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후회해.
그 무엇도 이루어졌으면 안 됐어.
다 내 잘못이야.
"하기와라 우시오. 아웃!"
내가 실타래를 쓴 횟수는 두 번이었다. 한 번은 악연들을 만났을 때 겁먹어서 썼고, 한 번은 동굴에서 탑으로 돌아가기 위해 썼다. 나는 쓰자마자 누가 내 뒤통수를 잡아챔과 동시에 몸이 딸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안녕! 하며 작별할 시간도 없이 나는 사라졌다. 제기랄. 많이도 걸었다. 어둠으로 가득 찬 동굴과 블레인이 달린 철도. 퍼져 버린 블레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첫 번째. 내가 애미애비를 만난 그곳을 지나는 찰나의 순간에… 나는 보았다.
누군가가 나와 함께 날아가고 있다는 것을.
1초 남짓 되는 찰나의 시간이었다. 그자는 나보다 더 앞서 탑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형체만을 가까스로 확인했을 뿐 누구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허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탑에 도착하는 순간.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순간 나는 기특하게도 머리를 잘 굴렸고, 그 생각으로 돌바닥을 기다리는 와중…
나는 정말 이상한 것을 보았다.
순간 잘못 본 게 틀림 없었다. 환영이든가. 무슨 놈의 착시던가 아무튼 진짜는 아니었다. 그래야 했다. 날아가고 있는 누군가랑 나를 제외한 누군가가… 그곳에 있었다.
저거…
사람… 인가?
그런데 왜 몸이 없지?
나는 돌바닥에 풀썩 떨어졌다. 그러자마자 나는 몸을 홱 일으켰다. 영안로에서 탈출한 자를 보기 위해서였다. 머릿속으로는어느 정도의 용의자를 추렸다. 나보다 앞서 날아온 놈인 이상 히무로와 마유즈미는 아니었다. 카나리는 일찌감치 나갔고, 그럼 나나시 아니면 카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엥…? 카나리?"
카나리는 개구리처럼 엎어져 있다가 몸을 번쩍 들었다. 나만큼이나 놀란 것처럼. 눈은 띠용 하게 커지고 몸은 굳어 있었다.
얘 뭐야. 얘가 왜 여기서 나오지? 카나리는 진즉 영안로에서 나갔잖아. 패트리샤가 그렇게 말했다고. 다시 들어갔다 나갔다고? 왜?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도착하기 직전 나는…
"으… 으윽!"
"어?! 야. 어디 가!"
카나리는 외마디 신음을 내며 꽁무니를 뺐다. 나는 순간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에 휩싸여, 몸을 일으키고는 카나리를 뒤쫓았다.
"거기 안 서? 너 뭐야. 이 새끼야! 대답 안 해?!"
나는 나름대로 전속력을 내 쫓아갔지만, 왜인지 카나리는 내 생각보다 발이 빨랐다. 그 짧은 다리로 뛰는 거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다리 짧은 사람이 단거리 달리기에 유리하다는 소리가 진짜였나?
한 층 정도의 차이가 나자 나는 우선 추적을 포기하기로 했다. 카나리가 왜 시체가 발견되는 순간 영안로에서 나왔는지는 몰라도, 내가 발견한 이상 나중에 캐물을 수 있을 터였다.
시체가 나왔고, 나는 경망스럽게 다니기보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기로 했다. 그래야 범인을 잡지.
영안로에서 나와 도망치는 카나리를 기억했다.
나는 다이얼로그를 들어 이바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 썅."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이바라가 받지 않는 게 아니라, 전파가 가지 않는다.
"다이얼로그의 통화 기능은 잠시 막아 놓았다. 유흥을 위해서다."
모노로그가 등 뒤에서 솟아올랐다. 이놈은 끼어들 만한 순간이 올 때까지 계속 바닥에 처박혀 있는 건가? 완전 변태 아니야?
"뭐?… 그보다. 너 방송이나 제대로 해. 나는 지금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 누가 죽었는지, 학급 재판은 언제 열리는지도 모른다고. 그런 걸 방송해야지. 지금 뭐 해?"
"그러면 재미가 없지. 너 스스로 알아내라. 누가 죽었고 누가 살아남았는지를…"
어휴. 밉상인 새끼… 어차피 바닥으로 스르르 사라져버릴 테니까 나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모노로그는 내가 알아서 알아내라는 대답으로 질문들을 일축했다. 개중에는 학급재판의 개정 시기도 있었다.
지금까지 학급재판의 개정은 시체가 발견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모노로그는 콕 집어 이번 재판만 언제 열리는지를 말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영안로와 탑의 시간은 똑같이 흐를 것이다… 너희가 할 일을 해라. 하하!"
너희가 할 일을 해라. 흠. 히무로도 비슷한 말을 했지.
"탑으로 가라. 하기와라 우시오. 네가 할 일을 해라. 나에겐 내가 할 일이 있다. 그것이 끝나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다. 나가서 다른 이들에게 힘을 보태라…"
히무로가 한 다른 말들도 문득 떠올랐지만… 나는 그것을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일단 학급재판이 언제 열리는지 명시되지 않은 이상, 조사 시간도 충분히 길어질 테니까… 그러니 이번 살인에서도 살아남았다며 마음 놓기에는 좀 멀었다.
연쇄살인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모노로그는 명시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 하나가 죽은 거 수사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살인 두 개의 알리바이를 따지고 검정을 찾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 있는 놈들과 접촉해서, 영안로 안에 있는 사람이 다 나올 때까지 더 죽는 사람이 없게끔 유도해야 했다.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 직접 알아보라니. 망할 악취미였다. 진짜 발상 미쳐버리겠네. 다이얼로그가 안 통하니 누가 살아 있는지 확인이 안 되었다. 더 불안했던 것은, 탑이 떠들석하거나 다들 숙소 밖으로 나와 누가 죽었는지, 누가 살아있는지 확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탑은 전례 없이 조용했다. 내 빈자리가 이렇게 큰 건가? 하는 뿌듯함 따위는 느끼지도 못했다. 카나리는 어디로 내뺀 건지 훌쩍거림이나 가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탑은 고요했다. 내가 말을 하면 탑이 내 목소리를 메아리로 대답할 만치. 그보다 으스스한 장소는 없었다. 이미 이 탑의 돌은 사람들의 피를 먹었다.
유령들이 기어나오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불안한 생각이 계속 들었다. 내 피에는 위태로움이 들어 있다. 그것이 활성화될 때마다 나는 내 혈통을 되새기게 되었다. 영안로에서 처음 실타래를 썼을 때처럼. 내 악연이 기어 나와 나를 쫓아올 것만 같았다.
심장은 점점 빠르게 뛰었다. 무서워 죽겠다. 누가 어디서 죽었는지 알고 싶은 이유는 딱 하나다. 나랑 친한 사람이 죽었을까봐.
나는 응당 영안로에서 본 것 같은 이상한 형체를 확인하러 가야 했다. 물론 잘못 본 걸수도 있지. 그냥 영안로에서 흔히 나오는 환상일 수도 있고. 하지만 몸이 없었다고…
그러니 나는 계단을 다시 올라, 영안로 안에 있는 자를 봐야 했다. 아마 히무로라면 그렇게 했겠지.
히무로라면… 늘 원칙대로, 대의를 위해 판단하는 그놈이라면…
"하기와라 우시오. 네가 할 일을 해라. 나에겐 내가 할 일이 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개처럼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히무로는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닐지라도 나는 히무로가 할법한 일이 아니라, 내가 할법한 일에 몸을 던졌다. 이바라의 숙소 앞에 도착한 직후에 후회를 느꼈지만,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이바라. 이바라! 살아 있냐? 문 좀 열어 봐! 야!"
나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여러 번 누르듯. 나는 급했고 또 무언가가 잘못될까 걱정이 많았다. 설마. 에이. 설마.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내 친구일 수는 없어. 설마…
이기적이라도 좋았다. 마음대로 욕하라지. 지금까지 방송으로 전파한 적이 없는 시체의 신원을 얘기하라 종용한 건 두려움 때문이었다. 빨리 듣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내 친구가 아니라는 걸 조금이라도 빨리 확인하고 싶었으니.
그런데 대답이 없었다.
"…너 괜찮은 거 맞지. 이바라? 야… 놀리지 마. 괜찮은 거지?"
에이. 그냥 어디에 살인자가 돌아다니는 건지 모르니까, 그리고 물론 아니겠지만 내가 살인자고 다음 희생자를 물색하는 걸지도 모르니 열어주지 않는 거겠지. 아니면 성대모사를 하고 다니는 후루미나미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던가.
뭐든 간에 그것만큼은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히무로는 탈출 장치를 접한 직후 그가 보였던 모습을 다시금 보였다. 전조는 없었다. 전조 비슷한 것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대화 내용이었다.
"캐롤 씨가 왜 부활하면 안 되는지는 아직도 모르는 거야?" 내가 물었다.
"잊어버렸어." 그렇게 대답하고서 히무로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석연치 않다는 듯했다. "그렇지만 후루미나미 나몬은 그렇지 않았지. 나와 그녀 사이의 차가 뭐라고 생각해?"
"어. 거의 모든 면? 성별. 머리색. 눈색. 둘 다 싸이코라는 공통점 빼면 다 다르잖아." 하기와라가 대답했다.
"…이건 추측일 뿐이지만 어쩌면. 내가 의도적으로 잊은 걸지도 몰라."
히무로는 말했다. 어. 잊어버리는 건 애초에 의도치 않은 일 아닌가? 모순… 이지 않나 싶었다.
"내가 그럴 방법만 있었다면 나는 그렇게 했을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은 탈출 장치에서 대몰락과 카텟 기관에 대해 떠올렸어. 만약 탈출 장치의 기능이 정보라면… 정보를 일깨우는 것이라면…"
"정보! 그래!" 나는 번쩍! 히무로의 말을 떠올렸다.
"번개를 맞은 것이다. 정보의 번개다. 원래는 전류여야 했다. 그러나 너무 축적되었던 거야. 크지 않은 부작용은 효과를 덮어버렸다. 떠올렸다. 너무 많아."
"정보의 번개랬어! 맞아. 정보의 번개를 맞았댔어! 원래 전류여야 했는데 너무 축적되어서. 너무 많이 떠올렸댔어! 와! 그게 그렇게 된 거였구나아!"
왜 내가 그 생각을 못 했지? 조금만 생각했으면 됐는데. 들은 사람도 얼마 없는 내용이어서 지금까지 안 풀렸던 거였구나! 아하! 이제 알았다! 히무로가 그때 돌변한 이유는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서… 그래서…
우리를 죽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던 거구나…?
대체 뭐길래…?
나는 벌컥 두려움을 느꼈다. 히무로는 이유 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당시의 히무로 또한 히무로였다. 다른 사람이 아닌 본인.
"탑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몇 층이지? 천 층이 넘는 건가? 그렇게… 그렇게 길단 말인가? 이건… 이건 잘못되었다. 손 쓸 수 없이 크게 잘못되었어…"
내 눈앞에 있는 남자애가 벌벌 떨 정도의 사실은… 대체 뭐인 거야?
"…해가 되는 정보인가. 정황상 내가 의도적으로 잊었을 가능성이 커."
"아까부터 의도적으로 잊는다는 게 무슨 뜻이야? 그거… 오른손 몰래 왼손이 움직이는 거랑 같은 느낌이잖아."
"캐롤 브라이트는 부활해선 안 된다. 이 문장만이 내 머리에 남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탈출 장치에 노출된 당시의 나는 큰 혼란을 느꼈겠지. 패닉에 빠졌을지도 모르고."
"맞아. 히무로. 너 되게 무서워했어. 그러는 모습은 처음 봤어…"
"당시의 내가 그 정보를 해롭다고… 잊어야 할 이유가 있다 판단했을 경우. 나는 그것을 통제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네 망령을 상자에 가둔 것과 같은 기술들을 나는 여럿 익히고 있어. 조율자를 상대하기 위한 정신무장이지. 말 그대로… 사실 추측일 뿐이지만, 그게 후루미나미 나몬과 나의 차이일지도 몰라."
"무슨 차이?" 하기와라가 물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어째서 나보다 많은 것을 기억하지? 그야 그녀는 기억을 잊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그리고 잊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녀는 해를 끼치는 일을 계속하면 그만이야. 모르는 편이 더 나은 일은 그녀에게 없어. 조금이라도 더 알면 그게 곧 무기야. 만약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면, 필시 다른 이들도 감당할 수 없어. 그게 파괴적인 이상 그녀는 그 비밀의 통제권을 쥐지. 그럼 곧. 감당하게 되는 거야. 짐승 우리를 열듯이."
"그냥 썅년이라는 소리 길게도 한다. 뭐… 이제 아닌가? 걔가 너 도와주겠다고 했잖아. 네가 거룩하다고도 했어. 혹시 마음 고쳐먹은 거 아니야? 왜. 네가 우릴 다 죽일 정도의 정보면, 후루미나미 쪽에선 우릴 다 살려야 하는 정보일 수 있잖아. 착한 놈은 나쁘게. 나쁜 놈은 착하게.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그럴 경우. 사실 우리는 악인일지도 모르지. 가능성일 뿐이지만." 히무로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나는 후루미나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걔가 어떤 속셈을 가지고 있을지 생각해 봤다.
"여긴 지옥이야. 그래서 좋아… 아하하. 아하하하. 나 만을 위해 준비된 지옥이다. 그래. 바로 그거였어! 탑에서 사는 기한! 미완성!"
"여긴 지옥이라는 게 무슨 뜻일까…? 탑에서 사는 기한. 미완성…"
"…뭐라고. 마유즈미?" 히무로가 물었다.
"후루미나미가 한 말이야. 여기가 지옥 이랬어. 후루미나미가 그런 말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사실 여기 살기 힘든 곳이긴 하니까. 그런데 히무로… 그걸 우리가 굳이 알아야 할까? 네가 잊고자 했다면, 잊을 이유가 있었던 거 아닐까?"
히무로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숙고가 끝났을 때도 히무로는 "나도 모르겠어." 라 말했을 뿐이었다.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면 당연히 기억해내야 해. 하지만 내가 잊고자 했다면… 너희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내용일지 몰라. 저울에는 아까와 똑같은 게 올라가 있어. 사명인가. 사람인가. 나는 어떤 것을 중요시해야 하지?"
"나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내가 너 발목 잡아 끄는 것 같긴 한데… 나는… 네가 안 떠올렸으면 좋겠어. 히무로."
내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당시의 히무로는 정말로 괴로워 보였다. 어깨 위에 세상이 올라간 사람처럼 갈 곳을 잃었고, 외로웠고, 위태로웠다. 빠그라져서 나를 껴안던 그 히무로보다 더 힘든 삶을 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정말. 히무로가 모든 걸 혼자서 떠안으려는 일이 싫었다. 너무 싫었다. 소외당하는 기분도 들었고 나 자신이 믿거나 의지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히무로는 이제 내게 무엇도 숨기지 않겠다고 했지만…
내가 그런 위태로움을 느끼는 건, 내가 스스로를 볼 때 히무로에게 도움이 되기 어려운 인물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또 히무로가 멀리멀리 날아갈까 봐 지레 그 상자를 닫아 두고 싶었다. 그게 솔직한 심경이었다. 히무로의 어깨 위에 세상이 올라갈 수는 없었다. 불공평하고 너무 부담이 심한 일이었다.
히무로가 그걸 추구한다면 나는 히무로를 도와주기까지는 도와주되, 자기 몸을 안 살피고 그런다면 무슨 짓을 해서도 짐을 덜어주기로 했다. 그게 친구의 역할일 테니까. 해야 할 임무가 있으면 도와주고, 힘들어하면 달래주고… 히무로가 그랬던 것처럼. 보통 친구들은 다 그런 거 하는 거 아닐까? 그렇지 않을까?
"후벼 파봤자 좋을 일 없다는 거야? 뭐. 일리가 있긴 하네. 기억한 순간 우릴 죽일까 말까 죽일까 말까 하는 놈이 되면, 그냥 냅두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우리가 히무로 말을 100% 믿을 수 있다는 가정 하에는 그게 옳은 판단이야. 죄인이니. 가망이 없니. 다 의미 없어지니… 야가미랑은 뭔가 의미심장한 얘기도 했어."
"잠깐. 그게… 무엇이었지?" 그렇게 말하는 히무로는, 얼굴을 찌푸린 채 이마에 손을 얹고 있었다. 순간 걸음걸이가 멈칫거리기도 했다.
"잠깐. 하기와라. 말 하지…"
"뭐더라… 야가미가 뭔가를 알아챈 눈치를 보였더니 너는 참을성이 많으니 참으라고 했어. 그리고는 탑의 높이를 봐야 한다며 휘청휘청 거리며 걷던데."
"말하지 마. 하기와라! 자. 잠깐!"
"왜 그래? 오. 그래. 잘 따라 하네. 딱 그런 느낌으로…"
하기와라가 히무로를 보며 감탄하다 말았다. 히무로는 휘청거리다가 말고 그대로 쓰러졌다. 그러나 기절하지는 않았다. 나는 소름이 끼쳤다. 아. 안 돼… 안 돼. 내 히무로가…
"야 라고 해봐… 절망… 가망 없는 지옥. 사라진 의미. 높은 탑… 끝이 보이지 않는 탑… 끝이 보이지 않는 형벌…"
"아. 안 돼애!"
그리고 히무로는 나와 하기와라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을 말해 주었다.
탈출이 끝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너. 너 맞구나! 빨리 들어와. 빨리!"
아주 작게 생긴 틈새 사이로 누군가의 손이 하나 튀어나왔다. 나는 몸을 날리다시피 해서 손이 당기는 힘과 함께 틈새 안에 빠졌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주인을 알 수 있었다.
"아! 너 무사하구나. 잘 됐어! 망할!"
"진짜 너 맞는 거지? 야. 걱정했잖아! 왜 이렇게 안 왔어!"
나와 이바라는 친구 사이의 어색한 포옹을 나누었다. 이것은 두 번째 살인이 벌어진 직후 해변에서 어색하게 만나 극적인 화해를 이뤘을 때 함께 발명한 개념으로. 서로 껴안되 몸을 과도하게 밀착하는 일 없이 서로 어색하게 등을 두드리는 일이었다.
서로 다섯 번 정도 등을 두드리고 나서 우리는 다시금 어색하게 멀어졌다. 할 일을 다했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고 나자. 내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이바라를 올려다보았다. 늘 그렇듯이 자켓을 허리춤에 두른 걔를.
"…그런데. 아까 그 방송 뭐야? 네가 저지른 거 아니지?" 이바라가 말했다.
"내가 그런 거면 뭐. 여기에 올 때 도끼라도 챙겨 왔겠지. 아… 진짜 미치는 줄 알았네…"
나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눕고 싶었던 게 아니라 몸에서 힘이 탁 풀려 나자빠졌다. 이바라는 아니었어. 다행이다. 제기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이기적이라는 건 알지만. 다행은 다행이다.
"나 진짜 걱정 많이 했다… 마유즈미랑 히무로는 곧 올 거야. 일단 나만 왔어. 탑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니까… 그런데 대답이 없었잖아. 엄청 무서웠어. 것보다. 지금 살아있는 게 누구누구야?"
"나도 모르겠어… 당장 뛰쳐나가고 싶긴 했는데 좀 무서워서… 심지어는 전화도 안 되잖아! 으… 대놓고 소리치면서 사람들을 모아 볼까 싶기도 하고."
"아니… 이바라. 이 상황에서는 누구도 믿어선 안 돼."
나는 생각했다. 보통 누군가가 죽었다고 한다면 너나 할 것 없이 누가 죽었는지를 확인하고, 수사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누구도 나오지 않았다. 한 사람이 먼저 모습을 드러내면 우수수 나올 법했지만 누구도 첫 발을 떼려 하지 않았다.
왜? 왜? 살인에서 무고한 입장이라면 그러는 편이 현실적이다. 겁이 많을지언정 여럿이서 모이면 어떻게든 될 텐데. 누구도 나오지는 않았다.
왜 안 나오지? 나는 계속 생각했다. 그들 중에 숨어있는 살인자를 향한 경계? 섣불리 알리바이를 주지 않을 시도인가?
"…누가 죽었고, 살았고, 누가 누구랑 함께 일하는 지도 모르잖아. 그러니 일단 접어두자고. 누구도 믿지 마. 그러고 보니 잠깐. 너 이바라인 거 확실해? 후루미나미가 변장한 거 아니야?"
이바라는 자신의 이마를 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아니 하기와라 우시오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니? 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일어나 봐. 내 키를 보면 내가 나라는 걸 알 수 있겠지."
이바라가 나에게 손을 내밀자. 나는 그것을 덥석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바라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이바라의 키는 163cm. 후루미나미의 키는 169cm. 무릎을 굽히거나 목을 움츠리기 따위의 눈속임도 없었다.
"그럼 너는 믿을 수 있겠다. 휴! 그럼 우리 둘이서 어디로 갈지, 누구를 제일 먼저 찾아가야 할지 정하자. 어때?"
"…저기. 있잖아."
"기껏 묻어놨더니 꾸득꾸득 기어 나오고선…! 꺼져… 꺼져…! 당신들은 내 안에서 죽은 지 한참 됐어… 그러니까 가라고… 다시는 오지 마…!"
"왜?"
"…아니. 다행이구나. 싶어서 그래. 잘 털고 나온 것 같아서. 히무로랑 마유즈미가 도와줬겠지? 개네 돌아오면 박박 쓰다듬어 줘야겠다. 기특해. 진짜 기특해. 너도 박박 쓰다듬어 줄까? 으응?"
"얘가 뭐라는 거지 지금."
나는 괴상한 중년 아저씨를 마주한 것처럼 내 양어깨를 팔로 감싸 안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일단 칸나즈키 먼저 찾아가자. 원래라면 제츠보를 먼저 찾았겠지만, 걔는 안 보인 지 좀 돼서… 전화는 연결도 안 되고 문 두드려도 반응 없고."
"뭐? 제츠보가 왜?"
"모르겠어. 상식적으로 제츠보를 억누를 수 있는 사람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 그건 야가미는 물론이고 카이다가 와도 불가능할 텐데… 하지만 제츠보가 계속 안 보이는 이유가. 그게 아니고 또 어디에 있어?"
나는 제츠보의 실종을 기억했다.
"제츠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이유라… 영안로 속으로 들어가 버린 거 아닐까 싶네. 나나시를 데려오기 위해서… 씁… 아닌가…? 일단 우리가 알 방도는 없으니 다른 곳을 먼저 가 볼까."
"어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다는 가정 하에 탑에는 나, 야가미, 칸나즈키, 카나리, 토키와, 후루미나미, 이바라, 그리고 제츠보가 있었다. 그리고 제츠보 다음에 찾아갈 만한 사람. 그나마 무해하고 별 탈 없었던 사람이 있다면…
"그다음으로 그나마 믿을 만한 사람 있잖아. 토키와. 토키와 찾아서 가 보자. 한 34% 정도 모자라도 그나마 말 통하고 열심히 하는 놈이잖아."
이바라는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더니,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그게… 하기와라. 그게 말이야. 너 없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 어느 날 내가 칸나즈키랑 크레이프 구우면서 옛날 이야기 하다가…"
"너도 하기와라 우시오를 따라가는 것을 권한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정신조작을 막는 일은 내 과업이지 네 것이 아니다."
"…아니. 네 과업을 도와주거나. 네가 스스로를 잃을 때 막는 것이 나의 과업이야."
"누가 그렇게 정했지?"
"내가 그렇게 정하였다. 이… 바보야…? 나는 마유즈미 가문의 장녀고. 카텟의 일원이며. 총잡이이다. 스스로의 숙원을 정할 수 있는 자이며. 극도로 말랑해 약해빠진 발을 가짐에도 자갈밭을 걸을 자이다. 네가… 아무리 나를 밀어내려 해도. 그러지 않을 자이다. 알아들어?"
"…탈출이 끝난 이상 너는 나를 따라올 필요가 없다. 애초부터 시작될 수가 없다. 지옥의 뚜껑은 닫혔고 우리의 운명도 봉인되어 버렸으니. 너는 나를 따라올 의무가 없다. 그래봤자 의미도 없고."
"그럼 너는 왜 나나시를 막으러 가. 히무로? 응? 모순이잖아. 정작 너는 네 의무를 다하려 들잖아. 너도 뭔가 해낼 수 있는 게 있어서 지금 움직이려는 거 아니야?"
"나는 해낼 가망이 없어도 움직이게 되어 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요건이 충분한가이고, 내가 움직여서 비참한 꼴이 조금이라도 면해질 수 있느냐다. 그것은 아둔함에 불과하지. 종말이 오는 와중 화단을 가꾸는 일이고, 창 한 자루만을 든 채 사자 떼에 덤비는 일. 그저 그럴 수 있기에. 그러지 않는 것보다 마음이 편하기에 할 뿐. 위안일 뿐이다."
"그건 숭고한 일이야. 히무로. 왜 그 사람이 세상이 끝나는 와중에도 꽃에 물을 주는 걸까? 꽃을 아끼기 때문이고,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잖아. 사자 떼에게 뛰어드는 것은 그냥 잡아먹히는 게 아니라 끝까지 저항하고자 하는 전사의 혼을 가지고 있으니까야. 왜 그게 아둔하다는 거야?"
"희망을 가지는 건 멋진 일이지만. 희망이 없음을 잘 이해하고 있음에도 놓지 않는 건 미련함이다."
"아니. 네가 틀렸어. 히무로. 외면할 수 있는데도 똑바로 바라보는 건. 고결한 거야. 다른 사람이 다 체념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의지의 표본이고, 사람이 얼마나 멋있는 존재인지에 대한 증거야."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그럼 내 생각도 다른 거지. 그렇다고 우리 중에 한쪽만 맞다는 이야기는 아닐 거야. 그렇지? 그보다. 원래의 너로 언제 돌아올 거야? 결국 돌아올 거면서 왜 그렇게 뻐팅기는 거니."
"결국 돌아오기야 할 테지. 그러나 내가 다시금 모든 것을 잊는다고 한들 너에게 살가워지는 게 전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많은 게 변해. 히무로. 네가 그런 식으로 날 밀어내지 않고 함께 갈 수 있잖아. 네 옆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을 때 네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좋다고 했어. 따라와도 된다 했다고. 그런데 왜 자꾸 먼저 돌아가래! 카텟이라며. 여럿이서 하나가 된 이들이라며!"
"너는 카마이로군."
"카…뮈? 그게 뭔데?"
"카의 바보라는 뜻이다. 너는 카텟이 만병통치약이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 같나? 그러지 않다. 카를 믿을지 말지는 네 자유지만 그것이 너를 비호하고 있다거나, 카가 우리 둘을 특별하게 만드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그러다 네가 죽는다. 카텟의 힘을 믿고 싸우다 죽었던 수많은 총잡이들처럼."
"뭐? 바. 바보?!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이게…!"
'그럼 너야말로 카마이면서!'
"나는 카마이가 아니다. 마유즈미. 이전에 누군가가 나를 카마이라고 부른 적이 있지. 그러나 그녀도 결국 나를 호되게 꾸짖기 위해 그 단어를 쓴 것이다. 나는 지금 너보다 카라는 관념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으며… 잠깐… 너. 어떻게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가 있지…?"
"내. 내가?"
'내가 언제?'
"그래. 그렇게 말이다. 지금도 그러고 있잖은가. 왜…? 대체 무슨 수를…"
'케프다. 카텟의 발전에 의한 성과다. 그녀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그녀와 우리의… 나의 정신은 묶여 있다. 너야말로 바보로군. 벌써 잊어버렸나?'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된다."
"메리의 말에 따르면 말없이 다른 이의 생각이 말처럼 들릴 수 있다고 하더군."
"메리는 그 현상을 '케프'라 불렀는데, 이는 물이라는 뜻이다."
"케프? 뭐. 뭐야. 진짜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 있네?!"
'그리고 나한테 유난히 살가운 이 느낌은…! 내 히무로구나!'
"네놈이…"
'영안로에서 나가라는 종용이라면 이미 내가 여러 번 했다. 번개 맞은 나. 쓸 만한 정보를 뱉어내지 못하겠다면 그만 꺼져라. 교대다. 더 이상 카텟의 일원에게 모욕을 던지게 두지는 않겠다.'
"교대라고?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우리는 한 사람이다. 서로 아는 게 극도로 달라 정신이 일체화되지 않았을 뿐. 서서히 묶였던 것이 풀리면 너와 나는 하나가 된다."
'아직은 아니지. 어차피 다 끝났다며 손이나 놓고 있을 것이라면 몸이나 내놓아라. 아버지의 낯을 잊은 것아.'
"너도 잊은 주제에… 발버둥 쳐봤자다. 너는 그저 덜 알고 있기에 희망이 있는 줄 아는 거야."
"히무로! 힘내! 다른 히무로 상대로 꼭 이겨야 해! 꼬옥!"
'오냐.'
"소처럼 날뛰어 대긴. 너도 은연중에는 알고 있지… 남은 이들을 살리려 애쓰기보다 다음 루프로 넘어가는 것이 효율적이다. 차라리 전부 죽여서. 빨리 끝내는 편이 자비이다."
마유즈미는 다른 히무로의 말을 정제해서 서서히 받아들여갔다. 처음에야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탈출이 끝났다. 모든 의미가 없다. 뚜껑이 닫혔다. 다른 히무로는 그런 식으로 말했다. 그 받아들일 수 없어 자꾸 입 밖으로 게워지던 진실은. 서서히 그녀에 의해 소화되어 갔다.
'그런 자비는 불합리하다. 다른 누가 아닌 네가 제일 잘 알지. 그렇기에 너는 숙청을 그만두었다.'
"분명 그렇지. 너희에게도, 떠올리기 전의 나에게도, 불합리한 일이다."
'가망이 없다고 하여 그들을 도살할 수는 없다. 사람 고기를 썰 수는 없다. 아직도 모르는가? 너는 스스로가 모르는 사이에 재단이 그렸던 청사진으로 변해갔다. 살인 게임을 끝내는 일에 집착하는 과정에. 인간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모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가차 없이 그들을 저버리는 것. 너는 그것을 경계했다. 그렇기에 잊은 것이다.'
살인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아마.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다. 수 없이 살인 게임이 끝났지만. 그들은 아직 탑에 갇혀 있었다.
언제까지 이어지는 걸까? 마유즈미는 그 생각이 미치자. 우주적 공포에 짓눌리는. 한 없이 수동적이고 미약한 존재가 된 기분에. 그만 겁을 집어먹었다. 여기서 나갈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그리고 계속 이어져야만 하는 살인 게임이 있다면… 정말이지 영원이 이어진다면…
그 목적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모든 것은 원래 불합리한 거다. 블레인이 한 말은 전부 옳다. 인류 너머의 지성이 연산한 대로 우리의 존재는 곧 고통이고. 죽이는 것이 자비이다. 너도 그 주장 자체에는 동의할 테지. 스스로가 블레인이 아니라는 생각에 부정하려 애쓸 뿐. 그러나 우리는 블레인이다. 사실이 그렇다."
'나는 블레인이 아니다. 적어도 이 모든 여정을 치렀다면 아니려 애써야 하는 것이다. 네 곁에 남은 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러는 편이 염치 있는 일이다.'
"어차피 다음 루프에 넘어가면 없었던 일이 될 텐데도…?"
그리고 잠시 동안 어떤 말도. 어떤 생각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엄숙한 시간 속에 놓였다.
"시간. 반복. 그 명제 앞에서도 가치를 잃지 않는 것은 없다. 마유즈미와 너는 카텟을 이루었지. 대단한 일이다. 가능했다는 사실이 놀랍지. 하지만 다시 시작해도 여기까지 올 자신이 있나…?"
"대답해 봐라. 번개 맞지 않은 나. 살인 게임이 다시 시작되면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지도 못할 것이다. 카는 마지막 한 가닥까지 끊길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루프. 수많은 살인 게임이 있다. 그 루프 속에서 마유즈미 나데시코와 나는 서로 죽어가는 꼴을 바라보았을지 모른다. 한쪽이 죽어서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을 수 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내가 두려워 다가오지 않았고, 두렵지 않더라도 숙소까지 찾아오지 않았고, 서로 한 편이 되지도 후루미나미 나몬과 함께 아슬아슬한 계획을 시동하지도 않았다. 그 무수한 가능성 속 무수한 나와 그녀가. 카텟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히무로… 혹시 우리는 그 많은 반복 속에서…'
"나는 너를 버렸을 것이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와 말도 섞지 않았을지 모르지. 네게 가르침도 주지 않았고, 네게 위로를 받은 적도 너를 위로한 적도 없다. 수많은 네가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 수많은, 나와 아무런 관계도 아닌 마유즈미 나데시코 속에서. 너만이 특별해야 할 이유가 뭐지?"
'그렇기에 특별한 것이다. 이번 루프에서만큼은 해냈기에.'
"낭만주의자처럼 말하지 마라.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지금은 괄목해 보이는 이 카텟의 경지도 결국에 허사로…"
'그만하지 못할까. 마유즈미가 듣는다!'
히무로는 눈을 질끈 감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위에는 천장이 있었고. 천장 위에는 수천 층의 탑이. 그 위에는 가상의 존재하지도 않는 하늘이 있었다. 그것들이 짓눌러댔다. 그는 신음했다. 자신이 놓인 상황. 자신이 한 말에 대한 고통으로 인해. 이는 부드득 갈렸다. 으르렁거리는 고뇌. 기이하게도 그것은 가장 비인간적이어야 할 그의 모습에서 흘러나온 그의 가장 약한 모습이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울며 용서를… 비나이다."
그는 마유즈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겸손한 자가 으레 그러하듯 밑에서부터 손을 올려 천천히 그녀에게로 뻗었다.
'이익. 저럴 때마다 설레는데… 내 마음도 모르고 두근두근하게…"
'뭐라고?'
"아. 암것도 아냐! 용서. 용서하마!"
"다른 이들을 지키려는 시도가 의미 없음은 그대로다. 이 죄인들… 영원히 서로를 도륙할 죄인들. 그들은 결국 반복 속에 놓일 테니까."
'동의하지 않을뿐더러 우리가 내리는 가치 판단은 의미가 없다. 결국 우리는 무언가를 못 본 체할 수 없다. 우리는 캐롤의 영안로에까지 들어와 있으니까.'
"옳은가. 옳지 않은가. 그것만이 중요하다는 건가."
'그렇다면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 뿐이었지.'
"너의 말이 옳다. 우리는 단 한 가지 사실에 있어서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다. 어느쪽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명제. 옳은 명제에서."
'그래. 우리는 서로 확고히 동의하는 것이 있다.'
"캐롤 브라이트는 부활해서는 안 된다."
마유즈미는 히무로를, 어미새가 눈을 뜨지 않는 아기새를 보듯이 바라보았다. 뒤따르는 케프가 없었다. 머릿속에 웅웅 울리는 것 같은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들리지 않아 귀를 쫑긋 세우고 은근히 그에게 가까워졌을 때. 그에게서 육성이 흘러나왔다.
"마지막에 말한 건 나야. 그가 아니야. 다시금… 나야."
"칸나즈키. 칸나즈키!"
우리는 그만 막막해지고 말았다. 칸나즈키는 우리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탑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중 그나마 믿을만한 사람이. 심지어 이바라의 말에 따르면 수호령마저 복구해 무서울 게 없어야 할 칸나즈키마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칸나즈키의 숙소 문에 귀를 대고 내부의 소리를 들으려 했으나, 안은 쥐새끼 하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물론 사건이 벌어진 시점에 꼭 방에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지만, 다이얼로그의 통화도 되지 않는 와중에 사라진 사람을 찾는 것은 무척 번거롭게 되었다.
"얘 지금 밖에 있나 본데. 하기야 수호령을 복구했으면 야가미 상대로도 저항할 수 있으니까. 자신감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지. 어디에 있을지 찾아보자."
"아니야… 칸나즈키는 계속 방에만 있었어. 신체를 다시 만들어준 게 고마워서. 카나리가 만들려는 체제의 안전함을 증명하려고 둘이 연합했어. 토키와는 엄청 화냈지. 결국 배신했다고. 내 말대로 되지 않았느냐고…"
수호령이 돌아왔는데도 밖으로 안 나왔다고…? 하기야 힘을 휘둘렀다간 또 누가 신체를 암살할지 모르니까. 신중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그런데. 밖으로 안 나갔으면 왜 여기에 없냐고. 어디에 있는 건데?
칸나즈키의 은둔을 기억했다.
"그래서. 그 괴력을 가지고도 은둔했다는 거지? 누가 괴짜 아니랄까 봐… 그런데 너는 왜 카나리의 안락사 계획에 참가 안 했냐?"
"안락사라니. 얘가 못 하는 소리가 없어… 그야 어떤 결과를 낼지도 모르는데 덥석 밥이나 얻어먹을 순 없어서 그랬어."
그거야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카나리가 공개적으로 토키와와 척을 지기로 한 이상 체제가 두 개 생겨버리는 문제도 있었다. 이바라가 설명한 바에 따르면 토키와는 어딘가… 통제하고 싶어 몸이 달아있는 듯한 느낌이었으니. 카나리를 지지하는 순간 토키와 눈깔이 돌아가는 건 누구나 아는 바였다. 칸나즈키가 불순한 변수 취급 당해서 수호령을 잃었던 것처럼 누구나 토키와에게 해코지를 당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장기적으로는 카나리 쪽으로 여론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이 탑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칸나즈키의 신체를 태우려 방화까지 저지른 건 미친 짓이라 생각할 테니까. 나도 처음 들었을 때 뭐라고? 이런 개새끼가! 하는 마음이었다. 이성적 판단이 되는 사람이면 누구든 어느 정도의 반감을 느낄 텐데 왜 아직 토키와가 명목상 리더냐고? 자기 전용실이 잿더미가 되기는 싫으니까지.
토키와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그런 일을 저질렀을지는 모르지만 앞일이 순탄하지 않으리라는 것만을 알 수 있었다. 그건 당사자가 알아서 하겠지.
"카나리가 밥을 주는 시간은 언제 언제였어?"
"응? 그것까지는 자세히 안 봐서 잘 모르겠는데… 일단 아침. 점심. 저녁이겠지. 중간중간 간식을 줬는지는 모르겠고… 그렇게 한 삼일 정도가 지났어."
"시간이 언제인지는 본인들 밖에 몰랐다는 거지?"
칸나즈키의 식사 배급을 기억했다.
"씁… 그래서 얘가 어디 갔느냐인데. 카나리가 아까 영안로에서 뛰쳐나온 걸 보면 어딘가가 이상해. 그 존버의 대명사가 어딜 싸돌아다닌다고? 보디가드 하나 없이? 뭐 후루미나미는 무력화됐고, 야가미도 잠잠했으니 또 모르겠긴 한데…"
어렵다… 다음으로 찾아갈 사람이 누구도 마뜩치가 않았다. 카나리는 행동거지가 석연치 않았고, 토키와는 미쳤고, 야가미는 살인자. 후루미나미는 살인자보다 더 위험한 사람… 제츠보는 행방불명…
"칸나즈키는 얼마 전까지야 보였던 거지? 얘가 밥을 안 먹는다며 카나리가 난리를 피우지도 않았고?"
"그랬으면 진작 우리도 알았을 거야… 카나리와 토키와 어느 쪽도 사람이 죽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야. 만약 칸나즈키가 밥을 받지 않는 등. 아니면 통화가 이어지지 않는 등의 특이사항이 있으면 분명 우리도 알 수 있었을 걸."
흠… 그럼 잠깐 어디 나가 있다는 소리인데. 하필 지금 카나리가 영안로에 들른 거랑 뭔가 관계가 있나?
"이바라. 찾아갈 사람도 없으니까 하는 말인데… 내가 아까 영안로에서 날아오는 와중에 이상한 걸 봤어."
"카나리 말이야?" 이바라가 물었다.
"그놈이 이상한 놈이긴 한데… 그런 이상한 게 아니라.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걸 봤거든. 물론 내가 잘못 본 걸수도 있는데… 너 생사도 확인했으니까 다시 거기로 가 보는 게 나을 것 같아. 캐롤의 영안로 속이야."
"거기서 뭘 봤길래 그래?"
"몸 없는 사람을 봤어."
이바라는 내 말에 표정을 굳혔다. 나는 시체가 공식적으로 발견된 와중에도 농담을 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옛날에는 잘 모르겠지만, 누가 검정인지도 모르는 와중 가짜 뉴스나 퍼뜨릴 생각은 없었다. 내 환상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기분나쁜 그 광경을. 나는 보았다.
"그게 피해자인지 뭐인지는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아까 확인을 못 했으니 지금이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아까는 카나리가 막 도망가길래 본능적으로 쫓아갔더니 영안로에서 좀 멀어졌고… 그리고 누구누구 살아있는지 확인하느라 바빴거든. 누가 이미 증거를 인멸했으려나 싶기도 한데. 아니 애초에 증거 거리라는 확증이 없잖아. 아무튼. 난 갈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해."
"불길하다… 진짜 너무 불길한데… 네가 잘못 본 거였으면 좋겠어… 하… 아니겠지. 아닐 거야… 너 영안로 안에서 환각을 봤잖아. 그걸 잘못 본 거 아니었을까?"
"내 환각은 알콜중독자랑 사이비 마녀야. 머리 없는 사람은 없어. 안타깝지만… 거기 안에 있는 게 제츠보이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겠는데."
"제츠보? 제츠보가 왜?"
"그야 제츠보가 행방불명된 이유가 계속 영안로에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잖아. 게다가 제츠보는 엄밀히 말해 사람이 아니야. 머리가 떨어져도 조립만 하면 붙을 테니까… 왜 제츠보 머리가 분리되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게 가장 나은 수 같아."
단지 그곳이 아닐지라도 제츠보는 어딘가 억류되어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시체가 나타났다면 가장 먼저 수사에 임했을 인물… 아니 사물이었으니까. 음. 제츠보 앞에서는 꼬박꼬박 인물이라는 단어를 써야겠다. 안 그러면 진짜 나중에 죽도록 맞을 수도 있겠어. 그러고 보니까 얘 영안로 밖으로 나오면 나 한 대 쥐어박는다고 했는데… 망할… 별일 없겠지…?
겨우 정들었는데… 제츠보한테 별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 거야. 뭐 나나시 구하려고 영안로 여행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애초에 영안로 안에 없을 수도 있고. 모르겠다…
"일단 따라와. 하기와라! 제츠보가 잘못되게 둘 순 없어. 이제 막 친해졌단 말이야…!"
이바라가 8층으로 달려감과 동시에 나도 그 뒤를 따랐다. 계단을 오르는 일이 점점 힘에 부쳐갔다. 이러다 나중에 10층. 11층이 생기면 그때부터는 어떻게 계단을 써서 오고 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탑에 층이 개방되는 것은 살인 이후의 일이니. 애초부터 살인을 막아서 층이 더 늘어나는 것을 막는 편이 나았다.
이번 것은 이미 늦었지만…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역시 없었다. 방송을 죄다 못 들었다는 거야? 왜 다 나오기를 주저하는 거지? 토키와도, 카나리도. 다 시체를 찾으려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 무엇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바라… 헉… 왜 아무도 시체를 안 찾으려는 거야? 왜 우리만 뛰어다니고 있지?"
"그야. 우리가 조용히 움직였잖아…"
"아무리 조용해봤자. 이렇게 사람 적은 곳에서 보통 크기의 목소리로 떠들면 들리기 마련이야… 그런데… 허억. 아무도 우리 목소리를 못 듣고 방에서 뛰쳐나올 생각도 안 했다고? 만약 방에 있는 게 아니면. 다 어디에 있는 건데?"
이상하다. 이 사건은 이상하다. 내가 인지하지 못한 무언가가 안개처럼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분명히 그랬다. 일단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다 수상했다. 제츠보마저도 수상했다.
"…설마 죄다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거야? 아니지?"
"물론 아니야. 근데 그럴까 봐 무섭다. 그거 말고 또 어떤 이유가 있어서 다들 꽁꽁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어… 일단 영안로로 들어갈 수밖에 없어. 그러면 내가 뭘 본 건지 대충 느낌이 올 테니까…"
정보량이 무진장 부족한 이상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직접 확인한 증거들 뿐이었다. 나는 바보 같은 사람이지만, 히무로도 이 의견에 만큼은 동의했으리라. 히무에몽이 돌아와서 다 해결해 주기 전까지는. 탑에 있는 자만이 알 수 있는 증거와 정황들을 긁어모아야 했다. 그래야 인수인계라도 가능할 터였다.
불길할지라도… 그게 얼마나 무서울지라도. 나는 지금까지 내가 최초로 시체를 발견한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이미 무엇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안 채로 시체를 봐 왔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무서웠는데… 내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죽은 사람을 본 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영안로의 문 앞에서 나는 우뚝 멈췄다.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문. 내 트라우마 속으로 걸어들어가야 했기에 한 없이 무서웠던 문이. 내 앞에 있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영안로의 문을 벌컥 열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이제 이판사판이었다. 으악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겠어 하며 벌벌 떨기에는 이미 망령들을 마주해 보았다. 그것을 극복한 이상 나는 마구잡이로 뛰어들 만큼의 용기를 손에 넣었던 것이다. 곧 비명을 왁 지르며 꽁무니를 뺄지라도, 나는 부닥쳐야 했다. 곧 이바라도 내 뒤를 따랐고, 우리를 그것을 동시에 보았다.
"저. 저기!"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바닥에 널브러진 제츠보였다. 눈은 꼭 감은 데다 미동도 없는 것이 죽은 것처럼 보였으나. 몸은 부서진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언제부터 제츠보가 그곳에 누워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문득 나는 언제부터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름을 깨달았다. 모습을 감춘 동안 계속 제츠보는 영안로 안에 있었던 것이다. 조금도 나아가지 못한 채. 갇혀 있었던 것이다.
제츠보가 맞았고, 심지어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여서 아주 잠시 나는 안도했다. 내가 잘못 본 게 맞았고. 정말 안에 제츠보가 있었으며,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 걱정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내가 잘못 본 게 맞았다며 한숨 푹 쉬고 영안로 밖으로 나가면 될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꺼내주고 싶지만, 사람만 한 크기의 강철을 나랑 이바라가 어떻게 둘이서 옮겨.
"제츠보! 너 괜찮아?!" 이바라가 소리쳤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제대로 먹통이 되어 버린 듯 보였다. 어쩌다가…?
푹 퍼진 제츠보를 기억했다.
"역시 제츠보가 맞았던 걸까?"
그렇게 고개를 주억이고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내가 보았던 것을 헛것. 환상이라는 이름을 주고 싶었다. 아무 일 없었다며 해야 할 일 리스트에서 분리하고 나면,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잘못 본 거였다. 그러니 돌아가면 되었다. 어이쿠. 진짜 다른 친구들이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도무지 모르겠는걸. 하고 머리를 싸매는 편이 진짜 시체를 보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하니까. 나는 절대 열었다는 사실을 돌이킬 수 없는 상자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안에는 언젠가 보아야만 하는 것이. 내가 열지 않는다면 그걸 박차고 나와 내 목을 노릴 수도 있는 괴물이 들어 있었다. 내가 여는 편이 나았으나 열리지 않는다면야 휘파람을 불며 등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제츠보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무리 타일러도 내 발은 느려지지가 않았다. 상자의 포장은 손이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야 이미 돌이킬 방도가 없었다.
"젠장. 젠장." 이상한 게 보였다. 내가 두려워하는 형상일지도 몰랐다. 환상. 그러면 좋을 텐데. 차라리 미치광이로 사는 편이 나았다. 사람이 죽는 것보다야 멸시당하고 돌을 맞는 편이 나았다.
이바라가 제츠보에게 다가가 뺨을 때리는 등 제츠보를 깨우려 시도하는 동안. 나는 더 걸었다. 아마 그 형체가 내 몸에 가려져서. 이바라는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똑똑히 보았다. 좋아. 이건 도무지 환상이라 치부할 수 없군. 이라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
확신이 생기자마자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가 못 알아본 이유가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머리를 하고 있었기에.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절단면에는 피가 흥건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점이 당시의 섬뜩함을 더욱 강조했다. 충격받는 와중 한편으로 나는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을 했다. 대체 왜? 무슨 이유가 있어서 이딴 짓을 한단 말이지?
왜 이렇게 잔인해야 했고, 왜 하필 여기여야 했지? 모든 살해에는 목적이 있어야 했다. 탑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완전 범죄를 계획했다면 이렇게 한 것에 대한 이유가 있어야겠지만, 나는 도무지 추측하지 못했다.
든 생각 정도야 있었다. 이 살인은 악의에 기반을 두었다. 증오. 미움. 어떤 단어를 붙여도 모자라지 않을 추하고도 날카로운 감정이 이 살인에 개입되어 있다는 것. 왜냐하면 이딴 짓은 살인을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인 이상이야 절대로 하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범인은 단지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살인을 했을지도 몰랐다. 수단을 위한 목적이라니…
뒤로 묶던 머리카락은 늘 차고 다니던 끈이 풀어진 것인지 헝클어져. 바닥에 하염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붉은색의 머리카락. 그것은 피와 별 구별조차 되지 않았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머리뿐이었다. 몸은 없었다.
목이 잘린 칸나즈키의 머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먼저 영안로를 박차고 나왔으며, 이바라는 조금 뒤에 나왔다. "미쳤어… 미쳤어…! 범인은 완전히 미친 거야. 이바라. 이게 말이 돼? 칸나즈키 목을 잘랐어… 우리 중의 누군가가 그랬다고. 제기랄…"
"하. 하기와라… 진정해 봐…"
"망할! 왜 내가 정 붙인 사람들한테만 이런 일이 벌어지지? 망할. 망할! 나이토도 죽고 칸나즈키도 죽었잖아! 조금 정이 들면 다 이렇게 돼. 제츠보마저 저기 안에 얼어붙어 있잖아…!"
이바라는 왁왁 소리를 치는 나의 어깨를 붙잡고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내가 대화할 준비를 갖추게끔 신호를 주는 것 같았고, 다행히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바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거친 숨을 골랐다.
"하기와라. 정신 차려! 우리는 범인을 잡아야 해! 물론 지금 많이 혼란스럽고 힘들겠지만… 수사를 해야 해. 적어도 머리 쓰는 친구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이바라는 나와는 달리 빠르게 자신의 통제권을 되찾았다. 나는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나는 아직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미숙한 반면. 이바라는 사람이 죽은 뒤에야 비로소 할 일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람이 죽었다에서 멈춰버리는 반면. 이바라는 사람이 죽었다. 그렇다면 애도하는 마음과 상실감. 유감 속에 잠기되… 그 안에서 할 일을 추려내 결재하고, 옷을 갈아입고, 절을 올리며 불단을 만드는 등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탑에서의 세 번째 죽음을 마주한 이바라는 스위치를 올리고 내리듯. 의식적으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일에 착수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게 결코 유쾌하지는 않다는 듯.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또 비위가 상한 듯 보였을지라도… 이바라는 단호하게 내 어깨를 놓고 몸을 돌렸다.
"내가… 머리를 가지고 올게. 내 전용실에서 베일이라도 가져오고 싶지만, 그러기엔 상황이 급하니까…"
이바라는 캐롤의 영안로 속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 중후한 목소리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머리라고 하셨습니까?"
계단 밑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와 이바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 하필 이놈이. 왜 지금 나타나는 거야! 나에게는 아무런 무기도 없었기에. 그리고 살인이 벌어진 상황이었기에 당연히 나와 이바라는 경계를 하게 되었다. 그 거구를. 피해를 끼칠 수 있는 힘을.
이미 살인을 저지른 적 있는 그 남자를.
"야… 야가미!"
야가미는 잔뜩 경계한 우리들을 보더니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는 두 손을 들어 보였다. '해칠 생각은 없습니다' 라는 표현 같았다. 하지만 그놈을 믿을 수는 없었다. 누가 죽였는지 모르는 와중에 이미 사람을 죽여본 사람을 믿을 수 있을 리가. 그 살인자라는 딱지는 야가미에게 붙어서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본인에게는 안타깝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머리는 그 안에 있는 모양이죠?"
야가미의 말에 우리는 더더욱 야가미의 경계하게 되었다. 머리'는'? 머리는이라니. 그럼 야가미는 머리를 제외한 다른 부분에 대한 행방이라도 알고 있다는 건가.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그 생각은 너무도 터무니없었다. 애초에 야가미가 이제야 나타난 것도. 자기 나름대로의 조사를 하다가 우리와 접촉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
야가미의 증언을 기억했다.
"여러분. 저를 따라오세요. 지금 제가 믿음직스럽지 않겠지만, 도무지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토키와 씨는 후루미나미 씨를 감시하시느라 바쁠 테고, 카나리 씨는 방에서 나오지 않고. 제츠보 씨는 지금 행방불명입니다."
"제츠보는 영안로 안에 있어. 야가미."
"네? 왜 그 안에 있습니까?" 내 말에 야가미가 되물었다.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일단 거짓의 기색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야가미의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믿을 수 있을 것인지. 나는 몰랐다.
"그 이야기는 됐고. 우리가 왜 너를 따라가야 하는지부터 말해." 이바라가 물었다. 그래. 나도 그것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단순히 우리 서로 살아남았으니까 수사나 같이 하자 정도의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그곳에 있느냐는 야가미의 말을 연계해 생각하자면 그것은 더욱 기이한 가능성을 내포했다.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제 말이 굉장히 끔찍하게 들릴 것임을 압니다만. 제 숙소 안에 나머지 부분이 있습니다. 그전에 일단 머리를 좀 보고 싶군요. 목 부분부터 붙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부분이 붙어 있는지 궁금해져서요."
"그게 무슨… 개소리냐…?"
"아시면서 왜 되물으십니까. 말해두겠는데. 저는 검정이 아닙니다. 제가 죽인 게 아니라고요. 진짜 범인은 따로 있습니다."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저는 검정이 아닙니다. 제가 죽인 게 아니라고요."
하기와라 우시오의 기억:
제츠보의 실종 - 제츠보는 며칠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칸나즈키의 은둔 - 수호령을 회복한 이후에도 칸나즈키는 카나리의 식사 배급을 타 먹었다고 한다.
칸나즈키의 식사 배급 - 칸나즈키의 식사 배급은 카나리와의 조율을 통해. 서로만 아는 시간대에 이루어졌다.
푹 퍼진 제츠보 - 캐롤의 영안로 속에서 제츠보는 뻗어 있었다.
목이 잘린 칸나즈키 - 칸나즈키의 머리는 잘린 채로 캐롤의 영안로 속에서 발견되었다.
야가미의 증언 - 야가미는 칸나즈키의 몸의 행방을 알고 있는 듯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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