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가미. 야가미! 야. 너 왜 이래!"
야가미의 몸이 바닥에 쿵 하고 떨어졌다. 코가 박살 나지 않았을까 싶을만치 큰 충격이었다. 엎어진 야가미를 똑바로 눕히는 데에는 나와 토키와가 무진장 애를 써여만 했다. 토키와는 자기 머리를 부여잡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야가미가 갑자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이건 마치…"
"커피!"
나는 바닥에 줄줄줄 흘러내리는 커피. 그리고 그걸 담고 있던 텀블러를 주워 똑바로 세워 놓았다. 안에는 커피가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텀블러를 세우느라 내 손에 묻은 커피를 탈탈탈 털어냈다. 왜냐하면…
"독이다. 커피에 독이 있어! 저거 마시지 마! 그리고…"
그리고 시시각각 죽어가는 야가미를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독을 먹었는지는 몰라도 이미 돌이킬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독이잖아. 먹었으면 보통 끝장이다.
"아니야. 독이 아니라 견과류야… 하지만 왜…? 야가미가 그걸 본인 손으로 먹을 리가…"
토키와의 중얼거림을 뒤로하고 나는 차갑게 생각했다. 어떤 경과를 보이며 죽었는지를 관찰하는 게 더 급했다. 나야 독의 종류나 어떤 독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몰라도 어딘가에 아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와중에… 화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세상에! 나와. 다 비켜. 비켜! 나오라고!"
나와 토키와는 그 외침에 후다닥 뒷걸음질을 쳤다. 외침은 이바라의 것이었다. 이바라는 문틀을 박차고서는 운동화가 바닥에 마찰하는 끼이익 소리를 내며. 야가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야가미를 살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커피를 마셨더니 갑자기 쓰러졌어!"
나는 겨우 살려낸 텀블러를 가리켰다. 고작 두 모금 정도가 남아 있었다. 이바라는 텀블러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내가 했던 것처럼 텀블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너희 절대 저 커피에 입 대지 마. 절대! 야가미. 입 벌려. 빨리! 토해내야 해!"
"크윽… 끄윽…!"
이바라의 말에 야가미는 대답하지 못했다. 야가미는 이를 앙다물고 있었다. 자기가 원해서 그러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내가 턱을 잡고 벌리려 힘을 줘 봤으나. 전혀 턱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턱힘 자체는 재규어보다 강하다는 걸 이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근육이 고정된 건가? 하지만 왜?
"미치겠네. 칼… 칼 가져와. 어서! 빨리 가져와. 토하게 만들려면 겨자 탄 물이 필요해. 하기와라! 내 전용실로 가! 거기 겨자 소스가 있을 거야. 칼은…"
이바라가 내게 전용실 열쇠를 던졌다. 나는 왜인지 묻지 않고 재빨리 야가미의 방을 박차고 나갔다. 등 뒤에서 후루미나미가 "메스." 라 말하며 이바라에게 무언가를 건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계단을 오르며 몇 초나 걸리는지 초를 세었다. 한 층 계단을 올라가는 데까지 10초. 이바라의 전용실 문 앞에 가는 데까지가 19초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왜 야가미가 갑자기 쓰러졌지? 언제부터 탑에 독이 있었던 거지? 생각이 마구 떠오르며 혼란을 유발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전용실의 열쇠구멍에 열쇠를 쑤셔 넣었다. 26초.
문을 벌컥 열었다. 안은 화학실과 주방을 섞은 곳에 관짝을 하나 놓은 모양새였다. 나는 주방에 가까운 쪽으로 달려갔다. 프라이팬. 냄비. 밀가루 반죽과 버너. 시럽과 과일들 등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39초. 겨자 통이 보이지 않자 나는 다급하게 찬장을 열었고. 겨우 온갖 조미료와 재료들 사이에서 겨자를 살폈다. 그리고 노란색 통을 발견해 낚아챘다. 51초.
나는 전용실 문을 닫지도 않고 그냥 달렸다. 한시가 급했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다시피 몸을 던지자 발목이랑 무릎이 욕을 내뱉었지만. 나는 아무튼 1분 몇십 초 정도 시점에 이바라에게 겨자 소스를 공수했다. 그러나 이바라에게 필요한 건 소스가 아니었다. 핫도그에라도 뿌려먹을 때는 아니었기에. 나는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양치에 쓰는 물컵에 소스를 듬뿍 붓고 수돗물을 탔다. 마땅히 저을 게 없어서 원래 컵 안에 있던 칫솔로 마구 저었다.
"겨자 물 가져왔어!"
길면 2분쯤이었을 것이다. 내 나름대로 엄청 빨랐다고 생각했지만.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야가미의 상태는 훨씬 안 좋아졌다. 숨을 쉬지 못하는 듯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턱관절 부분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턱 근육을 잘라서 어떻게든 입을 벌리게 만드려 시도했으나, 실패한 것으로 보였다.
토키와는 멍하니 서 있고. 이바라는 분주히 움직이고. 후루미나미는 멀뚱멀뚱한 와중 야가미는 이를 악문 채 죽어갔다. 아비규환이었다. 이바라는 내가 건넨 겨자 탄 물을 야가미의 입에 흘려 넣었다.
"야가미. 삼켜. 삼키면 토가 하고 싶어질 거야. 야가미! 빨리 토해내! 이빨 사이로 물을 마신다고 생각해! 어서!"
야가미는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이빨 위에 고여있던 겨자 탄 물이 꿀꺽꿀꺽하는 소리와 함께 내려갔다. 하지만 야가미는 토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윽… 크르륵! 끅…"
오히려 겨자 탄 물이 목구멍 안에서 가래 끓듯이 부글부글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가미의 목이 뒤로 홱 꺾이더니 등과 바닥 사이에 공간이 생겼다. 야가미의 등이 꺾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쿠션이 있는 것처럼 야가미는 뒤통수와 쭉 뻗은 다리 두 개로 몸을 떠받쳤다. 그러다. 굳어버렸다.
"왜… 왜 이러는 거지? 근육이 굳은 것 같잖아…" 나는 중얼거렸다.
굳어버린 야가미의 등과 다리를 기억했다.
"이대로면 무조건 죽겠는걸. 하지만 그렇게 둘 수야 없지. 야가미의 목숨은 내가 살리겠어! 너는 미망인 신세로 죽을 때까지 외로워야 하니까. 야가미!"
그렇게 소리친 장본인은 다름 아닌 후루미나미였다. 후루미나미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단도를. 턱 근육을 찢느라 이미 피가 묻어있는 것을 야가미의 턱 왼쪽에 더 깊숙이 찔러 넣었다. 손잡이까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후루미나미가 단도를 빼자 피가 밖으로 촥 튀었다.
후루미나미가 반대편 턱도 그렇게 찌르자. 비로소 야가미의 입이 쩍 열렸다. 이제 이걸 입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를 정도로 아래턱이 덜렁덜렁해졌지만. 야가미는 어눌한 발음으로. 핏발이 서서 피가 터질 것 같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헤가… 후긴 게 아이이아…!"
제가 죽인 게 아닙니다. 야가미는 그렇게 말했다. 여전히 숨을 쉬기 어려워하며. 핏물과 겨자 탄 물을 그르렁거리면서도 혼신의 힘을 짜내 그 말을 전했다.
나는 야가미의 주장을 기억했다.
"말하지 마. 심장이 약해진다…! 토키와. 인공호흡 준비해! 내가 흉부압박할 테니까. 어서!"
이바라는 야가미의 몸을 바닥에 밀착시키려 했지만. 뻣뻣해진 거구를 똑바로 눕게 만드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게 잘하는 짓인지도 확신하지 못한 채 야가미에게 몸을 던졌지만. 내 체중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야가미가… 아니. 도대체 왜… 이건 누군가가 일부러 커피에 시럽 같은 걸 넣은 거야. 하지만 누가…?"
"토키와. 빨리 해! 제대로 안 해?! CPR 할 줄 몰라?!"
이바라의 호통에도 토키와는 "에? 어?" 하는 얼빠진 소리만 낼뿐이었다. 이런 놈이 탑에 불을 질렀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토키와의 맹한 태도는 예전의 쉽게 충격을 받되 최소한 회복이 빠르던 모습보다 훨씬 도움이 안 됐다. 결국 토키와는 어물어물 야가미 곁에 무릎을 꿇었지만, 멈칫멈칫 주저할 뿐이었다.
"야. 씨발 왜 그러냐고!" 나는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자 토키와는 깜짝 놀라는 기색과 함께 어물거렸다.
"나… 남자 입술에 하는 게… 좀…"
"아 씨발 병신아! 나와! 차라리 내가…"
"내놔! 토키와. 맛 좀 보게!"
후루미나미는 그런 말과 함께 토키와를 툭 밀어냈고. 토키와는 저항 없이 밀려났다. 곧 후루미나미는 야가미의 쇄골을 한 손으로 짓누르며 입을 마주댔다.
"후. 후루미나미?! 무슨…" 토키와는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준비를 하라고 했지 벌써 하라고는 안 했어. 후루미나미! 왜 지금…"
"후우… 후우… 후우…"
입김을 불어넣는 소리가 몇 번 들렸다. 야가미는 작게 신음했다. 현저히 작은 신음이었고 이제 그르렁거림조차 거의 들리지 않았다.
후루미나미는 몇 초 뒤에 입을 뗐다. 야가미의 몸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후루미나미는 나와 이바라를 번갈아서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뭐야. 왜 멈췄어? 얘 왜 갑자기 이렇게 말이 잘 통하지? 오랜 생각하는 의자 형벌이 드디어 효과를 냈나?"
"잘 통하긴 무슨. 내가 너희 말 들을 것 같아? 나는 너희가 원하는 일의 정반대만 해."
"후루미나미. 아까 그게 얼마나 위험한 행동이었는지 알기나 해? 야가미가 숨을 쉬는 걸 오히려 방해하는 짓이었어!"
"하든 안 하든 결과는 똑같은데 무슨 상관이야?"
"이상한 소리 말고… 잠깐만. 결과가 똑같다는 게 무슨 뜻이야?"
후루미나미는 야가미의 코 앞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죽었어. 애초에 너희 모두 정상적인 판단이 안 되나 본데. 독으로 죽은 사람을 어떻게 심폐소생술로 살려내?"
그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비슷한 느낌을 받았으리라. 고무 밴드 하나를 최대한 늘려 보려고 손가락과 팔.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끝까지 당기던 도중. 힘이 풀려서 고무밴드가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원래 크기로 돌아가는 느낌. 모든 것이 허사가 되는 장력의 소음.
"애초에 겨자 탄 물을 먹였을 때 얘가 토를 했으면. 닫힌 턱 때문에 토사물에 질식했을 걸? 입을 열었어도 애초에 늦었을 거고."
"독으로 죽었다고…? 야가미가?"
"그래. 누가 봐도 독살이잖아. 그러니까 무슨 짓을 해도 방법이… 어어. 이바라."
이바라는 누가 말릴 세도 없이 야가미의 몸을 깔아뭉개려 애썼다. 온몸을 던지다시피 해 야가미를 눕히려 애쓴 이바라는, 흉부압박을 위해 조금이라도 몸을 떼면 스프링처럼 야가미의 몸이 튀어 올랐다. 독이라고? 어떤 독이 이런 작용까지 해. 보통 독이 다 이런가? 아니면 나만 모르는 걸까?
"거짓말이잖아… 거짓말. 거짓말이잖아…! 쭉 속였으면서. 또 속진 않을 거야… 살려내겠어…!"
"관둬. 죽었다니까."
"이 자식… 죽게 놔둘 것 같아? 너는 살아야 해. 살아서 속죄를 해야 한다고…"
살해 현장이 훼손되지는 않을까. 내 일면은 그런 시각으로 당시의 장면을 바라보았다. 말릴까 말까 고민하기까지 했다. 진실의 측면에서 야가미를 살리려는 시도는 불필요했다. 하지만 야가미의 굳어버린 몸은 억세고 억세 아무리 이바라가 눌러보려 한들 꿈적하지도 않았으니.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었을뿐더러…
그 시도는 아무리 헛되어도 고귀한 일이었다.
손을 놓고 있었던 그 자리의 모든 사람과는 달랐다. 심지어 이바라는 야가미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물론 야가미를 특히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바라는 남들보다 야가미를 더 싫어했다. 내가 야가미와 후루미나미를 똑같이 싫어한다면 이바라는 살인자 벌점을 부과해 야가미 쪽을 더 싫어하는 식이었다.
이바라는 그런데도 야가미를 살리려 했다. 독으로 이미 죽은 사람인데도 심폐소생술을 하려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히무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히무로는 어차피 모든 것은 의미 없다고. 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래. 죽고 사는 건 탑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는 "어쩌라고? 일단 수사는 해야 살든 말든 다시 시작하든 하지." 라는 생각으로 그 명제에 대한 답을 유보했다. 그 생각에 매달릴 바에야 증거를 하나라도 더 모으는 게 낫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으나. 이바라의 모습에서 나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히무로의 말을 연상했다.
그 이유는 히무로가 던진 명제의 답을 이바라에게서 보았기 때문이다. 살려야 하는 사람을 살려라. 무의미해 보일지라도 발버둥을 쳐라. 손을 얹어서 누군가를 살리거나 도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해라.
바로 그게 불합리한 고난과 짓눌릴 것 같은 시간 앞에서 똑바로 설 수 있는 방법이다.
토키와는 그 혼돈 속에서 문득 생각했다.
그래서 그 일기의 저자는 대체 누구였을까?
처음 보았을 때는 각기 다른 사람의 일기를 한 곳에 취합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형식이 똑같았고 무엇보다 특이한 필체로 쓰였기 때문이다. 극도로 유려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필체로.
그 교량 위를 걷던 셋 모두 세 개의 발걸음을 느꼈다. 그렇기에 기습은 없었다. 교량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기에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다. 서로 발걸음을 빠르게 했다간 밑도 끝도 없어지며 결국 다리는 추락하게 될 테니. 세 쌍의 발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
발을 세게 구르거나 제자리에서 뛰어 교량을 뒤흔들 생각은 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개개인이 실타래를 놓친 채 추락할 가능성이 있어 염두하지 않았다.
빛은 가까워져 왔고. 이름 없는 남자는 지쳤는지 걸음이 빠르지 않았다. 초조해할 것 없었다. 나는 초입의 오버룩과 딕테이트를 시선 피하기와 귀마개만으로 대처할 수 있었고, 터치는 당할 구석이 없을뿐더러 닿을지라도 통하지 않을 터였다.
조금씩. 조금씩. 나와 마유즈미는 유리해졌다. 사정거리에 진입하는 순간. 사실상의 끝을 낼 수 있었다. 마유즈미의 말을 따라 발포는 하지 않을지라도 사선 안에 있다면 협상권은 우리에게로 넘어온다. 영안로 밖으로 나가라는 일방적인 요구가 가능해지고, 그것을 행하지 않을 경우 협박도 가능했다.
나쁘지 않은 상황에 있음에도. 시시각각 더 이상은 못 떠받치겠다고 애원을 해대는 교량을 딛고 있자니 마음은 놓이지 않았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낭떠러지가 바로 밑이었다. 운이 나쁘면 휘청이다가 떨어질 수도 있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여 던질 만한 것을 찾았다. 바닥에 닿아서 소리가 나기까지의 시간을 잴 심산이었다. 그러나 나오는 것은 다이얼로그. 실타래. 그리고 일전에 몰래 숨겨둔 마시멜로우가 전부였다.
마시멜로우는 푹신한 물질이기에 떨어져도 별반 소리가 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것을 반쯤 베어 물었다. 다가올지 모를 대결 앞에서 영양을 돌리는 것이 솜덩이를 내던지는 격의 일보다는 쓸만할 터였다. 그것을 질겅질겅 씹으며 나아가는 와중. 마유즈미는 나를 팔꿈치로 쿡쿡 찌르며 자신의 입을 열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도 줘.' 라는 투였다.
먹다 남은 것을 줄 수는 없으니. 나는 주머니에서 마시멜로우를 하나 더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마유즈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을 보이며 마시멜로우를 낚아챘다. 우리는 나란히 대몰락 이전 시대의 그 괴이한 제과류를 질겅질겅 씹었다. 옛 전사들이 급습 직전에 코카나무 잎사귀를 씹듯이. 우리는 단 것을 씹었다.
그럴수록 빛은 더더욱 가까워졌다. 출구가 지척에 있었다. 그러나 기쁘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발밑의 침목과 금속 발판이 더욱더 부식되었으며 위태로워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선 이름 없는 남자가 빨리 걷지 않았던 것은 단순히 지쳤거나 심신이 건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뒤에서 따라오는 이를 인식했고 빨리 나아가고 싶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마유즈미와 나는 곁에서 나란히 걷는 게 아니라 때때로 누군가가 앞에 서고, 누군가가 뒤를 따라야 했다. 나는 마시멜로우가 제공하는 당분이 내게 코카잎처럼 작용하기를 바랐으나. 더 나아가고 이름 없는 남자에게 더 가까워질수록 나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큰 퍼즐의 조각 하나 없이 전진하는 기분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무언가를 간과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의 윤곽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총을 뽑았다. 그는 내 내면에 각인되어 있는 경계를 불러일으켰다. 어디서 입수했는지 모를 연구실의 가운. 그는 흰 옷의 남자였다. 내 머리는 그를 더 빨리 따라가야 한다 재촉했지만, 내 이성과 경계심은 어쩌면 천천히 가야 할지도 모른다 말했다. 세 명이 가기에는 교량이 점점 불안정해졌고 불길한 징조가 넘쳤다.
"우왓!"
귀마개를 뚫는 작은 신음을 듣자마자, 나는 총을 홀스터에 끼워 넣고 두 손으로 마유즈미를 붙잡았다. 그녀의 발 밑에 있던 침목이 하나 부러졌다. 나름대로의 반사신경을 발휘했는지 마유즈미는 곧바로 반댓발을 그나마 튼튼한 금속판 위에 디뎠지만, 위태롭고 위험한 순간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다.
"실타래를 들고 있는 편이 나을 거야. 마유즈미."
그녀가 안정적으로 서 있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말했다. 마유즈미가 이해할 수 있도록 그녀의 실타래를 가리켰다. 사실 한 번 추락의 위험을 겪으니 마유즈미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듯 보였으나. 다음 순간 이름 없는 남자의 발울림이 교량을 통해 전해져 오자 그녀는 다시 나아갔다. 두 손으로 총을 쥔 채로.
부러진 침목을 시작으로 교량은 급격히 불안정해졌다. 침목이 빠져 있거나 부러져 있는 것은 고사하고, 심하게 훼손되어 다리가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여긴 침목이 세 개나 비어 있어. 뛰어서 건너야겠는걸."
그 부분만큼은 교량이 아니라, 교량을 아슬아슬하게 잇고 있는 금속 골격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했다. 심지어는 금속판마저 없었다. 사실상 그 비어있는 틈은 조심스럽게 뛰어야 건널 수 있었다.
나는 제발 그 도약이 교량을 부수지 않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뛰어 반대편에 발을 디뎠다. 그러자 교량이 한 번 삐걱이며 흔들렸다. 발을 디디는 역할로써는 이미 자격 미달이었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으며. 붕괴가 진행될 것이라면 분명 그곳부터 시작될 터였다.
"자! 준비! 이야호오!"
내가 하는 것을 보고 마유즈미 또한 뛰어올랐다.
나는 총을 홀스터에 일찌감치 끼워 두었고, 팔과 가속도를 적절히 이용하기 위해 마유즈미 또한 그렇게 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눈으로 전부 살폈다. 총. 실타래. 자세. 착지하는 힘. 그것이 빈 교량을 넘을 만 한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보았다. 다행히도 그것은 충분했고, 마유즈미는 내가 했던 것보다 사뿐히 반대편에 다다랐다.
그 시점에서. 나는 귀에 쑤셔 넣은 천 하나를 빼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일전에 마유즈미의 발 밑에서 부서진 침목 한 자루를 염두에 두었다. 나에게는 단단하고 무게가 있어 절벽의 바닥까지의 높이를 계산할 만한 물질이 없었으나. 그 침목이 떨어지기까지의 시간을 계산하면 어떻게든 높이를 잴 수 있었다.
그러나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몇십 초 뒤에도 그것이 들리지 않자 나는 포기하고 다시 천을 귀에 쑤셔 넣었다. 거의 무저갱 수준이라고 받아들였다. 상관이야 없었다. 어차피 그 안에 빠지진 않을 테니. 일이 잘 풀리는 이상은…
"이제 거의 다 왔어."
나는 중얼거렸다. 빛은 이제 지근거리였다. 이제는 100미터도 채 되지 않았고, 이름 없는 남자와의 거리도 서서히 가까워졌다. 그는 마음이 급한지 서둘렀으나 오히려 그것이 나아가는 데에 방해를 주고 있었다.
이름 없는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머리카락은 여전히 분홍색이었으나 전부 그렇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물감을 뿌려놓은 듯이 금색이 분홍색 사이에 섞여 있었다. 금색의 발현. 그의 샤이닝이 고조되었으며 정신조작을 더 크게 발현하였다는 증거였다. 게다가 눈. 눈마저 원래의 보라색에 금색이 섞여 있었다. 그야말로 혼종이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이미 그는 충분한 위협이었다. 캐롤 브라이트는 부활해서는 안 된다. 그 생각만이 들었다. 내가 더욱 박차를 내서 그를 쫓자 교량은 더욱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 세 명이 그 다리를 건너는 것은 어쩌면 무리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나와 마유즈미가 발걸음을 재촉함에 따라. 그 또한 더욱 서둘러 교량을 건너댔다.
대면을 앞두고 나는 나 자신에게 다시금 코드를 걸었다. 훌륭한 군인들은 곧잘 할 수 있다는 반사행동의 지정이었다. 조건은 이름 없는 남자의 정신조작 사용 시도. 그리고 그에 따르는 결과는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었다.
그 시점에서 이름 없는 남자는 교량을 거의 다 건너기까지 했다. 그 너머의 빛. 실외에서는 바람이 불어왔다. 아마 그것이 교량을 더욱 부식시켰을 것이다.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었고. 따라서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그를 잡아 세우기로 했다.
"멈춰라. 이름 없는 남자! 멈추라고 말했다! 내가 못 맞출 것이라는 생각은 마라. 귀를 날려버릴 수도 있다!"
나는 그가 충분히 들을 수 있게끔 내 모든 성량을 다해 소리쳤다. 다행히 그는 내 말을 들었다. 교량의 거의 끝 지점에서 이름 없는 남자는 그 자리에 잠시나마 멈추었다. 나는 더욱 박차를 가해 그를 향해 나아갔다. 마유즈미가 등 뒤에서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지만(왜 그렇게 서두르냐 정도의 내용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사실 그는 내 사선에 들어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도하게 먼 거리는 권총으로 맞출 수 없고, 맞추더라도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수 없다.
이름 없는 남자는 그것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듯. 퍼뜩 다리를 움직여 도망치고자 했으나 그때는 이미 내 사선 안이었다.
"그러지 마!"
마유즈미는 소리쳤지만,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이름 없는 남자는 그 자리에 멈췄다.
"그러지 마!"
마유즈미의 외침을 들은 순간 나는 히무로가 방아쇠를 당길 작정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내가 몸을 비틀기도 전에 총성이 크게 울렸다. 꽝! 줄곧 조용하던 와중에 들린 총성은 순간 내 고막을 찢어놓을 것처럼 울려댔다. 나는 그 순간 이대로 끝인가 싶어 눈앞이 캄캄해졌고. 곧 총알이 몸의 어디를 뚫을 것인지 지레 겁을 집어먹었다. 내 전신이 왁 하고 굳어버렸다.
나는 내 얼굴 옆을 지나가는 총알을 느낄 수 있었다. 히무로는 일부러 빚맞혔다. 아까까지는 히무로도 맞힐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정도의 거리였다면. 이제 히무로는 나를 맞힐 수 있는 정도의 거리까지 왔다. 처음부터 그냥 말을 듣지 않고 걸어갈 걸 그랬다며 나는 후회에 잠겼다. 그 시점에서. 히무로에게 대항할 수는 없게 되었다.
눈앞에 다리의 끝이 있었고. 열 걸음도 채 내딛지 않아 다리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겠지만 등 뒤의 사람은 내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등을 돌렸다. 아마 한 발만 더 내디뎠다면 즉각적인 경고가 뒤따랐을 것이다. 나는 교량을 따라 나에게로 서서히 가까워지는 발걸음을 느꼈다.
히무로는 내게 총을 겨눈 채 천천히 걸었다. 다리가 움직이는 동안 손은 거의 떨리지도 않았다. 분명하게 내 행동에 개입하려는 의지를 보아 그는 이미 모든 맥락을 꿰뚫고 있었다. 내 곁에 카이다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의 전진이 독단적인 것임을 알아냈다. 모노로그가 죽도록 싫었지만 이 부분만큼은 맞았다. 캐롤 씨의 부활을 막으러 나를 따라올 가장 강력한 추적자는 분명 히무로였다. 총을 든 데다가 캐롤 씨의 부활을 어떤 방식으로든 저지하는 인물. 상대하기 버거운 적이었다.
"대화하자며! 대화하자며. 히무로! 아니 잠깐. 우리 애초에 귀를 막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거야? 그러면 내가…"
"귀는 계속 막고 있어. 마유즈미. 절대 풀어선 안 돼. 웬만하면 이름 없는 남자와 눈도 마주치지 마."
최후의 수단인 오버룩과 딕테이트마저 여의치 않았다. 두 사람 모두 귀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무로만큼은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아 그 눈동자를 바라볼 수 있었지만, 나는 사실 그 초능력 아닌 초능력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도 몰랐다. 게다가 본인은 시선이 맞닿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으니. 오버룩이 통할지조차 전망이 어두웠다.
나는 완벽하게 붙잡혔다.
"…발밑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너희 둘 다. 그 지대가 정말 불안정하거든."
그것만큼은 사실을 담아 말했다. 다행히 히무로와 마유즈미는 내가 이야기했던 지점 앞에 멈춰 섰다. 내 체중만으로도 흔들리던 부분이니 두 사람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세 사람이 그 인근에서 함께 서 있는 것 자체가 나쁜 생각이었다. 극도로 불안정했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나나시랑 대화를 나눠?!"
"내가 알아서 할게. 이름 없는 남자. 일단 두 손을 위로 들어라. 입술을 읽을 테니 하고 싶은 말을 해. 나는 정신조작에 면역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써서 이 상황을 타파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않는 게 좋을 거다."
철저하기도 하지. 나는 두 손을 들었다. 어차피 오버룩과 딕테이트가 전부 통하지 않으니 허튼 수고는 통하지 않았다. 그러니 남은 방법이란 어떻게든 히무로를 설득시키는 것이었는데… 나조차도 그것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최선을 다해볼 따름이었다.
"보내줘. 히무로. 나는 캐롤 씨를 살려내야 해."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캐롤 브라이트는 지독히 위험한 인물이다. 그 힘으로 무엇이 가능한지 너는 모른다."
"알아. 나는 그녀의 눈동자는 보지 못했으나 영혼만은 들여다봤으니까. 그녀가 어떤 파괴를 휘두를 수 있는지 알아. 왜냐하면 그녀 본인이 누구보다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야. 히무로… 알잖아. 캐롤 씨는 결코…"
"터치를 악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후루미나미 나몬이 터치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물을 통한 간접적인 것. 직접적인 터치는 아니었다며 꼬리를 자를 텐가? 그녀는 이미 미도리카와 아쿠토에게 강제적인 터치를 사용해 보았다. 한 번 선을 넘었다면 두 번 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지. 초범이기에 낮은 형량을 구형하는 것이 재범의 발판이 된다."
"그건 나 때문이야. 히무로. 모리와 나이토가 죽어가고 있었고, 후루미나미가 인플레이션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이상 우리는 그녀를 막아야 했어. 그녀는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니야… 내가 개입한 결과물이지. 그러니. 나도 화살을 맞아 마땅해."
"과오의 무게를 덜어주려 해봤자다. 이름 없는 남자. 나는 캐롤 브라이트의 부활을 허용해 줄 생각이 없다. 내가 영안로 안에 있는 이상 그녀는 살리게 두지는 않겠다."
히무로는 완강했다. 내가 울고 불며 바짓가랑이에 매달려도 히무로는 눈도 깜짝하지 않을 것임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마지막 작전이었던 감정에 호소하기는 절대 통하지 않을 터였다. 나에게 캐롤 씨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영안로에서 본 그녀는 어땠는지. 그녀는 새로운 삶을 받을 만하다고 말해봤자 히무로는 그 말에 공감하지도 못할 것이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너는 이해할 수 있잖아."
"나는 네 입장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내 입장이 아니야. 캐롤 씨 말하는 거야. 개인이 가진 강대한 힘과 가능성을 두려워해 다른 이들의 두려움을 사는 일이 어떤지 알잖아. 위험분자가 되어 터부시당하고…"
"내게는 마법이 깃들어 있지 않다. 그렇게 강대한 정신조작을 타고난 적도 없다. 그녀의 입장을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면. 죽어도 싸다는 거야? 후루미나미. 야가미. 카이다. 카나리가 버젓이 살아있는 탑인데 그녀가 살지 못할 이유는 뭐지? 적어도 후루미나미는 가진 걸 뱉어내기에 충분한 사람이었어. 우리가 나서지 않았다면 모리와 나이토를 살릴 방법이 없었다고! 우리는 옳은 일을 했어!"
나는 어쩔 수 없이 목소리를 키웠다. 그래. 그런 간접적인 터치를 써서 다른 이를 꺾는 일은 위험했다. 하지만 빌어먹을 탑에 불을 지르고, 모리와 나이토가 사경을 헤매게 만들고, 다른 이들이 죽기를 바라는 그 수많은 시도들은 위험하지 않은 건가? 그것보다 더 캐롤 씨가 살아서는 안 된다고?
그건 용납할 수가 없었다.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하는데? 누가 그렇게 허락했는데? 재단의 그 잘난 감시자인가? 어떤 로가 선을 넘었는지 넘지 않았는지 자로 잰다는 그 감시자? 위험하기로 따지면 총을 들고 있으며 누가 옳고 그른지 재단하는 그가 가장 위험하지 않은가.
"너도 같은 처지의 사람이었잖아. 히무로… 너는 이제 사회에 편입되었으니 그들의 뒷구멍이라도 닦아주는 거야? 정작 누구보다 그녀를 터부시 하면서. 그녀의 관뚜껑에 못질을 하고 위에 콘크리트까지 부으려 하면서 말이야?"
"좋은 지적이다. 이름 없는 남자. 하지만 정신조작은 논외다. 내가 이곳에서 너를 보내주는 것이야말로 크나큰 잘못이다."
"그럼 좋은 지적을 하나 더 하겠어. 시라유키 히메리가 너를 살리려고 했던 것처럼. 나는 캐롤 씨를 살리려 한다. 그것뿐이야."
솔직히 나는 그게 도발로 작용할지도 몰랐다. 나는 그저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히무로가 받아들이기에 그것은 어떤 종류의 모욕이었다. 히무로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그 감정 없는 눈동자는 더욱 매몰차게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마유즈미는 대화의 내용이 좀처럼 들리지 않는 듯이 얼굴을 찌푸린 채 나와 히무로를 번갈아 살폈다.
마유즈미는 독순술을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귀를 막은 이상 대화에서 완전히 밀려나고 말았다.
"이런 걸 친구라고 부르나. 히무로? 여기서 우리가 대화나 하고 있는 건 당연히 마유즈미의 생각일 텐데. 정작 마유즈미는 끼지도 못한다니. 웃기네."
"네가 감히 우정에 대해 논하지 마라. 이름 없는 남자."
내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그 상황에서 벗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히무로를 따돌려야 했는데 히무로에게는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으니. 나는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이용해야 했다. 그것 말고는 영안로에서 살아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를 자극해서 빈틈을 이끌어내고 싶었지만, 결국 히무로는 충분한 만큼의 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마유즈미에게라도 내 상황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귀를 막고 있는 이상 그것은 어려웠다. 만약 내가 어째서 영안로에서 나갈 수 없는 것인지를 히무로가 안다면. 히무로는 잘 되었다며 나를 제거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히무로의 기준에 따르면 나는 정신조작 보유자이고. 정신조작 보유자들은 위험분자였으니까.
"이제 교섭은 끝났다. 이름 없는 남자. 실타래를 꺼내라. 그리고 영안로에서 나가라. 지금 당장."
히무로의 총은 여전히 나를 겨누고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히무로의 말에 응해도 나는 죽고, 응하지 않더라도 죽을 목숨이었다. 궁지에 몰린 쥐는 신발이든 손가락이든 물어뜯으려 든다. 허나 과연 히무로의 몸에 이빨이 들어가긴 할까?
히무로가 마유즈미 앞에서 나를 제거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극단적인 가정인 것은 분명했지만 명사수가 총을 들고 나를 겨누고 있는 이상 명징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히무로라는 사람을 몰랐고, 탈출 장치에서 무엇을 보아서 캐롤 씨의 부활을 막으려는 지도 알 수 없었다. 그가 나를 사랑에 빠져 멍청한 짓을 하는 천치로 여긴 만큼. 나는 그가 정신조작 보유자들의 탄압에 혈안이 된 일종의 파시스트로 보았다.
"히무로. 이 세상에는 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사람도 있는 거겠지?"
"선문답은 그만하지. 나는 분명 말했다. 실타래를 써서 영안로에서 나가라. 정신조작을 사용하려는 기미를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즉시 사격하겠다. 그러기를 원하나?"
히무로를 믿어야 할까. 믿지 말아야 할까. 나는 오직 그것만을 생각했다. 만약 히무로가 내 말을 들어준다면, 나에게 이 방법밖에는 없다는 걸 받아준다면 우리 중 누구의 피도 흐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히무로는 완고하게 캐롤 씨는 부활해선 안 된다고 하였다.
내 탈출의 실마리는 내 과거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사람. 곧 캐롤 씨였다. 히무로가 나 한 명만을 위해 캐롤 씨의 부활을 묵인할 것 같지는 않았다. 차라리 한 명을 버리고 말 것이다. 그게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한 일이니까. 그리고 아무도 총 든 사람의 의견에 토를 달지는 않을 테니.
"너도. 캐롤 씨도. 나도. 허락은 받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거겠지. 누구도 그래주지 않으니까 알아서 살 길을 찾아 발버둥칠 수밖에."
나는 내 등줄기 사이에 들어가 있는 캐롤 씨의 머리카락을 느꼈다. 멍청이처럼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지는 않았다. 나는 히무로와 맞닥뜨리기 전부터 그것과 언제든지 연결될 수 있게끔 해두었다. 그래야. 저항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분고분히 죽음을 받아들이기는 싫었다. 그래서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고…
"나가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 거지. 나나시?"
나나시는 내 말을 듣자 몸을 흠칫 떨었다. 정답이라는 신호였다. 나나시가 뭐라고 말하는지는 귀마개 탓에 들리지 않았지만, 나나시가 고개를 세게 끄덕이는 것은 볼 수 있었다. 내 생각이 옳았다.
"히무로. 잠깐 이야기라도 해 보자. 나나시도 나가고 싶은데 나가지 못하는 걸 수도 있잖아!"
나는 히무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귀마개를 끼고도 들을 수 있게끔 큰 목소리를 내느라 목이 아팠다. 그러나 히무로의 대답은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히무로는 나나시에게 무언가 말을 했는데… 작아서 도무지 들리지가 않았다. 사실 나나시와 히무로 사이의 대화는 대부분을 듣지 못했다.
만약 나나시의 말만 들어도 내가 조종당한다면 나는 줄곧 귀마개를 끼고 있었을 테다. 객기를 부리지 않는 편이 훨씬 안전하고 나도 그 정도 분별은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나나시의 의도와는 다르게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히무로가 하려는 일이 더 나쁜 결과를 불러일으킬 것 같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나는 몰래 귀 안에 쑤셔 넣은 천을 빼내었다.
"허튼수작은 부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마유즈미에게 정신조작을 사용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나?"
"…우리 대화로 풀 수 있어. 히무로. 아무도 다치지 않을 수 있어. 협의점은… 찾을 수 없겠지. 나는 양보할 생각이 없고 너도 그럴 테니까. 하지만 서로의 입장을 알고 싸우는 게 그러지 않는 것보단 나을 거야. 그런데 지금 네가 그걸 좀 망치고 있거든?"
"내 입장을 듣고 싶다면 말해 주겠다. 조율자라는 명칭의 로는 오버룩. 딕테이트. 터치를 써서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수하로 부렸다. 내가 알던 수많은 사람이 조율자의 손에 변질되거나 죽었다. 너는 그 힘이 악한 자의 손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되는지 조금도 모른다. 나는 두 번 다시 내 사람들이 금색에 물드는 꼴을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포기해라. 영안로에서 나가란 말이다."
"그렇구나… 그럼 네가 두려워할 만도 하지. 네가 그런 일을 겪은 건 정말 유감이야. 하지만 히무로. 낙하산 없이 비행기에서 떨어지려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아니… 말을 잘못했네. 비행기에서 내리지도 못한다고 해야 할까. 빌어먹을 인풋을 잘못 넣었는데 제대로 된 아웃풋이 나오겠어?"
비행기에서 내리지 못한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 나나시?"
"마유즈미! 귀를 막으라니까!"
히무로는 나를 돌아보더니 목소리를 키웠다. 히무로가 소리를 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빠를 생각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야.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종용하니까 이렇게 되는 거야. 히무로가 이 말을 이해하면 나를 어떻게 할까? 내 옆에 영원히 남아 감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캐롤 씨를 부활시켜 줄 수도 없어. 그러니 아마 나를 죽이거나 영영 묶어놓을 거야. 히무로는 조율자라는 사람의 무서움을 알고 한 사람의 목숨이야 싼 값이니까."
잠깐… 할 수 없다니. 어어. 설마. 나나시는 말 그대로…
"너 정말.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기에 있는 거구나… 그러니까 너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거야. 나가고 싶어도…"
"마유즈미. 저 자의 말을 듣지 마!"
"암호는?"
"암호는?"
"암호는?"
"틀렸어! 틀렸어! 쏜다!"
"딕테이트의 영향이야. 들어서는 안 돼! 어서 귀를 막아. 마유즈미. 어서!"
마유즈미까지 잃을 수는 없다. 또 정신조작자에게 당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또 죽는다. 또. 나는 그 조그만 가능성조차도 허용해선 안 되었다.
"아니야. 너는히무로! 불행해질 권리를나나시는 지금 정말 여기서 원하겠지나가지 못하는 거야. 무슨 감시자이유가 있어서!"
"히무로. 내 말 좀 들어. 너는 빛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무엇을 줄 거지? 그들을 어떻게 구원할 텐가?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 사람이 아니야."
입술을 읽기가 어려웠다. 흰 옷의 남자. 정신조작 보유자. 막아야 한다. 코드. 정신조작을 사용하려는 기미가 보인다면 막아라. 쏴라. 억누를 필요가 없다. 그자에게 내가 돌려줄 것은 응징뿐이다.
내 손은 줄곧 이름 없는 남자를 겨누었다. 조금의 기미라도 보인다면 내 손은 총알을 쏠 것이고. 총은 이름 없는 남자를 죽이리라.
"손 들어. 눈 감아. 입 닫아."
나는 조율자의 명령 앞에 쓰러진 모든 이들의 얼굴을 보았다. 수많은 호출명. 수많은 사람들. 그것이 내 눈앞을 가렸다. 눈이 멀어버렸다. 갈 곳 잃은 의분과 무력감이 애먼 곳으로 향해 들끓었다. 나는 통제력을 잃었고 퇴화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너. 이런 사람 아니잖아. 고작 그것이 너다. 위대한 가능성을 품고 있음에도…"
"히무로. 진정하라니까! 이 바보야. 암호는?정신 차려! 나나시는 암호는?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어!"
"다시 말한다. 눈 감아. 입 닫아."
"완전히 뭔가에 씌였잖아… 어찌 그렇게 몰인정할 수가 있나. 감시자…?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사람에 사람이 겹쳤다. 목소리가 목소리에 겹쳤다. 나는 얼굴에 지난 날의 실패를 뒤집어썼다. 무언가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죄를 범하고 아버지의 낯을 잊게 만들었다.
"마유즈미. 너는 귀마개 다시 껴. 빛을 가지고 있음에도너까지 휘말릴 필요는 없어."
"잠깐. 나나시! 틀렸어! 쏜다!아직 얘기할 수 있어. 잠깐!"
"미안하지만. 죽일 걸가만히 손을 놓고 죽어줄 생각은 없어. 어찌 이보다 위선적인 일이 있을까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
이게 죄는 아니기를 바랄 뿐이야.
나는 숨을 내쉬었다. 본래라면 히무로가 나 따위 인간보다 무조건 옳았겠지. 하지만 내가 생판 모르는 남과 인상착의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총을 들이민 협박을 받아야 한다면 그 분별력은 더 이상 기댈만한 것이 못 되었다. 마유즈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겠으나 내가 죽을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머리카락 묶음을 매개체로 쓴다. 그것과 연결되었다. 머리카락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척추를 타고 목까지 올라왔다. 뜨거운 불 같은 것. 충격이자 흐름이 내게 깃들었다. 지체할 시간은 조금도 없었다. 이빨은 들어갈 것인지 확신은 없었으나. 일단 나는 입을 쩍 벌렸다.
"히무로! 당장 총을 내려놓고…!"
마유즈미는 귀마개를 빼냈는데. 이름 없는 남자는 샤이닝을 끌어모았다.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작게 빛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오버룩과 딕테이트. 정신조작.
"예수님의 손길이 내게 닿았어."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나 자신과 약속했고. 명령하기도 했다. 만약 그가 징조를 보인다면 당장 사격하기로. 손에 피를 묻힐지언정. 총알을 낭비하는 일일지언정 그는 나를 피해 갈 수 없었다.
내가 조금 더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었다면, 병신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디에나 비상정지 버튼이 있듯이 나는 코드를 무시한 채 자신을 돌아볼 수도 있었을 테지만. 참을 수 없는 만 분의 일의 순간이 내게 찾아왔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증오였다. 증오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것이 강박이 되어 나를 내몰았다.
"히무로! 안 돼!"
총성이 크게 울렸다. 나는 손으로 겨눠 손으로 쏘았다. 이름 없는 남자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총성에 가려졌을뿐더러. 총알이 그의 복부에 박혔기 때문이다. 갈비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44mm의 탄환은 관통상보다 먼저 사람을 짓이긴다.
나는 내가 무엇을 당했는지도 깨닫지 못했다. 총알을 맞는 건 그 부위를 무언가가 파고든다는 느낌이 아니라. 머리를 한 대 맞는 기분이었다. 저항할 수 없는 해일을 맞은 것처럼 내 몸은 저항 없이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안 그래도 불안정한 교량에 내 온몸을 부닥쳤다. 그런 뒤에야 고통이 몰려왔다. 깜짝 놀랄 정도로 배가 뜨거워졌고. 그 안에서부터 피가 울컥 터졌다. 무언가가 내 내부를 찔러댔다. 이거. 뼛조각들인가?
나나시의 몸이 교량에 떨어진 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나와 히무로가 디디고 있는 지점은 흔들렸다. 나는 몸의 균형을 잃었다. 발을 디딜 만한 곳이 없었다. 아까까지 잘만 디디고 있던 곳이 왜인지 더없이 가벼워졌다. 그 이유는 나나시가 쓰러지는 충격 탓에 다리의 구조 어딘가가 끊어져서. 그 지대 자체가 불안정해졌기 때문이다.
"어. 어어. 어어어어?!"
"마유즈미!"
히무로는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하필 나는 총을 홀스터에 넣고 실타래를 꺼내는 등 손을 바삐 움직이고 있어. 히무로의 손을 제때 잡지 못했다. 그냥 총을 버렸으면 잡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마지막까지 도움이 되고 싶었나 보다. 총 따위야 버려도 됐을 텐데…
내가 발을 디딘 침목이 뚝하고 부러졌다. 나는 더 이상 그곳을 밟고 서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실타래를 손에 쥐려다가. 그러지 못한 채 그걸 놓쳐버렸다. 송어를 손으로 잡으려고 했던 것처럼. 기름칠을 해 놓은 듯이 내 손에서 그게 쏙 빠져나왔다.
"아!"
실수를 했음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나는 몸의 균형을 잃었다. 기우뚱 몸이 뒤로 넘어가자 나는 보이지 않는 걸 잡으려고 팔을 붕붕 돌렸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그대로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히무로의 모습이 순식간에 작아졌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아악!"
마유즈미의 비명을 들은 순간. 비로소 내 눈에서 증오가 걷혔다.
"마유즈미!"
나는 그녀를 따라 공허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마유즈미가 실타래를 놓친 채 떨어지는 것을 보았고, 그것을 찾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마유즈미의 비명은 나보다 현저히 밑에서 들려왔다. 나는 몸을 모아 공기의 저항을 최소화한 채로. 마유즈미를 향해 더 가까워졌다. 더 빨리 죽기 좋은 바보짓이었다. 내 전신에 바람이 휘몰아쳤다.
바닥이 언제 나오는가. 적어도 그전에 마유즈미의 실타래를 낚아채야 했다. 영안로의 끝 지점에 있는 빛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진 데다가 마유즈미의 실타래는 검은색이었다.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 당연했다. 나는 마유즈미의 비명을 잘 듣고, 그 지점이 아닌 곳을 향해 방아쇠를 여러 번 당겼다. 총이 만들어낸 빛에 의지했다.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그 찰나의 빛으로 무언가를 볼 수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실제로 그것을 보았다. 실타래! 마유즈미의 것! 나는 눈을 부릅뜨고 몸을 더더욱 웅크렸다. 더 빨리 떨어져야 닿을 수 있었다. 나는 총알을 다 써버린 44구경 권총을 휙 내던지고서 자유낙하했다.
나는 더 깊이 추락했고, 실타래와 마유즈미는 나와 시시각각 가까워졌다.
5m, 4m, 3m, 2m, 1m.
매초 매초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도박이었다. 내 주머니에는 여전히 내 실타래가 있었으나. 나는 그것을 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카텟을 위한 도박이라면 내 목숨도 판돈으로 올려야 옳았다. 마유즈미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작게 들렸다. 나는 손을 길게 뻗었다.
총으로 만들어낸 섬광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문 채. 제발 내가 눈대중으로 그린 장소에 실타래가 있기를. 그래서 그것을 낚아챌 수 있기를 바랐다. 제발. 제발. 닿아라. 빌어먹을. 닿아라. 닿으라고. 이딴 저주받은 장소에서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흰 옷의 남자를 피했는데 추락사라니 웃기지도 않았다. 제기랄 것.
잃을 수는 없다. 무슨 수를 써서도 그녀와 함께 나갈 것이다. 잡을 것이다. 반드시 잡는다. 또 놓쳐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 수많은 실패의 비석에 마유즈미의 이름까지 올라갈 수는 없었다.
"히무로!"
나를 발견한 마유즈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그녀는 어느새 거의 같은 위치에 놓였다. 그녀는 절박하고, 반가우며. 또한 경악에 가득 찬 얼굴로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왜 내가 여기까지 뛰어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그러나 누구도 나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괜찮아! 다 괜찮아!"
우리는 이곳에서 무사히 살아나간다. 반드시 그렇게 될 터였으니까. 나는 어깨에 힘을 세게 주었다. 손을 뻗었다. 그 안에 무엇이 잡히더라도 움켜쥘 기세로 나는 손을 뻗었다. 맹금이 토끼를 잡듯이 손가락이 일점으로 모였다. 나는 손이 아파오리만치 세게 그것을 움켜쥐었다.
그 안에는 마유즈미의 실타래가 있었다. 나는 지체 없이 마유즈미의 실타래를 내 입으로 가져갔다. 몸에 구멍이 뚫리는 듯한 환희와 안심이 나를 때려댔다. 해냈다. 끝났어! 이제 다 괜찮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웃!"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 왜… 왜 안 통하지?" 마유즈미는 말했다. 목소리에 당황이 묻어 나왔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허무함과 위기감보다 나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일 앞에서 넋을 놓아버렸다.
어째서? 어째서? 마유즈미의 실타래는 작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왜?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떤 기이한 오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빠져나갈 수 없다니.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웃!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웃!"
나는 몇 차례 더 소리쳤으나 실타래는 여전히 반응하지 않았다. 왜? 어째서? 실타래는 누가 사용했다고 한들 당사자의 실타래에 당사자의 이름을 대면 그 사람을 영안로 밖으로 보내준다. 이미 제츠보에게 통하는 것. 하기와라에게 통하는 것을 전부 똑똑히 봤다. 그런데 왜 마유즈미에게는…
"23T5U130. 아웃!"
"니산티. 아웃!"
그 당시에도 실타래는 통하지 않았다. 23T5U130과 니산티는 제츠보의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다른 이들이 그 이름을 이름이라 인식하더라도, 진명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실타래는 반응하지 않았다. 가명은 실타래에 통하지 않는다. 마유즈미의 진명은 따로 있다. 그런데. 마유즈미는 정작 그 이름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그 두려운 사실 앞에.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파국을 깨닫고 그저 전율하며.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진명을 모르는 사람은 마유즈미 말고도 더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대체 무슨 짓을?
"네 이름은 지금부터 카이다 쿠로하다."
누가 말했더라. 모르겠다.
"흐흐흐흐흐… 이히히히… 아하하… 아하… 아아아악하하하… 이히히… 하하… 하하하…"
주체할 수 없는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솟아올랐다. 어떻게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지?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멍청했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답도 안 나올 정도라 나조차 놀랐다.
"그래… 나도… 그놈이랑 똑같은 처지였던 거야… 흐히히히… 흐흐흐…"
이름 없는 사람. 늘 혼자고 혼자 죽을 운명인 사람. 병신… 이용만 당하면서, 자기가 빠져나가지도 못할 곳으로 끌려들어 온 병신 같은 새끼… 그 새끼를 그렇게 욕해왔던 건. 내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었던 거지…
멍청한 년… 모노로그는 네가 영안로에서 나왔을 때 팽할 생각조차 없었어. 영안로에서 못 나가는 사람 둘을 한 곳에 모아놓으면 아무튼 둘 다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영안로에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몸을 막 쓰다가 당황한 채. 돌이킬 도리 없는 채로 죽을 테니까.
쿠로하. 나는 검은 칼날이었다. 어느 곳에서도 내게서 그 이상을 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단 한 번도. 그보다 더 나은 무언가가 될 수 없었다. 내가 어떤 밭에서 돋아 어떤 나무에서 수확되었는지조차 모른 채. 버려지게 되었다.
손아귀 안에서 실타래가 미끄러졌다. 이제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실타래를 주워서 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기력이 떨어졌다. 목석이 되어버린 몸은 그대로 굳었다.
이제 전부 끝났다. 이제 도무지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조금도. 그렇게 나의 운명은 닫혔다.
고통에 가득 찬 채 비명을 질렀다. 그런다고 도와주러 오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야. 다 내쳐버렸으니까.
"이름 없는 남자… 아웃."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이미 실타래에 대고 그 이름을 대 보았다. 설마 결과가 달라질까 하는 기대는 없었으나. 발버둥 치는 마음으로 한 번 더 시도했다.
"나나시… 아웃…"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실타래는 조금의 반응도 없었다. 그것 또한 이미 시도했으나 실패한 이름이었다. 나는 뜨거운 피가 울컥 터지는 복부를 손으로 감싼 채. 다음 이름을 떠올리려 애썼다. 어떤 이름이 가장 가능성이 클까? 어떤 이름…
어떤 이름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노네임. 아웃… 핑키. 아웃… 핑크헤어… 아웃… 네임리스… 커흑… 아웃…"
그것들은 전부 가명일 뿐이었다. 내 이름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어떤 것도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름 없는 남자였다. 그리고 실타래는 진명에만 반응한다. 탈출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모노로그가 나를 위해 파 놓은 함정이었다.
나는 영안로에서 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내 복부에는 여전히 총알이 박혀 있었다. 지혈하더라도 피가 멈추지도 않을 것 같았다. 치료할 방법은 없는 와중 피는 계속 흘러내렸다. 여전히 삐걱이고 비키라고 아우성인 교량 위에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 간단한 동작에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힘이 필요했다.
나는 억지로 다리를 움직였다. 그게 과다출혈을 재촉하는 일임은 알고 있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교량을 다 건넜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고통은 심해졌다. 옷으로 감싼다고 해서 출혈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윽고 나는 가운의 칼라 부분을 입에 물고서. 내 상의의 천을 상처부위 안으로 쑤셔 넣었다. 배를 짓이기는 느낌이 들었다. 지혈을 위해서라면 말 그대로 배를 짓이길 각오로 천을 쑤셔 넣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고통이 너무 심했다. 부서진 게 분명한 내 뱃속의 어떤 부분 안에서 뜨거운 탄환이 지글댔다. 마치 못이 잔뜩 박힌 쇠파이프가 내 안에 쳐박혀 빙글빙글 돌아가는 듯했다. 나는 억누를 수 없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발걸음이 점점 둔해졌다. 영안로에서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그 답은 알 수 없었지만, 곧 알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이제 나는 죽을 테니까.
괜찮아. 난 행정상 올해로 스물다섯 살이라서. 내 이름 들으니까 곧바로 인출해줬어. 가문 입김이 여기까지 닿을 줄은 몰랐는데…
그런 거 아니야! 내가 태어나기 몇 년도 전에 부모님이 미리 호적에 올려 두셨대. 어차피 집 밖으로 내보내진 않을 거니까 성인 신분으로 빠르게 집안 사업을 도울 수 있도록. 미리 올리신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마유즈미의 장녀였다. 그녀에게 손윗누이가 있다는 정보는 어디에서도 얻지 못했다. 그런데 언니라고?
"언니. 왜… 왜 이제 왔어? 어디 갔다가 이제 온 거야. 나 정말… 정말 무서웠단 말이야. 언니…"
마유즈미 가문을 오래 섬긴 한 사용인에게서 의미 있는 정보를 입수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어릴 때. 그녀보다 두 살 정도 많은 호위가 그녀에게 붙었다는 것이다. 나이는 어렸지만 실력은 확실하다고 불린 호위. 그녀는 양친에게서 정서적으로 분리된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보모 노릇을 하면서 그녀와 유난히 친하게 지내다가. 어느 순간 마유즈미 가문을 떠났다는 것이다.
거짓말이었다. 그는 가문의 비밀을 숨겼다. 죽은 주인들에게 충성을 다했던 거지.
"너는 누구냐." 나는 낮게 뇌까렸다.
"마유즈미 나데시코야." 그녀는 단조롭게 말했다.
"이 아이에게 아스모데우스에 대해 알려준 사람이지. 앞으로 잘 부탁해?"
"내가 말했잖아. 제대로 나이를 먹었으면 너희보다 나이가 많았을 거라고. 스물은 족히 넘겼을 거야."
괜찮아. 난 행정상 올해로 스물다섯 살이라서.
어떤 명문가의 행정도 그렇게 느슨할 수는 없다. 없는 아이를 미리 등록시켜 놓는다고?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열릴 수많은 잔치와 축복과 모임들은? 얼굴이라도 비추려 하는 정계의 인사들은? 돌이라도 보자기에 싸 놓고 아이라고 우겼을 수는 없다. 강대한 가문에 유령 아기란 존재할 수 없다.
"언니로군.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언니… 그렇지 않나."
"마유즈미 나데시코야."
"그녀에게 아스모데우스를 가르칠 수 있거나 비디오를 보여줄만치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자는 그 '언니'뿐이겠지."
가족이라면 가능하다. 보모가 아니라 가족이다. 보모에게는 전통을 어기고 괴이한 문물들을 알려줄 만한 권한이 없다. 마유즈미 가문 내에서도 터부시 할 수 없는 신성. 차세대의 당주 역할을 할 자. 초고교급 서예가라는 칭호… 그것마저도 마유즈미 본인의 것이 아니었다.
"마유즈미! 네 이름은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아니야. 그건 네 손윗누이의 이름이야! 너는 잊어버린 것 같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해답이야. 너에게 아스모데우스를 알려줄 만치 가까운 사람. 그 집 안에서 그 정도의 권한을 가진 사람. 외부 세계와 접촉마저 가능한 언니! 단어 말대로 그녀는 네 언니였어!"
마유즈미는 자신의 언니의 신분을 뒤집어썼다. 그렇기에 이름이 따로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알아낼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언제 떨어져 죽을지 알 수 없었다. 일본에 존재하는 여성의 이름을 전부 읊기에는 시간이 조금도 없었다. 마유즈미는 여전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없어. 마유즈미! 지금 당장 떠올려야 해!"
"아니야. 히무로. 나데시코가… 나데시코가 내 이름…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
마유즈미는 멍하니. 감정 없이 누군가가 주입한 듯한 문장을 중얼거렸다. 억압당했다. 이름이 지워졌다! 마유즈미 가문은 분명 그녀에게 나데시코라는 역할을 떠넘겼다. 원래의 정체성이 억눌렸다. 그래서 언니를 향한 그리움과 죄책감은 갈 곳을 잃고, 언니가 알려 주었던 모든 지식과 함께 악의 넘치고 자신의 부활을 바라는 인격을 낳았던 것이다. 그제야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왜 눈치채지 못한 거냐. 대체 왜!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교량과 희미한 빛은 이미 티끌만 하게 보였다. 마유즈미와 나는 기약 없는 공동 속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가속도가 심하게 붙어 이미 귓전을 공기와의 마찰과 바람이 때려댔다. 점점 더 빨라지는 와중 언제 바닥을 만나 추락사할지도 알 수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열쇠는 마유즈미에게 있었다. 내가 골몰한다고 해서 이름을 도출해 낼 수는 없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나는 발버둥을 쳤다.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도 나는 떠오르는 모든 이름을 실타래에 외쳤다.
"마유즈미 스미레. 아웃! 마유즈미 쿄카. 아웃! 마유즈미 유우카. 아웃!"
타자기를 네 번 두드려서 셰익스피어 작품을 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 소리쳤다.
"마유즈미 아즈사. 아웃! 마유즈미 미사키. 아웃! 마유즈미 리오. 아웃!"
시간이 없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아드레날린이 뇌 안에서 날뛴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당시 살면서 마주친 죽음보다 훨씬 더 가까이 죽음에 다가갔고, 초가 지날수록 더욱더 가까워졌다. 과연 그 방법이 먹힐지조차 회의적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수많은 가능성 중에 단 하나만이 정답이었고 정답을 말하지 못한다면 죽는다.
"마유즈미 히마리. 아웃! 마유즈미 아키라. 아웃! 기억해 내야 해. 마유즈미! 네 이름을 기억해야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어. 어서!"
"모… 모르겠어. 히무로. 전혀 모르겠어… 내 이름이 뭐였는지… 어. 어떻게 해?"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끝일 리가 없어.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는 없어. 또 벌어져선 안 돼. 나는 그 생각만을 했다. 왜 하필 그녀여야만 했지? 왜 하필 지금의 그녀여야만 하지?
"마유즈미 세이카 아웃! 마유즈미 나노하 아웃! 마유즈미 사쿠야 아웃!"
또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게 둘 수는 없어. 세상 누구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게 나는 아니야. 또 잃어버리는 건가? 또? 대체 왜?
"마유즈미 모모에 아웃! 마유즈미 미치코 아웃! 마유즈미 린 아웃! 마유즈미…"
"안 돼. 히무로… 여자애 이름은 골백개가 넘어. 히무로. 그런 식으로는 못 맞출 거야. 그러다가 너까지 죽어!"
"마유즈미. 떠올려야 해. 그게 아니고서야 우리는 나가지 못해!"
"너는 나갈 수 있잖아. 히무로. 빨리 나가래도! 네가 위험해지는 건 싫단 말이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곤두박칠치며 나는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공황과 절망을 느꼈다. 솟아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영원히 떨어질 수 있다면 찍어서 이름을 맞출 수 있겠으나 끝이 있다면. 전부 끝장이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생각했다. 또 놓칠 수는 없어.
나는 마유즈미의 몸을 공중에서 껴안았다. 수개미의 한 번뿐인 결혼비행이었다. 소중한 것이 생겼다. 이런 나에게도 사랑을 주었다. 나 또한 사랑을 돌려주고 싶었다. 그렇다면 끝까지 함께 가야만 이치에 맞는 것 아닌가. 어째서.
또 가증스럽게 혼자서만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나아간다면. 무엇이 남지?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그 야망만이 남았다. 누가 들었다간 코웃음을 칠. 실제로 나조차 반신반의하는 그 허상.
마유즈미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것은 마유즈미에게 내어준 나를 버리는 일과도 같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누구나 자신의 일부를 끊어내는 일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여럿이서 하나 된 사람들이었다. 카텟. 우리는 서로의 생각마저도 알 수가 있었다. 그렇게 깊게 얽혔다. 서로를 이해했고, 연민했고, 존경했으며 존중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영향을 받아 나아갔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것을 앗아가겠다고?
"…히. 히무로…"
"마유즈미 노아 아웃… 마유즈미 나기 아웃…"
. 모든 게 의미를 잃은 와중 마유즈미는 내게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것이었다. 그것을 뒤로하고 목숨을 보전하는 짓은 도무지 할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나는 준비가 안 됐어. 마유즈미…"
놀랍게도 나는 그렇게 말했다. 칭얼댔다. 아이 같은 짓거리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실타래를 사용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또 옆의 누군가를 버린 채 혼자 살 수는 없었다. 끝없는 상실. 그것이야말로 저주였다.
"이건 아니야. 전부 악몽일 거야…"
내 등에 마유즈미의 손이 올라갔다. 마유즈미는 개를 달래는 것처럼 천천히. 손바닥으로 등을 토닥였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괴로움을 느꼈다. 이럴 수는 없다. 또 누군가를 잃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새롭게 시도할 이름들을 머리속에 떠올렸다.
그러는 와중. 누군가는 이미 엄두를 냈다.
"히무로. 마음의 준비해. 우리 곧 헤어져."
"아니. 마유즈미. 나는 그러지 않을 거야…"
나는 실타래를 내 주머니 속으로 더 깊숙하게 밀어 넣으려 했다. 손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시멜로우마저 다 먹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마유즈미의 손에 들려 있음을 깨달았다.
"대체 언제…"
"네가 정신 팔렸을 때 슬쩍했지. 이러는 수밖에 없어. 히무로… 무너지지 마. 너는 나가야 해. 너까지 죽어선 안 돼."
"멈춰! 마유즈미! 이리 내!"
나는 팔을 뻗어 실타래를 빼앗으려고 했지만 마유즈미는 이미 등 뒤로 쭉 팔을 뻗어 실타래를 숨겼다. 나는 계속 소리쳤다. 이리 내놓으라고. 당장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마유즈미는 완강했다.
"…괜찮아. 히무로. 만약 모든 게 반복된다면. 우리는 다시 만날 테니까. 꼭 만날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나는 너를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기억할게. 히무로. 무슨 수가 있어도. 너를 기억할 거야."
표정은 보지 못했으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마유즈미는 줄곧 겁먹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무서워도 그녀는 늘 두려움에 직면해 왔다. 언제나 마유즈미는 용감했다.
"마유즈미! 그만! 그만둬!"
"네가 나를 잊어도… 내가 알아볼게. 히무로 시라베. 아웃."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이름 없는 남자였다."
"네 이름은 지금부터 카이다 쿠로하다."
일기
그 사람은 예술가였다. 진짜 예술가라는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었다.
나는 가족인 그 사람의 그림자를 따른다. 그 사람의 행위는 내 귀감이었고,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그 사람의 예술은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정말로 정말로 드물고 대단한 사람이었다. 주머니 속에서 드러나는 송곳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녀의 이름을 썼으니. 그 사람은 언젠가 잊힐 것이다. 그녀는 내게 흡수될 것이다. 동화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언젠가 영영 잊힐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으로 나를 기억하리라. 너무 잔혹한 일이다.
넌 내가 누구인지 이미 알아. 나데시코… 아니. 이 이름으로 부르면 안 되나? 응?
그녀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나를 원망하리라.
"그건 네 삶이 아니야."
"네 자리에는 내가 있어야만 했어. 그건 원래 내 자리야. 내 삶이야…"
"내놓으라고!"
바로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
넌 날 잊을 자격이 없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 또한 정당하지 않아. 알아들어? 내가 네 삶을 살았다면 너보다 훨씬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을 거야… 내가 네 자리에 있어야 했다고. 넌 쓰레기야. 쓰레기. 쓰레기! 네 삶을 나에게 내놔… 날 자세히 보고. 기억해내 봐!
Mea Culpa Mea Culpa
"놀랐지? 히히히. Mea Cupla."
Mea Maxima Culpa
"Mea Culpa… 히무로."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멍청한 딸년이 결국 내 명예까지 더럽히는군. 남자와 놀아나다가 그렇게 끔찍하게 죽다니…!"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이 내 가족이라는 건 무척 끔찍한 일이다.
"그러니까 방에 가둬만 놓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키워야 하는 걸 여기저기 쏘다니게 풀어주니 자기 분수도 모르고 날뛰었던 거야!"
왜냐하면 가족이라는 끈은 누가 어떻게 해도 끊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실수를 고쳐야 한다. 원래 이렇게 해야만 했어. 밖에 내보내선 안 돼."
또 다른 가족이 생기더라도 그 뿌리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섬겨야 하는 부모님이라던가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다. 말 그대로 나는 가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문을 닫고 TV를 치워. 가둔 채로 기르는 거야. 사용인들에게는 시킨 말만 하라고 지시해. 그럼 이번에는 죽지 않겠지… 그렇게 비참하게 죽지는 않을 거야…"
내 일부는 저 사람들일까. 나도 언젠가 저 사람들처럼 변모할까를 떠올리면 두려움에 벌벌 떨게 된다.
"왜 언니의 이름을 쓰라고 하는 거야? 왜? 나는 언니가 아니잖아!"
초고교급이 되는 기분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하루아침에 사람들이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과 역량과 태도와 삶을 강요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뭐라는 거니. 나데시코? 너는 원래부터 나데시코였잖니."
"너는 나데시코야. 나데시코."
"아가씨는 나데시코였어요."
"나데시코가 아닌 적이 있던가?"
누가 나와 같은 입장에 놓여 봤을까?
"나는 나데시코였나?"
"내 이름은 처음부터 나데시코였던 걸까? 그렇다면 언니는?"
"언니라뇨? 아가씨. 아가씨가 첫째 딸이었잖아요."
"여보. 나데시코가 또 자기 이름을 헷갈리나 봐요."
"요즘 유독 그러는구나. 치료사를 불러야겠지?"
그런 이가 없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누구에게 물어야 답을 알 수 있을까…?
"이걸 들여다보고 말하렴.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
"치료사님… 나데시코는 순종적인 여자애라는 뜻이라던데. 진짜예요?"
"그럼. 잘 아는구나. 누가 알려줬니?"
"언니요."
"당주님. 아무래도 치료 시기를 매일로 바꿔야겠어요."
죽음은 언제나 끔찍하다. 이 세상의 물것들 중에 죽음이 가장 끔찍하다. 누구도 어찌할 수 없고, 피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조차도 없다. 단 하나 가능한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내가 나데시코라 하잖아! 왜 다 언니를 없는 척하는 거야. 왜 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래! 언니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그걸 모른척하며 살아!"
"네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못 하는 거냐?"
"못 하겠어! 다 이상해! 날 여기에 가둬두는 것도 이상해. 너무 이상해! 내보내줘.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너 때문에 우리 모두 힘들다. □□□… 아니. 나데시코! 네가 정 그렇게 힘들다면. 마음대로 해라. 어디서 자빠져 죽든 간섭하지 않으마! 하지만… 네 의무는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갈 거다."
그러나 나는 잊고 싶지 않다. 오직 나만이 잊으려 하지 않는다. 제발 잊지 않게 해 주세요. 제발요. 부탁해요. 부탁할게요…
"내 이름은 나데시코다. 나는 나데시코였다. 앞으로도 쭉 나데시코다."
"치료사님. 그런데 우리 왜 이거를 하루 세 번씩 하는 거예요? 당연한 얘기를."
이제는 혼자가 아니다.
내 이름은 마유즈미 나데시코.
내 곁에 항상 그녀가 있기 때문이다.
한 일본인이 미국에서 납치살해를 당하였다.
실종된 자식을 찾으려는 일본인 부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납치범을 추적하였고, 곧 그가 체포됨과 동시에 모든 덜미가 붙들리고 말았다.
그는 노예였으나 왕이 되었고 오페라의 최상석에 앉았고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그는 고갱과 친구였으며, 카프카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예술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희생자를 정할 때도 예술계 종사자들을 선호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탑에서 벌어지는 일과 별다른 관련이 없다.
'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 > 챕터 3'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단크 타워 챕터 3 - 22+5 (6) | 2023.08.27 |
---|---|
더 단크 타워 챕터 3 - 22+4 (8) | 2023.08.17 |
더 단크 타워 챕터 3 - 22+2 (6) | 2023.08.01 |
더 단크 타워 챕터 3 - 22+1 (8) | 2023.07.16 |
더 단크 타워 챕터 3 - 22 (2) | 2023.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