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공원에 간 날 정말로 날씨가 좋다.
버스에 타자 소풍에 신이 난 또래 원숭이들이 마구잡이로 울어대니 귀가 아프다. 어린이들은 장소를 모르고 떠드는 게 보통이라 하니 참기로 한다.
회전그네를 타러 줄을 서는 와중 정오의 햇볕이 정수리에 뇌리 쬔다.
어머니와 줄을 선 동안 아버지가 아이스크림을 세 개 가져온다.
회전그네는 별반 즐겁지 않다. 그저 사람을 높은 곳에 두고 빙글빙글 돌리는 것은 흥미롭지 않다. 줄을 서는 것이 기구보다 즐겁다. 줄이 길다며 투덜거리는 이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두 시간 줄을 서고 십 분도 채 안 되는 놀이기구에 오른다. 그런데 어찌 기구가 목적이란 말인가?
원숭이들이 다리가 아프다 칭얼대는 꼴은 보기 좋다.
줄을 다 서서 밖으로 나가려 하니 아버지가 나를 잡는다. 여태 기다렸는데 안 타고 어디 가냐 한다. 혹여 내 뒤틀림을 들킬까 기구를 탄다.
추락하는 것만이 재미있다. 비명을 지르는 자들의 작태가 웃기다. 오십 미터 상공에서 떨어지는 느낌이 궁금해 탄 주제에 누구는 내려달라고도 한다.
위험하기 위해 안전하다. 죽을 것 같기에 즐겁다. 그 모순을 담은 기구는 흥미롭다. 롤러코스터만이 마음에 든다.
그날 아주 좋은 꿈을 꾼다. 남녀노소를 불문한 모든 사람들이 끝없는 줄을 선다. 앉을 곳 하나 쉴 곳 하나 없다. 모두 소중하다는 듯 티켓 하나를 든 채 멍하니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끝에는 티켓에 도장을 찍는 공무원이 있다.
오래오래 줄을 서서 티켓에 도장을 받으면. 공무원은 티켓을 찢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티켓을 하나 더 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새로운 티켓을 받아 또 줄을 선다. 멍하니. 오래오래 티켓을 들여다보며 한 발자국씩만 나아간다.
이것이 내가 만들고 싶은 지옥이다.
이것은 나의 기억이 아니다.
히무로 시라베: 허억…!
숨을 몰아쉬었다. 몇 초가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언탄에서는 언탄을 보낸 자의 기억과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이미 야가미 토가를 상대할 때 다른 이의 언탄을 읽어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의 시간이었고, 나는 샤이닝을 흡수하지 않은 채 실린더에 넣고 쏘았다. 그것이 본래의 절차였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것은 너무 길었다. 체감상 몇 시간은 족히 되었다. 그것이 언탄을 읽는 것과 샤이닝을 체내에 직접 받아들이는 것의 차이였다.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의 몸을 밀어내고자 했으나. 팔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주사기의 안에 극도로 순수한 독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미 꽂힌 주삿바늘은 뽑히지 않았다. 용액은 방아쇠를 쥔 이의 내부에서 충전되기 때문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이제 시작이야. 히무로. 이제 겨우 시작됐으니 저항하지 말고 버텨.
용액이 주입된다. 한 도스가 더 들어온다. 다음 기억이다.
어머니의 마음이 죽어간다.
나는 본래 낭만적인 표현을 싫어하지만 이것이 가장 정확한 진단이다. 어머니는 지쳐간다. 살인적인 일정. 마음의 안정은 어디에도 없다. 전부 병원비 때문이다.
차라리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어차피 암 말기면 얼마 버티지도 못한다. 아버지가 빨리 죽어주기만 하면 후루미나미는 더 이상 어머니를 협박하지 못한다. 사실 어머니도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아버지가 죽길 원할 것이다.
어머니는 화를 낸다. 단호하고 약간 무섭다. 사이가 틀어지는 것은 싫어서 얼굴을 찡그린다. 눈물을 흘린다.
어머니는 연기를 간파한다.
또 그 표정을 짓는다. 그 표정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머니는 내가 연기를 하는 걸 싫어한다. 무도회 주인공을 따 놔도 수포로 만들려 애쓴다. 언젠가 아버지와 속닥거리기도 한다. 도대체 왜 저렇게 연기를 잘하는 거냐며 애간장을 태운다.
어머니는 연기를 하는 제 딸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혐오다. 어머니는 늘 사랑이 이기게끔 한다. 좋은 어머니다. 딸에게 억누를 수 없는 거부감을 가지고도 그걸 숨기려고 애쓴다.
미움받는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후루미나미를 향한 반감은 이해한다. 은퇴한 이를 겁박해서 일을 시키니 죽일 놈들이다. 그러나 왜 후루미나미와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 딸이 그토록 미울까?
연기를 하면서 연기하는 딸을 미워한다니 모순이다. 어머니는 독초의 싹을 자르듯 딸의 재능을 억누른다. 집착에 가깝다. 무엇이 어머니에게 경계를 심는지는 모른다.
유치원에서 카구야 공주 연극을 한다. 대본도 짧고 배우들은 원숭이다. 혼자 공주 노릇을 하니 우스꽝스럽다. 하찮은 자들의 시기를 느끼지만 결국 그자들도 납득한다. 후루미나미니까.
각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카구야 공주는 달에 돌아가지 않고 행복하게 산다. 정인과 영영 헤어지는 게 카구야 공주 이야기의 핵심인데 누구도 이걸 이해하지 않으려 든다. 불만은 많지만 할 일을 완수한다.
어머니는 연극을 보다 조용히 퇴장한다.
끝까지 안 봐줘서 아쉽다.
어머니의 심마는 커져 사랑이 혐오에게 진다.
유리컵이 깨져 바닥에 조각이 즐비한다. 어머니는 어떻게 카구야 공주를 그토록 훌륭히 표현했느냐 묻는다. 칭찬은 오지 않는다. 오직 연기하는 딸에 대한 공포만을 어머니는 느낀다.
어머니에게 안아달라며 칭얼거리다 유리조각을 밟는다. 비명을 지르자 어머니는 순간 심마로부터 깨어나 내게 다가온다.
사실 유리조각은 밟은 적이 없다. 그저 대화의 흐름을 돌린 것뿐이다. 그것을 깨닫자 혐오는 어머니를 집어삼킨다. 비명이 들린다. 내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생에 최악의 악몽을 꾸고 있다는 것처럼 머리를 쥐어뜯고 울고 절규한다.
"완성했다! 내가! 내가 완성해 버렸어! 순금을 낳았던 거야!"
그 목소리는 조금도 들떠있지 않다. 나를 두려워하는 어투다. 아무래도 어머니는 딸을 낳은 것을 후회하는 모양이다.
어머니의 딸로 태어난 것에 후회는 없다.
애초에 정한 적은 없지만 다시 선택할 수 있다 해도 방 안의 물건을 집어던지는 어머니의 딸이 되리라.
이것은 나. 히무로 시라베의 기억이 아니다.
신음을 뱉으며 깨어났다. 며칠 길이의 기억이 단편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나는 기억을 보는 동안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것이 눈앞에 펼쳐진 동안은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꿈을 꿀 때처럼 나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스스로가 후루미나미 나몬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움직이려 애썼으나 여전히 몸은 굳어 있었다. 언제까지 후루미나미 나몬의 영혼을 받아들이기만 해야 한단 말인가? 후루미나미 나몬은 힘을 주고 긴장하여 뻣뻣해진 내 근육들을 토닥이며. 내 귀에 바람을 불었다.
히무로 시라베: 그만두어라. 그만두라고 하였다!
후루미나미 나몬: 쉬잇. 히무로. 진정해. 극장에서는 조용히 해야지. 상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후루미나미 나몬은 그렇게 말하며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손길이 닿을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너를 죽이겠다. 너를 죽이겠다! 그 생각만을 되뇌는 동안. 내 목 안으로 한 도스가 더 들어왔다.
장례식장에서 늙은 여우들이 속닥인다.
딴청을 피우며 근처로 가 대화를 엿듣자니 아버지가 쭉정이란다.
아버지의 인생을 폄하받을 만한 게 아니다. 흠모받아 마땅한 삶이다. 쭉정이라는 표현이 심장에 박힌 가시가 된다. 어딘가 구린 점이 있다. 찾아내지 않으면 영영 가시가 거슬릴 테다. 그러나 고인의 가십을 딸에게 말할 사람은 없다. 가시를 뺄 방법은 없다.
때마침 어머니가 자살한다.
관을 내려다본다. 천애고아가 되는 데에 걸린 시간이 짧게 느껴진다. 이렇게 빠른가? 이렇게 빨리 죽는 건가?
눈물을 흘리는 일에 어려움은 없다. 어린이의 편리한 점은 꼭 영정 앞을 영영 지킬 필요가 없다는 거다. 실신하는 척만 한 번 해도 다들 기함을 한다. 다 필요 없다. 어머니에 대한 추모는 개인적으로 할 것이니 후루미나미의 수수께끼를 푸는 게 먼저다.
후루미나미의 당주. 할아버지가 기자회견에 어머니의 유골을 가지고 간다. 자살하는 등 이슈를 만든 이의 가족이 유골을 들고 고개를 숙이는 문화는 이 나라에 밖에 없다 한다. 비극을 과시하는 느낌이라 그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할아버지가 장례식장에서 나를 부른다. 네가 이겨내야 한다고 말한다.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다. 연기자가 될 생각이었으니 알겠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그게 다냐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표정에는 미움이 없다. 오직 두려움과 경의. 놀라움이 있다. 적절한 표정이 아니다. 그 반응에는 이유가 있다.
"순금이구나."
할아버지는 말한다. 순금은 후루미나미의 금과 연관이 있다. 금은 후루미나미의 직계 후예다. 순금이라는 표현은 금보다 더 나은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연기자의 자질을 갖춘 금보다도 훨씬 천부적인 연기의 제일인을 일컫는 것이다.
그건 곧 나다. 어머니의 두려움은 그곳에서 온다. 후루미나미가 옳다는 것. 후루미나미는 혈통에 집착한 끝에 나를 세상에 내놓는다. 그것은 선구안인가. 혹은 천재의 탄생까지 계속되었을 뿐인 집착인가?
일부분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들의 순금에는 후루미나미 외부의 피가 섞여 있다. 순금이라는 단어에는 분명 후루미나미 내부의 아이여야 함이 암시되어 있다. 이상하다.
늙은 여우를 하나 찾아 궁금한 것을 묻는다. 아버지가 쭉정이라는 뜻에 대해 묻는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버틴다. 무서운 게 없나 보다. 아버지를 모욕해 놓고 아닌 체까지 하다니.
대답을 듣는다. 내게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조심스럽다.
아버지는 무정자증이다.
여우는 체외수정과 인공관. 불임치료의 가능성을 말한다. 그딴 궤변에 속을 줄 아나. 아버지는 나의 친부가 아니다.
친부가 누구일지가 궁금하다. 순금이라는 단어와 분명히 관련이 있다. 이미 죽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덮어둘 필요는 없다.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무도 파지 않으려 드니 파헤칠 사람은 나뿐이다.
후루미나미 내에 금인 사람들의 명단을 받는다. 얼마 없다. 있는 자들도 거의 생산에 기여할 순 없다. 근 이십 년 사이에 죽은 금의 명단도 받는다. 주목할 만한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어머니의 팔촌으로 어머니와 생년이 같다. 하나 성인이 되기 전 병사로 지금은 고인이다.
후루미나미를 여러 해 섬긴 고용인이 귀띔해 준다. 그자가 점지되어 있던 어머니의 짝이다. 그렇지만 요절하며 혼담은 없던 일이 된다. 가족끼리 결혼하는 게 되냐 물으니 고용인은 답해주기 어렵다는 투다.
고용인은 금과 금을 이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말한다.
금과 금.
순금.
무정자증.
명단을 다시 읽는다.
후루미나미의 당주는 현재 오십 세다. 살아있는 금 중에서는 이자가 제일 어리다. 후루미나미 직계의 혈통은 점점 끊기고 있다.
금과 금을 잇는다.
오호라.
일이. 모든 일이 그렇게 된 거구나.
나는 어머니에게 실망한다. 적었어야지. 마지막 편지에 이 사실을 적어 뒀어야지. 왜 안 적었을까? 바보 같으니. 적어 두었으면 내가 반드시 폭로해 주었을 텐데. 그것은 모든 이들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니까. 후루미나미라는 모든 이름을 실추시키고 불명예스러운 선입견을 심을 수 있는 일이니까.
누구보다. 딸애에게 큰 상처가 될 만한 일이니까.
혹시 고작 그것 때문일까? 어미를 잃은 딸에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진실을 안겨주고 싶지 않아서. 말하고 싶어 안달을 내는데도 함구한 채 죽은 건가?
미련한 사람들의 미련한 짓이 한심하다. 꼭 나아서 다시 놀이공원에 가자고 하던 아버지도. 딸을 그렇게 두려워하면서 여전히 아끼고 있는 어머니도. 정말이지 사양이다. 묻고 싶다. 왜 숨겼는가? 후루미나미를 찌를 수 있는 가장 큰 비수를 손에 쥐고도 그게 딸도 찌르게 될 것 같으니 그만두다니. 미련하기 짝이 없다.
비수는 아껴 두기로 한다. 비수로 망칠 수 있는 것은 평판뿐이다. 후루미나미 자체를 말살할 방법은 없다. 이들의 목숨 자체를 앗아갈 때를 기다려야만 한다.
올림포스 산의 오만한 신들아. 너희가 키운 파멸을 맞이해라.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나몬. 아서라!
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소리쳤다. 너무 길었다. 며칠은 되었다. 그 시간을 남이 되어서 산 뒤에 다시 현실을 자각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환각에 취한 나는 내가 누구이고 나의 어느 정도가 나인지를 알기 어려웠다. 이 정도 양의 샤이닝을 남의 몸에 투여하고도. 그 감정까지 담아 전달하면서 부담을 가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내 생각대로. 주사기를 쥐고 있는 후루미나미 나몬의 손은 점점 떨려갔다.
히무로 시라베: 지금 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거냐? 무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냔 말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허억… 아… 아니야… 아무런 문제없어. 괜찮아. 아직 괜찮아!
후루미나미 나몬은 헐떡였다. 그녀는 지금쯤 가슴이 찢어지고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샤이닝 추출은 언제나 실험체들의 입에서 목구멍을 찢는 비명이 나오게 만들었다.
다음 도스가 있는가? 나는 느리지만 천천히 주사기 내부에 용액이 차오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쏘고 싶은 것을 쏘는 개념이 아니었다. 자신의 기억 중에서 어떤 때의 어떤 순간을 보내는 것이다. 고도의 집중력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을 후루미나미 나몬은 영혼이 빠져나가는 와중에 해내고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너는 스스로의 영혼을 조각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주입하기 이전에 너 자신이 위태로워진단 말이다. 샤이닝을 강제적으로 추출당한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너는 모른다!
후루미나미 나몬: 시끄러워. 아직이야. 아직! 아직 너는 클라이맥스를 보지 않았어! 다 보고 나서 평가해. 다 보고!
그런 게 있단 말인가? 나는 이 연극에 절정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광경은 분명 끔찍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녀 자신의 걸작이라면 다른 이가 얼마나 고통받았는 지의 정도가 분명 그 척도일 테니까. 그리고 내 예상은 맞았다. 마지막 발악을 하는 듯한 후루미나미 나몬의 끙끙거림 끝에. 한 도스가 더 내 체내에 주입되었다.
그리고 한 없이 파괴적인 풍경이 나를 반겨 주었다.
무릉도원은 발각된다.
무릉도원이 어디에 있는지 내가 알기 때문이다.
후루미나미는 대몰락의 여파가 지나가기까지 은신하기로 한다. 후루미나미만이 아는 장소에 후루미나미들이 모인다. 후루미나미들이 시험을 치르는 곳은 산중에 깊이 숨겨져 있다. 내부 소행이 아니고서야 발각될 우려는 없다.
괴적이 무릉도원을 짓밟는다. 피가 흐르고 비명이 오만 장소에서 터져 나온다. 그것은 파괴 행위지만 그들에게는 더없이 평화로운 순간이다. 정화 의식이다. 호의호식하며 숨어 지내면서 대몰락에게서 살아남으려 했던 자들은 전부 불순하고 부정한 자들이다. 폭도들의 시점에서는 그렇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 죽이는 게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집단 환상 속에서 그들은 그저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이고, 그들에게 죽는 자들은 커다란 시스템의 일부분이다. 여덟 살의 아이가 사냥개 두 마리에게 잡혀 상체와 하체가 각각 토막 나는 데도 그들은 별 생각이 없다. 모든 방을 샅샅이 뒤진다. 도망칠 수는 있어도 숨을 수는 없게 해라. 귀찮아진다면 그냥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질러라. 그렇게 지옥이 현세에 중첩되게끔 하라. 사람 기름의 매연이 하늘을 뒤덮는다.
몰살할 필요는 없다. 폭도들은 리스트에 있는 사람을 하나하나 지워가지 않는다. 그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히면 족하다. 그렇게 죽은 이들이 한없이 끔찍하게 죽고 살아남은 이들은 이날의 기억을 절대 잊지 못하게 해라. 가는 곳마다 세상이 변질되었고 신이 죽었다고 전해라. 어떤 생존자도 영영 발 뻗고 잘 수 없다.
폭도들과 거래한 대로 당주는 내 몫이다.
당주의 끝은 비참하다. 손과 발을 자른다. 눈은 뽑지 않는다. 당주는 입을 쩍 벌린 채 왕국이 무너지는 걸 본다. 수백 년의 전통은 당주의 대에서 끊긴다. 멋들어진 건물과 정원사 수십명이 관리하는 나무가 활활 탄다.
당주는 내가 괴물이라 한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한다.
후루미나미는 줄곧 제정신이었다는 투다. 우스워 견딜 수 없다. 내가 잘못되었다니? 순금이 나인데? 후루미나미가 수백년의 염원 끝에 낳은 계승자가 옳다고 하면 그것이야말로 올바른 것이다. 걸물을 바란 것은 후루미나미다. 이제 와서 부정해 봤자 늦는다.
후루미나미는 제가 저지른 죄의 값을 받는다. 어머니가 날렸던 살(煞)은 사람의 형태로 후루미나미를 찾아온다. 당주에게 묻는다. 네가 만들어낸 것이 네놈들을 죽이는 기분이 어떠냐 묻는다. 당주는 시치미를 뗀다.
놈의 코를 도려낸 뒤 말한다. 내가 친아비가 누구인지 모를 줄 알았더냐.
당주는 눈을 시뻘겋게 뜬다. 알고 있었냐며 반문한다. 우습다. 너무 우습다. 병신들 같으니. 후루미나미가 당신 대에서 끝장난 건 전부 당신 잘못이다. 네놈이 어머니에게 강제로 저지른 일이렸다.
당주는 그제야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자기도 못한 일을 한 줄은 아나 보지? 후루미나미의 이름은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대몰락 때 망한 수많은 일족들 중 하나가 되어라.
활활 타오른다. 다 파멸해라. 비명이 실로 감미롭다. 후루미나미야. 꼬챙이에 꿰뚫리고 화형 당하고 거열형을 당해라. 생매장당하고 산채로 포가 떠지고 들개에게 물어뜯겨라.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고 있으리라 믿는다. 이것은 정의의 현현이 아니다. 이것은 더 큰 악이다. 더 큰 고통을 위하여. 잘못된 질서를 섬기는 자들에게 한 치 앞 수렁도 알 길 없는 어둠과 혼돈을 내려라.
이것이 추모가 아니란 말인가? 천신께 빌어댔을 후루미나미가 눈에 아른거린다. 천지신명이시어. 반신을 내려주소서. 오백 년에 한 번 태어날 걸물을 주소서. 송아지와 새끼 양을 바치나이다. 그래. 너희가 그렇게 원한다면 내 그것을 주마.
당주의 남근은 뽑아서 개떼들 먹이로 준다. 금기를 저지른 양물이니 그런 꼴을 당해 마땅하다.
히무로 시라베: 끄헉…!
나는 신음을 내뱉으며 깨어났다. 겨우 몸을 비틀어 주삿바늘을 내 목에서 꺼냈다. 그리고 내 등 뒤에 선 후루미나미 나몬을 바닥으로 밀어냈다. 그녀를 밀고서야 깨닫는다. 내가 저항했기 때문에 그녀에게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그녀의 힘이 다했기에 구속이 풀린 것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녀는 다리에 제대로 힘을 넣지도 못했다. 마치 갓 태어난 임팔라의 새끼처럼 후루미나미 나몬은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나는 그저 어지러울 뿐이었다.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은 여전히 뇌리 안에서 잔울림을 웅웅 울려대고 있었다.
내가 친아비가 누구인지 모를 줄 알았더냐.
내 숨이 가빠졌다. 환상에서부터 나 자신을 분리해야만 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본 것으로 이미 내 무의식은 결론을 내렸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그녀의 명제에 수수께끼는 없다. 손윗누이는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이게 무슨 뜻이냐. 후루미나미 나몬.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나는 물었다. 아버지는 무정자증. 어머니는 혐오를. 언니는 사랑을. 이 세 가지 걸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모순되는 내용마저 없었다. 내가 그 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 가능성 자체에서 견딜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칸나즈키는 자신의 수호령을 할머니 언니라고 불렀지.
후루미나미 나몬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간다.
후루미나미 나몬: 나에게는 어머니 언니가 있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어머니는 후루미나미 나몬을 낳았기에. 어머니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어머니는 후루미나미 나몬과 아버지가 같기에. 언니이다.
무정자증. 어머니. 그리고 언니.
후루미나미 나몬: 나는 사고로 태어나지 않았어. 나는 정교하게 짜인 결실이야. 후루미나미는 나 같은 사람이 나올 때까지 금과 금을 교접시켜 왔어.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한 걸까?
후루미나미 나몬은 자신의 그 무엇도 긍정할 수 없다.
그녀의 비범함은 그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후루미나미의 물건이다. 미신적인 근친혼을 통해 마침내 점지되어 이루어진 걸물. 그 운명은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새겨넣은 것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히무로. 너도 알다시피 근친혼은 열성 유전자만을 대물림해. 그렇기에 합스부르크 가와 순혈주의자들은 멸망의 길에 놓여 있지. 우월이란 열등이 있어야 성립되기 때문이야. 그것을 모른 채 우월과 우월을 섞으려 한다면, 그 결과는 주걱턱. 지능감퇴. 혈우병. 정신병. 신경쇠약. 거동의 불편함으로 나타날지도 모르지.
후루미나미 나몬: 어쩌면. 광증으로.
후루미나미 나몬은 바닥에 누운 채 깔깔 웃어댔다.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었다. 정말 이것이 우습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그 웃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직 하나의 질문만이 머리에 떠올랐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대몰락 이전에도 범죄는 있었다. 근친상간자들. 가정폭력자들. 총기난사범들이 있었다. 일족 대대로 내려오는 악습과 그에 짓눌려 죽은 무고한 사람도 수 없이 많을 터였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경우도 그 중 하나일 뿐이지만, 그것이 후루미나미 나몬의 사건에서 엽기성을 덜어내 주지는 않았다.
나는 프로파일러다. 사건은 사건이다. 하지만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의 눈을 통해 그녀의 기억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건들의 진실에 나는 동요하고야 말았다.
더럽다. 추하다. 천륜을 저버린 것들. 부끄러움 모르는 악한들. 혐오스럽기 짝이 없다.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의 마음 속을 둘러 보았다. 온갖 장면들이 염도가 다른 바다처럼 층층이 나뉘어 한 무대 안에서 상영된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모든 추억들. 모든 기억들 사이에 나는 둘러싸여 있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아아아아아하하하하하!
비명과 웃음이 섞여 구분할 수가 없다. 이곳은.
이곳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이곳은 죽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피안(彼岸)이다. 가서는 안 될 경계선 너머다. 인간이기를 저버린 악귀들이 거꾸로 행동하며 거니는 곳이었다. 그 안에서 후루미나미 나몬의 깔깔거림은 내 귓전을 찔러왔다. 그녀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휘청휘청 움직이는 것은 귀기 어린 의식의 춤처럼 보였다.
후루미나미 나몬: 아직도 모르겠어. 히무로? 내가 너에게 왜 이러는지를 진짜 모르겠어? 왜 너에게 내가 근친혼의 산물임을 알려주는지 모르겠냐고!
히무로 시라베: 모른다.
후루미나미 나몬: 네가 정답을 맞혔잖아!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과의 기억을 되짚는다. 그리고 가까스로.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깨닫는다.
히무로 시라베: 설마 근친혼을…
후루미나미 나몬: 아니야.
후루미나미 나몬: 아니야. 다급하니까 두 번 말했어. 절대 아니야.
히무로 시라베: 오해해서 미안해. 폐쇄적인 규율을 가진 집단일수록 근친혼을 통해 집단 내의 유전적 순수성을 보전하려는 경우가…
후루미나미 나몬: 아. 아니야… 아니라니까.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졌지만 분명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이 했던 말들의 매듭이 하나씩 풀려갔다. 그게. 그런 뜻이었나?
"내가 이러는 건 전부 네 책임이야. 히무로. 너는 나를 발굴해 냈어. 가만히 있는 나를 찾아와서 너를 처음으로 내보였어. 나도. 네게 스스로를 보여 주었어. 그리고 너는… 내 가장 은밀한 곳마저 관측했어."
"너는 절대 돌이킬 수 없는 나의 무언가를 찾아냈어. 슬쩍 엿본 뒤에 잊어버렸을지라도 그 일은 돌이킬 수 없어."
"나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소중했는데 너는 그걸 내던져 버렸어. 네 기억 한편을 차지할 자격이 있는 것을!"
이게 전부 그 때문이란 말인가?
후루미나미 나몬: 너는 내 즐거움을 빼앗으려 노력해 왔지. 내가 밝혀야 하는 것들을 네가 미리 밝혀서 흥이 깨지게 만들어 왔어. 그것이 내 행동에 대한 앙갚음이라면 납득할 수 있어. 하지만 가장 큰 반전을 밝혀버린 건 순전히 네 잘못이야.
후루미나미 나몬은 내 품 안에 뛰어들고는 공허한 주먹질을 날렸다. 그녀는 소름이 끼칠만치 큰 목소리로 내게 윽박을 질러댔다.
후루미나미 나몬: 이 모든 일은 내가 직접 털어놓아야 하는 일이었어! 그래야만 의미가 있었고 그래야만 내가 의도했던 만큼의 충격을 줄 수 있어. 내 빌어먹을 삶은 그것을 위해 연출된 무대였다고! 그런데 네가. 네가 다 망쳤어. 히무로. 내 최대의 반전을 네가 망쳐버렸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히무로 시라베: 내게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 그것은 가설조차도 아니었고. 이런 일이 벌어졌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나는 근친혼의 가능성이 매우 낮으리라고 생각했다.
내 말은 스스로의 귀에 변명처럼 들렸다. 진즉 알아차려야 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후루미나미 나몬이 급박하고 단호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당시가 처음이었으니까. 그리고 그처럼 동요한 것 또한 극도로 드문 일이었으니까.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서 뭐가 달라지지? 제대로 된 추론도 없이 통계를 들이대서 끝내 버리다니. 불공평해! 멋대로 그걸 잊어버렸을지라도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고. 그러니 그것을 밝혀낸 네가 스스로 그것을 다시 마주해야 해. 그래야만 했어!
히무로 시라베: 내게 복수하고 싶었던 건가? 그렇다면 다른 이들을 끌어들여서는 안 됐다.
후루미나미 나몬: 복수? 이건 복수가 아니야. 너 말고 다른 사람이 맞췄다면 그냥 알려준 다음에 죽여버렸을 테니까.
후루미나미 나몬은 애원하는 듯한 주먹질을 멈추고 어느 순간 내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명백한 희롱조였기에 달갑지 않았다. 나는 두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후루미나미 나몬: 나는 네가 미워. 히무로. 네가 죽도록 괴로워야 한다 생각해. 하지만 그 생각은 다른 이들에게도 똑같이 하고 있어. 네가 파멸하고 짓눌려 쓰러져 버리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너는 나의 동반자야.
히무로 시라베: 나는 그랬던 적이 없다.
후루미나미 나몬: 내 마음속에서는 언제나 그랬어. 우리에게는 서로밖에 없잖아.
나는 발각된 후루미나미의 거점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았다. 자신의 선조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자들. 후루미나미에서 일을 할 뿐 그 광기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이 죽어갔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학살을 자행했다.
히무로 시라베: 나에게는 너 따위가 없다. 후루미나미 나몬. 너는 비극에 빠뜨릴 사람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 존재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후루미나미 나몬: 틀렸어. 너는 나와 같아. 사실 나보다 더 심하지. 살인자들과 죽여야 할 사람 없이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백정은 고기 없는 시대가 오면 사냥개와 같이 삶아질 거라고. 웃기는 일이야.
후루미나미 나몬: 가장 웃기는 게 무엇인지 알아? 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까지 거짓말을 할 위인이 못 된다는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어머니는 연기를 잘했지만 사랑 앞에서는 정말 숫처녀가 따로 없더군. 어머니는 당당히 탁란을 할 순 없었어. 그런데도 어떻게 이 가정은 유지될 수 있었을까? 내가 내린 답은 이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아버지는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어머니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를 듣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편이 되기로 했어. 그렇게 그들은 도망쳐 나온 거야. 아마 내가 누구 씨에서 자라났는지도 알았을 걸.
후루미나미 나몬: 히무로.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식도 아닌 근친상간의 산물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줄 수 있지? 어떻게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낳은 아이에게 입을 맞출 수 있을까? 그들은 다 알고도 나를 사랑했어. 있잖아. 히무로.
후루미나미 나몬: 그게 가능하기는 해?
후루미나미 나몬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웃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모든 생물들이 자손을 남기려고 해. 야생에서 수컷 동물들은 다른 수컷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암컷은 죽여버려. 그건 합리적인 선택이야. 사람도 생물인 이상 사랑은 자기 자손에게만 주어야 해. 그런데 히무로… 그들이 내게 준 사랑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거지?
나는 그 답을 몰랐다.
후루미나미 나몬과 똑같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나는 딸 동생. 저주스러운 존재. 유일한 피붙이. 순혈주의의 결과물이야. 부친의 씨를 통해 낳은 아이라고. 그런데 나를 사랑한다니. 그녀가? 후루미나미의 가장 큰 치부를 묻어버릴 정도로 나를 사랑했다니!
후루미나미 나몬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차라리 발작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이해가 안 돼. 히무로. 나는. 나는 그 사람들이 이해가 안 돼. 이게 내가 치른 대가야. 히무로. 후루미나미가 내게서 앗아갔어. 나는 동시대의 누구도 가지지 못한 재능과 사고방식을 가졌지만, 두 사람을 이해하는 것만큼은 도무지 불가능해.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이 도달하려는 결론을 알아챘다. 상사체 이론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틀렸다. 틀려야 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우리는 시대가 낳은 괴물이야. 히무로. 시대가 스스로에게 선사한. 해를 끼치기 위해 탄생한 화신이지!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 해! 걸출한 재능의 자손을 바랐다면 그걸 주면 돼. 방해되거나 해를 끼치는 것을 가차 없이 죽이는 감시자를 원했다면 그걸 주면 돼! 우리는 저주받은 게 아니야. 우리가 저들에게 내려진 저주야!
아니다.
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나는 블레인이 아니다. 누군가의 저주가 아니다.
히무로 시라베: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다물지 않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너는 나야. 히무로.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너 하나밖에 없고. 너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이제는 나 밖에 안 남았어. 그러니까 말했잖아. 지금 네가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은 나라니까?
후루미나미 나몬은 서글프게 웃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이것은 연기가 분명했다. 가짜 눈물임이 틀림 없었다. 그녀가 내게 품는 감정은 내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나는 조금도 받아들여서는 안 됐다.
후루미나미 나몬: 히무로… 많이 힘들었지?
이 위로는 거짓 위로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나를 그녀의 편으로 포섭하고자 했다. 나는 그것을 꿰뚫어 봤다.
후루미나미 나몬: 죽이기 위해 만들어져 남을 지키는 것은 맞지 않는 신발에 발톱이 터질지언정 묵묵히 신고 가는 일과 같지. 너는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는데. 네가 감시자로 키워진 것은 조금도 네 탓이 아닌데 말이야. 다들 너무하잖아?
나는 의식적으로 그녀의 말을 듣지 않으려 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말이 신빙성 있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내 안에 도사린 후루미나미 나몬의 망령이었다. 나는 귀를 막았다. 그러나 민감하게끔 개조된 청각은 내 손이 제를 틀어막는 것을 보고 비웃음만을 남겼다.
히무로 시라베: 너는 내가 아니다. 너는 사람을 죽였다. 나를 네 자리로 끌어내리려 하지 마라.
후루미나미 나몬: 나는 너를 끌어내릴 생각 없어. 물론 너는 고결하지. 하지만 남들의 규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에게는 더 편하고 행복할 거야. 나는 네가 그걸 알아줬으면 할 뿐이야.
분명 타락은 쉽겠지. 포기해 버리는 것은 쉬웠다. 나는 괴성을 지르며 후루미나미 나몬의 목에 총을 들이대었다. 일전에 잡았던 대로 목은 가녀리며 또 얇았다. 결투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 그녀의 목에 동굴과도 같은 구멍을 뚫을 수도 있었다.
한 번이라도 분을 못 이겨 그녀를 죽여 놓고 그것은 실수였다고 말하면 편하리라. 게다가 실제로 죽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결투장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살인이 아니다. 그저 잠깐의 화풀이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그런 꼴을 당해 마땅하다.
나는 언총을 더 세게 잡았다. 하지만 총구가 목울대에 닿은 순간에마저 후루미나미 나몬의 웃음은 커져만 갔다. 나는 그녀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목뼈를 부러뜨려 그 빌어먹을 웃음을 영영 끊어버리고 싶었다. 후루미나미 나몬마저 그것을 읽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죽여. 히무로. 이 괴물아. 사람을 죽여. 선을 넘어. 너도 그러고 싶잖아. 사적 제제는 강한 자들의 특권이야.
후루미나미 나몬은 총열을 손으로 잡더니 총구를 자신의 턱으로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유혹은 하찮은 육욕 따위에 있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자비를 짓밟음으로써 그녀와 내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분명 나는 죽일 수 있었다.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죽인다면, 나는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녀와 나 사이의 줄다리기는 그저 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루어졌다. 내가 선을 넘는 순간 그녀의 사상은 진실이 된다. 아무리 노력해 봤자 내 본질은 흉물이고, 나조차도 후루미나미 나몬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
머리가 윙윙 울려댔다. 증오. 증오만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 내 몸은 호흡에 따라 부풀어 오르고 쪼그라들기를 반복했다. 피가 너무도 빨리 돌았다. 혈류가 끓을수록 숨이 가빴다. 나에게만큼은 허락될 것이다. 신이 있고 그에게 뜻이 있다면 이 한 여자를 죽이는 것만큼은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용서받을 것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힘들다면 내가 도와줄게. 히무로. 여기. 이 안에 쏘기만 하면 돼. 에에―
후루미나미 나몬은 쩍 입을 벌리고 총구를 자신의 입 안에 넣었다. 심지어는 총을 깊숙하게 삼키기까지 했다. 도발. 천박한 도발이었다. 총구에 느껴지는 무게감으로 미루어 보아 그녀의 입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손이 떨렸다.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녹색의 눈동자. 그것은 광기이자 독성. 뱀심의 상징이었다. 그 안에서 나는 굽은 머리카락을 가진 낯선 사내와 마주쳤다. 명령을 기다리는 맹견처럼 으르릉거리며 참지 못해 안달을 내고 있는 모습은. 나의 것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죽여버리겠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엏아영 얼 기하이으 어야? 즈혀.
후루미나미 나몬은 달뜬 표정을 한 채 무언가를 조르듯 나를 깔보았다. 내가 총구를 문다는 도발의 의미도 이해하지 못할 줄 알았던 건가? 상스럽고 얕은 행위. 불결했다. 흥분한 듯이 상기된 볼을 보며 나는 그녀를 향한 반감을 더욱 크게 느낄 뿐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두 손으로 총열을 감싸기까지 했다. 마치 손이 떨려서 조준이 흐트러질 것 같으니 도와주겠다는 투였다.
히무로 시라베: 죽여버리겠다.
즉이면 된다. 죽일 수 있다. 나는 그 생각에 사로잡혔다. 후루미나미 나몬이 야심가들의 비원을 담은 끝에 결함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인격 형성에 어떠한 의도가 담겼다는 것.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신은 어차피 죽지도 않는 결투장 속의 후루미나미 나몬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그녀를 죽일지라도. 내 살인이 정당하다 말해줄 것이다. 결국 죽어 마땅한 이였으니까. 내가 부득이하게 사살한 수많은 인간들과 후루미나미 나몬은 다를 바도 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내 복수심과 증오로 인해 그녀를 죽인다면, 신이 나를 용서한다 해도 내가 용서하지 않는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언총에서 자신의 손을 떼고 천천히 총구를 뱉었다. 총구의 끝에 묻어 나오는 타액이 길게 늘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후루미나미 나몬: …역시 날 죽이지 못하는구나. 나를 용서한 건 아니지. 네가 살인자를 보고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어.
후루미나미 나몬: 너는 나에게서 너 자신을 본 거야. 무력하게 개조당한 너를. 해를 끼치도록 만들어진 너를. 그래서 너는 나를 죽일 수 없어. 그것은 곧 너를 죽이는 일이니까.
히무로 시라베: 닥쳐라. 내 안에는 아주 조금의 너도 없다. 너와 나는 다르다. 아무리 닮았다고 하여 봤자 사실은 다르다. 너는…
말을 이어나가던 그 순간. 문득 나는 그녀의 눈동자 색을 다시 한번 보았다.
녹색이 짙어졌다.
아니. 짙어진 게 아니다. 검은색이 섞이고 있을 뿐이었다.
녹색이 빠지고 있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색이 빠지고 있는 것은 단지 후루미나미 나몬의 눈동자 뿐이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칼 또한 원래의 상아색에서 점점 탈색이 되듯이. 본래의 색을 잃어갔다. 일본인 평균이 가진 검정색 머리칼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나는 부들거리는 손을 그녀의 목에서 떼어내고. 대신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생각했던 대로였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몸에는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후루미나미 나몬.
나는 이 증상에 대해 알고 있다.
감시자 후보들은 본인의 적성에 맞는 감시자의 재능을 몸에 지녔다. 그리고 후보가 탈락해 죽게 된다면, 재단은 특이한 기구를 사용해 재능이 영혼과 함께 꺼져 버리기 직전 재능을 회수했다. 그 순간. 후보가 새로 얻은 머리칼과 눈은 후보가 원래 가지고 있던 검은색으로 화했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다리가 휘청이더니. 그녀는 곧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았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웃으려 애썼으나, 그 힘을 내는 것마저 여의치 않아 보였다. 나는 그녀를 놓았다. 그녀가 무너지게 내버려 두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흐흐흐… 흐흐…
히무로 시라베: 무엇을 했냐고 물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너한테 내가 가진 모든 걸 줬어… 사실 모든 것까지는 아니고. 반절 정도 넘게.
히무로 시라베: 어리석은 짓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서는 안 되었다.
샤이닝은 섣불리 쏘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저 몇 초뿐인 기억을 정제하는 것은 언탄을 쏘는 자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결투 신청자의 권한과 언탄의 사용을 응용해 그녀는 자신의 영혼 자체를 나에게 주입하려 했다. 당연히 그녀 본인에게도 영향이 미쳤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죽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생애를 반 폐인으로 보내게 될 것이다. 애초에 곧 죽을 목숨이니 내게 내던진 것일까? 고작 이 순간을 위해 그녀는 두 명을 죽였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말마따나 그 생애의 정점에는 가치가 없었다. 누가 보아도 형편없고 초라한. 그 끝만이 후루미나미 나몬에게 주어졌다. 어쩌면 장대하고 가치 높은 비극을 바라던 그녀에게는 그 최후가 어울릴지도 몰랐다.
히무로 시라베: 십수 년을 헛살았군.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한 거냐.
후루미나미 나몬: …사랑하는 이와의 동반자살.
후루미나미 나몬은 아련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히무로 시라베: 그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죽을 생각이 없고, 너를 사랑하지 않으며, 네가 나보다 먼저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곧 처형을 당할 것이다. 누구도 너를 기억하지 않을 테지.
후루미나미 나몬: 괜찮아. 네가 날 기억할 테니까. 너는 그 무엇도 잊을 수 없는 몸이니까. 너는 나라는 존재가 가슴에 박힌채로, 피를 흘리며 살게 될 거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허무한 최후였다. 나를 위기로 내몰았던 강적이 말라 파들거리는 모습은 내게 그저 측은함을 안겨 주었다. 블레인의 최후가 생각났다. 영안로 속의 블레인이 아니다. 실재했던 블레인은 엉엉 울다가 투신했다. 블레인은 자신의 설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자신의 설계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수행하다 죽었다. 비인간들은 죽어갔다.
나는 멍하니 나의 눈꼬리를 훑었다.
그 위에는 물방울이 있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그것이 흐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유즈미가 죽었을 때도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미치자 마유즈미의 기억들이 나를 찔러댔다. 나는 모든 종류의 슬픔에 약해졌다. 불편했다. 불편했다. 그저 가슴이 아팠다.
형연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괴로움을 느꼈다. 억눌러왔던 생각들이 피어났다. 블레인의 말을 들으며 느꼈던 감정.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 히무로. 이제 울어. 엉엉 울어도 돼. 무너져 버려. 무너지게 둬. 히무로. 아틀라스는 어깨로 하늘을 받치고 있지. 하늘이 무너지게 둬! 비명을 지르라고! 누구도 너에게 감사하지 않잖아! 산산이 깨진 하늘의 조각 위에서 발을 베어가며 춤을 추는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은 광기에 차 소리쳤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내가 내 것이라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생각들과 마주했다.
죽고 싶었다.
나는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이렇게 설계한 이들이 저주스럽다.
누군가를 탓하고 싶은 느낌. 불합리해서 견딜 수 없이 답답한 기분. 나는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는 감정의 분출을 느꼈다. 그것은 후루미나미 나몬이 내게 쌓아 올린 것이었다. 스트레스. 증오. 피로감과 거부감. 불편. 총체적인 미움. 나는 그녀가 스스로 원했기에 괴물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줄곧 나쁜 선택만을 하였기에 그녀에게는 죄가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녀를 사람 아닌 무언가로 키우려 개입한 이들이 있다면. 그런 의도 속에서 그녀가 자랐다면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그 물음은 곧 내가 누구를 탓해야 하느냐라는 물음과 같았다.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을 보며 나 자신에게도 같은 상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줄곧 화가 나 있었다. 그것은 후루미나미 나몬에 대한 증오 때문인 줄 알았다. 하지만 후루미나미 나몬의 전말을 알고 나서도 내 일부는 여전히 분개해 있었다. 왜인가? 그것은 내가 증오하고 싶다는 마음을 후루미나미 나몬에게 투사했기 때문이다.
내 증오는 외세계를 향해 있다.
나를 개조한 자들. 후루미나미 나몬을 만들기 위해 원치 않는 아이를 임신시킨 자들. 블레인에게 과도한 지능을 준 자들. 나는 그들에게 줄곧 화가 나 있었다.
그것은 내 뱃속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음에도 내가 그곳에 있는 줄 모르는 염증이었다. 만성 염증이다. 아프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았다. 원래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어디에선가 날카로운 철제 손톱을 가져와. 나의 염증을 긁었다. 그리고 자신의 배를 갈라 그녀의 내부에도 있는 그 염증을 환기시켰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그 고통을 느꼈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영향이다. 그녀의 샤이닝이 내 안에서 날뛰어대며 나의 중심을 망쳐 놓았다. 정신을 헤집어댔다. 비이성적인 행동. 비이성적인 감정이 나를 서글프게 했다. 그와 동시에 느끼는 두려움은 블레인의 죽음을 보았을 때 내가 느낀 것과 똑같았다. 사람 아닌 피조물들의 끝. 그들과 나 사이에 선을 그으려고 해도 내 직감은 알고 있었다. 그들만이 너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는다. 로를 대하는 나의 마음과 그것은 닮았다.
히무로 시라베: 네가 마침내 해냈군.
히무로 시라베: 나로 하여금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다니. 네가 해내고야 말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이제 만족스럽나? 그래. 너와 나는 무책임하게 세상에 던져졌다. 남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절뚝이게 되었다. 고작 그것이 우리다.
후루미나미 나몬: 드디어 받아들이는구나. 이것이 내가 너에게 주는 치료야. 히무로.
후루미나미 나몬은 내 다리에 손을 대었다. 그 힘은 갓난아기의 목도 조를 수 없을만치 약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너와 나는 같은 작가가 쓴 다른 작품이야. 그리고 너는 나의 심연을 들여다본 끝에 그 안에서 너의 상처를 찾아냈어. 그 끝에. 무언가를 해소했지. 자신에게 없다고 생각했던 고통을 타인의 고통을 보며 되새기는 것. 그렇게 풀리지 않는 응어리를 한 겹 푸는 것.
후루미나미 나몬: 바로 이것이… 카타르시스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많은 유아들이 향하는 오락시설이 있었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이들이 사는 집이 있었다.
두 개의 장례식장이 있었다.
사람 아닌 이들이 사는 집이 사람 아닌 이들에 의해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다.
후루미나미 나몬에게 벌어진 일을 떠올리며 나는 형연하지 못할 어떤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나도 대답할 재간이 없었다. 나는 단지 후루미나미 나몬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연민인가?
후루미나미 나몬이 내게 한 것은 분명 파괴보다는 치료에 가까웠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았던 고통과 마주하게 했으니. 하지만 그녀 때문에 나는 무통의 특권을 잃었다. 마취가 풀렸다.
그것은 결말을 망쳐놓은 나에 대한 보복일까. 비인간 동지를 위한 도움일까. 나는 알 수 없었다.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히무로 시라베: …너와 나에게는 차이가 있다. 후루미나미 나몬. 분명 나는 피안도로 떨어진 몸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밧줄이 내려왔다. 나는 그것을 끝까지 타고 오르려 애쓰고 있을 뿐이지. 하지만 피안도 위에 현세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악귀의 마음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누구도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나는 감시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나는 운이 좋았기 때문에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한평생을 숙명과 맞선 채 살아야만 했다. 한 번의 굴복도 허용되지 않았다. 받아들인다면 곧장 후루미나미 나몬과 다를 바 없게 되리라.
후루미나미 나몬: 그 선을 지키는 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너에게 좋을 게 뭐가 있지?
히무로 시라베: 내가 선을 지키는 것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다. 너 따위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다. 후루미나미 나몬. 네가 비극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시 쌓아 올리고자 노력했다면. 우리는 서로를 도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이 살인 게임의 반복 어디에선가는 후루미나미 나몬이 죄를 짓지 않아 내가 그 손을 내밀었을지도 모르지만, 이 살인 게임에서만큼은 아니었다. 그녀는 외롭게 죽을 것이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내 말을 듣고 멍하니 움직이지 않더니, 몇 초 뒤 다시금 새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후루미나미 나몬: 아하하하하! 오. 웃기는 소리 좀 그만해. 히무로. 네 꼴이나 돌아보라고. 사람 머리를 들고 다니면서 아무런 거리낌도 안 느끼는 네가. 나를 돕겠다니?
후루미나미 나몬: 너는 스스로를 돕는 것도 불가능하잖아. 히무로. 뒤틀린 별종아… 너는 나만큼 망가져있어. 누구도 도울 수 없을 거라고.
히무로 시라베: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에게 총을 겨누었다. 이미 너무 늦었다. 내가 후루미나미 나몬의 과거를 동정할지언정 그녀는 이미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 그러니. 죽어야만 했다.
히무로 시라베: 너는 두 사람을 죽였다. 이제 곧 너도 죽을 것이다. 준비는 됐나. 후루미나미 나몬?
후루미나미 나몬: 와 줘. 히무로. 이미 너를 내 색으로 물들였으니… 내 역할은 여기까지야.
후루미나미 나몬은 다시금 웃었다. 이미 나는 그녀를 절명시킬 언탄을 많이도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가 검정임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많았다. 여전히 후루미나미 나몬은 결투장에서 총을 맞는다. 그것은 내가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품을 때와 결투장에서 나갈 때 모두 같았다. 다른 것은 내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느냐 뿐이었다.
나는 총으로 죽이지 않는다.
후루미나미 나몬: 궁극의 동반자살은 이미 시작되었다.
나는 내 심장으로 후루미나미 나몬을 죽였다.
< 끝 >
하기와라 우시오: 야! 어떻게 된 거야? 너 괜찮은 거 맞아?!
히무로 시라베: …결국 승자는 나다. 아무런 문제도 없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분명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내가 패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리라. 사실 그의 생각대로. 나는 일부분에 있어서는 완벽하게 패배했다.
카나리 케이토: 꼴 좋기는! 바보 같은 게!… 잠깐. 쟤 왜 저래? 머리 색이 빠졌는데?
노이즈로 뒤덮이기 직전. 후루미나미 나몬의 모습은 모든 이들이 볼 수 있었다. 본래의 색이 빠져버린 껍데기가 되어. 초가 지날수록 더욱 쇠약해지는 그녀를.
이바라 쿠리스: 잠깐. 쟤 괜찮은 거야? 모노로그. 이게 무슨 일이야! 대답해!
모노로그: 영혼이 꺼져가고 있을 뿐이다. 자살 직전까지 갔군.
제츠보: 히무로. 설마 저 여자… 정말로…?
제츠보만이 후루미나미 나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눈치챘다. 다른 이들은 후루미나미 나몬의 변화의 원인을 알아낼 수 없었다. 그야 놀라운 일이었다. 자신의 영혼마저 조각내다니.
히무로 시라베: 모노로그. 음소거를 풀어라.
모노로그: 기껏 만들어놓은 기능인데 다들 결투에서 이겨 놓고서 음소거는 쓰지도 않는군. 이럴 거면 왜 결투를 했지?
히무로 시라베: 증오 때문이다.
분명 그랬다. 후루미나미 나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몸에는 힘이 없었다. 그녀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고 처형당하기 직전까지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나비가 찢고 날아간 번데기와 같이 초라한 형해가 되어버렸다.
후루미나미 나몬: 하하하하하… 으흐흐. 하하하…
토키와 아유키: 제기랄. 저. 저게 무슨…?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나몬. 지금부터 우리는 사건을 되짚을 것이다.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면 말해라.
하지만 나는 그녀가 어떤 것도 제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점점 텅 비어갔기 때문이다. 고작 몇 초 더 사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그저 웃으며 내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세 사람이 있다. 셋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토키와 아유키는 후루미나미 나몬에게서 정보를 제공받고 야가미 토가를 죽인다. 야가미 토가는 후루미나미 나몬을 죽이기 위해 칸나즈키 시노부 살해에 가담한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이 자들을 연막으로 삼고 나와 결투를 치른다는 진짜 목적을 숨긴다.
야가미 토가는 수면제를 가장한 독을, 토키와 아유키는 수혈팩을 조달한다. 그 외에 캐리어나 날붙이처럼 사람을 죽이는 데에 쓸 도구는 오랜 시간을 걸쳐 조달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카나리 케이토가 제츠보를 캐롤 브라이트의 영안로에 억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카나리 케이토가 어떤 시간대마다 영안로 속으로 들어가는지 또한 알고 있었다.
카나리 케이토는 칸나즈키 시노부에게 주기적으로 식사를 제공했다. 도시락을 그녀의 숙소 앞에 놓는 형식으로 그 일은 진행되었다. 카나리 케이토는 오후 6시 30분. 제츠보에게 방해 전파를 사용히러 가기 전 칸나즈키 시노부의 숙소 앞에 도시락을 두었다. 하지만 후루미나미 나몬은 그 이전에 이미 칸나즈키 시노부에게 독이 든 도시락을 주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그 안에 독, 그게 아니더라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물질이 안에 들었음을 알았다. 야가미 토가가 자신을 검정으로 만드려는 계획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적은 검정이 되는 것. 그리고 나와 결투장에 서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후루미나미 나몬은 독이 든 도시락을 칸나즈키 시노부에게 주었다.
칸나즈키 시노부가 언제 독이 든 도시락을 먹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오후 6시 30분의 도시락에 반응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이전에 도시락을 먹고.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30분을 넘게 고통받았을지 몰랐다.
그렇게 칸나즈키 시노부는 죽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능숙한 피킹 솜씨로 칸나즈키 시노부의 숙소를 열고. 그 안으로 야가미 토가가 진입한다. 야가미 토가는 살해 방식에 혼동을 주기 위해 칸나즈키 시노부의 신장을 칼로 찌른다. 그리고 그 자신의 힘을 앞세워 칸나즈키 시노부의 목을 자르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피가 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어쩌면 그는 의복을 벗어야 했을 수도 있다. 혹은 피가 튈 것을 감수하고 의복에 피를 묻힌 뒤. 누구도 모르게 증거를 묻었을지 모른다. 그에게는 시간이 많았으니까.
오후 7시 40분. 해체가 끝난 야가미 토가에게 후루미나미 나몬이 찾아온다. 후루미나미 나몬이 스스로 매듭을 풀었을 수도, 야가미 토가가 그녀를 찾아가 그녀를 풀어주었을 수도 있다. 그녀는 칸나즈키 시노부가 살아 있었다는 가짜 정황을 위해 잘린 목에 고무호스를 넣고 바람을 불어넣는다. 카나리 케이토는 다이얼로그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칸나즈키 시노부가 오후 7시 40분까지 살아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야가미 토가와 후루미나미 나몬은 칸나즈키 시노부의 몸을 구겨 캐리어 안에 쑤셔 넣고, 그것을 밧줄에 묶어 한 층 밑으로 보낸다. 나의 숙소. 그 안에는 토키와 아유키가 물건을 기다리고 있다.
토키와 아유키의 임무는 캐리어로 시체를 수령한 뒤 야가미 토가의 숙소에 시체를 놓아. 그에게 의심이 가게 하는 것이다. 그는 정작 야가미 토가 또한 그들과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는 먼저 자신의 숙소 안에 캐리어를 숨긴 뒤. 이후 야가미 토가가 명목상 후루미나미 나몬을 구출하러 갔을 때를 노려 야가미 토가의 숙소 욕조에 칸나즈키 시노부의 시체를 버린다. 살해 현장이라고 보기에는 피가 부족한지라 토키와 아유키는 자신이 양호실에서 훔쳐 두었던 수혈팩을 사용한다. 허나 그는 수혈팩의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피가 덩어리 져 있다.
야가미 토가와 후루미나미 나몬은 카나리 케이토가 영안로에서 돌아오기까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목만 제때에 영안로 안에 두면 그들의 임무는 끝난다. 한 통이 더 온 도시락을 비우거나 자신의 몸에 묻은 피를 씻으며 피냄새를 지우는 등의 뒷처리는 이때 대부분 할 수 있다. 누군가가 칸나즈키 시노부를 찾으면 다시 고무 호스에 바람을 불어넣으면 된다. 이때 야가미 토가는 후루미나미 나몬과 줄곧 같이 있었으나. 이후 그녀가 그녀의 숙소에 얌전히 있었다는 인식을 위해 야가미 토가는 후루미나미 나몬과의 일화를 지어낸다.
다이얼로그를 영안로 안에 가지고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만 명심한 채. 야가미 토가는 어느 때든 영안로에 칸나즈키 시노부의 목을 둔다. 계산한 대로의 때가 되면 카나리 케이토가 그 목을 발견해 최초 목격자가 되어 줄 테니까.
야가미 토가는 탑의 상황을 경청한다. 시체 발견 방송이 울리고 이바라 쿠리스와 하기와라 우시오가 영안로로 향하면 뒤늦게 나타나 무고한 체를 한다. 이후 야가미 토가는 대본대로 자신이 검정이 아니라는 둥 시치미를 떼다가 토키와 아유키에게 독살당한다.
그게 전부다.
"저한테는 실타래 안 주세요?"
그를 밖으로 내보낸 후. 캐롤은 자신이 갇힌 곳에서 나갈 수단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실타래라는 것이 없었다. 곧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제인 캐롤 브라이트. 저는 패트리샤라고 해요. 영안로를 헤쳐나가시는 분들을 도와드린답니다. 실타래가 없으신 분들은 영안로의 출구까지 걸어서…"
"흑막 불러와요. 고작 하청 따위와 말 섞을 생각은 없으니까. 그쪽도 나한테 예의를 지켜야 하지 않겠어요?"
캐롤은 패트리샤에게 말했다.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쌓이고 쌓인 동물들의 뼈를 둘러보았다.
이 장소는 어디지? 해변과 같은 건가? 아니. 장소가 문제가 아니다.
이 기억은 뭐지? 내가 탑에서 죽는 당시의 기억이 아니었다. 캐롤은 자신이 두 사람의 중첩처럼 느껴졌다. 탑에 오기 직전까지의 그녀와 탑에 와 많은 것을 바라보고, 떠들고, 구경하다 살다가 죽은 그녀가 한 몸에 함께 있었다. 죽는 당시에는 몰랐던 수많은 것들을 떠올려버린 것이다.
"부르니 친히 행차했다. 용건이 뭐냐."
바닥에서 모노로그가 솟아올랐다.
"왜 제 기억이 대부분 돌아와 있는지 궁금해서요. 저한테만 이런 건가요. 아니면 다른 사람이 깨어나도 저처럼 되었을까요?"
"영안로에서 부활한 자의 특권은 바깥 세계의 기억을 되찾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누가 영안로에서 부활하더라도 너와 같이 극단적인 변모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아. 그래요? 그게 부활에 따른 패널티군요? 여기 이름은 영안로고요."
"특권이라 하였다."
"이런 걸 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떠올리게 해 봤자.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걸요? 그게 노림수죠? 기껏 부활시킨 사람이 마구 날뛰는 거요."
"너는 감당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하는군."
"실타래나 주세요."
캐롤이 모노로그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모노로그는 종이입술을 뒤틀어대며 옷을 뿐이었다.
"패트리샤가 말해주지 않았던가? 너는 걸어서 가야 한다. 그렇게 쉽게 내보내줄 수는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골고다와 다크닝의 동굴을 잇는 다리는 끊어져 있지."
"어쩌다 끊어졌는데요?"
"너를 구하려 하던 이름 없는 남자와 그걸 막으려고 한 히무로 시라베가 대립했다. 그 끝에 낡아있던 다리가 끊어졌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자신의 본명을 알지 못해 추락해 버렸다."
"추락했다고요?! 어디요!"
캐롤은 모노로그의 말을 듣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모노로그는 그녀를 만류했다.
"어차피 떨어지기 시작한 지 오래 지났다. 심지어 실타래도 함께 떨어져서 네가 어떻게 할 방법은 없다… 게다가. 네가 걱정할 필요가 없기도 하지."
"마유즈미 씨가 무사하다는 말인가요?"
"너는 네 처지나 걱정하는 편이 나을 텐데."
캐롤은 모노로그에게서 적대감을 느꼈다. 대놓고 불이익을 주겠다면 사실 캐롤이 저항할 방법은 없었다. 터치는 생물에게나 통하니 최악의 경우에는 뼈로 뒤덮인 무덤 같은 곳에서 굶어 죽을 수도 있었다.
"저더러 어쩌라고요? 그냥 죽어요?"
"설마. 네가 날뛰어주지 않으면 나도 곤란하다. 그러니 다크닝 동굴로까지만 데려다주겠다. 그 뒤로는 네가 스스로 걸어가야 하니 명심하도록. 그러는 김에 네 과거와도 마주해라."
"제 과거라뇨?"
모노로그는 입을 쩍 벌리고 캐롤을 집어삼켰다.
누구도 없는 곳. 탑의 거의 모든 이들이 학급재판을 위해 엘리베이터에 모였을 때.
금색 문에서 튕겨져 나온 긴 머리의 소녀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몸이다. 내 몸."
다크닝의 동굴은 그녀에게 별반 새로울 것이 없었다.
다크닝의 사용은 카텟 기관에서도 과도한 샤이닝 수치를 가진 자들에게 사용하는 것을 논의하던 물질이었다. 그것이 샤이닝에 반응해 달라붙으려고 드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영구적인 손상을 입지는 않겠지만, 다크닝에 오래 노출된다면 당분간 샤이닝을 운용하는 데에 차질을 줄 수 있었다.
캐롤은 양손의 장갑을 전부 벗고 두 손을 모아. 좋은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감정의 고조는 샤이닝의 파장에 영향을 미친다.
"재회."
빛이 있으라.
이곳에 빛이 있게 하라.
캐롤은 빛을 뿜어냈다. 샤이닝과 다크닝은 상극이다. 캐롤은 자신의 힘에 대해 조금도 모르던 그녀. 다른 여자보다 훨씬 자신의 힘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뿜어내는 빛이 다크닝에게서 스스로를 지킬 만한 정도가 되었음을 확인한 뒤. 캐롤은 동굴 안을 걸었다. 빛의 파장이 베일처럼 그녀를 감쌌다.
길고도 외로운 동굴이었다. 하지만 그런 동굴마저도 그녀의 발로 밟으니 한 없이 즐거웠다. 동산을 거니는 기분과 같았다. 살아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좋은 거구나. 캐롤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며 두 팔을 벌렸다.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도 가족도 전부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디 그녀가 죽지만 않았을을 바랐다. 기껏 온전한 기억을 가지고 살아났으니 해주지 못한 것들을 잔뜩 해주고 싶었다.
내가 다시 살 수 있을까? 사이먼 가라사대. 그렇고 말고. 아가야.
캐롤은 동굴을 나섰다. 그 직후 동굴 밖의 공기라는 것을 느끼며 힘차게 기지개를 켜러던 순간. 캐롤은 땅바닥에 한 사람이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세상에."
캐롤은 땅에 누운 채 몸이 뻣뻣하게 굳어. 쥐 죽은 듯 미동도 없는 카이다를 보고 빠르게 달려갔다.
"너는 또 어쩌다가 이렇게 됐니?! 괜찮아? 내 말 들려?"
캐롤 브라이트는 카이다 쿠로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카이다는 제대로 답변마저 하지 못했다. 몸이 완전히 굳어버린 그녀는 허탈한 체념의 웃음마저 내뱉을 수 없게 되었다.
"아… 어…"
정신이 망가지기라도 했나? 만약 그랬다면 아무리 나라도 고치기 어려운데. 캐롤은 우려를 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숨 자체는 쉬고 있었지만 너무 불안정하고 또 어딘가 손상을 입은 듯했다.
캐롤은 자신의 손바닥을 최대한 넓게 펼친 뒤 열 개의 손가락을 각각 카이다의 머리에 가져다대었다. 그러자마자 캐롤은 터져 나오는 정신적 비명에 화들짝 놀랐다.
"창놈! 분홍색 창놈! 그 자식이 내 기억을! 내 기억을!"
"분홍색? 그이가 왜 창놈이야? 옷차림 때문이면 너무 선입견이 심하잖아… 그보다. 그이가 어떻게 이 절차에 대해서 알고 있지?"
캐롤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의 배경을 생각해 보았을 때 재단에서 사용하는 암시를 알 방법은 없었다. 그 증거로 절차는 제대로 이행되지도 않았다. 어조를 달리 하였거나 중간에 단어의 배열이 흐트러진다면 각인시켜 놓은 절차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어떻게 하는지는 알았지만 네가 너무 아파해서 정확히 이행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이한테 고마워하는 편이 나을 거야. 그이가 너에게 살살해주지 않았으면 너는 지금쯤 다른 사람이 암시를 주기만을 기다리는 백지가 되었을 테니까."
캐롤은 자신의 손끝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니 내가 이 절차를 풀어준다고 해도, 사적인 보복은 안 하는 거다?"
카이다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몸은 거의 굳어 버렸지만 외부에서의 자극은 인식할 수 있었다. 카이다는 캐롤이 부활한 것을 보았다. 영안로는 정말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장소였나?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또 말이 안 되는 것이 있다면 캐롤이 카이다에게 걸린 절차를 풀어주겠다 제안한 것이다.
카이다는 터질 것 같은 머리의 기억 어딘가에서 캐롤이 자신을 반말로 부른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가 캐롤을 웬 미친놈들의 연구소로 끌고 간 것 또한 떠올렸다.
대체 얘가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카이다는 자신의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를 도울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만약 그녀가 캐롤이었다면 가만히 두다 못해 침을 뱉고 온갖 모욕을 주었을 텐데. 왜 자기 원수를 도와주지?
나나시를 그이라고 부르는 등의 사소한 일은 원한이 있는 사람을 돕는 그 비정상적 행동에 가려져 버렸다.
"잘 풀렸으면 좋겠는데…"
카이다는 자신의 머리를 감싼 열 개의 손가락이 한순간 폭발한 것 같다고 느꼈다. 꽝. 열 군데에서 퍼져나가는 충격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카이다의 정신에 쌓이고 쌓인 단어들이 터져나갔다.
"헤윽…!"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목구멍을 긁으며 새된 고음이 새어 나왔다.
"아으아아아악으하윽하학허으으꺼윽!"
몸을 비틀면서 상체를 세운 카이다는 짐승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눈을 오랜 시간 동안 감지 못했기에 찢어지기 직전의 통증이 몰려왔다. 카이다는 뒤늦게 눈을 감쌌다. 폭포처럼 눈물이 흘러내렸고 차마 닫지 못한 입에서는 신음과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오는 데에 더불어 침이 늘어졌다.
"케흑! 꺼윽! 콜록. 콜록! 께흑! 흐으…"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다. 백지상태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사실이 카이다에게 준 안도감은 그녀가 상정한 바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기억상실자들에게 있어 기억은 단지 지워지고 되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아를 구성하는 핵이었다. '그녀'는 죽을 뻔했다. 다른 체험을 가지고 다르게 움직임 새로운 그녀가 그녀를 대신할 뻔했다.
"허억… 흐으… 흐윽… 헉… 으흐흑…"
그 상태에서 벗어난 끝에 카이다 쿠로하는 자기 무릎을 당겨 안은 뒤 그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염치없는 사람조차도 공포는 느낀다. 죽음의 얼굴을 마주하고 온 카이다는 머리가 아닌 몸으로 겸손이라는 개념을 이해했다.
"괜찮니? 어디 아픈 곳 없어? 일단 한 번 충격을 줘서 암시를 초기화시키긴 했는데… 실타래는 여기 있네. 영안로 밖으로 보내 줄게."
캐롤은 땅에 떨어져 있던 카이다의 실타래를 주워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이미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피로해져버린 카이다의 뇌가 신음을 토했다. 카이다는 어물어물 캐롤에게 물었다.
"너… 너… 으흑… 나한테… 왜 잘해주는 거냐…?"
카이다는 새빨갛게 뜬 눈으로 가장 위협적인 시선을 캐롤에게 보냈다. 그것은 배은망덕한 의도라기보다는 야생동물이 다른 생물에게 보내는 위협과 경계심 때문이었다. 캐롤은 아무 말 없이 카이다의 머리 위로 손을 가져갔다.
"뭐. 뭐야. 왜 이래! 크악! 이 손 치워!"
기력과 정신력 모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카이다는 그 손을 밀어내지도 못했다. 뇌에 직접 전해지는 영 거리 터치 같은 것을 생각하던 카이다는, 캐롤의 손이 자신의 머리를 천천히 헝클어뜨리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더더욱 알 수 없게 되었다.
"일단 나한테 존댓말부터 쓰자. 아무리 작은 차이라지만 이건 가려내야겠어. 네 생일은 3월 15일이잖아. 나는 3월 14일이고. 내 쪽이 언니야."
"뭐. 뭐라고? 이거… 훌쩍. 미친년 아니야?"
"미친년이 아니라 언니라니까? 너 나쁜 말도 그만 써."
"좆… 집어치워! 콜록! 애초에 하루 차이인데 무슨 언니라는 거야. 아니지. 아니지. 애초에 우리 동갑이기는 해?"
"동갑이야. 그리고 하루 차이가 아니라 한 시간 차이밖에 안 나."
"뭐?"
"나는 3월 14일 오후 11시 34분."
캐롤의 손이 자신을 향했다.
"너는 3월 15일 오전 12시 57분."
캐롤의 손이 카이다를 향했다.
"쌍둥이라지만 내 쪽이 언니야."
카이다는 멍하니 캐롤에게 되물었다.
"뭐…라고…?"
"그래서 너에게만은 존댓말을 안 쓰는 거야. 동생한테 존대를 할 수는 없잖아."
카이다는 영안로 안에서 탑에 오기 전의 그녀와 탑에 오기 전의 캐롤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이런 의문을 가졌다.
"적대적인 느낌이 아니었어. 처음이야… 나한테 저렇게 살갑게 대해주는 경우는 처음 봤단 말이다. 어딘가 잘못됐어. 야…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내가 왜 캐롤년이랑 친한 건데? 언제부터 저렇게 친한 건데?"
"가족이라서…?"
"맞아.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니? 왜 나랑 엮이는 사람은 다 이러지… 같은 고아원에서 자라기까지 했는데. 나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너는 적법한 절차를 통해 고아원으로 이송되었다. 자신이 부모에게 버려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인지. 너는 가면 갈수록 포악하게 변해갔다. 한 마리 들개처럼.
"네가 얼마나 너에 대해 알아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언제나 함께였어. 사실. 서로밖에 없었어. 의지하지 않고서야 버틸 수가 없었으니까… 누가 내 머리를 잡아당기면 곧장 네가 보복해 줬고. 누가 너를 속이려고 하면 내가 가만히 두지 않았지. 정말 좋은 한 쌍이었는데…"
캐롤의 얼굴에 기분 좋은 향수가 담겼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아련함은 아지랑이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의 운명은 갈라졌어. 원장이 너를 두 분에게 보여줄 생각이 없었거든."
부모님께서 저를 입양하셨을 때부터. 제겐 터치가 있었어요. 부모님은 미국인이셨죠. 사업 때문에 일본에 머무시는 사이 아이가 생기지 않아 저를 입양하셨다고 들었어요.
"나는 둘이 함께 가고 싶다 했지만 원장은 듣지 않았지. 흉이 진 아이를 입양하려는 사람은 없다더군. 내가 완강하게 버티자 너는 아닌 밤중에 사라져 버렸어. 원장이 너를 웬놈들에게 팔아버린 거야."
카이다는 모노로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모노로그: 너를 데려간 사람이야 있었지.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들은 너를 입양한 것이 아니다. 쓸 만한 후보를 확보한 것이지.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너는 사라져 있고. 나는 영락없이 입양을 가게 생겼지. 네가 나의 전부였는데. 내 자랑거리였는데."
카이다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캐롤을 보며 그만하라며 욕설을 지껄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카이다는 본인이 그것을 오랜 시간동안 기다려 왔다고 느꼈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낮춘 채 멍하게 쓰다듬을 수용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있잖아. 사실 나 그날에 죽으려고 했다?"
"나는 이제 살 이유를 잃었거든."
"가진 게 없어. 나는 거지야. 그래서 하나만 잃는 게 다 잃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다 잃었어. 이제 영영 가망이 없다고."
"아무리 좋은 집으로 입양을 가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 너를 잃은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았어. 그래서 죽으려고 했는데…"
"삶은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어. 정말이야. 아무리 네가 암울하고 지독한 불운 안에 있더라도 그 여정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외로워도 살아남아. 악착같이 살아남아…"
"재회…"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다시 살 수 있을까?' 고작 그 옅은 분홍색 무언가와
가족을 보기 위해?
"인연이 닿은 끝에 나는 살려는 마음을 먹었지.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가서 입양 수속을 밟았어.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너에게 말해준 적도 있잖아. 삶은 그 자체로 가치 있다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카이다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가 입에 담았던 말이 한순간 머릿속에 떠올랐다.
"삶에 살 가치가 있다는 건 씨발 개소리야!"
나는 왜 그런 말을 했지? 누구한테 그 말을 들은 것인지도 모르는데. 당시의 그녀는 누군가에게서 삶의 격려를 받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어쩌면 그것은 정신이 침해당하는 순간 퍼올린 그녀의 의식 최심층의 물질일지도 몰랐다. 삶의 가치 운운은 분홍색 창놈에게만 했으니. 캐롤년이 그것을 알 방도는 없었다. 분명 그랬을 텐데.
"말도 안 돼… 못 믿어. 못 믿어. 네가 나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아? 누가 나를 데려갔는지 알기나 해?"
카이다는 불신 반 믿고 싶은 마음 반으로 캐롤에게 물었다. 카이다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캐롤이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자신이 늘 느껴왔던 공백을 채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도무지 순순히 믿어줄 수 없는 의심이 혼재되었다.
캐롤은 자신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옛날 일을 떠올렸다.
"마피아. 그들은 이후 재단의 전신이 되는 조직에게 돈을 지불하고 네가 근섬유 압축 시술과 인공적 재능의 주입을 받게끔 만들었지. 마피아가 대몰락의 여파로 궤멸하자 재단이 너에게 접촉했고. 재단은 너를 수족으로 부렸어. 까마귀 가면을 씌우고."
카이다는 벌어진 입을 차마 다물지 못했다.
"어… 그걸 어떻게 안 거야? 이건 나밖에 몰라. 모노로그가 너에게 귀띔해 줬나? 나를 속이라고? 이. 이건 창놈도 같이 봤어. 그놈이 너에게 귀띔해 준 거구나!"
"아니. 네가 직접 말해줬잖아. 기억 안 나지?"
카이다는 스스로를 가리켰다.
"내가…?"
"우선 나가서 이야기하자. 걱정하지 마. 나도 뒤따라 나갈게."
캐롤은 카이다의 실타래를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대었다. 카이다는 끝까지 캐롤을 의심했다. 내 이름을 댈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본명을 쓴 기간보다 카이다 쿠로하나 코드네임을 쓴 기간이 더 길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내 이름을 알고 있다면. 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확실한 근거가 되리라.
"시로미 치나미(銀鏡 因). 아웃."
카이다는 영안로 밖으로 빠져나가는 자신의 몸을 느끼며. 느껴본 적 없었던 그리움에 머리가 멍해지고 말았다.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자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보라, 그들이 똑같은 가능성을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펼쳐가는가를,
그것은 마치 우리가 두 개의 똑같은 방 사이로
각각 다른 두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그들은 각자 서로 상대방을 받쳐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상대방의 도움에 피곤하게 기대어 있을 뿐 ;
그리고 그들은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피에다 피를 더하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예전처럼 서로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가로수길을 따라서 상대방에 의해 인도되거나
상대방을 인도하려고 시도한다면 ;
아, 그들의 걸음걸이는 똑같지가 않구나.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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