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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1

더 단크 타워 챕터 1 - 10

by 도타싫어! 2020. 6. 13.

나즈키 시노부: 출동 준비 완료!

 

가미 토가: 다들 물은 충분히 챙기셨나요?

 

키와 아유키: 응. 이번 수색은 거리 왜곡에 대한 탐사도 겸하니까. 충분히 챙겼어.

 

롤 브라이트: 세 분 모두 몸조심하세요. 위험하다면 바로 돌아오셔야 해요.

 

나즈키 시노부: 나랑 야가미 있으면 위험한 거 하나도 없어!

 

가미 토가: 나이토 씨도 오셨다면 더욱 든든했겠지만, 밤을 새신 분께 카이다 씨의 수색도 부탁하는 것은 무리겠죠.

 

나리 케이토: 얘도 깨 있는데 그 꼴마초 놈은 왜 잠이나 자고 있냐?

 

나시: 나이토는 어제 열심히 돌아다녔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 모리는 매사 피곤하게 사는 것 같고.

 

나리 케이토: 하긴. 사사건건 공리 같은 헛소리 하면서 시간 낭비하면 그렇게 될 법도 하지.

 

바라 쿠리스: 너 그거 모리가 들었으면 난리 났을걸?

 

나리 케이토: 오라고 해. 난 신경 안 써. 계속 무시하면 제 풀에 지쳐서 떨어져 나가겠지.

 

루미나미 나몬: 그 말. 자신 있나?

 

나리 케이토: 히이익?!

 

후루미나미가 카나리의 등 뒤에서 모리의 목소리를 내자. 그가 화들짝 놀라 후다닥 도망쳤다.

 

도망치면서 등 뒤를 흘끗 돌아본 그는 능청스럽게 모리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후루미나미를 봤다. 그리고 발을 멈췄다. 그녀는 무척 신이 난 듯이. 모리가 사용하지 않는 과장스러운 제스처까지 사용하며 카나리를 약 올렸다.

 

루미나미 나몬: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해선 안 된다. 시계공. 너는 공리의 증진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구나.

 

나리 케이토: ...야. 진짜 좆같이 구네?

 

바라 쿠리스: 아!! 아하하하하하핰!!

 

나리 케이토: 웃지 마! 웃지 말라고 했어!

 

나시: 그러지 말고 조금만 진정해 봐. 카나리.

 

루미나미 나몬: 아. 너무 재밌다.

 

나리 케이토: 이 개자식들 때문에 하루에 시계를 몇 번이나 재조정하는 거야... 썅.

 

롤 브라이트: 후루미나미 씨. 카나리 씨 놀리지 마세요. 카나리 씨는 나쁜 말씀 하지 마시고요.

 

나시: 말씀하시는 투가 묘하게 어린애 대하는 것 같아요...

 

카나리가 내 말을 못 들은 체하며 신경질적으로 시계침을 돌렸다. 그러나 시계침을 재조정하려 하면 할수록 그의 분노는 갱신되거나 심화되는 것 같았다. 시계의 초침이 멈추지 않고 평소의 몇 배 속도로 빙글빙글 돌아다니자 카나리는 심히 짜증을 냈다.

 

바라 쿠리스: 자기 화를 못 이길 거면 왜 그 시계를 가지고 다니는 거야? 손목시계만 가지고 다녀! 거의 롤렉스잖아.

 

나리 케이토: 닥치고 있어 봐.

 

롤 브라이트: 카나리 씨. 입 조심이요.

 

그는 그렇게 자신의 화가 멈추고, 시곗바늘도 원래의 속도로 돌아갈 때까지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난 그것이 분노를 받아들이는 카나리만의 방법 같다고 생각했다. 심장을 자신의 손에 쥐고, 박동을 인식하며 그것이 꺼질 때까지 조절하는 것.

 

나리 케이토: 휴... 한결 낫네.

 

가미 토가: 다들 긴장감이 없으시군요.

 

키와 아유키: 어쩌면 좋은 작용일지도 몰라. 다들 두려워하고 있진 않으니까. 위축되어 있진 않아.

 

가미 토가: 긴장은 스트레스기도 하지만, 위기감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이 마냥 좋은 작용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야가미의 말을 듣고 나는 어딘가 찔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미 토가: 지체하지 말고 이제 가시죠. 칸나즈키 씨. 토키와 씨.

 

나즈키 시노부: 우린 달려간다. 우린 승리한다!

 

키와 아유키: 우리가 없는 동안 미도리카와 감시를 잠시 부탁할게. 모두들.

 

바라 쿠리스: 예썰. 카이다 찾아서 돌아와!

 

나즈키 시노부: 미안. 솔직히 우린 절대 카이다 못 찾을 거야!

 

가미 토가: 말이 씨가 됩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렇게 세 명이 점점 멀어졌다. 나와 카나리, 후루미나미, 이바라, 캐롤 씨는 다시금 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어딜 탐사할까. 쓰러질 정도로 졸린 건 아니지만 피곤하긴 한데. 일단 잠부터 청할까...

 

행동의 갈피를 좀처럼 잡기가 어려웠다. 위기감. 야가미가 언급했던 그 단어가 내 귓가에 맴돌았다. 위기감. 난 위험하기에 이 곳에서 나가야 하지만 위험하기에 섣불리 이 곳을 조사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그래선 안 된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적어도 내 안에서 날 좀먹는 무력감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난 그런 생각을 하며 이바라. 캐롤. 후루미나미. 카나리와 함께 4층으로 올라왔다.

 

그 때. 하기와라가 하품을 하며 나타났다.

 

나시: 안녕. 하기와라.

 

기와라 우시오: 후와암... 와썹. 왜 식당에 아무도 없나 하고 찾아다니려 했는데 딱 마주쳤네.

 

바라 쿠리스: 이제 깼냐? 모노로그 알람 듣고 안 일어난 네 생활 패턴이 레전드다.

 

기와라 우시오: 니네 돌려보내고 전용실에서 좀 더 놀았거든... 허아아암...

 

루미나미 나몬: 영화 감상회 끝났을 때도 새벽 아니었어? 깜빡 졸면 바로 죽을텐데 배짱 좋네.

 

기와라 우시오: 배짱 좋은 거로 치면 미도리카와가 원탑이지. 아직도 안 뒤졌잖아. 이틀 내내 밤샜는데도 잠을 안 자고 있는 거야.

 

루미나미 나몬: 이미 죽은 뒤인데 우리가 모르는 걸 수도 있지만.

 

롤 브라이트: 불길한 말씀 하지 마세요... 이 탑에서 누군가가 죽는 일은 원하지 않아요.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말이에요.

 

바라 쿠리스: 누군들 안 그렇겠어. 사람 죽는 건 최악이야.

 

기와라 우시오: 그래서 너흰 여기에 있고... 다른 애들은 어디 갔어?

 

나시: 우린 아침 일찍 먹은 사람들에 대해서밖에 몰라. 히무로, 마유즈미, 카이다는 어디에 있는지 안 보여. 적어도 히무로랑 마유즈미는 늦잠을 자는 걸지도...

 

기와라 우시오: 아. 마유즈미? 걔는 내가 봤어. 히무로랑 같이 걔 전용실로 들어가던데.

 

나시: 히무로 전용실?

 

기와라 우시오: 예.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구먼유!

 

루미나미 나몬: 그게 정말이냐? 틀렸다면 네 목을 대신 내놓아야 할 것이야!

 

후루미나미가 모자를 벗고 길게 땋은 검은색 가발을 대신 쓰더니, 어디선가 부채를 꺼내며 하기와라에게 호통쳤다.

 

기와라 우시오: 마님. 정말이라이께유!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쥬!

 

바라 쿠리스: 잘 봐 둬라 신입... '각' 이다...

 

롤 브라이트: 마유즈미 씨가 히무로 씨의 전용실로요? 묘하네요.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던 걸까요?

 

나시: 히무로가 누굴 해칠 사람은 아니니 괜찮을 거예요.

 

기와라 우시오: 아무튼 마유즈미랑 히무로는 거기 갔고. 나머지는 어디 갔어?

 

나시: 나이토랑 모리는 자러 갔어. 밤을 새워가면서 23T를 감시했거든... 나도 곧 자러 갈 거야.

 

나시: 야가미랑 칸나즈키랑 토키와는 카이다를 찾으러 탑 밖으로 수색을 떠났어.

 

기와라 우시오: 뭬? 어느 방향으로 갔는데?

 

나시: 카이다가 마지막으로 향했던 그 방향으로.

 

기와라 우시오: 아 그래? 하긴 그게 맞는 판단인 것 같긴 하네. 별 일도 없으니까 난 밥 먹으러 간다. 안녕. 아디오스. 굿바이 그리고 알로하!

 

나리 케이토: 알로하는 인사말이야. 이 멍청아!

 

 

 

더 단크 타워

챕터 1: < 죽여 마땅한 사람 둘 >

"과정은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유즈미 나데시코: 좋아. 이야기를 해 보자... 들어 봐.

 

무로 시라베: 듣고 있어.

 

유즈미 나데시코: ......음.

 

무로 시라베: 안 들려.

 

유즈미 나데시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 분명 어제 캐롤 씨한테서 터치도 한 번 받고 왔는데...!

 

캐롤의 터치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물어보고 싶지만. 지금은 적기(適期)가 아닐 것이다.

 

무로 시라베: 그럼 내가 질문을 할 테니. 넌 대답을 해 주겠어?

 

유즈미 나데시코: 그럴...까? 말하고 싶은 게 있어서 여기로 온 건데. 네가 말을 하게 되네...

 

무로 시라베: 너도 대답을 하잖아. 그럼 된 거야.

 

마유즈미에게 찹쌀떡과 믹스커피를 제공했다. 이것은 취조가 아니라 담화였기에 안정된 분위기에서 진행하는 것이 효율적일 터였다.

 

유즈미 나데시코: 이럴 필요까진 없는데... 고마워.

 

무로 시라베: 차를 준비해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내 전용실엔 차가 없어.

 

유즈미 나데시코: 괜찮아! 차가운 차가 아니라면 무엇이든 차다운 차다!

 

마유즈미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그녀에게 뜨거운 커피를 대접한 것은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무로 시라베: 그렇구나. 차가운 커피가 아니라 다행이네.

 

유즈미 나데시코: 으음...?

 

마유즈미의 웃음이 멋쩍음으로 변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어... 그러니까. 이거 농담이었는데...

 

무로 시라베: 아.

 

유즈미 나데시코: '차가' 운 '차가' 아니라면 무엇이든 '차다' 운 '차다'... 이해 가?

 

마유즈미가 음절을 또박또박 끊으며 말하자 그녀가 어떤 농담을 의도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운율을 사용하는 농담은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 성공적인 농담의 예시로 기억해두자.

 

무로 시라베: 미안. 웃어주지 못해서.

 

유즈미 나데시코: 아니야. 나도 그냥 던지다시피 한 거니까... 아. 커피가 마음에 드는 건 진심이야!

 

유즈미 나데시코: 오히려 차보단 이게 더 좋아. 편하잖아? 물을 타기만 하면 바로 차가 나온다니.

 

유즈미 나데시코: 어린애가 마시기에 너무 쓰지도 않고, 꼭 정확한 차례와 각도를 맞춰서 마실 필요도 없어. 난 이게 더 좋아.

 

무로 시라베: 차를 마시는 특별한 각도도 있어?

 

유즈미 나데시코: 적어도 우리 집에는 있었어. 어렸을 때 그걸 외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그냥 차 마시는 건데 왜 다들 그렇게 호들갑을 떤 건지 아직도 모르겠네.

 

유즈미 나데시코: 차뿐만이 아니야. 서예, 식사, 의복, 목욕에 수면까지 우리 집엔 전부 정해진 규칙이 있었어.

 

무로 시라베: 많이 힘들었겠네.

 

유즈미 나데시코: 조금... 아니. 여기엔 우리 둘 뿐이니까...

 

마유즈미는 커피를 홀짝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네 말이 맞아. 나 많이 힘들었어.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매일매일을 그런 식으로 보내는 건 정말... 힘들었어.

 

"지치지. 힘들고... 진짜. 진짜로 힘들어. 과장하는 게 아니라 정말 힘들어."

 

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너도 그랬어?

 

무로 시라베: 맞아. 실험체들은 일정 주기마다 시험을 통과해야 했어. 약물을 투여받고, 재능이 얼마나 발현되었는지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버티지 못한 자들은 가차 없이 처분되었지.

 

유즈미 나데시코: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사람이... 너인 거지?

 

무로 시라베: 응. 분명 수십 명으로 시작했지만 막바지엔 열여섯 명 밖에 남지 않았어. 그중 하나가 차라리 이 연구소를 탈출해서 우리끼리 살자. 우리가 다 같이 모이면 로들과도 맞설 수 있을 거다.라고 주장한 적도 있어.

 

유즈미 나데시코: 좋은 생각이네!... 하지만 결국...

 

무로 시라베: 두 명이 그에게 동조했고. 그들은 한동안 계획을 짜거나 다른 실험체들을 회유하는 데에 시간을 썼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셋은 전부 처분되었어.

 

유즈미 나데시코: 앗...

 

무로 시라베: 그 세 명이 탈락한 테스트는 무척 기이했어. 한 남성과 열여섯 명의 실험체들을 한 방에 모아놓고, 차례대로 그 남자에게 총을 쏘는 테스트였거든.

 

유즈미 나데시코: 초, 총을...?!

 

무로 시라베: 걱정 마. 그는 무사했어... 아니. 걱정을 해야 하는 일인가? 네가 듣기 불편하다면 그만 말할게.

 

유즈미 나데시코: 아니야. 괜찮아... 계속 말해줘.

 

마유즈미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었기에, 요점만 간결히 말해주기로 했다.

 

무로 시라베: 우리는 차례대로 총을 쏘았으나 이상하게도 그에겐 한 발도 맞지 않았어. 분명 맞아야 할 각도였는데도 말이야. 그 자는 로였어. 단지 실험체에 불과한 우리 열여섯 명관 달리 그는 이미 완성된 개체였지.

 

유즈미 나데시코: '로'...?

 

무로 시라베: 다수의 재능을 주입받은 자들의 명칭이야. Rho. 그 테스트는 아마 실험체들이 다른 로의 재능과 얼마나 맞붙을 수 있는지 확인함으로써 재능이 제대로 주입되었는지 분석하려는 의도였을 거야.

 

무로 시라베: 다들 재능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단 한 발도 그를 맞출 순 없었지만 미세한 차이는 존재했어. 분석 결과 얄궂게도. 몰래 반란을 모의하던 세 명이 가장 저조한 성과를 보였고 그렇게 그들은 처분되었어.

 

유즈미 나데시코: ...슬프다.

 

무로 시라베: 애석한 일이지.

 

마유즈미가 믹스커피를 홀짝였다. 아직 따뜻한 커피잔을 손에 쥐고 있는 그녀는 문득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커피잔 안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일 때까지.

 

혹시 잠에 든 것인가? 전용실에서의 취침은 처형 사유이니 빠르게 그녀를 깨우려는 순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미안해. 히무로.

 

무로 시라베: 왜지?

 

유즈미 나데시코: 내 생각이 바보 같아서... 이제 안 건데. 난 널 위로하려고 여기에 왔던 것 같아.

 

무로 시라베: 고마워.

 

유즈미 나데시코: 그게 아니야. 난 그냥... 네 과거가 이질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주눅 들거나 다른 사람들이 널 없는 사람 취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널 위로해주고. 최소한 응원해주려고 왔던 거였어.

 

유즈미 나데시코: 그리고... 웃어도 돼. 난 너랑 내가 조금 닮았다고 생각했어. 동질감을 느꼈어.

 

무로 시라베: 안 웃어.

 

유즈미 나데시코: 나도 못 웃겠네. 너무 바보 같아서 웃음도 안 나와... 이런 가벼운 마음으로 오기엔 너와 내가 살아왔던 삶이 너무 달랐어. 너는 정말. 정말 괴로웠을 텐데 집 안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어.

 

유즈미 나데시코: 내 어줍잖은 위로는 너를 모욕하는 일과 같아. 고작 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조금이나마 너와 내가 닮았다고 생각했다는 게. 너무 바보같아...

 

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넌 좋은 사람이야.

 

기관 내에서의 입지를 다졌을 때. 이 일화를 다른 이들에게도 말한 적이 있다. 다른 로와 이전에도 만나본 적이 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였다.

 

그것이 무용담이라고 생각하던 이들이 많았다. 완성된 로에게 총을 쏴 봤구나. 네가 제일 가깝게 맞혔겠구나. 로에겐 총알이 통하지 않는구나. 몇 명은 내가 대단하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대체 어디가 그렇게 대단했단 말인가? 미완성품이 완성품에게 어떤 피해도 끼치지 못한 것이. 자신의 삶을 되찾으려 했던 세 명이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은 것이.

 

그걸 전부 보았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이. 대단한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성공했던 시련들은 사실 내게 실패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메리만큼은 이해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틀렸어. 히무로... 좋은 사람이면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다니진 않아.

 

무로 시라베: 넌 나에 대해 생각했잖아. 내가 다른 이들에게서 소외되는 것을 위로하려 왔고, 내 이야기에 공감했어. 그것만으로 넌 충분히 좋은 사람이야.

 

유즈미 나데시코: 그렇지만 난 널 위로해줄 수 없는걸. 널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을 거야.

 

무로 시라베: 꼭 지금 위로해줄 필요는 없어. 마유즈미. 이해엔 언제나 시간이 드니까. 조바심 내지 않아도 괜찮아. 중요한 것은 위로 그 자체가 아니야. 과정이지. 적어도 난 그렇게 배웠어.

 

"포기하지 않으면 돼."

"그 과정 속에서 금수조차 사람이 되고, 사랑이 태어나는 거니까."

 

무로 시라베: 그러니 네가 날 이해하고 싶다면. 나중에 다시 이야기를 나눠 보자.

 

유즈미 나데시코: 나중에...

 

무로 시라베: 그래. 나중에.

 

마유즈미는 내가 건넸던 찹쌀떡을 한 입 베어물었다. 그것을 우물우물 씹던 그녀는 믹스커피로 찹쌀떡을 넘긴 뒤 웃었다. 아까보다 조금 편안해진 표정이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찹쌀떡 맛있어.

 

나도 내 몫의 찹쌀떡을 물었다.

 

무로 시라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다 쿠로하: 손 위로 들어.

 

기와라 우시오: 아니. 이건 또 뭐야!

 

이다 쿠로하: 섣불리 움직이지 마. 몸성히 돌아가고 싶다면.

 

기와라 우시오: 나 가진 거 없어! 있긴 한데 탑에 바리바리 싸들고 오진 않았다고! 지갑도 없다니까? 여기에 돈 많이 가진 놈 있으면 분명 그 돈이 노잣돈이 될...

 

기와라 우시오: 악! 썅! 욱.

 

이다 쿠로하: 농담 따먹을 시간 없어. 내 말 알아들어? 내가 기분이 많이 안 좋거든.

 

기와라 우시오: 오금 까이고 엎어졌는데. 내가 기분이 더 나쁘지 않겠냐...?

 

이다 쿠로하: 아가리 닥쳐.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난 지금 널 죽이고 소리소문 없이 묻어버릴 수도 있어. 장미가 널려있는 거 보이지? 아무도 네가 죽은 줄 모를 걸.

 

기와라 우시오: 내가 빡대가리긴 해도 상황 파악은 되거든? 지금 나 큰일난 것도 알아. 근데 그냥 멈출 수가 없어! 이건 나의 본능! 나의 천직! 나의 존재 이유!

 

기와라 우시오: 아가리 닥치라고? 하지만 어림도 없지. 절대 안 닥쳐!

 

이다 쿠로하: 하아... 대화하려는 놈들 꼬라지가 하나같이 거지같네.

 

기와라 우시오: 야. 이게 어떻게 대화냐? 협박이지. 사람 담그고 다니는 게 카이다 스타일의 대화라면 아주 신세 조졌네. 하기와라 우시오!

 

이다 쿠로하: 닥쳐.

 

기와라 우시오: 아야야야야. 내 다리! 밟지 마 이 미친! 무슨 힘이 이래?!

 

이다 쿠로하: 묻는 말에나 대답해. 어떻게 내가 이 쪽으로 올 줄 알았지?

 

기와라 우시오: 나도 몰랐어! 여기로 올 줄 알았으면 니미. 나 혼자 왔겠니? 남는 사람들 다 모아 왔겠지!

 

이다 쿠로하: 내가 여기 올 줄 몰랐는데. 안전한 탑이 아니라 굳이 여기까지 와 봤다고? 산책을 나온 것도 아닐 텐데.

 

이다 쿠로하: 그렇게 놀라는 눈치도 아잖아. 넌 분명 내가 이 방향으로 올 줄 알고 있었어. 내가 마지막으로 향한 방향과 반대편임에도. 넌 여기로 왔지. 어떻게 알았어? 대답해.

 

기와라 우시오: 단순히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 아니야? 카이다 네가 갔던 방향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미도리카와 사선 안에 놓이잖아. 그러니까 갔던 방향으로 돌아와선 안 돼. 미도리카와의 사선 반대 방향에서 탑으로 들어와야지.

 

기와라 우시오: 존나 멀리 돌아가야겠지만, 거리 왜곡이랑 시야를 적절히 쓰면 탑 주변을 반 바퀴 돌아서 이 방향으로 올 수 있을 거고. 실제로 네가 여기 온 거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던 셈이지.

 

기와라 우시오: 근데 뭐... 내가 한 생각이니 들어맞진 않을 테고. 어차피 안 오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미어캣처럼 정찰 나가자. 했는데... 운도 지지리 없네. 바로 딱 걸렸어!

 

이다 쿠로하: 누구한테 말이라도 하고 왔다면 이 꼴은 안 났을 텐데. 멍청하긴.

 

기와라 우시오: 섣불리 누구한테 말했다가 우리 중에 네 끄나풀이라도 있으면 나가리야.

 

이다 쿠로하: 웃긴 생각을 하고 있네... 내가 지금 끄나풀이 있을 처지로 보여? 또라이 미도리카와한테 쫓겨서 밖에서만 이틀을 보내고 있는데.

 

기와라 우시오: 그럼 너 노숙했냐? 어디서 했어? 장미 꽃밭에 가시도 많은데 잘도 누워서 잘도 잤네!

 

기와라 우시오: 밥은 어디서 먹었고? 장미 먹었어? 무슨 베어 그릴스세요? ㅋㅋㅋㅋㅋ 장미 먹어서 자리 비우고 거기에 누웠네. 정말 대 단 하 다 !

 

이다 쿠로하: 조용히 못 해?!

 

기와라 우시오: 컥! 크으... 머리 때리지 마. 내가 여기서 더 멍청해지면 어쩌라고...

 

이다 쿠로하: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사지 성히 보내주려고 했더니... 네 말대로 넌 도무지 멈추질 않네.

 

이다 쿠로하: 다시는 그렇게 쪼개고 다니지 못하게 만들어 주지.

 

기와라 우시오: 잠깐잠깐잠깐! 원하는 게 뭔데?! 뭘 물어보려고?

 

이다 쿠로하: 내가 탑에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지? 전부 말해.

 

기와라 우시오: 아. 탑에서 뭔 일이 났는지 넌 모르겠구나. 히무로가 원래 이상한 면이 좀 있었거든? 그런데...

 

이다 쿠로하: 장황하게 말하지 말고 결론만 말해.

 

기와라 우시오: 어... 모리가 카나리를 거꾸로 매달았고. 토키와가 화를 내다가 접시를 깨뜨렸어. 후루미나미는 괴도가 돼 버렸고.

 

이다 쿠로하: ...자세히 설명해 봐.

 

 

 

 

 

 

 

 

 

나즈키 시노부: 또 300척마다 표시가 되어 있네. 발로 장미를 쭈우욱 밟아 놨어.

 

가미 토가: 정확히 300척인 것이 맞습니까?

 

나즈키 시노부: 아닐 수도 있지! 나나 걔나 완벽하진 않으니까.

 

키와 아유키: 이 흔적을 계속 따라간다면 카이다가 있는 곳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몰라.

 

가미 토가: 거리 왜곡 현상에 대해 제대로 조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300척마다 표시가 되어 있다는 것은 카이다 씨 본인도 그녀가 나아가고 있는지. 혹은 같은 구간을 반복하고 있는지 표시해 둔 것이겠죠.

 

나즈키 시노부: 그런데 끝도 없어. 토키와. 갈 수 있겠어?

 

키와 아유키: 힘 내야겠지... 어제 하루 푹 잤으니까 이제 한 사람 몫을 할 때가 온 거야.

 

가미 토가: 정상적인 수면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진 않습니다. 무리는 하지 마세요.

 

키와 아유키: 걱정 마. 난 멀쩡해!

 

나즈키 시노부: 이야. 저 많은 표시들 좀 봐. 몇십 개는 족히 넘는 것 같은데?

 

가미 토가: 저게 다 보이십니까?

 

나즈키 시노부: 당근 다 보이지!

 

키와 아유키: 상당히 동물적인 감각이네... 나쁜 뜻은 아니야.

 

가미 토가: 이 표시를 계속 따라가면 카이다 씨를 찾을 수 있을까요?

 

나즈키 시노부: 적어도 여기선 안 보여. 쫌 더 가야 할 것 같아.

 

키와 아유키: 표시가 끊어진 부분이 탑에서 멀어질 수 있는 한계라고 볼 수 있겠지. 표시의 개수를 세면 그 한계가 몇 미터 정도 되는지도 파악할 수 있을 거야.

 

가미 토가: 사실 그렇게 쉽게 수수께끼가 풀리진 않겠지만, 적어도 카이다 씨가 이 탑에서 빠져나가려 시도했다는 것은 명확하군요.

 

가미 토가: 그러나 저희들은 1시간 46분 만에 그 한계에 다다른 바 있었습니다. 그녀가 밤새 달린다고 한들 처음과 거리가 똑같다면, 다른 방법을 시도해볼 만도 하죠.

 

나즈키 시노부: 그러면 뭐 해? 뛰든 걷든 날든 그 방법으로는 탑에서 나갈 수 없는데.

 

가미 토가: ...네. 그렇겠죠. 지금은 표시와 거리 왜곡 탐사에 집중합시다.

 

키와 아유키: 재빨리 탐사를 끝내고 돌아가자. 다들 우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기와라 우시오: 그래서 모리가 카나리를 쏘아보더니 그냥 그 자리에서 서로 일기토를 뜨더라고. 카나리도 가오가 있으니까 좀 치던데 모리가 진짜 인정사정없이 패더라.

 

기와라 우시오: 펀치 한 발 한 발에 살의를 담아서 치더라니까? 그대로 바닥에 축 늘어져버린 카나리를 모리가 거꾸로 매달았어. 문고리에 발을 묶어 놨지. 뭐라더라... 돼지 같은 자본가의 최후 어쩌고 했는데.

 

기와라 우시오: 아무튼 나이토랑 야가미가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말리려고 하는데 모리가 순순히 말을 듣겠냐? 당연히 옥신각신 하는데 토키와가 여러 일 때문에 폭발한 거야. 먹고 있던 접시를 그냥 바닥에 던지면서...

 

이다 쿠로하: 너 지금 나 가지고 노냐?

 

기와라 우시오: 아니라니까. 들어 봐. 그러면서 작작 좀 하라고. 왜 그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고...

 

이다 쿠로하: 내가 눈치챘다는 걸 알았으면 적당히 그만 했어야지. 으응?

 

기와라 우시오: 아. 악. 아아아악!! 악! 다리 치워 썅!!

 

이다 쿠로하: 시간을 얼마나 낭비한 건지... 그것도 모자라서 날 바보 취급 해?

 

이다 쿠로하: 다시는 그렇게 생각 없이 웃고 다니진 못하도록 만들어 주지.

 

기와라 우시오: 야... 칼은 좀 무섭다. 치워주면 안 되냐?

 

이다 쿠로하: 걱정 말라고. 죽이진 않을 테니까. 어떻게 하면 안 죽을지 난 잘 알거든.

 

기와라 우시오: 너 죽을 때까지 그렇게 지낼 거야?

 

이다 쿠로하: 내가 입 닥치라고 계속 말했을 텐데.

 

기와라 우시오: 농담이나 시간 끄는 게 아니라 진심이니까 좀 들어 봐. 계속 그렇게 지내게?

 

기와라 우시오: 장미 뜯어먹고 노숙하다가 누구 하나 잡아서 정보 뜯어내기. 그게 다냐고.

 

이다 쿠로하: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닐 텐데.

 

기와라 우시오: 너야말로 그렇게 말할 처지야? 네가 운이 정말 좋아서 다른 사람도 협박할 수 있다고 쳐. 걔들이 너한테 거짓부렁이만 말하면 어쩔 거야? 넌 정보전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잖아.

 

기와라 우시오: 이제 사흘 째야. 다들 이 탑에 온 지 사흘 째라고. 그런데 벌써부터 이렇게 사람들과 척을 지면 네 끝만 안 좋아.

 

이다 쿠로하: 난 할 만큼 했어. 미도리카와 새끼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기와라 우시오: 남탓 하지 마. 다들 널 믿지 못하는 일차적 원인은 네 전용실에 흉기가 있기 때문이야.

 

이다 쿠로하: 그러면 어쩌라고. 내 전용실이라도 열어 버릴까?

 

기와라 우시오: 야. 그거 좋다! 아직 자기 전용실을 공개한 사람은 없었잖아. 네가 처음으로 네 전용실을 열고 그 안에 있는 물건들. 과거들을 보여준다면 다들 널 믿어줄 거야!

 

이다 쿠로하: 어설픈 소리 하지 마. 그 또라이 미도리카와는 총을 가지고 있어. 난 없고. 그 새끼한테 저항하려면 난 흉기가 필요해.

 

이다 쿠로하: 내가 너희들에게 내 전용실을 보여준다고 쳐. 단순히 흉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날 것 같아? 모노로그를 통한 보급 시스템이 전용실에 존재하는 한 난 전용실에 출입만 해도 흉기를 조달할 수 있어.

 

이다 쿠로하: 내가 원한다면 탑 이곳저곳에 흉기를 숨겨 너희들의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도 있지. 그러니까 그 자식들은 분명 내 전용실을 막아놓을 거야.

 

이다 쿠로하: 그럼 미도리카와 새끼는... 흉기 없는 내게 뭐든 할 수 있겠지.

 

기와라 우시오: 그래도 다른 애들은 널 다시 볼 거야. 널 믿어 줄 거고!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이다 쿠로하: 그 자식들이 날 지켜줄 것 같아? 당장 미도리카와가 총을 들이밀면 그 자식들은 제 살길 찾아 뿔뿔이 흩어져. 너희들은 지금 서로가 동료라고 생각하면서 신이 난 모양인데, 착각하지 마.

 

이다 쿠로하: 너흰 그저 분위기에 떠밀린 것뿐이야. 언젠가 크고 작은 불만들이 터지거나, 답도 없는 고난을 마주하면 그 같잖은 동료애는 흔적도 안 남아.

 

기와라 우시오: 아. 너랑 의견 일치되니까 기분 개나쁘네...

 

이다 쿠로하: 뭐. 이 새끼가...?

 

기와라 우시오: 아. 들렸냐? 귀 한 번 밝네 시발거. 대충 네가 에? 지금 뭐라고? 라고 하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츤츤대는 게 티키타카 정석인데... 컥!

 

이다 쿠로하: 매가 약이지. 순식간에 조용해졌네? 계속 떠들어 봐. 도무지 멈출 수가 없다면 내가 계속 멈춰줄 테니까. 더 떠들어 보라고.

 

기와라 우시오: 허억... 허억... 컥...! 허악... 

 

이다 쿠로하: 숨 쉬어. 그 정도론 안 죽으니까. 또 날 상대로 같잖은 장난을 친다면, 다음은 머리다. 적당히 해.

 

기와라 우시오: 콜록. 콜록... 하... 이거 진짜 못 버티겠다...

 

뚜- 뚜- 뚜-

 

이다 쿠로하: 못 버티겠다고? 재밌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기와라 우시오: 하하... 콜록. 팔자 개 조졌네 진짜로.

 

이다 쿠로하: 원래도 협박한 다음 순순히 보내줄 생각은 없었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거리낄 것도 없지. 넌 이제 나랑 같이 간다.

 

기와라 우시오: 네 본성을 목격한 사람을 가만히 둘 순 없는데 죽일 수도 없으니. 데리고 다니기라도 하게? 날 아주 들쳐 업고 다녀야겠네.

 

기와라 우시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결국 미도리카와와 대항하기 위해 흉기가 필요하기 때문이잖아. 전용실을 개방할 수 없으니 우리랑 손을 잡을 수도 없단 거고.

 

이다 쿠로하: 그래. 그래. 이 새끼야. 그 또라이한테 생포당했다간 어떤 꼴이 날지 모른다고.

 

이다 쿠로하: 난생처음 보는 놈이 갑자기 너와 나의 이야기니 업보니... 난 순순히 안 당해.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악착같이 살아남을 거야.

 

기와라 우시오: 그럼 만약에 말인데. 흉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너랑 미도리카와 두 명이 다가 아니라면 어떨 것 같아?

 

이다 쿠로하: 뭐?

 

기와라 우시오: 창고에 흉기가 있다는 걸 제일 먼저 발견해서, 미리 몇 종류를 자기 방에 꿍쳐둔 사람이 있다면 어쩔 거냐고.

 

기와라 우시오: 그 사람이 창고에 흉기가 있다는 걸 말하기 전까진 아무도 거기에 칼이나 망치가 있는 줄 몰랐을 거야. 알고 있더라도 흉기 개수를 다 세어두는 사람은 없지. 최초 발견자가 흉기를 파밍해도 다른 사람은 그걸 알 도리가 없어.

 

기와라 우시오: 그 최초 발견자가 너한테 무기를 제공하면. 만약 네 전용실이 막히더라도 넌 미도리카와랑 싸울 수 있잖아. 그치?

 

이다 쿠로하: ...하. 이 새끼 보게. 지금 나한테 협상을 걸겠다고?

 

기와라 우시오: 협상이라 부르기엔 너무 거창하고. 흉기는 내가 조달해 줄 테니 적당히 몸수색받고 전용실 포기해... 대충 이런 거지.

 

이다 쿠로하: 지랄 마. 너한테 흉기가 있었다면 지금 당장 쓰고도 남았어. 블러핑을 할 거면 네 상황을 잘 보고 했어야지.

 

기와라 우시오: 믿고 말곤 네 자유인데. 솔직히 내 입장에서 이건 널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마지막 시도야. 여기서 손 잡고 돌아가면 다 없는 일로 쳐 줄게!

 

이다 쿠로하: 난 썩은 동아줄은 안 잡아. 널 믿지도 않고.

 

기와라 우시오: 이 친구 마지막 기회를 버리는구만...

 

이다 쿠로하: 혀 놀리지 마. 내 마지막 기회는 고작 너 따위가 아니야. 절대 아니라고.

 

기와라 우시오: 그럼 네 마지막 기회는 누군데? 쟤들?

 

나시: 하기와라!

 

바라 쿠리스: 저기 있다! 저기 있어! 카이다가 누르고 있어!

 

하기와라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와 이바라. 캐롤 씨는 상황을 두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더 빠르게 달렸다. 카이다가 하기와라를 쓰러뜨렸다는 것은 어떻게 봐도 명확했다.

 

이다 쿠로하: 뭐야...? 저 새끼들이 여길 어떻게 알고...

 

바라 쿠리스: 하기와라! 괜찮냐?! 전화 왜 끊어진 거야?!

 

이다 쿠로하: 전화? 전화라고...?

 

이다 쿠로하: ...아하. 이 개새끼가!

 

기와라 우시오: 걍 보험 들어둔 거야... 어디서 비명횡사하지 않도록. 통화만 연결해 둔 거라고... 네가 이렇게 나올 줄 누가 알았겠냐.

 

롤 브라이트: 카이다 씨. 대화를 할까요.

 

나시: 대화는 이제 의미 없을 것 같아요. 우리가 조금만 늦게 왔어도 어떤 일이 났을지...

 

카이다는 하기와라의 다리에 발을 올린 채 강하게 압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손에는 칼이 있었다. 시퍼렇게 빛나는 칼. 그녀는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그걸 손에 쥐고 우리와 하기와라 쪽을 번갈아 흘깃거렸다.

 

이다 쿠로하: 더 다가오지 마. 더 다가오면 이 자식이 죽는다.

 

기와라 우시오: 얘들아! 살려 줘! 사람 살려!

 

이다 쿠로하: 이 새끼가 뻔뻔하게...!

 

바라 쿠리스: 야. 너 잘 생각해! 여기서 누굴 죽이면 너도 죽어!

 

이다 쿠로하: 그건 나도 알아. 그래서 아직까지 안 죽인 거야. 하지만 사는 것도 고통스러울 정도로 다치게 만들어 줄 순 있지.

 

기와라 우시오: 와아악! 와아아악!! 십ㅏㄹ 존나 무섭다!!

 

카이다가 갑자기 하기와라의 배를 발로 찼다. 아무런 고민도 없이 그렇게 했다. 나는 퍽 하는 소리를 예상했지만 그녀의 발이 만들어낸 소리는 '뻥' 에 가까웠다.

 

하기와라는 순간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몸을 감싸고 고통을 추슬렀다. 말도 못 할 정도의 고통이었던 모양이다. 나도 카이다가 그를 얼마나 세게 찬 것인지 가늠이 되자 몸이 서서히 굳어갔다. 공포가 스멀스멀 내 척추를 타고 내려가며, 그것을 마비시켰다.

 

바라 쿠리스: 너 미쳤어?! 왜 그러는데!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는 이바라를 캐롤 씨가 막아섰다.

 

롤 브라이트: 이바라 씨. 진정하세요! 섣불리 움직이면 하기와라 씨가 더 다칠 거예요!

 

바라 쿠리스: 보고만 있을 순 없잖아. 어떻게든 해야지!

 

나시: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카이다?!

 

어제 카이다를 만났을 때. 그녀는 우리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하고 있었다. 미도리카와에게 쫓겨나기 전까지 그녀는 우리에게 다가오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아무런 가식도 숨김도 없는 그녀의 모습은 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카이다는 자신이 우리에게 얼마나 위협이 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우리는 탑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강한 완력을 지닌 야가미, 칸나즈키, 나이토는 이 곳으로 올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그들에게 연락을 한들 이 곳까지 오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였다.

 

돌무더기에서 사람을 꺼낼 수 있는 그녀가 흉기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녀에게 대항할 수단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기와라가 위험하다는, 최대한 빨리 그리고 조용히 가야 한다는 이바라의 말에 무작정 따라오긴 했지만. 이런 상황일 줄은 몰랐는데...

 

이다 쿠로하: 나도 내 나름대로 카드를 모아야 하지 않겠어? 지금은 버림 패라도 싸그리 끌어모아야지. 어떻게든 써먹을 구석이 있다면 말이야.

 

이다 쿠로하: 너흰 이제 다 내 인질이야. 손가락 한두 개 정도 잃고 싶지 않으면 따라오는 게 좋을 거다.

 

롤 브라이트: 당신 뜻대로는 안 될 거예요.

 

캐롤 씨가 장갑을 벗으며 카이다 쪽으로 몇 걸음을 내디뎠다.

 

이다 쿠로하: 뭐. 너부터 해 달라고?

 

롤 브라이트: 아뇨. 제가 말했잖아요. 당신 뜻대로는 안 될 거라고요.

 

터치를 사용하시려는 건가? 결국 이렇게 됐구나. 결국 캐롤 씨가 강경책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진 않기를 바랐지만...

 

이다 쿠로하: 터치인지 뭔지 하는 그걸 믿고 덤비는 거라면. 다시 생각하시지? 내가...

 

이다 쿠로하: 윽!

 

기와라 우시오: 뭐야 씨발. 날이 거의 들어가지도 않는데...?

 

카이다가 움찔하며 다리를 움직이자 그녀의 중심이 잠시 무너졌다. 찰나의 틈. 하기와라가 재빨리 옆으로 몸을 굴렸다. 잘 보진 못했지만 하기와라가 그녀의 다리를 때린 모양이었다.

 

기와라 우시오: 안녕아디오스굿바이 알로하!

 

바라 쿠리스: 빨리 뛰어! 빨리!

 

이다 쿠로하: 가겠다고? 어딜 가. 못 가!

 

카이다가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무척 빨랐다. 몸을 일으키고 우리 쪽으로 달려오는 하기와라는 내가 눈을 감은 찰나의 시간 동안 그녀에게 뒷목이 붙잡히고 말았다. 이바라가 그를 향해 제대로 뛰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다 쿠로하: 잡았다! 이 새끼야!

 

기와라 우시오: 좆됐...!

 

카이다는 그대로 하기와라를 뒤로 당겨 다시금 그를 인질로 잡으려 했으나, 캐롤 씨가 어느새 그녀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터치를 사용하실 모양이었다.

 

나시: 앗... 캐롤 씨!

 

내가 터치를 받으며 느낀 감상은. 그것이 충분히 부정적인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신이 연결된다는 것은 마냥 낭만적인 일이 아니었다.

 

이 탑에 처음 떨어졌을 때. 기억의 공백으로 혼란을 느끼고 있던 나는 캐롤 씨에게서 터치를 받았다.

 

: 터치...? 그게 뭔데? 또 나만 모르는 거야? 나... 난 아무것도 모르겠어.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다고!

 

롤 브라이트: 원래 터치는 최후의 수단으로 정해 두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납치를 당했고 그중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외면할 수 없죠. 너무나도 괴로우시다면 제 손을 잡으세요. 마음이 한결 편해지실 거예요.

 

그건 내 삶에 있어서 잊기 어려운 순간이었다. 사실 기억을 잃었으니 내 삶이란 사흘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내겐 다른 어떤 체험보다도 그 최초의 터치가 더 강렬했다.

 

전류가 몸에 통하는 감각. 정전기 같은 것이 손끝을 스치는 순간, 혼란이 사라졌다. 거짓말같이 마음이 편해졌다. 내 몸이 다른 이의 것이 된 것처럼. 언제 혼란스러웠고 언제 고통스러웠냐는 듯이 난 평온을 되찾았다.

 

터치를 받는 것은 마치 상냥한 손길로 머리를 손질받는 것과 같았다. 미용사는 언제든지 가위를 내 대동맥에 꽂을 수 있으나 그것을 머리카락을 자르는 데만 사용한다. 단지 눈을 찌를 정도로 긴 머리를 짧게 자를 뿐이다. 그러나 그 가위는 언제든지 치명적인 무기로 쓰일 수 있었다.

 

난 이 상황이 너무나도 두려워 발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허나 내 가볍기 짝이 없는 입은 잘만 움직였으니. 그 이유는 카이다가 미용사의 가위에 베일 수 있을지언정. 미용사의 팔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다 쿠로하: 이제 어쩔래. 그거 피부가 안 닿으면 발동이 안 되는 모양이지?

 

카이다는 하기와라의 뒷목을 뒤로 확 끌어당겨 바닥에 내동댕이친 뒤. 캐롤 씨의 팔을 잡아 버렸다. 그녀는 어느새 칼을 자신의 품에 넣은 뒤였다. 얼마나 빨랐는지 거의 보지도 못했다. 아마 그녀가 마음만 먹었다면 충분히 캐롤 씨의 팔을 찌를 수도 있었으리란 것을 깨달았을 때. 내 머리에 빨간색의 위기감이 꽂혔다.

 

하기와라의 몸에 발을 올려 일어나지 못하게 막고 씨익 웃는 카이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난 저항할 수 없는 무력의 차이를 보았다.

 

롤 브라이트: 읏...!

 

기와라 우시오: 으윽... 이 새끼 윈터 솔져야 씨발...

 

이다 쿠로하: 터치인지 뭔지. 신체의 접촉으로 발동한다고 했지? 잘린 손으로도 발동하나 볼까.

 

이다 쿠로하: 너희 둘은 떨어져 있어. 움직일 생각도 하지 마! 너흰 이제 다 내 인질이야!

 

바라 쿠리스: 아. 진짜 난리났네...!

 

나시: ......

 

나에게 뭐가 있지? 뭘 할 수 있지?

 

이바라와 난 움직일 수 없었다. 카이다가 우리를 협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와 난 달랐다. 이바라는 하기와라를 향해 달리려 했다. 단지 카이다가 빨랐을 뿐 다른 상황이었다면 충분히 하기와라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난 어떤가? 캐롤 씨가 어떻게 될지 미리 알고 있지 않았나? 그렇기에 캐롤 씨에게 소리친 것이다. 조심하라고. 혹은 멈추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기와라는 카이다보다 힘이 세서 이 곳으로 왔던 게 아니었다. 캐롤 씨는 자신이 카이다를 제압할 수 있다는 온전한 확신을 가진 채 그녀에게 맞선 게 아니었다.

 

모든 것은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었다. 나는 약하고 무기도 없는데 상대는 두 명의 인질을 잡고 있고, 맨손으로 사람을 돌무더기에서 꺼내며, 흉기를 가지고 있는 상황이라도 움직여야 할 때가 있었다.

 

나는 약해 빠졌기에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할 순 없다.

 

하지만 다이얼을 돌릴 수는 있었다.

 

나는 다이얼로그에 대고 외쳤다.

 

나시: 23T! 도와줘! 아까 우리가 탑에서 나가는 거 봤지? 그 방향에 카이다가 있어! 하기와라랑 캐롤 씨를 인질로...

 

빠악!

 

순간 내 귀에 삐-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난 땅에 떨어졌다. 그 뒤 얼굴 쪽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순서가 뒤죽박죽인 폭력을 당했다. 너무 빨라서 통증을 인지하기도 전에 난 쓰러진 뒤였다.

 

바라 쿠리스: 나나시! 야 이 나쁜 년아아악!

 

카이다가 이바라를 턱 하고 밀어 쓰러뜨렸다. 모든 과정이 너무나도 빨랐다. 내 귀에선 계속 삐- 소리가 났다. 머리의 충격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질 정도였다. 어지러움.

 

그저 꿈속으로 사라지고 싶었으나 통증은 너무 심했고. 내 눈엔 카이다에게서 풀려난, 허나 내동댕이쳐진 캐롤 씨와 하기와라가 보였다. 그들이 아직 쓰러지긴 멀었다는 것을 내게 상기시켰다.

 

나시: 으윽... 23T...

 

이다 쿠로하: 어딜 감히 도움을 부르려 해? 당장...

 

다이얼로그에서는 일련의 음성이 들렸다.

 

23T5U130: 카이다가 다이얼로그를 빼앗은 모양이지?

 

누군가가 이 쪽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난 땅에 쓰러져 있었고 귀를 땅에 대고 있었기에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23T5U130: 끊을 필요 없어. 어차피 끊기엔 이미 늦었어. 너무 늦었지.

 

롤 브라이트: 저건...?

 

이다 쿠로하: 이런 개새끼들이!!

 

기와라 우시오: 어. 엄청 빠르네!

 

23T가 달려오고 있었다. 벌써 온 것인가. 라고 생각하기에 23T는 과도하게 빨리 왔다. 몇십 초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어지러움 속에서 난 23T가 전화를 받기 전부터 우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다 쿠로하: 운 좋은 새끼들 같으니. 도움이 끝도 없이 오네.

 

나시: 운이 좋은 게 아니야. 카이다... 23T는 우리가 동료이기에 구하러 온 거야. 네가 우릴 해치고 있기에 널 막으러 온 거고.

 

나시: 업보 같은 거지...

 

충격에 몽롱해진 내 입에선 어째서인지 업보라는 단어가 나왔다. 난 그 단어를 듣자마자 화가 치밀어 오른 카이다의 얼굴을 보며 약간의 희열을 느꼈다. 그 뒤 과도하게 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의 얼굴을 보자 희열이 곧장 불안감으로 바뀌긴 했지만.

 

카이다는 인질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모노로그를 맨손으로 뚫고 찢어버릴 수 있는 23T가 개입한 이상. 쉽게 넘어갈 순 없으리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23T에게 제압당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몸을 사리기로 한 것 같았다.

 

이다 쿠로하: 다음에 보자. 너희들 전부. 기억해 뒀어.

 

그 말을 남기고 카이다는 멀어져 갔다.

 

23T5U130: 다들 늦어서 미안해.

 

나시: 아니야. 충분히 빨랐어... 와 줘서 고마워. 23T.

 

23T5U130: 고마워할 필요 없어. 이건 내 의무니까... 오히려 늦게 왔지. 정말 늦었어. 너도 다른 이들도 상처를 입었잖아.

 

바라 쿠리스: 왔다는 게 중요하지! 카이다 저 괴물이 다시 오기 전에 도망치자! 어서!

 

기와라 우시오: 그래. 저 거지같은 게 다시 우릴 죽이려 들기 전에 가자고.

 

바라 쿠리스: 저 창문을 깨고 도망친 10세 끼가 다시 오기 전에 탑으로 돌아가야지. 아무렴!

 

나시: 다들 입이 너무 거칠어... 캐롤 씨. 이거 괜찮은 거에요?

 

롤 브라이트: ...다들 한 마디까지만 더 하세요.

 

아. 캐롤 씨도 화가 나셨구나... 23T가 다른 이들의 몸을 일으켜 주었다. 우린 몸을 추스렸다. 우리를 물어뜯고 사라진 이변을 뒤로한 채. 우린 탑으로 돌아갔다.

 

이명이 사라질 때 쯤. 카이다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마유즈미와의 이야기가 끝나고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만신창이가 된 하기와라, 이바라, 캐롤, 나나시. 그리고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23T를 보았다.

 

유즈미 나데시코: 다들 무슨 일이야?! 완전 안습이잖아. 생채기가 왜 이렇게 많아!

 

무로 시라베: 싸웠어?

 

23T5U130: 서로 싸운 건 아니야. 카이다가 이렇게 만들었지.

 

유즈미 나데시코: 카이다가...? 왜?

 

무로 시라베: 카이다는 결국 너희를 적대한 모양이구나.

 

바라 쿠리스: 걔 진짜 세. 내 어깨를 훅 밀었을 뿐인데 바닥에 쓰러지게 되더라고. 솔직히 너무 무서웠어.

 

기와라 우시오: 과장이 아니라 인간이 아닌 것 같더라. 힘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기와라 우시오: 존나 무서워 진짜. 내가 이바라랑 통화하고 있었던 건 어떻게 알고 통화를 꺼 버렸는지 아직도 모르겠다니까.

 

바라 쿠리스: 그러게. 그거 진짜 어떻게 한 거래?

 

기와라 우시오: 몰라. 그냥 다이얼로그를 내 품에서 쏘옥 하더니 통화를 뚝 끄던데.

 

하기와라가 가장 너덜너덜했지만. 정작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나시: 23T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분명 우리 모두 인질로 잡혔을 거야...

 

롤 브라이트: 몇 분은 심하게 다치셨을지도 몰라요. 다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정말로...

 

유즈미 나데시코: 지금도 다들 다쳤잖아. 양호실로 가자! 상처 치료해야지!

 

나와 마유즈미까지 그들에게 합류해. 응급처치를 돕기로 했다.

 

기와라 우시오: 아따따따따따!

 

바라 쿠리스: 가만히 좀 참아 봐. 옆에 나나시는 잘 견디고 있잖아.

 

나시: 나도 지금 엄청 따끔거려... 아얏!

 

무로 시라베: 가만히 있어. 나나시. 다들 소독약과 반창고로 나을 수 있겠어. 하기와라는 멍이 좀 생겼지만...

 

유즈미 나데시코: 캐롤 씨. 아프진 않으세요?

 

롤 브라이트: 저는 괜찮아요. 애초에 카이다 씨는 제 팔을 세게 잡고 바닥에 내던지신 게 다라서 눈에 띄는 상처는 없어요.

 

유즈미 나데시코: ...아무래도 다시 봐야 할 것 같아요!

 

나나시의 귀가 새빨개져서 얼음 찜질이 필요했고 하기와라에게 멍이 몇 개 생긴 것을 제외하면, 다들 생채기 수준의 상처만 입었다. 카이다의 완력에 대한 하기와라의 말이 사실이라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바라 쿠리스: 다들 미안해. 좀 더 신중하게 가야 했는데 내가 마음이 급했어.

 

기와라 우시오: 나도 쏴리. 아무 생각 없이 보험 걸었는데 상대가 카이다였네.

 

나시: 어쩔 수 없었는 걸. 상황이 너무 급했으니까... 소리도 제대로 낼 수 없었잖아. 그래서 이바라가 나랑 캐롤 씨 앞에서 엄청나게 열심히 뜻을 전달하려 했지.

 

롤 브라이트: 네. 그거 정말 다급했죠.

 

바라 쿠리스: (아이와아아 어이에 이아오 위어아아오)

 

나시: 말로 하...

 

바라 쿠리스: !!!!!!!!!!!!

 

롤 브라이트: ......?

 

바라 쿠리스: 크흠! 내 혼신의 립싱크와 댄스와 바디 랭귀지와 글씨 쓰기를 매도하지 마!

 

롤 브라이트: 음성 없이 뜻을 전할 수 있는 건 전부 시도하셨죠. 저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시간을 좀 지체했지만...

 

나시: 결국 마지막 글씨 쓰기에 가서야 겨우 이해했으니까요...

 

기와라 우시오: 그래도 서둘러서 와 줬잖아. 좀만 늦었어도 손가락 개털렸을 걸. 진짜 존나 고맙다. 나나시. 캐롤. 그리고 뭣보다 이바라.

 

바라 쿠리스: 흐흥. 그래. 나만 믿으라구. 그보다 재난이 너한테 닥치니까 좀 위기감이 생기디?

 

기와라 우시오: 어. 진짜 존나 생기더라...

 

23T5U130: 다들 이제 괜찮은 거지?

 

대략적인 치료가 끝나자 23T가 소리를 내었다.

 

바라 쿠리스: 맞아. 너한테도 고마워해야지! 23T 네 덕분에 다 살았어!

 

나시: 23T. 다시 한 번 정말 고마워. 이 은혜는 절대 안 잊을게.

 

롤 브라이트: 저도 마찬가지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23T 씨.

 

바라 쿠리스: 볼에 뽀뽀해 줄까?!

 

23T5U130: 감사 인사는 필요 없어. 너희들을 지키는 건 내 의무니까... 그럼 이만 돌아갈게.

 

나시: 돌아간다고? ...아앗! 맞아!

 

나나시가 퍼뜩 소리쳤다.

 

나시: 미도리카와 감시! 토키와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 우리가 해야 했는데...!

 

무로 시라베: 토키와가 어디로 갔길래?

 

롤 브라이트: 그 얘기는 나중에. 일단 가 보죠! 미도리카와 씨도 요주의 인물이에요. 그가 카이다 씨만큼 위험하다면 더욱 감시를 철저히 해야 해요.

 

유즈미 나데시코: 부상자는 여기에 남아 있어. 너흰 몸의 휴식이 필요하니까.

 

기와라 우시오: 하지만 어림도 없지 바로 따라가 버리기!

 

미도리카와의 전용실이 있는 2층으로 내려가자. 의외의 인물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미나미 나몬: 다들 무슨 일이야?

 

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네가 여길 지키고 있었구나.

 

루미나미 나몬: 전용실에서 놀다 나왔는데 아무도 앞을 안 지키고 있길래. 내가 잠시 지켰지. 그 동안 미도리카와는 안 움직였어. 불러도 대답이 없고.

 

23T5U130: 미도리카와는 항상 자신이 원할 때만 대답해. 이제 다시 내가 감시할게.

 

루미나미 나몬: 알겠네.

 

또 곰방대였다.

 

루미나미 나몬: 그래서 자네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나? 다들 꼴이 말이 아니군.

 

기와라 우시오: 카이다가 원래 갔던 방향에서 한 바퀴 빙 돌아서 올까봐 정찰 나갔는데 잡혔어.

 

바라 쿠리스: 그래서 나랑 캐롤이랑 나나시가 구하러 갔는데. 우리도 잡혔어.

 

루미나미 나몬: 그 뒤 무슨 일을 당했지?

 

바라 쿠리스: 다 죽을 뻔했어...

 

루미나미 나몬: 전개 한 번 스펙타클하군.

 

나시: 정확히는 인질로 잡히거나 심하게 다칠 뻔했어...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 23T가 구해줘서 겨우 살았어.

 

롤 브라이트: 저항하다가 다들 작은 상처를 입어서. 양호실에서 상처를 치료했죠. 히무로와 마유즈미 씨가 합류해서 도와주셨어요.

 

루미나미 나몬: 그 반창고가 다 치료의 흔적인가.

 

기와라 우시오: 사실 최악의 상황이라도 걔가 날 죽이진 않았을 걸? 날 죽이면 학급 재판에서 카이다도 죽잖아.

 

무로 시라베: 널 죽이고 장미밭에 묻는 가능성도 있었어. 하기와라. 학급재판은 시체가 발견되어야 개정되니까.

 

다들 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유즈미 나데시코: 으악. 무서워...! 그럼 아무도 못 찾을 거 아니야!

 

무로 시라베: 그렇지만 어떤 방식이든 하기와라의 시체는 발견되었을 테니 카이다는 확실하게 처형당했겠지. 그러니 무작정 카이다에게 죽을 것을 두려워하진 않아도 좋아.

 

나시: 왜 자꾸 예시 안에서  하기와라를 죽이고 그래...

 

무로 시라베: 예시를 든 거야.

 

기와라 우시오: 근데 얘 말이 맞아. 내가 죽고 장미밭에 묻혀서 학급재판이 안 열리면. 내 죽음이 아무런 의미도 못 가지게 되잖아. 모노로그가 그걸 냅두진 않을 거야.

 

바라 쿠리스: 죽음의 의미...?

 

무로 시라베: 모노로그는 우리들이 서로 죽고 죽이도록 게임을 설계했어. 공들여 납치한 초고교급이 죽었는데도. 누구도 처형되지 않고 누구도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모노로그에 있어 큰 손해야.

 

무로 시라베: 무엇보다. 선례를 남기게 된다는 점에서 큰 문제지.

 

롤 브라이트: 선례... 그 상황에서 모노로그 씨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이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아무런 개입도 할 수 없게 되는 거군요.

 

무로 시라베: 두 살인 사건의 수법이 똑같은데 모노로그가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면, 반발심이 일어날 테니까.

 

무로 시라베: 살인을 한 뒤 시체를 은폐할 수 있다면. 누구나 살인을 하고 장미밭에 시체를 숨겨 리스크 없이 위험요소를 제거할 수 있게 돼. 그러니 모노로그는 시체 은폐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거야. 시체 위치를 우리에게 대놓고 알려주거나 힌트를 주는 식으로.

 

유즈미 나데시코: 그치만... 우리가 화를 내도 모노로그는 들은 척도 안 하지 않을까? 완전 고집불통 대마왕이던데...

 

기와라 우시오: 우리만 반발하는 게 아니야. 그들도 반발하겠지.

 

바라 쿠리스: 그들이 누군데. 너까지 자기만 아는 얘기 하냐!! 진짜 배신감...

 

기와라 우시오: 아니 이건 너도 아는 얘기야! 정확힌. 나랑 너랑 후루미나미만 아는 얘기지.

 

바라 쿠리스: 아... 그 헛소리?

 

나시: 무슨 얘기를 했길래 그래...?

 

루미나미 나몬: 제4의 벽. 연극이 있는 이상 관객도 있기 마련이야. 하기와라는 이 살인 게임에 관객이 있다고 말했어.

 

후루미나미는 더 이상 목소리를 깔지 않았다. 셜록 홈즈에서 후루미나미 나몬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였다.

 

루미나미 나몬: 모노로그가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가 당장 서로 죽이도록 만들 수도, 우릴 죽일 수도 있지. 하지만 그러지 않아. 왜일까? 관객이 이 살인 게임을 평가하기 때문이야.

 

무로 시라베: 살인 게임의 관측자?

 

기와라 우시오: 초고교급이 서로 죽고 죽이는 장면을 생중계로 튼다고 생각해 봐.

 

유즈미 나데시코: 무지 끔찍하잖아!

 

기와라 우시오: 끔찍하니까 궁금해지는 거지. 누가 살아남을까. 누가 죽을까. 얘가 죽었어? 누가 범인일까. 누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을까... 내가 장담컨대 시청률 1위는 따 놓은 당상이야!

 

기와라 우시오: 근데 제작진 쪽에서 방송각 재려고 막 나가면 오히려 재미가 없거든. 그래서 모노로그는 룰에 얽매이는 거야.

 

하기와라는 반쯤 장난조로 말하고 있지만. 그의 견해가 옳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 살인 게임을 지켜보는 자가 있을 것이다. 알파걸의 살인 게임에 분명한 목적이 존재했던 것처럼...

 

혹시 이 살인 게임 역시, 알파걸의 것과 똑같은 이유로 진행되고 있는 것인가? 초고교급 학생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절망을 퍼뜨리려고?

 

그럴 가능성도 존재했다. 방법은 잘못되었지만 내가 만들어진 목적 자체는 절망보다 희망에 좀 더 기울어져 있다. 난 로들에게 협력할 의사가 없지만, 만약 내가 로들과 협력해 온전해질 가능성을 대비한 것일까?

 

날 살인 게임에 끌어들여 살해함으로써. 로와 초고교론자들에게 좌절을 안겨줄 수도 있으니... 이 살인 게임이 폭도들의 선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 역시 고려해볼 만한 가설이었다.

 

다만 모노로그의 발언이 마음에 걸렸다.

 

모노로그: 난 이것과 유사한 게임을 몇 개나 진행했다. 그때마다 23T5U130은 내게 개입했지.

 

이런 게임을 몇 개나 진행할 정도로 초고교급이 많이 남았던가? 그리고 몇 개나 진행했다면 어째서 카텟 기관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는가? 열다섯 혹은 열여섯 명이 그것도 비슷한 연령대의 초고교급들이 실종되었다면 분명 카텟 기관에서 낌새를 눈치챘을 터였다.

 

23T가 모노로그의 살인 게임에 개입했다는 것은 카텟 기관이 모노로그와 이 살인 게임의 배후를 추적해 왔음을 뜻한다. 그런데 내가 그것에 대해 모른다는 것은...

 

난 몇 년 동안의 기억을 잃은 것일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눈앞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무로 시라베: 설마 이 살인 게임이 바깥에 중계되고 있진 않을 거야. 전파 때문에 위치를 탐지당하는 등의 위험을 감수해야 할 테니.

 

루미나미 나몬: 그렇긴 하지? 이게 헝거게임도 아니고. 실시간 생중계라니... 헝거게임이랑 비슷하긴 하지만.

 

기와라 우시오: 그냥 한 귀로 흘려. 농담해본 거니까. 어차피 맞을리도 없고...

 

나시: 음. 저기. 얘들아.

 

나나시가 문득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끌었다.

 

나시: 우리 히무로를 믿으면서 지내보자.

 

다른 이들이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나시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나시: ...너무 갑작스러웠나? 그렇지만 꼭 말해야 할 것 같았어.

 

23T5U130: 히무로는 안전해. 내가 보증할게.

 

나시: 히무로가 안전하냐 안전하지 않느냐가 아니야. 동료끼리 뭉치느냐 뭉치지 않느냐지.

 

나시: 내가 오늘 배운 게 있어. 이 탑에선 동료가 필요해. 이바라가 없었으면 하기와라는 어떻게 됐을지 모르고. 23T가 없었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됐을지 모르듯이. 우린 서로에게 서로가 필요해.

 

나시: 히무로의 과거를 보고 모두 놀란 건 알아. 나도 놀랐어. 덮어두고 지내기엔 꺼림칙했겠지. 같은 카텟 기관 소속인 나도 그랬을 정도니까...

 

나시: 하지만 히무로는 우리의 적이 아니잖아. 히무로는 엄연히 우리의 동료야.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의 과거도 공개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를 노리던 카이다와 매우 대조적이잖아. 히무로를 유령 취급하면서 지낼 순 없어.

 

나시: 그리고 우리에게 히무로가 필요한 만큼. 히무로도 우리가 필요할 거야.

 

롤 브라이트: 전 찬성이에요. 다른 이들을 해치려는 명확한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누구든 저희와 함꼐할 자격이 있어요.

 

바라 쿠리스: 사실. 자연스럽게 양호실에서 우릴 도와준 시점에서 게임 끝이지 뭐...

 

루미나미 나몬: 그 말에 찬성이야!

 

이런 여론은 예상 밖의 일이었기에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까 고민이 되었다. 다른 이들이 날 이해할 기회가 주어질 줄은 몰랐는데.

 

이 자리에 없는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여론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게 되었다. 좋은 성과였다. 무슨 표정을 지을까 하는 고민 끝에 나는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즈미 나데시코: 다행이다! 다들 히무로랑 사이 틀어진 줄 알고 걱정했거든... 전용실까지 열었는데 그렇게 되는 건 좀 너무하잖아.

 

기와라 우시오: 이건 맞지. 그래서. '히물'오랑 '허물' 없이 지내자. 결론은 이거야?

 

롤 브라이트: 그렇죠. 좋은 결론이네요.

 

유즈미 나데시코: '히물'오랑 '허물' 없이 지낸대. 아하하하하!

 

무로 시라베: 하하.

 

이번에는 웃는 데에 성공했다.

 

루미나미 나몬: 잠깐. 궁금한 게 있어. 하기와라. 이바라. 캐롤. 나나시 네 명은 카이다에게 잡혀 있다가 돌아왔다고 쳐. 카나리는 뭐 자기 방에 틀어박혔을 테니까 궁금하지도 않고.

 

루미나미 나몬: 히무로랑 마유즈미 너희 둘은 어디에 있다가 합류한 거야? 아침에도 모습이 안 보이던데.

 

무로 시라베: 마유즈미가 내 방에 찾아왔어.

 

바라 쿠리스: 어이쿠! 시작된 건가... 잘 봐둬라 신입.

 

루미나미 나몬: 그래? 의외네. 둘이 뭐 했는데?

 

유즈미 나데시코: 옛날 얘기 나눴어. 찹쌀떡이랑 커피도 먹었고.

 

후루미나미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루미나미 나몬: 흠... 그렇단 말이지. 마유즈미랑 좋은 시간을 보냈나 봐?

 

무로 시라베: 그래.

 

루미나미 나몬: 그럼 이번엔 나랑 보내자.

 

유즈미 나데시코: ...엥.

 

무로 시라베: 상관은 없는데. 이유가 있어?

 

루미나미 나몬: 세 가지 있어. 첫 번째. 나도 네 얘기가 궁금하고. 두 번째. 너한테 내 얘기 해 주고 싶고.

 

무로 시라베: 세 번째는?

 

루미나미 나몬: 뭣보다 중요한 건데. 자유행동 스택 쌓아야 돼.

 

 

 

 

 

 

 

 

자유행동 투표 결과 후루미나미와 칸나즈키의 자유행동이 우선적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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