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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1

더 단크 타워 챕터 1 - 14

by 도타싫어! 2020. 7. 14.

스스로가 겸손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오만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내가 개조되었고 불완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저 사실로 다가왔다.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사실. 내가 태어나고 살고 언젠가 죽으리라는 것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듯이. 그저 사실일 뿐이었다.

 

또한 내 신체의 일부로 여기기도 했다. 항상 삐쳐 오르는 두 줄기의 머리카락과 같다고. 내 일부가 도려내진 자리를 차지했으니 엄밀히 말해 실로 내 일부였고, 다른 것들을 적출당했기에 내가 가진 것은 그것 뿐이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의 사격 솜씨. 그리고 몰인정성. 그것을 적절히 사용해 위기를 넘겨 왔다. 오직 그것에만 의존할 수 있었기에.

 

그렇기에 내 모든 것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만났을 때. 나는 무력감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게 되었다.

 

"총알이 한 발도 안 맞아."

"저게 말이 돼? 저게 사람이야?"
"사람이 아니겠지. 저건 이미 완성된 우리야."

"완성된 우리가 아니라. 완성된 너겠지."

실험이 끝나자마자 처분당한 그 아이의 쐐기가 무슨 뜻이었는지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것과 처음 마주친 순간을 떠올리자 나는 무슨 수를 써도 이들을 이길 순 없다고. 나의 기능적 한계는 여기까지라고. 대항할 수 없다고. 나는 마음속으로 깊게 좌절했다.

 

난 고개를 약간 내저어 과거를 떨쳐냈다. 지금은 트라우마에 굴복할 때가 아니었다.

 

청각에 주의를 기울이자 마유즈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즈미 나데시코: 맞아. 많이 위험했어… 히무로 네가 이렇게 흔들리는 건 처음 봐.

 

루미나미 나몬: 사실 두 번째지. 다이얼로그의 영상을 보고 난 직후 히무로는 잠시 엄청난 표정을 지었거든.

 

무로 시라베: 내 추태는 잊어 줄래? 그보다. 다시는 이렇게 무모한 일 하지 말자.

 

난 내가 낼 수 있는 모든 진심을 다해 그렇게 말했다.

 

루미나미 나몬: 그래. 내 생각이 좀 짧았던 것 같기도 해. 모두에게 언질을 주는 편이 좋았을까?

 

유즈미 나데시코: 다른 사람들이 전부 미도리카와와 적대하는 것보단 우리 셋만 끝내는 편이 나았겠지만….

 

무로 시라베: 일을 크게 벌이는 편이 더 안 좋았을 거야. 더 대규모로 진행했다면 미도리카와가 어떻게 행동했을지 알 수 없어.

 

무로 시라베: 정말 위험했지만.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야. 운이 좋았어.

 

"이래서 내가 '행운아' 라는 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유즈미 나데시코: 응… 후아. 진짜 무서웠어… 이제 자러 가고 싶어.

 

루미나미 나몬: 그래서. 어떻게 나가면 자연스럽게 나갔다고 소문이 날까? 셋이서 동시에 나갈까? 아니면 누굴 먼저 보내고 뒤따를까? 뭘 해야 의심을 덜 살 것 같아?

 

무로 시라베: 이미 의심은 살 대로 샀어. 네가 이상한 말을 하며 모두의 이목을 끌었잖아.

 

유즈미 나데시코: 그냥 빨리 나가자. 오히려 어색하게 행동하면 더 이상하게 보일 거야.

 

마유즈미의 말에 따라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더 단크 타워

챕터 1: < 죽여 마땅한 사람 둘 >

"과정은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가미 토가: 오히려 그렇기에, 저희는 미도리카와 씨에게 마음을 써선 안 됩니다.

 

이토 유즈루: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가미 토가: 협상을 진행하다 얻은 교훈 같은 겁니다. 협상은 매체에 등장하는 것만큼  역동적인 게 아닙니다. 짜릿한 역전의 순간도 없고요.

 

기와라 우시오: 진짜?! 썅. 환상이 반갈죽 당하네!

 

가미 토가: 들어보면 다들 저들만의 사연이 있습니다. 임금을 지불받지 못한 노동자와 경영난에 시달리는 회사. 더 나아가면 분유 값을 마련하지 못하는 부모와 파산할 경우 배우자와 이혼할 처지에 놓인 사장이 있습니다.

 

가미 토가: 그 모든 일에 공감해주다간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선을 그어야 합니다. 그것이 분명 모두에게 좋은 일입니다.

 

바라 쿠리스: 네 말도 이해가 가긴 하는데… 우린 아직 미도리카와의 사정이 뭔지도 모르잖아. 일단 들어 보고 선을 긋든지 말든지 하자.

 

가미 토가: 저도 미도리카와 씨를 돕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지만 돕고 싶은 마음이 강할수록 그것이 엇나갈 가능성도 커집니다.

 

리 레이코: 넌 확신을 가진 채 말하고 있다. 그 근거는 무엇이지?

 

가미 토가: 제 경험이죠. 사람은 실패에서 배우는 법입니다.

 

기와라 우시오: 뭐야. 맨손으로 쇠파이프 구부리는 똑대가 실패를 해?

 

가미 토가: 교훈을 얻기 전이었기에 실패했죠. 당시에는 이 정도로 몸집을 기르지도 않았고요.

 

가미 토가: 사연에 공감하고 몰입하지 마라. 이것을 배우기 못했을 때의 저는 사연에 빨려 들어갔습니다. 무모하다시피 몸을 내던졌죠. 자기 자신에게 취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미 토가: 그렇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협상가의 본분에서 벗어난 저는 개인적으로 그 사람을 도와주기 시작했죠.

 

가미 토가: 그리고 그 대가를 비싸게 치러야 했습니다.

 

키와 아유키: 야가미. 그렇다면 그건….

 

가미 토가: 이 단안경 말씀이십니까? 네. 안구의 형태는 남아 있지만 이쪽 눈은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다는군요. 그래서 착용했습니다.

 

기와라 우시오: 와. 오리진 스토리가 아주 기막힌데? 후루미나미가 들었으면 아주 좋아 죽었을 텐데 얘는 마유즈미 전용실에서 뭘 하는 거래?

 

가미 토가: 그건 별로 알고 싶지 않습니다. 밀회를 즐기든 종교를 만들든 취미생활에 몰두하든. 지금 저희의 일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저분들이 알아서 하실 일이죠.

 

가미 토가: 아무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게 다입니다. 지침선 없는 좋은 의도는 언제나 엇나간다는 거요.

 

루미나미 나몬: 다들 안녕.

 

우리는 마유즈미의 전용실에서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어두운 분위기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와라 우시오: 와! 바로 나오네! 호랑이가 제 말을 하면 호구라더니.

 

유즈미 나데시코: 저런 속담도 있어?

 

가미 토가: 없습니다. 하기와라 씨가 헷갈리신 겁니다.

 

바라 쿠리스: 근데 너희 셋이서 진짜 뭐 했어? 엄청 궁금하네.

 

무로 시라베: 마유즈미에게서 서예에 대해 배웠지.

 

루미나미 나몬: 벼루가 생각보다 무겁더라고. 글씨를 쓰는 손놀림에도 심오한 철학이 있었고… 어려웠어. 어려웠어.

 

유즈미 나데시코: 그래도 후루미나미 너 정도면 빠르게 배우는 편이야.

 

앞의 두 사람이 거짓말을 하자 마유즈미도 장단에 맞춰준 것 같았다.

 

바라 쿠리스: 아니 썅. 셋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며 중요한 티 팍팍 냈으면서 서예?

 

루미나미 나몬: 그건 그냥 너희들 당황하라고 일부러 그랬어.

 

가미 토가: 하아… 다 배우셨다면 숙소로 돌아가 주세요. 저흰 이 곳에서 미도리카와 씨를 기다려야 하니까요.

 

루미나미 나몬: 응. 우리가 있으면 방해만 되겠지. 다들 힘내.

 

걱정한 것에 비해 매우 쉽게 의심에서 벗어났다. 의심하고 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에 가깝겠지만.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후루미나미가 평소에도 기행을 저지르는 것이 도움이 된 셈이다.

 

유즈미 나데시코: 이제 자러 가자. 으으으으응… 피곤해.

 

마유즈미가 기지개를 켜며 괴로운 목소리를 내었다. 나도 동감이었다. 

 

무로 시라베: 오늘은 그럴 만했지. 다들 잘 자. 더 일 벌이지 말고 몸을 사리자.

 

루미나미 나몬: 그래도 수확은 있었어. 그렇지?

 

무로 시라베: 목소리 낮춰. 후루미나미. 자러 가.

 

유즈미 나데시코: 둘 다 잘 자! 내일 다시 보자!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우린 각자의 숙소로 돌아왔다. 나는 세안을 마친 뒤 침대에 쓰러졌다.

 

카텟 기관의 숙소보다 월등한 시설이었기에 나는 너무나도 쉽게 수면에 빠졌다. 하루가 지났다. 우리는 다시금 죽은 자 없이 하루를 보내는 데에 성공했다.

 

언제까지 이럴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나는 그것에 안도감을 느끼고 싶었다.

 

 

 

 

리 레이코: 이름 없는 남자. 일어나야 한다.

 

똑. 똑. 똑.

 

리 레이코: 오후에 잠이 들어 다음 날 오전에 눈을 뜨다니. 이 정도면 충분한 휴식이다. 일어나야 한다.

 

똑. 똑. 똑. 똑. 똑. 똑.

 

리 레이코: 네가 잠에 빠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려주기 위해 왔다.

 

리 레이코: 상담가는 총잡이에게 강제로 터치를 사용할 것이다. 네가 잠든 사이 그렇게 정해졌다.

 

나시: …뭐?

 

문을 열었다. 모리가 그 앞에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이 팔짱을 끼고 날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리 레이코: 일어나 있었는데 어째서 대답하지 않았지?

 

나시: 문을 두드리니 깨긴 했지만 네 부름엔 나가기 싫었어. 아침 6시에 굳이 날 찾아온다니 수상한 느낌밖에 안 들었거든.

 

리 레이코: 고작 그런 이유에서인가? 개인적인 감정에 치우쳐선 안 된다. 공리를 위해선 개인의 선호, 편견, 중히 여기는 가치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리 레이코: 너와 달리 상담가는 그것을 이해했다. 그것뿐이다.

 

나시: 아까부터 무슨 소리야 캐롤 씨가 갑자기 왜?

 

리 레이코: 갑자기가 아니다. 서서히 다. 첩자가 흉기 없는 구성원들 즉 너를 포함한 4명을 습격한 뒤 그녀를 통제할 방법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곧 모리가 그 논의의 내용을 간결하게 말해 주었다. 23T는 카이다를 제압할 순 있지만, 23T 없는 탑은 미도리카와에게 취약해진다. 그러니 미도리카와를 전용실에 가둬 죽이자는 주장이 나왔다고 그녀는 말했다.

 

나시: 대체 어떤 사람이 그런 주장을

 

그렇게 말하자마자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시: 너구나… 모리.

 

리 레이코: 잘 아는구나.

 

나시: 그럼 너 말고 달리 누가 그런 생각을 하겠어. 야가미도 냉정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자는 얘기는 안 해.

 

리 레이코: 네 말대로다.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무엇을 해야 할지 제시하지 않았다.

 

리 레이코: 내가 사색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행동하지 않게 만드냐는 것이었다. 무엇이 진실로부터 우리의 눈을 가리는가?

 

리 레이코: 냉정하거나 부도덕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려는 기만인가, 공리의 증진을 막는 도덕심인가,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될 거라 믿는 게으름인가?

 

나시: 이성이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을 그렇게 쉽게 죽여선 안 된다는 이성적인 생각 말이야.

 

나시: 그보다. 캐롤 씨는 터치를 하셨어?

 

리 레이코: 아니. 총잡이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에 터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늦은 새벽이 되어도 나오지 않으니 다들 의아함을 느꼈다.

 

리 레이코: 총잡이가 창문으로 빠져나간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코미디언에 의해 제기되었다. 코미디언과 장의사. 광대 둘이 총잡이의 전용실 문에 귀를 기대었다. 그리고 서예가의 전용실 문에서 그랬던 것처럼. 총잡이가 문을 걷어찼고 광대 둘은 달아났다.

 

리 레이코: 총잡이가 안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장본인이 나올 생각이 없고 우리가 전용실 앞에서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이 들킨 이상 순조로운 제압은 불가능했다.

 

리 레이코: 그렇기에 핵심 인원을 남겨두고 다른 이들은 수면을 취하러 갔다. 새벽이 늦어도 총잡이가 나오지 않자 핵심 인원도 수면을 취하러 갔고. 나는 방금 기상했다. 그리고 널 깨우러 왔다.

 

나시: 터치를 아직 안 하셨다면 다행이네… 그 방법은 안 돼. 터치는 그런 식으로 쓰여선 안 돼.

 

리 레이코: 어째서 계속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지? 터치는 공리를 증진시킬 도구로 쓰일 수 있다.

 

나시: 공리. 공리. 그놈의 공리. 넌 공리를 위해서라면 영혼도 팔 것 같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못 해. 말은 쉽지. 옆에서 따박따박 공리를 위하라고 훈계만 하면 되니까.

 

나시: 그렇지만 당사자 입장에선 그게 아니라고. 공리? 좋다 이거야. 그런데 그걸 추구한답시고 다른 사람들을 그냥 짓밟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야.

 

리 레이코: 공리와 개인을 선택해야 한다면 누구나 공리를 선택해야 한다.

 

나시: 틀렸어. 10명의 가족을 살리느냐. 내 가족을 살리느냐. 이런 선택을 강요받는다면 자기 가족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많을 걸.

 

리 레이코: 네 말도 일리가 있다. 범인(凡人)들이 그런 선택을 강요당한다면 누구나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택하겠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나시: 그럼 넌 초인이라는 거야?

 

리 레이코: 설마. 그 정도로 자기애와 오만에 차 있진 않다. 난 범인 중의 범인이다. 다만 공리밖에 가진 것이 없는 범인이다.

 

나시: 앗….

 

난 모리가 이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리 레이코: 내 영상에는 어릴 적 나를 잠시 돌봐준 빈민가의 어르신들이 나왔다. 자주 그분들을 찾아가곤 했지. 그분들도 나를 아꼈고, 그러나 이제 그곳은 초토화되었다. 판잣집이 다 부서졌고 내가 아는 이들의 시체가 바닥에 뒹굴었다.

 

리 레이코: 책과 살인 게임을 조종하는 자는 이것이 내 살인의 동기가 되리라고 생각했겠지. 내가 소중한 것을 위해 공리를 저버리길 바랐을 거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리 레이코: 그러지 못했다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지금의 내겐 공리 이외에 헌신을 바칠만한 것이 없다.

 

나시: 친구는…? 아. 없겠지… 미안해.

 

리 레이코: 네 말이 맞지만, 왜인지 모욕을 당한 듯한 기분은 그저 기분 탓인가?

 

나시: 가족은

 

리 레이코: 있다. 그러나 가족이 나를, 내가 가족을 소중히 여겼다면 영상에 어르신들이 나오지도 않았을 거다.

 

친구도 가족다운 가족도 없는 삶

 

나시: 그래서 공리에 그렇게 집착하는 거라고?

 

리 레이코: 공리를 추구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에 가깝지만. 결국 누구에게나 살아갈 이유가 필요하다. 목적 없이 사는 삶은 가축의 삶이다. 그것 없이 사람은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없다. 발전할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리 레이코: 그러니 추구해야 할 숙원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가 텅 비어버리지 않고 실존하도록.

 

숙원. 삶의 목적. 고등학생이 입에 담기에는 너무 무겁고 어색한 단어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혼자 있으면 제가 텅 비었다는 느낌을 받아요. 누가 껍데기만 남기고 전부 가져갔는데 남은 게 저인 거죠.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나는 좌절하지 않았는가. 텅 빈 나를 채우기 위해 나의 과거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는가.

 

나시: 너에게 있어선 공리가 그 숙원이라는 거야?

 

리 레이코: 그것 말고 다른 것이 없다. 너도 그렇지 않나? 이름 없는 남자. 너는 과거의 기억을 제거당했다. 그렇기에 네게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리 레이코: 그렇기에. 내가 말했듯 넌 이 탑에서 가장 자유로운 존재다. 잃을 게 없는 자가 제일 무섭다고들 하지.

 

나시: 내가 가장 자유롭다니… 난 전혀 그렇지 않아. 영상 하나만 보고도 주저앉았는걸.

 

리 레이코: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협상가는 혼란에 빠졌다. 프로파일러는 순간 무척이나 동요했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사라졌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리 레이코: 그러니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계속 추구할 뿐이다. 공리를 증진시키는 것.

 

모리는 내 이해의 범주에 들어왔다가 나가기를 반복했다. 어르신들의 죽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니라, 슬프긴 하지만 남은 것이 공리뿐이라니… 사람이 이렇게 관념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것에 나는 약간 놀라움마저 느꼈다. 그녀가 철학자이기 때문일까?

 

리 레이코: 나는 공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있었으나 잃어버렸다. 너는 지금 아무것도 없다. 있었으나 잃어버렸다. 그러니 공리를 위해 헌신하라는 뜻이다.

 

나시: 싫어.

 

리 레이코: 네겐 소중한 것이 없다. 네게 친구가 있나? 가족이 있나? 너는 공리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공리에 헌신하라. 넌 투사가 될 수 있다.

 

그래. 나는 텅 비었지…

 

나시: 그래. 나도… 가끔 내가 텅 비었다고 느껴. 아무것도 없다고.

 

나시: 왜냐하면 떠오르는 게 없으니까. 난 내 과거를 몰라. 카텟 기관의 일원이란 것만 알았을 뿐이야. 영상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며 주저앉는 놈이지.

 

나시: 그렇지만 나는 기억을 되찾을 수 있잖아. 만일 되찾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충분히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

 

그렇지만 나는 가득 찰 수 있다.

 

나시: 그게 너랑 내가 다른 점이야. 넌 공리 이외에 아무것도 없지만 난 당장 비어 있을 뿐이라는 거.

 

리 레이코: 네 안에 채워 넣을 내용물이 공리보다 값질 거라고 생각하나?

 

나시: 착각하지 마. 난 마냥 이기적으로 행동할 생각은 없으니까.

 

나시: 보다 많은 사람이 행복한 일은 나도 좋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네 방식대로는 하고 싶지 않아. 네가 어떻게 생각할진 몰라도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리 레이코: 상담가가 강제적인 터치 대신에 대화로서의 터치를 주장한 것처럼 말인가?

 

캐롤 씨는 그런 선택을 하셨구나. 캐롤 씨 다운 방법이다. 터치는 대화로 쓰여야 하니까. 악용되기에 그 힘은 너무 위험하니까. 무엇보다 미도리카와도 캐롤 씨 중 어느 쪽도 강제적인 터치를 원하지 않을 테니까.

 

나시: 나한텐 아무것도 없다는 이유로 공리를 선택하는 건 그냥 포기하는 거 아니야?

 

나시: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을 테니까. 그저 그런 이유로 공리에 몸을 내던진다고 해서 내가 공리의 투사가 되진 않아. 오히려 난 공리의 노예가 되겠지. 네 표현대로라면 가축이 될 거고.

 

리 레이코: 맞는 말이다. 당사자에게 의지가 없다면 신념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나시: 그럼 날 가만히 내버려 둬. 난 나 스스로 실존할 테니까.

 

리 레이코: 좋다. 적어도 당장 공리를 숙원으로 삼으라고는 강요하지 않겠다.

 

나는 순간 내가 모리의 말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나시: 진심이야? 정말 안 건드릴 거야?

 

리 레이코: 물론 난 모든 이가 공리에 헌신하길 바라고 있다. 다만 네게 있는 자유인의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을 뿐이다.

 

리 레이코: 강요를 통한, 압박을 통한 신념은 매우 연약하다. 반발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공리를 원한다는 내 권유가 오히려 공리를 훼손시킨다면 주장을 조금 굽힐 때가 온 것이지.

 

너무 깔끔하게 인정해버리니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약간의 머쓱함과 혼란감을 느끼며 내 얼굴을 긁적였다.

 

나시: 음… 친구가 없단 얘기를 듣고 든 생각인데. 계속 그렇게 혼자 다니지 말고 친구라도 좀 사귀어 봐. 이 탑에는 미도리카와랑 카이다를 제외하고도 사람이 13명이나 있잖아.

 

리 레이코: 공리에 부합하는 사상을 가진 자가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지진 않는다.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었다면 이 탑에 오기 전 이미 찾아냈을 것이다.

 

나시: 친구의 조건이 공리에 부합하는 사상이라니. 그런 식이니까 네가 그렇게

 

이토 유즈루: 우왁! 이런 씨바아아아아알!

 

'밖' 에서 나이토의 울부짖음이 들렸고, 곧바로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방금 떨어진 것이 나이토라는 것을 깨닫자 내 몸이 얼어붙었다.

 

 

 

 

 

 

 

 

루미나미 나몬: 어때! 나이토!

 

이토 유즈루: 이제 몇 초 지났다. 이것아!

 

무로 시라베: 통화 연결되어 있잖아. 굳이 소리치지 말고 그냥 말해.

 

바로 어제 밧줄을 통해 창문을 넘나들 수 있음을 확인한 후루미나미는 아침 일찍부터 나이토와 나를 불러냈다. 창문과 밧줄을 통해 계단이 끊겨 있는 5층을 넘어 6층으로 갈 수 있는지 실험해보기 위함이었다.

 

나이토와 나에게만 실험을 제의한 것은 아니었다. 몇 명에게도 제의를 해 봤으나 대부분이 무슨 일을 꾸미냐며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나머지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고 그녀는 말했다.

 

루미나미 나몬: 진짜 너무하지 않냐. 내가 뭘 했다고.

 

무로 시라베: 다들 너한테 얽히면 귀찮아진다는 걸 알게 되었나 봐.

 

이토 유즈루: 아니 썅. 그걸 면전에 대고 말하네?!

 

루미나미 나몬: 많이 친해져서 이 정도는 농담으로 넘길 수 있어.

 

무로 시라베: 농담이 아니야. 많이 친해진 것도 아니고.

 

이토 유즈루: 어느 쪽이야. 이 자식들….

 

무로 시라베: 그보다 후루미나미. 대체 어디서 이 정도의 밧줄과 갈고리를 조달한 거야?

 

루미나미 나몬: 내 전용실. 거기엔 흉기 빼고 다 있어.

 

무로 시라베: 하긴. 스프링 달린 신발이 있는데 뭐든 없겠어.

 

그러나 6층의 창문을 보고 우리는 가설을 수정해야 했다. 전용실과 숙소가 있기에 창살이 달려 있던 2층, 3층과는 달리 6층은 4층과 5층처럼 작은 창문 2개만이 있는 구조였다. 즉 창살이 없었다. 갈고리를 걸어 장력을 발생시킬 만한 구조물이 없다는 뜻이었다.

 

본래는 그 시점에서 다른 방도를 찾아봐야 했다. 그러나 나이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토 유즈루: 까짓 거 한 번 해 보자. 벽에 붙어서라도 6층 창문으로 올라가 보자고.

 

루미나미 나몬: 네가 그럴 의지가 있다면 내 전력을 다해서 지원해 주지.

 

나는 추진력과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진 사람이 추진력과 뛰어난 응용력을 가진 사람과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게 되었다.

 

나이토, 후루미나미, 그리고 나는 막힌 배수로를 뚫을 때 사용하는 고무 컵 도구를 챙겼다. 창고에 구비되어 있었다.

 

루미나미 나몬: 이제 뚫어뻥의 머리 부분만 떼어내서 강력 접착제로 장갑이랑 붙이는 거야.

 

진공을 통한 흡착력을 이용해 5층에서 6층을 단번에 오른다. 그것이 계획이었다. 후루미나미는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고무 컵 장갑을 두 개 만든 뒤 그것을 나이토에게 건넸다.

 

이토 유즈루: 와. 존나 빨리 만드네?

 

루미나미 나몬: 초고교급 공예가의 솜씨를 얕보지 말라고. 이 정도는 뚝딱이지.

 

후루미나미는 앞치마를 쓰고 태연하게 말했다. 그것을 벽에 몇 번 흡착시켜 충분한 흡착력을 확인한 나이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토 유즈루: 이거 될 것 같아. 그보다 유리는 어떻게 깨지?

 

루미나미 나몬: 나와라. 가제트 유리칼!

 

후루미나미가 어제 사용했던 유리칼을 주머니에서 꺼내더니 나이토에게 건넸다.

 

이토 유즈루: 아. 이거 그거네! 동그라미 만들고 구멍 내는 거!

 

루미나미 나몬: 역시 알고 있네. 이건 기본 상식이지.

 

무로 시라베: 그럼 안전장치를 만들어 보자.

 

안전장치라고 부릴 만한 것은 아니었고 만든다고 할 만한 작업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나와 후루미나미는 나이토의 몸에 길게 밧줄을 묶었다. 그 뒤 밧줄의 양 끝에 갈고리를 달아 5층의 창틀에 걸었다.

 

무로 시라베: 창살처럼 확실하게 걸릴 만한 물건은 아니야. 그냥 갈고리를 창틀에 걸쳐 놓은 것에 가까워. 우산의 손잡이를 계단 난간에 거는 것처럼. 위로 당기면 쉽게 빠지지.

 

무로 시라베: 그러니 네가 너무 높게 올라가면 갈고리가 창틀에서 빠져버릴 거야. 이 장치는 네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만 막을 수 있어. 밧줄의 길이는 충분히 잡았지만 7층까지 올라가면 갈고리가 빠져버릴 거야.

 

이토 유즈루: 그 정도면 충분해. 이제 힘 좀 써 보자!

 

루미나미 나몬: 행운을 비네. 친구여.

 

그리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후루미나미는 조바심을 이기지 못했다.

 

이토 유즈루: 대충 요령은 알겠네… 좀만 기다려 봐.

 

루미나미 나몬: Deshi, Deshi, Basara, Basara.

 

무로 시라베: 그게 무슨 뜻이야?

 

루미나미 나몬: '올라가라'.

 

힘을 쓰는 소리와 흡착음이 몇 번 들리더니 곧 나이토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혀 지치지 않은 듯한 목소리였다.

 

이토 유즈루: 됐어! 여기서 한 팔을 이렇게….

 

루미나미 나몬: 나머지 양다리로도 하중을 분산시켜야 돼. 알지?

 

이토 유즈루: 계속 그러면서 올라왔어. 안이라도 좀 둘러볼게. 음….

 

무로 시라베: 뭐가 보여?

 

이토 유즈루: 아무것도 안 보여. 존나 이상하네? 원래 창문 유리는 안에서도 밖에서도 서로 보이는 재질일 텐데.

 

루미나미 나몬: 흐릿하게나마 보이지 않아?

 

이토 유즈루: 아니.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안 보여. 그냥 시꺼매. 안에 불을 꺼 뒀나?

 

무로 시라베: 이미 아침이 되었는데 아무것도 안 보일 정도로 깜깜하다고?

 

이토 유즈루: 묘하네. 일단 구멍 뚫고 잠금 푼 다음 들여다볼게.

 

스으윽 하는 소리가 났다. 내가 유리를 자를 때와 똑같은 소리였다. 성공적인 절단. 그걸 의미했을 터였다. 그러나 내가 들은 것은 나이토의 감탄이 아니었다.

 

이토 유즈루: 뭐야. 이 유리?

 

루미나미 나몬: 왜?

 

이토 유즈루: 꿈쩍도 안 해. 흠집도 안 생겨.

 

무로 시라베: 제대로 자른 게 맞아?

 

이토 유즈루: 제대로 잘랐는데… 어. 이거 보게?

 

스윽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지만 진전은 없는 것 같았다. 전용실의 유리와 6층의 유리는 다른 재질인 것인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지만. 소리는 똑같은데

 

무로 시라베: 우선 내려와. 나중에 그 현상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자. 안전 장비도 제대로 갖추고.

 

이토 유즈루: 아니야. 오늘 이거랑 담판을 짓는다. 사나이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야지. 이게 진정한 기사가 할 법한 일이야.

 

무로 시라베: 어떻게 하게? 창문을 뚫을 수 없는 이상….

 

쾅. 커다란 충격음이 다이얼로그를 통해서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나이토가 뭘 하고 있는지 눈치챘다.

 

무로 시라베: 멈춰! 격렬하게 움직이면 흡착력이 떨어질 거야.

 

이토 유즈루: 아니. 모노로그가 이 유리에 수작을 부려 놨다면 난 그냥 때려 부숴 버리련다. 간다!

 

쾅 쾅 쾅. 창문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는 맨손으로 둘무더기에서 사람을 꺼낼 수 있는 완력의 소유자였다. 정상적인 유리라면 이미 부서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충격음이 이어질수록 나는 유리에 무슨 작용이 있는 것인지 불안해졌다.

 

루미나미 나몬: 얘 완전 소년만화 주인공이네. 가라! 그대로 뚫어버려!

 

무로 시라베: 부추기지 마. 저 안전장치도 임시에 불과해.

 

이토 유즈루: 아오. 왜 이렇게 안 부서져?! 좀 깨져라. 이 새끼야!

 

기물 파손은 금지라는 규칙도 있는데. 나이토는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꽝. 정말 큰 충격음이 마지막으로 들리고 나이토가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멈췄구나. 나는 안도심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개성이 넘치는 이 탑에서 나이토는 정상인의 범주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혈질적인 면모를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이게 초고교급인가.

 

이토 유즈루: 아니 이거 진짜 안 되는 것 같은… 뭐야 이거.

 

후루미나미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텅' 소리가 울려퍼졌다. 난 본능적으로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갈고리가 풀렸다. 그것을 붙잡으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창문을 통해 본 나이토의 모습은 위도, 아래도 아닌 뒤로 날아간 듯한 모습이었다. 창문 안에 있는 무언가가 그를 떠밀기라도 한 듯이.

 

어째서 뒤로…? 잘못 보았다고 하기에 그의 위치는 창문이 있던 곳에서 꽤 멀어져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토 유즈루: 우왁! 이런 씨바아아아아알!

 

땅으로 떨어지는 나이토의 목소리에는 공포가 전혀 서려있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 섞여 있는 감정은 격정이나 분통에 가깝게 들렸다.

 

쿵. 잔혹한 소리가 울렸다. 나이토가 떨어졌다. 6층 높이에서. 갈고리 로프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무로 시라베: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빨리 응급처치를 하러 가자.

 

루미나미 나몬: 넌 내려가. 난 양호실에서 구급상자 챙겨서 갈게. 초고교급 응급처치사로서

 

무로 시라베: 그런 놀이 할 시간 없어. 우리 둘이서 가야 해.

 

나는 그 뒤 내 귀를 의심하게 되었다. 환청이 들렸나? 과거가 날 지배했나? 잠시 그런 착각마저 했다. 누군가가 내뱉는 목소리. 괴로움보다는 짜증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토 유즈루: 아니 창문이…! 창문이 날 때렸어! 창문이 날 때렸다니까! 개 같네 진짜!!

 

무로 시라베: …뭐지? 멀쩡하네.

 

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이가 된 기분을 느꼈다. 어느새 내 옆에서 나이토를 바라본 후루미나미도 잠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루미나미 나몬: 뭐야. 뭐지. 뭐임? 이걸 어떻게 살았어?

 

무로 시라베: 초고교급 응급처치사는 어디 갔지?

 

 

 

 

 

 

 

 

더 빨리 써야 하는데 자꾸 뜸 들이다가 시간을 보내네요

 

너무 관념 중시적으로 텍스트가 돌아가는 것 같아서 일단 사건 진행시키고 보자~ 하고 재빨리 넘겼음

 

그리고 원래 13화에선 카텟 기관에 합류하기 전 카텟 기관과 대치하는 상황이 나왔는데 수정했음

 

다음 편에는 후루미나미와의 자유행동이 진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