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진짜 깊어진다… 그런데 왜 앞이 보이지? 진짜 침침한데. 애매하게 보여."
"몰라. 동굴처럼 보이는 실내인가 보지. 애초에 영안로는 실내잖아. 나니아 연대기 비슷한 느낌으로다가 말이야…"
"잡담은 그만 해라. 긴장을 늦추지 말고."
"눼눼. 몇십 분째 이러고 있는 것 같은데 별일 없지만 긴장해 보죠 뭐."
"근데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걸까?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만… 진짜 아무것도 안 나오넹. 심심한데… 끝말잇기 할 사람?"
"그거 말고 바거수 하자. 진짜 재밌다니까."
"그거 재미 없어! 이해가 안 되고 너무 어렵대도!"
"재밌는 문제도 많다니까 그러네! 아. 얘 고집 진짜 세다! 야. 히무로이드! 뭔가 시간 보낼 만한 놀이 없어?"
"할 일에 집중하라고 말했을 텐데."
"끝말잇기 같이 하자. 나 이거 진짜 잘해! 히무로부터 시작!"
"…저 자."
"뭐야. 이걸 해 줘? 히무로이드 가오 다 빠졌다. 나중에는 앞치마 입고 소꿉놀이도 해 주겠어. 미소녀랑 같이 다니더니 애가 순딩순딩하게…"
"저 자가… 저 자가 여기에 왜 있지? 너… 거기 서라. 거기 서! 발포하겠다! 조율자다! 조율자!"
"………어. 자스민?"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괴롭다. 과도하게 괴롭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째서 이래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왜 이렇게 된 지도 모르겠다. 외부 기압이 나를 짓눌러 폐를 찌그러뜨리는 기분이고, 몸에 수많은 무게추와 사슬이 달린 느낌이다. 한여름의 정오인데 나를 숨길 어떤 그늘도 없는 와중. 달구어진 공기가 내 피부를 튀겨댄다… 모든 무력감과 불쾌함. 견디기 어렵다는 감각들을 싸잡아 느끼듯이. 나는 갑갑했다.
나를 걱정하는 눈동자를 보았다. 장미색. 연두색. 이들은 나를 사람으로 만든다. 나를 약하게 만든다. 눈앞에 조율자가 나타난다면, 그들이 없는 편이 낫다. 그들을 지키는 것과 조율자를 제압하는 것. 과제 두 개가 내려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필요하다. 아니. 필요하다는 말은 부적절하다. 나에게는 그들이 필요 없다. 그들 없이도 내 신상에는 하등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동행을 바란다. 무척이나.
"걱정? 걱저엉? 때가 왔다." 그가 자신의 주먹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수정 펀치 함… 갈겨야겠지? 복수혈전이다. 응? 너 어디가. 어디 가냐니까!"
"히무로. 멈춰 봐! 일단 쉬고 가자. 너 지금 되게 피곤해 보여…"
"쉴 수 없어. 내가 하는 일은 쉬어서는 안 되는 일이야. 걸으면서… 걸으면서 이야기하지…"
그리고 우리는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흠… 헬로 키티. 하필 천으로 만든 인형. 도면…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그림에는 그렇게 나와 있었지. 이런 아마추어 같은 작업은 나 같은 장인에게 안 어울려. 이럴 거면 단안경도 필요 없잖아. 금속 가공보다야 뜨개질이 훨씬 빠르긴 하겠지만, 분명 시간이 꽤 걸릴 텐데. 심지어 이 짓은 안 한지 꽤 됐다구.
카나리는 속으로 중얼중얼거리며, 조금 주춤거리지만 반복적으로 뜨개질을 했다. 분명 용돈 벌려고 인형을 몇 개씩 만들 때보다야 느려졌지만, 단순하고 손재주가 필요한 작업에 특화된 그의 몸은 곧 숙련된 솜씨를 뽐냈다. 선이 이어져 면이 되었다.
쉽구만. 헬로 키티의 빨간 치마 부분 형태를 다 잡은 뒤 카나리는 콧노래마저 불렀다. 기분이 좋을 때 나오는 버릇이다. 이대로 몇십 분 정도 더 하다가 중간에 간식 먹고 마무리 작업까지 끝내면. 신체가 돌아온다.
칸나즈키는 별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카나리는 신체를 다시 만들어줄 의향이 충분히 있었다. 우선 영안로에서 안 바. 믿을 만한 사람은 지금 탑에 칸나즈키 뿐이었고, 남에게 잘해줘서 빚을 만들어두면 나중에 톡톡히 한몫 챙길 수 있다는 게 상식이었다. 사실 그 오컬트 비슷한 존재는 마음에 안 들었지만, 뭐… 누군가의 똑딱맨은 오컬트일 수도 있지… 남한테 피해도 안 끼치고.
카나리는 자신의 계획을 점검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탑 안의 놈들에게 방 밖으로 나오지 마라. 대신 식량은 전부 제공하겠다고 말한다. 제대로 된 상식을 가진 놈이면 다 승낙하겠지?
후루미나미 나몬은 묶여있을 거고, 토키와 놈은 갑자기 미쳐버렸으니 좀 불안하기도 하고 아니꼽지만 어떻게든 될 테고… 이바라는 사람 죽는 걸 막으려 하는 거니 괜찮고… 아 몰라. 아무튼 좋은 생각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며 뜨개질만을 계속하던 와중. 문 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한 명만의 목소리였다. 이바라 쿠리스.
카나리는 작업을 하던 와중 큰 소리를 듣는 게 싫었다. 남의 고충도 모르면서 왜 까르르까르르 떠드는 건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 카나리는 이바라가 하는 말도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단지 어쩌다가 엿들었을 뿐이다.
"너 지이이이이이인짜 예쁘다. 23T! 너무너무 예쁘다! 머리카락 찰랑거리는 것좀 봐. 너 이렇게 예쁘면 말이라도 할 것이지!"
"별 의미 없는 일이니 말하지 않은 거야… 이제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잖아. 나나시는 이제…"
뭐지? 들어본 적이 없는 목소리인데. 여자 목소리긴 하지만 내가 모르는 사람이야. 카나리는 그것이 연기를 하는 후루미나미 나몬의 목소리는 확실히 아님을 알았다. 애초에 이바라가 후루미나미 나몬에게 저런 식으로 외모 칭찬을 할리도 없는데…?
"나나시는 이제 저 안에서 죽을 거야… 다른 사람에게 예쁘게 보여 봤자, 무슨 의미지?"
"어어어. 23T.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고…"
"제츠보야."
"절망이다!"
카나리는 뜨개질거리를 놓쳤다. 손은 그대로 얼어붙었고, 몇 초 뒤에는 제멋대로 영상을 떠올렸다.
"절망이다! 절망이다! 절망이다!"
"태워라! 태워! 전부 태워라! 죽여! 죽여!"
"제츠보? 뭐가 절망이야?"
"내 이름. 내 진짜 이름이 그거야. 절망. 이상한 이름이고 듣기도 거북하겠지만, 나라는 존재를 잘 나타내는 셈이지… 서로가 서로에게 절망이었으니까."
"어… 그렇구나…?"
카나리의 손이 마구 떨렸다. 아. 이걸 내가 잊고 있었구나. 대몰락. 잊고 있었어. 그 폭도 자식들이. 절망 놈들이. 아. 그놈들이 또. 또 나를 잡으러 왔구나. 마침내 기억해 냈다. 리베로. 모리와 나이토의 리베로. 전부 대몰락의 혼돈 때문이었어. 이걸 나만이 떠올리다니…!
그는 다른 이들이 히무로와의 소동에서 대몰락에 대한 정보를 이미 알게 되었음을 몰랐다. 누가 재단 출신이며 누가 카텟 기관에 있는지도 몰랐다. 방에만 있다 보니 세상 물정에 어두운 탓에 카나리가 느꼈을 부담과 공포. 불안은 소심한 그에게 있어…
"배를 갈라!"
"찾아내!"
"목을 따!"
"돈은 다 불태워!"
공황 그 자체였다.
시계가 미친 듯이 달린다. 영안로 속 모리는 말했었지. 카텟 기관은 믿을 게 못 된다고. 그 말대로였다. 제츠보. 절망. 그런 이름이 어디에 있어? 누가 그딴 식으로 짓는데? 얘. 카텟 기관에서 직접 보낸 거잖아. 우리를 도우라고 보낸 건데. 이름이 제츠보라고? 웃기는 소리 마. 무슨 우연의 일치로 그랬다는 말은 안 통해. 대몰락 이후 그 단어를 사용하는 건 죄다 반동분자들이었어!
뻔하지. 카텟 기관은 절망에 잠식되어 있었던 거야. 죄다 그 모양이야! 아무리 탄탄해 보이는 조직도 내부에서 절망이 무너뜨려 버리지. 어쩌면 카텟 기관의 전부 다는 아닐지라도 제츠보나, 제츠보를 만든 사람은 절망이다! 지금까지 해낸 게 아무것도 없는 것도 그것 때문이었구나! 역시 그랬어! 그냥 무능했던 것일 리가 없지! 처음부터 나쁜 놈이었어!
이대로 제츠보에게 우리의 안전을 맡기는 건 바보짓이야. 일부러 만들어 둔 빈틈 사이로 살인범들은 자유자재로 드나들 거야. 그리고 충분히 수가 줄고 막을 방법이 사라지면, 본색을 드러내겠지! 약아빠진 기계 같으니!
카나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또 초조하게 왔다 갔다 걸었다. 네 걸음. 좁은 곳에서 산 사람의 보폭이 다시금 그를 무형의 벽 안에 가두었다. 제기랄. 누가 저놈을 막을 수 있지? 후루미나미 나몬이 플라잉 로봇을 가지고 있어도, 지금은 못 쓰잖아! 애초에 절망 로봇이 우릴 다 죽이려고 들면 저건 좋아라 하고 그냥 죽을 거라고!
내가…
내가 막아야 하나?
내가 막아야 해? 진짜 나 말고는 방도가 없어? 나 싫어! 내가 왜! 나는 내 목숨 하나만 부지하면 그만이야. 나머지는 다 자선이라고! 내가 왜…
"…나 없던 사이에 별다른 일이 벌어지진 않았겠지? 하루가 꼬박 지났다고 하던데. 후루미나미는 여전히 묶여 있고, 카나리도 잠잠해?"
"사실 좀 많긴 했는데… 칸나즈키가 신통력을 잃었어. 자세한 건 천천히 알려줄게."
"칸나즈키가…? 이거 안 좋은데. 괴력도 예지도 전부 잃었을 테니… 그래도 내가 왔으니 괜찮아. 후루미나미 나몬의 플라잉 로봇은 부숴 뒀으니 내게 위협이 될 수 있는 건 별반 없어."
= 나는 무적이다. 이제는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어. 카이다보다도 강한 데다가 무기도 통하지 않는 나를. 무슨 수로 멈출 셈이지?
누… 누구도 막을 수 없단 거야? 나 말고는 아무도…?
누구도 내 말을 안 믿을 텐데. 저거 속셈을 나만 알고 있어… 큰일이다. 큰일이야! 카나리는 발을 동동 굴렀다. 아무래도 큰일이 나 버렸다! 이제 제츠보한테 죄다 속아 넘어가서는 하나 둘 사라지게 생겼다는 생각에. 카나리는 소금 초콜릿을 한 조각 먹었다.
그리고 쌉싸름할 정도의 짠맛을 입 안에서 굴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플라잉 로봇."
곧 그의 가장 충직한 심복이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자본으로 얻은 것은 어느 것도 거짓말하지 않는다. 배신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편리하고 유용하며. 믿을 만하다. 카나리가 생각하기에는 그렇다.
언젠가 잘못 걸려서 목이 부러질지언정. 저 깡통은 내가 막는다. 카나리는 비장하게 주먹을 쥐었다. 네 마음대로는 안 돼. 카텟 기관의 마음대로 하게 두진 않을 거야… 히무로, 나나시, 제츠보. 전부 한 패다. 기관에 속한 사람들은 전부 죄 없는 사람들의 적이야!
"야가미랑 의논을 해 봐야겠어… 살인자긴 해도 그놈. 기관과 한 편은 아니었잖아…"
(야가미가 정황상 재단과 한 편이었음을 카나리는 모른다)
다행인 점은, 영안로에 히무로와 나나시가 있으니 제츠보는 고립되어 있다는 거지. 카텟 기관이 이 탑 안에 더 있어 보이지도 않아. 그러니… 어떻게든 수를 써서 끌어낸다.
카나리는 문을 아주 살짝 열었다. 이바라와 제츠보의 발소리는 다른 어딘가를 향했고, 그가 들킬 염려는 없을 때쯤 되었을 때 그는 문을 살짝 열었다. 그리고 표적을 흘겨봤다.
뜻대로는 되지 않을 거다. 나는 너희를…
우와. 진짜 예쁘네.
"나는 분명 분홍색 머리카락에 금색이 드문드문 섞여 있는, 점점 금색으로 변하는 듯한 남성을 봤다. 이름 없는 남자라면,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그를 영안로 밖으로 꺼내어야 한다. 그리고 그를 교정해야 한다."
"교정이라니! 교정?! 나나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히무로! 너 그거 나쁜 생각이야. 야! 야아! 너 왜 이렇게 빨리 걸어. 따라가기 힘들게!"
마유즈미가 종종걸음으로 나를 따라왔다. 마유즈미는 종종 종종걸음으로 걸어온다. 편한 운동화를 신었고 다급한 위기 속에서 곧잘 달려봤음에도 그런 버릇은 그녀의 다리에 남아 있다. 마유즈미는 교정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무리는 아니겠지. 나도 그 낱말이 나를 향할 때 무척 싫다.
나는 잠시의 고민 끝에 아주 조금 발을 늦추었다.
"그자는 터치를 발현하고 있어. 분명 캐롤 브라이트의 터치가 영향을 미친 것일 테지. 그를 멈추어야만 해. 더 발현하지 못하게끔 막아야 해."
"잠깐. 잠깐! 히틀러!"
호칭이 가면 갈수록 가관이군.
"그거 네가 진짜 본 게 맞기는 해? 우리 눈에는 안 보였다고. 이 놈아! 패트리샤! 야! 나나시 여기 안에 있어? 대답 안 해?"
대답은 없었다. 나라도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야 이름 없는 남자가 없더라도 우리가 시간 낭비하는 꼴을 보고 싶을 테니.
"나는 분명히 보았다. 흰옷. 금발. 눈동자는 보지 못했지만 금색이라면 막아야 한다. 나는 그런 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안다. 손에 닿는 것은, 피부에 닿는 생물은 무엇이든 정신을 주무를 수 있지. 노예로 만들 수도 있고, 원수로 만들 수도, 혈맹을 맺을 수도 있다."
"뭐? 손에 닿는 거? 야. 그거 캐롤 아니야?" 하기와라 우시오가 물었다. "맞잖아. 캐롤이 그렇게 안 쓴 거지 원래 되는 거라며? 그런데 어떻게 캐롤 말고 다른 사람한테도 터치가 있어?"
"터치는 극도로 희소하지. 그러나 결코 유일하지는 않다. 그녀 말고도 몇 명이 더 있었을 테지."
"나는 그런 얘기 처음 듣는데?"
"그야 네가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터치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고충을 무덤까지 숨기려 들기도 하지. 초능력자들은 오죽할까… 말해봤자 자신의 흠이 될 것을 그들은 안다. 남을 진정시킬 수 있음을 보고 강제적인 터치를 주창한 이들을 보지 못했나? 누구나 은연중에는 캐롤 브라이트가 눈 딱 감고 손을 써주길 바랐지. 그런 와중에 또 자신의 흠을 보일리가."
"그럼 너는 알아?" 하기와라 우시오의 물음에는 항변이 담겨 있었다. 캐롤이라는 사람의 고충을 신경쓰지 않은 건 비단 나만의 잘못이 아니잖아. 우리 다 캐롤을 등한시해왔잖아.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라지만, 강제적인 터치니 어쩌니 하는 와중. 캐롤에게 일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와중에 편이 되지 않은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게 잘못은 아니잖아. 그럴 여력이 없었던 걸 어떡하라고?
네가 캐롤에 대해 잘 알아?
"안다. 그러나 최근에야 떠올렸다. 탈출 장치에 노출된 이후였다. 그러나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은 없었기에 터치를 악질적으로 쓰는 자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았지. 이미 캐롤 브라이트는 죽었기도 하고… 그러나 새로운 터치 발현자는, 그것도 우릴 적대하는 자는 막아야만 한다."
"그렇지만, 나나시가 터치를 악용하리라는 보장은 어디 있는데? 히무로. 캐롤 씨가 나나시를 그렇게 가르쳤겠어? 그런 식으로 쓰는 건 나나시 본인이 가장 싫어할 거야!" 마유즈미도 항변했다. 왜 그들은 나를 설득시키고자 할까? 내가 조율자에 대해 더 많이 아는데. 그자가 세뇌한 무고한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이 아는데.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죽기 직전의 캐롤 브라이트는 모리 레이코의 죽음 앞에서 이윽고 강도가 낮을 지언정 터치를 써 후루미나미 나몬을 제압했다고 하더군. 신체의 마비만을 이용했다고 한들 그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도 터치를 악용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지?"
"나!" 마유즈미가 스스로를 가리켰다.
"어째서?"
"왜냐하면… 나나시는 캐롤 씨의 유지를 이을 테니까. 캐롤 씨가 추구했던 옳음을 따라갈 거야."
"그녀가 남긴 유지가 무엇일까? 자신의 책임과 정도를 지키며 점점 불리해져라, 혹은 자신처럼 되지 않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해 살아남아라?"
"나는 살아남아라 쪽에 한 표." 하기와라 우시오가 손을 들었다. "마음에 안 들지만 이건 히틀러가 맞는 것 같아… 어? 아니 미친 이게 무슨 소리야. 내 말은 그 사람이 아니라 얘가 한 말이 맞다는 거야!"
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얘 말이 맞다고. 나나시가 성자처럼 보이진 않아. 캐롤이 양보와 감내 끝에 죽은 이상 나나시에게 양보와 감내는 없어. 왜냐하면 그 가치를 따르지 않고 반발하는 것 자체가 캐롤의 죽음에 대한 나나시의 응보가 될 테니까. 연인이 단식 시위로 죽자 폭식을 하는 사람처럼."
"안 그래! 그런 식으로는 캐롤 씨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걸 나나시가 제일 잘 알아!"
"산 자가 왜 죽은 이의 용서에 매달려야 하지? 어느 누구도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을 텐데."
마유즈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것으로 보아 둘 중 한 명은 틀렸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상식이 모자란 내가 틀린 편이겠지만, 이 논건에 대해서만큼은 내 쪽이 옳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무엇에도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 받을 수가 없으니까.
"누구도?"
"그 누구도. 진실이다."
"그래? 누구도오?!" 마유즈미가 노기를 띠었다. 왜 화를 내지?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것이 없었다. 나는 논쟁을 하고 있을 뿐 그녀의 가치를 존중하거나 폄하하지도 않았는데…
"그럼 네가 나나시였어도 막 나갔을 거야? 아니잖아… 아니지? 그치?"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어." 내가 이름 없는 남자라? 그 가정을 왜 해야 하지?
"그러니까 내 말은, 만약 우리가 모종의 사유로 헤어지거나, 흩어지거나, 영영…"
발이 멈추었다.
"너무 외로워. 외로워! 나에게는 아무도 없어. 누구도 내 곁에 없어…! 나는 이 우주 속에 내던져졌어!"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시는.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 마유즈미. 나는 그런 종류의 가정은 조금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일말의 가능성도, 어떤 형태의 그림도 그리고 싶지 않아. 만약이라고도 하지 마. 그런 만약은 없으니까."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진솔함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으나, 그녀가 몸을 움찔거리며 상체를 뒤로 빼는 것을 보자 후회했다. 선을 넘었나? 내가 과하게 강압적이었나?
"…부탁이야. 마유즈미." 내가 뒤늦게 덧붙이자. 마유즈미는 고개를 슬쩍 돌리며 말했다.
"Mea Culpa… 히무로." 내가 알기로 그것은 내 탓이라는 뜻이다. 그녀가 접하기 어려운 종류의 언어라고 생각했지만, 그 사실을 물고 늘어지지는 않았다.
"틀렸어. 내 탓이야… 그러나 네 말은 옳아. 일단 나나시가 악한으로 돌변할 확률이 100%는 아니라는 점에는 동의할게. 하지만 그를 결코 믿지는 않을 거고, 영안로 안에서 그를 꺼내야 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어. 우리마저 그 탓에 위협에 빠져 있으니까."
"…지금 우리가 소중해서 그렇게 예민한 거냐?" 하기와라 우시오가 중얼거렸다.
"나는 목숨이 달려 있는 일에 예민해. 언제나."
"블레인에 탔을 때 자기 실타래를 내버리다시피 한 놈이? 웃기시네. 너 그때랑 비교하면 진짜 이상해. 아까부터 어딘가 이상하다고. 우리가 걱정된다 했지?"
"맞아! 그랬다!" 마유즈미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아까의 기죽은 모습과는 천지차이로 느껴질 정도의 발랄함. 나는 차라리 그것이 나았다. 그 면면은 지루하지 않았다.
"나 알았다! 진짜 알았다! 히무로가 우리를 좋아해서 그런가 봐. 우리가 너무너무 좋아서. 우리 없이 사는 게 상상도 안 될 정도로 좋은가 봐!"
"나는 빼주라. 나는 게이게이가 아니란 말이야."
들켰군. 그러나 별반 상관은 없다. 어차피 언젠가 들킬 일이고 내게 손해가 될 것도 없다. 그들에게 거리낌 없이 먼저 털어놓을 수도 있었다. 다만 바빠서 이야기를 나눌 새가 없었을 뿐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한테 까칠한 거야? 우리가 지기라도 할 까봐? 으흥. 그랬구나? 걱정도 팔자셔! 우리는 무적의 삼총사잖아! 그 무섭던 블레인도 우리가 이겼는데 누가 우릴 막겠어!" 마유즈미가 팔꿈치로 나를 쿡쿡 찔러댔다.
"누구도 무적이 아니야. 우리는 더더욱 아니고. 초인이라 불리는 이들마저 약점이 있어… 경계를 늦춰서는 안 돼. 우리가 아무리 탁월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은 언제나 벌어지지. 그토록 강한 총잡이들을 모은 작전마저 한 사람 앞에서 무너지듯."
그렇게 둘 수는 없다. 풀어준다면 다 죽는다. 몸을 빼앗긴다. 다시는 안 돼. 그를 막는 것은 나의 사명이다.
"자만하지 마. 우리를 고평가 하지 마. 애초에 우리가 누구지? 우리는 한낱 어린애들이야. 제츠보가 영안로에서 나가며 생긴 큰 공백을 두려워해야 마땅해. 우리가 마주해야 할 위협들을 경계하며.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럽게 나아가도 모자랄 판이야."
"야. 히무로. 마유즈미는 그냥 널 진정시키려고 막 달래주는 것 같은데?"
"왜 느닷없이 성씨로 부르는 거지?" 나는 그에게 물었다.
"히틀러라고 부르려니 나치가 된 기분이고. 히무로이드로 돌아가려니 그 별명은 너무 오래 써서… 그리고 이제 별명 아이디어가 바닥났어. 아무튼. 진정하라고 이 인간아. 여차하면 이걸 써서 바로 나갈 수 있는데. 왜 소란이야?"
"여차하지 못한다면? 몸의 자유를 박탈당하고도 자신의 이름을 말할 자신이 있나 보군. 그럴 생각이 전혀 들지 않고 숨을 그만 쉬고 싶어진 뒤에도. 네게 그럴 정신력이 있을까? 애초에 정신력의 문제가 아니다. 그의 말 한마디만 들어도. 조금의 신호만 보아도 너는 포로이다!"
작전에 참여한 이들 중 귀가 들리지 않는 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조율자를 상대로 적임자라 곧잘 말했다. 그러다 수화에 의한 명령을 받고 죽었다.
"히무로.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나시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잖아." 마유즈미가 말했다.
"나는 그저 가능성을…"
"가능성 자체가 없어! 어떻게 캐롤 씨도 못한 일을 나나시가 해내? 말 한 마디만 듣는다고 터치에 걸리진 않잖아. 캐롤 씨도 그건 못 했는걸!"
나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 그래… 조율자는. 조율자는 이 탑에 없지… 이름 없는 남자가 금발로 변하는 환상과. 실제 조율자를 겹쳐 보았을 뿐이다. 그러니 그에게 오버룩과 딕테이트는 없겠지…
마유즈미가 내 팔을 잡아끌고서. 내가 더 걷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녀를 질질 끌고 가려다가 멈추기로 하였다. 무심코 그녀를 돌아보니 내게 매달리는 듯한 그 눈동자를 본다. 장밋빛의 눈동자. 그 작은 접시 앞에서 숨을 수 없다. 숨길 수 없다기보다, 숨기고 싶지 않게 된다.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히무로… 혹시…"
그녀가 뿜어내는 그 미약한 떨림이 그대로 내게도 전해진다. 크게 동요하게 된다. 놀라고 견딜 수 없어 소리라도 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 그 사람을 계속 쫓았던 거구나. 그렇지? 그 사람이 얼마나 강한 지 아는 거야. 그래서 네가 그렇게 우릴 걱정하는 거고…"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 터치 보유자. 인위적으로 과도한 양의 샤이닝을 주입당한 자. 행운아를 극복한 이후에 내게 다가온. 새로운 종류의 적이었다."
"흰옷. 금발. 그 사람이야? 네가 말하는 사람이 그 사람 정신 조종한다던 그 사람이지? 터치를 악용한 사람." 하기와라 우시오가 물었다.
"악용뿐이 아니다. 악행을 저질렀다. 많은 이들의 자유를 빼앗고 지배했다. 그에게 얼마나 많은 이들이 패배했다. 죽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 하나하나를 셀 수 있었다.
하기와라 우시오처럼 농담을 즐기던 찰리. 정신감응을 가진 알파. 활을 쏘던 델타. 수많은 호출명. 수많은 알파벳. 그리고 수많은 이름들. 이치노세 신지로를 포함해 사망 처리로 영영 잊힌 자들. 그들은 내 안에만 살아있다.
이름 없는 남자와 인공지능이 이름을 잃은 계기를 들은 바 있다. 나는 그들을 이해했다. 어떤 것도 되새김질하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씹을수록 쓴 맛이 배어 나오는, 영원히 소화할 수 없을 비물질. 합성물들을 뱉고 그들은 단식을 선택했다. 목마름에 오직 타액을 삼켰다.
나만큼은 도무지 그럴 엄두가 나지 않는다. 반추는 사실 쾌적한 생활에 하등 도움을 주지 않는 행위다. 대몰락 시대의 모든 이들이 물것들을 그냥 넘어간다. 혀를 한 번 쯧 차고 감내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몰락이 벌어지기 전에는 자신에게 부모가 없다는 말이 다른 이들의 유감을 샀다고 하지만, 이젠 아니다. '그렇군. 그래서?'
나는 새삼스럽게 풀이 죽거나 가라앉지 않는다. 다만 늘 슬플 뿐이다. 새 눈물을 흘리지 않되 고여 썩은 물을 빼지도 않는다. 그러지 않으면 같은 목표를 향하다가 죽은, 내 눈앞에서 죽어간 무고한 이들. 정의로운 이도 있었고 비영웅적인 자도 있었지만 모두 소시민이었던 그들은 누가 인정해 주는가. 역사책에 그들을 전부 올리기에는 종이가 너무 비싸다.
나는 그 무엇도 외면하거나 망각할 수 없다. 그렇게 설계되었기에, 그들이 도무지 잊히지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단지. 너희들마저 잃고 싶지 않을 뿐이야…"
나를 제외하고 모두 너무 쉽게 죽는다.
"왜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 나는 과민하지 않아. 이게 당연한 거야. 나와 친한 또래 중 살아있는 사람은 얼마 없어. 애초에 또래를 차치하고도 한 줌뿐. 다 죽었어. 내 눈앞에서. 그런 식으로 다 죽어가는데. 너희가 어떻게 그걸 피해 갈 수 있겠어?"
로와 재단은 절대로 내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가하더라도 후유증은 남지 않는다. 오직 생채기들 뿐이다. 나와 함께한 이들이 어떻게 되는지에 비하면 코웃음이 나오는 경상이다. 아무리 적극적으로 움직여도, 바디캠이 그것을 증명하더라도 결과는 언제나 뻔뻔한 생존이다.
"누가 도와주는데. 누가? 나는 돕지 못해. 아무리 그러쥐어도 다 떨어져.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을."
그들은 운이 좋다. 언제나 좋아서. 로의 일원이 될지도 모르는 나에게는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한 번은 그들이 나와 동료들이 있는 건물을 폭격했다. 모든 층이 무너졌는데 나는 살아남았다. 운이 좋게도.
"내 곁에 너희가 있으니 다 괜찮을 거라고? 정반대야. 내 곁에 너희가 있으니 잘못될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가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너 여기서 나가면 상담 좀 받아라. 진심. 지금 너한테 필요한 건 사람이나 세상을 구하는 게 아니야. 히무로. 너는… 그냥 따뜻한 밥 먹고 잠을 실컷 자야 돼."
"상담사가 죽었는데. 어디서 받아야 하지? 캐롤 브라이트는 부활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상담을 받아야 하는 건 너도 마찬가지다. 하기와라 우시오."
"나는 괜찮아. 이미 받았어."
"캐롤 브라이트에게서?"
"너한테서. 이 새끼야.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데? 너 때문이잖아. 네가 날 구했어. 그거 알기나 해? 내가 블레인을 이길 수 있었던 건 네가 글러먹은 놈 머리채 잡고 들어와서라고. 애미애비가 아무리 나를 괴롭혀대도 나는 이제 그치들보다 나은 사람이야. 그러니 상관 없어졌다고. 그게 다 네 덕분이야…"
하기와라 우시오가 내 등을 두드린다. 무슨 뜻이지? 그가 보기 드물게 전혀 웃지 않는다.
"그때 네가 나를 본 기분이. 지금 내가 너를 본 기분이야. 진짜 수정펀치 함 갈겨야 하나…? 도무지 못 넘어가겠다고. 진짜 이상하잖아…? 지금까지 잘만 살았던 놈이 왜 갑자기 감성 폭주야?"
그래.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불행을 되새기는 일이 질리고 나면 나는 다시 걷기 시작하리라…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러니 괜찮다. 사실. 이런 식으로 낭비할 시간이 없다.
이 살인 게임에서 나가야만 한다. 재단을 무너뜨려야 하고, 수많은 위험분자들을 색출해야 한다.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그런데. 누가 날 잡는 거지? 나를 당기는 인력을 느꼈다…
나는 다리를 서서히 접어 동굴의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럴 때가 아닌데… 피할 수 없는 사실에 압도되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는데. 그러니 이름 없는 남자를 찾아서 그가 터치를 더 개화하지 못하게 막고, 캐롤 브라이트의 부활도 막아야 하는데. 그런데…
마유즈미가 내 양팔을 잡고 천천히 앉으니, 나도 그녀를 따라 앉게 된다. 손을 뿌리칠 수가 없다…
"히무로… 많이 힘들었지."
내 말을 들은 히무로의 눈이 커지는 게 보였다. 반대로 동공은 조금 더 작아졌다. 히무로처럼 사람 표정을 읽자면, 놀란 것 같이 보였다.
나는 히무로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정말 많았다. 왜냐하면 히무로는 자신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히무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주 말해왔다.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판단에 대해 말해왔다.
히무로는 자기가 무엇을 느끼는지에 대해 좀처럼 말하지 않았다.
빙산이 아무리 모습을 드러내어도 나는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을 볼 수 없었다. 히무로는 대몰락을 포함해. 어느 것도 순순히 내보이지 않았다. 스모어라는 그 달달구리한 걸 먹고 감탄하는 히무로만이, 내가 보던 그중에서 가장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히무로는 약한 모습을 의도적으로 숨긴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히무로는 결점 없는 사람이 되려는 것 같다.
"지금부터는 참말만 해. 히무로. 혼내기 전에."
"나는 언제나…"
"숨기잖아. 죄다 숨기잖아. 나는 이제 네가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다 알아. 족집게처럼 알아. 네가 무적인 척하는 것도 눈치챘어. 무적 아니면서… 봐. 내가 손을 꼬집기만 해도 막 몸을…"
나는 히무로의 손을 꼬집었다.
음…?
어… 어. 이러면 안 되는데. 으. 끄떡도 안 하네… 씨. 내가 손은 좀 매울 텐데. 왜 아픈 척도 안 하는 거야?
"그렇게 아픈 티를 내기 싫어? 그 정도야? 그만 하라던가, 아프다던가, 하다못해 악 소리도 안 내게? 왜? 내 앞에선 괜찮잖아…!"
내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히무로의 손이 빨갛게 부어오른 걸 보자 너무 세게 꼬집었나 싶기도 해 후다닥 팔을 뺐지만, 히무로는 여전히 무덤덤했다.
"나는 고문도 버틸 수 있는 몸이야. 고작 네 손아귀로는 나에게서 비명을 이끌어내지 못해."
"그걸 어떻게 아냐? 너 그거 그냥 가오 잡는 거야, 아니면… 뭐. 체험을 통한 데이터야?" 하기와라가 물었다. 그러자 히무로는 하기와라를 힐끗 돌아보았다.
"굳이 말해야 하나?"
나는 나도 모르게 "헉" 하는 소리를 냈다. 히무로의 의미심장한 되물음에서 또다시. 나는 그가 굴곡진 여정을 걸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나와 히무로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별 고생도 안 하고 살았던 나에 비해 히무로는 너무도 괴로운 일을 결어왔다.
"어떡해. 히무로. 너 정말… 어떡해… 안 됐어. 너무 안 됐어…"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몰랐다. 나는 그냥…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히무로한테 몸을 던졌다. 안아주려고 했는데, 묘하게 키랑 덩치 차이가 나서 내가 안기는 꼴이 되어 버렸다.
이익… 나는 히무로 품 안을 기어오르다시피 하며 히무로의 등 뒤로 팔을 올렸다. 좋아. 안아주기는 성공했으니. 이제 히무로의 긴장을 풀어줄 때다. 이건 내 경험담인데. 서러울 때 펑펑 울면 오히려 도움이 크게 된다. 참으면 참을수록 독이 된다…
그래서… 꼬집어도 신음 하나 안 내는 인간을 울릴 방법은 뭘까… 나는 가물가물함을 느끼며, 그게 통하리라는 확신은 조금도 없이 히무로에게 속삭였다.
"이제 울어. 히무로."
"이제 울어. 곧 울 것처럼 보였는데. 내가 잘못 판단한 건가?"
"울어도 돼. 정말이야. 엉엉 울어도 돼."
나는 남자아이답게 딱딱한 히무로의 몸을 팔로 꽉 조이며 말했다. 그러자 곧 히무로의 목울대에서 흐느끼는 듯한, 혹은 신음하는 듯한 떨림이 흘러나왔다. 그 흔들림이 얼마나 미약한지 나마저 속에서 무엇인가가 울컥 솟았다.
히무로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담아두고 있었을까? 그는 한 마디도 직접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알 수 있었다. 히무로가 보여준 이 반응은 정말 작은 단편일 뿐이었다. 내가 가늠할 수도 없게 큰 고드름이 히무로를 찌르고 있었다…
녹아라. 녹아… 나는 히무로의 품에 대고 입김을 호호 불어넣었다. 조금이라도 따뜻해지게…
나는 그 말만을 기다려온 것 같았다.
잔뜩 녹슬고 무거운 자물쇠에 딱 들어맞는 열쇠를 끼운 듯. 내가 외세계를 향해 두텁게 세울 벽이 허물어졌다. 처음부터 그것에 의해 해제되게끔 만들어진 듯했다. 높게 쌓아 올린 탑이 와르르 쓰러지자 다시 쌓아 올려야 한다는 생각이 1차, 어떠한 해방감이 2차, 공허함이 3차로 밀려왔다.
그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각오였음이 놀라웠다. 내가 그토록 심지가 가늘었던가? 어째서 흔들리는가. 왜 무너져 버렸지?
그 작용이 당연하다는 듯이 이루어져 나는 순간 내가 정신조작을 당한 것은 아닐까 의심하기까지 했다. 이것이 터치를 당한 이들이 느끼는 감각과 유사하다면 그것이야말로 정신조작이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함을 증명하리라.
나는 완전한 조율자의 터치에도 맞설 수 있다. 그러나 신장 162cm의. 자그마한 환희가 내 몸을 기어오르는 것도 떨쳐내지 못한다. 이것이 자발적인 변화의 무서운 점이다. 정상의 범주가 변하는 것은 분명 나를 한 고목에 묶어두었는데, 고목을 뿌리 뽑은 채 끌고 다니는 일과 같았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이 어려워진다. 무엇이 옳은지도 모호해진다.
"이러지 마." 숨결에 목이 간지러웠다.
"왜? 싫어?"
"전혀. 이럴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나를 위로할 만큼 심각한 일이 아니야."
"그렇지만 히무로 너. 괴롭잖아… 그럼 지금 힘들지 않다는 거야? 그런 거짓말이 어디에 있어. 어디에?"
"…네 말이 맞아. 마유즈미. 분명 나는 괴로워. 정말 지독하게…"
이게 뭐지? 이게 뭐지?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얼굴의 근육이 일그러지는, 이건 대체 무슨 느낌이지? 안도감과 스트레스가 동시에 밀려와 정신을 차릴 방도가 없었다. 절로 머리를 부여잡고, 입은 중얼거렸다.
"나를 민간인 살해자라며 기관 건물 앞에서 시위를 하고… 또 내게 썩은 토마토를 던졌어. 또.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시위마저 한단 말이지? 무엇을…?"
살아 돌아온 것은 잘못이 아니다. 내게 무기를 겨눈 이를 제압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터치에 감염된 이들이 기관의 인원이라면 죽이려 드는데, 놔둘 수는 없었다. 아무리 누가 손가락질을 해도 그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많이 죄를 지었다…
"나는 어린아이를 죽인 적도 있어. 네 나이의 반도 안 되는 어린아이에, 머리를 보라색 핀으로 고정시켰지. 폭발물을 매달았기에 어쩔 수 없었어. 그런 일이 수도 없어. 마유즈미… 누구도 지킬 수가 없었어. 작전을 같이 했던 자들은 다 죽었어. 메리도 죽었어. 다 내 잘못이지."
"그치만 히무로. 너는 고등학생이잖아… 어떻게 네가 모든 사람들을 전부 구한다는 거야? 어른들도 못 하는 일의 책임을 어떻게 네가 전부 떠안겠어…?"
그녀의 말이 맞다. 우리는 다 상처 입었고, 불완전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가 잘하는 일만 잘하고, 대개 반대급부적인 단점도 함께 가진다. 완벽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달라. 너희 누구와도 달라. 나는 잘 해내야만 해. 최고의 결과를 끌어내야만 해."
"왜? 왜 그런데. 히무로. 네가 천재 미남 프로파일러리서? 우리가 무슨 감성 같은 거에 휘둘리는 동안 너는 고고해서야? 응? 네가 신선이야?"
"정확히 그 반대야. 나는 최소한 스무 명이 죽었기에 이 자리에 있으니까."
나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있다.
내 몸에 있는 재능들은 다른 이들의 것이다. 프로파일러. 총잡이. 사냥꾼. 수사관. 그 이상은 나도 모른다. 재단은 때가 되었을 때 그것들이 발현되리라 말했다. 그리고 열다섯 명의 감시자 후보들… 그들 모두를 딛고. 나는 살아남았다.
"너는 네 앞에 있는 사람이 무엇인지 알아? 말 그대로 사람을 갈아 넣어 만든 흉물이야. 그러니 괴로워도 싸. 영영 고립되어도 돼. 내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모욕이고, 무덤을 파헤치는 일이야. 유족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말 그대로 그들 가족의 영혼을 덕지덕지 기워낸 게 나야…"
그래서 나만이 해야 한다. 다른 이들보다 내가 더 유리하고, 역량이 뛰어나며, 더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모든 책임은 나의 것이다. 모든 게 어떻게든 해내야만 했던 일이다.
다 내 잘못이야. 기분이 음울했다. 마유즈미가 말한 대로 울고 싶은데 예전에 어떻게 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가장 불편한 점은, 분명 내가 잃은 것을 인식할 수가 있는데 되찾을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환상통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부러질 수 없는 가상의 뼈에 영영 압박과 충격이 가해지는 동안 그 고통을 느껴야 하는 처지다. 와지끈 부서지는 편이 나은데 정작 뼈가 없다.
"미안하지만 못 울겠어. 마유즈미. 이것만큼은 네 부탁이어도 들어줄 수 없어. 의식적으로 되지가 않아…"
"괜찮아." 그리고 마유즈미는 내 등을 토닥였다. 그녀는 계속 부자연스럽게 숨을 쉬었다. 후루미나미 나몬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어딘가 편안하고 나를 진정시키는 숨. 그것이 안주하지 않고자 하는 나의 강박과 충돌했다. '나는 이럴 자격이 없다'. 앞으로… 더 나아가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
"간지럽다고… 마유즈미. 말하면 좀 들어."
"싫은데." 그리고 마유즈미는 체중을 슬그머니 내게 넘겼다. 나를 어찌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나를 밀어낼 생각 마. 나는 절대 안 밀려나. 어디를 그렇게 혼자 가려고?"
"그러다 네가 죽어. 마유즈미. 나는 어차피 무사할 거야. 하지만 너는 아니지. 그들은 집요하게 내 주변 것들을 가지치기해. 내가 아무런 것에도 의지하지 못하고 재단에 몸을 맡기게끔…"
"애초에 그 사람 여기 없다니까. 그리고 그건 아무도 모르잖아. 히무로. 이 바보야…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몰라? 애초에 안전할 거면 옛 저녁에 방에 틀어박혔을 거라고… 나는… 더 이상 네가 혼자 있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그때. 탑을 바라보며 겁에 질려있던 너는, 야가미에게 총을 쏠 때의 너는 정말 너무 외로워 보였어… 사람이 그 이상으로 외로울 수 없을 것만 같았어."
나는 그때 내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방금 전까지 나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고, 나한테 지금까지 사실을 숨겨왔다고 하는 히무로가… 너무 딱해 보였으니까. 도움이 필요하다고 온몸으로 소리치는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나는 히무로가 만약 나였다면, 그토록 외로워하는 사람에게 손을 건넸을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딱해 보여서가 아니라 그냥 그게 옳은 일이니까. 히무로는 자신을 숭고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점이야말로 히무로를 숭고하게 만드는 걸지도.
아무튼. 아무도 손을 안 건넨다면 적어도 나는 건넬 수 있지 않은가 싶었단 말이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같이 가 줄 거야."
나는 히무로를 내버려 둘 수가 없다. 도무지 외면할 수 없어. 그럼 어떡해. 어쩜 좋겠어… 응? 내 친구에다가, 단 거를 좋아하는 웃긴 점도 있는 남자애를…
"어째서? 분명 카텟이고, 카친이지. 하지만 그것은 살인 게임을 끝내기 위한 카야. 내가 짊어진 또 다른 카에는 누구도 오를 수 없어. 나는 변질된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라도 구원해야 해. 재단에 맞서야만 해. 지나치게 거시적이고,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미약하기 짝이 없어."
히무로가 가고자 하는 길은 굉장히 위험했다. 듣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좋아. 나도 세상 한 번 구해보고 싶었는데 잘 됐네 이런 식으로 몸을 던지기에는. 많이 경솔했다.
그렇지만 억지를 부리고, 떼를 써야겠다…
"내… 소원이니까."
"뭐?"
"소원. 네가 전에 하나 들어준다며. 기억나?"
"그럼 이렇게 하자. 나중에 내 소원 하나 들어주기!
"어떤 소원을 원해?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해 줄게."
"…너는 그 점에 있어 내게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어."
"그럼 들어줘. 그때 불문율에 부쳤으면 이럴 필요도 없었을 거. 네가 고집 부리니까 빚이 생기는 거야."
"할 말이 없군."
나는 등 뒤에 가 있던 손을 스르르 풀고 내 몸 앞에 모였다. 손에 깍지를 끼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히무로에 내 이마가 닿았다. 히무로는 별 생각도 없다는 듯이. 평소 그대로의 목소리 높낮이로 물었다.
"나에게서 무엇을 원해?"
히무로의 말을 듣자 나는 갑자기 할 말이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 어.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하지. 나는 이마가 익어가는 기분을 느끼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 뭐야. 나 오늘 왜 이렇게 들이대는 거지…? 부끄럽긴 한데. 그렇다고 멈추기는 싫다… 왜 이럴까. 나… 나중에 엄청 부끄러워져서 막 후회할 것 같은데. 나 이거 어떡해…
뭐라고 말하지. 뭐라고 말하지… 무엇을 원하냐고? 그런 식으로 물어보면 딱 집어 말하기가 조금… 아… 나 덥다… 땀 나는 거 티 나려나…? 그래서. 그래서 대답을…
"…다 줘."
나는 솔직히. 둘이 껴안았을 때부터 그냥 영안로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치만 일단 앞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그냥 슬그머니 빠져 주변이나 정찰하기로 했다.
뭔가가 이상한데… 영안로 안에서 묘하게. 다들 감정적이 되는 것 같단 말이지. 나도 잠깐 들어갔다 나온 다음에 지랄발광을 했고… 제츠보도 정말 나나시 좋은 티를 못 내서 안달이었다. 지금은 히무로마저 막… 어우. 오글거려.
마유즈미가 느닷없이 귀신에 빙의되기도 하고… 대체 뭐지? 이거 영안로의 작용인가? 기준이 뭔데? 다들 솔직해지던가… 비밀을 드러내는 게 작용이라고? 흠.
할 것도 없어서.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 이 동굴 안은 조명 하나 없으면서 묘하게 밝을 수 있지…? 진짜 뭐가… 에… 에…
"에취!"
에취. 에취. 에취. 에취. 동굴을 따라 소리가 울렸다. 나는 코를 손가락으로 비벼 삐져나온 콧물을 닦았다. 뭐가 있는 거야. 이 영안로에는… 어깨를 으쓱으쓱 거리며 되지도 않는 짱구를 굴리는 동안. 나는 어딘가 위화감을 찾아냈다.
재채기를 한 부분이. 더 밝다.
"뭐야. 이거?"
내 기분 탓이 아니라, 내가 침이랑 공기를 내뱉은 부분이 조금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뭐야. 이거? 진짜 뭐야? 나는 기이한 느낌에 손을 휘저어 보았다. 별다른 변화가 나타나지 않자, 팔로 풍차를 돌리듯 붕붕붕 돌려 큰 바람의 흐름도 만들어 보았다.
"이거… 어두운 게 아니잖아."
눈치채기 어려웠다. 왜 어두우면서 앞이 보이는지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았다. 대놓고 어떻게든 파헤치려고 유심히 보지 않는 이상 눈치채기 어려운 사실이. 눈앞에 있었다.
"어두운 게 아니야. 밝은 동굴 안에 어두운 물질이 차 있는 거야… 헉!"
나는 뒤늦게 코를 막았다가 다시 떼었다. 어차피 몇십 분 동안 호흡했으니 몸에 안 좋은 거였다면 진작 죽었다. 그럼 몸에 안 해롭다는 건가? 어둡다. 말 그대로 검은색이 아니라 어둠 자체다… 액체도 아니고 고체고 아니고 심지어는 기체도 아닌 것 같은데… 이게 뭐길래 이 동굴 안에 가득 차 있지?
잠깐. 이거 때문에 지금 히무로가 저렇게 흔들리나? 이게 대체 뭐길래?
"사들이게류인된하지능3하너다이기여니닝다은은이람통도해과는야과이닝초의며된… 아… 뭐더라… 아. 맞아."
샤이닝은 인간 내부의 잠재력이며 다크닝은 그 그림자이자 반발하는 힘이다.
영안로의 세 번째 장소는 그것들로 가득 차 있지. 인간을 퇴화시키는 힘. 절제가 아니라 원초적인 이끌림과 감정과 이어져 있는 힘…
"히무로. 과연 너는 얼마나 약해져서 돌아올까?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되찾고, 또 약해져 있을까?"
잘만 이루어진다면, 내가 널 먹어치우는 데에 충분할 정도로 약해질지 모르지.
나는 기지개를 켰다. 손목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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