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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1

외전: 호두

by 도타싫어! 2021. 2. 27.

 

이 곳으로 들어오려면 눈가리개를 착용해야만 했다. 금(金)도 은(銀)도 동(銅)도 철(鐵)도. 이 규칙만큼은 예외 없이 지켜야만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 장소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숨기기 위해서. 후루미나미의 어둠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었다. 설령 스파이가 그곳으로 향하는 차량에 잠입한다고 해도 다시는 그 학원의 존재를 찾아내지 못하도록.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분리를 위해서였다. 단지 우리가 살고 있던 세상과 동떨어지고 분리된 무릉도원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후루미나미가 그들 내부에서도 급을 나누듯이. 후루미나미는 현실과 그들 사이에 급을 나눈 것이었다. 우리가 더욱 우월하다고.

 

후루미나미에 속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말이다.

 

"악!"

 

그러니 은메달을 가진 형들과 누나들이 수다를 떠느라 나를 보지 못하고 부딪친 것도. 내가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재빠르게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3일간의 합숙은 내 자존심과 존엄을 전부 사그라뜨려 버렸다. 은들은 내 가슴께에 달린 동메달을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앞 좀 똑바로 잘 보고 다녀!"

 

"네. 앞으로는 안 그럴게요."

 

"저런 꼬맹이도 시험을 치르러 오다니. 어이가 없다니까 정말…"

 

이제 이십대를 갓 넘은 것 같은 그들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말고 자기들끼리 깨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멀어져 갔다.

 

나는 복도의 창문 근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선글라스 사나이 쪽을 돌아보았다. 학원 전체에 걸쳐 정장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단지 지켜볼 뿐이었다. 싸움이 심해지지 않는 이상 말리지도 않았고 팽배한 차별이나 시비는 방관했다.

 

앞으로 이곳에서 4일을 더 보내게 되는 내 이름은 후루미나미 링고(古南 林檎). 올해로 12살이며 동메달의 소유자다.

 

이 곳이 어디인지 묻는다면, 연기에 대해 배우고 연기만을 위해 배우는 후루미나미들의 과수원이다. 이 곳에선 연기자가 길러진다.

 

혈통에 따라 급을 나누고 상등품을 고르려 하는 곳. 그렇기에 나는 이 곳을 후루미나미 학원이라고 부른다. 그보다 더 적당한 이름이 생각나지 않기 때문에 나만큼은 그렇게 부른다.

 

이 곳이 여타 학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학생들 사이의 나이 제한이 없다는 점이다.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든 일주일 동안의 교육을 통해 후루미나미의 일원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시험받을 수 있다.

 

일원이 되더라도 성을 꼭 후루미나미로 바꿀 필요도 없다. 아마 이 점이 후루미나미 가문의 집권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겉으로는 잠시 어딘가로 여행을 다녀온 것 같지만. 어떤 연기자든 후루미나미의 시험에 통과한다면 비밀리에 후루미나미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비밀결사처럼. 겉으로는 후루미나미라는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속으로는 누구를 후루미나미로 임명해야 할지. 누구에게 자격을 줘야 할지. 누가 후루미나미에 대한 비밀을 캐내려 하고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를 의논하고 나눌 테다. 커다란 권력이다. 자본력과 영향력을 가진 권력 덩어리.

 

나는 그것의 일부가 되고 싶은 어린애에 불과하다. 그다지 가망 없는, 동메달의 어린이.

 

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후루미나미 학원 안에서 구성원을 구별하기 위한 표식이다. 합숙 기간 동안 후루미나미가 되고 싶은 자들은 가슴팍에 메달을 하나 차게 된다.

 

금은 한쪽이라도 좋으니 후루미나미 직계 태생의 피를 이어받은 자들에게 붙여진다.

 

은은 후루미나미의 직계 태생이 아니더라도 부모가 둘 다 후루미나미 출신인 자들에게 붙여진다.

 

동은 부모 둘 중 한쪽이 후루미나미 출신인 자들에게 붙여진다.

 

마지막으로 철은 부모의 어느 쪽도 후루미나미 출신이 아닌 이들에게 붙여진다. 철은 굉장히 드물다. 혈연을 중요시하는 후루미나미들의 학원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은 그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해서 금, 은, 동의 경우는 연기력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시험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진다. 특히 금의 경우는 심하다. 소문에 의하면 금메달을 가진 사람은 별다른 시험 없이도 후루미나미 가문의 지원을 받으며 승승장구할 수 있다고들 한다.

 

미신적인 일이다.

 

"너는 화도 안 나?"

 

밑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매끄러운 나무로 이루어진 복도 위에 내 또래로 보이는 검은 머리의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이 학원에 아이는 드물다. 후루미나미의 자녀들에게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시험의 기회를. 어린 시절에 보려는 사람은 좀처럼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를 보며 반갑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어째서 그녀가 복도에 걸터앉은 채 바구니 가득 담겨 있는 호두를 까고 있는 것인지 궁금함도 느꼈다.

 

"쿠루미야."

 

"응? 쿠루미? 뭐가?"

 

"내 이름. 후루미나미 쿠루미야. 너는?"

 

후루미나미 쿠루미? 그 사람 분명 유명한 배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동명이인인 것일까.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후루미나미 링고."

 

"링고? 사과?"

 

"응… 그 사과 맞아."

 

"아쉽네. 난 달달한 건 별로거든. 쌉싸름한 게 입에 맞아서."

 

나는 그녀에게 걸려 있는 메달을 슬쩍 확인했다. 그녀는 철메달을 가지고 있었다. 철메달

 

이 학원에 아이보다 드문 존재가 있다면 철메달일 것이다. 게다가 철메달을 가진 아이라니. 나는 눈 앞에 장수하늘소를 마주한 아이처럼 순간 놀랐고, 또 그만큼 반가움을 느꼈다. 

 

그녀는 바구니 가득 들어있는 호두를 펜치로 눌렀다. 그러자 껍질이 깨지며 호두알이 드러났다.

 

"지금 그거… 호두야?"

 

"그럼 이게 사과로 보이니?"

"아니. 내 말은… 왜 호두를 까고 있는 거야?"

 

"먹으려고."

 

깨진 호두알을 그녀는 입으로 집어넣었다. 오독오독. 질겅질겅. 그녀는 그 맛을 음미하듯이 눈을 꼭 감았다. 호두를 삼킨 뒤에 그녀는 다시금 눈을 뜨고 호두를 하나 내게 건넸다.


"먹을래?"

 

"아니. 아니. 괜찮아. 그보다… 정말 왜 복도 한가운데에 앉아서 호두를 까먹고 있는 거야."

 

"이게 내 배역이라서."

"배역?"

 

"시험에서 볼 배역 안 정해뒀어? 평소에도 내가 그 배역 그 자체라 생각하면 도움이 된대서 말이야."

 

지원자들은 자신이 어떤 배역으로 연기력을 보여줄 것인지를 미리 학원 측에 제출할 수 있다. 그를 통해 지원자가 어떤 감정선을 가진 채 연기를 하고 있는지 심사위원들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물론 후루미나미의 중요 인사들이다.

 

"메소드 연기 같은 거구나."

 

"맞아. 내가 시험에서 할 배역은 호두까기(くるみ割り)야. 이 등장인물은 항상 호두를 까고 있어. 주변의 시선과는 상관없이 항상 호두를 까. 그것이 수양인 것처럼 말이야."

 

쿠루미가 연기하는 배역이 쿠루미와리(호두까기)라니… 나름의 말장난 같았다.

 

"왜… 항상 호두를 까고 있는데? 먹으려고?"

"그건 스포일러라서 말 못 해."

쿠루미는 망치로 호두를 하나 더 까고 호두알을 오물거렸다. 몇몇 사람들이 복도를 지나다니며 그녀의 철메달과 호두 바구니를 보았다. 비웃음과 몇 마디의 중얼거림을 남긴 채 그들은 다리를 움직여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쿠루미는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나도 여느 사람들처럼 그녀를 이상한 사람이라 치부하고 갈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녀에게 관심이 생겼다. 단지 메소드 연기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남들이 지나다니며 그녀를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와중에도. 호두를 깨고 있는 모습이 왜인지 멋있었다.

 

"…그럼 최소한 어디에 나오는 등장인물인지만 알려 줘. 나중에 보게."

 

"내가 만든 캐릭터야."

 

"…그렇구나?"

 

"캐릭터 설정은 충분히 정리해 뒀으니까 나중에 시트를 제출하려고."

 

내가 다른 사람의 인생에 훈수를 둘 처지는 아니지만. 보통 시험은 유명한 작품의 명장면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잦다. 명장면이 아니더라도 연기를 잘했는지 못했는지 심사위원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경우 탈락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심사위원이 아무리 지원자의 연기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해도. 공식적인 작품도 아닌 등장인물은 통과할 법하지 않은데

 

나는 쿠루미의 철메달을 유심히 보았다.

 

혈연이 없음에도 후루미나미 학원에 왔다는 건 그만한 연기력이 있음을 의미했다 나는 정말 나랑 동갑인 이 괴짜 여자애한테 그 정도의 연기력이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너는 무슨 배역을 하기로 했어?"

 

"아직 정해두지는 않았어."

 

"슬슬 정해야 할 거야. 저 녀석들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다면."

 

"저 녀석들이라니… 아까 그 사람들 말하는 거야?"

"비단 저 사람뿐만이 아니라 너를 멸시하는 모든 사람에게 보란 듯이 너의 성공을 보여주고 싶다면. 시험을 통과해야 하잖아? 그러려면 등장인물을 미리 정해 둬야지 않겠어."

 

"그래야겠지…"

 

쿠루미는 호두를 질겅거리다 말고 바구니를 든 채 벌떡 일어섰다.

 

"너 아직 질문에 대답 하나 안 했어."

 

"어? 무. 무슨 질문?"

"너는 화도 안 나? 동메달이라는 것에 무시받고 멸시받는 것에. 화가 안 나냐고."

 

나는 선글라스 낀 사람을 흘끗 돌아보며 작게 대답했다.

 

"화야 나지… 그렇지만 참는 거야. 일일이 싸워봤자 내게 손해가 될 뿐이니까난 후루미나미가 되고 싶어. 나에게 있어서 떳떳하게 살아가고 싶어."

 

"후루미나미가 되고 싶다고? 그 나이에?"

 

"응. 너도 그렇듯이 말이야."

 

"그럼 나랑 손을 잡자. 그러기만 하면 넌 후루미나미가 될 수 있을 거야."

 

"손을 잡자니…"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줄게. 일단 잡아."

 

나는 어물어물 그녀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궁금한 이들이 있을까 미리 말하겠다.

 

나는 그녀 덕분에 후루미나미가 된다.

 

 

 

 

 

 

그날 이래로 우리는 함께 다니며 서로 연기 연습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쿠루미는 후루미나미 가문과 아무런 인연이 없지만, 그녀의 연기를 인상 깊게 본 후루미나미의 중요 인사가 있기 때문에 이 학원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링고 넌 어때?"

 

"나는… 어머니가 후루미나미신 적이 있어서 나도 학원에 올 자격이 있었어. 그게 다야."

 

"내가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너무 일찍 온 거 아니니? 네가 보여줄 수 있는 연기의 폭이 넓어질 때 오지 그랬어. 왜 이렇게 일찍 왔니?"

 

"가끔 나도 그렇게 생각해."

 

후루미나미 학원은 기본적으로 방임주의다. 다른 학교가 그렇듯이 시간표가 있으며 각종 지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하지만 듣고 싶은 수업을 들을 수 있을 뿐. 원하지 않는다면 수업을 전혀 듣지 않을 수도 있다.

 

쿠루미는 수업을 좀처럼 듣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안 들었다. 그녀의 말로는 이론적인 수업보다 메소드 연기 한 번이 더 값지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좀 심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괴짜 천재라는 말은 그녀를 위해 있는 듯이. 그녀는 자기보다 몇 살은 더 많은 사람이 그녀의 철메달을 보며 비웃더라도 전혀 괘념치 않는 것으로 보였다. 남이 어떻든 간에 그녀는 학원 곳곳의 공간에서 호두를 깠다.

 

설령 수업에 참여한다고 해도 결코 평범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쿠루미. 무슨 일로 수업에 온 거야?"

"알 바 없고. 저 사람 기억 나?"

 

쿠루미는 내 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나는 괜스레 부끄러워지려는 얼굴을 숨기려 애썼다.

 

"누구?"

"조용히 대답해. 2시 방향 저 사람. 너랑 부딪치고 널 꼬맹이라고 부른 사람이야."

 

쿠루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정말 그 형이 보였다.

 

"정말이네… 같은 조가 안 되길 바라야겠어."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조가 되지 않으려는 것처럼 말이지."

 

"…우리는 어린애고. 메달도 별 볼 일 없으니까 무시당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한 번 쓴 맛을 보여줘야겠어."

 

"그게 무슨 뜻이야?"

"날 지켜봐 줘."

 

즉흥 연기 수업에 참여한 날 쿠루미는 그들에게 한 조로 참여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학원의 교사 역할을 맡는 뮤지컬 배우가 허락했다.

 

형들과 누나들은 원래 어울려 다니던 아이와 헤어지기라도 했냐는 등 남몰래 모욕을 던졌다. 그녀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러는 것 같았다. 뭘 할 수 있냐는 듯이 그들은 우리를 비웃었다. 나잇값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을 것이다. 나는 결국 동메달에 불과하니까. 후루미나미의 자식이기에 시험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던 것뿐. 나눠진 권력 체계와 차별에서 도망칠 방법은 없으니까. 그들은 항상 그렇게 살아왔겠지. 은메달을 가지고 있으니 양질의 교육을 받아가며 이 학원에 왔을 터였다.

 

하지만 쿠루미가 그들의 왕국을 비집고 들어와. 평화로운 죽은 호수에 큰 흔들림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나 왔어." 로 시작하는 전형적인 가족의 연기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안정적이지만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연기였다.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쿠루미는 나와 다르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우리 딸. 벌써 깼어?"

은메달을 가진 누나 또한 충분한 연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쿠루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가져갔다.

 

쿠루미는 은메달을 가진 누나의 손을 짝 쳐냈다.

 

"나한테 손대지 마. 더는 못 참겠으니까!"

 

"꺄악. 뭐야?!"

"뭐냐고. 뭐냐고? 내가 말했잖아. 더는 못 참겠다고! 딸한테 화풀이를 하면 마음이 편해져?!"

 

패악스러울 정도의 분노에 주변에 있는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그녀는 순식간에 평화로운 가정을 가정 폭력의 재생산지로 바꿔 놓았다.

 

"너 지금 엄마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니!"

은메달을 가진 형은 당황한 티를 숨기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쿠루미의 돌발 행동에 맞춰 가려고 했다.

 

쿠루미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즉흥 연기 연습에 극적인 장면이 쓰이는 경우는 잦았지만 주변의 모든 이들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릴 만큼 격렬한 장면은 처음이었다.

 

"당신도 똑같아! 일. 일. 일. 집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상관도 안 하지. 다 똑같아! 당신들 모두 역겨워. 역겨워 미치겠단 말이야!"

 

쿠루미는 중얼거림과 외침의 중간 정도에 있는 말을 쏟아내더니.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 채 어디론가 걸어갔다. 찬장 같은 것을 열고 안에 있는 것을 꺼내는 동작은 허공을 갈랐으나. 사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그 움직임은 박력이 넘쳤다.

 

쿠루미는 무언가를 꽉 쥔 듯이 두 손을 모으고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당신이 미워! 죽일 거야. 죽여버릴 거야!"

 

"미쳤나 봐 진짜!"

 

"저리 가. 이 미친…!"

 

"여기까지 할게요?"

쿠루미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추고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수고했어요. 엄마. 아빠."

 

그 말을 듣고 소름이 끼친 것은 은메달을 가진 누나와 형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나 또한 그녀를 보며 소름을 느꼈다. 마치 어린아이니까 봐달라는 듯한 해맑은 웃음. 느닷없는 메소드 연기에 항의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그 표정에 나는 놀랐다. 쿠루미는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철메달의 소유자. 어린아이. 가장 무시받는 그녀이기에 돌발행동도 용납될 수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더 무서운 것은 그녀의 표정이 풀려 있음에도 손은 보이지 않는 칼을 꽉 잡은 채 놓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은메달을 가진 그들이 쿠루미에게서 몇 발자국 물러나며 뮤지컬 배우의 눈치를 보는 동안. 쿠루미는 두 손으로 쥐고 있던 허공을 오른손으로 옮겨 힘껏 던지는 시늉을 했다. 팔과 허리에 힘이 가득 실린 그 동작은 정말 내가 보지 못한 사이에 그녀가 칼을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쿠루미!"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 외침도 그녀의 동작이 위험해보는 데에 한몫을 했다. 은메달을 가진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몸을 웅크렸다. 쿠루미는 그 장면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비웃을 뿐이었다.

 

"역시 쿠루미 넌 대단해…"

 

"과찬이지."

 

그런 일이 있은 뒤에도 밖에서 연습을 했다간 곧잘 은이나 동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우리였기에. 우리는 연기 수업을 받지 않을 때면 서로의 숙소에서 연습을 했다.

 

"그 꼬마 둘 사귀기라도 하나 봐."

 

"둘 중 한 명이 연기가 아니어야 할 텐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우리를 비웃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귀가 밝은 편이다. 그리고 내가 옆에서 본 바에 의하면 그녀는 나보다도 귀가 밝았다.

 

"그런 말에 신경을 써? 복잡하게 생각 말고 호두나 먹어."

 

호두를 어디서 가져오는 것인지 그녀는 항상 호두를 가지고 다녔다. 저 정도로 배역에 몰입하고 있으면서 일상을 유지한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너 나 좋아하니?"

"아니!"

 

너무 빨리 대답한 것 같았다. 나는 멋쩍게 그녀에게서 얼굴을 돌리고는 딴청을 피웠다. 쿠루미는 내 쪽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호두를 까는 데에만 집중했다. 내가 아니라 호두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 됐어. 우리 사이를 그런 식으로밖에 해석하지 못하다니 이번 시험 대상자들은 통찰력이 별로야. 나이가 많아봤자라고. 그런 점에선 오히려 우리들이 더 주목받을지도 모르지. 단 한 번 뿐인 시험의 기회를 어린 나이에 사용하고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내 머리 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쿠루미는 시험의 기회가 한 번 뿐이라는 것도 알았다. 금에서 철까지의 위계질서와 불합리함도 알았다. 그녀의 나이는 어렸지만,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현명해 보였다.

 

그런데 왜 그녀는. 어린 나이에 철메달을 가지고 후루미나미 학원에 온 거지? 자신이 받을 불이익을 전부 알고 있었을 텐데도

 

"쿠루미. 너는 왜 그렇게 일찍 후루미나미 학원에 온 거야?"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쿠루미는 호두를 까던 손을 멈추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고민의 침묵이 잠시 이어진 뒤 그녀는 말했다.

 

"왜 일찍 왔냐면… 내 능력을 증명하고 싶어서. 라고 해야 하나. 더 늦게 와도 지금보다 별로 뛰어나질 것 같진 않아서 말이야."

 

"너 꽤 자신이 있었구나그럴 만큼 연기력이 출중하긴 하지만."

 

"링고. 넌 어때. 너는 왜 그 나이에 이 학원에 온 거야?"

 

내 입이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좋아. 누구나 비밀은 있는 법이니까."

 

"아니야… 말할게. 우리 엄마는 후루미나미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이었어."

 

쿠루미는 '있던' 이라는 말에 의아함을 느끼는 듯 보였지만 굳이 되묻지는 않았다.

 

"네 생각이 맞아. 지금은 아니야. 엄마는 후루미나미가 아니게 된 이후로부터 나한테 말했어. 네가 후루미나미를 이어야 한다고. 네가 후루미나미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야."

 

"그건 네 엄마의 소망이지 네 게 아니잖아. 너 사실 후루미나미가 되고 싶지 않은 거 아니야? 그래서 일찍 학원에 와서 탈락하고. 헛된 기대를 접게 만들려는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난 그냥… 우리 가족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더 가족 생각을 했다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나는 다른 생각을 하며 감정을 떨쳐 버렸다.

 

"후루미나미가 되면 가족이 행복해져?"

"그럴지도 몰라. 적어도 난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사려 깊네. 생각도 깊어. 그 나이에 기특하긴."

 

"너도 동갑이면서 나이 많은 듯이 말하지 마…"

 

나는 주먹을 쥐고 힘을 꽉 주었다. 손안에 귤이 있다면 즙을 전부 짜낼 수 있을 만큼.

 

"나는… 후루미나미가 되어야만 해. 그래야만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될 수 있어."

 

"엄마라…"

"…왜. 너무 어린애같아?"

"전혀. 오히려 성숙해. 나이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어려지지. 사랑에 무뎌져선 매사에 감사할 줄 모르게 돼. 그래서 슬픔으로 그 무뎌짐을 날카롭게 갈아야 하는 거고

링고. 네가 하기로 한 배역이 분명 엄마를 여의고. 떠난 가족을 원망한 채 권총으로 자살하는 역할이었지?"

 

"응… 맞아."

 

쿠루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을 멈추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봐."

 

 

 

 

 

 

 

"연기력이 깃든 성물을 빌려줄게."

 

쿠루미는 어딘가로 다녀오고선 내게 그렇게 말했다.

 

"성물? 그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 성물이야. 프레디 머큐리가 쓰던 마이크 스탠드라던가 그런 거."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아 나는 고개를 갸우뚱 돌렸다.

 

"네 배역이라면 무슨 장면을 할지 너무 명확해서 가져와봤어."

쿠루미는 내게 총을 건넸다. 엄청나게 정교하게 만들어진 모형이었다. 무게도 조금 묵직해 나는 내가 진짜 총을 들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받았다.

 

"소품으로 이걸 사용해. 이 안에 담긴 연기력이 네게 힘을 줄 거야."

 

"연기력…?"

 

"써 보면 무슨 뜻인지 감이 올 거야. 간수 잘하고 나중에 돌려줘야 해."

 

"그렇지만 쿠루미. 여기에 정말 연기력이 깃들어 있다면 네가 쓰지 않아도 괜찮겠어?"

"괜찮아. 진짜 성물은 따로 있거든."

 

쿠루미는 주머니에서 곰방대 담배를 꺼냈다.

 

"담배를 왜 가지고 있어?!"

"아쉽게도 유아기의 흡연은 독이라서 참고 있지만."

"아. 그래… 다행이야."

 

"내일 연기. 기대하고 있을게. 너는 후루미나미가 될 수 있어. 난 그렇게 믿으니까 너도 믿어야 해."

"정말 그럴까…?"

 

"그래. 넌 무조건 될 수밖에 없어. 나와 손을 잡은 이상 말이야."

쿠루미의 웃음이 조금 꺼림칙하게 느껴진 것은 착각이 분명했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고 결국 시험의 날이 다가왔다.

 

후루미나미의 연기 시험은 다른 모든 참가자들이 보는 앞에서 이뤄진다. 무대공포증에 걸리는 배우는 쓸모가 없다는 주의다. 사소해 보이지만 모르는 이들의 여러 가지 감정이 담긴 시선이나 들키지 않을 정도의 야유는 감정선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렇기에 출중한 연기자들도 이 시험에 붙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내 앞의 참가자 또한 평소에는 나쁘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사를 절고 넘어지는 등의 실수를 하고야 말았다.

 

내가 심사 무대에 서자마자 공기에 야유가 가루가 되어 퍼졌다.

 

우우. 키득키득. 우우우. 피식. 낄낄. 키득키득.

 

소곤소곤. 속닥속닥. 이러쿵저러쿵.

 

그 모든 소리가 내 귀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긴장하지 않으려 애쓸수록 긴장이 내 목과 배를 딱딱하게 굳혔다. 침이 바싹 마르고 다리의 움직임은 저절로 뻣뻣해졌다.

 

"끝났네."

라는 누군가의 중얼거림을 들었을 때는 무너질 뻔했다. 나는 손의 떨림을 잠재우려고 애쓰며 소품을 꺼냈다.

 

쿠루미가 내게 준 총. 이상하게 묵직하고 광택이 나는 그 총. 나는 그것을 뽑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더 이상 잡음이 들리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심사위원들 뿐이었다. 정말 권총에 있는 연기력이 내게 스며든 듯이 나는 연기를 시작했다.

 

"아아. 신이시어. 선하신 신이시어. 제게 어째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흔들었다. 다리는 조금 휘청였고 목소리는 떨리게 만들었다.

 

"더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삶은 살 수가 없습니다. 껍데기만 남은 채 사는 삶은 지옥입니다!"

등장인물의 감정선은 비관이다. 연기의 끝은 등장인물의 자살이기 때문에 곧 죽을 것 같은 사람의 연기를 잘 해내야 했다.

 

어떤 생각을 하며 감정을 잡아야 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몇 번이고 연습했다. 나는 등장인물을 완벽하게 따라갔다. 중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어느 임계점을 넘자. 내가 등장인물을 앞지르는 일이 벌어졌다.

 

"링고… 네가 꼭 후루미나미가 되어야 한다. 링고. 엄마랑 약속해 줘."

 

감정이… 솟구쳐 올라왔다.

 

"왜 나만 두고 간 건가요. 왜 나를 버리고 가야만 했습니까…?"

 

총을 쥐고 있는 내 손이 떨렸다. 실제로 떨렸다.

 

이것으로 내 목숨을 끊게 될 거라고. 나는 순간 진심으로 생각해버렸다.

 

"당신들이 내 곁을 떠나고 나는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게 되었어요."

 

이 배역을 왜 골랐는지 나는 줄곧 알고 있었다.

 

몰입하기 쉽기 때문에.

 

나와 닮았기 때문에.

 

"어머니 당신은 내게 저주를 남기고 간 거야…"

 

"그 망할 후루미나미가 대체 뭐길래 당신이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링고는 어떻게 하려고!"

 

"아버지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신의 이름으로 당신들을 저주합니다."

 

등장인물과 내 입술이 겹쳐진다.

 

나는 두 존재의 경계에 서 있다. 감정은 염도가 다른 해역의 바닷물이 갈라지는 경계를 넘나들며 조금씩 돌출된다.

 

"나에게 돌아와요. 내가 할 수 있어요. 해낼 수 있어요."

그렇지만 등장인물의 그 사람들은 이미 그의 곁을 떠난 지 오래다. 등장인물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그렇기에 원하지 않던 명예밖에 원할 게 없어진다.

 

그렇지만 명예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실패한다. 비관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머리에 방아쇠를 겨눈다.

 

"잘 보세요."

 

그때 내가 죽지 않은 것은 단순히 내가 방아쇠를 너무 빨리 당겼기 때문이었다.

 

내 머리에 제대로 겨누지 않고. 지친 사람이 으레 그렇듯이 비스듬히. 사선으로 쏘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총알은 내 머리카락을 잠깐 스치는 것으로 끝났다.

 

"으악?!"

내 비명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확 비명이 퍼졌다. 나는 권총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내 연기를 지켜보던 관중들은 많이 놀란 듯이 보였고 심사위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크게 당황해 중얼거렸다.

 

"왜…? 왜 진짜 총알이…"

 

"끌어내! 빨리 끌어내!"

 

심사위원이 날 가리키자 선글라스를 낀 남자들이 나에게 달려왔다.

 

눈 앞이 아득해질 정도의 당황이 나를 덮쳤다. 오해야. 난 이러려고 한 적 없어. 진짜 총을 쏘려 한 적 없어. 날 탈락시키면 안 돼. 날 탈락시키면 안 된다고.

 

날 잡아가도 좋아. 총기 소지죄로 벌해도 좋아. 하지만 탈락만큼은 안 돼. 후루미나미가 되고 싶어.

 

"날 탈락시키면…!"

 

"멈춰!"

쿠루미가 외치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쿠루미…"

 

난 그녀에게 건넬 질문이 많고도 많았으나 입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왜 진짜 총을 가지고 있어?

 

왜 나에게 줬어?

이걸 내가 내 머리에 쏘게 될 거라고. 알고 있었잖아. 왜 이걸 나에게

 

"내가 건네준 총이니까 날 탓하세요. 링고는 잘못 없어요."

 

"넌 누구냐?! 끌어내!"

"링고 다음은 제 차례예요. 끌고 가도 무대는 마치고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제 이름은 후루미나미 쿠루미입니다."

 

쿠루미의 이름을 들은 심사위원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후루미나미 쿠루미…? 무슨 소리야. 그 여자는 3년쯤 전에… 동명이인이라는 건가? 가명? 어느 쪽이든 불길하군"

 

"한 번 시켜 줘. 어차피 철이잖아."

 

"감사합니다. 여러분."

 

쿠루미는 심사 무대로 발을 내디뎠다. 다른 이들은 그녀의 미세한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보았다.

 

어슬렁거리는 걸음은 군인처럼 절도를 갖추었다.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손은 서부의 총잡이의 것처럼 허리춤 근처에 머물러. 걸음에 따라 무게추처럼 천천히 흔들렸다.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은 굳어 석고상 같은 것으로 변모했다. 옆얼굴밖에 보지 못했지만 그녀의 눈 밑에는 절묘한 그늘이 생겨. 그녀의 발걸음에 무게를 더했다. 그녀의 안에는 어른이 들어 있었다. 무대에 선 이상 그녀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되었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쿠루미는 양팔을 쫙 펼쳤다. 그 속도에 옷이 작게 펄럭였다.

 

"내가 깐 호두를 보세요. 여러분."

 

그녀는 주머니 안에서 펜치를 꺼냈다.

 

"보이지 않으시겠죠. 호두는 이미 떠났으니. 호두를 마지막으로 배웅하는 것은 나의 의무였습니다.

인형처럼 발달된 치악 기관도. 껍질의 조직을 연하게 만들 수 있는 열과 습기도. 날카로운 발톱도 가지지 못한 저는. 항상 도구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내가 한심하게 비칩니까?

비웃는 건 마음대로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세요. 여러분들이 달콤한 과자를 즐길 수 있는 것은 내가 호두를 까 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호두를 까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내가 호두를 부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그 왕좌에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모르십니까!"

 

쿠루미는 심사위원석을 향해 소리쳤다. 살벌하고 비장한 외침이었다. 정말 그 실없는 쿠루미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그녀의 연기는 차갑게 벼려진 칼처럼 심사장 안에 크게 울렸다. 철이라며 그녀의 출신을 비웃던 이들도 한 마디 야유조차 보내지 못했다.

 

"달콤함에 혀가 아릴 테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분에 맞지 않는 금을 모으고 왕국을 세운 당신들은 매사 달디단 것으로 혀를 즐겁게 할 수 있었을 테지요.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쓴 맛에 대해 알려줄까 합니다. 슬픔에 대해 알려줄까 합니다. 상실에 대해. 박탈감에 대해. 절망에 대해 알려줄까 합니다! 그 맛을 잊지 못할 정도로. 그를 중화하려는 단 맛에서조차 쓴 맛을 느낄 수 있도록 아리고 아린 쓴 맛을. 여러분들은 전부 느껴 보아야만 합니다."

 

나는 호두까기가 어떤 등장인물인지 몰랐다. 쿠루미가 만든 그 등장인물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연기자로서 느껴지는 힘이 있었다. 그녀는 지금 호두까기 그 자체가 되었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슬픔을 신앙합니다."

 

격정적이던 그녀의 어조가 가을에 피는 서릿발처럼 내려앉았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고통을 신앙합니다. 슬픔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을 믿고 있습니다. 결국 모두의 생에는 하나의 연극일 뿐이며. 그 끝은 비극으로 결정되어있는 바. 모든 이들은 자기 자신만의 비극을 만들어내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지요… 어쩌고 저쩌고? 어쩌고 저쩌고 어쩌고 저쩌고."

 

나는 경악한 채 입을 쩍 벌렸다.

 

진중하게 이어지던 그녀의 어조가 실없이 쫑알거리는 소리로 변모했다. 심사위원들은 느닷없는 일에 표정을 구겼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저 정도면 합격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왜?

 

"연기는 여기까지 하고.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쿠루미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뜯어냈다. 머리카락이 전부 한 올로 엮여 있는 것처럼 한 번에 모든 머리카락이 뜯어졌다. 어느새 그녀의 머리는 매끈한 민머리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이 머리카락을 숨기기 위한 고무 캡임을 뒤늦게 알아챘다. 고무 캡마저 벗겨내고 마침내 겉으로 드러난 후루미나미의 머리카락은. 아이보리 색이었다.

 

그녀의 기행을 본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점점 퍼져나갔다.

 

"잠깐… 잠깐. 아니 저건!"

 

그 웅성거림이 단지 쿠루미의 돌발행동 때문이 아님을. 나는 한 심사위원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순간 깨달았다.


"후루미나미 나몬이잖아!"

 

"후루미나미 나몬?"

 

나는 심사위원들이 그 말에 왜 그렇게 동요하는지 알지 못했다. 왜 그들의 입에서 후루미나미 나몬이라는 이름이 나오는지. 쿠루미의 시험을 보고 있던 사람들도 왜 다들 화들짝 놀라는지. 왜 선글라스를 낀 사람들이 허겁지겁 달려와 그녀를 데려가는지도 알지 못했다.

 

"아아악! 뭐예요! 갑자기 왜 그래요!"

 

왜 쿠루미가 비명을 지르며 끌려가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납득하지도 못했기에 나는 그들을 쫓았다.

 

"잠깐만. 기다려요! 왜 쿠루미를 데려가는 거예요?!"

 

"오지 마. 링고! 오면 안 돼!"

쿠루미가 아연실색이 된 채로 내게 소리쳤다.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듯한 그녀의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이거 놔요. 철에게도 연기를 할 자격이 있다고요! 이런 식으로 나를 떨어뜨려선 안 돼요!"

 

나는 기함을 했다. 이렇게까지 더러울 줄은 몰랐다.

 

금. 은. 동. 철. 나는 그것이 단순한 혈통주의일 줄로만 알았다. 대우가 조금씩 다르더라도 순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거대한 흐름 앞에서 옳음을 추구하기보다는. 가끔 굽히고 들어가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쟁 자체가 허용되지 않을 줄은 몰랐다.

 

"그게 말이나 돼?! 철이라고 떨어뜨리는 게 어디 있어요! 저런 연기를 보여줬는데!"

 

"그런 게 아니야. 좀 가만히 있거라. 후루미나미 링고!"

선글라스를 쓴 사람이 내게 말했다.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철이라고 해서 그런 식으로 데려가는 건 말도 안 되잖아요! 쿠루미에게도 연기를 끝낼 기회를 주라고요!"

 

나는 마구 소리쳤다. 선글라스를 쓴 사람에게 붙들린 채 나는 몸을 마구 휘적였다. 그러나 나를 잡은 이는 나를 더 높이 들어 올려 땅도 밟지 못하게 막았다.

 

"이거 놔. 이거 놔! 이거 놓으란 말이에요!"

 

쿠루미 또한 울부짖었다. 울부짖었다는 단어 말고는 그녀의 움직임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허영심 가득한 귀족에게 붙잡힌 백마와도 같이 그녀는 저항했다. 그녀는 심사위원석 위로 끌려갔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심사위원이 그녀에게 소리쳤다.

 

"그만 해! 그만 하란 말이다. 그만하면 됐잖느냐. 나몬!"

 

나는 그만 하라는 높으신 분의 말에 화를 내려다가. 뒤이은 말에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꼈다.

 

나몬?

 

그게 누구지?

 

쿠루미가 발버둥 치기를 그만두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억울함과 울분이 아니라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만할까요. 그럼?"

"그래. 제발 그만해라. 세상에… 이 곳에서 기행을 벌인 이들은 자주 보았지만 이런 건 듣도보도 못했다."

높으신 분이 선글라스를 쓴 사람에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쿠루미는 사뿐히 다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리고 쿠루미는 아무렇지도 않게, 심사위원석의 탁자에 걸터앉고선 자신의 다리를 꼬았다. 그러나 그녀를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건방진 만행을 저지르고 있음에도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어째서? 그럴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녀가 그래도 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와 쿠루미를 비웃었던 얼굴이 몇 보였다. 그들의 얼굴은 점점 새파랗게 질려갔다.

 

"이렇게 성공적인 건 본 적이 없죠. 그렇죠? 기행으로 치부하기 어려울 정도로 잘 통했잖아요."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눈 앞의 광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심지어는 높은 좌석에 앉은 분들 가운데에서도 웅성거림이 있었다.

 

"촌극 치고는 재미있기도 했죠. 그렇지 않나요."

 

"임원 분들이 설명 안 해주던? 너는 이 곳에 올 필요조차 없었단 말이다! 대체 언제부터… 그런 놀이를 시작한 거니?"

"잘못했어요. 주민등록을 조금 위조했을 뿐이니까. 신고하진 마세요. 그래도 이럴만한 가치가 있지 않았나요?"

"그래. 이런 소동을 벌이다니… 덕분에 네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이제 없게 되었구나. 일주일 동안이나 우리를 속이다니. 후루미나미 전체를 통째로 속이다니 말이야. 세상에 맙소사… 실탄이 들어간 총알은 어떻게 구한 거냐?"

 

"그건 묻지 마세요. 어떻게 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총 자체는 중요해요. 꼭 저한테 돌려주셔야 해요. 알겠죠?"

 

뭐야.

 

뭐지.

 

"쿠루미…?"

 

쿠루미가 심사위원석에서 날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아… 좋은데."

뭐가 좋다는 거지.

 

나는 선글라스를 쓴 사람이 쿠루미의 가슴팍에서 철메달을 떼어내는 것을 보았다. 메달을 빼앗고 퇴출할 생각이냐고 물으려는 순간 그녀에게 새로운 메달이 지급되는 것도 보았다.

 

그것은 번쩍이는 금메달이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그 의문이 끝나기도 전에 선글라스를 쓴 사람이 어디선가 접이식 의자를 가져와 좌석 앞에 놓았다. 자연스럽게 쿠루미는 탁자에서 내려온 뒤 그곳에 앉아 턱을 괴었다. 머리를 양옆으로 흔드는 몸짓에선 유쾌함마져 내비쳤다.

 

"링고는 합격으로 해 주실래요? 앞으로 잘 키우면 잘 될 인재예요.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정말로. 방아쇠 당긴 거 보셨죠?"

 

"그래. 능력은 충분했고. 네 추천까지 받았으니 매우 긍정적으로 검토될 거다."

 

"다행이네요. 사실 링고한테 약속한 바 있었거든요. 후루미나미로 만들어 주겠다고요."

 

"성공해서 잘 되었구나. 그러니 이제 놀이는 다 끝났겠지?"

 

"아뇨."

 

쿠루미는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직 멀었어요."

 

 

 

 

 

 

나는 멍하니 내 숙소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올 것임을 알았다. 왜인지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날 찾아오지 않고서야 배길 수 없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을 때도 놀라지 않았다.

 

"안녕. 링고."

 

열쇠가 없는데도 열고 들어왔다. 숙소의 마스터키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금에게는 마스터키까지 지급되는 것인가? 하고 나는 괜스레 분함을 느꼈다.

 

"쿠루미…"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씩씩 숨을 쉬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내 방으로 들어오는 그녀를 보며 화가 후끈 치솟았다.

 

"할 말 없어?"

 

"무슨 할 말. 화났어?"

 

"당연히 화가 나지. 넌 날 속였어!"

"내가 널 속였기 때문에 화가 난 거구나."

"그래!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널 친구라고 여겼는데…! 내가 발버둥 치는 모습이 재미있었던 거지? 연기력의 성물 같은 소리나 하고. 진짜 총을 주고!"

 

"네가 스스로를 쏘면 비극이 되니까. 잘하면 후루미나미의 시험에 대해 폭로할 수도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어."

 

"그런 말도 안 되는…!"

 

날 죽이려고 했다고 말하고 있는 동갑내기를 보며 나는 눈 앞의 그녀가 정말 호두를 까던 그 쿠루미가 맞는지 궁금해졌다. 지금까지 줄곧 연기를 해왔다는 건가.

 

그렇다면 그녀는 실로. 연기자였다. 실로 후루미나미였다.

 

나는 그녀의 가슴팍에 붙어있는 금메달을 보았다. 무서울 정도로 번쩍였다.

 

"그리고 네가 날 친구로 여겼다고? 철메달을 가진 친구라고 여겼잖아. 정확히는."

 

그렇게 말하고 쿠루미는 활짝 웃었다.

 

뭐가 웃기는지 몰라 나는 사랑스럽게 입을 살짝 가리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가?"

 

쿠루미 또한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 눈이 무서웠다. 내 안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 사물의 너머를 보는 듯한 눈빛. 나와 동갑인 나이에 모든 불합리와 세상의 어둠을 보고 온 듯한 눈빛이 무서웠다.

 

"내가 널 속였다는 말 말이지. 참 오해의 여지가 없는 것 같아. 왜냐면 나는 너한테 거짓말을 그다지 하지 않았거든. 철메달의 소유자 연기를 하고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네게 거짓말을 한 적은 없다고. 알아? 후루미나미의 방식이 불공평하다고 여기는 것도 전부 사실이야. 나는 단 한 번 너를 속였을 뿐이지. 내가 철메달의 소유자라고."

 

"왜 날 속였어. 대답해!"

 

"논점 흐리지 말고 너야말로 대답해 봐. 왜 화를 내? 정말 메달과 능력이 아무런 상관이 없고. 메달은 후루미나미가 만들어낸 미신이자 악습에 불과하다고 믿었다면 화를 낼 이유가 없어. 내가 다른 메달을 사용했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네가 화가 난 건 내가 널 속였기 때문이 아니야."

 

후루미나미는 부엉이처럼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지금까지 네가 내려다봤던 철메달의 소유자가. 지금까지 널 계속. 계속. 계속… 내려다보고 있었을 거란 사실에 화가 난 거잖아."

 

"아니야. 조용히 해. 아니야!"

 

"맞잖아. 너. 날 멸시했잖아. 은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면서 자기보다 낮은 계급은 깔봤잖아. 우리가 마주했던 많은 이들이 그랬듯이."

 

"아니란 말이야!"

 

"어린이들은 닮고 싶지 않은 것들을 무심코 닮곤 하지. 옳음과 강함을 구분하지 못해 강한 쪽을 곧잘 선망하지."

 

귀를 막으려는 순간 그녀가 내 양팔을 꽉 붙들었다. 힘으로 저항할 수가 없다는 사실에 나는 공포를 느꼈다.

 

"안 되지. 안 돼! 도망치게 둘 것 같아? 내가 너에게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그녀가 하려는 말을 막지 못하고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나는 크게 동요했다. 쿠루미는 커지는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만족감으로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뭐가 그렇게 만족스럽다는 걸까. 난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내가 이 녀석보단 낫지. 이 철메달을 가진 데다가 괴짜라 아무도 안 어울려주는 녀석보단 내가 낫지. 내가 쿠루미보단 사정이 나으니까. 나는 착한 사람이니까. 나는 저것들과는 달라. 급이 다르다고 해서 낮은 등급의 사람을 홀대하지 않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때 쿠루미가 내 팔을 놓아주었다. 나는 손으로 귀를 막고 주춤거리며 그녀에게서 몇 발자국 물러섰다. 그러나 내가 물러날수록 그녀는 더욱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철조차도 상냥하게 대해. 이런 괴짜의 실없는 말도 다 들어줘. 저 선글라스를 쓴 사람들은 우릴 보고만 있는 게 아니야. 평가하고 있는 거야. 후루미나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더라도 후루미나미에 먹칠을 하지 않는 이를. 찾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행실을 바르게 해야 해. 철에게도 친절을 베푸는 모습을 보면 나의 주가도 오를 거야…"

 

귀를 막았음에도 그렇지만 나몬의 목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도망칠 수가 없었다.

 

누구도 진실에서는 도망칠 수 없다.

 

"똑똑하기도 하지. 실제로 네 전략은 잘 먹혔어. 너 사실 꽤 많이 참았지? 날 친구라고 여긴 것 같긴 하지만 은연중엔 날 깔봤잖아. 이 병신 같은 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앞으로 4일밖에 안 남았는데 연습도 안 하고 메소드 연기 같은 거나 하고 있어? 동도 좋은 건 아니지만 철은 최악이잖아. 아무런 연줄도 없으니 여기에서의 생활이 출세길의 전부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런 것보단 나아. 동은 철보다 낫고 나는 노력이라도 하니까…"

 

"그 정도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어!"

 

차라리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했다고 고백하는 편이 나았으리라. 어차피 뜻은 같을 테니.

 

"네가 그렇게 모욕감을 느끼는 건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대하듯 대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잖아? 네가 나에게 그랬듯이 내가 줄곧 너를 깔보고 우월감을 느끼며 즐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잖아. 아직도 모르겠어? 링고 넌 거울을 들여다본 거야! 넌 나에게 은연중 품었던 경멸만큼을 다시 돌려받은 거야!"

 

뒤로 물러서던 내 다리가 침대에 닿았다. 나는 얼떨결에 침대 앞에 털썩 주저앉은 모양새가 되었다.

 

"너는… 너는 내게 총을 줬어. 실탄이 있는 총을! 날 죽일 수도 있었어!"

"그 성물을 원한 건 너였어."

 

"실탄이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잖아."

 

"말하지 않았던 것뿐 참말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 거짓말은 안 했어. 거짓말을 한 건 너야."

 

그녀의 말을 듣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짓말?

 

내 거짓말을 알고 있다고?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보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그것까지 알아선 안 돼. 안 돼. 안 된다고. 안 된다고!

 

"너. 부모님이 없더라?"

 

"그만둬."

 

나몬은 그만두지 않았다.

 

"이혼 가정. 모친은 후루미나미 소속이었으나 모종의 사유로 제명당함. 사치스러운 생활을 잊지 못하고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돌다가 남편과 이혼. 그 뒤 사고사. 넌 외조부모에게서 자랐어. 부모님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한다는 건 겉으로의 이유일 뿐."

 

"그마아안!"

 

"그 작자들처럼 한심하게 살고 싶지 않아서. 네 진심은 그것이었지."

 

"아니야… 그런 게…"

 

"고작 후루미나미라는 명예에 집착하다 욕망에 삼켜져 버린 너희 어머니. 그녀가 제명당하자 그녀 곁에 있지는 못할망정 너까지 버리고 떠난 아버지. 그들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보았기에. 후루미나미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 눈 앞에서 아른거리지. 후루미나미가 되면 아버지가 다시 돌아올 것만 같지."

 

"제발. 제발 그만해 줘…"

 

"왜 나한테 거짓말을 했어. 응? 링고. 말해 줘. 어째서 거짓말을 했어? 부끄러워서? 수치스러워서?"

 

"그래…!"

 

"이거 어떻게 하니. 자기 처지가 더 낫다고 여겼던 철메달은 사실 금메달의 소유자에. 심지어 네 허세와 거짓말을 간파하고 있었다니. 어떻게 해… 더럽게 부끄럽겠다. 저기 링고. 내가 언제부터 알고 있었게? 오늘 아침부터. 어제부터. 그제부터. 아니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네게 접근했을 때부터?

링고… 진짜 한심해. 너도 알다시피 너는 추악해. 차라리 멍청하고 실없는 다른 이들이 나아 보일 정도야. 넌 머리를 굴려가면서 더러워. 자기 부모님 얘기까지 팔아가며 남에게서 호감을 사려고 하다니. 링고… 대체 언제부터 그 모양 그 꼴이 되었니?"

 

"잘못했어. 잘못했어… 용서해 줘…"

 

"내가 왜 용서를 해… 칭찬을 아무리 해도 모자랄 텐데."

 

고개를 푹 숙인 내 콧잔등에. 누군가의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그곳에 나몬이 있었다. 내 몸이 얼어붙었다. 그것은 연심이라던가 두근거림에서 비롯된 경직이 아니었다. 일순간에는 정말 그랬다. 그녀는 가까이서 봤을 때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예뻤다. 그렇지만 다음 순간 그 분홍빛 감정들은 산산이 부서졌다.

 

내 몸이 멈춘 이유는. 내가 개구리며 그녀가 뱀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뿐이었다. 나는 몸이 얼어붙은 채 그녀가 나를 꿀꺽 삼킬 때까지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나몬이 두 팔을 내 어깨에 감아 나를 끌어안았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에서 그녀는 천천히 뱀과 같은 혀를 쭉 내밀었다. 그리고 내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할짝이기 시작했다.

 

나는 순수한 광기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에 나는 그녀가 두려웠다. 그녀가 내 생명력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내 몸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갔다. 나몬의 눈동자. 봐선 안 될 것을 본 사람의 깊은 녹색 빛의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까 나는 몸을 덜덜 떨었다.

 

"달아. 링고. 사과 맛이야. 수치스러운 좌절감의 눈물. 아. 달콤해. 너무 달콤해"

 

"제발 이러지 마… 그만. 그만 해. 제발. 부탁이야…"

 

눈꺼풀과 뺨을 핥는 혀의 미지근한 체온이 느껴졌다. 내 몸이 다가 아니라 근원적인 정신. 영혼마저 전부 더럽혀지는 듯한 느낌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 앞의 동갑내기 여자아이가 고양이처럼 다닥다닥 바늘이 나 있는 혀를 가진 악마로 변모해 있을까 나는 눈을 조금도 뜨지 못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는 명확했다. 내가 손을 잡은 사람은 악마였다. 나는 그녀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그녀와 손을 잡았다. 그러나 계약이 이루어지고 내가 합격한 이상. 나는 값을 치러야만 했다. 오르막 다음에 오는 내리막. 나는 악마의 손아귀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녀는 몇 초간 더 얼굴을 가까이하더니. 흐뭇하게 웃으며 내 등을 토닥였다.

 

"흐윽. 으흑. 흐으…"

 

"많이 힘들었어? 미안. 내가 너무했지? 우리 착한 링고. 불쌍한 링고. 어떡해… 어떡하니. 딱한 것. 가엾은 것…"

 

그렇게 말하며 나몬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내 어깨가 그녀의 눈물에 서서히 젖어갔다. 몇 초를 더 훌쩍인 뒤 그녀는 눈물을 쓱쓱 닦고 몸을 일으켰다. 얼굴에는 조금 남은 빨간 자국을 제외하곤 전혀 울음의 흔적이 남지 않았다.

 

"고마워. 링고. 최고였어."

 

"제발… 제발 그만해 줘. 아무것도 모르겠어. 왜… 왜 그러는지 전혀 모르겠단 말이야. 그만해 줘…"

 

"알겠어. 참고로 앞으로의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원래 계획은 네 가식을 드러내서 네게 상처를 줄 심산이었지만… 굳이 그러진 않기로 했어. 영혼을 가져가고 성공을 주는 게 둘 다 가져가는 것보다 잔인하거든."

 

"…무슨 소리야."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죽는 것 같아? 전혀. 전혀 아니야. 정말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은 죽으려 하지 않아. 가장 악착같이 살아남으려 들지. 비극은 그렇게 만드는 게 아니야. 진짜 비극은 물질에 눈이 멀어 보다 중요한 가치를 헐값에 팔아버린 자에게 찾아오지."

 

나몬은 계속 말했다.

 

"총알이 네게 맞았다면 넌 죽었을 거야. 그럼 나는 널 기억할 테고. 그럼 내가 죽음과 함께 가지런히 놓이는 날까지 나는 너를 독점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총이 네게 맞지 않았으니 네게 남은 건 성공가도뿐이야. 내게 고마워해."

 

"고마워하라고…?"

 

"고마워해야지. 고맙지 않아? 이제 너는 수많은 은과 동과 철을 제치고 후루미나미의 양자가 되는 거야. 이제 네가 배우고 싶은 건 후루미나미 쪽에서 지원해 줄 거고, 수많은 배역이 너를 원할 거야. 단지 후루미나미의 진정한 일원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로 너에게는 아름다운 날개가 달리는 거라고! 그 날개를 가지고 너는 어떤 영예라도 이룰 수 있어! 그래. 네가 꿈꾸던 그 영예. 후루미나미 말이야!"

 

나몬은 그렇게 말한 뒤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내게 고마워해야지?"

 

"고마워하라고…? 네가 나한테 한 일들에. 고마워하라고?"

"그래. 고마워해야지.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네가 합격할 수 있었을 것 같아? 너도 알잖아. 너는 절대 못 했을 거야. 나와 함께했기 때문에. 성물을 받았기 때문에. 내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에 너는 분수에 맞지 않는 성취를 할 수 있었던 거라고. 네가 제일 잘 알잖아?"

 

후루미나미.

 

내가 학원에 온 이유.

 

엄마의 후루미나미. 아빠의 후루미나미. 우리 가족의 후루미나미.

 

이제 내 거야.

 

나는 뻔뻔스럽게 그렇게 말하는 그녀에게. 격한 감정과 함께 올라오는 진심을 쏟아내었다.

 

"고마워. 나몬."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럴 줄 알았어."

 

나몬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나도 만족스러웠다. 내가 그렇게 원하던 영광이 이제 내 눈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후루미나미를 내가 반드시 계승해야 한다며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던 엄마의 모습에서. 변해버린 엄마의 광증에서 진정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아빠가 돌아올 일은 없지만 적어도 이제 아빠가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내가 후루미나미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나를 찾아오고 싶지 않기 때문임이 확실해졌다.

 

이제 행복하게 살 수 있어. 그렇지만

 

"다른 사람한테 나의 진실을 말하면 안 돼… 알겠지? 부탁할게. 나몬. 정말로."

 

"그래. 그건 걱정 마! 절대 안 말할게. 금메달의 약속이니까 동메달인 너는 믿어도 좋아!"

 

이렇게나 비굴할 줄이야. 비굴해.

 

비굴하다. 너무나도 더러워. 추잡해. 최소한의 자존심도 없어. 이미 자존심은 전부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어. 사람으로서의 선이 있었어.

 

발을 뻗은 채 잠에 들기 위해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었어. 팔아버려서는 안 되는 게 있었다고. 눈물이 다시금 치솟았다.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감이 오지 않았다. 그것에 대한 기억 자체가 송두리째 뽑혀 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마음속의 빈자리 남은 바람구멍. 사람의 머리가 통째로 들어갈 만한 바람구멍은, 그 숭숭 뚫린 허전함만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링고. 어차피 마지막이니까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될까?"

 

"뭐든 말만 해."

 

"무릎 꿇어 줘."

 

나몬이 당연하다는 듯 내게 말했다. 검지로 바닥을 두 번 가리키기까지 했다. 꿇으라는 제스처였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뭘 위해 이렇게 하고 있는 거야.

 

난 당당히 서서 살기 위해… 당당하게 후루미나미에서 성공하기 위해… 나 자신으로써 살기 위해 이 학원에 온 거였는데.

 

나는 무릎을 꿇었다.

 

"거기서 상체를 조금만 더 굽혀 줄래? 그래. 그거야. 조금만 더. 조오금만… 더어…"

"도게자하길 바라는 거야?"

 

"아. 슬쩍 유도하려고 했는데…! 눈치챘으니까 그냥 해 줄래?"

나는 이마와 두 손을 바닥에 대었다.

 

바닥이 차가웠다.

 

내 가슴과 피가 서서히 차가워지는 만큼. 냉랭했고 딱딱했다.

 

나몬은 그 모습이 그저 즐겁다는 듯이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너 정말 최고다아…! 여기에 오길 잘했어. 너와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링고! 넌 정말 최고야… 이제 일어나도 돼!"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몸을 일으켰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눈물조차 메마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내가 뭘 하면 돼?"

 

"응?"

"이제… 뭘 해야 되는 거야. 나는… 뭘 해야 해. 나몬…? 말해 봐. 이제 내게 뭐가…"

 

"아무거나 해. 하지만 네가 간절히 원하는 것에는 절대 닿을 수 없을 거란 것만 알아 둬."

 

내 입이 뻐끔거렸다.

 

"어째서…?"

 

"성공을 위해 영혼을 팔아넘긴 사람은 다시는 영혼을 되찾을 수 없거든. 영원히 텅 빈 채로 대체제를 찾아서 방황하는 거야. 그 모습이 어떨까… 궁금하네. 나중에 얼굴이라도 보자! 형식적인 말이 아니라 정말이야. 10년 후 너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후후후"

 

나몬은 즐겁게 웃으며 내 방에서 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겠지.

 

이미 다 된 요리일 테니까. 이미 껍질이 벗겨진 호두일 테니까.

 

나는 내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침대에 누워 잠에 들어 보려고 했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온 것은 후회와 절망뿐이었다.

 

나는 연기자가 무대에서만 연기를 하는 자인 줄로만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듯이. 하지만 나는 잘못 생각했다.

 

모두들 연기를 하며 살아간다. 나도 그렇다. 줄곧 연기를 하면서 살아왔고 지금에 와서야 진짜 링고가 되었다. 이제 와서야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를 거울을 통해 보았다.

 

이제 나는 알았다. 누구도. 그 누구도 진심을 내비치지 않는다. 진짜 자신은 가면 속에 감춘 채 보여주고 싶은 자신을 연기한다. 내가 그랬듯이. 나몬이 그랬듯이.

 

이 세상 어디에도 그녀가 있을 것이다. 항상 누군가의 가면 속에 숨어있을 나몬을. 두려워하며 살게 될 것이다. 도망치는 나날의 시작은 오늘이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연기를 하며 살게 될 것이다. 단순히 누군가에게 맞춰준다. 사회생활을 한다는 영역이 아니다. 나는 내가 이 학원에서 겪은 일에 대해. 누구에게도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무릎을 꿇었노라고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했노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죽는 날까지 이 더러운 기분은. 사슬은. 족쇄는. 목줄은. 낙인은. 나와 함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일부이기에. 처음부터 그랬기에

 

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 무대 위에 설지라도 커튼이 내려오고 스포트라이트가 꺼지면 나는 홀로 남겨질 것이다. 누구도 진정으로 내 곁에 있을 순 없으리라.

 

나의 공허를 채우지 못한 채 오만 것을 삼켜보려고 해도 나는 계속 텅 비어있을 것이다. 모든 쾌락이 그렇듯이 나는 결국 내리막길로 수렴할 것이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그런 다음에는 울음이 나왔다. 그 다음에는 화가 나왔다. 그 다음에는 죄악감이 나왔다. 어느새인가 나는 그 표정들을 쉽게 꾸며낼 수가 있게 되었다. 가면을 순식간에 바꾸는 묘기처럼.

 

이렇게 얼굴 만드는 것이 편하다니. 나는 내가 변해버렸음을 깨달았다. 이게 연기의 비밀이었다. 연기의 재능이란 후천적으로 얻을 수 있는 무언가였다.

 

연기자가 되는 가장 쉬운 방법이란 얼굴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얼굴을 가지지 못하니 얼굴을 쉽게 꾸며낼 수 있는 건 당연하다. 그것을 인식하자 또다시 웃음과 울음이 나왔다.

 

내가 무엇으로 변해버린 걸까? 나는 진정한 나의 표정이 어땠는지를 생각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 시절의 나를 나몬에게 도둑맞고 말았다.

 

살아있을 때의 나는 그녀의 기억 속에 갇힌 채 그녀와 함께 죽게 될 것이다. 그녀가 죽음과 함께 가지런히 놓이는 날까지

 

나는 껍데기가 되었다. 속이 텅 비어버린 채 누군가의 양자로 들어가. 사랑 없이 자라난 채로 날갯짓을 하게 되겠지. 영혼 없는 얼굴 없는 자신 없는 무언가. 내가 아닌 누군가.

 

그런 흉물이 무엇이라고 불리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후루미나미가 되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외전이지만 캐릭터 특성상 기행을 옆에서 보여주는 게 더 재미있겠다 싶어서 제3자 시점으로 진행했음

 

쓸 거리가 많았는데 다른 캐릭터 단편도 이렇게 많은 분량으로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적당히 마무리지었음 처음에는 분명 재미있는 구성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뽕이 차진 않음 감을 잃었다

 

후루미나미 설정이 써먹기 좋아서(+미리 구상을 좀 해 둬서) 길게 나온 거지 다른 단편은 이렇게 많은 분량이 나오지 못할 것 같아요 미리 ㅈㅅ합니다

 

후루미나미 쿠루미라는 이름은 이름 지어주시는 귀인분이 처음 지어주신 나몬의 이름이었습니다 초기 설정의 레퍼런스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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