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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3

더 단크 타워 챕터 3 - 22+7

by 도타싫어! 2023. 9. 10.

 

 

어느 순간부터는 춥지 않았다.

 

나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가야 하는 곳이 있다고 생각했다.

 

잔디가 내 발밑에서 사그락거렸다. 이윽고 도착한 곳에는 말라비틀어진 밤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잔디와 밤나무 말고 주변에는 어떤 풍경도 없었다. 열 걸음 너머로는 전부 백색이었다.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도,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다만 그 안에는 마법이 가득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밤나무의 밑에는 한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

 

"…벌써 온 거냐."

 

"모리."

 

모리는 여전히.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부끄러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런 사사로운 것을 느끼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나는 풀썩 그녀의 곁에 주저앉았다. 더 걸을 힘도 없었다. 나는 내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 기우뚱거림을 제어할 여력도 내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네가 원한 게 고작 이거란 말이냐? 네 모습을 봐라. 속이 곤죽이 되었군. 그런 꼴이 될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하나? 사랑이라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단 말이냐?"

 

나는 변명을 하고 싶었다. 나는 그저 생존을 위해. 영안로에서 나가지 못하니 내 본명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캐롤 씨를 부활시키려 했다는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영안로를 걸어서 나가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시도해보지도 않은 채 캐롤 씨를 부활시키기 위해 나아갔으니까. 그 핑곗거리를 얻자 마음이 한껏 홀가분해지기까지 했으니까.

 

"맞아. 모리. 내게는 중요했어.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나는… 살리고 싶었어."

 

"살려 낼 거야.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금기를 범하는 일이라도 좋아.

이런 식의 죽음은 받아들일 수 없어.

 

"이번만큼은 살려내고 싶었어. 내 시도가 결국 노바디에게도 인공지능에게도 몹쓸 짓일 뿐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나는 한 번이라도 아끼는 사람의 죽음을 되돌리고 싶었어…"

 

그녀는 내 추잡한 집착의 대상이자. 내가 구해내지 못한 수많은 인연들의 대변자다. 그것이 아브락사스다.

 

"…그 기분은 나 또한 알고 있다."

 

"입에 발린 말 할 거 없어… 우리가 서로 위로를 나눌 사이는 아니잖아."

 

"이건 위로가 아니라 솔직한 내 감상일 뿐이다.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너에게 좋은 말을 해줄 것 같나?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인 주제에?"

 

아.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머저리다. 이름 없는 남자. 네가 의도한 바는 아닐지라도 끝이 이렇게 된 이상. 전부 너의 부덕함이다."

 

"맞아. 바보같았지…"

 

이렇게 나는 죽어갔다.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너는 머저리다. 이름 없는 남자. 네가 의도한 바는 아닐지라도 끝이 이렇게 된 이상. 전부 너의 부덕함이다."

 

 

 

 

 

무로 시라베: 모노로그. 이번 재판에서 취조와 결투는 몇 번이나 가능하지?

 

모노로그: 지금까지는 분명 한 번이었다. 하지만… 살인이 두 번 일어났는데 그것들이 한 번이어서야. 힘들겠지?

 

하기와라 우시오는 모노로그의 말에 재빨리 반응했다.

 

기와라 우시오: 힘들어! 개힘들어! 야. 취조량 결투가 학급재판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나 해? 한 번씩만으로 어떻게 재판을 하냐!

 

모노로그: 이치에 맞는군. 그러나 결투는 악용될 여지가 다분한 바. 이 재판에서는 한 번으로 제약하겠다. 안 그래도 사람이 적은데. 두 명이나 음소거되어 다섯 명밖에 남지 않으면 많이 쓸쓸하지 않겠나? 그러니 취조는 두 번. 결투는 한 번으로 한다.

 

츠보: 애초에 우리는 서로 단편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있어. 나 같은 경우에는 카나리 케이토와 관련된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몰라. 결투는 확실한 상황에서만 사용하거나. 아예 사용하지 않는 편이 낫겠어.

 

무로 시라베: 칸나즈키 시노부 살인 사건의 용의자에게 쓰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야가미 토가 살인 사건의 검정은 이미 밝혀진 것 같으니.

 

키와 아유키: 아직 내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확실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다들. 히무로의 말에 넘어가선 안 돼.

 

바라 쿠리스: 증거가 없어…? 그럼 정말로. 네가 인공호흡을 하지 않으려 한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건데?

 

키와 아유키: 내가 말했잖아. 남자랑 입을 맞추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고! 게다가 그게 얼마나 더러웠는데. 너희가 자세히 보지 않아서 그래! 게거품에 커피 냄새에 겨자물이 섞여서 지독한 냄새가 났다고! 알싸하고 역한 거품이

 

기와라 우시오: 으아악! 거기까지! 진짜 듣기만 해도 더럽다 야!

 

하기와라 우시오 본인이 의도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는 토키와 아유키의 길어지는 변명을 적재적소에 끊어 주었다. 용의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포장하는 걸 내버려 두었다간 두껍고 터무니없이 커지게 되기 마련. 가장 나은 방안은 행동거지의 변명을 최대한 솎아내는 일이었다.

 

바라 쿠리스: 하지만 그렇게 더러웠다면 왜 후루미나미가 야가미에게 인공호흡을 했을까?

 

키와 아유키: 그야 후루미나미는 변태니까 그렇지!

 

루미나미 나몬: 못 하는 말이 없네? 나는 그저 사람을 살리고 싶었을 뿐이야. 토키와가 인공호흡을 못 하겠다고 했으니 내가 나선 거지.

 

토키와 아유키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다음에 꺼낼 말을 좀처럼 생각해내지 못했다.

 

키와 아유키: 무슨 헛소리야. 네가 사람을 살려…? 게다가 너. 맛을 보니 어쩌니 하면서 입술에 달려들었던 주제에

 

루미나미 나몬: 뭐야. 기억하네? 아이 부끄러워.

 

후루미나미 나몬은 본인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그녀의 말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인 사람들은 허탈함을 피할 수 없었다. 드디어 무언가 의미 있는 말을 하는가 싶어 귀를 기울여 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또 속았느냐는 조롱이었다.

 

바라 쿠리스: 게다가 너. 야가미가 독살당한 줄도 알고 있었잖아?

 

루미나미 나몬: 아. 맞아. 그랬지. 네가 야가미를 살리겠다는 헛수고를 하길래 내가 귀띔해 줬어. 너희 기억력이 생각보다 좋구나?

 

바라 쿠리스: 내가 바보인 줄 아니…? 그보다. 그래서 너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줄을 알고도 야가미한테 입을 맞춘 거라고?

 

후루미나미 나몬은 주섬주섬 작은 나무 피리를 꺼내더니 그것을 멋들어지게 연주했다.

 

마유즈미가 들었다면 분명 좋아했을 텐데. 그녀는 후루미나미 나몬의 바이올린 연주를 좋아했었지. 다시 들려달라 조르기까지 했다. 그때 우리는 후루미나미 나몬의 성정에 대해 조금도 몰랐다.

 

내가 다르게 처신했다면 상황은 지금과 달랐을까? 정말 내가 잘못한 것일까?

 

잡생각이 많이도 떠올랐다

 

츠보: 쟤 지금 뭘 하는 거지…?

 

루미나미 나몬: 너희랑 할 말 없다는 의사 표현이지. 역겨움 속에서 탄생하는 고상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과 무슨 말을 하리오?

 

기와라 우시오: 네 다음 커피겨자침보글보글하는 아가리에 키스하신 분.

 

루미나미 나몬: 점막은 안 닿았으니까 키스가 아니야. 나와 히무로가 일전에 나눈 것이야말로. 키스라 부를 수 있지.

 

하기와라 우시오가 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내 쪽으로 입맞춤을 쏘아 보냈다.

 

무로 시라베: 입 닥쳐라.

 

기와라 우시오: 에…? 너희 둘. 그 정도로 찐하게 했단 말이야…?

 

나는 그걸 해명하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것이 화두에 오를 대로 오를수록 후루미나미 나몬은 기뻐할 테니까. 점막은 닿지 않았다. 내가 재빠르게 밀어내었다 따위의 공방을 이을수록. 후루미나미 나몬은 점수를 벌고 있는 셈이었다. 그것이 음해하는 자들의 승리 전략이다.

 

무로 시라베: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주제로 흘러들어왔지? 지금 논해야 할 것은 토키와 아유키가 야가미 토가를 독살했느냐의 여부다. 오직 정황 증거뿐이고 물적 증거는 없다 이건가?

 

키와 아유키: 그래. 증거를 가져와 봐. 그게 없는 이상 너희들의 주장에는 아무런 효력이 없어. 나 말고는 할 사람이 없다고? 그냥 너희가 못 찾은 거겠지.

 

물론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스트리크닌이 온전히 들어있는 병에 토키와 아유키의 지문이 찍혀 있는 것도 아니니. 그가 부인할 수 없을 정도의 물적 증거를 제시할 방도는 없었다.

 

기와라 우시오: 그러면 우리가 물적 증거만 가지고 오면. 너는 죄를 인정하겠다 이거지?

 

키와 아유키: 증거만 있다면야… 잠깐. 그 말의 본의를 모르겠는데.

 

토키와 아유키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가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기와라 우시오: 내 말이 맞잖아. 증거가 없으니까 네가 인정을 못 하는 거면. 증거가 있을 경우에 네가 죄를 인정하겠다고 한 거 아니야? 너 지금 분명 증거만 있다면야… 까지 말했다?

 

키와 아유키: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래. 증거를 가져와. 그게 아니고서야 너희는

 

그야 혼란스러울 만도 하겠지.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을 테다. 그에게는 더 이상 자신을 변호할 수단도 없었다. 모든 정황이 완벽했다. 아쉽게도 토키와 아유키는 남을 속이는 일에 어색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증거 만능주의로 자신의 견해가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하기와라 우시오는 그가 잘못된 골목에 들어가게끔 유도해 냈다.

 

무로 시라베: 저런 말을 하는 자들이 살인자다.

 

나는 언총을 내 과녁에 대고 당겼다. 그 직후에 누군가가 또다시 언총을 쏘았다. 글자가 두 개 떠올랐다.

 

토키와 아유키의 실언.

토키와의 실수.

 

기와라 우시오: 뭐야. 우리 똑같은 생각을 했나 본데?

 

무로 시라베: 이 시점에서야 토키와 아유키의 살인을 계속 논하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라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키와 아유키: 실수?! 무슨 실수!

 

무로 시라베: 칸나즈키 시노부가 살해당한 시각은 오후 7시다. 야가미 토가가 토키와 아유키와 교대했을 시간이 오후 11시니. 오후 9시부터 11시까지는 야가미 토가가 감시했을 것이며 오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 후루미나미를 감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토키와 아유키는 동요의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분개해야 할지 계속 그 사실을 캐내야 할지조차 결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주먹을 불끈 쥔 채 나와 다른 이들의 얼굴을 빠르게 돌아보기만 했다. 그것 말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다행히도. 그가 해야 할 일은 다른 이가 대신했다.

 

루미나미 나몬: 질문 있습니다. 초고교급 프로파일러 히무로 시라베 씨! 토키와 아유키 씨가 저지른 실수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요! 대답 가능하십니까!

 

무로 시라베: 소품 들이대지 마라. 나는 초고교급도 아니다.

 

나는 내 얼굴을 찔러대는 마이크를 밀어냈다.

 

기와라 우시오: 저는 그의 매니저예요! 제가 답변드리겠습니다.

 

무로 시라베: 저 바보짓에 어울려줄 생각인가?

 

기와라 우시오: 아. 쏘리. 꽁트를 받아주는 게 내 버릇이야. 뭐든 다 받아주는 건 나쁜 버릇이고… 아무튼. 토키와의 말실수는 증거가 나오기만 하면 인정하겠다는 저 말투 자체야.

 

키와 아유키: 그게 왜 잘못되었다는 건데…?

 

츠보: 왜냐하면.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니기 때문이지.

 

그것은 정말 간단한 이치였다.

 

츠보: 네가 정말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면 증거가 나오면 죄를 인정하겠다는 말은 나올 수 없어. 너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는데 증거가 나오면 내가 살인자다? 그런 경우에는 증거가 잘못되었다고 항변해야 마땅한 것을. 증거 나왔으니 할 말이 없어졌다고 하는 건 살인자의 행동이야.

 

키와 아유키: 아니. 그건

 

토키와 아유키는 할 말을 잃었다. 더 이상 그는 어떻게 둘러댈 방도가 없었다.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하기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살인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그것을 들켜 평판에 흠이 가거나 고립될 수 있음은 살인 이후에 받을 처벌만큼이나 살인자들을 짓누르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야가미 토가 살인사건의 검정은 처형당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스트레스와 피로를 계속 견뎌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 그가 버텨온 것도 용하다 보아야 했다.

 

바라 쿠리스: 하지만 정말 토키와라고?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칸나즈키는 우리와 척을 진 적이 있고. 분명 오락가락하는 면이 있으니 그랬다 쳐도. 왜 야가미를 죽일 필요가 있어…? 토키와랑 나의 싸움을 중재시키고 어느 정도 토키와에게 힘을 실어주기까지 한 게. 야가미였는걸.

 

정치 구조가 살인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었다. 권력에 조금의 관심도 없는 사람들은 드물고 생사가 걸린 상황에 누가 주도권을 쥘지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바라 쿠리스: …너무 확실한데.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돼. 이건 정말 제 살 갉아먹는 일이잖아. 야가미는 무슨 네 비서라도 되는 양 공손했다고!

 

루미나미 나몬: 마치 사자가 하이에나에게 고개를 숙이는 듯한 모습이었지. 왜 토키와보다 훨씬 나은 역량을 가진 이가 열등한 자에게 고개를 조아린 걸까?

 

나리 케이토: 꼭 야가미가 그러기만 한 건 아니야.

 

카나리 케이토의 말에 토키와 아유키는 관심을 보였다. 그는 신경을 안 쓰는 채 했지만 나에게는 그의 귀가 쫑긋 서는 것이 느껴졌다.

 

나리 케이토: 한 번 야가미가 칸나즈키와 나를 찾아왔어. 이 살인 게임의 진정한 목적이나 우리의 성장에 대한 장광설을 털어놨는데… 그때 야가미가 말했어. 토키와만큼은 믿지 말라고. 후루미나미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키와 아유키: …나야말로 너에게 믿음이 가지 않는걸.

 

나리 케이토: 믿고 안 믿고는 너희 자유야. 하지만 야가미가 바보냐? 머리 하나는 잘 돌아가는 놈이었잖아. 걔는 토키와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어. 불필요한 갈등이 생기지 않게끔 중재해 온 거지. 막말로 리더 자리에서 탄핵했다가 이번에는 탑에 불을 지를지 누가 아냐고.

 

카나리 케이토가 말하는 와중. 토키와 아유키는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키와 아유키: 흐…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다고. 언제나 알고 있었어

 

무로 시라베: 이것으로 야가미 토가의 살인범은 토키와 아유키임에. 모두 동의할 수 있겠지?

 

키와 아유키: 아니야.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토키와 아유키는 점점 내려가던 고개를 홱 젖혀 올렸다. 말투는 지나치게 침착했기에 인위적인 인상을 주었다. 토키와 아유키는 정말로 억울해 보였다.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데에 성공한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경지보다 정신병에 오히려 가까운 현상이었다.

 

키와 아유키: 그것은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야. 내가 저지를 이유가 없다는 걸 너희도 알잖아. 야가미는 내 부관이었어. 내 통제를 따랐고 일을 완벽에 가깝게 수행해 왔어. 죽여서는 안 될 사람이지.

 

키와 아유키: 결국 진실은 밝혀질 거야. 검정이 누구이든 간에 자신의 죄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을 거라고. 나를 믿어 줘.

 

기와라 우시오: …이쯤되면 좀 역한데.

 

하기와라 우시오는 자신의 코를 틀어막았다. 그의 말에서 틀린 점이 있다면 토키와 아유키가 줄곧 역했다는 점이다. 자신의 행동과도 죄와도 마주하지 않으려 하는 뻔뻔함은 그저 나약함에서 기인한 것이고. 나약함 그 자체에는 어떠한 미덕도 없었다.

 

츠보: 토키와. 대체 왜… 그런 거야? 우리는 이제 다 알았으니 대답을 해 봐. 살인을 통해 얻을 이득이 없다는 건 너도 알았잖아. 아니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따로 있어. 정치학적으로 말이 안 된다.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떠나서… 

 

츠보: 너는 사람을 죽일 만한 사람이 아니었잖아.

 

토키와 아유키는 몸을 움찔 떨었다. 의표를 찔린 듯했다.

 

츠보: 네가 완벽했던 적은 없어. 그렇지만 이 탑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완벽은커녕 불안정한 결함품들이잖아. 오작동하고 아무리 말려봤자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것들이야.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잖아… 그런 사람들을 최대한 잡아두려고. 또 지키려고 했잖아.

 

키와 아유키: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이야. 왜 그때의 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투로 이야기하는 거야?

 

츠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네가 사람을 죽이게 된 건지 모르겠어. 나를 믿을 수 없다며 네가 내 감시역으로 붙었을 때도 너는 나를 경계하지 않았는데… 기억나. 토키와? 첫 번째 살인이 나기도 전의 일이야… 

 

키와 아유키: 기억하지. 그리고… 내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

 

무로 시라베: 사건과 관련 없는 이야기다. 토키와 아유키가 어떻게 스트리크닌을 입수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으나. 지금 당장 밝혀내기에는 어려운 인과 같으니 당장은 칸나즈키 시노부의 살인 사건으로 넘어가는 편이 나아 보인다.

 

사실 그 사안은 토키와 아유키가 가장 먼저 꺼냈다. 좁혀 들어오는 수사망을 느끼고 그 자신이 그물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막을 펼친 것이었다. 토키와 아유키 본인이 사실상 살인범으로 결정된 채 끝나는 것을 그가 납득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불복해 봤자 돌아오는 것이 그에게 유리할 리 없었다. 아마 스트리크닌의 입수 경로를 알아낼 때까지 멈추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기에. 그는 내 말에 동의하기로 했다.

 

기와라 우시오: …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 이 탑에 처음 왔을 때는 아주 잠시나마. 다들 똘똘 뭉쳐 다녔는데 말이야.

 

무로 시라베: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개인 단위로 생긴 것이 아니니까.

 

츠보: 하기야 그렇지. 카를 탓할 순 없으니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칸나즈키를 누가 죽였는지를 이야기하는 게 낫겠어.

 

카나리 케이토는 그 토의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나리 케이토: 좋아. 내가 우선 칸나즈키의 목을 처음 발견했을 때는

 

무로 시라베: 그전에 잠깐. 너희 모두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

 

나는 카나리 케이토의 말을 끊었다.

 

나리 케이토: 중요한 말이어야 할 거야. 지금까지 헛소리를 나누느라 시간이 너무 갔어.

 

무로 시라베: 네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장담컨대 헛소리는 아닐 것이다.

 

나는 해야만 하는 말을 했다.

 

무로 시라베: 미리 말하자면. 나는 칸나즈키 시노부의 살인은 후루미나미 나몬 아니고서야 누구에게도 불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지금부터 내가 하는 모든 추리와 논리의 흐름은 후루미나미 나몬이 검정이라는 전제 하에 진행될 것이다.

 

나리 케이토: …그 말. 진짜야?

 

츠보: 역시 저 여자인 건가. 남은 사람들보다는 저 여자일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 같긴 하지만

 

루미나미 나몬: 나를 의심하는 건 자유지. 하지만 지금 히무로가 나를 지목하는 일에는 개인적인 감정이 다분해 보이는 걸.

 

기와라 우시오: 감정? 아직도 히무로를 모르냐? 얘한테는 그런 게 없어.

 

루미나미 나몬: 너야말로 모르나 본데. 그에게는 감정이 없는 게 아니야. 감정을 남들이 납득할 만한 외면적 형태로 드러내는 게 어려워서 좀처럼 하지 않을 뿐. 그의 내면에서는 아주 차갑고도 진해서 우리가 헤아리기도 어려운 감정들이 흐르고 있어. 그것도 늘상.

 

무로 시라베: 누구에게나 사고의 패턴이 있다. 누군가는 사람을 해치는 데에 거리낌이 없지만 누군가는 큰 거부감을 느끼며. 자신을 잔인하다 여기는 사람도 막상 살생의 상황이 닥치면 굳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 잔인하며 전문적인 솜씨로 이루어진 살인은. 후루미나미 나몬을 제외한 그 누구의 것과도 부합하지 않다.

 

루미나미 나몬: 쟤는 내가 자기를 너무 잘 읽으면. 무대응으로 일관한다? 귀엽지?

 

무로 시라베: 내가 확실하지 않은 사실을 단정하고 있다 느낄 수 있지만. 지금 당장 검정에게 투표해야 한다고 하면 너희들은 누구를 지목할 테지? 이 살인을 어떻게 했는지 결국 풀지 못해서 아무런 근거 없이 한 명을 지목해야 한다면. 누구를 가리킬 것이냐고 묻는 거다.

 

나리 케이토: …나는 후루미나미. 저 여자로 하겠어.

 

카나리 케이토는 후루미나미 나몬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키와 아유키: 대체 언제부터 학급재판이 실질적 증거 없이 정황만으로 모든 걸 결정하는 곳이 된 거지? 후루미나미 말고 검정 후보는 있잖아. 공교롭게도 그의 살인에서도 피해자는 목에 상처를 입었고 피가 낭자했지. 나는 그 현장에 있었어.

 

토키와 아유키는 방아쇠를 당겼다. 야가미 토가.

 

루미나미 나몬: 또 나를 실망시키네… 시시한 놈. 아. 재미없어. 재미 없어. 내가 이런 걸 왜 계속 보고 있어야 하는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이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의 말에 신경을 쓰진 않았다.

 

무로 시라베: 네가 야가미 토가를 유력한 검정으로 지목한 이유는 무엇이지?

 

키와 아유키: 어. 글쎄. 뭐라고 할까. "이력"은 어때? "과거"는? "행보"? 

 

그는 비꼬는 기색을 한껏 담아 말했다. 그는 스스로를 찔러대고 있었다. 결국 그 또한 정황 증거밖에 없었으니까.

 

키와 아유키: 또 야가미는 칸나즈키의 괴력에 맞설 수 있어. 제츠보 정도의 힘은 아니라서 애를 먹었을 수는 있지만 야가미의 체구는 칸나즈키의 것보다 확실히 커. 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두 입장에서는 야가미가 좀 더 유리해.

 

무로 시라베: 그건 틀렸다.

 

토키와 아유키는 코웃음을 쳤다.

 

키와 아유키: 다윗과 골리앗 설화를 너무 감명 깊게 읽었나 봐. 히무로. 칸나즈키가 야가미보다 더 유리했다고 생각해? 그래서 칸나즈키가 야가미에게 져서 살해당하지 않았을 거라고.

 

무로 시라베: 첫 번째. 힘겨루기가 가능한 상황이라면 애초에 살인은 실패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너희 모두가 탑에서 자신과 동등한 힘을 가진 자에게 습격을 받는다면. 묵묵히 팔을 부여잡고 낑낑 줄다리기나 하고 있을 것 같나? 당장 비명을 지르는 것이 본능과 논리 모두에서 유력한 판단이다.

 

기와라 우시오: 안 그래도 사람이 부족해 극도로 조용한 탑 안에서 비명이 울리지 않았다는 건. 애초에 칸나즈키가 검정에게 저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거 아니야?

 

키와 아유키: 입을 막았을 수도 있잖아? 바로 그럴 때에 야가미의 완력이 큰 일을 하는 거지. 칸나즈키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완력이

 

무로 시라베: 그건 틀렸다.

 

이제 입을 막지 않았다는 뜻이냐고 묻겠지.

 

키와 아유키: 뭐가 틀려? 검정이 칸나즈키의 입을 막지 않았다는 거야?

 

무로 시라베: 칸나즈키 시노부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완력이라는 표현이 틀렸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칸나즈키 시노부를 제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리 케이토: 그게 무슨 소리야. 칸나즈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나 보지? 사람 두 명을 질질 끌고 다닐 수 있는 힘이야!

 

츠보: …칸나즈키가 약화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야?

 

나리 케이토: 약화? 무슨 약화?

 

제츠보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말하자. 카나리 케이토는 본인이 보였던 확신은 온데간데없는 채 질문을 던졌다.

 

츠보: 내가 기억하기로는 카나리 네가 신체를 다시 만들어서 수호령을 복원했다고 들었는데… 나는 영안로에서 나온 이전보다 몸이 약해져 있는 것처럼. 복원이 완전하지 않아서 칸나즈키가 이전보다 약해졌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냐는 거야.

 

기와라 우시오: 칸나즈키의 수호령이 신체의 상태에 따라서 달라져? 이바라. 아는 거 있어?

 

바라 쿠리스: 사실대로 말하자면 전혀 모르겠어. 애초에 칸나즈키의 신체에 대해 안 것도 신체가 탄 직후였으니… 어떻게 작용하는지 자체는 나도 몰라.

 

나리 케이토: 나는 알아. 그리고 확신할 수 있어. 나는 신체를 누구보다 완벽하게 만들어냈어. 칸나즈키 걔가 본인 입으로 그랬다고. 정말 헬로 키티다. 똑같이 만들어 줬다면서

 

기와라 우시오: 헬로 키티? 웬놈의 헬로 키티?

 

나리 케이토: 뭐긴 뭐야. 말 그대로 헬로 키티지. 걔가 가지고 있던 인형이 신체 역할을 했어. 얼마 안 가 걔는 정말 수호령을 되찾았다고!

 

무로 시라베: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판단했지?

 

카나리 케이토는 얼굴을 구겼다. 내 질문의 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다 그는 내가 묻는 말에 그대로 답하기로 한 듯. 옛날 일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나리 케이토: 늘 하던 것처럼 가부좌 틀고 위엄 있는 목소리. 그거 있잖아. 깊은 목소리를 내는 거. 그게 판단 근거지.

 

무로 시라베: 이 자리에서 묻지. 칸나즈키 시노부가 무력을 발휘하는 모습은 누구도 보지 못한 건가?

 

나는 충분한 시간을 주었으나 그런 모습을 목격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 듯했다. 카나리 케이토마저 고개를 저었다.

 

무로 시라베: 칸나즈키 시노부는 괴력을 구사할 수 있었으니 그에 맞설 역량을 가진 유일한 자. 야가미 토가가 검정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칸나즈키 시노부의 숙소 전경이다.

 

나는 다이얼로그로 찍어 두었던 사진을 토키와 아유키에게로 가져갔다. 영정 사진이 스쳐 지나갔다. 마유즈미. 미도리카와 아쿠토. 야가미 토가. 그 끝에 토키와 아유키에게로 갔으나 그는 사진이 달갑지 않은 듯 몸을 미세하게 비틀어댔다.

 

키와 아유키: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야?

 

무로 시라베: 수사 과정이자 다른 이들에게 정보를 공유하는 일일 뿐이다. 어떻게 생각하지?

 

토키와 아유키는 줄곧 못마땅한 기색을 냈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다.

 

키와 아유키: 피가 마구 튀어 있는 것 말고는 잘 모르겠는걸.

 

무로 시라베: 정확하게 봤다. 너희들 모두도 이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칸나즈키 시노부의 숙소에는 이 핏자국 말고는 특이사항이 없었다. 카나리 케이토가 배급한 도시락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키와 아유키: 그러니까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니까.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준다? 보여줘서 더 얻을 게 있나 싶지만.

 

토키와 아유키는 사진을 들고 이바라 쿠리스의 지정석으로 걸어갔다. 이바라 쿠리스는 사진을 건네받고서 몇 초동안 그것을 응시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찾아냈다.

 

바라 쿠리스: 왜 이렇게 깨끗하지?

 

키와 아유키: 깨끗하다고? 그 피칠갑이?

 

바라 쿠리스: 깨끗하다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야. 아. 여기 있어. 제츠보.

 

그 다음에는 제츠보가 사진을 받았다. 제츠보 또한 별반 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츠보: 육탄전의 흔적이 없잖아. 너무 깨끗해. 정말 완력이 뛰어난 두 사람이 싸웠다면 칸나즈키의 숙소는 조금 더 어지럽혀져 있어야 해.

 

기와라 우시오: 뭐야. 진짜네? 이거 봐봐. 벽에 피도 안 튀었어. 이 웅덩이 하나 말고는 주변에 튄 게 없어.

 

키와 아유키: 야가미가 몸싸움을 한 뒤에 치웠으리라는 생각은 못 해봤어?

 

무로 시라베: 육탄전의 흔적이 없고, 칸나즈키 시노부가 괴력을 발휘했다는 걸 본 사람도 없다. 심지어 신체를 다시 만든 카나리 케이토조차 그런 장면은 본 적이 없다. 일련의 상황에서 나는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칸나즈키 시노부가 수호령을 되찾았다.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칸나즈키 시노부는 봉문 했다.

 

이 괴리를 설명할 방법은 칸나즈키 시노부가 자신의 힘을 섣불리 사용할 생각이 없었던. 천인이라는 경우뿐이다. 나는 대신 다른 것을 보았다. 그것을 떠올리고 나는 언탄을 쏘았다.

 

무로 시라베: 애초부터 칸나즈키 시노부의 수호령이 회복되지 않았을 가능성이다.

 

수호령의 부재.

 

 

 

 

 

"인공지능에게는… 어떻게 사과해야 하지…"

 

내가 내던진 사람인데… 내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인데… 그걸 해주지도 못할뿐더러. 혼자 멋대로 죽어 버린다니

 

"죽음으로 사죄해라."

 

"작별 인사도 못 하고 죽는 걸 사과하려는 건데. 무슨…"

 

아득해지는 정신을 터져 나온 실소가 부여잡았다. 이런 바보 같은 트집 잡기와 불합리한 비난이야말로 나와 모리 사이에 이루어졌던 대화 전반이었다.

 

"뭐가 웃기지?"

 

"네 말이 웃기고 또… 내가 너를 싫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그리워했다는 게 웃겨서 그래. 그 당시에는 네가 죽었으면 했지만, 여기에 와 보니 너도… 그런 꼴을 당해 마땅한 사람은 아니었어. 카이다 쿠로하도… 예전의 언젠가는 그랬겠지…"

 

"나는 너를 싫어하기만 했다. 나는 그런 짓을 당해 마땅했지. 살인자니까. 카이다 쿠로하도 그렇게 될 만한 일을 많이도 했지. 나를 바다에 집어던지고 손 절반과 발목 하나를 잃게 만들었단 말이다. 그 괴물을 해치운 건 아주 잘한 일이다. 아마 네가 한 일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일 테지. 칭찬받아 마땅하다."

 

"한 마디도 안 지네. 진짜…"

 

하지만 그 익숙한 설교는 내가 살아있을 때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분명 짜증 나는 인간이었고 언제나 나를 깔보았지만, 그녀는 분명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기억 한 켠의 자리를 차지할 가치는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생전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이 너일 줄이야 몰랐는데…"

 

"네가 나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나타난 것은 아니다. 나는 영혼의 일부일 뿐이니까."

 

"뭐라고…?"

 

"네가 읽은 언탄 말이다. 재단의 언탄이 작동하는 걸 보지 않았었나?"

 

읽어라.

모리는 자신의 손에서 회갈색의 언탄을 건넸다.

 

"…좀 많이 다른데. 재단의 언총은 명령하는 기능에 치우쳐져 있단 말이에요. 총 내부에서 샤이닝을 정제하여 쓰는 것만 비슷하지…"

 

"그렇다고 네게 영향을 끼칠 만큼 크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네 목숨이 꺼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나는 너와 마주친 것이지."

 

"샤이닝의 정제하지만… 내가 읽은 언탄은 하나가 아닌데?"

 

"네가 나를 기억 한 켠에 늘 남겨두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이름 없는 남자…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말하며 모리는 나를 보았다. 그 표정에는 나를 책망하고 꾸짖는 기색이 가득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조금의 안타까움도 엿볼 수 있었다.

 

"사랑과 애착은 아편일 뿐이라고 분명 내가 말했을 텐데. 왜 내 말을 새기지 않았지?"

 

"그것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어. 나는 물론이고 카이다 쿠로하. 심지어 너마저도 자유롭지 못했잖아…"

 

"…동의하지 않을 수 없군."

 

나는 다시금 실소를 터뜨렸다. 저렇게 자기 잘못을 분명히 인정하는 것이 분명 모리의 미덕 중 하나였다.

 

실소에 피가 같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무로 시라베: 칸나즈키 시노부에게 조금의 복수심조차 없다고 생각하나? 누군가의 손에 의해 자신이 줄곧 가지고 있던 무언가를 잃었는데?

 

무로 시라베: 힘을 되찾았다면 당연히 사적 보복이 동반되어야만 했다. 꼭 육체적일 필요는 없지. 내 추측이지만 칸나즈키 시노부는 이후 토키와 아유키를 찾아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언제 허장성세가 들킬지 모르는 이상 관대한 체를 하고 봉문 하는 것이 안전할 테니. 그렇게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아낸 거지.

 

키와 아유키: 아니. 그럴 리가…

 

무로 시라베: 간담이 서늘하지 않았나? 이제 무슨 일을 당하는 것인지 최악의 경우를 마구 생각해 두었을 테지. 하지만 상대는 대응하지 않았다. 그것 말고 해답은 없다.

 

나리 케이토: 헛소리. 헛소리! 헛소리야!

 

카나리 케이토가 수호령의 부재라는 글자에 언탄을 쏘았다. 그의 문구는 주장을 산산조각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칸나즈키의 행동.

 

나리 케이토: 만약 그랬다면 나에게만큼은 이야기했을 거야. 그런 바보 같은 주장은 들어줄 가치도 없어! 칸나즈키의 수호령을 완벽하게 돌아왔다고! 내가 똑똑히 기억해. 그 목소리를!

 

무로 시라베: 만약 그랬다면.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야 탑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겠지. 애초에 왜 너는 괴력 행사를 요청하지 않은 거지? 수호령의 부활을 대가로 네 경호를 요청하지 않은 건가?

 

카나리 케이토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매수하는 관계로밖에 타인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힘이 다 돌아온 게 맞냐며 쇠파이프를 던져 마땅했다.

 

나리 케이토: 안 그랬어.

 

그 증언은 믿음직스럽지가 않았다. 애초에 나는 거의 모든 증언을 어느 정도 의심하지만. 카나리 케이토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는 것은 더욱이 의심할 여지가 있었다.

 

무로 시라베: 어째서?

 

나리 케이토: 왜냐하면… 영영 헤어진 줄 알았던 사람과 재회한 거에 대고 괴력이나 보여달라고 할 순 없으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기와라 우시오: …왜 상식적인 대답이 돌아오지? 아니 잠깐. 정말 그 이유가 다야? 예의가 아니라서?

 

나리 케이토: 또 칸나즈키를 믿었으니까. 칸나즈키가 돌아왔다고 했는데 그걸 의심할 이유는 없잖아. 애초에 나는 이 탑에 힘이 필요하지 않게 되기를 바랐어. 내 계획대로라면 칸나즈키에게 힘이 있든 없든 그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정말… 정말 잘 되고 있었는데

 

바라 쿠리스: 저런. 카나리

 

카나리 케이토의 입이 안쪽으로 오그라들었다. 그는 언총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회중시계는 계속 똑딱거리고 있었지만 그는 시계를 제어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카나리 케이토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금 소리쳤다.

 

나리 케이토: 하지만 걔가 왜 그렇게 했겠어! 그냥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될 일이었잖아. 수호령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러니 신세 좀 지겠다고! 애써줬는데 아쉽게 됐다고 말하면 됐잖아! 누가 와도 혼꾸멍을 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내버려 둔 거란 말이야…! 바보 같은 게!

 

바라 쿠리스: …너를 생각했던 거 아닐까.

 

나리 케이토: 뭐?!

 

바라 쿠리스: 네가 열심히 뜨개질을 해서 줬다며. 다시 신체를 만들어주려고 했던 네 노력이. 고마웠던 건 아닐까? 그래서 힘이 없으면서도 거짓말을 했던 거야. 네가 헛수고를 했다고 여기지 않게끔

 

카나리 케이토는 문득 자신의 지정석 옆에 있는 칸나즈키 시노부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 모노로그는 탑에서 죽은 자들의 사진을 농락했는데. 칸나즈키 시노부의 영정에는 분홍색의 음양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나리 케이토: …바보. 다 바보야. 바보들. 사실대로 말하지. 왜 그랬어. 대체 왜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손익과 거래 관계 자체만을 고려하던 카나리 케이토와 한 편이 되기 위한 칸나즈키 시노부 나름대로의 전략일지도 몰랐다. 수호령이 없으나 있는 체를 하여 카나리 케이토가 자신을 후원하게 만드는 것.

 

하지만 그것은 내 추측에 불과했고. 또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이미 죽었으니 알아낼 방법도 없었다.

 

나리 케이토: 망할. 내가 제츠보를 멈추지만 않았어도. 그러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어느새 훌쩍이고 있는 카나리 케이토를 뒷전으로 했다.

 

키와 아유키: 내가 고작 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거라고? 망할 소금물에 십자가에 콩까지 챙기고 다녔는데…?

 

무로 시라베: 이 가설대로라면 많은 의문이 해결된다. 왜 칸나즈키 시노부는 자신의 영향력을 더 발휘하지 않았지?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밖에 나오지 않은 것은 카나리 케이토를 지지하는 행동임과 동시에 실제로 취약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 일종의 허상성세였다.

 

무로 시라베: 그러니 칸나즈키 시노부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야가미 토가뿐이 아니다. 다른 이들도 있지. 그러니 다뤄야 할 쟁점은 아무리 급작스러운 습격일지라도 비명을 지를 틈이 조금이라도 없는 게 가능한가이다.

 

바라 쿠리스: 그게 가능하기는 해?

 

무로 시라베: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비명 한 마디도 지르지 못하고 살해당하는 사람은 그리 희귀하지 않다. 허나 그런 경우의 대부분은 피해자가 범인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가 기습당하는 상황이다. 조명이 켜져 있는 칸나즈키 시노부의 본인의 숙소에 누군가가 침입했다면 칸나즈키 시노부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지.

 

기와라 우시오: 범인은 칸나즈키를 등 뒤에서 찔렀어. 한 여기 정도? 왜 여기를 찔렀는지 짚이는 부분이 있는 사람? 그것도 왜 등 뒤에서 찔러야 했는지

 

하기와라 우시오는 자신의 두 번째 갈비뼈 정도의 부근을 쿡쿡 찔렀다. 나는 다시금 언탄을 쏘았다. 신장의 자상.

 

무로 시라베: 신장을 찌른 것이다.

 

나리 케이토: 신장…? 그거 하나 없이도 살 수 있는데. 찌르는 데에 의미가 있나?

 

상식과 동떨어진 발언을 뒤로하고 나는 신장을 찌르는 것이 왜 치명적인지 설명했다.

 

무로 시라베: 신장은 살아남기에 필수적인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그렇기에 많은 혈관과 신경이 지나다니지. 찌르기만 해도 출혈량이 크고 통증이 극심해 즉시 몸이 마비된다. 도검류를 써서 노릴 수 있는 급소 중에서 콩팥은 심장만큼이나 치명적이라고 배우기도 했다.

 

기와라 우시오: 그걸 무로형이 어찌 아시오?

 

츠보: 그 지점만 정확하게 노리는 게 그리 쉬울 것 같지는 않아. 등을 찌르고 보니 얻어걸려서 신장을 찔렀을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은데.

 

나리 케이토: 얘 말이 맞아. 게다가 뒤를 어떻게 노렸겠어? 문을 따고 들어가? 말이라도 쉽지 몇 초동안 철컥철컥 따고 있는 걸 멍하니 보고 있을 수는 없어.

 

루미나미 나몬: 이번에야말로 불가능 살인인가 봐.

 

슬쩍 말하며 후루미나미 나몬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나를 비웃었다. 조금 더 잘해보라며 나를 재촉하는 행동이었다. 나는 그쯤 미움이라는 감정이 낯설어졌다. 한 번 누군가에게 그것을 가지니 그 날카로움이 어디에도 비할 데가 없었다. 순식간에 솟으며,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점점 그게 당연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는 어떻게든 개인적인 사고에 말려들지 않으려 했다. 나를 흐트러뜨리는 것이야말로 후루미나미 나몬의 노림수였다. 아무리 미워도 결투가 있었기에 나는 그 분을 삭일 수 있었다.

 

무로 시라베: 무엇도 불가능하지 않다. 그 무엇도.

 

루미나미 나몬: 하지만 내가 사람을 죽이는 게 가능했다고? 내가? 묶여 있었는데? 야가미와 토키와가 나를 감시해 왔고!

 

확인하지 못한 것이 너무도 많았다. 탑에 사람이 몇 없었고 목격자도 없었다. 그래서 탑에 있던 이들 중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아는 이들은 극소수가 되었다.

 

무로 시라베: 여기서 묻고 싶은 게 있다. 카나리 케이토. 칸나즈키 시노부에게 몇 개의 도시락을 보냈는지 기억하고 있나?

 

키와 아유키: 그걸 어떻게 기억하겠어. 히무로. 매 끼니마다 보냈는데…

 

나리 케이토: 횟수? 훌쩍. 당연히 기억하지. 아홉 번.

 

키와 아유키: …….

 

카나리 케이토는 그 사실을 우쭐거리지도 않았다. 그저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그는 토키와 아유키의 반응에 오히려 멋쩍어했다. 그의 말에는 여전히 훌쩍여댔다.

 

나리 케이토: 매 끼니니까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을 삼 일 했어. 킁. 아침에 나랑 칸나즈키가 식당으로 가서 보급 계획 설명했잖아. 그때부터 우린 따로 도시락 배달시켜 먹고 있었어.

 

무로 시라베: 도시락통은 총 열 개가 있었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카나리 케이토의 지정석으로 걸어가 그에게 사진을 넘겼다. 그는 아리송한 눈빛으로 사진을 뚫어져라 보았다.

 

나리 케이토: 이거 진짜 맞아? 왜 도시락통이 열 개야? 나는 아홉 개 보냈다니까.

 

무로 시라베: 그럼 나머지 한 개는 다른 사람이 보낸 것이겠지? 정기적으로 도시락을 전달하는 시간보다 5분 먼저 전달하면. 칸나즈키 시노부의 입장에서야 무엇이 카나리 케이토가 보낸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섭취했을 것이다. 혹시 칸나즈키 시노부에게 매번 배급을 가기 전 연락을 줬나? 그랬다면 칸나즈키 시노부 또한 분간을 할 수 있었을 터.

 

카나리 케이토의 얼굴이 굳었다. 그것만으로 대답이 되었다.

 

나리 케이토: 독에 대해 잘 아는 사람 있으면… 내 질문에 대답 좀 해줘.

 

루미나미 나몬: 무색무취라서 밥에 섞어도 티가 안 날 독이 있냐고? 그래서 먹자마자 죽을 독이 있냐고 묻고 싶은 거니?

 

나리 케이토: 너는 조용히 해. 훌쩍. 살인자 주제에 입 열지 말라고. 하지만, 역시

 

카나리 케이토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우뚝 몸을 굳혔다.

 

나리 케이토: 아니. 아니야. 잠깐… 뭔가 이상하잖아. 나… 전화를 받았다고.

 

기와라 우시오: 뭐랑? 그보다 너 괜찮냐? 지금 너 얼굴이 아주 사색이야.

 

나리 케이토: 대화를 나눴다고. 제츠보한테 다시 방해 전파를 쐈는데. 칸나즈키한테서 전화가 왔어. 뭔가 했더니 이상한… 작은… 웅얼거리는 소리를 냈어. 그래서 잠꼬대나 하나 싶었는데…

 

바라 쿠리스: 전화가 언제 왔는데?

 

나리 케이토: 7시 40분 정도쯤에

 

킬로그는 거짓을 서술하지 않는다. 살인 게임의 관리자는 살인에 있어 공평한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누구의 편도 들어서는 안 되기에. 킬로그에는 누락된 내용이 있을지언정 틀린 내용은 있을 수 없다.

 

칸나즈키 시노부는 오후 7시경에 죽었다.

 

무로 시라베: 네가 누구와 통화했는지는 몰라도. 그건 칸나즈키 시노부가 아니다.

 

나리 케이토:?!

 

그리고 비로소 나는 사건이 어떠한 형태로 전개되었는지를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매끄럽게 전개되기에는 어딘가 맞물리지 않는 공백이 있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살인을 통해 얻을 것이 하등 없었다. 토키와 아유키 또한 야가미 토가를 죽일 동기가 없었다. 아무리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 상정한들. 검정이 되어 처형당할 위험을 감수할 정도의 원한이 있나? 그는 명석하지 못할 망정 바보는 아니었다. 탑의 모든 이들은 이미 처형 집행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았다.

 

토키와 아유키는 왜 그것을 알고도 야가미 토가를 죽였지?

 

처형당하지 않을 자신감이 있었나?

 

그 생각에 다다르자 나는 발칙하고 이해되기 어려운 발상을 하나 떠올렸다. 명확한 증거는 없으며 복잡한 것. 내가 가지고 있던 통념과는 정반대되는 것. 두 가지 살인이 아주 작은 간극만을 남기고 함께 이루어진 이유에 대한 답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나는 어떤 경위로 고무 호스가 칸나즈키 시노부의 잘린 목에 들어갔을지를 풀어내야 했다.

 

 

 

 

 

 

"그런데 고작 그 작은 언탄 하나 때문에 네가 내 주마등 속에 나타난 거라고?"

 

"주마등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그렇다."

 

"납득이 안 되는데. 정말 그렇다면 애초에 내 내면에서 무척 큰 일면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나와야…"

 

그리고 내 등 뒤에서. 누군가가 사그락거리는 잔디를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