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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1

더 단크 타워 챕터 1 - 9

by 도타싫어! 2020. 5. 29.

롤 브라이트: 그런 비인도적인 일을 8명에게...

 

이토 유즈루: 그럼 뭐야. 세상 어딘가에 나머지 7명이 숨어 있다는 거야?

 

무로 시라베: 현재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나도 몰라.

 

나리 케이토: 아니 그걸 모르면 어떻게 해?! 다 잡아들여야지!

 

리 레이코: 왜 잡아들여야 하지? 초고교급 재능을 다수 가진 자라면 공리를 증진시킬 수 있다.

 

"그럼 좋은 거 아니에요? 초고교급 몇 명의 역할을 혼자서 할 수 있잖아요. 오메가만큼은 아니더라도 잘만 구슬리면 기관을 위해 써먹을 수 있어요."


"아니. 연구소에서 자료들을 긁어모았는데. 저건 아직 미완성품이야. 재능은 집어넣었지만 그것들이 온전히 발현되진 못했어."

 

"그래도 어지간한 사람들보단 낫잖아요. 그 미친놈들도 결국은 폭도들을 적대하는 쪽이니까 적당히 간 좀 보면 우리 쪽에 붙을지도 몰라요."

 

"너 로들이 왜 서로 협력해야 하는 줄 알아?"


"협력해야 완전해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단지 재능만의 얘기가 아니야. 서로 협력해야 완전해질 수 있다는 건,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완전해질 수 없다는 거야. 그러니 재단 놈들 입장에선 로들이 서로 협력하게 만들어야 하지. 그런데 아무리 세뇌하고 교육하고 개조해도, 한 로가 자신의 처지에 만족한다면 어떻게 될까? 초고교급 재능 몇 개로 만족한 채 자신의 삶을 찾으려 잠적한다면?"

 

"뭐... 로는 8명이나 모일 수 없겠죠? 그 미친놈들 계획은 물거품이 되던가 난황을 겪게 될 거고요."

 

"그래서 재단은 로들이 서로 협력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어. 다른 로가 아니고서야 보완할 수 없는,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결점을 하나씩 심은 거지. 로의 장점으로밖에 덮을 수 없는 결점을 종양처럼 심어 놓은 거야. 서로 의존하도록."

 

"아. 그럼 로들이 자연스럽게 뭉칠 테니까요?"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을 만한 결점이거든. 결국 갈 곳이 로밖에 없어지니 서로 뭉칠 수 밖에 없지. 물론 세뇌가 성공적으로 됐다면 로들은 옳다고 교육받은 대로 행동했을 테지만. 재단 놈들도 보험을 들어 놓은 거지."

 

"그런데 그는..."

 

"미완성인 채로 완성된 거야. 결점을 극복할 수 없는데 장점조차 뚜렷하지 않고, 위험성은 가득한 놈이야. 상해버린 계륵이지. 우리 기관에서 품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어."

 

무로 시라베: 아니야. 그들은 체포되어야 해. 그들과 재단의 목적은 옳지 않아. 공리를 심하게 훼손시킬 거야.

 

기와라 우시오: 그 재단이란 곳이 널 만든 목적이 뭐길래?

 

이바라가 하기와라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바라 쿠리스: 믄드릇뜨느. 으 스끄으... 즈금 그그 믈으느?

 

무로 시라베: 하기와라의 표현은 틀리지 않았어. 난 로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난 뒤 로의 실험체로 쓰인 것이니. 만든 목적이라고 하는 게 옳아.

 

기와라 우시오: 들어봐봐. 그 작자들이 천재의 결점을 보완하려 했다면 그 목적이 있을 거 아니야? 목적이 없는데 개선을 왜 해. 그냥 있는 거로 만족하지.

 

롤 브라이트: 애초에 그 천재라는 사람이 존재하긴 하나요? 전 히무로 씨가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히무로 씨 이전에 그런 천재가 있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려워요.

 

난 칸나즈키의 쪽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예전처럼 거짓말을 한다면 그녀에게 들킬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내 전용실을 개방한 것은 헛수고가 될 터.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거짓말은 하지 않되, 진실을 전부 말해선 안 된다.

 

무로 시라베: 극비 정보였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루미나미 나몬: 그런데 넌 알고 있네?

 

무로 시라베: 나야 실험 도중 지겹게 들어온 것이 그 천재에 대한 정보였으니까.

 

나리 케이토: 야. 어때?

 

나즈키 시노부: 나쁘지 않아.

 

나리 케이토: 저거 거짓말은 아닌가 본데...?

 

나즈키 시노부: 나 거짓말 탐지기 아니거든!

 

키와 아유키: 잠시만 조용히. 히무로의 말을 들어보자.

 

카나리가 말을 멈추었고. 난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했다.

 

 

 

 

더 단크 타워

챕터 1: < 죽여 마땅한 사람 둘 >

"과정은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무로 시라베: 초고교급의 영향력을 신봉하다시피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그들은 초고교급이라는 엘리트주의가 희망이라는 관념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 생각했어.

 

무로 시라베: 그리고 그 상징이.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지.

 

리 레이코: 선한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초고교급 학생들은 우상화되어 있다. 아직 미숙한 고등학생 치고는 과분한 관심을 받고 있지.

 

리 레이코: 연예인 혹은 선거 활동자들을 방불케 한다. 초고교급. 희망봉 학원. 그 후광이 있는 것 만으로 사람의 가치가 올라간다. 위계질서가 생긴다. 그 집단에 소속되어있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가치를 증명한다.

 

리 레이코: 초고교급 행운. 실로 우습지 않나? 그들은 아무런 힘도 없다.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유즈미 나데시코: 초고교급 행운...?

 

가미 토가: 추첨 학생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희망봉 학원은 초고교급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학생들만을 스카우트하죠.

 

가미 토가: 그러나 평범한 학생들을 스카우트할 때가 있으니. 바로 추첨을 통해 뽑힌 일반 학생을 '초고교급 행운' 이라는 재능 하에 스카우트할 때입니다.

 

기와라 우시오: 이거 사실 말 많지. 탈도 많고. 룰렛 한 번 잘 돌리면 인생 쫙 피는 거잖아. 인생 한 방!

 

리 레이코: 아무런 재능도 없는 사람조차 단 한 번의 추첨으로 재능이 있는 자들과 똑같은 후광을 누린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리 레이코: 의무 없는 권리는 존재해선 안 된다. 그러나 누구도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가끔 이 사회는 초고교급에 중독된 듯하다.

 

키와 아유키: 그렇지만 초고교급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초고교급이 되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사람들.

 

무로 시라베: 여러 장점과 단점이 있지만, 적어도 그들은 초고교급의 장점에만 집중했어. 거의 그 영향력을 맹신하는 수준에 다다른 뒤, 이들의 이론은 큰 변화를 맞이해.

 

무로 시라베: 초고교급이라는 개념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지만, 누구에게나 영향을 끼칠 순 없었어.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지.

 

무로 시라베: 국가 간의 갈등. 인종차별. 환경 파괴. 빈부 격차. 초고교급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의문이 생겨났어.

 

키와 아유키: 그 답이...

 

무로 시라베: 날 만든 이들은 초인을 답으로 제시했어. 초고교급보다 뛰어난 사람. 초고교급 재능을 몸에 여러 개 가진 사람들. 초인들.

 

무로 시라베: 그 초인들이 사람들을 이끌어야만, 보다 우수한 자들이 대중을 통치해야만 세상이 평화로워지리라 여긴 거야.

 

루미나미 나몬: 아니 이건 좀 설정이 과도한데...?

 

유즈미 나데시코: 맞아. 아무리 사람들이 초고교급을 동경해도 그건 좀 이상해... 사람들이 초고교급을 보고 희망을 느낀다고?

 

대몰락과 그 여파에 대해 알려줄 수 없으니, 그들이 내 주장에 의아함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리 레이코: 이론이 뒤틀렸구나. 급진적 우생학에 가까워졌다.

 

무로 시라베: 네 말이 맞아. 그들의 이론은 점점 비대해졌고, 목표는 처음과 동떨어졌지. 사이비 종교나 음모론으로 끝날 발상이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어.

 

무로 시라베: 초고교급보다 우수한 자들이 서로 협력하며 사람들을 이끄는 사회. 전쟁도 환경 문제도 테러도 없는, 완벽하게 통제되며 지배당하는 전체주의 사회. 그들은 그것을 꿈꿨어.

 

"대몰락의 여파는 암을 낳았다. 치유될 수 없는 암이다. 대몰락 이전의 세상은 다시는 도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닿을 수 없는 태양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새로운 경로를 개척해야 한다."

 

루미나미 나몬: ...그거 참 멋진 신세계네.

 

유즈미 나데시코: 멋지긴 개뿔! 엄청 무서워! 뭐야?!

 

가미 토가: 포부는 크다만 허황된 계획이군요. 세상이 발칵 뒤집혀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무로 시라베: 허황된 계획이지만 그들은 될 거라고 생각했어. 거듭 말했지만 내가 여기에 있는 한 그들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으니 안심해도 좋아.

 

허황된 계획이지만 8명의 로가 전부 모였다면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대몰락을 겪은 이후의 병든 사회가, 자신만의 특기 분야를 발휘하며 100% 이상의 역량을 내는 초인들을 상대로 버틸 수 있었을까. 모르는 일이다. 이젠 절대 모를 일이 되었으니 어찌나 다행인지.

 

리 레이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다. 결국 넌 초고교급 재능들을 인위적으로 부여받은 자 아닌가?

 

리 레이코: 그렇다면 넌 초고교급이라 불려야 한다.

 

이토 유즈루: 그게 지금 중요하냐?

 

리 레이코: 중요하다. 프로파일러는 거짓말을 했다. 초고교급 프로파일러면서 자신이 그냥 프로파일러라고 주장했다.

 

무로 시라베: 난 희망봉 학원에게 선택받지 못했어. 그러니 엄밀히 말해 난 초고교급이 아니야. 초고교급이라는 명칭은 희망봉 학원에 재학 중인 것을 전제로 성립해.

 

무로 시라베: 또한 내겐 어떤 재능도 온전히 주입되지 못했어. 초고교급이라 불리기엔 하자가 있지. 그러니 난 그냥 프로파일러야.

 

"역시 초고교급 프로파일러야. 대단해. 내 말이 맞지? 널 데려온 건 신의 한 수였다니까?"

"난 초고교급 프로파일러가 아니다."

"겸손해할 필요 없어."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다. 난 초고교급이 아니다. 그렇게 불리고 싶은 의사도 없다."

 

기와라 우시오: 그냥 프로파일러가 아니라 그냥 프로펠러는 없나요? 엌ㅋㅋ

 

가미 토가: 말장난이나 하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저희는 히무로 씨와 관련된 문제를 똑바로 바라봐야 합니다.

 

기와라 우시오: 쟤 어딘가 싸한 구석 있는 거 다들 알고 있었잖아. 새삼스레 그러네?

 

나리 케이토: 그렇다고 무슨 음모론자 새끼들이 만든 실험체도 그러려니 할래...? 난 그렇게 못 해. 꺼림칙한 놈...

 

키와 아유키: 모두들 각자 생각이 많은 거 알아. 지금은 일단... 해산하자.

 

리 레이코: 동의한다. 다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

 

나시: ......

 

 

 

 

 

 

 

나시: ...예상치 못한 일이었어.

 

난 23T를 찾아가 대화를 나눴다. 미도리카와에겐 대화의 내용이 들리지 않도록 그의 전용실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23T5U130: 히무로가 자기 전용실을 순순히 열어주더라도 자신의 과거까지 공개할 줄은 몰랐네.

 

23T5U130: 꽤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절박한 상황이니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걸까?

 

나시: 기관원들이 히무로를 반기지 않았다는 게 그 일 때문이었구나...

 

23T5U130: 응. 그 정도의 대규모 인체 실험은 작은 소동으로 치부될 일이 아니었거든. 모두가 그 일의 심각성에 집중하고 있었지.

 

23T5U130: 그런데 그 실험체. 아마 연구소에 습격해 실험을 중단시키지 않았다면 완성되었을 실험체가 기관에 들어온다니 반대가 심했어. 언제 배신할지 모른다며 배척했지.

 

나시: 아...

 

탑 안팎에서, 누군가는 흰 물건을 수색했다. 누군가는 휴식을 취했다. 누군가는 카이다와 미도리카와에 대해 이야기했다. 배가 고파지면 식사를 하고 시간이 남으면 대화를 나누며, 모두가 자신만의 방법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우리 중 대부분은 그저 기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스스로를 향한 기만이었다. 아직 모든 것이 우리들의 손에서 흘러 내려가지는 않았다는 체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살인 게임. 미도리카와. 카이다. 그리고 히무로. 하루 만에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많은 긴장감이었다. 머리가 다 차 버린 우리들은 전부 삼키지 못하고 남긴 생각들을 냉장고에 넣었다. 내일을 기약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던 우리는 밤이 다가오자 숙소로 숨어들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탑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나 역시 그랬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몸을 뒤척였다.

 

히무로의 과거... 카텟 기관... 나의 과거.

 

여러 생각들을 비집고 한 목소리가 들렸다.

 

리 레이코: 나와라. 이름 없는 남자.

 

나시: 모리?

 

리 레이코: 할 일이 없다면 당장 나와라. 네가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안다.

 

솔직히 안 좋은 예감밖에 들지 않아서, 난 입을 꼭 다물고 모리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곧 똑똑 소리가 들렸다. 모리가 문을 두드리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밖으로 나가지 않자. 똑똑거리는 소리가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이토 유즈루: 그러다 문 부수겠다! 기물 파손하면 즉각 처형인 거 몰라?

리 레이코: 그 정도로 세게 두드리고 있진 않다.

 

나시: ...나이토? 너는 웬일이야?

 

리 레이코: 내가 부를 때는 죽은 체하면서 승부사가 부를 때는 반응하는구나. 왜지?

 

이토 유즈루: 평소의 행실이 돌아오는 거지. 하! 봤냐 봤어?!

 

리 레이코: 콧대가 높아지는구나.

 

이토 유즈루: 아무리 높아도 네 것보다 높겠냐. 이 모아이 석상 같은 새꺄?

 

나시: 얘들아...?

 

리 레이코: 널 부른 용건은 토키와를 대신할 감시역의 필요성이다.

 

나시: 토키와? 아 맞아... 토키와가 이틀 연속으로 밤을 새울 순 없을 테니까.

 

이토 유즈루: 맞아. 원래는 나 혼자서 하려고 했는데 얘가 적어도 세 명이 필요하대. 말싸움하다가 지쳐서  결국 한 명 더 찾으러 다니고 있었어.

 

리 레이코: 공리의 증진을 위해서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리더를 계속 감시역으로 세우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분담해야 한다.

 

리 레이코: 그러나 한 명은 믿을 수 없고, 두 명은 서로를 노릴지도 모른다. 고로 세 명이 필요하다.

 

이토 유즈루: 아오 썅! 어차피 23T도 근처에 있잖아. 두 명 사이에 뭔 일이 나도 바로 달려올 거라고.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리 레이코: 유사시 네가 날 습격한다면 나는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나 역시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겠지만, 완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

 

이토 유즈루: 아니 애초에 내가 왜 널 죽이냐니까. 진짜 말 존나 안 통하네!

 

나시: 그런데 왜 나한테 왔어? 솔직히 내가 옆에 있어도 나이토라면 우리 둘 죽이고도 남을 텐데... 난 팔 굽혀 펴기 다섯 개도 연달아 못 해.

 

이토 유즈루: ...거 참.

 

나시: 아. 네가 우릴 공격할 거라고 가정한 건 아니야! 다만 굳이 나한테 올 필요가 있었냐는 거지.

 

리 레이코: 대안이 없었다.

 

대안이 없었다고? 그럼...

 

나시: 나 말고 다들 감시역을 거절한 거야?

 

이토 유즈루: 다는 아니고 거의 다지. 하기와라랑 이바라랑 후루미나미는 싫다 했어. 셋이 하기와라 전용실에 모여서 영화 본단다.

 

리 레이코: 오락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도피처가 되면 공리를 심하게 훼손시키지. 무당과 협상가는 완력이 강해서 나와 승부사만으론 유사시의 제압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그 둘은 제외했다.

 

이토 유즈루: 솔직히 야가미랑 칸나즈키라면 흔쾌히 우릴 도와줬을 텐데... 그리고 난 충분히 걔네 제압할 수 있거든?

 

리 레이코: 그건 네 자만이다. 네 마음가짐은 어중간하다. 그들이 널 죽이려 든다고 한들 진심으로 임하지 않겠지.

 

나시: 아까부터 예시가 너무 극단적이야... 우리가 무슨 피에 굶주린 짐승들도 아니잖아.

 

리 레이코: 아니. 우리는 본질적으로 그렇다.

 

이토 유즈루: 지랄 그만하고. 아무튼 카나리는 절대 안 도와줄 테니 애초부터 안 찾아갔어. 마유즈미는 감시역을 시키기엔 뭔가 불안하고... 그래서 캐롤이랑 너 둘 중 하나를 먼저 찾아오려고 했지.

 

나시: 히무로는?

 

이토 유즈루: ...히무로는. 어.

 

리 레이코: 프로파일러는 믿을 수 없다.

 

순간 내 표정이 조금 찌푸려졌다. 아무리 그의 과거가 심상치 않다지만 덮어놓고 그를 위험인물 취급하는 건 옳지 않다. 그는 그 위험인물 취급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과거를 공개한 것이고, 결국 그의 태도는 이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우리를 더 적대하지도 유난히 가까워하지도 않았다. 그는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가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난 마음속으로 그들의 판단을 납득했다.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납득해버렸다. 그 위선이 수치심이 되어 나의 얼굴을 조용히 달궜다.

 

히무로를 믿어줘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의 과거만으로 그에게 꺼림칙함을 느껴선 안 된다고. 그런 것쯤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무의식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 탑의 모두가 그를 어려워하고 있었다.  단지 다름에서 비롯된 거부감이었다. 우리와 너무나도 다르나 우리와 너무나도 닮은 사람. 우리는 그에게서 꺼림칙함을 느끼고 있었다.

 

당신에게 지인이 있다고 치자. 그렇게 막연한 사이는 아닌 사람. 만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그 사람의 내면도 취미도 무엇도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자.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연쇄살인마의 사생아였으며, 옆구리 안쪽에는 그 연쇄살인마가 남긴 흉터가 남아있다.

 

그 사실을 의도치 않게 알게 됐다면, 누가 그 사람을 어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차라리 몰랐으면 좋으련만'.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떼어낼 수 없는 색안경이 우리들의 동공에 달라붙었으니까.

 

어쩌면 단순히 껄끄럽다의 수준이 아닐지도 몰랐다. 우리가 그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은 단순한 어색함보단 두려움의 쪽에 더 기울어져 있었으니.

 

한 작가가 정립했던 공포의 세 갈래를 떠올렸다.

 

오염. 질병. 세균. 더럽고 비위 상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역겨움.

 

상어. 살인마. 지진. 대처 불가능성과 위험에서 비롯되는 두려움.

 

그리고 마네킹. 인형. 귀신. 불확실성과 불완전성에서 비롯되는 소름 끼침.

 

막연한 거리감과 소름 끼침은 살인 게임이라는 환경과 맞물려, 깊고 곧 넓어질 간극을 만들어냈다.

 

이토 유즈루: 솔직히 그렇게 나쁜 놈으론 안 보이지만... 지금 걔한테 가기엔 뭔가 좀 그래.

 

나시: 심각한 얘기였으니까... 알겠어. 이해할게.

 

리 레이코: 상담가와 너 중에서 널 먼저 고른 이유는, 네가 자유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주체적으로 행동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네게 행동의 지표를 제공하기로 했다.

 

리 레이코: 또한 넌 자기주장도 좀처럼 하지 않으며, 자존감도 낮기에 지속적인 교유웁. 웁.

 

나이토가 아무 말 없이 모리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내 기분이 상한 것을 눈치챘는지. 그는 어색한 분위기를 중재하려 한 것 같았다. 몇 초 뒤 그가 비명을 질렀다.

 

이토 유즈루: 으아아악! 내 손! 이 또라이가 날 물었어! 놔. 놔! 아아아.아.아.아.아! 아! 아! 놔!

 

리 레이코: 난 외부의 압제에도 침묵하지 않는다.

 

이토 유즈루: 아오. 쓰블... 존나 아프잖아 진짜!

 

리 레이코: 사전 동의 없이 내 입을 막으려 한 네 실책이다. 반성하고 행동을 개선해라.

 

롤 브라이트: 저기... 무슨 일 있나요?

 

나이토와 모리가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말싸움을 벌이던 도중. 캐롤 씨가 조심스래 문을 열며 우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셨다.

 

나시: 아. 소란 피워서 죄송해요.

 

롤 브라이트: 죄송할 것 까진 없어요. 어차피 아직 안 자고 있었으니까요.

 

리 레이코: 나와 승부사는 오늘 밤 잠을 자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일에 이름 없는 남자를 영입시키려는 도중 승부사가 내 입을 막으려 해 소동이 있었다.

 

롤 브라이트: ...네?

 

나시: 토키와 대신에 23T를 지켜볼 사람 세 명을 모으고 있었다는 얘기에요.

 

롤 브라이트: 아. 그렇군요. 불침번 일 말씀이셨군요!

 

리 레이코: 혹시 내일 감시역 중 하나를 맡아줄 생각은 없나? 마음같아선 내일 밤 당장 리더를 현장에 재배치시키고 싶지만. 효율적인 감시를 위해서 그에게 이틀간의 휴식은 주려고 한다.

 

롤 브라이트: 네. 기꺼이 그럴게요.

 

이토 유즈루: 나이스! 이제 내일 감시역은 두 명만 더 찾으면 되겠다.

 

나시: 들어가세요 캐롤 씨. 안녕히 주무세요.

 

롤 브라이트: 네. 나나시 씨도 안녕히 주무세요.

 

다시금 문 안으로 사라지는 캐롤 씨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토 유즈루: 나나시. 너 왜 캐롤한테 존댓말 쓰냐?

 

나시: 캐롤 씨가 먼저 쓰시니까... 나도 그냥 쓰게 되던데. 나보다 연상이신 것 같기도 하고.

 

이토 유즈루: 그래?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나도 존댓말 써야 하나? 반말 잘 쓰다가 갑자기 존댓말 쓰면 그것도 좀 어색한데 하 이걸 어떻게

 

리 레이코: 실용적인 담론을 나누자. 상담가는 공리의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다.

 

나시: 또 터치 얘기할 거지? 터치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 모든 위험을 막을 수 있다. 또 그 얘기할 거잖아.

 

리 레이코: 그 생각은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녀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단잠을 포기할 수 있다.

 

이토 유즈루: 그럼 이 자리에 서 있는 나도 인재겠네?

 

리 레이코: 그렇다. 매우 고무적이지. 스스로 행동할 의지가 있는 자는 누구든 능히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다.

 

리 레이코: 열 사람 몫을 할 수 있는 이가 스스로의 한계를 정해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리 레이코: 식당에 다녀오겠다.

 

이 말을 남기고 잠시 사라졌던 모리는 커피 세 잔과 설탕, 우유를 가지고 돌아왔다.

 

리 레이코: 식당에서 커피를 끓여 왔다. 들어라.

 

이토 유즈루: 밤에 카페인 마시면 몸에 안 좋은데...

 

리 레이코: 투덜거리지 말고 들어라. 밤을 지새우기 위해선 드는 것이 좋다. 네가 곯아떨어진다면 감시 체제에 차질이 생긴다.

 

이토 유즈루: 오냐. 끓여 왔는데 안 먹는 건 예의가 이니지. 잘 먹을게.

 

나이토는 식히지도 않은 커피를 그대로 쭉 들이키더니 자신의 얼굴을... 상당히 입체적으로 구겼다.

 

이토 유즈루: 으윽. 컥! 컥. 브ㄹㄹㄹㄹㄹ

 

리 레이코: 극찬 고맙다.

 

이토 유즈루: 아니. 딱히 네 커피가 맛없었다는 건 아니고. 걍 존나 쓰네...

 

나시: 펄펄 끓었을 텐데 용케 맛을 봤네? 설탕이랑 우유 넣지 그랬어.

 

이토 유즈루: 아니야... 도망가선 안 돼. 맞서 싸워야 해! 기사답게!

 

나이토는 눈을 부릅떴다. 마치 커피잔을 시선으로 부술 기세였다. 이를 악문 그는 단숨에 남은 커피를 전부 들이켰다. 자신의 업적을 보라는 듯이 그는 빈 커피잔을 자신의 머리에 대고 탈탈 털었다.

 

이토 유즈루: 성공! 내가 해냈다! 하하! 봤냐?!

 

나시: 굳이 그랬어야 했을 것 같진 않지만... 축하해.

 

리 레이코: 굳이 그렇게 마셔야 했나? 누군가와 경쟁하는 것도 아닌데.

 

이토 유즈루: 꼭 이렇게만 마셔야 하는 이유는 없는데... 내가 만든 규칙이 있어.

 

리 레이코: 규칙? 커피를 그렇게 마시는 것이 너의 규칙인가?

 

이토 유즈루: 꼭 커피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야. 사실 이건 아빠한테서 배웠는데... 고통과 직면하는 거야.

 

이토 유즈루: 고통을 피하기 위해 수단을 사용하다 보면, 그 수단이 떨어졌을 때 고통을 버틸 수가 없게 돼. 그러니 고통을 피하지 않고 기사답게 맞서라! 이런 거지.

 

리 레이코: 하아... 내가 들어본 것 중에 가장...

 

이토 유즈루: 씁! 들어 봐! 내가 커피에 설탕이랑 우유를 넣었다고 쳐. 근데 언젠가 설탕이랑 우유가 다 떨어지면. 난 달고 부드러운 맛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커피를 마실 수 없게 돼. 안주하는 삶을 살아선 안 된다는 거야.

 

나시: 그럼 음식에 간을 하나도 안 한다는 거야?

 

이토 유즈루: 설마! 먹는 즐거움은 포기 못 하지!

 

리 레이코: 행동의 기준이 불분명하다.

 

이토 유즈루: 기준? 그런 건 사실 내가 보기에도 모호하긴 한데...

 

이토 유즈루: 뭘 첨가하는 게 0을 플러스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이너스를 0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안 쓰는 느낌? 이해 가?

 

나시: 싱거운 음식에 소금은 쳐도 쓴 커피에 설탕을 뿌리진 않겠다... 이런 거구나?

 

이토 유즈루: 그렇채!

 

리 레이코: 생각보단 말에 뼈가 있구나.

 

리 레이코: 아. 말에 뼈가 있다는 것은 네 주장에 근거가 있다는 비유이다. 언어에 골격이 있다는 게 아니다.

 

이토 유즈루: 나도 그건 알아. 새꺄! 누굴 진짜 대가리가 텅텅 빈 사람으로 아나...

 

나시: 인정할 건 인정해주네? 매사 비판만 하는 줄 알았는데...

 

리 레이코: 지금 우리가 놓인 상황과 닮았기 때문이다.

 

이토 유즈루: 네 말이 맞아. 난 설탕. 나나시는 우유. 그리고 모리 넌 존나 쓴 커피!

 

나시: ...방금 그 말 진심으로 한 거야?

 

맨손으로 돌무더기에서 사람을 꺼낼 수 있는, 훤칠한 근육맨이... 설탕.

 

리 레이코: 역경의 중화와 중화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우리의 상황과 유사하다. 이 자리의 세 명이 사라지면 누가 인공지능과 총잡이를 감시할까?

 

이토 유즈루: 또 지랄 염병났네.

 

나시: 모리. 아까부터 너무 비관적인 거 아니야?

 

리 레이코: 우리는 리더를 대신해 이 자리에 모여 있다. 리더의 대역을 맡은 세 명이다.

 

리 레이코: 만약 언젠가 우리 셋이 죽는다면 누가 이 자리에 설 것 같나? 굳이 밤을 지새우며 남의 수고를 덜어주는 행위를. 공리의 증진을 위한 선행을. 과연 누가 감행할 것 같나?

 

이토 유즈루: 우린 안 죽어. 죽어도 남은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뭐. 캐롤 봤잖아?

 

리 레이코: 지나치게 낙관적인 사고다. 타인의 과거도 두려워하는 이들이 타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나? 그렇지 않다.

 

나시: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아무리 우수한 인재들이라고 해도 우리는 고등학생에 불과하니까. 누군가가 죽는다면 그걸 버틸 수 없을 거야. 무서워서 방에 틀어박히겠지.

 

아까 나처럼...

 

이토 유즈루: 난 안 그래!

 

나이토가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꼈다.

 

리 레이코: 네가 죽든 죽지 않든, 누군가는 이 자리에 서야 한다. 그러나 구성원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다.

 

리 레이코: 난 다른 이들에게 권유할 수 있을 뿐. 강제할 순 없다. 지금은 이름 없는 남자나 상담가가 우리의 뜻에 동참하고 있지만 이후의 일은 확신할 수 없다.

 

리 레이코: 결국 구성원의 자발적인 희생이 필수적인 사회는 그 끝이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구성원이 희생을 그만두고. 사회가 멈추는 일.

 

리 레이코: 그렇게 되면 누구도 커피를 마실 수 없게 될 것이다. 밤의 감시역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언젠가 어느 누구도 스스로 고역을 치르지 않는다면. 달고 부드러운 맛의 포로가 된 이들은 조금의 쓴 맛도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이토 유즈루: ...힘내자. 죽지 말자고. 안 죽으면 되는 거 아니야. 그렇지?

 

이토 유즈루: 빠샤! 죽지 말자! 나나시 너도! 힘내자!

 

나시: 어?! 어... 그래. 그러자.

 

갑자기 열정을 불태우는 나이토를 보는 내 목소리는, 왜인지 정말 초라하게 들렸다.

 

리 레이코: 본래 나는 커피에 설탕과 우유를 넣는다. 항상 그렇게 마셨다. 그러나 이 탑에 설탕과 우유가 떨어진다면, 나는 커피를 마실 수 없게 될 거다.

 

모리는 약간 식은 커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리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리 레이코: 쓰다. 중화 없는 역경은 이런 맛이구나.

 

이토 유즈루: 그래도 먹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뭐.

 

리 레이코: 최악의 경우 탑에서 커피 자체가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모든 노력은 실로 무의미하겠지.

 

이토 유즈루: 그래? 그럼 마실 수 있을 때 마셔 보자고. 딱 기다려! 커피머신 자체를 들고 올 테니까!

 

나시: 어차피 너희 둘 표정 보면 몇 잔 못 마실 것 같은데...

 

리 레이코: 이름 없는 남자의 말이 맞다. 아서. 과도한 카페인의 섭취는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말을 끝낸 모리가 문득 내게 눈치를 주었다. 왜 그런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문득 그녀가 내 커피잔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시: ......

 

나 혼자 설탕과 우유를 넣기엔 미묘한 분위기여서, 나도 설탕과 우유를 넣지 않았다.

 

나이토와 모리의 반응에 비해. 커피 맛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바라 쿠리스: 으아아악! 도저히 못 보겠어! 썅! 미친!

 

루미나미 나몬: 저 많은 사람들이 재난 앞에 무너지고 있네.

 

기와라 우시오: 자유의 여신상은 뭐로 만들었길래 저렇게 잘 부서지냐?

 

루미나미 나몬: 자유의 여신상의 강도와는 상관없이,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랜드마크가 덧없이 무너지는 것으로 재난의 위험성을 강조시키는 연출 아닐까?

 

바라 쿠리스: 아이고 아버지 어머니. 저 많은 사람들이 전부... 아앗...

 

루미나미 나몬: 저 사람들을 봐. 극 중 부여받은 역할이 엑스트라이기에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덧없이 죽어버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루미나미 나몬: 목표도 비전도 이루지 못한 채 무대에서 퇴장하지. 이 얼마나 비극적인가...

 

바라 쿠리스: 그만 해! 과몰입 되잖아! 아! 저 남자 좀 봐 세상에. 너무 끔찍해 진짜!

 

기와라 우시오: 너 재난영화 못 봐? 아까 좀비들 순대 터지는 거 봤을 땐 아주 좋아 죽던데?

 

바라 쿠리스: 좀비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지! 한두 명 죽는 거면 몰라. 저 차에 탄 사람들 말곤 싸그리 죽고 있잖아. 완전 끔찍해...

 

루미나미 나몬: 저 해일에 휘말리면 익사하는 게 빠를까, 어딘가에 치여 손상으로 죽는 게 빠를까?

 

바라 쿠리스: 나도 몰라 이 또라이... 와아아앗! 야! 저거 봤어?! 사람들이 무슨...

 

기와라 우시오: 걍 생각 없이 봐. 재난영화 보면서 생각을 하다 보면 답이 없어져. 과학적 오류에 클리셰에...

 

루미나미 나몬: 사실 단물이 많이 빠진 장르긴 하지.

 

기와라 우시오: 그렇다니까? 어쩌면 옛날엔 참신한 장르였을 진 몰라도 지금은 그냥 재난에 다채롭게 죽는 사람들 보려고 가는 거지.

 

기와라 우시오: 결국 안정감이야. 안정감. 저 사람들은 저렇게 죽어가는데 난 안전하다는 거에서 오는 안정감.

 

바라 쿠리스: 안정감? 나 지금 무서워 미치겠는데 개소리를!

 

루미나미 나몬: 지금은 네 반응이 정상이야. 나랑 하기와라가 연출에 무뎌질 정도로 영화를 많이 본 거야.

 

기와라 우시오: 아니. 내 말이 맞다니까? 너희 그런 적 없어? 밖에 비가 오고 천둥이 치는데 난 자려고 누워있는 상황 말이야.

 

기와라 우시오: 그때 뭔가 편안~하잖아. 번개가 치든 비바람이 불든 내가 창문을 닫아두는 한 난 안전해. 아. 집에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 느낌 받아본 적 없어?

 

루미나미 나몬: 알 것도 같아.

 

기와라 우시오: 뭐든 간에 내 얘기가 아닌 이상 뜬구름이 되는 거지. 이런 적 있지 않아? 창 밖을 보라. 창 밖을 보라. 밖에 비가 오는데 누가 우산을 안 가져왔는지 죽어라 뛰고 있네.

 

기와라 우시오: 그거 보면 어떤 느낌 들어? 재밌잖아. 그게 다야.

 

바라 쿠리스: 글쎄. 난 좀 안쓰럽던데... 그러다가 누가 웅덩이에 넘어지기라도 하면 좀 안됐다 싶어.

 

루미나미 나몬: 웅덩이에 넘어졌는데 하필 품 안에 중요한 서류, 지병을 치료할 수 있는 가루약, 솜사탕이 있다면 비극적인 일이 되겠지.

 

기와라 우시오: 그런데 난 그걸 모르잖아. 애초에 알 필요도 없어. 그냥 재미만 느끼면 될 일이야.

 

루미나미 나몬: 샤덴프로이데 말이구나.

 

바라 쿠리스: 그건 또 뭐야?

 

루미나미 나몬: 남의 불행에 기쁨을 느끼는 감정이야. '쌤통' 이라고도 불리지.

 

기와라 우시오: 갈 곳 없는 불안감과 허황된 상상력을 합쳐 관음 하며 소화하는 것. 그게 재난영화야. 그러니까 저기 죽어가는 엑스트라들한테 공감할 필요 없어. 우리를 즐겁게 만들기 위한 건데 겁을 왜 먹어?

 

바라 쿠리스: 지랄 좆문가 납셨네... 난 그런 거 못 해. 사람들이 저렇게 죽는 거에서 안정감을 어떻게 느끼냐. 그냥 존나 끔찍해.

 

바라 쿠리스: 영화를 얼마나 보면 그런 소리를 태연하게 하니? 너 싸이코야?

 

기와라 우시오: 아뇨 전 뚱인데요?

 

바라 쿠리스: 개새꺄!

 

루미나미 나몬: 하기와라는 싸이코 아니야. 아까 좀비 영화에서 아주 기절 직전까지 간 걸 보면 절대 아니야.

 

루미나미 나몬: 꺄아아아악! 씨발! 그러지 마! 아 이러지 말라고! 나한테 이러지 말라고! 꺄아아악!!

 

바라 쿠리스: 진짜 과장 안 하고 개똑같다. 역시 초고교급 연기자야.

 

루미나미 나몬: 내 캐릭터성. 내 아이덴티티를 되찾았다. 하!

 

기와라 우시오: 지랄하네! 내가 그 정도로 꼴깝을 떨었다고?! 아니. 좀비는 존나 무서운 놈들이란 말이야! 좀비는 ㅇㅈ해 줘야지!

 

바라 쿠리스: 네. 네. 그렇겠죠. 네 상상 속에서만 말이야. 그 와중에 얘기하다가 영화 내용 다 놓쳤네. 저 아저씨는 또 왜 저래... 이 영화 누가 보자고 했어?

 

루미나미 나몬: 그냥 다른 거 보자. 별로 재미가 없네.

 

기와라 우시오: 야. 그러고 보니 이 살인 게임도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있지 않을까?

 

바라 쿠리스: ...이건 또 뭔 소리야. 갑자기.

 

루미나미 나몬: 샤덴프로이데 때문에?

 

기와라 우시오: 룰에 집착하는 면모. 귀여운 마스코트. 정체불명의 장소. 살인 게임이라는 자극적 소재. 그래 이거 완전 클래식 클리셰!

 

기와라 우시오: 무슨 쇼 같아. 짜고 치는 쇼 같다고.

 

바라 쿠리스: 모노로그는 못생겼잖아. 귀여운 마스코트가 아니야.

 

루미나미 나몬: 난 귀엽던데? 뭔가 딱딱한 말투와 겉모습 안에 여리디 여린 내면이 있을 것 같은...

 

기와라 우시오: 귀여움은 주관적인 거니까 그건 덮어두고, 어떤 이유에서라도 이 살인 게임은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있을 거야.

 

기와라 우시오: 그럼 대체 왜 보고 있을까? 즐거움을 위해? 그렇다면 이 살인 게임의 목적은 관중들을 즐겁게 해 주는 거겠지.

 

기와라 우시오: 모니터링을 통한 연구를 위해? 그렇다면 목적은 극한 상황에 초고교급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연구하는 걸 테고.

 

루미나미 나몬: 하지만 우리로선 알 도리가 없어. 제4의 벽을 뚫을 수 없으니까.

 

바라 쿠리스: 나중에 조사를 통해 알아내면 되잖아.

 

기와라 우시오: 그걸 조사를 통해 알아낼 수 있게 두겠냐? 우린 이미 존나 좆됐어.

 

기와라 우시오: 하. 그러고 보니 웃기지 않냐? 좆같은데 좀 웃기다. 지금 재난에 휘말려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내가. 재난영화에서 죽는 사람들한테 공감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거 말이야.

 

바라 쿠리스: 야... 그 지랄맞은 상황 잊자고 여기서 영화나 보고 있는 거잖아. 더 말하지 마. 분위기 다 식었어.

 

기와라 우시오: 역설적이라고 부르나? 만약 이걸 관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방금 우리가 나눈 대화를 보며 최소한의 즐거움을...

 

루미나미 나몬: 어이 하 씨. 입 닥치고 팝콘이나 먹어.

 

 

 

 

 

 

 

이다 쿠로하: 너.

 

도리카와 아쿠토: 여보세요. 할 말 있어?

 

이다 쿠로하: 원하는 게 뭐야. 씨발 새끼야.

 

도리카와 아쿠토: 말을 좀 곱게 해 봐.

 

이다 쿠로하: 닥쳐. 원하는 게 뭐냐고 묻잖아.

 

도리카와 아쿠토: 이틀 동안 굶었으면서 조금도 안 지친 것 같네? 대단해. 이대로 널 굶겨죽이기라도 하고 싶지만 그건 이루어지지 않겠지. 너도 발악할 테니까.

 

이다 쿠로하: 나한테 왜 이러는데?

 

도리카와 아쿠토: 내가 원하는 걸 말해 줄게. 누구와도 접촉하지 마. 이 탑의 누구와도. 접촉할 생각 하지 마.

 

이다 쿠로하: 왜냐고 내가 묻고 있잖아. 대답 안 해?!

 

도리카와 아쿠토: 왜냐면 네가 누군가를 인질로 잡을 것 같거든. 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야.

 

도리카와 아쿠토: 물론 네가 누굴 죽였다간 즉각 처형당할 테니 그럴 순 없겠지. 남을 해치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이제 절박함이 느껴져?

 

이다 쿠로하: 당장 널 잡아서 네가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어.

 

도리카와 아쿠토: 마음대로 해. 하지만 네가 나를 모르는 한. 그리고 내가 너를 아는 한. 협상의 소재는 항상 내 손에 있다는 걸 기억해 둬.

 

도리카와 아쿠토: 끊어.

 

이다 쿠로하: 야. 잠깐! 이런... 개 씨발...

 

이다 쿠로하: 좆같은 새끼...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다 방법이 있다고... 내가 언제까지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

 

이다 쿠로하: 반드시 몇 배로 갚아 주겠어... 개새끼가 왜 나한테...

 

모노로그: 그래서. 네가 허기를 채우는 방법은 장미를 뜯어먹는 거냐? 스스로의 존엄을 한 없이 내던졌구나.

 

이다 쿠로하: 닥쳐. 네 제안도 안 받을 거니까 일찌감치 꿈 깨.

 

모노로그: 글쎄. 어떻게 될까. 두고 봐야 아는 일이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침이 밝을 때까지 미도리카와가 죽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적어도 전용실에서 실수로 잠에 빠져 처형당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은 듯하다. 아직까지는.

 

과연 그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사람이 잠을 자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그의 정신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나흘까지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난 좋지 못한 상황에 놓였다. 이제 미도리카와와 비슷한 입장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위험한 물건도 소지하고 있지 않지만... 좋지 못한 건 여전하다.

 

카이다는 여전히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급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 명이 수색조를 구성했다. 그러나 누가 참여하는지는 듣지 못했다. 내게 수색조에 대한 것을 발설할 만큼 주의력이 산만한 사람이 카나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야가미와 칸나즈키다. 그 둘은 강한 완력을 가지고 있기에 비상 상황에도 어느 정도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이토 역시 참여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새벽 동안 23T를 감시했으니 체력이 충분하지 않다.

 

잠깐 한숨을 쉬었다. 섣불리 뒤를 캐거나 움직인다면 사태가 더욱 악화될 수도 있다. 그러니 그 두 명에 대해서는 우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당분간은 미도리카와가 전용실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려도 되리라.

 

누군가가 숙소의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안녕. 히무로...?

 

무로 시라베: 무슨 용건이야?

 

유즈미 나데시코: 그런 거 없이 그냥 왔어.

 

거짓말을 하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아. 용건이 있으려나... 잠깐 네 전용실에 가보고 싶은데, 열어줄 수 있어? 꼭 열어야만 하는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열어줬으면 좋겠어.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용건이 없었던 걸까.

 

무로 시라베: 그래. 상관없어.

 

유즈미 나데시코: 좋아. 고고씽.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마유즈미의 요청에 응하긴 했지만, 난 전용실의 문을 여는 와중에도 의아함을 느꼈다.

 

마유즈미가 왜 내 전용실에 찾아온 것인가? 내가 관찰한 대로의 그녀는 낯선 환경을 꺼리는 사람이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표본에 실마리가 있는 것인가?

 

무로 시라베: 내 방에 그렇게 재미있는 물건은 없어.

 

유즈미 나데시코: 응. 어려운 게 많긴 하더라. 모르는 용어도 많았고.

 

무로 시라베: 그런 내 전용실에서 뭘 찾으려 그래? 앞뒤가 안 맞아.

 

유즈미 나데시코: ...저거.

 

그녀가 전용실 구석의 유리벽을 가리켰다.

 

무로 시라베: 관심이 있어?

 

마유즈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전용실 구석의 유리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유즈미 나데시코: ...여기에서 계속 지낸 거야?

 

무로 시라베: 계속 지낸 건 아니야. 약물을 투여하거나, 시험을 통과하거나, 실험을 진행할 땐 다른 곳으로 갔어.

 

유즈미 나데시코: 이 좁은 방 안에 갇혀서. 아니. 방이라고 부르지도 못할 곳에 갇혀서 계속... 원하지 않는 일을 해 왔던 거구나.

 

무로 시라베: 맞아.

 

유즈미 나데시코: 그거 정말... 슬프다. 정말 슬퍼.

 

마유즈미의 말끝이 흐려졌다. 분명 내 과거가 다른 이들에 비해 좋지 않은 편에 속하지만, 이 정도로 공감할 수가 있는가? 말끝을 흐릴 정도로? 오히려 내 과거가 드문 만큼 공감하기 어려워야 할 것이다. 마유즈미는 어떻게 나에게 공감하고 있는가?

 

유즈미 나데시코: 많이 힘들지. 그렇지 않아? 그냥...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게 말이야.

 

유즈미 나데시코: 내가 원해본 적도 없는 역할을 떠맡고,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고, 원하는 일은 하지도 못한 채 계속. 계속...

 

마유즈미의 말에 나는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아직 표본이 부족해서인지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그녀에게서 본 것은 고작 압박적인 가정환경, 매체와 정보를 통제당하는 상황, 보수적이고 전통 중시적인 부모, 감금의 가능성 높음, 의무교육 이수하지 못했을 가능성 높음,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기대감과 그보다 훨씬 큰 두려움뿐이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초고교급 격투가. 마유즈미 나데시코(黛 撫子). 집 안에서 수련만 하다가 몇 년 만에 밖으로 나온 거라 무서우... 흥분되네. 내 몸이 떨리는 건 그거 때문이야.

 

거짓말은 진심과 정반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것은 틀린 말이다. 거짓말을 하는 자들은 있을 법한 일을 꾸며낸다.

 

있을 법한 일이란 실제로 있었던 일. 대개는 숨기고 싶은 진실이다. 거짓말은 표절작과 같은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원본을 반영하되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급조한 흔적이 남는다.

 

그리고 그 세심한 흔적들. 표절을 들키지 않기 위해 정교하게 꾸며진 장식은, 항상 부자연스러운 인상을 남긴다. 그것에 집중하면 누구든 볼 수 있다. 진실을 비춘 채로 빚어지는 것이 거짓말이기에 그것에는 언제나 부분적인 진실이 숨어 있다.

 

초고교급 격투가. 집 안에서 수련만 하다가 몇 년 만에 밖으로 나온 거라 무서우... 흥분되네. 내 몸이 떨리는 건 그거 때문이야.

 

집 안에서 몇 년 만에 밖으로 나온 거라 무서우... 흥분되네. 내 몸이 떨리는 건 그거 때문이야.

 

집 안에서

 

몇 년 만에 밖으로 나온 거라

 

무서우... 

 

무로 시라베: 너도 그랬구나.

 

유즈미 나데시코: 어차피 곧 말하게 되겠지만, 조금은 더 숨기려고 했는데... 가끔 넌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것 같아.

 

무로 시라베: 그건 사실이 아니야. 난 네가 날 찾아온 이유조차 알 수 없어.

 

유즈미 나데시코: 그건 나도 잘 몰라. 이상하지? 내가 왜 이럴까. 이 탑에 온 뒤부턴 전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야.

 

유즈미 나데시코: 내가 아는 게 있다면, 네가 적어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뿐이야. 그거 하나뿐인데... 어떻게 네 방까지 오게 된 걸까?

 

변화가 생기고 있다. 내 결함에 대한 변화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부도덕한 일이 아니다.

 

무로 시라베: 이야기를 나눠 보자. 그런다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스토리 큰 틀만 잡아두고 즉흥으로 쓰니까 너무 전개가 산으로 가는 느낌이 드네요

 

분명 처음 구상했을 땐 나쁘지 않게 풀 수 있겠다~ 싶었는데 히무로도 메리수 느낌이 많이 나는 거 같음 

 

빌드업을 너무 조져버렸지만 꾸준히 봐주시는 분들에겐 언제나 감사합니다

 

댓글과 의견들은 언제나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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