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나리 케이토는 안도하며 한숨을 쉬었다. 히무로 시라베의 발표라는 것에 다른 이들이 정신이 팔린 동안. 그는 후다닥 자신의 전용실로 들어가 식량을 가지고 나오는 데에 성공했다.
초콜릿 케이크와 우유였다. 카나리는 앉은자리에서 반 판을 해치웠다. 나머지 반 판도 아껴먹으면 이틀은 족히 먹을 수 있었다.
카나리 케이토: 히무로 시라베의 발표 덕분에 식량을 꺼내 왔지만. 무슨 정보였는지 궁금하긴 하단 말이지….
카나리는 낮잠을 자기 전 양치를 하려다가 총성을 들었다.
야가미 토가: 무쿠치. 무쿠치. 무쿠치.
야가미 토가는 자신의 전용실에서 기록들을 읽고 있었다. 진행했던 협상들에 대한 일지였다. 그가 작성한 원본이 이 곳에 있었다.
'무쿠치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가 없어. 초고교급 무기상이라고? 그렇게 불리는 범죄자가 있었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어.'
야가미 토가: 거짓말인가? 거짓말이라면 마유즈미 씨 역시 히무로 씨와 결탁했다는 거겠지. 다른 세 분은 몰라도 마유즈미 씨는 충분히 위조를 분간할 수 있어. 대대로 걸출했던 마유즈미 가문이니까.
야가미 토가: 하지만 대체 왜? 미도리카와 씨의 정체가 뭐길래 숨겨야 한다는 것이지? 분명 이유가 있어. 분명….
야가미는 탑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가장 나은 방법은 흰 물건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흰 물건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모노로그는 흰 물건에 간섭할 수 없다고 했는데. 애초에 흰 물건이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
만약 누군가가 흰 물건을 찾아냈는데 다른 이들에게 정보를 공개하고 있지 않다면, 탑에서 나갈 전망은 어두웠다.
야가미는 한숨을 쉬다가 총성을 들었다.
이바라 쿠리스와 하기와라 우시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바라 쿠리스: 야. 봤냐. 봤어?
하기와라 우시오: 봤다. 봤어.
이바라 쿠리스: 이야. 언제부터 저 두 명 사이가 저렇게 가까웠대?
하기와라 우시오: 난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 시간문제였어.
이바라 쿠리스: 지이랄하네.
하기와라 우시오: 야. 진짜라니까? 히무로가 넘어가기만 하면 그대로 두 사람은 게임 끝이었어.
이바라 쿠리스: 지이랄하네! 히무로 걔는 다른 건 몰라도 태도가 너무 심심해서 재미가 없어! 연애 대상으로는 꽝이라고.
하기와라 우시오: 히무로가 다른 사람들한테 신경을 안 쓰긴 하지.
이바라 쿠리스: 신경을 안 써? 꽤 쓰는 것 같던데.
하기와라 우시오: 글쎄… 공적인 부분만 신경 쓴다고 해야 하나. 동료로 둔다면 몰라도 친구로 두고 싶진 않다고 해야 하나….
이바라 쿠리스: 네가 친구 가려 사귈 처지야? 다들 널 괴짜 컨셉충으로 보고 있거든? 나니까 너랑 놀아주는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 네 말이 맞다. 고마워.
이바라 쿠리스: 어… 뭐야 썅.
하기와라 우시오: 네 말이 맞다고. 사람들 웃기겠다고 돌아다니다 보니 진짜 광대 놈이 돼 버렸어. 이상한 놈이랑 놀아줘서 고맙다.
하기와라 우시오: 라고 할 줄 알았냐?! 어아하하하하! 진지하게 듣는 것 좀 봐! 동네 사람들. 이바라가 이거에 속았대요! 개쪽팔리겠네!
이바라 쿠리스: 이 새끼가 진짜?!
이바라와 하기와라는 그 뒤로 격론을 벌였고, 그 탓에 총성을 듣지 못할 뻔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는 캐롤의 전용실에 모여 있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잘 됐어요. 그쵸? 그치? 나나시. 잘 됐지?
나나시: 다행이지. 미도리카와의 비밀을 알아냈으니 이제 카이다 것만 알아내면 돼.
나나시: 뭣보다 캐롤 씨가 강제적으로 터치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어. 정말 다행이야.
캐롤 브라이트: 이게 다는 아닐 테죠.
마유즈미 나데시코: 다가 아니라뇨?
캐롤 브라이트: 미도리카와 씨의 정체를 알아낼 필요가 없어졌을 뿐. 상황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어요. 강제적인 터치를 쓸 이유가 하나 사라졌을 뿐이죠.
나나시: 그 이유가 하나 사라졌다는 게 중요해요. 당장 캐롤 씨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압박을 받아왔잖아요.
마유즈미 나데시코: 맞아요! 캐롤 씨에게 있어서는 괴로운 일일 텐데. 다들 이상하게 캐롤 씨를 도구로 여겨요. 캐롤 씨는 도구가 아닌데.
캐롤은 이상한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캐롤 브라이트: 저를 위해 주시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두 분 모두 저를 과보호하시는 건 아닐까 염려되네요.
마유즈미 나데시코: 과보호라뇨?
캐롤 브라이트: 여러분들은 왜 그토록 저를 보호하려 하시는 거죠?
은혜를 입었으니까요. 마유즈미와 나나시는 동시에 말하려 했다. 그러나 캐롤의 이어진 말에 막히고 말았다.
캐롤 브라이트: 네. 알아요. 하지만 왜 여러분들은 터치를 받으신 뒤부터 제게 존댓말을 쓰시는 걸까요.
마유즈미 나데시코: 캐롤 씨가 연상이시니까요…?
캐롤 브라이트: 아뇨. 이 곳에 모인 분들의 나이에는 편차가 존재해요. 마유즈미 씨와 나나시 씨가 동갑이고. 토키와 씨가 두 분보다 한 살 많으시죠. 저는 토키와 씨보다 한 살이 많고….
캐롤 브라이트: 연상과 연하를 따진다면 여러분들은 토키와 씨에게도 존댓말을 쓰셔야 해요. 물론 제가 여러분과 터치를 해 봤기에 여러분들의 나이를 아는 것뿐이지만 야가미 씨는 확실하게 저희보다 연상이잖아요? 왜 야가미 씨에게는 존댓말을 쓰시지 않죠?
나나시: 그건 그냥….
나나시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나나시와 마유즈미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게? 왜?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캐롤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토키와도 그랬다. 하지만 왜?
나나시: 족보 따지기 어색하니까…? 전 모리가 저보다 연상이라고 해도 모리한테 존댓말 쓰고 싶진 않아요.
마유즈미 나데시코: 맞아! 나두!
캐롤 브라이트: 하지만 저에겐 존댓말을 쓰시네요.
나나시: 캐롤 씨는 모리가 아니니까요.
캐롤 브라이트: 정말 아닐까요…?
캐롤은 한숨을 내뿜지 못해 안에 기체가 가득 찬 사람처럼 보였다. 적어도 나나시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캐롤 브라이트: 죄송해요. 혼잣말을 한 거니까 마음에 두지 마세요. 그렇지만… 알고 싶어요.
캐롤 브라이트: 제게 있어서 여러분들과 모리 씨는 같을까요? 제가 모리 씨에게 터치를 쓰면, 모리 씨마저 저를 보호하시려 할까요?
마유즈미와 나나시는 캐롤이 왜 그런 가정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캐롤은 주변과 자신을 보며 두려움과 외로움을 느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 모리 씨마저. 제게 존댓말을 쓸까요?
마유즈미, 캐롤, 나나시는 의문 속에서 총성을 들었다.
더 단크 타워
챕터 1: < 죽여 마땅한 사람 둘 >
"과정은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히무로 시라베: 엎드려!
내가 이 말을 누구에게 한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미도리카와는 카이다의 목소리와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그쪽으로 세 발을 쏘았다. 내가 후루미나미에게 달려들며 들은 것은 비명이나 고통에 가득 찬 신음이 아닌, 총알이 무언가에 부딪혀 튕겨져 나가는 소리였다.
카이다는 손에서 팔꿈치까지를 검은 갑주 같은 것으로 감싸고 있었다. 금속 장갑이었다. 간간히 칼날 같은 돌기가 박혀있는 그 장갑을 찬 채 카이다는 총알을 튕겨내고 있었다. 미처 피할 수 없는 것은 몸을 놀려 피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동체시력과 반응속도. 민첩성이 따르지 못하면 저런 짓은 흉내도 낼 수 없다.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초인만이 저런 움직임을 할 수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네가 카이다를 불러온 거야?!
나는 후루미나미에게 소리쳤다. 그녀는 총을 줍기 위해 팔을 뻗고 있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내 함정카드에 제대로 걸렸구나. 히무로! 네가 그만큼 날 믿어줬다는 뜻이겠지? 미안해. 고마워!
히무로 시라베: 멈춰!
나는 그녀를 넘어뜨려 바닥에 엎드리게 만든 뒤 등 뒤로 팔을 꺾었다. 그 상태로 몸을 낮춘 뒤 나는 미도리카와와 카이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권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미도리카와는 벽에서 산탄총을 잡았다. 카이다의 움직임은 대단했지만, 산탄은 튕겨낼 수 없다.
그렇기에 카이다는 사라졌다. 정확히는 그 상태로 엎드려 산탄을 피했다. 그녀를 맞췄을지도 모를 미세한 총알들은 버블티나 진열대 같은 엄폐물에 박히고 막힐 뿐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카이다! 도와줘!
카이다 쿠로하: 바라는 것도 많네. 무능한 새끼!
카이다가 파충류처럼 내게 기어 왔다. 미도리카와가 산탄을 가지고 있는 이상 즉각적인 엄호는 기대하기 어려웠기에, 나는 후루미나미에게서 떨어지며 진열대에서 권총을 주웠다. 그리고 카이다 쪽을 향해 쏘았다.
빗나갈 우려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빗나가도록 쏘았기 때문이다
내가 사용하던 것과는 많이 다른 총이었지만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살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견제를 위한 사격이었기에 카이다는 총알을 쳐낼 필요도 없었다. 도탄의 가능성 또한 없었다.
나는 카이다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내 지근거리에는 미도리카와가 있게 되었다. 2대 2. 이래서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고 말한 거였나?
카이다 쿠로하: 뭐야. 불청객이 하나 껴 있네?
후루미나미가 카이다를 미도리카와의 전용실에 불렀음은 명백했다. 그렇다면 불청객은 나였다. 본래 그들의 계획은 먼저 후루미나미가 미도리카와의 전용실에 뻔뻔하게 들어간 뒤, 카이다가 곧바로 들이닥쳐 양동을 펼치는 것이었을 터다.
하지만 이렇게 되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서 묻는 건데. 나 좀 구하러 와 줄래?
후루미나미가 날 굳이 불러냈기 때문에. 둘의 계획은 무의미해졌다.
카이다의 내통자가 왜 이런 변수를 만들어냈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것을 생각하기에는 눈앞에 초인이 있었다. 카이다의 움직임은 신체 개조 없이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 역시 재단 혹은 로와 큰 관련이 있으리라.
다시 말해. 이 탑의 모두는 이제 흉기를 가진 초인과 맞서야 하는 처지에 놓인 셈이다.
고생문이 가면 갈수록 넓게 열리고 있구나. 나는 미도리카와에게 물었다.
히무로 시라베: 미도리카와. 괜찮아?
미도리카와 아쿠토: 카이다 쿠로하! 네가 그럴 줄 알았다. 이 개새끼야!
미도리카와가 패악스럽게 소리쳤다. 반대편에서도 그만큼 악랄한 대답이 돌아왔다.
카이다 쿠로하: 지랄하네. 만난 적도 없는 놈이 날 어떻게 안다는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아무나 져라! 지는 편 내 편!
미도리카와 아쿠토: 넌 닥쳐! 날 죽이려고 저 자식을 데려왔냐? 나도 그냥 죽어주진 않을 거다!
문 밖에서 여러 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토키와 아유키: 총격이야! 대체 어디서… 미도리카와?
나이토 유즈루: 야야야야야. 뭐야! 썅! 뭐야! 썅! 뭐냐고!
모리 레이코: 무기상의 전용실 안이다. 총격전이 일어나고 있다! 첩자가 안에 있어!
문 밖의 이들도 총성의 근원지를 눈치챘다. 이 탑에 총을 가진 이는 미도리카와뿐이었으니 당연했다.
야가미 토가: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마유즈미 나데시코: 우왓. 미도리카와?!
마유즈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적어도 그녀가 이 총격전에 휘말리지는 않은 것을 위안으로 삼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마침내 23T가 다급하게 전용실의 문을 두드렸다.
23T5U130: 문 열어! 미도리카와! 문 열어!
히무로 시라베: 문 열면 안 돼! 다 떨어지라고 전해!
23T5U130: 히무로…? 너 그 안에 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떻게 된 거야. 히무로?!
히무로 시라베: 23T만 남고 전부 문에서 떨어져. 총에 맞을 수도 있어!
당장 미도리카와의 전용실에서 빠져나가는 방법도 있었다. 후루미나미와 카이다는 창문을, 나와 미도리카와는 문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와 미도리카와가 도망친다면 카이다와 후루미나미는 총기를 탈취할 수 있게 된다. 23T가 즉시 돌입하더라도 몇 정은 빼앗길 것이다. 저 둘에게 총기가 주어지면 탑은 전보다 더 큰 위험에 처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자리에서 카이다와 후루미나미를 제압해야 했고. 23T를 안에 데려오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이 최대한 미도리카와의 전용실에서 멀어져야 했다. 말려들지 않도록.
마유즈미 나데시코: 잠깐! 이거 놔 봐! 히무로가 안에 있잖아!
야가미 토가: 지금 저희가 근처에 있으면 더욱 위험합니다. 23T 씨를 안에 진입시키기 위해서라도 저희는 물러서야 합니다!
토키와 아유키: 야가미의 말이 맞아. 다들 방 안에 숨어!
야가미 토가: 제 전용실로 오세요. 빨리!
캐롤 브라이트: 마유즈미 씨! 오셔야 해요!
나나시: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은 빨리 도망쳐야 해. 마유즈미!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미도리카와!
마유즈미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그래. 제발 도망쳐라. 제발 더 휘말리지 말아 다오. 제발.
더 악화되지만 말아 다오. 난 그것만을 바랐다. 턱도 없었지만.
후루미나미 나몬: 히무로 말이 맞아. 다 숨는 게 좋을 거야! 벌집이 되고 싶지 않다면!
후루미나미가 득의양양한 표정을 한 채 솟아올랐다.
그녀의 양손에는 각각 커다란 기관총이 들려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아서! 위험해!
후루미나미 나몬: 히무로. 너도 맞기 싫으면 고개 숙여! 음하하하하! 간다아아아!
미도리카와는 카이다를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나는 후루미나미를 더 말리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도리카와에게 몸을 숙이라 지시하고 잠시 기다기만 하면 되었다.
후루미나미는 양손에 기관총을 들고 방아쇠를 당겼다. 문제는 기관총이 매체에 나오는 만큼 얌전하지가 않다는 점에 있다.
두 손으로 기관총을 쏘는 일은 건장한 성인 남성조차도 불가능하다. 두 손으로 들어도 연달아 쏘면 조준이 빗나가기 일수인 것을 저지대 없이 각각 한 손으로 들고 있으니 맞을 리가 없다. 총을 잡은 이가 고등학생이라면 더욱 그렇다.
여기에서 총을 놓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기관총의 반동에도 불구하고 방아쇠를 놓지 않는 건 말에 억지로 올라타려는 일과 같다. 중첩되는 충격이 팔을 피로하게 만들다 결국에는 총을 잡고 있는 게 아니라 총에 매달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후루미나미도 그렇게 되었다.
매달린다는 것은 몸이 그 방향으로 끌려간다는 뜻이다. 후루미나미의 몸이 오른쪽으로 빙 돌면서 카이다 쪽을 겨냥했다.
카이다 쿠로하: 야아아아아! 이 병신 새끼가 진짜!
총의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총에 지배되는 이들을 보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경이로운 병신 짓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카이다는 졸지에 연달은 총알을 전부 피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카이다는 총알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낮추었고. 다음 순간 벽을 걸었다.
벽에 잠깐 다리를 딛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으나.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녀는 후루미나미에게 달려들었고. 후루미나미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기관총을 빼앗겼다.
카이다가 후루미나미의 멱살을 잡고 목이 부러져라 흔들었다.
카이다 쿠로하: 이딴 개 짓거리할 거면 가만히 있어! 죽고 싶냐? 잠시 협력했다고 네가 나랑 맞먹을 수 있을 것 같아?
후루미나미 나몬: 으아아! 그치만 23T가 곧 들어올 텐데 속전속결로 끝내야 하잖아! 이게 가장 빠른 방법이었고!
후루미나미의 속셈은 몰라도 그녀의 난사는 다른 이들이 대피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벌어 주었다.
히무로 시라베: 23T. 들어와 줘!
나는 전용실의 문을 열었다.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아. 제기랄.
또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23T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더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다고?
후루미나미 나몬: 뭐야. 왜 안 들어와?
카이다 쿠로하: 뭔가 이상해. 이상한 짓 말고 가만히 있어.
카이다와 후루미나미는 엄폐물 뒤로 몸을 숨겼다. 교착 상태였다. 지레 겁을 먹어준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만. 만약 그들이 23T의 부재를 눈치챈다면 상황은 악화될 것이다.
미도리카와는 고개를 들었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살기가 느껴졌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후루미나미 나몬. 저것도 죄업을 쌓았어. 저건 나뿐만 아니라 너도 배신했어. 그렇지?
미도리카와는 소름 끼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상대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듯한 눈빛이었다. 사냥꾼의 눈빛이라기엔 증오가 담겨 있었다. 맹수의 눈빛이라기엔 집착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복수자의 눈빛이었다.
상대를 사람이 아니라 목숨을 빚진 채권자로 보는 눈빛. 그것을 눈앞에 두자 나는 그녀를 어떻게 말려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말려야 했지만 어떻게 이 복수심을 가로막을 수 있을까?
히무로 시라베: 그렇다고 해서 죽여선 안 돼.
미도리카와 아쿠토: 죄업을 쌓은 것들은 벌을 받아야 해. 너와 내가 저것들의 업보야. 그냥 넘어갈 생각이라면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말해주고 싶네. 히무로 시라베!
"그래! 감시자가 아니라도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앞을 볼 순 있겠지. 앞을 봐! 눈을 떠!"
미도리카와 아쿠토: 저건 방금 전까지도 너에게 기관총 두 개를 난사했어. 그런데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
히무로 시라베: 나도 여기서 불평만 하고 있을 생각은 없어. 만약 죽이지 않을 수 있다면 죽이지 마. 그것만 부탁할게.
솔직히 나조차도 후루미나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이 자리에서 나와 미도리카와를 죽일 생각이라면… 최악을 상정해야 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노력해 볼 테니까 너도 내 부탁을 하나 들어.
히무로 시라베: 말해.
미도리카와 아쿠토: 내가 죽으면 야가미 토가, 하기와라 우시오, 나나시, 마유즈미 나데시코에게 내 정체를 말해 줘.
기준이 뭐지?
히무로 시라베: 알았어. 하지만 죽지 마.
미도리카와 아쿠토: 죽을 때를 대비해서 말하는 거야. 그리고 '사람을 죽이지 마. 최대한 버텨서 지하로 진입할 방법을 찾아내. 자판기를 주시해.'
히무로 시라베: 부탁이 너무 많아. 이해할 수 없고. 탑에 지하와 자판기가 있어?
미도리카와 아쿠토: 지하로 진입할 방법을 찾으라는 건 부탁이 아니야. 읽은 내용을 너에게 전해준 거지.
나는 미도리카와의 말에서 어떠한 위화감을 받았다.
히무로 시라베: 뭘 읽었다고?
미도리카와 아쿠토: 흰 종이였어. 정말 '흰 물건' 이더라.
찾았구나. 나는 거의 감탄을 내지를 뻔했다. 미도리카와가 흰 물건을 찾았구나. 그리고 그 내용을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모노로그는 간섭할 수 없는 탈출의 단서. 카텟 기관이 우리에게 보내준 것.
히무로 시라베: 어디서 찾아냈지?
미도리카와 아쿠토: 장미밭. 그러니 아무도 못 찾지. 얼마나 넓은데… 카이다와 싸우러 간 날 돌아오다가 발견했어. 나도 적외선 시야가 아니었다면 못 찾았을 거야. 한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직사각형 물체는 꽤 잘 보이거든.
미도리카와 아쿠토: 너에게 알려주는 게 맞는 건가 싶지만… 적어도 이제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의심할 때는 지난 것 같아서 말이야. 누군가는 알아야 하겠지. '이걸 찾아낸 게 시라베이길 바라. 흰 물건들을 다른 목적 때문에 찾는 이가 있거든. 그를 주의해야 해. 절대 그에게 흰 물건에 대해 알려선 안 돼. 믿을만한 자에게만 알려줘야 해.'
그 자에게 알려선 안 되기에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던 건가. 정말 시기가 안 좋다. 이 자리에서 둘 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보다.
시라베? 시라베라고?
히무로 시라베: 정말 그렇게 적혀있었나?
미도리카와 아쿠토: 그래. 그렇게 적혀 있었어. 그러니 너 역시 흰 물건을 찾아내더라도 믿을 수 있는 자에게만 흰 물건을 보여줘야 해.
히무로 시라베: 좋아. 살아서 나가자.
살아 나가야만 할 이유가 생겼기에 그렇게 말했지만. 나조차도 살아나갈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카이다. 23T 진짜 어디 갔나 봐. 더 빠르게 오기 전에 그냥 끝내 버리자!
카이다 쿠로하: 쯧. 기분 나쁜 새끼… 그래. 너든 깡통이든 무슨 이상한 일을 꾸미기 전에 내가 다 끝내 버리면 될 일이지.
카이다 쿠로하: 내가 뭘 할 수 있나 봐.
카이다의 움직임을 본 나는 권총을 세 발 쏘았다. 양쪽 다리와 어깨를 맞출 심산이었으나 카이다는 다리를 놀렸고 장갑으로 총알을 튕겨냈다.
미도리카와도 가세했다. 카이다는 벽에 진열된 총에 다가가려 할 때마다 번번이 저지되었다. 후루미나미는 두더지처럼 고개를 내밀며 카이다를 엄호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우왓. 반동! 엄청나네!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가 총을 잡게 둬선 안 돼. 미도리카와!
미도리카와는 대꾸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잠시 우리 둘은 카이다와 후루미나미를 견제하는 데만 온 신경을 쏟았다. 카이다가 마음만 먹으면 뭘 할 수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엄폐물 뒤에서 채찍이 튀어나왔을 때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후루미나미 나몬: 왓슨! 채찍은 말이야. 무언가를 때리는 용도가 아니라 이렇게 쓸 수도 있다네!
채찍이 벽에 있는 기관총에 걸렸다. 후루미나미가 채찍을 당기자 기관총이 벽에서 떨어졌다.
나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기관총이 엄폐물 뒤로 사라지기 전에 네 발을 맞췄다. 기관총에 손상이 생겼지만 내가 기관총을 쏜 만큼 카이다는 총알의 위협에서 벗어났다. 틈이 생긴 순간 그녀는 재빨리 벽에서 기관총을 두 정 가져왔다.
히무로 시라베: 큰일이야.
미도리카와는 아무 말도 없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오늘은 내 인생 최고의 날인 것 같아. 이걸 현실에서 두 눈으로 보다니!
카이다 쿠로하: 내가 뭘 할 수 있나 봐.
그렇게 모두가 우려하던 순간이 찾아왔다.
카이다 쿠로하: 너흰 이제 다 죽었어. 이 새끼들아.
초인이 총기를 쥐는 순간이 찾아왔다.
마유즈미가 명명했던 '터치파' 는 야가미와 함께. 야가미의 전용실에서 다시 모였다.
귀를 막았음에도 총성은 우리들의 귀를 비집고 들어왔다. 저 안에 있으면 분명히 귀가 멀 것이라고 생각하며 난 신음했다.
나나시: 으윽…!
마유즈미 나데시코: 으아아악! 어떡해! 총을 저렇게…!!
야가미 토가: 총성은 아무리 들어도 항상 우레처럼 크군요.
야가미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세상에. 야가미마저 공포에 떠는구나. 이 똑 부러진 거구마저도…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떡하지. 어떡해? 히무로가 안에 있었잖아. 총싸움이라고!
캐롤 브라이트: 어떻게든 도와야 해요.
야가미 토가: 돕긴요? 총격전인데 저희가 어떻게 끼어듭니까. 섣불리 난입하면 다 죽습니다. 23T 씨가 어련히 잘하시겠죠.
토키와 아유키: 그래. 다들… 진정하자. 우리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캐롤 브라이트: 저는 있어요.
나나시: 네?
모두가 캐롤 씨를 바라봤다. 캐롤 씨는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나나시: 설마…
캐롤 브라이트: 가까이 갈 수만 있다면요.
야가미 토가: 강제적인 터치라도 쓰실 겁니까?
캐롤 브라이트: 네. 쓸 거예요.
마유즈미 나데시코: 안 돼요!
야가미 토가: 안 되긴요. 됩니다. 안 돼도 되게 하셔야 합니다. 지금 누가 총을 쏘고 있는지는 몰라도. 23T 씨는 누군가를 잡아두는 역할밖에 할 수 없어요. 제압은 다른 이들의 몫입니다. 가장 효율적인 제압은 캐롤 씨의 강제적인 터치고요.
토키와 아유키: 네. 쓰세요. 단 한 번의 기회를 보신다면. 쓰셔야 해요. 반드시 쓰셔야 해요.
안 된다고 소리치기 직전. 나는 캐롤 씨의 말을 생각했다.
저를 위해 주시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두 분 모두 저를 과보호하시는 건 아닐까 염려되네요. 여러분들은 왜 그토록 저를 보호하려 하시는 거죠?
캐롤 씨가 바라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원하는 것과 캐롤 씨가 원하는 것. 그 둘은 서로 다를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히 달랐다. 그러나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었다. 내 멍청함이 한이 되었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괜찮으세요?
캐롤 씨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나나시: 캐롤 씨. 이것 하나만 확실하게 말해 주세요.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의 질문에 따라서 그럴 수 없을지도 몰라요.
나나시: 정말 하실 생각이세요?
과보호. 그 표현이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혹시나 우리의 선의라는 것이, 그녀를 위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그녀의 의사를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캐롤 브라이트: 안 할 수가 없겠어요.
나나시: 캐롤 씨가 강제적인 터치를 절대 사용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전 모든 수를 써서라도 캐롤 씨가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을 거예요.
캐롤 씨의 얼굴에 당혹감과 약간의 실망감이 떠오른 뒤 사라졌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나시: 사실 최근까지만 해도 캐롤 씨가 사용하고 싶으시더라도 반드시 막을 생각이었어요.
캐롤 브라이트: 왜죠…?
나나시: 당신을 걱정하는 마음에 여러 이유를 붙였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전 캐롤 씨를 걱정한 게 아니었어요. 캐롤 씨가 잘못되었을 때 아픔을 느낄 나를 걱정한 거였어요. 당신이 내 약점인 것처럼. 그래서 보호하려 들었죠.
나나시: 캐롤 씨가 괴로워하는 것을 견딜 자신이 없었어요. 캐롤 씨가 자신과 대상자 분의 괴로움을 감수하고, 손을 더럽힐 각오를 가질 가능성은 고려하지도 않았어요. 동경하는 사람이 성인(聖人)으로 남길 바랐어요.
캐롤 브라이트: 그랬군요.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나시: 하지만 이제 달라요. 총격전이면 몇 명이 죽을지 몰라요. 아마 제가 강제적인 터치를 통한 제압을 막는다면. 그래서 몇 명이 죽거나 다친다면. 전 그렇게 상처 입진 않을 거예요. 당신이 안전하니까. 하지만 캐롤 씨는 상처를 입겠죠. 전 이기적이니까 신경 쓰지 않을 테고.
나나시: 네. 이기적이죠. 이타적으로 되려 했지만 전 당신만 한 사람이 못 돼요. 아직은 그래요. 그렇지만 캐롤 씨의 뜻을 최대한 존중해줄 수는 있어요.
나나시: 그러니 제게 가장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캐롤 씨.
가장 솔직하게.
나는 꼭 그런 방식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캐롤 씨는 그 방법을 선택했다. 캐롤 씨는 내 손을 만졌다. 전류가 튀었다.
느낀 것은 혼란이었다. 어떤 것이 옳은가. 어떤 것이 그른가. 하고 싶지 않은데 해야만 하고. 옳지 않음에도 더 옳지 못한 상황을 막아야 한다. 회오리바람처럼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흑백마저 가릴 수 없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난 그것을 전부 이해했다. 내 쪽에서도 그녀를 향해 무언가가 흘러들어 갔다. 캐롤 씨를 향한 걱정이었다. 캐롤 씨는 그것을 이해하셨다. 도움을 준 사람을 반쯤 숭배의 대상으로 삼아버린 약해빠진 경위를 이해하셨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터치를 향한 의구심이었다. 터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쓰여야 한다. 하지만 터치를 받은 사람들은 전부 존댓말을 사용하고 그녀를 보호하려 든다.
터치가 그 사람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조종하는 건 아닐까? 내가 내담자 분들을 왜곡시키고 개량시켜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아닐까?
아니다. 아니에요. 터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쓰일 수 있어요.
부정적으로 쓰일 예정인 터치일지라도. 지금 이 터치를 부정하고 싶진 않아요.
잘못된 선택이 될지라도 그게 캐롤 씨의 선택이라면…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일지라도. 캐롤 씨가 그 일을 하려는 의지를 보인다면. 캐롤 씨가 각오했다면… 나는 그녀를 도울 것이다. 난 그것을 원해 보기로 했다.
캐롤 씨가 손을 놓았다. 그녀는 내가 무슨 일을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캐롤 브라이트: 다녀오세요. 몸조심하시고요.
나나시: 네… 이만 가 볼게요.
새삼스럽게 쑥스러움을 느끼며 손을 흔든 뒤, 나는 마유즈미의 전용실을 박차고 내 전용실로 달렸다.
총성 탓에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방을 뚫고 나오는 총알이 없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며 나는 내 전용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작업에 착수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이야! 화력 봐!
후루미나미의 말대로. 괄목할 만한 화력이었다. 기관총 두 개를 양팔로 쏘는 행위가 왜 그리도 선망의 대상이 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저런 짓을 할 순 없기 때문에. 선망의 대상이 되는 거겠지. 대단하지만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하지만 초인은 저런 일이 가능했다.
카이다 쿠로하: 고개라도 좀 내밀어 봐! 신나게 총 쏴놓고 내가 쏘니까 숨어 버리기냐?!
벽에 생기는 탄흔을 보며 나는 그 화력을 실감했다. 그녀는 미도리카와의 전용실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진열돼있던 총들은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졌다. 빵이나 버블티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땅에 떨어졌다. 단 1초라도 사선 안에 들어간다면 죽을 것이다. 저런 걸 상대로는 엄호사격도 견제도 불가능했다.
뚫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뚫으며 카이다는 천천히 나와 미도리카와의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사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땅에 팔꿈치를 대고 몸을 움직였다. 이대로라면 둘 다 죽는다. 그것만이 확실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됐어.
뭐가 됐지?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미도리카와의 손에 들린 것을 보았다.
미도리카와의 전용실에는 총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폭발물도 있었다. 전용실은 분명 쾌적하지만 폭발에 휘말리지 않을 만큼 넓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분명 미도리카와의 전용실에는 폭발물이 있었다.
미도리카와는 폭탄을 들고 있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치욕스러운 복수일지언정 나는 가만히 앉아서 죽진 않아…
히무로 시라베: 미도리카와. 멈춰. 그 방법으로는 복수할 수 없어.
미도리카와 아쿠토: 너에겐 미안하게 됐다. 그 녀석에게도 미안하고.
들을 생각이 없구나. 지긋지긋함을 느끼며 나는 카이다가 어디에 있는지 보았다. 거의 지근거리였다.
한 발 한 발의 각도를 조절할 틈은 없었다. 나는 바닥에 총구를 대고 총알을 연달아 쏘았다.
도탄이 한 발이라도 스치면 조금이라도 틈을 벌 수 있다. 당장 틈을 벌어도 무슨 의미가 있나 싶겠지만 시도하지 않는 것보단 나았다.
카이다 쿠로하: 윽!
카이다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는 지금 두 손이 자유롭지 못했다. 기관총을 버리거나 뒤로 물러나야 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틈을 벌었다.
누군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아마 밑에서부터 기어올라왔을 것이다. 모노로그를 맨손으로 부술 완력이라면 당연히 벽을 타고 오를 수도 있었다.
왜 굳이 이렇게 돌아왔을까? 퇴로를 막고 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저지하기 위해서? 너무 위험이 큰 도박이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23T는 도박에 승리했다.
23T5U130: 잘 버텼어. 히무로.
히무로 시라베: 23T.
23T가 창문틀을 넘었다. 내가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23T는 카이다에게 몸을 부딪혔다.
그것을 받아내기 위해 카이다는 기관총을 바닥에 내던졌다. 자동차를 힘으로 이기려는 꼴이다. 카이다는 완력에 있어서 분명히 23T에게 밀리고 있었다.
23T는 어깨를 카이다에게 들이대며 그녀를 밀어냈다.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23T는 탑의 인원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줄 수 없었다. 그러니 23T는 그녀의 주의를 끌뿐. 제압은 다른 이들의 몫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총을 쏘았다. 어차피 맞아도 안 죽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고 실제로 그랬다. 팔에 총알을 몇 대 맞은 카이다는 내 쪽을 돌아보며 으르렁거릴 뿐.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카이다가 23T에게서 거리를 벌리고 팔을 쓸어내렸다. 피부를 반쯤 뚫은 총알이 바닥에 떨어져 땡그랑 거리는 소리를 냈다.
단단한 몸. '대적자' 와 닮았다. 그러나 힘에 있어서는 전혀 달랐다. 아마 대적자 본인이 그녀의 자리에 있었다면 23T는 이미 산산이 부서졌을 것이다.
미도리카와의 사격이 뒤따랐다. 내가 팔에 쏜 것관 다르게 머리 쪽이었다. 카이다는 몸을 숙이고 엄폐물 쪽으로 숨었다. 후루미나미는 23T나 미도리카와를 견제할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전용실의 구석에 앉아서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카이다를 지켜봤다.
후루미나미 나몬: 정말 대단한걸. 아주 귀한 경험을 했어. 재밌구나. 재미있어!
저럴 줄 알았다. 후루미나미는 판을 벌릴지언정 매듭을 짖는 사람은 아니다. 가장 위험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발자국을 빼더니 적과 관찰자로 돌변하는 것이. 그녀다.
카이다 쿠로하: 이런 씹새끼들이…!
23T가 온 시점에서 후루미나미는 저항할 의지가 없었다. 카이다는 빈번이 벽에서 총을 줍거나 나와 미도리카와에게 달려들려 했다. 23T는 그 모든 시도를 좌절시켰다. 23T는 그녀가 자신에게서 일정 반경 이상 떨어지게 두지 않았다.
거리가 멀면 돌진했고, 가까우면 잡으려 했고, 적당하면 돌진해서 잡으려 했다. 그러자 카이다는 열세에 몰렸다. 그녀 이상으로 강한 23T가 그녀를 잡아둔 동안 나와 미도리카와는 빈번이 카이다를 향해 총을 쏘았다. 23T는 총에 맞아도 다칠 우려가 없으니 부담도 없었다.
그녀의 아군이었던 후루미나미는 더 이상 그녀를 돕지 않았다. 그녀를 제대로 몰아붙였다. 나뿐만 아니라 미도리카와까지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궁지에 몰린 모든 동물들은 최후의 수단을 사용한다. 카이다의 팔이 이상한 각도로 꺾여 벽에 있던 것을 잡았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게 아니라 바깥으로도 굽을 수 있다면 그녀와 비슷한 동작이 나올 것이다.
카이다 쿠로하: 그래. 다 집어치워. 이제 신경 안 쓸란다. 안 쓴다고!
카이다는 과일 정도 크기의 둥근 것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하지만 이 좁은 방 안이라면 카이다도 휘말릴 텐데. 초인이니 죽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녀 역시 중상을 입을 텐데….
사용한 뒤 전용실에서 나갈 생각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이리 와!
후루미나미 나몬: 로미오? 로미오. 오 로미오. 당신은 왜…
대꾸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기에 난 그녀에게 달려가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급박했기에 총은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달렸다. 2초.
미도리카와 아쿠토: 23T! 저 자식 잡아!
잡을 수 없었다. 카이다는 죽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도망칠 터였고 실제로 그랬다. 23T는 폭탄에 신경을 쓰느라 카이다를 잡을 수 없었다. 23T에게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23T는 폭탄을 안고 최대한 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4초.
23T5U130: 빨리 나가! 나가라고! 도망쳐!
미도리카와 아쿠토: 어딜 가! 당장 돌아오지 못해?! 이 비겁한 새끼야!
미도리카와는 카이다에게 소리쳤고, 카이다는 미도리카와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놓쳤다. 당장 연연할 일은 아니었다.
히무로 시라베: 나와! 빨리!
후루미나미 나몬: 참호 안 수류탄! 폭발에 대비해! 엎드려어어어어어!
이미 열려 있는 문. 나는 전용실 밖으로 몸을 던졌다. 미도리카와와 후루미나미도 나를 뒤따랐다. 귀를 막고 벽 뒤로 몸을 숨기자마자…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왔다.
잠시 귀가 들리지 않았다. 삐- 하는 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가다듬은 나는 전용실의 내부를 살폈다.
폭발이 다른 폭발물과 반응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지만, 23T는 어떨지 염려가 되었다.
히무로 시라베: 23T. 괜찮아?
나와 후루미나미는 몸을 일으켜 전용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해치웠나?
히무로 시라베: 23T가 죽길 바라?
후루미나미 나몬: 오해하지 마. 이건 상대가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마법의 주문이야.
23T5U130: 난 멀쩡해. 너흰 어때?
매캐한 연기 냄새와 함께 23T가 모습을 드러냈다. 23T는 지친 기색도 하나 없었다. 기계이기 때문이겠지.
후루미나미 나몬: 봐. 내가 살렸잖아. 23T 너 나한테 고맙다고 해. 나도 폭발에서 구해 줘서 고맙다고 할 테니까. 그럼 공평하네.
히무로 시라베: 23T. 너 덕분에 무사해.
미도리카와 아쿠토: 망할. 다 잡은 거였는데 저 폭탄 하나 때문에…!
미도리카와가 분통을 터뜨렸다. 그녀의 손에는 아직 총이 들려 있었다.
좋지 못한 예감이 들었고 현실화되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후루미나미 나몬. 배신자. 할 말은 있냐?
히무로 시라베: 아. 제발. 미도리카와. 진정해.
미도리카와가 후루미나미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꺄아악! 쏘지 말아요! 살려주세요!
히무로 시라베: 미도리카와를 자극하지 마. 후루미나미.
미도리카와 아쿠토: 난 분명 너희에게 말했지? 카이다 쿠로하와 손을 잡지 말라고. 협박을 당했다면 모를까 이 자식은 아주 즐기고 있었어. 죄업을 쌓았다면 업보를 받아야지.
23T5U130: 미도리카와. 총 내려놔.
미도리카와 아쿠토: 왜. 너희들이 내 전용실 앞에서 짜던 그 작전을 계속하려고? 마침 전용실 문도 열렸고 난 여기에 있으니 더할 나위가 없겠네. 그래서. 올 거야?
제발 한 번이라도 싸움을 멈춰라. 이 부도한 것들아. 총. 폭력. 그런 것에 의지해서 살인 게임에서 승리할 순 없단 말이다. 모든 살인 게임이 그랬다.
히무로 시라베: 지금 이 자리에서 후루미나미를 죽이면, 넌 카이다에게 복수할 수 없게 돼.
미도리카와 아쿠토: 난 이미 복수를 너무 많이 미뤘어. 때가 아니다. 복수가 완전하지 못하다. 합류해야 한다. 핑계가 많고 많았지.
미도리카와 아쿠토: 너무 많이 미뤘어. 진작 이래야 했어….
후루미나미 나몬: 히무로! 도와줘!
후루미나미는 소리쳤다. 영락없는 피해자의 눈빛이었다. 처절한 외침이었다. 전용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덮기엔 충분한 비명이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이제 더는 미루지 않을 거다! 일단 하나를 끝낼 거야. 카이다 쿠로하는 그 다음이야!
후루미나미 나몬: 마지막이니까 말할게. 히무로. 나는 너를… 너르을… 너어르으을… 너어어어어…
후루미나미는 유언에 너무 뜸을 들였다. 진짜 유언이 아니라 미도리카와의 발포를 조금이라도 늦춰 보려는 시도라는 것이 들킬 만큼 뜸을 들였다. 그렇기에 미도리카와는 수상함을 감지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사ㄹ…
미도리카와가 고개를 돌리고 그 방향에 총구를 겨누었다. 야가미가 그곳에 있었다.
후루미나미가 비명을 지르는 동안 야가미는 전용실에서 나왔다.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고 난 그의 쪽을 바라보지 않게 시선을 조절했다. 그런데도 들켰다. 직감이 뛰어나구나. 혹은 후루미나미가 초를 쳤던가.
야가미 토가: 미도리카와 씨!
야가미는 쏘지 말라는 듯이 외치며 미도리카와를 향해 달렸다. 난 미도리카와의 총이 불을 뿜으리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총에 맞아도 죽지 않기 위해 단련했다는 야가미라도. 무사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읏…!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미도리카와는 주저했다. 야가미의 다리를 쏘아 그를 무력화시킬 수도 있었지만. 미도리카와는 야가미에게서 총구도 시선도 떼지 못했다. 그녀의 동공이 조금 확장되었다.
미도리카와는 야가미의 근처 바닥에 총을 연달아 네 발 쏘았다. 야가미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오지 마! 한 발이라도 더 다가오면 후루미나미 나몬은 분명히 죽는다!
야가미 토가: 이런…
교착 상태가 시작되기 직전. 한 전용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나나시: 미도리카와!
나나시는 문을 박차고 나오자마자 미도리카와에게 무언가를 겨누었다. 미도리카와를 포함한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나시를 향했다.
은색으로 빛나는 총 한 정이 나나시의 손에 들려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저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총을 만들어냈단 말인가? 한정된 재료와 시간으로? 이렇게 단기간에?
나나시: 당장 손 머리 위로 올려! 그렇지 않으면 발사…
나나시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총을 제대로 잡지도 않은 채 미도리카와에게 경고하는 동안. 그녀는 나나시의 총을 정확하게 겨누어 쏘았다. 나나시는 화들짝 놀라며 총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바닥에 떨어진 총은 텅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런 총은 없다. 어떻게 설계를 해도 총의 속이 비어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도출될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애초부터 총이 아니었다. 그저 철통을 알맞게 두 개 붙이고 방아쇠 비슷한 것을 만들었을 뿐. 그것은 총이 아니었다. 그저 한 번의 기회를 위한 눈속임일 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야가미의 뒤에 숨어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캐롤 브라이트: 고마워요. 나나시 씨!
캐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야가미의 체구는 큰 편이었기에 캐롤마저 그의 뒤에 숨을 수 있었다. 미도리카와의 동공이 다시 수축되며. 그녀의 총구가 캐롤의 움직임을 따랐다. 걷거나 달려서는 닿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캐롤은 몸을 숙이고 내던지다시피 해. 미도리카와를 향해 미끄러졌다.
목표는 총을 쥐고 있는 미도리카와의 손이었다. 미도리카와는 캐롤을 겨누기 위해 팔을 재빠르게 돌리고 있었다.
시간에 맞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시간이 맞았다. 캐롤의 손과 미도리카와의 손이 마주쳤다. 천지의 창조를 그린 한 화가의 작품이 문득 떠올랐다.
그러나 현실과 그림은 정반대의 양상을 띄었다. 미도리카와가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렸다. 하반신이 마비당한 듯이 미도리카와의 다리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픽 쓰러졌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으윽…!
캐롤 브라이트: 이건…? 무슨…?
캐롤은 당황하고 있었고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미도리카와의 내면을 보았던 것이리라.
들켰다. 모든 공작이 들켰구나. 강제적인 터치가 실현되고야 말았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강제적인 터치란 것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렇게 착각했다.
야가미 토가: 하아. 성공했군요,
나나시: 정말. 무사하셔서 다행이야… 이 가짜 총이 통해서 다행이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실패했어….
대부분의 이들은 마유즈미의 중얼거림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계속.
캐롤은 쓰러진 미도리카와의 손을 놓고 재빨리 그녀의 쇄골에 손을 대었다. 겉으로 보기엔 마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은 일이 벌어졌다.
미도리카와의 목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끄윽. 으으윽! 으으으윽!
캐롤 브라이트: 잠들어요. 잠들어요. 잠들어요.
강제적인 터치를 눈앞에서 본 소감으로는.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마유즈미, 나나시와 토키와는 그것을 거의 바라보지도 못했다. 터치를 받아 본 자는 미도리카와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미도리카와의 사지는 부들부들 떨렸다. 차라리 그것은 발작에 가까웠다. 캐롤의 손이 닿자마자 미도리카와는 감전된 듯 바닥에 픽 하고 쓰러졌기에. 캐롤은 터치를 유지하기 위해 무릎을 굽힌 채 계속 미도리카와의 쇄골을 잡고 있었다.
감전에 의한 근육의 수축. 강직간대 발작이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끄으윽! 으아아악! 아아악!
몸은 굳어 있었으나 의식은 그렇지 않았기에 미도리카와는 끝없이 저항했다. 그녀의 눈은 실핏줄이 터져 잔뜩 충혈되었다. 이따금씩 신음이 거세질 때 그녀는 고개를 고통스럽게 휘저었다. 허리를 휘게 만들고 목을 뒤로 꺾고, 입에서 짐승과도 같은 소리를 내었으나 캐롤은 미도리카와를 놓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탑의 전등을 보았다. 그것들이 깜빡이고 있었다. 과열된 듯이. 혹은 누군가가 전류를 끊은 듯이. 전등들은 깜빡였다.
히무로 시라베: 총을 빼앗아야 해. 캐롤. 잠시 터치를…
캐롤 브라이트: 다가오지 마세요. 말려들어요!
캐롤이 눈을 질끈 감아가며 터치를 계속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미도리카와에게 총이 들려있는 이상 터치를 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총을 빼앗자니 캐롤의 터치에 말려들어 함께 몸이 굳을 수밖에 없다.
아마 터치에 말려들 각오로 미도리카와에게서 총을 빼앗으려 해도. 마비된 근육이 계속 총을 잡고 있을 테니 빼앗을 수도 없다.
캐롤은 터치를 끊을 수 없다. 그녀는 미도리카와에게 계속 속삭였다.
캐롤 브라이트: 제발 잠드세요. 제발. 제발…!
미도리카와 아쿠토: 절대로!
미도리카와가 절대로 무엇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저항은 보고 있는 모든 이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모리와 야가미마저도 터치의 효과에 만족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모리 레이코: 이런 빌어먹을.
미도리카와 아쿠토: 절대로. 끄륵. 절대로! 절대로…!
야가미 토가: 이건 좀 심하군요.
나나시: 으윽… 미안해. 미도리카와. 미안…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건 아니야… 나는 이러려 한 게…
미도리카와 아쿠토: 왜… 하필… 네가. 왜. 하필…! 네가…! 아아. 아아아악!
고통스러운 절규에 많은 이들이 움츠러들었다.
야가미 토가: 이거… 끝나기는 하는 겁니까? 더 심해지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캐롤 브라이트: 저항이… 얘는 건드리지 마… 너무 거세요… 너랑은 상관없잖아… 제발 잠들어요… 아무런 잘못도 안 했는데…
캐롤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를 본 나나시가 작게 신음했다.
어느 순간부터 전등들은 깜빡이지 않았다. 빛이 더 강해지기만 했다. 전등들이 최선을 다해 타오르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현상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동요를 감출 수가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이건 대체…
미도리카와 아쿠토: 흐윽. 으윽…! 커억. 컥!
캐롤 브라이트: 카이다 쿠로하… 그래. 그래서 미도리카와 씨는…
이바라 쿠리스: 야. 얘 질식할 것 같아! 터치 끊어! 빨리!
토키와 아유키: 아니야. 끊어선 안 돼. 캐롤 씨. 끊어선 안 돼요!
토키와는 스스로 한 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것 같았다.
토키와 아유키: 지금 끊으면 오히려 더 괴로워져요. 한 번 연결됐을 때 끝까지 해야 해요!
나이토 유즈루: 너 미쳤냐. 이걸 끝까지 하라고?!
모리 레이코: 그럼 잠시 터치를 끊고 휴식 시간이라도 주자는 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소의 뿔을 빼야 한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걸 원한 게 아닌데….
캐롤 브라이트: 여호와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너무나 괴롭습니다… 너무 슬피 울어서 눈이 잘 보이지 않고, 몸과 마음이 슬픔으로 지쳐 있습니다.
탑에 갖춰진 조명 설비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밝게 타오를 수 있는 전등이 있던가. 고개를 들자 그것들은 눈이 따가울 정도의 빛을 내뿜고 있었다. 전구라면 필라멘트가 끊어질 정도로 그것들은 밝게 타올랐고.
문득 암전이 있었다.
주변의 전등이 전부 꺼졌다. 나는 암흑 속에 놓였다. 혹시 이 어둠을 틈타 누군가가 수작을 부리진 않을까 우려가 되었지만. 기우였다. 나를 포함해 그 누구도 잠시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했다.
캐롤 브라이트: 번민으로 신음하면서 세월을 보냅니다… 근심으로 기운을 잃었으며, 슬픔과 탄식으로 내 뼈가 점점 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나를 업신여기고 비방하는 말들을 들었습니다. 사방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내게 들려 옵니다. 저들이 악한 계획을 세우고, 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전등이 꺼졌음에도 모든 이들은 캐롤과 미도리카와를 볼 수 있었다. 손과 쇄골이 맞닿은 부분에서. 틀림없이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밝은 빛이. 소리 없이 발산되고 있었다.
터치는 이론상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 생체 전기. 암시에 따른 최면 상태. 뇌파 감지. 나도 신비한 현상이라고 치부했을 뿐 그것이 인식의 범위를 벗어난 초능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빛에서는. 그런 나마저도 종교적인 색채를 보았다. 모두 숨을 죽였다.
캐롤 브라이트: 내 목숨이 주님의 손에 달려 있으니 나를 원수의 손아귀에서 건져 주시고, 나를 뒤쫓아오는 자들에게서 구하여 주소서. 주님의 얼굴을 주님의 종인 내게 비춰 주시고,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으로 나를 구하여 주소서. 아멘.
미도리카와 아쿠토: 아….
캐롤이 계속 속삭이자. 미도리카와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캐롤은 미도리카와의 쇄골에서 손을 떼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빛이 끊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탑의 조명이 다시 돌아왔다.
캐롤 브라이트: 됐어요. 강제적인 터치는 끝났어요.
나나시: 캐롤 씨. 괜찮으세요?
캐롤 브라이트: …사실. 그다지 좋진 않네요.
모리 레이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죽지 않아 다행이군.
나이토 유즈루: 다행…? 이게 다행이야? 방금 무슨 일이 났는지 봤으면서. 이게 다행이라고?!
토키와 아유키: 다행이야.
나이토와 모리가 다시금 말싸움을 버리리라 생각했던 많은 이들이 토키와의 발언에 그를 돌아보았다.
토키와 아유키: 죽지 않는 것보단 나아. 캐롤 씨에겐 미안하지만, 그리고 캐롤 씨에겐 부당하지만… 다행이야. 아무도 죽지 않았으니까.
야가미 토가: 그렇죠. 최후의 수단으로만 사용해야겠지만 최후의 수단을 손에 넣었다는 점은 긍정적이군요.
캐롤 브라이트: 그래도 자주는 못 써…요. 나한테도 부담을 주니까. 요…
캐롤의 말이 이상하게 끊기고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나나시: 캐롤 씨. 이만 쉬세요. 많이 어지러우세요?
캐롤 브라이트: 응. 좀… 그렇네. 요. 총소리가 이렇게 크다니.
이바라 쿠리스: 부축해 줄게. 세상에. 강제적인 터치가 그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하기와라 우시오: 뭔 드립 하나도 못 치겠더라. 이건 정말 심각해.
캐롤 브라이트: 나도 각오한 바였지만 생각보다 정말 힘들어요.
하기와라 우시오: 반존대 말투 쓴다고 놀리고 싶은데 지금은 그럴 기분 아니니까 다들 내가 놀리는 거 들은 셈 치고 웃어. 시~작!
아무도 웃지 않았다. 웃을 일이 없었다.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을 뿐 모두가 강제적인 터치에 대해 생각했다. 꺼진 조명. 빛. 엄숙하기까지 했던 풍경을 보았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었기에 의식의 위로 끌어올리려 하지 않았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캐롤에게서 공포를 보았다.
모리 레이코: 무기상을 그의 숙소로 옮긴다. 이 기회에 잠을 실컷 재워두어도 괜찮겠지.
야가미 토가: 혹시 밧줄 가지신 분 없나요? 미도리카와 씨를 묶어야 합니다.
나이토 유즈루: 내 전용실에 조금 있을 거야. 가져올게.
나이토가 그의 전용실로 뛰어간 동안 나나시는 잠시 발걸음을 옮겨 바닥에서 가짜 총을 주웠다.
나나시: 하아아….
아까까지만 해도 일말의 기회를 만들어낸 것에 조금의 자부심마저 느끼는 듯한 나나시였지만. 지금 그에게선 어떤 자부심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보이는 것은 미도리카와를 향한 죄책감. 그리고 약간의 착잡함 뿐이었다.
나도 비슷한 것을 느꼈다. 난 옳지 못한 짓을 했다. 마유즈미가 그것을 증명했다.
나나시: 어? 마유즈미. 왜 그래?
마유즈미 나데시코: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마유즈미는 고개를 숙인 채 계속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자기혐오와 후회가 그녀를 지배했다. 주변의 이들은 마유즈미가 왜 그리고 누구에게 사과를 하는지도 몰랐지만 나만은 알았다.
그녀가 나와 후루미나미의 무모한 작전과 계획에도 발을 맞춰 준 이유는 단지 캐롤이 강제적인 터치를 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나는 그것마저 제대로 보장해주지 못했다.
동료로서는 최악이다.
야가미 토가: 후루미나미 씨. 히무로 씨. 왜 미도리카와 씨의 전용실에 들어가 계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후루미나미 나몬: 다들 궁금하겠지. 그럼. 그럼. 아무것도 모르니 궁금할 수밖에. 아무것도 모르게 만들었으니… 어쩔래. 히무로?
히무로 시라베: 전부 말해. 어차피 그럴 생각이잖아.
나는 나를 돌아보았다.
카이다. 놓침.
후루미나미. 웃고 있음.
미도리카와. 비밀을 들킴. 쓰러짐. 강제적인 터치를 당함.
캐롤. 강제적인 터치를 하게 되었음.
마유즈미. 울고 있음.
히무로. 어설픈 계략을 부리다가 최악의 결과를 맞이함.
"네 꼴을 봐라. 히무로 시라베. 이게 감시자가 아니면 뭐겠느냐. 선의를 표방하는 재단과 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제일 잘 알면서. 모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최악의 상황을 만들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도 없을 때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네 꼴을 봐라. 히무로 시라베. 이게 감시자가 아니면 뭐겠느냐…
내 꼴을 봐라.
모리는 열변을 토했다.
모리 레이코: 우리가 심문해야 할 대상 두 명이 저 안에 있다! 저 둘이 도망치기라도 하면 네가 책임질 것인가?!
토키와 아유키: 진정해. 모리.
모리 레이코: 진정할 수 없다. 누구의 잘못인지는 무척 명확하다. 너희들 모두가 외면하고 있을 뿐 진실은 눈 앞에 있다. 당장 저 둘을 쥐어 짜내서 모든 것을 실토하게 만들어야 한다! 서예가 또한 마찬가지다!
야가미 토가: 저렇게 가둬 놓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탈출할 경우에 붙잡기 위해 23T 씨가 창문 밑에서 대기하고 있으니까요.
야가미 토가: 게다가 모리 씨의 주도로 몸수색까지 끝낸 참 아닌가요? 당신은 분명 그녀가 손톱보다 날카로운 것은 일절 가지고 있지 않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바라 쿠리스: 그리고 마유즈미한테는 캐롤이랑 나나시가 갔잖아. 그쪽은 분위기가 어두워도 험악하진 않았어. 순조롭게 진행될 거라고.
칸나즈키 시노부: 근데 그거 심문이야. 상담이야?
이바라 쿠리스: 둘 다인 것 같던데. 그래도 상담 쪽에 더 가깝더라.
야가미 토가: 카나리 씨는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는군요.
나이토 유즈루: 그놈도 생각이 있겠지. 알아서 하게 냅둬야 해.
모리 레이코: 쯧. 당장 움직여야 하는데…! 사기꾼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내가 나머지를 캐낼 것이다. 알겠나?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얘기 다 끝났는데 왜 그렇게 화가 잔뜩 났어. 히무로가 후루미나미를 구워삶고 돌아올 때까지 손가락 발가락 쪽쪽 빨며 입 좀 닥치자 우리. 응?
모리 레이코: 광대. 지금 말 다 했나?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 다 했다. 너 기분 상하라고 한 말이니까 변명은 안 해.
모리 레이코: 그렇다면 그 행동이 만들어 낼 결과 역시 감내한 뒤겠지?
하기와라 우시오: 감히 철인 통치자 나리께 대들어서 죄송합니다. 목마르시면 서민의 고혈 좀 빨아 드시겠슴까!
야가미 토가: 그만 싸우세요. 지금은 저희들끼리 싸울 때가 아닙니다.
토키와 아유키: 그래. 신경이 예민해진 건 이해하지만 지금은 조금 더 감정을 억눌러야 해.
나이토 유즈루: 계속 싸우면 머리에 꿀밤 한 대씩 갈길 거다. 이 새끼들아!
하기와라 우시오: 죄송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모리 레이코: 난 전혀.
나이토 유즈루: 됐다 그래. 싸우지만 마. 그런데… 후루미나미는 왜 우리한테 그런 요구를 했을까?
토키와 아유키: 히무로와 가장 친하니까 그런 걸 수도 있지.
야가미 토가: 옛 동료로서의 우정이 있다는 거군요? 후루미나미 씨가 배신하면서 모든 소란이 발생했음에도.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면 안에서 고백하려는 걸 수도 있지.
이바라 쿠리스: 미친놈아. 이 탑에서 우결 찍냐?
야가미 토가: 무엇이든 간에 과열되지만 않으면 됩니다. 서로를 해칠 정도로 두 분의 감정이 격양된다면 저희가 들어가서 저지합시다.
하기와라 우시오: 야. 설마 진짜로 둘 사이의 미묘한 기류 나만 느낀 거야? 적어도 후루미나미는 히무로를 무슨 잡아먹을 것 같은 눈으로 보고 있던데. 얼마 전부터 계속 그랬어.
후루미나미 나몬: 사실이야. 히무로.
숙소의 문은 그렇게 두껍지 않았다. 평범한 말소리나 소곤거림은 막아 주더라도 큰 소리의 대화는 들리기 마련다. 후루미나미와 나는 그들의 대화를 전부 들을 수가 있었다.
후루미나미는 방금 전까지 야가미, 나이토, 모리가 만들어낸 포박에 꽁꽁 말려 있던 참이었다. 사건의 전모를 내가 순순히 실토하자 나 역시 포박당했다.
철저히 실패했고. 상황이 이전의 교착 상태보다 나빠졌다는 것이 명백했기에 나는 아무런 반론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묶인 채 매사 감시당하며 숙소 안에서 갇혀살 처지에 놓였지만, 후루미나미의 제안 하나에 우리 둘은 풀려났다.
히무로 시라베: 진심이야?
후루미나미 나몬: 진심이야. 네게 눈독을 들여왔어.
믿음이 가지 않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믿어도 돼. 진실만을 이야기하겠다고 말했잖아. 모든 것을 이야기하겠다고도 말했지. 너와 내가 포박이 풀린 채 단 둘이 이야기할 수 있다면 말이야.
후루미나미는 생글생글 웃으며 몸을 빙글 돌렸다. 아마 모리가 당장 후루미나미를 보았다면 반성의 기미가 없다며 불같이 화를 냈으리라.
후루미나미 나몬: 다들 융통성이 있어서 다행이야. 그전에 모리한테서 뺨을 두 대 정도 얻어맞았지만 다행히도 다들 말려주더라고.
히무로 시라베: 아프지 않았냐고 물어봐주고 싶지만. 맞아도 쌌어.
후루미나미 나몬: 말이 심하다.
후루미나미가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나한테 많이 실망했어?
히무로 시라베: 그래.
사실이었다. 난 잔망스럽게 웃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짜증이 났던 것 같기도 했다.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느꼈다.
후루미나미 나몬: 나한테 그렇게 기대를 걸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히무로 시라베: 적어도 네가 악의를 가진 채 행동하는 것은 아닐 거라 믿었지. 생각이 있을 거라고.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을 뿐일 거라고.
이야기를 나눠 보자. 그런다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히무로 시라베: 상황이 여기까지 치달은 것이 오롯이 네 탓만은 아닐 테지. 하지만 분명히 네 잘못으로 사람이 다쳤어. 네가 어떤 의도를 가졌다고 해도 이젠 돌이킬 수 없어.
후루미나미 나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미도리카와를 확보했잖아. 이럼 된 거 아니야?
히무로 시라베: 전혀. 미도리카와의 전용실이 열려있는 이상 카이다가 총기에 눈독을 들일지도 몰라. 나와 너, 아마 마유즈미까지 다른 이들에게서 신뢰를 잃었고.
히무로 시라베: 캐롤도 그래. 강제적인 터치를 하게 됐지. 마유즈미가 우리와 손을 잡은 것도 캐롤을 돕기 위해서. 강제적인 터치를 막기 위해서였는데… 마유즈미의 바람은 산산이 부서졌어.
후루미나미 나몬: 히무로?
히무로 시라베: 왜.
후루미나미 나몬: 내가 앞에 있는데 다른 사람 얘기하지 마.
농담일 거라 생각했지만 후루미나미는 웃고 있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눈을 몇 번 깜빡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장난일 테지. 질투하는 듯한 장난.
이런 사소한 것에 질투를 하진 않을 테지. 그럴만한 이유도 없었다. 나는 흔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결국 최악이야. 모든 상황이…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어.
후루미나미 나몬: 네가 낙심하는 건 보기 좋지만, 네 정신건강을 위해서 한 마디 하자면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어. 나만 아니었으면 네 바람대로 그리고 의도대로 일이 이루어졌겠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내가 왜 온갖 짓거리로 네 계획을 망친 건지 궁금하구나. 미스터?
히무로 시라베: 그래.
후루미나미 나몬: 고마워. 그렇게 말해 줘서. 내 말은… 이게 어떤 느낌인지 알려면 네가 악당이 돼 봐야 해. 꽤 기막혔는데 나 말고 아무도 모른다고!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서 많은 악당들이 굳이 사악한 계획을 숨겨진 카메라 앞에서 다 털어놓는 것 같아. 클리셰가 클리셰인 이유가 있다고나 할까?
후루미나미 나몬: 클리셰 하니까 말인데.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나몬.
후루미나미 나몬: 알겠어. 알겠다고! 어휴. 분위기 좀 풀어 보려니까 딱딱하게 만들고 말이야.
그녀는 질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어디부터 시작할까… 나는 카이다의 정체를 꽤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전용실에 들어가 봤거든.
그래. 후루미나미의 전용실이 카이다의 전용실 옆에 있다면 당연히 그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다.
당장 후루미나미가 마유즈미의 전용실을 통해 미도리카와의 전용실로 진입한다는 방법을 생각해내고, 유리칼과 갈고리 로프라는 구체적인 준비물을 가져왔을 때부터 눈치채야 했다. 이제 보니 이렇게 당연하다.
후루미나미 나몬:그때가 언제였더라… 카이다가 우리와 합류하려고 했는데 미도리카와가 총을 겨눠서 물러났던 거. 기억 나? 그 때 내가 잠시 없어졌었잖아.
고개를 끄덕였다.
히무로 시라베: 그렇게 예전부터?
후루미나미 나몬: 카이다가 저렇게 멀어지면 카이다의 전용실은 비어 있겠지 싶어서. 조사해 봤어.
히무로 시라베: 그렇게 예전부터일 리가 없어. 그때는 하기와라, 이바라, 나이토 세 명이 탑 밖에서 널 찾고 있었어. 셋 뿐이라지만 창문을 통해 카이다의 전용실로 간다면 분명 발각되었을 거야.
후루미나미는 내 말을 듣자마자 폭소를 터뜨렸다. 그렇게 듣기 좋은 웃음은 아니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창문을 통해 안 갔으니까 그렇지! 아. 진짜 넌 너무 순진해! 이 탑의 모두가 순진해. 자물쇠와 열쇠를 왜 그렇게 신봉하는 거야? 그것만 따면 문은 아무것도 아닌데!
그 말을 듣자마자 내 머리에 섬광이 쳤다. 그래. 분명히 이 경우의 수도 있었다. 당연히 있었다. 이 가능성은 언제든지 존재했다.
창문으로 침입할 수 있다면 문을 통해 침입할 수도 있다. 잠금장치만 제거하면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다.
히무로 시라베: 문을 땄다고?
후루미나미 나몬: 탐정한테 어울리는 일이잖아. 용의자의 거처를 따고 들어가서 결정적인 증거품을 가지고 나오는 것 말이야. 마침 카이다도 장미 꽃밭 너머로 사라졌으니 거리낄 것 없었지.
후루미나미 나몬: 정확히는. 음… 그때 아홉 명은 날 찾으러 다녔고. 미도리카와는 자기 방에 있었고. 토키와와 23T는 둘을 감시하고 있었지. 카이다는 탑 밖에 있었고.
후루미나미 나몬: 칸나즈키랑 카나리가 식당 안에만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카나리 성격 보면 밥이나 먹지 딴짓할 놈은 아니잖아? 그냥 들키겠다는 각오로 들이댔어.
히무로 시라베: 우리가 전용실에서 널 발견한 건…
후루미나미 나몬: 적당히 안을 둘러보고 신원을 확인한 다음 곧바로 내 전용실에 들어간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아. 세상에. 그냥 잠깐 뭘 찾으려 했다니. 다들 이런 허접한 변명에 넘어가? 웃음 참느라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
나는 후루미나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후루미나미 나몬: 맞아. 쥐도 새도 모르게 행동해야 탐정인 거지. 오히려 탐정은 쥐랑 새가 말하는 것도 숨어서 듣는 사람이라고.
정말 쥐도새도 모르게 움직였다. 누구도 그녀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 쉬운 일이었겠지. 그냥 천성이 저렇다며 큰 의미를 두지 않은 대가는 쓰디썼다.
후루미나미 나몬: 아무튼 카이다의 정보를 먼저 알아낸 뒤 접선했지. 시기만 놓고 보면 미도리카와의 전용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계획을 세웠어.
후루미나미 나몬: 카이다 쪽에서 미도리카와와 마주쳤다는 연락을 보냈고. 난 너와 마유즈미를 공범으로 삼은 뒤 안으로 들어갔지. 미도리카와는 카이다와 내통하지만 말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미 내통한 뒤였어.
후루미나미 나몬: 그 뒤로는 뭐… 뻔하지. 내가 먼저 미도리카와의 전용실로 들어간 다음 뻔뻔하게 뻐기다가 카이다와 협공하는 계획이었어. 내가 널 불러와서 다 망하고 이렇게 됐지만. 그래도 재미있었지?
히무로 시라베: …난 네 그 특성을 이해할 수 없어.
후루미나미 나몬: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말이야?
히무로 시라베: 두려워하긴 커녕 너는 오히려 실패를 원하고 있어. 내 전용실에서 위조의 가능성을 제안한 것. 미도리카와의 전용실에 나를 불러온 것. 23T가 오자마자 저항을 멈추는 것.
히무로 시라베: 네가 원하는 건 성공하는 게 아니야. 실패를 만들어내는 거지. 마유즈미의 말대로 너는 큰일이 나려고 안달난 사람처럼 굴었지. 당연해. 정말 큰일이 나길 원했으니까.
후루미나미 나몬: 바로 그거야!
후루미나미는 기쁘다는 듯이 내게 손가락을 겨누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드디어 날 이해해 줬구나. 히무로? 그래. 맞아. 그게 나야. 이제 좀 후련하네! 가면 쓰고 사는 거 되게 힘들단 말이지.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서 나와 함께한 이들이 전부 실패한 거야! 내가 그걸 원하니까. 자. 이게 나야. 멋진 일이 될 거라고 여겼던 가면 속 얼굴과의 만남이 이런 식이라 미안해. 하지만 넌 이제 날 이해할 수 있겠지.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서. 소감은 어때?
히무로 시라베: 불길해.
후루미나미 나몬: 뭐가?
히무로 시라베: 네가 웃고 있기에 불길해. 다음 계략이 있는지 모르기에 불길해.
후루미나미 나몬: 다음 계략은 없어. 왜 웃냐면 단지 내가 비극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극적인 실패. 극적인 비극일수록 좋지. 단지 그것뿐.
후루미나미 나몬: 너도 봤잖아. 히무로.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잖아? 나나시와 토키와는 눈을 뜨지도 못했고. 마유즈미는 주저앉았고. 캐롤도 꽤 마음의 상처를 입었어. 미도리카와는 고문을 당했고. 네 선의는 내 악의로 더럽혀져 다른 이들을 상처 입히는 도구로 쓰였지.
후루미나미 나몬: 화려한 대결 끝에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어. 그래서 난 만족해.
이게 후루미나미의 본질이다. 내가 알고자 했던 사람의 진면목.
내겐 실망할 자격이 없다. 모두 사람을 보는 눈이 부족했던 내 잘못이다. 후루미나미를 공범으로 삼은 이상 책임도 죄책감도. 내가 지고 가야 했다.
그런 생각들에 빠져 있었던 나는 후루미나미의 말에 제대로 반응할 수 없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서 난 네가 마음에 들어. 히무로.
히무로 시라베: …뭐?
나는 내가 그녀의 말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후루미나미는 내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아무래도 제대로 들은 모양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모르겠다는 듯이 그러지 마. 너도 내가 무슨 말하는지 알잖아? like. love.
후루미나미 나몬: 난 오히려 네가 놀랐다는 게 신기한걸. 내 쪽에선 꽤 눈치를 줬던 것 같은데.
그럴 낌새는 보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반응을 보며 재미를 얻는 놀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 이것도 그렇겠지. '이번에는 진심이겠지.' 라는 생각은 후루미나미를 상대로 지양되어야 했다. 타인을 놀잇감으로 여기는 이의 진심은 믿을 가치가 없다.
후루미나미 나몬: 하지만 난 네게 신용을 잃었으니까… 이렇게 하자. 내가 널 진심으로 사랑하는 논거를 댈게. 그럼 넌 내 진심이 거짓이라는 논거를 대 줘. 그럼 승부가 나겠지?
히무로 시라베: 승부라니. 애초에 이 건은 설전의 여지조차 없어. 아무리 흔들 다리 효과가 이 탑에 적용되고 있다 해도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야. 무엇보다 너는 알고 있잖아.
후루미나미 나몬: 카텟 기관과 메리라는 여자에 대한 얘기?
히무로 시라베: 그래.
후루미나미 나몬: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얘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좀 알려 줘. 그녀의 목적에 대해 알게 된다는 부분에서 끝났어.
히무로 시라베: 지금 네가 뭘 요구할 상황 같아?
후루미나미 나몬: 응. 충분히 요구할 만 해. 왜냐면 내가 아직 뭘 더 알고 있는지 넌 모르잖아.
후루미나미 나몬: 네가 날 전부 알았다고 장담할 수 있어?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들을 것도 못 듣고, 못 들을 것도 들을 수 있어.
후루미나미 나몬: 네가 한 실수를 만회하고 싶잖아?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
체면을 차릴 때는 아니다. 하지만 메리와 카텟 기관에 대해 발설하고 싶지 않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나는 고민 끝에 대략적인 상황만을 말해주기로 했다.
히무로 시라베: 만들어진 초고교급 행운이 있었어. 행운아. 자신이 원하는 환경을 얼마든지 조성할 수 있는, 무서운 자였지.
후루미나미 나몬: 초고교급 행운? 그게 있긴 했구나?
히무로 시라베: 많은 이들이 초고교급 행운의 진위를 의심했지만 재단은 연구 끝에 초고교급 행운을 증명하는 데에 성공했어. 난 행운아가 카텟 기관과 나를 조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지.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서 어떻게 했어?
히무로 시라베: 오해가 생겼고. 난 오해를 풀지 못했어. 그녀는 풀었지만 난 그녀를 믿지 못했어. 그땐 아무도 믿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지.
히무로 시라베: 그리고…
"포기하지 않으면 돼."
"쉽지 않은 여정일 거야. 세상은 변질되었으니까. 전망이 어둡지. 하지만 그럴수록 한 줄기 빛이 눈에 잘 들어올 거야. 그 길을 따라."
"나는 널 기다릴게. 널 절대 버리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도 다른 이들을 버리지 말아 줘."
"그 과정 속에서 금수조차 사람이 되고, 사랑이 태어나는 거니까."
히무로 시라베: 오해를 풀었고. 여러 일 끝에 카텟 기관의 일원이 되었지.
후루미나미 나몬: 끝부분은 되게 뭉뚱그렸네? 그래도 메리라는 여자의 역할이 컸겠지?
고개를 끄덕였다.
후루미나미 나몬: 흐흠. 역시 좋은 이야기야. 몇 번을 들어도 변하지 않아. 그런 게 바로 고전이지. 변질되지 않는 가치. 변질되지 않은 것들….
후루미나미 나몬: 요즘 세상 참 보기 싫단 말이야. 사랑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지. 자기가 상처 입는 게 무서워서 몸을 사렸다간 절대 진정한 사랑 따위 해볼 수 없어. 불같은 사랑에 빠졌다면 불같이 타올라야 해. 서로 타 죽는다고 할지라도.
후루미나미는 담담한 어조로 장황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히무로 시라베: 비극이랑 실패를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희극도 좋아하나 봐?
후루미나미 나몬: 응? 아닌데. 희극은 별로야. 그냥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고 끝나는 건 별로야. 맹탕이야. 불연소야.
히무로 시라베: 그런데 왜 내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뭔 소리래. 비극이니까 좋아하는 거지. 그렇게 행복했던 한 쌍이 갈라졌으니까 비극이잖아?
뭐라고 말하는 거지?
나는 진심으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발상이 가능하리라고도, 가능하더라도 그걸 내 면전에서 말하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히무로 시라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그렇잖아.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건. 네 영상에 메리라는 여자가 죽는 장면이 나왔기 때문 아니야? 그래서 영상을 봤을 때 격렬하게 반응한 거잖아.
히무로 시라베: 메리가… 어떻게 메리가…
후루미나미 나몬: 23T는 영상 속 내용들이 다 사실이라고 했으니까 냉정하게 보면 메리라는 여자는 이미 죽었겠지. 너는 납치되고, 메리는 죽고. 짠. 비극이네?
농담은 아니겠지. 내가 아무리 농담에 대해 모른다고 해도 이런 게 농담이 될 리가 없다. 그래. 농담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메리가 죽었고 난 납치됐으니 비극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후루미나미는 말하고 있었다.
핏발이 서는 것을 참으며 나는 후루미나미에게 물었다.
히무로 시라베: 너… 미쳤어?
후루미나미 나몬: 비범하지.
히무로 시라베: 비범해지려고 하는 거겠지. 비범하게 보이고 싶기에 하는 거겠지. 네가 그렇게 사는 건 참견할 바가 아니지만 사과는 받아야겠어.
후루미나미가 입을 삐죽였다. 바로 고개 숙여 사과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 뻔뻔함을 눈앞에 두자니 인내심이 점점 가늘어졌다.
결국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알겠어. 미안… 하지만 사실이잖아.
히무로 시라베: 네 추측을 사실이라 단정 짓지 마.
메리는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미도리카와가 사실을 말했다면. 메리는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시라베라고 부르는 사람은 메리뿐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 분명히.
후루미나미 나몬: 미안해….
눈. 눈썹. 입. 입술. 일련의 움직임들이 전부 미안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런 사과를 들었는데도 개운하지 않았다. 이것마저 뻔뻔한 연기일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대신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앞으로 내가 뭘 노릴 생각인지 알려 줄게.
히무로 시라베: 이만큼 실패해 놓고 또 떨어질 구석이 있다니.
후루미나미 나몬: 아. 이번 일은 실패 안 할 거야. 더 짜릿하게 실패하려면 성공을 좀 해야 하는 법이거든. 스카이다이빙처럼. 더 커다란 비극을 연출하려면 밑바탕을 충분히 쌓아야 해.
후루미나미 나몬: 히무로. 나랑 동반자살해 줘.
후루미나미는 마실 것 좀 달라는 어투로 그렇게 말했다.
히무로 시라베: 뭐?
후루미나미 나몬: 너랑 나랑 동반자살하자고. 같이.
히무로 시라베: …왜?
후루미나미 나몬: 너에게선 그럴 기질이 보이거든. 넌 그럴 만한 누군가와 그럴 만한 상황에 빠지면 동반자살을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후루미나미 나몬: 하지만 로미오와 달리 너는 줄리엣과 함께 죽지 못했잖아? 그러니 내가 네 줄리엣이 돼 줄게.
이 자리에서 그저 '왜?' 밖에 말하지 못하게 되진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히무로 시라베: 왜? 싫어.
후루미나미 나몬: 왜냐고? 내가 비극을 사랑하니까. 내 비극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비극마저 사랑하지.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서 난 재난 영화를 좋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표도 비전도 이루지 못한 채 덧없이 죽으니까. 그 점을 이바라는 싫어하는 것 같지만 나는 그게 좋아.
후루미나미 나몬: 하기와라가 그나마 내 사고방식에 근접했어. 하지만 그조차도 순수한 사람들의 비극을 선호하진 않았어. 비극을 자신의 안정감을 만들어 낼 매개체로 사용했을 뿐.
후루미나미 나몬: 난 순수하게. 비극을 사랑해. 이루어지지 못한 짝의 동반자살. 가문의 몰락. 자기 파멸적인 복수. 산산이 조각난 우정. 끔찍한 예언의 실현. 난 순수하게 사람이 꺾이고 무너지는 꼴을 사랑해.
히무로 시라베: 그럼 지금 당장 자살해버리지 그래? 다른 이를 끌어들이지 말고.
폭언이었지만 실로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비극이다. 후루미나미는 실패를 원하고 자신의 삶이 비극이 되길 원한다. 그렇기에 무모하다. 하지만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은 자살이다. 그것만으로 그녀의 삶은 지독한 비극이 될 수 있다.
그저 죽어 버리면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비극을 어떻게 평가할지 자신의 눈으로 관측할 수 없기 때문일까.
후루미나미 나몬: 말이 되긴 해. 나도 항상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하지만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참는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그냥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보다는 내 아이랑 함께 교통사고를 당하는 게 더 비극적이잖아. 가진 게 많을수록 잃을 게 많아지고, 난 최대한 많은 걸 잃고 싶어.
히무로 시라베: …….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 완전히 뒤틀려 있었다. 난 후루미나미가 왜 웃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실패는 좋다. 성공은 이후 더 높은 곳에서 추락할 수 있으니 좋다. 그러니 언제나 만족할 수 있다. 이기든 지든, 그녀를 꺾든 꺾여주든 결국 그녀는 승리하는 셈이다.
그녀가 짜 놓은 판에 들어온 순간부터 후루미나미가 만족하는 것은 정해진 순리였다. 지금도 그랬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서 동반자살을 원해. 나랑 같이 죽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와 무척 가까울 텐데. 그런 사람과 함께 죽을 수 있다면… 아아. 너무 아름답고 슬프잖아. 언젠가 죽을 목숨이라면 그렇게 죽고 싶어.
후루미나미는 스스로의 상상에 도취된 듯이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러니까 나랑 동반자살 해 줄래. 히무로미오?
히무로 시라베: 내가 그녀를 포기하고 네 권유를 받아들이는 일은 추호도 없을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네게 권유하는 거야!
히무로 시라베: 네 말은 모순돼. 나와 동반자살을 하려면 내가 그만큼 너를 사랑하고, 우리 둘의 사이도 가까워야 해. 하지만 내겐 이미 그녀와의 카텟이 있고. 너와 그렇게 가까워질 일은 없어. 너도 알고 있잖아?
후루미나미 나몬: 카텟? 관심 없고 히무로. 혹시 바람피운다는 말 알아?
히무로 시라베: 간통.
다음 순간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모순이 아니게 되는 방법.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법. 분명 방법이 있긴 했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히무로 시라베: 진심은 아니겠지.
후루미나미 나몬: 한 번 생각해 봐. 널 믿어주고 네 든든한 한 편이 되어 준 메리라는 여자가 있는데. 네가 나와 바람을 피운다면…
후루미나미 나몬: 그거 참 지독한 일 아니겠어? 하늘에 대고 통탄해 마지않을 비극이지. 단 한 번의 외도면 충분해. 단 한 번만 너를 유혹하면. 그 성스러웠던 한 쌍은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해. 그냥 사라져 버린다고!
후루미나미가 두 손을 쥐었다가 확 하고 펼쳤다.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달뜨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 않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렇게 아름다운 한 쌍이 완전히 부서진다면 그만한 비극도 없을 거야. 그 완전한 관계가 산산이 부서지고. 둘의 사랑은 잊히고. 내가 그 완전한 관계를 빼앗는 거지.
후루미나미 나몬: 그녀에게서 너를 빼앗는 거야. 난 비극을 좋아하지만 뺏기거나 뺏게 하는 쪽보다는 뺏는 쪽이 좋아서.
히무로 시라베: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에 내게 접근한 거라고? 그럴 리가. 대체 뭘 보고…
후루미나미 나몬: 모노로그가 영상을 나눠줬을 때. 그때 네 표정을 봤어. 정확한 내용은 몰랐지만 '메리' 가 사람 이름이라면 한 번 찔러볼 만하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히무로 시라베: 그래. 아직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실하지 않아. 내 동기 비디오에 그녀가 나왔을지라도.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진...
후루미나미 나몬: 과육 안에 꿀이 가득 들어차서 썩기 직전인 상태였던 거 있지! 딱 봐도 뭔가 있잖아. 뭔가 있었다고. 히무로. 난 들어야만 했어!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서 난 네 이야기를 들었어. 그리고… 빠져들었지.
후루미나미 나몬: 아아.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남자와 그에게 대가 없는 도움을 나눠 준 여자. 서로에게 더없이 소중한 두 사람… 흑…
후루미나미 나몬: 아… 이거야. 이 두 명이야. 이 감동적인 한 쌍. 서로의 영혼의 동반자… 마음에 쏙 들었어.
후루미나미 나몬: 그 뒤로 목표를 정했어. 난 그 메리라는 여자에게서 너를 빼앗을 거야. 너희들의 완전한 관계를 부순 다음. 내가 네 마음의 빈자리를 비집고 들어갈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난 요즘 그거에 열중하고 있어.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후루미나미는 그렇게 말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녀에게 있어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을 훔치려 들면서도 정작 값은 모른다.
내가 메리를 어떻게 여기든, 내 과거가 어떻든, 후루미나미는 그걸 알 뿐 이해하지는 않는다. 불행을 보고 눈물을 흘리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는다.
세상을 그저 놀이터로 여긴다. 다른 이들이 있는 공유지가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 욕망. 즐거움을 이끌어낼 놀이터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오직 자신만을 안다.
히무로 시라베: 정말 날 메리에게서 빼앗기 위해.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 하나 때문에?
후루미나미 나몬: 응응.
후루미나미는 뒤틀렸다.
사랑하기에 빼앗는 것이 아니라 빼앗기 위해 사랑한다.
얻은 것을 잃는 게 아니라 잃기 위해 얻는다.
히무로 시라베: 다른 사람을 찾아. 난 네 도착증에 어울리고 싶지 않아.
후루미나미 나몬: 이 탑 안에 너 만한 사람 없어. 네가 있는데 왜 내가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해?
히무로 시라베: 내가 싫다고 분명히 말했으니까.
후루미나미 나몬: 그치만 나도 네가 좋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잖아!
나는 어디서부터 그녀를 설득해야 하는지 막막함마저 느꼈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이라니…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이거 하나만 물어볼게.
후루미나미 나몬: 응응.
히무로 시라베: 만약 네가 나와 메리의 관계에 대해 일절 듣지 못했다면… 그래도 네가 내게 이 정도로 집착했을까?
후루미나미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후루미나미 나몬: …아니? 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왜 그러겠어?
이럴 줄 알았다.
히무로 시라베: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그녀를 안 뒤에 관심을 가지고, 그녀를 몰랐다면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니.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것도 정도가 있어.
후루미나미 나몬: 히무로.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잖아. 외모. 재력. 권력. 능력. 사랑에 빠진 결정적인 계기가 없었다면 애초에 사랑에 빠지지 않았겠지. 당연한 이치야. 나한텐 그게 천생연분의 유무였던 것뿐이야!
히무로 시라베: 네가 내게 외도를 제안한 이상 그것들은 전혀 달라. 관계를 부수는 것에 중점을 둔 이상 그건 구애가 아니야. 절도지. 넌 탐정이 아니라 괴도야.
후루미나미 나몬: 셜록 홈즈와 아르센 뤼팽이 한 편이라니. 후후. 재밌네. 안 그래?
히무로 시라베: 전혀. 난 사람이지 물건이 아니야. 조건만 만족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 상품이 아니라고. 난 그저 널 꾸밀 뿐인 장신구가 아니야… 날 절도의 대상으로 보지 마.
후루미나미가 나를 별종 보듯이 보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싫다고 하는지 모르겠네. 너로서도 그렇게 손해는 아니잖아.
히무로 시라베: 손해가 아니라고…? 이게 손익의 문제로 보여?
후루미나미 나몬: 아니. 난 너한테 좋은 일 시켜주려는 거야. 히무로. 너도 모욕에 화를 내고 옛사랑을 그리워한다면. 욕구도 있을 거 아니야?
후루미나미 나몬의 얼굴에 도발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히무로 시라베: 말을 멈춰.
후루미나미 나몬: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난 매력적이잖아. 내가 무대 위에만 서면 수많은 사람들이 내 사랑을 갈구해. 내가 윙크 한 번만 해도 아주 미쳐.
후루미나미 나몬: 내 가면만을 보고 내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들이지. 내 내면은 아무도 몰라. 후루미나미 가문 자식들도 마찬가지야. 몇은 알아챘고 날 두려워하고 있지만 날 이해하고 긍정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없어.
후루미나미 나몬: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히무로.
히무로 시라베: 네가 주장하는 바를 아는 한 널 긍정하지는 않을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완고하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 네가 결국 꺾이는 모습을 보고 싶어 져. 한계의 한계까지 버티다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날 받아들이는 걸 보고 싶어. 추할 정도로 장렬한 좌절을… 보고 싶어.
후루미나미 나몬: 날 더 가지지 못해 매시간 갈증을 느낄 정도로. 나를 원하게 되어 버린 네 모습을 보고 싶어. 히무로. 어때? 그 여자에게서 잠시 한눈을 팔 만큼은 매력적이니?
후루미나미는 모자를 벗어 바닥에 던졌다.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후루미나미 나몬: 표정을 읽을 수가 없네. 장미의 가시가 두려워? 네가 삼키기 어렵다면야 잠시 가시를 눕혀 줄 수도 있어.
히무로 시라베: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후루미나미…
후루미나미 나몬: 몇은 가시에 피투성이가 될지라도 장미를 안아보려 갖은 애를 쓸 걸? 넌 지금 스스로가 얼마나 행운아인지 모르고 있어.
행운아.
저주받을.
후루미나미 나몬: 그냥 아무 말 없이 눈만 감고 있어도 좋아. 내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합리화해도 상관없어. 응?
히무로 시라베: 절대 안 돼.
뒤로 물러섰지만 그에 따라 후루미나미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날 자극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지긋이 올려다보았다.
히무로 시라베: 멈춰.
후루미나미 나몬: 뭘? 너도 네가 넘어갈까 봐 두렵니?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간 내게 발이 붙들리게 될 걸.
히무로 시라베: 멈추라고…
이건 모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번거로운 방식으로 내 면전에 침을 뱉고 있을 뿐이었다.
살면서 모욕을 들어왔다. 내 태생. 내 행적. 내 한계에 대한 모욕과 유언비어를 들어왔다. 그렇지만 나와 메리를 동시에 모욕하는 짓을 내 면전에 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여자 이전에는.
후루미나미 나몬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먹어서는 안 될 사과. 해서는 안될 도박. 걸어서는 안될 길. 치명적인 것들이 충분한 매력을 갖추면 그것들은 파멸적으로 변하지.
히무로 시라베: 제발… 조용히 해.
"저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텐가? 저런 것들에게 자비를 쏟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저들에겐 그만한 가치가 없다. 그렇기에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가치판단의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은 너요 우리다. 네가 옳지 않다면 옳지 않다."
조용히 해라. 넌 허상에 불과하다.
허상뿐만 아니라 허상이 아닌 것 역시 끝없이 떠들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네 마음은 살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 계기는 만들어보고 싶어. 겉과 속 중 하나를 사로잡으면 나머지 하나도 따라오거든.
대체 무엇이? 나는 머리가 지끈해질 정도의 피로를 느꼈다. 그만해. 멈춰. 조용히 해. 닥쳐. 그 모욕을 제발 그만…
내가 노를 삭이며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다 댄 동안 후루미나미는 내 귀에 바람을 불었다.
귀에 바람 불지 마.
명백한 도발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후후후. 고민돼? 그냥 눈 한 번 딱 감고 저지르자. 그렇게 손해 보는 일은 아니잖아? 오히려 이득이지. 너는 즐기기만 하면 되는 일이잖아.
후루미나미 나몬: 아. 혹시 몰라서 말인데 메리 인상착의 좀 알려줄 수 있어? 내 전용실엔 가발이랑 옷이 많고, 성격은 내가 어떻게든 비슷하게…
히무로 시라베: 그 실없는 소리를 그만 닥쳐라. 이 배냇병신아!
윽박질렀다. 숙소 밖이 조용해졌다. 숙소 안도 그랬다.
후루미나미 나몬: 까…깜짝이야. 그렇게 화났어? 넌 절조를 중요시하는 타입이구나. 더 마음에 들었어.
후루미나미 나몬: 그럼 네 마음이 열릴 때까지 기다릴 테니 없었던 일로 하자.
그녀를 보았다.
히무로 시라베: 네가 상황을 통제하는 것 같나?
후루미나미 나몬: 윽. 무뚝뚝 모드로 변했네. 그 상태의 넌 별로 재미없어.
대꾸할 필요성조차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단 둘이 대화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고 말했지.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가능하다. 내가 너를 심문하는 것. 너는 그것을 보아야 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날 때리기라도 할 생각이야? 큭… 네가 내 몸은 꺾을지언정 마음은 꺾을 수 없어!
히무로 시라베: 정말 그런지 볼까.
후루미나미 나몬: 뭐… 뭐야. 진짜 하게? 이건 내 캐릭터 해석이랑 너무 많이 틀린데.
몸을 돌렸다. 그대로 몇 걸음을 걸은 뒤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스위치는 잘 작동했다. 전등은 꺼졌다.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는 공포. 위기감의 조성. 효율적인 심문.
후루미나미 나몬: 뭐야. 갑자기 불은 왜 꺼…?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거야? 오!
히무로 시라베: 끝까지 입을 닥치지 않는군. 후루미나미 나몬. 내가 어디까지 넘어가 줄 거라고 생각했나?
후루미나미 나몬: 알겠어. 히무로. 알겠으니까… 불 좀 켜줘. 응?
다시금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히무로 시라베: 묻는 말에 대답해. 어디까지 넘어가 줄 거라고 생각했나?
후루미나미 나몬은 입을 열지 않았다. 못했나? 어떻든.
히무로 시라베: 네 눈에는 내가 병신으로 보였나? 대답해 봐.
후루미나미 나몬: 아니야.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어… 난 네가 마음에 들어서…
히무로 시라베: 멋대로 평가하고, 도발하고, 배려와 인내 위에서 춤을 춘 뒤의 변명인가?
히무로 시라베: 네 계획은 왜 네가 이렇게 뒤틀리게 됐는지 내게 실토하는 것 까지겠지. 네 즐거움을 빼앗겠다. 너도 최소한의 벌은 받아야 하기에. 그것이 벌이 된다면 얼마든지 빼앗겠다.
생각해보면 이 방법은 언제나 손안에 있었다. 조금의 용기만 가졌다면 모든 것이 더 나아질 수 있었다. 다른 모두를 생각한다는 명목으로 스스로를 기만의 늪에 빠뜨릴 일도 없었겠지.
뒤늦게 시작했다.
히무로 시라베: 양친이 타계하셨지. 안 그런가?
후루미나미 나몬: 뭐……
후루미나미 나몬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사실 상관은 없다.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그녀의 반응은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히무로 시라베: 양친께선 후루미나미 가문에서 꽤 높은 지위의 사람이었다. 아마 연기자였겠지. 먼저 한 쪽이 죽었고, 몇 년 후 나머지 한 쪽도 죽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잠깐. 어떻게 그걸…
히무로 시라베: 화려한 실패를 보았나? 어린 시절에 보았겠지. 양친의 죽음이 그것과 관련이 있나?
순조로웠다. 이대로 질문과 확인을 반복하면 후루미나미 나몬의 행동 원리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이대로만 하면 된다. 이대로만 하면.
히무로 시라베: 양친 중 어느 쪽이 자살했지?
후루미나미 나몬: 그만 해. 그만 해!
후루미나미 나몬이 소리쳤다. 양심의 가책? 부적절하다. 적어도 후루미나미 나몬이 상대라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지금 그녀는 분개심도 수치심도 느끼고 있지 않다.
느끼고 있더라도 정상적인 감정은 아니리라.
히무로 시라베: 자살하는 장면을 직접 보았나?
후루미나미 나몬: 멈춰! 제발 멈춰! 더 얘기하지 마! 내 쪽에서 직접 말할 테니까!
직접 말한다라.
후루미나미 나몬은 애초에 과거사를 숨길 생각이 없었다. 들려줄 생각만이 있었다. 어떻게 자신이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는지 읊어서 충격을 주려 했으리라.
히무로 시라베: 불특정 다수의 인원들이 너와 함께 보았나?
후루미나미 나몬: 그 얘기는 내가 들려줘야 한단 말이야! 내가 너한테 말해야 한다고! 그걸 전부 멋대로 알아내다니…! 내가 너한테 알려줘야 모든 게 의미 있는 거였다고!
광인의 작태다.
히무로 시라베: 그럼 기뻐해야지. 네가 그토록 원하던 비극이다. 네가 내게 어떤 인상도 남기지 못하는 것. 너에게 있어서는 최악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건 용납 못 해! 그냥 날 없던 일 취급할 순 없어! 그런 건 용납 못 해!
후루미나미 나몬: 너와 내가 그럴 수 있다면 좋겠어. 네 가면 안을 보고 싶어. 내 가면 안을 보여주고 싶어.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건 참 멋진 일이지 않겠어?
히무로 시라베: 네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사건을 겪었기에 그 꼴이 됐는지 수많은 형용사와 미사여구를 붙여 표현하려 했겠지. 그렇게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기려 했겠지. 네가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듯이 말이다.
히무로 시라베: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 것. 기억나나? 널 이해하고 싶었고. 지금 이해했다.
히무로 시라베: 그리고 신경 쓰지 않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아니야. 아니야! 이건 아니야!
히무로 시라베: 날 이해할 수 있었나? 무엇을 보았지? 나와 같은 것을 보았나?
히무로 시라베: 넌 날 이해했다고 생각했겠지. 그렇기에 이런 같잖은 제안을 했던 거겠지. 너는 볼 수 있는 것마저 보지 않았다. 보고 싶은 것만을 보았다. 네가 나의 무엇을 아는가?
후루미나미 나몬: 무뚝뚝하고. 똑똑하고. 연인이 있고. 개조 인간. 음울한 얼굴. 다부짐. 의외로 가끔 사려 깊음. 연애 눈치는 꽝. 그리고…
히무로 시라베: 턱없이 부족하다. 그것마저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고작 그런 것들로 날 이해했다고 여겼나? 너는 모른다. 너는 나에 대해 모른다. 로에 대해서. 카텟 기관에 대해서. 나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관성. 가속도. 중력. 흐르기 시작하니 멈출 수 없게 되었다.
히무로 시라베: 그런데 네가 나의 무엇을 아는가? 그것들을 전혀 모르면서 어떻게 알은체를 할 수 있었나. 어떻게 그런 추한 모욕을 내게 던질 수 있었나!
후루미나미 나몬: 알겠어. 미안해! 잘못했어! 그러니까 그만….
아니다. 지금은 아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아직 미안하지 않다. 그저 이 상황이 싫기에 빠져나가려는 것뿐이다.
계속한다. 속행한다. 이대로만 하면 된다.
히무로 시라베: 피학성 도착자 같으니. 널 경멸하고픈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그것이 네 바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난 내 마음 안에 널 위한 공간을 남겨두지 않겠다. 그곳에 부정적인 감정을 담지도 않겠다.
히무로 시라베: 그대로 넌 내게 잔물결 하나 일으키지 못하고. 끝인 것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 그럴 수가….
흐른다. 멈출 수 없다. 멈출 필요가 없다. 이런 것을 상대로는…
그러나 멈추고 싶었다.
왜지? 내 노여움은 정당했다. 후루미나미 나몬이 내게 모욕을 던졌기 때문이다.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면 후루미나미 나몬은 아직도 닥치지 않았을 터다. 주도권은 항상 넘어가 있었을 테고.
거리낄 것이 없었지만 꺼려졌다. 후루미나미 나몬과 동급인 사람이 된 것 같았기에. 노(怒)를 토해내도 개운해지지 않았다.
어떻게 행동한들 후루미나미 나몬을 설득할 순 없다. 몇 마디 말로 마법같이 가치관이 변하거나 내게 사과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상대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건 그런 것이다. 무슨 일을 해도 무의미하다면 허무해질 뿐이다. 그렇기에 후루미나미 나몬은 상심을 느끼는 듯한 낯짝을 할 수 있었다.
나도 그것을 조금은 느꼈다. 벽에 화를 내고 있을 뿐임을 자각한 뒤, 돋아오른 핏줄을 누르면서 천천히 말했다.
히무로 시라베: …폭언은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난 네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것뿐이야.
히무로 시라베: 언젠가 지금 내가 화낸 이유를 진심으로 이해한다면. 다시 이야기할 날이 올 테지. 그때가 되면, 그리고 네가 여전히 그러고 싶다면 내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려줘. 들을 테니까.
히무로 시라베: 할 얘긴 끝이야. 잘 있어. 후루미나미.
후루미나미 나몬: 이건 아니지.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게 있는데… 네가 그렇게 날 무시하겠다면. 좋아.
후루미나미 나몬: 너에게 상처를 입힐 거야. 깊은 인상을 남길 거야. 나는 인상파 화가다!
등을 보였을 때 후루미나미 나몬이 내게 몸을 던졌다.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이럴 줄은 몰랐다. 가장 먼저 한 것은 그녀의 팔을 잡는 일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이 카이다 쿠로하와 협력했다면 그녀 역시 흉기를 소지할 수 있다.
아닌데. 모리 레이코는 분명 후루미나미 나몬의 몸수색을 끝냈다. 그녀의 집착과 끈질김은 분명 후루미나미 나몬의 아주 작은 흉기라도 잡아냈을 터다.
그러면 후루미나미 나몬은 왜 내게 달려들고 있는 것이지?
후루미나미 나몬의 손을 잡아 흉기가 들려 있는지 확인했다. 흉기는 없었다.
어둠 속의 후루미나미 나몬의 표정이 어땠는지 볼 수 없었던 것이 패착이 되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손바닥 안을 확인하던 내 손에 그녀는 손가락을 집어 넣어 깍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나는 재빨리 후루미나미 나몬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뿌리치기 직전 나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나는 암흑 속에서도 흐릿하게나마 앞을 볼 수 있지만 그래도 시야가 줄어들긴 하기에. 다른 감각들이 보다 민감해진다. 청각과 촉각 같은 것들이 그렇다.
숨소리가 들렸고, 입술에 따뜻함이 느껴졌고, 눈앞에는…
순간 몸이 굳었기에 후루미나미 나몬을 뿌리치지 못했고, 그녀의 가속도와 기세에 넘어가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머리와 등이 바닥에 부딪히며 충격을 느꼈지만. 그것들은 빠르게 잊혔다.
히무로 시라베: 으읍…! 읍…!
후루미나미 나몬의 어깨를 밀어 입을 떼어냈다.
후루미나미 나몬: 푸하…! 아하하하! 아하!
입이 떨어지자마자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내가 해냈다! 어땠어? 두근거렸어? 난 두근거렸어. 으흠. 이런 느낌이구나? 겉은 얼음처럼 차가워도 안은 따뜻한 사람이네?
히무로 시라베: 너. 너 대체 무슨…
후루미나미 나몬: 그 여자랑은 이런 거 해 봤어?
그만 참지 못하고 목청을 높이고 말았다.
히무로 시라베: 이런 제 밖에 모르는 것이…!
야가미 토가: 다시 과열됐어요. 진입하겠습니다!
토키와 아유키: 히무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조금만…
문이 열렸다. 숙소 안의 암흑을 보자 누군가가 스위치를 눌렀다. 조명이 들어왔다.
다른 이들의 눈동자를 느꼈다.
침묵이 있었다.
토키와 아유키: …진정해.
이바라 쿠리스: 이… 이게 뭐야. 너희 지금 뭐 해?
후루미나미 나몬: 보면 알잖아. 그렇게 보고 싶었니?
하기와라 우시오: 내가 맞았지? 이 새끼들아! 뭐? 우결을 찍어? 내 통찰력 앞에 경배해라! 이거 봐봐! 잡아먹었잖아!
후루미나미를 몸 위에서 밀어내고 몸을 일으키며. 나는 이 말을 떠올렸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초고교급 연기자다. 그녀의 특기는 다른 등장인물들을 연기하는 것이다. 그녀는 메소드 연기를 통해 배역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다.
종잡을 수 없는 기행을 저지른다. 맞춰주다 보면 끌려다니게 되어 있다.
그녀는 날 속이는 행위에서 상당한 만족감을 얻는 듯하다. 적당히 받아주되 선을 넘게 두지 말자.
후루미나미 가문은 시장 독점적인 성향을 띄고 있으며 내부에는 친자와 양자 사이의 차별이 존재한다. 그들은 후루미나미의 유전적 순수성이 이어진 자들만이 연기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후루미나미 나몬 본인의 반응으로 보아 근친혼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후루미나미는 연기자로서 특정한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어쩌면 그녀 나름대로의 완전성을 향한 시도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기행은 이따금씩 유쾌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덮어놓고 부정할 순 없다. 우선 대화를 해 보자.
내 행적을 알고 싶어 하는 눈치가 있지만 그녀가 카텟 기관의 정보를 캐내려는 것은 아니다.
나와 손을 잡고 그녀가 입을 댄 음료수를 건네는 등 신체적인 접촉을 유도하는 것은 그녀의 장난이 발전된 형태이다. 선을 넘는다면 불쾌감을 표시하자.
처형당할 위험이 사라지고 살인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그녀와 거리를 두려는 것은 옳지 않다. 다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후루미나미는 메리와 나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 연기자이기에 어떤 이야기에도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인가? 단지 그렇게 치부하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후루미나미는 비극을 고평가 한다. 이 점을 기억해둬야 한다.
기억했으나. 대비하지 못했다. 그녀는 비극을 선호한다. 그렇기에 자신과 타인이 비극을 겪길 바란다. 그녀와 손을 잡는다면 십중팔구 실패하게 될 것이다. 후루미나미가 내부에서 실패하기 위한 공작을 부리기 때문이다.
난 그걸 몰랐고, 후루미나미의 행동력을 과소평가했다. 그랬기에 그녀에게 배신당했다.
후루미나미는 내게 관심을 가진다. 그녀의 장난은 줄곧 장난의 탈을 쓴 진심이었다. 그녀는 내게 관심을 가졌다. 다만 순수한 관심은 아니다. 그녀는 메리에게서 나를 빼앗아 외도를 유도함으로써 비극을 연출하려 한다.
후루미나미는 진심으로 날 유혹할 셈이다. 다만 그것이 목적은 아니다. 유혹은 부수적일 뿐 결국 후루미나미는 나를 가장 커다란 비극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셈이다. 나는 그 욕망을 거부한다.
후루미나미의 눈물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한 없이 모욕적이다. 후루미나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 든다. 자신의 즐거움 혹은 슬픔을 위해서라면 다른 이들에게 아무리 상처를 입히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그녀를 이해하려 했지만 이것이 그녀이다. 그것은 진실이다. 애석함이나 아쉬움은 불필요하다. 잊자. 아무런 관심을 주어선 안 된다. 어떠한 감정도 가질 필요가 없다. 그것이 그녀의 즐거움을 빼앗는 일이라면.
기억할 것: 강제로 내게 입을 맞춘 것에 대한 대가를 받아내야 한다.
호감도 측정
후루미나미의 호감도: 50
-50=원수 / -30=앙숙 / -15=상극 / 0=무관계 / +15=친구 / +30=연인 / +50=배필
후루미나미 나몬한테 저런 설정을 정해둔 뒤에 쓰긴 했지만 다른 캐릭터들이 그렇듯이 후루미나미도 자유행동을 안 하면 설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예정의 친구였음
그런데 자유행동이 계속 진행되면서 이 친구한테 살을 붙일 기회가 늘어났고 그에 따라 얘가 핵심 조연 위치까지 올라와버렸음
아마 여러분들의 투표로 후루미나미의 자유행동이 진행되지 못했다면 후루미나미는 이렇게 겉으로 나서지 않고 괴짜 사차원 능지캐로 남지 않았을까 싶네요
담편에는 모리 칸나즈키 둘 중 하나와의 자유행동이 진행됩니다
빤스는 이걸 진짜 해야 돼 말아야 돼? 하면서 고민 중이니까 좀만 기다리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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