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일기 씨. 마유즈미 나데시코예요.
오늘은 온몸에 채소를 뒤집어썼어요. 토마토라는 채소예요. 빨간색에 시큼 달달한 맛이 나고, 눈에 채즙이 들어가면 따가워요. 씨는 이상한 점액질 같은 거에 갇힌 느낌이라 개구리알이랑 느낌이 비슷해요.
일어났을 때부터 기분이 좋지는 않았어요. 기관 사람들 중 반 정도는 저를 싫어한다는 걸 아니까요. 잘 부탁한다고 말해도 대답을 안 해주고, 제 쪽은 보지도 않고, 제가 바보 같은 짓을 하면 어디선가 나타나서 비웃고 사라지고… 왜 저를 싫어하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별다른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러니 아침부터 마음이 슬퍼졌어요.
저에게 주어진 간이 숙소는 여전히 꽤 비좁았어요. 그리고 그 문 앞에 서면. 저는 제가 숙소 밖으로 나가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벌을 받는 것만 같다고 느꼈어요. 저라는 사람을 지탱하는 모든 게 누군가에게는 학 속의 까마귀처럼 보기 싫은 모양이었어요.
브라우스라 불리는 옷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어요. 저는 늘 품이 넓은 전통식 하카마를 입었으니까요. 한평생 동안을요. 그래서 그걸 입는 간단한 일도 저에게는 꽤 어려운 과제였어요. 다 입고 나서 몸가짐이 가지런한지. 실수해서 비웃음을 사지는 않을지 거울 앞에서 몇 바퀴를 돈 뒤에야 밖으로 나가야 했죠.
그럴 때마다 저는 제가 얼마나 순진무구하게 살아왔는지를 새삼 다시 깨닫곤 했어요. 저는 제가 가문에서 갑갑하게만 자란 줄 알았지만, 사실 그건 부유하게 산 것이었어요. 제게는 깐깐한 규칙이 있고 뭐든 얽매인다며 투덜거릴 자격이 없었던 거죠. 아무튼 저는 쉽게 자라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어요. 아주 길고 긴 카텟 기관에서의 신고식을 통해서요.
문을 열고 밖에 나가면. 또 비웃음이 날아오겠죠. 단 며칠 사이에 저는 괴롭힘을 배웠어요. 다른 사람이 저를 흘끗 보기만 해도 칼바람에 베이는 것 같았어요. 다들 속으로는 저를 무시하고 바보처럼 여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고개를 숙인 채. 매번 도망치듯이 구는 거예요.
"하지만… 오늘은 더 나아질 거야."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저는 그게 마법의 주문인 것처럼 되뇌었어요. 저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아무리 입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 옷의 매무새를 가다듬었어요. 그리고 부디 오늘은 좋은 하루가 되길 바라면서. 문을 열었어요.
그러자 으깬 토마토가 제 머리 위에 쏟아졌어요.
저는 제가 무엇을 뒤집어썼는지도 몰랐어요. 기관 사람들이 쑥덕대던 것처럼. 바보여서 그래요.
토마토라는 채소가 있는지도 모를 만큼 세상물정을 모르고, 고립된 채 자랐기 때문도 있을 거고요.
하지만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라도 밖으로 나가자마자 위에서 축축한 것이 떨어지고. 그게 내 문틀 윗부분에 절묘하게 끼워져 있던 양동이에 담겨 있었음을 보면. 내가 뭘 뒤집어썼는지는 몰라도 그게 모욕이라는 건 알 수 있어요. 누군가가 오랜 시간을 들여서 정성스럽게 양동이에 무언가를 넣은 거죠. 쥐의 목을 탁 잡아챌 쥐덫처럼. 꿩의 목을 조여들 올가미처럼. 그게 미세한 진동 따위에 미끄러지지 않고 오직 문이 열리는 순간에만 밑으로 쏟아지게끔 심혈을 기울여서 누군가는 내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었던 거예요.
저는 멍하니 제 몸을 타고 내려가는 그 축축한 물과 덩어리 중간에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어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부글부글 머리가 끓어올라서 몸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그 무엇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어요.
내가 이런 짓을 당해 마땅한 짓을 했다면 억울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제가 다다미를 뒤집고 연못에 침을 뱉고 집안을 마구잡이로 뛰어다니는 악동이었다면, 그리고 누군가가 제게 꾸준하고 참을성 있게 저를 타일렀음에도 제가 변하지 않았다면야 어떤 벌이라도 받아 마땅할 테지요. 하지만 저는 착한 아이가 되려고 열심히 했어요. 미움받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늘 방실방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었던 건데.
간신히 억눌렀던 울음이 가슴속에서 서서히 북받쳐 올랐어요. 몸이 마구 떨렸어요. 저는 설교는 많이 들었어도 괴롭힘이나 모욕을 당한 적은 없었어요. 욕을 들은 적도 없었어요. 그러니 웬 이상한 물건을 제 온몸에 퍼붓는 건 저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아무리 떠올려 봐도 어떻게 해야 할지 떠오르지가 않아서. 저는 그 자리에 굳은 채 섰어요.
다행인 점이 하나 있다면 저는 집에서 언제나 아침 6시에 일어났던지라. 아침 6시 20분에는 기관에 구경꾼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딱 그거 하나.
저는 한 줄기의 녹색 이슬이 제 눈썹과 길게 자라난 속눈썹을 비집고 들어온 뒤에야. 그렇게 아주 따끔하고 시큼한 고통이 바늘과 같이 제 눈을 찌른 뒤에야 깨어났어요. 저는 한쪽 눈을 가렸어요. 이미 망울망울 올라온 눈물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어요. 온실 속 화초에 멍청하다. 무능하고 민폐 덩어리라는 수군거림에 울보라는 말까지 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저는 훌쩍거리기 시작했어요.
허겁지겁 간이 숙소의 문을 열고 저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어요. 문을 쾅 소리 내며 닫았지만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어요. 여전히 온몸에서는 풋내와 흙냄새가 났고 질척거리는 점액 같은 게 몸 사이사이에 파고들 때마다 소름이 끼쳐 왔어요. 그때 저는 악의에서 어떤 내음이 나는지 알았어요. 악의에서는 토마토의 내음이 나요.
그 일은 저에게 큰 실망을 남겼어요. 저는 사람들이 언젠가 저를 좋아해 주리라는 소망을 품고 있었어요. 지금은 제가 미숙하고 보잘것없는 몸인지라 멸시를 받고 있지만 제가 제 몫을 하게 되고 무엇인지는 몰라도 나를 싫어할 만한 오해가 풀린다면. 이윽고 저를 좋게 봐주는 사람 몇 명과는 지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제 몸에 흘러내리는 뭉개진 채소들은 그 소망을 산산이 부서뜨렸어요. 누가 이런 짓을 당해요. 누가? 부당하잖아요. 부당해. 부당해. 천부당만부당하잖아요. 장난으로 할 짓이 아니었어요. 누군가가 이다지도 내게 수치심과 모멸감을 주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되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어요. 그 악의가 담겨 있는 행위가 아니라 그자가 뱃속에 품고 있을 악의의 양을 떠올리기만 해도 위에 구멍이 뚫릴 것처럼 배가 아파오는걸요.
저는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아서. 간이 숙소의 문에 등과 머리를 기댄 채 눈물을 흘렸어요. 누구도 눈물을 말려주지 않는다는 건 가슴이 아파요. 엄마와 아빠도. 수많은 선생님들과 수행원들도 제가 우는 것만 보면 울지 말라며 다그치거나 달래주거나 했어요.
하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남겨진 곳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제가 스스로 목이 잠겨 숨을 쉴 수 없게 되어도 신경 쓰는 사람 하나 없을 거라는 게. 너무 슬펐어요.
무릎을 끌어올려서 그 안에 얼굴을 묻었어요. 눈물이 무릎을 타고 아래로 떨어져 흘러갔어요. 옷과 몸을 씻어야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어요. 간이 숙소의 화장실에는 작은 세면대와 변기뿐이거든요. 옷을 빨거나 몸을 씻으려면 더러워진 채로 문 밖으로 나가야 했죠. 만약 몸을 씻고 싶어 졌어도 저는 감히 문 밖으로 발을 디디지 못했을 거예요.
또 무슨 양동이에 어떤 채소가 채워져 있을 줄을 알고 밖으로 나갈 수 있겠어요.
저는 미움을 받는 게 무서워졌어요. 자포자기하는 마음은 점점 커져가기만 했어요. 애초에 그들은 제가 꺾이기를 원하는 거 아닐까요? 제가 엉엉 울고 부끄러움을 느껴서 도망이나 치고 다니는 걸 원하지 않을까요? 그게 누구이든 간에 그 비열한 마음이 원하는 먹이를 던져주기만 한다면, 그들이 떨어져 나가지는 않을까요?
아주 가능성 적은 이야기였어요. 아마 제가 약한 점을 보여준다면 그들은 옳다구나 하고 제 모든 걸 짓밟으려고 들 거예요. 하지만 그것 말고 저에게는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어요.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 하죠. 저는 그렇게 점점 더 나쁜 생각과 유보의 늪으로 푹푹 빠지고 있었어요. 돌이켜 보면 그땐 정말 끝장이 난 줄 알았어요. 제가 살던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느낌에 막연히 짓눌려갈 때. 문 밖에서 누군가가 제 이름을 불렀어요.
"마유즈미. 문 열어."
아주 잠깐동안 저는 그게 '문 열어 봐. 네가 굴 속에 숨어든 토끼처럼 벌벌 떠는 모습을 보게.' 따위의 천하의 악독한 짓이라고 느꼈어요. 그러자 제 안에서 꺼져가던 되갚음의 잔불이 순식간에 확 고개를 들었어요. 저는 문을 돌아보면서 이 너머에 그 악독한 자가 있다고. 내가 감히 문을 열지도 못하리라 여기고 궁둥짝을 씰룩대고 있다고 되뇌었어요.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하리! 저는 쭈그리고 있던 몸을 일으키고 얼룩진 얼굴을 세차게 소매로 닦았어요. 침을 꿀꺽 삼킨 뒤 문을 향해 눈총을 쐈어요. 숨이 저도 모르게 거칠어졌어요. 아무리 쉬고 쉬어도 숨이 모자랐어요.
그러나 그 간신히 끌어모은 용기는 문이 문이 아니게 되었을 때 입김 앞 촛불처럼 훅 꺼져버렸어요. 그건 무늬였어요. 벽이기도 했고요. 아니면 제가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덫이겠지요. 제가 문을 벌컥 열어봤자 그 악한이 으악! 마유즈미다! 하고 도망치지는 않을 거잖아요.
제 상상 안에만 있는 그 사람은 문 밖에서 몸집을 점점 불리기만 했어요.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포부는 그 덩치 앞에서 쪼그라들었어요. 제가 어찌나 겁에 질려 있었는지 그 일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제 얼굴은 열이 오른 것처럼 화끈거리게 돼요. 무늬 너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을 때는 그게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거든요.
"마유즈미. 문을 여는 편이 좋을 거야.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으니까."
"히… 히무로?"
히무로는 카텟 기관 안에서 제가 이름을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어요. 저는 꽤 머리가 안 돌아가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히무로가 저에게 토마토를 쏟았으리라는 오해는 조금도 하지 않았어요. 애초에 제 목숨을 구해준 게 히무로일 뿐더러 히무로는 첫 만남부터 저를 꽤 잘 대해줬거든요. 찹쌀떡도 먹여 주고요.
"무… 무슨 일이야?"
저는 울음 때문에 벌벌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히무로에게 물었어요.
"나도 이런 비열한 짓을 당한 적이 있지. 하지만 샤워장은 간이 숙소 안에는 구비되어 있지 않아. 네가 몸을 씻기 위해서는 문을 열어야 해. 그러니 문을 열어."
이후에 알게 된 건데. 카텟 기관에는 히무로의 말투가 딱딱하고 차갑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더라고요. 저는 그들이 히무로와 제대로 된 말을 나누어 보기는 했는지 의심스러워요. 말은 어떤 높낮이나 감미로움을 담느냐보다 어떤 내용을 담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나요? 히무로는 분명히 상냥한 의도를 가지고 제게 말을 걸었어요. 저와 비슷한 일을 겪었고, 그러니 제가 느끼는 고충을 떠올릴 수 있었고, 가장 나은 해결책을 알려 주었어요.
"…너도 이걸 뒤집어썼어?"
"맞아. 양동이 안에 가득 찬 으깬 토마토. 동일한 수법이야. 그 이래로 나는 이 야채를 좋아한 적이 없어. 반 초고교급의 정서를 가진 이들이 너에게도 테러를 한 거야."
저는 히무로의 말을 들으며 하소연을 마구 털어놓고 싶었어요. 이게 무슨 일이냐고. 다들 나만 미워한다고. 그래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며 매달리고 싶었어요. 저는 홀로서기를 도무지 못하는 사람인가 봐요. 히무로랑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히무로가 제 투정을 들어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데. 저는 누구에게만은 털어놓고 싶었어요.
하지 마. 마유즈미 나데시코. 마유즈미의 이름을 욕보이지 마. 마지막 핏줄이 이런 꼴을 당하는 걸 보면 세상이 비웃을 거야. 저는 제 안에서 터져 나오려고 하는 그 감정을 정말 꽉 억누르고 싶었어요.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왜… 나한테 왜 이래… 다 너무해… 흐윽… 나쁜 사람들이 한 트럭이야 여기…!"
그렇게 시작된 추태는 다시 떠올려도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여서 차마 더 쓸 수가 없어요.
저는 심지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칭얼거리기도 했어요. 못할 짓이에요. 마유즈미 일족은 이미 불타서 망했고, 꼼짝없이 납치되던 저를 구해준 게 카텟 기관. 그리고 히무로였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때 세상의 모든 불행을 제가 뒤집어쓴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추한지 아닌지조차 볼 수 없었어요. 그마저도 조금 억누르고 있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에요. 마음 같아서는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었거든요.
"진짜 괘씸해… 내 앞에서는 못 하고 이런 함정을 준비해서는… 으흑… 숫기도 없는… 뭐냐… 겁보. 바보! 미워! 너무 미워…!"
히무로는 제가 그렇게 가슴속 응어리를 꺼내는 동안 아무 말 없이. 하지만 방문 앞을 떠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어요. 저는 여전히 인기척을 느끼고 있었지만 아무 반응이 없으니 어디 떠난 건 아닌가 불안해질 때쯤. 히무로는 짧게 말했어요.
"네 말이 맞아. 이건 병신의 소행이야. 누군가를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음식이 내게 모욕을 주기 위해 사용되다니 한심한 짓이지."
"그러게… 음식 귀한 줄 모르는 사람이야. 훌쩍… 먹는 거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는 건 여섯 살 때부터 배우는 건데."
저는 얼굴을 한 번 더 소매에 묻고서 마구 문질렀어요. 이름도 얼굴도 모를 그 사람이 문득 바보 같다고 느꼈어요. 히무로의 말이 저에게는 왜인지 웃기게 들리기도 했고요. 덕분에 서서히 기분이… 아주 조금씩이지만 나아졌어요. 여전히 바닥에 처박힌 느낌이기는 했지만요.
"하지만 왜… 왜 사람들이 너에게까지 그렇게 한 거야? 나는 답답이에 겁보에… 말짜라서 그렇다 쳐도 너는 왜?"
"초고교급이기 때문이야."
저는 히무로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분명 저는 초고교급이라 불린 적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저를 그렇게 평가했대요. 하지만 그게 괴롭힘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어요.
"그건… 훌쩍. 이유가 안 되는 것 같아."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부적절해. 이런 짓을 할 만한 이유가 너에게 있음을 전제로 했다간 너는 스스로를 비난할 수밖에 없어. 잘못은 네 게 아니라 잘못을 저지른 자의 것이니까."
그리고 히무로는 저에게 자신의 말을 받아들일 시간을 주었어요. 히무로의 말이 일리 있고 지금의 저에게는 별반 선택권도 없다는 걸 생각하는 동안 더 근본적인 억울함을 느끼기도 했어요. 내가 뭘 했길래 이런 짓을 당하고도 내가 잘못을 한 것처럼. 방안에 몸을 숨겨야 하냐고요.
하지만 혼자는 무서웠어요. 혼자는 싫었어요.
아주 조금의 용기만 있다면 몸을 씻으러 갈 수 있노라고. 저는 숨을 몰아쉬며 문을 손으로 짚었어요. 이건 벽이 아니다. 이건 문이다. 그러니 열고 나갈 수 있다. 이건 벽이 아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도와줄게."
"…이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용기가 나올 것 같은데. 도와줄 수 있어?"
"내 능력 범위 안에 있다면."
저는 염치불구한 채 제 마음속에 남아있는 일말의 용기를 쥐어 짜냈어요.
"손… 잡고 가줘."
제가 왜 그런 걸 요구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자고로 남녀는 유별하니까 나이가 찬 남녀는 약혼자가 아닌 이상에야 손이 맞닿는 건 커녕 눈이 맞닿는 것도 안 된다고 배웠으니까요. 지금 적으면서 떠올려 보니까 정말 경솔하고 천박한 여인이 된 것 같아 너무 부끄럽네요…
그렇지만 저는 정말이지 히무로와 손을 잡고 싶었어요. 왜인지 저는 누군가와 손을 잡고 함께 걷는 일에 심한 향수와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마치… 마음 한 구석이 비어있는 것처럼. 다시 채워 넣고 싶은데 어디에 넣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처럼요.
"알겠어."
히무로가 그렇게 말하자 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어요. 한쪽 손에는 갈아입을 깨끗한 옷을 가지고요.
문 밖에서는 온갖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제 쪽을 보았어요. 문을 열고 제 모습이 보이자 몇몇은 더 크게 떠들었고, 몇몇은 떠들기를 멈추었어요. 저는 어느 쪽도 불편했어요. 그 사람들의 얼굴이 사라지고 저는 사람들이 온통 적으로 변하는 걸 느꼈어요. 숨이 다시 가빠졌어요.
서서히 열리는 문을 다시 당겨 저는 영영 몸을 숨겨 버리고 싶었어요. 다시 들어가면 나올 수 없을 것도 같았지만. 무서운 걸요. 울면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아서 울음을 참으니까 오히려 더 눈물이 벅차올랐어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비웃음이 보이고 귓전을 울려댔어요. 심장이 터질 것만 같고 또 쪼그라들 것도 같았어요. 너무 어지러운 심정이어서. 다 적지도 못하겠네요.
아무튼 그런 공황은 히무로가 제 손을 낚아채고 기관을 가로지르면서. 서서히 사그라들었어요.
"헉!"
마음의 준비가 안 됐으니 잠시 놓아 달라 말하고 싶었지만, 저는 어버버거리는 더듬거림밖에 말할 수 없었어요. 그 뒤로는 잘 기억이 안 나요. 단지 제 손보다 훨씬 크고 거칠고. 골격도 단단한 남자아이의 손이 어떤 느낌인지가 몽실몽실 머리에 피어오르다가. 다음에는 누군가와 손을 잡을 때의 안정과 그리움을 느꼈어요.
그 순간 저와 히무로를 제외한 모든 건 사라져 버렸어요. 저희는 말 그대로 사람의 파도를 가르는 것 같았어요. 양쪽으로 쪼개지며 사람들은 저희에게 갈 길을 터 주었어요. 히무로는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남녀가 유별하다는 가문의 가르침. 가십과 소문을 두려워하는 제 나약함. 그리고 본인 뒤에 따라다닐지도 모르는 저와 관련된 추문들. 그 모든 것에서 히무로는 자유로워 보였어요.
"샤워장으로 가면 몸을 씻을 수 있어. 그때까지만 버텨. 마유즈미. 잘하고 있어."
그 말은 제 마음속의 신경 쓰이는 곳을 쓰다듬어 주었어요. 저에게 있었던 적이 없는 오빠와 함께 걷는 것만 같았어요. 가슴이 뭉클하니 아프면서도. 그 아픔은 저에게 다시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어요. 저는 가족을 떠나왔고, 제가 알던 사람과도 다시는 만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저와 함께 가줄 사람이 있었어요.
카텟 기관 사람들은 저들끼리 카텟 기관에서 가장 상냥한 사람이라는 칭호를 누군가에게 붙여 주었겠죠.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돕고 동물을 아껴주고 슬픔에 눈물을 흘려주거나 위로를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에게 가장 상냥한 사람이란 다른 누구도 아닌 히무로 시라베라는 소년이었어요.
기관의 샤워장에는 차가운 공기가 감돌았어요.
차갑고 미끄러운 타일을 맨발로 걷자니 약간 불안하기도 했어요. 약간의 물기가 남아있는 샤워장 내부는 문이 없는 아주 작은 방들처럼 구역이 벽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구역의 안에는 샤워기와 비누가 하나 놓여 있었어요. 집에 있던 욕실과 비교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부족함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더라고요. 그보다 당혹스러웠던 건 바로 뒤로 뻥 뚫려있는 샤워실 각각의 구역을 막아주는 건 옆으로 열리는 아주 얇은, 너머의 그림자가 보일 것만 같은 천막뿐이라는 것이었어요.
이러다 누가 급습을 하면 어떻게 막지?! 하는 걱정이 벌컥 들었어요. 하지만 히무로가 밖에서 기다리는 참이었기에(제가 만류해도 듣지를 않았어요) 후딱 씻고 밖으로 나가야만 했어요. 좋아. 한 번 해 보자! 속으로 소리치면서 수도꼭지를 돌리자 샤워기의 머리 부분에서 찬물이 쏟아졌어요.
"우왓. 차가워!"
차가운 물이 몸을 타고 내려가자 몸이 부들부들 떨렸어요. 비누로 몸을 열심히 닦으니까 잔뜩 묻어있던 토마토가 거품과 함께 서서히 닦여 나갔어요. 그것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뭐랄까. 처량한 느낌이 들었어요. 몸을 숨길 곳 하나 없는데 비에 온몸이 홀딱 젖는 기분이었어요.
그것도 알몸으로 젖는 거죠. 저는 분명 최대한 펼쳐 놓은 천막을 누가 젖히지는 않았나. 누가 나를 구경하고 있지는 않나 뒤를 계속 두리번거렸어요. 그건 속으로도 정말 바보 같은 딴생각이구나 싶어서. 결국 그 공상을 지우기 위해 머리를 양옆으로 휘두르게 되었죠.
"으으. 으츠츠츠."
저는 저도 모르게 끙끙거렸어요. 몸을 녹이겠다는 듯이 쏟아지는 냉수 안에서 두 손을 파바바 문지르기도 했어요. 문득 저는 제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떠올리고 있었어요. 그 갑갑하고 꽉 막혀 있는, 하지만 뜨거운 물에 온몸을 담글 수 있는 집에서 토마토를 뒤집어씌우고 차디찬 물로 씻어야 하지만 일단은 자유로운 기관으로. 별일을 다 겪었어요. 그렇죠?
머리카락을 닦는 게 가장 고역이었어요. 차가운 물을 맞으며 비누칠을 하니까 머릿결이 뻣뻣해지며 서로 달라붙기만 하더라고요. 토마토가 남아있지는 않나 머리 사이사이를 헤집다가 손목과 손가락에 가락들이 엉켜서 제가 제 머리를 잡아당기는 꼴이 되기도 했어요. 아야야 하는 소리가 자연스레 나왔죠.
그렇게 씻고 있자니 히무로가 몸을 씻으라고 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어요. 단지 더러운 게 묻어서 몸을 씻어내는 게 아니라 저에게 묻은 부정을 정화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저는 목욕재계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여기자니 얼음을 문지르는 것처럼 얼얼해지는 피부 또한 괴로움과 고통을 감내하는 일종의 수련이자 의식으로 여겨지기도 했어요. 네. 저 딴생각 좀 많이 하죠?
기분 좋은 욱신함이 감도는 몸을 버적버적한 수건으로 닦고서. 저는 구석에 놓인 바람을 뿜는 기구를 사용해 머리의 물기를 말렸어요. 머리가 보송보송해진 채 새 옷으로 갈아입으니 기분은 정말 나아졌어요. 꼼꼼히 비누칠도 하고 얼굴도 열심히 닦았으니. 아까 토마토를 잔뜩 뒤집어썼던 일이 내 생에 전혀 벌어진 적이 없다는 느낌마저 들었어요. 이상한 꿈이나 환상은 아닐까? 싶어서 몸 이곳저곳을 킁킁거리던 와중 저는 손톱 밑에서 나는 풋내를 맡았어요. 악의의 내음. 토마토의 내음을요.
그러자 저는 희망찬 꿈결 속으로 몸이 쏠리다가 다시금 현실로 돌아왔어요. 그 일은 정말 벌어졌던 일이었어요. 이 기관의 누군가는 저에게 토마토를 뒤집어씌울 정도로 싫어해요. 제가 별 짓을 안 했는데도요. 어쩌면 별 짓을 안 해서 괴롭히는 걸까요?
왜인지 샤워장 밖이 약간 떠들썩해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 조금 무서워지기도 했어요. 기관 한복판을 토마토즙 뚝뚝 떨어뜨리며 히무로와 손을 잡고 걸었으니. 이목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었나 봐요. 하지만 또 저를 연못의 잉어 구경하듯이 보는 구경꾼들 앞에 서자니.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어요.
옷은 다 입었지만 발은 바닥에 딱 붙어서 움직이지 않았어요. 답답한 게 가슴속에 꽉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어요.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기도 했고요. 걱정을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저는 그렇게 돼요. 코로 숨을 들이쉬고 입으로 내쉬는 걸 빠르게 다섯 번 반복하자 약간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저는 또 저를 향할 손가락이 무서웠어요. 네. 분명 겁쟁이였죠. 하지만 멸시를 두려워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요?
마음 같아서는 떠들썩한 게 가라앉을 때까지 샤워장 안에서 서성거릴까 싶었지만, 누군가가 저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러는 건 못할 짓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양손을 꽉 움켜쥐고 어깨를 최대한 넓게 편 뒤에 밖으로 걸어 나갔어요. 거울 앞에서 자세도 한 번 잡았는데 우스꽝스럽지 않고 괜찮았어요.
"흠. 히무로… 나 왔어. 아무런 문제는… 없어. 이 정도야 애들… 장난이지 뭐."
저는 호기롭게 말했지만 왜인지 밖으로 나오는 말은 꽤 우물쭈물하더라고요… 목소리가 작기도 했고요. 아. 이게 아니었는데. 거짓말을 칠 거면 좀 당당하게라도 쳐야 하는 건데. 너무 아쉬워요. 괜히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았으려나…? 진짜 바보 같은 생각이었네요…
아무튼. 밖으로 나가자 그곳에는 히무로가 있었어요. 그리고 아직 저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다른 사람도 히무로의 옆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몰랐어요. 이름은 들어봤지만요.
"마유즈미 나데시코. 씨."
"어. 네?"
그녀는 하늘색 눈동자와 백발을 가졌고, 흰 실험실 가운을 입고 있었어요. 어른스럽게도 짧은 치마를 입고 있기는 했지만 저는 왜인지 그녀가 저와 동갑이거나. 나이가 많더라도 두 살 이상은 차이가 나지 않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어요.
"나는 시라유키 히메리야. 오늘 겪은 불미스러운 사고에 대해 진술을 좀 듣고 싶은데. 잠시 내 사무실로 와주겠어?"
"어. 네."
"편하게 반말 써. 야 라고 해봐."
시라유키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어요. 첫인상이 되게 좋은 사람이었어요.
시라유키의 사무실에는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물건들이 좍 깔려 있었어요. 생전에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물건들이요. 제가 쓰임새를 추측하기도 어려운 물건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시라유키가 저 이상으로 어떤 분야에 통달해 있음은 눈치챌 수 있었어요. 히무로에게 들었던 인상과 똑같았죠.
목이 가늘고 긴 유리병이나 이상한 색이 들어간 안경. 작은 유리그릇 안에서 꿀렁거리는 검은색 액체.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로 쓰인 책은 빼곡하게 한 책장을 채우고 있었어요. 누군가가 칼로 깎다 만 나무토막(시라유키겠죠?)이나 처음 보는 전자기기들. 그 안은 정말 별천지였어요.
시라유키는 자기가 쓰는 테이블 앞에 의자를 두 개 펼쳐 두고선 저와 히무로를 앉혔어요. 시라유키 또한 자리에 앉고 난 뒤 시라유키는 제일 먼저 저에게 고개를 숙였어요. 깜짝 놀랄 일이었죠. 잘못 없는 사람이 저에게 사과를 하니까요.
"카텟 기관을 대표해서 사과할게. 마유즈미. 이런 일이 너에게 벌어져 유감이야. 몇몇 기관원은 초고교급을 증오해. 그 무분별한 증오가 이번에는 너를 향했어. 용납할 수 없는 일이고. 주동자를 반드시 잡아낼 거야. 시라베가 이런 일 당했을 때 어떻게든 찾아내야 했는데…"
저는 손사래를 치며 그녀를 말렸어요. 그야 잘못은 시라유키가 한 게 아니니까요.
"고개 숙이지 마! 네 잘못도 아니잖아. 별로 신경 안 써. 나중에 또 이러지만 않으면…"
"네가 개의치 않는다고 해도 그들은 처벌을 받아야 해. 초고교급을 향한 증오 범죄는 뿌리를 뽑을 필요가 있어."
히무로의 말에 저는 조금 의아함을 느꼈어요. 초고교급을 증오한다고?
"나 궁금한 거 있어. 왜 사람들이 초고교급을 싫어해? 나는 사람들이 초고교급을 좋아하는 줄 알았어…"
그리고 시라유키가 제 질문에 대답해 주었어요.
"대몰락 이전에는 분명 그런 풍조가 있었지. 뭐라고 할까. 연예인 같은 느낌이었어. 아니면 인플루언서. 어떤 분야에든 간에 그 분야에 한정해서는 정점에 서는 사람들. 등판만 하면 만루 홈런을 쳐 주는 선수를 누가 싫어하겠어? 하지만 대몰락이 터지면서… 그 원죄는 살아남은 초고교급들 전원이 져야 했지. 실제로 몇몇 초고교급은 폭도들에게 큰 힘을 싣기도 했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마유즈미. 너는 앞으로 이런 종류의 비방과 맞서야 해."
시라유키는 그렇게 말하며 저에게 약간 두꺼운 종이를 보여 주었어요. 양피지 혹은 나무껍질처럼 거친 질감의 종이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쓰여 있었어요.
資格ない ( 자격 없어 )
機関から消えろ ( 기관에서 나가라 )
早く 出ろ ( 빨리 나가 )
"오늘 내 사무실 문틈으로 들어온 메시지야. 아마 너를 겨냥한 것 같아. 보여줄까 말까 고민이 많았지만 그래도 네가 알고 있는 편이…"
저는 사실 내용이 별반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어요.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거든요.
"거친 재질이네?"
"응? 뭐가?" 시라유키가 물었어요.
"종이가. 그냥 여기에서 쓰는 그 매끄럽고 늘 규격이 일정한. 그 종이. 그거를 뭐라 불러?"
"A4용지." 히무로가 제 질문에 대답했어요. 무슨 종이 이름이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쓰던 종이는 공방에서 수제 제작하는 거였거든요. 보통 장인 분의 이름이나 공방의 이름이 붙는데. 사람 이름이 A4였을까요?
"보통 여기에선 그 A4용지를 쓰는 것 같던데. 이 사람은 다른 종이를 썼어. 왜일까?"
"특정한 사상을 전하고 싶어 하는 자는 자신의 사상이 여타 종이와는 다른 것에 적히기를 바라기 마련이야. 그래서 이런 것에 글씨를 썼겠지."
"번지는 정도를 보면 잉크가 아니라 먹인데… 그럼 이 편지는 나를 지목하고 있는 것 같아. 내가 서예가니까 먹을 쓴 거겠지. 음… 나이는 한 20대 중반쯤 될 것 같아. 아무리 많아도 30살 전후야. 그리고… 남성 분이 쓰셨어."
시라유키는 제 말을 듣고 웃었어요. 또 비웃음을 샀나 지레 겁을 먹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어요. 그 눈에서 조금 감탄하는 기색을 느낄 수 있었거든요.
"마유즈미. 네가 무슨 일면을 보고 그렇게 추측했는지 알려줄 수 있어? 우리가 보기에는 그저 특별할 것 없는 글씨 같아서."
"하이쿠 형식인데 엉터리 하이쿠니까 나이가 있어 보이려고 하는 어린 사람이지. 진짜 연세가 있으신 분은 이런 바보 같은 내용을 안 쓸 테니까. 또 기관(機関) 부분 글씨를 자세히 보면 손목을 안 쓰고 줄곧 손가락 힘으로 썼어. 그러니 남성 분이야."
"대단한데. 하지만 아직 이해를 못 했어. 마유즈미. 한 번만 더 설명해 주라."
시라유키가 부탁한 대로. 저는 제가 아는 내용을 최대한 알아듣기 쉽게 말해주었어요.
"하이쿠는 이런… 요구문에 쓰이기에는 걸맞지 않은 형식이야. 애초에 시잖아. 음절이 주는 아름다움과 그 정갈한 미를 위해서 쓰는 거야. 간결함과 품위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 하이쿠는 2절과 3절의 어미가 똑같아서 뭐랄까… 품위가 없어 보여. 이건 5음절-7음절-5음절 구조를 가지고 있을 뿐 하이쿠가 아니야."
"저속한 내용임은 분명하지." 히무로가 제 말에 동조해 줬어요.
"내가 느끼기엔 이 사람들이 나한테 모욕을 줄 적당한 방법을 연구한 것 같아. 서예가라고 하니 옛 방식의 모욕은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하이쿠를 쓴 것 같은데. 되게 구리다… 정말 왜 이렇게까지 했는지 모르겠어. 아. 계속 말할게. 나무판처럼 느껴질 정도로 두껍고 거친 이런 종이에 복잡한 글씨를 쓸 때면 손가락 힘이 부족해지는 사람이 대부분이거든. 그러면 무의식적으로 손목을… 이렇게 이렇게 돌릴 수밖에 없어. 손목 힘으로 쓰는 거야."
저는 히무로와 시라유키에게 뱀의 목이 꿀렁이는 것처럼 손목이 꿀렁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게 잘 이해되기를 바랐어요.
"그러면… 여기 봐봐. 글씨 끝부분이 가늘게 끝나지 않고 일정하잖아? 손목을 돌리면서 쓰는 사람들은 촉이 더 이상 안 닿는 부분에서 가늘게 마감 처리가 돼. 그래서 끝부분이 얇아져야 하는데 이 편지는 그렇지 않았어. 그러면 손가락 힘이 좋은 사람이라는 거고. 그런 사람들은 대개 남자야. 여자가 손가락 힘만으로 쭉 글씨를 쓰려면 나처럼 연습을 많이 해야 하거든."
하지만 누구도 저처럼 젓가락이나 펜을 잡은 채 여섯 시간을 내리 버티는 연습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남성 분일 가능성이 컸죠.
"종이나 먹. 글씨를 쓴 촉까지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더 자세히 볼까?"
"아니. 그 정도면 충분해. 마유즈미. 큰 진전이 됐어."
저는 히무로의 말이 그저 띄워 주려는 속 빈 말인지 의심했지만. 히무로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당황스러웠어요. 내가 잘했다고?
"정말? 나이랑 남자인 거밖에 못 알아냈는데. 이게 많이 알아낸 거야?"
"대몰락 이후 수사 분야는 많이 퇴보했어. 일본 내에 필적감정이 가능한 사람은 이제 백 명도 채 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네가 그중 한 명이지. 네 능력을 더 자세히 검사해 볼 필요가 있겠어."
히무로는 그렇게 말했어요. 시라유키 말 대로면 제 보호와 검사를 겸해서 당분간은 히무로와 함께 일하게 될 거라고 했어요. 간이 숙소에서 쓰던 짐은 빼고 자기가 쓰는 기관 숙소의 빈 방을 쓰라고 하네요.
저를 둘러싼 많은 게 변하고 있어요. 사실 조금 무섭기도 하고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겠죠. 저는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 기분이에요. 오늘 하루는 이게 다예요. 다음에 봐요. 일기 씨.
안녕 일기 씨. 마유즈미 나데시코예요.
요즘은 히무로와 함께 일하고 있어요. 여러모로 제가 쓰일 여지가 많다더라고요. 시라유키는 제 기량이 들쑥날쑥하긴 하지만, 장기적인 프로젝트에서 그런 단점은 거의… 이 다음 말이 기억이 안 나네요.
시라유키는 거의 매일 제 가슴 쪽에 이상한… 스캐너라고 불리는 물건을 가져다 대고는 해요. 샤이닝 측정기라고 하는데 나중에 히무로에게서 그 뜻을 들었어요. 샤이닝은 곧 각각 사람이 가진 재능의 정수이자 혼이고… 측정기는 그 재능의 강력한 정도를 재는 거라고 했어요. 저는 기분이 좋을 때는 샤이닝이 강하지만, 안 좋을 때는 바닥까지 친다고 하더라고요.
아무튼. 그 뒤로 괴롭힘은 없었어요. 히무로와 시라유키랑 함께 일하면서 자주 마주치지도 않게 됐고, 히무로가 눈에 불을 켜고 있다고 해요. 히무로도 토마토의 굴욕을 당했다고 떠올리면 어이가 없어요. 한 번은 히무로에게 너의 경우에는 어땠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거든요. 어른스럽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듣고 싶어서요.
"나의 경우에는 먼저 몸을 씻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나는 붉은 채즙을 흘리며 몸을 씻기에 적합한 시설을 찾아다녔어. 그러다 한 기관원이 나를 먼 곳에서 보고. 내가 누군가의 혈액을 뒤집어썼다고 오해를 한 거야. 내가 드디어 사람을 죽였다고 말이야. 한 명이 도망치며 비명을 지르니 다른 이들도 분위기에 떠밀려 줄행랑을 쳤어."
"저… 정말 기분 나빴겠다. 히무로…"
"그렇지는 않아. 나는 오히려 카텟 기관을 향한 실망을 조금 거둬들였어."
"뭐어?! 어떻게?"
그리고 히무로가 그때 제게 둔 대답은 저 같은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아주 깊은 생각을 담고 있었어요.
"내가 뒤집어쓴 것이 토마토라는 걸 알았다면 도망치지도 않았을 테니까. 즉 도망친 자들은 그 장난질의 공모자가 아니고. 나에게서 도망친 이들은 아주 많아. 마유즈미. 적어도 카텟 기관의 모든 이들이 비열한 건 아니었던 거야. 내게는 그것으로 충분해."
제가 보기에 히무로는 아주. 아주아주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어요. 불자(佛者)를 보는 것만 같았어요. 저라면 뭐 이런 속 좁은 겁보들이 있냐고 투덜댔을 텐데 히무로는 자기를 향한 어떤 멸시에도 개의치 않아 했어요.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 사람들도 죄다 나쁜 사람들이야! 네가 피를 뒤집어썼다고 착각한 건 네가 그럴 짓을 할 만한 사람이라고 보는 거잖아. 네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면서! 진짜 무례하긴!"
"그들은 무례한 게 아니야. 그저 내가 껄끄럽고 두려운 거지. 거의 모든 혐오는 공포에서 비롯돼. 그게 동물종 전체를 아우르는 본능이기 때문이야. 그걸 기억한다면 그들이 나를 두려워할지라도 나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어."
저는 잠깐 휴식을 취할 때면 히무로와 함께 건물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어요. 그 하늘의 색은 누군가가 이상한 도료 같은 걸 대기 중에 뿌려서 만들어진 거랬어요. 고개를 들었을 때 파아랗고 속이 뚫리는 광경을 누구도 볼 수 없게끔.
그리고 저는 오늘 히무로에 대해 더 알아가 보기로 했어요. 잘 되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요. 저는 먼저 이렇게 물었어요.
"히무로 너는… 취미가 뭐야?"
"미제사건의 범인을 찾아."
"어어… 그건 업무 아니야?"
"개인적인 시간에 금전적 이득 없이 하는 일을 취미라 부르지. 그러니 그게 나의 취미야."
오잉? 그런가? 하지만 히무로는 그저 일이 취미인 게 아닐까? 저는 알쏭달쏭해졌어요. 그리고 본래 제가 알고 싶었던 것이 히무로의 관심사였으니. 저는 그쪽을 더 자세히 캐 보기로 했죠.
"그런 거 말구. 즐거워서 하는 거! 막 힘들게 하는 일이 아니라. 진짜 계속하고 싶은 일. 재밌어서 관두기 싫은 일들 있잖아!"
"그 일을 지속하는 기간이 정확히 어떻게 되지?"
히무로는 제가 떠올려본 적이 없는 신선한 질문들을 해서 저를 당혹하게 만들고는 했어요. 처음에는 제가 히무로와 얼마나 다른지 팍팍 체감이 되었지만, 하다 보니까 이것도 재미있어요. 저와 히무로는 분명 다른 세상에 살지만 저는 히무로라는 창문을 통해 그 세계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보고. 이해할 수 있게 되니까요. 언젠가 저도 창문을 열어야 하는 처지잖아요.
"어… 하루 종일?"
어쩌면 질문을 잘못 정했던 것 같아요. 저는 히무로가 무언가를 즐겁게 하는 건 본 적이 없어요. 웃는 모습도, 농담을 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어요. 히무로는 모든 일을 그저 사무적으로 처리하는 것 같기도 해요.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전부 해야 하는 일인 거죠. 그건 의무나 과정의 수행에 더 가깝고… 그 자신이 어떤 판단을 하지는 않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히무로에게도 있더라고요. 즐거워하는 일이요.
"찹쌀떡을 먹는 거야."
"아하하하하!"
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어요. 히무로가 얼굴을 까딱 기울이는 것도 웃겼어요. 제가 왜 웃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마저 왜인지. 뭐라고 해야 하나. 호기심이 가득한 소년 같은 모습이라 앙증맞았어요.
"너 정말 찹쌀떡 좋아하는구나. 처음 볼 때부터 찹쌀떡 상자를 가득그득 들고 오더라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너는 재단으로 납치되고 있었어. 내가 찹쌀떡 상자를 네 앞에 보여준 건 네가 카텟 기관에 도착해 대화가 가능할 만큼의 시간을 준 뒤. 카텟 기관에 합류하는 의례적 면담 때의 일이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때를 떠올리니 기분이 확 침울해졌지만. 저는 개의치 않고 물었어요. 이렇게 흥미로운 주제가 화두에 올랐는데 놓쳐버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히무로. 왜 그렇게 찹쌀떡을 좋아해?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
"특별할 건 없어. 모든 사람들이 찹쌀떡을 좋아하잖아. 그런데 왜 내가 그것을 좋아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예상치 못했다는 듯이 구는 걸까?"
"어… 보기랑은 다르게 쫀득쫀득하고 달콤한 걸 좋아해서. 네가 찹쌀떡을 맛있게 먹는 모습은 다들 상상하기 어려운 것 아닐까?"
"그렇다면 겉모습이 사람을 판단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지표임이 거듭 증명될 뿐이야."
"그야 그렇긴 하네… 다른 얘기 하자. 찹쌀떡 좋아하면 단팥죽도 좋아해?"
"찹쌀떡만큼 좋아하지는 않아. 누군가가 제공한다면 먹겠지만. 나에게 있어 찹쌀떡이라는 음식은 다른 것보다 큰 의미를 가지고 있어."
"왜?"
저는 무심코 물었지만, 히무로의 대답은 제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어요. 저는 그냥 쫀득쫀득한 감각을 즐긴다 따위의 실없는 이야기를 상정하고 있었는데. 히무로의 대답은 지금까지 제가 들은 것 중에서 가장 사적인 이야기였어요.
"나를 구원해 준 자가 나에게 처음으로 준 선물이기 때문이야. 그래서 찹쌀떡을 먹을 때면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곤 해."
저는 이렇게 흥미로운 주제의 이야기는 처음 들었어요. 무엇이! 이런 낭만적인 일이 다 있나! 히무로도 추억을 떠올린다니. 그리고 그 추억과 깊게 이어진 인연이 있다니! 듣고 싶다. 너무너무 듣고 싶어! 저는 원체 이야깃거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저에게 허락된 거라고는 글씨와 풍경. 성현과 영웅들. 그것을 묘사하기 위한 전설과 이야기뿐이었으니까요.
"듣고 싶어. 들려주라. 히무로! 와. 정말 듣고 싶어!"
"…재미는 없을 걸."
저는 히무로의 중얼거림에 어떤 뜻이 담겨있는지 읽지 못했어요.
"그래도 듣고 싶어! 들려줘. 히무로! 응?"
히무로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에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본래 재단에서 추려낸 감시자 후보는 16명이었어."
그리고 그건 제가 가벼운 마음으로 물어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이야기는 굉장히 오래 이어졌고. 그걸 다 들은 저는 진이 빠져서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어요. 좀 꼴사납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저는 가슴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핑 돌기까지 했어요.
"마유즈미. 괜찮아?"
"그… 그건 내가 할 말이야. 히무로… 괜찮은 거야?"
"지금이야 괜찮지."
지금이야. 저는 히무로의 그 담담한 표현을 듣고 더 큰 슬픔을 느꼈어요. 히무로는 강제로 어른이 된 사람이었어요. 저라면 견디지 못했을 일들을 히무로는 전부 겪었어요. 죽어가는 동료들. 변화하는 자신.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의 적응… 하나같이 너무 기구한 이야기들 뿐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깨달은 거예요. 저와 히무로는 세상에 겹쳐 살고 있지만 우리 둘의 세상이 똑같지는 않다는 걸요…
물론 저도 히무로가 어떤 사람이라고 대략적으로 알고 있기는 했어요. 애초에 히무로 본인이 제게 자신이 로라는 초고교급 실험체 집단의 일원이었으며, 탈출한 뒤에 기관에서 일하고 있다 말했으니까요. 시라유키도 지레 놀라지 말라고 히무로에 대해 귀띔해 주기도 했어요.
저는 기관 사람들이 쑥덕대는 게 죄다 거짓말이라고 여겼어요. 거짓말이 아니더라도 굉장히 크게 부풀려진 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런 심한 일을 겪어 왔을 줄은 몰랐어요. 히무로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그와 가까워져 보려던 제 시도가 얼마나 경솔하고 얕은 짓이었는지를 일깨워 주었어요.
"뭐야. 오늘 샤이닝 수치가 완전 바닥이네. 마유즈미."
시라유키는 샤이닝 스캐너에 떠오른 제 수치를 보고 말했어요. 제가 아는 바로는. 샤이닝 수치가 바닥이라는 건 오늘 능률이 아주 떨어질 거라는 말과 같았어요. 그리고 저는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제가 어느 날에만 수치가 낮아지는지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죠.
"왜 나는 기분이 울적한 날에만 샤이닝 수치가 떨어지는 걸까?"
"뭐야. 마유즈미. 너 울적해?"
"아. 아니!"
시라유키는 웃음을 지었어요.
"울적하구만 무슨. 마음이 심란하고 힘드니까 당연히 일이 손에 안 잡히지. 오늘은 내가 마유즈미 기분 전환 좀 시켜줘야겠어. 맛있는 거 먹을래? 뭐 좋아해? 나한테 궁금한 거 있어? 아. 참고로 그 토마토 양동이 놈은 내가 영상분석까지 하면서 쫓고 있으니 걱정 마. 잡으면 그놈은 끝장이야."
"자. 잠깐. 질문이 너무 많아… 그리고 딱히 울적해서 일이 안 되는 건 아니야. 늘 열심히 한다구…"
시라유키는 그런 저를 보고 웃으며 박수를 짝짝 쳐 줬어요.
"사실 마유즈미 네가 이렇게 오래 버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 흘려들어. 아무튼 너. 아주 잘하고 있는 거야. 시라베랑 일하는 건 편해? 기관 사람들 몇몇은 그쪽으로 이동하라 하면 그게 징계인 줄 알아. 네가 불편하다고 막 하소연을 하진 않을까 싶었는데 끄떡도 안 하는 거 보고 놀랐어."
"나쁘지는… 않아. 시라유키.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네가 이 기관에서 히무로에 대해 제일 잘 아는 것 같은데… 맞아?"
"시라베에 대해서는 시라베 본인이 제일 잘 알지만, 네가 물어보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겠지. 맞아. 하지만 나는 그 앞에 '그나마' 라는 말을 붙이고 싶어. 그나마 내가 제일 잘 아는 거지 나도 무지한 부분에는 무지해. 솔직히 그놈이 뭘 좋아하는지도 몰라. 걔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
저는 시라유키마저 히무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듣고 양가감정을 가졌어요. 일단 출발선은 비슷하다는 느낌이랑… 우리 모두 결승점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거요.
"나는 너희 둘이 되게 절친한 줄 알았는데… 이름으로 부르잖아. 우리 집안에서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그건 약혼자 거나 이미 부부인 경우뿐이야."
"뭐어? 이런. 마유즈미! 우리는 분명 친하지만… 너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친하지는 않아. 우린 서로를 이해하기 때문에 서로 별 관심이 없는 거야. 그럴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게 더 낫다는 걸 둘 다 아니까. 나랑 시라베는 그런 식으로… 닮은꼴일 뿐이야."
"우와… 쿨한데! 쿨하다! 이럴 때 쓰는 말 맞지? 쿨하다."
시라유키는 애써 웃어 보였어요.
"어. 맞아. 나와 시라베 사이는 쿨~해. 그래서 서로 모른다 이거야."
"좋아하는 그림이나… 책이나 … 음식이나… 아니. 찹쌀떡을 좋아한댔지…? 아무튼 그런 거는?"
"시라베가 찹쌀떡을 좋아해? 허. 안 어울리네."
"어… 너한테서 선물로 받아서 먹을 때마다 당시의 추억이 떠오른다고 했는데. 어떤 찹쌀떡이 나올지 모른다 어쩌구…"
시라유키는 제 말을 듣자 감탄사를 내뱉었어요.
"이런!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진짜 대단하네."
어라. 시라유키에게는 별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었나? 까먹어버릴 정도로?
"내가 이렇다니까. 그러니 직접 물어보는 게 빠를 거야. 마유즈미. 나와 시라베는 서로 사생활까지는 간섭하지 않거든. 그림. 책. 음식. 노래. 뭐. 성적 판타지. 아무거나."
저는 마지막 단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충 히무로의 기호를 물어볼 만한 게 하나 더 있구나 생각하고 그건 나중에 물어보기로 했어요. 문제는. 제가 히무로에 대해 알고 싶은 건 정작 히무로 본인에게 물어보기 뭐했다는 거죠.
"그치만 그… 직접 물어보기 어려운 것들 있잖아. 이상형 같은 거라던가…"
"그런 걸 물어봐서 어쩌게?"
시라유키는 키득거리며 말했지만 저는 어떤 변명을 해야 그럴싸할지를 머리에서 쥐어짜느라 죽을 지경이었어요. 결국에는 대답이 너무 늦어서 시라유키의 눈이 크게 뜨일 뿐이었죠.
"아니 잠깐. 그러니까. 너는… 히무로를… 응?"
저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시라유키는 자기 턱을 어루만지며 혀를 한 번 쯧 하더니. 알쏭달쏭하다는 듯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어요.
"어려운데… 하아… 골치 아파. 여자 취향…? 글쎄… 시라베한테 그런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 외롭다고 하소연하는 것도 본 적이 없고… 그런데 시라베를 좋아하는 이유가 뭐야? 아니다. 아니다. 그냥 말하지 마. 어차피 들어봤자 이해 안 될 테니까. 내가 진짜 연구를 많이 해도 연애 분야는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지…"
시라유키는 중얼중얼거리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어요. 어딘가 좋지는 않은 조짐이라 긴장하고 있는데. 시라유키는 이렇게 물었어요.
"진심 어린 말이 듣고 싶어, 듣기 좋은 말이 듣고 싶어?"
"어? 진심 어린 말."
그야 진심 어린 말과 듣기 좋은 말이 서로 다르단 건. 듣기 좋은 말이 진심 어리지 않았다는 뜻이니까요. 저는 그런 사탕발림보단 진솔된 조언이 듣고 싶었어요.
진솔된 조언을 듣기 전이었으니. 제가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던 거죠.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다가 너만 지쳐서 떨어져 나갈 테니까."
시라유키는 시원하게 말했어요.
그리고 저는 사실 듣기 좋은 말이 듣고 싶었나 봐요. 그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아서.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막 캐묻고 싶어지는 거 있죠?
입술이 옴싹거렸지만 입이 열리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헛된 시간을 몇 초 더 보냈을 때. 시라유키는 다급하게 말했어요.
"취소! 취소할게! 미… 미안. 기분 나빴구나. 그렇지? 나참. 나도 서투르다니까. 배려가 없어 사람이… 하지만 이게 사실이야. 마유즈미. 하아… 이걸 어떻게 잘 말해야 네가 상처를 덜 받을까…?"
시라유키는 정말 난처하다는 듯이 말했어요. 그리고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이야기했어요.
"너는 시라베를 매력적이라고 여기는 게 아니라. 그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해서 사랑으로 보답하려는 거야. 그건 동경이나 보은 심리에 더 가까워. 너는 설화에 나오는 학과도 같아. 구해줬으니까 당연히 아내가 되어서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그거. 지금까지 숨겨왔지만 당신은 제 생명의 은인이랍니다. 아이는 몇 명이 좋아요?"
"뭐뭐뭐뭣. 뭐라는 거야 지금?! 아니라니까! 그렇게까지 먼 미래의 일은 생각도 못 했어!"
저는 완강히 시라유키가 틀렸다고 말했지만, 저보다는 시라유키가 더 완강했어요. 시라유키 나름대로의 근거도 있었고요.
"맞대도? 나는 그런 사례를 정확히 알고 있어. 시라베가 나에게 구애한 것처럼. 너는 시라베에게 구애하는 거야."
"헉!"
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몇 번 끔뻑였어요. 제가 이해한 내용대로라면 저는 아주 해서는 안 될 짓을 해버린 거였어요. 남의 정인을 넘본 건가? 그것도 그 사람에게 내가 넘보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하다니! 저는 등줄기에 땀이 차는 걸 느꼈어요.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가 않았어요. 아주 방금 시라유키가 히무로와 그녀 사이의 관계를 쿨하다고 표현한 건 금방 잊어버렸던 거죠.
"잠깐! 아니야. 오해하지 마. 마유즈미! 내가 거절했어!"
하지만 시라유키는 제 기색을 눈치챈 듯이 빠르게 손사래를 쳤어요. 그러자 제 입 안에서 휴 하는 한숨이 빠르게 밖으로 빠져나갔어요. 어. 나 지금 안도한 건가? 제가 스스로를 보며 어안이 벙벙해질 때쯤 시라유키는 다시금 말을 이었어요.
"꽤 된 이야기야. 시라베가 언젠가 나를 불러 세워서 나를 연모한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었어. 나는 거짓말을 했지. 나는 네가 남동생으로 보이고,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동경하는 거라고. 시라베는 납득했어. 자신의 사랑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폐가 있었던 거야. 시간을 가지고 보면 결국 다른 남자가 더 마음에 들걸?"
거짓말을 했다고? 저는 시라유키가 히무로를 거절한 진짜 이유를 듣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걸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저는 아쉬움을 느끼며 입을 꾹 다물었죠.
그런데 시라유키는 제 그런 기색마저 읽더라고요. 이쯤 되니 시라유키가 사실 사토리 요괴의 후손은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어요.
"히무로는 사랑에 대해 몰라. 마유즈미. 그게 네 사랑이 난황을 겪을 가장 큰 요인이야."
"그건… 나도 알아. 히무로가 어떤 면에서 되게 둔감한 거. 하지만 그렇다고 히무로가 쭉 그러리라는 법은 없잖아!"
"물론 그렇지. 히무로의 인간적인 면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어. 하지만 네가 히무로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일 거야. 초고교급 재능을 여러 개 가진다는 건 그런 의미지. 대가가 여러 개 따라온다고. 마유즈미. 나. 정말 너에게 상처를 줄 생각은 없어. 단지 내 말이 옳을 뿐이야."
저는 시라유키의 말에 반감이 생기기보다 먼저 시라유키의 어조가 적응이 되지 않았어요. 저는 그때까지 시라유키를 무지 상냥하고 사려 깊은 사람으로 보고 있었거든요. 물론 시라유키가 상냥하지 않다는 건 아니었어요. 저는 시라유키가 저를 배려해주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방법은 조금 이상할지라도요.
악의는 없었어요. 그건 확실했어요. 그건 그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정말… 그뿐이었어요. 시라유키는 저에게 모진 말을 하지 않아요. 하지만 남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그녀의 관심사 밖이었어요. 왜냐하면… 그건 덜 중요한 일이니까요. 그 부드럽고도 차가운 태도는 마치 피부에 닿는 첫눈처럼 느껴졌어요.
"정말 네 기분이 안 상했으면 좋겠다. 마유즈미. 잘 받아들이길 바랄게."
저는 왜인지 시라유키의 그런 모습에서 누군가를 보았어요. 카텟 기관에서 제가 아는 몇 명 중 하나. 그 남자애와요.
안녕. 일기 씨. 인사 생략할게요.
요즘은 매일이 똑같아요. 항상 능률은 바닥에 마음은 싱숭생숭. 또 주눅이 드는 매일이요. 예전만큼 글씨를 잘 읽지 못하고 있어요. 아무리 눈이 빠지게 봐도 어려워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마유즈미."
"아. 아니야! 나 아직 더 할 수 있어. 끄응… 그러니까… 이 글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럴 필요 없어. 사람의 집중력은 한계가 있고, 아무리 네가 스스로를 채찍질해도 그 한계가 팽창하지는 않아."
히무로가 그렇다고 하면. 그 일은 대개 히무로의 말이 맞았어요. 또 통 일에 집중이 안 되는 것도 사실이었고요. 그래서 저는 바락바락 우기기보다 처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편을 택했어요. 주섬주섬 검은색 겉옷을 몸에 걸치면서 저는 한숨을 내쉬었어요.
"요즘 내가 왜 이럴까? 나 옛날 같지가 않아… 이대로면 안 되는데…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이제는 글씨를 봐도 그게 남성 분이 쓴 건지 여성 분이 쓴 건지도 모르겠어. 다 거기서 거기 같지 뭐야…"
"현 상황보다 나아져야 한다는 강박이 오히려 너에게 독이 되는 것 같아. 마음을 편히 가지는 편이 나을 거야."
"그게 마음대로 안 돼…"
저는 또 가슴에 멍울이 낀 것처럼 답답해지는 걸 느꼈어요. 남자아이가 보고 있으니 조심스럽게 가슴뼈 아래의 오목한 곳을 콩콩콩 두드렸지만, 그게 싹 씻겨 내려가지는 않았어요. 으. 갑갑해. 갑갑해…
"뜨겁고 매운 거 먹고 싶다… 그러면 속이라도 확 풀리는데… 하지만 안코 씨와 종종 가던 라멘 집이 문을 닫았어. 라멘이 뜨겁다며 손님이 칼부림을 벌였대…"
"인사과의 야마모토 안코 씨 말하는 거야?"
"응. 내가 잘 먹는 게 보기 좋대. 자기 딸아이를 보는 것 같다고 하셨어."
"야마모토 씨는 딸을 잃었으니 그 빈자리를 네가 채우고 있는 거군."
순간 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어떻게 그런 상처되는 말을 할 수 있나 싶었지만, 히무로에게 악의는 없으리라는 깨달음이 뇌리에 스쳤어요. 애초에 히무로가 느닷없이 욕을 할 이유가 없었잖아요.
히무로와 지낼 때 당황스러운 점은 대개 이런 차이였어요. 히무로의 말은 곡해될 때가 많아요. 왜냐하면 히무로는 있는 그대로 말을 하거든요. 그게 듣는 이에게 어떻게 들릴지는 좀처럼 감을 잡지 못해요. 사려 깊지 않은 일이지만 그럴 의도가 없으니… 공놀이를 하다가 얼굴에 공이 아프게 날아오는 느낌이에요.
"그… 그 말은 나뿐만 아니라 안코 씨에게 조금 상처가 될 것 같아. 히무로. 내가 고인의 대체품이라는 말이니까…"
히무로는 그 말을 듣고 제 쪽을 바라보았어요. 저는 몇 초간 히무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읽을 수 없었어요. 저와 나란히 걷던 히무로는 문득 우뚝 걸음을 멈췄고. 곧이어 제게로 고개를 푹 숙였어요.
"마유즈미. 내가 경솔했어. 부디 용서해 줘."
피유. 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어요.
"받아줄게… 그런데 히무로.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도 그렇게 말하면 오해 사. 나를 모욕할 생각은 없었던 거 맞지?"
"추호도 없었어. 미안해."
저는 이렇게 의도치 않게 경솔한 이야기를 한 히무로의 표정을 볼 때면. 왜인지 주눅이 들고 풀이 죽은 것처럼 보였어요. 남들이 보기에는 평소와 다른 무표정이어도 저에게는 다르게 보였어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 자기를 미워하는 것 같은? 느낌이요. 히무로와 친한 사람이 기관에 몇 없는 건 이렇게 생긴 사소한 오해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시라유키의 조언은 때때로 제 머릿속에 떠올랐어요. 그리고 저는 분명 저와 히무로 사이에 이해하기 어려운 차이가 있음을 느꼈어요. 시라유키에게서 느꼈던 간극과 같았어요. 신경 쓰는 것의 차이가 있다는 느낌이요.
"미안하면. 음… 네가 잘 아는 매운 요리 식당 있어? 소개해 주라."
"나는 매운 음식을 즐기지 않아. 별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서 너와 같은 미각을 느낄 수 없어. 대부분은 설탕이나 소금이 과도하게 들어간 음식의 맛이 나지."
"우와. 힘들겠다… 매운 거 되게 맛있는데. 그렇지만 히무로는 불지옥맛 라멘도 쉽게 먹을 수 있다는 거잖아? 대단하다. 약간 부러워 질지도…?"
"매운 음식은 통각을 즐기기 위해 섭취하는 거잖아. 통각에 둔한 사람이 먹어봤자 본말전도야. 그리고 마유즈미. 통증으로 인한 엔도르핀 분비로 내적 갈등을 해소하는 것보다는 상담 팀에게 문의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그…치만 다른 사람한테 내 이야기하는 게 조금…"
저는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히무로를 곁눈질했어요.
"그렇다면 급하게 할 필요는 없지. 시간을 들여. 마유즈미."
"하아… 그렇게 마음을 편하게 먹을 수가 없어. 히무로… 계속 이런 식인 건 나도 싫단 말이야. 대체 뭐가 문제일까…? 매일매일 연습을 해도 나아지지가 않는다니…"
"꾸준히 무언가를 할 정도의 집념을 가지고 있다면 성취는 반드시 따라올 거야."
"좋은 말 해 줘서 고마워. 히무로… 하아. 그렇지만 내가 꾸준히 연습한 글씨들은 내 샤이닝 수치와 거의 비슷했어. 대부분이 좀… 저조하더라. 몇몇은 꽤 좋은 글씨였지만 나머지는 내 성에 못 미쳤어."
그리고 히무로는 제 쪽을 돌아보았어요.
"마유즈미. 그 말은 네가 이룬 성과를 정기적으로 기록한 샘플이 있다는 뜻이야?"
"응. 맞아. 자기 전이나 밥 먹고 나서 매일 한 장씩 적어. 별건 아니지만… 그날그날 떠오른 사자성어 같은 것들이야. 그냥 글씨."
"한 번 보고 싶은데. 너에게 조언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으엥? 저는 과연 이게 히무로를 제 방으로 부를 수 있다는 뜻일까 떠올렸지만. 그건 좋지 않은 생각 같았어요.
"어. 그건 좀… 그게. 그러니까…"
제가 횡설수설 우왕좌왕을 하려던 와중 히무로는 제 말을 끊고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렇군. 이해했어."
"나 아직 아무것도 말 안 했는데?! 뭘 이해한 거야. 히무로!"
"대몰락의 시대에 남을 자신의 거처로 부르는 건 신중하지 않은 일이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까. 네가 옳아. 그럼 내일 보자. 마유즈미."
"자. 잠깐! 내가 널 믿지 못해서 부르기 싫어하는 게 아니야! 그냥… 부끄러워서 그런 거야!"
"부끄럽다고? 어느 점이?"
"아…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부끄러운 것 같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불러도 될 것 같긴 한데. 아. 남자애를 내 방에 부르다니 이게 무슨 망측한…"
"무슨 문제가 있다면 거리낌 없이 말해 줘. 남의 사적 영역을 침범할 생각은 없어."
만약 제가 여기에서 오지 말라고 했다면 히무로는 쉽게 납득했을 테죠. 히무로에게 오지 말라는 말은 오지 말라는 말이니까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대답을 한다면 그쪽으로 히무로는 홱 돌아설 터였어요. 제 얄팍한 부끄러움 때문에 히무로와 함께 제 부진을 이겨낼 가능성이 훅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어요.
이걸 불러. 말아? 저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했어요. 그동안 히무로는 묵묵히 제 대답을 기다렸죠.
그리고 저는 장고 끝에 악수를 뒀어요.
"어어… 놀라 까무러치기 없기야. 알겠지?"
"나는 잘 놀라지 않는 사람이야."
히무로가 그렇게 말해놓고. 제가 자취방을 소개하자마자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짜자잔… 내 방에 온 걸 환영해. 어…때? 그렇게 더럽진 않지?"
"놀라운데."
"으아아아악! 안 놀란다고 했으면서! 그랬으면서! 으아아! 거짓말쟁이! 이 뻥쟁이야!"
"나는 잘 놀라지 않는 사람일 뿐이야. 이토록 열정적인 표본을 보면 놀랄 수밖에."
저는 제가 사는 방의 벽에다 제가 쓴 글씨들을 붙여 놓았어요. 집에서도 글을 쓰는 방은 그렇게 꾸며놓았기에 저에게는 오히려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전경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거라는 것 정도는 저도 알고 있었어요.
저는 벽에 붙여 놓은 수많은 종이를 구겨서 바닥에 버리고 싶었지만, 히무로가 그걸 흥미롭게 보고 있으며 또 가치 있는 표본이라고 하니 그럴 수도 없었어요. 그리고 묘하게 히무로의 어조가 칭찬 같기도 했고요. 아니. 분명 칭찬이었어요!
"그… 그래? 내가 그렇게 대단한가?"
"자신의 재능을 가꾸는 사람은 모두 대단한 이들이지. 너는 스스로의 역량이 부진할 때 그것과 정면으로 맞섰어. 내 능력이 부족해서 너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 연습은 계속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마유즈미."
"흐히히… 히무로가 나 대단하대."
저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잠재우려 애썼지만, 기쁜 건 기쁜 일이었어요. 칭찬에 인색하지 않은 히무로의 기질 덕분에 저는 또 몇 배로 기쁘게 되었어요. 히무로의 입장에서 사실을 여러 번 거듭해 말하는 건 정말 아무 일도 아니거든요. 다르게 말하면 제가 대단하다는 게 사실이라는 거죠!
"그래. 맞아. 너는 대단해."
"히무로. 그… 내 어느 면이… 대단해?"
다시 말하지만. 히무로는 칭찬에 인색한 편이 아니었어요.
"불특정 다수의 멸시를 견뎌낸 면. 선입견 없이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면. 보편적이지 않은 특기를 가진 면. 적응을 포기하지 않고 애쓰고 있는 면. 개인적으로는 모욕을 담했음에도 여전히 친절을 베푸는 그 배포도 고평가해. 그리고…"
"에이. 그만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자꾸 한다니까. 히무로는 정말!"
엄청 부끄러웠지만 전 그것 이상으로 기분이 좋아졌어요. 나 대단하대. 저는 칭찬에 정말 많이 고파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집에서도 칭찬을 들은 적은 몇 없었으니까요. 부모님도 안 하신 칭찬을 제가 동경하는 동료에게서 들으니. 기쁠 수밖에요.
저는 장난스럽게 히무로의 팔을 툭툭 쳤어요. 왜인지 그만하라고 말리고 싶으면서도 계속해 달라고 재촉하는 그런… 이상한 동작이었네요? 저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히무로가 이해하기는 더 어려웠겠죠? 결국 히무로는 특유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어요.
"왜 웃고 있으면서 그만하라는 거야? 물어본 장본인은 너였으면서."
"으흠. 히히. 그럼 이번에는 내 차례. 히무로의 대단한 점! 아무리 당황스러운 일 앞에서도 놀라지 않는 점. 사실은 다른 사람을 많이 생각하는 점. 언제나 당당한 점. 믿음직스러운 점. 또…"
"그런 이야기는 아무래도 좋아. 초고교급의 대가를 여러 개 짊어진 결과일 뿐이니까."
저는 히무로의 그 말에서 시라유키가 했던 말을 떠올렸어요. 초고교급 재능을 여러 개 가진다는 건 그런 의미지. 대가가 여러 개 따라온다고. 대가? 대가라니?
제가 그게 뭐냐고 히무로에게 묻기 전에 히무로는 제 방의 벽 여기저기에 붙은 글씨들을 바라봤어요.
"일진월보(日進月歩), 오월동주(呉越同舟), 후생대사(後生大事), 분골쇄신(粉骨砕身)… 분골쇄신은 이전과 다른 기법으로 쓴 것 같은데. 마유즈미. 당시에 감정적인 동요를 느꼈던 것 같아."
윽. 저는 쿡 찔린 것처럼 몸을 움츠렸어요. 사실 분골쇄신이라는 글자를 쓸 때 저는 꽤 결의에 차 있어서. 심장이 쿵쿵 뛰는 걸 느끼며 어떻게든 이 부진의 벽을 깨겠다고 다짐했거든요. 히무로는 그걸 그대로 읽었어요.
"기관에서 썼던 글씨보다 나아. 기관이 너에게 압박과 긴장을 주고 있는 거야. 마유즈미. 기관에서…"
"안 떠날 거야. 히무로. 도망치기 싫거든. 나는 언젠가 글씨 식별을 엄청나게 갈고닦아서 우리한테 토마토를 뒤집어씌운 사람을 찾아낼 거야!"
히무로는 가끔 저에게 기관을 떠날지 말지를 물었어요. 자기 말로는 추천서까지 써 주겠다고 했으나, 저는 카텟 기관을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저에게 장난질을 친 사람이 제가 기관을 떠나는 걸 보면. 고소하다며 발을 뻗고 잘 터였으니까요. 저는 그 장난꾼한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또… 뭐. 다른 이유도 있고요.
"찾아내서 어떻게 하게?"
"어… 사과하라고 해야지. 마음 같아선 무릎도 꿇리고 싶은데. 그건 좀 심하려나…?"
"굉장히 관대한 처우인걸. 나는 생사결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은 사안이라고 생각해."
저는 제 귀를 의심했어요. 생사결(生死決)이라는 단어를 들은 적 없기도 했지만, 그 한자의 뜻을 유추했을 때 그 내용을 더더욱 믿을 수 없게 되었거든요. 생. 살다. 사. 죽다. 결. 정하다…?
"…아하하하. 재밌다! 농담이구나. 히무로! 아하하!"
저는 애써 웃다가 히무로의 그 표정을 보고 웃음을 서서히 거둬들였어요. 그. 아시잖아요. 왜 웃는 거지? 하는 그 떨떠름한 표정이요.
"다… 다음 글씨나 보자. 이거. 아. 이거 좋다! 이건 그나마 잘 쓴 것 같아. 심혈을 기울여서 썼거덩!"
"빙탄상애(氷炭相愛)…"
히무로는 제가 건넨 종이에 잠시 시선을 집중했어요. 오오! 그래. 너도 뭔가 느끼는구나! 꽤 기량이 저조했던 다른 글씨들과는 달리 빙탄상애는 제 역량이 꽤 잘 발휘된 작품이었거든요. 손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고 먹이 튀지도 않았어요. 저는 몸을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몇십 분에 걸쳐서 네 글자를 썼어요. 자랑할 만한 글씨였죠!
"어때? 응? 히무로. 어때? 뭔가 느껴지지? 뭐라고 할까. 염원이라던가 집념이라던가. 정서와 감정! 그런 게 보이지 않아? 우오옷!"
히무로는 그렇게 몇 초를 더 보고 있다가 제게 다시 종이를 건네주었어요.
"잘 쓴 글씨네. 흠잡을 것이 없어."
"……어. 어어. 응. 고마워. 히무로."
그리고 종이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을 때. 저는 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히무로와 마주쳤어요. 왁!
히무로는 당연하다는 듯이 저를 보고 있었어요. 아주 찰나의 시간도 저에게는 꽤 길게 느껴졌어요. 히무로의 그 어떤 금기와 통념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태도는. 모름지기 남녀는 서로를 바라보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는 제 틀을. 빡 하고 부숴버리는 거예요. 뭐라고 써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히무로가 저를 바라봤을 때… 저는 무방비해졌어요.
"내가 어떤 실수를 한 거야? 반응이 좋지 않은걸."
그리고 곧 히무로의 질문이 저를 꿈에서 깨어나게 했죠.
"아니야! 그런 거 없어! 단지… 유심히 보길래. 뭔가 할 말이 있는 건 아닐까 싶었을 뿐이야. 하기야 잘 쓴 글씨를 어떻게 잘 썼는지 말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겠지. 음흠."
"할 말은 있어. 다만 그게 네 솜씨와 관련된 내용이 아니라. 글씨에서 다른 고사를 떠올렸을 뿐이야."
"고사? 무슨 고사? 혹시 빙탄상애라는 한자와 같이. 얼음과 숯처럼 서로 맞지 않는 사람들이 이윽고는 사랑하게 된 낭만적인 기적의 이야기인가?!"
"아니. 고대 초나라의 신하 굴원이 간신들의 모함으로 유배를 갔을 때의 이야기야."
아. 저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다가 별반 재미없는 이야기의 기운을 느끼고 기세를 팍 누그러뜨렸어요. 세차게 뿜어져 나오던 콧김도 사그라들었죠.
"굴원은 결국 유배지에서 죽었어. 한나라의 신하였던 동방삭은 그런 굴원을 추모하며 다음과 같은 시구를 남겼지. 빙탄불가이상병혜(冰炭不可以相並兮)."
저는 히무로가 하는 말을 듣고 한자가 뜻하는 바를 말했어요. 거의 생각하지도 않은 채로요.
"얼음과 숯은… 함께할 수 없노라?"
"충신이었던 굴원과 아첨하여 유능한 신하를 쫓아내 버리는 간신들이 서로 공존할 수 없다는 뜻이야. 이 시어에서 빙탄상애라는 사자숙어가 파생되었겠지. 동방삭 쪽이 옳아. 차이를 가진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 빙탄상해(氷炭相害)가 될 뿐."
"…그런 말 하지 마. 히무로."
저는 그 단어에 어느 정도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심하지만 히무로에게 의견을 전했어요.
"어째서? 이건 사실이야. 마유즈미. 로와 평범한 사람들은 마주치지 말아야 해. 그들은 차라리 다른 인종에 가까우니까. 재능을 가진 만큼 무언가를 내려놓은 사람들이 세뇌 교육까지 받았어. 로는 사람을 자신과 같은 종으로 보지 않아. 통솔해야 할 유인원으로 인식할 뿐이야."
"내려놓는다는 게 무슨 뜻이야? 초고교급의 대가와 그건 무슨 관련이 있는 건데. 히무로?"
저는 속으로 약간 울컥했어요. 하지만 그 이유를 말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히무로는 제 얼굴을 빤히 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어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일단 앉자."
그렇게 저와 히무로는 식탁을 펴고 서로 앉았어요. 뭐라고 해야 하나. 그제야 저와 히무로가 단둘이 한 방 안에 있다는 사실이 좀 실감이 되더라고요. 괜히 다소곳하게 앉게 되고요. 막 머리를 재빠르게 정돈한다던가. 히무로랑 눈이 마주치고 싶기도 하면서 마주치지 않고 싶기도 하고. 발가락이랑 손가락이 제멋대로 막 꼼지락꼼지락… 아까 속에서 끓은 울컥은 대번에 잠잠해지고서 그 간질간질한 느낌이 방 안을 가득…
"초고교급 학생들은 그 분야에만 특화된 자들이야."
아. 이야기 시작이구나. 저는 딴생각을 그만하고 히무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어요. 마법처럼 제 몸과 방을 채우던 분홍색 기운은 사라졌지만. 그 감각은 여전히 제 어딘가에서 몽실몽실 도사리고 있었어요.
"개인마다 차이가 있지만, 초고교급 학생들 중에는 특정 분야에 뛰어난 만큼 어떠한 분야에는 그에 대비될 정도의 약점을 가진 자들이 있어."
"약점?"
"특이점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가령 신체운동 계열의 초고교급 인사 중 복잡한 행정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자는 15%도 채 되지 않아. 어려운 일터 속에 던져 놓으면 그들은 악성 민원인과 부대끼지 못하고 그들의 멱살을 잡아. 이건 농담이 아니야. 그렇기에 초고교급 학생들은 변질된 사회에 적응하기 힘든 거야. 그들은 특정한 움직임을 할 수 있도록 타고난 자들이지만… 그만큼 다른 기능은 퇴화하기 마련이야."
저는 히무로가 하는 말을 좀처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그건… 말이 안 돼. 히무로. 그럼 초고교급은 누구 할 것 없이 전부… 어딘가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거야?"
"내가 말하는 대가란 보편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야. 물론 인격적 결함 없이 사는 초고교급도 많아. 노력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 자들도 많고. 하지만 메리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의 재능은 시대를 거듭할수록 점점 강해지고 있으니… 언젠가는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정도의 결함을 모든 초고교급이 떠안게 될지도 모르지."
초고교급 재능을 여러 개 가진다는 건 그런 의미지. 대가가 여러 개 따라온다고.
그게 그 의미였구나. 저는 시라유키가 남겼던 말을 비로소 이해했어요.
"…히무로. 그럼 네가 무뚝뚝한 것도… 그 일환인 거야?"
이렇게 물으면 실례일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안 그래도 불편해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런 물음이라뇨. 하지만 히무로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어요.
"맞아. 재단에서 의도적으로 감정 중추를 억누른 탓도 있지만. 주입당한 샤이닝 또한 내게 영향을 미쳤어. 한두 가지의 결함이 쌓이면 나처럼 변하는 거야. 로는 한쪽의 각을 없애버린 육각형이야. 그들의 원형을 이루던 기둥이 하나 무너져 버렸어. 그러니 그들은 서로가 아니고서야 누군가를 이해할 수도, 함께 살아갈 수도 없지."
"…그럼 그들은 사랑을 느낄 수도 없을까?"
"몇몇은 아예 불가능할 거야. 그리고 만약 느낄 수 있는 개체가 있더라도 그 사랑은 보편적인 의미의 감정이 아니겠지."
"기쁨은? 슬픔은? 불쌍히 여기는 감정은?"
"마찬가지야. 대적자는 적을 영구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일만이 기쁘고, 행운아는 보통 사람들이 미개하기에 슬프고, 개척자는 원시적인 인류를 불쌍히 여기지. 마유즈미. 너는 로를 같은 사람으로 보기에 그런 실수를 범하는 거야.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그런 건 없어."
"잠을 잘 때 누군가를 떠올리지도 않는다는 거야? 다른 사람과 네가 같이 있는 장면은 조금도 떠올리지 않아?"
"떠올리지."
저는 덤덤히 이야기하는 히무로에게 옳다구나 소리쳤어요. 그래. 그런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 많은 일을 겪은 히무로에게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도 없다니. 그런 건… 너무 가혹하잖아요!
"거봐! 너도 누군가를 사랑하잖아! 아직 시라유키를 사랑하는 거잖아. 그건 보은이나 동경 같은 게 아니야! 너는 사랑을 가지고 있어! 안 되겠다. 내가 도와줄게! 다시 한번 똑똑히 말하는 거야. 히무로! 시라유키에게…"
"내 말을 곡해한 것 같은데. 마유즈미."
히무로는 제 제멋대로인 말을. 등을 떠밀어 주겠다는 그런 오망방자한 말을 손쉽게 끊었어요. 그 표정. 히무로의 얼굴에 떠오른 그 표정은 잊을 수가 없어요.
평소와 똑같았거든요. 히무로는 제가 어떤 말을 하든 상관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자신의 옛 구애를 제삼자인 제가 느닷없이 꺼내도 히무로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어요.
"나는 연모의 대상을 떠올리는 게 아니야. 나로 실험을 하던 자들을 떠올리고, 로의 얼굴을 떠올리고, 내가 구하지 못한 사람들을 떠올려. 그리고 나는 전망 어두운 일을 굳이 공상하지 않아."
그건 마치 아무리 돌을 던져 봐도 한 줄기 울림조차 일지 않는 호수였어요. 의아해져서 저는 그 호수에 뛰어들었지만. 저는 그 안으로 발가락 하나조차 담글 수 없었어요.
그 호수가 얼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제 발만 차가워질 뿐인 꽝꽝 얼어붙은 호수요. 그건 상처를 입지도 않아요. 안에 무언가를 품지도 않아요. 그건… 그저 얼어 있고. 조금도 요동치거나 깨어나지 않는 거예요.
그 호수는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있어요. 엄청나게 괴롭고 불행해 보이는데. 외로워 보이는데. 히무로는 자신이 그런 줄도 몰라요. 상처투성이인데. 그냥… 살아요.
"왜 우는 거야. 마유즈미? 내가 또 말실수를 했나?"
저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어요.
"…네가 딱해서."
"…흠."
"여전히 별로야?"
"점점 안 좋아지는데. 마유즈미. 혹시 히무로한테 차였어? 아. 미안."
"왜 자꾸 미안할 말을 해?! 그리고 아직 얘기도 못 꺼냈어! 네 말대로더라. 자기는 사랑에 대해 모른다나. 로는 사람과 어울려서는 안 된다나.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차인 기분이라니까! 잘났어. 정말…! 이씨잉…!"
"진정해. 마유즈미. 운다고 해서 히무로가 너를 신경 쓰지는… 미안."
"나 너 싫어!"
한바탕 소동이 있은 후에. 저는 다시금 입을 열었어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부정적인 생각을 자꾸 해서 그래. 그럼 네 능률도 떨어져. 심리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물리학적으로 그렇게 돼."
"뭔 뚱딴지같은 소리래…? 그럼 내가 딱 지금부터 나쁜 생각 그만해야지! 다짐하고 그대로 지키면. 나는 순식간에 날개를 펴고 날아다녀?"
"어. 맞아. 사실 더 쉬운 방법이 있긴 한데. 그건 네 마음에…"
"알려 줘!"
저는 시라유키에게 왁 소리쳤어요. 저를 좀먹고 있던 부진은 히무로와 제가 얼마나 차이 나는지를 다시 한번 보고 히무로가 어떤 사람인지 느끼고 난 뒤로 더욱 심해져서. 그걸 떨쳐낼 방법만 있다면 저는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고 싶었거든요.
"내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마유즈미. 그건 네 마음에 들지 않을 거야."
"듣고 나서 결정할래. 그러니까 들려줘!"
"끝까지 들으래도. 그리고 이 방법은 굉장한 기밀이야. 능률을 올리고 싶으면 그냥 시간을 들이는 편이 나을 걸."
"히무로랑 똑같은 얘기를 하네… 그래도 듣고 싶어! 응? 제발. 시라유키. 부탁이야!"
"하아… 이걸 어떻게 하지…"
시라유키는 손으로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내리고서 생각에 잠겼어요. 서서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시라유키는 가끔씩 한숨을 내쉬면서 무언가를 중얼중얼거렸어요. 어딘가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리려는 것 같았어요.
마침내. 시라유키는 웃음기 하나 없이 입을 열었어요.
"마유즈미. 들려줄 수 있어. 하지만 그걸 들으려면 너는 나를 아주 자세히 알아야 해. 그럴 준비가 됐어?"
저는 시라유키의 말을 곱씹었어요. 그리고 준비는 충분하니까 당장 방법을 보여 달라고 소리치려 했어요. 그 순간. 제 혀가 굳어 버렸어요.
왜인지는 설명할 수 없어요.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어요. 시라유키가 불편했다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저는 그런 사사로운 차원을 넘어선 격동을 느끼고 있었어요. 주변에서 북소리가 둥 둥 울리고 있는 것만 같은. 큰 전투를 앞둔 영주가 내 운명의 갈림길이 이곳임을 깨닫듯이. 저는 저 자신이 기이한 힘이 모인 어느 지점 위에 서 있는 것 같았어요. 아니. 제가 그 지점이 된 듯했어요.
무언가가. 크게 움직이고 있었어요.
저의 운명이…
"자리를 옮길까."
시라유키는 저를 스쳐 지나가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어요. 저는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다가 중얼거렸죠.
"하지만 나는 아직 대답을 안 했는데…?"
"하지만 따라올 거잖아. 그렇지?"
………
저는 벽에 느닷없이 난 구멍 속으로 몸을 쑤셔 넣었어요. 그 안에는 축축한 어둠과 비밀스러운 계단이 있었어요. 시라유키는 먼저 손전등을 계단 쪽으로 비추며 앞장을 섰어요.
"너는 일단 내 좋은 모습만 봤으니 모르겠지만. 마유즈미. 나는 진짜 진짜 착한 척을 하고 있는 거야. 이제는 몇 안 되지만 내 옛날 모습을 본 사람들은 알아. 내가 어떤 인간말종이었는지."
"가. 갑자기…?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시라유키. 너무 자신한테 엄격하잖아…"
"그치만 사실인걸? 나. 지금까지 나쁜 짓 엄청 했어. 네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쁜 짓을 했어. 내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한 짓이 어떤 여파를 낳았는지 너는 생각도 못 해. 내가 여기서 말해 주잖아? 장담컨대. 너는 뒷걸음질을 칠 거야."
저는 그제서라도 밖으로 도망칠까 따위의 약한 생각을 했지만. 제가 보고 싶다고 졸라대서 따라온 마당에 그런 얌체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왜 그렇게 무서운 내용을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거야. 시라유키?"
"…미안해. 나한테는 문제가 조금 있거든. 하지만 곧 나아질 거야."
저는 그건 대답이 아니며 왜 항상 사과할 만한 말을 하느냐고 따지려다가 그만두었어요. 시라유키의 목소리가 묘하게 주눅이 든 것 같았거든요. 저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어요.
마침내 시라유키가 계단의 끝에 도달하고 어떤 막대를 밑으로 끼릭 당겼을 때. 주변의 전경이 환해졌어요. 높은 천장 위. 옆에 있는 벽. 어떤 곳은 바닥에서까지 조명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어요. 저는 감탄하며 시라유키의 뒤를 따랐죠. 비밀의 방…
"이곳을 누군가에게 보여준지도 꽤 오래되었어. 아무튼. 잠깐 구경이나 하고 있어. 위험해 보이는 건 건드리지 말고."
"시라유키…내 눈에는 다 위험해 보여."
저는 시라유키의 사무실에서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맞닥뜨렸어요. 저는 정말 견식이 좁아서 복잡하게 생긴 기계 장치들과 발명품들은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분야만 쓸게요. 온갖 과학적 무언가가 즐비한 방 한켠에는 그림과 글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어요.
검은색 탑의 그림. 붉은색 무언가를 뒤집어쓴 여자애의 그림.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가 덕지덕지 쓰인 칠판. 제가 보았던 어떤 종이보다 더 낡고 헤진 종이. 그 위에 쓰인 이해할 수 없는 언어… 빛과 어둠이 충돌하는 그림… 저는 그걸 보면 볼수록 어딘가 불쾌한. 견딜 수 없어지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일이 무서워졌어요.
"…미안. 내가 잠깐 해야 하는 게 있어서. 빨리 끝내고 다 설명해 줄게."
시라유키는 그렇게 말하고서 자신의 팔을 흐물흐물하고 탄성 있어 보이면서 억센 막대…? 같은 걸로 묶었어요. 그리고 시라유키는 자기가 입은 흰 긴옷의 소매를 들춰 올렸죠. 드러난 시라유키의 팔에는 무언가에 무수히 찔린 것만 같은 자국이 나 있었어요.
"허억…! 괜찮아?! 시라유키. 이떻게 된 거야! 누가 이렇게 했어?!"
"나 자신이."
"뭣?!"
어안이 벙벙해진 저에게 시라유키는 말을 이었어요.
"보통 이렇게 팔에 난 주사기 자국들은 무언가를 투여한 흉터로 취급되곤 하지. 하지만 내 흉터는 아니야. 내 건 오히려… 무언가를 추출해 낸 흔적이야."
그러고 나서 시라유키는 벽에 있는. 아니 벽처럼 보이는 아주 커다란 기계 앞으로 서서히 다가갔어요. 그 앞에는 나름 푹신한 재질의 가죽으로 덮인 침대와 의자 중간 정도 되는 물건이 있었어요. 시라유키는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기계의 여러 장치를 만지작거리더니 그 침대의자에 풀썩 걸터앉았고, 기계와 연결되어 있는 투구 비슷한 걸 머리에 뒤집어썼어요. 머리를 감싸는 금속이었는데 투구 말고는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네요.
저는 서서히 웅웅 거리는 소리를 내며 공명하는.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성능의 기기의 진동 앞에서 겁을 냉큼 집어먹었어요.
"뭐… 뭘 하려는 거야. 시라유키?"
"아까 말했잖아. 추출."
저는 시라유키에게 그게 무슨 뜻인지를 더 물어보려고 했으나 그걸 들을 수는 없었어요. 시라유키 본인이 낼름 재갈을 입에 물었거든요. 기계는 점점 더 크게 울어댔어요. 무언가가 회전하는 소리. 커지는 소리. 시라유키는 그 앞에서 침착했어요. 늘 하던 일인 것처럼 오히려 시라유키는 능숙하게 움직였어요.
시라유키는 침대의자에 앉은 채 기계의 단추 같은 걸 꾹 눌렀어요. 그리고 온갖 전선과 관으로 기계에 붙어 있는, 짧은 바늘을 가진 기이한 스캐너를 자신의 팔로 천천히 가져다 댔어요. 저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시라유키가 옳은 방향이나 지점을 찾기 위해 아주 정교히 인형을 깎는 사람처럼 집중하고 있음을 알았어요. 점점 커져가는 소음과 진동 속에서도요.
저는 숨 하나 쉬는 것도 조심했어요. 시라유키가 그러고 있었거든요. 마침내 시라유키는 자신의 팔 깊숙한 곳에 푹 바늘을 꽂아 넣었어요.
입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비명이 시라유키의 입 안에서 터졌어요. 시라유키의 새하얀 피부는 곧바로 새빨개졌고, 시라유키는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댔어요. 너무 아파서 견디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였어요. 다리는 쭉 펴졌고, 허리는 등 뒤로 한 없이 꺾였어요. 이윽고는 침대의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털썩 쓰러지기까지 했어요.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시라유키는 자신의 팔에서 스캐너를 떼지 않았어요.
시라유키의 비명이 어땠는지는 쓸 수 없어요. 그저 저는 시라유키가 재갈을 차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게 아니었다면 어떤 종류의 끔찍한 절규를 들을지 몰랐으니까요. 저는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어요. 봐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이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잘못된 일이라는 느낌이 저를 핥고 지나갔어요. 하지만 발은 움직이지 않았어요.
시라유키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투구가 덜덜덜덜 떨려댔어요. 저주받았다. 이 자리에서 하고 있는 일은 저주를 받았다. 저는 그런 인상만을 받았어요. 섭리를 벗어나는 일. 보고만 있어도 죄가 될 것 같은 느낌에 저는 눈을 질끈 감았어요.
시라유키는 목이 거의 쉰 채로 신음했어요. 몸은 아기처럼 웅크리고 덜덜 떨어댔어요. 그러는 동안 서서히 비명소리는 잦아들어갔고. 몸의 떨림과 고통도 서서히 진정이 되는 것으로 보였어요. 저는 그때 자신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거세게 내쉬었어요. 그리고 시라유키에게 다가갔어요.
"어… 어떻게 된 거야. 시라유키?! 무슨 짓을 한 거야. 아까 그건…"
저는 시라유키의 팔을 잡고 몸을 침대의자 위로 끌어올려 주었어요. 그러자 시라유키는 재갈을 벗어 바닥에 던지더니. 휘청휘청 몸을 일으켜 기계의 구석을 향해 걸었어요.
"…왜 네가 부진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지?"
무언가가 나오게끔 설계된 것처럼 보이는 구멍 안에서. 검은색 액체나 고체로 가득 찬 것 같은 제 엄지 손가락 한 뼘 크기의 유리병이 떨어졌어요. 시라유키는 그걸 손으로 들어 저에게 보여주었어요.
"이건 다크닝이야. 너를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
"차라도 마실래? 이상한 걸 보여주게 해서 정말. 정말 미안해. 너에게 안대라도 줬어야 했는데. 많이 놀랐겠다. 그렇지? 마음 같아서는 기억소거제를 주고 싶지만… 너도 이 일을 기억할 자격은 있으니 그러지는 않을게. 아. 내 정신 좀 봐. 홍차 한 잔 마시자. 나도 우리는 법을 어느 정도 알거든."
시라유키는 천연덕스럽게 비밀의 방 어디론가로 사라졌어요. 저는 시라유키가 사라진 동안 그녀가 놓고 간 유리병을 가만히 보았어요. 유리병 안에는 검은 무언가가 가득 담겨 있었죠. 시라유키는 그걸 다크닝이라고 불렀어요.
대체 내가 뭘 본 거지? 시라유키는 본인의 몸에서 무언가를… 뽑아냈어요.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엄청나게. 엄청나게 아파 보였어요. 저는 시라유키가 스스로를 고문하는 줄만 알았어요. 그 고통. 상처투성이였던 시라유키의 팔. 대체 시라유키는 뭘 한 걸까요?
왜 이 추출이 끝나고 난 뒤에 시라유키가 묘하게 더 상냥하다고 느껴지는 걸까요? 저는 몰랐어요. 시라유키라는 사람에 대해서 저는 조금도 모르고 있었어요. 왜인지 그녀가 조금 무서워져서. 결국 저는 시라유키가 건넨 홍차를 입으로 가져다 대며 손을 덜덜덜 떨었어요. 홍차가 컵 안에서 튀어 제 입술을 뜨겁게 했지만 떨림이 멎지는 않았어요.
"아. 너무 미안한데… 마유즈미. 진정해. 정말 별 것 아니야. 몸에서 종양을 제거하는 것과 같은 결의 일일 뿐이야. 내 몸에 해도 없어. 오히려 득만 있다니까?"
시라유키는 그렇게 말하며 접이식 의자를 두 개 가져와 저를 앉혔어요. 저는 분명히 상냥한 태도를 하고 있지만. 왜인지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시라유키 앞에서 몸을 잔뜩 움츠렸어요.
"본론으로 들어갈게. 마유즈미."
그리고 시라유키는 샤이닝이라는 물질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어요. 시라유키는 본인이 먼 옛날 연구를 통해 사람의 몸 안에 샤이닝이라는 물질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했어요. 그리고 이 샤이닝은 초고교급 학생들이 특히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며, 샤이닝의 크기는 곧 재능의 척도라는 이야기도 했어요.
"내 인생사를 줄줄 읊진 않을 거야. 나는 내 실수로 사람이 죽은 일을 계기로 내가 악하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리고 어떻게든 내 기질과 성격을 누그러뜨리려고 노력했지. 명상. 심리 치료. 요가… 그러던 와중 나는 카텟 기관에서의 연구 끝에. 샤이닝과 반대되는 물질 또한 있다는 걸 알아냈어."
"그게… 다크닝인 거야?"
그렇다면 시라유키가 당장 몸에서 뽑아낸 다크닝은…
"이야기 잘 통하네. 그래. 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때 증진되는 다크닝이 샤이닝에 반응해서 그걸 꺼트려 버린다는 걸 발견했어. 여러 연구 끝에 나는 내 마음속의 악한 그림자. 내가 부정적이라고 판정하는 자아 일부를 추출해낼 수 있게 된 거야. 그렇게. 지금의 내가 있지. 상냥한 내가."
저는 그때 눈치챘어요. 시라유키의 그 묘하게 상냥하고도 차가운 태도는 차가운 사람에게서 상냥함을 최대한 끌어낸 결과임을요.
"다크닝은 너를 퇴화시키는 힘이야.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방황할수록. 네 마음 속의 그림자가 커져갈수록 너는 더 약해지지. 사실 네 샤이닝 수치는 굉장히 높아. 마유즈미. 네가 가진 재능은 네가 상상한 이상이라고. 문제는 네 다크닝 수치도 굉장히 높기에… 그 재능이 온전히 날개를 펼치지 못한다는 거야."
내가 마음고생을 할수록. 나는 더 약해진다고…?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나를 의심하면 의심할수록. 나아질 일은 없을 거라고…?
시라유키는 박수를 한번 짝 쳐 제 주목을 끌었어요.
"자! 그럼 이게 진짜 본론으로 들어가자. 다크닝 추출 시술을 받고 싶다면 언제든지 나에게 말해. 마유즈미. 정기적으로 이곳에 찾아와서 다크닝을 뽑아내기만 한다면 너는 네가 원하는 너 자신이 될 수 있어. 네가 좋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만 가질 수 있는 거지. 편리하지 않아?"
"…그렇다면. 왜 나에게만 이런 제안을 해 주는 거야?"
저는 시라유키에게 물었어요.
"너는 이 비밀의 방에 사람을 들인 것도 오랜만이라고 했어. 그럼 지금까지 다크닝 추출을 받은 사람은 너뿐인 거잖아. 이 기계가 여기에만 있다면 말이야… 그렇게 좋은 시술이라면. 왜 다른 사람 모두에게 해 주지 않는 거야?"
"좋은 지적이야. 마유즈미. 정말 좋은 지적이야."
시라유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홍차를 홀짝 마시고 대답을 해 주었어요.
"첫 번째 이유는 이 다크닝 추출 실험 자체가 나의 치부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야. 내가 아까 한 말 기억해? 예전의 나는 인간말종이었어. 그런데 너는 지금 내가 인간말종 같아?"
"아니. 오히려… 상냥하려고 애쓰는 사람 같았어."
"상냥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라…"
시라유키는 제 말을 듣고 자기 턱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더니 씩 웃었어요.
"그 표현 마음에 드네. 내가 이런 사람이 된 데에는 다크닝 추출이 큰 역할을 했어. 내가 가지고 있던 기형적인 호기심. 윤리를 짓밟으려는 태도. 남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언동. 그중 무엇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지. 이 시술을 개발하기 전에도 억눌러 왔지만 이제는 정말 쉬워졌어. 그런데 이 시술을 누군가에게 행하는 순간… 사람들은 내 가면이 가면임을 알게 될 거야. 일단 그게 싫어. 이래 봬도 온건파 대표 격인 인물인지라 체면을 구기고 싶진 않네. 애초에 보편화하기엔 윤리적 문제도 심하고."
"하지만 시라유키… 너. 나에게는 이 시술에 대해 알려 주었잖아. 이 기관에서 오래 지내지도 않은 나에게. 내 뭘 믿고 여기까지 날 데려왔어? 나 정말… 이해가 안 돼서 그래!"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은 저에게 시라유키는 달래듯이 쉬쉬 소리를 내주었어요.
"진정해. 마유즈미. 그러니 두 번째 이유를 알려줄게. 두 번째 이유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네가 카의 흐름을 타고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너는 나와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이 있어."
"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곳. 운명. 숙명. 네가 피를 뒤집어썼던 걸 보고 너도 나와 한 배를 탔음을 알게 됐지."
"피?!"
피?! 무슨 피?! 저는 피를 엄청 싫어하거든요.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쳐요. 히무로가 지나가며 흘린 현장사진 한 장을 보고서 기절할 뻔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피라니?
"아. 토마토였지. 아무튼. 중요한 건 양동이에서 흘러나온 붉은색 액체를 괴롭힘으로 인해 네가 뒤집어썼다는 거야. 나는 지금까지 온몸에 붉은색 물체를 뒤집어쓴 사람을 너를 제외하고 두 명 만났어. 한 명은 내 옛 친구고. 한 명은 시라베야. 그리고 어느 쪽 모두 나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지. 네가 토마토를 뒤집어썼을 때. 나는 눈치챘어. 이건 카라는 걸. 너는 어떤 방식으로든 나와 엮여 있어. 마유즈미. 그래서 너를 위해 이 시술을 해줄 용의가 있는 거야."
"…이해가 안 돼. 시라유키."
"이해하지 마. 그냥 받아들여. 머지않은 앞날. 로에 대적할 기관만의 프로젝트가 시작될 거야. 나는 그곳에서 네가 어떤 역할을 할지는 몰라. 우리는 누가 어떤 배역을 연기할지도 모르고 배우만 모으고 있어. 그리고 나는 거의 무조건 주연 배우인 너에게. 귀한 기회를 제공한 거야. 끝."
시라유키는 어깨를 으쓱였다.
"자. 대답은?"
안녕. 일기 씨. 히무로를 불렀어요.
"휴일에까지 나를 불러서 할 이야기가 뭐야?"
"…앉아서 이야기하자. 이야기가 길어질 거야."
저는 히무로를 집 안으로 들여보내며 침을 꿀꺽 삼켰어요. 히무로에게 할 말을. 제가 낑낑거리면서 내린 결론을 히무로에게 말해 주고 싶었어요. 그건 선언이었고 선전포고와도 같았어요. 저는 식탁을 펴고 히무로를 앉혔어요.
"달콤한 향기가 나는데."
깜짝 선물을 들킬까 봐, 그리고 빨리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난 말이 있었기에 저는 다급하게 히무로의 관심사를 돌렸어요.
"있잖아. 히무로. 내 말 들어 봐."
"듣고 있어."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말은 별로 의미가 없는 거니까. 흘려 들어야 해?"
히무로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알겠어."
"너라면 네 모든 결점을 지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걸 지워버릴 거야. 아니면 그대로 가지고 있을 거야?"
"나라면…"
"잠깐!"
저는 손을 뻗어서 히무로의 말을 막았어요.
"답은 정해뒀어. 그러니까 그냥 들어줘. 히무로. 나는…"
나는, 내가 싫어.
별반 쓸모도 없는 일만 배워서는 홀로 서지도 못하고. 남의 도움에 의존하면서 살아야 하는 내가 싫어. 기껏 잘한다는 일도 자기 감정에 먹혀서 지지부진하게 질질 끄는 것도 싫어. 매일매일 불안해. 네가 그러지 않을 거란 건 알지만. 나를 한순간에 내쫓을까 봐 무서워. 마음 같아서는 버리지 말라고 매달리고 싶어.
그런 나의 추한 모습은 내가 제일 잘 알아. 히무로. 나는 너처럼 자기 몫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내가 가지고 있는 공포와 걱정을 다 없애고 내가 보기에 가장 어여쁜 모습을 한 채 너에게 가고 싶어.
하지만…
"내 모든 결점도… 결국에는 나의 일부라 보고 있어. 만약 그런 기회가 생겨서 내가 스스로의 절반을 떼어내 버리면. 그중에는 내가 있을 거야. 나는… 아무리 보기 싫더라도 나를 버리고 싶지 않아."
히무로는 아무 말 없이 제 말을 듣고 있었어요.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것 같기도 했어요. 저는 제가 하는 말에 용기를 얻고 더더욱 크게 말했어요.
"만약 내가 보기에 추한 모습이 있다면 나는 그걸 사랑하려고 노력할 거야. 사랑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랑스러운 점을 만들 거야. 내가 차마 나라는 사람의 결점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더러워도… 나는 그걸 봐야 해. 그러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어."
저는 숨을 한 번 몰아쉬고 다시 입을 열었어요.
"그게… 나랑 화해하는 방법일 것 같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네 말이 옳아. 마유즈미."
저는 히무로가 그렇게 한 마디를 한 다음 용건이 끝났으면 이제 가 보겠다며 일어날 줄 알았지만. 의외로 히무로는 몇 마디를 더 했어요.
"결점을 전부 없애버린 인간은 다른 사람의 결점을 이해할 수 없게 돼.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건 막아야겠지. 우리는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야. 마유즈미."
"…맞아. 그리고 여기. 이거 받아… 그. 이건… 도전장…이야."
"도전장?"
히무로는 제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건넨 도전장을 받았어요. 그리고 내용을 읽었죠.
"빙탄상애…?"
"저번 것보다 낫지. 다음 빙탄상애는 그보다 나을 거야. 그다음 빙탄상애는 전의 것보다 나을 거고."
저는 제가 옳았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말겠어요. 동방학자고 굴이고 저는 그런 거 몰라요. 하지만 빙탄불가이상병혜는 헛소리예요. 얼음과 숯은 서로 사랑할 수 있을 거예요.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우린 서서히. 그렇지만 분명 더 나아질 거야. 히무로."
제 마음을 하루이틀 사이에 알아주리라고는 생각도 안 해요. 아주 긴 여정이 되겠죠. 보상이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어요. 손을 뻗을 뿐 영원히 박수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아요.
얼어붙은 호수에 혼자 서 있으면 발바닥이 시리겠죠. 하지만 괜찮아요. 나는 숯이니까.
나의 몸 안에는 잉걸불이 있고, 그게 서서히 호수를 녹일 테니까.
그 과정에서 웅덩이가 생겨도 꺼지지 않을 거예요. 좋아하기를 멈추지는 않으려고요. 그게 빙탄상애잖아요?
그러니까. 오늘은 히무로와 제 사이에 전쟁이 시작된 날이에요. 선공은 제가 잡았고요.
"…네 말마따나 이 글씨는 전에 네가 썼던 것보다 빠르게 쓰인 흔적이 있어. 네가 그만큼 숙달되었다는 뜻이겠지. 발전과 성장은 너를 더 강하게 만들겠지… 하지만 네가 받아 마땅한 찬사를 주기에는 내 말주변이 부족해. 안타까운 일이야."
"아. 괜찮아! 어차피 부모님들도 나를 칭찬해 준 적은 거의 없어. 음. 해야 할 일을 했구나. 딱 이 정도 느낌? 내가 아무리 잘 써도 그건 네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더 할 말이 필요하냐. 그런 태도 셔서 말이야… 그래서 칭찬은 얼마 못 받았어. 쓰다듬어 주신 적도 없고."
히무로는 얼굴을 찌푸렸어요.
"두분은 유년기의 애착 경험이 정서 함양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몰랐나 보군."
"아쉬운 거지 뭐… 한 번이라도 배 터지게 사랑을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그걸 기억해서라도 뭐든 이겨낼 수 있었을 텐데…"
저는 문득 아련하고 숙연진 채 고개를 숙였어요. 히무로는 그런 저를 보고 있다가 한 마디를 했는데. 그 말은 제 고개를 홱 들게 만들었죠.
"원한다면 내가 대신해줄 수도 있어."
뭐어어어엇?!
저는 그때 너무 놀라서 밖으로 어떤 반응을 내보이지도 못했어요. 지금 얘가 무슨 소리를 한 거야? 사랑해 주겠다고?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오해한 거겠지?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되는데?! 대충 이런 식으로 머릿속이 잔뜩 떠들썩해졌어요. 히무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제 바로 옆에 앉을 때는 몸까지 거의 굳어버렸어요.
"시작한다. 마유즈미. 싫으면 언제든지 말해."
"뭐시라?!"
저는 그대로 굳었어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도 못 잡았어요. 이. 이렇게 빨리는 안 된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저는 팔을 마구 휘저으며 히무로를 만류할 준비를 마쳤지만. 히무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적어도… 제가 생각한 일은 하지 않았어요.
히무로는 제 머리에 손을 올렸어요.
"너는 순수하고도 긍지 높은 사람이야. 마유즈미. 나는 너를 존경해."
"…아하. 좋아. 이건 괜찮아."
저는 수긍했어요. 오호라. 칭찬과 쓰다듬기구나. 제가 염두에 뒀던 일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었어요. 또 이 정도는 친구끼리 괜찮지 않나? 싶었죠. 본격적으로 히무로가 저를 쓰다듬기 시작하자. 저는 제가 얼마나 쓰다듬기에 굶주려 있었는지 비로소 깨달았어요.
주변은 다시금 분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했죠. 한 번 히무로의 손이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길 때마다 아주 작은 옴싹거림이 행복하게 저를 어루만졌어요. 우와… 우와… 이게 뭐지? 쓰다듬기가 그렇게 좋은 거라면 한 번만 해달라고 부모님한테 조를 걸 그랬어요.
그건 뭐랄까… 모든 걸 보상받고 또 용서받는 느낌이었어요. 긍정을 받는다. 사랑을 받는다. 그 느낌 자체였어요. 제 마음은 뭉실뭉실 따뜻해졌고. 기분 좋고도 잔잔한 행복감이 제 방을 부글부글 채웠어요. 저는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어요.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사실 돌이켜 보면 히무로는 별생각 없이 머리에 손을 대고 원형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지만. 쓰다듬받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의무적인 손길이면 뭐 어때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어요. 쓰다듬는 사람의 얼굴은 건조하기 짝이 없었지만. 손도 거칠고 단단했지만. 저에게는 차고 넘치는 정도의 들뜸을 주었어요. 그러고 보니 누군가에게 쓰다듬을 받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그리고 집을 나온 이래 그렇게 행복한 적도 처음이었죠.
입꼬리에 웃음을 담은 채 저는 히무로를 바라보다가 깨달았어요. 아. 내가 지금 느끼는 게 동경이나 보은 심리일리가 없구나. 그럴리는 천에 하나 만에 하나에도 없겠구나.
나는 이 남자애를…
"녹는다… 나 녹아. 히무로… 마음이 치유되고 있어… 앗. 잠깐. 으엑. 으아아."
노곤노곤하게 제 몸의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던 저는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왔어요. 히무로는 아무래도 쓰다듬기의 강도를 올리면 제가 더 만족하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히무로는 점점 빠르고 세게 제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거든요. 의도적으로 헝클어뜨리는 것처럼요. 제 정수리가 뜨거워지기까지 했다니까요?
"뜨. 뜨거. 히무로! 앗뜨거!"
"만족했어. 마유즈미?"
"마. 만족. 대만족! 이제 그만! 충분해! 나. 나중에 다시 하자!"
"다행이네."
그리고 히무로는 자기가 원래 앉아 있던 제 반대편의 자리로 돌아갔어요. 그렇게 떠나 보내고 보니 살짝 아쉬웠지만, 그 아쉬움은 또 나중의 재미가 되겠죠. 그러지 않을까요?
저는 벌써 다음 만남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는걸요. 저는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날아오르는 것만 같았어요.
"사실 오늘 너를 부른 이유는 하나가 더 있지롱. 예전에 대접해주고 싶었는데 집에 뭐가 없어서 못해줬던 거. 기억나?"
"기억하고 있어."
"그럼 오늘은 내 설욕의 시간이야!"
저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을 하고 부엌으로 가서 두꺼운 천 장갑을 손에 끼웠어요. 그리고 아직 따뜻한, 달큼한 냄새를 풍기는 솥을 잡고 식탁 위에 내려놓았어요.
"기다려 봐. 덜어줄게!"
덜어먹을 그릇 두 개와 각자 쓸 숟가락을 준 뒤에 저는 솥의 뚜껑을 열었어요. 그러자 먹음직스럽고 얼마나 맡아도 질리지 않은. 팥의 향기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죠. 아마 그 점에는 히무로도 동의했을 거예요.
"단팥죽이군. 먹음직스러워."
"내 비장의 무기야. 히무로. 안코 씨에게서 재료와 요리법을 받아 왔지요! 자기가 단팥죽 하면 어디서 알아주는 실력이래. 자. 먹어 봐. 내가 먹을 때는 참 잘 됐어. 떡도 넣었으니까 꼭 가져가!"
저는 잔뜩 신나서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었어요. 곧 제 비장의 무기를 마주한 히무로의 반응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히무로는 제가 단팥죽 안에 넣은 큼지막한 떡을 숟가락 위에 올려두고 후후 불어 식힌 다음. 그걸 베어 물었어요. 그리고 눈을 조금 크게 떴어요! 히무로 치고는 엄청난 반응이었다고요. 성공이다! 저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히무로를 보고 히히 웃어댔어요.
"마유즈미. 이건…"
히무로는 믿기가 어렵다는 투로 말했어요. 헹.
"내 비장의 무기를 맛본 기분이 어때. 히무로? 응? 떡 대신에 찹쌀떡을 넣은 단팥죽! 헤헹!"
"…천재적인 발상이야. 마유즈미. 맛있어."
히무로는 단팥죽을 먹었어요. 그 맛있다는 반응은 예의상 하는 걸로는 보이지 않았어요. 안코 씨한테 감사인사하러 가려고요. 찹쌀떡 하나 큰 걸로 넣어서!
"메리."
"뭐야. 시라베? 왜 불러?"
"내가 왜 부르는지는 너도 알고 있을 거야."
…
"마유즈미가 이야기하던가?"
"아니. 하지만 너라면 네 모든 결점을 지울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왔지. 마유즈미는 그런 질문을 허투루 하지 않아. 태도도 진중했어. 나는 마유즈미가 모종의 방법으로 그런 방법에 접촉할 기회를 얻었다 보았어. 그리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메리. 너뿐이야."
"칭찬 고마워. 시라베. 하지만 정말 그런 비약적인 추론을 통해 나에게 찾아온 거야?"
"아니."
"그렇다면 어떻게 내 비밀을 알 수 있었어?"
"그냥 알았어. 카 때문일 테지."
…
"카마이."
"내가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 알 거야. 메리. 그만둬. 그렇게 편리한 기술에는 분명 대가가 따를 거야. 사람의 어두운 면을 그렇게 쉽게 절제할 수 있을 리 없어."
"하지만 내 어두운 면은 사람을 죽여."
"비약이군."
"비약이 아니야. 시라베. 인공지능의 원본 인간은 내가 죽였어. 안전과 사람에 대해 덜 신경 썼기 때문이야. 러드에서 블레인에게 튀겨진 사람들은 내가 죽였어. 내가 블레인을 내버려 두고 떠났기 때문이야. 그리고 더 있어. 시라베. 나는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과오가 있어. 심지어 너에게도. 아니. 너에게만은 말 못 해.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히무로."
…
"예전의 나는 그 모든 부수적인 피해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라고 믿었지. 심지어 블레인도 내버려 뒀어. 하지만 내 부주의 때문에 죽은 한 사람을 계기로. 나는 바뀌기로 한 거야. 선한 사람으로. 정말 세상을 더 낫게 만들 사람으로 말이야. 그걸 위해서라면 내 욕심과 그림자는 죽게 둘 수 있어."
"사람의 올바른 면을 남기려 한 자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을 텐데."
"이건 달라. 이건 내가 달라지기 위해 나 스스로에게 행한 거니까. 너는 나를 몰라. 시라베. 내가 사람들에게 끼친 해악도. 너는 결코 전부 알지 못해. 내가 한 연구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하지만 나는 너를 이해했을 것이다."
…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큼은.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으려나.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어. 내가 모든 역량을 발휘하려면 다크닝을 배제해야만 해. 그래야지만 이 세상을 회복시킬 수 있어. 시라베. 이해해 줘."
"이미 하고 있다. 다른 방법이 없었음이 애석할 뿐."
"…역시 우린 닮았어."
나는 분명 낙하하는 와중. 마유즈미의 안에 있는 여자가 그녀의 언니리라 판단했다. 그 결론이 아니면 어떤 결론도 나오지 않았다. 유년 시절 가족의 상실에 큰 충격을 받은 자는 스스로를 죽은 자라 망상하는 경향이 있다. 마유즈미가 자기 방어기제로 언니의 인격을 만들어냈다면, 모순은 없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일단 나는 만들어진 인격 따위가 아니라 살아있었던 사람이었고, 외세계로부터 그녀를 지키기보단 그녀의 존재를 갉아먹고 싶어 한다는 거."
"영혼을 뽑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영혼을 다시 넣는 일도 가능할 테니까."
마유즈미의 언니는 스스로가 그녀의 손윗누이라 주장하는 발언도 여러 번 하였다. 모순은 없다. 하지만 나는 카텟 기관에서 마유즈미가 언니의 인격을 보인 적이 있는지, 정말 그런 인격이 형성되어 있는지 아닌지를 모른다. 확신은 없지만 유일한 답이기에 선택한 것이다. 그것이 함정이었다. 옳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옳지 않으나 그나마 가능한 일을 받아들이는 것.
나는 애초부터 잘못된 답을 택하게끔 조종당했다. 그리고 나는 선택지에 없었던 답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 말 들어. 히무로! 마유즈미는 이 시점에서 자기 본명을 알 수가 없어! 절대 알 수가 없다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닥쳐라. 망령. 나도 안다. 내 눈앞에 있는 건 다른 여자다.
"…너는 마유즈미의 언니 따위가 아니다."
"맞다니까? 대체 너는 뭘 근거로…"
"우린 닮았으니까."
동공이 커졌다. 순간의 당황이야말로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 마유즈미의 언니가 아닌 다른 존재가 언니인 척을 하고 있다면. 그자는 누구인가? 나의 의심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만약 다른 존재가 있다면 일순위로 그녀를 놓았다.
카 때문이리라.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지? 네가 왜 여기에 있지? 그리고 왜 하필. 마유즈미인 거야… 대답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누구도 그녀의 진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분명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 그녀는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범적인 동료애였다. 그녀와 나는 서로가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했다.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인류라는 종의 요원 중 한 명이었다.
그녀와 나는 닮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알아볼 수가 있다.
"메리."
그러나 눈앞의 메리는 어느 때보다도 이질적이었다.
"눈치챘군."
마유즈미의 얼굴을 움직이는 그녀의 웃음은 마치 그늘처럼 서늘하고도 불길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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