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가미는 의미심장한 말들을 늘어놓다가. 내 입장에선 더욱 의미심장한 말을 꺼내었다.
야가미 토가: 지금부터 여러분들께 어째서 캐롤 씨가 범인인지를. 확실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머리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들었지만.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금부터 / 여러분들께 / 어째서 / 캐롤 / 씨가 / 범인인지를 / 확실하게 / 말씀드리고자 / 합니다 / .
왜 느닷없이 캐롤 씨가 범인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야가미는 분명 명석한 사람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난 정말로 왜 야가미가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눈 앞의 야가미가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했더라도 아마 비슷한 기분을 느꼈으리라.
그 뒤 서서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실감이 왔다.
캐롤 씨가 범인인지를.
캐롤 씨가 범인이라고?!
더 단크 타워
챕터 1: < 죽여 마땅한 사람 둘 >
"과정은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책임은 사라지지 않으며 그것은 업보처럼 다가온다."
캐롤 브라이트: …야가미 씨. 지금… 뭐라고 하신 건가요?
캐롤 씨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나도 할 말을 찾지 못해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이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모리 레이코: 협상가는 네가 범인이라고 말했다.
캐롤 브라이트: 제가… 범인이라고요?
캐롤 씨가 재차 물었다.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이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야가미 토가: 그렇습니다.
나나시: 왜 갑자기 캐롤 씨를…
야가미 토가: 지금부터 당사자인 캐롤 씨를 포함해 토키와 씨. 마유즈미 씨. 나나시 씨는 반박을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야가미가 단칼에 내 말을 잘랐다.
토키와 아유키: 야가미. 너무 느닷없지 않아? 왜 네 명씩이나 발언을 막으려는 거야?
야가미 토가: 삼가 달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순간 눈치챘다. 야가미는 우리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친절하고 점잖은 어조로. 그는 우리에게 입을 다물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뻔뻔하다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그는 당당했다. 저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어. 나는 지레 입을 다물었다.
히무로 시라베: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야가미 토가: 제 말을 다 들으신다면. 제가 무엇을 고려하고 있는지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제 추리를 들어주세요.
후루미나미 나몬: The floor is yours.
야가미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야가미 토가: 제 가설은 이렇습니다. 마유즈미 씨와 토키와 씨의 증언. 1시 전에 살인이 일어났으며 2시 전에 2층 밖으로 나온 이가 없다는 증언들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뭐?!
후루미나미 나몬: 근거를 대 봐.
야가미 토가: 네 명이 함께 살인을 저질렀는데 근거가 있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히무로 시라베: 네 명?
나도 히무로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네 명? 무슨 네 명?
야가미 토가: 캐롤 씨를 필두로 한 토키와 씨. 마유즈미 씨. 나나시 씨가 그 네 명입니다.
야가미는 반박을 삼가라고 말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삼가기가 힘들었다.
왜 그가 우리를 압박하는지. 난 감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마유즈미도 안절부절못한 채 야가미와 다른 이들의 얼굴을 살폈고, 토키와는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캐롤 씨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지금까지 내가 본 바 없었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오래 본 것은 아니지만. 나는 캐롤 씨가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다는 걸 그제서야 처음 알았다.
캐롤 씨는 공황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무언가를 어떻게든 해야 했다. 이 오해를 풀어야 했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반박하는 것보다 그에게 반박할 거리를 미리 생각해두는 게 나을 거란 생각에. 나는 터져 나오려는 반박을 꾹꾹 눌러 참았다.
야가미 토가: 자. 범인은 어떻게 미도리카와 씨를 찌를 수 있었을까. 이것이 관건입니다. 그녀가 부르신 분들 혹은 캐롤 씨가 용의자에 오른 이유는, 그들이 미도리카와 씨의 방에 들어가더라도 그녀가 크게 경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가미 토가: 마취제나 제압 방법. 매우 불확실하죠. 그래서 미도리카와 씨가 반응하기 전에 찌른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고요. 그렇지만 저희가 무언가를 간과하고 있지 않습니까?
후루미나미 나몬: 그게 뭔지는 너희들도 알고 있겠지?
후루미나미가 윙크를 하며 다른 이들에게 손가락 총을 쏘아댔다. 야가미는 과녁에 대고 총을 쏘았다. 그러자 글자가 떠올랐다.
터치를 통한 마비.
야가미 토가: 손에 닿는 순간 아무런 움직임도 취할 수 없게 되는 터치라면. 사람을 마비시키는 것 또한 가능하겠죠.
나이토 유즈루: 어. 뭐야. 진짜야? 언탄을 쐈잖아?!
나이토가 놀란 것처럼. 나도 놀랐다.
언총은 지식을 정제하는 도구라고 모노로그는 말한 바 있었다. 야가미는 저 지식을 정제했다. 내가 기억을 정제한 것처럼.
그렇다면 야가미가 쏜 언총은 사실인 건가?
히무로 시라베: 미도리카와가 터치를 당하는 장면을 직접 본 거야?
히무로가 야가미에게 물었다.
야가미 토가: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정황 상 캐롤 씨의 터치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야가미의 대답에 히무로는 아무 말 없이 총을 쏘았다.
야가미와 카이다의 완력.
하기와라 우시오: 뭐야. 썅! 뭘 의미하는 것이지. 쟤들도 사건 관계자야?!
히무로 시라베: 아니. 아직은 몰라. 하지만 관계없는 정보를 상기시켜 너희에게 혼선을 주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히무로의 말이 맞아. 언총은 결국 도구에 불과해.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거짓을 만들어내려 한다면 거짓을 만들 수도 있을 테지. 쓰는 사람 나름이다. 이 말이야.
후루미나미 나몬: 도구는 그저 주인의 뜻에 따라 조종될 수밖에 없어.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도구에겐 영혼마저 없어.
나이토 유즈루: 대체 그렇게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가 뭐냐…? 급발진 진짜 괴상하네.
그래. 언총은 결국 지식을 정제해 쏠 수 있게 돕는 도구일 뿐이었다. 내가 무언가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분명 언탄으로 쏠 수도 있을 테지.
나는 허공에 떠오른 글자에 언총을 조준했다.
떠올릴 지식은…
터치의 작용이 만들어내는 소음.
나나시: 그건 틀렸어!
내 언탄을 맞자 글자가 산산조각 부서진 채 사라져 버렸다.
카이다 쿠로하: 허. 언총으로 저런 것도 돼?
모노로그: 사용하기 나름이다.
히무로 시라베: 논파(論破)…
야가미 토가: 나나시 씨. 반박은 삼가 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야가미가 혀를 작게 찼다.
나나시: 네가 내 반박을 막고 싶다는 이유가 네 추리에 기반한 거라면. 터치로 미도리카와를 마비시켰다는 네 추리는 틀렸으니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
모리 레이코: 이름 없는 남자. 협상가의 추리가 틀린 이유를 알아냈나?
나나시: 미도리카와가 받았던 터치. 다들 기억하고 있잖아. 미도리카와 한 사람을 제압하는 게 쉬웠어?
미도리카와는 그렇게 괴로워하고 비명을 질렀다. 소리 없이 죽인 이런 사건과는 전혀 달랐다. 강제적인 터치는 전기 충격기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까다롭고 파괴적인 무언가였다. 나만큼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모리 레이코: 그렇지 않았지. 끔찍한 비명과 이상현상이 뒤따랐다. 무엇보다 밀수업자는 상담가의 터치에 당해본 경험이 있다. 상담가가 자신에게 다가온다면 과연 순순히 마음을 열까?
모리 레이코: 그럴 리가 없다. 밀수업자는 어젯밤 상담가를 자신의 숙소에 부르지도 않았지.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다면 마음을 푹 놓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렵다.
야가미 토가: 생각보다는 논리적인 반박이군요. 나나시 씨. 무턱대고 캐롤 씨를 옹호하실 줄 알았는데. 다시 보았습니다.
나와 캐롤 씨가 한 편에 있다는 투다. 야가미는 두 손으로 작게 박수까지 쳤다. 그의 반대편에서 추궁을 당하는 입장에 서니 영 불안했다. 야가미는 똑똑하니 어떤 속내를 가지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야가미 토가: 그렇지만 그 반론을 압도하는 진실이 있습니다. 미도리카와 씨는 캐롤 씨에게 저항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번에는 비명조차 지르실 수 없었을 테죠.
나나시: 대체 왜…?
야가미 토가: 전 캐롤 씨가 터치의 힘을 숨기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카나리 씨?
야가미가 카나리를 부르자.
카나리 케이토: 어. 어? 왜!
야가미 토가: 수사 도중 세 분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카나리 케이토: 느꼈지. 그게 왜.
야가미 토가: 말해 주세요. 사건과 큰 관련이 있습니다.
카나리는 야가미의 말에 긴가민가하면서도, 기억을 차차 더듬어갔다.
카나리 케이토: 너희 모두 얘들이 미도리카와 시체를 제대로 보지도 못한 건 알지?
나이토 유즈루: 그게 왜? 야. 사람이 죽었는데 그걸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냐?
후루미나미 나몬: 어디 보자. 하나요. 둘이요. 셋이요. 넷…
후루미나미가 손가락을 한 개씩 접자 나이토가 말을 끊었다.
나이토 유즈루: 그래. 생각보다 많긴 하지만! 장난이 아니잖아! 제대로 못 보는 건 오히려 당연한 거야. 심지어 그렇게 끔찍하게 죽었는데…
이바라 쿠리스: 난 얘 말에 찬성.
카나리는 억울해 미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꽤 망가진 카나리였지만, 지금 그는 평소보다 더 억울하게 소리쳤다.
카나리 케이토: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내 말 좀 끝까지 들어 봐! 쟤들은 자기 때문에 미도리카와가 죽었다며 벌벌 떨었다니까?!
이바라 쿠리스: 자기가 살인에 연루되었다고 생각하면 죄책감을 가질 수도 있잖아.
카나리 케이토: 아! 그런 게 아니라고!
야가미 토가: 세 분은 사람이 죽은 걸 보고 싶지 않으셨던 게 아니라, 미도리카와 씨가 죽은 것을 보고 싶지 않으셨던 겁니다.
야가미가 말했다. 카나리도 말한 바 있었다. 야가미가 자신에게 저런 귀띔을 해주었노라고. 그러나 두 번째로 저 말을 들었음에도 나는 여전히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카이다 쿠로하: 저것들이 미도리카와 새끼랑 그렇게 친했냐?
야가미 토가: 글쎄요. 저희가 모르는 사이에 친목을 다지셨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보다 더 가능성이 높은 가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야가미 토가: 캐롤 씨의 터치를 받으신 분들이 그녀에게 정신을 지배당하게 된다는 가설입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말도 안 돼!
마유즈미가 소리치자마자 야가미의 목소리는 더욱 싸늘하게 식었다.
야가미 토가: 반응이 나오는군요.
토키와 아유키: 야가미. 그런 식으로 반론을 묵살하는 건…
야가미 토가: 네 명이서 한 마디씩 하면 재판의 흐름이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죠. 네 명이서 위증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차단하는 겁니다.
야가미는 노골적으로 토키와의 말을 끊었다.
토키와 아유키: 야가미. 네 가설은 틀렸어!
야가미 토가: 목소리가 커지시는군요. 절박하시기 때문인가요?
덫에 걸렸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야가미는 논리의 그물을 우리에게 던져 움직이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그는 캐롤 씨를 중심으로 다른 세 명을 묶고, 공범설을 주장함으로써 모든 반론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언성을 높이는 게 오히려 역효과였다. 언성을 높이는 것 외에 다른 수단이 없어 보임에도 그랬다.
카나리 케이토: 일단 조용히 얘기 좀 들어! 참을성 없는 놈들 같으니.
당장 살인자 취급을 받고 있고, 저 주장을 가만히 둘 수록 여론이 더 쏠리리란 것을 알고 있음에도 참을 수 있다면 난 죽어서 성인의 반열에 오를 군자겠지…
카나리의 말에 토키와는 눈가를 찌푸렸다. 온화하고 매사에 잘 넘어가던 그로는 보이지 않을 만한 불쾌감이 그의 얼굴에 담겨 있었다. 거울을 들여다보지는 않았지만, 내 얼굴에도 불쾌감이 가득하리란 것은 자명했다.
불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캐롤 씨와 나에게…
캐롤 씨…
…어?
야가미 토가: 터치의 힘은 실존합니다. 저희가 두 눈으로 보았죠. 문제는 터치의 힘이 저희들의 생각보다 훨씬 막강하다는 점에 있습니다.
모리 레이코: 과연 그런가…
모리가 중얼거렸다.
야가미 토가: 모리 씨도 저와 의견이 같으십니까?
모리 레이코: 경계한 바 있었다. 언젠가 터치로 이루어진 거대한 권력 구조가 생겨날지도 몰랐기에. 경고한 바 있었다.
모리 레이코: 지금 보니 내가 너무 늦었던 것 같군. 이미 우리 사이에 돌림병이 퍼져 있었다니.
캐롤 브라이트: 말도 안 돼요! 그런 건…
야가미 토가: 무엇이 말도 안 됩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세 분이 캐롤 씨와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설명할 방도가 없습니다. 명령이라도 받은 듯이요.
후루미나미 나몬: 캐붕 같은데.
후루미나미가 중얼거렸다.
야가미 토가: 후루미나미 씨.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후루미나미 나몬: 아니 그냥. 내가 지금까지 관찰한 바에 기초한 너에 대한 해석이 영 틀린 건가. 싶어서 말이야. 똑 부러지고 생각 많아 보이던 야가미 네가 정말 그런 주장을 하는 거야?
후루미나미가 야가미에게 묻는 동안. 나는 이상한 위화감에 대해 생각했다.
이 느낌은 대체 뭘까. 이 감정은 뭘까.
왜 난 나보다 캐롤 씨를 먼저 생각했을까.
나는 멈춰 있었으나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야가미는 말했다.
야가미 토가: 여러분들 중 누구도 이 사실을 지적하지 않은 게 놀랍군요. 알고 있음에도 굳이 치부를 들치지 않으시려는 분도 계시지만. 아무래도 목숨이 달린 상황인지라 이를 덮어놓고 넘어갈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야가미 토가: 터치를 받은 사람들이 전부 캐롤 씨에게 존댓말을 쓴다는 것이. 묘하지 않습니까?
마유즈미 나데시코: 해... 해치진 않을 거지? 아프게 잡지만 말아 줘...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 어. 네... 감사합니다. 마음이 갑자기 킹왕짱 편해지네요.
인지하지 못했던. 어쩌면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해왔던 것.
그러나 눈을 돌린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모든 사람이 달을 보지 않더라도 달이 항상 그곳에 있듯이. 진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현상과 증거는…
나: 터치...? 그게 뭔데? 또 나만 모르는 거야? 여긴 또 어디야. 당신은 또 누구야...
나나시: 맞아. 이름은 떠올리지 못했지만. 임시 이름을 하나 정했어요! 나나시예요. 이름이 없다는 뜻이지만.
…절대 사라지지 않으며, 그것을 인식한 뒤에야 한 폭의 그림으로 맞춰지며…
착시가 풀리듯이…
토키와 아유키: 캐롤 씨. 쉴 필요가 없으시다면 마유즈미를 찾아가 주세요. 히무로. 후루미나미. 마유즈미 이 세 명이 어디까지 미도리카와의 정보를 알고 있고 언제부터 숨겨 왔는지. 그런 것들을 물어 주세요.
나이토 유즈루: 생각해보니까… 그렇네?
캐롤 브라이트: 네. 알아요. 하지만 왜 여러분들은 터치를 받으신 뒤부터 제게 존댓말을 쓰시는 걸까요.
경험들이 하나로 모였다.
카나리 케이토: 저… 정말이잖아. 너희 셋 다. 항상 캐롤 씨 캐롤 씨 거리잖아…
카나리 케이토: 미친…! 온몸에 소름이 돋네! 너희 대체 뭐야! 너희 정체가 뭐냐고!
모리 레이코: 너희가 아니다. 물어야 할 대상은 따로 있다.
모리는 카나리의 호들갑을 끊고 나와 캐롤 씨를 가리켰다.
모리 레이코: 넌 대체 정체가 뭐지. 상담가? 그리고 터치라는 힘은 대체 정체가 무엇인가.
이건 아니야.
야가미 토가: 캐롤 씨 본인조차 터치를 받은 이들이 그녀에게 존댓말을 쓰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기 보다는, 단순히 연기를 하고 있다 보는 게 타당하겠죠.
야가미 토가: 그러니 추측해 볼까요? 캐롤 씨에게서 터치를 받은 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위계 질서에 포함시킨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채 캐롤 씨에게 복종하게 된다. 존댓말이 나오는 것은 주군을 위한 존중의 의미이다…
야가미 토가: 지금의 저로써는 그 정도의 생각밖에 들지 않는군요.
그건 틀렸어. 분명 틀렸을 거야.
왜 난 그렇게 확신하지?
언제부터?
캐롤 브라이트: 아니에요. 여러분!
난 왜 지금 캐롤 씨를 이다지도 걱정하고 있지?
마유즈미와 토키와의 표정을 보았다. 전부 혼란에 빠졌다. 왜? 캐롤 씨를 보고 있다. 왜?
캐롤 씨가 당황했기 때문인가? 그렇기에 그들도 당황한 건가? 나도 당황했다. 왜?
'그럴 리가 없어' 를 압도하는 '그럴지도 몰라'. 나는 캐롤 씨가 나를 지배하지 않았다는 논거를 찾으려 애썼다.
왜. 캐롤 씨를 위해 대신 반박을 해주기 위해서인가.
그만.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라고!
아니다. 아니에요. 터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쓰일 수 있어요.
부정적으로 쓰일 예정인 터치일지라도. 지금 이 터치를 부정하고 싶진 않아요.
난 터치를 나눴으니까. 그 안에서 거짓을 보지 않았어…
하지만 터치가 내게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었다면 내가 저항할 방도는…
하기와라 우시오: 근데 정신 지배가 되면 존댓말도 통제할 수 있을 텐데. 굳이 꼬투리를 줬을까? 정신 지배는 좀 오바 같다 야.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누구를 믿어야 하지?
야가미가 날 보고 말했다.
야가미 토가: 나나시 씨. 심정이 복잡하신 모양이군요. 이해합니다. 당신에겐 탑의 오기 전 기억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야가미 토가: 큰 혼란을 느끼셨겠죠. 그런 상황에서 터치를 받으니 개인이 캐롤 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웠을 것입니다.
나나시: 조용히 좀 해 봐… 지금 생각 중이잖아.
말에 날이 섰다.
그래서 정말 야가미의 주장이 맞는 건가? 캐롤 씨의 모든 터치. 모든 말이. 모든 순간들이 결국 거짓을 토대로 새운 것일 뿐이었나?
터치가 사람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다는 전제 앞에서 나의 믿음은 무력했다. 내가 캐롤 씨에게 가진 감정. 나누었던 대화. 헤쳐왔던 위기들. 모든 게 거짓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날 덮쳤다.
나나시: 캐롤 씨. 의심해서 죄송해요… 그렇지만 이 죄송한 감정조차 제 것이 아닐까 봐 너무 무서워요.
나나시: 정말… 터치로 사람을 지배할 수 있으세요?
모리 레이코: 이름 없는 남자. 지금은 상담가에게 물을 때가 아니다. 너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너는 자유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되찾아라.
조용히 해 봐. 지금 캐롤 씨한테 묻고 있잖아. 또 시작이지. 자유. 자유.
그게 그렇게 중요해? 다 죽게 생겼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무슨 자유란 말인가. 자유가…
그래. 모리야 명색이 철학자다. 시도 때도 안 가리고 어려운 상징물이나 비유를 들이대는 건 익숙했다. 자유의 가능성. 모리라면 그런 말을 할 법도 했다. 다른 사람을 재단하려는 모리라면 내게 그러고도 남았다.
그렇지만 야가미는? 야가미가 언제부터 이런 식이었지? 야가미가 이렇게 고압적인 대화 방식을 사용한 적이 있던가.
너무 생각이 많아. 조절해야 해. 날 되찾아야만…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그게 아니에요… 제가 가장 두려워한 게 그것이었어요. 저는 단 한 번도…
야가미 토가: 캐롤 씨. 이제 전부 끝난 것 같군요.
캐롤 씨 말 끊지 마. 네가 우리 말을 끊는다고 해서 네가 옳게 되는 게 아니라고. 지금 나한테 말씀하고 계시잖아.
히무로 시라베: 야가미. 스스로도 너무 성급히 결론을 내린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히무로가 야가미에게 물었다.
야가미 토가: 전혀요. 충분한 추론을 통한 결론이었습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렇지만 증거가 없었잖아. 우리가 그렇게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토키와 아유키: 넌 가설을 제시했을 뿐이야. 야가미. 우리의 의견을 묵살한다고 해서 네 가설이 진실로 받아들여지진 않아.
하지만 증거가 없다는 사실마저. 증거가 있을 리가 없다는 엉터리 주장으로 넘어가겠지.
카나리 케이토: 그냥 캐롤이랑 세 명 발언권 없애! 재판에 자꾸 물만 흐리잖아!
카나리가 꼭 한 마디를 더 얹었다. 다들 정말 이 말도 안 되는 가설을 믿는 거야…? 설마. 이대로 재판이 끝나지는 않을 테다.
하기와라 우시오: 야가미 말도 일리는 있는데 말이야. 증거가 너무 없지 않냐? 네 명이서 작전을 짰어도 설마 증거가 하나도 없었겠어.
카이다 쿠로하: 다른 방 조사하러 다닌 것들이 다 공범이잖아. 증거가 없을 만도 하지.
칸나즈키 시노부: 꼬마야. 너도 같이 들어갔잖아. 이상한 일 없었니?
칸나즈키가 묻자 카나리는 턱을 잡고 생각에 잠겼다.
카나리 케이토: 별로 그런 것 같진 않았는데…
야가미 토가: 제대로 보신 것 맞나요?
하기와라 우시오: 하필 카나리를 보내서 존나 미덥지가 못하다! 얘 분명 한눈팔았을 것 같아. 뭐 어떻게 해. 야가미 말 믿어? 말아?
나이토 유즈루: 일단 쟤들 말도 좀 들어봐야겠다. 그냥 야가미 말만 믿기엔 너무 찝찝해.
모리 레이코: 자신이 있나. 승부사? 지금부터 어떤 설득을 듣더라도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는 마녀와 그 수하 셋에게 흔들리지 않겠다고 자신할 수 있나?
나이토 유즈루: 자신이고 지랄이고 쟤들 말도 들어줘야지. 한쪽 말만 듣는 게 어디 있냐! 재판을 하랬더니 마녀사냥을 하고 있어!
모리 레이코: 언더도그마에 빠지지 마라. 스스로의 도덕성을 증명하고 싶다면 무턱대고 약자를 두둔하는 것 말고도 방법은 충분하다.
야가미 토가: 역시 한계가 보이는군요. 재판이 감정적으로 진행되리란 것을 경계해 반론을 막은 것인데…
몰렸어. 이대로라면 살인자 취급을 받고 그대로 몰살이야. 범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저 추리에 다 휘말릴지도 몰랐다.
최악의 가능성은. 내가 정말로 살인에 가담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정말 터치가 정신을 지배할 수 있다면 내가 조종받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난 정말 텅 빈 이가 될 테고,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되겠지.
나나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반론을 해야 해…? 내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무슨 증거가 있어. 증거가…
23T5U130: 네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돼.
재판 도중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던 23T가 말했다.
23T는 기계 손가락을 내 어깨에 얹었다. 금속의 차가움이 피부를 통해 전해졌다.
나나시: 23T?
23T5U130: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서는 안 돼. 그런 식으로는 이길 수 없어. 굳이 반론을 할 필요도 없어. 너도 남을 공격할 수 있어야 해. 남을 해칠 수 있어야 해.
23T5U130: 왜냐하면
23T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23T가 자신의 안면으로 손가락을 가져다 댄 뒤에야 나는 23T가 또다시 제한에 걸렸음을 눈치챘다.
23T가 내게 하려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멀리서 들려오는 딱딱한 발걸음 소리.
느닷없이 엄습하는 두통을 느꼈다.
왜. 왜. 갑자기 왜? 나는 머리를 잡고 신음했다. 마치 내 머리 안에 다른 생명체가 살고 있으며 그것이 내 뇌내를 헤집고 다니는 듯한 감각이었다.
나나시: 머리가…!
전두엽 부근에 전해져 오는 깨질듯한 격통에. 나는 숨을 거칠게 쉬었다. 대체 뭐야. 또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건가? 대체 뭘 떠올리려는 거야. 왜 난 기억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이렇게…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괜찮으신가요?
모리 레이코: 상담가. 조용히 해라. 그래. 이름 없는 남자. 저항해서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
나나시: 그런 거 아니야…!
23T. 넌 나에 대해 뭘 알고 있는 거야. 왜 갑자기 날 돕지.
의문이 의문을 이었다. 난 그 어떤 의문의 끝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그저 고통스러운 과정뿐이었다. 두통을 헤쳐 나가며 맥이 트이듯. 막혀 있던 댐이 뚫리듯. 고장 난 기계가 충격으로 인해 잠시 가동하듯. 나의 무언가가 떠올랐다.
경험이…
멀리서 들려오는 딱딱한 발걸음 소리.
발걸음 소리가 멈추고. 등 뒤에서 음성이 들렸다.
"얘기 다 들었어. 무슨 내기를 걸었다며?"
"벌써 들었어? 가십 퍼뜨리는 것 하나는 기막히네. 카텟 기관! 소식 다 들었으면 나 좀 도와줘. 설계 다 끝냈으니 이제 금속만 두드리면 돼. 우리 둘이 뭘 할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주자."
"우리라면 확실히 저 열 명을 이길 수도 있지만, 기관 사람들은 여전히 네가 옳지 않다고 여길 거야… 이런 내기는 좋지 않아."
"너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우리가 옳다는 건 증명할 필요가 없어. 저 자식들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면 우린 자동으로 옳은 쪽이 되는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해?"
"왜냐하면 저것들은 세상이 두 편으로 갈라져 있다고 믿거든. 옳은 쪽과 그른 쪽. 우리가 어느 쪽인지는 별로 안 중요해. 항상 저것들을 거꾸러트리면 우리는 항상 옳은 편일 거야."
어렴풋한 감각만을 남기고 떠오른 대화는 사라져 버렸다. 두통은 사라졌으나 나는 남았다. 이 불합리한 상황에 맞서야 하는 내가. 남았다.
내가 아무리 항변한다고 해도 그 행동은 캐롤 씨에게 꼭두각시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반신반의하고 있는 이들조차 내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었다. 정말 저 세 명이 캐롤에게 협력한 건가? 하는 시선. 미리 답을 다 정해둔 듯한 시선.
나는 다른 무엇들보다도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터치가 무엇이든, 야가미가 옳든, 내가 살인을 저질렀든, 상관없었다. 내가 힘겹게 만들어낸 인연들이 그런 식으로 치부되는 것이. 나는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범인이 아닌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그것을 알고 있는 한, 그것을 믿고 있는 한 내가 범인이 아닌 이유는 댈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건 상대를 거꾸러트리는 일뿐이었다.
결국 내가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캐롤 씨가 상처를 받으면 똑같이 상처 받을 내가.
강하지 못한 내가. 남의 아픔조차 감당하지 못할 만큼 약한 내가.
남에게 상처를 주지 못할 만큼 약한 내가.
나나시: 그럼 다들 이 결과로 하는 거지?
카이다 쿠로하: 뭐?
나나시: 지금 다들 캐롤 씨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거잖아.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지? 캐롤 씨가 터치의 정신 지배를 이용해 미도리카와를 살인했다. 이걸 정답으로 정한 거지?
모리 레이코: 공리의 바람이 네 심장 안에 분 건가. 이름 없는 남자?
나나시: 당장 투표해. 그러면. 캐롤 씨가 범인이라고 확신했다면. 지금 당장 투표해.
캐롤 씨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터치의 영향인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캐롤 씨를 본다면 난 분명 그녀를 걱정하고 말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남길 상처를 두고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캐롤 씨를 몰아붙이는 내 행동은 그저 연기로 보이겠지. 우와. 캐롤은 저런 대단한 연기도 시킬 수 있구나. 역시 정신 지배야. 바로 투표가 시작되겠지. 몇몇은 몰라도 나머지는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믿어 주세요. 저는 여러분을 조종하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나는 눈을 감고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나나시: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그 와중 다른 눈동자들은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카나리 케이토: 뭐야. 왜 그러는데 갑자기 또! 무섭잖아!
나이토 유즈루: 진짜 왜 저런다냐…?
이바라 쿠리스: 야. 나나시. 어디 아파?
히무로 시라베: ……
캐롤의 수하가 된 나나시가 캐롤을 향한 투표를 주장한다면. 정신 지배의 가설은 조금씩 흔들린다.
이제 야가미의 쪽에선 어떻게 나올까?
야가미 토가: …당신들. 설마. 진범을 캐롤 씨가 아니라 다른 분으로 둔 겁니까?
야가미는 잘 받아쳤다. 내가 캐롤 씨에게 투표를 종용하자 터치가 정신을 지배할 수 있다는 가설이 흔들릴 위기에 놓였으니, 애초부터 캐롤과 그 수하들은 캐롤을 검정으로 세워두지 않았다. 그래. 그런 전환도 가능했다.
나나시: 야가미. 그럴 리가 있어? 검정이 들켜서 죽는다면 또 몰라. 이번 재판에는 검정이 처형되지 않는데 왜 다른 사람을 검정으로 세워 두겠어.
나나시: 자칫 잘못해서 수하가 살아남고 주인님이 죽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잖아. 그건 네가 제일 잘 알지 않아?
카나리 케이토: 연기를 하고 있나 봐! 자기랑 캐롤이 관계가 없다고 연기를 하고 있는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손절을 했다 이거구만.
나나시: 야가미. 투표 안 해?
야가미 토가: 당신이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은. 당신에게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나나시: 결국 투표를 당장 할 수는 없다는 뜻이지? 그럼 나도 사건을 한 번 짚어 보자.
야가미 토가: 그렇게 두지 않을 겁니다. 재판에 혼선을 주게 두진 않습니다.
나나시: 그럼 이거 하나만 묻자. 다른 미도리카와의 친구라는 사람은 대체 우리 중 누구야?
과녁을 향해 언총을 쏘았다. 미도리카와의 친구.
후루미나미 나몬: 생각해보니 아직 그 얘기가 안 나왔군요. 다들 미도리카와가 네 사람을 왜 불렀는지도 모른 건가요. 그럼?
후루미나미가 점잖게 곰방대를 입에 문 뒤, 다음 순간 활발하게 소리쳤다.
후루미나미 나몬: 다 인생 절반 손해 봤네! 그럼 미도리카와의 드라마틱 스토리를 알지도 못하고 재판에 참여한 거잖아! 아아. 진짜 불쌍하다. 이게 비극이지. 이 재미있는 걸 놓치다니…
카이다 쿠로하: 미친년. 너한테는 그게 다 즐길 거리지.
칸나즈키 시노부: 걔한테 친구가 있어? 언제 사귀었는지가 너무 미스터리야. 분명 방에 틀어박혀 있었을 텐데…
캐롤 브라이트: 이 곳에서 친구가 되신 게 아니라 친구인 두 분이 함께 탑으로 납치되신 거예요.
야가미 토가: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건에 특정한 인물이 관계되어 있으리라 저희에게 혼동을 주려는 것일 뿐입니다.
캐롤 씨의 말에 야가미가 즉각 반응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해. 야가미의 태도는 어딘가… 이상했다.
나는 후루미나미의 말에서도 위화감을 느꼈다.
나나시: 미도리카와가 네 사람을 왜 불렀는지도 모른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 너희들은 아마 미도리카와가 네 사람을 왜 불렀을까? 모르겠는데 일단 부른 건 맞나 보다. 이런 느낌으로 재판에 임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네 명을 부른 데엔 이유가 있어.
후루미나미 나몬: 부르고 싶은 사람은 네 명 중에 있는 자신의 친구. 한 사람뿐. 나머지는 자신의 친구가 누구인지 모르도록 눈속임용 세 명을 같이 부른 거지. 인간 야바위를 한 셈이야.
나나시: 그렇다면… 캐롤 씨가 미도리카와를 찾아왔다고 해도. 미도리카와는 캐롤 씨를 돌려보내거나 경계했을 거야. 미도리카와의 목적이 친구고. 들어온 사람이 자신의 친구가 아니라면 터치파 중 누가 찾아오더라고 경계했겠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맞아…! 분명 그랬을 거야!
이 반론이면 충분할까?
야가미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입을 먼저 연 것은 모리였다.
모리 레이코: 벌써 잊은 것인가? 상기시키자면. 사실상 가장 오래 터치를 받은 자는 밀수업자다. 기절할 때까지 강제적인 터치를 받은 것. 다들 기억하지 않나?
야가미 토가: 미도리카와 씨를 지배하는 건 캐롤 씨에게 있어 쉬운 일이었을 겁니다. 그녀가 이미 터치에 오염된 상황이었으니 그 뒤에 네 분을 부른 것은 캐롤 씨의 명령이라고 봐야 합니다.
야가미 토가: 애초에 미도리카와 씨가 누구를 불렀는지 연락을 보내신 것도 캐롤 씨잖습니까. 이래도 미도리카와 씨의 친구 분이 정말 실존인물인 것 같습니까?
반박이 실패했다. 저 논리 앞에서는 모든 게 다 허사에 불과했다. 정말 부조리했다. 논리에 허점이라도 생기면 캐롤 씨가 우리를 지배했다는 가설로 퉁치고 넘어가다니.
몇몇이 미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가미의 주장이 약간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받은 듯이 보였지만. 아직 턱 없이 부족했다. 나에게 '캐롤에게 지배당했을 가능성이 있음' 이라는 낙인이 붙은 이상. 내 말에는 충분한 신빙성이 깃들지 못했다.
히무로 시라베: 그 사람은 실제로 있어. 내가 미도리카와의 전용실에서 들은 게 있거든. 후루미나미도 같이 들었으니 위증의 염려는 마.
모리 레이코: 정말인가?
히무로 시라베: 우리가 미도리카와의 정체를 무쿠치로 위조했을 때. 미도리카와는 '그 자식' 이라는 사람을 언급했어. 미도리카와의 친구라고 생각하면 앞뒤가 맞아.
후루미나미 나몬: 나도 서로 쏴재끼기 전 같이 들었어. 걔가 우리 중 있다는 건 확실해. 마유즈미도 알고 캐롤도 알지만. 뭐. 지금 상황에서 둘의 증언은 못 믿으시겠지?
후루미나미 나몬: 설마 우리 둘도 터치에 오염된 거라고 주장하진 않으리란 믿어. 후후.
야가미 토가: 그런 주장은 하지 않습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군요…
나이토 유즈루: 그럼 대충… 미도리카와의 친구가 있다고 결정이 난 거구나.
모노로그: 사건의 핵심 인물이 있군.
모노로그가 입을 열었다. 이젠 모노로그야?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모노로그: 그 사람에게서 진실을 듣는 것이 재판의 흐름을 좌우할 테지. 제삼자의 반론 없이 이뤄지는 취조와 재판의 공방은 무척이나 상이하다.
야가미 토가: 모노로그 씨.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모노로그: 지금이야말로 최적의 시기란 뜻이다.
모노로그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입 안에서 알사탕 같은 걸 굴리는 듯이. 혹은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이 모노로그는 입술을 움직였다. 굉장히 사람과 닮아 있어서 불쾌함마저 느꼈다.
기계면서 꼭 진짜 사람 같단 말이야.
모노로그가 무언가를 퉤 내뱉었다. 얇은 종이. 혹은 카드였다. 모노로그가 뱉은 카드는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다가 나이토의 손에 턱 하고 잡혔다.
나이토 유즈루: 조심 좀 해라. 위험하잖아! 이건 또 뭐야. '취조실로 가시오' ?
나이토가 다른 이들에게 카드의 내용을 말했다. 간단하게 그려진 모노로그가 호루라기를 물고 있는 그림이 있었고, 그림 밑에는 '취조실로 가시오' 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취조실…?
하기와라 우시오: 뭐야. 모노폴리야? 어?! 모노로그! 모노폴리! 둘이 사촌지간이었어!
이바라 쿠리스: 조용.
하기와라 우시오: 넵.
모노로그: 지명권이다. 조사관 역할로 한 명. 혐의자 역할로 한 명을 정한다. 조사관은 다수결로. 혐의자는 조사관의 지명으로 정해진다. 두 명이 정해지면 그들은 별개의 공간으로 이동된다.
모노로그: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학급취조' 라고 부른다.
히무로 시라베: 학급취조라…
후루미나미 나몬: 아. 진실의 방?
아. 큰일 났다. 하필 지금…? 캐롤 씨가 범인이 아닌 이유를 막 제시한 참인데. 이 상태에서 저런 물건이 나오면 십중팔구 캐롤 씨가 혐의자로 지명될 텐데…!
캐롤 씨는 여전히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저런 상태에서 취조실로 끌려가시면 분명 좋지 못한 결과가 나온다.
이 위기를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해?
야가미 토가: 지금 저희에게 가장 절실한 물건이군요. 여러분. 제게 조사관의 역할을 주세요.
야가미 토가: 취조실 안에서 모든 모순을 파헤치겠습니다.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후루미나미 나몬: 전적으로 못 믿겠어. 너무 편파 수사를 할 것 같아.
다른 이들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모리가 오려나…?
모리 레이코: 그럼 내게 조사관의 역할을 주어라. 모노로그. 취조 도중 육체적인 충돌이 허용되나?
그럼 그렇지…!
나이토 유즈루: 일단 얘는 절대 보내지 마! 얘가 갈 바에는 차라리 내가 간다!
하기와라 우시오: 모리 보낼 일 없으니까 나이토도 절대 보내면 안 돼. 차라리 날 시켜! 두뇌 풀가동 해 줄게!
토키와 아유키: 얘들아. 잠깐 조용히! 그만! 이렇게 싸우다간 끝이 없어!
토키와가 어지러운 상황을 수습했다.
카나리 케이토: 뭐. 네가 하려고?!
토키와 아유키: 능력이 충분하다면 내가 하고 싶지만. 이 재판에서 내가 공범으로 의심받고 있는 이상 내가 할 순 없어. 나 말고 다른 적임자가 있다면 더욱 그래.
후루미나미 나몬: 역시 토키와 경감은 보는 눈이 있단 말이야.
토키와 아유키: 경감…? 아무튼. 우리가 수사관 역할을 줘야 할 사람은 따로 있어. 바로…
후루미나미 나몬: 나야!
토키와 아유키: 히무로야.
히무로 시라베: 내가 하면 안 될까?
세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후루미나미는 히무로를 향해 고개를 홱 돌리고 말을 쏟아냈다.
후루미나미 나몬: 히무로! 이건 아무리 너라도 절대 양보 안 해 줘. 내가 제일 먼저 수사관에 침 발라 놨어. 내꺼 찜!
히무로 시라베: 기분 나쁜 비유 좀 그만 써.
후루미나미 나몬: Oh! Dare you! 너 지금 무슨 상상 한 거야?! 세상에나. 응큼한 놈 같으니! 보는 사람들도 많은데 주책이야 정마알.
토키와는 난처한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토키와 아유키: 하아… 우리 중에서 히무로만큼 취조에 대해 전문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히무로는 사건을 중립적으로 바라보기도 하니까 조사관은 히무로로 하자. 어때.
하기와라 우시오: 내가 듣기엔 되게 좋은 판단 같은데. 가즈아! 설마 토키와가 저런 말했다고 히무로도 캐롤 편이라 묶는 음모론자 없재?
카나리 케이토: 괜찮을지도 모르겠는데…
나이토 유즈루: 히무로면 어련히 잘하겠지. 여기. 히무로한테 전해 줘.
나이토가 히무로의 쪽으로 지명권을 돌렸다.
모리 레이코: 투표는 어떻게 하지? 총을 이용하나?
모노로그: 손을 들어라. 히무로 시라베가 조사관이 되는 데에 찬성하는 사람이 있나?
카이다와 히무로 본인을 제외한 전원이 손을 들었다.
모노로그: 그렇다면 조사관은 히무로 시라베다.
하기와라 우시오: 뭐야. 존나 김 빠지네. 무슨 반장 선거야? 그래서 '학급'재판이었던 거구나!
히무로 시라베: 혐의자는 내 재량대로 지명할 수 있는 거지. 모노로그?
히무로가 지명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모노로그: 그렇다.
히무로 시라베: 그럼 난 야가미 토가를 지목하겠어.
정적이 있었다.
카나리 케이토: 뭐야?! 뭐 해! 제정신이야?!
모리 레이코: 상담가가 아니라 협상가를 지목하다니. 둘의 이름을 헷갈리기라도 한 건 아닐 텐데.
나로서도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캐롤 씨가 범인이 아니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히무로의 선택에는 의문을 느꼈다. 야가미?
야가미를? 갑자기?
야가미 토가: 왜 저를 지목하신 겁니까? 히무로 씨. 지금은 심문해야 할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히무로 시라베: 아니. 너야. 이렇게 지명만 하면 되겠지?
모노로그: 그래. 지명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
히무로의 손안에 있던 지명권이 사르르 불타 사라졌다.
야가미 토가: 어떻게 이런 실수를…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에게 심문의 기회를 허비하셔선 안 된단 말입니다.
야가미 토가: 취소하세요.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빨리 캐롤 씨를…
모노로그: 미안하지만 엎지른 물을 다시 담기는 어려울 것 같군. 본인에게 그럴 뜻도 없어 보이고 말이지.
모노로그의 빨간 눈이 더욱 빨갛게 빛났다. 모노로그가 내는 음성이 커졌다. 우리를 비추는 빨간 섬광은 마치 구급차의 사이렌 같았다.
빨간 섬광은 그저 모노로그의 눈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재판장의 조명이 통째로 붉은빛을 냈다. 사이렌 소리마저 들렸다.
모노로그: 프로파일러. 히무로 시라베는 초고교급 협상가 야가미 토가를 취조 대상으로 지목했다. 지금부터 학급취조가 시작된다.
모노로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히무로와 야가미가 사라졌다.
마치 밑에 경첩이 달려 있던 것처럼. 그들이 밑으로 푹 하고 꺼져 버렸다.
모두가 반응하기도 전에. 둘은 우리의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 히무로?! 히무로!
마유즈미가 사라진 히무로의 자리에 다가가. 그가 딛고 있던 바닥을 주먹으로 콩콩 두드렸다.
하기와라 우시오: 뭐야 이거?! 이세카이 전생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아니야! 토끼 굴이야!
후루미나미가 토끼 머리띠를 썼다. 저럴 때가 아닐 텐데!
토키와 아유키: 별개의 공간으로 보낸다는 게 이런 거였어. 모노로그?!
모노로그: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사건의 결정적 증거를 찾는 것은 두 명에게 달렸다.
카나리 케이토: 캐롤을 데려갔으면 다 끝난 건데! 왜 야가미를 데려간 거래?!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를 믿어 보자. 다 생각이 있을 거야.
마유즈미가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약간의 확신을 얻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이토 유즈루: 왜 야가미를 불러 갔는지는 모르겠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가 알 도리는 없어?
모노로그: 없다. 취조실과 재판장은 완전히 분리되어있는 공간이다.
이바라 쿠리스: 그럼 여기서 두 사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거구나…
카이다 쿠로하: 그렇게 쉽게 마음을 먹을 때냐? 헛똑똑이를 믿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그 자식이 안에서 떡대랑 무슨 작전이라도 세워 오면 어쩌려고 그러시나.
마유즈미 나데시코: 믿을 사람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래.
믿을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나를 믿지 못한다.
카이다는 마유즈미의 대답에 코웃음 쳤다.
카이다 쿠로하: 뇌 빈 소리 하고 있네. 그 둘이 갑자기 한 편 먹으면 어떻게 할지나 걱정하고 있어라.
후루미나미 나몬: 후후후… 드디어 시작됐어.
후루미나미가 웃으며 곰방대를 태웠다.
토키와 아유키: 뭐가 시작되었다는 거야. 후루미나미?
후루미나미가 속내를 알 수 없게 웃었다. 토키와의 걱정 섞인 물음에 그녀는 답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히무로와 나 사이의 사실상 간접 키스가.
카이다 쿠로하: 무슨 개소리야. 이거 완전 미친년 아니야?
칸나즈키는 아무 말 없이 후루미나미에게서 세 발자국 멀어졌다.
쌔하게 빌드업하던 터치파 떡밥이 조금 회수되었습니다
나나시는 옳은 판단을 한 걸까요?
나나시 감정선이 너무 급발진인데 솔직히 말해서 주연들의 관계성은 큰 틀로밖에 안 짜 놔서 1챕터에 어느 정도까지 진행을 시켜야 할지 감을 전혀 못 잡았음 그냥 되는 대로 썼습니다 쓰다 보니 이미 짜 놓은 것도 다 뜯어고쳐야 될 것 같음 이게 뭐고?
안일하게 시작한 결과가 쓰게 돌아오네요
일단 기말고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올리고 나중에 최대한 수습해보겠습니다
'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 > 챕터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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