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다시는 가족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언제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커져만 갔다. 분명 모든 일이 잘 돌아가고 있었는데 총을 가진 이들이 전용실 하나가 끝장났다. 한 위기가 끝났다 했더니 인질극이 발생하고 전용실이 하나 불에 탄다. 잠깐 졸았더니 사람이 죽었다.
나는 충분하지 않아.
그 생각은 나를 괴롭혀 왔다. 정확히 무엇을 채워야 하는지 모르는 그릇이 텅 비어 있었다. 내가 그것을 든 채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다른 이들은 어디에선가 색색별로 다채롭고 향기로운 음료를 가져와 마시고 있었다.
나는 항상 궁금했다.
대체 그게 어떤 맛일까?
그것들이 어떻게 혀 위에서 노래하고, 목 안으로 미끄러지며, 배 안을 끓여댈까?
탑 안에 있는 자들은 초고교급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희망봉 학원 공인은 아니다. 그저 세간에서 초고교급이라는 평가를 받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들은 편의상 서로를 초고교급 무언가라고 부른다. 나도 명목상 그들과 같지만. 나는 안다. 나에게 없는 것을 저들은 가지고 있다.
나는 충분하지 않았다. 탑 안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밤을 지새운 것은 노력이 아니라 노동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열심히 했다고, 사람이 죽었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했다고.
변명. 변명. 변명을 위한 노동, 도망치기만 했다. 그건 다른 누구를 위한 변명이 아니었다.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변명이었다. 누구도 내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게 가장 나쁜 일이었다. 다른 이들이 나를 배려해 주는 만큼 나는 스스로가 미웠다.
내가 너무 한심했다. 다른 이들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그런 자책을 원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데도 내게 가혹하게 굴었던 것은. 내가 나를 증오하는 일종의 자해 행위였다. 내가 나를 충분히 미워하면 이제 그만 되었다면서 면죄부를 주는… 번거로운 일이었다.
나는 내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달리 할 사람도 없으니 내가 리더가 되어야 하는데. 내가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악마와도 손을 잡기로 했다.
"단번에 말해줄 수는 없고. 절차를 밟아야 해. 일단 도서관에 가 봐. 너희 모두 눈치채지 못했지만, 도서관의 장서는 살인이 벌어짐에 따라 그 종류가 바뀌거든."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의 말대로 도서관에 갔다.
그리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알아 버렸다.
내가 책에 쓰인 것을 읽지 못할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두렵다 못해 그것은 끔찍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대체 무엇이 옳은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나는 후루미나미를 본격적으로 감시하기 전 내 방의 벽을 주먹으로 때렸다. 그러면 순간에는 기분이 나아졌지만, 곧 얼얼하게 붉어진 주먹을 내려다보면 그 아픔과 함께 다시금 침잠이 찾아왔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답답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끈끈이주걱에 달라붙은 한낱 벌레가 된 양.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우리를 잡아먹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물에 사로잡혀. 서서히 녹아 양분이 될 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날의 밤. 나는 악몽을 꾸었다.
미궁을 탐사한다고 생각해 보아라. 빛 한 점 없는 쿰쿰하고 먼지가 가득한 미궁 안을. 자신이 무엇을 찾는지도 모른 채.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이정표도 없이 헤맨다고 생각해 보아라. 그런데 그 안에는 괴물이 들어 있다. 내가 가져서는 안 되는 끔찍한 생각들. 내가 나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싶지 않은 감정들이 그 안에서 나를 노리고 있었다. 그 이름은 허영. 오만. 권위의식과 강박이다. 초고교급 리더가 되는 것은 수단이어야 했다. 탑의 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한 수단. 하지만 어느새 그것은 목적이 되어갔다.
나는 그 미궁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찾지 못했다. 내가 어떤 길을 걸은 끝에 미궁의 어느 곳에 도달했는지. 나는 서서히 잊어버렸다.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하룻밤 사이의 수면. 그 안에서 한 없이 불쾌하고 더운,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게 만드는 꿈을 꾼 뒤 나라는 사람은 변해버렸다.
그 꿈은 내가 미궁에서 살기로 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나의 생각은 바뀌었다.
'나는 이미 충분하다'.
'나는 중요한 사람이다'.
'나는 이미 리더이다'.
'내가 옳다. 그렇기에 내 의견은 중요하다.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존중받아야 한다. 그것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나만이 다른 이들을 진정한 의미로 이끌며 또 지킬 수 있는 재목이었다. 그것은 확실했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나와 같은 상황이 주어졌다면 하지 않았겠지만, 나는 할 수 있다.
그 시점에서야 본래 어떤 마음으로 초고교급 리더가 되려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이미 충분하다'.
'나는 중요한 사람이다'.
'나는 이미 리더이다'.
토키와 아유키: 이… 이… 뻔뻔스러운 화냥년이…!
그의 욕설에 몇몇 인원들은 몹시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토키와 아유키가 살인자이고 그 사실을 어떻게든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게 되었으나, 그걸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였다. 탑의 인원들은 아직 '악행을 하는 토키와 아유키'라는 인물을 모른다. 이해는 하고 있어도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른다.
따라서 그의 입에서 악의로 가득 찬 욕설이.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했지만 어감만 들어도 어떤 단어인지 알 수 있는 욕설이 나오자 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제츠보: 까. 깜짝이야.
이바라 쿠리스: 어우. 야…
하기와라 우시오: 야. 토키와. 진정해. 아무리 후루미나미가 아주 튀겨먹어 마땅한 사람이라지만, 나한테 한 욕이 아니더라도 일단 들으면 기분이 나빠진다고.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 어차피 평판도 박살 난 데다가 돌아갈 곳도 없는데. 더 밑바닥으로 내려가지는 말자.
토키와 아유키는 후루미나미 나몬의 말을 듣고 더더욱 분개했다.
토키와 아유키: 화냥년!
이바라 쿠리스: 아. 시작됐네…
토키와 아유키: 화냥년아! 뻔뻔스러운 화냥년. 뻔뻔스러운 화냥년!
토키와 아유키는 후루미나미 나몬을 향해 언총을 쏘아댔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잽싸게 쭈그려 앉아 별 수고도 없이 날아오는 언탄을 흘렸다. 그러자 토키와 아유키의 얼굴에는 피가 잔뜩 쏠렸다. 흡사 도깨비 같기도 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진정하…세요. 토키와 씨? 저기요?
토키와 아유키: 뻔뻔한. 뻔뻔한 화냥년!
그의 행동은 논리적으로 아무런 결함이 없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에게 적대심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계약 때문이다. 서로 지킬 것을 지킨다면 아무리 후루미나미 나몬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다고 한들, 그는 그녀에게 이빨을 보일 수 없었다. 하지만 후루미나미 나몬은 그를 배신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토키와 아유키에게 휘발유를 뿌린 것은 카나리 케이토라고 들었다. 하지만 그 휘발유에 불을 붙이고 패닉에 빠진 그에게 소화기 포말을 뿌리고, 머리를 가격해 기절시킨 것은 후루미나미 나몬이었다. 그에게는 분명 그 일에 대한 원한이 있었다. 그것은 어떤 때보다도 사적이며 격렬할지도 몰랐다.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나몬은 토키와 아유키와 협력했다.
카나리 케이토: 잠깐… 잘못 생각한 거 아니야? 공범이라니. 그런 게 있을 수가 없다고 계속 얘기했잖아. 공범에게 좋을 게 없다고.
히무로 시라베: 통상적인 살인이라면 그렇다. 검정에게는 자신의 살인을 아는 공범의 존재 자체가 자신의 패배를 의미하며, 공범에게는 검정을 도와봤자 함께 나가지 못하고 죽으니. 서로 협력에 의미가 없다. 학급재판의 목적을 탈출에 국한한다면 그렇다.
하기와라 우시오: …후루미나미가 사람을 죽였다면 확실히 이것보단 풀기 어려웠겠지. 저 말은 일리가 있어.
카나리 케이토는 고개를 저었다.
카나리 케이토: 아니. 이상하잖아. 탈출을 위해 죽인 게 아니라니! 그럼. 아무 의미도 없이 죽였다는 거야?
히무로 시라베: 목적은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그녀의 목적이다. 이것은 살인을 하기 위한 살인이다. 시체를 옮기는 등의 공작은 기만일 뿐이다.
그렇기에 후루미나미 나몬에게 살인의 이유를 묻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오해가 있는걸. 나는 토키와의 말만 믿지 말라고 한 거야. 내가 누굴 죽였다고는 일언반구도 한 적이 없어. 토키와가 나를 감시하지 않았을 뿐. 나는 여전히 의자에 묶여 있었어. 나 혼자서 매듭을 다시 묶을 수는 없다고. 심지어 그 매듭은 야가미가 개발한 거야!
히무로 시라베: 토키와 아유키가 묶어주면 될 일이다. 삼 일이 지났는데 매듭법도 인수인계 되지 않을 만큼 그들은 바보가 아니다.
후루미나미 나몬: 너무 억측이야! 목격자 하나 없고, 오직 정황 증거뿐인데 사람을 이렇게까지 몰아가? 왜? 내가 그렇게 잘못을 했어?
하기와라 우시오: …저기 있잖아. 히무로. 내가 하나 이상한 생각을 떠올렸는데 말이야.
이바라 쿠리스는 언총을 자신의 과녁에 대고 쏘았다.
야가미가 공범일 가능성.
하기와라 우시오: 그 매듭은 야가미 본인이 묶어줄 수도 있지 않아?
나는 그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럴 리 없다며 가능성을 일축하려고 했으나, 허황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히무로 시라베: 야가미 토가 또한 후루미나미 나몬과 내통했을 가능성은 물론 존재한다.
이바라 쿠리스: 잠깐. 야가미가 살인을 도울 이유는 없잖아. 야가미 본인한테 득이 될 게 없는걸. 애초에 지금 우리는 왜 토키와가 후루미나미를 도왔는지도 설명을 못 하고 있어.
토키와 아유키: 내가 안 했다고!
하기와라 우시오: …어어? 이 친구 설마 뻔뻔했던 게 아니라 진짜 억울했던 거였나?
히무로 시라베: 아니. 그의 어조는 내가 취조실에서 확인했다. 그는 이 살인에 분명한 공헌을 했다. 그가 후루미나미 나몬에게 그리한 이유는 후루미나미 나몬이 탈출 장치를 통해 얻은 정보를 그가 공유했기 때문이다.
카나리 케이토: 잠깐. 애초에 탈출 장치를 통해 얻은 정보가 뭔데? 나는 그 문장 자체가 이해가 안 돼.
카나리 케이토는 탈출 장치를 얻은 뒤에 벌어진 소동에 대해 모르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히무로 시라베: 탈출 장치의 기능은 정보의 주입이다. 탈출 장치의 버튼을 누른 자와 그 주변의 인원들은 탈출 장치 내에 저장된 정보를 받아들이게 된다. 얼마나 받아들이느냐는 개인의 역량에 달렸지만.
후루미나미 나몬: 사실이에요! 카나리 쟤는 진짜 소식 느리다. 이게 살인 게임에서 협력이 중요한 이유라니까?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나몬은 탈출 장치에서 많은 지식을 취합했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만이 아는 비밀을 말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머지 사실들은… 토키와 아유키. 네 쪽에서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군.
토키와 아유키: 나는 계속 말하고 있잖아. 내가 그런 짓을 저지를 리가 없다고. 그런 짓을 저지른 적이 없다고!
토키와 아유키는 항변했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머저리가 아니고서야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충분한 증거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들 그 무엇도 똑똑히 바라볼 수 없었다. 책망. 비난. 의문. 멸시. 깔봄.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저었다.
토키와 아유키: 아니야. 나는 아니야… 나는 안 했어…!
하기와라 우시오: 토키와. 진짜 안 한 거 맞아? 그러면 대체 왜 네가 쭉 후루미나미를 보고 있었다고 거짓말을 한 건데?
후루미나미 나몬: 슬슬 질리니까 말을 해야겠어. 토키와가 살인에 협력한 이유는 간단해. 내가 도서관에 있는 장서와 양호실에 대해 알려주었기 때문이야.
토키와 아유키: 닥쳐. 후루미나미!
토키와 아유키는 윽박을 질렀으나 후루미나미 나몬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양호실에 처음에 없던 독이 추가된 것처럼. 도서관에는 처음에 없던 책이 가끔씩 들어와. 그 안에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열람할 수 없는 기록. 누군가가 탑에 오기 전 쓴 일기. 죽어도 숨기고 싶었던 비밀들이 적혀 있지. 나는 토키와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었어. 그리고… 뭐. 그래서 사람을 죽였다 이거지.
이바라 쿠리스: 뭉뚱그리지 마. 아니다. 토키와. 네가 답해! 왜 사람을 죽이는 데에 가담한 거야. 왜!
토키와 아유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야…
이바라 쿠리스: 그러니까 왜 그렇게 한 거냐고! 왜 칸나즈키가 죽어야 했어? 왜 야가미가 죽어야 했냐고. 그 둘이 죽을 걸 알고도 방조할 만한 이유를 말해 봐. 토키와! 말해 보라니까!
토키와 아유키: 내가 옳으니까. 그리고 불공평했으니까!
토키와 아유키는 이윽고 이바라 쿠리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이바라 쿠리스는 할 말을 잃었다.
이바라 쿠리스: 네가. 옳았다고? 칸나즈키의 목이 잘렸어. 후루미나미는 그 시체로 장난까지 쳤어. 야가미는 우리가 보는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며 죽었는데. 네가 옳았다고? 도대체 어떤 경위로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건데?
토키와 아유키: 그게 궁금하다면 먼저 내 쪽에서 묻자. 고작 전용실 하나 태운 걸 가지고 왜 내가 못할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왜? 나는 위험한 물건을 치웠을 뿐이야! 하기와라와 모리가 미도리카와의 전용실을 태웠을 때도 네가 몹쓸 짓을 했다며 반목을 했나? 아니지! 모두 그 일을 문제 삼지 않았잖아!
히무로 시라베: 그럴 시간조차 없이 살인이 벌어졌고. 다음날 카지노가 열리자마자 일곱 명이 해안에 떨어졌다. 그렇기에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신경쓸 것들이 많았다.
토키와 아유키: 조용히 해! 히무로! 너한테 물어본 적 없어!
나는 그의 저열한 의도를 알 수 있었다. 토키와 아유키는 사실을 따지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오직 자신이 옳다는 논거만을 제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주 잠시라고 자신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그 기세에 주눅이 든 이바라 쿠리스를. 토키와 아유키는 보고 싶었던 것이다. 포악하고 일방적인 주장. 그는 자신의 말에 누군가가 대처하지 못하길 바랐다. 그의 의도대로 이바라 쿠리스는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다만 기세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노기가 끓어올랐을 뿐이었다.
이바라 쿠리스: 지금 내가 그딴 소리를 듣고 싶어서 물어본 줄 알아…? 그딴 궤변을 들으려고?
토키와 아유키: 하기와라가 칼을 네 목에 겨누기까지 했잖아. 인질극! 인질극이었다고! 설마 목숨을 위협한 게 폭력적이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 그래놓고 지금은 서로 친구 사이래. 자기 목숨을 가지고 협박한 사람은 용서하면서. 우리를 배신했던 사람의 힘을 없앤 나는. 용서할 수가 없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바라. 하기와라. 말이라도 좀 해봐!
하기와라 우시오: …네가 불합리하게 느꼈을 거란 건 인정할게. 토키와. 너도 그렇게 생각할 여지는 충분했어. 하지만 이바라와 나 사이의 일은 우리 둘 사이의 일이지. 다른 사람이 참견할 바가 아니야.
하기와라 우시오는 선을 그었다. 그의 태도는 여러모로 적절했다. 과도하게 흥분한 상대의 감정에 우선 공감해 준 뒤에 그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짚어 주며. 또한 개인적인 일을 언급하지 않게끔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바라 쿠리스는 눈을 질끈 감은 채 토키와 아유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바라 쿠리스: 그건 같은 선상에 오를 수 없어. 왜냐고? 네가 칸나즈키의 수호령을 없앤 덕분에 칸나즈키는 죽었으니까! 괴력을 없애고 방 안에만 있었으니 너희에게 사냥당했어. 그런 주제에 네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토키와 아유키: 잘못한 건 너희야. 나는 그저 잘해보려고 했던 것뿐인데!
제츠보: 그래서 대체 왜 사람을 죽였다는 거야. 토키와. 다들 너를 공격해 대니 기분이 상했다는 건 대답이 될 수 없어. 너는 지금 상황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거지 누구의 질문에도 답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
토키와 아유키: 그러시겠지. 꼭 나한테만 그래야 하지. 지금까지 내가 희생해 온 건 전부 잊고 이제 나는 야가미. 후루미나미. 카이다와 동급이다 이거야. 응? 나한테만 엄격하고… 나한테만 인색해… 내가 산채로 불에 타다가 소화기 용액을 뒤집어썼을 때. 누가 나 잘했다고 칭찬 한 마디라도 했어? 응…? 왜 내가 열심히 하는 건 다들 당연하게 생각하는 거야? 이제는 잠을 오래 자는 게 더 어색해. 침대에 누우려고 하면 불안이 밀려온다고! 다 내 탓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아니야. 이건 내 탓이 아니야!
살인 게임은 사람을 변질시킨다. 그 광기에서 토키와 아유키는 자유롭지 못했다.
토키와 아유키: 내가 죽인 게 아니라니까! 죽인 사람은 후루미나미야. 후루미나미가 검정이니까 처형시키라고!
내부고발자의 증언. 하지만 나는 하기와라 우시오의 야가미 토가 동시 공범설을 듣고 사건을 한 번 되짚게 되었다. 야가미 토가가 사건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을까?
카나리 케이토: 그래. 슬슬 투표해도 될 것 같은데…
히무로 시라베: 너희에게 알리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조사 시간 도중 내게 자신의 범행 사실을 털어놓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와아앗?!
카나리 케이토: 처. 처형! 처형! 지금 당장 처형이다!
이바라 쿠리스: 다들 진정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말을 안 했겠지!
후루미나미 나몬: 내가 한 말 맞아. 다들 오해하지 마. 내가 칸나즈키 시노부를 죽였어. 이게 사실이니까 다들 잊지 말라고!
후루미나미 나몬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댔다.
제츠보: 진작 말하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는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나몬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의 주장이 정말 맞는지 교차검증을 해야 했으며. 만약 내가 재판을 시작하자마자 후루미나미 나몬의 자백에 대해 말했다면 모든 언쟁이 무의식적으로 그녀가 검정이라는 결론을 낼 가능성이 높았다.
히무로 시라베: 무엇보다 그렇게 쉽게 결론을 내 투표하는 것은 이 중의 누구도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투표는 사건의 경위를 다 알아낸 뒤에 해야 한다. 누가 얼마나 살인에 가담했는지를 덮고 넘어갈 수는 없다. 그것이야말로 더 없는 기만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히무로 말이 맞아. 무슨 개 같은 일이 벌어졌을지 누가 알아?
히무로 시라베: 나는 지금까지 당연히 후루미나미 나몬이 검정이며, 토키와 아유키가 공범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게 뭔데?
히무로 시라베: 이 재판이 충분한 작품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을 바라보았다.
히무로 시라베: 이게 끝일 리가 없다. 단 한 번의 죽음이다. 그것도 탈출 장치에 노출된 귀하디 귀한 목숨의 끝이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다. 그녀가 검정이며 토키와 아유키가 공범이라는 것을 꿰뚫기만 하면 풀리는 것은 그녀의 대본 안에 없다.
나는 미리 답을 정해둔 채 이야기를 풀려했다. 나는 분명 이 재판을 대강 넘기려 했다. 사필귀정. 나는 모든 것이 순리에 따라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마유즈미가 죽는 끔찍한 일 뒤에는 당연히 그녀보다 훨씬 죽어 마땅했던 자가 처형대로 끌려가야 한다고 믿었다.
심리를 조종당했다.
히무로 시라베: 무엇보다도…
그녀는 이미 진정한 목적을 내게 토로한 적이 있음에도. 나는 그것을 잊었다.
히무로 시라베: 그녀의 목적은 나와의 동반자살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히무로. 나랑 동반자살해 줘.
히무로 시라베: 언제나 그녀는 나에게 기이한 집착과 훼손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죽는다면, 그 죽음은 나와 얽혀 있어야 한다. 내가 다른 이들과 함께 그녀를 몰아붙여 처형시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나는 그것을 표현할 만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공헌의 분산…? 아니다. 분명 더 정확한 단어가 있을 텐데.
하기와라 우시오: 다른 놈들이 쓸데없이 한 숟가락 올리는 격이지. 비중을 갉아먹는 거야.
나는 그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보아 그건 나에 국한되는 일인 듯했다.
이바라 쿠리스: 으으. 소름 끼쳐. 동반자살이라니. 다자이 오사무 따라 하는 것도 아니고… 아직도 그걸 원하고 있는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그때 입을 맞춘 이래로 계속 그러고 있지.
이바라 쿠리스: 으엑! 징그러!
카나리 케이토: 그래서 어쩌자고. 후루미나미 나몬이 범인이 아니라면 누가 범인인데?
히무로 시라베: 하는 일은 사실 같다. 벌어진 모든 일을 알아내는 것. 그러나 이제부터는 닫힌 사건이 아니라 조금 더 생각의 폭을 넓힐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그 사건에 많이 관련된 자의 증언이 필요하다.
나는 토키와 아유키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토키와 아유키: 나는 할 말 없어.
히무로 시라베: 있어야 할 거다.
토키와 아유키: 할 말 없다고! 다 집어치워! 결국 나를 몰아내다니. 네가 리더 역할을 맡다니…! 다 잘못됐어. 잘못됐어!
제츠보: 토키와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한걸.
토키와 아유키: 기계한테서 그런 말을 들을 생각은 없어.
토키와 아유키가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자 제츠보는 고개를 저었다.
제츠보: 비꼬는 게 아니야. 토키와. 너는 지금 정상적인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아. 그냥 자기한테 적대적인 모든 사람들을 적대하고 있잖아. 그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아.
토키와 아유키: 너희는 아무것도 몰라! 내가 아는 것들에 대해서 너희는 몰라…!
나는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크다 생각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그의 손가락보다 길고 그의 몸이 그의 몸보다 크다 여겼다. 자신을 강력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이들이야말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들은 시한폭탄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토키와. 너에게 벌어진 일은 다른 게 아니야. 금단의 지식은 너를 유혹하지 않았어. 내가 너에게 잘못된 생각을 심지도 않았지. 선뜻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 일어난 일은 달라.
후루미나미 나몬: 팽창. 너는 팽창한 거야.
"팽창(inflation)…"
토키와 아유키: 뭐가 팽창했다는 거야. 지금?
후루미나미 나몬: 네 의식 말이야. 마음의 어두운 면에 집어 먹힌 자아가 부풀어 올랐다고. 자기 자신의 심연에 떨어졌는데 실타래가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 줄 알려 줄까? 괴물이 돼. 네가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겠지? 다른 이들을 진정한 의미로 지킬 수 있을 줄 알았지? 그 오만함이 네게 살인을 불사하게 만든 거야. 토키와.
토키와 아유키는 후루미나미 나몬에게로 손가락을 뻗었다.
토키와 아유키: 그건 네 잘못이잖아! 내가 나아가야 하는 길은 명확했어. 탑에 있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카텟 기관이 주도하는 질서를 깨야 해. 무엇보다 위험요소를 가진 개인들을 억누르고. 여의치 않다면 제거해야 했어…!
토키와 아유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수없이 들었던 주장들과 별 다를 것은 없었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인데. 세상을 바꾸자. 정의롭게 세상을 다시 세우자. 그것을 위해 전쟁을 하자'.
자신이 세상을 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가장 위험했다. 히틀러는 자신이 독일을 구원할 유일한 이라 믿었다. 독일 군인들은 바그너의 음악을 들으며 지크 하일을 외쳤다. 잘 정돈된 대규모의 투쟁은 필연적으로 집단적인 의식 고취를 동반한다. 폭풍과 열광. 광기와 도취. 그 모든 일이 한 사람의 내면에서 휘몰아친다. 모든 방향이 순식간에 뒤바뀌는 힘의 소용돌이 안에서 믿을 수 있는 명제는 단 하나다. '내가 옳다'. 그것이야말로 지침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남탓하지 마. 토키와. 너는 영웅이 되고 싶었을 뿐이야. 다른 이들이 너를 떠받들어주기를 원했잖아! 너는 스스로의 자존감에 끊임없이 바람을 불었어. 왕이 되려 했지. 그 자리는 자격을 갖춘 뒤에야 올라갈 수 있다는 걸 모르고 헐레벌떡 왕좌에 앉았으니. 누가 따를 소랴?
후루미나미 나몬: 네 모습을 좀 봐. 파란 풍선 같아! 능력도 없어. 재능도 없어. 잘하는 것도 없다니. 아하하!
후루미나미 나몬은 입을 손으로 가린 채 쿡쿡 웃었다. 토키와 아유키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토키와 아유키: 감히… 감히 네가 나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다니. 그렇다면 나도 전부 말해주지. 우리 간에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
그리고 토키와 아유키는 복수를 위한 폭로를 시작했다. 그것은 그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해 반성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저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서. 계약을 지키지 않은 자에게 불이행으로 인한 보복을 가하기 위한 고자질이었다. 그는 후루미나미 나몬의 살인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당한 배신만 중요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이자에게 입김을 불어넣었다. 물론 토키와 아유키 또한 그의 에고를 팽창시켰겠지. 하지만 결정적인 첫 모금은 후루미나미 나몬이 사주했다. 그는 심리를 지배당했다. 자신이 탑을 이끄는 것이 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결론은. 그렇게 도출되었을 것이다.
후루미나미 나몬이 달변가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토키와 아유키를 설득시킬 만한 정보가 있는가.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지만 별반 알 가치는 없었다.
토키와 아유키: 여기까지 유추한 너희들의 생각이 대부분 맞아. 나와 후루미나미는 칸나즈키와 야가미를 죽이려 했어.
토키와 아유키: 후루미나미가 그렇게 하자고 했거든.
남의 장기짝처럼 놀아나 놓고 리더의 역할을 하겠다니. 나는 할 말이 다 떨어져 버렸다. 다른 이들 또한 허탈한 표정을 짓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토키와 아유키는 그것이 계속하라는 신호라 판단했고, 따라서 그는 더더욱 자세한 진상을 말해 주었다.
토키와 아유키: 정확히 말하자면 수호령을 되찾은 칸나즈키는 샤이닝 운용에 있어서 일이 위를 다툰다고 했어. 또 야가미는 살인자니 언제 살인을 저지를지 모르는 위험분자였어. 안 그래?
후루미나미 나몬: 하나 빼먹은 게 있어. 갈팡질팡하는 토키와에게 내가 말했지. 그가 부관이 된 건 너와 다른 이들 사이의 마찰을 억누르기 위함이지 너 같은 놈을 도울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속으로는 너를 깔보고 있다고.
토키와 아유키: 그건 중요하지 않아.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나몬과 내통했다면 분명히 수행했을 역할이 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요주 감시 대상이고, 명목상으로나마 두 사람이 번갈아 그녀를 감시하고 있다. 따라서 내통자가 후루미나미 나몬의 구속을 풀어준다 한들. 불시 검문이나 탑 내 인원들에 의한 발각의 리스크를 감수할 순 없다. 살인 트릭을 꾸미는 것에 필요한 재료는 내통자가 제공했겠지.
히무로 시라베: 수혈팩은 네가 제공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나?
토키와 아유키는 흠칫 고개를 한 번 뒤로 젖혔다.
토키와 아유키: 그걸 어떻게 안 거야?
히무로 시라베: 욕조에 들어간 칸나즈키 시노부의 시신 밑의 고인 혈액을 확인해 보았더니. 덩어리 진 피가 나왔다. 수혈팩을 어째서 특정한 온도에만 보관하는지 너는 몰랐겠지. 그것은 혈액이 냉장보관하지 않기에 적절하지 않은 액체이기 때문이다. 너는 수혈팩을 훔쳤으나 냉장보관의 중요성까지 알지는 못했다. 그것을 상온에 오래 방치했겠지. 그러다 사용했으니 변질이 일어나고 혈액이 부분 부분 굳을 수밖에.
이런 실수는 높은 지능을 가진 사람이 할 만한 게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이 구분의 지표일지도 몰랐다. 일처리가 확실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히무로 시라베: 욕조에 고인 피가 조금 더 차갑게 느껴진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몸에서 나와 천천히 식어간 피와 냉장되어 있다가 밖으로 나온 피를 비교하면 당연히 후자가 더 차가울 수밖에.
토키와 아유키: 맞아. 젠장. 맞아. 엄청나게 예리하다. 너…
하기와라 우시오: 존나 웃긴 게 뭐냐면 토키와 쟤가 저 피가 수혈팩 아니냐고 짚었다는 거야.
"누군가가 피를 끼얹었을 수도 있다고 봐. 양호실에 수혈팩이 있었던 걸로 기억해. 그걸 쓰면 욕조에서 죽인 것처럼 눈속임을 할 수 있게 돼. 다른 곳에서 살해하고… 야가미의 욕조에 두는 거지."
하기와라 우시오: 와. 진짜 존나 소름 돋네. 수혈팩 뿌린 게 자기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를 해? 그런데 자기 수법을 말해준 건. 메소드 연기였냐? 아니면 그냥 아는 척을 하고 싶었던 거야?
토키와 아유키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듯 피식 웃었다.
토키와 아유키: 연기라고 생각해 줘. 나는 언제나 연기를 하고 있었거든.
하기와라 우시오: 어쩌라고.
이바라 쿠리스: 수혈팩… 그런데 고작 야가미한테 혐의를 떠넘기려고 그런 대장정을 한 거야? 어차피 쉽게 풀릴 사건인데? 또 시체는 어떻게 옮겼대?
나는 피가 묻은 캐리어라는 글씨를 띄웠다.
히무로 시라베: 야가미 토가의 침대 밑에 있었다. 증거인멸을 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던 모양이다. 전용실의 배치도를 기억하는 사람. 있나?
후루미나미 나몬: 자료 화면. 나갑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스케치북을 팔락였다. 그러자 탑에 처음 왔을 때 그녀가 그렸던 그림이 보였다.
후루미나미 나몬: 자. 보이시죠? 3층에 있는 칸나즈키의 숙소에서 한 층만 밑으로 내려가면. 히무로의 숙소가 있습니다. 어때요. 참 쉽죠?
나는 욕설을 참고 계속 말을 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과 한쌍인 모양새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히무로 시라베: 나는 이렇게 추측하고 있다. 먼저 검정은 캐리어를 칸나즈키 시노부의 숙소로 공수한다. 아마 후루미나미 나몬의 숙소에서 바로 옆방으로 옮겼겠지. 그 시점에서 칸나즈키 시노부는 움직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빠르게 한다면 들키지 않을 수 있다.
히무로 시라베: 준비가 끝난 뒤 검정은 칸나즈키 시노부의 숙소에서 그녀를 살해하고 목을 자른다. 그리고 목을 잘라낸 몸을 구겨서 캐리어 안에 집어넣는다. 피가 조금 흘러나와도 어차피 사건 현장 안이니 상관은 없다. 이 캐리어에 밧줄만 묶으면, 미리 내 숙소에서 대기하고 있던 공범이 캐리어 안에 있는 시체를 수령하는 것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곧바로 야가미의 숙소로 옮기…진 않았겠지. 칸나즈키가 7시에 죽었다고 치고 해체랑 목 자르기랑 캐리어에 사람 담기 등등 이것저것 고려하면… 한 40분 걸렸다 치자고. 그쯤에는 야가미가 아직 자기 숙소에 있잖아. 아마 자기 숙소로 옮기지 않았을까?
제츠보: 어차피 야가미는 후루미나미를 감시하려 떠날 테니까. 그때를 기다리면 돼. 하지만 히무로의 숙소나 탑의 바닥. 야가미의 숙소에도 피가 묻지 않았을까?
히무로 시라베: 살인 사건이 났는데 내 숙소에 들를 틈은 없었다. 여기 중 자신의 숙소에 잠깐이라도 다녀와본 사람이 있나?
카나리 케이토는 눈치를 보다가 손을 들지 않았다. 자신의 경우가 내가 짚고자 하는 맥락에 부합하지 않음을 아는 듯했다.
히무로 시라베: 재판을 위해 모이기 전 사건 현장을 조금이라도 기웃거리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다. 검정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확인하지 않았을 뿐 바닥을 닦는 등의 뒤처리를 했을지도 모르지.
하기와라 우시오: 또 탑의 바닥은 그냥 검은색이라서 피가 튀어도 티가 안 나. 죄다 시꺼먼데 빨간 점 몇 개가 눈에 띄겠어? 야가미의 숙소에 묻은 피는 수건이라도 가져와서 닦으면 그만이고. 유일하게 걸리는 건 어떻게 캐리어 질질 끌고 다니면서 안 들켰느냐인데… 뭐. 잠깐 들어서 옮겼던가 그건 알아서 했겠지.
토키와 아유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추측은 대부분 맞는 모양이었다.
이바라 쿠리스: 몸을 토키와가 옮겼다면. 목은 누가 옮긴 거야?
토키와 아유키: 글쎼. 일단 나는 아니야.
이바라 쿠리스가 그를 의심스럽게 보자. 토키와 아유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토키와 아유키: 우겨대도 아닌 건 아닌 거야. 다들 기억해? 영안로 안에 들어가면 다이얼로그의 시계 기능 망가지는 거? 내 거는 안 망가져 있었잖아. 그러니 목을 옮긴 건 내가 아니야. 이제 와서 거짓말해 봐야 좋을 것도 없어.
하기와라 우시오: 그건 후루미나미도 마찬가지잖아. 네 말대로라면 후루미나미도 못 했다는 건데?
토키와 아유키는 멀뚱멀뚱 하기와라 우시오를 바라보며 어깨를 과장시켜 가며 으쓱였다. 순간 그의 목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토키와 아유키: 나도 몰라. 알아서 했겠지. 일단 나는 아니야.
히무로 시라베: 이것은 두 번째 내통자 가설을 조금 더 뒷받침하는 일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어. 히무로. 내가 지금 떠올린 건데. 다이얼로그 시계 기능이 멀쩡하다고 해서 두 사람이 모두 캐롤의 영안로 속에 안 들어간 건 아닐 것 같아. 다이얼로그가 들어가면 고장이 나는 거잖아. 자기 다이얼로그만 영안로 문 앞에 두고 쏙 나오면 돼.
히무로 시라베: 물론 그것 또한 맞다. 하지만 여전히 후루미나미 나몬은 발각의 위험성이 큰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7층까지 발걸음을 옮겼을까?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지. 카지노에서 휴게실을 경유해 올라가면 유의미한 거리를 단축할 수 있으니. 하지만 나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나는 하기와라 우시오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히무로 시라베: 하기와라 우시오. 재판 도중 분명 쓸 일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쏘지 못한 언탄이 있나?
하기와라 우시오: …두 개 있어. 그런데 진짜 사소한 의문이야. 네가 들으면 고작 이딴 걸 가지고? 싶은 의문.
히무로 시라베: 네 의심을 의심하지 마라. 하기와라 우시오. 너에게는 역량이 있다. 말해라. 아마 그것이 검정을 잡을 큰 단서가 될 것이다.
나는 그의 말에 관심이 쏠리게끔 단어를 골랐다. 학급재판에서 다루는 모든 단서는 검정을 잡을 큰 단서지만, 그것을 강조하면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다. 나는 그가 망설이고 있다면 그럴 필요도 없게끔 등을 떠밀기로 했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느끼자. 약간 부담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하나는 야가미가 죽기 직전에 내가 죽인 게 아니라고 말했던 거. 나머지 하나는 야가미가 후루미나미를 감시하려 투입됐더니. 후루미나미가 오줌을 싼 채 방치돼 있어서 씻겨야 했다는 거. 진짜 이게 다야.
후루미나미 나몬: 아. 부끄러워 진짜! 나한테 왜 그래!
후루미나미 나몬은 두 손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하기와라 우시오가 말한 첫 번째의 내용 까지는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지만, 두 번째의 예상치 못한 내용에 다른 이들은 크게 당황한 듯 보였다.
이바라 쿠리스: 오. 오줌?! 나이가 몇인데 오줌을!
카나리 케이토: 야. 그거 앞가림 하나 못하냐? 이거 완전 구제불능이네. 진짜! 더러워. 더러워!
후루미나미 나몬: 웬 하이에나들이 이렇게 나타나서 이때다 하고 비난이야? 웃기시네. 제츠보 너는 말 얹을 생각도 마. 방광도 없는 주제에 사람의 배설 고충을 얼마나 알아?
제츠보: 나는 그딴 일 따위 관심도 없었어! 야가미가 죽기 전에 남겼다는 내용에 관심이 있지. 자기가 죽인 게 아니다. 야가미가 그렇게 말했단 말이야?
이바라 쿠리스: 맞아. 우리 다 같이 들었어. 혀가 굳은 건지 엄청 힘들게 말하긴 했지만…
사람들이 유언으로 남기는 말은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토키와 아유키: 자기숙소에 시체가 있으니 의심을 벗으려고 할 만하지.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걸.
히무로 시라베: 그것은 단순한 혐의를 벗기 위해서가 아니다.
토키와 아유키: 글쎄. 그건 아무도 모르지. 야가미에 대해 확실히 안다고 장담할 수 있어? 너희 중 누가 그럴 수 있는데? 야가미에 대해 우린 아무것도 몰라.
히무로 시라베: 죽기 직전까지 혐의를 벗으려고 한단 말인가? 누구도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그는 스스로의 혐의를 벗을 필요가 없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이미 죽었는데 평판 따위가 무슨 소용이지? 다른 이들이 그에게 투표해 처형당한다 해도 그에게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토키와 아유키는 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토키와 아유키: 세상만사 전부 네 말이 맞다고는 생각하지 마. 히무로. 사람들이 자기한테 투표하면 칸나즈키의 진짜 검정은 빠져나가 버리잖아. 그러니까 야가미는 자기가 검정이 아니라 했던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히무로가 하는 말이 그거잖아. 단순히 혐의를 벗기 위해서가 아 자기 말고 다른 검정을 지목한 거야… 아. 미친. 뭔가 잡힐 듯 말 듯 하는데… 만약 야가미가 공범이었으면…
하기와라 우시오는 자신의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토키와. 그래서 아까 후루미나미가 보여준 모르핀 염산염은 네가 공수해 준 거지? 스트리크닌도 네가 보내줬고.
토키와 아유키: 아니? 그래서 저 모르…핀을 처음 보여줬을 때 나도 놀란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뭐? 네가 안 했으면 누가 해?
토키와 아유키: 후루미나미가 직접 뛰었겠지. 나는 몰라. 자세한 계획의 조율은 후루미나미가 했어. 내가 아니야. 나는 그저 캐리어를 옮기고 시체를 욕조에 넣기만 했다고. 아. 혈액팩 뿌리고 캐리어 숨기고 흔적 닦고 그런 뒤처리를 하긴 했지만.
히무로 시라베: 야가미 토가의 커피에 스트리크닌을 타는 것을 누락했다.
토키와 아유키는 나를 째려보았다. 그래서 마주 봐주자 그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토키와 아유키: 그래. 그거 포함이지. 다시 말하지만 야가미는 위험인물이었어.
이바라 쿠리스: 우리가 야가미의 욕조를 조사하고 있을 때 혼자 뒤에 쏙 빠져 있었던 게. 야가미의 텀블러에 스트리크닌 타려고 그랬던 거지?
토키와 아유키: 그래. 맞아. 너희가 다 시선을 팔고 있는 그때를 노렸지.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스트리크닌의 조달은 내가 한 게 아니야.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그즈음 다른 이들 또한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다.
제츠보: 히무로가 아까 말했지. 후루미나미가 남들에게 들키지 않게 움직이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고. 그런데 후루미나미는 언제 빠져나가서 독약과 수면제를 입수할 수 있었을까?
토키와 아유키: 그냥 돌아다녔는데 안 들킨 거겠지. 운이 좋았던 거야. 후루미나미는 카나리가 언제 캐롤의 영안로로 향하는 줄 알고 있으니. 이따금씩 방에서 나와 활동하는 이바라만 주의하면 되잖아.
하기와라 우시오: …공범한테 시키면 주의할 필요도 없지.
하기와라 우시오가 언총을 쏘아 제2의 내통자라는 글씨를 띄우자. 토키와 아유키가 그 글씨를 부쉈다. 그 자리에는 정보 공유가 되지 않았음이라는 글씨가 올랐다.
토키와 아유키: 다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후루미나미를 도운 사람은 나 하나라고. 만약 살인을 도울 사람이 있다면 내가 알았을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웃기고 있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쟤가 언제 양호실에 들러서 독을 가져왔는지도 모르면서 뭘 알 수 있었다고? 후루미나미가 작정하고 너한테 숨겼고 야가미도 너한테서 그 사실을 숨겼으면. 너는 몰랐을 걸.
토키와 아유키: 아니야! 이. 이상해. 그럴 리가 없는데…
하기와라 우시오: 내가 제2의 내통자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야가미가 한 번 내통을 해 봤기 때문이야. 얘는 협상가라서 자기 이득에 맞게 이리저리 붙어다니기를 잘해. 좋게 말하면 합리적으로 사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존나 배신자인 거지. 토키와가 후루미나미한테서 어떤 얘기를 들었는지는 몰라도 후루미나미가 잘만 꼬드겼다면, 야가미는 넘어갔을 수도 있어.
카나리 케이토: 후루미나미랑 토키와는 결국 야가미를 독살했잖아. 그런데 야가미는 그걸 몰랐고, 토키와는 야가미의 내통을 몰랐다고? 이게 가능한가…?
하기와라 우시오: 그건. 음…?
제츠보: 서로 계획을 일부분만 알고 있었던 거지. 야가미는 자신도 공범임을 숨겼고, 토키와는 야가미도 죽일 계획임을 숨겼어.
생각할수록 기막힌 일이었다. 야가미 토가와 토키와 아유키가 후루미나미 나몬을 감시했는데. 사실 둘 모두 후루미나미와 협력하고 있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보다 못하다. 고양이 둘이 생선의 지느러미에 맞춰 움직이다니 농담거리조차도 아니었다.
이바라 쿠리스: 야가미까지? 정말로…? 토키와 도와주면서까지 원만히 지내려 하길래. 관 옮기는 거 도와주길래 좋게 봤더니. 결국 또 사람을 죽였다니…
야가미 토가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살인에 가담할 이유는 별반 없었다. 그는 후루미나미 나몬을 도울 동기가 없었다. 반복에 대해 아는 이상 재판에서 승리해 봤자 다음 살인 게임이 시작될 뿐이었다. 혹시 다음 살인 게임에서 미도리카와 아쿠토와 재회할 심산일까 짐작해 보았으나, 아무리 꼬아 보아도 야가미 토가가 그토록 비이성적인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카나리 케이토: 야가미는… 토키와를 믿지 말라고 했어. 그때는 무슨 뜻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토키와 아유키: 제발 좀. 얘들아. 야가미도 공범이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 그런 증거도 없다니까. 만약 야가미가 후루미나미와 협력했다면 대체 뭘 했는데?
히무로 시라베: 칸나즈키 시노부를 죽이고 독이 든 도시락을 변기에 내려 처분하는 등의 공작. 그리고 목을 자르는 절차까지.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을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표정이 잠시 불쾌해지는 것이 보였다. 예상대로 그녀는 자신의 업적. 엽기적인 행각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따라서 야가미 토가가 목을 잘랐다는 추리는 그녀에게 있어. 공을 빼앗기는 일이었다. 목을 자른 이는 후루미나미 나몬이었다. 당연히 목에 바람을 부는 것도 후루미나미 나몬의 짓이었다. 그녀는 그런 짖궃은 일을 마다할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넘길 바에야 차라리 계획에서 빼는 편이 그녀에게는 나았다.
히무로 시라베: 어쩌면 목에 바람을 불어넣는 만행도 그의 것일지 모른다. 후루미나미 나몬이 그렇게 하라 지시했다면.
카나리 케이토: 잠깐. 그럼 오줌 이야기는 어떻게 된 거야? 야가미가 돌아왔을 때 오줌을 싼 후루미나미가 있었다며.
하기와라 우시오: 거짓말인 거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줘서 야가미가 후루미나미를 계속 감시했다는 인식을 심으려 했던 것 같아. 외출했다 온 사람이 자기가 편의점에 갔는데 시간여행자를 만났다고 하면 사람들은 시간여행자 만났다는 부분을 의심하지, 편의점에 갔다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덜 의심하잖아. 그런 거.
히무로 시라베: 그리고 소변을 눈 채로 몇십 분 이상 방치되었다면 그 악취는 잠깐의 환기와 청소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숙소로 갔을 때 소변의 악취를 느꼈나? 소변에 젖은 옷을 묶어놓은 봉지 같은 것은 없었나?
다른 이들은 고개를 저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씻었다는 말 자체는 사실일 수도 있다고 봐. 다만 자기 몸에 밴 피냄새를 없애려고 씻은 거겠지? 아무튼 칸나즈키의 머리는 계속 칸나즈키의 숙소 안에 보관하고 있다가. 카나리가 다음에 들를 영안로 시간에 맞춰서 캐롤의 영안로 쪽으로 가져가면 돼. 보자기를 쓰든 가방을 쓰든. 내가 이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나와 이바라가 칸나즈키의 목을 봤을 때 야가미가 우리 쪽으로 왔기 때문이야.
이바라 쿠리스: 아…! 맞아. 그때…!
"…머리는 그 안에 있는 모양이죠?"
이바라 쿠리스: 야가미가 나타나서 말했어. 몸은 자기 욕조 안에 있다고!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다녀서 뒤를 밟은 걸 수도 있지만, 너무 적절하게 나타났어! 게다가…
"말해두겠는데. 저는 검정이 아닙니다. 제가 죽인 게 아니라고요. 진짜 범인은 따로 있습니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주 일관성 있는 새끼야. 그렇지? 계속 어필했잖아. 자기는 검정이 아니다. 진짜는 따로 있다. 내가 말장난 좀 해볼까? 검정은 아니다. 그런데 공범이기는 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이거라면 야가미가 11시 20분쯤에 몸을 발견해 놓고 말은 안 했다는 것도 설명이 돼.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 카나리나 다른 사람들이 머리를 찾아낸 다음에 쓱 나타나면 되니까. 실제로 우리는 여태까지 누군가가 야가미한테 혐의를 덮어씌우려고만 했다고 생각했잖아. 토키와도 야가미 검정 설을 밀었어. 야가미가 진짜 살인에 개입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
카나리 케이토: 후루미나미의 계획은 야가미를 죽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야가미는 그걸 몰랐고, 토키와는 야가미 또한 공범이라는 걸 몰랐고… 끄응. 복잡해…
결국 야가미 토가는 자신이 조달한 스트리크닌에 의해 살해당했다. 자업자득. 미도리카와 아쿠토가 주창하던 업보가 실현된 노릇이었다. 야가미 토가는 그 스트리크닌이 자신에게 쓰일 줄을 알았을까? 필요가 있다고 하여 조달했는데 정작 칸나즈키 시노부에게는 수면제밖에 쓰지 않았을 때. 그는 과연 스트리크닌이 어디에 쓰일지 생각해 보았을까?
이바라 쿠리스: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 대체 야가미는 왜 후루미나미를 도왔을까? 야가미라는 사람이 왜 그랬느냐가 아니야. 이득이 되니까 했겠지. 내 말은 무슨 이득이 있느냐는 거야.
제츠보: 토키와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
토키와 아유키: 말 안 해.
그 대신에 입을 연 것은 후루미나미 나몬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권력을 약속했어. 정확히는 권력을 얻을 수단에 대해 말해 주었지. 가장 원하는 걸 주겠다고 하니 내게 넘어오는 건 당연한 일이야. 다들 진작에 넙죽 엎드리지 그랬어? 괜히 토키와 같은 사람에게 결핍과 갈등을 주니 홀딱 배신할 수밖에.
토키와 아유키: 닥쳐. 화냥년아! 굴뚝새에 똥파리 같은 년! 색욕에 미친 괴물 같으니!
한 차례 한숨이 흘렀다. 토키와 아유키의 감정 발산은 순식간에.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이루어졌다. 미성숙하고 악의가 담긴 욕설은 후루미나미 나몬 본인보다 다른 이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별반 개의치도 않았다. 본인도 그게 사실임을 알았고 그게 차라리 자랑스러운 듯했다.
제츠보: 아무래도 후루미나미는 공범에게 공범이 원하는 걸 줬던 것 같은데. 야가미가 원하는 게 뭐였는지를 모르겠어. 미도리카와를 향한 복수인 줄 알았는데. 미도리카와가 미웠던 적은 없다고 하니…
그러나 여전히 야가미 토가는 가치 체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과 같은 극단적인 허무주의는 분명 인간의 의식에 있어 밑바닥에 있는 허무주의다. 하지만 추락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린다. 사람의 믿음이 변하기에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야가미 토가에게도 거래에 응할 만한 미끼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점에 후루미나미 나몬이 야가미 토가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뿐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불완전한 가설이 하나 있는데. 들어 보겠나?
하기와라 우시오: 어이구. 마음껏 해 마음껏. 지금 제대로 돌아가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히무로 시라베: 분명 저들은 본래 야가미 토가가 검정이 되는 것을 계획했으리라.
만약 야가미 토가가 후루미나미 나몬과 거래했다면, 가능한 경우는 그것뿐이었다. 야가미 토가를 지목하는 듯한 가짜 단서들을 놓은 후루미나미 나몬의 범행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야가미 토가를 검정으로 만드는 것이다.
토키와 아유키: 그런 건 계획에 없었어.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나몬과 야가미 토가 사이의 계획 말이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네게 말했겠지? 어차피 너는 내가 검정인 것을 알지 않느냐. 학급재판에서도 네가 적당히 재판의 흐름을 이끌어만 주면 내가 승리할 일은 없다. 어차피 나는 삶에 미련이 없고 죽어도 된다.
히무로 시라베: 단지 너는 정보를 얻고, 후루미나미 나몬은 남들에게 불행을 안겨준 채 자신이 원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너는 그 거래에 납득했다. 만약 네가 공범인 것이 들키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나은 일은 없다고 생각했겠지.
히무로 시라베: 하지만 후루미나미 나몬의 목적은 나와의 동반자살이다. 고작 홀로 죽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지. 그녀는 검정이 될 수 없다고 했을 때.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검정이 되어줄 사람이다. 승리하여 하양들을 전부 처형시킬 사람. 그렇게 세 명이서 역할을 나눠 가졌다.
카나리 케이토: 이. 이해가 안 돼! 뭐라고?!
카나리 케이토가 소리쳤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러니까 이거야. 야가미와 후루미나미와 토키와가 힘을 모아 사람을 죽였다. 야가미와 후루미나미는 토키와 몰래 야가미를 검정으로 세우려 했고, 후루미나미와 토키와는 야가미 몰래 야가미를 죽이기로 했다. 야가미를 꾄 미끼는 검정으로써의 승리. 토키와를 꾄 미끼는 몰?루 정보. 물론 야가미의 거래 조건이 진짜 저거인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후루미나미가 달리 지불할 게 없지 않냐 이거야.
히무로 시라베: 그 결과로 야가미 토가는 홀로 살아남고자 했으나 죽었고, 토키와 아유키는 리더가 되고자 했으나 자신의 과오를 드러냈고, 비로소 자신의 공범들을 나락에 빠트린 후루미나미 나몬은 학급재판에 교란을 일으켜. 이미 죽은 검정을 맞추지 못한 전원이 처형당하는 마무리를 바랐다는 것이다.
히무로 시라베: 그것은 거시적인 동반자살이다. 그 안에 나와 그녀가 포함되어 있으니. 동반자살이지. 물론 내 의사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불완전하지만, 그녀 혼자서 죽는 것보다야 그게 훨씬 낫다. 규모도 크며 많은 이들을 휩쓸지. 후루미나미 나몬의 입맛에 맞는 일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재미있는 가설이네. 하지만 다들 이걸 봐주겠어?
후루미나미 나몬은 나의 눈앞에 하트 모양의 장식이 달린 열쇠를 보여 주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너희들 중 몇몇은 크레딧 상점에 이 품목이 추가되어 있는 것을 봤을 거야. 이건 사랑의 열쇠라고 하는 물건인데. 이 가상현실을 만든 사람이 심어놓은 부활절 달걀 같은 거지. 원래는 진정한 사랑을 가진 누군가가 사용하도록 만든 건데… 뭐 그런 거 없어도 기능의 일부분만큼은 작용해.
후루미나미 나몬: 이 열쇠는 내가 지목한 상대와 내가 동시에 잠에 들 때 둘의 꿈을 연결해 줘. 꿈에서 상대는 나를 소중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지. 정신력에 따라 그건 차이가 있고 쓰는 것도 까다롭지만 나는 이것으로 야가미 본인에게서 매듭 묶는 법을 배웠어. 푸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내 손목을 거의 뽑았다고. 아파. 사실 지금도 아파. 야가미와 한 패였으면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이바라 쿠리스: 뭐야. 그게 그런 용도였어? 디자인이 예쁘길래 어디에 쓰나 했더니…
히무로 시라베: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믿지?
후루미나미 나몬: 나는 그냥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야가미는 나와 협력한 적이 없어.
하기와라 우시오: 그러면 네 뒤치다꺼리는 누가 다 했는데? 매듭이야 푸는 방법만 알면 대신 풀어줄 사람이 없어도 너 혼자 움직일 수 있게 되잖아. 또 네가 그 열쇠인지 뭔지를 쓴 뒤에 야가미가 너한테 합류했을 수도 있고. 안 그래?
후루미나미 나몬은 콧방귀를 뀌며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이봐들. 공범이 많아봤자 좋을 건 없어. 살인은 케이크야. 나눌 수 없는 케이크. 한 명밖에 못 먹는다고. 입이 늘어난들 케이크가 늘어나나. 애초에 야가미가 공범이라고 해도 알 게 뭐야? 야가미가 검정이 아니면 이미 죽은 사람이 뭘 하든 상관이 있느냔 말이야.
후루미나미 나몬: 다들 큰 그림을 좀 보려 해 봐. 제발 좀 그래 줄래. 응?
나는 그 일련의 대화 속에서 문득 야가미 토가와 나눈 대화를 생각해 냈다.
야가미 토가: 흑막은 저를 오래 살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지금도 저를 지켜보고 있겠죠. 왜냐하면 저는 알려져선 안 될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약 당신에게 이 진실을 전하려 한다면 전 그 자리에서 숙청될 테고요.
야가미 토가: 그러니 제가 할 말은 이게 전부입니다. 큰 그림을 보세요. 히무로 씨. 그게 제가 남길 말의 전부입니다.
그 대화는 해변의 세 번째 문에서 나온 뒤에 나누었다. 따라서 학급재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야가미 토가: 히무로 씨. 당신은 큰 그림을 볼 줄 아시는 것 같군요. 믿음이 갑니다.
야가미 토가: 역시 당신은 큰 그림을 볼 줄 아십니다.
하지만 어째서 그의 말이 마치 전조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그가 그 어휘를 거듭해서 말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이유가 학급재판과는 관련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의 말에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잘못 사용된 지성에 그를 대신하여 아까워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후루미나미 나몬: 내 살인에 야가미 토가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다들. 배추 도매상이 요리에 기여한 것은 배추를 가져다주었다 뿐이야. 내 요리에 그 사람 이름을 쓸 수는 없다고. 알아? 도시락에 수면제를 타고 언제 도시락을 칸나즈키에 방에 두며 언제까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내가 전부 설계했어. 장막 안에서 천하를 본 사람은 나야!
히무로 시라베: 야가미 토가가 너를 대신해 독과 수면제를 조달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발언이군.
후루미나미 나몬: 아. 이래서 교수들이 대학원생들 이름을 논문에 안 실어 주나 봐. 내가 이룩한 내 일인데 도움을 주긴 뭘 줬대?
히무로 시라베: 말장난은 마라. 재미없다. 나에게 들려줄 더 나은 소재는 무덤 안까지 가져갈 셈인가 보군. 네가 하기와라 우시오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지?
하기와라 우시오: 야 임마! 쟤한테 나를 비벼?!
하기와라 우시오는 기분이 상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후루미나미 나몬의 모욕을 당한 듯한 표정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화를 드러낸 몇 안 되는 순간 중에 하나였다. 그녀에게 있어서 하기와라 우시오라는 사람은 비극을 이해하지 못하는 삼류 코미디언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나에게는 그나 그녀나 뒤틀리고 재미없는 유머감각을 가진 것으로는 똑같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참아 줄게. 히무로. 아직 싸우기에는 멀었으니까. 아. 몸이 근질거려서 힘들어 죽겠지만, 서로 욕구를 참아 보기로 했으니까 어울려 줄게. 그리고 나은 점? 그건 네가 곧 알게 될 거야. 누구도 할 수 없는 위업을 나는 곧 달성할 거니까.
후루미나미 나몬: 그러니 히무로.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두 번째 걸음을 알려 줄게. 내 어머니는 나를 마음 한 켠에서 혐오해 왔어. 이게 두 번째야. 기억해. 이거 중요한 내용이야.
히무로 시라베: 관심 없다.
후루미나미 나몬: 내가 강조해 줄 때 듣는 게 나을 거야. 히무로. 그러다가 후회한다?
그러시겠지. 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뗐다. 마침 목이 빠져라 기다려온 자가 나타나기도 했다.
모노로그: 다들 논의는 잘 이루어지고 있나? 늦어서 미안하게 되었다.
모노로그가 우리들의 앞으로 솟아올라. 재판장의 자리에 섰다.
후루미나미 나몬: 어디 갔다가 이제 와?
모노로그: 나도 빨리 오고 싶었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쓸 만한 실험체를 찾는 것도 힘이 드는 일이거든. 겨우 찾아내서 먹이고 오는 길이다.
토키와 아유키: 자. 이제 때가 왔다. 이제 저 모르핀이라는 약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가려낼 수 있겠지!
토키와 아유키는 당당하게 소리쳤다. 사실 칸나즈키 시노부의 비명을 누구도 듣지 못한 시점에서 그것이 진짜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설령 그것이 가짜라 하더라도 그는 이미 후루미나미 나몬이 검정이라 진술한 바 있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의 여부는 그저 그의 기분에만 연관이 있었지 다른 무엇과도 이어져 있지 않았다.
모노로그: 자. 이것이 후루미나미 나몬이 가지고 있다던 '모르핀 염산염'의 사용 결과다. 다들 확인해 보도록.
모노로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재판장의 바닥에서 사족보행하는 작은 체구의 포유류를 하나 솟아올렸다. 흰색과 검은색의 털이 줄무늬를 이루고 있어 얼룩말 같은 인상을 주었다. 얼굴의 형태는 라쿤을 연상시켰으며 쭉 뻗은 몸의 길이는 대몰락 이전의 견종 닥스훈트와 유사했다. 그 생물의 이름을 나는 알고 있었다. 개너구리였다.
제츠보는 깜짝 놀랐다.
제츠보: 개너구리잖아?! 이게 얼마만이지? 진짜 오랜만에 봐!
토키와 아유키: 와. 귀여운데? 자고 있는 것 같아.
히무로 시라베: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재판석의 구조물을 넘어 재판장의 중앙으로 향했다. 개너구리는 바닥에 누운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모르핀 염산염이 개너구리에게도 통하던가? 포유류의 신경계를 공유하고 있으니 꼭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나는 개너구리의 몸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그 강아지 먹을 생각은 마.
하기와라 우시오는 웃으며 말했다.
히무로 시라베: 익지도 않은 개너구리를 어떻게 먹지? 기생충에 걸릴 생각은 없다.
하기와라 우시오: 뭣?
굳게 닫힌 눈꺼풀 안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금색의 땡그란 눈이 있었다. 눈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특이사항은 없었다.
주목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개너구리의 몸은 차갑게 식어갔다. 심장 박동도 호흡도 없었다. 개너구리는 이미 죽어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이게 무슨 뜻이냐. 모노로그.
이바라 쿠리스: 뭐야. 어떻게 됐어. 히무로? 그 깜찍한 동물이 어떻게 된 거야?
모노로그: 이것은 분명 수면제였다. 그래. 영원한 잠에 빠져버렸군. 이것으로 이 모르핀 염산염 아닌 약품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다들 확인했겠지?
후루미나미 나몬: 뭐…?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의 반응에 주목했다. 그 중얼거림은 그녀가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음을 암시했다.
모노로그: 비유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말해 주자면. 이것을 먹은 생명체는 무사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이바라 쿠리스: 주. 죽었다고?!
제츠보: 잠깐 기다려. 모르핀 염산염은 분명 수면제라고 하지 않았나? 나는 사실 저 튜브 안에 든 것이 모르핀 염산염이 아니라 그냥 식염수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어. 그런데. 수면제보다 더했다는 거야?
재판장 안에서 웅성거림이 퍼졌다.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의 행동을 주시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뭐야. 이러면 안 되는데…?
후루미나미 나몬이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모노로그: 성분은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모르핀 염산염은 아니다. 그리고 후루미나미 나몬이 제공한 약품이 어떤 방식으로든 체내에 들어갔다면. 그 생물은 저 개너구리 꼴이 되었을 것이다. 이해가 되었나? 부디 그랬길 바라지.
후루미나미 나몬: 잠깐. 주사액 안에 모르핀 염산염이 아니라 독약 같은 거라도 들어 있었다는 거야?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나몬. 네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것 같군.
후루미나미 나몬이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후루미나미 나몬: 뭔데? 지금 내게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거야. 히무로?
히무로 시라베: 너는 개너구리에게 물렸다. 단지 그것뿐이다.
모노로그가 공수한 개너구리는 곧 야가미 토가라는 사람의 메타포였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토끼를 죽인 개너구리를 솥에 넣고 삶으려 들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솥에서 개너구리가 튀어나와 후루미나미 나몬을 물었다.
그런 죽기 직전의 저항은 어떤 생명체도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몰랐다. 쥐도 구석에 몰리면 긴 앞니를 드러내 가죽 신발을 뚫는 법이었으니. 하지만 끓는 물을 뒤집어 쓴 그 기습 한 번을 위해 산 채로 삶아지는 것은… 자기파괴적인 일이었다. 물론 주인이 광견병에 걸려 죽는 것은 개너구리에게 통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겠지만, 그 계획을 위해 죽은 토끼의 목숨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히무로 시라베: 야가미 토가의 목적은 후루미나미 나몬을 처형시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칸나즈키 시노부의 살해에 가담했다.
눈먼 여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낯선 남자 :
그런 말을 하시는 게 두렵지 않나요?
눈먼 여인 :
아니, 괜찮아요.
옛날 일인걸요. 그건 다른 여자였어요.
그 시절 그 여자는 세상을 바라보며, 떠들고, 구경하며 살다가 죽었지요.
낯선 남자 :
그렇다면 힘겹게 죽었나요?
눈먼 여인 :
죽는다는 것은 죽어보지 못한 사람에겐 무서운 일이니까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죽을 때라도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안 되죠.
낯선 남자 :
그 여자가 당신한테 낯선 사람이었나요?
눈먼 여인 :
글쎄요. 이제 그렇게 되었군요.
죽음은 심지어 자식을 어머니에게서도 멀어지게 하지요.
하지만 처음 며칠 동안은 정말로 힘들었어요.
몸뚱어리 어디 한 군데 멀쩡한 데가 없었어요.
여러 가지 사물들
속에서 꽃피고 성숙하는 세계가
내게서 뿌리째 뽑혀나간 거지요.
(내 생각엔) 나의 심장까지도 말이에요. 나는
파뒤집힌 땅처럼 몸을 훤히 드러낸 채 누워,
신이 죽자, 텅 빈 하늘에서 구름들이 떨어지듯,
죽은 나의 두 눈에서 끊임없이 철철 흘러나오는
내 눈물의 차가운 빗물을 마셨지요.
나의 청력은 맑고, 모든 것을 향해 열렀어요.
나는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었어요.
나의 머리카락 위로 흐르는 시간의 소리를 들었고,
가냘픈 유리잔들 속에 울리는 정적의 소리도 들었어요.
그리고 나의 두 손 근처로 한 떨기 커다란 흰 장미의
숨결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어요.
그리고 언제나 나는 밤과 밤만을 생각하면서,
낮처럼 자라날 밝은 줄무늬를 보고 있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나는 아침을 향해 가는 것 같았어요.
(중략)
"일어나요. 제발."
'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 > 챕터 3'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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