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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1

더 단크 타워 챕터 1 - 20

by 도타싫어! 2020. 9. 9.

 

나시: ….

 

총알이 박힌 채 찌그러진, 끝부분이 붙어있는 쇠막대 두 개.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내 손 안의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전용실에서 쇠막대 두 개와 철사를 적절히 용접해서 그것을 만들어냈다. 짧은 시간 안에서 급하게 만든 물건이었기에 총이라는 이름이 과분할 정도였다. 아마 미도리카와도 이 물건을 조금만 자세히 보았다면 내 쪽에 시선도 총알도 낭비하지 않았을 터였다.

 

뒤늦게 손에 식은땀이 차올랐다. 이 총알이 내 몸에 꽂혔다면….

 

롤 브라이트: 빵!

 

나시: 와아아아악!

 

캐롤 씨가 내 귀에 대고 소리치자. 나는 화들짝 놀라 가짜 총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나시: 캐. 캐롤 씨?! 깜짝 놀랐잖아요!

 

롤 브라이트: 아하! 너무 놀라시는 거 아닌가요? 지금 제 손엔 총도 없는걸요. 더한 건 있지만요?

 

캐롤 씨는 자신의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까딱거렸다. 뭐지? 묘하게 유쾌하신데

 

나시: 캐롤 씨. 몸은 괜찮으세요?

 

롤 브라이트: 괜찮죠. 오히려 미도리카와 씨가 걱정이에요. 저도 터치로 상대를 기절시킨 건 처음인지라 언제 깨어나실지 모르겠네요.

 

나시: 정말 괜찮은 거 맞으세요? 심신 양면으로요.

 

롤 브라이트: 저는 당신도 걱정되네요. 나나시 씨. 무섭진 않으셨어요?

 

나시: 네… 지금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무서웠죠. 총알에 맞아 죽을지도 몰랐어요. 제가 여기에 살아있는 건 미도리카와가 절 살려 줬기 때문이에요.

 

나시: 미도리카와는 일부러 제 총을 맞췄어요. 마구잡이로 쏜 게 아니라 정확하게 제 총을 겨누었어요. 죽일 생각이 없다면 제 팔이나 손을 맞춰도 되지만. 굳이 총을 쏴서 떨어뜨렸어요.

 

나시: 아까까지 총을 후루미나미한테 겨누고 있었을지언정… 왜인지 미도리카와의 본판이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롤 브라이트: 네. 생각만큼 나쁜 분은 아니었어요. 미도리카와 씨는.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캐롤 씨는 미도리카와의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알고 싶지 않더라도 터치가 연결된 이상. 터치를 지속해야 했던 이상 그것은 필수 불가결했다.

 

미도리카와의 제압을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난 캐롤 씨의 선택을 지지했다. 가짜 총으로 미도리카와의 시선을 끈 것 역시 캐롤 씨가 강제적인 터치를 쓰실 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 순간을 맞닥뜨리자 나는 후회를 느꼈다.

 

잔뜩 고통스러워하던 미도리카와. 터치는 감전처럼 작용했다. 바로 직전에 캐롤 씨와 터치를 해 봤던 나였기에. 터치가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던 나였기에 나는 그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었다. 팔다리는 굳고. 저항할 방법은 없고.

 

할 수 있는 것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것뿐. 숨기고 싶은 비밀도 지키고 싶은 가치도. 과거도. 전부 강제로 보여진다. 상대의 것도 보고 싶지 않지만 봐야 한다. 누구도 원하지 않지만 그 일은 벌어진다.

 

세포 한 조각 한 조각이 비명을 지른다. 뜨겁고 따가운. 갉아먹는 듯한 얼얼함이 작렬한다. 눈이 빠질 것만 같다. 입에는 거품이 생긴다. 가위. 가위. 미용에 쓰이던 그것이 마침내 사람을 해친다. 머리카락이 조금 묻어날 뿐이던 가윗날에 피가 튄다. 사방에 튄다.

 

대동맥을 자른다. 힘줄을 자른다. 서걱서걱 살을 가르고 절개해 머리 안에 든 것을 꺼내고… 헤집는다. 먹어치운다. 세상에. 세상에.

 

나시: 윽….

 

비위가 상했다. 그 모든 고통이 상상되었다. 내가 그렇게 만든 미도리카와의 고통이… 느껴졌다. 내가 누군가를 상처입혔다는 죄책감에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

 

캐롤 씨를 돕기 위해 움직였다고 한들 그게 면죄부가 되지는 않았다.

 

롤 브라이트: 후회하세요?

 

나시: 후회하지는 않아요. 혹시 야가미나 캐롤 씨가 다쳤을 수도 있으니까요. 다시 그 자리에 간다면 전 똑같이 행동할 거예요. 그렇지만… 안타까워요.

 

롤 브라이트: 저는 조금 후회해요.

 

캐롤 씨는 담담하게 말했다. 슬픈 목소리보다 담담한 목소리가 오히려 더 서글프게 들렸다.

 

롤 브라이트: 제가 바로 총을 빼앗았다면 미도리카와 씨가 그렇게 되시진 않았겠죠. 제가 터치의 기능에 대해. 강제적인 터치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면 모든 일은 더 나았을지도 몰라요.

 

롤 브라이트: 심지어 저는… 여러분들께 터치를 쓴 일조차 조금 후회해요. 아무도 터치에 대해 몰랐다면. 그런 생각을 버릴 수가 없네요.

 

롤 브라이트: 그래도 다시 그 자리에 간다면 전 똑같이 행동할 거예요. 나나시 씨와 마찬가지로.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난 잠자코 캐롤 씨의 말을 들었다.

 

롤 브라이트:  결국 후회하더라도 달라지는 일은 없죠. 그저 안타까울 뿐이에요. 그러니 힘내서 움직여요.

 

나시: 네. 마유즈미에게 가 봐야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마유즈미의 숙소로 향했다.

 

그러나 석연치 않음은 내 마음 속에 그대로 남았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괜찮다는 대답을 주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 후루미나미의 목적에 대해 간결하게 말해 주었다.

 

무로 시라베: 그렇게 되었다.

 

이토 유즈루: 실패…? 진짜로? 아니. 지더라도 좋은 승부를 할 수는 있어. 하지만 지기 위해서 싸우는 건 좀 아니지!

 

이토 유즈루: 그건 상대한테 그냥 좆까라 하는 거라고. 기사는커녕 동네 싸움꾼도 일부러 져 주지는 않아!

 

리 레이코: 추구할 것이 없어서 실패를 추구한다니. 그보다 밑바닥 인생이 없군. 그런 저열한 자와 네게 속았던 나 자신이 수치스럽다.

 

가미 토가: 무엇보다 그 공작의 최종적 목표가 믿기지 않는 수준이군요.

 

바라 쿠리스: 야. 하기와라. 네 말이 맞았어… 잘 맞췄다. 너 돗자리 깔아.

 

기와라 우시오: 이게 맞춘 거야?! 이건 아니지. 시발. 무효로 해! 존나 소름 끼치네. 우리 쟤랑 영화 같이 봤잖아. 존나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 쿠리스: 잊으려 하고 있는데 굳이 말하지 마… 나도 좀 쫄린단 말이야.

 

무로 시라베: 재난 영화를 같이 봤군.

 

기와라 우시오: 후루미나미가 말해주디? 그래. 걘 아주 좋아하더라. 걔가 틀었으니까 좋아하겠지. 아무렴!

 

키와 아유키: 그래서 히무로. 후루미나미의 제안을 수락하진 않았지?

 

무로 시라베: 절대 안 한다. 앞으로 후루미나미 나몬을 가까이하는 일도 없다.

 

바라 쿠리스: 히무로 말에 따르면 선 많이 넘긴 했으니까 그럴 만 하지.

 

나즈키 시노부: 그래도 아깝다! 너희 둘 꽤 잘 어울렸는데. 궁합이 어느 정도 잘 맞아.

 

칸나즈키 시노부의 말은 썩 유쾌하게 들리지 않았다.

 

가미 토가: 두 분의 그런 면모는 본 적이 없습니다.

 

나즈키 시노부: 진짜야. 보여 줄까? 히히. 이거 원래는 돈 받고 하는 거야. 그치만 공짜로 봐 줄게!

무로 시라베: 사양하겠어.

 

나즈키 시노부: 안 돼. 이제 못 멈춰. 자. 보자. 디보자. 어디보자… 히무로는 2월 16일생. 후루미나미는 9월 16일생. 둘 다 16일에 태어났지?

 

나즈키 시노부: 히무로는 계산이 뛰어나고 이지적이며 강한 의지력을 가지고 있으며 기회를 포착하는 날카로운 눈을 가져 혼자서 계획 세우기를 좋아해.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협력하기도 하지만 늘 경계심을 늦추지 않지.

 

나즈키 시노부: 후루미나미는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있으며 침착하고 끈기가 강해. 대인관계에 있어 처세술이 원만해 융화력과 친화력이 돋보이고 적극적이면서도 기분파적인 기질이 있어. 부친과 불화하거나 사별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 아버님 건강을 항상 신경써야 해.

 

리 레이코: 그 미신적인 짓거리. 꼭 해야 하나?

 

나즈키 시노부: 일단 들어봐 봐. 타로 카드에서 2는 여사제. 9는 은둔자야. 둘 다 비밀을 감추고 있어. 비밀을 공유하기 좋은 사이라 할 수 있지.

 

바라 쿠리스: 이거 벌써부터 돌팔이 같은데…? 무당이 무슨 타로 카드로 점을 쳐?

 

나즈키 시노부: 난 그런 데에 편견 없어서. 아무튼 2와 9까진 좋은데 16일이 문제야. 16은 탑이거든. 탑은 좋지 않아.

 

탑. 이 검은 탑이 떠올랐다.

 

나즈키 시노부: 탑은 파괴와 격번을 상징해. 그러니 살면서 히무로와 후루미나미는 중요한 걸 하나쯤 부술 거야. 그로 인해 일어나는 변화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어.

 

나즈키 시노부: 서로 좋은 변화 쪽으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나쁜 변화 쪽으로 빠져버릴 수도 있지. 파멸적인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야.

 

무로 시라베: 굳이 계속해야겠나?

 

나즈키 시노부: 거의 끝나가. 아내가 이 운을 만나면 남편 이해함을 자신처럼 해야 해. 사랑이 깊어질수록 남편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꼬집고 덤빈다거나 몰래 의심한다거나 과거에 집착하면 긁어 부스럼이 돼.

나즈키 시노부: 그리고 그대로 된 것 같네. 쯧쯧!

 

기와라 우시오: 허… 이거 꽤 말이 되는데? 나 좀 혹했어. 나도 좀 봐주라.

 

나즈키 시노부: 돈 내.

 

기와라 우시오: 썅! 얼마?

 

실없는 이야기를 계속하는 이들을 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물었다.

 

무로 시라베: 왜 본론으로 넘어가지 않지? 내게 미도리카와 아쿠토에 대한 정보를 물어야 하지 않나?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의 동기밖에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떤 질문에 대답하고 어떤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지 생각하는 동안. 다른 이들을 보았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추측해 보았다.

 

무로 시라베: 아. 캐롤 브라이트가 이미 말했겠지? 그러니 내게 물을 필요가 없을 테지.

 

이토 유즈루: 아니. 캐롤은 미도리카와에 대해 한 마디도 안 했어.

 

무로 시라베: 뭐?

 

이토 유즈루: 그리고 네가 미도리카와에 대해 한 마디도 못 하도록. 내가 여기에 있고.

 

리 레이코: 나는 여전히 이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상담가가 실패한다면 나는 곧바로 널 추궁할 것이다.

 

어떤 경위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나이토 유즈루가 미도리카와 아쿠토에 대한 정보를 통제하고. 다른 이들이 그것을 묵인한단 말인가?

 

키와 아유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게. 이게 되게 복잡해서

 

무로 시라베: 캐롤 브라이트와 나나시는 마유즈미 나데시코에게 찾아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둘은 미도리카와 아쿠토에 대한 정보를 묻기 위해 간 것이 아니었나?

 

가미 토가: 네. 아닙니다. 그 두 분은 그저 마유즈미 씨를 달래주러 가신 것 같습니다.

 

무로 시라베: 그렇다면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부당하게 취조를 당하지는 않겠지.

 

안도감을 느낄 자격은 없었지만. 나는 안도했다.

 

리 레이코: 서예가가 취조를 당하는 것과 네가 무슨 상관이지?

 

무로 시라베: 그녀에게 미안하니까. 적어도 나 탓에 더 불이익을 받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기와라 우시오: 관심 없고! 자. 지금부터 설명 들어가겠습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우선 미도리카와가 누구인지

 

 

 

 

 

더 단크 타워

챕터 1: < 죽여 마땅한 사람 둘 >

"과정은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히무로와 후루미나미, 그리고 마유즈미와 미도리카와는 밧줄에 포박당하고 숙소에 갇혔다.

 

네 명의 숙소, 전용실에 쓰이는 열쇠들은 토키와가 맡아서 관리하기로 했다. 그보다 적합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 뒤 미도리카와의 진짜 정체가 무엇이었는지가 화두에 올랐다.

 

가미 토가: 어쩐지. 초고교급 무기상 무쿠치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는데 묘하다 싶었습니다.

 

이토 유즈루: 너 그쪽에서 일해 봤다며. 미도리카와로 추정되는 사람 없어?

 

가미 토가: 불법적인 사업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신분을 숨깁니다. 염색을 하고 몸을 가리면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하죠.

 

가미 토가: 미도리카와 씨와 신장이 비슷한 분들 중 얼굴을 가리던 분만 해도 열 분이 넘습니다. 그의 정체를 특정하기는 어려워요.

 

리 레이코: 그의 정체를 특정하고 있음에도 그를 옹호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야가미는 단안경의 알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미 토가: 음해는 그만두세요. 다들 왜 제게 미도리카와 씨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는지 모르겠군요. 캐롤 씨의 증언이 가장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키와 아유키: 그렇긴 하지만. 정보는 많을수록 좋을 테니까.

 

리 레이코: 정말 그게 다인가?

 

모리가 미심쩍은 눈빛을 토키와에게 쏘았다.

 

키와 아유키: 그게 다라니. 터치로도 알 수 없는 정보가 있다면 누구에게서라도 듣는 게 당연하잖아.

 

리 레이코: 그런 이유라면 타당하다. 나는 타당하지 않은 이유를 네가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기와라 우시오: 걍 본론으로 빨리빨리 넘어가자! 모리 이대로 냅두면 문장 구조 꼬아놓기 챌린지 1등 먹겠어.

 

바라 쿠리스: 요즘은 별 이상한 챌린지가 다 나오네.

 

기와라 우시오: 만담 그만하고! 빨리 본론! 빨리! 내 헛소리 받아주니까 만담 하고 싶어 지잖아. 빨리!

 

롤 브라이트: 네. 빨리 끝내도록 해요.

 

캐롤 씨는 어딘가 차분하게 보였다.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몸을 휘청이던 캐롤 씨는 시간이 지나자 차츰 컨디션을 되찾았다. 다행이었으나 나는 그녀를 보며 어딘가 불안을 느꼈다.

 

리 레이코: 상담가. 강제적인 터치로 읽은 내용을 말해라.

 

롤 브라이트: 말하고 싶지 않네요.

 

캐롤 씨가 단번에 모리의 요구를 거절하자. 솔직히 나는 당황했다.

 

나시: 어…? 네?

 

가미 토가: 무슨 말씀이시죠?

 

롤 브라이트: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캐롤 씨는 싫어하는 음식에 대해 말하듯이. 짧게 말할 뿐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는 등의 거부 의사조차 드러나지 않았다. 캐롤 씨는 그저 조용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당연하다는 듯이 반론이 이어졌다.

 

리 레이코: 상담가. 위조된 정보를 정정하는 것은 중요한 작업이다. 그걸 이해하지 못할 만큼 우둔하지는 않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니 말해라.

 

롤 브라이트: 말할 것인지 말하지 않을 것인지는 제 의사 아닌가요? 저는 이 정보에 대해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말하지 않을 거예요.

 

가미 토가: 그건 듣는 사람이 판단할 문제입니다.

 

롤 브라이트: …일리가 있긴 하네요. 저 혼자만의 판단이 틀렸을 가능성도 분명히 있죠.

 

키와 아유키: 휴… 그럼 미도리카와는 정말 누구인지 저희에게 알려주실 수 있나요?

 

롤 브라이트: 그건 거절할게요.

 

토키와의 얼굴에 낭패감이 떠올랐다. 다른 모두가 그랬다. '이제야 미도리카와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되었는데. 캐롤이 말하지 않으니 도무지 알 수 없다'. 다들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시: 숙소에 갇힌 세 명에게 물어보는 건 어떨까?

 

기와라 우시오: 굳이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캐롤이 한 마디만 눈 질끈 감고 하면 되잖아. 한 마디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나즈키 시노부: 그치만 그렇게 해줄 것 같지가 않아.

 

롤 브라이트: 잘 보셨네요. 전 미도리카와 씨의 정체를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다른 세 분께 미도리카와 씨의 정체가 무엇인지 추궁하는 것도 막겠어요.

 

산 넘어 산이라는 것처럼. 토키와의 미간에 큰 그림자가 잠시 드리워진 뒤 사라졌다. 다른 이들도 조그만 한숨을 토했다.

 

바라 쿠리스: 저. 캐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그렇지 않아? 총을 가진 사람 정체도 모른 채 하루하루 보내면 누가 죽을지 몰라.

 

리 레이코: 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기와라 우시오: 무슨 날?

 

리 레이코: 터치는 대상과 주체의 정신이 하나로 묶이는 작용이라지. 그것이 강제로 진행되었으니 원활하게 묶일 리가 없다.

 

리 레이코: 즉. 상담가의 정신에 무기상으로 알려진 자의 정신이 뒤죽박죽 섞이게 되었다. 상담가는 자신의 일부가 된 자를 차마 저버릴 수 없기에 그를 옹호한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

 

나시: 잠깐. 그럴리가

 

리 레이코: 오염되었다. 상담가의 사상과 사고는 무기상으로 알려진 자에게 오염되었다. 침식당했고. 지배당했다. 다들 경계해. 상담가가 언제 우리를 적대할지 모른다.

 

롤 브라이트: 잔혹한 가설이시군요. 하지만 틀렸어요. 전 미도리카와 씨가 저희와 동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시: 동료요…?

 

기와라 우시오: 어아하하하하하하!

 

의문과 당황의 분위기는 하기와라의 난데없는 폭소에 갈기갈기 찢겨 버렸다.

 

기와라 우시오: 동료래! 동료! 방 안에 사람 죽일 무기가 가득한 놈이. 동료?! 이야. 기막히다 기막혀! 우리 배꼽 전원처치다! 아~하하하하!

 

기와라 우시오: 그래서. 아까 그거 진심이야?

 

하기와라는 웃음이 멎은 뒤에도 슬며시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딘가 과장하는 투의 몸짓이었다.

 

롤 브라이트: 네. 진심이에요.

 

키와 아유키: 반대할게요.

 

리 레이코: 반대한다.

 

가미 토가: 반대합니다.

 

나시: 난… 찬성.

 

나보다 똑똑한 인원들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목소리를 내긴 어려웠지만. 난 결국 찬성을 택했다.

 

가미 토가: 나나시 씨. 왜 찬성하셨습니까?

 

나시: 미도리카와를 동료로 만들 수 있다면 탑이 더 안전해질 수 있잖아. 적어도 앞으로 계속 적대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해.

 

가미 토가: 적대하되 포박한 상태라면 문제없습니다.

 

나시: 그게 정상적이지는 않아.

 

가미 토가: 정상이요? 정상적이지 않은 건 방금 저희가 마주한 상황입니다. 네 명 정도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어요. 총이 겨눠진 후루미나미 씨. 미도리카와 씨에게 달려간 저와 캐롤 씨. 그리고 총에 맞을 뻔 한 나나시 씨. 당신은 죽을 뻔했습니다.

 

가미 토가: 정말로. 당신이 지금 살아있는 것은 단지 미도리카와 씨가 당신의 총을 쏘았기 때문입니다. 조준이 조금만 위로. 혹은 아래로 향했다면 당신은 이미 시체였습니다.

 

롤 브라이트: 우리가 그분의 적이었기 때문이죠. 아직까지는.

 

리 레이코: 앞으로도 적일 것이다. 왜 그토록 무기상으로 알려진 자를 이해하려 들지? 사람이 사살당할 위기에 놓였다. 중요한 것은 그 사실 하나 뿐이다. 왜 그를 옹호하려 드는 거냐?

 

롤 브라이트: 이런 일을 막아야 하니까요. 지금까지 저희는 미도리카와 씨를 위험으로만 여겼어요. 이제는 달라져야 해요.

 

리 레이코: 어째서지?

 

롤 브라이트: 미도리카와 씨는 저희에게 스스로의 정체를 말씀해주지 않으셨죠. 카이다… 씨를 적대하실 뿐이었어요. 그랬기에 잠재적인 위험으로 취급당했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죠.

 

롤 브라이트: 제가 여기에서 미도리카와 씨의 정보를 전부 말해 버린다면. 저희는 미도리카와 씨와 진정으로 동료가 될 기회를 잃어버릴 거에요. 전 그것을 잃고 싶지 않아요.

 

키와 아유키: 미도리카와는 위험해. 카이다와 대립하고 있으니 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롤 브라이트: 무기를 어떻게 관리할지 저희와 타협점을 찾을 수 있겠죠.

 

리 레이코: 과도하게 이상론적이다. 네가 무기상으로 알려진 자의 무엇을 알기에 확신할 수 있지?

 

롤 브라이트: 거의 모든 것을 알죠. 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어요. 미도리카와 씨는 저희의 동료가 될 수 있어요.

 

롤 브라이트: 제가 그렇게 만들 테니. 여러분 모두 한 번만 저를 믿어 주세요.

 

이토 유즈루: 으으음….

 

찬성표가 눈에 띄지 않자 캐롤 씨는 조용하게 덧붙였다.

 

롤 브라이트: 참고로 믿어주지 않으셔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전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거예요.

 

이토 유즈루: 그럼 고민할 거 없지. 정했쓰. 찬성! 원래부터 강제적인 터치니 뭐니 공작 피우는 거 마음에 안 들었어!

 

리 레이코: 넌 당연히 그렇겠지. 칸트주의자가 이성적인 판단을 하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이토 유즈루: 이게 시비를 끝도 없이 터네! 언젠가 미도리카와가 기회 잘 봐서 탈출하면 감당할 수 있냐? 감당할 수 없으면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게 상책이지. 적어도 시도는 해 봐도 되잖아!

 

가미 토가: 그를 계속 가둬두면 감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전용실 열쇠도 토키와 씨가 가지고 있으니 미도리카와 씨는 무기를 배급받을 수 없어요.

 

나시: 토키와가 노려지면 어떻게 해?

리 레이코: 죽음을 각오하더라도 열쇠를 넘겨주지 않으면 된다.

 

나시: 토키와에게 그런 독박을 씌울 필요는 없어! 미도리카와를 동료로 만들 수 있다면 많은 위험이 사라지잖아.

 

가미 토가: 지금 저희가 있는 곳 자체가 위험입니다.

 

리 레이코: 상담가가 막는다 한들 소용없다. 나는 반드시 무기상으로 알려진 자가 정말 누구인지 듣고 말 것이다.

 

이토 유즈루: 그럼 난 널 반드시 막으면 되겠네. 당분간 미도리카와 정보 뒤로 캐고 싶으면 먼저 나랑 싸울 각오는 해야 할 거야!

 

가미 토가: 꼭 해야 합니까?

 

키와 아유키: 잠깐! 잠깐! 잠깐. 얘들아!

 

분위기가 점점 고양되자 토키와가 앞으로 나섰다.

 

키와 아유키: 너무 과열됐어! 잠시 멈춰. 캐롤 씨. 잠시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롤 브라이트: 제가 자리를 피해서 모든 사건이 해결된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리 레이코: 그러지 않는다.

 

가미 토가: 당연하죠. 계속해야 합니다.

 

이토 유즈루: 계속하게? 난 상관없어. 오는 사람 안 말려!

 

키와 아유키: 그만하라고 했어!

 

토키와가 소리쳤다.

 

키와 아유키: 캐롤 씨. 쉴 필요가 없으시다면 마유즈미를 찾아가 주세요. 히무로. 후루미나미. 마유즈미 이 세 명이 어디까지 미도리카와의 정보를 알고 있고 언제부터 숨겨 왔는지. 그런 것들을 물어 주세요.

 

캐롤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토키와에게서 마유즈미의 열쇠를 받았다.

 

롤 브라이트: 필요한 일이긴 하니. 그렇게 할게요.

 

기와라 우시오: 감시할 사람도 하나 붙여! 둘이 뭔 얘기할지 아무도 모르잖아.

 

키와 아유키: 그래. 그럼… 나나시. 네가 가 줘. 그나마 너와 캐롤 씨가 마유즈미와 가장 친했으니 어떤 경위로 모든 일이 발생했는지 들을 수도 있겠지.

 

나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캐롤 씨와 계단을 내려갔다. 그 뒤.

 

나시: ….

 

나는 마유즈미의 숙소 밖에서 그녀와 캐롤 씨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엿듣고 있다기엔 조금 부적절할까. 나는 엿들을 의도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으니

 

그래. 엿듣고 있었다. 마유즈미의 울음소리는 숙소의 문을 뚫고 들렸다.

 

토키와는 케롤 씨와 나에게 마유즈미를 심문해 보라고 지시했다. 아마 그건 대외적일 뿐. 토키와는 캐롤 씨를 둘러싼 분쟁을 일단 종식시키려 우릴 마유즈미에게 보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마유즈미에게 심문을 진행하지 않았다. 그저 상담뿐이었다.

 

마유즈미의 숙소 문을 열었을 때. 마유즈미는 손가락으로 슬쩍 밀기만 해도 쓰러질 듯이 위태로워 보였다.

 

롤 브라이트: 안녕하세요. 마유즈미 씨.

 

유즈미 나데시코: …안녕하세요.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괜찮지 않았기에 적잖이 고민이 됐다. 마유즈미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훌쩍이고 있었다. 그녀의 고개는 계속 숙여진 채였고 어렴풋이 보이는 낯빛은 창백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와 후루미나미는 무사해요?

 

마유즈미는 고개를 살짝 들었지만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롤 브라이트: 두 분 다 다친 곳은 없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나시: 후루미나미도 걱정하는 거야? 후루미나미가 너랑 히무로를 배신했는데도?

 

유즈미 나데시코: 사실… 아직도 그렇게 믿기지는 않아. 이 탑에 처음 왔을 때 후루미나미가 나한테 바이올린을 연주해 줬거든.

 

유즈미 나데시코: 그런 악기를 두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라 엄청 들떴어. 재미있었고 아름다웠어. 새로운 게 참 재밌었어.

 

유즈미 나데시코: 좀 이상하긴 해도 후루미나미는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슬퍼. 뭘 물어보려고 오신 거예요?미도리카와의 정보 같은 거?

 

롤 브라이트: 아뇨. 미도리카와의 정보는 이미 알아요.

 

유즈미 나데시코: 네? 어떻게… 아앗…!

 

그래. 터치 때문이었다. 마유즈미의 고개가 다시금 살짝 밑으로 기울었다. 눈물은 조금 더 많이 고였다.

 

나시: 명목상으로는 세 명이 미도리카와의 정보를 얼마나 아는지. 그런 것들을 물어보려 온 거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롤 브라이트: 저희는 당신이 걱정돼서 왔어요.

 

유즈미 나데시코: 네?

 

마유즈미의 눈이 크게 떠졌고. 그 탓에 눈에 힘겹게 머물던 눈물들이 밖으로 흘러나와. 뚝뚝 떨어졌다.

 

롤 브라이트: 마유즈미 씨. 지금 굉장히 위태로워 보여요. 제게 죄책감을 느끼시나요? 제가 강제적인 터치를 사용하게 된 게 당신의 탓이라 생각하고 있죠?

 

유즈미 나데시코: 왜냐하면 그게… 사실이잖아요. 언제까지나 숨기면, 조금만 버티면 될 줄 알았어요. 바로 말했어야 했는데 내가 왜… 뭐라도 된 듯이 왜 그랬는지

 

마유즈미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롤 브라이트: 마유즈미 씨.

 

유즈미 나데시코: 죄송해요. 저 때문에 캐롤 씨가 이런 일을… 당하게 됐어요. 나 때문에

 

롤 브라이트: 마유즈미 씨. 제 말 들으세요. 마유즈미 씨!

 

나시: 마유즈미! 괜찮아?!

 

마유즈미는 공황 상태에 빠진 듯. 팔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렸다. 무언가를 듣고 있는 것처럼. 듣고 싶지 않은 사실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너 때문이야. 이 고통은 네 책임이야. 네가 그러지만 않았어도 저 사람이 아프지는 않았을 거야.'

 

나도 그 목소리를 알았다. 미도리카와가 저렇게 된 것은 나 때문이라는 죄책감. 마유즈미는 거기에 더해 캐롤 씨가 나 탓에 강제적인 터치를 하게 되었다는 죄책감마저 더해졌다.

 

모든 방향이 그녀를 짓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마유즈미는 끊임없이 사과했고 용서를 빌었다.

 

나시: 마유즈미. 이. 이걸 어떻게

 

롤 브라이트: 마유즈미 씨. 제 말 들으세요!

 

캐롤 씨는 흰 장갑을 끼신 채로 마유즈미의 양팔을 꽉 붙잡았다.

 

롤 브라이트: 절 보세요. 절 보셔야 해요. 마유즈미 씨.

 

유즈미 나데시코: 제가 캐롤 씨를 어떻게 봐요! 면목이… 없어요… 죄송해요.

 

롤 브라이트: 사과는 그만 하세요.  언제까지 사과하실 건가요. 언제까지 제 얼굴을 안 보실 건가요. 평생?

 

유즈미 나데시코: 캐롤 씨가 원한다면

 

롤 브라이트: 전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아요!

 

마유즈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것조차도 힘들어 보였다. 나는 그녀가 어느 정도의 부끄러움과 자기혐오를 가진 채 고개를 드는지. 반도 채 이해하지 못했다.

 

마유즈미는 주저하며 눈을 떴다.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제가 다 망쳤어요.

 

롤 브라이트: 망치려고 하신 게 아니잖아요. 절 도우시려 한 거잖아요. 미도리카와의 가짜 신분을 만들어낸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니에요. 마유즈미 씨.

 

롤 브라이트: 그러니 너무 혼자 고통스러워하지 마세요. 왜… 왜 그 모든 일을 혼자 떠맡으신 건가요. 제가 강제적인 터치를 쓴 것은 제 선택이에요. 전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도.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남에게 고통을 주더라도 강제적인 터치를 썼을 거에요.

 

롤 브라이트: 그러니 그 모든 죄책감을 혼자 떠안으실 필요는 없어요. 네? 마유즈미 씨.

 

유즈미 나데시코: …그래도 될까요? 제가 정말 그래도 될까요?

 

롤 브라이트: 네. 저흰 친구잖아요.

 

캐롤 씨의 미소가 빛나 보였다. 난 그것에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마유즈미의 울음을 거의 듣지 못할 뻔했다.

 

마유즈미는 무너지듯이 울음을 터뜨렸다.

 

유즈미 나데시코: …흑. …으흑! 으흑

 

롤 브라이트: 저런. 마유즈미 씨

 

마유즈미가 캐롤 씨에게 안긴 순간.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리란 직감이 들었다. 난 말주변이 그렇게 좋지도 않고 마유즈미와 유별나게 친한 것도 아니니까.

 

그렇기에 자리가 조금 거북해졌다. 나는 기회를 봐서 이유를 적당히 둘러댄 뒤 마유즈미의 숙소를 빠져나왔다.

 

그게 문 앞에서 마유즈미와 캐롤 씨의 대화를 엿듣게 된 경위였다.

 

마유즈미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묘한 안도감을 받았다. 눈물이 멎는다면 그녀는 훨씬 나아질 터였다. 코 끝이 약간 찡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문 앞에 서 있던 순간. 나는 익숙하고도 불길한 가죽부츠 소리를 들었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그녀가 있었다.

 

 

 

 

리 레이코: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모리는 내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며 운을 뗐다.

 

나시: 아… 너구나.

 

리 레이코: 반갑지 않은 손님이겠지. 난 근본적으로 이 탑의 등에이니까. 계몽을 위한 등에 말이다.

 

나시: 네 사상과는 별개로 그냥 너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

 

리 레이코: 예를 들면. 너?

 

솔직히 그녀가 어떤 해코지를 할지 무서웠지만. 나는 용기를 짜내어 고개를 끄덕였다.

 

나시: 응

 

꽤 용기를 끌어모았음에도 내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너무 약하게 들렸다.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리 레이코: 나 역시 너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능동성을 잃은 네 자신의 꼴을 봐. 문 밖에 버려진 네 꼴을 보란 말이다. 네가 집 지키는 개인가?

 

나시: 버려진 게 아니라 내가 나오고 싶어서 나온 거거든. 안에 있기가 영 거북해서.

 

리 레이코: 그게 너 자신의 생각이라고 확신할 수 있나?

 

나시: 당연하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리 레이코: 그래… 나 역시 아직은 가설에 불과하니. 확실하지 않은 것을 계속 주장하지는 않겠다. 흘려듣도록.

 

나시: 뭐라는 건지… 여긴 또 왜 왔어.

 

리 레이코: 설득을 위해 왔다.

 

나시: 아. 미도리카와에 대해서?

 

모리는 캐롤 씨의 선택에 크게 반발했으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리 레이코: 그래. 상담가는 그것을 실토해야 한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기껏 정보를 얻어냈는데 정보를 말하지 않겠다니.

 

나시: 나도 그건 놀랐지만. 그래도 캐롤 씨를 너무 압박하진 마. 강제적인 터치가 끝나신 다음에 거의 쉬지도 않으셨잖아.

 

리 레이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셈인데도?

 

나시: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니. 너 아까 그걸 보긴 한 거야? 그걸

 

리 레이코: 강제적인 터치 말인가? 두 눈으로 보았다. 상담가의 노고를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상담가는 급박한 상황에 적절히 터치를 사용하여 다른 이들을 구했다. 대단한 위업이지.

 

리 레이코: 가짜 총으로 관심을 끌어 상담가와 다른 이들을 지킨 너도. 상담가를 뒤에 숨기고 달려갔던 협상가도 또한 마찬가지다. 우린 전부 용기 있는 자들의 행동 덕분에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알겠나?

 

난 평소 엄한 선생님에게서 칭찬을 받은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가… 최선을 다해 그것을 떨쳐냈다. 좋은 타이밍이 아니었다.

 

리 레이코: 그렇기에. 무기상으로 알려졌던 자의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면 그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된다. 희생을 감수했던 용기도 숭고함도. 무의미해진다. 난 그렇게 둘 수 없다. 그러니 현재 상담가의 행보를 지지할 수 없는 것이다.

 

나시: 캐롤 씨가 미도리카와를 우리의 동료로 만들면… 의미 있는 일이 되잖아. 조금 더 기다려 보자.

 

리 레이코: 나는 타협하고 싶지 않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모리와 하게 될 말싸움을 생각하자니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리 레이코: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난 너와 상담가가 서예가에게 찾아온 것 역시 달갑지 않게 여긴다.

 

나시: 또 왜?

 

리 레이코: 탑에 권력과 계급 구조가 생기는 일은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권력? 계급 구조?

 

그런 대답이 돌아오리라곤 예상하지 못했기에. 나는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시: 네가 비유나 은유를 즐기는 건 알겠는데. 제발 좀 알아듣게 말해봐. 내가 대화를 하는 건지 사상 강연에 온 건지 헷갈린단 말이야.

 

리 레이코: 내 화술에 대해 말하는 거라면 수용할 가치가 있는 비판이지만. 지금 난 어떤 비유도 은유도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네 비판은 부당하다.

 

나시: 그러니까… 나랑 캐롤 씨가 마유즈미에게 찾아온 걸 왜 달갑지 않게 여기냐는 네 대답이. 탑에 권력과 계급 구조가 생기는 걸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아무런 비유도 없다고?

 

리 레이코: 그렇다.

 

모리의 '그렇다.' 는 듣는 것만으로 사람을 '그런가?' 라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었다. 어쩌면 내 기억상실 탓에 지극히 논리적인 발언을 억측 취급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넘기기에는 아무리 그래도 너무 억측이었다.

 

나시: 아니 무슨… 대체 몇 다리를 건너뛰었길래 그런 생각으로 그런 결론을 내린 거야!

 

리 레이코: 너는 나와 같은 것을 보고 있지 않군. 이렇게 당연한데도.

 

나시: 그럼 그게 왜 당연한데?!

 

내가 호소하듯이 묻자 모리는 혀를 대놓고 쯧 하고 찼다. 못마땅하다는 건가? 나도 마찬가지야.

 

리 레이코: 좋다. 네가 스스로 깨우치도록 유도하려 했지만 네가 그럴 의지가 없어 보이니 알려 주겠다. 현재 상담가의 산하에는 세 추종자가 있다. 이름 없는 남자. 서예가. 그리고 리더다.

 

나시: 추종자라니…! 꼭 그런 표현을 써야 돼?

 

리 레이코: 추종자라는 단어에 내포된 수동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허나 하수인보단 추종자가 낫잖나.

 

나시: 그냥 친구라고 하면 되잖아. 캐롤 씨. 나. 마유즈미. 토키와. 이 넷은 친구야. 너도 친구라는 단어는 알잖아!

 

친구는 없지만… 이라고 덧붙이려다가 참았다. 아무리 상대가 모리라지만. 내 말에 신경도 쓰지 않을 모리라지만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내 기분이 그랬다.

 

리 레이코: 친구? 재미있군. 내가 아니라 장님이라도 너희들이 우정으로 엮여 있는 것이 아니란 건 알 수 있다. 너흰 그저 상담가와 상담가에게 도움을 받은 이들이 모인 공동체다. 당장 상담가가 사라지면 너희들의 구심점은 사라진다.

 

모리는 트렌치코트의 주머니에서 분필을 꺼내더니 탑의 검은색 벽에 그림을 그렸다. 작은 동그라미 셋. 그리고 그 동그라미들의 중앙에 놓인, 세 동그라미와 각각 선으로 이어진 큰 동그라미의 그림이었다.

 

그림 솜씨가 별로인 점만 빼면 무슨… 선생님처럼 보였다.

 

리 레이코: 이게 너희 넷이다. 중앙에 상담가가 있고. 너희들은 상담가를 중간에 둔 채 서로를 마주한다. 이것이 문제다.

 

나시: 네가 생각하는 친구가 어떤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다지 문제가 되진 않아. 친구의 친구랑 친구가 되는 일은 비일비재하잖아. 내 상식이 이상한 건가?

 

리 레이코: 나는 인간관계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이 집단의 중심에 상담가가 있다는 점이다. 위에 있다고도 할 수 있지.

 

리 레이코: 하루. 단 하루였다. 인원들이 탑에 납치된 날. 상담가는 손짓만으로 세 명의 추종자를 만들어 냈다. 아마 마음만 먹으면 지금쯤 탑의 모두를 자신의 수하로 부릴 수도 있었겠지. 단지 상담가가 그러지 않았을 뿐.

 

리 레이코: 너는 상담가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난 그보다 잠정적인 위험이 없다고 본다.

 

나시: 위험도로 치면 누구든 똑같아. 사람을 죽일 수 있으니까.

 

리 레이코: 아니. 상담가는 터치로 다른 이들을 자신의 곁에 둘 수 있다. 위험 분자를 제압할 수 있는 힘으로. 자신의 수하를 늘릴 수 있다. 방패에 창을 다는 격이다.

 

모리는 큰 동그라미를 중심으로 직선을 여러 개 쭉쭉 그었다. 직선 끝에는 또다시 동그라미가 놓였다.

 

그러자 큰 동그라미에 수많은 동그라미가 연결되었다.

 

리 레이코: 이해가 되는가? 너는 이 관계를 인플루언서. 은인. 친구라고 부를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권력이 보인다. 범접할 수 없는 권력이 보인다.

 

모리는 경멸을 가득 담은 채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리 레이코: 집단은 구성원들의 동의 없이 이루어질 수 없지. 하지만 지도자가 구성원들의 동의를 받아낼 수 있다면? 동의하지 않는 구성원도 묵살시킬 수 있을 만큼의 지지를 얻는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모리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큰 동그라미. 중앙에 놓인 그것에 그림을 그렸다. 다섯 개의 막대기 같은 것이 원에 붙었다.

 

그것들은 손가락이었다. 동그라미는 손바닥이 되었다. 그러자 수많은 동그라미들이. 단 하나의 큰 손바닥에 연결되었다.

 

모리가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하게 이마에 식은땀이 배었다.

 

리 레이코: 구성원들이 동의하게 만들 수 있는 직접적인 수단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 것 같냔 말이다.

 

나시: …이런 가설은 어느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어. 모리. 당장 네가 우리 모두의 죽음이 공리의 증진이라며 우리 모두를 죽이려 들 수도 있잖아.

 

나시: 내가 내 전용실에서 가짜 총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기관총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고. 누구나 조금씩은 위험하잖아!

 

리 레이코: 내 말의 맥락이 그곳에 있지 않다는 걸 알 텐데. 상담가는 특별하게 위험하다. 삼인성호(三人成虎). 사람 셋이 모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든다고들 하지. 이미 세 명이 모였다. 이름 없는 남자. 서예가. 리더. 하루 만에 그런 일이 가능한 자는 상담가뿐이다.

 

리 레이코: 상담가처럼 큰 영향력과 위험성을 가진 자는 스스로의 처신을 더 바르게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상담가와 그 추종자를 중심으로 제국이 세워진다.

 

나시: 처신을 바르게 하다니.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야?

 

리 레이코: 고립되어야 한다. 비유가 아니다. 상담가 쪽에서 다른 이들을 피해야 한다. 다른 이들이 상담가를 없는 체하는 것도 좋겠지.

 

나시: 그렇게까지 하라고?

 

리 레이코: 그리 심한 일도 아니다. 상담가가 원한다면 터치를 이용한 상담은 계속해도 좋겠지. 하지만 단순히 누군가가 고통스럽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사적인 판단만으로 터치를 쓰는 일은 지양되어야 한다. 터치에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

 

리 레이코: 사람의 마음은 연약하고 너무나도 쉽게 구부러진다. 그것으로 세운 울타리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울타리에 막힌 자가 주인과 친하다면 얼마든지 열릴 수 있지. 그런 건 울타리도 아니다. 사람을 가려 받는 문이다.

 

리 레이코: 그러니 울타리를 세우겠다면. 견고하게 세워야 한다. 스스로도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울타리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랐다. 규칙. 행동의 이유. 어쩌면 선의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모리가 무엇으로 울타리를 세웠는지만큼은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나시: 너는 공리로 울타리를 세웠다는 거구나.

 

리 레이코: 세우려고 노력 중이다. 항상 부족하기 때문이다. 타협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언제나 부족하다. 아무리 생각하고 아무리 움직여도. 결국 나 자신에겐 한계가 있다.

 

리 레이코: 나를 봐. 육체의 단련을 게을리한 것은 아니지만 이 육체에는 물리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나시: 키에 대해서 말하는 거라면 너 그렇게 작은 편은 아니야.

 

리 레이코: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말하지?

 

나시: 카나리랑 칸나즈키…?

 

리 레이코: 그들에게 비교되는 것 자체가 수치다. 빌어먹을… 내겐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출중한 능력과 빛나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썩히고 낭비하는 이들을 도무지 두고 볼 수가 없다. 그들은 전부 계몽의 일 순위 대상이다.

 

리 레이코: 초고교급. 나를 포함해 이 탑에 모인 이들의 절반 이상에게. 그 칭호는 과분하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봐 광대짓이 끝도 없다.

 

리 레이코: 웃음. 즐거움. 욕망. 고작 그런 하찮은 것을. 스스로의 울타리로 삼는단 말인가? 승부사가 차라리 나으니 말 다 했지. 칸트주의일지언정 그의 동기는 분명하고 울타리는 견고하다. 선한 의도로 행동하니까.

 

리 레이코: 그러나 다른 이들의 울타리는 그렇지 않다. 방금 프로파일러에게서 사기꾼의 동기에 대해 듣고 오는 길이다. 너는 듣지 못했겠지?

 

나시: 후루미나미의 동기? 응. 못 들었어. 어땠는데?

 

리 레이코: 사기꾼의 동기는 프로파일러의 동반자에게서 그를 빼앗으려는 것이다.

 

내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나시: 어떤 의미로…?

 

리 레이코: 육체적 혹은 정신적. 또는 둘 다의 의미로.

 

나시: 아. 아하… 그것 참

 

리 레이코: 저열한 욕망이지. 사기꾼과 같이 이 탑의 많은 이들이 추구할 것을 잘못 골랐다. 재능에 걸맞은 책임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가지고 있기에 휘두르고 당연하게 여긴다.

 

리 레이코: 그래선 안 된다. 그들은 더 가치 있는 것에 헌신할 책임이 있다. 그것을 위해선 사사로운 것들을 버려야 한다.

 

나시: 그래도 같은 공간에서 살고. 같은 목표를 위해 노력한다면 서로 친해지거나… 때론 다툴 수밖에 없잖아. 그냥 네 말 한마디에 모두의 감정을 통제할 순 없어.

 

리 레이코: 인정한다. 그러니 점진적으로 노력해야겠지.

 

나시: 아니야. 아니야… 난 도무지 네 말에 동의 못 하겠어. 공리가 아무리 좋다지만 그걸 위해서 감정을 가진 채 살지 말라니.

 

나시: 아무런 관계도 없이 살아간다니 그건… 그냥 공평하게 다 같이 불행해지잔 말이잖아.

 

리 레이코: 그렇게 호들갑 떨지 마라. 내 제안은 누구와도 의사소통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정을 붙이지 말라는 것뿐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공리는 증진될 것이다.

 

나시: 모리. 정을 붙이는 것도 공리의 증진으로 이어질 수 있어.

 

리 레이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감정은 이성의 방해물이다.

 

나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나와 모리는 다르다. 너무나도.

 

나시: 모리. 내가 저번에 친구를 사귀어 보라고 말했잖아. 사귀어 봤어? 아니겠지. 혹시 네 친구로 삼기엔 다른 사람들이 너무 저급해?

 

리 레이코: 저급함이라는 단어에 내포된 오만과 계급성을 제한다면. 그렇다.

 

나시: 저급함의 기준이 공리를 위해 행동하지 않는 거라면. 너는 친구랑 학파를 헷갈린 거야. 사상이 다른 사람들도 친구가 될 수 있어.

 

리 레이코: 사상이 다르다면 공리를 증진시키려는 자가 아닐 텐데. 내가 왜 그런 자와 친해져야 하지?

 

나시: 왜냐면 그 사람은 네 사상을 아울러서 너라는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걸 테니까. 그런 지지자를. 동료를 얻는다고 생각해 봐. 응?

 

리 레이코: 논점이 샜군. 난 그런 것에는 관심 없다. 상담가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가 궁금할 뿐이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유즈미의 숙소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캐롤 씨가 걸어 나왔다.

 

롤 브라이트: 당신이 말씀하신 요지는 잘 알았어요. 모리 씨.

 

나는 그제야 입을 틀어막았다. 내 쪽에서 캐롤 씨와 마유즈미의 대화를 들을 수 있다면. 당연히 캐롤 씨와 마유즈미도 나와 모리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모리는 매사에 당당한 말투를 하니 듣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테다.

 

그렇다면 이 대화를 전부

 

나시: 들으셨어요…?

 

롤 브라이트: 네. 어떤 그림을 그리셨는지 궁금했는데. 이런 걸 그리셨군요.

 

손. 그리고 손을 둘러싼 수많은 동그라미들. 난 캐롤 씨의 표정을 좀처럼 읽을 수가 없었다.

 

리 레이코: 내 요지를 이해했다면 네가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말해라.

 

롤 브라이트: 싫어요.

 

리 레이코: 자기주장이 강해졌군.

 

롤 브라이트: 네. 저도 이런 제가 낯설어요.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에요. 제 본질 자체가 변한 느낌이라 약간 두렵기까지 하네요. 강제적인 터치는 다 이런 식일까요?

 

롤 브라이트: 지금 상황. 감당 안 되시죠? 순순히 말할 것 같았는데 그렇게 안 되니까. 내가 입을 열지 않으면 원하는 걸 아무것도 들을 수 없으니까. 다급하시겠죠.

 

모리의 얼굴에서 한 줄의 씰룩임이 떠올랐다. 고까움인지 냉소인지 당황인지 읽기 어려웠다. 내 얼굴에 떠오른 것은 그것보다 훨씬 단순했다. 낯설음.

 

캐롤 씨는 적의를 드러내지 않은 채 모리를 몰아세웠다. 그녀는 시종일관 담담했고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비치지 않았다. 어떻게 들으면 상냥하기까지 했기에 오히려 위협적이었다.

 

리 레이코: 네가 입을 열지 않겠다면 다른 이들로부터 듣겠다.

 

롤 브라이트: 이젠 협박까지 하시네요. 제가 말했다시피. 그렇게 두진 않아요.

 

리 레이코: 막겠다고? 어째서. 서예가가 너의 내담자이기 때문인가? 특혜를 드러내는 것이 수치스럽지도 않은가 보군.

 

롤 브라이트: 특혜가 아니에요. 당신은 타협을 거부하시니. 마유즈미 씨에게서 정보를 들을 수 없다면 히무로 씨에게도, 후루미나미 씨에게도 찾아갈 생각이죠.

 

롤 브라이트: 아니야… 당신이라면 미도리카와 씨를 찾아가 본인에게서 들을지도 모르겠네요.

 

리 레이코: 잘 아는군. 그렇게 일이 번거롭게 되기 전에 네 쪽에서 실토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롤 브라이트: 효율에 대해 잘 아시나 봐요? 진짜 효율은 미도리카와 씨를 저희의 동료로 삼는 거예요.

 

모리는 잠시 캐롤 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해 둔 다음 그것을 기반으로 초상화를 그리려는 듯이.

 

리 레이코: 아까 들은 말이지만 다시 들으니 이상한 위화감이 드는군.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지?

 

롤 브라이트: 최근이요.

 

리 레이코: 강제적인 터치 이후겠지.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네 행동은 무척이나 부자연스럽다.

 

롤 브라이트: 그러니 제가 미도리카와 씨에게 지배당했다고요? 정말 그렇게 주장하실 건가요?

 

리 레이코: 지배당하지 않았다면 증명해라.

 

캐롤 씨는 손가락 세 개를 폈다.

 

롤 브라이트: 미도리카와 씨는 초고교급 무기상이 아니에요.

 

캐롤 씨가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롤 브라이트: 미도리카와 아쿠토라는 이름은 본명이 맞고요.

 

캐롤 씨가 손가락 하나를 더 접었다.

 

롤 브라이트: 카이다 쿠로하… 가 아니라 카이다 씨는 미도리카와 씨를 일전에 죽이려 들었어요. 미도리카와 씨는 카이다 씨를 알아보지만 카이다 씨는 미도리카와 씨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어요.

 

캐롤 씨가 마지막 손가락을 접었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보면 볼수록 그녀의 묘한 변화가 눈에 확실하게 들어왔다.

 

리 레이코: 부족하다.

 

롤 브라이트: 당신은 언제 만족할까요. 모두가 공리의 이름으로 상처 투성이가 된 채. 텅 빈 마음으로 연명하면 그때야말로 당신은 만족감에 웃으실까요.

 

롤 브라이트: 부족하더라도 모든 선택권은 제 손안에 있어요. 미도리카와 씨는 제가 찾아가서 설득하겠어요. 그러니 섣불리 움직이지 마시고 기다리세요.

 

리 레이코: 무기상으로 알려진 자의 일부에 네가 섞였다면 쉽게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자신 있나?

 

롤 브라이트: 반 밖에 없어요.

 

리 레이코: 그렇다면 최선을 다 해라. 널 지켜보겠다. 네 행동에 따라 공리가 증진될지, 더없이 훼손될지가 결정된다.

 

모리는 등을 돌리고 몇 걸음을 걷더니.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선 채로 자는 건가? 싶었던 다음 순간 모리가 말했다.

 

리 레이코: 마지막으로 하나만 말하지. 서예가가 언제부터 저렇게 연약했던가?

 

롤 브라이트: 마유즈미 씨는 연약하지 않아요.

 

모리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리 레이코: 울음소리가 여기서도 들리더군. 탑에 처음 왔을 때는 내게 불쾌감을 표출할 수 있던 서예가가. 저렇게 무너져 내렸다. 왜 저렇게 약해졌지?

 

리 레이코: 서예가는 퇴화했다. 네가 마법처럼 근심과 걱정을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네 덕분에 당장은 괴롭지 않겠지. 하지만 그 결과 서예가는 스스로 강해질 기회를 박탈당했다. 그것은 정말로 두려운 일이다.

 

리 레이코: 모든 이들을 노예로 만드는. 더없이 두려운 일이지. 널 계속 주시하겠다.

 

모리는 자신의 말을 끝내자마자 발걸음을 옮겼다.

 

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모리 씨의 말씀을 너무 마음에 두진 마세요.

 

나시: 네? 아. 네. 그럴 생각도 없었어요.

 

롤 브라이트: 그렇지만 무시하지도 마세요. 그녀의 말도 충분히 요점을 잡고 있으니까요.

 

나시: 네. 저도 알아요. 모리는 이 탑의 등에니까요. 계몽을 위한 등에… 정말 그 말이 맞네요.

 

조금 많이 짜증 나지만. 맞는 말을 하는 등에. 그게 모리인 것 같았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숙소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기와라 우시오: 칼? 아니야. 칼은 너무 위험해. 망치가 가장 나을 것 같은데.

 

하기와라는 쓸만한 무기를 고르다가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기와라 우시오: 아아아아아! 어렵다. 어려워. 걍 잠이나 자고 싶은데. 자면 누군가가 저 총들 가져갈 거 아니야. 저게 탑으로 퍼지면 그때부터 개지랄이 날 거라고.

 

카이다가 가져갈지도 몰랐기에. 하기와라는 머리를 싸매고 생각했다.

 

기와라 우시오: 할 일이 너무 많아. 신경 쓸 게 너무 많아. 나 혼자서 전부 처리할 순 없어. 나 혼자선 혼잣말밖에 못 해.

 

기와라 우시오: 잘 구슬리기만 하면 상도덕 다 버린 채 날뛸 수 있는 사람 어디 없나? 야가미는 이런 일 안 해. 칸나즈키는 이상하고, 나이토는 날 뜯어말릴 거고, 카이다는 시발 될 리가 없지… 좀 과감하게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하기와라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기와라 우시오: …진짜 존나 싫다.

 

 

 

 

 

 

 

 

 

리 레이코

 

초고교급 철학자. 일단 그 이름이 무색하진 않다. 내가 살다 살다 이렇게 관념적으로 사는 사람은 처음 봤다. 애초에 지금 내가 아는 사람은 20명도 채 안 되지만. 아무튼…

 

아마 모리는 눈에 레몬즙이 들어가도 신음소리 하나 안 낼 거다. 분명 '이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야만 개인은 담금질되어 강해질 기회를 얻는다.' 이런 말만 하겠지. 으.

 

최근 모리는 캐롤 씨와 터치파가 와해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권력 구조를 막아야 하기 때문이란다. 매우 구체적이고 나도 잠시 두려움을 느끼긴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그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다. 당연해.

 

솔직히 좋은 사람이라고는 못 하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하게 나쁜 사람이라고도 못 하겠다. 모리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긴 한다. 문제는 감정이나 인간관계 같은 것들을 하나도 고려하지 않은 채. 매우 큰 그림의 공리만 보고 있다는 점이다. 난 그 점이 못마땅하다.

 

모리는 친구가 없다. 가족도 없다. 모리 본인이 그걸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 앞에서는 할 말과 못할 말을 잘 가리자.

 

 

 

 

호감도 측정

모리의 호감도: -15 ~ 5 (행동에 따라 달라짐)

-50=원수 / -30=앙숙 / -15=상극 / 0=무관계 / +15=친구 / +30=연인 / +50=배필

 

 

 

 

 

 

 

처음의 칸나즈키 사주풀이는 진짜 사주 사이트를 참고했음

 

개강했습니다 시이발 ㅋㅋㅋ 그래도 계속 가 봅시다... 여전히 이 소설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