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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2

더 단크 타워 챕터 2 - 2

by 도타싫어! 2021. 2. 14.

 

 

흰 물건이 인도하는 대로.

 

나는 자판기 앞에 서게 되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자판? 무슨 한자를 쓰는 거지…?

 

무로 시라베: 자동판매기의 줄임말이니까 자(自)와 판(販)을 써.

 

유즈미 나데시코: 아! 자동판매기의 줄임말이구나!

 

루미나미 나몬: 보통 돈을 투입하면 점원 없이도 상품을 받을 수 있는 기계야. 처음 봐?

 

유즈미 나데시코: 처음 봐

 

무로 시라베: 나도 이렇게 큰 자판기는 처음이야.

 

마유즈미와 나는 자판기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기억하는 한 자판기는 대몰락 이후의 시대에서 대부분 멸종했다.

 

일본은 한 때 자판기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자판기가 많았다고들 한다. 그러나 대몰락이 발생하고 치안이 어지럽혀지며, 자판기를 관리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살인과 폭행이 난무하는 무정부 상태에서 자판기는 그저 해체할 경우 부품과 돈. 그리고 물자를 얻을 수 있는 상자에 불과했다.

 

치안이 비교적 유지되고 있는 구역이나 공공기관에는 자판기가 있다고도 들었지만, 적어도 카텟 기관에도 자판기는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큰 자판기는 대몰락 이전에도 없었으리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루미나미 나몬: 많이 크긴 하네. 안에 뭐가 들어 있을까 궁금한데?  한 번 돌리는 데에 1000 크레딧이래. 한 번 돌려 볼까!

 

유즈미 나데시코: 나도 해 볼래! 안에서 보통 뭐가 나오는 거야?

 

루미나미 나몬: 보통 과자. 음료수. 인형. 커피. 담배. 신문

 

유즈미 나데시코: 에엑!

 

마유즈미는 입을 떡하니 벌린 채 자판기를 올려다보았다.

 

유즈미 나데시코: 한 번에 몇 크레딧이라고?

 

루미나미 나몬: 1000 크레딧. 우선 가볍게 10연차 정도를

 

무로 시라베: 더 의논해보지 않겠어? 재화를 섣불리 소비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해.

 

루미나미 나몬: 크레딧의 쓰임새는 도박밖에 없는 것 같던데 한 번 돌려보자.

 

무로 시라베: 아니… 이건 그렇게 접근할 사안이 아닐 것 같아.

 

유즈미 나데시코: 이렇게 접근할 사안이야. 히무로! 이 안에서… 어… 새로운 단서를 발견할 수 있잖아!

 

무로 시라베: ….

 

유즈미 나데시코: 왜. 왜 그런 얼굴로 날 보는 거야! 자판기에서 물건 좀 뽑았다고 해서 천벌이 내리지는 않잖아!

 

유즈미 나데시코: 만약 천벌을 두려워한다면 히무로는 겁보야. 도전하지 않으면 새로운 발견은 없잖아! 겁보. 겁보!

 

루미나미 나몬: 옳소! 완전 겁보다 겁보!

 

무로 시라베: 그게 아니야. 나는

 

나조차 내 생각에 확신하지 못했기에 말을 멈추었다.

 

그런 내 의중을 눈치챈 듯이 후루미나미가 넌지시 물었다.

 

루미나미 나몬: 크레딧의 쓰임새가 도박 말고도 있을 거라 생각하는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유즈미 나데시코: 크레딧의 쓰임새? 아직은 노름이랑 이 자판기밖에 없지 않아?

 

무로 시라베: 너희들이 얼마나 많은 크레딧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겐 상당한 양의 크레딧이 지급되었어.

 

루미나미 나몬: 나는 엄청 많아.

 

유즈미 나데시코: 나도 꽤 많이 받은 것 같아

 

무로 시라베: 크레딧이 어째서 개개인마다 편차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박에만 쓸 수 있는 재화라기에는 너무 많이 줘.

 

40만 크레딧. 야가미가 하던 쇠구슬 도박이 100크레딧이었다.

 

간단하게 생각해도 4000회를 시도할 수 있다.

 

과도하게 많은 금액이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도박에 많이 쓰라고 많이 준 거 아닐까?

 

루미나미 나몬: 카지노가 설립되는 목적은 방문객에게서 이득을 취하기 위함이야. 재화를 나눠준 다음에 수급한다고 해서 모노로그 쪽에서 이득인 건 아니야. 애초에 돈을 공급해준 사람이 모노로그인걸! 의미가 없다 이 말씀.

 

무로 시라베: 의미가 없을뿐더러 구성원들 사이에 재화의 편차를 만들 필요도 없지. 당장 이 자판기를 몇 번 씩이나 돌린다면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물건들을 거저 살 수 있는 거야.

 

무로 시라베: 살인 게임에서 무조건적인 호의는 없어 분명 다른 목적이 있어. 아마 살인의 동기와도 관련이 있을 거야.

 

루미나미 나몬: 그건 그렇다손 치고. 한 번 돌려 보자!

후루미나미는 주머니에서 크레딧을 꺼냈다. 이미 한참 전에 다이얼로그에서 크레딧을 뽑아 가져온 것으로 보였다. 이럴 때에는 행동이 참 빠르기도 했다.

 

루미나미 나몬: 마유즈미. 너도 1000 크레딧 받아. 지금 크레딧 바꿔 오기는 번거롭잖아. 언니가 쏠게!

 

유즈미 나데시코: 와! 고마워!

 

후루미나미를 향한 의혹의 눈빛을 죽이려 애썼다. 흰 물건의 내용이 계속 떠올랐다.

 

자판기를 주시해.

 

흰 물건이 모노로그의 인지를 벗어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카텟 기관에선 흰 물건의 내용 안에 흰 물건의 힌트를 제공해. 서서히 다른  흰 물건들을 찾아가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판기 안에 흰 물건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하필이면 후루미나미가 이 정보에 접근하다니

 

내가 할 수 있는 추론이라면 분명 후루미나미도 해낼 수 있을 터. 이런 상황은 전혀 좋지 않았다. 자신이 조금만 일을 망쳐 놓아도 다른 이들의 생존과 흰 물건이 전부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을. 그녀가 참을 수 있을리 만무했다.

 

늦기 전에 무력화시켜야 하나?

 

지금 당장

 

유즈미 나데시코: 와! 이거 봐! 이게 뭐지?!

 

마유즈미가 투입구 안에서 작은 컵 같은 것을 꺼냈다.

 

루미나미 나몬: 푸딩 같은데. 참고로 그거 먹는 거야.

 

유즈미 나데시코: 질감이 두부 같아. 히무로. 이거 봐!

 

마유즈미가 컵 안에 담긴 두부 같은 것을 내게 내밀었다.

 

무로 시라베: 보고 있어.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후루미나미를 제압할 수 있더라도 마유즈미. 이바라. 카나리. 하기와라에게 그 광경을 들킬 수 밖에 없었다. 제압의 경위를 구구절절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야가미 또한 이 카지노에 있으니.

 

곧바로 움직였다간 자판기와 흰 물건의 관계성을 숨길 수도 없었다.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너무 많았다.

 

루미나미 나몬: 히무로? 무슨 생각 해. 내 생각?

 

무로 시라베: 아니. 나도 하나만 돌려 볼까 하는 생각을 했어.

 

나는 다이얼로그를 꺼냈다.

 

최소한의 시도를 통해 흰 물건을 먼저 입수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테니.

 

유즈미 나데시코: 좋아! 한 번 신문물을 체험해 보자!

 

 

 

 

 

 

 

캐롤 씨. 나이토. 23T. 모리. 그리고 내가 토키와를 따라 6층으로 향했다. 원래 계단이 없었던 5층에 6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새로 생겼다.

 

이토 유즈루: 이렇게 열릴 줄 알았으면 창문 뚫고 위로 올라가려 들지도 않았을 텐데… 망할.

 

리 레이코: 시도 자체는 타당했다. 살인이 벌어진 뒤에야 탑이 더욱 개방된다고 해서 사람이 죽기를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토 유즈루: 결과도 좋았으면 얼마나 좋겠냐. 아직도 그 높이에서 떨어진 거 생각하면 삭신이 쑤셔온다.

 

키와 아유키: 이 방에서 탈출의 실마리를 찾아내자. 그러면 되잖아.

 

토키와가 문을 열었다.

 

세로로 4개. 가로로 8개의 모니터가 벽에 설치되어 있었고. 그 밑에는 제어 패널 같은 것이 위치해 있었다.

 

나시: 방송실… 이라고 불러야 하나? 모니터실?

 

리 레이코: 이게 혹시

 

키와 아유키: 설마.

 

토키와와 모리가 모니터와 자판을 향해 달려갔다.

 

리 레이코: 뭘 눌러야 켜지는 거지?

 

키와 아유키: 나도 잘 모르겠어. 이런 설비를 보는 건 처음이라

 

이토 유즈루: 갑자기 왜 그래. 뭔가 심상치가 않냐?

 

키와 아유키: 이 모니터들이 어디에 쓰이느냐에 따라서 탑에서 벌어지는 살인을 완전히 막을 수가 있어.

 

롤 브라이트: 설마 탑을 감시하는 모니터들인가요?

 

나는 놀랐다. 이 모니터에 탑 속이 비친다면 이 안에 몇 명의 인원이 상주하는 것만으로도 살인을 막는 게 가능해질 터였다.

 

모니터실 안을 감시할 수 없다는 맹점이 있겠지만 그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테고

 

이토 유즈루: 아. 어떤 느낌인지 알겠다! 그래서 이거 어떻게 켜?

 

리 레이코: 난들 어떻게 알지. 그저 시도해 볼 뿐이다.

 

키와 아유키: 우리 중에 기계에 해박한 사람이 있다면 좋을 텐데.

 

나는 넌지시 23T에게 물었다.

 

나시: 23T. 너는 기계에 해박해?

 

23T5U130: 해온 일이 있으니 많이 알긴 하지만. 너만큼은 아니야.

 

나시: 난 지금 아무것도 못 떠올리고 있는데…?

 

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전용실에 기계가 있지 않으셨나요?

 

나시: 분명 그렇긴 하지만 제가 그렇다고 모든 기계를 다룰 수 있는 건 아닌걸요.

 

나는 모니터의 밑에 있는 제어 패널과 씨름을 하고 있는 모리와 토키와를 보았다.

 

모리는 불평을 늘어놓으며 버튼을 하나씩 눌러보고 있었다. 토키와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그거 누르면 안 되는데. 그걸 백 번 눌러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긴가민가하는 느낌을 받으며 나는 제어 패널로 서서히 다가갔다.

 

나시: 잠깐만… 다들 잠깐만 비켜 봐.

 

리 레이코: 이 기계를 조종할 수 있겠나?

 

나는 그때 아무런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내가 기계를 조종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패널을 보았다. 그리고 덮개 속에 숨겨진 쥐덫 같은 장치를 찾아냈다. 내 손이 저절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나시: 이게 스위치야. 밑으로 내리면… 켜질 거야.

 

나는 스위치를 밑으로 내렸고. 그 순간 모니터가 일제히 켜지며 제어 패널에서 위잉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버튼들에 빛이 들어오고 모니터는 영상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키와 아유키: 대단해! 조작법을 어떻게 안 거야? 스위치가 거기에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어!

 

나시: …그냥 느낌이 왔어. 전용실에 있던 기계들을 다룰 수 있다는 느낌이 왔던 것처럼.

 

리 레이코: 역시 네가 카텟 기관의 엔지니어였다는 인공지능의 말은 진실이었던 모양이군.

 

나시: 맞아. 진실이었어.

 

카텟 기관의 일원이라고 하기엔 기억 속의 내가 카텟 기관을 싫어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아무튼.

 

빛이 들어온 화면을 훑어보자 우리는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키와 아유키: 해변이잖아.

 

화면에는 웬 해변밖에 나오지 않았다. 32개의 모니터에 모래사장과 파도치는 바다만이 비쳤다. 영상이 드문드문 끊기며 화질도 좋지 않았기에. 32개의 화면이 각도만 다르게 한 같은 장소를 비치는 것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나시: 저기가 어디야? 탑에 저런 곳이 있어?

리 레이코: 적어도 우리가 본 적은 없는 장소군. 인공지능. 저곳은 어디지?

23T5U130: 나도 탑에 대해서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야. 잘 모르겠어.

 

23T의 음성이 흐려졌다.

 

23T5U130: 아마 탑에 새로 열린 공간이 아닐까… 싶은데.

 

이토 유즈루: 썅. 이젠 탑 안에 바다가 있다고? 바다는 존나 최악이야. 절대 가기 싫다.

 

키와 아유키: 탑 안의 것들이 대개 그렇지만 이 모니터실은 정말 이상해. 아무도 없는 해변을 감시하기 위해 왜 이렇게 많은 설비가 필요한 건지 모르겠어.

 

이토 유즈루: 장미 밭 밖으로 멀리 나갈 수 없다던가. 창문이 안 뚫리고 사람을 튕겨낸다던가. 별 이상한 일이 벌어지니까 이젠 놀랍지도 않다 야.

 

나시: 그렇긴 하지만

 

뭔가. 뭔가가 거슬렸다.

 

23T의 다이얼로그가 울렸다. 23T가 전화를 받았다.

 

23T5U130: 여보세요. 카나리? 무슨 용건으로

 

나리 케이토: 어디 있어! 빨리 와! 이 쓸모없는 자식아. 빨리 오라고!

바라 쿠리스: 큰일 났어. 큰일 났어. 쟤가 왜 여기에 있어?!

기와라 우시오: 아니 그렇게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니까? 그보다 진짜 위험하면 꼴값을 떨 게 아니라 조용히 기다려야

 

나리 케이토: 너야말로 조용히 해! 저 자식이랑 마주치고도 멀뚱히 도박이나 하고 있어? 저기 세 명은 자판기나 돌리고 있었고. 다 제정신이 아니야!

 

23T의 다이얼로그 너머에서 어마어마할 정도의 북적거림이 들려왔다.

 

나시: 카나리. 그게 무슨 뜻이야?

 

나리 케이토: 야가미 그 자식이 여기에 있단 말이야. 카지노에 있다고!

 

이토 유즈루: 뭐시라?!

 

23T5U130: 정말이야?

 

23T의 음성이 약간 커졌다.

 

나리 케이토: 정말이야! 내가 그 자식 휴게실로 들어가는 걸 똑똑히 봤다니까?! 빨리 와. 멍청아!

 

이토 유즈루: 좋아. 지금 당장 간다! 빨리 따라와!

 

나이토는 그대로 모니터실을 떠나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23T5U130: 나도 갈게.

 

키와 아유키: 야가미랑은 얘기를 해 봐야 해

 

리 레이코: 내통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력화시켜야 한다. 나도 간다.

 

23T와 토키와. 모리는 그대로 나이토의 뒤를. 잠깐만.

 

나시: 그렇게 다 가게?! 6층 조사는 해야지!

 

키와 아유키: 나머지 한 방은 부탁할게. 미안해!

 

리 레이코: 최선을 다하도록!

 

6층에 올라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나와 캐롤 씨만을 남기고 다른 모두는 계단을 향해 달려가 버렸다.

 

나시: 다들 왜 이렇게 제멋대로인 거야

 

롤 브라이트: 그래도 다들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시는 것이니까요. 의욕이 없으신 것보단 훨씬 나아요.

 

나시: 하기야 그렇긴 하네요.

 

나는 흘끗 그녀를 돌아보다 말고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그곳에 주목할만한 것은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했다. 캐롤 씨와 단 둘이 남겨지니 영 어색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까 캐롤 씨가 내 숙소에서 건넨 말 때문일까?

 

 

 

 

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저희. 이야기를 나눠 보아요.

 

그 말을 곱씹지도 않고 일단 '네' 라고 답하고 싶어지는 충동이 약간 두려웠다.

 

나시: 이야기

 

롤 브라이트: 저는. 절대 내담자 분들을 조종하지 않았어요.

 

나시: 저도 알아요.

 

롤 브라이트: 모르시잖아요.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으니까

 

나시: 캐롤 씨?

 

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는 저를 믿고 계신 거예요. 제 말이 아니라. 어쩌면 믿고 계시지 않더라도 적당히 맞춰주는 것일 수도 있겠죠. 분명 상냥하시지만… 지금 저는 그런 배려 말고 진실을

 

롤 브라이트: 죄송해요. 계속 제 고집에 휘말리게 만들어서… 하지만 부탁할게요. 제가 터치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말씀드릴 테니까. 그 뒤에 저를 믿어 주세요.

 

 

 

 

 

나는 그때 얼떨떨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캐롤 씨도 혼란하신 모양이었다. 영문 모를 탑에 갇힌 채 서로 죽고 죽이도록 강요받고는, 마침내 우리 중 한 명이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식사를 하며 다른 이들의 낯빛을 살펴 두었다. 대부분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1층과 6층을 조사하기 위해 인원을 꾸렸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했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마모를 막기 위해 처한 상황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나로 말하자면 지금 당장 방에 틀어박히고 싶었다.

 

캐롤 씨의 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단순히 인기척이라던가 눈총이 느껴진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녀가 잠시 날 바라본 뒤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모든 동작이 느껴졌다.

 

감각이 착각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분명… 잠이 덜 깨서 이상한 생각에 빠져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와 내가 한 사람인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서로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을 리가 없었다.

 

만약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당장 무슨 말을 걸어야 할지 입을 뻐끔거리고 그녀 쪽을 계속 흘깃거리는 모든 동작들을 그녀 또한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었다.

 

롤 브라이트: 앗? 저기!

 

나시: 네?!

 

캐롤 씨의 외침에 나는 화들짝 놀라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을 너무 빨리 돌려 작은 뚜둑 소리가 났다.

 

캐롤 씨는 모니터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모니터의 수는 많았기에 정확히 어떤 것을 가리키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롤 브라이트: 지금 카이다 씨가

 

나시: 카이다요?

 

롤 브라이트: 카이다 씨가 화면에 있지 않았나요?

 

나시: 카이다가 화면에요?

 

나는 모니터를 재빨리 훑어보았지만, 그곳 어디에도 카이다의 모습은 없었다. 캐롤 씨도 그녀의 모습을 찾지 못한 듯이. 나지막이 말하셨다.

 

롤 브라이트: 잘못 본 것 같네요.

 

캐롤 씨와 내 사이의 말문이 다시 닫히기 전 나는 재빨리 말했다.

 

나시: 그럼 저흰 모니터실 말고 다른 방을 조사하러 가요. 야가미를 쫓는 건 다른 사람들한테 맡겼으니까 저흰  토키와가 맡긴 일을 해야죠.

 

롤 브라이트: 네. 그래요.

 

모니터실 밖으로 나와 반대편 방으로 이동하는 사이. 나는 캐롤 씨와 히무로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처한 상황을 정리하려면 정리할수록 그것들이 어지럽혀지는 느낌을 받았다.

 

히무로. 카텟 기관. 시라유키 히메리. 노네임. 노바디. 카텟. 카텟 기관의 원년 멤버. 인공지능. 엔지니어. 23T5U130. 터치. 미도리카와. 마유즈미. 토키와. 야가미. 카이다. 모노로그. 흰 장갑. 전류. 독심술. 상담. 존댓말. 반말. 자유의지. 지배. 세뇌. 조종. 자유. 공포. 다시 독심술. 인식. 감각의 확대. 나약함. 따뜻함. 경애. 감시자. 살인자. 전화 박스. 날 잊지 마. 산산조각. 빛. 기계. 스패너. 팬치. 철판. 엔진. 냉각수. 부동액. 용접 기구. 크랭크. 축. 스위치. 레버. 엔진. 카텟의 뜻. 카. 다시 히무로. 캐롤 씨. 23T. 마유즈미. 토키와. 미도리카와. 야가미. 카이다. 모노로그. 전류. 상담. 존댓말. 반말. 조종. 자유의지. 따뜻함. 경애.

 

카텟. 카텟. 카텟

 

한 번 기억을 되새길수록 정리해놓은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의 반복이었다. 정보가 많을지 몰라도 그걸 연결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걸 알고 있음에도 나는 그 사이의 연결점을 찾으려 줄곧 기억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랬기에 캐롤 씨가 헉 하는 숨막히는 소리를 내었을 때도. 나는 내 앞에 무엇이 서 있는지 보지 못했다.

 

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물러서세요!

 

캐롤 씨가 내 어깨를 팔을 잡고 뒤로 당겼다. 하얀 면 장갑의 감촉이 맨 어깨에 닿았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몇 걸음을 뒤로 물러선 뒤에야 캐롤 씨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할 것이 많다고서니 이런 거대한 것을 보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가미 토가: 두 분 모두 안녕하십니까.

 

야가미는 전혀 안녕하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리 케이토: 정말이야! 내가 그 자식 휴게실로 들어가는 걸 똑똑히 봤다니까?! 빨리 와. 멍청아!

 

카나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야가미의 행방을 주시한 결과 그가 '휴게실' 로 향했음은 확인해 두었다.

 

 

 

가미 토가: 히무로 씨. 당신도 피곤해지신 것 같군요.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어떻습니까.

 

 

 

휴게실의 문을 열자마자 그 말을 듣고 닫아버리긴 했지만. 그에게 묻고 싶은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무로 시라베: 야가미는 무슨 생각으로 밀폐된 공간에 들어간 거지?

 

루미나미 나몬: 다 그렸다!

 

아프로 가발을 쓴 후루미나미가 스케치북을 우리에게 건넸다.

 

 

 

루미나미 나몬: 카나리는 지금 여기. 휴게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야.

 

무로 시라베: 휴게실 안에는 소파. 침대. 그리고 약간의 다과 용품이 놓여 있었어. 들어가는 문 말고도 반대편에 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잠시 안을 들여다봤을 때 야가미는 소파에 앉아 있었어.

 

유즈미 나데시코: 그럼 이제 야가미를 완전히 몰아세운 거잖아?

 

무로 시라베: 변수가 없다면 그렇겠지.

 

다만 내통자이기 때문에 어떠한 변수도 생길 수 있었다. 그렇기에 무난하게 그를 붙잡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토가 우당탕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토 유즈루: 어흑. 썅!

 

기와라 우시오: 하하하! 저 놈 좀 봐라! 마음이 급해서 계단에서 굴렀나 봐!

 

루미나미 나몬: 계단에서 굴렀다고? 신속히 응급처치를 해야겠어!

 

후루미나미가 가방에서 주황색 조끼를 꺼낼 즈음 나이토가 몸을 일으킨 채 달려왔다.

 

기와라 우시오: 뭐야 멀쩡하잖아. 어떻게 멀쩡 아니 잘못했어요!

 

이토 유즈루: 집어치워! 그놈이 어디로 들어갔다고?

 

후루미나미는 주황색 조끼를 가방에 집어넣고 아프로 가발을 꺼냈다.

 

루미나미 나몬: 자. 저기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참 쉽죠?

 

나리 케이토: 그래. 저기로 들어갔다고. 저기로!

 

후루미나미가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을 가리키자 카나리가 더욱 난동을 부렸다. 다른 이들도 나이토를 뒤따라 카지노에 도착했다.

 

리 레이코: 의욕만 앞서 봤자 되는 일은 없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 승부사!

 

이토 유즈루: 아 어쨌든 왔으면 됐잖아!

 

키와 아유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야. 가자. 23T!

 

23T5U130: 그래. 이게 휴게실이지? 돌입한다!

 

23T와 나이토가 문을 박차고 먼저 들어갔다. 그러나 우리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나이토의

 

이토 유즈루: 어?!

 

하는 외침뿐이었다. 나이토에 이어 23T도 말했다.

 

23T5U130: 안에 아무도 없는데?

 

나리 케이토: 뭐?! 너 고장 난 거 아니야? 분명 여기 안으로 들어갔는데

 

키와 아유키: 잠깐 기다려 봐!… 정말이야. 야가미는 없어.

 

휴게실 안을 둘러본 토키와가 말했다. 야가미는 휴게실에 있었으나 지금 그는 사라졌다. 이 사실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무로 시라베: 변수가 생겼어.

 

나는 후루미나미의 스케치북을 한 번 더 들여다보았다.

 

내 기억 속 휴게실 안의 전경과 후루미나미의 지도를 비교한 끝에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무로 시라베: 카지노에서 휴게실로 들어가는 문 말고도, 휴게실 안에는 문이 하나 더 있었어.

 

23T5U130: 맞아. 저기 안에 문이 하나 더 있어.

 

무로 시라베: 그런데 저 문은 어디로 이어지는 거지?

 

탑의 크기를 고려할 때 휴게실 밖에 방이 하나 더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저 방은 어디로 이어진 걸까.

 

저 방을 통해 야가미는 어디로 향한 거지?

 

 

 

 

 

 

가미 토가: 두 분 모두 안녕하십니까.

 

롤 브라이트: 야가미 씨

 

캐롤 씨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흰 장갑을 벗었다. 길고 흰 손가락은 대리석을 깎아 조각된 것처럼 보였다.

 

롤 브라이트: 다가오지 마세요. 경고했어요!

 

가미 토가: 경계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해봤자… 제가 말해선 설득력이 없지만요.

 

나시: 왜 거기서 나오는 거야?! 지하 1층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의문이 생겼다. 혹시 히무로가 탑의 바닥을 뚫었던 것처럼. 야가미도 탑을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는 건가?

 

야가미는 자신이 나온 방의 문을 닫고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롤 브라이트: 다가오지 말라고 했어요!

 

가미 토가: 당신들을 노리는 게 아닙니다. 추적을 피하려는 거지. 제 방해를 하지 않으신다면 여러분들에게 해코지는 하지 않을 겁니다. 휴게실의 비밀이 들키기 직전이니 그럴 시간도 없어요.

 

캐롤 씨는 야가미에게 물었다.

 

롤 브라이트: 야가미 씨. 당신과 모노로그 씨. 카이다 씨는 대체 뭘 꾸미고 계신 거죠? 말해 보세요.

 

가미 토가: 죄송하지만 오늘은 때가 아닙니다. 단지 크레딧의 과소비는 참아 두세요. 카지노는 크레딧을 불릴 수 있도록 모노로그 씨가 준비한 체계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건 크레딧입니다.

 

나시: 크레딧…?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게 뭔데?

롤 브라이트: 대답하고 가시라고 말했어요.

 

가미 토가: 제가 한 말을 기억하세요.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시고요.

 

느닷없이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기도 전에 야가미가 계단을 향해 달렸다.

 

롤 브라이트: 멈춰!

 

나시: 캐롤 씨. 잠깐만요!

 

캐롤 씨가 야가미의 뒤를 쫓아 달리려 하셨다. 안 돼.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야가미는 막강한 힘을 가진 모노로그의 내통자였다. 23T도 나이토도 칸나즈키도. 지금은 우리의 곁에 없었다.

 

그를 추적하려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몰랐다. 나는 캐롤 씨를 잡기 위해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팔을 잡으려던 손은 그녀의 팔을 잡지 못하고

 

대신 손을 잡았다.

 

흰 장갑이 벗겨진 맨 손을.

 

순간 나는 캐롤 씨의 손과 내 손이 가까워지는 것이 매우 느리게 보였다.

 

매우. 매우.

 

캐롤 씨의 손과 내 손이 맞닿았을 때 스파크가 튀는 것마저 보일 정도로. 느리게 보였다.

 

느려진 의식은 화끈한 고통을 느끼자마자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시: 아윽!

 

전류가 튀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랐다. 실수로 이뤄진 터치라지만 이전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처음 느껴보는 아픔이었다. 터치에서 아픔을 느낀 것도 처음이었지만 그런 식의 아픔을 느낀 것도 처음이었다.

 

뜨겁고. 따갑고. 괴로운. 몸을 타고 퍼지는 듯한 격통. 핏줄 사이사이로 화상을 입는 듯한 감각이 나를 핥고 지나갔다. 세포 하나하나가 그 흐름에 찔리며 비명을 지르고 찢어지는 듯했다.

 

떠나갔음에도 손과 몸에 남은 얼얼함은 내가 서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리가 풀렸다. 근육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고통에 잔뜩 놀라버린 근육은 그저 무너져 내렸다. 난 휘청이다 결국에는 몸의 중심을 잃었다.

 

캐롤 씨가 퍼뜩 나를 돌아보았다.그녀의 손이 나를 향해 가까워지자 내 동공이 다시금 커졌지만. 이번에는 맨몸이 아니라 옷을 잡으셨기에 터치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녀가 픽 쓰러지려는 나를 잡고 외쳤다.

 

롤 브라이트: 나… 나나시 씨?!

 

나시: 아아… 윽

 

롤 브라이트: 왜. 왜 이런 일이? 안 돼요. 이건 안 돼요. 왜. 왜

 

시간으로 따지면 2초도 채 지나지 않았다. 잠시 손을 잡았고. 손을 놓았다. 그게 전부였지만 찰나의 시간 동안 나는 고압 전류에 감전된 기분을 느꼈다.

 

이런 고통을 누군가가 겪은 바 있었는지 나는 알 것 같았다.

 

끄윽. 으으윽. 으으으윽!

 

그녀가 느꼈던 고통은 이런 것이었구나.

 

이 고통이 내게 누구보다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내가 터치를 원하고 있지 않음을.

 

 

 

 

 

후루미나미를 미리 어떻게든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을 했을 때의 히무로는 이런 느낌입니다

 

표정 변화는 없지만 미묘한 느낌이 있는 타입

 

자유행동 투표가 바로 들어오지 않아서 히무로의 자유행동과 나나시의 칸나즈키 자유행동은 다음 편에 나옵니다 아직 투표는 끝나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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