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았다.
통했다.
더 단크 타워
챕터 1: < 죽여 마땅한 사람 둘 >
"과정은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책임은 사라지지 않으며 그것은 업보처럼 다가온다."
쏘았다.
통했다.
토키와 아유키: 됐어. 성공이야! 통했어!
몸에 갑옷을 두른 듯이 견고하던 야가미의 태세가 마침내 흐트러졌다. 야가미의 머리가 순간 홱 넘어갔다. 금방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자세를 가다듬긴 했으나 그에게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저거 내 언탄 아니야? 내 언탄이겠지? 꺄악! 어떡해!
마유즈미 나데시코: 도와 주자. 빨리! 어… 내가 줄 만한 증거가…
하기와라 우시오: 대충 생각나는대로 쏘면 되나? 좋아. 무한 탄창 버그 한 번 써 보자. 총알이 복사가 된다고!
토키와 아유키: 기다려!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언탄이 아니면 통하지 않을 거야. 정말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되는 것들만 보내자.
모두 히무로의 과녁 앞에 모여 쏠 만한 내용을 빠르게 의논하고, 그럴 여유가 없다면 일단 자신의 판단에 맡겨 쏘았다. 히무로가 이기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우리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카이다 쿠로하: …흠.
토키와 아유키: 카이다. 너도 처형당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 뭐 하는 거야?
카이다는 히무로의 과녁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한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야가미의 과녁이 있던 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가미의 과녁이 있던 곳을…
나나시: 어…? 저거…
나는 의아함에 가득 차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내가 무언가를 잘못 본 것만 같았다.
캐롤 브라이트: 왜 그러세요?
나나시: 야가미의 과녁이 열려 있잖아…?
나이토 유즈루: 뭐?!
카나리 케이토: 저 자식 건 왜 열려 있어?! 빨리 닫아. 닫아버려!
모리 레이코: 어떻게 닫아야 하는지가 문제군. 협상가 또한 도움을 받게 두어서는 안 된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아까까지는 분명 히무로의 과녁만이 열려 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야가미의 과녁 또한 마찬가지로 열려 있었다.
그리고 카이다는 야가미의 과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이다 쿠로하: 이대로라면 야가미가 지겠지? 하지만 누군가가 도와준다면 얘기는 달라져.
숨이 헉 하고 들이쉬어졌다. 야가미는 이미 기관총을 두 개 가지고 있는데?!
카이다 쿠로하: 솔직히 둘 다 싫어. 마음에 안 든다고. 그렇지만 누가 이길지를 고르자면 야가미 쪽이거든? 히무로 저 새끼는 기분이 나빠. 아는 척이나 해 대고 말이야…
나나시: 카이다. 대체 왜 그래. 처음 이 탑에 왔을 때는 이렇지 않았잖아!
카이다는 내 쪽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카이다 쿠로하: 내 연기에 속은 너희 잘못이지. 그러게 누가 겉만 보고 판단하랬어?
후루미나미 나몬: 난 아닌데. 아마 히무로도 아닐 걸.
카이다 쿠로하: 처음에는 본성 좀 숨기고 살아 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제 다 필요 없어. 대체 왜 이러냐고?
카이다 쿠로하: 너희들이 싫으니까. 초고교급 꼬리표 붙은 새끼들은 전부 싫어. 그냥 보고만 있어도 화가 치밀어올라!
누구도 그녀를 향해 왜냐고 묻지 않았다. 왜인지 물어봤자 의미가 없으리라는 직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카이다 쿠로하:새 출발 해 보려고 했지만 결국 또 사람 죽이게 생겼으니… 적어도 너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어줄 거야.
23T5U130: 네 처지만큼?
카이다는 23T를 노려보더니. 야가미의 과녁에 대고 언탄을 쏘고야 말았다.
히무로 시라베: 이게 다 몇 개야.
한 손에 다 쥘 수 없을 정도의 언탄이 내 주머니를 불룩하게 채웠다. 대부분이 아이보리색이었고, 주머니 안에서 증식하듯이 언탄이 점점 차올랐다.
핫핑크색 언탄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보리색이 후루미나미의 것이었으니 분명 이건…
나나시의 기억이었다.
"이거 전부 욕실용품 팩 아냐?"
"입욕제만 썼네…?"
"이것도 입욕제만 없어. 나머지는 거의 전부 새 물건이야. 샴푸나 치약이 비어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래.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입욕제 그거를 물에 넣으면 거품이 막 나온다더라고. 그래서 넣어 봤더니. 보글보글한 게 엄청 좋더라."
기억했다.
마유즈미와 관련된 내용이기에 야가미에게 충격을 입히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정보의 폭은 넓어졌다.
나는 그대로 다른 언탄들을 마구 읽으며, 읽은 언탄을 실린더에 넣어갔다.
"이건 뭐야. 붕대인가?"
구멍 뚫린, 피 묻은 붕대.
기억했다.
"여기 흔적이 남아있네. 여기에 로프를 걸었던 거야."
카이다 숙소의 창살에 남아 있는 흔적.
기억했다.
야가미 숙소의 창살 흠집. 야가미의 완력. 카이다의 내통. 위치 추적의 수단.
기억했다.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까지. 많은 이들이 내게 지식과 증거를 제공해 주었다. 나는 무엇이 그를 몰아붙일 수 있을지 한 번 더 생각한 뒤 언탄을 난사했다.
언탄들이 야가미의 이마에 맞았다.
야가미 토가: 컥!
야가미가 신음을 토했다. 어차피 언탄으로 충분한 피해는 주지 못하는 것 같았기에 머리를 집중적으로 쏘았다. 그 끝에 야가미의 이마에선 조금씩 피가 새어 나왔다. 피부가 찢어질 정도의 상처는 입힌 것인가.
나는 다시금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야가미 토가: 으윽…!
히무로 시라베: 야가미. 참아. 조금만 더 하면 끝나니까. 무엇보다 네가 살인을 저질렀다면 이런 고통 정도는 감내해야 도리가 맞아.
히무로 시라베: 미도리카와는 그것보다 더 아팠을 테니까.
벽에 몸을 기댄 채 그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야가미는 내게 소리쳤다.
야가미 토가: 쉽게 입에 올리지 마세요!
모퉁이 너머에서 야가미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화가 났나? 입이 방정이었다.
그렇지만 화가 난 상대와의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기의 손에서 사탕을 뺏는 것보다 쉬운 법이었다. 화가 난 상대가 기관총을 양손에 들고 있다면야 경우가 다르겠지만.
한 번 사용한 언탄일지라도 내가 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얼마든지 또 쓰일 수 있었다. 나는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의식하며 그에 맞춰 발을 움직였다. 폐공장을 중심으로 한 바퀴를 돌듯이. 거리를 유지했다.
야가미는 나를 보자마자 기관총을 치켜들었다. 나는 그에게 충격을 줄 수 있듯이 그의 기관총에도 충격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내 가설은 적중했다.
손 두 개. 총신 두 개. 총구 두 개. 내가 가진 언총은 하나뿐이었기에 일일이 쏘는 것이 번거로웠지만 어떻게든 해내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야가미 토가: …쯧.
야가미는 기관총 두 개를 땅에 놓치고 말았다. 기관총의 총구와 총신은 찌그러졌다. 언탄이 강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스스로를 다칠 수 있는 존재라 인식하고 있기 때문 같았다.
이 장소는 야가미의 정신에 영향을 받았다. 아마 그와 기관총도 마찬가지였으리라. 피가 나고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언탄이 통하기 시작했으니. 그가 약한 모습을 보일 때 확실히 그를 제압해야만 했다.
다시금 중요한 증거들을 떠올리며 그에게 언총을 겨눈 그 순간. 느닷없이 무(無)에서 유(有)가 생겨났다.
히무로 시라베: 무슨…?
야가미 토가: 히무로 씨…
언탄처럼 생긴 커다란 물체가 야가미의 등 뒤에서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그의 옆에 부유하며 멈추었다. 마치 누군가가 커다란 총을 쏘아. 야가미에게 무기를 준 것만 같았다…
야가미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건가. 불합리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 언탄은. 어뢰만큼이나 큰 저 언탄은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크게.
야가미는 이를 갈면서 오른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의 옆에 둥실 거리며 떠 있던 어뢰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히무로 시라베: 아.
이건 반칙 같다는 투정을 내뱉을 새도 없이. 나는 뒤를 돌아보며 달렸다. 어뢰의 궤적을 재고 몸을 던져야 할 곳을 찾느라 앞과 뒤를 번갈아서 보았다. 뒤를 볼 때마다 조금씩, 사실 다소 많이 가까워지는 어뢰는 마치 악몽 같았다.
일직선으로 달리다간 피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나는 또다시 공장의 모퉁이를 향해 달렸다. 그렇지만 시간이 맞지 않았다. 숨이 점점 차올랐고 다리는 무거워졌다.
무엇보다 어뢰가 너무 빨랐다. 모퉁이로 몸을 던지기도 전에 어뢰가 내 몸을 찢어 놓으리라고 느낀 나는, 눈을 부릅뜨고 몸을 홱 돌렸다.
이제 어뢰의 뒤에는 불꽃까지 붙었다.
제발. 제발 통하길 빌며. 나는 언탄을 쏘았다.
여섯 발이 날아갔다. 네 발이 적중했을 때 어뢰가 공중에서 폭발했다.
섬광과 굉음이 화면을 뒤덮었을 때. 내 심장도 함께 내려앉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안 돼…
마유즈미는 조금 울먹인 것 같았다. 설마 죽은 거야? 설마.
나나시: 이렇게 죽는 건 아니잖아…
검고 불길한 연기 속을 히무로가 뚫고 나왔다. 그러나 몸이 무사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몸 곳곳에 새까만 검댕 같은 것을 뒤집어쓴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윽. 하아…
후루미나미 나몬: 어머. 섹시해라.
나이토 유즈루: 지금이 농담할 때야?! 쓸 만한 증거 더 없어? 저러다 죽겠다!
카이다 쿠로하: 아니. 한 발 밖에 안 갔으니까 죽진 않을 거야. 진짜 폭탄은 아닌 것 같지만 나쁘지 않은데?
카이다 쿠로하: 한 발 더 먹여주면 아예 끝나겠지.
우리가 그녀를 저지하기도 전에. 카이다는 야가미의 과녁에 언탄을 쏘았다. 뒤틀린 미소가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마치 악마 같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아아아아안~ 돼애애애애애~
하기와라가 슬로우모션에 갇힌 양 천천히 손을 뻗었다. 나도 그와 비슷한 동작을(더 빠르긴 했다) 취했지만, 그녀의 언탄은 과녁에 흡수되지 않았다.
카이다 쿠로하: 뭐야. 왜 더 안 들어가?!
언탄은 과녁에 잠시 붙어 있다가 허무하게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저 미사일 같은 게 하나 더 생길까 가슴을 졸이던 나는 아주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나나시: 결투 신청자가 더 유리한 싸움이니까 야가미를 돕는 건 한 번 밖에 안 되나 봐.
나이토 유즈루: 하하! 꼴좋다. 임마!
하기와라 우시오: 그럼 그렇지. 저런 걸 몇 번씩 줄 수 있으면 그게 말이나 되냐? 밸런스가 안 맞잖아!
후루미나미 나몬: 밸런스가 안 맞는다… 그래서 한 사람당 한 번의 제한을 둔 걸까?
후루미나미 나몬: 잠깐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실례.
후루미나미는 태연하게 야가미의 과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나 말고도 많은 사람이 눈치를 챘고,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모리였다.
모리 레이코: 그렇게는 두지 않겠다.
모리는 주먹을 우두둑 꺾으려는 듯이 두 손을 겹쳤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칸나즈키 시노부: 쪽팔리겠다.
모리 레이코: 조용히 하도록.
후루미나미 나몬: 모리. 어쩌게? 모리뿐만 아니라 너희 전부. 어쩌려고 그래? 날 때려눕히기라도 하게?
하기와라 우시오: 맞는 말이긴 해. 우리는 쓸모가 없다. 팝콘이나 가져와!
나이토 유즈루: 그래. 또 덤볐다가 역공당하지 말고. 화 좀 삭여!
모리는 나이토의 얼굴을 쏘아본 뒤 후루미나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모노로그: 과도하게 의도적인 상해는 규칙 위반이다. 모리 레이코!
모리 레이코: 대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이지?
후루미나미 나몬: 자아실현.
모리는 유유히 그녀의 앞을 지나가는 후루미나미에게 손 하나 대지 않았다. 내가 보면서도 놀랐다.
카이다 쿠로하: 참을성이 생기셨네. 우리 공주님?
모리 레이코: 닥쳐라!
나이토 유즈루: 아오! 굳이 한 마디를 더 해서 또 얘 화를 돋우냐?!
모리가 나이토와 아웅다웅하는 동안 후루미나미는 아무런 방해 없이 야가미의 과녁에 도달했다. 막을 방법이 없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몇 명이서 손을 맞잡고 그녀 주위를 감싸기라도 해야 했을까?
후루미나미 나몬: 흠흠흠. 어디 보자. 일단 한 발 쏘고 시작할게.
후루미나미가 휘파람을 불며 방아쇠를 한 번 당겼다.
후루미나미 나몬: 카이다는 한 발 밖에 야가미에게 주지 못했어. 나나시의 말대로 이런 어뢰를 마구 줄 수 있으면 히무로에게 너무 불리한 싸움이지. 그렇지만. 히무로에게 충분한 무기를 제공한 나라면 어떨까?
후루미나미 나몬: 히무로의 손을 많이 들어줬으니. 야가미의 손을 조금 더 들어주더라도… 괜찮을 거야.
후루미나미가 한 발을 더 쏘았다.
언탄은 과녁에 흡수되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후루미나미. 그러지 마… 히무로가 다치는 걸 보고 싶진 않잖아.
후루미나미 나몬: 마유즈미. 어차피 우린 미도리카와가 죽는 상황을 만든 장본인들이잖아. 히무로가 죗값을 치른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겠어?
마유즈미는 얼굴이 새파래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아. 너도 저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야. 다만 이제 와서 착한 사람인 척 하기엔 너무 늦었단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그보다 내 주특기가 뭔지 알아? 일인다역이야. 역시 안타고니스트도 하고 싶단 말이지. 아. 오늘 밤은 발 뻗고 자겠어!
후루미나미는 웃으며 방아쇠를 네 번 더 당겼다.
헛웃음이라도 짓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이런…
야가미의 등 뒤로 어뢰가 여섯 발 더 나타났다. 간신히 몸을 피하고 모퉁이 뒤로 숨었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숨을 수 있을지는 이제 알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확실하게 알 수 있었을까? '절대 못 숨는다' 라고.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나몬… 이거 분명 네 짓이지.
난 그렇게 확신했다. 내가 이 곳에서 신체의 일부를 잃기라도 한다면 다시는 후루미나미 나몬의 얼굴을 보지 않으리라고, 나는 맹세했다.
정말로. 사지 멀쩡히 돌아가고 싶은데… 저걸 상대로 어떻게 하지?
야가미 토가: 내가 생각 짧은 살인자로 보일 테지.
야가미는 이마에서 피를 주르륵 흘리는 채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내게 가까이 다가오면서 그는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답지 않은 일이었다.
야가미 토가: 흑막의 말에 속아 넘어가선 경솔하게 살인을 저지른, 인면수심의 멍청이로 보일 테지…
야가미 토가: 하지만 내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알게 두지도 않아. 누구도 이 복수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지 못할 테니까…
귀를 기울이다가 그만두었다.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주머니 속의 언탄을 몇 개 읽어 보았으나 사건에 직접적인 증거가 되진 못할 것 같았다.
이 결투를 끝낼 수 있을 정도의 증거. 과연 무엇을 써야 하는지 고심하던 도중 검은색 언탄이 내 눈에 띄었다.
마유즈미의 것.
그녀의 기억을 보았다.
욕실용품 팩. 마유즈미의 것. 그녀는 입욕제를 많이 사용했다.
또다시 욕실용품 팩. 야가미의 것. 그는 여러 욕실 용품들을 사용했다. 여러 가지를 재보급받았다.
한 사람이 순식간에 쓰기에는 말이 안 된다. 그렇게 많이 보급받을 필요도 없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면…
이길 수 있는 활로가 생겼다. 하지만.
야가미 토가: 내 앞을 가로막을 순 없어… 당신이 나의 무엇을 압니까? 히무로 씨. 당신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이제 내 이름을 부른다. 점점 의식이 드는 모양이었다. 충격을 받은 자가 꿈에서 깨어나듯이 야가미는 자신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 말은, 여태까지의 눈먼 기관총 난사를 기대할 순 없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기관총은 내 손으로 고장 냈다. 야가미는 한 손으로 상처를 막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내가 공격하는 것을 기다리던가, 나를 찾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인식하고 있었다. 아까보다 더 까다로운 상대임이 분명했다. 원래대로 돌아오라고 말했던 것을 취소하면, 생각이 짧던 폭주 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었다.
그는 곧 나를 추적하는 것보다 나에게서 멀어지는 편이 유리함을 깨달을 것이다. 언탄의 사거리보다는 어뢰의 사거리가 더 기니까. 그가 어뢰를 피하기 어려운 위치로 도망간다면 결국 난 그와의 결투에서 승리할 수 없게 될 터였다.
모퉁이를 넘어 다시 그에게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어뢰를 피하기 위해 벌려놓은 거리가 오히려 나의 목을 잡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야가미 토가: 모습을 보이세요. 이곳에 영원히 있을 순 없습니다.
그래야 한다면야.
히무로 시라베: 나는 손으로 겨누지 않는다. 손으로 겨누는 자는 아버지의 낯을 잊은 자니…
재단에서 배운 금언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히무로 시라베: 나는 내 눈으로 겨누리라.
숨을 고른 뒤 나는 모퉁이를 박차고 달렸다.
첫 번째 어뢰가 날아왔다. 언탄이 날아가는 속도와 그 힘을 재 놓았다. 어뢰가 내 몸에 명중하기 2초 전. 나는 그것을 언탄으로 쏘아 터뜨렸다.
이 짓을 두 번이나 감행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어쩌면 다섯 번이 더 남아 있었다. 그런 일만은 막기 위해 나는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머리를 울리는 이명과 어지러움을 이겨내느라 치아를 한계까지 악물었다. 연기를 파헤치며 앞으로 나아가자 두 번째 어뢰가 날아왔다.
손과 내 감각이 어뢰를 학습했다. 이번에는 3초 전의 거리에서 요격시킬 수 있었다. 연기가 앞을 막지 않도록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야를 뚫고 앞을 보았다. 어뢰는 세 발이 남아 있었다. 야가미는 두 발을 쏘았는데. 나머지 하나는?
위를 보았다. 야가미는 머리를 잘 썼다. 위에서 어뢰가 날아오고 있었다. 폭발까진 3초 전. 내 시야의 사각에서 어뢰를 쏘려는 심산이었으리라.
계획을 떠올렸다.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손과 총이 대답했다. '할 수 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해야만 한다'.
여섯 발을 쏘았다. 대신 세 발을 어뢰의 탄두 한쪽에 몰아 쏘았다. 탄두가 내 진행 방향과 반대로 기울어졌다.
어뢰를 보며 계속 달렸다. 그리고 탄두의 조금 밑에 세발을 더 쏘았다. 같은 부위에 총격이 집중되지 않았기에 방향이 기울어진 채 어뢰가 터지지는 않았다.
나는 몸을 앞으로 뻗어 크게 굴렸다. 카이다의 것까지 포함하면 네 번째 폭발. 그러나 처음으로 내게 이점이 되는 폭발이었다. 공기가 터져나가며 내 후미에 속도를 붙였다. 조금의 추진력이라도 끌어모아 그에게 가까워지려는 도박이었고, 성공했다.
야가미 토가: 이런…!
세 발이 남았다. 야가미는 다시금 손을 나를 향해 뻗었다. 어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뢰의 단점을 봐 두었다. 한 번에 한 어뢰만 쓸 수 있는 것은 부수적인 문제였다. 무엇보다 어뢰는 불꽃이 붙은 뒤에야만 터질 수 있었다. 어뢰의 뒤에 불꽃이 붙고 속도가 오르기 전에는, 그저 움직이기만 했다.
또 다른 단점으로 내구성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언탄을 네 발만 맞으면 그 자리에서 터져 버렸다. 승리하기 위한 티켓은 그곳에 있었다.
어뢰에 불이 붙기에 나는 충분히 그에게 가까워져 있었다. 야가미로서는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 이대로 내가 가까워지면 꼼짝없이 지는데 어뢰를 터뜨리기엔 이미 늦어 있었으니.
야가미는 찰나 동안 고심에 빠졌을 테다. 이대로 터뜨릴까. 추진력을 제공해선 안 돼. 새 어뢰를 쏘아야 해. 그렇지만 이미 히무로는 충분히 가까워졌는데. 불꽃이 붙을 시간도 없을 거야.
그 찰나의 시간 동안 나는 야가미의 방향으로 총을 쏘았다.
그러나 야가미를 향해 쏘지는 않았다.
야가미의 남은 두 어뢰는 언탄을 맞은 끝에. 그의 바로 옆에서 터졌다.
폭발의 여파에 내 몸 또한 조금 날아갔다. 하지만 시멘트 바닥에 구르며 먼지를 뒤집어쓸지언정 부상은 입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쓰러진 야가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야가미는 죽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공간 속에서는 아무리 큰 부상을 입어도 죽지는 않는 것으로 보였다. 폭발물이 바로 옆에서 터졌는데도 신체의 결손 하나 없었으므로.
온몸이 새까맣게 타긴 했지만 야가미의 사지는 멀쩡했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채 신음하고 있었고, 숨이 옅어지기는 했으나 끊어지지는 않았다.
빨리 승부를 본 덕분에 쓰러트릴 수 있었다. 만약 더 먼 거리에서 야가미를 상대해야 했다면, 꼼짝없이 내가 졌으리라.
야가미 토가: 으윽…
고통스러운 것인지 야가미는 거구를 일으키지도 못한 채 숨을 몰아쉬었다.
히무로 시라베: 내가 이겼어. 넌 더 이상 싸울 수 없어. 하지만 결투가 끝나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마무리가 필요한 모양이야. 가장 핵심적인 증거.
야가미 토가: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의 기억이 가장 큰 단서가 됐어. 마유즈미의 팩과 너의 팩에는 큰 차이가 있었으니까.
입욕제. 그리고 욕실용품 다수.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는 입욕제를 많이 사용했지. 일회용품이니까. 그러나 네 몸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바디워시. 샴푸. 치약. 칫솔이 그렇게 쉽게 소모될 순 없어. 특히 칫솔. 칫솔이 가장 비어 있었어. 칫솔을 가장 많이 보급받은 셈인데 이상하지 않아?
히무로 시라베: 칫솔의 기능은 저하될 수 있어도 칫솔 자체는 사라지지 않아. 다시 보급받을 이유도 없지. 네 치열이 심하게 고르지 않아 칫솔의 마모 속도가 빨랐던 것일까. 아니면 항상 완벽한 칫솔을 사용해야 한다는 강박증이라도 있나.
히무로 시라베: 둘 다 아니야. 미도리카와를 찌른 흉기. 관통상을 만든 것이 칫솔일 뿐.
야가미 토가: …말도 안 됩니다. 칫솔로 사람을 찌른다고요? 그게 가능하다면 손가락으로도 관통상을 낼 수 있겠군요.
히무로 시라베: 정확히는. 부러뜨린 칫솔일 거야.
야가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히무로 시라베: 연필로 찔러도 적당한 각도와 힘을 쓰면 뚫을 수 있는 게 사람의 몸이야. 딱딱한 플라스틱 재질의 칫솔이라면 더할 나위 없지. 게다가 무한한 재보급의 기회가 있었으니…
히무로 시라베: 날카로운 면으로 부러질 때까지. 몇 번이고 팩을 재보급받을 생각이었겠지? 그러나 세 번째 시도에서 적당한 물건이 나왔고. 넌 그것을 사건에 활용했어.
히무로 시라베: 유별나게 날카롭지 않았을지라도 모난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사람을 찔러 죽일 수 있지. 네 완력도 있고 말이야. 그래서 미도리카와의 상처 부위는 훼손되어 있었던 거야. 찌를 만한 도구가 아닌 것으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찔러 댔으니까.
그것에 대해 생각하며. 난 야가미의 몸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야가미의 전신이 덜컹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 퍼져나갔다. 미약한 진동이 내 발에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가 간신히 힘을 끌어모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인자였고 아까까지 총을 겨눈 적이었지만, 괄목할만한 정신력이었다.
야가미 토가: 절 완벽하게 잡으셨군요… 설마 이런 걸 상대하게 될 줄이야…
야가미는 서글프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히무로 시라베: 웃지 마. 지금 이 상황의 어디도 웃기지 않아.
야가미 토가: 죄송하게 됐습니다… 밑바닥까지 떨어지니… 자조적인 웃음을 참을 수가 없네요…
히무로 시라베: 밑바닥은 아니지. 아픈 건 잠깐이야. 넌 탑에서 나갈 수 없더라도 처형되지 않고. 우리도 죽을 위기에서 벗어났으니 그렇게 낙담할 필요 없어.
히무로 시라베: 그렇지만 기억해라.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네가 무슨 동기로 살인을 저질렀든 간에. 그녀의 피는 항상 네 손에 묻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손에도.
마유즈미의 손에도.
후루미나미의 손에도.
캐롤의 손에도.
하기와라와 모리의 손에도.
모든 이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새겨지리.
히무로 시라베: 그리고 언젠가 그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형태로든 돌아오게 될 것이다. 업보처럼.
또한 운명처럼.
히무로 시라베: 또한 카처럼…
야가미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생겨났듯이. 야가미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거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건가? 무언가의 오작동은 아닐까? 나는 주변이 다시금 심연으로 뒤덮이는 것을 보며 약간의 불안함을 느꼈다.
야가미 토가: …한쪽 눈을 되찾은 줄 알았지만, 두 눈이 멀었던 거였군요.
야가미 토가: 역시 당신은 큰 그림을 볼 줄 아십니다.
야가미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새도 없이 재판장으로 돌아왔다.
히무로와 야가미가 땅 밑에서 솟아올라왔다. 참혹했던 야가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두 사람은 들어갈 때와 똑같이 밖으로 나왔다. 야가미는 단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결투는 내가 이겼어.
토키와 아유키: 우리도 봤어… 후유증이 없어서 망정이지 둘 다 큰일 날 뻔했어.
캐롤 브라이트: 야가미 씨. 하실 변명이라도 있으신가요?
야가미 토가: ……?
야가미가 입을 뻐끔뻐끔 움직이다가 말고 흠칫 놀랐다.
나나시: 잘 안 들려.
야가미 토가: ………!
야가미는 계속 입을 뻐끔거리기만 했다. 그의 입을 자세히 보니 단순히 뻐끔거리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지만…
나나시: 말이 안 나오는 거야?
야가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야가미의 팔, 다리, 머리 등 단말(端末)로부터 전자기기가 오작동하는듯한 노이즈가 발생하더니. 곧 그의 몸이 노이즈로 뒤덮였다.
야가미의 모양을 한 노이즈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우리의 귀에는 어떤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카나리 케이토: 뭐라는 거야?! 안 들려!
히무로 시라베: 저게 패널티인 모양이지. 음소거.
후루미나미 나몬: 결투에서 진 사람은 발언권이 없어지는 거야?
히무로 시라베: 내가 저렇게 될 수도 있었어. 누구 씨가 어뢰를 6개씩 보내준 덕분에.
후루미나미 나몬: 크흠. 과거는 묻어두자. 그런데 내가 6개를 보낸 건 어떻게 알았어?
히무로 시라베: 네가 지금 자백해서.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무튼 무사해서 다행이야…
하기와라 우시오: 맞아. 믿고 있었다고 히무로맨!
히무로 시라베: 그래. 어찌 되었든 야가미가 무사하지 않으면 결국 숙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을 수 없으니까. 다행이지.
히무로 시라베: 저 음소거는 끌 수 없는 거야. 모노로그?
모노로그: 승자가 원한다면야 꺼줄 수도 있다. 꺼 드릴까.
히무로 시라베: 투표가 끝나면 꺼 줘.
나나시: 투표를 지금 하는 거야? 벌써?
히무로 시라베: 결투를 통해 여러 증거를 모으면서 검정이 누구인지 알아냈어. 지금부터 사건이 어떤 경위로 진행되었는지 말해 줄게.
히무로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결론부터 예기하자면 야가미가 검정이야. 카이다는 우연히 공범이 되었어.
히무로 시라베: 야가미는 미도리카와의 부름대로 그녀의 숙소를 찾아갔지만. 혹시 신체적 접촉이 발생하고 그녀를 죽이게 될까 두려워 창문을 통해 갔어. 또한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있도록 부러뜨린 칫솔을 챙겨 갔지. 관통상의 흉기는 바로 그 칫솔이야.
히무로 시라베: 미도리카와와 만난 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야가미는 미도리카와를 부러진 칫솔로 찔러 살해했어. 우발적인 살해로 보이니 둘의 대화 내용에 관련이 있을 거야. 야가미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바로 그때 카이다와 마주치게 되지.
히무로 시라베: 흰 물건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미도리카와를 배제하기 위해 그녀의 숙소에 들어온 카이다는 이미 죽어있는 미도리카와를 발견했을 거야. 그렇기에 이후 나나시와 토키와만이 시체를 보았음에도 시체발견 방송이 울린 거고.
히무로 시라베: 이후의 일은 알 수 없으니 전부 추측일 뿐이지만 아마 야가미와 카이다는 일시 동맹을 맺었던 것으로 보여. 육탄전의 흔적도 없고 둘이 한 방에서 시체에 공작을 했다면, 협력을 했던 거라고 볼 수 있어.
히무로 시라베: 우린 야가미가 내통자인 카이다와 모노로그에게 입막음되었으리라 여겼지만 실상은 다를 거야. 야가미의 살해에 카이다가 편승한 거니까. 어차피 끝의 끝에 가서야 검정의 정체를 털어놓으면 된다고 여긴 게 아니었을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말이야.
히무로 시라베: 미도리카와의 목에 난 상처는 아무리 봐도 카이다의 소행이야. 그녀의 숙소에 흉기가 남아 있기도 했어. 이후 두 명은 그녀가 입고 있던 사라시를 벗겨서 현장에서 숨기고, 그녀의 숙소에 있던 여분의 사라시로 그녀를 전등에 묶었지.
히무로 시라베: 아마 미도리카와가 거꾸로 매달린 것은 피를 빼 시체가 언제 죽었는지를 모르게 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이유가 없었을 거야. 우리에게 텅 빈 수수께끼를 던진 것일지도, 과시적인 살해를 드러낸 것일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던 상관은 없어.
히무로 시라베: 최초의 관통상이 야가미의 소행이라는 것이 확실한 이상 다른 수수께끼는 투표가 끝난 후에 들어도 늦지 않아. 이견이 없다면 이대로 투표하자. 어때?
후루미나미 나몬: 그 말에 찬성이야!
후루미나미는 왁스로 머리카락을 세웠다. 또 저거였다…
모노로그: 투표의 결과. 야가미 토가가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검정으로 지목되었다. 과연 그 답은 정답인가. 오답인가?
모노로그: 죽음인가 삶인가. 삶인가 죽음인가. 그 결과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야가미 얼굴 아이콘이 화면에 떠올랐다.
모노로그: 정답! 훌륭한 정답이다. 역시 이렇게나 많은 수가 살아있는 학급재판이었기에 쉽게 끝났군. 하지만 다음 학급재판도 이 만큼 쉬울까?
모노로그: 지금 그것은 중요하지 않겠지. 중요한 것은 하양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그것뿐이니.
나는 깊은 숨을 쉬었다.
결투로 인한 피로와 부상은 몸에 전혀 남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정신이 몹시 피곤하다고 느꼈다.
카나리 케이토: 살았다! 살았어! 개 같은 것들… 내가 살았다고!
칸나즈키 시노부: 역시 이렇게 되었어.
토키와 아유키: 정말 다행이다. 모두… 큰 위기를 넘겼어.
모리 레이코: 살인자가 죽진 않겠지만,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캐롤 브라이트: 하지만 아직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에요.
히무로 시라베: 캐롤 말이 맞아. 진실은 아직 남아있어. 모노로그. 야가미의 음소거를 풀어.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전신에 머무르고 있던 치직거림이 사라졌다.
야가미 토가: 아. 아. 들리시나요? 풀린 것 같군요.
히무로 시라베: 들려. 그러니 이제 말해. 그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야가미 토가: …어디부터 얘기할까요.
카이다 쿠로하: 그렇게 듣고 싶으시다면야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말씀드려 줄게.
야가미의 말을 끊고 카이다가 말했다.
히무로 시라베: 왜 당당하지. 살인이 아무렇지도 않아?
카이다 쿠로하: 그런 걸로 치면 너희들도 떳떳하지 못해. 너희 전부가 그 자식의 죽음에 동참해준 셈이니까. 자. 이거 봐.
카이다가 주머니에서 종이를 한 장 꺼냈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게 뭔데. 니 양심?
카이다 쿠로하: 미도리카와 아쿠토의 유서다. 이 멍청한 새끼들아.
유서? 미도리카와의 유서?
야가미 토가: 유서…
캐롤 브라이트: 유서를 쓰셨다고요?
야가미 토가: 제가 보는 앞에서 쓴다길래 사인펜을 빌려준 기억이 있습니다. 방 안을 많이 뒤지시더니 저런 걸 찾으셨군요.
만약 저 유서 안에 흰 물건에 대해 적혀 있다면… 정보를 통제해야만 했다.
모노로그는 흰 물건에 간섭할 수 없다. 카텟 기관이 흰 물건을 그렇게 만든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카이다가 미도리카와의 유서를 입수했다는 것은 흰 물건에 대한 정보가 흑막 쪽으로 넘어갔음을 의미했다.
히무로 시라베: …뭐라고 적혀 있는데?
카이다 쿠로하: 읽어 줄까? 아쉽지만 너희가 원하는 내용은 아닐 거다.
카이다는 종이를 두 손으로 잡고 그곳에 적힌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이 유서를 누군가가 읽고 있다면 내 작전이 실패했다는 뜻이겠지. 아쉽게 되었어. 야가미에겐 미안하게 되었고. 반드시 빠져나가게 해 주고 싶었는데…"
야가미 토가: …….
"내가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알고 싶겠지. 정말 내가 말해주길 원한다면 그냥 스스로에게 물어봐. 내가 뭘 원했는지는 사실 너희들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하기와라 우시오: 짜고 친 거다. 이거구만.
나이토 유즈루: 짜고 쳤다니? 뭔 소리야. 야가미가 미도리카와 친구였고 야가미가 미도리카와를 죽였고…
하기와라 우시오: 그걸 짜고 친 거라고. 미도리카와는 야가미를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자기를 죽여달라고 요청한 거야.
"이제 난 곧 카이다 쿠로하에게 죽을 거야. 그녀를 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나였는데 여기에 갇혔으니. 카이다 쿠로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지. 그건 모노로그와 결탁했을 테고… 그러니 그녀에게 죽기보다는, 내 친구에게 죽고 싶어."
후루미나미 나몬: Aww. 정말 감동적이다.
야가미 토가: 조용히 하세요.
"아무도 큰 국면을 보려고 하지 않아. 카이다 쿠로하가 이 탑에 살아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려 하지 않아. 정말 그들이 중립이라는 이름의 위선을 계속 표방하겠다면 말리지 않을 거야. 말릴 수도 없고. 하지만 너흰 언젠가 후회하게 될 거야.
그때가 오면 너희 모두 알게 되겠지. 스스로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버틴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손에 피가 잔뜩 묻은 뒤에야 눈치채겠지."
유독 그 말에 얼굴이 창백해지는 두 사람이 있었다.
토키와 아유키: …….
캐롤 브라이트: …….
좋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이 둘이 초기에 대응하지 못했다며 분열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적어도 카나리와 모리라면 이들을 비난할 터였다.
"아마 이걸 처음 읽게 되는 건 너겠지. 야가미.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해. 정말로 미안. 하지만 살아남아 줘."
캐롤 브라이트: 말도 안 돼요. 설마 이런 일이…
카이다 쿠로하: 의외냐? 넌 터치를 받은 이후의 그 자식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그 자식이 진짜 원하는 걸 몰랐겠지!
카이다 쿠로하: 착한 척을 하고 자기가 아무 죄가 없는 양 선량하게 굴지만. 너흰 전부 똑같아. 나랑 저 고릴라를 나쁜 놈으로 규정하고 오늘 밤엔 미도리카와에게 명복이라도 빌겠지. 위선적인 것들!
나는 내 손에 묻어있는 책임을 느꼈다.
내 손에 미도리카와의 죽음이 묻어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그녀의 죽음에 영향을 미친 자들.
카이다 쿠로하: 그런 식으로 날 보지 마. 너희도 나와 똑같아. 그 또라이를 방에 쳐넣는 데에 열심이었던 자식들. 저 또라이가 죽는 걸 막지 못했던 자식들. 너희 전부 나와 똑같은 살인자라고. 알아?!
후루미나미 나몬: 푸핫!
후루미나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후루미나미 나몬: 아. 미안. 푸하하! 앗. 푸후… 풉. 아하하하!
카이다도 할 말을 잃은 듯 웃음을 참으려는 후루미나미를 지켜보았다.
카이다 쿠로하: 뭘 쪼개. 너 진짜 미쳤어?
후루미나미 나몬: 아니. 어떻게 해. 카이다… 심성 꼬인 네가 이루고 싶었던 게 고작 우리 사이의 분열이었어? 우리한테 죄책감 심는 거? 그게 다였단 말이야…?
후루미나미 나몬: 네가 그런 어쭙잖은 짓만 안 했어도 이건 내 추억으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고작 그런 옹졸하고 그릇 작은 꿈을 꿔서 일을 다 망치다니. 어쩌면 좋아. 너무 가엾어라.
후루미나미는 우는 소리를 내면서 눈물 한 방울 내지 않았다.
그녀는 주섬주섬 사냥모자를 벗은 뒤 그 안에 있는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종이는 너덜너덜하고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종이조각을 억지로 이어 붙인 것처럼 보였다.
이상하게도 카이다는 그 쪽지를 보자마자 눈을 부릅떴다.
카이다 쿠로하: …야. 너 그거 뭐야.
후루미나미 나몬: 뭐인 것 같아? 내 친구 카이다.
카이다의 반응이 심상치가 않았다. 저 쪽지는 카이다의 물건인가? 후루미나미의 기억을 보았을 때. 그녀가 수사 시간에 사라졌던 동안 카이다의 숙소를 조사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토대로 생각해 봤을 때. 저건…
카이다 쿠로하: 너 이 새끼. 당장 안 내놔?! 그건 내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너 좀 웃긴다. 너는 다른 사람 숙소 마구 헤집고 다니면서 자기가 당하는 건 못 참아? 우스워라. 그러니까 문단속 제대로 하고 다녔어야지.
후루미나미 나몬: 애초에 이게 왜 네 거야? 이미 죽었다지만 엄연히 주인이 있는 걸. 여러분. 저 가짜한테 속지 마세요! 이게 바로 미도리카와의 진짜 유서랍니다! 짜잔!
후루미나미의 사냥모자는 어느 새에 챙이 넓은 검은 색 모자로 바뀌어있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와! 마술사다!
후루미나미 나몬: 마술사가 아니야! 괴도 루팡이다! 프랑스의 대도! 셜록 홈즈와 괴도 루팡이 한 몸에 담겼다고! 박수! 빨리! 나한테 박수!
히무로 시라베: 정말 잘했어. 후루미나미!
후루미나미 나몬: 후후하하! 다들 봤지?! 이게 바로 나야! 내가 그 히무로의 입에서 칭찬을 이끌어냈단 말씀!
칭찬을 아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카이다의 숙소에서 미도리카와의 진짜 유서를 가져왔다면, 카이다의 의도를 차단할 수 있었다. 카이다의 날조가 드러난 시점에 우리들 사이의 분열 또한 무산되었다.
나이토 유즈루: 그럼 저건 뭐야!
칸나즈키 시노부: 가짜 유서였다는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 저건 가짜 유서야. 진짜는 바로 여기에 있지요. 카이다의 숙소에 갈가리 찢겨 있더라!
카이다가 증거를 인멸하지 않은 게 큰 다행이었다. 찢은 것도 인멸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후루미나미가 복구할 수 있었으니.
야가미 토가: 그럼 카이다 씨가 찾은 유서는 거짓말이겠군요.
모리 레이코: 안에 뭐라고 적혀 있지?
후루미나미 나몬: 그건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나중에 말해 줄게. 흰 물건에 대한 내용이거든. 이해해 줘.
카이다 쿠로하: 너희 정말 저 새끼 말을 믿냐? 이미 너흴 속인 자식 말을 또 믿겠다고?!
이바라 쿠리스: 너도 남 말할 처지가 아니잖아.
카이다 쿠로하: 내가 정말 미도리카와 새끼 유서를 없애지 않았다면 내 곁에 뒀겠지. 바보들이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럼… 나한테 줘. 카이다.
마유즈미가 카이다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 팔이 덜덜 떨렸지만 마유즈미는 뒷걸음치지 않았다.
카이다 쿠로하: 너 지금 뭐랬냐.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 나한테 주라고 말했어.
카이다 쿠로하: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너한테 줘?
카이다가 자신의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는 훌쩍 재판대를 넘으며 순식간에 마유즈미의 눈앞에 도달했다. 표범이 담장을 넘듯이 쉽고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 쿠로하.
마유즈미 나데시코: 괜찮아! 괜찮아…
재판이 끝났는데 언탄이 통할지 염려하던 도중 마유즈미가 내게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카이다가 허리를 굽히며 험악한 얼굴을 마유즈미에게 들이댈수록 더욱 괜찮지 않게 변했다.
카이다 쿠로하: 말해. 네가 뭘 할 수 있냐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글씨…! 난 사람 글씨를 구별할 수 있어…! 아무리 정교한 위조라도 밝혀낼 수 있어. 그러니까 정말 네 유서가 미도리카와의 것이라면 나한테 넘겨줘!
카이다 쿠로하: 내가 미쳤냐? 너도 히무로 놈이랑 한 편 먹고 다른 자식들 속였잖아. 너희들이 내 머리 위에서 놀려고 드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았냐. 쥐방울만 한 게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마유즈미는 점점 가까워지는 카이다의 얼굴에 눈을 질끈 감았다.
캐롤 브라이트: 카이다 씨. 마유즈미 씨에게서 떨어지세요. 협박은 당신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캐롤 브라이트: 제가 용서할 것 같나요? 저런 가짜로 우릴 속이시고… 저는 절대 용서 못 해요. 사람의 마음을 뭐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카이다 쿠로하: 이것들이 줄줄이 덤비네. 어쩌시게?!
내 손을 언탄으로 쏘아보았다. 언총과 언탄은 아직 잘 작동했다. 카이다에게 가장 잘 통할 만한 증거 6개를 떠올리던 도중 모노로그가 우리를 만류했다.
모노로그: 적당히 하지. 카이다 쿠로하.
모노로그가 몸을 살짝 좌우로 흔들었다. 모노로그의 몸을 머리로 치면, 마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 같았다.
마유즈미는 카이다가 꽉 붙잡고 있는 종이를 힐끔거렸다.
카이다 쿠로하: 뭐라는 거야. 왜?
모노로그: 실패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라. 너는 결국 실패했다. 그게 다다. 결과에 승복해라.
모노로그는 한숨을 쉬었고 카이다는 불길함과 짜증을 담은 얼굴로 모노로그를 쳐다보았다. 역시 카이다는 모노로그의 내통자였다.
모노로그: 선수도 빼앗기고, 요구한 일은 불가능하다며 거절해,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전혀 그것을 살리지 못하는 너는. 정말이지 쓸모가 없는 내통자다.
카이다 쿠로하: 입 안 닥쳐?! 애초에 네가 정보를 더 잘 제공했다면…!
마유즈미가 카이다의 종이를 향해 슬금슬금 손을 뻗었다. 마유즈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종이를 확 낚아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익!
카이다가 종이를 꽉 쥐고 있었기에 낚아챘다기보다는 일부분을 찢어낸 것에 가까웠다. 마유즈미는 그것을 손에 쥐자마자 눈으로 그것을 빠르게 훑었다.
카이다 쿠로하: 뭐야?! 이게! 당장 그거 이리 내!
카이다가 마유즈미의 어깨를 붙잡았다. 23T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에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못했다. 아마 더 해코지를 하려 들면 내 언탄보다 23T가 빨리. 23T보다 모노로그가 더 빨리 개입할 터였다.
마유즈미는 최대한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 글씨는… 사람을 해치기 위해 쓰였어. 그런 악의가 글씨에 마구 묻어있어…카이다. 이거 네가…
카이다 쿠로하: 날 얕보고 있어!
카이다가 팔을 크게 휘두르려는 찰나 모노로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울렸다.
모노로그: 그런 꼴을 당하고도 내 탓인가. 나는 네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했다. 탑에 없는 23T. 미도리카와의 현재 상태. 사용할 수 있는 도구 위치. 모든 것을 알려 주었는데도 고작 이거야.
토키와 아유키: 마유즈미. 좋아. 덕분에 카이다의 목표는 이루어지지 못했어.
모노로그: 모두를 분열시켜놓겠답시고 가짜 유서까지 준비했으면서 숙소를 비워. 진짜 유서를 빼앗겨…? 네가 그러고도 초고교급 첩자인가? 야가미 토가를 좀 본받는 건 어떻지?
카이다의 눈이 조금 커졌다.
카이다 쿠로하: 갑자기 뭐라는 거야.
모노로그: 진심으로 말하는 것이다. 야가미 토가를 본받도록 해. 이보다 유능한 자가 어디 있나. 재빠른 행동력. 판단력. 쓸만한 완력에 지능도 갖추었잖아.
이상해.
모노로그의 어투가 어딘가 이상했다. 위화감이 있었다. 평소에 모노로그는 우리에게 비꼬기를 좋아했다. 그렇지만 지금 모노로그의 발언들은 어딘가 위화감이 있었다.
야가미 토가: 모노로그 씨.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야가미마저 그렇게 말했다.
모노로그: 사실을 말할 뿐이다. 경주를 붙여 놓았는데 한쪽이 이겼다면, 진 쪽은 이긴 쪽을 본받아야 마땅하다.
히무로 시라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모노로그. 지금 마치…
의문이 실타래처럼 풀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왜 이 가능성을 더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내통자가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이 말을 한 장본인.
잘 되었습니다.
그가 절묘한 순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 모노로그가 바닥에서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의 대상이 우리가 아니었다면.
야가미 토가: 멈추세요. 이런 얘기는 사전에 없었잖습니까. 모노로그 씨!
모노로그: 너희들 모두에게 소개하지. 야가미 토가. 카이다 쿠로하. 이들이 나의 충실한 내통자들이다!
다음 화를 끝으로 더 단크 타워의 1챕터도 완결이 납니다
쓰다 보니까 재판 시스템이 너무 잡다하게 많아서 뇌절 같길래 빨리 끝냈는데 빨리 끝내니까 또 급전개라서 두 마리 토끼를 전부 잃었어요 아... ㅠㅠ
그래도 1챕터에 많은 내용을 욱여넣었던 만큼 1챕터의 반전이 충분히 즐겁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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