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의 구속. 포박감.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묶인 채 방 안에 갇히느냐. 묶이지 않은 채 감옥 안에 갇히느냐. 굳이 택일한다면 나는 전자를 선호한다.
적어도 그 감옥보다는, 어느 곳이라도 낫다.
내가 요청했기에 시라유키 히메리는 내게 총구를 계속 겨누어 주었다.
잠시 걸은 끝에 나와 시라유키 히메리는 카텟 기관의 범죄자 수용소에 도달했다.
규모는 작다. 현재 수용하고 있는 인원도 적다. 기관은 체포하고 취조할 뿐. 그 작업이 끝난 범죄자는 공공기관으로 후송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크고 견고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인물을 가두는 곳. 얼마 전 새로 증축된 그곳은 달랐다. 그곳 만큼은 더없이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아직 사용될 예정이 없었기에 경비도, 주변에 배치된 죄수도 없었다.
오직 나와 시라유키 히메리 뿐.
그 감옥은 아가리를 벌린 채 와야 할 자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폭포에서 물살에 휘말린 연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곰처럼.
운명과 카는 물처럼 흐르고 나는 그 흐름을 따르는 피조물이다.
사람도 아니지.
"여긴…"
"이 곳에 나를 가두는 것이 카텟 기관의 최종 목적이었을 테지. 두껍고 견고하군. 마치 재단의 실험실을 보는 느낌마저 든다. 그 모든 일의 끝에 종국에는 제자리라…"
"그래서 뭐야… 여기에 직접 들어가겠다는 거야?"
"이미 로의 비원에 대해 아는 한. 내가 그들에게 헌신할 일은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의심하며 사는 것 역시 지쳤다. 마지막까지 금수를 믿은 너마저도 의심하는 것에 지쳤다.
그러니 가장 나은 선택지다. 감옥에 갇혀 있다면 예전만큼 성가시진 않겠지."
"야. 히무로 시라베. 거짓말 마. 네가 날 의심했다면 여기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도망쳤어야지.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널 이용하겠다는 음모에 편승해서 좋을 게 뭐가 있어? 내가 널 속였다면 최대한 저항해야지! 카텟 기관의 모두를 적으로 돌려서라도!"
"상관없다. 네가 날 이용하겠다면. 그래도 좋다."
허무와 체념. 가슴이 서늘하다.
"뭐…?"
"이미 정했다. 괘념치 않기로. 최악의 경우를 상정했다. 내게 극복할 수 없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하며. 로는 날 포기하지 않고. 행운아는 이미 모든 것들을 조종해 뒀으며. 네 헌신도 노고도 전부 거짓에 불과했다고 가정했다.
그리고 신경 쓰지 않았다."
다시 한번. 시라유키 히메리가 뺨을 때렸다.
"안 아파?"
"감각 기관은 제거되지 않았다. 아직은."
"아프잖아. 그럼 무슨 생각이 들어? 되갚아주고 싶단 생각 안 들어?"
"날 자극하려 한다면 그만 두기를 권하지. 수저로 바다를 떠 먹이는 격이니."
"오해 마. 난 너한테 되갚아준 것뿐이니까. 내가 널 줄곧 배신한 거였어도 신경 쓰지 않겠다고? 내가 널 배신했다고 단정 짓는 거랑 뭐가 달라?!"
"본질적으로 그것과 같다."
"너 정말…!"
"어차피 의미 없지 않은가. 결과가 정해져 있다면 최악을 상정하겠다. 무례한 일이지. 네 명예와 노고에 침을 뱉는 격이다.
그러나 여전히. 너마저 믿을 수 없다. 구차한 일이다.
어차피 로에게 끌려갈 처지라면 차라리 기관원들의 소원을 이루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내가 말했지. 로가 찾아와서 널 데려와야 끝인 거라고."
"대단한 의지다. 하지만 네게 묻겠다. 과정은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이미 정해진 결과고 정해진 실패였다고 한들. 과정이 그것에 조금의 위안이라도 줄 수 있는가?"
답을 미리 정해 두고 묻다니. 바람직하지 못했다.
"그럴 수 없다. 책임은 사라지지 않으며 그것은 업보처럼 다가온다. 좋은 과정으로 악한 결과를 바꿔 보려고 한들. 그 책임은 오롯이 행동한 자의 것이다. 모든 후회를 안고 가는 것이다."
"내 행동에 대한 후회는 내 몫이지. 내 마음이야. 내가 멋대로 널 포기하지 않겠다고 한들 네가 참견할 바가 아니야. 웃긴 얘기지만."
"네 행동에 대한 후회는 네 몫이지. 질문이 하나 더 있다. 경험이 아니니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날 기관으로 데리고 왔나?"
"말했잖아. 네가 우리에게 총을 쏘지 않았고. 나는 거기에서…"
"내가 묻는 것은 그게 아니다!"
그렇게 소리친 뒤에야 내가 혼란에 빠져 있음을 자각했다.
"소리쳐서 미안하다. 이제 정말 끝까지 떨어진 모양이야…"
"됐어. 그렇게 자책할 거면 그냥 아무 말도 마."
"너그럽기도 하지… 내가 스스로를 경멸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내가 이런 너를 비난한다는 점이다."
팔이 떨린다. 쥔 주먹이 떨린다. 제 분을 못 이기고 힘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생각한다. 그 날 연구소가 무너지지 않았기를. 내가 온전하게 로가 되었기를. 연구소 밖과 세상 따위 처음부터 또한 앞으로도 몰랐기를. 감정의 존재와 내 한계에 대해서 처음부터 알지 못했기를.
너를…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기를. 네가 날 포기하지 않았기에 알 수 있었던 것들. 가능했던 것들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기를."
짧은 손톱이지만 살에 파고든다. 자국이 남는다.
손에 피가 스민다. 그것이 붉은색이 아닐까 두려워 차마 보지 않는다.
"그런…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일들을. 바라게 되었다. 그런 나 자신을 경멸하지 않을 수가 없다."
"히무로…"
눈 앞이 흐리다.
"대답해 다오. 왜 나를 카텟 기관에 데려왔지? 가능성을 보았다는 말은 하지 않길. 단지 가능성만으로 목숨을 걸기에 넌 명석한 사람이다.
나는 원론적으로 묻고 있다. 어째서 히무로 시라베를 거두었지?"
"개인적으로 말하라는 거야?"
"진실을 말하라는 거다."
"도저히 가만히 둘 수가 없었으니까."
무슨 뜻이지? 시라유키 히메리는 말을 이었다.
"넌 그때 스스로를 볼 수 없었겠지? 나와 부대원들이. 아니… 내가 본 너는, 당장이라도 들고 있는 총을 네 머리에 겨눌 것 같았어."
"내가 말인가? 그때는 자살 충동을 느끼지 않았는데."
"아니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 눈은 퀭하니 아무것도 안 비쳤고, 걸음걸이는 잠을 며칠 동안 안 잔 사람 같았어. 총 뽑는 속도는 번개처럼 빨랐지만.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어. 며칠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처럼. 삶의 목적을 다 잃은 도박꾼처럼 보였단 말이야.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꺼내 달라고 온 몸으로 외치는 것 같았다고. 알아? 이… 길고양이 같은 자식아."
믿지 못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외형적인 일면 만으로 가장 위험한 실험체를 기관에 데려왔다니.
너무나도 허술하고, 실없고, 엉성했다.
"나한테서 무슨 숭고한 뜻 같은 걸 기대했다면… 사람 잘못 찾았어. 난 성녀가 아니야. 재단의 연구소를 살피고, 그 끔찍함에 떨던 와중 나타난 너를. 내가 막지 않으면 분명 우리를 사살하고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릴 너를. 도무지 두고 볼 수가 없었을 뿐이라고.
정말. 그게 다라고…
왜. 실망했어? 카텟 기관의 토대를 만든 사람이 고작 인정(人情)에 휘말려서?"
부적절하다.
그러나 부도덕한 일은 아니다.
"아니. 전혀."
그녀는 내게서 사람을 보았다. 위태롭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나조차 보지 못했던 것을. 그녀는 보았다.
"오히려 고맙다. 내게 인간적인 면모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고맙다."
손을 들어 내 손톱이 낸 상처를 보았다.
피는 붉은색이었다.
스스로 안도했다는 사실에 냉소를 느끼는 와중. 시라유키 히메리가 손을 잡아챘다.
"세상에. 손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네가 이렇게 했어?! 너 정말…!"
시라유키 히메리가 내 손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빠른 시일 내에 손버릇 고쳐! 두고 볼 거야!"
"알았다."
시라유키 히메리가 내 손을 놓자. 느닷없는 정적이 있었다.
말했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길눈이 밝지 않아 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해야 저항할 수 있을지, 사람이 될 수 있을지… 흐릿하다."
"포기하지 않으면 돼."
"네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인가."
"네가 안 하고 있는 게 이것뿐이야."
할 말이 없었다.
"쉽지 않은 여정일 거야. 세상은 변질되었으니까. 전망이 어둡지. 하지만 그럴수록 한 줄기 빛이 눈에 잘 들어올 거야. 그 길을 따라."
"관념적이군."
"네가 뭘 빛으로 삼을지 알 수가 없으니 관념적으로 말하는 거야. 대충 어떤 느낌인지 감은 오잖아. 그거면 됐어. 시간을 들이면 돼."
"시간은 덧없이 흐르고 날 기다리지 않는다. 세상은 변질된 채 멈춰 있고 난 제자리를 걷는다."
"내가 널 기다릴게. 모두가 떠나더라도 나는 계속 널 기다릴게."
"네가 그 과정에서 겪게 될 일이 두렵다."
시라유키 히메리가 잠시 눈을 깜빡이며 나를 지긋이 보았고. 그 뒤 말을 이었다.
"나도 내 앞가림은 할 수 있어. 나는 네 말대로 천재 미인 만능 연구가니까."
어조는 야무졌으나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그런 말은 한 적 없다."
"여하튼. 내가 널 기관에 데려온 이상. 넌 내 카텟이야. 카텟 기관원이기 이전에 내 카텟이라고. 널 절대 버리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도 다른 이들을 버리지 말아 줘."
대답할 수 없었다. 시라유키 히메리는 계속 말했다.
"그 과정 속에서 금수조차 사람이 되고, 사랑이 태어나는 거니까."
시라유키 히메리의 새하얀 머리칼은 은은한 조명 밑에서 새벽의 하늘이 되었다.
눈동자에 그녀가 비쳤다.
그 순간.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둘은 없으리라는 확신을 느꼈다.
"있지. 내가 말한 사랑이란 건… 감정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거야. 알지?"
"이해했다."
그리고 나는 감옥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해했다며! 야! 어디 가?!"
"잠가 다오. 지금은 이 편이 가장 낫다."
"…역시 내 말주변이 영 별로였어?"
"전혀. 네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게도 심산이 있다.
포기하지 않았으니. 날 믿어 주겠나?"
시라유키 히메리는 피식 웃은 뒤 슬프다는 듯이 입꼬리를 내렸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거절을 해…"
시라유키 히메리가 스위치를 내렸다. 감옥의 문이 닫혔다.
"가도 좋다. 가서 네 위업을 즐겨라. 빈정거리는 것이 아니다. 네겐 그럴 자격이 있다."
"네가 감옥에 갇힌 이상. 넌 명목상 죄인의 신분이라 이제 내 쪽에서 찾아가긴 어려워. 이대로도 괜찮아?"
"마음 쓸 필요 없다. 이것이 마지막 대화일지도 모른다고 각오했으니."
시라유키 히메리는 슬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아직 너 밖에 모르는구나."
그리고 시라유키 히메리는 물러났다.
그 마지막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보았다.
'너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이런 일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을.'
잘 되었다.
히무로 시라베: 탑은 그렇지 못하다.
탑에 갇힌 이들의 외침만으로 대략적인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하기와라 우시오와 모리 레이코는 인질극을 벌였고. 성공했다. 23T5U130이 그들의 뒤를 쫓았다.
인질극만 제하면, 또한 총기가 카이다 쿠로하를 살해하기 위한 도구로 쓰인다는 것만 제하면 총기를 폐기하겠다는 발상은 나쁘지 않았다. 그 발상에서 인질극과 살해를 제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겠지만.
다른 이들은 미도리카와 아쿠토의 전용실에 난 화재를 진압했다. 분명 창고에 소화기가 몇 개 배치되어 있었지.
히무로 시라베: 그러나 모노로그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탑에 이 정도의 손상이 생겼다면 살인 게임의 관리자는 그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그런데 어째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
히무로 시라베: 다른 할 일이 있는 것인가.
살인 게임의 관리자가 살인 게임을 관리하고 있지 않다면,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살인 게임의 관리자에게 그런 것은 없다. 혹시 외부에서의 도움을 차단하기 위해 간 것인가?
히무로 시라베: 탑을 관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관리하고 있을지도.
그 자리에 없었던 이들은 나, 마유즈미 나데시코, 후루미나미 나몬, 미도리카와 아쿠토, 칸나즈키 시노부, 카나리 케이토, 그리고 카이다 쿠로하다.
히무로 시라베: 일곱 명 중 누군가에게. 모노로그가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다.
더 단크 타워
챕터 1: < 죽여 마땅한 사람 둘 >
"과정은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이바라가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23T가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23T5U130: 전화받고 왔어. 저 안이야?
이바라 쿠리스: 저 새끼들 좀 막아 주라. 23T! 이거 조졌어!
그 순간. 미도리카와의 전용실 안에서 열기가 치솟았다. 불이었다.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던 나를 누군가가 거세게 끌어당겼다.
야가미 토가: 몸을 피합시다! 안에서 폭탄이 터질지도 몰라요!
이바라 쿠리스: 어. 어디로 가야 하지?!
토키와 아유키: 일단 위층으로! 밀지 말고 빠르게 움직여!
23T5U130: 빨리 몸을 피해. 저 둘은 내가 맡을게.
나나시: 조심해. 23T!
23T는 주저 없이 화염 속으로 뛰어들었고, 토키와의 지시대로 우린 위층을 향했다.
캐롤 브라이트: 미도리카와 씨와 마유즈미 씨는 아직 아래층에 계시잖아요. 갇혀 계세요! 어떻게 해야 하죠?
나는 후루미나미가 그린 바 있었던 방의 배치 구도를 생각했다.
나나시: 미도리카와의 전용실은 두 사람이 갇힌 곳의 반대 편에 있어요. 한 층이 전부 타는 게 아닌 이상… 두 사람은 무사할 거예요.
나이토 유즈루: 그 안에 폭탄 있다고 했잖아! 그게 다 터지면… 썅! 토키와. 열쇠 줘 봐! 안에서 최대한 빨리 데려올 테니까!
야가미 토가: 폭발의 여파가 한 층을 전부 파괴하진 않을 텐데요.
이바라 쿠리스: 아니. 잠깐! 아. 젠장! 말하는 게 늦었는데. 안에서 폭탄은 안 터져. 하기와라 놈이랑 모리가 다 가져갔어.
토키와 아유키: 그럼 불만 끄면 돼. 소화기가 창고에 몇 개 구비되어 있었을 텐데…
나이토 유즈루: 가져오면 되잖아! 빨리 가자!
칸나즈키 시노부: 갈 필요 없어. 여기 있지롱!
4층에서 칸나즈키가 소화기를 세 개 들고 나타났다. 어쩐지 안 보인다 했더니. 창고로 간 건가?
나이토 유즈루: 와. 타이밍 죽이네! 그거 던져!
나나시: 던지는 게 아니라 건네줘야…
칸나즈키 시노부: 자! 받아!
칸나즈키는 그대로 소화기 세 개를 계단 아래로 내던졌다.
이바라 쿠리스: 건네 달라고! 미친 새꺄!
나이토가 공중에서 두 개를 잡았고. 야가미가 한 개를 받았다.
이바라 쿠리스: 근데 이걸 잡네! 니들 존나 짱이다?!
나이토 유즈루: 감탄할 시간 있으면 급한 불부터 끄자. 말 그대로!
나이토 유즈루: 자! 나나시. 받아!
나나시: 어…?!
나이토가 내게 소화기를 휙 던졌고. 난 그걸 잡았으나 소화기에 실린 힘 탓에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나나시: 아. 아야…
나이토 유즈루: 억! 미안!
이바라 쿠리스: 던지지 말고 건네 달라니까! 이 미친 놈들아!
칸나즈키 시노부: 이름 없는 자야. 괜찮니? 일어나 보렴.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괜찮으세요?
나나시: 괘. 괜찮아요…
칸나즈키 시노부: 그럼 됐고!
내가 잡고 있는 소화기를 칸나즈키가 끌어당기자. 나는 졸지에 그 힘으로 몸을 일으켰다. 칸나즈키는 소화기의 안전핀을 뽑고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미도리카와의 전용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야가미 토가: 조심하세요. 칸나즈키 씨. 마음만 앞서다간 불에 다치실 겁니다.
야가미와 나이토도 소화기의 안전핀을 뽑았다. 나이토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이. 불을 쳐다보며 거칠게 소리쳤다.
나이토 유즈루: 빗자루 쓸듯이 뿌리는 거야. 알지?! 가자!
칸나즈키 시노부: 개비스콘!
나이토의 외침과 동시에. 세 줄기의 이산화탄소가 맹렬한 화염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하기와라는 주위를 돌러보며 잘도 모리에게 떠벌대고 있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서 그냥 무기를 내 숙소로 가지고 왔던 거야. 별생각 없었어.
모리 레이코: 별생각 없이 했다기엔 대작업이군.
하기와라 우시오: 진짜 별 생각도 목적도 없었다니까. 언젠가 쓸 일이 있겠거니 싶었던 거라고.
모리 레이코: 자각하지 못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행동하는 것부터 넌 비정상적이다. 고작 그런 이유로 도끼를 숙소에 구비해놓는 것이 정상인의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나?
하기와라 우시오: 허허. 이 친구 좀 보게. 날 비정상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려고 하네? 하지만 어림도 없지! 난 좀 모자라긴 해도 음모 꾸미는 스타일은 아니야! 뻑 유.
모리 레이코: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면 굳이 스승 노릇을 하진 않겠다. 자신이 아는 것조차 모른다고 여기는 자는 제자로서 최악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뭐라는 겨. 뭔 개소린진 모르겠는데 나한테 스승 노릇을 할 경우의 수가 있다는 게 소름 돋는다! 으웩!
23T5U130: …….
23T는 신중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에 반해. 모노로그는 23T가 있는 방향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모노로그: 이제 800m 안에 진입했군. 몸을 숨기는 게 좋을 거다.
카이다 쿠로하: 이미 숨기고 있어. 하기와라 우시오와 모리 레이코랬지? 하. 총을 가지고 오면 뭐라도 될 줄 알았나 보네.
카이다는 자신의 체온을 낮춘 채 장미 꽃밭에 엎드린 채였다. 적외선 고글로 발견할 수 없도록. 오직 그녀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모노로그: 상당히 자신만만하구나.
카이다 쿠로하: 너도 알잖아? 내가 저것들 상대로 자신만만해도 되는 거. 그러니까 나한테 이렇게 달라붙는 거 아니야?
카이다 쿠로하: 저 녀석들이 날 죽이려고 쏴도 난 한 발도 안 맞아. 다 피할 수 있다고.
모노로그: 재미있군. 히무로 시라베와 미도리카와 아쿠토에게선 도망쳤으면서?
카이다 쿠로하: 망할 깡통이 개입했잖아. 그 자식은 대체 정체가 뭐냐? 너를 파괴할 수 있다면 예삿 놈은 아닐 텐데.
모노로그: 불청객이다.
카이다 쿠로하: 대체 어디서 온 불청객이냐고. 이 탑에 침입하는 게 가능하긴 해? 장미 꽃밭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것처럼. 장미 꽃밭에 들어오지 못하게 처리를 해 놨으면 되잖아.
모노로그: 잡담을 할 여유가 충분한가 보지?
카이다 쿠로하: 둘 밖에 없는데 그럼 충분하고 넘치지.
모노로그: 아. 내가 둘이라고 했던가?
카이다는 모노로그를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카이다 쿠로하: 무슨 소리야. 그럼 셋이야? 넷이야?
모노로그: 셋이지.
카이다 쿠로하: 뭐. 나이토 유즈루라도 따라붙었나? 걔는 그럴만한 놈이지.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일단 덤비고 보는 놈…
카이다 쿠로하: 분명 하기와라와 나이토가 친구였지? 혹시 모리와 나이토도 친구냐?
모노로그: 물으면 대답해줄 것 같나? 네 악취미에 어울릴 생각은 없다.
카이다 쿠로하: 후루미나미 나몬이랑 히무로 시라베도 꽤 친해 보였는데. 몸 좀 상하게 만들어줄 걸 그랬어… 아쉬워 미치겠네.
카이다 쿠로하: 아무튼. 나머지 한 명은 누군데?
모노로그: 23T5U130.
카이다는 고개를 홱 돌려 모노로그를 노려보았다.
모노로그: 흠. 왜 그러지? 갑자기 자신감이 떨어졌나? 격려라도 해 드릴까.
카이다 쿠로하: 나랑 장난해?! 23T가 있으면 말을 해 줘야 할 거 아니야!
모노로그: 자신이 있다면 그 자리에 23T가 있어도. 너는 그들을 죽일 수 있다.
카이다 쿠로하: 처음부터 23T를 발견했을 거면서…! 이제 어쩌자는 거야. 네가 어떻게든 막았어야지!
모노로그: 다른 것은 몰라도 23T를 막을 순 없다. 하기와라 우시오와 모리 레이코라도 막아야 했을까? 네 목표가 그들인데.
카이다 쿠로하: 네가 얼마나 망쳐 놨는지 알기나 해?! 이제 어쩔 거야!
모노로그: 이 정도도 처리하지 못한다면 내 동업자로 두기엔 부족하지. 아무리 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내 명령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가치가 없다.
모노로그는 책장. 입술을 비틀며 씨익 웃었다.
모노로그: 네 가치를 증명해 봐. 혹시 자신이 없나?
카이다 쿠로하: …….
모노로그: 실망스럽군. 그토록 강한 신체를 가졌으면서 조금의 위험도 감수하지 않겠다니…
카이다 쿠로하: 네가 뭘 몰라서 그래! 저 자식은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진짜 괴물이야.
모노로그는 카이다를 보며 끌끌 웃었다.
모노로그: 내가 23T5U130에 대해서 모른다고? 하기야 네 입장에선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
모노로그: 아무튼.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다면야 다른 일을 맡기도록 하겠다.
카이다 쿠로하: 다른 일이라니?
모노로그: 몸을 숨겨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근처에 인기척이 들리자 난 문에 대고 말했다.
히무로 시라베: 비상 상황이다. 문을 열어 주겠나?
나이토 유즈루: 아. 맞아. 그래! 포박 풀어줘야 하는 것도 있으니까 일단 열자.
토키와 아유키: 좋아… 후루미나미와 마유즈미도 포박을 풀어 줘.
열쇠의 짤랑임. 누군가에게 열쇠를 양도했다.
또 다른 배신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그 열쇠를 타인에게 맡긴다니. 아쉬운 판단이었다.
칸나즈키 시노부: 그럼 대녀올게.
야가미 토가: 미도리카와 씨는 어떻게 할까요.
캐롤 브라이트: 일단 총이 없으니… 미도리카와가 하실 수 있는 일 역시 무척 줄어들 거예요.
야가미 토가: 그렇다고 그에게 자유를 줘선 안 됩니다.
토키와 아유키가 문을 열었다. 나이토 유즈루는 내 숙소로 들어와 밧줄을 툭툭 끊었다. 그는 맨손이었다.
풀려났지만 신체의 자유를 기뻐할 세는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그의 다리는 풀어 주더라도 손은 묶어 둬야 한다. 그가 총을 숨겨 두었더라도 손으로 총을 쥘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니.
야가미 토가: 좋은 지적입니다.
숙소의 밖으로 발을 내디딘 순간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숙소 안에서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안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온몸이 묶여 있을 텐데 어떻게?
온몸을 문에 내던지고 있는 것일 테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잇…챠! 이거 열어 줘! 히무로! 이바라! 얘들아. 괜찮아?! 뭔 일 이래?!
히무로 시라베: 이바라 쿠리스는 무사하다. 너는 어떤가?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도 말짱해! 넌 괜찮아? 안 다쳤어? 후루미나미는? 미도리카와는?
히무로 시라베: 무사해서 다행이다.
이바라 쿠리스가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숙소 문을 열었다.
이바라 쿠리스: 짜잔! 다 잘 살아있으니까 걱정 마. 하기와라 놈이랑 모리가 일을 잘 하긴 했나 봐. 방 안이 다 타서 검댕만 남았는데 안에서 뭐가 터지진 않더라고.
캐롤 브라이트: 많이 놀라셨죠? 안에 갇혀 계신 사이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나나시: 마유즈미가 숙소가 아니라 전용실에 갇혀 있었으면 불이 잘못 옮겨 붙었을지도 몰라요. 천만다행이죠.
마유즈미 나데시코: 캐롤 씨랑 나나시도 좋아 보이네? 아! 정말 다행이다. 히무로 너는 어때?
히무로 시라베: 나 또한 평소와 같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나의 얼굴을 천천히 관찰한 뒤 말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정말? 히무로. 너 안 괜찮아 보여.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왓스으으으은! 자네 무사한가?!
히무로 시라베: 아.
후루미나미가 곰방대를 물고 계단을 내려왔다. 급박해 보였다.
칸나즈키 시노부: 신바람이 났구나.
칸나즈키가 그녀를 뒤따르며 중얼거렸다.
후루미나미 나몬: 왓슨. 자네 무사하군! 다행일세. 정말로 다행이야!
히무로 시라베: 나를 네 조수인 양 말하지 마라. 불쾌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나와 후루미나미 나몬을 번갈아서 보았다.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후루미나미 나몬의 망발을 모르니. 당연한 일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럼 평소의 말투로 돌아올게. 나도! 나도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해 줘! 응?
히무로 시라베: 싫다.
후루미나미 나몬: 매정해잉.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차도남이 됐어?
히무로 시라베: 별다른 일 없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별다른 일이 없긴! 그 싫은 티 못 내던 히무로가 이렇게 거부감 팍팍 드러내는 거 보면 모르겠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둘이… 다퉜구나?
히무로 시라베: 일방적인 시비였다.
후루미나미 나몬: 난 원래 히무로가 더 덜컹덜컹한 면이 있어서 좋지만. 이런 너도 나쁘지 않네. 특히 나를 내려다보는 듯한 그 눈빛이… 이상하게 매력적이야.
후루미나미 나몬: 앗. 지금 다시 보니까 그냥 키 차이 때문에 날 내려다보는 거구나! 이런!
농담인가? 재미는 없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쯧! 달갑지 않은 사실이야. 옛 연인은 죽은 것 같으니 그만 잊어버리고 같이 놀잔 말이 그렇게 심해?
마유즈미 나데시코: 뭐어?! 후루미나미. 너 그런 말을 했어?!
후루미나미 나몬: 저런. 왜 꼭 다른 여자를 사귀어야만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이 말이군요. 하지만 이건 진지한 얘기인데요. 난 정말이지 시라베가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식으로 한 여자 하고만 계속해서 사귄다는 건 한심할 정도로 나쁜 태도예요. 모든 인간은 서로 공유해야 하니까요.
'멋진 신세계' 의 인용이다. 그 소설의 안에서는 모든 이들이 결혼이라는 개념 없이 자유롭고 난잡한 연애를 즐긴다.
그 책을 좋아한 적이 없다.
히무로 시라베: 뻔뻔스러운…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도발에 넘어간 자신이 다시금 한심했다.
그러나. 빌어먹을 멋진 신세계.
"왜 아무렇지도 않을까. 난 그게 궁금해. 네가 태어난 목적은 다른 이들을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해서잖아. 로의 탄생 목적 자체가 그렇다고. 다른 이들을 멋진 신세계로 이끌 지도자 8명. 서로를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8명. 그중 한 사람이 너인데 왜 아무렇지도 않아? 네 백성들한테서 핍박을 받는 건데 억울함 느낀 적 없어?
난 왜 이렇지. 난 왜 완전하지 못하지. 난 왜 분리될 뿐이지. 내가 있을 곳은 어디지. 이런 생각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엄격한 기준을 통해, 초인을 세우기 위한 토대로 걸맞은 자들만이 선발된다. 또한 그들을 더욱 그 역할에 걸맞도록 개조한다. 다듬는다. 원석이 보석으로 변할 때까지. 이것이 우리들의 멋진 신세계이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다섯 개의 계급제. 그리고 알파 중에서도 더욱 뛰어난 알파. 알파 플러스. 그것은 곧 초인이다.
재단의 목적에는 멋진 신세계가 인용되어 있었다. 그리고 하필 후루미나미 나몬이 인용한 것이 멋진 신세계였기에. 과민하게 반응했다. 부적절하기에 생각을 가라앉혔다.
토키와 아유키: 히무로. 진정해.
히무로 시라베: 이미 그렇게 했다.
애시당초 후루미나미 나몬은 나와 시라유키 히메리의 사이를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으니, 무지에서 비롯된 도발로 치부하고 걸러듣는 것이 적절한 대응이었다.
나나시: 후루미나미. 그건 좀… 그렇다.
캐롤 브라이트: 후루미나미 씨. 굉장히 무례해지셨군요. 약간 무섭기까지 해요.
마유즈미 나데시코: 응! 완전 에바야. 사과해! 나쁜 말이잖아!
후루미나미 나몬: 난 옛 저녁에 시라베 히무로에게 사죄의 뜻을 전했소. 그가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히무로 시라베: 야가미 토가는 미도리카와 아쿠토의 숙소로 간 것인가?
나이토 유즈루: 어. 손만 묶어두려고 미도리카와를 찾아갔어.
후루미나미 나몬: 이젠 대놓고 화제를 돌리는군. 이 관계를 어떻게 회복해야 하나…
답을 몰랐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야가미 토가: 그렇게 당신의 전용실 안 물건들은 전부 처분되었습니다. 흔적도 없이 다 사라졌어요. 안에 남은 것은 탄소뿐이더군요.
야가미는 미도리카와의 몸을 감싼 밧줄을 단번에 끊어버렸다. 손만 남겨두는 것은 잊지 않았다. 아무리 총기가 없다고 한들 미도리카와가 위험인물인 것에 변함은 없었다.
야가미 토가: 당신의 전용실이 그렇게 되어서 유감입니다. 하지만 총기는 탑에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네 말이 맞아. 다른 이들에게 악용될 바에야 차라리 다 타 버리는 게 낫지. 모리와 하기와라는 잘했어.
야가미 토가: 순순히 인정하시는군요.
미도리카와 아쿠토: 부탁이 있는데. 손 좀 풀어주겠어?
미도리카와의 말에 야가미는 고개를 저었다.
야가미 토가: 안 됩니다. 무슨 일이 날지 모르니까요.
미도리카와 아쿠토: 마지막 부탁이라 생각하고 들어 줘. 유서라도 써 두고 싶어.
야가미 토가: 유서요? 자살이라도 하실 작정입니까?
미도리카와 아쿠토: 아니… 전혀. 오히려 살고 싶어서 안달이 날 지경이야. 내게 살 자격이 있다면 살아보고 싶어.
미도리카와 아쿠토: 그런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 되니. 내가 살아왔던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어 졌어.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기를 바라게 되었어.
야가미 토가: …대체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캐롤 씨는 당신에게서 무엇을 봤죠?
미도리카와 아쿠토: 지금 여기선 말할 수 없어. 오늘 나를 찾아오면 얘기해 줄게. 모든 것을.
야가미 토가: 네. 캐롤 씨가 그렇게 전하더군요. 당신에게 찾아가 보라고요.
야가미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가미 토가: 솔직히 당신에게 믿음이 가진 않습니다. 저도 꽤 험한 꼴 보며 살았죠. 그렇기에 전용실에 총 모형이 놓여 있습니다. 이걸 보고 반성이라도 하라는 듯이 말이에요.
야가미 토가: 그런데 총이 전용실 안에 빼곡히 쌓여 있다니. 당신의 정체에 대한 두려움이 앞섭니다. 하지만 제가 물어도 이 자리에선 대답하지 않으시겠죠. 답답한 일이군요.
야가미 토가: 고등학생의 나이에 이 정도로 총기와 연관되어 있었다면 내가 알 법도 한데….
야가미는 미도리카와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 미도리카와의 몸에 묶인 밧줄을 풀었다. 사인펜까지 건네주었다. 연필이나 만년필처럼 날카롭지 않아 무기로 사용될 염려도 없는 필기도구였다.
정신을 잃은 미도리카와를 숙소에 가둘 때. 방 안을 나이토가 샅샅이 뒤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방 안에는 총기도 흉기도 없었다.
야가미 토가: 유서를 쓰실 시간은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미도리카와 아쿠토: 몇 분이면 충분할 거야. 생각은 예전에 다 정리해 뒀으니까.
미도리카와는 야가미가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유서를 썼고. 순순히 손을 묶였다.
야가미 토가: 잘 되었습니다.
야가미 토가가 절묘한 순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 모노로그가 바닥에서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무로 시라베: 모노로그. 왜 왔나? 탑에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네가. 무슨 연유로 나타났나?
모노로그: 다른 곳으로 번질 화재는 아니었다. 가만히 뒀으면 땔감 없이 죽을 불이었다.
모노로그: 번질 불이었다고 해도, 살해의 도구로 그 불이 사용된다면 꺼선 안 되지. 누군가가 죽기 전까진.
정연한 말이다. 그러나 의심은 남았다.
모노로그: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려고 했지만 그 열쇠가 살해를 위해 쓰이지는 않을 것 같군.
토키와 아유키: 그래서?
모노로그: 열쇠가 살인의 도구로 사용되면 모를까. 살인을 막는 도구로 사용되어선 안 되지.
야가미 토가: 모노로그 씨. 그건 무슨 말씀이시죠?
모노로그: 말로 하진 않겠다.
모노로그는 의미심장하게 말한 뒤 숨을 들이마셨다.
예상치 못한 돌풍이 불었다.
주변의 바람이 모노로그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태풍의 중심부처럼 모노로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토키와 아유키: 뭣…?! 잠깐!
토키와 아유키가 그렇게 소리쳤다. 왜인가 하니. 모노로그의 입 안으로 8개의 열쇠가 전부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바람 속에서 그것들은 잠깐 서로 짤랑였고, 모노로그가 그것을 꿀꺽 삼키자 돌풍이 멎었다.
히무로 시라베: 이게 무슨 짓이지?
모노로그: 열쇠는 전부 너희들의 숙소와 전용실로 돌아갔다. 가서 확인해 봐도 좋다.
모노로그의 입으로 들어간 열쇠가. 숙소와 전용실에 나타났다?
열쇠의 복사본을 미리 배치한 뒤 원본을 회수한 것이겠지. 눈속임이다.
하지만 만약 눈속임이 아닐 경우엔…
토키와 아유키: 이건 부당한 짓이야. 모노로그! 당장 그 열쇠들을 내게 내놔!
모노로그: 변명이나 궤변은 소용없다. 너는 그 열쇠들을 살해에 쓸 의향이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그것을 묵과할 이유도 사라지지.
불합리하다. 그러나 이것이 살인 게임이다. 살해를 유도하기 위한 조정은 어쩔 수 없다.
후루미나미 나몬이 말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나야 좋긴 한데… 이러면 다른 애들 입장에선 꽤 불안해지겠는걸?
야가미 토가: 미도리카와 씨의 손은 묶였지만 다른 세 분의 손은 자유로워졌으니까요.
토키와 아유키: 그러니 이제 다시 묶어야겠어.
히무로 시라베: 지당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 또 묶여야 하는구나.
캐롤 브라이트: 하지만 네 분을 언제까지 감금해야 할까요? 식사는 저희가 가져다 드린다고 해도. 이 감금은 매우 허술하잖아요.
캐롤 브라이트: 말이 감금이지. 사실 네 분은 언제든지 밖으로 나오실 수 있어요. 묶인 손으로도 문의 잠금을 푸는 것 정도는 가능하니까요.
칸나즈키 시노부: 그렇게 보면 사실 가두는 게 별 의미가 있나 싶어. 그치?
토키와 아유키: 일단 내일까진 손을 묶어 두고. 상황을 보자.
야가미 토가: 내일이 올지조차 모르겠군요. 만약 카이다 씨가 하기와라 씨와 모리 씨가 아닌. 이 탑을 노리고 있으면 저흰 위기에 처합니다.
야가미 토가: 23T 씨가 올 때까지 가만히 서 있을 수도 없으니. 어렵게 되었어요.
토키와 아유키: 23T를 불러도, 23T는 오지 않을 거야. 올 수 없어. 하기와라와 모리가 카이다를 죽이겠다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히무로 시라베: 둘의 총기 탈취는 카이다 쿠로하가 총기를 노리고 그들에게 접근할 것이며, 그들이 카이다 쿠로하를 사살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세워졌다.
히무로 시라베: 그러니 카이다 쿠로하가 탑을 노린다면. 우리는 카이다 쿠로하에게 대항할 수 없다. 무기도 없으며, 있다고 한들 카이다 쿠로하는 규격 외이다.
이바라 쿠리스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이바라 쿠리스: 그래도 그냥 앞문을 열어줄 순 없잖아. 사람 하나 죽이고 가세요. 하고 그냥 둘 순 없어…
후루미나미 나몬: 가장 가능성 있는 방안은 이거지. 다들 빗장 걸어 잠그고 23T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
나이토 유즈루: 그게 통하진 않을 것 같은데.
칸나즈키 시노부: 통할 거야. 아마. 적어도 힘쓰는 사람 셋이서 탑 주위를 순찰하는 것보단 낫잖아.
나이토 유즈루: ……아. 그렇구나.
나이토 유즈루는 순찰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야가미 토가: 전 사양하죠.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습니다. 저는 몸만 단련했을 뿐. 격투술은 그다지 연마하지 않았기에 별 도움도 안 될 겁니다.
칸나즈키 시노부: 나두! 저항할 수 있는 거에 저항해야지. 카이다는 말릴 수 없어. 거의 짱구야.
토키와 아유키: 일단… 오늘은 다들 숙소에 몸을 숨기는 게 나을 것 같아. 무책임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히무로 시라베: 무책임하지 않다. 그것이 가장 적절한 대응이다.
손이 자유롭다고 한들 카이다 쿠로하에겐 저항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세 명의 손만을 묶어 두는 편이 더 낫다.
다른 이들도 같은 것을 이해했는지, 생각조차 못했는지는 몰랐다.
잔혹하지만, 나의 일면은 네 명이 카이다에게 해코지를 당하더라도 그럴 만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금 손이 묶였고. 숙소 안으로 돌아왔다.
다른 이들도 숙소에 몸을 숨겼다.
히무로 시라베: 역시 서서히 감시자가 되어가는 모양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좋아… 간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미도리카와 아쿠토에게 전화를 걸었다.
손이 묶여 있었기에. 우선 그녀는 침대에 다이얼로그를 올려놓고 묶인 손으로 열심히 다이얼을 돌린 뒤. 통화가 연결되면 옆으로 누워 다이얼로그에 입과 귀를 가까이하려 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보는 이도 없으니 누가 뭐라 하리오?
그러나 미도리카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 왜 안 받지?
마유즈미의 입장에서는 낭패인 일이었다. 분명 캐롤 씨에게서 미도리카와를 찾아가 보라는 전화를 받았으나 단신으로 찾아가기엔 좀처럼 겁이 났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동행하지 말고 꼭 혼자 가라고 캐롤 씨에게서 언질을 듣기도 했다.
마유즈미는 두 번 더 전화를 걸었으나. 미도리카와는 한 번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역시 직접 찾아오라는 건가…? 직접 찾아오지 않으면 전화는 받지도 않겠다는 미도리카와의 표현일지도 몰랐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렇다고… 꼭 오늘 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랬다. 분명 꼭 오늘 오라는 말은 없었다. 마유즈미는 두려움과 피곤함에 그 이유를 가져다 붙이고. 잠에 빠져들었다.
나나시는 마유즈미 나데시코와 비슷한 처지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마유즈미가 두려움 탓에 만남을 미루었다면 나나시는 피곤함 탓에 만남을 미루었다는 점이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벌떡 일어나 다이얼로그를 보았다.
시간은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나시: 아…! 미도리카와를 찾아갔어야 했는데!
캐롤 씨가 찾아가 보라고 말했었는데. 깜빡 잠에 들어 버렸다.
나나시: 아… 미도리카와가 기다렸을 걸 생각하면 너무 미안한데….
꼭 어제 찾아가라는 말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나시는 지금이라도 미도리카와를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카이다가 무섭긴 했지만 날이 밝았으니 그녀도 섣불리 날 노리지는 않을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하며 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내가 본 광경은…
반쯤 열린 문에 끼워진 채 잠든 것처럼 보이는. 토키와 아유키의 모습이었다.
토키와 아유키: 쿨… 푸우…
나나시: …진짜 자고 있네?! 토키와. 뭐 하는 거야! 큰일 나려고 그래?!
토키와 아유키: 음. 나나시…?! 아. 큰일이다!
토키와는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벌떡 일어섰다. 혈색이 돌던 그의 얼굴에서 피가 빠져나와. 그는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다.
토키와 아유키: 나나시. 지금 몇 시야?!
나나시: 어… 7시.
토키와 아유키: 5시간이나 지났어! 이건 내 실책이야. 내가 다 망쳤…
토키와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바닥에 거의 엎어지던 그는 벽에 팔을 기대어 겨우 중심을 잡았다.
나나시: 조심해. 토키와!
토키와 아유키: …세상에. 카이다가 누굴 죽이기라도 했으면. 난 절대로 날 용서할 수 없어.
나나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걱정 마.
나는 토키와를 달래며 미도리카와의 숙소를 향했다. 나는 미도리카와의 숙소 문을 똑똑 두드렸다.
토키와 아유키: 나나시. 미도리카와에게 용건이 있어?
음… 캐롤 씨가 비밀리에 알려 주셨는데. 토키와가 보는 동안 미도리카와를 찾아가도 되는 건가? 이거 비밀스러운 용건이었어야 했나?
약간의 불안함을 느끼며. 나는 토키와 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나시: 미도리카와. 음. 좋은 아침이야. 나 기다렸어? 미안해.
대답이 없었다.
나나시: 아. 자고 있나…? 미도리카와!
나는 문을 조금 세게 통통 두드렸다.
자고 있는데 깨우면 화 안 내려나. 안 그래도 다음 날에 찾아와서 미안한데…
나는 모리가 나를 깨우러 왔을 때.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를 생각했다. 이거 큰일 난 거 아닐까. 문을 두드리는 힘이 절로 빠졌다.
나나시: 음… 미도리카와?
무심코 손잡이를 돌려본 그 순간이었다.
토키와 아유키: 나나시. 무슨 용건이길래 그래?
나나시: 뭐야… 열려 있잖아?
토키와 아유키: 뭐?
토키와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왔고 나는 문을 열었다.
그 안에서 나는 보았다.
피.
그 안은 새빨갛지 않았다. 나는 피가 굳을 경우 검붉은 색으로 변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머리가 밑.
발이 위.
팔이 아래.
다리가 위.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피.
비린내. 비린내. 비린내. 비린내.
사라져 버린 생명의 흔적. 남은 것은 무정물.
나는 눈앞의 것이 현실이라고 좀처럼 믿지 못했다.
이런 건 본 적도 없었다. 당연히 없다. 이런 걸 어떻게.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피 냄새를 맡자 오감이 비명을 질렀다. 이 곳은 위험하다고. 도망쳐야 한다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탑에게서 도망칠 순 없다. 그래. 우리가 잊고 있었을 뿐 탑은 우리를 담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릴 쫓고 있었다.
토키와 아유키: 아…
토키와가 입을 벌렸다. 나는 아무 말도 섣불리 꺼내지 못했다.
거꾸로 매달린 미도리카와의 목과 가슴팍에 커다란 상처가 나 있었고. 그 안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잔뜩 적시고 있었다.
피.
그리고 또 피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더 단크 타워
챕터 1: < 죽여 마땅한 사람 둘 >
"과정은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책임은 사라지지 않으며 그것은 업보처럼 다가온다."
드디어 피해자가 발견되었습니다
1챕터에는 대충 이런저런 떡밥 넣고 해소해야지~ 하고 썼는데 사실 조금 급한 감이 없잖아 있네요
주인공 과거를 좀 더 천천히 푸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조금이라도 계획이 있으니 잘 될 겁니다
사실 개연성이 좀 부족하긴 하죠? 저도 쓰면서 이걸 진짜 어떻게 써야 하나 하고 계속 고민했습니다 히무로랑 시라유키의 대화 장면만 3일을 붙잡고 있었음
아무튼 여기까지 같이 달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고비를 하나 넘겼다는 느낌이 드네요
앞으로 재미있게 써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 > 챕터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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