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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1

외전: 얼음

by 도타싫어! 2021. 3. 27.

 

"여덟 로 중에서 누가 제일 위험해?"

 

이런 질문을 받은 바 있다.

 

"그것은 쇠로 이루어진 도구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위험하냐는 질문과 같다."

 

"총 아니야? 아니면 칼이던가."

 

"나무의 입장에서는 도끼가 총보다 위험하겠지."

"아하.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거구나."

 

"정보 처리 분야에서는 제어자가 가장 위험하다.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개척자가 가장 위험하며 전투에서는 대적자가 가장 위험하다. 다 저마다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 총으로 나무를 벨 순 없다."

 

"그러면 이렇게 물어볼게. 어떤 로가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워?"

 

"감시자는 로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로 중 하나이다. 내가 만들어진 목적대로 총을 가진 내가 그들을 급습한다면 거의 모든 로가 비슷하다. 하나가 되지 못한 초인은 탄을 피할 수 없다."

 

"우와. 아무리 싸움을 잘하는 사람도?"

"예외는 없다. 대적자조차도."

 

"히무로가 우리 편이라 다행이야! 그런 무서운 사람들도 이길 수 있잖아. 결전 병기 히무로!"

 

"아니. 한 명. 내가 꺾을 수 없는 상대가 있다. 본래 행운아 대신 내게 찾아왔어야 했던 자다."

 

그게 누구냐는 물음에 나는 대답했다.

 

"나는 로 대부분의 명단과 그들의 활동 범위를 알고 있었다. 감시자이기에 그들의 약점 또한 배웠다. 로를 견제하는 로였기에 그렇게 했다. 그러나 로를 견제하는 로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를 꺾을 수 없었다."

 

 

 

 

 

 

문명이 한 발자국 퇴보하자 동장군은 과거의 위상을 되찾았다.

 

겨울이 원래 어떤 것이었는지 모든 이들이 그것과 맞닥뜨리고 나서야 기억해냈다. 문명의 혜택이라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지. 비눗방울과도 같은 얇은 막이 깨지고 마주한 동장군의 맨얼굴은 얼마나 차고 고통스러운지. 살아남은 이들은 잊지 못하게 되었다.

 

많은 무법지대 속의 많은 사람들이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겨울의 일부가 되었다.

 

이누이트족에겐 눈을 지칭하는 수백개의 단어가 있다는 낭설이 떠돌았던 적이 있다. 이누이트족에 대해 많은 기록이 사라져 누구도 정확히 어느 정도의 단어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단어는 이제 어디에서도 사용되지 않는다. 믿을 사람이 없으면 신마저 죽는 세상에 언어의 죽음은 너무나 빈번한 일이 되었다.

 

길거리에 쌓인 눈을 치우기에는 모든 이들이 인색해져. 쌓인 눈이 얼어 죽은 시체들을 덮어 숨겨주었다. 봄이 될 때까지 그들은 창백해지고 핏기가 빠진 채 그 안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추위와 눈바람을 뚫고 한 총잡이가 마을을 찾았다.

 

총잡이의 총은 따뜻했다. 오는 길에 한 번 불을 뿜었기에 서서히 식어가면서도 잉걸불처럼 열이 남아 있었다. 눈이 만들어낸 습기 탓에 오작동이 날 법도 하지만 그의 백단향 총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기름을 발라 건조하는 등의 처리를 확실하게 하는 이상 총은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총잡이는 자신의 체력이 넉넉하지 않음을 자각했다. 그것은 턱이 반쯤 부서진 한 남자의 몸을 총잡이가 밧줄에 묶은 채 끌고 있기 때문이었다. 총잡이 자신과 눈에 피부가 닿은 채 질질 끌려온 이 남자를 위해서라도. 총잡이는 쉬어야 했다.

 

총잡이는 마을이 너무 조용하다고 느꼈다. 소리가 좀처럼 나지 않았다. 겨울은 죽음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살아남을 자들을 솎아내기도 한다. 그렇기에 겨울에 살아남는 자들은 몸을 덥힐 줄 아는 사람들 뿐이다. 난폭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열정을 가진 이들. 저열하고 더러울지언정 개의치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이들. 그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특히 술집에 있곤 했다.

 

총잡이가 청력에 귀를 기울였음에도 왁자지껄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마을 전체가 죽어있는 것 같았다. 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다 사라져 버린 걸까. 변질된 세상이기에?

 

꼭 그렇지는 않았다. 어디에서나 사람들은 살아남는다. 한 도시가 불바다가 되어 증발하는 일은 없다.

 

삶은 계속된다. 어떤 방식으로라도. 새로운 갑각을 만들어내며 이어진다.

 

총잡이는 마을을 더 돌아보았다. 다져지지 않고 쌓인 눈에 바지의 밑단이 젖고 곧 얼어붙었다. 총잡이는 자신의 발이 얼어 잘라내게 되는 일이 없길 바랐다. 몸을 녹일 곳을 찾으며 총잡이는 시각에 신경을 기울였다.

 

멀리서 눈사람을 만들고 노는 두 아이가 보였다. 대몰락 이전의 세상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어린아이들이었다. 총잡이는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길 바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가 기절한 남자의 몸을 눈밭에 끌고 다니는 것에 겁에 질리지 않는 것은 과한 기대였지만. 총잡이는 그래도 한 번 시도해 보았다.

 

"너희. 말을 할 수 있나?"

 

"네!" 두 아이가 동시에 대답했다. 기대 이상의 반응이었다.

 

"이 마을에 가장 번창하던 술집이 어디에 있지?"

 

"저기 있어요." "저기 있어요." 아이들이 다시금 동시에 말했다. 아이들은 키도 외모도 성별도 달랐지만 똑같이 행동했다. 똑같은 몸동작으로 그들은 똑같은 장소를 가리켰다.

 

"고맙구나. 기나긴 낮이 되길."

 

"아저씨가 끌고 있는 거. 시게루 씨 맞죠?" 남자아이가 얼굴에서 피를 흘리는 남자를 보며 물었다. 세상이 변질했음을 총잡이는 새삼스럽게 다시금 깨달았다. 아이들조차도 다툼과 상처. 죽음에 익숙해지기 마련이었다. 총잡이는 그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려고 했지만. 그 순간 이상한 꺼림칙함 같은 것을 느꼈다. 두 아이의 몸 안이 비어있는 듯한 위화감이었다.

 

"아는 사람이냐?"

"저희는 모두를 알아요." 여자아이가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모두가 모두를 알아요. 시게루 씨는 믿음이 너무 과하다고 들었어요. 남을 해치지 말라는 말씀을 안 듣는대요."

 

"누가 그렇게 말했지?"

두 아이는 동시에 자신의 입술에 손을 가져다대고는. 그것을 지퍼로 잠그는 듯한 시늉을 했다.

 

총잡이는 그것이 외지인에게 건네는 장난 같다고 생각했다. 어울려줄 생각은 없었다. 의문점을 기억해두며 총잡이는 아이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술집의 이름은 '피사의 사탑' 이었다. 대몰락 이후 술집에는 무조건 사람이 모였다. 정신을 바짝 차린다면 손님이나 주인에게서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곳만큼은 예외였다. 피사의 사탑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장사를 하고 있는데 황량한 술집이랑 드물었다. 총잡이는 자신이 문을 벌컥 열자마자 시선 한편에서 사라지는 시궁쥐 하나를 보았다.

 

"어서오시게."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인사를 건넸다가. 다음 순간 당혹감에 놀랐다. 이게 정상적인 반응일 것이라고 총잡이는 생각하며. 기절한 남자의 몸을 끌어올려 한 술집 테이블 위에 얹었다.

 

"시게루잖아?! 시게루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기절시킨 것뿐입니다. 운이 좋다면 곧 일어날 겁니다. 그 자리에 두었다간 얼어 죽을 게 뻔하기에 데려왔습니다. 얼굴은 당분간 제대로 움직이지 않겠지만요. 그리고 저는 이 남자에게 무언가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 남자가 제게 시도했죠."

 

"설마 자네에게 개를 푼 건가? 언젠간 저지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그 커다란 맹견을…"

 

"개너구리가 아니라 정상적인 개더군요. 보기 드문 동물인데 유감입니다."

 

술집 주인. 이치노세 신지로는 더 이상 총잡이에게 무언가를 묻지 않았다. 총성 같은 것을 들었는데 네가 쏜 거냐. 개가 죽었냐 따위의 질문이 혓바닥에 맴돌았지만 물어봤자 나올 대답이 너무 선명했다.

 

"사람이 없군요."

 

총잡이는 정말 드문 일이라고 생각하며 이치노세에게로 다가갔다.

 

"말해줘도 아는데 굳이 입 밖으로 내야 하나?"

"불가능할 정도로 없습니다. 오늘은 일요일이죠. 사람들이 몸을 덥히기 위해 토요일에 와서 이 시간에 나가는 풍경이 이것보단 정상일 겁니다."

 

"다들 밀주 맛에 지친 거지." 이치노세는 혀를 쯧 찼다. "하기야 있는 술이라곤 항상 똑같은 것뿐이니 질리지 않는 게 이상해."

 

"저는 물에 알코올을 타 마시던 자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총잡이의 말에 이치노세는 얼굴을 찌푸렸다.

 

"별 꼴을 다 봤군. 그런 걸 술이랍시고 마시던가?"

"아마 그들도 술이라고 여기진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취할 수 있는 것이 필요했겠죠. 정신을 무디게 만드는 약에 다들 절박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주점이 비어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취할만한 다른 것을 찾았다는 뜻입니다.

저는 '예수' 를 찾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습니까?"

 

총잡이의 물음에 이치노세가 몸을 움찔 떨었다. 이 자는 알고 있다. '예수' 에 대해 알고 있어. 총잡이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수라니. 그런 사람을 왜 여기서 찾아?"

 

"이천 년 전에 죽은 그 사람을 찾는 게 아닙니다. 예수라 불리는 자를 찾고 있는 것이죠."

 

"이봐. 이봐 너!"

 

이치노세는 술집 안에 누군가 없는지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았다. 총잡이 말고 아무도 없다는 것은 이치노세가 가장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충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들려선 안 된다는 듯이 이치노세는 몸을 앞으로 숙여 총잡이에게 속삭였다.

 

"여기서 떠나는 게 좋아. 이 곳은 위험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나이도 젊어 보이는데…"

 

"젊은 정도가 아니죠."

 

총잡이가 챙이 넓은 모자를 벗자 그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음영이 물러났다. 이치노세는 총잡이의 얼굴을 보고 당혹감을 먼저 느꼈다. 어린둥이. 새파란 어린둥이였다. 아직 대학도 못 끝냈을, 잘해봐야 한 두 살을 더 먹었을 어린둥이였지만 눈빛만큼은 사막만큼 메말라 있었다. 마치 어른을 아직 어린 몸에 가두어 놓은 듯이 이치노세는 총잡이에게서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다.

 

영구동토층 같은 무표정. 거의 깜빡이지도 않는 눈. 이목구비를 전부 갖추고 있고 똑같은 언어를 구사하고 있음에도 이치노세에게 총잡이는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로 느껴졌다. 포유류보다는 코모도 왕도마뱀 따위의 파충류를, 사람보다는 마네킹이나 인형 같은 무정물을 더 닮은 듯한 사람이었다.

 

어째서인지 눈을 마주치기 어렵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이치노세는 그 감각이 처음 느껴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보름 전에 찾아왔던 한 남자도 눈 앞의 애어른과 똑같은 기운을 풍겼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략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름 전 기이한 자가 이 마을에 찾아왔다죠."

 

"그걸 알고도 이 곳에 온 건가?"

"알고 온 것은 아니지만, 오는 길에 알게 되었죠. 우연히 들을 기회가 생겼으니까."

 

누구에게서? 무엇을? 이치노세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본다고 해도 돌려보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자는 왜 찾는 거야. 애초에 그 자의 정체는 뭐지? 네 정체는 뭐고?"

"자세한 사항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그를 추적하고 정체를 규명하고, 불가피할 경우 사살 혹은 체포하는 것이 저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그의 족적을 밟았습니다."

 

"불구덩이로 들어가고 싶다면 그럴 만한 이유를 대. 그쪽이 어떤 속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나중에 네 시체를 보며 알려주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하긴 싫으니까."

 

총잡이는 아무 말 없이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은동전을 꺼냈다. 그리고는 바 테이블 위에 올려 건넸다.

 

"이것 치워! 날 뭐로 보는 거야?!"

 

"합리적인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저승길 뱃사공마저 동전으로 살 수 있죠. 당신은 좋은 사람일 뿐 백치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치노세는 총잡이의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가치판단도 깃들지 않았다. 은동전을 넙죽 받을 정도로 자신이 밑바닥을 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던 이치노세는 총잡이와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치노세는 그가 사지에 발을 들이는 값으로 은동전 하나를 받고 싶진 않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고결함을 헐값에 파는 일과 같았다.

 

그러나 총잡이는 그저 값을 제시했다. 이치노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그를 걱정하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는 필요한 정보가 있었고, 그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면 재화를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이치노세는 의사와 목적을 가진 벽을 상대하는 느낌을 받았다.

 

"거절하신다면 모자라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정말 위험하다니까. 당신 죽을 거야! 아니면 죽느니만 못한 꼴이 될 거라고."

 

총잡이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기다려! 주지 마. 왜 그를 쫓는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말할 수 없는 건가?"

 

총잡이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은동전 한 닢으로 정보를 살 수 있게 된다면 총잡이로써는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예수와 제가 잘 아는 위험인물이 접촉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런데 그 위험인물은 저 말고 누구도 상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를 추적하는 인원은 제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치노세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다가 총잡이의 입이 굳게 닫힐 것 같아 그만두었다.

 

"흰 옷의 남자는 스스로를 예수라 칭하며. 종교를 만들어 세력을 넓히고 있습니다. 그 종교가 지배한 구역은 전부 절망의 폭도들을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죠. 긍정적인 변화이지만 그 종교가 또 다른 폭도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험인물과의 접촉을 통해 조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이 마을에도 이미 종교가 생겨나지 않았습니까?"

 

"그래. 네 생각이 맞아. 그들은… 정상이 아니야."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시게루라는 남자가 저를 타천사라고 부르더군요. 그 사람에게서 여러 정보를 들을 수 있었으니 운이 좋았습니다."

 

총잡이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잠시 침묵을 지켰다.

 

"모든 이들이 그 남자와 같이 변한 겁니까?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죠?"

"예전에 영화관이었던 곳."

 

"지금은 다른 곳이라는 투군요."

"그래. 이젠 달라. 그곳은 교회야." 이치노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교회야. 며칠도 되지 않아서 뚝딱 그렇게 만들어 버렸어. 개조해 버렸다고…"

 

"위험하군요." 총잡이는 감각에 신경을 기울였다. 작은 쥐구멍 안에서 시궁쥐가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 말고는 매복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건가? 자네는 혼자잖아. 지금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오십 명은 족히 넘을 거야. 혼자서 그들을 전부 상대할 순 없어.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해."

 

총잡이는 그제서야 총띠에 들어있는 총을 뽑아 보여주었다. 이치노세는 흠칫 놀라 뒤로 몇 발자국을 물러났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총은 멸종한 줄로만 알았는데"

 

"적어도 아직은 아닙니다. 변질된 세상일지라도 모든 게 멸종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대몰락 이전의 세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잔재가 남은 것은. 예수가 다시금 현현했기 때문 따위가 아니라 아직 선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말해주지 않겠습니까. 예수가 이 마을에 온 뒤 무엇을 했습니까?"

 

이치노세는 유다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흰 옷을 입은 남자가 마을에 온 그 날을 떠올렸다. 저주받은 책을 한 장씩 넘기듯이.

 

바 테이블의 은동전은 흐릿한 전구빛을 반사해 아주 조금 빛났다.

 

 

이치노세는 세상이 망한 뒤 질 좋은 술을 판 적이 없었다. 먹기도 아까운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주막에서 주로 팔던 것은 발효가 아닌 증류를 통해 만들어낸 야매 술 따위뿐이었다. 만드는 것도 헐값, 파는 것도 헐값이었지만 모든 이들이 불평은 할지언정 마다하지는 않았다. 정제가 제대로 되지 않아 손님이 크게 탈이 나더라도 별다른 소동은 없었다.

 

왜냐하면 다들 술이 너무 간절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눈이 오는 날에는 더욱 간절했다. 정신을 무디게 하고 눈을 가릴 만한 것이 필요했다. 눈이 오는 날에 한량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어슬렁어슬렁 이치노세에게 찾아와 밀주를 마셨다. 법이 없어졌는데 밀주라는 단어를 쓰는 게 어색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곧 그 사람도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밀주라고 생각하고 마시면 밀주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이 알지 못하게 영혼을 점점 더럽히고 싶다면. 밀주가 되는 것이었다.

 

술집 안에는 더러운 행색의 사람들뿐이었다. 살아남았으나 영혼이 메말라버린 사람들 뿐이었다. 그들이 한 곳에 모여 밀주를 마시며. 체온을 올리고 서로의 체온으로 술집을 채워 추위를 견디는 것을 볼 때마다 이치노세는 더없이 비참한 기분을 느꼈다. 하늘 끝까지 치솟다가 풀썩 주저앉아버린 세상에서 이치노세는 언제까지 그들이 살아있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과연 우리에게 내일은 있을까? 아마 있을 것 같았다. 6개월 뒤는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2년 뒤는? 10년 뒤는? 그 뒤에는 이 모든 게 조금이라도 더 좋아질까? 아니면 끊임없이 나빠지기만 할까?

 

어쩌다 한 번 아직 훼손되지 않은 악기를 가진 딴따라가 오면 그나마 분위기가 풀어졌다. 많은 사람들은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눈물을 흘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노래를 들으며 사람들은 그저 눈물을 훔쳤다. 몰락 이전의 노래들. 찬란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향수는 술처럼 사람을 취하게 한 뒤 어지럽고 지독한 뒷맛을 남긴 채 사라졌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신을 믿지 못하게 된 자들이 죽은 신을 찾는 소리가 술집 안에 울렸다.

 

그런 작은 마을. 쇠락해가는 변질된 마을에 어느 날 흰 옷을 입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시오!"

 

이치노세는 술집 문을 두 팔로 활짝 열어젖힌 그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저런 행동이 가능하리라는 것도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는 흰 옷의 남자를 향해 눈을 끔뻑였다. 적어도 대몰락 이후에도 명랑함을 유지한 사람은 이 마을에 없었던 것이다. 잘 손질된 금색 머리칼을 가진 흰 옷의 남자는 이상하게 고풍스러운 말투를 사용했는데, 사무라이보다는 권력자들이 쓰는 느낌에 더 가깝게 들렸다.

 

대몰락 이전의 세상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모습을 보며 흰 옷을 입은 모건 프리먼을 떠올렸을 것이다. 셔츠. 자켓. 넥타이에 신발까지 흰색으로 맞춘 흑인의 노신사를. 그러나 중후한 음색과 하얗게 샌 머리 없이도 그에게선 기이하고도 강렬한 인상이 느껴졌다. 그라는 사람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입은 옷이었다. 흰 옷의 남자는 양털 모피로 보이는 새하얀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 겉에는 어떤 티끌도 검댕도 피도 묻어있지 않았다. 저런 좋은 옷에 아무런 손상도 없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코트를 탐낸 자들로 인해 소유자가 열댓 번은 바뀌었을 법한, 윤택이 나고 부드러워 보이는 새하얀 양털.

 

아직 닳아빠지지 않은 이치노세의 오지랖. 착한 사람의 양심 비슷한 것이 흰 옷의 남자에게 이 마을을 떠나라고 소리치기 전. 다이고가 술집 의자에서 자리를 일으켰다. 다이고의 앞에는 빈 밀주 병이 넷 놓여 있었다. 아침에 온 뒤 밤에 나가는 다이고. 술꾼 다이고. 술을 먹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던 다이고. 항상 칼을 가지고 다니는 다이고.

 

"이봐. 너." 다이고가 옷 안에서 칼을 꺼냈다. 정글에서나 쓰일법한 곡선의 마체테였다. "그 옷 나한테 내놔. 이 자식아."

"다이고… 그러지 말게." 이치노세가 그를 말리려 말을 꺼내자 다이고가 이치노세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닥쳐! 말리지 마! 내 말 안 들려? 그 옷 내놓으라고!"

 

"그러지 마시오. 그대는 아버지의 낯을 잊었소."

 

흰 남자가 다이고를 타이르듯이 말했다. 이치노세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분명 칭찬은 아니리라고 추측했다.

 

다이고가 대몰락 전에 어땠는지 기억하는 이치노세였기에. 다이고의 행동거지를 보는 그는 항상 당황스러웠고 기가 막혔다. 그리고 그런 만큼이나 연민의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다이고의 처지가 딱하더라도 졸지에 가진 걸 전부 뺏기게 된. 세상 물정 모르는 저 귀공자만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이치노세는 순간 떠오른 생각에 의아함을 느꼈다. 아니. 이치노세의 무의식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 흰 옷의 남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를 하등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그것은 흰 옷의 남자가 눈 앞의 흉기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것을 보았기에 떠오른 엉뚱한 발상일까. 혹은 본능적인 감각이었을까. 이치노세는 몰랐다.

 

흰 옷의 남자는 실실 웃으면서 다이고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자세히 보니 놈은 이제 이십에서 네 살이나 다섯 살 정도를 더 먹은 것으로 보였다. 새파랗게 어린 것은 아니었지만 천진난만함 만큼은 유치원생과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었다. 걸어 움직이는 순수한 광휘 같은 느낌. 까르르 웃는 어린아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느낌이 흰 옷의 남자의 전신에서도 느껴졌다.

 

흰 옷의 남자가 마체테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자 다이고의 시선마저도 흔들렸다.

 

"왜 그렇게 화가 나셨소. 웃고 살아야지? 내가 지혜를 하나 알려 주겠소. 그건 바로 웃음이야말로 최고의 축복이란 거요. 어찌 멋지지 않소? 웃음은 자신의 동족에게 자신이 괜찮고 안전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생겨났다고 하오. 웃음은 살아있다는 증거. 신뢰와 공동체에서 탄생한 거요. 우리는 그것에 자랑스러워해야 해. 행복할 수 있는 비법은 바로 웃음에 있소."

 

"그게 무슨 좆같은"

 

"내 말의 요지는 이거야 웃어!"

 

흰 옷의 남자의 몸 옆에 새하얀 잔상이 생겼다. 그의 양팔이었다. 이치노세가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사이 흰 옷의 남자는 다이고의 머리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잘못 보면 마치 추운 날씨에 얼어붙은 귀를 녹여주려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다이고는 한 번 눈을 크게 뜨더니 마체테를 움직이는 대신. 웃음을 터뜨렸다.

 

"웃어! 웃어! 더 크게! 더 신나게 웃으라고!"

 

흰 옷의 남자의 말에 따라 다이고가 점점 더 크게 웃었다. 종국에는 어찌나 격렬하게 웃음을 터뜨렸던 것인지 눈가와 이마에 주름이 잔뜩 생기고 힘이 들어간 목에는 혈관이 마구 울거질 정도가 되었다.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마치 '당신의 말이 맞다' 고 호응하는 것처럼 다이고는 광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이치노세는 다이고의 눈이 원래 충혈되어 있었는지. 원래부터 그런 게 아니라면 대체 언제 실핏줄이 다 터져 눈에 붉은 기가 돌게 된 것인지 궁금해졌다.  다이고와 눈을 맞추고 있는 흰 옷의 남자도 눈을 부릅뜨고 비슷한 웃음을 터뜨렸다.

 

"됐소! 됐어! 잘하셨소. 이렇게 웃을 줄 알면서 슬픔과 분노를 가진 채 살면 안 되지."

 

흰 옷의 남자가 다이고의 머리를 바닥에 내던지다시피 하자 그는 바닥에 쓰러졌고, 거품을 문 채 기절하고야 말았다. 이치노세는 까무러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이고는 악한이었다. 본인 앞에서 하지 못했을 뿐 술집의 모두가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이 남자. 아내와 아들딸을 전부 잃은 뒤 한 번도 웃지 않았던 다이고가 배꼽 빠지게 웃게 만든 흰 옷의 남자는 분명 다이고보다 위험했다. 술집의 모두가 그것을 느꼈다. 오소리 따위와 더부살던 들쥐들이 난생처음 범을 만날 때의 육감 같은 것을.

 

흰 옷의 남자는 바 체어 위로 훌쩍 뛰어올라 착지했다.

 

"포도주. 고급으로 주시오."

 

차라리 코코넛 열매를 주문하는 편이 현실적이었을 것이다.

 

"포도주 같은 건 없어요." 이치노세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보다 훨씬 어린놈에게 존댓말을 썼다. 반말을 써선 큰일이 난다던가 해코지를 당한다던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여기서 파는 건 전부 싸구려 술뿐이에요."

"자신이 파는 것을 싸구려라고 폄하하지 마시오. 스스로에게 떳떳하시오. 그것 또한 행복의 비결이오." 흰 옷의 남자가 낄낄대며 몸을 돌렸다. 그러나 바 체어는 지난 몇 년간 녹이 슬어 전혀 회전하지 않게 되었다.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자 흰 옷의 남자가 멋쩍은 끄응 소리를 내었다.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흰 옷의 남자는 술집의 사람들은 두런두런 돌아보았다. 다들 슬금슬금 눈길을 피했으나 성질이 나쁘고 수염이 덕지덕지 난 가토만큼은 흰 옷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흰 옷의 남자는 싱긋싱긋 웃으며 가토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표정은 누가 봐도 웃고 있었으나 행동은 누가 봐도 위협에 가까웠다.

 

"흐흐흐…!"

 

표정을 찌푸리고 있던 가토의 입에서 한 줄기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는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자리를 박차고 후다닥 술집에서 나가버렸다. 가토만 한 용기가 있는 자들은 곧바로 그를 따라 술집에서 나갔다. 그럴 용기가 없는 자들은 흰 옷의 남자의 눈초리를 살피며 제발 아무 일이 없기를 하느님에게 빌었다.

 

흰 옷의 남자가 신은 흰색 구두가 술집 안에서 움직였다. 그는 술집의 구석에 앉아있는 미우라와 그녀의 딸에게 다가갔다. 술집 안에 어린아이가 있는 것은 특별한 광경이 아니었지만 전부 어른인 사이에 홀로 어린아이인 것을 보고 남자의 관심이 동한 눈치였다.

 

흰 옷의 남자는 미우라의 옆에 놓인 작은 휠체어를 물끄러미 보았다. 휠체어라기엔 초등학생을 위한 유모차처럼 보였다. 그는 미우라의 품 안에 안긴 딸아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다음에는 절레절레 저었다.

 

"요 귀여운 똘똘이 좀 보게. 이 나이에 못 걷게 되었구나. 딱하기도 하지. 참으로 딱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요? 술집에 애를 데려왔다가 술을 잘못 먹이기라도 했소?"

 

"하반신 마비예요. 만족하세요?"

 

"어찌 만족할 수 있겠소. 왜 술집에 딸아이를 데리고 왔지?"

 

"집에 아이를 어떻게 혼자 두겠어요." 미우라가 자신의 딸을 품에 안았다. "걷지도 못하는 아이를요."

"아가씨께서 술집에 오지 않으면 되는 일이지. 다른 해결방법도 있지만 말이야."

 

흰 옷의 남자는 소녀를 향해 천천히 팔을 뻗었다.

 

"우리 딸한테서 손 떼세요." 제발 저에게만은 손대지 말아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미우라의 그 음성에는 힘이 없었다.

 

"걱정 마시오. 내가 기적을 보여줄 테니. 딸아이를 놔줘."

 

"안 돼요…"

"놔주시오."

 

흰 옷의 남자가 미우라의 이마를 검지로 톡 찔렀다. 미우라는 입을 멍하니 벌린 채 딸의 몸을 돌려 자신의 무릎에 얹었다. 미우라의 딸은 몸을 비틀며 도망치려 했지만 그럴 방법이 없었다. 오. 그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모습. 이치노세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항의의 말을. 아무런 효과가 없더라도 한 마디라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하지 못했다. 술집의 모든 이들이 무언가가 자신을 짓누르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흰 옷의 남자의 안에 들어있는. 그렇지만 흰 옷의 남자 본인의 몸보다 큰 무언가가 커다란 눈으로 그들을 내려보는 듯한 감각이었다.

 

흰 옷의 남자는 이제 밖으로 드러난 소녀의 두 손을 잡았다. 소녀가 잠시 흠칫 놀랐다. 옆에서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정전기 소리가 빠직하고 튀었다. 손을 조금 떠는 소녀를 보며 흰 옷의 남자는 낄낄거리더니, 갑자기 팔을 확 끌어당겨 소녀를 미우라의 무릎에서 끌어냈다.

 

"이봐요! 당신…"

 

순간 공포도 잊은 채 화를 내려던 미우라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술집의 다른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녀는 땅에 두 발을 딛고 섰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소녀는 흰 옷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어린아이는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 말은 틀렸다. 어린아이들일수록 그들은 외부 세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아주 작은 변화라도. 어른보다 밝은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런 어린아이의 눈에 외경심이 비쳤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나는 곧 나니라."

 

흰 옷의 남자는 그렇게 말한 뒤 목에 무엇이 걸린 듯이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여유로운 모습을 유지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잠시 실례… 허억… 콜록!"

 

흰 옷의 남자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허리를 굽혔다. 그의 입에서 기침과 함께 어두운 색깔의 구정물이 촥 튀어나왔다. 가래나 침. 혹은 구토처럼 보였으나 셋 전부와 동떨어진 물질 같기도 했다.

 

숨을 몰아쉬며 흰 옷의 남자는 여유를 회복했다. 그는 만찬을 앞둔 사람처럼 두 손을 비볐다. 그리고 몸을 돌려 이치노세에게 물었다.

 

"혹시 이 마을에 교회가 남아있소?"

 

"교회? 그가 그렇게 물었단 말입니까?"

"그래. 교회야. 기독교의 교회!"

 

총잡이는 교회에 대해 생각했다. 일본은 아시아 문화권의 나라 중에서 가장 기독교의 입김이 약하다. 대몰락 이전에도 그러했고 후에도 그러하다. 반달리즘이 성행하는 무법지대의 환경에서 교회가 온전히 유지되었을 리가 만무했다.

 

"분명 교회는 없을 텐데요."

 

"이런 마을에 교회는 처음부터 없었네. 그런데 이 자는 버려진 영화관을 찾더니. 얼마 가지 않아 사람들과 함께 그곳을 통째로 보수했어. 이제 전기도 들어온다더군. 돈도 안 주는데 다들 그 일을 자발적으로 했다고!"

 

"오히려 사람들이 예수에게 돈을 주었을 테죠."

 

이치노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어. 미우라의 딸은 분명 걷지 못하는 처지였단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손이 닿는 것만으로 걷게 만들 수 있는 거야?"

 

"눈속임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게 아니라면…"

 

"아니라면?"

 

"확답은 내릴 수 없지만. 예수가 사람의 정신에 간섭할 수 있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사람의 정신…? 그게 가능할 리가 없어. 어떻게 손을 대는 것만으로 사람을 쓰러트리고, 마비된 다리조차 걷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대몰락 이전에도 최면술과 세뇌 기술은 존재했습니다. 예수가 그런 것에 조예가 깊으며 동시에 종교를 만들어냈다면, 사람들이 그의 수족이 되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닙니다. 보름은 확실히 너무 빠르지만요.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것일수록 쉽게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번번이 실패하곤 했지만 대몰락 이후 종교를 다시금 부흥시키려는 움직임도 많았습니다. 쇠퇴된 종교를 다시 세우는 일,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일, 종교와 비슷한 체계로 변모해가는 일… 줄곧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아무튼 제가 할 일은 뒤늦게라도 그것을 수습해보는 것이군요."

 

총잡이는 모자를 다시 눌러쓰며 총을 다시 총띠에 걸었다. 이치노세에게서 등을 돌리면서도 총잡이는 그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였다.

 

"감사합니다. 충분히 들었습니다. 기나긴 낮이 되시길."

 

"잠깐 기다려!"

 

"자네… 정말 이 곳의 광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건가?"

"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할 사람이 저 밖에 없군요."

 

"내 말을 좀 들어주게. 누군가에겐 털어놓고 싶었어.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말하지 않고서야 버틸 수가 없었어…"

 

총잡이는 갑자기 핼쑥한 얼굴이 된 이치노세를 보며 총에 손을 얹었다. "무슨 말입니까?"

"그 자가 나에게 한 말이 신경 쓰여서. 미쳐버릴 것만 같네… 제발 들어주게. 지금 말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렇다면 말하세요." 총잡이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알겠네… 나는 그 자에게 물었어."

 

"그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알고 싶소? 정말로?"

 

교회가 없다는 말을 들은 흰 남자는 터를 닦아야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대로 술집을 나서려는 그에게 이치노세는 소리쳤다.

 

"그래요. 어떻게 미우라의 딸을…"

"그대는 알고 싶은 게 아니오. 감히 알고 싶지 않겠지. 그저 내가 한 짓이 별 일은 아니라고 여기고 싶을 뿐이야. 그렇지 않나? "

 

"그게 무슨…"

 

"우리 모두는 한계에 갇혀 있다는 뜻이오. 감히 개인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규범들이 모든 이들을 묶고 있소. 인류가 할 수 있는 일을 막아버리는 규범들이오. 그렇기에 비범한 이는 비정상이라고 여겨지지. 그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라 인류가 만들어낸 환상 때문이오. 사람은 사람을 초월할 수 없다는 환상. 하지만 어째서 초월해서는 안 되는 걸까. 그것이 우리를 하나로 묶고 더 나은 종족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을지라도?"

 

"말은 잘하는군! 그들을 해친 거요? 내게 제대로 말해 보란 말입니다!"

 

흰 옷의 남자는 눈을 부릅뜨고 묻는 이치노세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부엉이처럼 고개를 까딱거리며. 먹잇감을 보듯이.

 

"내가 사람 보는 눈은 확실하지. 너는 날 은닢에 팔아넘길 자로구나. 이름을 말하라."

"이치노세 신지로"

 

이치노세는 멍하니 대답했다.

 

"이치노세 신지로. 내가 암호를 하나 정하지. 곧 나의 사람들이 나를 따르기 시작할 테야. 그러고 나면 그들에게 말을 남기마. 그 말은 14다. 그 말을 하면 나의 사람들이 마음을 열 거야. 자신이 무엇을 당한 건지 말해줄 것이다. 암호는 14다. 알고 나면 다시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겠지. 하지만 조만간 물어보게 될걸. 다시 한번 말하지. 암호는 14다."

 

"불합리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 안 돼서. 이제 뭐가 뭔지…"

 

"예수가 사람들에게 한 일은 분명 듣기 좋지 않을 겁니다. 일종의 신호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신호라니?"

"예수는 정신에 간섭할 수 있는 인물로 보입니다. 그가 당신에게 특정한 암시를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14라고 말하는 암시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신도들에게는 14라는 말을 당신에게서 듣는 순간. 예수가 신도들에게 무엇을 했는지 말하라는 암시를 주었겠죠."

 

"나는 대체… 어떤 내용을 듣게 되는 거지?"

 

"듣기 좋은 내용은 아닐 겁니다. 이치노세 씨. 그 숫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가 중요하다는 암시를 주었기에 당신은 그 숫자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생각하고 싶지 않기에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금기는 그렇게 작동합니다. 머릿속에서 13 다음의 수는 15라고 생각하고, 28의 반절은 16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속이세요. 심리 상태가 신체에 끼치는 영향은 당신의 생각보다 큽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할 사람이 당신밖에 없습니다."

 

일요일 8시 30분. 기독교에서 예배가 시작하는 시간은 9시.

 

총잡이는 교회로 변해버린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관의 스크린은 복구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신도와 흰 옷의 남자가 필요했던 것은 여러 사람이 흰 옷의 남자를 들을 수 있을 만큼 넓은 실내의 장소. 그것으로 충분했다. 부서진 스크린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었고, 그 앞에 단상이 있었다.

 

여기서 예수가 신도들에게 말씀을 시작하는 것인가. 총잡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지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현명하지 않았기에 그는 예수에게 접근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곧 사람들로 영화관 안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총잡이가 본 그들의 표정은 약간 몽롱하고, 무표정하고, 그러면서 행복해 보였다. 약물에 중독된 사람들을 보는 듯했다.

 

"당신도 예수님을 찾아온 건가요?" 그의 곁에 한 신도가 앉았다.

"그렇습니다." 총잡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분의 이름이 이 땅의 멀리까지도 퍼지는군요." 총잡이의 옆에 앉은 신도는 그렇게 말하며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부모처럼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이들을 이롭게 한다더군요. 변질된 세상을 치유할 것이라고. 모든 것을 재건할 거라고 약속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당신도 그걸 믿으시나요?"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만 그 주체는 절대 만들어진 신 따위가 아니리라고 총잡이는 생각했다.

 

악마에 대해 말한다면 악마가 찾아온다는 격언대로. 그가 신에 대해 생각하자 그가 찾아왔다. 신도들이 내뱉는 아찔한 탄식 같은 것을 듣자 총잡이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분이다. 그분이야. 오셨어. 오셨다. 그분이. 예수님이. 온갖 종류의 웅성거림과 속삭임. 중얼거림이 영화관 안을 순식간에 가득 채웠다. 총잡이의 곁에 앉은 신도 또한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하고 있었다.

 

그는 단상 앞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영화관의 입구였던 곳에서 나타났다. 예배를 진행하는 주체는 분명 예수일 터인데 목사답지 않은 등장이었다. 차라리 정말 예수의 등장 같았다.

 

하얀 옷을 입고 있는 그를 보자마자 총잡이는 반사적으로 그에게 총을 겨눌 뻔했다. 총잡이의 본능이 그를 즉각 무력화시키라고 말해왔다. 그것은 재단에 의해 주입받은 로의 감각이 아니라, 인류가 진화하며 서서히 사라졌지만 유전자 속에 남아있는 육감에 가까웠다. 총잡이는 알 수 있었다. 그가 걸을수록 영화관에 울리는 탄식 소리를 듣고 깨닫지 못할 수가 없었다.

 

"아아…"

 

 

저 자가 예수다.

 

흰 옷을 입은 남자는 충분히 신도들이 달아오를 때까지 기다린 뒤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신도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총잡이에게는 가사 없는 찬송가처럼 들렸다. 허밍. 외침. 탄식. 혹은 셋 모두가 섞인 노랫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흰 옷의 남자는 지휘자처럼 지휘자처럼 두 손을 움직이며 단상 앞으로 나아가다가, 느닷없이 영화관의 좌석 위로 풀쩍 올라섰다.

 

흰 옷의 남자는 팔걸이와 의자. 그리고 신도들을 밟았다. 키가 큰 풀을 주의 깊게 밟으며 습지를 나아가는 사람처럼. 인파를 헤치고 물 위를 걷는 예수의 모습처럼 그는 신도들의 허벅지. 어깨. 등. 얼굴 따위를 밟으며 두 팔을 벌린 채 걸어갔다. 사람을 발판으로 삼는 모습은 공중부양을 연상시켰다. 그러는 와중에도 불평의 한 마디 없이 신도들은 노래를 계속 불렀다. 음정이 순간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신도들은 예수가 자신의 몸에 닿는 순간을 무척이나 즐기는 것으로 보였다. 신도들은 예수가 자신의 몸을 밟을 때마다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행복감에 젖은 미소. 아편이나 마리화나를 피우는 듯한 쾌락의 파도타기에 총잡이는 혐오 비슷한 감정을 순간 느꼈다. 분명 구색만 갖추었을지라도 교회라는 이름의 장소였지만, 총잡이에게는 밑바닥의 매음굴과도 비슷하게 보였다.

 

총잡이는 손으로 자신의 코와 입을 막았다. 공기 중에 흥분성 약물이 살포되어 있을 가능성 때문이었다. 환각제를 통한 집단 최면이라면 종교적인 고양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가능했다.

 

그렇지만 언제? 직접 투여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들이마시게 만든다면 총잡이 또한 약효를 느꼈어야 했다. 약은 없었다. 약을 살포할만한 설비 또한 없었다.

 

정신에 간섭하는 힘. 자유의지를 빼앗을 수 있는 힘.

 

멋진 신세계.

 

총잡이는 검은 옷의 남자. 행운아와 흰 옷의 남자. 예수가 접촉했다는 정보를 통해 그를 추적했다. 로가 만들어내려는 전체주의 체제에 사이비 종교가 힘을 합친다면 여파가 커질 수밖에 없기에. 저지해야만 했다.

 

총잡이는 생각했다. 지금 쏠까.

 

지금만큼 확실한 순간도 없다. 이 자는 사람을 좀먹는 괴인이다. 굳이 사살하지 않더라도 그의 피를 볼 각오는 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좋지 않았다. 그는 군중들 사이에 있었다. 그가 빗맞출리는 없었지만 만약 사살에 실패한다면 모든 광신도들이 몸을 바쳐 흰 옷의 남자를 지킬 것이 명백했다.

 

"늦어서 죄송하오." 결국 흰 옷을 입은 남자는 단상 앞에 섰다. "오는 도중에 해야 할 일이 있었소."

 

"괜찮습니다." 신도들이 똑같은 말을 했다. "구원자님."

 

"오늘 우리가 묵상할 주제란 바로 배신자요."

 

"배신자…" "배신자." "아아. 배신자…"

 

"여러분. 나는 보았습니다. 다른 형태의 대홍수가 닥친 세상 속에 재건과 번영을 위한 천사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로의 역할을 가진 채 조화롭게 세상을 이끌어나갈 천사를. 저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신도들이 하나 되어 대답했다.

 

"저도 그들 중 하나였음을 믿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믿습니다."

"천사들은 모든 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내려왔습니다. 영광된 주님의 사랑 속으로 인도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그렇지만 그중 한 천사는 우리 아버지의 나라를 거부했습니다."

 

"아아…" 정말 아쉽다는 듯한 애절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배신자입니다. 그는 타천사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나라의 적입니다. 어째서 성령의 은총이 널리 퍼지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째서 하느님의 나라는 오지 않는 것일까요? 그가 우리를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천사가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타천사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사탄에 맞서야 합니다. 타천사와 사탄은 다릅니다. 사탄은 여러분 모두에게 속삭이는 악입니다. 간음하라. 죄를 지어라. 살인하라. 간통하라. 강탈하라. 착취하라. 지배하라. 사탄이 득세한 이래 세상은 변질했습니다."

 

"아아 아아아…!"

 

한 남자가 몸을 부르르 떨며 발작하더니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예수의 발 앞으로 몸을 던졌다.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사탄이 그대에게 속삭였군요." 예수는 더러운 침이 자신의 흰 신발에 떨어지는데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는 남자가 예수의 말에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15도밖에 기울이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 끄덕임은 격렬했고 또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사탄이 무어라 속삭였습니까?"

"돈을 빼앗으라고 했습니다. 도박을 하라고 했습니다. 죽이라고. 하고 싶은 일을 전부 하라고아. 아. 선하신 인간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하느님은 저를 용서하지 아니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사탄의 명에 따르겠습니까? 적색 뱀이. 붉은 메기가 에덴으로 미끄러져 들어올 때 그를 봉양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총잡이는 남자가 탈수 상태에 빠지지 않는지 궁금했다. 그는 온몸에서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리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를 짓밟아버리겠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사탄에게서 등을 돌리겠습니까? 사탄과 함께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대에게 내려진 예수님과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을 믿으시겠습니까?"

 

"예! 예! 아! 선하신 인간 예수님! 자비로우신 예수님!"

 

"어머니의 이름에 걸고?"

 

"예! 아아. 구세주 예수님!!"

 

"아버지의 낯에 걸고?"

 

"예에에에에에!"

 

총잡이가 듣기에 그 외침은 간절한 기도라기보다 괴성이나 비명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당신을 용서하실 겁니다. 타케토. 당신의 죄는 사함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 예수님. 나의 예수님…"

 

"고개를 드십시오."

 

예수가 무릎을 꿇은 남자의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예수보다 천장을 올려보는 것 같은 자세로 남자의 이마에 예수의 엄지가 맞닿았다. 황홀한 고통 속에서 남자는 신음하다가 고개를 픽 밑으로 꺼뜨렸다.

 

"하느님꼐 영광을." 신도들은 하나가 된 듯이 말했다. "예수님께 영광을."

 

"하느님께 영광을." 남자가 작게 말했다.

 

"간악한 염소를. 똬리를 튼 음탕한 뱀을 볼 때. 구더기와 파리가 들끓은 곳에 현현하는 그를 볼 때 당신은 그에 맞서 싸우겠습니까?"

 

"네! 아! 아! 예수님께 영광을! 예수님! 예수님께 영광을!"

 

"형제자매 여러분. 그에 맞서 싸우겠습니까?"

"그러하겠습니다…!"

"하느님에게 여러분의 영혼과 사랑을 바치겠습니까?"

 

"그러하겠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에게! 내 영혼을 당신에게!"

 

남자가 입을 헤 하고 벌린 채 예수에게 열렬히 소리쳤다.

 

"하느님이 손길로 내려주신 성령과 은총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배신자를 발견한다면 그를 우리 천사의 곁으로 보내겠습니까? 그와 우리와 다시금 함께할 수 있도록?"

 

"그럼요오오…!"

 

"정말입니까?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성령을 통해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아멘 하시겠습니까?"

"아멘…!"

 

충분히 보았다. 총잡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영화관의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예수를 인질로 잡기만 한다면 신도들을 상대하는 것 또한 수월해질 수밖에 없었다. 총잡이는 단상을 향해 속도를 붙였다.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흰 옷을 입은 남자가 그런 총잡이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총잡이는 단상 뒤에 숨은 흰 옷의 남자를 향해 방아쇠를 다섯 발 당겼다. 총알로 단상에 구멍이 뚫렸지만 흰 옷의 남자에게는 적중하지 않았다.

 

"올라와라!"

 

영화관의 맨 앞열에 앉은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예수의 주위에 붙었다. 마치 누군가의 의지대로 살아 움직이는 시체들 같았다. 총잡이는 그들 전부를 쏘아 죽일 수도 있었지만 죄 없는 이를 사살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알았지. 흰 옷의 남자?"

 

"행운아에게서 소식을 많이 들었지. 언젠간 찾아오리란 걸 알고 있었어. 그리고 어찌 내가 모를 수가 있겠나? 이 구역 전부에 내 눈이 있거늘."

 

총잡이는 남은 총알을 계산했다. 신도의 수를 어림짐작한 총잡이는 충분하다. 라고 순간 생각했고, 그 생각을 잊어버리기 위해 이를 꽉 악물었다. 그렇다고 정신을 지배당한 이들을 전부 죽일 수는 없었다.

 

"그게 행운아마저도 맞출 수 있다던 감시자의 총이군. 지금 당장 나를 죽일 셈이야?"

 

"그럴 수 있다."

 

"나도 살아남기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하겠지만, 그래도 내 백성들이 다치고 죽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너 또한 그렇지 않나? 감시자. 너는 이 상황에서 나를 따르는 이들을 모조리 죽이는 게 옳지 않음을 알지."

 

"이 자리의 모두를 사살하는 것으로 몇십만 명을 구할 수 있다면 난 그렇게 한다."

"그럴 방법도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대화를 하는 건 어때."

 

"나는 할 대화가 없다. 어떻게 자수할 것인지에 대해서라면 한 번 들어보지."

"아니. 우리에겐 할 대화가 있어. 네 스스로를 돌아봐라. 감시자. 변질된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지? 내가 제시한 해답은 이거다. 만인이 행복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지. 믿음으로 모두가 하나 되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행복? 그들은 행복할지 몰라도 노예다. 영혼 없는 노예. 전부 네 명령대로 움직이고 있다."

 

"너는 불행해질 권리를 원하겠지. 감시자.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고생하는 권리. 이 투성이가 되는 권리.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아갈 권리.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할 권리. 어찌 그토록 야만인 같을까?"

 

"네가 모두를 멋진 신세계로 이끌겠다는 건가? 너는 예수가 아니다. 신은 더더욱 아니다. 너는 사기꾼. 기만자. 가짜 예언자에 불과하다."

 

"그럴지도 모르지. 날 그렇게 불러도 좋아. 하지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그보다 더한 것도 될 수 있다. 살아남을 힘이 없어서 죽는 사람이 수두룩해. 아이는 어른을 어른은 아이를 죽여. 어떻게 이런 세상을 뿌리째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어? 우리는 빛을 가진 자들이기에. 빛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그것을 나눠줘야만 해! 그것이 네가 살아있는 이유란 말이다!"

"그건 네가 정할 일이 아니다."

 

표본을 얻을수록 총잡이는 확신했다. 오만한 화술. 행운아와 닮은 꺼림칙함. 멋진 신세계의 인용. 행운아와 접촉한 예수. 모든 정황이 하나의 증거를 가리키고 있었다. 로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또 다른 로.

 

그렇지만 처분과 억제에 특화된 감시자와 다르게, 완화와 화합에 특화된 로. 정확한 사항은 재단 내에서도 배우지 못했지만, 총잡이는 그의 힘이 무엇인지 납득했다. 정신에 간섭하며 여덟 초인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로.

 

"조율자…"

 

"그렇다면 너는 빛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무엇을 줄 거지? 그들을 어떻게 구원할 텐가?"

 

"구원해선 안 된다. 우리는 실험체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에겐 그럴 권한이 없다. 있더라도 인류의 자주성을 빼앗아선 안 된다. 강제로 재건된 사회는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그건 방관에 불과해. 너는 항상 한 발을 늦는다. 폭도가 다이고의 아내와 딸을 죽였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지? 미우라의 딸이 척추를 다쳐 못 걷게 되었을 때는? 타케토가 죄를 지었을 때는? 이치노세가 그 짧은 적막을 견디지 못하고 14를 물었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냐는 말이다."

 

총잡이는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뭐라고?"

 

"너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다. 폭도를 상대하고 몇 명을 구하는 것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없어. 보다 강경한 구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네가 그것을 막고 있지. 로에 합류하지 않아 모든 이들을 지옥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너 자신의 독단 때문에. 오늘 이치노세는 죽는 것이다."

 

"그에게 무슨 짓을 했지?"

 

"왜 궁금해하나? 그가 어떻게 되는지는 신경조차 쓰지 않으면서. 너는 그런 식이다. 네가 합류하지 못했기에 완성하지 못한 체제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는지. 알 필요도 없어. 마음이 불편하지도 않아. 우리 모두 인간적인 마음을 상실했지만… 무관심한 것으로는 네가 가장 심하다. 감시자."

 

"감히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지 마라…"

 

분노로 인해 총잡이의 머리가 더욱 차가워졌다. 어떻게 사람으로 이루어진 벽을 뚫을 것인가? 의사 체계의 혼동. 수뇌부를 제거한다면? 전두엽. 혹은 후두엽?

 

"조율자. 네가 늘어놓는 것들은 전부 궤변뿐이다. 그들 모두가 너의 노예가 됨으로써 구원받았단 말이냐? 이들이 행복하다고? 자유의지를 빼앗긴 순간 사람은 사람이 아니게 된다. 인권을 빼앗는 대신 행복을 주겠다니. 그게 로의 실체다. 이상은 높지만 실상은 추악하고, 이루어질 일도 없다. 네게 어떤 신성함도 없듯이."

 

총잡이의 말을 들으며 흰 옷의 남자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영화관 안의 모든 신도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 했다. 짝.

 

"어찌 그렇게 몰인정할 수가 있나. 감시자…?"

 

총잡이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영화관 안의 신도가 점점 더 흰 옷의 남자를 둘러쌌다. 총잡이는 그 모습에서 군체를 보았다. 해파리 같은 군체를. 여러 개체가 합쳐져 하나의 거대란 체계가 되는 장면을 보았다.

 

하나의 덩어리가 되 버린 것이군. 자신을 잃고 무언가에 종속되어. 톱니바퀴처럼 기능할 수밖에 없게 되었어. 총잡이는 그들을 보며 솟구치는 혐오감을 잠재우려 애썼다. 흰 옷의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어. 그렇지만 어쩔 도리가 없군. 그를 잡아서 내게 데려와 줘."

 

"명령대로."

 

총잡이의 등 뒤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방아쇠를 당겼으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총잡이는 자신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 넘어가는, 갑옷과 전투복 같은 것을 입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는 매의 주둥이 모양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면을 쓴 남자가 팔을 들며 말했다.

 

"감시자. 히무로 시라베님. 재단은 당신을 우선 확보 인물로 지정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매발톱이며, 당신을 데려가겠습니다."

총잡이는 가면을 쓴 남자를 보았다. 방아쇠를 당기는 것으로 대꾸하자 총이 그의 손 안에서 포효했다. 가면의 남자가 들은 총성은 두 번이었지만, 날아온 총알은 세 발이었다. 그는 재빠르게 총알을 쳐냈음에도 팔꿈치의 관절로 날아오는 한 발만큼은 튕겨내지 못했다.

 

총잡이가 기억하기로 로를 호위하는 개조인간들은 갑주를 몸에 두른다. 그러나 관절에마저 갑주를 덮을 수는 없었다.  총잡이가 장전을 하기 위해 총띠로 오른손을 내리자 가면의 남자는 자신의 목을 다친 팔로 감싼 채 그에게 달려들었다.

 

총잡이는 총띠에 감아놓은 탄환들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실린더를 열어 장전했다. 그러며 왼손으로는 자동권총을 꺼냈다. 화력은 백단향 리볼버보다 떨어질지언정 다가오는 상대에게 빠르게 쏘는 데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허벅지. 무릎. 어깨와 발. 갑주 탓에 부상을 입히진 못했지만 충격을 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총잡이는 장전을 끝내고 몸을 날려 영화관의 의자 위로 뛰어올랐다.

 

가면의 남자 또한 그를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았다. 겉보기에는 위태롭게, 그러나 그의 딴에는 항상 균형과 근거를 갖춘 채로 총잡이는 영화관의 좌석 위를 움직였다. 묘기를 부리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가면의 남자가 총알을 맞는 한이 있어도 그를 붙잡으려 할 때마다 간발의 차이로 실패하고 가까스로 총알을 비껴내는 일이 몇 번이고 일어났다. 총잡이는 쫓는 쪽이 매 주둥이 가면의 남자. 쏘는 쪽이 자신임을 잊지 않았다. 오른손에 들려 있는 백단향 리볼버가 어느새 살을 태울만큼 뜨거워지는 와중에도 장전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총이 몇 번이고 불을 뿜었다. 가면의 남자의 갑주는 이제 여러 곳이 금가고, 그을리고, 약해져 갔다. 흰 옷의 남자는 그것을 보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감시자가 제압을 목적으로 총을 쏘고 있다는 것을.

 

"아… 역시 안 되나? 이봐. 그만 돌아와!"

 

흰 옷의 남자가 가면의 남자를 향해 손뼉을 두 번 쳤다.

 

"죄송합니다. 조율자님…"

 

가면의 남자는 절뚝이고 피 몇 방울을 흘리는 채로 흰 옷의 남자를 향해 뒷걸음질 쳤다. 총잡이는 총띠에 감아놓은 총알을 다시 손으로 쓸어내렸다. 

 

"이들은 열화된 대적자의 재능을 주입받았기에 대적자의 약점을 똑같이 가지고 있지. 익사시킬 만한 깊이의 물 없이도 꺾을 수 있다 내가 완성되지 못했다고 해서. 매발톱 한 명 만으로 나를 제압할 수 있으리라 여겼나?"

 

"역시 존댓말은 너에게 안 어울려. 감시자. 그런 오만함이 감시자에게 어울리는 일이지. 누구의 가치판단도 개의치 않으며 자신의 기준으로 사물을 보는 것. 그게 감시자다.

위협도 지배당한 민간인도 제대로 죽이지 못하는 너는. 전혀 감시자스럽지 않다. 번거롭게 총알을 다 낭비해가면서까지 죽이지 않으려 갖은 애를 쓰다니… 결함을 잔뜩 머금은 반푼이 같으니."

 

총잡이는 흰 옷의 남자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이제 그의 목소리만 들려올 뿐 흰 옷의 남자라는 사람의 실체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신도가 만들어낸 인간 벽 때문이었다.

 

"쏘지도 않을 거면서 왜 겨누는 거야? 너는 로 체계의 완성으로 구원될 사람의 목숨은 등한시하지만. 당장 눈 앞의 사람들은 죽이지 않으려 최선을 다해. 대체 기준이 뭐지? 어떤 목숨을 아끼고 어떤 목숨을 아끼지 않는 거야? 스스로도 모순에 빠져 있다고 느끼지 않나? 일부는 신경 쓰지 않고 일부는 신경을 쓰려고 노력하는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나. 당장 너의 총알이 부족해진 틈을 타 내가 모든 이들로 하여금 널 공격하게 만든다면 너는 이 영화관 안의 모든 이들을 죽이겠지.

어찌 이보다 위선적인 일이 있을까."

 

총잡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는 불완전하게 만들어진 것을 기회로 여길지 모르지만 그것은 저주일 뿐이다. 영원히 네가 원하는 곳에 닿지 못하고. 자기모순에 빠진 채로. 누구와도 함께하지 못할 저주. 고작 그것이 너다. 위대한 가능성을 품고 있음에도… 빛을 가지고 있음에도."

 

"할 말이 남았나?"

 

"해줄 말은 이제 없다. 그러니 떠나. 나도 내 사람들이 죽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떠나고 잊어라. 내가 한 말의 가치를 무시해. 그러는 동안 나는 내가 구원하지 못한 이들을 생각하며. 발을 차마 뻗지 못하고 밤잠을 설칠 테니까.

우리도 곧 떠날 거야. 공동체를 만들어보려고 말이지. 그러니 돌아가서 보고해.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감시자. 돌아가는 길에 이치노세 죽이는 것 잊지 말고."

 

"나는 그를 죽이지 않는다."

"아니." 흰 옷을 입은 남자는 웃었다. "죽일 걸."

 

 

 

 

 

 

총잡이는 곧장 술집으로 향했다. 벌컥 들이닥치자 테이블 위의 시게루라는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치노세는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던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외견상 무사한 그의 모습을 보고 총잡이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변화가 있나 살폈다.

 

"왔나…"

 

이치노세의 눈빛은 사십 살은 더 늙은 사람처럼 보였다. 문득 총잡이는 흰 옷의 남자가 예배에 늦었던 일을 떠올렸다. 들를 곳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곳이었다.

 

"14를 말했습니까?"

이치노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이야기의 끝이었다. 이치노세는 14를 말하고야 말았고. 그러자 예수가 그에게 찾아왔다. 무언가를 보여줬다. 그가 손을 잡은 이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그에게도 보여주었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어. 주체할 수가 없었어. 내가 말했어. 다이고에게 물으니 예수님이 찾아왔어…"

 

총잡이는 다이고가 누구인지 몰랐다.

 

"예수의 손길이 닿으신 겁니까."

 

"예수님의 손길이 내게 닿았어."

 

"비밀도 들으셨군요."

 

"맞아. 그 자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전부 들었어. 무슨 일을 한 건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나라는 사람은 무엇인지조차… 세상에. 일체감이라니. 그 고양감. 도무지 잊을 수가 없어. 나는 없었어. 동시에 어디에도 있었어. 나 자신의 존재를 쪼개. 모든 곳에 내가 있을 수 있었는데. 합일될 수 있었는데. 그 가능성이 이젠 사라졌어"

 

"괜찮으십니까?"

 

"날 죽여줘."

 

이치노세는 텅 빈 동공으로 총구를 바라보았다. 총잡이는 그 공허한 눈빛만큼이나 이치노세라는 사람 또한 공허해졌다고 느꼈다. 텅 비어 버렸다. 무언가에 영혼을 빼앗기고 껍데기만 남아 버렸다.

 

신자들과는 달랐다. 가진 게 없이 밟히고 착취당하며 모든 명령에 순종하는 꼭두각시들조차 노예로서 행복했다. 그들은 충만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치노세는 아니었다. 원래 있던 것마저 잃어버렸다. 마치 하나가 된 점토 뭉치에 하나가 되었다가 일부만 떨어져 나온 점토 조각을 보는 것 같았다.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갈라 비틀어졌다. 곧 습기를 전부 잃은 채 말라붙어 잘게 부서지고 먼지가 되리라.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주워 담는다고 해도 결국 흩어질 운명에 있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이치노세가 잘 알고 있었다.

 

이치노세의 눈에서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한계까지 짜낸 그의 정수였다. 그가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있으며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었다. 총잡이는 고개를 픽 떨구고 밑을 내려다보는 그를 보며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죽여줘…"

 

무엇을 보았는지는 묻지 않았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도. 묻지 않았다. 이치노세는 환각을 봤다. 정신을 조종당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깊은 의미의 무언가는 없다. 신성함도 없다.

 

남은 것은 정신이 넝마가 된 한 사람뿐이다. 총잡이는 삶의 목표를 잃은 폭도들에게서 그와 똑같은 눈을 보았다. 다시는 더 나아질 수 없다고 완벽히 좌절한 사람은 그런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는 항상 부탁하지. 죽여줘요.

 

그렇게 둘 수 없었다. 살아가는 것이 고통이 된 폭도들은 절대로 죽게 둬선 안 됐다. 죽음은 그들에게 있어서 과분했다. 그러나 이 자는. 이치노세 신지로의 경우는

 

총잡이는 이치노세를 위한 다른 대답을 준비했다.

 

"고개를 들어요. 당신은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습니다. 사람 탈을 쓴 자들이 낭자하는 변질된 세상 속에서. 당신은 마지막까지 아버지의 낯을 잊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낯…?"

 

이치노세의 얼굴에 한 줄기 깨달음이 스쳤다.

 

"너도 그들 중 하나였구나."

 

"맞습니다."

"그런데도 그들과 맞서 싸우려고 하고 있었어. 그들을 막기 위해서인가…"

 

"막지 못했습니다. 이 마을의 누구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조차 광기에 잠식되어 하나의 의식 속으로 퇴적했는데도."

 

"스스로를 탓하지 마… 너는 선한 사람이다."

 

총잡이는 이치노세가 그에 대해 모르기에 오해를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곧 죽을 사람과 말다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총잡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총잡이는 총을 뽑고 이치노세에게 겨누었다.

 

"죽기 전에 네 이름을 말해 줘.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의 이름 정도는 알고 싶어."

 

"히무로 시라베."

 

총잡이는 말해 주었다.

 

"고맙다. 히무로…"

 

그의 정신이 무너진 게 분명하다고. 총잡이는 생각했다. 원망해도 모자란 판국에 고맙다니. 옳고 그름조차 판단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 분명했다. 총잡이는 이치노세의 고통을 끝내 주기로 마음먹었다.

 

총잡이는 재단에서 배운 금언을 떠올렸다.

 

"나는 총으로 죽이지 않는다. 총으로 죽이는 자는 아버지의 낯을 잊은 자니…"

 

…나는 내 심장으로 죽이리라.

 

총잡이는 고통이 없도록 이치노세의 전두엽에 정확히 총을 쏘았다. 그의 소망을 이루어주었다. 이치노세의 고개가 뒤로 홱 돌아가더니 그 반작용으로 밑으로 축 늘어졌다.

 

이치노세는 14의 세계로 사라졌다.

 

그러나 눈을 감은 채 머리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는 그를 보고도. 총잡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적지에서 특정한 감정에 빠져들면 위험에 처할 수도 있기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 총잡이는 당장 카텟 기관에 새로운 정보를 보고하기 위해 뒤로 돌아섰다. 예수. 흰 옷의 남자. 로와의 관계성. 정신 지배와 종교의 창설. 여러 생각을 동시에 하던 히무로는 느닷없이 흰 옷의 남자가 한 말을 떠올렸다.

 

"너는 빛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무엇을 줄 거지?"

 

"…."

 

총알밖에 주지 못했다. 죽음밖에 주지 못했다.

 

그가 다른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배려도 자비도 사랑도 줄 수 없다. 줄 수 있는 것은 총알과 죽음뿐. 선한 자에게도. 악한 자에게도. 결국 똑같은 것을 주는 게 바로 총잡이라는 사람의 전부였다.

 

총잡이는 술집의 문을 나서기 직전 뒤를 돌아보았다.

 

총잡이는 언젠가 밤잠을 설칠 날을 위해 그의 얼굴을 눈에 새겨 두었다.

 

 

 

 

 

 

 

"그런 일이…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히무로?"

 

"프로젝트가 완성된다면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게 돼."

 

총잡이. 히무로 시라베의 눈에 서려있는 것은 건강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기관원의 눈에는 걱정의 기색이 어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초인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마. 히무로."

 

"너도 마찬가지야. 너는 초고교급이니 언젠가 너를 노리는 단체나 집단이 너를 찾아올지도 몰라. 항상 조심해야 해. 정말 다른 기관으로 갈 생각은 없는 거야?"

"이제 와서 내가 어딜 가겠어. 히무로. 내가 있을 곳이 여기인걸. 이제 일에 익숙해지려는데 또 이사하면 힘들어!"

 

"그렇다면 너는 우리와 계속 함께해야 해."

 

히무로 시라베는 무표정한 채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유즈미."

 

"웅! 알겠어!"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쾌활하게 웃었다.

 

히무로 시라베가 그리움을 배우게 되는 계기가 바로 그 웃음이었다.

 

 

 

 

 

 

 

외전 특: 구상했던 것보다 재미가 없음

 

그래도 외전에서밖에 풀 수 없는 걸 풀어 봤으니까 이제 본편으로 가 봅시다~~

 

단크 타워는 궁예와 추측을 적극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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