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무로는 세 명의 유력 용의자를 지목했다.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 쿠로하. 야가미 토가.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 셋에 가장 주목하는 게 어떨까?
야가미 토가: 미도리카와 씨의 숙소와 밀접해 있으니까요?
토키와 아유키: 확실히 일리가 있어.
캐롤 브라이트: 그렇지만 두 분이 왜 미도리카와 씨를 죽이겠어요?
토키와 아유키: 지금은 동기가 아니라 가능성에 대해 따져 봐야 해요.
나나시: 가능성에 대해 따진다면 마유즈미가 어떻게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겠어? 손이 묶여 있었잖아.
야가미 토가: 밧줄로 손이 묶인 것에 대해 말하자면. 히무로 씨도 밧줄을 스스로 풀었습니다. 그녀가 못할 것도 없지 않을까요?
히무로 시라베: 나는 침대에 밧줄을 갈아 느슨하게 만든 뒤 완력으로 풀었어. 마유즈미가 따라 하는 데에는 문제가 따르고 무엇보다, 시체 발견 당시 마유즈미는 계속 밧줄에 묶여 있었어.
아무리 보아도 히무로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히무로 시라베: 그러려면 여분의 밧줄이 필요할 거야.
야가미 토가: 다시 묶는 것은 다른 문제이지만 사전에 밧줄을 준비해 뒀고 스스로 묶었다면 이야기는 다르죠.
캐롤 브라이트: 마유즈미 씨가 그렇게 하셨다고요?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가 그렇게 했으니 다른 이가 못할 일도 없지.
토키와 아유키: 희박해도 가능성 중 하나죠. 야가미. 마유즈미. 숙소의 열쇠를 줘. 가능하다면 전용실의 것도.
마유즈미 나데시코: 알겠어.
마유즈미는 순순히 토키와에게 모든 열쇠를 건넸고, 야가미도 그렇게 했다.
야가미 토가: 그런데 마유즈미 씨가 마유즈미 씨의 방을 조사하셔도 될까요? 만약 눈치를 보다가 증거를 교묘히 감춘다면. 더없이 치밀한 은폐가 될 텐데요.
나나시: 나랑 토키와가 잘 살피면 돼. 마유즈미가 범인이라고 정해진 것도 아니니까…
야가미 토가: 그래도 세 분만 보낼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한 분이 더 필요합니다.
토키와 아유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카이다를 포함해서 이미 네 명이 수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지금은 현장 수사에…
야가미 토가: 아뇨. 무조건 한 명이 더 필요합니다. 자세한 이유는 재판에서 말하겠습니다. 우선 제 말을 들어주세요.
야가미는 완강하게 주장했다.
야가미 토가: 아무도 따라가지 않겠다면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히무로 시라베: 용의자가 증거를 감출 가능성은 네게도 있어. 야가미.
토키와 아유키: 지금은 사람을 더 쓰기 어려워. 당장 수사를 해야 하니까 우리 셋만 가는 게 가장 효율적이야.
야가미 토가: 아. 그래요?
야가미가 아무 말 없이 미도리카와의 숙소 문을 벌컥 열었다. 아. 잠깐! 그렇게 갑자기 열면…
미도리카와의 시체가 보였다.
이젠 매달려있지 않은. 그럼에도 여전히 창백한. 바닥에 피를 흩뿌린. 미도리카와의 죽은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다시금 어지러움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가렸다. 보고 있기조차 어려웠다. 언뜻 보인 캐롤 씨도 분명 괴로워하시는 눈치였다. 나도 그녀만큼 괴로웠다. 죽음을 앞에 두고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기억은 잊어도 지식은 잊지 않았기에. 그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것이 죽음이다.
당당하게 살아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싸늘하게 식어 버리는 것.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것. 잊히는 것. 잃어버리는 것.
자신의 일부가 영영 사라지는 것.
또다. 또다시 두통이었다.
무언가를 기억해내려 할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두통. 결정적인 것을 떠올리려는 순간마다 이 두통이 나를 붙들었다. 지옥문을 막고 있는 수문장처럼.
기억을 헤집으려 노력할수록 조개를 채집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조개의 숨구멍을 찾아 내고 모래와 뻘을 파 내어도 조개가 그 안을 파고드는 속도가 더 빠르듯. 그 뒤를 쫓으려 할 수록 내 손은 더러워지고 숨구멍은 자취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졌다.
지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은 것들 뿐이었다. 떠올리는 것들조차 내게 속해 있다고는 생각이 되지 않았다. 내 뇌 속에는 뉴런들이 떠 다니지만, 그들을 연결하는 시냅스가 전부 끊어진다면 그것을 기억할 수 없듯이.
우연히 시냅스가 이어지지 않으면. 기억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식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생각날 때 나타나고, 계기가 없으면 내 안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나나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움직여야 한다. 도움이 되어야 한다.
언제까지나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선 안 돼…
야가미 토가: 역시 세 분은 미도리카와 씨의 죽음이 괴로우신 모양이죠?
야가미가 무정한 눈빛으로 우리를 보았다. 이건 내 기분 탓일 가능성이 컸지만, 그 눈빛은 무정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히 계산되고 억눌러진 의심이었다. 당장 돋보기를 꺼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의심의 눈초리였다.
야가미의 눈동자 움직임을 뒤쫓아, 그가 주시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보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으으…
마유즈미.
토키와 아유키: 사람이 죽었는데 괴롭지 않을 순 없어. 더 시간낭비를 하게 둘 셈이야?
토키와.
그리고 야가미는 나를 보았다.
잠깐. 나…? 내가 왜?
야가미 토가: 저도 이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의심의 적중한다면 벌어질 일이 너무나 두렵군요. 여러분들. 이 세 분을 보내는 게 맞는 판단이라고 보십니까?
야가미가 미도리카와의 숙소 안 모두에게 물었다.
나이토 유즈루: 무슨 소리야?
카나리 케이토: 저 놈 되게 툴툴거리네. 저 셋을 보내는 게 왜 문제가 되는데?
야가미 토가: 제발. 논쟁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선 제 말을 들으세요.
칸나즈키 시노부: 그렇다면 똑딱몬. 너로 정했다!
칸나즈키가 카나리의 등을 떠밀었다. 발을 땅에 질질 끌며 밀려나간 카나리는 몸을 버둥거렸으나, 칸나즈키의 완력에 저항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카나리 케이토: 야! 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칸나즈키 시노부: 화내지 마. 꼭 한 명이 가야 한다잖아. 그냥 신경전 말고 빨리 끝내자! 그럼 다녀오너라!
칸나즈키는 카나리를 숙소 밖으로 내보내자마자 문을 쾅 닫았다. 카나리가 화를 버럭버럭 내며 문을 발로 찼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카나리의 화만 거세질 뿐이었다.
카나리 케이토: 이거 열어! 안 열어?! 갑자기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야가미 토가: 잘 되었군요. 카나리 씨. 세 분을 따라가 주세요.
카나리 케이토: 야. 누구 마음대로 명령질이야! 자기들끼리 멋대로 결정해놓고 부탁하는 태도도 안 보이네? 너희 나한테 뭐 맡겨 놧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렇게 싫어하는데 굳이 데려가야 할까…?
마유즈미의 말에 잠자코 카나리를 지켜보던 히무로가 입을 열었다.
히무로 시라베: 카나리. 급박한 상황이기에 네 도움이 절실해.
카나리 케이토: 어쩌라고?
히무로 시라베: 네가 세 명과 동행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할 거야.
카나리 케이토: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네 마음대로 움직이진 않아!
야가미가 히무로를 거들었다.
야가미 토가: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카나리 씨를 비난할 순 없습니다. 친하지 않은 세 분과 함께 움직이시는 건 역시 거북하시겠죠.
나나시: 야가미. 굳이 그렇게 말할 필요가…
내 말은 뒤를 이은 야가미의 말에 그대로 막히고 말았다.
야가미 토가: 무엇보다. 세 분이 카나리 씨를 제압하려 드신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카나리 케이토: 뭐?
토키와 아유키: 우리가 카나리를 제압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캐롤 브라이트: 세 분이 왜 카나리 씨를 그렇게 하겠어요?
야가미 토가: 가능성입니다. 모리 씨가 감시역으로 세 분을 요구했던 것과 같습니다. 세 분은 친밀하시니 만약 세 분이 카나리 씨를 제압하려 드신다면 그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죠. 무서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수치스러운 일은 더더욱 아니고요.
야가미 토가: 그럼 칸나즈키 씨를 설득해 봅시다.
카나리 케이토: 뭐?! 나랑 걔랑 어디가 그렇게 다른데!
히무로 시라베: 칸나즈키는 완력이 세니까. 어떤 위험에도 대항할 수 있겠지. 야가미의 말이 맞아. 지금이라도 문을 열어 칸나즈키를 설득해 보자.
우와. 호흡이 척척 맞네…
카나리 케이토: 뭣… 그 자식이 할 수 있는 거면 나도 할 수 있어!
히무로 시라베: 무리할 필요 없어. 카나리.
카나리 케이토: 무리가 아니야. 이 자식들이! 좋아. 내가 간다! 무조건 내가 갈 거야. 무조건!
자존심을 세운 것에 비하면. 영 쉬웠다…
야가미 토가: 큰 용기를 내셨군요. 카나리 씨. 그럼 귀를 잠시 빌려 주시죠.
야가미는 카나리의 의사도 듣지 않은 채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이거 놓으라며 발을 동동 구르던 카나리는 야가미의 속삭임을 듣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카나리 케이토: 뭐라는 거야? 알 수 없는 소리만 하고. 짜증 나!
카나리는 회중시계와 손목시계를 번갈아 보며 회중시계를 조정했다. 아무리 보아도 화를 다스리는 기묘한 방법이었다.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짜증을 내던 카나리는 한숨을 쉬며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카나리는 또다시 짜증을 내었다.
카나리 케이토: 왜 가만히 있어. 방 뒤지러 안 가게?
나나시: 아니… 가야지!
토키와 아유키: 그래. 가자. 마유즈미의 방을 먼저 찾아보자.
마유즈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나리를 필두로 우리는 마유즈미의 방으로 향했다.
더 단크 타워
챕터 1: < 죽여 마땅한 사람 둘 >
"과정은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책임은 사라지지 않으며 그것은 업보처럼 다가온다."
마유즈미의 숙소는 미도리카와의 숙소에서 그렇게 멀지 않았다. 그렇게 멀지 않다기보단, 바로 옆에 있었다. 야가미의 숙소 또한 미도리카와의 것과 맞닿아 있었다.
정말 이 두 명과 카이다 중에서 범인이 있을까? 만약 정말 마유즈미가 범인이라면 나는 지금 살인자와 함께 있는 셈인데…
안 될 생각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과민한 생각들을 잊어버리려 애썼다.
토키와가 문을 열고 우리는 마유즈미의 숙소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마자, 우리들은 예상치 못한 장면을 보았다.
카나리 케이토: 뭐야. 증거를 다 없애 놨잖아?!
카나리의 말대로 증거를 없앤 것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마유즈미의 방은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게 깨끗했다. 주변이 전부 청소되어 있기보다는 애초부터 사람이 산 적이 없는 방 같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증거 없앤 거 아니야! 그냥… 치워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조심조심 행동한 거야…
원래 마유즈미에게는 치워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건가? 부잣집 아가씨 같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토키와 아유키: 그래도 조사를 안 할 수는 없어. 어떤 흔적이 있는지 찾아보자.
토키와가 침착하게 할 일을 지시했다. 침대 밑과 창틀의 흔적 등. 깨끗한 방 안임에도 조사할 것들이 많았다.
나나시: 창틀에 흔적이 나 있어…
미도리카와의 숙소로 향하는 방향 창틀에. 쇠로 긁은 듯한 흠집이 나 있었다.
마유즈미 숙소의 창살 흠집을 다이얼로그로 찍어 기억했다.
카나리 케이토: 아하! 여기로 건너갔구만!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니야! 나도 이런 게 왜 있는지 몰라…!
토키와 아유키: 카나리. 섣불리 의심은 하지 말자. 어차피 학급재판에서 다 밝히게 될 테니 지금은 조사에 집중해.
카나리 케이토: 그래. 너 잘났어. 아주!
카나리는 퉁명스레 대답하고는 조사를 계속하는 시늉을 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정말이야. 난 이런 거 몰라… 난 미도리카와한테 전화를 걸고 나서 바로 잤단 말이야.
나나시: 전화를 걸었다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응. 미도리카와 얼굴을 보고 얘기하기는 무서워서 전화로 하려 했어… 그런데 미도리카와는 전화를 안 받았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때 낌새를 눈치채고 미도리카와 숙소 문이라도 두드렸다면 어떻게 될지 몰랐는데… 나 때문에.
카나리 케이토: 또 그 얘기야?
나나시: 잠깐. 난 처음 들어. 내가 기절한 것 때문이구나. 그보다 몇 시에 전화를 걸었는데?
마유즈미 나데시코: 새벽 1시 정도…?
새벽 1시의 전화를 기억했다.
만약 미도리카와가 죽어 있어서 전화를 받지 못했다면. 새벽 한 시에 전화가 오기 전부터 미도리카와는 이미 죽어 있었던 건가?
토키와 아유키: 계속 너 자신을 탓하진 마. 마유즈미.
카나리 케이토: 애초에. 왜 계속 탓하는 거야? 걔가 뭐라고?
나나시: 뭐라니! 카나리. 그게 무슨 말이야?
카나리 케이토: 뭐야. 왜 그래? 너희 좀 이상해. 진심으로 이상하다고. 왜 미도리카와 놈이 죽은 거에 그렇게 충격을 받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떻게 충격을 안 받아…? 미도리카와가 저렇게 됐는데…
카나리 케이토: 진짜 이해가 안 가네!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게 제일 이상하다니까. 너희 대체 뭐가 문제냐? 지금 아무런 이상함을 못 느끼고 있는 거야?
카나리는 별종을 보듯이 우리를 보았다. 그의 회중시계를 살짝 보니 초침이 살짝 빨라졌다. 화가 난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우리를 물끄러미 보았다.
긴장한 건가? 왜?
카나리 케이토: 소름 끼쳐. 너희가 미도리카와를 언제 봤다고 걔를 감싸고도냔 말이야.
토키와 아유키: 우리가 미도리카와를 감싼다고?
카나리 케이토: 그래! 지금 니들 꼴 보니까 떡대 놈이 나한테 했던 말이 생각난다. 뭐라고 했는지 알아?
야가미 토가: 저분들은 사람이 죽은 걸 보고 싶지 않은 게 아닙니다. 미도리카와 씨가 죽은 것을 보고 싶지 않은 겁니다.
카나리 케이토: 이렇게 말했어!
카나리의 말을 듣고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나나시: 야가미가 그렇게 말했다고…?
카나리 케이토: 그래. 그리고 그 말이 딱 맞네! 너희를 봐. 그냥 잔인하다. 무섭다. 이런 게 아니라 자기 가족이 당한 것 마냥 걔 시체를 제대로 보지도 못 했잖아. 얘는 자기 탓만 엄청나게 하고 있고!
카나리 케이토: 스톡홀름인지 뭔지. 아무튼 그게 걸리기라도 했냐? 총기 가지고 소동을 벌인 놈을 왜 그렇게 아껴주냔 말이야. 난 그놈 때문에 무서워서 밤에 잠도 못 잤는… 크흠!
카나리가 헛기침을 하며 말끝을 흐렸다. 무심코 본심이 나왔구나…
토키와 아유키: 총기로 소동을 벌였어도 함께 탑에 갇힌 동료였잖아. 미도리카와는 우릴 동료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카나리 케이토: 넌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 하지만 그놈은 그렇게 생각 안 했을 걸? 그렇게 생각했다면 날 입막음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카나리 케이토: 아. 그놈에 대해 말하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죽었어. 개자식 같으니…
카나리의 의혹은 의혹으로 치부하고. 나는 다른 곳으로 발을 디뎠다. 화장실.
화장실에 별다른 것이 있나 싶겠냐만. 화장실의 찬장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그것을 열려 하자…
마유즈미 나데시코: 앗. 안 돼! 거긴…!
마유즈미의 다급한 목소리에 나는 얼어붙었다.
카나리 케이토: 뭐야?! 뭘 찾았어!
카나리가 와다다 욕실로 달려왔다. 토키와도 마찬가지였다. 마유즈미는 무심코 그렇게 소리쳤다는 듯이. 자신의 입을 막고 그다음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니다. 생각해보니… 될 거야. 아마. 아닌가? 안 되나…?
나나시: 어느 쪽이야…
카나리 케이토: 알겠다! 여기에 숨겼구만? 어디야. 어디에 있어!
토키와 아유키: 사건과 관련된 물건일지도 모르니 일단 실례할게.
카나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이 토키와가 찬장을 벌컥 열었다. 찬장 안에 들어있는 것은 반투명한 가방들이었다.
카나리 케이토: 이거 전부 욕실용품 팩 아냐?
내 눈에도 익은 물건이었다. 우리들의 욕실에는 작은 양의 샴푸. 바디워시. 치약. 칫솔. 입욕제 등이 들어 있는 욕실용품 팩이 제공되었다. 세안에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하는 배려 같았다. 달갑지는 않았다.
그 팩이 아홉 개나 찬장에 빼곡히 쌓여 있었다. 카나리는 먼저 그것을 몇 개 꺼내 안을 들여다보았으나. 별다른 것을 찾지 못한 듯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나나시: 입욕제만 썼네…?
토키와 아유키: 이것도 입욕제만 없어. 나머지는 거의 전부 새 물건이야. 샴푸나 치약이 비어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래. 어떻게 된 거야?
마유즈미의 욕실용품 팩을 다이얼로그로 찍어 기억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게… 입욕제 그거를 물에 넣으면 거품이 막 나온다더라고. 그래서 넣어 봤더니. 보글보글한 게 엄청 좋더라.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 주머니는 모노로그한테 말만 해도 꼬박꼬박 나오길래… 그러니까…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게… 우리 집 목욕탕이 옛날 식이라 거품 목욕이 힘들거든? 그래서 솔직히. 입욕제만 엄청…
마유즈미 나데시코: 미안…
마유즈미의 어깨가 느닷없이 축 늘어졌다.
나나시: 갑자기 왜 사과를 하고 그래…?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렇게 힘든 상황인데 꼬맹이처럼 거품 목욕이나 즐기고 있는 게…
마유즈미 나데시코: 으우… 잘못했어…
카나리 케이토: 이런 사소한 걸 신경 쓰고. 완전 어린애 구만.
나는 마유즈미보다 머리 하나가 작은 카나리를 흘끗 본 뒤. 그에게 들키지 않도록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토키와 아유키: 이상한 점이 있어. 우리가 분명 이 탑에 온 게 오늘로 6일 째일 텐데 왜 팩은 9개가 있는 걸까?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게. 사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많이 힘든 날에 두 개씩 넣어서 목욕했거든…
마유즈미는 땅 속을 파고 들어갈 듯이 고개를 숙였다.
카나리 케이토: 아무도 신경 안 써. 꼴값 그만 떨어.
토키와 아유키: 카나리.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아무튼… 특별한 범행의 단서는 없었어.
나나시: 응. 조금만 더 둘러보고 야가미의 숙소를 찾아가 보자.
하기와라 우시오는 양갱에 다시는 입도 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물릴 때까지 양갱을 먹은 뒤, 그것들을 다시 토해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욕이 절로 나오는 상황에 하기와라는 지독한 기분을 느꼈다.
하기와라 우시오: 콜록. 콜록! 우욱. 씹!
23T5U130: 여기 정도면 될까? 총기와 폭발물들을 처분하기에.
23T가 하기와라와 모리를 안고 탑으로 달려가는 도중. 최대한 빨리 위험한 것들을 처분하고 다시 가야 한다고 하기와라가 맹렬히 주장했다.
실은 단순히 23T에게 매달린 채로 가자니 너무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아서, 잠시 숨 돌릴 틈을 확보하고 싶을 뿐이었지만 모리와 23T는 하기와라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여겼다.
하기와라 우시오: 퉤! 퉤! 아아아악! 진짜 괜히 나왔어! 무슨 개고생이야 이게?! 우리 때문에 사람도 죽고. 양갱 먹다가 토하고! 망할!
하기와라 우시오: 트롤 짓이라도 하는 사람이 재미있으면 몰라. 이건 하는 사람도 재미가 없잖아! 트롤의 결과도 최악이야. 좆같네 진짜!
모리 레이코: 우는 소리 마라. 이 계획을 세운 것은 너다. 책임을 받아들이도록.
23T5U130: 싸우지 마. 이 무기들을 어떻게 처분할지나 생각해 보자.
모리 레이코: 휘발유가 조금 남았다. 무기를 모으고 그 위에 뿌린 채 점화하여. 폭발물이 무기를 무용으로 만들도록 유도한다.
하기와라 우시오: 마님 뜻대로 합지요. 빨리 돌아가서 살인 사건 수사라도 도와야 하는데 여기서 노가리를 깔 순 없지.
하기와라가 마음을 잡은 듯 뻐근한 목을 풀었다.
23T5U130: 그럼 내가 불을 붙일 테니 너흰 멀리 떨어져 있어. 휘말리면 너희도 위험해지니까.
하기와라 우시오: 걱정 고맙고! 근데 넌 왜 우리를 이렇게 도와주는 거냐?
23T5U130: 시간 낭비를 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어?
하기와라 우시오: 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다는 건 하지 않는다는 거야 하지 않는 걸 하지 않겠다는 거야?
모리 레이코: 입 좀 닥치고 할 일을 해라.
하기와라가 모리의 말에 입을 삐죽 내밀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그들은 가방에 든 것들을 꽃밭에 쏟았다.
그들이 23T에게서 멀어지는 동안. 23T는 무기들에 휘발유를 부었다. 충분히 멀어졌다고 판단한 뒤 하기와라가 모리에게 말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모리. 넌 궁금하지 않아? 생판 모르는 기계가 튀어나와선 우리 뒤치다꺼리를 해 주는데.
모리 레이코: 언젠간 규명해야겠지. 단서가 없을 뿐이다. 인공지능이 속해 있다는 카텟 기관을 무작정 믿어선 안 된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걸 누가 몰라? 딱 봐도 존나 수상하지. 23T도 마찬가지야. 근데 카텟 기관이 뭘 하는 곳이길래 생면부지인 우리들한테 에너지 빔도 쏘고. 든든한 23T도 붙여 주냔 말이야. 그게 너무 궁금해.
하기와라 우시오: 네가 안 놓으면 자결하겠다고 했을 때. 23T가 우릴 놓아줬잖아. 23T는 우리가 해치는 걸 막도록 설계된 거야. 대체 우리의 어디가 그렇게 소중할까? 23T는 왜 모노로그한테 그렇게 화를 낸 거야?
모리 레이코: 인공지능이 공리를 증진시키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인공지능은 첩자에게 여러 번 맞섰다. 인공지능이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이 알 수 없는 것은 유감이다만, 해상구조원이 분실된 금품까지 챙겨줄 순 없다. 그것을 요구하는 것 또한 타당하지 않다.
하기와라는 모리의 말을 전부 들은 뒤 기지개를 켰다.
하기와라 우시오: 에라이! 모르겠다! 나 같은 멍청이 코미디언 나부랭이가 생각해 봤자지. 니들이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내. 생각을 그만둘란다! 다른 애들이 어련히 알아내겠지. 버스 탑승!
모리 레이코: 너 또한 한 사람 몫을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나?
하기와라 우시오: 해상구조원이 금품까지 챙겨줄 수 없듯이. 코미디언은 실용까지 챙겨줄 수 없답니다.
하기와라 우시오: 내 말은. 나한테서 대체 뭘 바라니? 난 그냥 웃기는 놈일 뿐이야! 그게 다고! 그 이상은 절대 아니니까 너흰 나한테서 그 이상을 바라면 안 돼. IS겠어요? 잠깐. 근데 우리 좀 너무 멀리 나온 것 같다? 아닌가? 몰라.
하기와라가 모리의 말에 신경을 쓰지 않았듯이. 모리 또한 하기와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카이다의 흔적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모리는 폭발음을 들었다.
모리 레이코: 아무래도 인공지능이 위험물을 전부 제거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뭐라고?! 안 들려!
하기와라는 폭발이 액션 영화에 나오는 것 만큼 극적이지 않음에 조금 실망했다. 화염과 충격이 마구 빗발친다기보다는 공기가 찢기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몇 번 들리는 것 같았다. 연쇄적인 폭발에 그들은 고막을 보호하기 위해 귀를 막았다. 서로의 말은 당연히 들리지 않았다.
잠시 뒤 폭발이 멎어들자 하기와라가 조심스래 귀에서 손을 치웠다.
하기와라 우시오: 저 놈 진짜 튼튼한가 보네! 저 폭발에도 멀쩡하니까 우리 대신 저 일을 했을 거 아니야?
모리 레이코: 적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군.
모리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 당장은 23T가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 카이다와 몇 번씩 맞서며 그들의 생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23T가 적으로 돌변하게 된다면? 과연 누가 23T에게 대항할 수 있을까?
하기와라에게 의견을 물어 보려던 모리는 적외선 고글을 쓴 채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그를 보고 욕을 작게 내뱉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뚜우━ 뚜우━ 뚜우━
모리 레이코: 그새를 못 참고 실없는 짓인가.
하기와라 우시오: 조용히 해 봐. 레이더 탐지 중이잖아. 뚜우━ 뚜우━
모리 레이코: 첩자를 찾는 것이라면 고글을 쓸 필요는 없다. 애초에 지금은 낮이다. 적외선을 통한 열 감지보다 눈으로 보는 게 빠르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도 온기를 보는 게 더 자세하게 보이지 않을까? 체온을 감지하면 아무리 꽁꽁 숨어도…
하기와라가 입을 다물었다.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모리는 적당히 생각나는 말을 던졌다.
모리 레이코: 대체 왜 고글을 쓴 거지? 그렇게 자신의 행동이 누군가의 비웃음을 사길 바라나?
적외선 고글을 착용한 모리는 몇 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의 땅이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낮이 오며 주변의 온도. 색깔은 파랑에서 주황과 빨강으로 빠르게 바뀌었다. 그러나 그 일렁임은 초록색이었다. 높은 온도와 낮은 온도가 중용을 찾은 것이다. 그 온도가 바뀐다는 것은 적어도 무언가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땅 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리는 하기와라에게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모리는 적외선 고글을 착용했고 땅 안의 무언가에 신경을 쓰고 있었기에 그의 표정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기와라의 표정은 위기감과 당황으로 마구 일그러져 있었다.
땅을 손가락으로 마구 가리키며 하기와라는 23T 쪽으로 고개를 홱홱 돌렸다.
'지금 가자. 도망쳐야 해. 으아아아! 튀어야 한다고! 지금 튀자고!'
하기와라는 모리에게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모리 또한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섣불리 도망쳤다간 곧바로 잡힌다. 최고의 기회를 노리며 자만하고 있을 때 도망친다.'
모리는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그들은 그들의 지근거리까지 다다른 땅 안의 무언가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땅을 파고 있다기에는 너무나 부드럽고 빠른 움직임이었기에. 그들은 두더지보다는 상어를 떠올렸다. 땅을 헤엄치는 상어.
하기와라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느끼며 모리를 향해 중지를 들었다. 손가락 한 개를 펼친 셈이었다.
모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하기와라에게 손가락 한 개를 펼쳤다. 그녀 또한 중지를 들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파인애플!!!!!!!!!!!!
땅 안에서도 그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하기와라는 크게 비명을 질렀다. 그대로 모리와 그는 23T가 있는 곳으로 전력을 다해 달렸다.
장미와 흙을 헤치고, 카이다 쿠로하가 되살아난 시체처럼 그들을 뒤쫓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여기 살인 사건 나! 빨리 와! 왔어! 야! 왔어! 빨리 와! 이 깡통 새끼야!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찌질한 악당 보스처럼 하기와라가 소리쳤다. 그는 차마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카이다가 너무 무서웠다.
카이다는 몸에 묻은 흙을 다 털지도 않은 채 달려왔다. 네 발로 달리는 것처럼 빨랐다. 23T는 하기와라의 절실한 외침을 듣고 달리기 시작했지만. 과연 카이다가 모리와 하기와라를 잡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카이다는 그들에게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거의 악에 받힌 채로 그들을 따라갈 뿐이었다. 관용 없는 추적. 하기와라는 등 뒤에 치타가 달려오는 것 같다고 느꼈다.
하기와라 우시오: 왔어! 어! 오! 오우! 어! 왔어!
모리 레이코: 입 좀 닥치지 못할까!
하기와라 우시오: 오우! 오호오오!!!
몇 시간 동안 수면 없이 걸은 사람들치고 그들은 꽤 빠르게 달렸다. 그러나 3초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그들의 신체는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밤을 새운 피로가 한 번에 닥쳐왔다.
다리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명을 질렀고, 폐는 터질 듯이 움직이느라 경련이 생길 정도였다. 심장은 엔진보다 더 격렬하게 뛰었다. 머리마저 아파오는 동안 하기와라와 모리는 어째서 카이다가 땅 밑에 있었고 그들의 위치를 알 수 있었는지.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23T는 카이다보다 더 빨랐다. 거의 날아오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카이다는 23T와의 충돌도 감수한 듯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았다.
하기와라는 분명 카이다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라고 추측했다. '아니면 그냥 우리들한테 존나게 빡쳤거나'.
모리 레이코: 이제 안 되겠어…
모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로 몸을 돌렸다. 하기와라는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깜짝 놀랐지만,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영문은 몰라도 일단 카이다가 나보다는 모리를 먼저 노리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모리는 트렌치코트의 안주머니 속에서 총을 한 정 꺼냈다.
23T를 피해 숨겨 놓은 비장의 무기였다.
총구는 카이다의 쪽으로 겨눠졌다. 카이다 또한 총구를 보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멈추기에 그녀는 이미 너무 빨랐다. 모리도 그 사실을 알았다. 총이 카이다의 심장을 꿰뚫는다고 해도, 카이다가 모리를 잡으려 한다면 몸에 실은 속도만으로 모리의 뼈를 부러뜨릴 수 있을 터였다.
하기와라조차 그들의 대면을 지켜보느라 발을 멈추었다. 그의 옆을 23T가 번개처럼 지나갔다. 카이다의 목표가 모리로 노려진 이상 모리를 지키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맞춰서 죽이겠다. 피해서 잡겠다. 맹수와 사냥꾼처럼 서로를 노리며 모리와 카이다의 거리는 무섭게 좁혀졌다.
'여섯 발. 전부 맞추면 죽일 수 있다.'
모리 레이코: 공리를 위해 널 숙청하겠다.
모리는 카이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모리는 떨리지 않는 손으로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실 그녀가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 승리의 미소를 지은 카이다를 보며 자신의 패배를 깨달았다.
카이다는 몸을 옆으로 놀리며 속도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총알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단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장미 한 송이가 밟혀 푹 파인 땅 밑에 달라붙었다. 카이다가 뛰어오른 자리에는 그 정도로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제자리에서 자신의 키만큼 높이 뛰어오른 카이다를 보며 하기와라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카이다는 공중에서 모리조차 제쳤다. 그 정도로 그녀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땅에 내려오자마자 카이다는 모리를 향해 달려들었고, 여분의 탄창조차 없기에 모리는 카이다에게 저항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카이다가 모리의 목을 독수리처럼 낚아챘다.
모리 레이코: 크윽…!
카이다 쿠로하: 오지마아아아!
카이다가 23T를 향해 천둥과도 같이 소리쳤다. 23T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23T가 그 속도대로 모리에게 도착했다면. 2초도 채 지나지 않아 카이다와 충돌했을 거리였다.
카이다 쿠로하: 내 쪽으로 오는 순간 이 자식은 죽는다. 알아?! 드디어 잡았다. 개자식들아!
모리 레이코: 첩자를 제압해라. 인공지능… 사사로운 것은 버려야 한다. 나는 금품이다…
모리는 최대한 의연하게 말했다. 목을 잡힌 상태에서 나온 작은 목소리는 오히려 모리가 직면한 위기를 더욱 부각했다.
카이다가 손에 힘을 세게 주기만 하면. 모리의 목은 꺾여버릴 것임을 그 자리의 모두가 알았다. 총알을 튕겨낼 수 있는 괴물이 청소년의 목을 꺾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23T는 움직일 수 없었다.
카이다 쿠로하: 조용히 못 해?!
카이다가 모리의 얼굴에 윽박질렀다. 23T는 뒤로 몇 걸음을 물러서며 카이다에게 말했다.
23T5U130: 기다려. 카이다. 굳이 모리를 죽일 필요는 없잖아?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 지금이 조사 시간이긴 하지만. 살인을 하면 처형당하는 건 똑같을 걸?
23T와 정반대로 하기와라는 카이다를 향해 몇 걸음을 내디뎠다.
23T5U130: 하기와라! 멈춰!
하기와라 우시오: 걱정 마. 어차피 카이다 쟨 모리를 절대 못 죽여. 카이다도 죽는 건 둘째치고 당장 네가 움직이지 못하고 막고 있는 건 모리의 존재야. 여기서 모리를 죽이면 당장 넌 카이다에게 달려들 수 있어. 모리가 너의 억제력이란 말이야.
하기와라 우시오: 카이다는 너와 맞붙고 싶지 않아. 당연히 중요한 인질을 낭비할 순 없겠지. 그러니까 일단 모리는 안전해. 카이다. 대체 원하는 게 뭐길래 이 지랄이냐? 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카이다 쿠로하: 니들이 다 죽는 거!
하기와라 우시오: 뭐야. 얘 완전 이상해… 또라이 같아. 무서워…
하기와라가 다시 몇 걸음을 물러섰다. 23T도 그렇게 했다. 카이다는 만족스럽게 피식거렸다.
카이다 쿠로하: 야. 너. 날 죽여야 하느니 뭐니 하면서 잘도 떠들어 댔다며?
카이다는 모리의 목에서 손을 치우고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총을 빼앗아 멀리 던져버렸다.
틈이 보이자마자 모리는 주먹을 한계까지 끌어모아 쥐었다. 손가락 뼈가 돌기처럼 튀어나올 정도로. 그녀는 전력을 다해 카이다 쿠로하의 코뼈를 강타했다.
그 순간 모리는 자신이 바위를 때린 것 같다고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이 계란에 비유될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 그녀가 고통으로 가득 찬 신음을 참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그녀의 고통이 카이다의 기쁨이 되리라는 것을 이를 악물고 되새겼기 때문이었다.
카이다 쿠로하: 하! 그게 네 딴에는 친 거야?! 제대로 좀 쳐 봐! 쳐 보라고!
카이다는 코웃음을 쳤다. 몸을 숙이고 모리에게 얼굴을 들이대기까지 했다. 허리에 손을 얹은 그녀의 자세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모리보다 강하다는 자신감에서 나왔다. 그녀의 도발에 휘말리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던 모리는 카이다의 자만이 도를 넘었다고 느꼈다.
'이 역병 같은 것이!'
모리는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그녀는 카이다의 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그것을 뽑아 버리려고 했다.
카이다가 더 크게 웃으며 자신의 손을 툭 쳐내자 모리는 자신이 도발에 보기 좋게 넘어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자신이 손바닥 위의 개미처럼 장난감 취급당했다는 것도.
카이다 쿠로하: 형편없긴! 날 잡고 싶으면 저 새끼들처럼 총이라도 잘 쏘지. 애초에 개활지에서 나한테 총이 통할 것 같았어? 고작 네가 뭘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 입만 살은 년 같으니!
카이다는 모리의 양손목을 꽉 잡았다. 그리고 놓아주지 않았다. 모리의 몸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이다는 뒤틀린 우월감을 숨김없이 드러내었다.
카이다 쿠로하: 날 죽여야 한다고 떠들은 것 치고는 너무 약하잖아. 지금 너를 봐! 네가 뭘 할 수 있냔 말이야!
모리 레이코: 입 닥쳐라…!
카이다 쿠로하: 사람을 때린다는 게 정말 뭔지. 내가 몸소 알려줄까?
카이다는 어느 정도 명랑하게 느껴질 정도로 신이 난 듯이 웃었다. 그러면서 모리의 머리를 주먹으로 비스듬히 내려쳤다.
빡 하는 소리가 난 뒤. 모리가 꽃밭에 털썩 쓰러졌다. 풀린 자신의 다리. 속절없이 쓰러지는 자신의 몸을 느낀 모리는 아주 찰나의 시간 동안 죽음을 느꼈다.
"따님의 몸이 워낙 약하시니… 야외 활동은 삼가도록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레이코. 너는 작고 연약하단다. 밖은 위험해.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얌전히 있으렴."
모리는 주마등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결국. 이게 나란 말인가.
결국 이토록 보잘것 없는 모습이 내 최선이란 말인가…
눈물 한 방울 없이 메마른 모리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의식이 서서히 흐려졌다.
암흑 속으로 추락하는 기분을 느끼며 모리는 생전 경험한 적이 없는 대화를 보았다. 그러며 일말의 의문을 느꼈다.
"세상은 변질되었다. 동료들은 우릴 떠났다. 그럼에도 난 손을 놓고 있을 수 없다. 외면할 수 없다. 너도 그렇지 않나. 승부사."
누구의 목소리지…?
내가 이런 말을 했던가…
기절하지는 않았지만, 전신에 힘이 빠진 모리는 축 늘어져버렸다.
하기와라 우시오: 오우. 쒸엣…
23T5U130: 정말 이해가 안 돼. 왜 이러는 거야?
카이다 쿠로하: 내가 말했지? 너희들이 전부 죽길 바란다고. 다 뒈져버리길 바란단 말이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기와라 우시오: 그건 알겠고. 그럼 우리를 어떻게 찾았는지나 말해 봐.
23T5U130: 하기와라. 카이다가 어디에서 나타난 거야? 주변이 이렇게 밝은데 기습에 성공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하기와라 우시오: 땅에서 튀어나왔어. 땅 안을 파고 다니다가 우리 근처에서 팍 나타났다고. 그런데 땅 안에서 우리를 어떻게 찾을 수 있지?
카이다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낸들 아냐는 듯한 몸짓에 하기와라는 그녀가 대답을 얼버부리고 있음을 간파했다.
카이다 쿠로하: 그럼 너희가 그렇게 시끄럽게 떠드는데 내가 못 찾겠어?
하기와라 우시오: 우리의 위치를 미리 알고 있는 게 아니면 애초에 다가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목소리만 듣고 땅 속에서 그렇게 정밀하게 움직여? 그럼 막판에 나랑 모리가 말을 안 할 때는 어떻게 다가온 건데?
23T5U130: 카이다가 위치를 미리 알고 있었다면…
카이다 쿠로하: 하. 입 놀리게 내버려 두니까 끝까지 기어오르려고 드네? 한 번 그 입을 영원히 닥치게 만들어 줄까?!
모노로그: 그만.
모리의 앞을 모노로그가 가로막았다.
카이다 쿠로하: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모노로그: 지금부턴 어떠한 상해도 금지된다. 카이다 쿠로하. 모리 레이코에게서 떨어지도록 해라.
카이다 쿠로하: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어?! 내가 다 잡아 놓은 물고기인데!
모노로그: 그렇다면 이 탑 안에서. 내 지시에 불복종하겠다는 건가?
카이다와 모노로그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카이다 쿠로하: 너. 나를 너무 대놓고 견제하는 거 아니야?
모노로그: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카이다 쿠로하: 뭐가 우연의 일치라는 거야. 내가 깡통 놈을 피해서 간신히 누굴 하나 잡았더니. 이렇게 나오기야?!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모노로그는 카이다에게서 시선을 돌려 23T를 보았다. 23T는 약간 흐려진 음성을 내었다.
23T5U130: 모노로그. 때가 된 거구나.
모노로그: 그렇지.
하기와라 우시오: 무슨 때가 되었다는 거야?
모노로그: 학급 재판의 때가 왔다. 이 자리에서 뛴다고 해도 시간에 맞추진 못한다. 그러니 가능한 빠르게 움직이도록.
하기와라 우시오: 잠깐! 가기 전에 카이다를 모리한테서 떼 줘!
모노로그: 그렇게 할 생각이다. 카이다 쿠로하. 모리 레이코에게서 멀어져라.
카이다 쿠로하: 내가 이걸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야.
카이다가 모노로그에게 패악스럽게 말했다. 바닥에 놓인 모리를 보는 카이다의 눈빛은 사냥감을 빼앗긴 맹수의 그것과 같았다.
카이다는 탑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모리에게서 멀어지자 23T와 하기와라는 모리를 향해 달렸다.
하기와라 우시오: 정신이 들어. 고든?!
23T5U130: 외상은 없지만. 뇌진탕이 생겼을지도 몰라… 모리. 내 말 들려?
모리 레이코: 이젠 책에게까지 도움을 받다니. 구차하기 짝이 없다…
모리가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23T5U130: 의식을 잃진 않아서 다행이야. 일어설 수 없을 테니 널 들고 달릴게. 이번에는 천천히.
모리 레이코: 그렇지만 아무리 구차하고 비참할지언정. 나의 정신만은 꺾이지 않는다… 결코 패배하지 않으리…
하기와라 우시오: 개소리하는 거 보니 말짱한가 본데! 그럼 탑으로 돌아가즈아!
23T는 활기차게 외치는 하기와라를 한 손으로 번쩍 들었다. 순식간에 23T의 옆구리에 낀 하기와라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잠깐. 나도?!
23T5U130: 그럼 당연하지. 너도 이젠 한계잖아. 게다가 곧 학급재판이 열릴 테니 빠르게 가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하기와라 우시오: 에반데… 으아아아아아악!!
히무로 시라베: 클로로포름.
양호실 찬장의 깊은 곳에 놓여 있었다. 평범한 양호실의 전경이라고 쉽게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적어도 클로로포름에 대해서는.
클로로포름을 묻힌 솜만으로 미도리카와가 기절했다고 보긴 어렵다. 클로로포름의 효과가 작용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몇 초가 필요하다. 미도리카와에게도 기본적인 완력은 있으니 충분히 저항할 수 있다. 베개로 그녀를 질식시키려는 꼴이다.
클로로포름 용기에는 사용한 흔적도 없었다. 혹시 모르니 클로로포름을 사용한 뒤 비우고, 다른 액체를 채웠을 가능성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양호실에 놓여 있던 비닐봉지를 찢어 작은 조각을 만들었다. 그 위에 클로로포름 용기를 기울였다.
클로로포름은 플라스틱을 쉽게 녹인다.
플라스틱이 녹았다. 클로로포름을 사용한 만큼 물을 탔을 가능성은 몰라도, 다른 액체를 넣었을 가능성은 배제해도 좋았다.
히무로 시라베: 클로로포름이 재보급된 건가?
아니다. 오히려 사건에 클로로포름이 사용되었다면 누구의 요청이 있어도 그것을 재보급해선 안 된다. 클로로포름이 비어 있다는 것 자체가 사건의 중요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사용되지 않은 클로로포름을 기억했다.
마취시킨 뒤 찌른 게 아니라면, 어떻게 미도리카와가 그토록 방심한 것이지? 그녀는 저항하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죽었다. 어떻게 그런 지근거리까지 접근할 수 있었지?
히무로 시라베: 미도리카와가 다른 이에게 그 정도의 틈을 허용했을 리가 없어. 신뢰할 수 있는 이라면 모를까…
미도리카와를 찌른 수단을 기억했다.
양호실에서 조사할 것을 끝냈기에 미도리카와의 숙소로 돌아갔다.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 수확이 있었나요?
히무로 시라베: 클로로포름이 사용된 흔적은 없었어.
야가미 토가: 그럼 범인은 어떻게 미도리카와 씨를 찔렀을까요? 심장을 정확하게 찌르는 건 그럴 만한 기회 없인 불가능한데요.
히무로 시라베: 이미 죽은 미도리카와를 찔렀을 가능성이 있어.
야가미 토가: 그녀의 몸에 남은 외상은 관통상과 그 이후에 난 목의 자상이 전부입니다. 그녀가 공격을 받고 죽은 후 심장을 찔렸다면 분명 다른 흔적이 남았을 거예요.
히무로 시라베: 외상 없이 죽였을지도 모르지. 독살… 혹은 질식시켰을 수도 있어.
다만 독살되었다면, 검정과 하양 간의 균형을 추구하는 학급재판의 특성상 독극물의 가능성을 킬로그에 적어놓았을 것이다.
다른 이들은 이 사실을 모르니. 내가 대몰락과 알파걸의 살인 게임을 기억하고 있음을 숨기려면 학급재판에 대해 굳이 발설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야가미 토가: 독이 몸에 침투하면 드러나는 작용이 있지 않을까요?
히무로 시라베: 호흡기의 이상으로 코와 인후(咽喉) 부위에 자국이 생겼을 수도 있지만, 보이지 않아. 피부 발진이나 붓기. 눈 빨개짐도 마찬가지야.
캐롤 브라이트: 그럼 질식당하신 걸까요…? 그렇지만 미도리카와가 질식의 기미를 느끼셨다면 분명 비명을 질러서라도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위기를 알렸을 거예요.
야가미가 캐롤을 흘끗 본 뒤 미도리카와로 시선을 돌렸다.
야가미 토가: 어쩌면 마비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히무로 시라베: 마비라. 그렇지만 클로로포름이 사용된 흔적은 없었어.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빠르게 시험하고 와도 좋아.
야가미 토가: 아닙니다. 믿겠습니다. 시간이 없으니까요. 당신은 미도리카와 씨와 숙소도 떨어져 있으셨으니 범행의 가능성은 현저히 낮습니다. 유력 후보는 따로 있죠.
야가미는 그 나름대로 범인을 특정한 모양이다. 증거를 모았고 정황을 통해 용의자를 줄였으니 누구나 범인을 생각해 뒀겠지.
나 또한 그러했지만 아직 모든 것이 명확하지만은 않았다. 추리가 명확하더라도 다른 이의 증거도 있을 테니 재판의 과정에서 반드시 수정되어야만 했다.
이제 다른 것들을 더…
모노로그: 거기까지다.
히무로 시라베: 이런.
모노로그가 나타났다. 허용된 시간이 다 되었다.
캐롤 브라이트: 무슨 말씀이세요?
모노로그: 충분한 증거를 얻었길 바라지. 곧 학급재판이 열릴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충분한지 아닌지는 모른다. 단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야 했다.
학급재판은 이미 시작되었다.
마유즈미의 방에서 별다른 증거는 찾지 못한 채 우리는 야가미의 방으로 향했다.
그의 방은 사람이 사는 방처럼 보였다. 그것도 정돈되고 깔끔한 사람이 사는 방.
창살을 확인해 보자. 미도리카와의 숙소로 향하는 쪽으로 흠집이 나 있었다. 마유즈미 말고도 이 쪽에도 역시 흠집이 나 있다…
마유즈미와 야가미가 둘 다 미도리카와의 숙소로 향했을 리는 없었다.
토키와 아유키: 5시간이나 지났어! 이건 내 실책이야. 내가 다 망쳤…
7시에 그렇게 말했으니 토키와는 적어도 새벽 2시까지 다른 이들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마유즈미는 1시에 미도리카와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증언했다.
그 전에 미도리카와가 죽었다면, 창살을 통해 갈 수밖에 없다. 로프를 통해 갔다면 두 사람이 어디서 로프를 구한 거지? 창고? 창고에 두 사람이 들렀던가?
어려웠다. 모든 것이.
야가미 숙소의 창살 흠집을 다이얼로그로 찍어 기억했다.
그것 말고 눈에 띄는 무언가는 없었지만, 야가미의 화장실 찬장에도 욕실용품 팩이 있었다.
나나시: 야가미도 팩을 세 개 썼네…
토키와 아유키: 야가미는 입욕제가 아니라 바디워시 쪽을 많이 사용했어.
몸이 크니까 바디워시도 많이 쓰게 되는 건가…?
카나리 케이토: 덩치 커서 좋을 거 하나도 없구만!
입욕제만 사용한 마유즈미의 팩과는 달리. 야가미의 팩은 여러 욕실용품들이 더러 비어 있었다. 몸이 크니까 확실히 소비가 빠른 것으로 보였다. 개인사를 건드리는 기분이라 영 좋지는 않았다…
야가미의 욕실용품 팩을 다이얼로그로 찍어 기억했다.
나나시: 카이다의 방도 조사해보고 싶은데, 본인이 없으면 역시 힘들겠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후루미나미가 유리칼을 빌려준다면…
토키와 아유키: 후루미나미 본인이 없으니까 힘들 거야.
카나리 케이토: 걔도 참 쓸모없어.
나나시: 애초에 후루미나미는 어디로 간 걸까? 묘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그렇게 제멋대로라니.
후루미나미의 목적이 히무로와. 어… 아무튼 친해지는 것임을 알고 나니 후루미나미라는 사람에 대해 더더욱 종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설마 그냥 놀고 있는 건 아니겠지?
토키와 아유키: 후루미나미에게 의지해선 안 돼. 일단 밖에서 카이다의 숙소로 들어가는 건 위험하니. 우선 다른 걸 조사해 보자.
모노로그: 미안하지만 힘들 것 같군.
모노로그가 바닥에서 불쑥 솟아올라 우리를 놀라게 했다.
나나시: 우왓!
카나리 케이토: 으아아아아! 깜짝이야!
모노로그: 내게 도무지 익숙해지지 못하겠나?
카나리 케이토: 썅. 바닥에서 튀어나오는 책에 어떻게 익숙해져?! 죽어 그냥!
토키와 아유키: 여기엔 왜 온 거야?
모노로그: 몰라서 묻나. 학급재판의 개정을 알리기 위해 온 것이다. 일일이 참 번거롭기도 해… 본래라면 다이얼로그를 사용했을 것을.
마유즈미 나데시코: 다이얼로그?
나나시: 시체 발견을 다이얼로그로 알린 것처럼. 다이얼로그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연락할 수도 있었던 거구나… 그런데 왜 지금은 네가 직접 나타났던 거야?
모노로그: 한쪽에 나타났는데 다른 쪽에 나타나지 않으면 불공평할 테니.
모노로그는 알아듣지 못할 말만 하고 있었다. 아니면 그냥 내가 못 알아들은 것일 수도 있었지만. 정말 저게 무슨 뜻일까?
모노로그: 줄여 말하자면. 1층으로 모이도록 해라. 최대한 빨리.
모노로그가 바닥을 뚫고 다시금 사라졌다. 카나리는 모노로그가 정말 사라졌는지 바닥을 콩콩 두드려 확인한 뒤에. 그 자리를 발로 마구 밟았다.
카나리 케이토: 잘 가라! 꺼져! 흥!
토키와 아유키: 아무래도 조사 시간이 다 돼 버린 것 같아.
나나시: 벌써?!
큰일 났다. 기절했다가 깨어난 다음 아무것도 못 했는데!
별다른 증거도 못 찾았다. 이러다가 검정을 못 찾으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
전부 처형당할지도 몰랐다. 그런 일은 절대로 안 돼. 더 조사를 했어야 했어…
나나시: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토키와 아유키: 최선을 다해야겠지. 우선 내려가자.
야가미의 숙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다른 모두가 보였다.
나이토 유즈루: 어. 네 명도 나왔네.
야가미 토가: 카나리 씨. 별다른 소동은 없었나요?
카나리 케이토: 없었어. 애초에 조사할 것도 얼마 없었어.
야가미 토가: 그렇겠죠. 가장 중요한 용의자의 숙소는 조사할 수 없었으니까요. 다른 세 분을 확실하게 지켜보셨겠죠?
캐롤 브라이트: 아까부터 왜 세 분을 위험 분자 취급하시죠. 야가미 씨?
캐롤 씨가 야가미에게 지적했다. 의문을 담은 목소리였지만 나는 그 안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칼날을 느꼈다. 캐롤 씨는 분명 불만을 품고 있었다.
카나리 케이토: 그럴 만하니까 그렇지! 얘들 진짜 이상하단 말이야. 미도리카와의 죽음이 뭐 어쨌다고 그렇게 신경을 쓰냐고!
야가미 토가: 그런 낌새를 보셨나요?
카나리 케이토: 안 볼 수가 없지! 자기 때문에 미도리카와가 죽었다고 계속 징징거리는데.
이바라 쿠리스: 카나리. 입 좀 조심해.
카나리 케이토: 또 나한테 시비야?! 너희들은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
히무로 시라베: 그만하고 내려가자. 마유즈미.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
마유즈미 나데시코: 응. 걱정해줘서 고마워…
나나시, 마유즈미, 토키와 그리고 카나리까지 왔으니 이제 후루미나미와 탑 밖의 네 명만 합류한다면 학급재판이 비로소 시작되리라.
검정을 적발해도 검정은 죽지 않지만, 검정을 적발하지 못하면 다른 모든 이들이 죽는다. 이번 살인은 리스크가 없다는 점에 있어 검정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내가 의심하고 있는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랬다.
쉽지 않은 재판이 되겠지.
계단을 내려와 다른 이들을 기다리던 도중 나이토가 소리쳤다.
나이토 유즈루: 얘들 언제 와? 어디 잘못된 거 아니야? 전화도 먹통이니까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잖아!
칸나즈키 시노부: 누구?
나이토 유즈루: 몰라서 묻냐. 모리. 하기와라. 23T. 그리고 카이다! 후루미나미 얘도 와야 되는데 어디서 뭐 하는 거야?!
칸나즈키 시노부: 다들 곧 올 거야.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오니까.
나이토 유즈루: 그건 무슨 개소리… 이런 썅! 저거!
나이토가 가리킨 방향에는 카이다가 있었다. 그녀는 어슬렁거리며 탑의 입구를 통해 들어왔다.
역시 그녀도 학급재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무리 강대한 그녀라도 규칙에 얽매여 있음을 나는 확인할 수 있었다.
야가미 토가: 여러분 모두 저희 뒤로 오세요. 저희 세 명이면 어떻게든 카이다 씨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칸나즈키 시노부: 이거랑 비슷한 일이 저번에도 일어났던 것 같은데. 데자뷰 느껴보고 있어!
카이다 쿠로하: 야. 야. 쫄지 마. 어차피 모노로그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니까.
카이다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토키와 아유키: 모노로그 때문이라니?
카이다는 대꾸하지 않고 벽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카이다는 지금까지 계속 탑 밖에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탑에 머무르다가 탑 밖으로 나간 것인가?
둘 중 무엇이냐에 따라 사건의 양상은 판이하게 갈릴 텐데…
하기와라 우시오: 우리가 돌아왔다!
곧이어 하기와라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렸다. 23T와 23T에게 부축을 받고 있는 모리도 함께였다.
나이토 유즈루: 뭐야. 모리 쟤는 왜 골골거려? 카이다가 저렇게 만들었어?
23T5U130: 폭발물을 처리하기 위해 모리와 하기와라를 멀리 보낸 사이에 카이다가 땅 밑에서 기습했어. 둘은 도망쳤지만 모리가 잡혔고…
모리 레이코: 두부를 가격 당했을 뿐이다… 인공지능이 굳이 내게 신경을 써야 하니 공리가 훼손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귀감이 되지 못해 면목이 없다…
나이토 유즈루: 아니 뭐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야… 걷기가 힘드냐?
23T5U130: 하반신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야. 다만 충격이 심해서 아직 어지러워하는 것 같아.
하기와라 우시오: 세게 때리긴 했지. 나나시를 때린 것보다 2.5배는 더 세게 때린 것 같았어.
나나시: 그거의 2.5배…?
하기와라의 말을 듣고 나는 카이다가 나를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기억했다. 어마무시하게 아팠다. 맞고 쓰러진 뒤에야 내가 맞았다는 걸 느낄 정도로 빠르고 강했는데… 그보다 더 세게 맞는 것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모리가 아직도 영 거북하긴 하지만, 평소에 그렇게 단호하던 그녀가 비틀거리며 나타나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 말고 다른 이들도 그런 눈치였다.
적어도 하기와라를 빼면.
하기와라 우시오: 그럼 모리가 카이다 죽이자고 그렇게 난리를 피웠는데 그걸 넘어가는 게 보살이겠다. 아무튼 와썹. 굿모닝. 알로하! 살아서 만나니 너무 기쁘다 모두들!
하기와라가 시원스럽게 웃었지만, 환영받지는 못했다. 그의 뒤를 따른 모리 역시 더 나은 취급은 받지 못했다. 걱정이 되는 것과는 별개로 그들의 돌발 행동은 절대 칭찬받을 일이 못 되었다.
모리 레이코: 첩자의 사살에 실패한 것 또한 면목이 없다. 위험물은 이제 전부 처리했다지만 오히려 악수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혹시 무기상으로 알려진 자 말고 다른 사상자가 있나?
토키와 아유키: 없었어. 그리고 미도리카와의 재능은 밀수업자야. 무기상으로 알려진 자가 아니야.
모리 레이코: 초고교급 밀수업자라? 범죄자에게 초고교급이라니 당치 않은 칭호다.
나이토 유즈루: 아니. 그보다. 너희 누구한테 할 말 없어?
나이토는 하기와라와 모리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하기와라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 미안해. 잘못했어. 응? 카이다를 그렇게 쉽게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내가 레전드지.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살아 돌아왔잖아! 안 죽은 게 어디야. 그치? 응. 그치?
이바라는 하기와라에게서 눈을 피했다. 하기와라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모리 레이코: 그래… 위험 분자이긴 했지만 첩자를 억제하던 자가 살해당한 것은 큰 손실이다. 밀수업자를 죽인 범인을 찾는다고 해도, 살인자가 처형되는 일도 없을 테니 공리를 훼손시킨 자도 살아남을 테지.
나이토 유즈루: 지금 그게 문제야? 너희 다 이바라한테 아무 말도 없는 게 말이나 되냐! 우리한테도! 사과 한 마디 없어?!
카나리 케이토: 어후. 시끄러!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카나리가 두 귀를 막고 신음했다.
야가미 토가: 굳이 열을 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분들이 저희를 이렇게 대한다면 저희도 그에 맞는 취급을 해 드리면 됩니다.
캐롤 브라이트: 그래선 안 되죠. 하기와라 씨에게도 사과의 기회를 드려야 해요.
하기와라 우시오: 진지하게 해 줘. 장난스럽게 해 줘?
나나시: 진지하게!
하기와라 우시오: 미안.
하기와라가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장난스럽게 할 걸 그랬나? 미안해용. 쏘리 쏘리. 봐주세요!
나이토 유즈루: 됐다. 집어치워 이 새끼야…
모리 레이코: 나는 진심을 다해 사죄하겠다. 승부사의 주장에는 뿌리가 있다. 아무리 공리의 증진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한들, 공리가 훼손되었다면 나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모리 레이코: 그러니 언젠가 이 손해를 만회해 보이겠다고.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맹세하겠다.
모리의 선언에 나는 엄청난 불안감을 느꼈다. 이런 짓을 또…?
나이토 유즈루: 또 무슨 일을 벌이겠다고? 차라리 나한테 대놓고 싸움을 걸지 그래!
모리 레이코: 너는 숙청 대상이 아니다만. 오히려 장기적으로 볼 때 너와 나의 길은 맞닿아 있다. 무분별하지 않고 적절하게 사용될 경우 공리의 증진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나이토 유즈루: 미쳤어?!
또다시 말싸움이 벌어지려는 때.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계단 위에서 들려왔다.
후루미나미 나몬: 늦었다. 늦었어! 늦었다. 늦었어! 늦었어! 티 파티에 늦겠다. 늦었어! 늦었어! 늦었어!
히무로 시라베: 이 목소리는…
불안함을 느낄 새도 없이 후루미나미가 나타났다. 그녀는 회중시계와 우산을 들고 있었다. 안경을 썼고, 머리에는 토끼 귀를 달고 있었다. 머리띠로 보였다.
후루미나미 나몬: 내가 뭘 놓친 거야?! 빨리 말해 봐!
빨간 셔츠. 회색 바지. 노란색의 양복 조끼. 보라색 나비넥타이. 복장에 공을 들인 것처럼 보였다. 후루미나미는 그에 따른 반응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우리 모두를 내려다보았다. 기대감이 가득한 웃음이었다.
모리 레이코: 나도 묻고 싶어 지는군. 내가 탑을 비운 사이 뭘 놓쳤길래 사기꾼이 저렇게 되었지?
나이토 유즈루: 낸들 아냐…
야가미 토가: 무시하도록 하죠.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그래서 진짜 저게 뭐야? 뒤틀린 혼종 황천 이세카이의 바니걸이야?
후루미나미 나몬: 바니걸이라니! 시계토끼야! 일단 애니메이션 버전대로 입어 봤는데 말이지. 시계토끼의 안경이 단안경이었던가, 아니면 그냥 안경이었던가? 혹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원전 읽어본 사람 있어?
후루미나미는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반응이 좀처럼 없자 무안해진 후루미나미는 탑으로 돌아온 네 명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없으면 말고. 오! 너희구나. 안녕. 하기와라? 안녕. 모리? 안녕. 23T? 그리고 오. 나의 친구 카이다! 이게 얼마만이야?
카이다 쿠로하: 죽여버리기 전에 닥치고 꺼져. 도움도 안 된 게 어디서 아는 척이야.
후루미나미 나몬: 하느님 맙소사! 저렇게 천박하게 말하다니! 사랑도 우정도 내게 등을 돌리는구나. 오오!
하기와라 우시오: 나는 반갑다! 안녕. 후루미나미!
모리 레이코: 저 사기꾼은 수사에 참여하지 않았나? 왜 이제야 내려온 것이지?
후루미나미 나몬: 무례하긴. 사생활에까지 간섭하다니! 개인적으로 할 일이 있었을 뿐이오!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는 우리와 함께 조사를 진행하던 도중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어. 개인적인 수사에 착수하겠다고.
그렇지만 저런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보아. 그녀를 신용하긴 어려웠다.
모리 레이코: 정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군.
모리는 경멸을 가득 담아 후루미나미를 바라보았다.
토키와 아유키: 마지막으로 후루미나미까지 왔으니. 이제 모든 인원이 모였어. 모노로그. 이제 다음은 뭐야?
모노로그: 그래. 모든 이들이 모였으니. 이제 학급재판장으로 안내하겠다.
탑의 중심에 있는 기둥.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그 기둥이 서서히 열렸다. 장치가 움직이기보다는 그림자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듯이 엘리베이터가 우리들 앞에 열렸다.
히무로 시라베: 이건 탑의 최상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라고 하지 않았어?
모노로그: 최하층으로 내려갈 수 있기도 하다.
히무로 시라베: 최하층이라는 건, 탑에 하층도 있다는 뜻이지?
'사람을 죽이지 마. 최대한 버텨서 지하로 진입할 방법을 찾아내. 자판기를 주시해.'
지하. 미도리카와가 내게 전했던 내용과 맞아떨어졌다.
야가미 토가: 지하…? 그 안에 뭐가 있습니까?
모노로그: 아직은 알 수 없다.
카나리 케이토: 말장난 그만 하고 알려주지 못해?!
모노로그: 넌 감당하지 못할 말만 지껄이는 재주가 있나 보군. 보채지 않더라도 어차피 학급재판은 곧 열린다. 다들 엘리베이터에 타도록. 학급재판장으로 이동한다.
모노로그의 지시에 따라 우리들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엘리베이터가 15명의 몸을 담은 채 내려갔다.
1초에 한 층을 내려간다고 가정하면. 60층을 족히 내려갈 듯한 깊이였다. 덜컹이는 소리도 없이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는 마치 금속으로 이루어진 파충류의 식도 같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먹이다. 이미 뱃속에 들어온 채 다시는 나갈 수 없는 먹이들.
학급재판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긴장을 느꼈다. 오히려 다른 이들은 생소한 감각과 체험에 별다른 공포는 느끼고 있지 않았다.
학급재판. 서로 추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의논을 통해 피해자를 죽인 검정을 밝혀내는 일. 이론은 그렇지만 실상은 그것보다 더한 무언가 이다.
온갖 인간군상이 숨기고 있던 모든 것을 털어내고, 살아남기 위해 상대의 모든 것을 파헤친다. 모든 이들이 절박하기에 서로를 의심한다. 무엇보다 패배한 이는 처형당한다. 아주 잔인하고 악취미적으로.
무엇보다 최악인 것은 그 처형을 다른 이들이 엿본다는 점이다. 언제나 살인 게임에는 관측자가 있었다. 그렇게 둘 순 없다. 절대로.
이미 많은 이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난 그냥 버스나 타련다. 캐리해 주라.
야가미 토가: 그러지요. 반드시 범인을 잡아야 하니까요. 우리 안에 숨어있는 범인을.
칸나즈키 시노부: 나쁜 놈이지. 불쌍한 미도리카와를 거꾸로 매달았어.
카나리 케이토: 뭐야. 이 엘리베이터 왜 이렇게 덜컹거려… 기분 나쁘게. 이거 잘못했다가 떨어지는 거 아니야?
토키와 아유키: 괜찮을 거야. 안 떨어져. 괜찮아… 전부 괜찮아.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니야. 괜찮지 않을지도 몰라…
나이토 유즈루: 살인범이 누군진 몰라도. 반드시 잡고 말 거야! 누가 가만히 죽어 줄까 봐?!
후루미나미 나몬: 그 말이 맞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 선수 입장! 삑! 학생입니다!
모리 레이코: 공리를 위해. 무슨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살인자를 색출할 것이다.
이바라 쿠리스: 믿을 수가 없어. 사람을 그렇게 쉽게 죽이다니… 절대 안 놔줘.
캐롤 브라이트: 네. 모든 것이 어떻게 되었는지 반드시 알아내야 하겠죠.
카이다 쿠로하: …….
23T5U130: 그래. 알아내자.
나나시: 여기서 기억을 찾기도 전에 죽을 수는 없으니까… 반드시 재판에서 승리해야 해.
히무로 시라베: 기억을 찾은 뒤에도 죽어선 안 돼.
아. 그렇지. 당연했다. 히무로는 별 다른 속내를 담지 않았겠지만 난 어째서인지 칸나즈키의 말을 떠올렸다.
제일 무서운 게 죽는 거라고 말했지만, 정작 기억을 찾지 못하는 게 무서운 이유는 줄줄이 나오는구나. 넌 죽는 건 그다지 무서워하지 않아.
단지 기억을 찾지 못한 채 죽는 게 무서울 뿐이지. 그러니 따지고 보면 죽는 것도 무서운 거겠지만... 네게 있어서 1순위는 기억이라고 할 수 있어. 그렇지 않니?
여전히 난 목숨보다도 기억을 우선시하고 있나?
그것에 목을 매진 마렴. 네 목이 매달릴 수 있어.
나나시: 그렇지만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는 채로 살아남는다면… 그걸 삶이라고 부를 순 없을 거라고 생각해.
내 말을 들은 히무로의 눈빛은 차가웠다. 어찌나 차가운지 오히려 조용히 불타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히무로 시라베: 나도 그런 생각을 하지.
나나시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 탑에 처음 왔을 때 나는 많은 것을 잊었다. 심지어는 메리마저 잊었다. 닿을 수 없는 존재라 하더라도 그녀를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기억을 잃은 삶은 삶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그러니 내가 나아갈 길은 명확했다. 모든 기억을 되찾고, 모든 수수께끼를 풀고, 탑에서 나가는 것.
히무로 시라베: 그리고 무언가를 떠올리려면, 우선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해. 살아남기 위해서.
나나시: 응… 히무로. 네 말이 맞아.
이런 곳에서 죽을 순 없다.
잃어버린 것을 모두 되찾고. 나는 이 탑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히무로 시라베의 기억:
사용되지 않은 클로로포름 - 미도리카와를 살해하는 데에 클로로포름은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미도리카와를 찌른 수단 - 클로로포름이 사용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녀를 쉽게 찌를 수 있을지가 문제이다.
나나시의 기억:
마유즈미 숙소의 창살 흠집: 마유즈미의 숙소를 찾아봤더니 미도리카와의 숙소 방향으로 창살에 흠집이 나 있었다.
새벽 1시의 전화 - 마유즈미는 새벽 1시에 미도리카와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미도리카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가 죽어 있었기 때문이라면…
마유즈미의 욕실용품 팩 - 마유즈미의 욕실용품 팩들에는 입욕제가 비어 있었다.
야가미 숙소의 창살 흠집 - 야가미의 숙소에도 미도리카와 숙소의 방향에 창살 흠집이 나 있었다.
야가미의 욕실용품 팩 - 야가미의 욕실용품 팩들에는 바디 워시와 여러 세안 용품이 비어 있었다. 소비가 빠르기 때문일까?
한 달 만에 돌아온 단크 타워입니다
11월 20일이 되면 단크 타워를 연재하기 시작한 지 1년이 되네요 ㄷㄷ
설정 변경이 있다는 걸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쓰다가 '히무로는 시라유키한테 반할 이유가 있는데 시라유키는 히무로한테 반할 이유가 없네? 이거 어쩌지?' 하면서 계속 고민하고 떡밥도 던졌는데 아무래도 추후 내용 전개도 편하게 하는 데엔 둘이 연인이 아닌 게 낫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히무로와 시라유키가 연인 사이가 아닌 것으로 몇몇 내용들을 좀 수정했습니다 두 사람을 지지하고 계시던 분들에겐 죄송합니다
추리 파트 쓰겠다고 이렇게 늦게 올린 건데 중간에 하기와라 모리 카이다 부분으로 사족이 너무 길어졌네요 씨발 뭐해
다음부터는 재판 파트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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