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조의 색을 살폈다. 피의 착색 정도가 미묘했다. 나는 약간 고인 피의 웅덩이에 손을 대 온도를 확인했다. 혈액은 묘하게 차가웠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살해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혈액 치고는 상당히 온도가 낮았다.
나는 사건 현장에서 어딘가 부자연스러움을 느꼈다. 나는 이윽고 손바닥에 피를 묻히고 나의 손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주 작은. 하지만 응고된 혈액의 덩어리들이 혈액의 안에 둥둥 떠 있었다.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지혈증 환자가 아닌 이상 그런 덩어리들은 존재할 수조차 없었다.
피웅덩이의 온도를 기억했다.
그 다음으로 나는 칸나즈키 시노부의 목구멍에 들어갈 만한 물체를 찾고자 했다. 검정이 어떤 의도로 했든 간에 무언가가 칸나즈키 시노부의 잘린 목 안에 들어갔음은 명백했다. 그러나 야가미의 욕실엔 그럴듯한 물체가 없었다. 사실 탑에서 누군가가 증거물을 숨기고자 작정을 한다면 찾기 어려워지니.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했다.
"어머나. 이건 또 뭐지?"
후루미나미 나몬이 욕실 밖에서. 과장된 어투로 말했다.
"어머나! 히무로! 이건! 또 뭐지?!"
내가 반응하지 않자 한 번을 더 소리쳤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욕실을 나섰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야가미 토가의 침대 밑에 있는 물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피가 묻어 있잖아?"
우리가 침대 밑에서 발견한 것은 캐리어였다. 여행에 쓸 법한 캐리어. 그 안이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피가 묻은 캐리어를 기억했다.
야가미 토가의 숙소에서 나가기 전. 나는 그의 몸에서 몇 가지 시험을 더 해 보았다. 첫 번째는 그의 손이었다. 야가미 토가의 주먹은 꽉 쥐어져 있었다. 무언가를 때리기 위해 주먹을 쥐는 게 아니라, 손가락 자체가 안쪽으로 말려들어갔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꽉 다물어진 주먹에 손가락을 넣어 어떻게든 펴 보려고 시도했다. 야가미 토가의 손은 온 힘을 다해야 손가락 하나를 펼 수 있을만치 세게 경직되어 있었다.
내가 힘을 그만 주자. 야가미 토가의 손가락은 제멋대로 스르르 감겨 다시금 주먹을 만들었다. 야가미 토가의 사후강직은 강렬했다. 칸나즈키 시노부의 것보다도 훨씬 심했다. 나는 역시 곧게 뻗어 있는 야가미 토가의 발을 살피고자 했다. 신발을 벗겨내자. 발가락이 또한 안쪽으로 말려들어가 있음을 확인했다. 근육 강직이다.
모든 정황이 견과류 알레르기 가설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단정짓는 일을 최대한 미루고자 했다.
사건 현장을 볼 때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은 아무런 선입견 없이. 그저 놓인 정보만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상에 집중하는 것이다. 직관적인 관찰은 대부분 들어맞기 때문이다. 사람이 두 명이나 죽은 변칙적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검정이 꾸며낸 그림과 차마 숨기지 못한 의도를 동시에 봐야만 했다.
굳이 야가미 토가의 욕조에 목 잘린 시체를 놓았고, 굳이 남들이 보는 앞에서 야가미 토가가 고통스러워하며 죽게 만들었다. 분명 칸나즈키 시노부를 죽인 자는 조사 도중 야가미 토가 또한 죽기를 의도했다. 손을 대기도 어려운 상황. 생존자들이 따라잡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복잡하게 꼬아둔 실. 하지만 그 매듭은 분명히 시간을 들이면 풀릴 것이고,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듯이 본질을 꿰뚫는 것 또한 가능할 듯 보였다.
"카나리. 스탠드에 클램프를 하나 조여 줘. 그리고 클램프 안에 펀넬을 놓고 펀넬 안에는 기름종이를 깔아. 밑에는 비커를 두고. 아니다. 잠깐. 대형 펀넬을 쓰고 거름종이도 두텁게 놓아야 해. 우리는 커피에 액체가 들어간 건지 고체가 들어간 건지도 모르니.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거름 용법을 먼저 써 볼 거야. 이해가 됐지?"
"…아니."
"내가 너무 어렵게 설명했나…? 그러니까 모든 물질에는 용해도가 있어. 어떤 물질은 뜨거운 물에 잘 녹고 어떤 물질은 차가운 물에 잘 녹는 식이야. 하지만 우리는 커피 말고 이 용액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도 모르니까 증류나 증발은 시킬 수 없어. 마구잡이로 섞여 버리니까. 그래서 우선 물에 얼마나 잘 녹았는지를 관찰하기 위해 거름종이를 쓰자는 거야. 서로 조금의 차이가 있다면 분명 커피가루의 성분과 첨가된 성분이 걸러질 거야… 실패했다면 걸러진 것을 다시 커피에 넣으면 되니까 리스크도 적지."
"뭐라고?"
"그러니까! 밑으로 긴 구멍 뚫린 접시 같은 거 안에 저 냅킨 같이 생긴 걸 쑤셔 넣어. 아니. 잠깐. 일단 스탠드에 클램프를 조여 줘. 클램프의 구멍에 펀넬… 그러니까 구멍 뚫린 접시의 출구를 끼우면 돼."
"클램프가 어떻게 생긴 건데?"
"아아. 너 말고 다른 사람 불러올 걸 그랬나 봐…"
"나… 나도 할 수 있어. 더 자세히 설명해 봐."
"이바라 말로는 야가미 두 시간. 너 두 시간씩 후루미나미를 감시하다가 서로 2시간씩 쉬었다던데. 그럼 그 2시간 동안은 아무도 후루미나미를 못 본 거네?"
"그렇긴 하지만… 후루미나미가 끈을 풀고 나가지는 못했을 거야. 야가미에게서 인계를 받을 때도, 야가미는 후루미나미가 방에 여전히 앉아 있었다고 말했어… 그렇게 유쾌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맞아. 그것도 있었지…
"…정말 비극적인 일이었어."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만 말해두죠."
"후루미나미랑 야가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뭐였던 거야?"
"윽… 사실 그건 말이지…"
토키와가 얼굴을 한 번 찌푸리더니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왜인지 벌써부터 좋은 예감이 들지 않았다. 야가미가 말하기를 꺼렸다면 대체 어떤 종류의 기분 나쁜 상황이었을까. 목 자른 시체 뒤에 독을 먹고 죽은 시체가 나온 상황에서. 내 머리는 막연히 끔찍한 상황을 상상했다. 토키와의 입이 천천히 열리는 것을 지켜보며, 내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사실 나와 야가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후루미나미가… 그… 소변을…"
"아 씨발. 알겠어. 알아들었어. 더 안 들어도 되겠다."
미친. 쉬 하나를 못 참아? 고작 2시간인데? 나 같으면 온 힘을 다해서 참았을 텐데… 야가미는 졸지에 후루미나미 보모 역할까지 했겠군.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궁금한 건데. 그냥 탑에 남은 사람들끼리 감시역 계속 이어가지. 왜 굳이 두 시간의 공백을 둔 거야?"
"그야 누가 후루미나미와 내통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 일을 맡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후루미나미가 풀려날 확률도 줄어드는 법이었어. 아무리 이바라가 후루미나미에게 적대적이었다고 해도 후루미나미의 감언이설이 사람을 어떻게 속일 줄 알고?"
이상한데… 이바라는 후루미나미 말에 절대 안 넘어갈 사람 중 하나인데… 그건 아마 누구나 알 것이다. 아닌가. 물론 나와 토키와의 견해가 다를 수도 있겠지… 칸나즈키 전용실 방화 사건으로 토키와한테 반감을 가진 이바라가. 후루미나미 견제라는 중요한 일을 맡는 것이 자기 리더십을 견제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일지도…
그때쯤 나는 속으로 과연 누가 범인일지. 누가 범인이 될 수 있을지를 추려 보았다. 칸나즈키의 살인만을 놓고 보자면 일단 이바라, 야가미, 토키와, 후루미나미 전부 다이얼로그의 시간 표시 기능을 쓸 수 있었다. 칸나즈키의 머리를 영안로 안에 놓은 게 누구인지는 몰라도 네 명은 아니었다. 유력한 검정 후보였던 카이다는 영안로에서 나오지도 못했고… 제츠보의 다이얼로그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제츠보는 여기서 활동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었는데… 제츠보가 칸나즈키를 죽였다? 그럼 제츠보를 얼린 카나리는 어디서 튀어나오는 거지? 제츠보가 행방불명된 지는 좀 됐다고 이바라가 그랬는데… 그렇다면 카나리와 제츠보만이 후보라고?
맞지 않아… 도무지 맞지가 않았다. 추려지지 않았다. 내가 제대로 보고 있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지만, 그걸 한 번에 맞추기는 요원했다. 그래서 나는 하던 대로 계속 토키와를 심문했다.
"너는 야가미가 후루미나미와 손을 잡았을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해?"
"내가 생각하는 야가미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 같은데. 야가미가 모노로그와도 내통해 본 입장이라지만 최근에는 정말 살인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성실했어. 탑의 질서를 지키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걸 볼 수 있었어. 그런 사람이 후루미나미와 손을 잡았을 것 같지는 않아."
"토키와 아유키."
야가미의 숙소 안에서 히무로가 걸어 나왔다. 그 뒤를 후루미나미가 쫄래쫄래 따라왔다. 저년은 참 어지간하네… 그런데 지금은 히무로 옆에 붙어있기 좋을 때가 아닐 텐데. 히무로를 저렇게 살살 긁어대다가 언제 뻥 하고 터질지는 아무도 몰랐다. 뻥 터지지 않는다면… 히무로 본인에겐 그게 더 나쁜 일일수도 있겠다. 발산하지 못하고 꾹꾹 눌러 담다가 썩고 삭아버리는 거. 나는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었다.
"어? ㅇ. 왜. 히무로?"
"네 도움이 필요하다. 야가미 토가의 전용실과 칸나즈키 시노부의 숙소를 열고자 한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하기와라에게 꼭 알아야 하는 정보를 전달하고 있어서… 후루미나미와 함께 가는 건 어때? 잠긴 문을 여는 것은 후루미나미도 할 수 있잖아."
"내가 그래 주겠다니까 내가 해주는 건 마음에 안 드나 봐!"
후루미나미가 분통을 터뜨리는 듯이 발을 굴렀다. 히무로는 나를 슬쩍 바라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만큼은 너를 쓰겠다. 따라와라. 마지막으로 토키와 아유키. 야가미 토가에게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었나?"
"야가미가 자기 입으로 그렇다고 했어."
"알겠다."
그게 전부였다. 의외로 순순히 히무로는 물러났다. 후루미나미는 늘 하는 지랄발광을 하며 히무로를 따라갔다. 동네 마실 나온 개마냥 앞서가기까지 했는데. 참…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기로는 제일이었다.
아무튼 간에 나는 토키와에게서 캐낼 걸 게속 캐냈다.
후루미나미 나몬이 사람을 죽였다. 이것만이 유일한 해답이었다. 내가 모은 표본 안에서 그녀 말고 이런 짓을 저지를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내가 풀어야 하는 문제는 누가 검정이느냐가 아니라 후루미나미 나몬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죽였느냐였다.
"사람을 죽일 틈이 있긴 했나?"
"자기야. 내가 계속 얘기하잖아. 내가 어떻게 죽이냐니까. 빌어먹을 그놈들이 나를 혼자 방치해 두느라 내가 어떤 일까지 겪었는지 알기나 해? 혀 깨물고 죽을 뻔했어."
"해봤자 배변활동을 조절하지 못한 것뿐이겠지."
"…너는 늘 내가 문제를 내면 그걸 재미없게 까발려 버리더라."
후루미나미 나몬이 달갑지 않은 기색을 내다가 얼굴을 바꾸었다. 매번이 가짜 울음이었다.
"그래서. 계획이 뭐야? 이대로 틀린 검정을 지목해 다음 루프로 넘어가기? 아니면 최대한 이 루프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얻어 보기?"
후루미나미 나몬은 평소대로의 천진함을 가진 채 순순히 야가미 토가의 전용실을 열었다. 얇고 단단할 철사 같은 것이 열쇠구멍에 들어가자. 몇십 초도 지나지 않아 짤깍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렇게 쉽게 남의 숙소와 전용실을 오갈 수 있다면 당연히 그녀가 유력한 용의자였다. 뻔뻔하기도 했다. 사람을 죽여놓고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탑에 있는 이들이 던질 그물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촘촘했다.
"계획이 뭐냐니까. 정말 궁금해서 그래. 히무로. 나는 지금 이 살인 게임 속 네 유일한 이해자야."
"더 나은 질문을 가져와라. 이해가 안 되니."
야가미 토가의 전용실은 우선 커피의 향기가 났다. 나는 스위치를 올려 전용실의 전경을 보았다. 원두를 모아놓은 종이백과 커피 메이커. 그리고 이전에 야가미 토가 본인이 증언했던 대로 총의 모형이 있었다. 가루형 단백질 보충제도 보였다.
단안경. 진공포장된 타피오카 펄이 있었으며 레그 프레스, 역기, 여러가지 사이즈의 덤벨, 랫 풀 다운, 푸시 다운 등 그가 자신을 단련하는 데 쓰였을 운동기구들 또한 보였다. 그러는 동안 벽 한 켠에는 큰 책장에 빼곡하게 책이 꽂혀 있었는데, 책의 내용은 화술. 심리학. 협상의 선례 등 그의 전문 분야와 더불어 몸을 이상적으로 단련하는 방식에 대한 책도 몇 권 있었다.
"미도리카와는 얼마나 행복할까? 누군가가 자기를 찾고 싶어서 이렇게까지 열심히 살아왔다니. 심지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다시 만나기 위해 말이야.
문무 모두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은 분명 괄목할 만한 분주함이었다. 분명 그는 게으름을 모르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바라던 미도리카와 아쿠토를 본인이 죽이지만 않았어도 많은 게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 말고 별다른 것은 없었다. 작은 수첩에 담긴 일기. 작게나마 그려본 바다뱀의 인상착의(그림 솜씨는 나쁜 편이었다). 헤어 왁스 등 잡다한 물품뿐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물건이 없었다. 책이나 운동 기구 따위보다. 커피 따위보다 중요한 게 있을 텐데 그것은 그의 숙소와 전용실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에피펜이 없군."
"뭐가 없다고?"
"에피펜. 에프네프렌이다. 아나필락시스 쇼크가 발생했을 때 발작을 진정시키는 데에 쓰지.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더라도 그것을 허벅지 근육에 투여하면 알레르기를 가라앉힐 수 있다. 급성 알레르기를 겪는 사람의 전용실에 에피펜이 없다고?"
"흐음. 이상하긴 한걸. 누가 숨기려고 다 빼돌린 거 아닐까?"
"야가미 토가의 숙소를 수색했을 때도 에피펜은 없었다. 야가미 토가의 소지품을 조사했을 때도 에피펜은 없었다. 그걸 누가 다 빼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에피펜의 부재를 기억했다.
"여기서 알 것은 이미 다 알았다."
내가 야가미 토가의 전용실을 나서려 하자 후루미나미가 내 팔을 붙잡았다. 그 손길에 닿아도 소름이 끼쳐 팔을 털어냈다.
"흥. 매정하긴… 그보다. 고작 그 약품 하나 없었다고 야가미의 모든 혐의를 다 없앨 셈인 거야? 너무 물러. 히무로. 영안로에서 약해져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이건 너무 약해지지 않았나 싶은데. 너답지가 않아."
"네가 그렇게 단정 짓는다고 해서 사실이 되는 건 아니지. 야가미 토가에게는 견과류 알레르기가 없다. 이것 하나만으로 많은 사실을 유추해 연결할 수 있다."
토키와 아유키가 무슨 의도로 했는지는 몰라도 그는 위증을 했다. 야가미 토가는 알레르기를 앓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한 가지. 독뿐이다.
"그렇지만 이 탑의 어디에 독이 있을까. 히무로? 생각해 봤어?"
"칸나즈키 시노부의 숙소로 간다."
"대답! 이 탑의 어디에 독이 있겠어. 히무로! 내가 무지막지하게 뽑아 놓았던 수많은 잡동사니 중에서 일까. 이바라의 전용실일까? 혹시 식당이야?"
어쩌면 카이다 쿠로하의 전용실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수많은 가능성을 뒤져 어떤 독이 쓰였을지보다는 누가 독을 탈 수 있었는지를 고려하는 게 급선무였다. 토키와 아유키일까? 야가미 토가와 교대하며 후루미나미 나몬을 감시한 이상 야가미 토가의 숙소에 침입해 독을 탔을 수도 있었다. 견과류 알레르기에 대한 위증은 자신이 독을 썼음을 감추는 연막이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가 그렇게 한 이유를 내가 떠올릴 수 없다는 점이었다. 단적으로 말해 얻을 것이 없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경우에도 동기가 없었다. 특히 후루미나미 나몬은 탈출 장치에 노출되어 루프에 대해 알고 있다. 어차피 사람을 죽이더라도 이 살인 게임의 탈출 조건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이고 들키지 않아 무고한 이들을 다 처형시켜도, 게임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노림수가 무어냐. 나는 분명 범죄자처럼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감정 구사의 결여를 가지고도 내가 쫓는 이를 붙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후루미나미 나몬을 따라잡는 일만큼은 까다로웠다. 내게는 광인의 자질이 없기 때문이다.
칸나즈키 시노부의 숙소에 도착했을 때. 바닥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피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그토록 현장이 노골적일 줄이야 몰랐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짐짓 화들짝 놀랐다.
"우와! 피가 이렇게 많이?!"
나는 웅덩이를 이룬 피를 향해 다가가 손가락을 담갔다. 혈액의 온도는 야가미 토가의 욕조에 있던 것보다 높았다. 욕조에 고여 있던 혈액이 더 낮다는 게 더 정확한 서술일까.
목을 자른 곳은 여기일지도 모른다. 일단 피를 발견했으니 나는 흉기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증거인멸은 모든 범죄자들이 꼭 밟으려 하는 절차 중 하나였으니.
그 끝에 나는 숙소의 구석에서 푸른 고무호스를 하나 발견했다. 피가 묻어 있었다. 지름은 조금 넓은 편이었고, 안을 살피자 흰 고무가 오렌지색으로 착색된 것을 볼 수 있었다. 흰 부분에 피가 스며들어 색변이 이루어진 것이다.
고무호스를 기억했다. 이유는 몰라도 그 고무호스가. 칸나즈키 시노부의 목구멍에 들어간 물건이었다. 그 고무호스를 써서 검정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으로 확실해졌다. 목을 자른 장소 자체는 칸나즈키 시노부의 숙소 안이었다. 그 시점에서 사건 현장에 있어 가장 먼저 든 인상은: 서두름이었다. 검정은 상당히 초조했다.
나는 사건 현장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숙소 구석에 가지런히 놓인 플라스틱 도시락 통이 보였다. 벌레가 꼬이지 않게끔 음식물을 비우고 양념까지 물로 씻어 두었다. 다이얼로그를 통해 배달되는 도시락만 먹으면서 생활한 것으로 보였다. 어지럽혀진 흔적은 없었다. 도시락 통은 총 10개가 있었다. 이 도시락은 어디에서 온 거고. 왜 칸나즈키 시노부는 식당을 이용하지 않았지?
방치된 도시락 통을 기억했다.
"카나리가 배급해 주었다는 그 도시락이야. 너는 모르겠지만 카나리가 재미있는 계획을 하나 세웠거든."
"그 짓거리를 그만 멈춰라."
"뭐 말이야?"
"남의 사고를 읽는 것을 멈추란 말이다. 도무지 달갑지가 않다."
"그 말 들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기억나? 네가 나에게 그 실없는 소리를 그만 닥치라고 했던 거."
잊을 수 있을 리가. 후루미나미 나몬은 당시 메리와 나에게 더없는 모욕을 던졌다. 나는 값싼 시비에는 대응하지 않았지만 후루미나미 나몬의 조롱은 유독 집요했고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 언젠가 값을 받아내야 했는데, 그 장소는 학급재판장이 될지도 몰랐다.
"좋은 때였는데. 그렇지? 그때는 동반자살을 한다면 영영 끝이 난다고 믿었는데. 이제는 내가 너를 깔아뭉개고 모든 존엄성과 고결함을 퇴색시킬지라도 모든 게 다시 초기화될 거란 걸 알아 버렸잖아. 정말 애석한 일이야. 여기서 이루어낸 어떤 업적도 영겁 회귀 앞에서는 죽어 버리지."
"자기 일에 종사하는 것. 할 일을 다하는 것. 그 모든 일이 투쟁이야.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다를 것은 없다. 모든 게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 이치다. 그렇기에 창출해 낸 가치에 의미가 있다."
"틀렸어. 그 가치마저도 무(無)로 돌아가기에 결국 허무해지는 것이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존재에는 목적이 없어. 무엇도 손에 남지 않는다면 가장 강렬한 것을 움켜쥐어야 해."
그녀의 사상과 관련된 헛소리는 너무도 많이 들었고.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면 경청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들려달라 애원하든 말하지 말라고 애원하든 그녀의 뜻대로 되기 때문에. 나는 잠자코 내 할 일을 했다.
"이어서 말하자면, 카나리는 너희들이 영안로에 돌아오기 전까지 자신이 보급 시스템을 이용해서 탑에 있는 이들 모두의 식사를 책임지겠다고 말했어. 대신. 자신의 숙소 밖으로 나오지도 말라고 했지."
"토키와 아유키는 반대했겠군."
"자기 영향력이 줄어드니까 그런 선택을 했겠지. 이 당시의 토키와는 칸나즈키의 괴력을 억누르기 위해 칸나즈키의 전용실에 불을 지르기까지 했어. 결과적으로 신체가 탔고. 수호령은 칸나즈키의 몸에 깃들지 못하게 됐어. 괴력과 미래 예지 모두 바이바이."
구구절절 말이 길기도 했다. 심지어는 자세했다. 자신의 범행을 숨길 생각이 있는지도 의문이 들었다.
"갇혀 있었다는 사람이 탑의 사정을 속속들이 잘도 알고 있군. 차라리 네가 검정이라고 털어놓아라. 그런 이야기라면 끝까지 들어주겠다."
"선입견이 너무 심하다니까. 불침번을 서면서 사람들이 아무 말도 안 할 것 같아? 토키와 걔는 고민이 너무 많았어. 털어놓을 사람은 나밖에 없었지. 물론 그건 적에게 정보를 조달하는 일이었지만 누가 토키와를 욕할 수 있겠어? 외로운 사람은 누구라도 좋으니 가슴속 응어리를 털어놓고 싶어 하는 법이야. 너만 빼고."
"토키와 아유키의 정치 인생은 위기에 놓였겠지."
영안로로 떠나지 않고 탑에 남은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칸나즈키 시노부와 이바라 쿠리스만 그를 규탄해도 거의 4할에 대하는 정적이 생긴다. 야가미 토가 또한 토키와 아유키의 행동을 옹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카나리 케이토가 도중 영안로에서 탈락해 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본을 써 자신의 영향력을 펼치려 했다.
"맞아. 심지어는 칸나즈키의 수호령도 카나리가 부활시켰거든. 신체를 다시 만들어서 말이야. 재미있지?"
"정말 칸나즈키 시노부가 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나?"
"있었을 걸."
"네가 그 장면을 직접 본 적이 있냐고 묻는 것이다."
물론 교차감정은 하겠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단서를 얻고 싶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제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으나, 곧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 동작을 보자니 마유즈미 생각이 났다.
"나야 못 봤지만 토키와는 봤겠지. 그러니까 수호령이 부활했네 어쩌네 떠든 거 아니겠어?"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칸나즈키 시노부의 수호령을 기억했다.
"히무로. 그런데 왜 그렇게 수사를 열심히 하는 거야? 네 목적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남들 앞에서야 열심히 하는 척하고 나를 적대해도. 우리 둘만 있으면 편하게 해도 돼."
칸나즈키 시노부의 숙소 안에서 해체 작업이 이루어졌다면 어떻게 야가미 토가의 숙소까지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옮길 수 있었는가? 야가미 토가의 숙소에서 발견한 캐리어로 옮겼을까? 허나 계단을 통해 옮긴다면 분명히 바퀴가 끌리는 소리를 누군가가 들었을 터였다. 그러다가 누군가와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끝장이다.
나는 다시금 피웅덩이에 손을 댔다. 피에서는 응고된 덩어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것이 칸나즈키 시노부 본인의 혈액이었고. 야가미 토가의 욕조에 있던 혈액이 누구의 것이든, 그것은 칸나즈키 시노부의 혈액이 아니었다.
"양호실로 간다."
"에에? 양호실까지?"
번거롭게도 꼬아놨다. 연쇄살인. 참수. 독살. 밀실살인. 완벽한 알리바이. 기이한 시체 유기. 검정은 카테고리를 추가하듯 여러가지 요소를 써서 자신의 살인을 풍성하게 꾸몄다. 따라서 살인의 과정이 다소 복잡하게 보일지언정. 핵심만 꿰뚫는다면 쉽게 검정을 찾을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이미 지목을 끝냈다.
여전히 그녀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언젠가 다 밝혀질 터였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나를 계속 따라왔다. 별 말이 없는 것을 보면 그녀가 의도한 수사의 과정을 내가 그대로 밟고 있는 모양이었다. 주인이 만들어 놓은 구조물을 돌파하는 햄스터가 된 기분이었다. 달갑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칸나즈키의 숙소를 나서 4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를 때. 후루미나미 나몬이 말했다.
"아니. 대답 좀 해줘! 대체 왜 그렇게 열심히 해? 너는 그럴 필요도 없잖아!"
"손을 놓고 죽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 그리고 너는 내게 더없이 불편한 사람이다."
"이해가 안 되네… 너 나만큼 많이 알고 있는 게 맞기는 해? 탈출 장치가 전해주는 정보를 다 취합했어? 잠깐 의도적으로 잊어버린 것 같기는 했지. 아니면 그냥 모른 척이던가. 하지만 이래서야 아직 나보다 백 발자국 더 늦어있다고밖에 볼 수 없겠는걸."
"대부분은 되찾았다. 살인 게임이 진행될수록 탑이 변하는 것도 알고 있다."
"그건 정말 사소한 일일 뿐이야. 히무로. 설마 정말 잊었어? 잊은 척이 아니라고? 어쩐지 뻔뻔하더라니."
"뻔뻔한 것은 너다. 이 살인자야. 사람을 죽여놓고 나를 따라다니며 실마리를 던져 주겠다는 거냐. 내가 재판장에서 그토록 나를 도와주었던 네가 검정이라는 사실에 전율이라도 느끼라는 거냐?"
나는 양호실의 문을 열었다. 탑에 처음 왔을 때. 나는 야가미 토가, 모리 레이코와 함께 양호실을 조사했다. 안은 그저 평범한 양호실이었다. 하지만 탑의 양호실에는 학교의 것보다야 조금 더 특별했다.
양호실 한 켠에는 작은 냉장고가 놓여 있다. 수혈팩을 보관하기 위한 저장고였다. 그 안을 열었을 때. 비어있는 공간을 보았다. 누군가가 수혈팩을 가져갔고, 그것이 어디에 쓰였는지는 명확했다.
수혈팩을 기억했다.
후루미나미는 그러는 와중에도 내 등 뒤에 선 채 침묵을 지켰다. 무슨 꿍꿍이를 부리고 있나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입이 귀에 걸리게 웃고 있었다. 입 안에 가득 찬 이빨이 보였다.
"뭐냐."
"정말 모르는 거야. 히무로?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무엇을 모르는 척한다는 거지?"
"모든 것. 우리가 어쩌다 여기로 왔는지. 이 살인 게임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것인지. 살인 게임에 오기 전 우리는 무엇이었는지를 아우르는 모든 것들. 샤이닝과 다크닝. 초고교론자. 시라유키 히메리. 캐롤 브라이트."
그들이 살인 게임에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것인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허장성세인가. 그렇게 치부하고 싶었지만 내 직감은 어째서인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귀를 막는 게 아니라. 어쩌면 이해가 될 때까지 그녀를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너는 분명 인간의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잊어야 하는 것을 잊었어. 네가 너 자신으로 남을 수 있는 내용만을 남겼어. 그게. 너의 패착이 될 거야."
"이해가 안 되는 소리만 하는군."
"괜찮아.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는 구절을 하나 읊어 주자면.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건 이해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이해할 때가 되었기에 하는 거지. 너도 언젠가는 나를 이해하게 될 거야. 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될 거야. 진심으로. 너는 내 영혼 안을 들여다보게 될걸. 아. 그리고 내가 죽였어."
나는 그녀의 장광설을 잠자코 듣고 있던 도중. 무시할 수 없는 문장을 들었다.
"뭐라고?"
"내가 죽였어. 히무로. 이거 자백이야. 너 말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무고한 사람처럼 있겠지만 자백은 자백이지. 재판장에서는 추궁하지 마."
후루미나미 나몬의 자백을 기억했다.
"…왜 죽였나. 그리고 왜 그것을 지금 내게 털어놓는 거지."
후루미나미 나몬의 말은 진실이다. 그녀가 사람을 죽였다. 순순히 혐의를 인정한 것을 보고 나는 설마 그녀 말고 다른 진범이 있는지 의심하였지만, 정황상 그리고 발상의 한계상 그녀 말고 범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왜 그걸 털어놓는 거지? 그래봤자 득이 될 것은 없었다. 생에 집착이 있는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일찍 죽는다고 해서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검정 승리로 인한 하양 몰살의 비극을 연출하고 싶었다면. 내게 자신의 범행을 자백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을 죽여놓고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게 바보지. 네가 탑에 남아 있는데. 게다가 승리할 수 있다고 해도 나는 승리할 생각이 없어. 오래 살아봤자 뭐 해? 나는 어차피 이 살인 게임을 통틀어서 세 번째 재판을 살아서 넘기지 못한 사람인 것을."
"너는… 지난 루프의 기억마저 가지고 있는 건가."
"전부는 아니고 몇 개 정도만. 개인적으로는 초중반에 죽는 편이 더 마음 편하다고 생각해. 나도 샤이닝 수치가 높은 편에 속하긴 해도 괴물들과 힘겨루기를 할 생각은 없거든. 샤이닝. 다크닝. 정신 조작 능력들… 그런 것들과 경쟁할 바에야 일찌감치 죽어버리는 게 나아. 죽는 건 잠깐동안의 안식이거든. 어차피 다시 살아나 죽고 죽일 텐데 오래 쉬는 편이 낫지. 내 말 믿어. 히무로. 지금 죽은 사람들은 승리자들이야. 이 살인 게임 속에서는 존재 자체가 부조리인걸."
"아직 그것을 왜 내게 알려주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대체 왜냐?"
"왜냐고?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당연히 모른다. 광인의 의도는 본인밖에 모르지."
후루미나미 나몬은 눈을 부릅뜨고 내게 손가락질을 했다.
"다 너 때문이야. 히무로."
나 때문이라고?
"내가 이러는 건 전부 네 책임이야. 히무로. 너는 나를 발굴해 냈어. 가만히 있는 나를 찾아와서 너를 처음으로 내보였어. 나도. 네게 스스로를 보여 주었어. 그리고 너는… 내 가장 은밀한 곳마저 관측했어."
"그게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야. 너는 절대 돌이킬 수 없는 나의 무언가를 찾아냈어. 슬쩍 엿본 뒤에 잊어버렸을지라도 그 일은 돌이킬 수 없어. 실수로 슈뢰딩거의 상자를 열었더라도 고양이는 돌아오지 않듯이. 판도라의 상자 속 재앙도 회수되지 않지. 나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소중했는데 너는 그걸 내던져 버렸어. 네 기억 한편을 차지할 자격이 있는 것을!"
"그런 일은 없었다. 스스로를 너무 크게 보는군."
"있었어! 있었다고! 그런 개인적인 원한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지만, 그건 네가 알아서 유추해 내야겠지. 그러나 너에게 단서만큼은 주겠어."
후루미나미 나몬은 어느새 곰방대를 들고 있었다. 모친의 유품이라고 말했던 곰방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연기를 내뿜고서 만족스러운 신음을 냈다.
"이 모든 건 전부 하나의 사실에서부터 출발해. 나는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분명한 과정과 차근차근 밟아나간 논리의 전개 끝에 이렇게 된 거야. 그 첫걸음은 바로. 내 아버지가 사실 무정자증이라는 것이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말해 줬잖아. 네가 알아내야 하는 거라고."
"내가 이미 알아낸 것을 말해 줄까. 너는 남을 훼손하는 게 즐거운 사람이다. 그게 전부다. 그것을 관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저 네가 얕은 인간이었을 뿐이지.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너는 시정잡배일 뿐이라고 말이다. 모친이 자살했다고 다 너처럼 되는 줄 아나?"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히무로. 나도 상처를 받아. 어린둥이들이 풍선 칼로 난도질을 하는 건 간지러워도 같은 사람이 배를 찔러대면 아파."
"그러시겠지."
어투는 억눌리고 또 흔들리고 있었지만 나는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후루미나미 나몬은 꿋꿋하게 어조를 유지한 채 말을 이어갔다.
"네가 시라유키 히메리의 죽음에 아파하는 것처럼."
그 어조는 이윽고 평소의 뒤틀리고, 심기를 긁는 유리손톱의 마찰이 되어 돌아왔다. 그것은 뻔한 도발이었다. 나의 반응을 가지고 노는 짓이었다. 주먹 한 두대로는 닥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좋다고 깔깔 웃어대겠지. 이런 부류의 범죄자는 죽기 전까지 떠들어댄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소중한 기억을 모욕 소재로 쓰는 것은 나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후루미나미 나몬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집요한 노림수였다. 고래의 꼬리 혈관을 물어뜯으려는 상어와 같았다.
"네가 마유즈미의 죽음에 아파하는 것처럼 말이야. 화를 내기까지에는 좀 멀었나. 히무로? 그럼 한 번 참을 대로 참아 봐. 마유즈미는 죽는 편이 나았어. 히무로. 너를 약하게 만들잖아. 시라유키 히메리를 모욕하는 것과 마유즈미를 모욕하는 것은 이제 거의 동일한 무게를 지니지. 네가 바보같이 그녀가 주는 사랑을 받아들이기 때문이야. 너한테는 그녀가 없는 편이 나아. 그게 더 쾌적할 거야."
역린이 두 개가 되었다.
"멍청한 것. 자기가 네 여정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나 봐. 네가 뛰는 무대는 그런 규수 따위가 지내기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아. 반면에. 나는 네 단짝이지. 너와 나는 생각보다 많이 닮았어. 히무로. 누구도 이해 못 할 네 고뇌마저 나는 그게 어떤 것인지 알아. 오. 히무로… 나야 곧 사라질 목숨이지만, 너에게 올바른 처방전을 내려 주지. 너에게 필요한 건 이해자와 위안이야."
후루미나미 나몬이 한 발짝 더 내게 가까워졌을 때. 나는 그녀가 내게 무슨 짓을 할 작정인지를 이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넥타이를 풀어 길게 늘어뜨렸다.
"그만해라."
"너에게는 내가 반드시 있어야 해. 살결과 교합만이 네 외롭고 삭막한 여정 위 유일한 안식인 걸 정녕 모르나? 받아들여. 히무로. 나는 이 시점의 네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야."
후루미나미 나몬은 자신의 셔츠 단추를 위에서부터 풀고 있었다. 어찌나 빠른지 나는 눈을 돌리기도 전에 그녀의 살을 보았다. 더럽고 저열한 유혹. 통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저지름은 내 면전에 떨어지는 가래침과 다를 바 없었다.
"그만하라고 말했다. 이 탕녀야."
"화를 내. 침을 뱉어. 뭐라도 해.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만 않으면 뭐든 해주지."
사람들이 역린에 대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역린을 찌르면 용이 날뛰고 찌른 자를 죽이려 든다고 하여 그것이 용의 생명과 직결되는 곳이라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원전에 역린이 용의 약점이라는 서술은 일언반구조차 없다. 역린을 찌른 들 용은 그저 발광할 뿐이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자신을 봐 달라 애원하듯이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아댔다. 이전 장미꽃밭에서 위성이 자전하듯이 했던 그대로였다.
"시라유키 히메리는 소시오패스에 윤리를 저버린 과학자였어. 죽어 마땅한 업보를 많이도 쌓았으니 죽은 건 잘 된 일이야. 시라유키 히메리의 적이 그렇게 많은 데는 다 이유가 있어! 마유즈미가 이전 루프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너는 모르지? 응? 얼마나 꼴사나웠는데. 너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아마 이번 마유즈미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바보처럼 죽었겠지? 늘 그렇듯이!"
용의 약점 같은 헛소리를 믿고 만약 누군가 용을 잡겠노라 역린을 찌른다면 그들은 알게 될 것이다. 용은 죽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용에게 그들을 죽일 이유를 주었을 뿐이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천천히 내 곁으로 다가와. 내 귀를 노려왔다.
"그리고 너는 또 혼자 남았어. 너는 그렇게 정해져 있어."
"너를 죽이겠다. 후루미나미 나몬."
나는 처음으로 학급재판과 처형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몸은 내게 가까워지다가 멈추었다. 내가 그녀의 목을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케흑…!"
손아귀 안에서 연약한 목울대가 움찔거렸다. 공기를 들이마시려고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너 같은 사람도 숨통이 막히면 괴로워하는 거냐? 후루미나미 나몬은 대답했다. '아니'.
그녀는 내가 잘 하고 있다는 듯이 음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내 팔을 할퀴려는 노력은 커녕 양손으로 그것을 부드럽게 쓰다듬기까지 했다. 소름이 끼쳤다. 그녀가 질식할 때까지 나는 목을 조를 수도 있었다. 한 손이 아니라 두 손으로 하면 더욱 빠를 터였다. 하지만 그 힘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후루미나미 나몬은 여전히 추행하는 자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 광기. 완전하게 비틀린 가치관 앞에서는 어떤 실재적인 것도 원본 세계의 법칙대로 작용하지 않았다. 피안도의 주민은 손등으로 손뼉을 친다.
나는 손의 힘을 풀고 그녀를 밀어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자신의 브래지어마저 드러낸 채 휘청거렸다. 몸가짐을 가다듬을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더러운 마귀 같으니… 내가 어쩌다 이런 사람에게 나를 내보였단 말인가? 어떻게 알 방법이 없었는가? 눈앞에 있는 여자는 얽혀서는 안 될 부류라는 것을?
"콜록… 콜록… 커흑! 그래… 바로 그거야. 히무로. 좋아! 좋아! 사랑해! 이 짐승같은 자식!"
"너를 사형대로 보내겠다. 이 배냇병신아. 너는 악행을 너무도 많이 저질렀다. 사람마저 죽였다. 그러니 더 이상 너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 비극을 그렇게 좋아한다면 가장 나은 비극을 너에게 주지. 죽음을."
후루미나미 나몬은 자신의 목에 남은 붉은 자국을 쓰다듬었다. 마치 그게 성흔이라도 되는 듯한 몸짓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마저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더 내놓으라니. 욕망은 역시 만족을 모르는구나.
"아니아니아니아니. 부족해. 그걸로는 부족해. 히무로. 정말 나를 처형시키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겠어? 그건 너와 나 모두 성에 차지 않는 방식이야. 대신에. 이건 어때?"
후루미나미 나몬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내게 무언가를 내던졌다. 나는 공중에서 그것을 낚아챘다.
얇은 재질의 고무장갑이었다.
"학급재판에서 할 걸 미리 했다고 생각해 줘."
"결투 말이냐."
"맞아. 네 손으로.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언총의 결투로 이 인연의 끝을 내자고. 너도 그러고 싶잖아. 그렇잖아? 어떻게든 나를 끊어내 버리고 싶으면서!"
나는 침묵으로 합의했다. 곧 논리와 증거. 언쟁을 통해 후루미나미 나몬을 죽이기 위한 도구를 하나씩 조립해 나갈 것이다. 어떤 악취미적인 방식으로 죽든 간에 그녀는 비로소 영원히 입을 다물게 되리라.
"결투란 웃긴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히무로? 학급재판과의 승패와는 사실 조금도 관련이 없잖아. 첫 번째 결투는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고, 두 번째 결투는 설득과 앙갚음을 위해 쓰였고, 이제 세 번째는 화풀이를 위해 쓰이겠지."
부정할 수 없었다. 그토록 누군가가 기껍지 않았던 적은 처음이었다. 스스로가 낯설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 방안이라고 느껴졌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죽어야 했다. 그것도 내가 몰아세워 죽이는 형식이야말로. 후루미나미 나몬이 당해 마땅한 죽음이었다.
"내 증오를 사니 좋겠군."
"나보다는 너에게 좋은 일이지. 히무로. 나는 자원봉사 하는 기분으로 네 서슬 퍼런 미움을 받아내고 있는 거야. 살면서 누군가는 증오해야 하거든. 사랑을 입에 머금을 줄 모르는 자들은 증오라도 삼켜야 해. 그래야 자신의 마음에 있는 모든 응어리를 배출할 수 있어. 사랑이 응어리를 녹이는 와중 증오는 그걸 외면화할 수 있게 도와주니. 지금 네가 그토록 거칠어진 것 또한 그 반증이지. 얼마나 불만이 많고. 얼마나 화가 날까… 그리고 누구한테 그 화를 풀고 싶을까?"
슬금슬금 다가오는 손목을 꽉 잡았다. 마음만 같아서는 부수고 싶었다. 분명 고통만이 느껴질 텐데도 후루미나미 나몬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어댔다. 그 눈에 담긴 악의는 극도로 순수해서 선의보다도 투명했다.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을 믿을 수 있다. 언제까지나 이 여자가 나를 훼손하지 못해 안달이 났고. 내게 고통을 주려 애쓴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를 향하는 악의를 대할때야말로 마음을 놓을 수 있다라. 나의 모양새가 우스웠다.
"쌓인 걸 전부 내보내. 히무로… 내가 전부 받아내 줄게…"
"…야. 이거 제대로 되는 거 맞아? 걸러져서 나온 물이 여전히 갈색이잖아."
"커피를 거름종이에 걸렀는데. 그러면 깨끗한 물이 나올 줄 알았어? 당연히 색은 그대로지. 이제 관건은 커피 성분이 걸러졌느냐, 아니면 커피보다 물에 안 녹는 이물질이 걸러졌느냐야. 너희 생각보다 커피는 물에 잘 안 녹는 물질이거든."
이바라는 겹겹이 겹쳐 놓은 거름종이를 핀셋으로 집어 차가운 물이 담긴 비커에 담갔다. 커피를 거른 거름종이이기에 물은 곧 갈색이 되었으나 원래의 용액보다는 옅은 갈색이었다. 이바라는 핀셋으로 거름종이를 몇 번 저어 성분을 물에 풀어냈다.
"일단 프레파라트도 만들어 둘까… 아니다. 일단 보이는 게 있는지 확인한 다음에 해야겠어."
"안에 뭐가 있는지 보면 되는 거야?"
"응. 돋보기를 써서 볼 거야. 내가 볼 테니까… 우와! 너 좋은 거 가지고 있네?!"
카나리는 이미 본인의 단안경을 쓴 뒤였다. 야가미의 단안경과 그의 것이 다른 점이라면, 야가미는 시력 교정을 위해 단안경을 쓰는 반면 카나리는 더 자세히. 그리고 크게 상을 들여다보기 위한 다층적 렌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렌즈의 슬라이드를 전부 겹치자. 카나리는 용액의 내부를 아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보이긴 보이는데… 저게 뭔지를 모르겠으니…"
"보여?! 뭐가 보여?"
"하얀색 결정 같은 거. 무슨 설탕이나 소금 같긴 한데… 팔각형이야."
설탕과 소금은 커피가루보다 물에 잘 녹는다. 거름종이에 걸러질 리가 없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찾아냈다. 커피보다 물에 더 녹지 않는 이물질…
문제는 그들이 그 이물질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탑은 참 복잡하게도 돌아갔다. 특히 토키와는 대부분의 사람이 영안로로 떠난 뒤에도 아주 피곤하게 살아온 모양이었다. 그 노력 하나만큼은 언제나 본받을만하다고 생각했다. 왜인지 그 끈기와 노력이 예전과 다른 방식으로 발현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분명 제츠보를 무력화시킨 건 카나리야. 플라잉 로봇을 가진 사람이 카나리뿐이니까."
"그것 말고야 답이 없긴 하지. 그래서 걔는 왜 제츠보를 막으려 들었을까?"
"그거야 아무도 모르지! 아니. 아니. 알 수 있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칸나즈키를 죽이는 데에 가장 큰 방해물은 제츠보일 테니까."
"왜 제츠보가 가장 큰 방해물인데?"
토키와는 답답하다는 듯이 콧김을 불고 한숨을 쉬었다. 뭔가 사람이 멍청한다고 면전에서 무시하는 느낌이라. 재밌지는 않았다. 오케이. 여기까진 인정. 지금까지 남 멍청이 취급했던 내 행실이 돌아왔다 생각하자고.
"제츠보는 칼도 주먹도 안 통하는데 계속 탑에서 순찰을 도니까! 잠을 자지도 않아! 사실 나와 야가미도 그래서 제츠보에게 맡길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어. 이미 미도리카와의 전용실 앞에서 미도리카와를 감시한 전적도 있고, 카텟 기관이 보낸 확실한 도움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사라져 버려서 우리는 어쩔 도리 없이…"
"내 말은. 어차피 카나리는 칸나즈키 밥을 계속 가져다줬다며. 사실 칸나즈키만 그렇게 밥을 받아먹었다면서. 그럼 그냥 칸나즈키 밥에 독만 타도 칸나즈키를 죽일 수 있어."
토키와는 표정을 굳히더니 자신의 턱을 붙잡았다. 몇 초 뒤에 토키와는 내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이런 간단한 생각도 안 했나? 카나리는 이런 식의 살인과 가장 거리가 멀지도 몰랐다. 그야 그냥 독만 먹이면 죽일 수 있으니까.
"물론 그러면 칸나즈키를 죽인 게 카나리라는 사실이 너무 명백하지. 그러니 야가미의 숙소에 시체를 넣는 등의 공작이 필요했을 수도 있어. 물론 카나리가 제츠보를 멈추게 만든 이유가 살인을 위해서 말고는 별반 생각나는 게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나리가 꼭 검정이라는 법은 없다는 거야. 또 제츠보가 플라잉 로봇의 방해 전파에 맞으면 얼마 정도 얼어붙는지 알아?"
"예전에 당했을 때는. 한 10분 정도…"
"그러면 왜 며칠씩이나 자취를 감추는데?"
토키와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어쩌면 영안로와 탑 사이의 시간 간극 때문에 제츠보는 깨어나지 못한 것일지도 몰랐다. 영안로 안에서는 1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이 탑에서는 반나절일 수도 있었다. 사실 우리가 영안로에 들어간 지 체감상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았는데 탑에서 지난 시간을 생각해 보면. 그게 맞는 추론이었다.
그래서 대체 카나리는 왜 제츠보를 얼린 거지? 그걸 제일 먼저 물어야 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급할 건 없었다. 어차피 학급청문회 앞에서 카나리 같은 겁쟁이가 버틸 리 만무했다. 아마 탈탈탈 털려서 첫사랑이 누구였는지도 털어놓게 될 것이다.
"제츠보 입장에서 진술을 들으면 조금 나을 텐데…"
학급재판에서 들을 수 있겠지만, 제츠보가 방해 전파 때문에 뻗어있는 점을 고려하면 학급재판에 참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건 그거고. 나는 일단 심문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야가미한테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은 언제 알았어?"
"언제였지… 기억은 안 나는데 교대하면서 커피를 끓여서 건네준 적이 있거든. 그때 혹시 헤이즐넛 시럽 같은 거 넣었냐고 물어볼 때 알았어. 자기한테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대."
글쎄… 야가미 성격에 그걸 알려줄 것 같지는 않은데. 살인 게임에서 믿을 놈 없다는 건 야가미가 제일 잘 알 거란 말이지. 사람도 죽여봤으니 이 탑에 안전구역이 없다는 것도 알 거고. 내가 야가미라면 일단 고맙다 나중에 마시겠다고 한 다음 조용히 버리던가 하겠지. 텀블러를 가지고 다닌 데다가 전용 커피머신까지 있는데 남이 주는 걸 마실리 만무해. 자기가 내린 취향대로의 커피를 먹으면 먹었지 남이 타준 커피를 순순히 마신다고? 자기 약점을 드러내면서?
"그런데 야가미 숙소에 알레르기 치료제 같은 건 없었잖아."
"알레르기에 치료제도 있어?"
"있지 않냐?" 토키와와 나 모두 알레르기 치료제라는 개념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알레르기는 병이랑 달라서 치료제가 없나? 그럼 진짜 알레르기 심한 사람들은 그거 닿기만 해도 죽어?
뭔가 가물가물한데… 그리고 견과류 알레르기로 죽어간다면 죽기 전에 누가 자기 커피에 견과류를 탔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정상 아닐까? 자기가 죽인 게 아니다 뭐 그런 당연한 소리가 아니라.
으음… 그치만 토키와가 하는 말을 의심할 필요도 없겠지… 이렇게 간단히 들킬 거짓말이라면 안 하는 편이 낫잖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가물가물함을 느꼈다. 거짓말을 했다 참말을 했다 어느 쪽도 깔끔하게 말이 되지는 않았다.
"아무튼 토키와 네가 확실하다니까 기억하고 있을게. 다음. 칸나즈키가 7시쯤에 죽었다던데 너는 그때 어디서 뭐 하고 있었어? 그냥 상투적인 질문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답해."
"내 숙소에서 쉬고 있었지."
"그거 보증해 줄 사람은? 이것도 상투적 질문."
"없어. 너희가 떠난 이래 탑에는 큰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았어. 식사도 자기 몫의 음식을 식당에서 덜어간 다음 자기 숙소나 전용실에서 먹는 일이 빈번했어. 다들 나와 상황이 비슷했을 거야. 늘 식사를 크레딧 상점의 도시락으로 때우던 카나리와 칸나즈키를 제외하면 말이야."
"그런데 크레딧 상점으로 물품을 사면 본인한테 오잖아. 칸나즈키한테 곧장 배송은 안 될 거야. 그건 해변에 경주마가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지. 카나리는 아마 도시락을 시킨 다음에 칸나즈키 방으로 그걸 가져다줘야 했을 걸."
결국 칸나즈키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카나리였다. 분명 칸나즈키 시체의 마지막 목격자도 카나리였고.
"카나리가 캐롤의 영안로에 자주 들렀어?"
"계단을 오르는 건 많이 봤지. 혹시 어디 가나 싶어서 따라갔더니 몇 시간 단위로 계속 캐롤의 영안로를 찾아가는 것 같았어. 아마 칸나즈키의 시체를 어디에 유기할지 물색했던 걸 거야."
"아니… 나 같으면 이미 자리를 찾아봤다면 나중에 시체를 버릴 때만 다시 찾아갈 것 같은데. 여러 번 들러서 누군가에게 발각될 필요 없이. 그리고 칸나즈키의 목만 유기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어. 누군가가 카나리의 동선을 알아둔 다음에 그 자리에 시체를 놓은 거라면 모를까…"
나는 토키와를 바라보았다.
토키와가 내 눈빛을 의식하기 시작하자. 나는 빠르게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굳이 내가 토키와를 카나리보다 수상쩍게 생각한다 말할 필요가 없었다.
"뭐 그래도 카나리가 제일 수상한 건 사실이지."
"그렇지? 너라면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어."
내가 병신으로 보인갑지. 나는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가설이 떠올랐다. 카나리는 왜인지는 몰라도 캐롤의 영안로로 제츠보를 유도했고, 플라잉 로봇을 써 기절시켰다. 영안로와 탑 사이의 시간 간극을 이용해 카나리는 플라잉 로봇의 방해 전류가 충전될 때마다 캐롤의 영안로에 들러 제츠보를 계속 멈춰 두었다. 그걸 누군가가 인지했고, 카나리가 특정 시간에 영안로로 들어갈 걸 예상. 그 안에 칸나즈키의 목을 두어 혐의를 분산시킨 것이다.
여전히 오리무중 한 것은 칸나즈키가 어쩌다가 살해당했느냐였다. 나이토랑 나나시를 두 손에 각각 질질 끌고 가던 애가. 힘으로 누군가한테 질 리가 없었다.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잠깐.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원형 계단 위에서 누군가가 쿵쿵 내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 같은데."
"그건 나도 알아. 지금 탑에는 우리밖에 없잖아. 마유즈미, 나나시, 카이다. 전부 못 돌아와. 그런데 누가 돌아온 거냐고. 잠깐. 잠깐! 야! 마유즈미! 너…"
나는 속으로 설마. 설마. 하며 반신반의했지만, 마유즈미가 돌아온 것이라면 당장 방방 뛰어오르고 소리를 지르며 히무로를 데려와 극적인 상봉을 시켜줄 용의가 있었다. 아주 감동적일 것이다. 카친은 멀쩡하다! 우리 카친은…
"나야… 카나리 어디에 있어?"
"제츠보…? 야. 너 괜찮아?"
제츠보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 차올랐다.
"난 괜찮아. 그보다 카나리… 카나리 케이토 이 자식 어디 갔어. 또 그 깨부술 놈의 플라잉 로봇이야! 이딴 장난을 쳐서 얻을 게 뭐 있다고!"
"이바라 따라서 도와주려고 갔는데. 이바라 전용실에… 어어. 야. 잠깐!"
소름이 돋는 그 목소리. 환각은 보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두려운 그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순간 낭패를 느꼈다. 히무로가 기껏 상자 안에다가 귀신을 가둬 뒀는데. 실수로 내가 그걸 열어 버렸다. 내 안에서 어떻게든 타개책을 찾으려다가 풀어서는 안 되는 걸 풀어 버렸다.
나는 히무로가 알려줬던 대로. 절대로 가고 싶지 않은 장소를 떠올리고 귀신을 억누르려 했다. 하지만 턱도 없이 실패했다. 귀신은 다시금 그 시커먼 집의 풍경에 머물지 않았다. 내 귀에 대고 속삭이기라도 하듯이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방법은 있어! 네 이름을 알려주기만 하면 되겠지? 나는 알아! 나는 네가 모르는 걸 전부 아니까!"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무서운 건 무서운 것이었지만, 언제 떨어져 죽을지 몰랐다. 나는 히무로가 다시 보고 싶었다. 영안로에서 살아나갈 방법이 정말 있긴 하다면. 어떻게든 그 기회를 잡고 싶었다.
"뭘 하면 알려 줄 건데요…?"
"간단해. 교대다. 네 몸을 내놔."
"그러면 저는 어떻게 돼요?"
"나처럼 되는 거지. 아니. 나처럼 밖에 잘 나오지는 못할 거야. 나는 상자를 꾹 닫아둘 거니까."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귀신… 아니. 히무로의 말에 따르면 '언니'처럼 되는 게 어떤 느낌인지는 몰라도. 내 몸을 넘겨준다는 건 너무 위험하게 들렸다. 내 발로 걷지 못하고 내 입으로 말하지 못하면. 그냥 쭉 잠을 자는 상태 거나 깨어나도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하면, 그게 다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기 싫어? 그럼 여기서 죽던가. 하지만 지금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너는 언젠가 깨어날 수 있을 거야. 내가 허락하는 이상 네 낭군과 재회도 할 수 있을 거고."
히무로. 히무로가 보고 싶었다. 지금 죽으면 영영 못 보겠지만, 다시 깨어나면 언젠가 한 번쯤은… 하는 욕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하지만 내 몸과 목소리를 가진 채 언니가… 히무로한테 못되게 굴면 어떻게 하지? 비단 히무로에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못되면? 나 때문에 다들 힘들어하는 건 싫었다.
"빨리 결정해! 빨리 하라고! 죽고 싶어?!"
"생각 중이야! 조용히 해요!"
심지어 나는 총도 가지고 있잖아.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 내가 몇 초 뒤에 바닥을 만나 죽게 될지도 모른 채 나는 골똘히 생각만 했다. 결정을 내리기가 너무 어려웠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내 몸을 준다니. 게다가 나는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을 거고!
"빨리. 빨리! 빨리 하라고! 너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살고 싶단 말이야!"
그 목소리는 겁에 질린 듯 다급하게 말했다. 나는 그걸 느꼈다. 나만큼이나 강한 삶에 대한 열망을.
내가 언니라고 부르는 이 인격이 정말 내 다른 모습인가? 억눌린 나. 그러니까 내 그림자 같은 것일까? 나에게 정말 언니가 있었고, 그 언니를 향한 그리움이 삶을 간절히 원하는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게. 사실일까?
"정말 너도 나야…?"
"그래. 그래! 나는 너야! 너라고! 이 멍청아! 나는…!"
"그렇지만… 나는 탑에 오기 전까지는 너한테 시달린 적이 없는걸."
"날 자세히 보고. 기억해내 봐!"
"탑에 온 뒤에야 나는 너에 대한 꿈을 꿨어. 내가 언니에게서 떠올리는 건 아주아주 단편적인 기억뿐이야."
"Mea Culpa."
"그런데 네가 내 다른 면이라는 거야? 탑에 오기 전까지 너를 만난 적도 없는데?"
정말 그녀가 내 다른 면이라기엔 어딘가 어색했다. 뻔하게 속아 넘어가고 싶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헛소리 그만하고 나와! 몸을 내놓으란 말이야!"
"…너무 자기 할 말만 하지 마. 앞으로 같은 몸을 쓰게 될 거라면. 이웃이랑 사이좋게 지내야지."
"지금 내가 장난하는 거로 보여?! 너도 죽는다고. 이대로 가다간 우리 둘 다 끝장이야!"
그건 사실이었다. 어쩌면 욕심을 부릴 게 아니라 당장 내게 떨어진 기회를 잡는 쪽이 현명할지도 몰랐다. 반대로. 내 몸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지 않는 쪽이 더 나을지 모르는 일이기도 했다.
결국 어느 쪽이든 나는 동전을 던져야 했다. 동전이 땅에 떨어지기 전 내가 떨어져 죽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동시에. 영영 의식의 세계 밑에 갇혀 있으라는 말은 극구 사양이었다. 집에서 갇혀 있다가 나왔더니 이제 내 몸 안에 갇혀서 다른 누가 내 몸을 타고 다니는 걸 구경만 하라니. 그런 건 싫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바보짓이었지만. 나는 어떻게 해서든 내 몫을 받아낼 작정이었다.
"정말 살고 싶어?"
"그래. 맞아! 살게 해 줘! 나는 너야! 아직도 모르겠어? 내게 몸을 넘기는 법만이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너는 나라는 말은 이제 하지 마. 별반 안 믿겨. 거짓말 말고 솔직하게 말해. 살고 싶어?"
"그래!"
내가 듣기로는 충분히 절박하게 들렸다. 나는 나와 몸을 같이 쓰고 있는 사람이 나인지 다른 사람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 목소리에서 나만큼이나 살고 싶어 하는 기색을 느꼈다. 내가 이 사람보다 더 절박할 이유는 없었다. 다들 자신이 소중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고, 발바닥에 닿는 잔디의 느낌을 느끼고 싶어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쯤 속아 줄게."
모두 살고 싶을 거야.
"네가 그렇게 간절하다면. 살게 해 줄게… 대신. 나쁜 짓은 하면 안 돼. 그리고 가끔씩이라도 좋으니까. 나한테도 몸을…"
그래서 몸을 어떻게 주지? 같은 의문이 스쳐나갈 때쯤. 강한 어지러움이 느껴지더니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내 몸의 감각을 점점 잃어갔다. 추락하는 와중에도 또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점점 내 몸에서 빠져나오는가 싶더니…
"허락이 떨어졌어! 교대다! 이제 이건 내 몸이야!"
그렇게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끝으로.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사실 그건 내 목소리였다. 하지만 내 목소리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들으면, 내가 말하는 것보다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내 통제를 벗어난 손은 내 실타래를 세게 붙잡았고. 나는 그대로…
마유즈미는 괜찮을 것이다. 히무로도 괜찮을 거고. 일단 둘 다 이름이 있으니 영안로를 빠져나갈 수 있겠지. 그 점 하나만큼은 다행이었다. 나는 누구도 길동무로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나와 함께 누군가도 함께 죽기보단 나 혼자 죽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그게 나에게 별반 위안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문득 추위를 느꼈다. 출혈의 영향일지도 몰랐다. 여전히 상처부위에 천을 쑤셔 넣은 채 이동하는 와중. 숨을 쉬는 것이 점점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꺼끌꺼끌하고 거친 무언가가 몸 내부에서 느껴졌다. 내 몸 어딘가의 뼈였다.
나는 내 몸이 얼마나 상했는지조차 확인하지도 않았다. 아픔만으로도 내가 곧 죽으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더는 못 하겠다며 복부는 칭얼거리며 피거품을 내뿜었고, 다리는 서서히 무거워져 걸음을 옮기기도 어려워졌다. 하지만 안정을 취해봤자 곧 죽는 건 마찬가지였다.
히무로를 믿었어야 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버룩과 딕테이트라는 위험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니. 내가 영안로에서 나갈 방법이 없다는 걸 히무로가 알면 나를 죽이리라는 것은 너무 극단적인 생각이었을까?
하지만 그것 말고 히무로에게 방법이 있지도 않았다. 나는 캐롤 씨를 부활시키고 싶은데 히무로는 그걸 막아야 하고. 나는 영안로에 영원히 남아야 하는데 히무로는 밖에서 할 일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나를 죽이고 밖으로 나가는 게 가장 나은 방안 아닌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배에 총을 맞은 뒤에야 너무 늦은 가정이 되어 버렸다. 숨을 쉬면. 몸 어딘가에 구멍이 뚫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차피 나는 영안로를 나가지 못하고 죽는다.
그렇다면 이제 두 가지 길밖에 없다… 캐롤 씨를 되살리고 죽느냐. 되살리지 못하고 죽느냐. 그것뿐이었다. 지혈할 방법이 없으니까. 어쩌면 되살아난 캐롤 씨가 내 본명에 대한 실마리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이름을 없앤 경위를 떠올려 보면 확률이 굉장히 낮았다. 우리가 그렇게 가까웠나? 내가 알기로 나와 캐롤 씨는 그저 마법의 머리카락으로 수다를 나누는 관계에 지나지 않았다.
느닷없이 기침이 나왔다. 입에 손을 대고 막자 몸이 흔들렸다. 두 번 콜록거린 만큼 복부에서 피가 두 번 울컥 터졌다. 입을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내자. 어느새 손은 피로 흥건해져 있었다. 입 안에서는 쇠 맛이 났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도무지 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힘이 부쳤다. 여전히 배 안에 남아있는 총알 파편들이 어딘지 모를 장기를 짓이겨댔다. 너무 아팠다. 너무… 감당하기 어려울 만치 아팠다… 산산이 부서진 뼈와 철조각들이 집요하게 살을 파고들었다. 눈이 까뒤집힐 것만 같아서. 나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울었다.
무의식적으로. 혹은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마음으로 나는 빛을 향해 조금씩 더 나아갔다. 다만 발은 한 발자국씩 나아가고 있다기보다 동굴 바닥에 질질 끌려가는 것에 더 가까웠다. 그 때문에 한 번 돌부리에 발이 걸려 휘청거렸을 때. 바닥에 무릎을 세게 부딪혀가며 팔을 짚었다. 코가 깨질 뻔했다. 그렇게 바닥에 두 팔과 다리를 딛고 엎드린 순간.
다시는 일어나 걷지 못할 것 같았다.
숨이 점점 가빠졌다. 산소를 전신으로 돌리기에는 피가 부족해져 가기 때문이었다. 한계까지 근육을 몰아붙였을 때. 팔이 더 이상 몸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느꼈다.
입을 열자 신음이 터져 나왔다. 고통 때문에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는 와중 나는, 내가 옳은 일을 하는지도 도무지 확신을 갖지 못했다.
"캐롤 브라이트는 부활해선 안 된다."
히무로의 말이 맞으면 어떻게 하지…?
캐롤 씨가 부활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정말 있다면. 그래서 내가 여기서 죽는 편이 더 낫다면…?
아니야. 아니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이야… 내가 죽는 편이 어떻게 더 나을 수가 있겠어. 나는…
"살고 싶어…"
그리고 캐롤 씨도 살고 싶을 거야.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그녀를 살릴 사람은 오직 나뿐이니.
내가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를 갈며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좀 쉬게 해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목소리들은 묵살했다. 아랫입술을 씹으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아랫입술이 조금 너덜너덜해졌다. 하지만 내 몸은 그런 사사로운 아픔을 느낄 여력이 없었다.
나는 빛을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너무도 느렸지만 분명한 전진이었다. 눈이 부시는 와중 팔을 들어 눈을 가리기도 힘이 들어. 나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걷기 시작했다. 반쯤은 정신을 잃었던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관성이 몸을 이끄는 대로 허나 넘어지지 않게끔 제때 발을 옮겼을 뿐이다.
여전히 출혈 부위를 막고 있는 한쪽 손과 천조각의 안에서 가장 연약하고 통증에 취약한. 물컹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너덜너덜해진 조직은 옷과 손에 닿을 때마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고통을 선사했다. 움직이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지 않으려고 애쓰기도 했는데, 그것은 팽창한 폐의 끝부분에 무언가가 툭툭 닿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풍선처럼 부풀렸다가 폐가 찢어지면 전부 끝장이었다. 결국 점점 숨이 가빠지기만 했다.
내 얼굴은 눈물과 피로 마구 얼룩져 있었다. 흰 옷의 가운은 붉게 물들었다. 나는 정말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있었다. 누군가가 뺨 한 대를 때리면 그대로 쓰러져 움직이지 못할만치 나는 쇠약해졌다.
마침내 눈이 멀 것 같은 빛을 뚫고 도달한 장소는, 사실 이상하리만치 별반 밝지 않았다. 패트리샤가 그곳으로 통하는 입구만을 밝게 해 놓은 듯했다.
그 장소에서는 황혼이 지고 있었다. 내 발밑에서 무언가 빠직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뼈였다. 하얗게 바래고 약화된 해골들. 동물의 것으로 보이는 뼛조각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 코요테. 사슴. 토끼. 너구리. 웬 두더지나 까투리 같은 잡다한 뼈들. 을씨년스러운 장소였다. 어딘가 기괴하고 불경스러운. 사악한 기운이 감도는 장소였다. 그 장소에서 색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나뿐이었다.
여기서 어떻게 그녀를 살려야 하지? 나는 초조해졌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골머리를 앓을 시간이 없었다. 패트리샤에게 소리쳐 당장 캐롤 씨를 부활시켜 달라고 말하려던 찰나. 나는 내 등줄기 사이에 놓인 머리카락 묶음이 어느 순간부터 이전과 비교되지 않는 세기와 격렬함을 가진 채 나를 어느 방향으로 이끄는 것을 느꼈다. 그 힘은 너무도 강해 나는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발로 걷는 게 아니라 머리카락이 나를 떠미는 것 같기도 했다.
동물의 뼈를 밟았다. 앙상한 고목들을 지났다. 어디선가 까마귀가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영안로의 끝은 공동묘지를 방불케 하는 음산함이 감돌았다. 원체 겁이 많은 나였지만, 죽음 앞에서야 사사로운 공포는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런 스산한 풍경들 사이로 나는 한 공터를 보았다. 그 공터는 공허함이 지배하는 뼈의 무덤들 사이 단 하나의 빛이었다. 백장미가 만발한 화원. 생명과 아름다움이 죽음 사이에 피었다.
그리고 그 산뜻한 공터의 중앙에. 백장미 꽃보다 더 밝은 빛을 내는 존재가 있었다.
점점 더. 점점 더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나는 절뚝거리며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캐롤 씨였다.
금색 유리로 변한 그녀가. 널려 있는 해골들 사이에 우뚝 서 있었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브락사스… 나는 그녀가 되살아나는 데에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그저 내가 사는 데에 그녀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녀가 보상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내가 보상받고 싶었다.
당신을 살리는 일은 내가 할 유일한 선행이며. 어쩌면 내가 저지를 최악의 죄일지도 몰랐다.
"나 왔어요… 캐롤 씨…"
그것 앞에 서서 무릎을 털썩 꿇은 순간. 머리카락은 아우성치기를 그만두었다. 무릎을 꿇은 것은 이윽고 끝까지 도달했다는 안도감 때문도 있었으나. 실상 내게 더 움직일 기력이 없기도 했다.
"캐롤 브라이트 씨를 부활시킬 건가요?"
패트리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몰랐지만, 이미 내게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 다른 행동의 선택지는 없었다. 배가 너덜너덜해진 사람 치고는 너무 열심히 움직였다. 내가 할 일은 끝났나? 이제 캐롤 씨는 부활하는 건가? 그 끝을 볼 기회도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위를 우러러보았다. 어두침침하고 침울한 구름에 모든 하늘이 덮여 있었다. 햇빛은 한 점도 없구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아아… 춥다…
10분 정도가 더 지난 시점에서 모노로그의 방송이 울렸다.
"이쯤이면 충분하겠지? 오지 않는 참여자들을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군. 어쩔 수 없이 참여할 수 있는 이들만이라도 재판에 참여해야겠다. 비로소 학급재판의 때가 왔다. 엘리베이터의 정문으로 모여라!"
"자. 죽으러 가 볼까?"
당시의 시점. 나와 후루미나미 나몬은 탑의 외부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할 것이 있었다. 나는 내 숙소 창문 아래 지점의 땅에 밧줄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팔을 걷어 젖히고 멋대로 떠났다. 나는 학급재판장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 1층의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나는 다른 이들이 계단을 따라 내려와 엘리베이터 앞에 서기를 바랐다. 총 7명이 도착했다.
"이것으로 전부 모였군."
"전부? 이게?"
하기와라 우시오가 물었다. 그 자신, 카나리 케이토, 토키와 아유키, 후루미나미 나몬, 이바라 쿠리스, 나. 그리고 제츠보가 인원의 전부였다. 세 번째 재판이 되었는데 참여자는 처음 인원의 절반 미만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벌써 그렇게 되었느냐는 반응이었다.
"그래. 전부 모였다."
모노로그가 바닥에서 솟아오르며 말했다. 영안로에 현재 갇혀 있는 인원들이 자율적으로 빠져나올 방법은 없었으니. 오직 7명이 치르는 재판이 되었다.
"영안로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 아는 사람 없어?" 이바라 쿠리스가 물었다.
"재판이 끝난 다음에 알려 주겠다. 너희는 지금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라. 그게 너희들의 생존에 있어서도 더 나은 일일 것이다. 진심으로."
모노로그가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영안로에서 벌어지는 일은 이미 나의 소관을 벗어났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이미 죽은 사람도, 지키지 못한 사람도. 내가 어찌할 수 없었다. 나는 이미 벌어진 일만을 수습하려 애쓴다. 언제나 그랬다.
이제 내게 주어진 과제를 마주할 때였다.
"검정을 잡는다. 죗값을 치르게 만들 것이다."
"좋지. 히무로. 우리끼리도 충분히 가능해."
하기와라 우시오가 팔꿈치로 나를 찔러댔다. 문득 곧잘 팔꿈치로 나를 찌르던 마유즈미가 생각났다. 나는 앞으로 계속 마유즈미가 하던 모든 행동들에서 마유즈미를 볼 것이다. 단 간식을 먹거나 모닥불을 피울 때. 낭떠러지를 볼 때. 총을 볼 때마다 그녀를 떠올리겠지.
모든 이들이 그렇게 산다는 것이 놀라웠다. 물론 언제나 그런 기억 속에 갇혀서 살지는 않으리라. 언젠가 기억은 흐릿해지니까. 하지만 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는 무뎌지게 될까?
고통을 덜기 위해 그 선명한 기억을 흐리게 될까?
"뭐라도 말 좀 해 주지. 무안하게."
"너는 무엇을 조사했지?"
"아. 조사 내용 공유 좋지. 탑에서 벌어진 대략적인 상황이나… 개인적인 심문 정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검정이 누구인지 아는 이상. 어떤 맥락에서 살인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정보도 큰 도움이 되리라.
다른 이들을 둘러보았다. 제츠보는 카나리 케이토를 노려보고 있었다. 카나리 케이토는 제츠보의 시선을 피했다. 토키와 아유키는 중얼중얼거리며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이바라 쿠리스는… 연한 갈색의 물이 담긴 비커를 가져왔다.
"저 비커는 무엇이지?"
"증거. 야가미의 커피에서 걸러낸 물질이야. 뭔지는 모르겠지만, 걸러내는 데 성공했으니 일단 가지고 왔어. 이게 뭔지 아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아."
물질의 추출에 성공한 것인가? 좋은 소식이었다. 나에게도 그런 게 있었으니. 나는 주머니 안에 넣은 작은 병을 생각했다. 양호실에서 발견한 물건이었다.
"카나리 케이토…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학급재판장에서는 제대로 대답을 하는 게 좋을 거야."
"헛소리를… 너 뻔뻔하지도 않아? 말하지도 못할 목적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무슨 목적? 너 정신 나갔어? 영안로에서 뭘 봤길래 이래?"
"너라면 내가 뭘 봤는지 대충 짐작이 갈 텐데!"
카나리 케이토와 제츠보 사이에 적대적인 기류가 돌았다. 카나리 케이토는 간이 크기도 했다. 손가락으로 찌르면 몸에 구멍이 날 사람이면서 분노한 인공지능을 적대할 수 있다니. 그 겁쟁이의 모습은 어디에 갔지? 저것은 만용일까?
"그런데 후루미나미랑은 왜 계속 같이 다니는 거야? 시비 거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하기와라 우시오가 물었다.
"정리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부득이하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도 있었고. 그리고 내가 어르고 달래 봤자 후루미나미 나몬은 내게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마유즈미 죽은 동안 내 거로 만들어야지. 낭비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
"어휴. 지랄이다 지랄…"
하기와라 우시오는 역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가슴이 떨려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했다. 결국 사필귀정이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범행은 밝혀질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반전도 없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분명 이번 재판에서 죽게 되리라.
"이제 곧 학급재판장으로 진입할 것이다.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불렀다고는 생각하지 않길 바라지. 나는 분명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그것을 적절하게 쓰지 못한 것은 너희의 과오다. 그럼…"
"두 명이 죽었는데. 검정도 두 명을 찾아야 하나?" 나는 모노로그의 말을 끊고 물었다.
"아. 맞아! 이것도 따져야 했는데 모노로그 이놈이 도무지 보이지가 않잖아. 야! 흑막 직무유기 좀 그만하고 우리한테 신경 좀 써라!"
"조용히. 자세한 사항은 학급재판장에서 마저 하겠다. 너희도 학급재판을 빨리 끝내고 싶을 텐데? 그래야 영안로에 있는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듣지 않겠나?"
"재판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애초에. 규칙 2번에서부터 학급재판에 열외자가 허용되지 않는다 명시하고 있다. 영안로에서 다른 이들이 나오기까지 기다린 뒤에 학급재판을 여는 게 옳다."
규칙 2: 시체가 3인 이상의 사람에게 발견될 경우 검정을 밝혀내기 위해 모든 학생들은 학급재판에 참여합니다. 참여하지 않을 경우 규칙 위반으로 간주해 처벌합니다.
"규칙 7번은 잊었나. 히무로 시라베?" 모노로그는 피식 웃었다.
규칙 7: 규칙들은 살해를 존중합니다.
"누군가가 영안로 속에 의도적으로 갇혔는데. 죽거나 살인 게임에서 제외시키기 위해 갇혔는데 내가 그걸 빼오면 쓰나? 행위자의 권리를 존중해야지. 그러니 지금 너희는 학급재판에 참여하는 것 말고 별반 수가 없단 말이다. 내게 대항할 수단도 없지. 있긴 했지만, 그걸 쓴 자들이 별반 힘을 못 쓴걸 어찌하나? 자. 잡담은 적당히 해라. 시작이다."
모노로그의 말을 듣고. 7명의 참가자들은 다시금 엘리베이터 속으로 발을 디뎠다. 그들 모두가 알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 엘리베이터에 다시는 발을 디디고 싶지 않을지라도 그들은 결국 다시 학급재판장으로 내려갈 운명이었다. 그것이 마지막 살인은 아니었다. 그들은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죽고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살인 게임도 마지막 것은 아니었다. 또 반복되겠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발버둥. 그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저항뿐이었다.
엘리베이터에 다다랐을 때. 하기와라 우시오가 내 등을 손바닥으로 세게 두드려댔다. 격려하고자 하는 몸짓 같았다. 어느 정도는 격려를 받았다. 아주 조금이었지만 나는 마유즈미도 함께할 때의. 아주 찰나였으나 짙었던 시간을 떠올렸다. 카친으로서의 활동을.
"히무로."
"뭐냐."
"탑의 평화를 지킬 사람 여기 여기 붙어라."
하기와라 우시오가 엄지를 치켜든 손을 내 앞에 들이밀었다. 나는 그의 손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거지?"
"뭐야. 너 이거 안 해 봤어? 여기여기 붙어라? 내가 조건을 말하고 네가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면 엄지를 네 손으로 감싼 다음 엄지를 펼치는 거야. 그럼 다음 사람이 네 손에 붙고 그러는 놀이야."
"이렇게 말인가?"
내가 하기와라 우시오가 말한 대로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모두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하기와라 우시오의 말마따나 다음 사람이 내 손에 '붙었다'는 것이었다. 이바라 쿠리스의 손이 내 위로 왔고. 그 위에는 제츠보가 왔다.
"어.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왜 예상을 못 해? 나랑 제츠보도 탑을 지키려는 사람이야.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실패할지 모르지만. 어떻게든 하고 싶다고…" 이바라 쿠리스가 말했다.
"붙으라길래 붙은 거야. 그리고 하기와라… 영안로에서 나가면 한 대 때린다는 약속. 학급재판이 끝나면 지킬게."
"무. 무슨?"
토키와 아유키는 네 명이 붙은 그 기이한 꼴을 흘끗 보더니 조심스럽게 제츠보의 손 위에 자신의 것을 올렸다. 그것을 보고 흡족해하는 하기와라 우시오를 본 시점에서. 나는 하기와라 우시오와 치른 일련의 행위가 고양을 위한 의식이라기보다는 아이들의 장난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손을 떼려다가 그만두었다.
"…우리끼리도 해낼 수 있어. 반드시 살아나가자." 하기와라 우시오가 말했다.
"당연하지… 가만히 죽어주지는 않을 거야…" 카나리 케이토가 말했다.
"검정은 자기가 저지른 일의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토키와 아유키가 말했다.
마유즈미는 내 곁에 없었다.
"그리고 그 끝에 탑에는 어떤 상처가 남을 것이며. 모든 게 어떻게 바뀌어 버릴까?" 후루미나미 나몬이 말했다.
"나는… 이렇게 빨리 빌 줄은 몰랐어. 이제 절반도 안 남았다니…" 이바라 쿠리스가 말했다.
"분명히 한 명은 더 줄어들 것이다. 검정이 있기 때문에." 내가 말했다.
"너무 늦었지만… 많은 걸 잃어버렸지만… 다시 할 수밖에 없어." 제츠보가 말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한 곳에 모인 다섯 개의 손은 서로 흩어졌다. 이제 누구도 믿지 못한다. 의지해야 할 것은 자기 자신. 반드시 잡아서 죽여야 하는 적이 있었다.
나와 후루미나미 나몬 사이의 일은 언젠가 정리되어야만 했다. 탑에 처음 온 순간 그녀의 행위에 관심을 드러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정신이상자와 맞닥뜨렸다. 그때부터 내겐 집요한 하이에나가 붙었다. 한 번 이빨을 드러내자 후루미나미 나몬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고기 맛을 보려 들었고. 결국에는 탑에 있는 이 중 하나를. 어쩌면 둘을 집어삼켰다.
과오를 거둘 순간.
죗값을 매길 순간.
언어를 통해서 싸울 순간.
히무로 시라베: 이제 학급재판의 때가 왔다.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이 시점의 네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야."
하기와라 우시오의 기억:
제츠보의 실종 - 제츠보는 며칠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칸나즈키의 은둔 - 수호령을 회복한 이후에도 칸나즈키는 카나리의 식사 배급을 타 먹었다고 한다.
칸나즈키의 식사 배급 - 칸나즈키의 식사 배급은 카나리와의 조율을 통해. 서로만 아는 시간대에 이루어졌다.
푹 퍼진 제츠보 - 캐롤의 영안로 속에서 제츠보는 뻗어 있었다.
목이 잘린 칸나즈키 - 칸나즈키의 머리는 잘린 채로 캐롤의 영안로 속에서 발견되었다.
야가미의 증언 - 야가미는 칸나즈키의 몸의 행방을 알고 있는 듯이 말했다.
공백의 2시간 - 야가미와 토키와는 서로 번갈아가며 후루미나미를 감시했으나, 두 사람도 감시하지 않은 2시간이 존재한다.
이바라의 참여를 막은 토키와 - 토키와는 이바라가 감시역을 하겠다는데도 말렸다. 별다른 이유는 없겠지만…
후루미나미와 야가미 사이의 불미스러운 일 -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가 있었다.
후루미나미의 증언 - 야가미가 자신을 줄곧 감시했다고 한다. 믿을 만한지는 모르겠다.
탑의 표준시와 다이얼로그 - 영안로에 들어갔다 나오면 다이얼로그의 시간 표시 부분에 오류가 생긴다. 이걸 통해 누가 영안로에 들어갔고 안 들어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후루미나미의 방에 접근할 수 있었던 두 명 - 야가미와 토키와만이 서로 열쇠를 공유하며 후루미나미의 방에 드나들 수 있었다.
시체 발견 후 다른 사람과 접촉하기까지의 시간 - 야가미는 오후 11시 20분에 시체를 발견해 놓고 질질 끌었다. 다른 이유가 있을까?
제츠보를 억류한 플라잉 로봇 - 제츠보는 힘만으로는 억누를 수 없는 존재인 만큼. 플라잉 로봇을 이용했을 정황이 크다.
피로 흠뻑 젖은 옷 - 칸나즈키의 옷은 전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야가미의 발작 - 야가미는 커피를 마시더니 느닷없이 고통을 호소했다. 그리고 죽었다.
굳어버린 야가미의 등과 다리 - 야가미의 목이 뒤로 꺾이고 등이 굽고 다리는 쭉 펴졌다.
야가미의 주장 - 야가미는 자신이 죽인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토키와의 증언 - 토키와는 야가미의 죽음이 견과류 알레르기 때문이라 말했다.
칸나즈키의 척추 옆 자상 - 척추 옆에 찔린 상처가 있었다. 왜 목을 안 찌르고 그렇게 밑을 찔렀을까?
히무로 시라베의 기억:
칸나즈키 시노부의 목의 삽입 흔적 - 몸 부분보다 머리 부분의 목구멍 지름이 더 넓었다. 머리 쪽에 무언가가 삽입되었고, 목까지 전부 도려낸 것을 보면 분명한 이유가 있다.
야가미 토가의 근육 강직 - 야가미의 몸은 기이하게 보일만치 굳었다.
독 없는 겨자 물 - 독이든 견과류든, 그것이 들어가 있었던 건 커피 쪽이다.
신장의 자상 - 검정은 칸나즈키 시노부의 신장을 노려 찔렀다. 누가 그럴 수 있었을까?
피웅덩이의 온도 - 칸나즈키 시노부의 시체 밑에 고인 피는 이상하리만치 온도가 낮았고 기이한 혈액 덩어리가 떠 있었다.
피가 묻은 캐리어 - 야가미 토가의 침대 밑에 놓여 있었다. 그것으로 칸나즈키 시노부를 옮겼는가?
에피펜의 부재 - 야가미 토가가 정말 견과류 알레르기라면 에피펜 없이 살 수 없었을 텐데.
고무호스 - 칸나즈키 시노부의 숙소 내에 있었다. 목구멍에 삽입된 물건이 그것이겠지.
방치된 도시락 통 - 칸나즈키 시노부는 식당에 가는 대신 카나리 케이토에게서 식사를 제공받았다.
칸나즈키 시노부의 수호령 - 후루미나미 나몬은 칸나즈키 시노부의 신통력 발휘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다.
수혈팩 - 누군가가 양호실에서 수혈팩을 가져갔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자백 - 후루미나미 나몬은 본인이 검정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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