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가미 토가: 저희 나눌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모노로그: 나는 그런 것 없다만.
야가미 토가: 제가 이런 취급을 받기 위해 내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은 저를 배신했습니다.
모노로그: 걱정하지 마라. 내 지시를 따른다면 네가 목숨의 위협에 빠지는 일은 없을 테니.
야가미 토가: 제가 그것 때문에 화를 내는 것 같습니까? 저는 신용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모노로그: 유능하지만 복종하지 않는 칼. 무능하지만 복종하는 칼 중에 선택하라면 나는 무능한 쪽을 선호하는 편이다. 아무리 날이 무디더라도 칼은 언젠가 저마다의 쓸 곳이 있고, 내 명령을 따른다면 내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크게 유용할 수 있지.
모노로그: 그러나 아무리 날이 잘 드는 칼일지라도 나까지 찌르려고 든다면 도무지 쥐고 있기가 힘들지.
야가미 토가: 지금 저를 적으로 돌리셔봤자 좋은 일은 없을 텐데요.
모노로그: 너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야가미와 모노로그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모노로그: 머리를 식혀라. 앞마당에 한 번 가 보는 건 어떻지? 재미있는 것을 만들어 뒀던데.
야가미 토가: …누가 뭘 말입니까?
이바라 쿠리스: 끙… 끄응…
이바라는 그녀의 전용실에 있는 관을 밖으로 옮기고 있었다. 빈 관의 무게는 90kg 전후이다. 그녀가 쉽게 옮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관이 바닥에 끌리며 불쾌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하기와라는 이바라가 끌고 있는 관을 보며 어째서인지 첼로를 연상시켰다. 바닥에 문질러서 소리를 내는 첼로 같다고.
아니. 첼로보다 큰 첼로가 있었는데. 첼로보다 큰 바이올린. 그걸 뭐라고 부르지? 배운 적이 없으니 하기와라는 굳이 떠올리려 하지 않기로 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도와줄까?
대신 하기와라는 커다랗고 현 없는 첼로에 다가갔다.
이바라 쿠리스: 저리 가.
하기와라는 이바라의 눈빛을 보았다. 순간 그는 이바라가 다른 사람의 혼에 씐 것 같다고 느꼈다. 초점 없이 흐릿하고 애도를 담은 그 눈빛은. 장의사의 눈빛이었다. 하기와라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이토 유즈루: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뭐야. 너희 지금 뭐 하냐?
나이토가 관과 바닥의 소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바라 쿠리스: 관을 탑 밑으로 옮길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옮겨서 뭐 하게.
이바라 쿠리스: 아까 후루미나미가 미도리카와 숙소로 달려가길래 뭐 하나 싶어 따라가 봤더니… 시체가 사라져 있더라. 그냥 어디에도 없어. 우리가 재판을 하는 사이에 모노로그가 빼돌린 거겠지…
이바라 쿠리스: 시체가 없으니 장례는 못 치러주지만, 묫자리는 만들어주고 싶어.
나이토 유즈루: 관만 땅에 묻겠다는 거야?
모리 레이코: 나도 동참하지.
모리가 문을 벌컥 열고 그들에게 합류했다.
나이토 유즈루: 야. 갑자기 무슨 속셈이야?
모리 레이코: 장례 의식은 세간의 인식보다 더욱 중요하다. 장례를 치름으로써 고인을 원만히 떠나보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일을 셋이서 하는 것보다는 넷이서 빨리 끝내는 편이 낫다.
이바라 쿠리스: …그게 다야?
모리 레이코: 또한 지금 내가 자신의 방에 있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의 편안함 뿐이다. 그러나 이 장례가 탑에 미칠 영향보다는…
이바라 쿠리스: 됐어… 너는 그럴 줄 알았어. 애초에 기대도 안 했어.
모리 레이코: 땅을 팔 도구는 준비해 뒀나?
이바라 쿠리스: 전용실을 자세히 뒤져 봤더니 삽이 있었어. 관에 넣어뒀어.
모리 레이코: 좋군. 이것을 네 명의 어깨에 들쳐 메는 것으로 한다. 코미디언. 멀리서 보고만 있지 말고 와서 도와라.
하기와라 우시오: …그렇게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모리 레이코: 개인적 감정이 문제라면 지금은 대의를 위해 접어 두도록 해라. 나 또한 접어 두고 있으니.
나이토 유즈루: 네가 접을 때냐? 우리가 접어야 할 상황인데 뻔뻔하긴… 아무튼 넌 이 쪽 들어. 하나 둘 셋!
하기와라가 뻘쭘함을 느끼며 이바라의 눈길을 외면했다. 나이토의 구호에 맞춰 그들은 관을 들쳐멨다. 그러나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이거 무게 균형이 안 맞는데. 모리 키가 너무 작아.
모리 레이코: 닥쳐라.
하기와라 우시오: 개인적 감정은 접어 둔다며! 내가 틀린 말 했어?!
모리 레이코: 첩자에게 당한 여파가 아직 남아있을 뿐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앗…! 탈룰라 미쳤다!
나이토 유즈루: 야. 막 움직이지 마! 관 흔들린다! 떨어진다고. 이것들아!
이바라 쿠리스: 다들 적당히 해… 고인을 욕보이는 짓은 그만둬.
이바라의 진중한 목소리는 그들의 핀잔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그들 네 명은 아무 말 없이 관을 옮겼다. 무게중심이 맞지 않은 채로 계단을 내려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이토가 두 사람 몫을 해내어 그들은 관을 옮겼다.
그러다 탑의 1층에 도달했을 때. 하기와라가 느닷없이 몸을 천천히 흔들기 시작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뜬 뜨르든뜬♬
그는 팔을 좌우로 흔들며 몸을 주기적으로 떨었다.
모리 레이코: 코미디언. 느닷없이 이게 무슨 망발이지? 관이 흔들려 힘이 분산되고 있지 않은가.
하기와라 우시오: 너희 이거 몰라? 관짝 춤이라는 건데. 이렇게 관을 어깨에 얹고 뜬뜨르든뜬. 뜬 뜨르른 뜨르른♬
이바라 쿠리스: 작작 해. 하기와라.
그들 사이에 끼게 된 나이토만 눈을 질끈 감고 도망쳐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가 그 싸해지고 무거워진 분위기를 견딘 것은 그저 기사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신념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바닥에 관을 내려놓고, 관에 있는 네 개의 삽으로 땅을 팠다. 그들은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빠르게 끝났다.
땅을 6피트 판 뒤 그들은 관을 땅에 넣었다. 관의 위에 한 줌 흙을 뿌리며 이바라는 중얼거렸다.
이바라 쿠리스: 우리는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지. 네가 알려주지 않기도 했지만. 우리도 알고 싶지 않았던 거야. 너를.
이바라 쿠리스: 총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너를 두려워했던 거야. 한 번이라도 더 네 방 문을 두드렸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모리는 생각했다. 그런 일 없었을 거라고. 그녀가 마음을 열 상대는 협상가 밖에 없었으리라고.
나이토는 생각했다. 내가 부족한 탓에 많은 사단이 벌어졌다고.
하기와라는 생각했다. 어둡고 슬픈 것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이바라 쿠리스: 이제 와서는 전부 텅 빈 말일뿐이야. 죽은 너는 돌아오지 않아. 절대로…
이바라 쿠리스: …시체조차 찾아주지 못했어. 얼마나 쓸쓸할까. 너와 좋은 추억은 없었지만 너를 다시는 못 본다는 게 너무 슬퍼.
이바라는 조금 눈물을 흘렸다.
이바라 쿠리스: 네가 영영 사라져 버린다는 게. 슬퍼.
후루미나미 나몬: 흠흠… 이게 미도리카와의 죽음의 메아리란 말이지.
후루미나미 나몬은 미도리카와의 진짜 유서에 적혀 잇었던, 흰 물건의 내용을 되뇌었다.
사람을 죽이지 마. 지하로 진입할 방법을 찾아 내. 자판기를 주시해.
이걸 누구에게 알려줘야 하나…?
후루미나미는 이것을 누구에게 알려주든 간에. 분명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리라는 것을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이것 때문에 흑막에게서 해코지를 당할까? 그럴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나나 히무로에게 해코지를 하다가 흰 물건의 정보가 퍼지는 것보단 흑막이 상황을 더 지켜보리라고 후루미나미는 결론지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내용은 전부 머릿속에 넣었는데. 이건 어떻게 할까.
미도리카와의 유서. 그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후루미나미는 잠시 고민에 빠져 보았다. 그녀는 서서히 결정을 내렸다.
일단 이건 미도리카와의 마지막 유지가 담긴 물건이고 야가미에게 가야 했던 친구의 유언이니까. 이렇게 하는 게 낫겠지.
후루미나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도리카와의 유서에 불을 붙였다.
유서를 잡고 있는 손이 화상을 입기 직전 후루미나미는 유서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가공된 식물 섬유가 불에 타며 탄소 그을음으로 변해 사라지고 말았다. 몇 초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미처 타지 않은 잔해들이 바닥에 흩날렸다. 하지만 그 어느 것에도 글씨는 남아있지 않았다. 미도리카와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었던 말은 영영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것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흐후후…
복실복실한 강아지를 보는 듯이 흐뭇한 미소가 그녀의 입에 감돌았다.
사람 한 명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마지막 증거를 없애는 것은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짜릿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라는 한 사람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는 실감에. 후루미나미는 스스로를 끌어안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아아… 잔혹한 세상아. 텅 빈 세상아. 허무해. 너무나도 허무하구나!
그 잔혹한 세상에 후루미나미는 홀로 남겨진 기분을 느꼈다.
후루미나미 나몬: 어째서 이런 일이…? 너무해. 정말 너무해… 덧없는 삶이여.
후루미나미는 벅차오르는 눈물에 곰방대를 피웠다. 매캐한 연기를 들이마시니 또 다시 눈물이 나왔지만 후루미나미는 눈물이 흘러내리도록 두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거인의 손… 등장인물이 저항할 수 없는 각본 속 운명. 작위적 극 중 장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
후루미나미 나몬: 이야기 속에서 아무리 발버둥 친다고 해도 결국 깔려버릴 뿐이야. 다들 저마다의 거인의 손을 향하고 있을 뿐.
후루미나미 나몬: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은 아름다워…
나만의 비극을 만든다. 내 서사를 완성할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너희들도…
후루미나미는 히무로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얼굴이 완전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23T에게 부축을 받은 채 내 숙소로 돌아왔다. 내 숙소의 문 앞에 다다랐을 시점에선 내가 23T에게 매달린 것에 가까워질 정도로. 나는 몸을 가누지 못했다.
나나시: 아파… 머리가… 아파…
야가미의 죽음을 본 이래.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내 머리가 서서히 자라나 내 몸 전체를 좀먹는 것 같았다.
23T5U130: 힘들지? 많이 아플 거야. 앞으로도 넌 그 고통과 싸워야 할 거야.
통증을 참으며 내 이마에는 식은땀이 배었다. 그 땀이 눈에 들어가 쓰라렸다. 눈물이 살짝 나왔다. 나는 허덕이며 23T에게 물었다.
나나시: 왜…? 어째서야…?
23T5U130: 많은 기억을 되찾는 것은 많은 고통이 따를 테니까. 너는 고난을 하나 넘어설 때마다 더 많은 걸 기억해내겠지만. 고통도 너와 함께할 거야.
23T는 내 주머니에서 문 열쇠를 꺼내 숙소를 열어 주었다. 나는 숙소 안으로 쓰러졌다.
23T5U130: 너는 많은 걸 알고 있어. 나나시… 결코 순탄하진 않겠지만, 그것을 이겨낸다면 너는 모든 것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게 될 거야.
23T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23T의 말에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이 빌어먹을 두통이 내 뇌 안쪽을 좀먹고 태우고 헤집어놓고 있었기 때문에. 내 입에서는 작은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나시: 고마워. 23T… 네가 아니었으면 모두들… 지금보다 훨씬 위험에 처했을 거야… 정말 고마워…
23T는 문을 닫으려다 말고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23T5U130: 그렇게 말해줘서 기뻐.
23T가 문을 닫았다. 몸을 반쯤 일으켜 잠금장치를 거니 더 이상은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내 몸의 무게에 몸을 맡기고 바닥에 머리를 대었다.
나나시: 아파… 아파… 머리… 내 머리가…
의문이 끊이질 않았다. 캐롤 씨의 정체는 뭐야. 터치는 정확히 뭐지. 난 줄곧 캐롤 씨의 하인이었던 건가.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생각들이 그저 인형극에 불과했을까.
23T의 정체는 뭐야. 카텟 기관은 어디야. 히무로와 난 언제 만났지…
아. 토 할 것 같아.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살고 싶지만 이렇게 살고 싶진 않아.
나나시: 카텟… 카텟 기관… 카텟 기관에 대해서…
나나시: 카텟 기관… 카텟 기관의 뜻은…
"카로 하나 된 자들. 카텟. 그래서 카텟 기관이지."
누군가의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의 주인은 어느 건물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저 곳이 카텟 기관임을 느꼈다. 그런 내 뒤를 누군가가 따라오고 있었으나 기억의 주인은 날 따라오는 이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이런 기관에 붙기에는 너무 거창한 이름이야. 결국 최초의 카텟 기관은 부서져 버렸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돌아왔으니 결국 카텟은 유지된 거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발자국 소리의 뒤에 부드러운 기계 관절의 소리가 뒤따랐다. 위잉. 철컥. 위잉. 철컥.
"저거… 기계에 옷을 입혀놓은 거야?"
"기계 같지가 않아. 사람 같아."
"사람이 아니야. 사람처럼 꾸며놓은 기계지… 대체 무슨 취미가 저래?"
어디에선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리번거리지 마. 우리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 같잖아."
내 목소리다. 자신감이 차 있는 듯한 목소리이긴 했지만. 분명 내 목소리였다.
이건 내 기억이야.
"그렇지만…"
"우리는 아무런 잘못도 안 했어. 잘못은 이 기관이랑 그 여자가 했지. 그러니까 앞만 보고 가자. 우리 모습을 본 이 작자들 표정이 어떤지는 확인해야지 않겠어?"
기억 속의 나는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나는 그의… 나의 목소리에서 어딘가 위화감을 느꼈다.
자신감 말고도 내 말투에 배어있는 그것은. 기분 나쁜 어둠이었다.
적갈색 머리의 남성과 실험실 가운을 입은 하얀색 머리의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한눈에 그를 알아봤다. 히무로다. 역시 카텟 기관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거야…
"우리 왔어."
"…노네임?"
하얀색 머리의 여성이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의 이름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기억 속의 나는 그녀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나를 노네임이라고 불렀다. 저게 내 이름 일리는 없을 터. 아마 기억을 잃기 전 나의 가명이었을 테지. 지금의 가명도 이름이 없다는 뜻인데. 예전의 가명도 이름이 없다는 뜻이라니…
그녀의 표정을 보며 기억 속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구면인가. 메리? 반갑습니다. 저는 히무로 시라베라고 합니다. 노네임 씨. 그리고…"
"구면이지. 네가 그 유명한 히무로 시라베구나. 감시자. 초면이지만 만나서 반갑다. 내 뒤의 이 친구는 이름이 없으니 그냥 인공지능이라고 부르고."
인공지능?
"그러지요. 반갑습니다. 인공지능 씨."
"말도 안 돼… 네가 여기에 왜?"
메리라 불린 여성이 기억 속 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히무로가 메리라는 사람의 이름을 부른 것이 기억났다. 이 사람이 히무로의 영상에 나온 사람이구나…
"엔지니어가 필요하다며 인원 보충을 요청했잖아. 그래서 온 거야. 나와 계약을 체결한 건 여기 말고 다른 지부장이긴 했지만… 그 사람을 탓하진 마. 카텟 기관 원년 멤버가 아니고서야 우리 셋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 리가 없으니까."
"저기. 우리 그냥…"
내 뒤의 누군가가 말했다.
"그냥은 없어. 지금의 카텟 기관은 우리가 무슨 일을 겪고 돌아왔는지 알아야만 해. 시라유키 히메리. 이 얼굴이 기억나기는 하냐?"
"말도 안 돼… 네 뒤의 저건… 노바디잖아. 노네임. 노바디. 너희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노바디에게 무슨 짓을…"
노네임은 나를 지칭하는 말이었고. 노바디는 정황상 내 뒤의 누군가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것은 이해하고 있었지만 메리라는 사람의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노바디에게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죽은 사람을 되살려냈다고 할 수 있지.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걸 보아하니 너도 양심이 없진 않나 봐? 뭐 자기가 죽게 만든 사람을 잊는 게 이상한 경우겠지만."
"이건 무슨 모욕인가요? 아무리 구면이라지만 도를 넘으시는 것 같군요."
"미안하지만 댁 곁의 위인께서 우리에게 저지른 건 훨씬 심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냐. 시라유키 히메리. 이 살인자야."
"그만!"
내 등 뒤의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아 시선을 돌렸다.
"그만 좀 해. 그렇게 싸움을 걸 필요는 없잖아."
기억 속 나는 그녀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나나시: …23T잖아.
"당사자가 이렇게 말하니까 할 말이 없네. 아무튼 우리도 카텟 기관에 합류해 프로젝트를 돕는다. 대신 너희는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그게 계약 내용이야."
"무슨 정보…?"
"우리가 카텟 기관에 있었을 때의 모든 것들."
아아아…
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나시: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현실로 돌아오자 지금까지 겪었던 것보다 훨씬 심한 통증이 나를 덮쳤다. 나는 바닥에 쓰러져 몸을 굴렸다.
불가능해! 이런 고통을 앞으로도 계속 견딘다는 건 불가능해! 절대 하고 싶지 않아! 차라리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이런 고통은…
그러는 와중 광인과도 같은 중얼거림이 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나나시: 카테헷… 카텟… 나는 카텟 기관이어써…! 노네임! 노바디! 메리. 카텟. 카테헷…!
나는 어딘가에서 내려오는 동아줄이라도 잡으려는 것처럼 온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몸부림을 치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동아줄은 내려오지 않았다. 이 탑에 구원은 없었다.
오직 죽음과 고통만이 이 탑에서 내게 주어진 전부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내 몸에 감옥처럼 갇힌 채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에 이를 악무는 것뿐이었다.
너무나도 무섭고 외로웠다.
나나시: 23T는 나와… 만난 적이… 인공지능은 나의…
토키와의 말에 따르면 나는 그 말을 중얼거린 끝에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느낀 것은 바닥에 감도는 한기. 그리고 공포였다.
야가미 토가는 미도리카와의 무덤을 내려다보았다.
아직은 묘비마저 없는 초라한 묫자리. 부자연스럽게 쌓인 흙만이 그 밑에 텅 빈 관이 있음을 얘기해 주고 있었다.
정말 무덤을 만들어 뒀네. 어차피 바다뱀의 시체는 여기 없을 테니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냥 무거운 나무상자를 굳이 땅에 묻은 것뿐이야.
바다뱀의 무덤이라기엔 무척 초라했다.
야가미 토가: …….
야가미는 미도리카와가 생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그런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 되니. 내가 살아왔던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어 졌어.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기를 바라게 되었어.
야가미 토가: 그 점에 있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야가미는 장미 꽃밭에서 장미를 한 송이 꺾어 미도리카와의 묫자리 앞에 놓았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잠시 침묵을 지키던 야가미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우며 뒤를 돌아보았다.
야가미 토가: …날 엿보고 있는 당신. 지금 당장 모습을 보이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당장 뒤쫓겠습니다. 도망칠 자신이 있다면 도망가 보세요.
탑 뒤에 숨어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그림자가 단박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기와라 우시오: 짜잔! 나였지롱!
야가미 토가: 아… 당신이군요. 당신은 괜찮습니다. 돌아가도 좋습니다.
하기와라 우시오: 이 자식이 나를 개무시하네?! 이거 진짜 너무한다!
하기와라가 야가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팔짱을 낀 야가미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오케이. 그런데 가까이에서 보니까 네 입장에선 나를 무시해도 상관은 없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인정! 이렇게 커다란데 똑똑한 자식이 모노로그의 내통자라니. 그놈은 계 탔네. 계 탔어! 우리 편이었으면 든든했을 텐데 말이야.
야가미 토가: 좀 꺼지세요. 애초에 흑막의 내통자에게 이 정도로 접근해도 괜찮습니까? 다른 이가 당신을 흑막의 내통자로 오해할지도 모릅니다.
하기와라 우시오: 네가 내 걱정할 때냐. 너는 이 새끼야. 내일부터 투명인간 취급이야. 당장 모리가 네 문짝 부숴놓고 너 포박하려고 벼르고 있을 걸. 그건 힘내시고.
하기와라 우시오: 그리고 뭐… 다른 놈들도 내가 내통자 노릇 하기엔 너무 멍청한 거 알고 있을 테니까 걱정 안 해. 깍두기 취급이 이렇게 편하다니까. 그러니 이 정도 시간은 충분하지.
하기와라는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나가며 장미를 한 송이 꺾었다. 그리고 미도리카와의 묫자리 위에 놓았다.
야가미 토가: …의외군요.
하기와라 우시오: 의외군요 받아치기.
하기와라는 야가미의 말에 딱딱하게 대답한 뒤 잠시 묵념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이러려고 나왔는데 네가 무덤가에 있는 걸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침이라도 뱉는 게 아닌가 조마조마하더라. 다행히 안 뱉더라고.
야가미 토가: 고인을 모욕할 정도의 악취미는 없습니다. 저는 당신이 침을 뱉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하기와라 우시오: 나한텐 그런 악취미가 있어 보여? 다른 놈들 앞이면 이거 가지고 농담이라도 한 마디 읊었겠지만. 보는 사람 없으면 나도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
묫자리를 조금 더 들여다보던 하기와라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기와라 우시오: 기분 거지 같네… 이런 느낌 받기 싫은데. 슬픈 건 안 좋아. 웃는 게 좋지. 적어도 난 그렇게 믿고 있다.
야가미 토가: 하기와라 씨.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기와라 우시오: 나도 드릴 말씀 있어. 너 그 장미 말인데. 왜…
야가미가 하기와라의 멱살을 잡고 가뿐히 그의 몸을 들어 올렸다. 하기와라는 당황한 채 공중에서 발을 마구 버둥거렸다.
하기와라 우시오: 우왓. 썅. 뭐야?! 왜 급발진을 해. 나도 때와 장소를 가리는데!
야가미 토가: 농담할 시간 없으니 용건만 간단하게 얘기하겠습니다. 제 말 잘 들으세요.
하기와라는 얌전히 저항을 멈추었다. 야가미는 최대한 험악한 얼굴을 만든 뒤 하기와라를 노려보았다.
야가미 토가: 오늘 일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마세요. 잊어버리는 겁니다… 내 말을 알아들었습니까? 잊으십시오. 영원히.
하기와라 우시오: …왜 그렇게 화가 났냐? 모노로그랑 무슨 일 있었나 봐?
야가미는 하기와라의 멱살을 놓은 뒤 탑으로 돌아갔다. 망연자실해진 하기와라는 멀어지는 야가미의 뒤통수에 다급히 뻐큐를 날렸다.
하기와라 우시오: 하하. 심상치 않네…
하기와라도 초라한 미도리카와의 무덤을 조금 더 내려다본 뒤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난 뒤 탑의 뒤에서 한 사람이 더 모습을 드러냈다.
캐롤 브라이트: 미도리카와 씨.
캐롤의 다리가 무너졌다.
캐롤 브라이트: 숙소를 찾았을 때 시체는 없었어. 빈 무덤…
캐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캐롤 브라이트: 흐윽… 흑…으흑…
그녀는 미도리카와의 묘를 보며 두려움을 느꼈다. 슬픔 직후에 닥쳐온 두려움이었다.
마음이 아팠다.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슬펐다. 어째서 그렇게 마음이 아플까. 캐롤은 그것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친구나 가족을 잃는 상실감과는 달랐다. 그녀가 미도리카와에게 느낀 감정은 마치 자신의 또 다른 몸을 잃었을 때의 감정과 같았다. 팔다리를 잃었을 때의 감정과도.
캐롤 브라이트: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그분들은 내 일부가 아니야. 난 한 사람이야…
캐롤은 자신이 확장되는 듯한 느낌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의 팔을 끌어안고 체온을 느꼈음에도 떨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캐롤 브라이트: 괴물이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그러니 제발 그렇게 보지 마…
재판에서 그녀가 마주했던 터치파의 혼란과 공포에. 그 눈동자에 깃든 경계와 배신감과 의혹에 그녀는 비수로 찔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상담사 일을 하며 그녀는 터치를 몇 번 사용해 보았다. 단지 상담만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그러나 정신이 연결된 그 어느 때에도 내담자의 삶에 이 정도로 몰입하게 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탑에 온 뒤로 이루어진 터치. 네 명과의 터치는 탑에 오기 이전의 터치와 확연히 달랐다. 서로를 보다 잘 이해하게 되었다. 서로의 마음을 잘 알게 되었다. 서로에게 몰입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캐롤 브라이트: 내담자 분들이 나를 따르게 되었어…
나나시는 재판장에서 공포에 떤 바 있었다. 정말 터치가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느냐고. 그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녀 자신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탑에 온 이래 그녀에게서 터치를 받은 모든 사람은 그녀에게 존댓말을 한다. 그녀가 미도리카와의 죽음에 슬퍼하면 다들 슬퍼하고, 혼란스러워하면 함께 혼란스러워한다.
마치 그녀의 일부인 것처럼.
모리 레이코: 집단은 구성원들의 동의 없이 이루어질 수 없지. 하지만 지도자가 구성원들의 동의를 받아낼 수 있다면? 동의하지 않는 구성원도 묵살시킬 수 있을 만큼의 지지를 얻는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캐롤 브라이트: 난 도대체 뭐지…? 터치는 대체…
탑에 오기 전 자신의 능력을 규명해보려 하지 않았던 캐롤이었기에. 그 의문은 뼈아프게 다가왔다. 대체 터치라는 능력의 한계는 어디일까. 어째서 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터치가 더욱 강력하게 적용되는 것일까.
캐롤 브라이트: 오해를 풀어야 해. 반드시… 나는 나야. 다른 사람이 아니야. 한 사람이야…
캐롤은 자신이 내담자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조차 그들을 자신의 일부로 여기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마유즈미 씨. 토키와 씨와 이야기를 해 봐야 해…
꿈을 꾸었다. 행운아가 나오는 꿈이었다.
"안녕. 동생."
행운아는 바닥에 앉아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보도록 해. 내가 자네의 미래를 점쳐줄 거거든."
카드는 크기가 커다랬고 뒷면에 복잡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타로 카드야. 세 장을 뽑겠어."
행운아는 카드를 섞었다. 그는 첫 번째로 뽑은 카드를 내게 보여줬다.
"매달린 남자가 나왔어."
매달린 남자 카드를 바닥에 놓은 뒤. 행운아는 한 장을 더 뽑았다.
"두 번째도 매달린 남자가 나왔어."
두 번째 매달린 남자 카드를 바닥에 놓은 뒤. 행운아는 한 장을 더 뽑았다.
"세 번째도 매달린 남자가 나왔어."
세 번째 매달린 남자 카드를 바닥에 놓은 뒤. 행운아는 웃었다.
"이게 뭘 의미하는 것 같나. 총잡이? 이 카드는 너와, 네 카텟이 될지도 모르는 자들의 운명이야."
"과연 세 장 중에서 몇 장이나 뽑을 수 있을까…"
히무로 시라베: …….
수면을 취했음에도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잡생각이 많은 탓에 꿈자리가 사나웠다. 행운아를 꿈에서까지 보다니. 스스로가 흔들리고 있음을 자각했다.
매달린 남자…
타로 카드에서는 자기희생과 통과의례를 상징하는 카드다.
더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
미도리카와 아쿠토: …으윽.
미도리카와 아쿠토는 몸을 일으켰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하아… 하아… 아… 여기가 어디지…?
미도리카와는 짙은 색의 바닥을 보았다. 지그재그 무늬가 그려져 있는 벽도 보았다. 곳곳에는 빨간색의 천 재질 의자가 도열해 있었다. 의자들은 계단 위에 세워진 듯이 저마다 다른 높이의 도열을 가지고 있었고, 가장 낮은 도열의 앞에는 커다란 검은색 화면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관찰을 통해 그녀는 확신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영화관이잖아…
아무도 없는 영화관에 그녀는 홀로 남겨졌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탑은… 토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명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명확한 마지막의 기억은 몸을 굽히고 눈을 뜬 채 토가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었다. 그 뒤의 일은 흐릿했다. 숨이 막혔던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을 되짚던 그녀는 문득 냉정한 직감에 사로잡혔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나… 죽은 건가 봐.
마지막으로 있었던 일이 좀처럼 기억나지 않고, 머리가 아파오고. 그녀가 지금까지 있었던 탑은 두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 그녀는 그렇게 판단했다. 아니… 기억이라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심장의 통증.
미도리카와 아쿠토: 으윽…!
그것만큼은 스멀거리는 안개처럼 옅게 그녀의 심장을 찔러왔다.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통증이 재발하는 기분에 미도리카와는 숨을 몰아쉬었다.
누구에게 죽은 거야… 역시 카이다 쿠로하겠지. 토가에게 말할 게 수도 없이 많았는데 죽어버리다니…
미도리카와는 지긋지긋한 마스크를 벗어던진 뒤. 그것을 손 안에서 구겼다.
처음부터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더라면… 복수에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토가에게 내 정체를 밝혔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까.
얼굴을 뜯어내었으나 그녀의 맨얼굴을 볼 수 있는 자는 이제 어디에도 없게 되었다.
결국 똑같아. 예전과 똑같아. 객기를 부리다가 파멸할 뿐이야.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결국. 또 토가를 혼자 남겨 버렸어. 이제 다시는 못 만나겠지. 복수도 끝내지 못하고 다시 그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아무 의미도 없이 죽어버린 거야. 토가를 남기고…
미도리카와는 영화관 의자에 몸을 기대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토가…
머리를 헝클어뜨린 뒤 미도리카와는 초라하게 몸을 일으켰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그래도 토가라면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캐롤 씨도 있어. 다른 녀석들도 멍청하진 않으니 어떻게든 해낼 거야…
한 계단씩 밑으로 내려가며 미도리카와는 자신이 저승에 온 것이 아니라, 단순히 탑에서 다른 곳으로 이중 납치는 당한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저승이라기엔 영… 실감이 안 나.
유황불도 악마도 고통도 없는 영화관. 영락없는 영화관. 언젠가 스스로가 지옥에 떨어질 거라 믿었던 미도리카와는 약간의 허무함마저 느꼈다.
미도리카와는 초록색 사람이 문 밖으로 나가려 하고 있는 그림을 보았다. 출구를 나타내는 표지판이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저승에도 출구가 있는 건가?
이 문을 열면 진짜 지옥이 시작되는 걸까. 미도리카와는 긴장과 호기심을 느끼며 출구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곳에도 유황불과 악마는 없었다.
미도리카와가 상상한 어느 무엇도 문 안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분명 몇 미터 정도는 평범한 영화관의 복도였다. 그대로 걷는다면 에스컬레이터로 도달할 수 있는, 영화 포스터 따위가 붙어 있고 팝콘과 음료수 통을 수거하는 차가 있을 법한 복도였다.
그러나 그 복도 끝의 조금 큰 방에는 영화관에 있을법하지 않은 것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의아함에 몇 걸음을 빠르게 내디딘 뒤, 미지를 향한 두려움에 몇 걸음을 느리게 내디뎠고. 마지막엔 걸음을 멈추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이게… 뭐지…?
미도리카와의 눈앞에 놓인 것은 세 개의 통로였다.
통로라고 부르기 어려워 보였지만, 그렇다고 달리 무엇으로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빛이 덩어리 진 채 금속 테두리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액체화된 흰색의 금속이 요동치며 파동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유리처럼 단면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동시에 잠시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깊었다.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크기이기에 통로를 연상시켰을 뿐. 그 세 개의 통로가 어디로 통하는지는 흐릿해서 보이지도 않았다. 미도리카와는 그것이 무슨 예술 작품이거나 착시 현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도리카와는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미도리카와는 바람을 빨아들이는 세 개의 통로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녀의 비취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흩날렸다. 관찰력을 되찾은 그녀의 눈에 마침내 표지판이 보였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첫 번째 피해자 특전. 일회용. 선택하시오'…?
방에 여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인간의 것이라기보다 단순히 기계 속에 내장된 것처럼. 인위적이고 음질이 좋지 않았다.
"포털 조정 완료."
다크 타워가 영화화된 적이 있다는 걸 아시나요? 국내에선 다크 타워: 희망의 탑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답니다
Man in black을 검은 옷을 입은 남자, Gunslinger를 총잡이로 번역한 소설과 달리 영화판 자막과 더빙에선 둘 다 맨 인 블랙과 건슬링어로 음차 해버린 덕분에 영 느낌이 안 산답니다
또 한 편에 다크 타워 스토리와 세계관을 너무 많이 담으려고 한 나머지 이드리스 엘바(헤임달)와 매튜 맥커니히(인터스텔라 아빠)가 출현했음에도 쪽박을 치고 말았죠 별로 재미가 없어요
총 쏘는 판타지 영화인데 볼 만한 장면이 장전 장면밖에 없어… 덕분에 저에겐 와! 다크 타워를 영화로 볼 수 있다! 하는 마음과 아니 다크 타워를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가 있지? 하는 마음이 공존하는 애증의 영화입니다
아무튼 이번 미도리카와의 저승 영화관 탐험의 포털에는 그 영화판의 한 장면이 쓰였답니다 딱히 여성의 목소리라고 해서 떡밥이라던가 그런 게 아니랍니다! 그냥 팬심으로 가득 찬 오마주입니다!
이번 편은 본격적으로 2챕터에 돌입하기 전 분량이나 흐름 때문에 넣지 못했던 1챕터의 마지막 일들을 우겨넣었습니다 시점이 오락가락하지만 1챕터 후일담으로 생각해 주세요 챕터 2 - 0이 챕터 1 - 후일담보단 느낌 있지 않나요? 죄송합니다
이제 2챕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제 구상만큼 재미있게 이야기가 나온다면 기대하셔도 좋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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