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로그: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나?
카이다 쿠로하: 닥쳐.
모노로그: 새벽부터 날이 밝을 때까지 달렸는데도 벽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다시 한 번 벽을 향해 달릴 게 아니라 이 꽃밭에 어떤 작용이 있다고 의심해 봐야지.
모노로그: 상당히 실망스러운데. 아직도 깨닫지 못했나? 하. 그럴리가.
모노로그: 넌 그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뿐이야. 어찌 이리도 가련하고 한심한가. 불리한 환경이 주어지니 현실에서 도망치려고 한다는 게 말이야.
카이다 쿠로하: 닥쳐! 닥쳐! 닥쳐! 아아아아악!
모노로그: 어이쿠. 장미들에게 원수라도 졌나? 그런 건 아닐텐데? 네가 원수를 진 대상은 가족도 육신도 마음도 없는 장미 따위가 아니지 않나?
모노로그: 그래. 분이 풀릴때까지 그러고 있거라. 격하게 날뛴들 달라지는 일은 없다.
카이다 쿠로하: 야.
카이다 쿠로하: 너 나 알아?
모노로그: 네가 스스로에 대해 아는 것보다 많은 것을 알고있다.
모노로그: 이는 탑의 다른 이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지만, 너에게는 더욱 적절하구나. 유용한 비수여.
카이다 쿠로하: 야. 너. 목적이 뭐야. 나한테 원한이 있든 조직한테 원한이 있든 그냥 죽이면 될 거 아니야.
모노로그: 원한? 고작 원한? 정말 상황 파악이 전혀 되고 있지 않구나. 이곳에 갇힌 게 고작 원한 따위라니.
모노로그: 그래. 네가 무엇을 알겠느냐. 넌 사람이 아니라 그저 유용한 비수일 뿐인데.
토키와 아유키: 미도리카와. 듣고 있어?
토키와 아유키: 너도 어렴풋이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곧 우리는 히무로의 전용실을 탐사할 거야. 그러나 나는 당장 탐사를 떠날 수 없어.
토키와 아유키: 일단 다이얼로그를 통해 모두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보고받을 거고. 이후 잠시 감시역을 교대하고 직접 탐사할 예정이야.
토키와 아유키: 그리고. 넌 우리에게서 정보를 공유받지 못해.
23T5U130: 토키와. 그걸 언급한들 좋은 작용이 있을까?
토키와 아유키: 나쁠 작용도 없어. 미도리카와가 카이다에게 총을 겨눈 시점에서 그는 위험인물이야. 계속 정보를 공유할 순 없지.
토키와 아유키: 23T. 넌 안 가도 되겠어?
23T5U130: 난 이미 그에 대해 알고 있는데 굳이 갈 필요가 없지. 같은 카텟 기관 소속이니까.
토키와 아유키: 그렇구나. 알겠어.
미도리카와 아쿠토: 히무로가 스스로 전용실을 연 거야?
23T5U130: ......
미도리카와 아쿠토: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 일방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해.
미도리카와 아쿠토: 그의 방에는 위험 물건이 없는 모양이지? 의심을 없애기 위해 자신의 전용실을 연다면 말이야.
미도리카와 아쿠토: 혹은, 자신이 위험 인물이라고 규정될 리스크를 감수했을지도 모르지.
후루미나미 나몬: 왓슨. 어디 있다가 이제 온 거야?
후루미나미의 질문에 난 적합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전용실 문을 두드리자마자 그녀가 태연하게 말하며 문을 열어줬기 때문이다.
그녀는 날 이상하리만치 경계하지 않았다. 왓슨이라면 셜록 홈즈에 등장하는 존 왓슨을 의미하는 거겠지. 그녀가 셜록 홈즈를 인용하며 모방하고 있으니 아마 그녀의 역할은 셜록 홈즈일 것이다.
지금 그녀는 홈즈. 나는 왓슨이기에 날 경계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믿을 수 있는 친구 사이이기 때문에? 항상 무언가를 연기하듯이 행동하는 후루미나미와 대화를 수월하기 이어나가기 위해선...
히무로 시라베: 널 찾고 있었지. 홈즈.
그녀의 연극에 어울려줘야 한다.
후루미나미 나몬: 내가 필요한 일이 또 생겼어?
히무로 시라베: 여기서 탈출하려면 자네의 두뇌가 절실한 거 자네도 알잖아. 홈즈.
또한, 우리가 탑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그녀의 연극 각본에 사족을 끼워넣는 작업. 이것을 그녀가 용납한다면 그저 시간낭비에 불과한 상황극조차 탈출을 위한 논의로 바뀔 수 있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렇겠지. 그래. 아직 살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야.
히무로 시라베: 자네. 설마 살인 사건이 일어나길 바라는 건가?
후루미나미 나몬: 그렇게 들렸다면 유감이야. 일단 들어오게.
나는 후루미나미를 약간 경계하며 그녀의 전용실로 발을 디뎠다. 그곳은 만물상을 방불케 했다. 바이올린. 물뿌리개. 구명 조끼. 구급상자. 형형색색의 가발. 물감. 책. 돋보기. 화장품. 여러가지 복장. 스프링 달린 신발...? 풍선 칼...? 네모난 수박...?
여러 운동기구에 이어 천장과 바닥을 연결하는 봉을 발견한 순간. 난 그녀의 특기 분야가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더더욱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더욱 그녀의 행동에 주목했으나, 나의 경계가 무색하게 그녀는 책상 위에 신발을 신은 채 올라가더니 능청스럽게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기행인가 싶어 잠자코 후루미나미를 관찰하던 난 그녀의 뛰어난 솜씨에 순수히 감탄했다.
히무로 시라베: 대단한데. 어떤 곡이지? 난 음악에는 조예가 없어서 모르겠군.
후루미나미 나몬: 곡 같은 거 없어. 그냥 내키는 대로 연주하고 있는 거야.
상당한 음악적 감각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셜록이 바이올린 연주를 잘 하는 것과 별개로. 내 솜씨도 나쁘지 않지? 어제 마유즈미도 굉장히 좋아했어.
히무로 시라베: 연기자가 아니라 연주가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야.
후루미나미가 전혀 웃지 않은 것을 보아, 농담이 실패했다. 운율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이 실패 원인으로 추정됐다.
그 와중에 마유즈미와 셜록에 대해 언급했으니. 그녀는 셜록 홈즈에서 후루미나미 나몬으로 자신의 에고를 바꾼 모양이었다. 원활한 대화를 위해 나도 그렇게 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난 영화나 드라마도 무대로 삼지만. 내 전문 분야는 뮤지컬이나 연극이거든. 자연스럽게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지.
후루미나미 나몬: 그리고 후루미나미 가(家)에서 교육받을 때 여러 교양을 배워서. 굉장히 어려운 분야가 아니라면 어떤 배역이든 몰입할 수 있어.
행동이 다소 비정상적일 뿐. 그녀 자체는 양질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인 모양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가문은 대부분 유명인사라고 했지? 후계자들을 엄하게 교육시키나 봐?
후루미나미 나몬: 대부분 유명인사라기보단, 모든 이들이 연기와 관련된 직종에 종사해. 그게 규율이야.
히무로 시라베: 말 그대로 모든 이들이? 보기 드문 규율이네.
후루미나미 나몬: 응. 가부키 연극이 만들어진 때부터 가문이 가부키를 통해 크게 성장했거든. 그 뒤로 연기 자체가 우리 가문을 상징하게 되었고, 일종의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어.
후루미나미 나몬: 일단 우리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난 이상. 어떤 분야도 좋으니 연기에 관련된 일을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파문되거든.
히무로 시라베: 파문되다니. 가문에서 제명이라도 한다는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응. 가혹하지. 괴짜같고. 하지만 다들 가혹할정도로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으니까. 후루미나미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면 누구든 두 사람 몫은 족히 할 수 있어.
후루미나미 나몬: 그만큼 명성이 높지만. 큰 어둠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
히무로 시라베: 확실히. 후루미나미의 사람들이 과도하게 시장을 차지한다는 논란이 생겼겠어.
후루미나미 나몬: 그것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
히무로 시라베: 그게 뭔데?
후루미나미 나몬: 나중에 말해 줄게. 지금은 말할 수 없어. 언젠가 때가 되기 전까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그녀의 화법에는 말해주지 않겠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다음에 또 오면 알려줄게. 첫 자유행동부터 너무 많은 걸 알려주면 재미가 없어. 그렇지 않아?
히무로 시라베: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후루미나미 나몬: 몰라도 괜찮아. 언젠가 내 말이 어떤 뜻인지 알게 될 테니까... 그럼 떡밥도 많이 남겼으니. 조심해서 돌아가게 왓슨.
내게 손을 흔들어 주는 후루미나미를 보자 그녀가 허락한 대화가 여기까지라는 직감이 들었다. 더 물어봤자 그녀의 연극이 끝난 이상 유의미한 정보는 오가지 않을 테니. 난 미련 없이 그녀의 전용실에서 나가...
후루미나미 나몬: 아. 맞다. 물어볼 게 있었어. 히무로? 잠깐 나 봐.
히무로 시라베: 봤어.
후루미나미 나몬: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날 찾아온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의외라고 해야 하나. 너는 느와르 영화에 출연하면 파티를 즐기기보다 죽은 연인에 대해 떠올리며 홀로 눈물 흘리는 타입일 거라 생각했거든.
히무로 시라베: 아직 안 죽었어.
후루미나미 나몬: ...아직?
히무로 시라베: 그래. 아직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실하지 않아. 내 동기 비디오에 그녀가 나왔을지라도.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진...
말을 끝내자마자 후회했다. 왜 여기서 굳이 메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지? 내게 약점이 있다는 걸 들켜서 좋을 일은 어디에도 없는데.
약해졌다. 변화의 역기능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미안.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그녀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인식할 수는 있는 모양이다.
히무로 시라베: 됐어. 이 탑에서 나가면 내가 직접 알아낼 테니까.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도 아니야.
히무로 시라베: 널 찾아온 첫 번째 이유는 네가 잠시 사라진 동안 전용실에서 뭘 찾았는지 물어보려고 온 거였어. 그러나 네가 제대로 대답하진 않을테니 포기했지.
후루미나미 나몬: 그럼... 두 번째 이유는?
히무로 시라베: 내 전용실이 개방되기 전에 알아낼 수 있는 정보를 최대한 알아내야 했거든.
후루미나미 나몬: 왜?
히무로 시라베: 다음에 또 오면 알려줄게.
후루미나미 나몬: 과연 후루미나미와 히무로에게 다음이란 존재할까?!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
나나시: 어... 음.
23T5U130: 무슨 일이야. 나나시?
난 누군가와 어울린 기억이 전혀 없으나, 어떻게 어울려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23T에게 그런 지식이 통할지는 의문이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뭘 물어봐야 할까? 애초에 난 23T에 대해서 아는게 거의 없었다. 카텟 기관에서 투입된 인공지능. 우리들의 편. 그게 전부다.
나나시: 그냥. 얘기라도 좀 나눠볼까 하고... 왔는데. 정작 할 말이 생각이 안 나네.
23T5U130: 카텟 기관에 대한 건 어때?
나나시: 카텟 기관? 좋아. 좋긴 한데... 제한을 받고 있으니 분명 말하기 어려울 거야.
23T5U130: 그럼 너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나나시: 내 이야기?
23T5U130: 그래. 넌 네가 누구인지 궁금했잖아. 내가 이전에 말해주긴 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지 않아?
그래. 23T는 나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었다.
23T5U130: 넌 커다란 슬픔을 가지고 있었어.
나나시: 커다란 슬픔을 가지고 있었다... 궁금해. 궁금하긴 하지.
나나시: 그렇지만 난 네 얘기도 궁금해.
내가 묻자 23T는 의외인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렇게 움직이는 걸 보면 정말 인간같단 말이지...?
23T5U130: 내 얘기가 궁금해? 난 그저 인공지능일 뿐이야. 할 얘기는 없어.
나나시: 그렇지만 너도 나랑 만난 적이 있다며. 아무리 인공지능이라지만 나랑 만난적이 있다면 이야기거리 하나는 있지 않겠어?
23T5U130: 그거라면 수도 없이 많지.
나나시: 그러면 그 얘기를 하자. 나와의 일화가 많다면 네 얘기와 동시에 내 얘기도 하는 셈이잖아. 그렇지?
나나시: 네가 어떤 사람. 아니 기계였는지 얘기해 줘.
23T5U130: 굳이 정정해줄 필요는 없어. 난 기계보다는 사람으로 취급받고 싶거든.
하긴. 인공지능이라도 사람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니. 23T가 저렇게 생각하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나나시: 알겠어. 그럼... 카텟 기관에선 무슨 일을 했어?
23T5U130:
23T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3T는 묵묵히 자신의 입 부분―입이 없긴 했지만―을 만지작거렸다.
나나시: 제한에 걸렸구나...
23T5U130: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제한에 걸린다니. 얄궂네. 나에 대해 알고 싶어했는데 기대를 배신해서 미안해.
나나시: 아니야! 네가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가장 괴로운 건 너일 텐데.
23T5U130: 말할 수 없는 일을 제외하면, 기관의 잡무를 돕거나 연산을 돕거나 그런 일을 했어. 아무리 큰 부품이나 물건도 내 몸이면 옮길 수 있었고, 아무리 어려운 계산도 내 속도면 충분히 가능했거든.
나나시: 어. 몸이 있었어?
23T5U130: 지금도 있잖아?
나나시: 그렇긴... 하지.
검은 색 마네킹에 연보라색을 덧칠한 것 같은 모습이지만. 23T에게도 분명 몸이 있었다.
23T5U130: 지금과 같은 형태는 아니지만 말이야. 지금은 기본 형태밖에 남지 않았기에 기능도 얼마 없지만, 카텟 기관에서 난 상당히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었어.
23T5U130: 카텟 기관원들은 날 도구라며 멸시했지만 너만큼은 그러지 않았어. 오히려 나와 많이 친밀했지.
23T5U130: 언제는 한 팀이 달려들어서 일주일 걸린 작업을 우리가 힘을 합쳐 반나절만에 한 적도 있어. 다들 표정들이 볼만했지.
23T5U130: 너도 굉장히 좋아했어. 아주 콧대를 납작하게 해 줬다면서 통쾌하게 웃고 그랬어.
나나시: 내가 그랬어? 기억이 없으니까 영 상상이 안 가는데...
23T5U130: 기억은 인격에 큰 영향을 미치니까. 그 당시의 너는 상당히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어.
나나시: 재밌네... 지금 나한테 가장 부족한 건 자신감인데.
난 다이얼로그의 영상만으로 절망했던 어제의 나를 떠올렸다. 내게 아무것도 없다는 내용을 본 것 만으로 깊게 좌절한 나를 떠올렸다.
우스운 일이었지만 난 영상 하나만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난 그 정도로 약했다. 그런 내가 누군가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며 웃는다고?
차라리 그 사람이 나 대신 여기 오면 좋았을 걸... 그 사람도 결국 나 본인이니 어이가 없는 생각이었지만. 난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내 전용실에서 벌어진 사고. 기억하진 못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이겨내고 내일로 나아간 사람이라면 나보다 훨씬 강할 것이다. 그런데 왜 기억이 지워진 약해빠진 내가. 이런 곳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해야 하는 건가?
카텟 기관에서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면. 모노로그와 이 탑에 대해서 무언가 알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그렇기에 내 기억이 지워진 것일지도 몰랐다.
우리가 잃었던 기억이 어떤 내용인지 누군가가 알려준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테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23T는 제한에 걸렸으니까.
23T5U130: 걱정 마. 모노로그가 지운 기억도 언젠가는 돌아올 테니까.
나나시: 그럼 그 때의 나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겠지?
23T5U130: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아.
나나시: 응...?
23T5U130:
나나시: 아. 또 제한이구나.
그 뒤로 우리는 제한에 걸리지 않는 한도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그러나 미도리카와의 전용실 바로 앞에서 나와 23T가 애기를 나누는 데도, 미도리카와는 조금도 우리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미도리카와는 마치 전용실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더 단크 타워
챕터 1: < 죽여 마땅한 사람 둘 >
"과정은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히무로 시라베: 이제 다들 모였네.
내 전용실 앞에 11명이 모였다. 23T. 토키와. 미도리카와. 카이다. 그리고 전용실의 주인인 나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었다. 토키와는 우선 다이얼로그를 통해 다른 이들이 발견한 것들을 보고받고, 이후 잠시 다른 이들을 보초로 세운 뒤 직접 내 전용실을 탐사하기로 했다.
1시간의 휴식이 다른 이들에게 여유를 주었는지. 대부분의 상태가 1시간 전보다 좋아 보였다. 모일 인원이 전부 모였다는 걸 확인한 뒤. 나는 자물쇠를 해제했다. 문이 열렸다.
모리 레이코: 드디어.
나나시: 이거. 결국 들어가는구나...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가 개의치 않아 하시니 저희로썬 말릴 수 없겠지만, 여전히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을 대신 쓰고 싶네요.
모리 레이코: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지. 프로파일러 본인이 동의한 이상 다른 이들이 반대할 이유도 없다.
나이토 유즈루: 휴식 시간동안 생각하겠다면서 변한 게 없네.
모리 레이코: 생각은 지금도 하고 있다. 1시간만에 수정될 신념이라면 그것은 신념이라고 부를 수도 없어.
후루미나미 나몬: 캐릭터성이 쉽게 변하면 재미가 없긴 해.
야가미 토가: 일단 빨리 들어가기나 합시다.
토키와 아유키: 그래. 조사를 시작하자.
다이얼로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토키와의 목소리와 함께. 모두가 내 전용실에 발을 디뎠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실례할게요... 계세요?
하기와라 우시오: 당연히 아무도 없지! 이 탑에 사람은 우리들 뿐이니까.
칸나즈키 시노부: 그건 아니야.
후루미나미 나몬: 안은 생각보다 깨끗한데.
후루미나미가 갈색 가발을 쓰고 중얼거렸다.
이바라 쿠리스: 어허. 그런 말 하면 큰일난단 거 몰라? 깡!
별다른 생각이 없어보이는 이들을 뒤로 하고 나나시의 반응을 살폈다. 의구심 반, 반가움 반이 그의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나나시. 뭔가 떠오르는 게 있어?
나나시: 응... 뭔가 기시감이 들어. 이것들을 본 것 같은 느낌이 엄청나게 들어.
히무로 시라베: 어느 부분이?
나나시: 저 책상이라던가, 저 하얀 상자라던가, 저 책장이라던가... 되게 많아.
히무로 시라베: 전부 카텟 기관에 있던 시절 나의 물건들이야. 그걸 본 적이 있다는 건, 네가 확실히 카텟 기관 소속이었으며 나와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는 뜻이 되지.
나나시: 응. 그런 것 같아.
히무로 시라베: 그래서 말인데 나나시. 프로젝트에 대해서 무언가 떠오르지 않았어?
나나시: 프로젝트? 무슨 프로젝트?
히무로 시라베: 그건... 나도 몰라.
카나리 케이토: 뭐야. 너 지금 장난하냐? 그걸 너도 모르면 누가 알아.
옆에서 나나시와의 대화를 엿듣던 카나리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히무로 시라베: 나도 모르기에 물어보는 거야. 프로젝트는... 정말 중요해. 어떤 프로젝트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매우 중요해.
칸나즈키 시노부: 그렇긴 하지...
칸나즈키가 다시금 깊은 목소리를 냈다. 여성보다는 남성에 가까운, 깊게 울리는 듯한 목소리. 그것을 듣자 그녀가 탑에 꽂힌 광선에 대해 예지했음이 떠올랐다.
히무로 시라베: 칸나즈키. 넌 비범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 그 목소리로 말할 때마다 넌 광선을 예지하고 내 거짓말을 밝혀내는 등 여러 활약을 해냈어.
나나시: 모노로그 말로는 미지의 독립체가 칸나즈키의 몸을 지배한다던가 그랬는데... 그걸 믿게?
칸나즈키 시노부: 그러게. 너는 이런 거 안 믿을 줄 알았는데?
나나시: 이런 거라니... 본인 얘기면서.
히무로 시라베: 그 음성의 주인이 독립체인지 아닌지는 관심 없어. 확실하지도 않고. 그러나 실존하는 현상은 충분히 기대할 가치가 있어.
카나리 케이토: 야. 야. 관둬. 부정 타. 저주받는다고.
칸나즈키 시노부: 왜? 신령에게 무언가를 묻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해서? 맞아. 어긋나는 일이지. 그러나 내가 더 싫어하는 일은 따로 있어.
칸나즈키 시노부: 바로 날 멍청이 취급하는 거야. 그거 정말 기분나빠.
카나리 케이토: ......
카나리는 칸나즈키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자신의 행실이 돌아오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이제 그는 속이기 쉽고 재미있는 대상으로 전락해버렸구나.
칸나즈키 시노부: 그래. 널 저주하겠다. 카나리이이이이!
카나리 케이토: 자, 잘못했어!
후루미나미 나몬: 제 뒤로 오세요! 전 검은 사제입니다!
십자가 목걸이와 부적, 일관성 없는 소품들을 들고 후루미나미가 칸나즈키의 앞을 막아섰다. 카나리는 후루미나미의 말을 듣고 그녀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히무로 시라베: 저 셋은 저러도록 내버려 두자.
나나시: 아하하... 알겠어. 조사하다가 카텟 기관에 대해 더 떠오르는 게 있으면 바로 말해 줄게. 어. 이 책 어디선가...
나나시가 내 책장을 조사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득 내 귀에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하기와라 우시오: 어디보자. 어디보자. 어디보자...
하기와라의 중얼거림이었다. 그는 내 책상 주변을 뒤적이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뭘 찾고 있어?
하기와라 우시오: 당연한 걸 묻네. 다른 사람 방에 들어왔으면 뭘 먼저 찾아야겠어?
히무로 시라베: 누군가를 해칠 수 있는 냉병기 혹은 화기.
하기와라 우시오: 뭐 그것도 중요하긴 한데... 가장 중요한 건 빨간 책이지!
히무로 시라베: 포르노그래피 말하는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오해하지 마라? 난 단지 너한테 기본적인 욕구라는 게 존재하긴 하는지 확인하려는 거야. 딴 생각은 없어! 전혀! 네버!
히무로 시라베: 하지만 내 전용실에는 포르노그래피가 없어.
하기와라 우시오: 아. 지랄 ㄴ. 그럼 지금부터 확인 들어가겠습니다잉. 따라란 따라란 따라란 딴. 쿵짝짝 쿵짝짝 따라리라라리...
거듭해서 말해도 듣지 않을 것 같아 가만히 내버려두기로 했다. 그에게 있어서 이 역시 하나의 즐거움일지도 모르니.
야가미는 벽에 걸려 있는 내 총을 들어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야가미 토가: 이게 당신의 총이군요? 화약 없는 총.
히무로 시라베: 총알도 화약도 없으니 아령이나 마찬가지야.
야가미 토가: 확실히 무게가 있군요. 나무 손잡이 때문인가요?
히무로 시라베: 백단향으로 만들어진 손잡이야. 무겁지만 매끄럽지.
야가미 토가: 확실히. 총에 조예가 없는 제가 봐도 일품이란 걸 알 수 있는 물건이군요.
모리 레이코: 일개 고등학생이 어째서 이런 총을 가지고 있지?
어느새 모리가 나와 야가미 옆에 나타났다. 상당히 결정적인 질문과 함께.
야가미 토가: 확실히 그렇네요. 당신은 초고교급이 아닌 그냥 프로파일러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겁니까?
히무로 시라베: 가지고 있었다기보단, 받은 뒤 지금까지 간직해 온 거에 가까워.
모리 레이코: 가보란 말인가?
야가미 토가: 총이 가보라고요?
히무로 시라베: 아니야. 말하자면 긴데, 어차피 곧 모두에게 말하게 될 테니 조금만 기다려. 그 전에...
히무로 시라베: 모노로그. 요청이 있어.
내가 모노로그를 부르고 기다리자 내 전용실 바닥에서 스멀스멀 그것이 나타났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그것에게로 쏠렸다.
모노로그: 뭐지?
나이토 유즈루: 뭐야. 네가 여기 왜 왔어? 여긴 히무로 전용실이야. 꺼져!
칸나즈키 시노부: 그래! 당장 꺼져!
모노로그: 불러서 왔는데도 불만이 많구나.
히무로 시라베: 용건만 끝내고 바로 가면 되잖아. 이 총 안에 화약과 총알을 채워 줘.
야가미 토가: 무슨...?
모노로그는 당연히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으니까.
모노로그: 채울 수 없다. 네 전용실 물품 중 화약과 총알은 없다. 네가 요청한다고 한들 네 전용실에 없던 것을 재보급할 수는 없다.
히무로 시라베: 이제 다시 가.
모노로그: 날 증서로 쓰다니. 영악한 놈 같으니.
히무로 시라베: 난 내 권리를 이용했어. 모노로그. 뭐가 문제지?
모노로그는 대답 없이 바닥을 스르륵 뚫고 사라졌다.
모리 레이코: 스스로의 진실성을 증명했구나.
나이토 유즈루: 뭐야. 뭘 한 건데?
야가미 토가: 그의 총에 화약과 총알은 보급품으로 취급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화약과 총알을 미리 빼 두고 저흴 속이고 있진 않다는 뜻입니다.
모리 레이코: 책은 프로파일러의 전용실에 화약과 총알이 없다고 증언했다. 둘이 한 패가 아니라면 그의 결백이 증명되는 셈이다.
히무로 시라베: 나와 모노로그는 한 패가 아니야.
모리 레이코: 그것은 최후의 최후까지 알 수 없는 법이다. 아무튼. 프로파일러의 전용실에 제대로 작동하는 총기가 없다는 것은 확실해졌다.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가 마냥 경계받을 이유는 사라진 셈이네요.
마유즈미 나데시코: 축하해. 히무로!
야가미 토가: 그것과 별개로. 카텟 기관에 대해서도 긴장의 끊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다들 조사를 계속하세요.
히무로 시라베: 그래. 모노로그를 불러서 다들 당황했지? 계속 조사해 줘.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고.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하기와라의 목소리에 그 쪽을 돌아보니 그는 아직도 내 전용실 이곳저곳을 수색하며 '빨간 책' 이라는 것을 찾고 있었다. 모노로그가 내 방에 등장한 와중에도 저러고 있었던 것인가? 의외로 상당한 집중력이다.
이바라 쿠리스: 야. 넌 뭘 그렇게 뒤지고 있냐?
하기와라 우시오: 금서.
이바라 쿠리스: 뭐? 금서? 너 이자식 설마...
드디어 그의 수색이 멈추는 것인가?
이바라 쿠리스: 그럴거면 나한테도 언질을 줬어야지! 아! 괜히 지금까지 찹쌀떡 같은 거나 찾고 있었네!
계속되는구나.
하기와라 우시오: 네가 왔어도 못 찾았을 걸. 여기엔 우리가 찾는 물건이 없어.
이바라 쿠리스: 뭐야. 여기서 포기해? 너라면 끝까지 집요하게 달려들 줄 알았는데.
하기와라 우시오: 얜 진짜 일만 아는 놈이야. 보고서를 뒤져 봤는데 낙서도 없이 자기 일 얘기만 잔뜩 써놨어. 범죄자 패턴 분석. 프로파일링 결과. 완전 일벌레 개미좌야 이거.
이바라 쿠리스: 그래...? 이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초고교급 프로파일러로 발탁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네.
하기와라 우시오: 그것도 그건데. 대체 카텟 기관이 뭐하는 곳이길래 고딩한테 이렇게 일을 많이 시키냐?
히무로 시라베: 모든 카텟 기관원이 이렇게 일을 많이 하지는 않아.
하기와라 우시오: 그럼 왜 너만 이렇게 많이 했어? 이거 봐봐!
하기와라가 내 책상의 서랍에서 수많은 파일들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이바라 쿠리스: 와. 진짜 많네!
마유즈미 나데시코: 뭐야. 그게 뭔데 그래?
하기와라 우시오: 마유즈미 씨. 이리 와서 이것 좀 먹어... 아니 봐봐유.
하기와라는 책상 위에 수북히 쌓여 있는 내 보고서와 파일들을 가리켰으나, 맥락을 따라가지 못한 마유즈미로서는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게... 뭔데?
이바라 쿠리스: 이게 다 히무로가 쓴 거야. 일하면서 작성한 보고서들. 그 양이 이 정도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정말? 대단해! 글자를 이렇게 많이 쓰는 건 정말정말 힘든 일이야. 내용도 한 번 보고 싶은데... 히무로. 봐도 돼?
히무로 시라베: 얼마든지 봐.
마유즈미 나데시코: 알겠어. 흐음... 와. 세상에!
마유즈미가 화들짝 놀라 파일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하기와라 우시오: 뭔데?! 갑자기 왜 그래?
이바라 쿠리스: NANI?
마유즈미 나데시코: 별건 아니고. 그냥 글씨가 너무 예뻐서... 감탄한 건데. 실수로 떨어뜨렸네.
마유즈미는 주섬주섬 떨어진 파일을 주워 다시 한 번 읽기 시작했다.
이바라 쿠리스: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히무로가 글씨를 그 정도로 잘 써?
마유즈미 나데시코: 응. 그 정도로 잘 썼어. 정말 예쁘다... 완전 또박또박이야.
히무로 시라베: 내가 아는 사람도 그렇게 말했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사실 이 종이 안엔 모르는 단어들이 많지만. 네가 이걸 열심히 썼다는 건 알 수 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 정말 사명감을 가지고 일했구나. 글씨에서 다 보일 정도야.
히무로 시라베: 글씨에서 사명감이 보인다니. 그 정도까진 아닐 텐데.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는 알 수 있어. 살면서 해온 게 글씨 쓰는 것 밖에 없었으니까 특기가 하나 생겼거든. 필적 검사.
마유즈미 나데시코: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진 채 글씨를 썼는지 알 수 있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대충 알 수 있고.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그게 어떻게 돼? 글씨를 얼마나 썼으면...
이바라 쿠리스: 내가 보기에 이 탑에 모인 사람들은 다 자기 분야에서 개미인가 봐. 너랑 나만 베짱이였고.
하기와라 우시오: 망할.
히무로 시라베: 정말 대단해.
마유즈미 나데시코: 에이. 대단하긴... 다른 초고교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뭐. 서예 정도야.
히무로 시라베: 아니야. 필적을 검사하는 것 만으로도 사람의 인격을 볼 수 있다는 건. 관상학을 넘어서는 기예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 정도야...?
히무로 시라베: 당연히 그 정도지. 다른 이들의 글씨를 볼 수 있다는 전제 하에 넌 수많은 일을 할 수 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의식하고 쓴 글씨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글씨를 보는 거라서, 그렇게 쓸모가 있진 않겠지만...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히. 빈 말이라도 기분 좋다.
히무로 시라베: 빈 말이 아니야.
이바라 쿠리스: 진짜로 쩔어! 그보다. 히무로 결과는 어떻게 나왔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는 좋은 사람이야! 내가 보기엔 그렇게 나왔어.
히무로 시라베: 그래?
하기와라 우시오: 흐음...? 터레스팅...
마유즈미 나데시코: 진짜야! 히무로는 꽤 좋은 사람이야.
마유즈미의 필적 검사법은 신뢰하기 어렵다. 그녀의 행적과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다.
나도 그녀의 필적 검사가 정확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녀는 틀렸다. 좋은 사람이라면 나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좋은 사람은 언제나 행동한다. 옳은 것을 위해 행동한다. 아무리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지부장님. 왜 제 폭발물 목걸이 사용 금지 명령을 기각하신 거죠?"
"무슨 폭발물 목걸이?"
"말 돌리지 마세요. 히무로 시라베의 폭발물 목걸이 말입니다. 현장 임무에 배속될 때마다 그가 착용해야 했던 물건이요. 전 이 비인도적 처사를 당장 중단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지부장님이 기각하셨죠."
"기각해야만 했어."
"전 그 이유를 묻고 있는 거에요. 제가 모르는 사이에 어떻게 이런 일이..."
"네 생각은 잘 알지만 그래야만 했어. 히무로 시라베가 더 이상 폭발물 목걸이를 착용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럼 히무로 시라베가 안전해질 것 같아? 정말로?"
"......"
"현장 임무에 배치된 이들이 히무로 시라베를 심각한 수준으로 경계하지 않는 이유는, 그의 행동이 배신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즉각 사살할 수 있는 수단이 있기 때문이야. 아무리 히무로 시라베가 의심스럽다고 한들, 그의 행동을 감지하고 유사시 즉각 사살할 수 있단 걸 아니까 임무에 집중할 수 있는 거라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폭발물 목걸이가 히무로 시라베의 목숨을 지켜주고 있는 꼴이지. 폭탄을 목에 채웠음에도 히무로 시라베가 배신하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부대원들이 수두룩한데. 그 폭탄을 제거하면 그들은 자신이 히무로 시라베에게서 안전하지 않다고 느낄 테고. 언젠가 우발적으로 그를 사살할지도 몰라."
"다른 수단도 있잖아요. 수면제도 있고 마취제도 있어요. 책임자의 잘못된 판단이나 오작동이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것
보단, 리스크는 작으면서 대상자 제압이라는 기능은 똑같이 수행하는 것을 선택해야 해요."
"글쎄. 기관원들이 그걸 용납할까?"
"용납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기관원들이 원하는 건 히무로 시라베가 이 기관에서 사라지는 일이야. 나도 그렇고."
"왜죠? 히무로는 이제 어엿한 카텟 기관의 일원이에요. 저희 카텟의 일부라고요."
"카텟은 죽음과 배신을 통해서만 부서진다고들 하지. 그가 배신한다면 카텟이 부서질 거야."
"카텟은 부서지지 않아요. 죽음과 배신이 있다고 한들 그것 역시 운명의 일부에요."
"방금 그 발언은 오해의 여지가 있어. 시라유키 히메리. 나야 네 불같았던 성격을 아니까 넘어가는 거지. 다른 기관원들 앞에서 그런 얘기를 꺼냈다간 너 정말 배신자 취급당해."
"...네. 제가 경솔했네요. 너무 민감하게 대답했어요."
"몸 좀 사려. 기관원들은 널 존경하며 따르고 있어. 그 어린 나이에 온건파를 대표하는 인물이고, 지금까지 실적도 어마어마하니까. 그러나 이대로라면 그 존경심이 사라질지도 몰라."
"이 정도 일로 사라져버릴 존경심이라면 없는 게 낫습니다."
"...시라유키. 왜 그런 말을 하는거야? 너도 알잖아. 이건 '이 정도 일' 로 치부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훨씬 더 심각한 거라고. 그래서 모두가 혼란에 빠진 거야. 네가 히무로 시라베에게 인질로 잡힌 채로 기관에 도착했을 때, 너와 친한 나조차도 굉장히 놀랐어. 아주 잠깐이지만 네가 변절한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고. 나도 이런데 네가 히무로 시라베를 계속 감싸돌면 기관원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출신과 과거의 행적들을 이유로 그를 잠정적 배신자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네 말이 맞아. 그러나 그 규범들은 이 사례에 적용되기 힘들 거야. 네 노고는 정말 대단했지만... 이제 발을 뺄 때가 됐어. 시라유키."
시라유키 히메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자진 사퇴했다지만, 넌 지부장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잖아. 나도 기관원들도 네가 나보다 뛰어나단 걸 알아. 그러니 제발... 동정심에 먹히지 말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몇 분 뒤, 시라유키 히메리가 옥상으로 올라왔다.
시라유키 히메리가 10초간 자신의 머리를 감싼 채 벽에 등을 기댔다. 그 뒤 6초간 자신의 머리를 짓눌렀다.
"지친 모양이군."
"...히무로? 여긴 웬 일이야?"
"오늘의 일화를 보고하기 위해 널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사과하자면 너와 지부장과의 담화를 의도치 않게 도청했다."
"뭐...? 어쩌다가?"
"날 도청하는 장치를 발견했다. 기관 내가 아닌 외부에서의 도청이 아닐까 의심이 되어 전파를 역추적했다. 그러나 기우였다. 기관 내에서의 도청이었다. 설마 지부장실로 통하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런데... 도청 당하고 있으면서 그런 거 말해도 되는 거야?"
"끊어 뒀다. 비공식적인 도청이었으니 그들도 나나 네게 불만을 토할 순 없을 거다. 그러니 이 담화는 더 이상 도청되지 않겠지."
"그래서. 결국 나랑 지부장님과의 대화는 다 들은 거야? 아. 좀 쪽팔리네... 거의 열변을 토했는데."
"수치스럽다고? 네겐 그럴 이유가 없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럴 이유가 없지. 나쁜 일을 한 게 아닌데 왜 수치를 느껴야 해. 왜 내가 눈치를 봐야 하고 고민해야 해. 내가 스스로 부끄럽지 않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넌 충분히 노력했다."
"틀렸어. 아직 모자라. 충분하지 못해..."
"무엇이 널 그렇게 만들지?"
시라유키 히메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엇이 널 맹목적으로 만들지? 무엇이 너로 하여금 나를 이 기관에 머물도록 하게 만들지?"
"내가 그래야 하니까... 난 널 이 기관에 데려온 장본인이야. 그러니 너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건 당연해... 내가 말했잖아. 너 사람 만들겠다고. 그거 진심이야. 난 해낼 거야. 그러니 나만 믿어. 기관이 널 받아들이도록 만들 테니까... 반드시."
"지부장이 경고했던 것처럼, 네가 배신자로 낙인찍힌다고 해도?"
"그래."
강박증. 스트레스. 책임감. 자가혹사. 자기희생적 태도.
두꺼운 가면.
내 전용실을 공개한 뒤 어떤 취급을 당할지 알고 있음에도 나의 전용실을 공개한 것은. 아주 조금이지만 그녀처럼 행동한 것일까?
그렇기를 바랐다.
모리 레이코: 이건 프로파일러가 입었던 복장인가?
나이토 유즈루: 아니지. 무슨 특수부대 옷 같잖아. 나랑 아빠가 패션 센스가 좋다곤 못 하지만 내가 봐도 이건 너무 특수부대 옷 같아. 어디에 입고 돌아다니지 못 할걸?
모리 레이코: 나는 특수부대의 복장이라는 전제로 말을 한 것이다.
나이토 유즈루: 히무로 나이에 특수부대라니... 야. 말도 안 되지!
모리 레이코: 프로파일러에게 물어라. 그러면 해결될 일이다.
나이토 유즈루: 히무로! 우리 궁금한 거 있는데 잠깐 여기 와 봐!
이바라 쿠리스: 알겠어. 히무로 빌려줄 테니까 30분만 놀다가 돌려 줘.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가 무슨 게임기야?!
하기와라 우시오: 마유즈미 이 친구 리액션이 아주 혜자일세.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나이토와 모리 쪽으로 다가갔다.
히무로 시라베: 왔어.
나이토 유즈루: 이건 또 뭐야? 특수부대 코스프레 복장?
히무로 시라베: 카텟 기관의 행동부대 시절 내가 착용했던 복장이야.
모리 레이코: 네 나이에 행동부대라니. 카텟 기관은 인재가 부족했나? 왜 널 등용한 것이지?
히무로 시라베: 내가 자원했어. 카텟 기관에게서 신뢰를 얻기 위해선 그게 특효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히무로 시라베: 그러나 성공적이진 않았어.
"망설이지도 않고 총을 쏘더라니까."
"무슨 꿍꿍이인지 도저히 모르겠어. 화가 난 건지 안 난 건지 구분이 안 가. 둘 다일지도 모르고."
"누가 금수 아니랄까봐..."
나이토 유즈루: 거 참... 신뢰를 얻는다니, 그 기관 사람들이 어지간히도 깐깐했나 보네. 그러면서 고딩을 특수부대에 넣어주는 건 또 뭐야.
모리 레이코: 기관이 그에게 엄격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계속 조사하겠다.
모리는 그대로 다른 곳을 조사하러 갔다.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 이건 범죄자들을 분석하신 파일인가요?
히무로 시라베: 그래. 프로파일링과 취조를 통해 범행 동기나 배경을 알아낸 거야.
캐롤 브라이트: 살인범. 아동 학대범. 납치범... 대상자 중에서는 흉악한 사람들도 많았네요.
히무로 시라베: 흉악한 사람들이 많았지.
대몰락 뒤였으니.
캐롤 브라이트: 아직 당신은 고등학생일 텐데... 분명 큰 부담이 되지 않았나요?
히무로 시라베: 너도 다른 사람들에게 상담을 해주고 있잖아. 비슷한 거지.
나보다 한두 살 더 많아 보이는 사람이 내게 존댓말을 쓰는데 난 반말을 쓰고 있다는 게 조금 거슬렸으나 시급한 사항은 아니기에 고려하지 않기로 했다.
캐롤 브라이트: 물론 상담가도 피상담자와의 대화 중 스트레스나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도 있지만, 프로파일링 분야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할 거에요.
히무로 시라베: 괜찮아. 난 그들에게 휩쓸리지 않으니까.
캐롤 브라이트: 확실히 이 기록들을 보면 무척 수월하게 상담이 진행되었던 것 같네요... 하지만 여전히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에요.
캐롤 브라이트: 아무리 초고교급 학생이라도 정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활약해요. 그러나 당신은 초고교급 학생이 아닌데도 프로파일링을 하고, 범죄자와 면담을 하고, 듣기로는 특수부대에도 참여했다면서요?
캐롤 브라이트: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죠?
히무로 시라베: 곧 모두가 알게 될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왓슨. 자네의 전용실 상당히 멋있군.
후루미나미가 곰방대를 피우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보다 또 왓슨인가...
히무로 시라베: 여기서도 하게?
후루미나미 나몬: 당연하지. 왓슨. 자네가 아니면 누구와 같이 하겠나. 왓슨.
캐롤 브라이트: 왓슨이요?
히무로 시라베: 솔직히 다른 사람이 눈 앞에 있으면 사양하고 싶은데.
후루미나미 나몬: 역할극은 언제 어디서 해도 재미있지 않아?
캐롤 브라이트: 여기서도. 역할극. 다른 사람이 눈 앞에... 자네가 아니면...?
캐롤 브라이트: 어머...!
캐롤이 무언가를 눈치채고 재빨리 나와 후루미나미에게서 멀어졌다. 무엇을 눈치챘는지는 몰라도 크나큰 오해임이 틀림 없었다. 정말 크나큰 오해임이.
후루미나미 나몬: 이제 들을 사람 없네?
왜 이렇게 집요하게 구는 거지. 고작 한 번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괜히 연극에 맞춰줬던 건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려는 불친절의 기색을 최대한 숨기며 난 말했다.
히무로 시라베: 그래. 알겠어. 홈즈.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후루미나미 나몬: 아까 자네랑 내가 내 전용실에 단 둘이 있었을 때 말이야.
히무로 시라베: 남이 들었을 때 오해살 만한 말은 그만 하지.
후루미나미 나몬: 알겠네. 알겠어. 아. 이거 정말 재미있군. 아무튼!
후루미나미 나몬: 자네의 전용실이 개방되기 전에 알아낼 수 있는 정보를 최대한 알아내려고 했댔지? 떡밥 남긴 것 치고는 자네의 전용실에서 그대의 성실함밖에 발견하지 못했다네.
히무로 시라베: 무언가가 더 있을 것 같아?
후루미나미 나몬: 오. 그래. 당연하지. 무조건 뭔가가 더 있겠지. 게임이 시작된 거야!
히무로 시라베: 네 생각이 맞아.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분 조사를 끝낸 참 같았다. 몇몇 이들에게서 내 전용실의 단조로움으로 인한 약간의 실망이 느껴졌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일이었다. 난 카텟 기관에서 단조로운 삶을 살았으니까.
정작 중요한 것은 구석에 있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저거 되게 신경쓰이네...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저게 뭐야? 내 집엔 저런 거 없어서 모르겠어.
마유즈미가 전용실의 구석을 가리켰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 재현되어 있었다.
야가미 토가: 확실히. 신경쓰이긴 하네요. 용도가 확실한 것은 전부 조사했고 남은 건 이것 뿐입니다.
후루미나미 나몬: 저게 미스터리의 해답이 되는가!
후루미나미가 먼저 성큼성큼 내 전용실의 구석으로 걸어가자 다른 이들도 하나 둘 모였다.
토키와 아유키: 이 쪽에선 안 보이는데.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해줄 수 있어?
모리 레이코: 비어있는 박물관 같다.
이바라 쿠리스: 유리 판... 같아 보이는데.
칸나즈키 시노부: 수많은 원한이 무섭도록 쌓여 있어.
히무로 시라베: 방탄 유리야. 두께가 있어서 판보다는 벽에 가깝고. 여기 이 버튼을 누르면 입구가 열려.
안의 환경을 조작하는 패널에 버튼을 누르자 견고하던 유리벽에 약간의 틈이 생기더니, 반사광의 변화를 통해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서서히, 정교하게 변화했다. 곧 사람이 하나 들어갈 정도의 문이 생겼다.
몇 명이 유리벽의 근처로 다가가 그것이 얼마나 두꺼운지 관찰했다. 내 기억으로는 대략 7.5cm 정도의 두께였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서로 간섭할 수 없도록 만들어졌으니 그렇게 두꺼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이 두꺼운 게 방탄 유리라고? 이런 게 왜 있어? 안에 뭘 넣어두려고 했나?
야가미 토가: 히무로 씨. 이 유리벽이 왜 당신의 전용실에 있는 거죠.
히무로 시라베: 전용실에는 우리들의 재능, 선호, 그리고 과거에 관련된 물건들이 진열되기 때문이야.
히무로 시라베: 이렇게 완성도 있게 재현한 건 놀라운 일이야. 모노로그는 우리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카나리 케이토: 얘가 물어본 건 그게 아니잖아. 네 재능이랑도 선호랑도 과거랑도 연관 없는 게 왜 네 전용실에 있냐고!
야가미 토가: ...아뇨. 히무로 씨는 제대로 대답한 것 같습니다.
모리 레이코: 이 유리벽은 프로파일러의 과거 자체와 연관이 있는 모양이다. 재능과는 동떨어져있고, 그가 선호하는 기색도 없다.
나이토 유즈루: 히무로의 표정을 보니 오히려 싫어하는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미간에 힘이 들어가 있었던 모양이다.
히무로 시라베: 맞아. 난 이걸 몇 년 전까지 계속 봐왔어. 이 패널을 조종해서 유리벽 안에 다양한 작용을 미칠 수 있지. 이 버튼을 다시 누르면 문이 닫히고.
버튼을 누르자 유리벽의 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른 이들의 반응으로 말미암아 이런 기술은 확실히 그들 입장에서 생소한 모양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와. 요즘 세상에는 이런 것도 있구나. 엄청 신기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닌데! 요즘 세상에 이런 게 어딨어?! 이거 뭐야! 존나 신기하잖아?!
이바라 쿠리스: 개쩐다... 문이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져. 다른 기능 뭐 있어?!
히무로 시라베: 기다려 봐. 충분히 보여줄게. 모노로그가 모든 기능을 옮겨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에서 시간이 아무리 지난들 패널의 기능은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내가 이 패널을 누르는 입장에 설 줄이야.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고 과거의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히무로 시라베: 이 버튼을 누르면 유리벽의 내부가 환기돼. 실험체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기체가 있을 경우 제거하기 위한 기능이지.
나나시: 실험체라고?
버튼을 누르자 전용실의 벽에 구멍이 뚫리더니, 그 곳으로 공기가 빠져나갔다.
후루미나미 나몬: 이거. SCP 재단에서 사용하는 장치인가? 아니면 캐빈 인 더 우즈의...
나나시: 이상한 얘기 하지 말고. 히무로. 방금 뭐라고? 분명 실험체라고 말했지?
캐롤 브라이트: 뭔가... 많이 심상치 않은데요.
토키와 아유키: 음...?
히무로 시라베: 걱정 마. 전부 다 말해줄 테니까... 이 버튼은 유리벽의 내부에 수면 가스를 살포하지. 사실 몇 번 쓰인 적 없어.
히무로 시라베: 원래는 폭주하는 실험체를 잠재울 목적으로 개발된 건데, 폭주한 실험체를 잠재우지 않고 제압할 방법은 많고, 폭주하지 않은 실험체에겐 이 기능을 쓸 일이 없거든. 그래서 몇 번 안 쓰였지.
버튼을 누르자 전용실의 벽에 구멍이 뚫리고, 약간 파란 색을 띄는 연기가 구멍 안에서 새어나왔다.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유리벽 안에 파란 연기가 가득 차올랐다.
하기와라 우시오: 어... 슬슬 뭔가 무섭다? 쎄하다?
환기 버튼을 다시 눌러 파란색 연기를 제거했다.
히무로 시라베: 그러고보니 누군가를 이 유리벽에 가두고 수면 가스를 살포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 전용실 내의 취침이니 즉각 처형할지도 몰라. 그건 살인으로 취급될까, 취급되지 않을까. 이후 모노로그에게 물어봐야겠어.
모리 레이코: 이런 위험한 기능을... 어째서 언급하지 않았지?
히무로 시라베: 네 말이 맞아. 내 생각이 짧았어. 패널의 기능과 규칙이 맞물리는 경우를 엄두에 둬야 했어.
야가미 토가: 그 얘기가 아닙니다. 대체 이게 뭡니까...? 실험체는 무슨 뜻인가요.
히무로 시라베: 실험을 당하는 대상이라는 뜻이지. 다음 기능을 볼까.
야가미 토가: 제가 물은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후루미나미 나몬: 어. 어이... 히로시. 이제 돌아가자고...
후루미나미가 노란 색 가발을 쓴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토키와 아유키: 다들 일단 히무로에게서 멀어져.
모리 레이코: 좋은 판단이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 히무로...?
버튼을 누르자 벽에서 전선들이 튀어나왔다. 이 기능까지 재현해놓았을 줄이야.
전선이 끝부분에 스파크를 일으키며 두족류의 촉수처럼 움직였다. 그것들은 유리벽과 마주치자 타다다닥 하는 소리를 내며 유리벽 내부를 샅샅이 훑었다. 누가 봐도 좋은 용도로 쓰이는 기능은 아니었고, 실제로 이 기능은 단 한 번도 좋은 용도로 쓰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실험체에게 좋은 용도로 쓰인 적은 없었다.
조사 인원들을 돌아보자 그들은 이미 몇 걸음 너머의 거리에서 날 경계하고 있었다. 예상된 반응이었다. 어떤 식으로 보여준들 날 경계할 것이라면 숨기지 않기로 했으니. 이미 감수한 일이었다.
나나시: 히무로... 너. 이런 실험을 하는 사람이었어?! 카텟 기관은 이런 실험을 하는 기관이었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닌데... 히무로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야.
토키와 아유키: 야가미. 나이토. 내가 그 쪽으로 갈게. 최대한 도망쳐.
모리 레이코: 아니. 오지 마라. 넌 카텟 기관의 일원인 23T를 계속 주시해야 한다. 사실 그것의 근처에 있는 것부터 넌 위험에 처한 셈이지만...
캐롤 브라이트: 히무로 씨. 잠시 멈추세요.
나나시: 캐롤 씨...?
캐롤이 흰 장갑을 벗고 손을 내 쪽으로 향했다. 모두의 신변이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제압을 목적으로 한 터치의 사용도 고려하는 건가? 좋은 정보를 얻었다.
히무로 시라베: 난 이런 실험을 한 사람이 아니야. 카텟 기관 역시 이런 실험을 하는 기관이 아니야.
카나리 케이토: 개소리 마! 그럼 왜 네 전용실에 이게...
하기와라 우시오: 아.
버튼을 한 번 더 누르자 전선들은 다시 벽으로 돌아갔다.
히무로 시라베: 전용실에는 우리들의 재능, 선호, 그리고 과거에 관련된 물건들이 진열되지.
히무로 시라베: 그러나 내 재능과 이것은 관련이 없고, 난 이것을 선호하지 않아. 이건 내 과거의 산물이야.
후루미나미 나몬: 오. 어머니...
히무로 시라베: 난 실험을 한 쪽이 아니야. 당한 쪽이지. 정확히는 실험을 당한 끝에 살아남은 쪽.
나나시: 실험...? 무슨 실험?
히무로 시라베: 이런 곳 말고 식당에서 이야기하는 건 어때. 그곳에는 의자가 많아. 물론 쉬고 싶은 사람들은 식당으로 오지 않아도 좋아.
토키와 아유키: 야가미. 나이토. 히무로를 계속 경계해. 유사시 다른 이들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너희밖에 없어.
야가미 토가: 저희도 압니다.
나이토 유즈루: ......
히무로 시라베: 의심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면 그러지 않아도 돼. 충분히 의심할만한 상황이야.
모두가 경계를 조금 누그러뜨린 채, 하지만 분명히 날 계속 경계한 채 식당으로 향했다. 오지 않은 자는 한 명도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그럼. 뭐부터 이야기할까?
하기와라 우시오: 실험! 이게 무슨 실험이었는데?! 너 무슨 윈터 솔져야? 윈터 솔져는 카이다가 아니라 히무로였구만!
후루미나미 나몬: 히무로 이미지는 윈터 솔져보단 캡틴 아메리카 같지만.
히무로 시라베: 난 엄밀히 말해서 군인이 아니야. 전투를 상정하고 만들어진 게 아니니까. 군인이라는 이름은 만들어진 목적이 전투인 개체에게 붙어야겠지.
토키와 아유키: 만들어진 목적이 전투인 개체도 있단 뜻이구나.
히무로 시라베: 맞아.
야가미 토가: 그럼 당신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히무로 시라베: 생물학적, 사회적으론 사람이지. 지금은.
야가미 토가: 알려주셔서 참 고맙게 됐군요.
모리 레이코: 프로파일러. 네가 이런 실험을 받은 이유가 뭐냐?
재단의 목적에서 대몰락에 대한 이야기를 제하고 말하려니 생각의 정리가 필요했다.
모리 레이코: 지혜를 짜내지 말고 사실을 말해라.
히무로 시라베: 인위적으로 재능을 만들어내는 연구가 있었지.
생각의 정리가 끝난 뒤 입을 열었다.
히무로 시라베: 재능이라는 것에 대해 연구하고, 그것의 본질을 추출해 인위적으로 재능을 만들어내려는 시도가 있었어.
히무로 시라베: 그 최종 목표는 모든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인공적인 천재. 인공적인 희망 그 자체를 만드는 거였어.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그 시도에 맹점이 있다고 생각했지.
히무로 시라베: 바로 그 만들어진 희망이 타락했을 때. 그것을 억제할 방법이 없다는 거야. 모든 재능을 휘두르는 범죄자는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재앙과 같으니까.
카나리 케이토: 그걸 하나 더 만든 다음 둘을 싸움 붙이면 되잖아.
야가미 토가: 그 하나도 마저 타락하면 문제가 더 커지는데도요?
히무로 시라베: 그 방법 대신 그들은 힘의 분산과 견제 체제를 선택했어.
힘의 분산과 견제 체제를 제시하겠습니다.
히무로 시라베: 개개인의 힘은 모든 재능을 가진 자의 발 끝에도 못 미치지만, 한 개체가 타락하더라도 다른 개체들이 제압하거나 원래대로 복구시킬 수 있는 체제. 그리고 서로의 힘을 합쳐 온전한 힘을 낼 수 있는 체제. 그들은 그것을 만들어내려고 했어.
하기와라 우시오: 인위적으로 재능을 부여받은 천재들이 뭉친다고? 우리 꼬라지 봐선 서로 안 싸우는 것도 다행일 텐데.
히무로 시라베: 그래서 서로 협력하도록 교육시켰지.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세뇌 교육이라고 표현했어. 우리는 이념과 사상을 주입당했어. 그것을 위해 움직이도록.
히무로 시라베: 물론 교육 뿐만이 아니라 실험의 영향도 분명히 있었고.
나나시: 아까 그 실험실 말하는 거야...?
히무로 시라베: 유리벽 안 공간에 대해 말하는 거라면. 그 곳은 실험실보다 숙소나 격리실에 가까워. 실험은 저것보다 심하지. 훨씬 심해.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 좁은 게 숙소였어...?
야가미 토가: 아까 히무로 씨는 자신이 실험을 당한 끝에 살아남은 쪽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는 건 살아남지 못한 쪽도 있단 거겠죠.
히무로 시라베: 그래. 내 연구소에서 살아남은 건 나 하나 뿐이었어. 다른 이들은 전부 죽었어.
그 장소에 있던 내 또래는 오래 전에 전부 죽었으니... 그를 만날 수 있는 곳은 카텟 기관밖에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복종하지 않은 실험체들은 사살당했고, 폭주한 실험체들도 사살당했어. 실패한 실험체들은 처분당했고. 최후에 남은 한 명이 나야.
이바라 쿠리스: 죽었다고...? 아니... 정말로 사람이 죽었다고?
캐롤 브라이트: 마치 다른 세상 얘기 같아요...
이바라와 캐롤은 믿지 못하는 듯이 어안이 벙벙했다.
히무로 시라베: 그대로 청소년기까지 계속 교육받았다면 난 완성되었겠지만. 카텟 기관이 날 찾아 구조하면서 난 카텟 기관에 합류하게 된 거야.
히무로 시라베: 그게 다야.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지. 이 얘기를 숨길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카텟 기관이 이 살인 게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밝혀야만 했어.
예상된 침묵과 정적이 있었다. 그것을 깬 것은 모리였다.
모리 레이코: 정말 신뢰하기 어렵지만, 프로파일러의 전용실에 있었던 증거들과 대조하면 허황된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없다.
토키와 아유키: ...잠시 23T와 이야기를 나누고 왔어. 히무로의 말은 진실이야.
히무로 시라베: 23T가 그걸 말할 수 있었다고? 신기하네. 내 개인적인 이야기이기에 말할 수 있었던 걸까.
나나시: 그럼 결국 사실인 거구나...?
경계심. 각오한 바다.
후루미나미 나몬: 히무로. 넌 다른 개체들이 있고, 전투에 관련된 개체가 있다고 했어. 그 자들은 어떻게 됐지?
히무로 시라베: 카텟 기관이 내 연구소의 정보를 토대로 다른 연구소와 개체들을 추적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어. 나 말고 다른 개체들은 전부 완성되었어.
야가미 토가: 그럼. 세상 어딘가에 당신 말고 다른 개체들도 숨어 계시단 건가요?
히무로 시라베: 맞아. 내가 이 탑에 갇혀 있으니 모든 개체가 모여 온전한 힘을 낼 일은 없을 테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자들임엔 변함이 없어. 한 역할에 특화되있다고 한들 복수의 초고교급 재능을 가진 자들이니까.
후루미나미 나몬: 그럼... 널 포함해서 그들은 몇 명이나 있는 거야?
"나의 정식 명칭은 ρ다.
"뭐라고?"
"로(Rho). 그들은 날 ρ라고 불렀다."
"그게 무슨 뜻인데?"
"그리스 숫자로 100을 의미한다."
"갑자기 그리스 숫자...? 왜 하필 그리스 숫자로 100이야?"
"Ω가 그리스 문자로 800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히무로 시라베: 8명.
자유행동 투표가 진행됩니다
일전에 1표를 받았던 마유즈미 자유행동 이후 이번 투표의 결과가 반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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