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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3

더 단크 타워 챕터 3 - 22+4

by 도타싫어! 2023. 8. 17.

 

안 돼.

 

"네가 나를 잊어도… 내가 알아볼게."

 

안 돼. 안 돼. 안 돼.

 

"어떡해. 히무로. 너 정말… 어떡해… 안 됐어. 너무 안 됐어…"

"이제 울어. 히무로."

"울어도 돼. 정말이야. 엉엉 울어도 돼."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같이 가 줄 거야."

"…다 줘."

 

그러지 마. 마유즈미. 제발 그러지 마. 나는 견딜 수 없어. 내가 이런 일을 견딜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야?

 

나는 못해. 마유즈미. 이것만큼은 그럴 수가 없어. 너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잖아.

 

"내가 더 걱정한다니까!"

"… 근거는… 네가 잘생겼으니까. 네 좋은 점을 잔뜩 알고 있으니까."

"사심이 있어서 걱정이 된다고 하면… 그런 건 사소할 뿐이라고 할 거야?"

"기다려 줘?"

 

네가 나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지 너는 몰라. 너는 내 마음을 열어버렸어. 내가 연 것이 아니야. 네가 열어젖힌 거야. 여태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문을 두드렸지만 해낸 사람은 너뿐이야.

 

이런 일이 내게 벌어질 리가 없어. 같은 사람에게 이런 일이 두 번씩이나 벌어질 리 없어.

 

세상 사람들의 절반이 그렇게 생각하겠지.

이름 없는 남자도 그렇게 생각했겠지.

 

"…그러지 마. 바보야. 내가 반한 남자가 흉물이면. 나는 뭐야?"

"당근이지. 원래 누나한테는 의지해도 되는 거야. 히무로."

 

"히무로 시라베. 아웃."

 

"마유즈미!"

 

마지막으로 나는 마유즈미의 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를 잡고자 했지만,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

 

영안로 밖으로 나가는 동안 내가 지나온 풍경의 빛이. 내 눈을 밝혀 주었다. 내가 영안로에서 마지막으로 본 마유즈미의 얼굴은 야무진 선언과 정반대 되는 것이었다. 아쉬움과 두려움으로 얼룩진 마유즈미의 모습이 내 눈에 새겨졌다. 다시는 잊지 못할 얼굴이 나에게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

 

어둠에 둘러싸인 채 포옹을 했던 동굴이 지나갔다.

 

"…치. 웃겨 진짜. 내가 안아주니까 너도 안아준 거야? 그렇게 오는 추파마다 다 받아주면 안 돼."

 

함께 누웠던 산의 길바닥.

 

"오. 하기와라 말 잘했어! 그래. 히무로. 우리가 친구면 누워! 여기서 뒹굴뒹굴 구르자!"

 

함께 맞섰던 살인 열차 블레인.

 

"히. 히무로! 내가 잡아줄게! 일루 와!"

 

달디 단 간식을 나누어 먹었던 모닥불 앞.

 

"고마워. 그럼. 잘 먹겠습니다… 와! 이거 진짜 맛있다. 히무로!"

 

그 자리에서 나는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용서를 빌었다.

 

"폼 잡긴. 히무로. 유치해."

 

…머리만 남은 사람과. 누운 사람이 보인다.

 

그 모든 것을 바라본 끝에 나는, 탑의 7층에 도달했다. 세 개의 문이 있는 곳. 모든 일이 시작되어 버린 장소.

 

"더 와. 일루 와. 히무로. 너 나랑 같이 가."

 

함께 갔는데 그녀는 돌아오지 못했다. 한 명이 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내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총마저 내버렸다.

 

나는 요란하게 구르고 질질 끌리며 탑에 떨어졌다.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나를 내던졌다. 나는 엎드린 채, 너는 영안로 밖으로 나온 것이라 소리치는 검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마유즈미를 버려두고, 또다시 혼자 살아남았다.

 

나는 이것이 정말 악몽은 아닌지 의심했다. 괴로워서 도무지 진짜라고 느껴지지가 않았다. 생생하지만 나는 부정했다. 단지 이것이 정말 악몽일 뿐이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끔 본받겠으니 제발 당장 깨어나게 해 주기만을 바랐다. 끔찍해서 더는 꾸고 싶지 않았다. 하필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던 방식으로 그녀를 잃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악몽에서 깨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줄곧 그 안에서 살아왔다.

 

멍청한 것. 다른 이와 함께하며 나에게 심어진 종양과 한계를 언젠가는 극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나. 누군가에게 배가 부르다며 항복할 때까지 애정을 먹여줄 때가 올 것 같았나?

 

아니. 믿지 않았다. 거의 넘어갈 뻔했다. 그러나 결국 나는 회의적이었다. 나는 내 끝을 보지 않았다. 사람 아닌 자 4기의 말로를 나는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외로워!"

 

잊을 뻔했다. 나는 블레인이라는 것을.

 

비참한 세상 앞에 홀로 내던져졌다는 것을.

 

울음은 나오지 않고 비명조차 지를 기력이 없었다.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금색 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거의 의식하지도 못했다. 나는 그저 그녀를 다시 보고 싶었다. 가서 어떻게든 구해 데려 나오고 싶었다. 하지 못한 말과 답이 너무 많았다. 그것을 전하는 것만큼은 허락될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녀는 이제 없다." 라는 계시를 받았다. 사실이었다. 들어가서 무엇을 할 텐가? 몇 시간이 걸려 세 번째 구역에 다다라도 마유즈미의 추락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는데.

 

다 끝이었다. 나는 그 무엇도 보답할 수 없을 것이고, 유보했던 마유즈미의 마음에 대한 대답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만 마음속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해라. 잘 가라고. 마유즈미의 웃음. 천진함. 농담. 애정은 이제 없다.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내 등을 토닥이는 그 작은 손조차

 

그 생각에 미치자 나는 도무지 갈무리할 수 없는 고통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부조리하다. 너무 부조리하다. 그 생각만을 했다. 받아들이기에는 도가 지나쳤다. 마유즈미와 내가 가꾼 꽃은 화원이긴커녕 화분에 불과했다. 이제 막 심었고 잘 자랄지도 알 수 없는 화분. 그것을 그렇게까지 악착같이 가져가야 했나? 그리고 나는 이렇게나 쉽게 빼앗긴단 말인가?

 

그 무엇도 내 뜻대로 이루지 못했다. 줄곧 그랬다. 하지만 한 사람조차 허락되지 않을 줄은 몰랐다. 그토록 외세계는 인색하고 잔인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듯이. 나는 또다시 홀로 남았다.

 

만약 그게 정해진 결말이라면 애초에 만나지를 말았어야 했나. 바라지를 말았어야 했나. 답하지도 걱정하지도 원하지도 이름을 나누지도… 처음부터 시작하지도 않았어야 했나.

 

모르겠다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어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느 정도는 그렇게 되었다.

 

온기를 되찾아가던 내 마음은 반작용으로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식었다. 따라서 나는 마구 터져나와 나를 잡아먹으려 드는 통한의 유리병에 코르크 마개를 끼웠다. 나는 그 안에 있는 것을 마실 자격조차 없었다. 분에 맞지 않는 것에 매달리다가 카텟의 일원까지 죽게 만든 놈은, 독배로마저 목을 축여서는 안 된다.

 

슬픔이 들끓게 두고 비척비척 걸어갔다. 나의 형태에는 파멸이 내재되어있지 않던가. 누구도 내 곁에 남지 못하게끔 빚어졌다. 그에 따라 한 명이 또 사라졌다. 그뿐이었다. 그런다면  납득은 가지 않았으나 체념은 할 수 있다. 바포메트의 물건은 언제나 바포메트에게로.

 

나는 블레인이다.

 

누구도 꺼져가는 나의 탄식에 분노하지 않는다.

 

사랑은 달콤했나? 그럼 이제 할 일을 하자.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나는 블레인이다."

 

 

 

 

 

"시체 발견. 시체가 발견된 장소는 야가미 토가의 숙소 안이다."

 

모노로그는 키득키득 웃으며 방송했다. 야가미는 죽었다. 한 번에 두 명이 죽었고. 우리는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두 명이 죽으리라는 법이 없긴 했다. 두 번째 살인에서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시체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말해주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나름 추측해보자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살인에서는 모노로그는 다이얼로그를 차단하고 어디서 시체가 나왔는지 알려주지 않음으로써, 서로 경계하고 서로 마주치는 일을 꺼리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야가미의 숙소에 대부분의 사람이 모여있는 이상. 경계는 더 이상 성립되지 않았다. 그러니 장소를 말하든 말든 상관이 없는 것이리라.

 

사실. 그런 것보다는 야가미가 죽은 원인을 캐는 게 더 시급했다. 이바라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어 야가미를 살릴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우리에게는 다시금 수사해야 할 문제가 생겼다.

 

"야가미는 이 커피를 마시자마자 이렇게 되었다면서? 그럼 이 커피 안에 독이 들어있었던 거네. 그렇지?"

 

"아니야. 이바라. 독이 아니라 견과류야." 토키와가 말했다.

 

"너 아까부터 계속 중얼중얼거리더라. 견과류 때문이라고. 뭐. 야가미가 땅콩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거야?"

 

내가 묻자 토키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최근에 대화할 기회가 많았거든. 어쩌다 알게 됐어. 야가미는 심한 견과류 알레르기 환자야. 조금만 닿아도 쇼크가 일어나서 위독해진다고 했지만.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는데…"

 

토키와의 증언을 기억했다.

 

"알레르기로 저런 개발작을 한단 말이야? 가능은 해?"

 

"아나필락시스 쇼크의 정도는 개개인마다 차이가 있어. 하기와라. 얼마나 가공하느냐에 따라 증상이 더 심해지거나 덜해지는 사람도 있고 접촉하는 것만으로 발진이 생기는 사람도 많아. 하지만 야가미의 경우는 확실히 극단적인걸…"

 

후루미나미가 내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후루미나미에게 믿음이 가지 않았다. 태연하다는 듯이 수사를 하고 있지만. 후루미나미는 나에게 살인의 일순위 용의자였다.

 

하지만 하기와라. 토키와랑 야가미가 빈틈없이 감시했다잖아! 음. 그러시겠지. 역시 가장 수상한 건 십중팔구 영안로에서 돌아왔으면서 코빼기 하나 안 비추는 카이다였다. 카이다가 어떻게 견과류 알레르기를 알고 야가미를 독살했는지는 몰라도… 어. 잠깐.

 

"…그럼 견과류 알레르기에 대해 아는 사람은 토키와 너 하나네?"

 

"야가미와 달리 친한 사람이 없다면… 내가 다겠지."

 

"그럼 네가 죽인 거 아니야. 토키와? 너밖에 모르면 다른 누가 범행을 저질러."

 

야가미가 미쳤다고 그걸 혼자 먹을 리도 없다. 그걸 아는 게 토키와 하나면 토키와 말고 아무런 후보가 없다.

 

검정을 잡은… 건가?

 

"…어?"

 

토키와는 잔뜩 멍청하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꾸며낸 표정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정말 성실하게 떠올린 증언인데 자기한테로 시선이 쏠리니까 일이 잘못 돌아간다는 걸 깨달은 눈빛이었다.

 

"오오오! 잡았다. 잡았어! 토키와가 살인자다! 우우. 사형! 사형이다!"

 

"아. 아니야. 후루미나미! 얘들아. 내가 야가미를 왜 죽이겠어? 나에게 좋을 일이 어디 있다고!"

 

"…만약 내가 야가미 커피에 견과류 시럽이든 뭐든 넣은 장본인이라면. 누가 봐도 독인 쪽으로 여론이 흘러갈 때 그냥 가만히 헛다리 짚도록 내버려 뒀을 거야. 하지만 토키와는 그러지 않았어. 자기가 범인으로 몰릴 생각까진 못한 거겠지만. 굳이 정정한 걸 보면… 일단 그것만으로 단정 짓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 것 같아."

 

이바라가 말했다. 내가 듣기에는 꽤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야가미가 죽기 전에 커피를 마시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너무… 쓴데요… 으윽…"

 

"나 반론. 야가미는 커피를 마시면서 너무 쓰다고 말했어. 견과류 시럽을 넣었으면 오히려 조금 달다고 말해야 하지 않아? 애초에 견과류 냄새가 나면 본인이 안 먹었을 텐데."

 

"그 견과류 냄새와 맛을 숨기기 위해 범인이 무언가를 가미했을지도 모르지. 어떤 약물인지 아니면 식품인지는 몰라도." 후루미나미가 말했다.

 

"그럼 그냥 견과류 시럽을 탔다는 가설과 독을 탔다는 가설이 다를 바 없어지지 않냐? 차라리 둘 다 넣어서 죽였다고 하지 그래."

 

"난들 어떻게 하라고? 여기서 커피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아낼 법도 없잖아."

 

"있어." 이바라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내 전용실에서 알아보면 돼. 나라면 이 커피에 어떤 물질이 들어있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그럼 야가미가 먹은 게 견과류인지. 아니면 독인지도 확인이 되겠지. 내가 가져가게 해 줘."

 

"나는 찬성! 화학 지식이 많다면야 네 마음대로 하라지. 우리 중에 실험실 설비 갖춘 사람도 얼마 안 되잖아."

 

"그렇게 쉽게 결정할 거 아니야. 이년아. 이바라도 결국에는 100% 결백한 게 아니야. 미안한 말이지만, 혼자 저걸 가져갔다가 자기 멋대로 주무르지 않는다는 보장 있어? 옆에 감시할 사람은 붙여둬야 해."

 

나는 이바라 쪽으로 최대한 그러고 싶지 않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물론 나야 이바라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믿었다. 라인업을 보면 이바라보다 수상한 사람이 차고 넘쳤으니까.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모두의 목숨이 걸린 이상 나는 최악의 가능성까지 염두에 둬야 했다.

 

다행히 이바라는 그러지 말라는 듯 허공에 손을 휘적휘적했다. 오해가 쌓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기껏 돌아왔는데 간극이 생기는 일 따위 사양이었으니까.

 

"맞는 말이긴 한데. 하기와라이 자리에 네 명밖에 없는데 감시할 사람을 붙이면 인력이 엄청 줄어들어 버릴걸. 사실 나 한 명이 지금 빠지는 것마저 손실이 너무 커. 안에 들어있는 걸 알아야 하니까 손해를 감수하는 거지…"

 

"아니 씨발. 수사할 사람 다 어디 갔어. 아무리 자기가 범인 후보라도 이제 슬슬 얼굴 들이밀어서 뭐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영안로에서 애들 다 돌아온 다음에야 오케이. 조사 시작! 하던가."

 

빌어먹을 증거랑 미스터리는 넘쳐대는데 정작 사람이 부족했다. 사람이 두 명이나 죽었는데 네 명이서 처음부터 끝까지 수사하라고? 그것도 누가 범인이라 일부러 사실을 누락하거나 정보에 혼선을 놓을 확률을 제하고도 이미 어려운 일이었다.

 

"틀렸어. 하기와라. 특성상 영안로에서 돌아올 수 없는 사람도 있거든. 그런 자들은 영안로에서 썩어. 애초에 모두가 그 안에서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함정인 거 아니?"

 

후루미나미의 말에 나는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는 것으로 응수했다.

 

"무슨 개소리야. 실타래는 그냥 자기 이름에 아웃만 대면 돌아올 수 있어. 23T니 니산티니 가명을 두 개나 가지고 있던 제츠보도 자기 이름을 대니까 돌아왔다고. 그런데 왜…"

 

나는 후루미나미의 얼굴을 보고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이미 답은 다 알고 있는 채로 답을 모르는 사람을 한심하게 보며, 또 그 헤매는 꼴을 즐기는 웃음. 후루미나미가 우위를 점하고 있을 때의 웃음은 곧 내가 간과한 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생각이 미치자 나는 맹점이 어디였는지를 쉽게 떠올렸다.

 

가명… 진짜 이름을 써야만 나올 수 있다라… 아. 씹… 설마… 에이. 설마

 

"나나시가… 영안로 속에서 못 나온다고?"

 

개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답이었다. 23T도 니산티도 제츠보에게는 가명이었다. 그렇다면 나나시든 뭐든 그 가명들로는 영안로를 나올 수가 없다고?

 

"그럼 나나시는 처음부터 영안로에 참여할 수 없는 몸이라는 거야?"

 

"참여는 할 수 있어. 이바라. 나오지를 못하는 거지. 자기 본명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걸 어떻게 알아낼지는 자기 재량이고."

 

"그럼 구하러 가야 해!" 토키와가 말했다.

 

"진명이 필요하다니까 어떻게 구하자는 거야? 대책도 없긴. 나나시는 이제 죽은 사람이라고 보는 게 맞아.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나나시는 끝이야. 다른 사람도 그렇고."

 

"다른 사람? 다른 사람 누구?"

 

나는 물었다. 하지만 사실 그런 거나 물을 때가 아니었다. 애초에 후루미나미가 순순히 대답해 줄 이유가 없었고, 칸나즈키 시체 조사와 야가미 시체 조사만 해도 시간이 빠듯했으니까… 애초에 네 명이서 처리하기엔 일이 너무 많아졌다.

 

칸나즈키의 머리마저 조사하지 못한 채 왔는데. 시체가 하나 더 생겼다고?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야가미랑은 알리바이 대조도 못 해봤는데…! 필요할 때만 원한다고 누가 욕하면 할 말 없었지만, 그때 나는 토키와가 무슨 지시라도 내려주기를 기대했다. 일단 초고교급 리더였고 계속 자기가 리더 자리에 앉겠다는 의사를 표했으니까. 하지만 토키와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어야 하는 법. 내 질문에 후루미나미가 휘파람을 피우며 딴청을 피우자. 나는 한숨을 쉬며 일의 우선순위를 생각해 보았다. 영안로 속에 갇힌 사람들? 그게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나오지 못한다면야 우리끼리 학급재판을 해야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 영안로 사람 구출은 가장 마지막이었다. 애초에 후루미나미 말마따나 진명이 필요한데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사람 성씨와 이름 도감 건네주기?

 

그리고 가장 시급한 것은 살인 사건의 수사였다. 사람이 없으면 열심히 일할 수밖에. 나는 일단 누군가가 무슨 짓을 하기 전에 커피가 담겨 있는 텀블러를 손에 쥐었다. 그걸 먹는 순간 나도 죽을 수 있다고 상상하니 무섭긴 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일단 이건 내가 들고 있는다. 가만히 내버려 뒀다가 누가 어이쿠 하면서 쏟아버리면 성분 분석이고 뭐고 다 물 건너가는 거야. 다 동의하지? 나는 영안로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니까 이 사건들과 가장 관련이 없다고."

 

"그런 걸로 치면 나도 쭉 묶여있어서 관련이 없어. 하기와라."

 

"조용히 해! 솔직히 지금 누가 범인일지 덮어놓고 투표하면 네가 당선될 테니까. 그래서. 이바라. 후루미나미. 너희 둘이 칸나즈키 조사해서 밝혀낸 점이 있어?"

 

"기다려 봐. 하기와라. 그럼 영안로의 구출은 어떻게 해? 히무로도 아직 안 돌아왔잖아."

 

아오. 진짜 얘 왜 이러지? 나는 화를 삭이고 삭이면서 가장 논리적이고 듣는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쉬울 말을 떠올렸다.

 

"그럴 시간 없어. 토키와. 언제까지 히무로가 다 해줄 수는 없다고. 히무로가 오면 좋겠지만 안 온다면 우리끼리 해야 해. 모노로그는 언제 재판을 열지조차 공지 안 해줬다고. 언제 끌려갈지 모르는 와중에 사람을 구할 순 없어! 그래서…"

 

"칸나즈키의 옷을 벗겨서 살폈는데. 등 뒤에서부터 찌른 흔적이 있었어."

 

이바라가 말했다. 우리에게서 등을 돌려 어느 부위에 찔렸는지를 손가락으로 보여 주었다. 골반으로부터 한 뼘 정도 위였고 척추의 옆에 있었다. 뒤에서 찔렀다면. 기습인 것일까?

 

"그런데 뒤에서 찔렀다기에는 너무 위치가 낮지 않아? 나 같으면 경동맥을 노리거나. 정 안 되면 심장을 찔렀을 텐데… 거기 말고 다른 상처는 없었어?"

 

"뭐. 그것 말고는 목이 잘린 게 가장 큰 특이사항이지. 뒤에서 찔린 그거 하나 말고는 별것 없던데. 내가 꼼꼼히 살폈어. 외부에서의 자상은 그게 다야."

 

나는 칸나즈키의 척추 옆 자상을 기억했다.

 

칸나즈키는 키가 148cm다. 그런 애의 등을 낮게 찌르려면 보통 사람들은 몸을 구부려야 한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을 것이다. 목에 상처를 남기는 게 어느 방면에서나 나았다.

 

"이 상처로 죽은 것 같지는 않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기와라?" 토키와가 물었다.

 

"칸나즈키 키가 나보다 22cm 작거든. 그러니까 목이 한 이쯤 와." 나는 내 명치뼈 아래쯤을 가리켰다.

 

"그러면. 내 입장에서 칸나즈키를 죽여야겠다 싶으면 어딜 찌르겠냐? 목? 아니면 이보다 한참 아래인 그 상처 자리? 그냥 목을 찔러서 상처를 내 죽였는데 그걸 숨기려고 목을 자르고, 대신 척추 옆에 상처를 남겨놓은 거 아니야?"

 

"그래서 범인에게 무슨 이득이 되는지 모르겠어. 애초에. 칸나즈키는 줄곧 자기 방 안에 있었을 텐데 무슨 기습을 해? 사람이 벽을 뚫고 다닐 수도 없는데."

 

이바라의 말은 물론 납득이 되었다. 칸나즈키가 계속 방에 있었으면 애초에 죽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애초에 들어갔다 해도 수호령 빙의 상태라며. 어떻게 칸나즈키가 죽을 수 있었지? 나는 떠올리려 애썼다.

 

야가미가 당한 것과 같은, 그 사람의 무력도 어디에 있는지도 상관하지 않은 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독살… 인가?"

 

"뭐라고. 하기와라?"

 

"독살 아니냐고. 칸나즈키도 그렇게 당했을지 모른다는 거야. 일단 먹으면 끝장이잖아. 야가미처럼. 아. 젠장. 그렇다고 하기에는 목을 자르고 시체를 옮기고 할 필요가 없는데… 아니지. 야가미 방에 시체를 놓은 건 야가미한테 혐의를 뒤집어씌우기 위해서였어. 범인이 노린 구도는 야가미가 의심받게 만든 다음. 야가미를 죽여서 사건을 미궁 속에 빠뜨리는 거였을까?"

 

정보가 도무지 취합이 되지 않았다. 검정이 뭘 노리는 지도 알 수 없었다. 마치 미로 같았다… 하지만 내가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칸나즈키의 살인과 야가미의 살인이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딱딱 맞아떨어질 리가 없었다.

 

분명 후루미나미는 쭉 감시당하느라 움직이지 못했다는 것이 정설이었지만, 나는 후루미나미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내가 그녀를 싫어해서 괜히 하는 생각일지 몰라도 후루미나미보다 이런 종류의 살인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후루미나미는 정말 나온 적이 없다고 하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츠보를 얼린 카나리가 분명 수상하기도 했다. 게다가 카나리는 칸나즈키에게 독을 먹일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조건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만약 독을 먹였어도 어떻게 야가미의 숙소까지 들여와서 욕조에 버려둘 수가 있지? 목까지 자르고. 야가미는 정말 범인이 아닌 건가… 누구의 증언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칸나즈키가 마지막으로 뭘 했는지 알면 도움이 될 텐데. 칸나즈키랑 가장 가까웠던 놈의 행방을 모르니"

 

내가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 공교롭게도 누군가의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탑의 벽을 뚫고 야가미의 숙소에까지 울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건 분명 카나리 케이토의 것이었다.

 

 

 

 

 

제츠보를 옮기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나는 칸나즈키의 머리만을 들고 영안로에서 나왔다. 머리에는 목이 거의 온전하게 붙어 있었다. 보통 참수를 한다면 목의 중간 부분을 택한다. 어깨와 목 사이에는 신경이 많이 지나다니며 근육과 뼈가 억 센 반면, 목의 중간은 비교적 연약하기 때문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밝은 조명 아래에서 내려다보니 머리를 조금 더 잘 관찰할 수 있었다. 절단면은 깔끔하지 않았다. 억센 신경과 근육 다발을 끊느라 애를 쓴 기색이 보였다. 무엇보다 목의 단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때. 일반적인 목구멍 지름보다 목구멍이 더 넓어졌음을 보았다. 식도의 주변이 충혈되어 있었고, 내부에 손가락을 넣자 미세하게 헐고 약화된 조직을 느낄 수 있었다.

 

정황상 목 안에 무언가를 삽입한 게 틀림없었다. 검정에게는 칸나즈키의 식도가 필요했다. 무엇에 썼을까? 목을 창에 꿰기라도 했나?

 

칸나즈키 시노부의 목의 삽입 흔적을 기억했다.

 

야가미의 숙소를 향해 가기 전 나는 먼저 카나리의 숙소로 향했다. 제츠보를 기능 정지시킨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나는 그가 어떻게 제츠보를 영안로 안에 가두었을지 거의 짐작마저 할 수 있었다.

 

나는 오른손으로 카나리의 숙소 문을 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안에서 숨죽인, 그리고 입을 막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겁쟁이 놈. 설마 했더니 자기 방에 틀어박혔나.

 

"문을 열어라. 카나리 케이토. 네가 칸나즈키 시노부를 죽였나? 안에 있는 것을 안다. 열어라."

 

"아…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야…"

 

카나리 케이토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자신이 저지른 짓이 아니라면 사람이 죽었는데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멍청이고,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면 헛수작으로 나를 속이려는 시도였다.

 

그에게서는 어떤 종류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그는 아마 재판이 시작하기 직전까지 도움이 되지 않은 채 처박혀 있을 것이다. 나는 그를 내버려 두기 전에. 그가 칸나즈키의 살해와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한 반응을 떠 보기로 했다.

 

"그래. 믿겠다. 내가 너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 문을 조금만 열어주는 것으로 족하다. 이것을 확인만 해 준다면 나는 아무런 요구사항 없이 돌아가지."

 

그러자 방 안에서부터 조심스럽게 문을 향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여 다행이었다. 협박이나 할 시간이 없었다.

 

"정말 보기만 하면 되는 거지? 대체 그게 뭐라고…"

 

카나리는 반신반의하는 기색을 목소리에 담은 채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나는 작게 생긴 틈을 놓치지 않고 그 사이에 내 왼손에 들려 있는 것을 들이밀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너에게 달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어우. 씨발!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 너무 큰 나머지 위층에서 들려왔다. 그건 아무리 들어도 카나리의 것이었다. 설마. 설마. 아. 개지랄이야.

 

"카. 카나리?!"

 

이바라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숙소를 뛰쳐나갔다. 나를 포함한 나머지 인원들도 거기에 멀뚱멀뚱 서있지는 않았다. 비명이 들려온 것은 3층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3층으로 달려 올라가려던 찰나. 그 위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렸다.

 

"올라올 필요는 없다. 그저 겁만 주었을 뿐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새된 비명이 울렸다. 당연히. 후루미나미의 것이었다. 3층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히무로의 것이었으니까. 아주 살판났군… 나는 후루미나미의 신난 기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히무로를 다시 봐 다행이긴 했지만…

 

"꺄아아! 왔구나! 내 사랑. 시지프 신화의 등장인물. 불행한 반신아. 의무를 뒤집어쓴 티탄! 저 장대한 모습을 보라. 오. 나의 남편!"

 

나는 후루미나미의 그 장황한 개소리를 듣고 비로소 히무로가 돌아왔구나. 싶어 잔뜩 반가워졌다. 나나시가 영안로에서 영영 나오지 못하리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히무로와 마유즈미도 그럴까 싶어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다행히 둘은 무사한 모양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몰라도

 

히무로가 계단을 내려오자 천천히 히무로의 모습이 드러났다. 늘 똑같은 창백한 피부에 빨간 머리카락.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조금 꺼림칙한 인상이었으나. 그 좀비 같은 행색이 그렇게 반갑기로는 처음이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잘했어 이 새끼야! 반갑…"

 

우리는 히무로를 보았다. 욕으로 어느 정도의 친근감을 표현하려던 나는 히무로의 행색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영안로에서 조금이나마 풀어진, 인간미가 조금이라도 생긴 모습에서 완전히 어긋난 버린. 아무런 표정도 표현도 없는 히무로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히무로의 행색을 더 기괴하게 만드는 요인은 따로 있었다.

 

"으아. 세상에!"

 

"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히무로. 그거 내려놓지 못해?!"

토키와와 이바라는 각각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히무로의 왼손에는 칸나즈키의 머리가 있었다. 캐롤의 영안로. 제츠보 옆에 있던 칸나즈키의 머리 부분이었다. 히무로는 그걸 조심스럽게 옮기지도 않았다. 음식을 포장해 온 듯이 히무로는 칸나즈키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있었다. 그 장면은 아무리 윤리에 인색한 나조차도 놀라게 화들짝 놀라게 만들었다. 나는 속으로 그에게 물었다. 어쩔 작정이야. 히무로? 어쩌자고 사람 머리를 그렇게 옮기는 거냐고.

 

"영안로 속에서 발견했다. 수사해야 하니 방치해 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걸 손으로 들고 온 거야?! 저… 정신이 나가버린 거야…?" 토키와는 중얼거렸다.

 

히무로와 헤어진 지는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 사이에 히무로는 예전처럼. 아니 예전보다 더 무심해졌다. 나와 마유즈미가 소중하다며 축 처져있던 그놈과 같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칸나즈키의 목에서는 아직 마르지 않은 피가 몇 방울씩 엉겨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머리를 잡고 있는 히무로의 손조차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귀기 어린 모습이었다. 히무로는 살인자처럼 보였다. 우리와 같은 곳에 발을 딛고 사는 게 아니라 피안(彼岸)에서 내려온 것 같았다.

 

"두 번째 살인의 피해자와 살해 방법은 무엇이지?"

 

"야가미가 죽었어. 커피를 마셨더니 죽었어. 독인지 견과류 알레르기인지 우리끼리 의견이 갈리긴 해."

 

우리는 안부를 묻기보다 죽은 사람에 대해 먼저 이야기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는 텀블러를 히무로에게 보여주었다.

 

"그 커피는 아직 남아있나?"

 

"남아있어. 이바라가 안에 뭐가 들어있던 건지 알아보려 하고 있지만, 이바라를 감시해 줄 사람을 붙이기엔 수사할 사람이 부족해져."

 

"정 급하다면 이바라 쿠리스 혼자 보내는 것도 방법이다. 커피는 엎어지지 않게끔 잘 간수해라. 이 방 안에 칸나즈키 시노부의 몸이 있나?"

 

나는 그렇다고 대답해 주기 전에 히무로한테 이야기하고 싶었다. 히무로. 다 필요 없고 칸나즈키 머리 좀 어떻게 내려놔. 미친 새끼야. 왜 이러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너 히무로 맞긴 해?

 

"제기랄. 머리 좀 내려놓지 못해. 히무로?!" 나 대신에 토키와가 소리쳤다.

 

"오. 내 정신 좀 봐! 바깥양반이 돌아왔는데 짐도 안 들어주고.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많이 힘드셨죠?"

 

"꺼져라. 후루미나미 나몬."

 

후루미나미가 머리를 자신에게 달라는 식으로 쫄래쫄래 걸어가자. 히무로는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그리고 이바라와 토키와가 앞서 이야기했던 대로. 자기의 발치에 칸나즈키의 머리를 두었다. 아니 길바닥에 내려놓지 말고 좀 성의 있게… 아. 됐다

 

"히무로. 마유즈미는 어디에 있어? 나나시는 무사해? 카이다도?"

 

히무로가 이바라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저벅저벅 야가미의 숙소로 들어갔다. 그게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히무로 입장에서 세 사람의 안위를 설명해 나쁠 건 조금도 없었다. 그러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야야야. 히무로 이 새꺄. 대답 좀 해 주라. 무시하지 말고…"

 

나는 히무로가 놓고 간 칸나즈키의 머리를 들고 싶었지만 손에 들려 있는 독 탄 커피 텀블러 탓에 주저했다. 한 손으로 들기가 어딘가 뭐했다. 내가 쩔쩔매는 와중 후루미나미가 바닥에 놓인 칸나즈키의 머리를 낚아챘다. 얄미운 년. 그러는 와중에도 나쁜 예감은 가시지 않았다. 히무로가 대답을 하지 않으면 하지 않을수록 안 좋은 가능성이 아우성을 쳐댔다.

 

"여보야 좀 그만 귀찮게 해. 얘들아. 누가 봐도 죽었잖아. 왜 이미 힘든 사람한테 계속 비수를 꽂아?"

 

후루미나미의 말에 나쁜 예감은 배가 되었다. 나는 칸나즈키의 머리를 바닥에 떨굴 뻔하기까지 했다. 나는 왜인지 화가 나 후루미나미를 쏘아붙였다.

 

"야. 닥쳐. 정신 나갔다고 다른 사람한테 멋대로 해도 되는 건 아니야. 재미라도 있던가 지금 무슨…"

 

"농담 아니야. 마유즈미는 영안로 안에서 죽었을 거야.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눈에 선히 보여.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잔뜩 방심해 있었겠지. 실타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본인이 직접 확인하지도 않았으면서 말이야. 뭐. 누가 먼저 끝에 도달하느냐의 승자독식 경주에서 그거 시험하겠다고 출발점으로 돌아갈 사람은 없으니. 이제 도무지 안 되겠다! 싶어 실타래를 썼지만 작동하지 않으니 잔뜩 당황하고. 결국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했겠지?"

 

히무로는 후루미나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야가미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 못 들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히무로는 귀가 나보다 훨씬 좋다. 그저 후루미나미를 무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후루미나미. 너 진짜…!"

 

"사실인 걸 어떡해. 이바라? 히무로도 부정 안 하잖아. 마유즈미뿐 아니라 나나시도, 카이다도 영안로에서 못 나올 거야. 탑이 많이 휑해지겠다. 아하하! 어쩌면 좋아!"

 

"너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을 알고 있었나?"

 

히무로가 후루미나미에게 물었다. 그게 처음으로 보인 반응이었다. 망할. 야 이 새끼야. 거기서 후루미나미한테 그걸 물어보면 어떻게 해. 지랄하지 말라며 뺨을 때렸어야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데 이렇게 될 줄 알았냐는 무슨. 후루미나미의 말이 옳은 것 같잖아.

 

빌어먹을 가명 때문에 마유즈미도 못 나왔다고 하는 것만 같잖아. 그러니까 욕을 해. 제발. 이 새끼야.

 

"나는 처음부터 모든 걸 알았지. 다 기억해. 히무로. 너희들 하나하나의 과거사를 다 알아. 당연히 마유즈미가 가서 돌아오지 못할 줄도 알았지. 하지만 그걸 귀띔해주지 않은 건 내 자유지. 안 그래?"

 

"그렇겠지. 너희들 중 누가 야가미에게 겨자 탄 물을 먹였나?"

 

"이바라가 먹였어. 히무로. 제대로 못 삼킨 데다가 턱이 무슨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물어져서 고생 좀 했지." 내가 대답했다.

 

"그렇군. 야가미 토가의 킬로그의 내용이 여기에 있다. 읽어라."

 

"뭐?! 아니. 그새 생겼어? 뭐라고 적혀 있는데?"

 

내가 묻자. 히무로는 내용을 읊었다.

 

피해자: 초고교급 협상가. 야가미 토가.

 

시체가 발견된 곳은 야가미 토가의 숙소 안.

 

피해자의 전신은 굳어 있음. 몸의 단말이 수축되고 등이 굽음. 입에서는 침이 새어나옴. 턱의 근육을 끊어놓은 상처가 있음.

 

"아. 그 부분은 우리가 한 거야."

 

"턱의 근육을 끊어가며 겨자 탄 물을 먹였군. 이해했다."

 

사망 추정시각은 오전 12시 40분경.

 

"의도적으로 나 무시하게? 네가 그런다고 누가 칭찬이라도 해주니? 응? 화라도 내 보시지. 

 

후루미나미는 히무로가 간 길을 따라 야가미의 숙소로 걸어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벙찐 채로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나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마유즈미, 나나시, 카이다. 다 돌아오지 못한다고? 그럼 지금 몇 명이나 죽는 거지? 다섯 명. 이 안에 있을 검정까지 생각하면 여섯 명?

 

나. 카나리. 토키와. 후루미나미. 이바라. 히무로. 제츠보. 이게 전부란 말이야? 심지어 이 안에서 한 명이 더 줄어들 수도 있다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와중. 우리는 곧바로 무엇을 할지도 떠올리지 못했다. 반푼이 들이라고 욕을 먹어도 쌌지만, 정말 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마유즈미와 막 친해졌는데 그렇게 쉽게 보낼 수는 없었다.

 

"카친이다! 너도 카친이야. 와자뵤!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대도. 우리끼리 얘기해야 한다고 했잖아. 나 천재인가 봐!"

 

그 밝던 애가… 이바라 말마따나 무슨 양심 같던 애가. 죽었다고?

 

"아니… 거짓말이지…? 마유즈미랑 나나시… 이게 무슨 개 같은 일이야…"

 

이바라와 토키와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바라는 이미 두 번의 죽음 앞에서 충분히 피폐해진 와중. 자기가 그렇게 귀여워하던 마유즈미의 부고를 들었다. 아무리 이바라가 프로다운 사람이라고 해도 그걸 곧바로 딛고 일어나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토키와는 내가 영안로에 오기 전부터 상태가 안 좋았으니 더욱이 안 좋아졌고

 

그렇게 생각하면 히무로 저놈도 분명 저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망할. 등이라도 토닥여줘야 하나.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 상념들을 헤치고 나는 우선순위를 정했다. 이런 거는 리더가 좀 해주면 안 되나 하는 불만이 보글보글 피어났다.

 

"일단… 이바라. 너는 커피 성분을 분석하러 가. 히무로가 여기에 왔으니까 수사 인력은 어떻게든 될 거야. 그래서 누가 이바라를 감시할지인데… 내가 갈게. 달리 갈 사람이 있나 싶다."

 

"아니. 하기와라 너는 안 돼. 이바라를 중립적인 시선으로 보지 못하잖아. 내가 가겠어."

 

"뭐… 토키와 말도 일리가 있으니까. 토키와 네가 오는 게 낫겠다… 일단 따라와. 전용실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이바라가 자신의 전용실로 막 향하려던 찰나. 예상치 못했던 또 다른 목소리가 계단 위에서 들려왔다.

 

"야… 야! 너희!"

 

"…저 새낀 또 뭐야?"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얼굴을 보았다. 솔직히 재판이 오기까지 그냥 어딘가에 숨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놈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카나리 케이토는 우리 앞에 나타났다.

 

"뭐 하려고 나온 거야. 카나리?" 토키와가 말했다. 어투에 날이 서 있었다. 나만 그 기색을 느꼈는지는 몰라도 토키와는 카나리만을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카나리는 토키와의 따지는 듯한 말에 주눅이 든 듯 입을 꾹 다물다가, 다음 순간 소심하게 다시금 입을 열었다.

 

"도와줄게…"

 

"뭐?"

 

"칸나즈키 살인범을 잡을 수 있게 해 줘. 뭐든 도와줄 테니까… 시키기만 해."

 

"너 마침 잘 왔다. 너 수사 참여도 안 해서 아무것도 모르잖아? 나 따라와. 조수 역할 좀 해! 하기와라. 커피 나한테!"

 

"어? 어. 그래!"

 

나는 얼떨결에 이바라에게 커피를 넘겼다. 카나리는 쪼르르 이바라를 따라 이바라의 전용실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히무로와 후루미나미가 같이 가고. 이바라와 카나리가 같이 가고. 남겨진 나와 토키와는 어색하게 그 자리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제 뭘 하지? 애초에 히무로가 다시 돌아왔는데 내가 할 일이 있나? 하는 게으른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으나, 문득 나는 떠올렸다. 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어쩌면 히무로가 하지 못하는 일을 내가 할 수 있으리라. 블레인을 죽였을 때처럼.

 

"대체 카나리는 어디서 뭘 하다가 이제서야 나타난 거지? 너무 수상해.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그러게… 나도 카나리가 수상하다고 생각해. 제츠보를 억류한 것도 그렇고 분명 저놈한테는 비밀이 많아. 아주아주 수상하지."

 

토키와는 옳지 잘 한다 그런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내 반감에 흡족한 눈치였다. 왜인지는 몰랐다. 이제 알아가게 되겠지.

 

"그래서 말인데 토키와. 내가 이 탑을 좀 오래 비웠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없었던 동안 탑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모르거든. 좀 정확히 들을 수 있을까?"

 

히무로가 수사 쪽이라면. 나는 심문을 한다.

 

 

 

 

 

 

 

 

견과류 알레르기는 개인의 차가 있다지만 사람이 팔다리로 삼각대를 세울만치 근육이 강직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야가미 토가의 전용실을 수사한다면 답이 나오겠지.

 

야가미 토가의 근육 강직을 기억했다.

 

"신선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히무로. 네가 처한 상황이 밉지도 않아? 나조차도 밉지 않다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 너는 그냥 감각을 차단하려 애쓰는 거잖아."

 

후루미나미 나몬은 내 옆에 붙어 나를 귀찮게 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내 할 일을 했다. 텀블러 안에 독을 넣었다면 야가미 토가의 생활 패턴을 관측할 만한 누군가의 소행이었다. 그는 또한 야가미 토가의 숙소에 침입할 수 있는 사람이리라.

 

"네가 없는 동안 나 너무 심심했어. 히무로. 하지만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해. 너는 돌아와 주었으니까. 그것도 차고 넘치는 비극과 함께 왔어. 아. 사랑스러운 서방님. 고 도둑고양이 년은 확실히 끊어내고 오신 거죠? 가지 말라는 마유즈미를 뿌리치고 건너오셨나요? 아니면 오발사고로 피가 흐르는데 실타래가 통하지 않았나요? 우후후."

 

야가미 토가에게 먹인 것으로 추정되는, 겨자 탄 물이 조금 남아있는 컵을 찾았다. 손가락에 찍어 입에 넣었을 때 겨자 맛 말고는 별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다. 적어도 겨자 탄 물에는 독이 없었다. 역시 독이 들어 있었던 건 커피 쪽이다.

 

독 없는 겨자 물을 기억했다.

 

"애초에 지금 왜 수사를 하려는 지도 모르겠네. 탈출이 끝났다는 의미를 너는 알잖아. 나 같으면 그냥 떨어져 죽던가 수사 안 하고 다 같이 처형당하면서. 다음 루프로 넘어갈 텐데. 왜 그렇게 애를 쓰니?"

 

"그렇다면 너는 왜 칸나즈키 시노부를 죽였지?"

 

보이는 반응은 없다. 그녀를 상대로 추궁이 쉬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정도의 잔혹한 살인은 오로지 너만의 것이다. 다른 이들의 성정이 너보다 선하다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 이런 종류의 번거로운 잔인함은 떠올리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너는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지."

 

"아직 얘기 못 들었구나? 나 쭉 묶여 있었다?"

 

"그렇다면 묶여있지 않았던 거다. 이 수수께끼는 수수께끼로 기능하지조차 않는다. 나더러 속아 넘어가라는 말이냐? 이 살인을 네가 저지르지 않았다고? 나는 속지 않는다."

 

"범인을 정해놓고 추리를 하다니. 너답지 않아. 히무로. 전혀 너답지 않아. 애초에 나는 루프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야. 너랑 나 단둘이 남는 게 내 목표라고. 나만큼 너 사랑해 주는 사람도 없을 텐데! 이러면 나 마음이 아파!"

 

마음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주제에 그것이 아프니 어쩌니 떠드는군.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왜 사람을 죽였지? 얻을 수 있는 게 하등 없다는 걸 너는 알 텐데. 게다가 네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숨기지도 않았다. 뭘 꾸미고 있는 거지?"

 

"내 목표는 언제나 똑같아. 히무로. 너라는 사람을 가지는 거야."

 

"자백이라도 하는 거냐."

 

"자백은 무슨. 그냥 늘 하는 사랑 고백이지. 그리고 너는 이걸 당연한 듯이 여기면 안 돼. 네 처지에 사랑을 가려먹을 생각이야? 나 말고 누가 널 사랑할 건데? 마유즈미? 죽었어."

 

후루미나미 나몬의 얼굴이 내게로 가까워졌다.

 

"시체의 얼굴은 좀 내려놓고 이야기하지."

 

"불편하지도 않으면서 웃기시네. 내가 하고 싶다면 마유즈미의 목을 가져와서 네게 종용했을 텐데. 자. 이걸 봐. 받아들여. 히무로. 받아들이라고. 마유즈미는 죽었어. 이제 너한테는 나밖에 없어. 누구도 널 사랑하지 않잖아. 심지어는 너조차도 네가 싫잖아… 이런 식으로."

 

진심으로 구애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녀와 나는 서로를 안다. 그녀는 내가 그딴 값싼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니 그녀의 시도는 그저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그녀를 향한 악감정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어 언젠가 터뜨릴 수 있게끔.

 

"안정은 안정이야. 히무로. 사람의 몸은 간단해서 무엇이든 크고 따뜻한 걸 껴안으면 옥시토신을 내뿜는다고. 그러니까 죽은 년 대신에 앞으로는 나랑 놀자. 날 껴안으며 마유즈미 생각해도 돼. 정말로."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는 것이 분했다. 팔을 펼쳐 나를 껴안으려는 기색을 느끼자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치워 버리고, 야가미 토가의 욕조 안에 있는 칸나즈키 시노부의 몸 부분을 향해 다가갔다. 등 뒤에서 후루미나미 나몬이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아앙! 진짜 너무 매정해!"

 

화장실 근처에 피로 범벅이 된 무녀복이 있었다. 자세한 검시를 위해 벗긴 모양이었다. 칸나즈키 시노부의 시체는 엎드린 형태를 하고 있었다. 등 뒤에서부터 찌른 자상을 찾았다. 정확히는 신장을 찔렀다. 통증이 극심한 부위였다. 찌르는 순간 대개 기절하고, 쇼크로 사망한다. 그러나 이런 지식을 아는 자는 드물었다.

 

신장의 자상을 기억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말고 이런 살인이 가능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사람의 육체와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 이바라 쿠리스 정도이리라. 그렇지만 의문이 떠오르는 것이야 어쩔 수 없었다. 왜? 왜 사람을 죽인 거지. 어차피 탑에서 못 나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후루미나미 나몬. 칸나즈키 시노부의 머리를 이리로 넘겨라."

 

"여기."

 

나는 시신의 몸을 일으켜 목구멍의 지름을 재고 그것을 머리 쪽의 지름과 비교했다. 확연히 머리 쪽의 지름이 넓었다. 역시 무언가를 삽입했다. 그것을 분명히 하고 나는 욕조 안에 칸나즈키 시노부의 머리를 놓았다.

 

할 일이 많았다. 칸나즈키 시노부의 숙소를 찾아가야 하고 야가미 토가의 전용실도 마찬가지였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닫힌 문을 열기 위해 그들의 열쇠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는데, 야가미 토가의 것은 몸수색을 통해 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칸나즈키 시노부의 것은 요원했다.

 

"나 데려가. 내가 문 열어줄게."

 

"집어치워라.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누구도 그녀 대신은 될 수 없다. 그런 저열한 방식의 제안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이미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니까. 히무로? 결국 누구든 간에 안기만 하면 사람은…"

 

"그렇다면 너도 토키와 아유키한테 가면 될 일이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그 말에 그저 입을 다물었다. 늘 그렇듯 눈을 가늘게 뜬 채 웃기만 하였다.

 

"너도 나 대신에 다른 사람에게 집착해라. 그를 유혹해 나락에 떨어트려라. 나보다야 손쉬울 것이다. 네가 부르면 부름 받은대로 오는 옥시토신 주사지. 왜 하필 나여야 하지? 왜 너는 그렇게 하지 않나? 궤변은 늘어놓지 마라. 우리 모두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그것은…"

 

"그것은 저열한 짓이고 무의미하니까. 자기위로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지."

 

후루미나미 나몬은 곧 깨달았을 것이다. 그 표현이야말로 내가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것을.

 

 

 

 

 

 

 

 

 

하기와라 우시오의 기억: 

 

제츠보의 실종 - 제츠보는 며칠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칸나즈키의 은둔 - 수호령을 회복한 이후에도 칸나즈키는 카나리의 식사 배급을 타 먹었다고 한다.

 

칸나즈키의 식사 배급 - 칸나즈키의 식사 배급은 카나리와의 조율을 통해. 서로만 아는 시간대에 이루어졌다.

 

푹 퍼진 제츠보 - 캐롤의 영안로 속에서 제츠보는 뻗어 있었다.

 

목이 잘린 칸나즈키 - 칸나즈키의 머리는 잘린 채로 캐롤의 영안로 속에서 발견되었다.

 

야가미의 증언 - 야가미는 칸나즈키의 몸의 행방을 알고 있는 듯이 말했다.


공백의 2시간 - 야가미와 토키와는 서로 번갈아가며 후루미나미를 감시했으나, 두 사람도 감시하지 않은 2시간이 존재한다.

이바라의 참여를 막은 토키와 - 토키와는 이바라가 감시역을 하겠다는데도 말렸다. 별다른 이유는 없겠지만

 

후루미나미와 야가미 사이의 불미스러운 일 -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가 있었다.

후루미나미의 증언 - 야가미가 자신을 줄곧 감시했다고 한다. 믿을 만한지는 모르겠다.

탑의 표준시와 다이얼로그 - 영안로에 들어갔다 나오면 다이얼로그의 시간 표시 부분에 오류가 생긴다. 이걸 통해 누가 영안로에 들어갔고 안 들어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후루미나미의 방에 접근할 수 있었던 두 명 - 야가미와 토키와만이 서로 열쇠를 공유하며 후루미나미의 방에 드나들 수 있었다.

시체 발견 후 다른 사람과 접촉하기까지의 시간 - 야가미는 오후 11시 20분에 시체를 발견해 놓고 질질 끌었다. 다른 이유가 있을까?

제츠보를 억류한 플라잉 로봇 - 제츠보는 힘만으로는 억누를 수 없는 존재인 만큼. 플라잉 로봇을 이용했을 정황이 크다.

피로 흠뻑 젖은 옷 - 칸나즈키의 옷은 전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야가미의 발작 - 야가미는 커피를 마시더니 느닷없이 고통을 호소했다. 그리고 죽었다.

 

굳어버린 야가미의 등과 다리 - 야가미의 목이 뒤로 꺾이고 등이 굽고 다리는 쭉 펴졌다.

 

야가미의 주장 - 야가미는 자신이 죽인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토키와의 증언 - 토키와는 야가미의 죽음이 견과류 알레르기 때문이라 말했다.

 

칸나즈키의 척추 옆 자상 - 척추 옆에 찔린 상처가 있었다. 왜 목을 안 찌르고 그렇게 밑을 찔렀을까?

 

 

 

 

 

히무로 시라베의 기억:

 

칸나즈키 시노부의 목의 삽입 흔적 - 몸 부분보다 머리 부분의 목구멍 지름이 더 넓었다. 머리 쪽에 무언가가 삽입되었고, 목까지 전부 도려낸 것을 보면 분명한 이유가 있다.

 

야가미 토가의 근육 강직 - 야가미의 몸은 기이하게 보일만치 굳었다.

 

독 없는 겨자 물 - 독이든 견과류든, 그것이 들어가 있었던 건 커피 쪽이다.

 

신장의 자상 - 검정은 칸나즈키 시노부의 신장을 노려 찔렀다. 누가 그럴 수 있었을까?

 

 

 

 

 

 

 

 

 

 

괜찮아.

 

나는 이대로도 괜찮아.

 

히무로라면 잘 해낼 거야. 나는 믿어. 히무로라면 내가 여기서 죽어도… 이윽고 일어날 거야. 다시 멋진 일을 할 거야. 내가 하지 못한 몫까지 전부 해줄 거야. 맛있는 걸 먹고. 실컷 자고. 사랑을 하고… 사랑 응원해 줘야겠지…?

 

그러면서 살아남아줄 거야.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의 일일면을 탐험할 거고. 이 살인 게임에서 나가서 흑막을 멋지게 무찔러주겠지. 왜냐면 히무로는 강하고 멋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은 히무로가 유지를 이어받아 주는 거야. 그럼 내가 히무로의 수호천사가 되는 거지. 그러면 우리는 쭉 같이 모험할 수 있는 거고

 

…그러니까 괜찮아.

 

나도 살고 싶었지만… 괜찮아… 히무로 말마따나 그냥 나가려 하지 않은 내 잘못이잖아. 일찌감치 그랬으면 떨어지는 와중에 내 이름을 몰라 전전긍긍하지는 않았을 텐데. 어떻게든 방법이 있었을 텐데… 나나시는 괜찮으려나…? 제발 괜찮았으면 좋겠다. 캐롤 씨는 되살아날까…? 아. 그래!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는 수단이 또 있으면 나도 언젠가

 

살아날 수는… 없겠지. 모노로그도 그렇게 부활을 남발할 수야 없으니까. 이번 영안로가 특이했던 거지 또 살아날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나아. 영영 이별이야. 받아들여.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 그 이름조차도 아니라고 했던가.

 

아쉽다. 너무 아쉬워… 겨우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헤어질 수밖에 없는 거구나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어쩔 수 없어

 

 

 

하지만 역시. 살고 싶어

 

"살고 싶어. 히무로…"

 

눈물이 내 볼을 타고 방울방울 미끄러졌다. 아무래도 미련이 남았다. 나는 이제 막 살기 시작한 것 같은데 벌써 끝이라는 건 싫었다. 영영 사라질 수밖에 없다니. 억울했다. 조금만 더 살고 싶었다. 사실 조금만이 아니라 나는 오래오래 살고 싶었던 것 같다. 아무것도 못 해 봤는데. 함꼐 여름축제도 산장도 우동가게도 못 가봤는데 여기서 끝이란 말이야?

 

나는 물에 빠져 지푸라기를 잡는 심경으로 더듬더듬 다른 이름들을 불러 보았다.

 

"마유즈미 하나코. 아웃… 마유즈미 사쿠라. 아웃…"

 

하지만 당연히. 나는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게 통하지 않으리란 건 나도 알고 있지 않던가. 그러자 공포가 찾아왔다. 몸이 떨렸다. 싫어. 싫어. 히무로. 이대로는 싫어. 나 무서워.

 

정말 어디에도 방법이 없는 걸까? 어디에도? 이제 정말 끝이란 말이야?

 

싫어

 

도와줘

 

누구라도 좋으니까. 도와줘.

 

언니

 

"알겠다."

 

그리고 상자의 뚜껑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