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다 쿠로하: 말했어. 저 자식… 말했다고.
카이다가 중얼거렸다.
야가미 토가: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노로그: 밝히기로 했으니 어쭙잖은 연기는 그만하는 게 어때?
침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 그는 미간을 마구 일그러뜨렸다.
야가미 토가: …지금 저랑 장난하십니까? 이건 계약에 없었습니다.
야가미가 모노로그의 말에 그렇게 대답했음에도 모두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질 나쁜 농담으로 여겨질 정도였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의문점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캐롤 브라이트: …이게 무슨 소리죠?
하기와라 우시오: 뭐야. 진짜 뭐야?
히무로 시라베: 야가미는… 만일을 대비한 게 아니었어. 미도리카와를 찾아간 뒤 우발적으로 그녀를 살해한 게 아니었어.
히무로 시라베: 처음부터 그녀를 죽이려고 간 거야. 모노로그의 내통자였기에. 흰 물건에 접촉한 사람을 죽여야 했기에…
히무로 시라베: 두 명이 미도리카와의 숙소 안에서 협력한 것도. 서로 공범과 진범의 정체를 얘기하지 않은 것도. 내통자이기 때문이야. 모노로그의 제의를 거절했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모노로그: 숙소 안에서 만난 당시에는 서로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야가미는 모노로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야가미 토가: 너무 경우가 없는 행동이라 당황스러울 지경이군요. 도무지… 지금 제가 내통자임을 밝히셔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저는 이런 대접을 받으려고 사람을 죽인 게 아닙니다.
야가미 토가: 토사구팽(兎死狗烹)을 염두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설마 이렇게 일방적일 줄은 몰랐군요.
모노로그: 걱정 말도록. 내 지시를 계속 따른다면 네 신상에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야가미 토가: 따르지 않으면 내치겠다 이겁니까. 이런 식으로 목줄을 잡다니. 무서운 일입니다.
모노로그: 역시 똑똑해. 카이다 쿠로하. 이 얘기는 너에게도 적용된다. 이번에는 야가미 토가가 이겼지만 다음 번은 더 분발하도록 해.
카이다 쿠로하: 지금 이딴 짓을 하고도 다음 같은 소리를 해?!
모리 레이코: 이 염치없는 것들. 영혼을 팔아넘긴 변절자들아!
나이토 유즈루: 그래. 이 자식들아! 정신 나갔어?! 저 책이랑 싸워도 모자랄 판에 한 패를 먹어?!
모리와 나이토가 불같이 화를 냈다.
야가미 토가: 할 말이 없군요. 하지만 생존을 위한 선택입니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이건… 존나 말이 안 되잖아. 너 미도리카와랑 친구라며. 그런데 넌 카이다 편에 붙었다고?
나나시: 말도 안 돼. 그건 말도 안 되잖아.
토키와 아유키: 미도리카와의 정체가 바다뱀이라는 걸 몰랐을 거야. 죽이고 나서야 깨달은 거지. 아니… 너에게서 직접 듣겠어. 야가미. 왜 그런 거야?!
야가미는 한숨을 크게 내쉰 뒤에 말했다.
야가미 토가: 다들 조금만 진정하세요. 하실 질문부터가 잘못되었습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가 바다뱀임을 알고 죽인 것인가? 그걸 물어보셔야죠.
야가미 토가: 말해 드리죠. 알고 죽였습니다. 욕지거리는 잠시 입 안에 머금어 두세요. 제 말을 들으시면 여러분들도 납득하실 수 있을 겁니다.
캐롤 브라이트: 납득을 시켜 주시겠다고요? 사람을. 그것도 당신의 친구를 죽이셨는데 저희가 납득을 할 수 있다고요?
야가미 토가: 잠깐. 캐롤 씨. 친구요? 제가. 미도리카와 씨의 친구란 말입니까? 하. 제발요.
야가미의 말에 캐롤은 드물게도 큰 소리를 내었다.
캐롤 브라이트: 당신…! 미도리카와 씨가 당신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했는지 아세요?! 그녀의 모든 노력은 언젠가 당신과 다시 만날 날을 위해서였어요! 그런데 당신은…!
야가미 토가: 그 점에서 보면 그녀와 내게도 공통점이 있었군요.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위해서 수 없이 칼을 갈다니. 겨누는 대상은 달랐지만요.
토키와 아유키: 그게 무슨 뜻이야. 겨누는 대상이 달랐다니… 네가 미도리카와의 친구라면 카이다가 네 원수라는 것도 알고 있을 거 아니야? 그녀의 정체도… 기억을 잃은 게 아니고서야.
야가미 토가: 기억은 멀쩡하지만 전제가 잘못되었어요. 제 원수는 카이다 씨가 아닙니다. 제 눈은 카이다 씨 탓에 잃은 것이 아니니까요. 눈은 미도리카와 씨와 함께 몸을 피하던 도중 다친 겁니다. 유리조각이 잔뜩 들어갔죠.
야가미 토가: 카이다 씨는 저와 미도리카와 씨를 추적하셨습니다. 그건 사실이죠. 저도 그녀의 손에 죽을 뻔했고요. 하지만 그뿐입니다. 그녀는 조직에 의한 의뢰를 받았을 뿐 저희에게 악감정은 없었습니다.
캐롤 브라이트: 아니에요… 조직은 오히려 당신을 살려 보내려고 했어요. 초고교급 협상가로서의 이름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카이다 씨가 독단적으로…
야가미 토가: 하아… 캐롤 씨. 이런 말을 재판 뒤에도 다시 하게 되어 유감이지만. 입 좀 다물어 주세요.
캐롤 브라이트: 뭐라고요…?
야가미 토가: 미도리카와 씨의 기억에 감명을 깊게 받으신 것 같군요. 터치를 통해 그녀를 이해하게 되었으니 오지랖을 부리는 것도 이해합니다. 그녀가 마치 당신의 친한 친구라도 된 기분을 느끼실 테고, 저는 친구를 배신하고 그녀를 죽인 악한으로 보일 테죠.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받아들이는 것은 당신 자유니까.
야가미 토가: 그런데 듣는 사람 입장도 고려해주시는 건 어떤까요. 제 입장에선 죽은 사람이 다른 가죽을 뒤집어쓰고 나온 것처럼 들린단 말입니다… 꽤 소름이 끼쳐요. 제발 남의 일에 신경 좀 끄란 말씀을. 굳이 드려야겠습니까?
캐롤 브라이트: 이해가 안 돼요… 대체 왜 미도리카와 씨에게 그토록…
캐롤이 중얼거렸다.
야가미 토가: 저를 해치려고 든 것이 카이다 씨의 독단적 행동임은 저도 이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누구보다 증오하는 이는 따로 있었죠.
야가미 토가: 캐롤 씨. 당신은 미도리카와 씨의 내면밖에 보지 못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제 내면도 보시겠습니까?
야가미는 캐롤을 향해 팔을 쭉 뻗어 보였다.
모노로그: 야가미 토가. 그만. 재판장에서의 터치는 금지되어 있다.
야가미 토가: 저도 압니다. 그 터치라는 것이 없으면 그녀는 절대 저를 이해할 수 없으리란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야가미가 뻗은 팔을 접으며 손끝을 비볐다. 그의 입꼬리에서 실소가 비어져 나왔다.
야가미 토가: 나를 위해? 하. 언젠가 미도리카와 씨를 다시 보시거든 웃기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당신은 제가 미도리카와 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추호도 알 수 없었겠죠. 없었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겠죠.
야가미 토가: 그녀의 입장이었으니까. 버려진 내 입장은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겠죠.
히무로 시라베: 버려진?
야가미 토가: 그럼 이게 버려진 것이지 달리 무엇입니까. 부상을 입은 반병신은 도피행에 방해만 될 테니 병원에 버려두고 자기 혼자 떠나다뇨. 언젠가 그녀가 나를 찾으리라 덧없는 기대를 해 보았지만, 그녀는 이 탑에서 다시 만난 순간까지 저를 찾지 않았습니다.
야가미 토가: 그렇죠. 밀수업에 도움이 되는 협상가랑 친구 노릇 좀 하다가 짐이 되니까 버려두고. 전 그녀에게 고작 그런 위치였겠죠. 발을 뺄 때가 왔다고 끊임없이 말해 왔는데도 그녀는 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야가미 토가: 나중에 생각해보니 모든 퍼즐이 맞더군요. 그녀 쪽에서는 저를 친우라고 여기지 않았던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그녀가 찾아오기를 기다렸다니. 저도 참 무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후루미나미 나몬: 세상에. 어쩌면 좋아…
후루미나미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야가미 토가: 멋대로 울지 마세요. 남의 인생을 관음 거리 취급하시다니. 무례한 것도 정도가 있습니다.
히무로 시라베: 야가미. 미도리카와는 너를 정말로 친구라고 여겼을 거야. 그녀는 마지막까지 네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를 주저했어. 카이다에게 말려들지 않도록…
야가미 토가: 그렇지만 결국 제 손을 빌리려 들었죠. 자신이 갇히자마자 써먹기 편한 야가미 토가를 호출하다니. 참 약았어요. 안 그렇습니까?
히무로 시라베: 너를 정말 쓰기 편한 장기짝처럼 여겼다면, 네가 캐롤을 등 뒤에 숨기고 미도리카와에게 달려갔을 때 네게 총을 쏘았겠지.
미도리카와는 주저했다. 야가미의 다리를 쏘아 그를 무력화시킬 수도 있었지만. 미도리카와는 야가미에게서 총구도 시선도 떼지 못했다. 그녀의 동공이 조금 확장되었다.
미도리카와는 야가미의 근처 바닥에 총을 연달아 네 발 쏘았다. 야가미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야가미 토가: 그것 하나뿐입니까. 닷새의 시간과 단편적인 사건 만으로 그녀의 전부를 알았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그녀의 시각으로 나를 보고 있는 누군가는 더욱 그렇고요.
하기와라 우시오: …야가미 말이 맞나?
하기와라가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나시: 저 말이 맞다니?
하기와라 우시오: 생각해보면 그렇잖아. 아무리 믿을 수 있는 친구라고 해도 타이밍이 좀 적나라하지 않아? 어쩐지 저번에 통화했을 때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더라니. 자기 살인에 친구를 끌어들이려 한 셈이잖아.
카나리 케이토: 그래. 다른 사람한테 협박을 하는 자식이야! 착할 리가 없잖아! 다들 미쳤어. 밀수업자한테 공감을 하게?!
나이토 유즈루: 미도리카와가 좋은 사람인지는 차치고. 저 새끼들이 나쁜 놈들이란 건 확실해!
야가미 토가: 저도 한때는 소위 좋은 사람에 속했습니다.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 사연에 빨려 들어가고, 버려졌습니다. 멍청하게도.
야가미 토가: 그 값을 나중에 치러야만 했죠. 재활은 고통스러웠으니까요. 그런데 그녀는? 치르지 않았습니다. 그녀 쪽에서 오지 않으니 제 쪽에서 가리라고 마음먹을 수밖에요.
토키와 아유키: 그렇게 몸을 키운 이유가. 언젠가의 복수를 위해서였어?
야가미 토가: 이런 몸을 만드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매일매일 뼈를 깎을 정도로 노력한 이유가 총을 맞고도 무사한 몸을 원했다. 고작 그게 전부일 것 같습니까.
야가미 토가: 제가 미쳤다고 한쪽 눈이 반병신이 된 뒤에도 협상 테이블에 앉았을까요. 명성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은 반병신이 아니었습니다. 이용할 가치가 있는 초고교급 협상가였죠.
야가미 토가: 결국 날 버린 이의 심장을 내 손으로 찌를 수 있었으니. 만족스럽습니다.
히무로 시라베: 모노로그가 너에게 제시한 것은 내통자만이 알 수 있는 정보나 특권뿐이 아니었구나. 복수를 이룰 수 있는 환경. 그 자체를…
야가미 토가: 모노로그 씨와는 이해관계가 통했죠. 미도리카와 씨의 정체를 알려 주시며 내통자 역할을 제안하신 순간 깨달았습니다. 이 계약은 서로를 이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을.
야가미 토가: 모노로그 씨는 흰 물건에 대해 알고 있는 미도리카와 씨를 제거할 수 있었고. 덕분에 저는 오랜 숙원을 드디어 이룰 수 있었어요. 윈윈입니다.
모리 레이코: 드디어 미쳐 버린 건가. 협상가? 책이 원하는 것은 살인 게임이다. 그 협상은 네게 전혀 유리하지 않다. 네가 죽는 것을 오히려 바라는 이에게 영혼을 팔아넘기다니. 복수심이 네 나머지 눈도 멀게 만들었나?
모리가 화를 불태웠다.
야가미 토가: 입 조심하세요. 그리고 모노로그 씨는 목적이 확고하신 만큼 신뢰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모노로그 씨의 요구를 완수했으니 이제 대우도 보다 나아지겠죠.
하기와라 우시오: 개새끼라서 믿음이 간다, 그거구만?
야가미 토가: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카이다 쿠로하: 내통자가 하나 더 있었으면 미리 말을 해 줬어야지. 자칫 그 자리에서 입막음을 할 뻔했단 말이야.
모노로그: 내게 있어서는 그것도 나쁘지 않았지.
카이다 쿠로하: 이 새끼가. 지금 나랑 말장난 해?
야가미 토가: 제 정체는 공작 도중에 말씀드릴 수 없었지만 이해해 주세요. 저도 당신이 내통자라고 확신하진 못하고 있었기에 몸을 사린 겁니다.
카이다 쿠로하: 그래. 이해해. 이해한다고.
나나시: 카이다. 네가 모노로그에게서 제시받은 건 미도리카와나 23T에게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정보들이었어?
후루미나미 나몬: 내 생각엔 조직에서 소거받은 기억들의 복구도 제시되었을 것 같은데. 기억이 없다면 채워야지!
카이다 쿠로하: 닥쳐. 넌 정말 가만 안 둔다. 후루미나미 나몬…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날 대놓고 엿 먹이더니 방에까지 침범해?
야가미 토가: 기억이 없다는 점에선 당신에게 동정심마저 드는군요. 당신이 만약 바다뱀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면, 나의 십 분의 일 정도는 기뻤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카이다 쿠로하: 하하. 야가미… 닥쳐.
야가미 토가: 이렇게 보니 당신을 향한 옅은 복수심도 충족이 되는군요. 후유증은 남지 않았지만 그때의 비수. 참 아팠습니다.
야가미 토가: 아참. 기억이 안 나시죠? 전부 소거되었으니까요. 그러니 스스로의 행동에서 배우는 게 없는 것일지도 모르죠.
카이다 쿠로하: 개새끼가…!
히무로 시라베: 네가 겪어온 일을 부정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살인을 정당화할 수도 없어. 야가미.
야가미 토가: 그러면 그냥 용서합니까? 과거에 있었던 일을 모두 잊고. 새 역경에 맞서 싸워야 했을까요?
히무로 시라베: 당연히.
야가미 토가: 그러면 제 반쪽 눈은 누구에게 받아냅니까.
야가미는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야가미 토가: 파편이 튀어서 평생 단안경을 착용해야 하는. 제 눈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칼에 맞고 상처에 짠물이 들어가는 고통은 쉽게 잊히지가 않습니다. 그 보상은 누가 해줍니까.
히무로 시라베: 그 보상이 네 복수라고 말하는 거야?
야가미 토가: 다른 것은 생각하기 어렵군요.
히무로 시라베: 틀렸어. 그건 보상이 아니야. 그저 네 목을 죄일 올가미일 뿐이야. 당장은 만족스러울지 몰라도 네 죄는 사라지지 않아.
야가미 토가: 재미있군요.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요. 미도리카와 씨를 빠르게 체포하고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게 두었다면 모든 게 이런 식으로 끝나지는 않았겠죠.
야가미 토가: 미도리카와 씨의 정체를 숨기겠다며 공작을 부리는 일이 없었다면 말입니다. 결국 그 공작에 가담한 이들 탓에 그녀가 죽은 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후루미나미 나몬: 에헷. 뭐 그런 말씀을!
살인자의 궤변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의 손에 가장 많은 피가 묻었지만. 내 손에 묻은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업보.
결국 나도 언젠가 값을 치르게 되겠지.
하기와라 우시오: 근데 카이다나 야가미나 니들도 나랑 똑같다고 하는 거 존나 별로다. 책임감이라는 단어에 대해 아니?
카이다 쿠로하: 개소리하네. 사실 네 도움이 가장 컸어. 멍청아. 네 덕분에 이제 탑엔 총이 없고, 나를 막을 수 있는 사람도 없지. 23T 유인해 줘서 고맙게 됐다.
하기와라 우시오: 말 돌리는 거 보니까 모르는 거 같네. 기억상실당해서 모르나 봐. 쯧.
모노로그: 말싸움은 그만. 학급재판은 폐정되었다. 검정은 야가미 토가지만, 이번 검정은 처형되지 않는 것이 약속이었지.
야가미 토가: 네. 이제 탑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모노로그: 그렇지만 처형은 이 살인 게임에 있어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토키와 아유키: 뭐라고?
야가미의 표정이 뒤흔들렸다.
야가미 토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모노로그: 처형을 하지 않으면 생존자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것도, 집단을 와해시키는 것도, 혼란과 공포로 탑을 지배하는 것도 힘들어지지. 첫 번째 살인이 큰 영향을 주듯 첫 번째 처형도 큰 영향을 준다.
야가미 토가: 내통자를 이런 식으로 대우해선 안 될 겁니다. 아무도 당신과 내통하지 않을 겁니다. 제 말이 들리십니까? 모노로그 씨!
야가미의 목소리가 점차 다급해졌다.
모노로그: 야가미 토가가 어떤 처형을 받는지 너희 모두 지켜보아라.
야가미 토가: 제가 가만히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런 배신을 당하면서까지 제가 당신에게 충성을 다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뭘 알고 있는지 모든 분들에게…
모노로그: 처형 시작!
화면 속 야가미는 목이 무언가에 붙들린 채 끌려갔다.
목에 견고하게 채워진 초커를 풀기 위해 애를 쓰는 듯 보였지만, 야가미는 초커를 풀 수 없었다. 바닥에 발을 디디고 어딘가를 붙잡으려고 해도, 덧없이 끌려갈 뿐이었다.
야가미는 무슨 말을 외친 것 같았지만, 화면 너머로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꽤 먼 거리를 이동한 끝에 야가미가 앉은 곳은. 평범해 보이는 사무실 안이었다. 야가미는 그곳에 앉아 있었으나, 곧 누군가가 그 안에 들이닥쳤다.
모노로그를 머리로 가지고 있는 듯한 괴인들이 나타나. 야가미에게 총을 겨누었다. 양손에 들린 기관총이었다.
야가미는 주위를 둘러본 뒤 사무실의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단안경을 쓰지 않은 그의 눈에서 피가 났다. 그는 단안경을 쓴 쪽의 눈에 의지하며 도망칠 곳을 찾았다. 그가 본 주변은 폐공장들 뿐이었다.
그러나 도망칠 곳은 없었다. 총을 맞고도 살아남기 위해 단련했다던 야가미였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약했다. 총에 비하면 턱 없이 약했다. 모노로그 괴인들이 그를 포위하며 그에게 총을 쏘았다. 어깨. 팔. 다리. 맞을 때마다 야가미는 격통에 신음하며 느려졌다.
마침내 그가 절뚝거리며 속도가 현저히 느려진 찰나. 비취색 머리를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모노로그 괴인들의 사이에서 솟아났다.
야가미는 잠시 그 자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비취색 머리를 가진 누군가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야가미도 그 사람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비취색 가발을 뒤집어쓴 모노로그 괴인이 야가미에게 총을 난사했다.
그는 당황과 놀람이 얼굴이 새겨진 채 온몸에 사격을 당했다.
벌집이 된다는 표현이 그렇게 시각적인지는 처음 알았다. 한 발 한 발마다 야가미의 모든 조직. 모든 살이 그을리며 구멍이 생겼다. 피가 터져 나왔다. 원초적인 징그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고통으로 인한 발작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의 모든 살. 모든 뼈. 모든 내장에 총알이 쏟아졌다. 야가미는 이미 숨이 끊어진 듯 보였지만 사격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몸은 충격으로 덜덜덜 떨렸다. 광인의 춤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사격은 끝나지 않았다.
마치 야가미의 몸을 해체하고 그 안을 총알로 채우려는 것 같았다. 피가 끊임없이 터져나왔다. 야가미의 몸 내부가 보이기 시작할 즈음 몇 명이 비명을 질렀다.
화면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야가미의 모습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총알에 짓이겨진 모습이었다.
산산이 깨진 단안경만을 남긴 채. 화면 속 야가미는 사라져 버렸다.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지지직거리는 화면을 응시했다.
야가미 토가: ………….
야가미 토가: 저게 뭡니까.
야가미 말고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야가미마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야가미 토가: 저게 뭐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방금 뭘 본 겁니까.
모노로그: 너 자신의 죽음을 보는 것은 처음인가.
야가미 토가: 저건… 저건 합성 영상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과는 달랐어요. 저건…
후루미나미 나몬: 죽음이야. 저건 죽음이야. 나도 알 수 있어. 연기라던가 합성이라던가 하는 가짜와는 달라. 참된 것…
후루미나미는 넋을 놓고 줄곧 화면에 눈독을 들였다.
후루미나미 나몬: 정말 떨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 아아… 아아아…
하기와라 우시오: 이건 좀 아니잖아. 우욱…!
토키와 아유키: 쿨럭. 콜록. 우웁! 우웩… 세상에…!
나이토 유즈루: 미친… 썅…!
모리 레이코: 정말 미쳤군… 제정신이 아니야.
캐롤 브라이트: 악취미… 악취미예요…
나나시: 우윽…! 욱. 으윽…!
이바라 쿠리스: 이제 더는 안 돼… 이런 건 미쳤어…
칸나즈키 시노부: 카나리 기절했네. 나중에 깨워야겠어.
23T5U130: 다들 진정해. 저건 영상일 뿐이야.
나나시: 콜록. 콜록…! 이걸 어떻게 진정할 수 있어?! 이건…! 으윽… 머리가아…!
히무로 시라베: 야가미는 이 곳에 살아 있잖아. 대체…
모노로그: 글쎄. 내가 진실을 말해준다면 감당할 수 있겠나?
모노로그: 아니. 너희는 감당할 수 없다. 스스로의 존재를 중히 여기는 너희들은, 진실을 감당할 수 없다.
야가미는 살아 있다.
야가미는 죽었다.
끝도 없는 수수께끼들 속에. 나는 눈을 감기로 했다.
카이다 쿠로하: 지랄 말라 그래. 모노로그. 저게 뭐야. 뭐냐고!
카이다가 외쳤다. 모노로그는 대답이 없었다. 다른 이들은 말이 없었다.
엄숙한 두려움 속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단지 침묵이 아니다. 이건…
모노로그: 절망해라. 너희도 저렇게 될 수 있다. 저렇게 되는 자의 손에 죽음을 당할 수 있다. 너희 전부 그렇게 되겠지. 너흰 이 탑에서 나갈 수 없다. 절망해라!
절망이었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금속 뱀의 식도를 거슬러 올라왔다. 그렇게 기분 나쁘고 천천히 움직이는 엘리베이터는 두 번 다시 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타게 되겠지. 언젠가. 왕복해서 타게 되겠지. 어쩌면 편도 여행이 되는 일도 있을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나는 주먹에 힘을 주었다.
토키와가 카이다와 야가미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다음 날 아침에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다들 동의했지만 그들의 눈 안에는 피로함이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첫 번째 학급재판이니. 학급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고 있는 나조차도 심히 지쳤는데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카이다는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오자마자 어디론가 뛰어갔고, 야가미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둘 모두 내일이면 죽은 사람 취급을 당하게 되겠지.
캐롤 브라이트: 야가미 씨.
캐롤이 그를 불러세웠다. 야가미가 뒤를 돌아봤다.
캐롤 브라이트: 이제 행복하세요? 이게 당신이 원하던 결과인가요? 고작 이런 상황이요?
야가미 토가: …그 질문을 돌려드리고 싶지만, 섣불리 말씀드리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군요. 일단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못합니다.
야가미 토가: 그렇지만 사연에 빨려 들어가신 당신보단 좋은 상황에 놓인 것 같군요.
토키와 아유키: 캐롤 씨. 우선 오늘은 해산해요. 내일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할 수 있을 테니까요…
캐롤 브라이트: …네. 그렇게 할게요.
야가미와 토키와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어지러움을 느끼며 캐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입 안에서 한 마디의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는 어디에 계시지…?
문을 두드렸다.
히무로 시라베: 열어 주겠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야? 응…
문 안에서 의기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유즈미가 문을 열었다.
히무로 시라베: 괜찮아?
마유즈미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안 좋아.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을까. 도무지 모르겠어. 그렇게 끔찍한 죽음은 처음 봐서 놀란 것도 있지만…
마유즈미 나데시코: 야가미의 말대로일까 봐 분해. 내가 정말 캐롤 씨를 내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거면 어떻게 하지. 히무로. 네 눈엔 그렇게 보여?
히무로 시라베: 내가 어떻게 보는지는 상관없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하다. 그런 뜻이야?… 그렇지만 내가 아무리 봐도 좋은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아. 후루미나미의 말대로 이제 좋은 사람인 척 하기엔 너무 늦었어…
히무로 시라베: 야가미의 말이 마음에 걸리는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캐롤 씨는 괜찮다고 하셨지만 역시… 내가 다 망친 것 같아. 내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결국 미도리카와의 죽음에 나도 일조한 것 같아.
마유즈미 나데시코: 일조한 것 같은 게 아니라. 일조했지… 아. 히무로 너를 나무라는 건 아니야. 당연히!… 당연히 아니야…
마유즈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 왜 이렇게 약한 걸까? 유능한 사람이 못 되면 착한 사람이라도 되려 했는데. 그것마저 안 될 것 같아… 난 이 탑에 왜 온 걸까? 그냥 없는 사람 같은데…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잠시 내 이야기를 할 테니 들어주겠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응?
히무로 시라베: 옛날 얘기야. 내가 로 세 명과 마주쳤던 순간의 이야기.
마유즈미 나데시코: 로? 분명 네가 말했던…
히무로 시라베: 성공한 실험체들. 초인들. 자신을 빼앗긴 자들.
히무로 시라베: 나와 달리 완성된 자들.
경보. 비상 상황.
침입이 시작된 지 몇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한 기관원이 내가 갇힌 감옥에 찾아왔다.
"감시자님. 재단과 로의 종복이 여기 왔습니다."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으나, 접점은 없었다. 역시 카텟 기관의 안에도 재단의 마수가 뻗쳤다.
"몇 명의 로가 찾아왔나?"
"세 분입니다. 행운아님. 제어자님. 판단자님입니다. 그 감옥에서 꺼내 드리겠습니다."
재단의 종복이 스위치를 올렸다. 감옥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세 명이나. 그것도 행운아를 포함해서…
"언제부터 재단을 따랐나?"
"몇 개월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재단을 따르는가."
"외람된 질문이지만 감시자님. 지금은 몸을 피하시고 로에 합류하시는 것이…"
"대답해라."
재단의 종복은 대답했다. 조금의 주저도 없었다.
"세계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초고교급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초고교론자들의 발상이었습니다. 허황된 이야기라고 치부되었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초고교급 희망 나에기 마코토를 중심으로 규합되었습니다. 논란에 휘말린 와중에도 상당수가 그를 따르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초고교급은 사람을 모을 수 있을 뿐. 세상을 재건할 만한 능력은 부족합니다. 그렇기에 초고교급을 뛰어넘은 초인이 필요합니다. 오메가완 달리 다수로 이루어진 로는, 서로의 타락을 저지하고 완전해질 수 있다는 점에 있어 이상적인 체제입니다. 인류는 로가 재건해야 합니다. 대몰락의 여파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로가 필요합니다. 감시자님.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인류를. 로가 재건한다고? 로가 완성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려주겠다. 우선 자신에게 따르지 않는 자들을 모두 숙청할 것이다. 선한 자들도 악한 자들도 전부. 그 뒤 상처뿐인 세계를 지배하려 들 테지. 인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희생을 강요하고, 불합리를 강요하고, 인류를 커다란 틀에 넣어 누를 것이다. 그 과정에서 흘린 피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하나의 흉물이 되어 군림할 것이다."
종복은 당황한 눈치를 보낼 뿐이었다. 그와의 대화는 시간낭비였다.
"시라유키 히메리는 어디에 있지."
"아. 시라유키 씨는 전선에서 로분들과 교전 중입니다. 하지만 곧 꺾일 테니 안심하십시오. 행운아님은 자비로우시니 기관원들을 필요 이상으로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전투가 힘든 기관원들은 무기고로 대피해 바리케이트를 만들었습니다."
"내 총은 가져왔나?"
"네. 여기에 있습니다. 재단이 당신에게 하사하신 백단향…"
백단향 손잡이는 가볍고도 매끄러우며, 강인하다.
손잡이로 그의 관자놀이를 강타하자 재단의 종복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로를 감시하는 것이 감시자의 일이라지."
발걸음을 재촉했다.
"히무로 시라베다! 감시자다!"
"내가 둘 중 무엇으로 보이나."
기관의 무기고. 비상상황의 쉘터로도 쓰일 수 있다. 대부분의 기관원이 대피한 것으로 보였다. 바리케이트 너머로 총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지 마라! 발포하겠다!"
"둘 다로 보이는 모양이군. 시라유키 히메리가 있는 곳을 말해라."
그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할 말을 세심하게 고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이 곳에 없는 것을 보면 로와 교전 중인 모양이지?"
"저 개자식이! 시라유키 씨의 은혜를 모르고…!"
"오직 머리 검은 금수만이 은혜를 모르는 법이지. 지금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그녀를 구출할 테니 시라유키 히메리가 있는 곳을 말해라."
"히무로 시라베."
지부장.
"우리가 너의 어디를 보고 믿어야만 하지?"
"믿을 필요 없다. 그러나 내가 로에게 맞서리라는 것은 사실이다. 너희가 알려주지 않는다면 내가 독단적으로 그녀를 찾겠다."
"이봐. 발포는 잠깐…"
총구가 불을 내뿜었다.
나는 맞지 않았다.
"발포는 잠깐 대기하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제정신인가?!"
"죄. 죄송합니다!"
"행운아…"
내가 시야에 없음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인가. 가깝다.
"다 눕혀놨어. 다들 나와도 돼."
행운아는 손을 탁탁 털었다. 손에 아무것도 묻지 않았음에도. 손에 무언가를 묻힐 필요도 없이 모든 일이 해결되었음에도.
"연막탄. 수면제. 마취탄. 실탄과 폭발물까지 있었는데… 정말 괜찮을까? 정말 그래도 돼?"
"보안 시스템 무력화는 네 작품이잖아. 행동부대도 전부 제압됐으니 이대로 돌입한다."
판단자는 제어자를 보며 확실하게 말했다.
"네 말만 믿을게…"
"아무 일 없다니까. 여동생아. 이 오라버니의 말씀이 안 믿기니?!"
행운아가 끌끌 웃었다.
시라유키 히메리는 쓰러진 채 신음했다.
"으윽…"
"어허. 일어나지 마. 무리하다가 뼈 부러져. 그럼 우리만 히무로한테 미움받는단 말이야. 무혈입성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무혈입성이라니. 저 자가 안 보여?"
판단자가 쓰러진 기관원을 가리켰다.
"윽. 으윽…"
"아니. 자기 도탄에 자기가 맞는 경우가 내 잘못은 아니잖아? 죽진 않을 테니 인생의 교훈으로 삼으라고 해. 그러니까 우리 히무로한테 왜 그랬어. 응?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그릇임을 알았으면 그냥 내버려 뒀어야지. 먹기는 그렇고 남 주긴 아까우니 가둬 놔? 발상이 재미있긴 하네."
"그런데… 감시자는 언제 합류하는 거야? 아까 온 무전에 의하면 감옥에 도착했다고 들었는데…"
행운아는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아. 이제 오네!"
멀리서 행운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을 숨기는 건 역시 불가능한가. 그의 인식 범위 밖에서 저격하는 것은 힘들어졌다. 그들은 날 공격하지 않으니 선공권은 나에게 있었다. 공격을 해 봤자 로 세 명에게는 먹히지 않겠지만…
"모습을 보여. 히무로! 우리가 왔단다. 이제 마음 놓으렴. 감시자. 나의 동생아. 가족이란 게 뭐겠니? 서로 돕는 거잖니. 그러니 널 구하지 않을쏘냐! 어떤 철옹성이라도 너를 위해서라면 뚫고 올 수 있다. 너와 우리를 위해서라면."
"행운아. 감시자는 순순히 합류할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합류할 생각이 없어. 강제로 데려가야만 해."
"그래? 뭐…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나도 어쩔 수 없지. 동생을 아끼는 마음이 크지만 난 가족 전체 또한 아끼니까. 그래도 최대한 회유해보긴 할 거야. 알겠지?"
이제 선공권마저 빼앗겼다. 그들이 마음을 정한 순간 빼앗긴 것과 다름이 없었다.
"빨리 나와. 안 나오면 우리 쪽에서 간다?"
나는 천천히 그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제어자의 손에 들려있는 전자기기 말고는 눈에 띄는 무장이 없었다. 그래. 행운아의 존재 자체가 무기이니 싸우는 데에 무엇이 필요할까.
"안녕. 히무로. 총잡이여! 이제 감시자라고 불러야 하나? 이 쪽이 네 여동생이랑 형이야. 제어자랑 판단자. 참고로 내가 판단자보단 형이다?"
"히무로… 도망가…"
시라유키 히메리.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나와 한 때 사선을 넘었던 행동부대원들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행운아. 기를 꺾어 놔."
"그러지."
느닷없이 천장에서 콘크리트 조각들이 떨어졌다.
가장 큰 것은 피했지만, 몇 개 맞을 수밖에 없었다. 카텟 기관이 로와 교전하는 과정에서 약해진 거겠지. 그것이 행운을 타고 내게 내려왔다.
"큭…"
"좀 심했나? 이거 미안한데. 그래도 판단자 말을 안 들을 순 없었어. 이해해 줘!"
역시 행운아가 가장 까다롭다. 어떻게든 그를 무력화시킨다면, 총으로 나머지 둘을 몰아낼 수 있는데…
"…눈빛을 보니 아직 안 꺾였네?"
행운아가 차갑게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뒤늦게 깨달았다.
시라유키 히메리의 위로 큰 콘크리트 조각이 떨어졌다.
"안 돼!"
몸을 날려 그녀를 감싸려 했으나. 그 순간 그녀 옆의 벽이 반파되었다. 쓰러진 벽의 파편이 아슬아슬하게 나와 그녀가 깔리는 것을 막았다.
"히무로…!"
"괜찮나. 시라유키 히메리."
"재밌네. 히무로. 어딘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돌더라니."
나는 행운아의 표정을 보고 직감했다. 그가 나를 꿰뚫어 보고 있음을.
"그녀는 나의 은인이다. 너희가 죽이게 두지 않겠다."
"안 죽인다니까!"
행운아가 손사레를 쳤다.
"아니. 그건 두고 봐야 아는 일이야. 감시자? 이렇게 하지. 네가 로에 합류한다면 그녀 또한 재단의 일원으로 맞이하겠다."
판단자가 말했다.
"뭐라고…?"
"네가 순순히 로에 합류한다면 그녀 또한 재단의 일원으로 맞이하겠다. 시라유키 히메리는 카텟 기관에서 제일 가는 걸물이라지. 출신에 상관없이 우수한 인재는 언제나 등용해야 한다."
"재단이 무슨 권리로 그런단 말인가."
"아직 말이 안 끝났어. 네가 로에 합류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다면 이 자리에서 시라유키 히메리를 죽이겠다."
분노가 끓어오르지 않고, 대신 증오가 차올라 그 자리를 메웠다.
"네가 이 기관에 남은 유일한 미련이 그녀 같군. 네가 오면 그녀와 계속 함께할 수 있다. 네가 오지 않으면 그녀는 죽는다. 어떤가. 감시자?"
"오. 역시 판단자야! 그런 수는 생각 못 해 봤는데!"
"감시자… 어떻게 할 거야? 응? 네가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우리 모두 피곤해져. 빨리 대답해. 부탁해…"
아군에게 의심을 사고, 포위되고, 간발의 차로 폭발을 피할 때도. 포기해본 적은 없었다. 골몰할지언정 손에 있던 것을 놓고 하느님을 향해 기도를 올린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내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세 명을 마주치자. 나는 순간 나 자신을 포기했다.
'여기까지란 말인가. 그때와 똑같다. 행운아를 처음 봤을 때와 똑같아. 이게 격의 차이인가. 완성품과 미완성품의 차이…'
"히무로… 안 돼… 응하면 안 돼…"
시라유키 히메리의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말을 멈춰라. 넌 부상자다."
행운아가 나를 보며 눈가를 훔쳤다.
"눈물이 나올 것 같다. 히무로. 비단 너뿐만이 아니야. 이들을 봐. 딱한 것들. 애처로운 것들! 갈 곳을 잃고 헤매는 어린양들. 무지가 죄라면 도살장에 끌려가야 마땅하겠지만 무지는 죄가 아니야. 그저 수치일 뿐.
이들의 수치가 아니야. 우리들의 수치지. 이끌어야 할 곳으로 이끌지 못했으니."
그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곳에 자유의지란 있는가. 우리가 사람들을 이끌어야 하는 곳에. 자유의지란 있는가?"
"자유의지라. 그것이 세상에 존재한 이래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알잖아. 단 한 사람의 자유의지가 세상을 어떻게 변질시켰는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자유로운가? 아니. 신이 죽은 세상일지라도 사람들은 자유롭지 않아. 풀어 두기에는 너무 지독해서 결국 서로를 해치고 말아. 신이 죽은 세상이기에 그렇지. 존엄하고 압도적인 지배 체계 없이 인류는 살아남을 수 없어.
그렇기에 신의 빈자리는 초인들이 짊어져야 한다. 인간은 본디 이기적인 존재이기에 자기 보호를 최우선시한다. 변질된 세상 속 사람들은 자연적인 상태에 놓인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지속된다.
로와 재단이 인류를 해치는 것이라 생각하나? 아니. 그들이 우리를 원한다. 우리는 세상에 의해 요구되었기에 태어났다. 아직도 보지 못하는가? 감시자여. 이것이 너의 운명이다. 정녕 두려운 옛 세계가 보이지 않는가. 사방에 널려 있는. 추한 옛 세계가!"
"시라유키 히메리. 몸은 어떤가."
"…그냥 두고 가. 바리케이트가 있을 거야. 우리가 버틸 테니까 그 사이에 도망가… 로가 완전해지지 않는 한 희망이 있어…"
입에 발린 소리를.
"그녀를 두고 도망치진 않겠지? 설마 그녀를 배신하진 않을 거야. 안 그래. 히무로?"
"잘 아는군."
총을 총띠에 찼다. 나는 시라유키 히메리를 들고 바리케이트를 향해 달려갔다.
"도망칠 순 없다. 감시자! 알지 못하는가? 운명의 수레바퀴에게서 도망갈 순 없다. 네 자유의지는 허상에 불과하다!"
"지금 폼 잡을 때가 아니야. 가서 잡아야 해!"
멀리서 행운아와 판단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시라유키 히메리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히무로… 이거 놔줘! 나 말고 다른 기관원들을 구해…!"
"나는 하나. 적은 셋. 다친 자는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너 말고 다른 이들을 구하라는 것인가? 지부장 다음의 위상을 가진 너를 두고. 다른 이를 구하란 말인가? 스스로 말하고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히무로오…! 빨리!"
"죽어서 카텟 기관에 이름이라도 남기고 싶나? 네가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지금만큼은 성인(聖人) 흉내를 그만둬라. 강한 척 마라. 이상적인 인물이 되려 하지 마라. 소름이 끼친다… 나를 보는 것만 같기에."
"……."
로들의 추적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나도 다리를 더 빠르게 움직였다.
"이것이 정말 마지막 대화가 될지 모른다. 네 두꺼운 가면 안에 무엇이 있지? 말해라."
시라유키 히메리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분해… 히무로. 분해서 미칠 것 같아. 저 나쁜 놈들이 우리 사람들을 다 저렇게 만들고 있는데. 아무것도 못 해… 짜증 나 미치겠어."
"그렇다면 무엇을 하고 싶나."
"저 자식들을 기관 안에서 쫓아버리고 싶어. 사실 그냥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야… 날 두고 가도 돼. 하지만 만약 날 바리케이트까지 들어 준다면, 네게 협력해서 저 개자식들에게 맞설게. 내 전력을 다해서."
"좋다."
"정말 데려왔어!"
바리케이트 안이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나는 몸을 숙여 바리케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시라유키! 괜찮아?!"
지부장이 그녀를 보고 소리쳤다.
"보시다시피… 나름 멀쩡해요."
"사망자는 없는 것으로 보였다. 시라유키 히메리는 부상을 입었고 로는 제압하지 못했다."
"…고맙다. 히무로 시라베."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다. 로가 곧 이 바리케이트로 들이닥칠 것이다. 응전은 의미가 없다. 이제 와서 이 많은 인원들이 대피할 방법도 없지."
"로의 관심사는 너다. 지금 가장 빠른 이동수단을 빌려주면 도망갈 수 있겠나?"
"내가 도망가면 그들은 시라유키 히메리를 사살할 것이다. 판단자가 그렇게 약속했다. 어차피 그들에게서 도망갈 방법도 없다."
지부장이 낭패라는 듯 머리를 감쌌다.
"로의 목적은 나를 탈취하는 것이다."
"…완전해지기 위해서잖아. 완전해져서 모든 인류를 지배하기 위해서."
주변의 기관원 중 하나가 말했다.
"그렇겠지."
기관원이 내게 총을 겨누었다.
"그럴 바에야…!"
"총 치워. 너 미쳤어?!"
시라유키가 소리쳤다.
"죽음을 각오한 행동인가."
"저도 압니다. 이 자식을 죽이면 저것들이 미쳐 날뛴다는 것쯤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어요!"
기관원이 이를 악물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 자는 아버지의 낯을 기억하고 있었다. 총을 잡은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은 방아쇠의 무게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재앙의 탄생을 목전에 두고서도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에 고뇌하는 자는, 시라유키 히메리를 닮았다.
이 기관원만이 변화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무기고 안의 다른 이들은 나를 향해 총을 겨누지 않는가. 목숨을 아끼기 때문에? 아니면 감시자가 시라유키 히메리를 구하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인가.
"총 치워. 명령이다!"
"하지만 지부장님…!"
"총 치우라고 말했다!"
냉소가 스멀스멀 기어올라 그들을 비웃었다. 나의 모든 시도를 등한시했으면서 시라유키 히메리를 구한 것 만으로 태도가 완전히 뒤바뀌는 것들이라며 그들을 비웃었다.
그러나 멸시와 허무함 속에서. 나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모든 이들이 완벽할 순 없다. 모든 이들이 고결할 순 없다. 완벽하고 서로를 해치지 않는 세상은 초인들의 새장 속에나 있다.
금수도 사람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와 같이 이들도 배울 수 있었다. 어쩌면 모두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아버지의 낯을 기억하고 있음을.
"행운아가 나를 비호하고 있다면 쏘아도 맞지 않을 터다. 무기고는 좁으니 도탄이 일어나면 다른 이들이 위험해진다."
"네 말을 어떻게 믿어?!"
"믿지 않아도 좋다. 너희들의 믿음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바리케이트 밖으로 몸을 꺼냈다.
"지금까지 줄곧 기관에 내 충성심을 보여주려 했지. 그러나 이젠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젠 누구에게도 요구받는 자가 되지 않으리라. 누군가가 원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해서 행동하리라."
낙타에서 사자로.
"히무로… 할 수 있어…"
시라유키 히메리가 내게 말했다.
"이제 나가도 돼?"
행운아가 느리게 박수를 치며 나타났다.
"감동적이야. 감시자. 그런 저열한 것들을 감싸다니. 히무로를 쏴 죽이려는 시도는 없었지? 있었으면 주동자들을 잡아서 본보기로 세웠을 텐데. 다행이야!"
"앞으로 나왔다는 건 함께 갈 의사가 있다고 받아들이겠다."
판단자가 내게 말했다.
"그런데 저 시라유키라는 사람을 저기에 두고 왔잖아…"
"그녀를 말려들지 않길 바라는 거겠지! 오 세상에. 동생아. 너무 감동적이야. 이런 이가 감시자라니 아직 갈 곳이 멀어! 감시자의 심장은 항상 차가워야 하거늘 말이야! 당장 재단으로 가자. 그곳에서 우리는 완전할 테니!"
잡혀가면 기껏 배운 것을 다 제거당하겠군. 당연하지.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감시자를 원하니.
"내가 이 곳에서 몹쓸 것을 배웠다고 생각하나."
"불필요한 것을 배웠다고 보는 것에 가깝지. 누군가를 감싸는 희생정신. 자비. 관용. 애착. 사랑. 감시자는 그런 것과 거리가 멀어야만 해. 기껏 배웠는데 빼앗게 되어 아쉽지만 걱정 마. 우리와 함께하면 넌 완전하니까. 잠시의 상실감 끝엔 하나가 된 충만함이 따를 거야!"
"내가 아닌 채로 완전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바리케이트 너머의 시라유키 히메리를 보았다. 지부장. 기관원. 나에게 총을 겨눈 기관원. 그 모든 이들을 보았다.
그렇지만 시라유키 히메리가 가장 크게 보였다. 설령 쓰러져 있음에도, 부상을 당했음에도.
"완전하지 않은 것 또한 의미가 없긴 마찬가지지. 감시자."
"그래. 완전하지 못한 감시자는 행운아를 꺾을 수 없다. 네 말이 맞다."
나는 실린더에 총알이 들어가 있는지 확인했다.
"성장하지 못한 감시자는. 성장하지 못한 채 미완성으로 남은 감시자는. 미완성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감시자는…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
내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을 경우의 가정이었다.
시라유키 히메리가 떠올랐다. 나와 닮았으나 전혀 닮지 않은 그녀. 마지막까지 나를 믿은 그녀.
다시금 갈망을 느꼈다. 느낄 수 없으니 느끼고 싶다고.
내가 배우지 못했던 것들도 전부 배워보고 싶다고. 완전해지고 싶다고…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행운아의 뺨을 스쳤다.
내 짐작이 맞았다.
"……"
행운아는 자신의 뺨을 닦은 뒤 손에 묻은 핏자국을 내려다보았다.
"해. 행운아… 행운하… 행훈? 하?! 행우나?!"
제어자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행훈하! 파… 판단자. 판. 판단자. 판다! 파. 판다. 판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왜 총알이? 감시자는 분명…"
"개화하지 못했다. 감시자는 분명 미완성품이다.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거겠지. 판단자."
나는 행운아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
"궁금하게 여긴 적이 있다. 어째서 감시자가 될 실험체들은 행운아를 상대로 총을 쏘아야만 했을까.
어차피 안 맞을 터인데. 행운아가 그렇게 원한다면 실험체들의 총알은 행운아를 스치지도 못할 터인데. 어째서 행운아를 얼마나 정확히 맞췄는지를 경쟁하게 만들었을까. 어째서? 답은 간단하다.
감시자의 총알은 로를 제지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행운아마저도."
행운아의 표정이 크게 뒤틀렸다.
"줄곧 너를 나의 천적이라 여겼지만. 오히려 내가 너의 천적이었다. 그러니 우연히 재단의 사상에 물들지 않은 채 각성하는 일이 없도록. 일찍 데려가려 혈안이 되었던 것이지."
제어자가 무너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맞는 말이잖아! 행운아! 이제 어떻게 해? 어떻게. 어. 어. 어떻게 해! 여기서 죽는 거야? 해. 행운아. 판단자! 어떻게든 해 봐!"
"입 닥쳐! 생각 중이잖아!"
판단자가 제어자에게 소리쳤다.
"넌 그런 것을 가족이라고 부르나. 완전한 공동체. 초인이라고 부르나?"
"우리 동생. 많이 컸네…"
행운아가 자신의 손가락에 묻은 피를 핥았다. 그를 향해 한 번 더 방아쇠를 당겼으나. 이번에는 적중하지 않았다.
역시 완벽히 압도하기엔 무리가 있나…
"재단이 널 완성시키지 않았음에도 스스로를 연마한 끝에 성장했다는 거야? 하. 이런 건 예상하지 못해서 감격스러워."
"어설픈 짓 마라. 이번에는 맞출 테니."
"맞출 수 있을 것 같아? 아무리 네가 성장했다고 한들. 네가 다른 형태로 꽃을 피운다고 한들 난 저항할 수 있어."
"네 저항이 충분치 않다면 넌 그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제어자와 판단자 또한 죽겠지."
"건물이 무너져 내려서 너 빼고 나머지가 다 죽는다면 어떨까?"
그런 도박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저 쪽도 마찬가지였다. 로 세 명이 총에 목숨을 잃는 리스크를. 그들은 감당할 수 없었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인 것 같나. 행운아?"
"아니. 오늘 운수는 완전 쪽박이야. 하… 말도 안 돼. 스스로 성장하다니. 재단 사람들이 다들 화들짝 놀라겠는데?"
"그럼 돌아가라. 이 기관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라."
"정말 함께 오지 않을 거냐. 히무로."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넌 이해 못 해. 네 합류가 이 세상을 얼마나 평화롭게 만들지를!"
판단자가 소리쳤다.
"평화롭게 죽은 세상이겠지. 자유를 절개당한 살아있는 시체들의 낙원이겠지."
"우린 네 도움이 필요해. 솔직히 말하지. 히무로. 재단은 예전 같지 않아. 카텟 기관이 연구소를 습격하고 너를 데려간 뒤. 다른 로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배포한 이래 우리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어. 대적자는 우리와 분리돼서 행방을 알 수 없고, 조율자도 힘을 키우던 도중 습격을 받아 많이 약해졌어. 단점을 보완하지 못하니 우리도 이렇게 삐걱이잖아. 원래 이 자리엔 내가 아니라 조율자가 왔어야 했는데 말이야.
그렇기에 네가 필요해. 지금은 한 사람의 힘이라도 절실한 시대란 말이다."
"난 너희들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초인의 눈에는 범인(凡人)이 저열하게 보일지 몰라도 너희가 이들을 변형시키게 둘 순 없다. 난 내 방식대로 완전함을 손에 넣을 것이다. 빼앗긴 모든 것을 다시 배움으로써."
행운아가 한숨을 쉬었다.
"앞날이 어두워. 우리들을 감시하고. 제압하고. 보다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하는 감시자가 고작 이런 곳에서 썩을 거라니. 슬퍼. 말해두겠는데 결국 넌 불행해질 거야. 아무도 너를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려 들지 않는 환경 속에서. 썩고 시들고 메마를 거야.
네가 그것을 선택하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어차피 시간은 우리의 편이니까. 마지막에 우리는 완전해질 것이다. 다시 만날 때. 우린 동포가 되리라.
운명의 수레바퀴는 언제나 돌아가고 있음을 명심해라."
그 말을 남기고 세 명의 로는 기관을 떠났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아스팔트 사이로 사라졌다.
나는 그를 쫓지 않았다.
모든 일이 끝났다는 확신이 든 후.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아…"
너무나도 피로했다. 그런 내 곁에 시라유키 히메리가 다가왔다.
"아직도 내가 카마이 같나?"
"아니. 전혀 그렇게는 안 보여."
손이 조금 떨려왔다.
행운아에게 거스를 수 있었다. 총잡이로써 성장했다. 재단이 날 완성시키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성장했다.
완전해질 수 있다… 천천히. 그렇지만 언젠가는…
나는…
"울지 마."
"안 운다."
히무로 시라베: 그 뒤 기관이 나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고, 서서히 더욱 변해갔지. 그 끝에 카텟 기관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다른 사람이 내 삶에 평가를 내리게 둬서는 안 된다. 그런 뜻이야?
히무로 시라베: 또한. 나아가고자 하는 길이 아무리 고되더라도 꺾여서는 안 된다고. 난 그렇게 생각해.
내가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천천히 말을 이으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녀보다 뭐가 뛰어나서 설교를 늘어놓을 수 있을까.
나는 문득 내가 그녀 말고도 다른 사람에게 또한 말을 걸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과거의 내 모습을 보았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메이던 내 모습을. 과도한 자아 투영이었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말이 조금이나마 방향을 잡아줄 수 있길 바랐다.
최초의 내가 그랬듯이.
히무로 시라베: 네가 스스로를 떳떳하게 여길 수 없다 해서 그게 끝은 아니야. 우린 살아 있으니 앞으로도 많은 일을 겪게 될 거고. 그 과정 속에서 너는 보다 이상적인 네 모습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을 거야.
히무로 시라베: 살아있는 이상 모든 사람은 더 나아질 수 있으니까.
마유즈미가 고개를 조금 들어 나를 보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히무로.
마유즈미 나데시코: 뭐랄까… 히무로는 되게 행동이 확실하네. 선생님 같기도 하고… 그 시라유키 씨라는 사람도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맞아? 하긴 연인 이랬으니…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도 이 사안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나와 그녀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마유즈미가 고개를 갸우뚱 돌렸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정말?!
히무로 시라베: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메리를 향한 연정을 가지긴 했지만, 그녀가 완강하게 거절한 이후로는 마음을 접었어. 나를 남자로 볼 수 없을 것 같다더군. 남동생처럼 보인다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설마. 그럴 리가!
히무로 시라베: 그럴 리가 있어. 그보다 마유즈미. 너를 찾아온 것은 너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네게 제안할 것이 있기 때문이기도 해.
뭐냐고 묻듯이 눈을 깜빡이는 그녀를 보며. 나는 말했다.
히무로 시라베: 내 편이 되어줬으면 해.
마유즈미는 또다시 눈을 깜빡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네 편?
히무로 시라베: 거창한 것은 아니야. 모노로그와 야가미. 카이다는 서로 내통했어. 이후 다른 내통자가 생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고.
히무로 시라베: 살인을 일으키려는 그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생존자들 또한 단결해야만 해.
마유즈미 나데시코: 단결은… 이미 토키와가 모두를 단결시키고 있잖아.
히무로 시라베: 충분하지 않아. 의무적인, 그리고 상황에 의한 협력 관계는 야가미가 그랬듯이 쉽게 깨질 수 있어. 살인을 막기 위해선 생존자들 사이에 유대 관계가 형성되어야만 해.
히무로 시라베: 이미 어느 정도는 형성되었을 테지. 지금이야 가치관의 유사함이나 특정한 접점에 의해 모인 이들이 많겠지만, 사선을 넘고 협력하며 그들의 유대감은 점점 단단해질 거야. 그렇게 되면… 카텟이 만들어지겠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카텟? 네가 다니고 있었다는 카텟 기관 말이야?
히무로 시라베: 카텟은 카: 운명과 목표, 가야만 할 길로 하나 된 자들. 같은 카를 공유하는 자들. 여럿이서 하나 된 자들이라는 뜻이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히무로 시라베: 이 살인 게임을 헤쳐나가기 위한 저마다의 파벌. 조직. 그것들이 한층 진화된 형태라고 생각하면 좋아. 운명 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럼 터치파도 일종의 카텟이 될 수 있다는 거구나.
히무로 시라베: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어. 난 네가 나와 함께 살인을 막기 위해 노력해줬으면 해. 어떤 경우에서도 살인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함께 힘을 합치거나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해.
마유즈미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알겠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아. 그런데 왜 굳이 나야? 나는 그렇게 똑똑하지도 않고, 능력이 대단하지도 않고, 모르는 것도 많고… 좀 말짜 같아 보이잖아.
히무로 시라베: 그런 요소들이 너를 평가하지는 않아. 그리고 어째서 너 스스로를 저평가하는 거야? 네 특기가 아니고서야 카이다의 유서 위조를 밝혀낼 순 없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차피 별 의미도 없었는 걸.
고개를 젓는 마유즈미에게 난 완강하게 말했다.
히무로 시라베: 아니. 네가 없었으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할 때. 이 탑의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을 수도 있었어. 네가 스스로를 어떻게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대단한 사람이야.
히무로 시라베: 그리고 남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사람이기도 해.
마유즈미는 내 과거를 안 날. 내 전용실에 나를 위로하러 왔다.
언제나 타인의 고통을 끌어안는 자가 가장 강한 법이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고마워.
마유즈미가 시선을 피했다.
히무로 시라베: 그리고 마유즈미. 오늘 네게 찾아온 또 다른 용건이 있는데. 듣겠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다른 용건? 응. 들을게.
히무로 시라베: 네가 나의 친구가 되어줬으면 해.
마유즈미 나데시코: 친구… 친구… 친구?
마유즈미는 그 단어를 발음하기 어렵다는 듯이 말했다. 단어는 알고 있지만, 이질적이고 입 밖으로 내 본 적이 없어 발음에 신중을 기울이는 듯이 말했다. 나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히무로 시라베: 친구가 되지 않고서야 우리가 정말 카텟이 될 순 없을 테니까. 우선 같은 편으로 너를 영입하기 전 친구부터 시작하고 싶었는데 순서가 꼬였어. 미안해.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니야. 뭐 그런 것 가지고 사과를 해. 나도 히무로랑 친구 하고 싶었어!
히무로 시라베: 정말이야?
이 탑에 온 이래 첫 번째 또래 친구인가.
감회가 새로웠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우린 이제 베프야. 히무로. 잘 부탁해!
단어의 뜻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문맥상 긍정적인 단어로 해석했다.
히무로 시라베: 베프가 된 기념으로 악수를 하겠어. 마유즈미?
마유즈미 나데시코: 악수?! 악수는 조금… 위험하긴 한데…
히무로 시라베: 그렇다면 안 해도 좋아.
마유즈미 나데시코: 하기 싫다는 게 아니라! 저기. 그…
마유즈미가 자신의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해… 해도 되려나…? 여기엔 보는 사람도 없고. 우리 집 사람들도 없으니까…
히무로 시라베: 뇌물도 가져왔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뇌. 뇌물까지?! 나는 그런 거 싫은…
나는 마유즈미에게 작은 찹쌀떡 상자를 건넸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 고마워.
히무로 시라베: 이걸 싫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단 말이야.
마유즈미가 찹쌀떡 상자를 받은 뒤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너 가끔 꽤 엉뚱한 거 알아?
마유즈미가 내게 손을 뻗었다.
히무로 시라베: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지.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히무로 시라베: 나도 잘 부탁할게. 마유즈미,
나는 마유즈미의 손을 잡았다. 손이 따뜻했다.
체온이 맞닿는 느낌은 낯설었다. 언젠가 친숙해질 날이 올까.
언젠가 그녀를 포함한 탑의 모든 이들을 그늘 하나 없이 대할 수 있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더 단크 타워
챕터 1: < 죽여 마땅한 사람 둘 >
"과정은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책임은 사라지지 않으며 그것은 업보처럼 다가온다."
END
마유즈미 나데시코
초고교급 서예가. 특기는 글씨를 통해 글쓴이의 정보를 알아내는 일이다. 글쓴이의 인격과 의도마저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한 기예이다.
마유즈미는 억압적이고 과보호적인 가정에서 자라났다. 다도, 서예, 식사, 의복, 목욕, 수면에 특별한 규칙이 있을 정도라면 그녀가 이 탑에서 혼란을 느끼는 이유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캐롤이 마유즈미에게 도움을 줘 다행이다.
나는 미도리카와의 신분을 위조하는 과정에서 그녀를 끌어들이고 말았다. 마유즈미는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말했지만 역시 후회가 든다. 그녀는 스스로를 무능하고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듯 보인다. 사실이 아니다.
그녀는 내가 이 탑에 온 이래. 처음으로 사귄 친구다. 언젠가 그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길.
호감도 측정
마유즈미의 호감도: 20
-50=원수 / -30=앙숙 / -15=상극 / 0=무관계 / +15=친구 / +30=연인 / +50=배필
참 오래 끌었던 단크 타워 1챕터가 1년만에 드디어 완결을 맞이했습니다 감격스럽네요
느려터진 연재 주기에도 이걸 계속 봐준 독자분들의 인내심이 레전드입니다
곧 1챕터 후기와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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