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시라유키 히메리는 내게 물은 적이 있다. 왜 초고교급이라는 이름을 거부하냐고.
나는 시라유키 히메리에게 답한 적이 있다. 그것은 나의 결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나는 그저 주입받았다고.
내가 초고교급 재능을 부여받은 것에 의미가 존재하는가? 고아에 불과했던 내가 재능을 부여받아야만 했던 이유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엄격한 기준을 통해, 초인을 세우기 위한 토대로 걸맞은 자들만이 선발된다. 또한 그들을 더욱 그 역할에 걸맞도록 개조한다. 다듬는다. 원석이 보석으로 변할 때까지. 이것이 우리들의 멋진 신세계이다."
단지 내가 감시자의 역할에 제일 적합했기 때문인가? 난 감시자가 되기 위해 태어났던 것인가? 그렇다면, 감시자의 역할에서 빠져나온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솎아내고 길러지고 솎아내고 길러진다. 작물만이 이와 유사한 과정을 지난다. 발달한 유전학과 생명과학은 진화와 주체성마저 지배했다. 몇몇 작물들은 수확량과 효율을 위해 다른 것들이 제거당해, 주인의 관리 없이는 자생조차 불가능하다. 단독자로서의 도태가 아닌 기능적 한계가 그들의 종(種)에 낙인처럼 새겨진다.
로가 아니고서야 메울 수 없는 결핍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특정하기 어렵다. 가지고 있던 것을 잃어버렸다. 중요했던 무언가. 그러나 알 수 없다. 녹은 얼음에서 얼음의 본래 형태를 유추할 수 없듯이.
그것을 원한 적은 없지만 대가를 치렀다. 대가를 치렀으나 온전히 얻지 못했다. 이런 내가 초고교급이라 불린다는 것을, 나는 치욕이라 부른다.
더 단크 타워
챕터 1: < 죽여 마땅한 사람 둘 >
"과정은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마유즈미, 후루미나미와 상의를 끝내고 내 숙소에 돌아왔을 때 나는 숨을 돌렸다.
아마 잘 될 것이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미도리카와의 비밀을 폭로하는 일 없이 누군가가 강제적인 터치를 당할 필요도, 누군가가 죽거나 다칠 필요도 없어진다.
카이다가 날 표적으로 삼을지도 몰랐다. 이후 진실을 밝히면 모두에게서 신용을 잃을지도 몰랐다. 후루미나미와는 달리 마유즈미가 이 계획에 반대한 이유는 아마 그곳에 있겠지.
처신을 잘 하면 내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다. 누군가가 죽거나 다치는 것보단 내가 신용을 잃는 게 낫다. 그럼에도 나 역시 조금은 회의감을 가졌다. 두 명과 상의를 하고 나면 보다 생각이 확실해질 것이라 여겼지만, 그 반대였다.
나는 두 명이 계획에 대해 상반된 시선을 보내는 와중에도 줄곧 이게 옳은 일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누군가가 원하지 않는 일을 당하거나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구실은 거창했다. 그렇지만 이걸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거짓말이 더 나쁜 결과를 야기할 가능성을 제하더라도. 나의 판단만으로 다른 이들이 접해서는 안 되는 것, 접해도 되는 것을 재단하고 통제하는 것이 옳지는 않았다.
가지를 치는 정원사처럼. 어린아이의 부모처럼. 상관처럼…
히무로 시라베: 독선이야.
행운아의 약점은 독선이다.
히무로 시라베: 아니야.
나는 그런 게 아니다.
아니고 싶었다.
히무로 시라베: 나는 감시자로서 이렇게 행동하는 게 아니다.
히무로 시라베: 나는 그런 게 아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나는 감정적이었다. 아버지의 낯을 잊었다. 필요한 일. 내가 막을 수 있는 것을 막는 일을 감시자의 통제와 같은 선에 두고 경계하는 것은 내가 감시자를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에 대한 반증이 되었다. 칼에 찔려본 사람이 날 선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나는 과민해졌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히무로. 감시자가 되기는 아직 멀었구나! 지독한 자기기만이야! 가장 중요한 대몰락에 대한 정보를 꽁꽁 숨기고 있으면서 고작 위조에 흔들린다니! 그들에게 자유를 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통제가 아니라 무엇이겠는가!"
히무로 시라베: 대몰락에 대해 알리더라도 지금은 안 된다. 지금 알렸다간 곧 사람이 죽는다.
"그들이 서로 죽고 죽이고 불행해질 권리를 빼앗는 것인가?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통제야!"
히무로 시라베: 물론 모든 이들이 혼란에 빠진 채 살의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 역시 자유의 일종이다. 하지만 난 그런 자유를 두고 볼 수 없다.
"그럼. 그럼! 네 판단에 따라 자유를 싹둑싹둑 오려내! 훈계와 칭찬으로 구부려! 명령으로 복종시켜!"
히무로 시라베: 감시자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두고볼 수 없다. 내가 보는 앞에서 무고한 사람이 죽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미도리카와의 비밀을 위조했다.
"개인적인 욕망으로 움직이다니! 너는 녹지 않는 감시자여야 한다!"
그것은 눈 앞에 떠 있지 않았지만, 난 마치 그렇다는 듯이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기분은 나아졌다. 환청은 서서히 사라졌다.
히무로 시라베: 꺼져라. 꺼져….
내가 왜 이러지… 평소의 나라면 감시자와 나를 구분할 정도의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과민하더라도…
이 살인 게임이 내게 정신적 부담을 주고 있나? 그 가능성도 높지만 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메리. 전기의자에 앉은 메리. 그것이야말로 정신적 부담이었다.
시라베....
그 영상에 대해서는 잠시 잊자. 복수는 나중에 해도 충분하다. 살아남지 못한다면 흑막을 알아낼 수도, 복수할 수도 없다.
나는 내가 행동해야 하는 이유를 세 보았다.
마유즈미의 바람. 그녀는 캐롤이 누군가에게 강제적인 터치를 하지 않길 바랐다. 자신을 도와줬던 그녀에게 보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도리카와의 비밀. 그녀의 비밀을 알리면 나와 마유즈미, 후루미나미가 위험에 처한다. 알리지 않으면 미도리카와가 위험에 처하고 캐롤은 계속 강제적인 터치의 압박을 받는다.
그리고 메리. 메리의 행방을 알아내야 한다.
그녀만이 나를 감시자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시라유키 히메리가 계단을 올랐다. 희미한 발자국 소리가 몇 개 들리는 것으로 보아 호위가 따라붙었다.
아마 내가 그녀를 해하려고 하는 순간 그들은 나를 사살할 것이다. 해할 생각도 없지만 카텟 기관이 내게 귀를 기울일 날은 오지 않는다.
"…안녕. 히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를 정정하고 싶어."
"무엇인지 듣고 싶다."
"일전에 널 습격한 그 기관원에게는 징계가 내려졌어. 내가 그 사람을 사주해서 널 해치려고 한 게 아니야. 정황이 아무리 확실해 보여도…"
"알고 있다. 날 해하고 싶었다면 더 확실하게 했겠지. 그 자는 예기치 못한 변수였다. 그러나 그 일을 알고 있는 자는 분명 너와 나뿐이었다."
"그래. 맞아… 내 실수였어. 카텟 기관의 보안을 강화시키고 네게 호위를 붙여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그게 새어나갈 줄은…."
"그것이 누출된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정말 아니야."
"네 의도에 대해서가 아니다. 십중팔구 나를 제거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인원이 구성되는 과정에서 그 기관원이 누출된 정보에 접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도 있다. 카텟 기관에 배신자가 있다는 가능성."
"설마. 그럴 리가…."
"넌 내게 물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냐고. 나는 답했다. 보이는 것만을 보려 해서는 안 된다고. 내가 보는 것들이 신경과민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행운아가 보이지 않는 손을 심어두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신하나?
내가 행운아와 손을 잡았다면 어쩔 텐가?"
"쏘지 마!"
시라유키 히메리가 계단 쪽으로 손을 뻗었다. 곧 그녀는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호위를 두었다는 사실이 내 심기를 건드렸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오히려 카텟 기관의 총잡이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들은 섣불리 날 쏘지 않았다. 그들은 아버지의 낯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마저도 아버지의 낯을 잊게 만드는 것은 나와 로 뿐이다. 재단의 연구소에서와 같았다. 카텟 기관원들은 대부분이 일반적인 도덕성을 가지고 있었다. 도덕적인 일이 로를 배제하는 일일 뿐.
"호위를 두지 않으려 했는데. 도저히 단신으론 못 보내겠대서… 널 믿지 못한 건 아니야."
"날 믿는다는 뜻인가? 제발 그런 뜻은 아니길 바란다."
"왜?"
"내게 믿을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네가 나의 무엇을 믿을 수 있었다는 건가? 내 노력인가? 내 사상인가?"
"네 선택이야. 그 자리에서 날 쏘지 않고 카텟 기관까지 따라온 네 선택. 난 거기서 가능성을 보았어."
"이제 와서 내 선택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어떻게 의미가 없겠어. 히무로. 우리는 그때 서로를 믿었잖아."
"지금 네가 고려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내가 만약 너와 기관 전체애 배신감을 느꼈다면. 그렇기에 로에 합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어떤 무기도 나를 해할 순 없다. 행운아의 손길이 내게 뻗쳐 있다면.
계단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그들의 총기가 오작동해 폭발할 수도 있다. 내가 로에 합류하겠다는 의사만 가진다면 로 본인들이 카텟 기관을 습격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이 회담을 거절하지 않았지? 너는 무엇을 믿고 이 회담을 수락했나?"
"……"
대답이 없었다.
"넌 내게서 무엇을 보고 있지?"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대답하려는 듯이 입술을 움직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당황한 표정. 입을 열고 싶다는 표정. 이것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저주스러웠다.
"내가 지금 사방에서 보고 있는 것들은… 불신뿐이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행운아의 존재는 재앙이다. 그것은 모든 이들을 노예로 만든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캔버스에 칠해진다. 큰 그림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이제 내가 무엇을 믿을 수 있지?
내 행동 하나가. 생각 하나조차 온전히 내 의지에서 나온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당장 로에게 손해가 되는 판단이라도, 얼마든지 정반대 방향으로 변할 수 있다. 너도 그렇다. 행운아가 나를 비호하기 위해서 너를 보내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하지?"
"그건 말도 안 돼. 그 말은 못 넘어가겠어. 내가 로 편이라니 너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네 말이 맞다. 나는… 정말이지 더는 견딜 수가 없다."
내 메마른 입술에서 허무함이 흘러나왔다.
"피로하다. 너무나도 피로해. 지긋지긋해서 견딜 수가 없다. 고뇌하면서 사는 것에 신물이 난다. 이런 식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게 내 카인가?
시라유키 히메리. 겨우 이게 너의 카인가? 같은 카를 공유한다는 카텟이란 것이 절대 깨지지 않는 집합이라면. 이 카텟은 결국 파멸로 달려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히무로…"
"내 모든 것은 부정되었다. 나는 계속 포기하려 했지. 네게 포기하라고 독촉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너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 날 위해서였다. 끝까지 나아갔는데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너 같은 걸물과 함께했음에도 다른 이들과 합일되지 못하는 건 내게 아무런 가망이 없음을 시사한다. 그렇기에 패배주의에 빠졌다.
감시자 아닌 히무로 시라베는 거기까지라는 사실에서.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카는 내게 진실을 보여 주었다. 절대 도망갈 수 없는 쳇바퀴 안에 내가 놓여 있음을.
이제 나를 봐라. 제 밖에 모르는 자가 여기에 서 있다. 실망스럽고 환멸스럽지 않나? 그게 바로 나다. 내재적인 것을 적출당한 인간은 결국 그렇다. 사람이 아닌 것들은…."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시라유키 히메리가 내 뺨을 때렸다.
그 다음에는 주먹으로 내 안면을 강타했다.내 발을 밟고, 다리를 걷어차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호위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육신이 멍하니 그녀의 폭력을 받아내는 동안 의식은 그들 사이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성격이 불 같았다.
"아파? 아프지. 아프겠지. 아프라고 때린 거야."
내가 대답하지 않자 시라유키 히메리는 내 뺨을 좌우로 짝짝 때렸다.
"이것도 카냐. 이것도 카 같아? 이것도 행운아가 만들어낸 큰 그림의 일환이냐고. 이 카마이 자식아!"
"카마이?"
"카의 바보라는 뜻이다. 이 바보야! 그냥 그렇게 포기해 버리라고 카텟이 있는 줄 알아? 카텟은 말이야. 서로 숙명을 향해 나아가라고 있는 거야!"
"나는 감시자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 내 숙명. 내 카는 감시자에 있다. 감시자가 아닌 나는…"
"히무로 시라베지. 그게 다야. 그게 문제라고 생각해? 아니. 아무런 문제도 없어. 상관 없다고!
감시자가 네 카니까 거기에 종속되야만 할 것 같아? 초인적인 행운이 네 카를 포함한 모든 걸 지배해버릴 것 같아? 정신 차려. 아무리 정해진 끝이 확실해 보여도 아직 끝은 다가오지 않았어. 알아? 로가 찾아와서 널 데려가야 끝인 거야. 그 전까지는 끝이 아니야. 넌 싸울 수 있어. 싸워!"
"싸워? 싸우라고 말했나?"
"그래. 우리가 도와줄 테니까…"
"넌 날 도울 수 없다! 누구도 날 도울 수 없다. 금수를 사람으로 만들 순 없어! 그것이 나의 기능적 한계다. 그게 재단이 내게 새긴 낙인이다! 그것을 네가 어쩔 텐가!"
정적이 있었다. 하늘은 흐렸고 입술은 메말랐다. 내 눈 역시 메말랐다. 너무나도 피곤했다. 괴롭다. 체념한 체 사는 것마저 괴로웠다.
시라유키 히메리는 입을 열지 않았기에 내 쪽에서 열었다. 서로 달라붙은 입술이 떨어지며 조금 찢어졌다. 피 맛이 났다.
"너에게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러나 보는 눈이 많다. 혹시 호위를 물려줄 수 있겠나? 아니. 그것보단 너와 나만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게 낫겠군."
"…어떤 얘기길래 그래? 로에 관련된 이야기야?"
"난 그것을 너와의 마지막 대화일지도 모른다고 각오했다. 로에 대해서는 입에도 올리기 싫으나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내가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면. 비무장 상태가 되겠다."
나는 시라유키 히메리에게 총을 건넸다. 시라유키 히메리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무게에 적응하지 못한 듯이 잠시 쩔쩔맨 뒤 그녀는 총을 쥐었다.
"이 총은 백단향으로 만들어졌다. 주인을 해할지도 모르는 도구라니 실로 카텟 기관과 나를 보는 듯 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넌 카텟 기관의 도구가 아니야. 히무로."
"곧 알게 될 거다. 이제 가자. 총구를 내 머리에 대라. 대화를 나누고 싶은 곳에 멈출 테니."
기억하자.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춤을 추고 있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왜 그렇게 신이 났냐고? 신이 날 만한 일이 생겼거든. 너도 정말정말 좋아할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어. 잘 풀렸어. 나중에 전화 걸 테니까 꼭 받아.
후루미나미는 통화를 끊었다.
제발.
다들 펑펑 터져 줬으면 좋겠다. 후루미나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빠를수록 좋다는 의견을 수용했다. 나는 저녁에 다른 이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용실에서 발견한 것이 있으니 카이다와 미도리카와에게 들키지 말고 오라는 내용을 전달했다.
정오를 지나고 오후가 되자 막연한 위기감에 사로잡혀있던 이들은 충분히 이성을 되찾았다. 카나리, 미도리카와, 카이다를 제외한 탑의 인원들은 내 전용실로 와 주었다. 23T에게도 권유했지만 23T는 미도리카와를 감시해야 한다며 응하지 않았다.
야가미 토가: 그래서. 무엇을 발견했죠?
토키와 아유키: 미도리카와와 카이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칸나즈키 시노부: 두 사람과 관련된 내용이야?
하기와라 우시오: 아닐 것 같은데….
히무로 시라베: 카텟 기관에 대해 떠올리고 싶어서 전용실을 조사하던 중 이걸 발견했어. 프로필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에게도 보여주는 게 나을 것 같았어.
캐롤 브라이트: 범죄자 분들의 프로필인가요?
하기와라 우시오: 프로필 하니까 생각난 건데. 왜 Profile에 r 붙였는데 프로필러가 아니라 프로파일러라고 발음이 될까? 이런 것 때문에 영어 배우기가 좆같아 그냥.
이바라 쿠리스: 프로펠러랑 비슷하니까 그런 거 아니야?
하기와라 우시오: 그거 말 되네. 지식이 늘었다.
하기와라와 이바라가 하이파이브를 했다. 신경 쓰지 않기로 하며 나는 다른 이들에게 프로필 모음을 건넸다.
나나시: 명예훼손. 협박. 폭력단체 조직. 폭행. 불법 거래. 사이비 종교. 살인…. 살벌하다.
캐롤 브라이트: 이 사람들 전부와 면담을 해 보신 건가요?
히무로 시라베: 맞아. 120번째 파일을 봐줘.
원래 있던 120번째 파일은 찢어서 처리했다. 물건을 훔치던 잡범에 대한 내용이었기에 없애더라도 문제가 없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초고교급 무기상. 무쿠치(無口)?
모리 레이코: 성별은 남성. 회색 마스크를 착용. 총포상을 운영하고 있음. 범죄 조직에 무기를 납품한다는 소문도 있음. 공식적인 초고교급은 아님.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
나이토 유즈루: 야. 이거… 미도리카와 아니야? 걔는 항상 회색 마스크를 끼고 다니잖아.
이바라 쿠리스: 와 씨바. 카텟 기관 좋은 곳이네! 이걸 다 관리했다고? 그럼 미도리카와는 카텟 기관에 갇힌 거 아니야? 왜 여기 있어?!
히무로 시라베: 그건 나도 몰라. 애초에 나와 나나시까지 이 탑에 있으니까. 하지만 미도리카와로 추정되는 인물을 발견해서 너희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었어.
토키와 아유키: 이건… 정말 값진 정보야.
야가미 토가: 무쿠치요?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야가미가 문득 그렇게 말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도 처음 들어. 애초에 이 탑에 오고 나서 너희 모두의 이름 자체를 처음 듣지만….
야가미 토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일전에 총기 거래 관련 분야에 깊게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부는 아니지만 대략적인 핵심 인력들을 알고 있어요. 몇은 만나본 적도 있고 협상도 진행해 봤습니다.
나나시: 대단해. 아직 우리 또래인데….
하기와라 우시오: 아 씨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초고교급 차이 존나 심하네! 누가 몇 명 웃기는 동안 범죄자들이랑 협상을 진행해?! 모노로그! 밸런스 좀 맞춰 봐라!
하기와라의 한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야가미는 말을 이었다.
야가미 토가: 무쿠치라는 이름을 사용한다면 일본 쪽 사람일 텐데. 그 분야에 들어가 봤던 저로서 말하자면,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입니다.
모리 레이코: 어떻게 된 일이지. 프로파일러?
변수다. 야가미의 협상 분야가 무기 거래까지 뻗어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즉흥적으로 덮을 수 있는 변수다.
히무로 시라베: 나도 이 자료를 보고 무쿠치라는 이름을 기억해냈어. 너희도 알겠지만 우리 모두는 이 탑에 오며 기억의 일부분을 소거당했잖아?
후루미나미 나몬: 응. 나나시는 기억이 전부 날아갔지.
캐롤 브라이트: 이 탑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고요.
히무로 시라베: 나나시의 기억이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소거됐어야 했는지는 몰라. 하지만 무쿠치에 대한 기억이 참가자에게 남아 있다면 무쿠치에게는 불리한 게임이 되겠지. 정체를 숨겨 봤자 알고 있는 이들이 있으니까.
모리 레이코: 책이 공평한 경기를 위해 무기상에 대한 기억을 지웠다는 말인가?
이바라 쿠리스: 그게 돼?
칸나즈키 시노부: 응.
야가미 토가: 글쎄요… 히무로 씨와는 달리 이 보고서를 봐도 저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히무로 씨의 말씀도 타당하군요.
하기와라 우시오: 첩자랑 무기상이면 뭐… 카이다가 미도리카와를 암살하려 했다던가 그랬나 본데?
히무로 시라베: 어쩌면 나는 프로필을 작성한 본인이라서 무쿠치에 대해 더 빨리 떠올릴 수 있었던 걸지도 몰라. 야가미 너도 곧 떠올릴 수 있을 거야.
야가미 토가: 확실히 그런 걸지도 모르죠.
나나시: 그럼 23T는? 23T는 우리 모두의 정체를 아는 것 같았는데 왜 무쿠치에 대해 말해주지 않은 거야?
토키와 아유키: 모종의 이유가 있었을지도 몰라. 23T는 일전에도 나이토가 탑에서 떨어진 이후에야 탑의 방어 기제에 대해 말해 줬어.
토키와 아유키: 즉. 23T 본인은 모든 걸 알고 있지만, 우리가 모르는 내용은 말해줄 수가 없는 거야. 우리가 그걸 체험한 뒤에야 알려줄 수 있어.
나이토 유즈루: 거참. 그러면 하나하나 알아나가는 수밖에 없나?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런 식으로 계속 알아가면 되지. 이제 미도리카와 전용실에 왜 그렇게 총기가 많았는지 알 수 있게 됐잖아?
나나시: 그래. 맞아. 미도리카와의 정체에 대해 알아냈어. 그래…!
나나시의 어조가 점점 열정적으로 변했다. 이제 거의 다 됐다.
모리 레이코: 뭐가 그렇지?
나나시: 미도리카와는 초고교급 무기상. 이게 정체. 카이다에게 원한이 있기에 카이다를 노리고 있다. 이게 목적. 다 알아냈잖아?
나나시: 그럼 이제 캐롤 씨가 터치를 하실 필요는 없는 거 아니야?
캐롤 브라이트: 아아…?
이바라 쿠리스: 그렇네. 맞아! 그렇긴 해!
모리 레이코: 하지만 그는 여전히 위험하다. 무기상은 억압되어야 한다.
나나시: 본래 강제적인 터치가 화두에 오른 이유는 미도리카와를 제압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미도리카와의 정체를 알아야 했기 때문이잖아.
나나시: 그럼 이제 된 거 아니야? 그렇잖아?
토키와 아유키: 그렇지. 그렇지… 맞아.
야가미 토가: 잘 됐군요. 캐롤 씨. 이제 당신이 미도리카와 씨에게 강제적으로 터치를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캐롤 브라이트: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정말…
캐롤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캐롤 브라이트: 정말 다행이에요.
마유즈미 나데시코: 와! 잘 끝났어. 진짜 다행이에요!
후루미나미 나몬: 안 끝났어. 아직 확신이 없잖아.
후루미나미는 내가 위조한 문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마유즈미. 이거 어떻게 생각해?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 응?
마유즈미가 후루미나미의 질문에 흠칫 놀랐다. 나 역시 그녀의 행동에 의문을 가졌다. 마유즈미에게 질문할 문제라면 분명…
후루미나미 나몬: 넌 글씨에 통달했잖아. 히무로가 이걸 위조한 건지 어떤지 알 수 있겠어?
무슨 속셈이지? 후루미나미는 그녀와 내가 서로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것은 진심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마유즈미의 특기를 언급해 우리 셋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었다. 이 문서가 거짓임을 들키면 미도리카와의 정체를 알아내야 한다는 주장은 더욱 거세질 터였다.
그렇게 되면 이 계획은 완전히 실패한다. 나는 물론이고 마유즈미와 후루미나미까지 큰 의심을 사게 될 터였다. 후루미나미가 이 계획에 반대했던가?
후루미나미 나몬: 이 아이디어 정말 화끈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후루미나미는 같은 자리를 빙빙 돌면서 작은 원을 그렸다.
후루미나미 나몬: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진실을 밝히면 뒷감당을 할 수 없다. 이 딜레마를 진실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으로 타파하다니. 화끈한 발상이야. 마치 고르디우스의 매듭 같아.
후루미나미는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 행동은 연기였던 것인가? 무엇을 위해서?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가 위조를 한다고요? 굳이 왜 그러겠어요?
후루미나미 나몬: 혹시 모르지. 히무로가 미도리카와와 한 패라서 가짜 정보를 우리에게 넘겨줬을 수도 있잖아. 만약 그렇다면 카텟 기관 전부가 그를 돕고 있다고 간주해도 되겠지?
후루미나미 나몬: 어디 보자. 가짜 정보를 풀면 무슨 이점이 있을까? 존경하는 사람이 굳이 독박을 쓸 필요가 없어지지. 안 그래. 나나시?
후루미나미가 나나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나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리 레이코: 일리가 있다. 이름 없는 남자는 사사로운 감정에 잠식되었다.
나나시: 무슨…! 난 카텟 기관이 뭐 하는 곳인지도 아직 몰라!
후루미나미 나몬: 내 지적에 대해선 반박하지 못하네? 잘 알겠어.
모리 레이코: 고작 그것 때문에 다른 모든 이들을 기만하려 한 것이라면 넌 가축보다 못한 존재다. 이름 없는 남자.
모리가 날이 잔뜩 선 목소리로 말했다. 약간의 가책을 받았다. 하지만 그만둘 순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도 이 파일을 맹신할 순 없어. 모노로그가 내 기억을 조작했을지도 모르고 이 문서들 역시 몇 개는 모노로그가 끼워둔 가짜일지도 몰라.
히무로 시라베: 미도리카와 역시 무쿠치 본인이 아니라 모방범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이 문서를 일부러 만들어내지는 않았어.
칸나즈키 시노부: 히무로 말을 믿어 주자. 그게 더 나아.
토키와 아유키: 그러고 싶지만 확실하게 해 보자. 마유즈미. 이 문서가 위조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가능하긴 한데….
이렇게 된 이상 마유즈미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둘 중 하나다. 이것이 위조임을 밝히는 것과 밝히지 않는 것. 그 둘 뿐이다. 중용은 없다.
나는 마유즈미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녀는 나를 버리느냐, 버리지 않느냐를 선택할 처지에 놓였다. 어느 쪽이든 불합리한 선택이었다.
문서의 위조를 밝힌다면 나는 신뢰를 잃는다. 나뿐만이 아니라 카텟 기관 전체가 미도리카와를 보호한다는 오해를 사게 된다. 미도리카와를 향한 의심은 더욱더 커져 누구도 막을 수 없게 된다.
위조를 밝히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을 속일 수 있겠지만. 거짓말이 들켰을 때 그녀 역시 공범으로서 책임을 나눠야 한다. 카텟 기관과 함께 미도리카와를 보호한다는 누명마저 뒤집어쓰게 된다.
결국 나는 마유즈미를 휘말리게 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얼떨결에 휘말렸지만 흐름을 타는 건 내 선택이야.
마유즈미가 내 눈치를 살피지 않길 바랐다. 보복이 두렵다는 이유로 내게 협력한다면 그녀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의지로 내게 협력한다면, 흐름을 타겠다고 선택한다면.
나는 냉혹하게 다짐했다. 그렇다면. 마유즈미는 나와 끝까지 함께 가야 한다.
야가미 토가: 어떤가요. 마유즈미 씨?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 잠깐만 기다려 봐.
문서가 마유즈미에게 도달했다. 그것을 천천히 읽던 마유즈미의 선택은 이러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가 쓴 글씨 맞아.
모리 레이코: 프로파일러가 쓴 글씨인지 아닌지 판단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지어내고 있는지 검사하라는 것이다.
모리는 빠져나가려는 틈을 주지 않았다. 아군이라면 믿음직스러웠겠지만 의심받는 입장에 오니 참 번거로웠다. 마유즈미는 다시금 문서를 읽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선택을 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글쎄…? 나한테는 별다른 흔적이 안 보여. 다른 문서들도 좀 봐도 될까?
모리 레이코: 나도 살피겠다.
나이토 유즈루: 너도 마유즈미랑 비슷한 거 할 수 있냐?
모리 레이코: 아니. 그렇지만 조금의 도움이라도 없는 것보단 낫다.
나이토 유즈루: 그런 이유면 나도 할래. 최선을 다해 봐야지.
토키와 아유키: 나도 동참할게.
마유즈미, 토키와, 나이토, 모리 네 사람은 잠시 내가 쓴 문서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토가 문서들을 내팽개쳤다.
나이토 유즈루: 썅. 모르겠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럼 그렇지. 문외한이 살펴봤자 뭐가 되냐?
나이토 유즈루: 아무리 봐도 위조한 것 같지는 않아. 후루미나미 추측은 틀린 것 같아.
모리 레이코: 나 역시 주목할만한 흔적을 찾지 못했다.
토키와도 아무 말 없이 문서들을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 다행이네. 그럼 우린 무쿠치에 대한 정보를 얻은 셈이잖아. 히무로가 우릴 속인 것도 아니고. 다 잘 됐어.
야가미 토가: 히무로 씨. 무쿠치에 대한 정보는 그 문서가 다인가요?
히무로 시라베: 찾아보면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게 다야.
토키와 아유키: 더 용건이 없다면 재빠르게 해산하자. 만에 하나라도 미도리카와나 카이다에게 걸리면 일이 복잡해져.
이바라 쿠리스: 아라따. 자연스럽게 해산하면 되겠지? 하기와라 너 일루 와.
하기와라 우시오: 대충 문소리 안 내고 나간 다음 태연하게 떠들자. 자. 하나. 둘. 셋 하면 간다.
하기와라가 문을 열었고. 그 시점부터 두 명은 맹렬하게 수다를 나누었다.
이바라 쿠리스: 그런데 커피에 시럽 넣는 거랑 설탕 넣는 거랑 무슨 차이야? 어차피 시럽이 설탕 녹인 거 아니야?
하기와라 우시오: 스피노사우루스보다는 카르노타우루스가 더 세지. 스피노사우루스는 생선을 먹잖아.
다른 이들도 하나 둘 내 전용실에서 나갔다. 생각에 잠긴 야가미. 나나시, 캐롤과 함께 대화하고 있는 토키와. 하품을 하는 나이토.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모리.
칸나즈키 시노부: 잘했어.
이 말만을 남기고 종종 달려 나간 칸나즈키. 태연하게 행동하고 있는 마유즈미. 마지막으로 내게 불길하게 웃는 후루미나미. 두 사람을 보며 나는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던 과학자의 말을 떠올렸다. '이제 우린 전부 빌어먹을 놈들이야.'
기회를 잘 본 뒤 우리는 다시 마유즈미의 전용실에 모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 진짜 열심히 연기했어. 얘들아… 나 이번에는 잘했어? 안 들켰겠지?
후루미나미 나몬: 안 들켰을 거야. 아주 자연스러웠어. 거기에서 벌벌 떨었다면 우리 셋 모두 끝장이었을 텐데 잘 해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끄. 끝장….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왜 그랬어?
후루미나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후루미나미 나몬: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 나도 나름대로 뜻이 있었어.
히무로 시라베: 말해.
후루미나미 나몬: 자. 내가 히무로를 몰아세우고 위조의 가능성을 제시했을 때 마유즈미는 널 옹호했지. 그건 맞아. 아마 너희 둘은 잘못하다간 엮일 수도 있을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엮ㅇ
후루미나미 나몬: 하지만!
마유즈미가 입을 채 열기도 전에 후루미나미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마유즈미가 널 옹호했다면 모리와 나이토. 토키와까지도 널 옹호한 셈이 됐어. 하긴 그 정도로 정교하게 위조했으니 속아 넘어가는 것도 당연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세 명의 보증을 얻은 셈이지.
후루미나미 나몬: 게다가 난 위조의 가능성을 제기한 장본인이니 우리 셋이 작당했다는 의심은 더욱 줄어들 거야. 꽤 많이 생각하지 않는 이상 이 모든 배후를 알아낼 순 없을 걸?
후루미나미 나몬: 큰 줄거리의 흐름을 봐. 내가 거기서 너희를 몰아세웠기에 우린 더 나아갈 수 있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지금 와서는 다 잘 됐지만… 내가 거기에서 연기를 제대로 못 하거나 벌벌 떨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후루미나미 너 왜 자꾸 그렇게 무대뽀로 가는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미도리카와 때도 그렇고 왜 그렇게 큰일 나려고 안달 난 사람처럼 굴어. 그러다 정말 큰일 나. 너도 나도 히무로도….
히무로 시라베: 분명 별다른 이유가 있지?
후루미나미 나몬: 누구? 저요?
히무로 시라베: 하지만 그걸 당장 나와 다른 이들에게 알려줄 생각은 없어.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저 후루미나미가 원래부터 저런 괴짜라는 이유로 일련의 행동들을 전부 규명할 순 없었다. 총을 든 이를 도발하고 사전에 없었던 돌발 행동으로 모든 작전을 무너뜨리려는 건 불나방 같은 행위였다.
불나방은 명확한 목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후루미나미가 무슨 불을 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표본이 부족했다. 더 나쁜 점이 있다면 마유즈미와 나까지 그녀와 함께 불길 속으로 끌려갈 수 있다는 점이다.
…아니. 결국 모든 이들을 끌고 들어온 건 나였다. 내가 누군가를 비난할 처지는 못 되겠지만 적어도 마유즈미가 나와 후루미나미에게 동조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헛된 일이 되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히무로. 내가 왜 대답을 하겠어? 밀고 당기기 몰라?
히무로 시라베: 내가 아무리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단 둘이 아니라면.
마유즈미 나데시코: …….
마유즈미가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려 했다. 난 그녀를 만류했다.
히무로 시라베: 여긴 네 전용실이야. 마유즈미. 네가 쫓겨나는 건 부당한 일이야.
후루미나미 나몬: 꼭 여기서 얘기할 필요는 없잖아. 히무로? 나중에 단둘이 얘기할 수 있으면 그때 말해주면 된다고. 왜 그렇게 조급해?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후루미나미. 너희들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후루미나미 나몬: 어머?
마유즈미 나데시코: 앗.
히무로 시라베: 너희들을 포함해 이 탑에 있는 누구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후루미나미 나몬: 아. 뭐야. 흥이 조금 식네….
히무로 시라베: 네가 무슨 생각으로 내게 협력했는지는 몰라도 내가 원하는 건 그거야. 이 탑에 납치된 어떤 사람도 죽지 않는 것.
히무로 시라베: 그러니 후루미나미 너도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줬으면 해. 마유즈미. 후루미나미. 우리 제발…
내 입 안에서 맴돌던 여러 말들이 합쳐져 결정을 이루었다.
히무로 시라베: …살아남자.
마유즈미 나데시코: 응. 알겠어 히무로. 나 절대 안 죽을게! 아자!
마유즈미는 활기 넘치게 대답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
후루미나미는 대답 없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나는 그녀에게 왜 웃는지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그 이후의 일은 굳이 손댈 필요도 없이 알아서 진행되었다.
나이토 유즈루: 야. 미도리카와! 들리냐? 얘기 좀 하자!
모리 레이코: 언제까지고 그곳에서 버틸 순 없을 거다.
23T5U130: 문에 너무 가까이 가는 건 자제해. 안에서 총을 쏘면 영락없이 맞을지도 모르니까.
하기와라 우시오: 미도리카와 들어라. 미도리카와 들어라!
나이토 유즈루: 으악. 썅! 깜짝이야!
나이토의 집요한 설득과 모리의 집요한 협박. 그리고 그들을 진정시키는 23T 사이에 하기와라가 확성기를 든 채 난입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네놈은 완전히 포위됐다! 순순히 항복해라! 반복한다. 순순히 항복해라!
이바라 쿠리스: 해… 해 버렸다! 저걸 진짜 하네! 진짜 미친놈! 진짜다. 진짜 진짜다!
그 뒤를 반쯤 웃고 반쯤 경악하고 있는 이바라가 뒤따랐다.
나이토 유즈루: 야. 어떻게 된 일인지 존나 뻔하긴 한데. 어떻게 된 일이야?
이바라 쿠리스: 계속 말을 안 듣겠다면 듣게 해 주겠다면서 후루미나미한테서 확성기들을 빌려 오더니… 진짜 저러고 있어.
하기와라 우시오: 쿵쿵쿵. 쿵쿵쿵! FBI다. 문 열어!
모리 레이코: 광대. 확성기 하나 더 있나?
하기와라 우시오: 옛다. 받아. 넉넉히 챙겨 왔지롱.
모리 레이코: 고맙다.
하기와라가 모리에게 확성기를 건넸다. 더 시끄러워질 것이라는 직감을 느꼈다.
하기와라 우시오: 준비됐어. 모?
모리 레이코: 내 이름은 모리 레이코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무튼. 시~작!
모리 레이코: 무기상. 문을 열고 나와라.
하기와라 우시오: 함께 눈사람 만들래? 함께 눈사람 만들래? 함께 눈사람 만들래? 함께 눈사람 만들래? 함께 눈사람 만들래?
모리 레이코: 계속 그곳에 머문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문을 열고 공리를 위해 우리와 협력해라.
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나이토와 이바라도 어느새 그러고 있었다.
나는 거리를 두고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줄곧 관찰했다. 통화가 연결된 다이얼로그를 품은 채로. 도청을 위해 사용한 방법이지만 하기와라와 모리의 음성은 탑 전체에 들릴 정도로 컸다.
아마 마유즈미와 후루미나미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강 눈치챘을 터였다.
나이토 유즈루: 씨발 세상에! 저걸 계속 듣고 있어야 해? 야. 좀 적당히 시끄러워야지!
이바라 쿠리스: 정신 나갈 거 같아아아!
23T5U130: 정말 총에 맞을지도 모르니 조금만 멀어지도록 해.
미도리카와 아쿠토: 아. 젠장. 시끄러워 미치겠네.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전용실 안에서 희미하게 미도리카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기와라와 모리가 동시에 숨을 고르는 순간에 겨우 들린 음성이었다.
나이토 유즈루: 대답했다! 대답했어!
모리 레이코: 우린 너의 정체를 알고 있다. 무기상. 더 이상 숨겨도 의미가 없다. 나와라.
하기와라 우시오: 사랑은 열린 문! 사랑은 열린 문! 사랑은 열린 문! 사랑은 열린 문!
이바라 쿠리스: 미도리카와가 대답했잖아. 또라이들아! 왜 계속 소리쳐?!
나이토 유즈루: 그보다 저거 말해도 되는 거야? 정체를 알고 있다고 말해도 돼?
섣불리 말해선 안 될 일이지만, 그런 모리의 독선이 몇몇에게는 이득이 되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너희가 내 정체를 알고 있다고?
하기와라 우시오: 왜. 쫄려? 쫄면이 돼버릴 것 같아? 기분이 막 쫄깃쫄깃해져서?
미도리카와 아쿠토: 재미 없으니까 웃음기 빼.
나이토 유즈루: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좀만 멀어져. 너흰 대체 뭐가 문제냐? 총 든 새끼한테 저렇게 개기고.
모리 레이코: 난 각오하고 있다.
하기와라 우시오: 난 생각이 없어.
나이토 유즈루: 자랑이다. 이것들아.
나이토가 두 명의 목덜미를 잡고 미도리카와의 전용실 문에서 멀찍이 떨어트려 놓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이건 어쩔 수 없지.
모리 레이코: 내게 완력이 주어졌다면 이런 압제를 절대 허용하지 않았을 것만 알아 둬라.
나이토 유즈루: 너한테 완력이 없어서 천만다행이다 이 또라이야.
미도리카와 아쿠토: 그래서. 누가 말해 줬어?
모리 레이코: 말해줄 순 없다.
하기와라 우시오: 절대 안 말하지! 답답해 미치죠? 개빡치죠? 열받죠? 우린 네 정체를 완벽하게 알아냈다고. 초고교급 무기상 무쿠치!
미도리카와 아쿠토: 무쿠치…? 누가 그런 헛소리를 했지?
모리 레이코: 모르는 척은 소용없다.
초고교급 무기상 무쿠치. 미도리카와가 상황을 파악했든, 파악하지 못했든 아직까지 그녀의 어조는 충분히 '비밀이 새어나간 것에 대한 짜증' 으로 들릴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가 돌발적으로 행동한다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터였다. 후루미나미는 본인이 알아서 미도리카와에게 계획을 전달했다고 말했지만.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만약 여기서 잘 풀린다면 우리에게 승기가 찾아온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누가 그런 헛소리를 했는지 말해.
하기와라 우시오: 말하는 거 보니까 얘 정체 무조건 무쿠치야! 아주 그냥 도장 인장 날인에 서명까지 땅땅 박혔다!
모리 레이코: 아는 척을 해 주었군. 고맙다. 무기상.
이바라 쿠리스: 됐으니까 떨어져 봐! 그러다가 총 맞아서 죽으면 너희 장례 안 치러줄 거야.
잘 되었다.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다른 이들은 미도리카와의 정체가 무쿠치이며, 목적은 카이다뿐일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캐롤이 미도리카와에게 원치 않는 터치를 할 이유도 사라지며, 모리가 미도리카와를 죽이려는 이유도 사라졌다.
잘 되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이 계획이 어긋날 여지는 없었다. 다른 이들은 속아 넘어갔고, 협력은 들키지 않았고, 미도리카와는 거짓말을 받아들였다.
히무로 시라베: 분명 그럴 터인데…
나는 하기와라를 만류하고 확성기를 압수하는 등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다른 이들 역시 전용실 안의 미도리카와에게 '밀고자' 의 정체가 들키지 않게끔 나와 적당히 몇 마디를 나눠 주었다.
그들을 충분히 지켜보다 내 전용실로 돌아왔다. 그동안 아무런 이변도 없었다.
그런데도 불길했다. 무언가가 불길했다. 단정 지어서 말하자면 후루미나미가 어떤 일을 저지를까 불안함을 느꼈다. 그녀라면 언제든지 이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녀의 불나방 같은 행동이라면…
미소. 그 미소가 걸렸다. 당장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듯한 미소.
정말 잘 된 건가…?
대비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아무 일도 없겠지만… 나는 다이얼을 돌렸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여보세요.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지금 어디에 있어?
후루미나미 나몬: 창밖.
금속이 철컹이는 소리가 났다. 갈고리와 철창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다른 방으로 가려고? 어디로 가려는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별 건 없고. 너와 마유즈미가 내게 휘말려들기 전에 나 혼자 움직이려는 것뿐이야.
히무로 시라베: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몰라도 그만둬.
후루미나미 나몬: 내가 걱정돼? 다정하기도 하지. 겉으로는 무심하게 보이지만 정작 흑화하지만 않으면 넌 꽤 다정해. 어떤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구할 용의가 있어. 그래서 미도리카와의 정보까지 위조한 거겠지.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서 묻는 건데. 나 좀 구하러 와 줄래?
히무로 시라베: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말해.
이럴 줄 알고 있었다. 나는 이 대화로 후루미나미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녀는 말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어디에 있느냐 하면 지금 카이다의 전용실 밖이야.
히무로 시라베: 뭐?
후루미나미 나몬: 괜찮잖아. 어차피 카이다 얘 탑에 얼굴도 안 비춰. 그런데 전용실 위치는 내 전용실 옆이고, 미도리카와의 전용실을 밑에 두고 있지. 그러니까 써먹어 보려고.
또 불나방 짓을 하려는구나.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히무로 시라베: 미도리카와의 전용실로 들어가겠다고 말한 거라면 그러지 마. 그래야 할 이유도 없잖아. 말 그대로 아무런 이유도 없어.
후루미나미 나몬: 마유즈미 쪽으로 내려와서 미도리카와 쪽으로 건너가나. 카이다 쪽으로 건너가서 미도리카와 쪽으로 내려가나 결과는 같아.
후루미나미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굳이 지금 미도리카와를 만나러 가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지? 목적이 무엇이지?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나 좀 구하러 와 줄래?'
히무로 시라베: 너 설마. 그저 날 움직이게 하기 위해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거야?
다이얼로그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름이 끼치려는 것을 억눌렀다. 그 웃음소리는 그녀의 눈물과 같이. 진심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이 상황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후후. 역시 넌 날 너무 잘 알아. 이대로 내려갔다가 미도리카와에게 총을 맞고 죽으면 무척 비극적이겠지? 무법자 둘을 탑에 둔 채 애꿎은 사람이 죽다니.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죽음이잖아.
후루미나미 나몬: 네가 안 오면 그렇게 될 거야.
히무로 시라베: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정신 차려. 미도리카와가 섣불리 널 쏠 리가 없어.
후루미나미 나몬: 내가 들어가자마자 '카이다. 지금이야!' 라고 말하며 총기 하나를 주워서 미도리카와한테 겨눠도. 미도리카와가 날 안 쏠까? 당장 하기와라와 모리 때문에 잔뜩 민감해졌을 그녀가?
그렇다면 쏘겠지. 그렇게 도발한다면 아마 미도리카와는 후루미나미를 쏠 것이다. 안 쏴도 결국 쏘게 만들겠지. 위기에 처하고 싶으니까. 나는 이를 갈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내가 그렇게 죽으면 제발 상처를 입어 줘. 네 마음이 아팠으면 좋겠어. 난 그게 비극의 좋은 점이라고 생각해.
히무로 시라베: 네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 후루미나미! 당장 멈춰!
어조가 격해질 수 밖에 없었다. 태연함을 느끼기에 상대는 후루미나미였다. 아마 당장 그녀가 전신에 철제 갑옷을 두르고 돌아다니더라도 누구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후루미니마라면 누구든 납득한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네가 날 더 알게 되면 내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도 알 수 있을까? 여기서 죽는다면 넌 영원히 알지 못해. 평생 궁금해하겠지. 그 때 후루미나미는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하고 말이야.
히무로 시라베: 궤변 늘어놓지 마. 멈추라니까! 원하는 걸 말해!
후루미나미 나몬: 전용실 문은 열어 뒀어. 오고 싶다면 얼마든지 와. 날 구하러 와 줘.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기다려!
통화가 끊어졌다. 목적 없는 행동이 가장 무서웠다.
후루미나미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날 끌어들이기 위해 이렇게 행동한다고? 그것은 이해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날 끌어들여서 무엇을 얻느냐는 것이었다.
장난일 가능성도 농후했지만 그녀라면 이런 소재를 단지 장난으로 소모하지 않는다. 후루미나미는 내가 이런 상황에 움직일 것임을 알고 있기에 이렇게 행동했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 있었다면. 내가 이런 장난을 한 번 당한다면 다시는 당하지 않음을 이해하고 있었다면 구해달라는 반 협박을 고작 장난에 소모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믿기 어렵고 목적도 어이없었지만. 내 직감은 그녀가 정말 미도리카와의 전용실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히무로 시라베: 제기랄. 후루미나미.
반대로. 나의 이성은 누군가가 내게 해코지를 하기 위해 후루미나미를 이용했다고 말했다. 어쩌면 후루미나미 본인이.
그렇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는 추측에 불과했다. 그런 추측들은 공상과 다를 바가 없었기에. 이성은 지금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상대의 의도를 반은 알고 반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도 도박을 걸어야 할 때가 있었다.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을 때가 그러했다. 후루미나미의 말대로였다. 지금 그녀가 죽으면 그건 개죽음이다.
히무로 시라베: 감시자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두고볼 수 없다.
후루미나미는 내가 두고 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고생문이 훤하게 열렸어….
나는 문을 박차고 나왔다.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몇 명과 마주쳤고, 3층에도 몇 명이 서 있었지만 행동을 숨길 염두는 내지 못했다. 뒷일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도움을 요청할까? 아니. 문을 부수고 들어갈 수도 없는데 창틀에 사람이 몰리면 감당할 수 없어진다. 유일한 출구가 창문인 이상 소란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후루미나미의 전용실을 열고 들어갔을 때. 창문은 보란 듯이 열려 있었다. 닫을 사람이 없으니 당연했다. 창틀 구석에 연결되어있는 로프가 보였다. 카이다 쪽으로 건너갈 때 사용되었을 로프였다.
이바라 쿠리스: 뭐야. 히무로. 노크도 안 하고 후루미나미 문을 활짝활짝 열어?
이바라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문을 닫았다. 장의사가 해야 할 일이 이 탑에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로프를 탔다. 카이다의 전용실 철창까지 도달했다.
카이다의 철창에는 밑으로 내려가는 로프가 또 하나 걸려 있었다. 미도리카와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움직일 생각 하지 마. 쏴 버릴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쏴 봐. 그럼 카이다에게 복수할 기회를 영영 잃을 텐데?
아… 쏴 보랍신다. 적어도 그녀를 최대한 자극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고생문이 훤히 열렸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이런 뻔뻔한 것 같으니.
히무로 시라베: 미도리카와. 진정해!
나는 미도리카와의 철창에 거의 도착하며 그렇게 말했다. 내 눈앞에는 총구가 있었다. 미도리카와는 오른손에 든 총으로 나를, 왼 손에 든 총으로 후루미나미를 겨누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꺅. 도와줘요. 왕자님!
아까까지의 자신만만하고 담담했던 어조는 온데간데없이. 그녀는 한 번도 낸 적이 없는 간드러진 목소리를 냈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지금은 전혀 상황극을 할 만한 때가 아닌데 이 무슨 경우없는…
미도리카와 아쿠토: 이봐. 너희 둘. 남이 전용실 안에 버젓이 있다는 걸 알면서 들어오는 건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히무로 시라베: 미안해. 후루미나미는 아무런 생각이 없어.
후루미나미 나몬: 말이 너무 심하다. 히무로. 그래도 구하러 와 줘서 고마워. 감동이야. 멋있어.
히무로 시라베: 네가 내 어디를 보고 믿을 수 있었다는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네 과거. 그리고 행실.
내 과거? 의아했지만 말한 이가 후루미나미니 흘려 들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그보다 너희 둘. 아마 마유즈미 나데시코도 한 패겠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초고교급 무기상 무쿠치를 나랍시고 내세운 거야?
뭐지?
미도리카와가 문서 위조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고?
히무로 시라베: 강제적인 터치를 막아야 했고, 널 살해하겠다는 의견을 억누르고, 네 원한도 사지 않는 방법은 이것뿐이었어. 후루미나미가 분명 네게 이 계획에 대해 전달했다고…
"하하하하하하! 히무로! 보기 좋게 넘어갔어! 만물을 의심했어야지. 그렇게 풀어주면 쓰나? 네 우둔함과 강직함은 거의 소에 비견될 수 있겠구나!"
후루미나미 나몬: …너무 무섭게 보지 마. 미안해. 잘못했어.
히무로 시라베: 여기까지 와서는 전부 늦었어. 후루미나미.
미도리카와 아쿠토: 더럽게 시끄러웠지만 카이다에게 내 정체를 발설하지 않았으면 그거로 됐어. 그런데 용케 모두를 속였네. 어떻게 했지?
후루미나미 나몬: 히무로가 심혈을 기울여서 옛날에 썼던 것과 형식이 완벽히 동일한 문서를 만들어냈어. 위조지. 무쿠치라는 가상의 인물에 대한 문서를 만들어내고 그 자의 정체가 너라고 주장했어.
미도리카와 아쿠토: 망할. 고작 그거에 속아 넘어갔다고? 그 자식도 날 잊었나? 아니면 그냥 잊은 척하는 거야?
미도리카와 아쿠토: …아. 이런. 내가 말을 안 했으니 당연히 모르겠지. 그때도 내 본명을 가르쳐 준 적이 없으니 당연해.
미도리카와가 한숨을 쉬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히무로 저 녀석은 너한테 딸려 들어온 것 같고. 후루미나미 나몬. 넌 왜 들어왔어?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는 자신의 목숨을 위기에 몰아넣는 것으로 내가 그녀를 구하러 오게 만들었어. 그게 목적의 다야. 후루미나미는 아무런 생각도 없어.
미도리카와 아쿠토: 좀 나사 빠진 여자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 그게 다라고? 넌 그걸 알면서도 여기로 왔고?
히무로 시라베: …아무리 그래도 죽게 둘 순 없었어.
미도리카와 아쿠토: 멍청하긴.
나는 미도리카와의 말에 동의했다. 아마 행운아가 지금의 나를 보면 비통함에 눈물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감시자가 고작 이런 이유로 휘둘리다니 말이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빨리 꺼져. 전용실 문 말고 창문으로 꺼지도록 해.
후루미나미 나몬: 기다려. 히무로 너 날 향한 평가가 너무 박한 거 아니야? 나도 다 생각이 있어.
히무로 시라베: 또 뭐야? 솔직히 말해서 네 장단에 놀아나는 건 이제 질렸어.
후루미나미 나몬: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계략. 네가 날 구하러 오길 원했다는 이유로 여기까지 뛰어들겠니? 당연히 넌 다른 목적이 있으리라고 눈치를 챘어야지.
무시하고 창 밖으로 향하려고 했으나 후루미나미의 말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
히무로 시라베: 내가 여기까지 온 게 네 목적이라고? 왜 내가 여기에 와야 했는데?
미도리카와 아쿠토: 제발 다른 곳에서 싸워. 꺼지라고.
후루미나미 나몬: 원래는 나 혼자만 올 생각이었어.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냥 히무로도 끌어들이자. 그러자. 화려하게 일을 키워 보자. 펑펑 터지게 만들자.
후루미나미 나몬: 미도리카와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내가 밸런스를 세세하게 맞추는 타입의 인간이라는 것 덕분에 네가 이길 확률도 떡상했어.
히무로 시라베: 그게 무슨 뜻이야?
후루미나미 나몬: 체스를 같이 둘 사람이 없어서 너 혼자 체스를 둘 때. 가끔 기막힌 수가 나오면 그걸 막지 않고 일부러 그 묘수를 연출하고 싶어질 때가 있잖아?
왜 혼자서 체스를 둘까? 다른 이와 함께 두는 게 더 유익할 텐데.
미도리카와 아쿠토: 아. 그래. 마음대로 해라. 아직 원한도 없으니 총도 못 쏘고 이게 뭐야. 빨리 알아서 잘 정리하고 꺼져.
미도리카와는 체념한 듯이 우리 둘에게서 총구를 치웠다.
후루미나미 나몬: 짜릿하지. 알면서도 당해준 거지만 다른 사람과 할 때는 못 나오는 기막힌 플레이를 만들어 냈으니까.
후루미나미 나몬: 보기는 좋아. 이대로라면 한쪽이 수월하게 이기겠지. 아무런 개입이 없다면 그렇게 될 거야.
후루미나미의 말을 흘려 듣던 나는 문득 나쁜 예감을 받았다.
히무로 시라베: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하지만 그러면 스스로 체스를 두는 데 무슨 의미가 있겠어. 무슨 재미가 있겠냐고. 애초에 의미는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게임이라면, 최소한의 구색을 갖춰야 해. 묘수를 허용했다면 다른 쪽에도 묘수를 허용해 줘야지.
히무로 시라베: 대답해.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누구한테 묘수를 허용하겠다는 건데?
후루미나미 나몬: 아. 네가 조바심을 느끼는 얼굴을 볼 때마다 좋아서 미쳐버릴 것 같아. 너도 지금 느끼지? 그 느낌을 받고 있지? 온다. 온다. 다가오는 클라이맥스를 너도 지금 느끼고 있지?
미도리카와 아쿠토: 너희. 아까부터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야?
나는 창문 밖과 문 밖에 귀를 기울였다. 특별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누군가가 이득을 얻었다면 다른 한쪽도 얻어야 해. 그 과정에서 둘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거야.
그것은 기어올라오지 않았다. 위에서 내려왔다. 미리 만들어 둔 길을 통해서.
카이다 쿠로하: 뭐야. 불청객이 하나 껴 있네?
후루미나미 나몬: 음후하하하하! 카이다. 지금이야!
총성이 울렸다.
다음 화에 자유행동이 진행됩니다
근데 후루미나미 1표 모리 1표 칸나즈키 1표라서 이대로 더 신청이 없으면 사다리 타서 2명을 정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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