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그 사람은 예술가였다. 진짜 예술가라는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었다.
나는 가족인 그 사람의 그림자를 따른다. 그 사람의 행위는 내 귀감이었고,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그 사람의 예술은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정말로 정말로 드물고 대단한 사람이었다. 주머니 속에서 드러나는 송곳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녀의 이름을 썼으니. 그 사람은 언젠가 잊힐 것이다. 그녀는 내게 흡수될 것이다. 동화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언젠가 영영 잊힐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으로 나를 기억하리라. 너무 잔혹한 일이다.
그녀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나를 원망하리라.
바로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
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이 내 가족이라는 건 무척 끔찍한 일이다.
왜냐하면 가족이라는 끈은 누가 어떻게 해도 끊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가족이 생기더라도 그 뿌리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섬겨야 하는 부모님이라던가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다. 말 그대로 나는 가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내 일부는 저 사람들일까. 나도 언젠가 저 사람들처럼 변모할까를 떠올리면 두려움에 벌벌 떨게 된다.
초고교급이 되는 기분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하루아침에 사람들이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과 역량과 태도와 삶을 강요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나와 같은 입장에 놓여 봤을까?
그런 이가 없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누구에게 물어야 답을 알 수 있을까…?
죽음은 언제나 끔찍하다. 이 세상의 물것들 중에 죽음이 가장 끔찍하다. 누구도 어찌할 수 없고, 피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조차도 없다. 단 하나 가능한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잊고 싶지 않다. 오직 나만이 잊으려 하지 않는다. 제발 잊지 않게 해 주세요. 제발요. 부탁해요. 부탁할게요…
이제는 혼자가 아니다.
내 곁에 항상 그녀가 있기 때문이다.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유사 초고교급들이 모여 만든 '그 조직'. 유타, 자경단, 신무영과 아이들… 이름조차 정하지 않았던 그들에게는 거창한 목표가 없었다. 여정 끝에 그들이 어깨 위로 들 트로피도, 언젠가 손을 툭툭 털고서 "할 일은 다 했군" 이라 말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그들에겐 몸뚱이와 의욕뿐이었다.
재능조차 그들은 살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패배하였다. 그들은 강한 힘. 커져가는 인류의 가능성 앞에 짓눌린 수많은 조직 중 하나였다. 개셔라는 가명을 댔던 불한당들과 그들은 똑같았다. 똑같이 시대에 패배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의 있는 패배자들이었다. 그들은 개인의 이득보다 다른 것을 추구했다. 무모할지언정 눈앞의 한 명을 구하고자 했다. 그들은 약조를 하고 모인 게 아니라, 그저 대책 없이 뛰어다니다가 서로를 마주쳤다.
아는 이들은 알 것이다. 그들은 평범한 이들이 평범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투쟁했었다.
"카나리. 정신이 들었구나!"
뭐야. 이바라 쿠리스?
카나리는 눈을 끔뻑였다. 내가 왜 누워 있지? 왜 눈 앞에 이것들이 다 모여있고… 옆에 의자 다리. 책상다리. 밥 냄새… 식당이잖아?
맞다… 식당에서 회의 하자고 했지. 내가 모았잖아. 일단 밥 먹이면서… 여기까지 나오는 것도 위험하지 않느냐. 이제 그럴 일이 없다… 로 말을 트려 했지. 그런데 왜…
"너 기절했었어. 카나리. 너무 긴장을 많이 한 거 아니야? 눈을 까뒤집더니 그대로 굳어 버리던데."
"으아아아아악!"
카나리는 참지 못하고 팔을 앞으로 휘적이며 몸을 일으켰다. 제츠보가 재빨리 숙인 고개를 옆으로 치우지 않았다면 좋지 않은 불상사가 일어날 뻔했다. 민망한 접촉 따위의 사사로운 게 아니라, 강철 면면에 코와 입술을 짓찧어 생길 상처 같은 것이.
"…그렇게까지 놀라는 건 좀 섭섭하잖아. 왜. 너무 달라져서 놀랐나? 마네킹 머리보다는 이게 낫잖아?"
"많이 달라지긴 했지. 영안로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점을 차치할지언정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지?"
카나리는 그 목소리에 목을 홱 돌렸다. 뿌드득 소리가 나며 목뼈가 뻐근해지는 와중 카나리는 그 고통을 거의 느끼지도 못했다. 너무 놀랐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놀랐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소스라침이었다.
"토키와… 아유키…!"
"그래. 카나리. 케이토. 우리를 왜 불렀어? 하고 싶는 말이 뭐지?"
토키와는 카나리를 내려다보며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카나리는 토키와의 눈빛에서 기이한 거부감을 느꼈다. 토키와 아유키가 의자에서 꼼짝 하지 않고 있음도 그에 한몫했다.
닮았다. 닮았어. 그때랑 똑같다.
"쉬는 시간을 늘려 달라고?"
똑딱맨의 아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누가 그런 자격이라도 주었다는 것처럼. 물론 똑딱맨의 아들은 고용주고 그는 피고용인이었으나, 그게 웬 상위존재인 양 남을 멸시해도 좋다는 뜻이었던가?
손 하나도 까딱 안 하네. 카나리는 토키와의 눈에 담겨 있는 권력자의 눈앞에 얼어붙었다. 어떻게 저렇게 냉담할 수가 있지? 나야 좋은 사람은 전혀 아니지만, 눈앞에 누가 기절했다 깨어났으면 어떻게 됐는지 살필 거야. 내가 아무리 매몰차지려 해도 그렇게 될 텐데. 어떻게 이놈이…
"세상의 모든 약속이 영원히 이어지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만 이 살인 게임 속에서 우리에겐 서로가 필요해. 우리 모두에게… 서로가 필요해. 난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카나리. 내겐 대단한 재능도 뛰어난 말솜씨도, 높은 지능도 없어. 그렇지만 이런 나조차도 다른 사람을 위해 조금 더 강해질 수 있어. 우리 모두에게 그럴 가능성이 있어. 제발. 카나리…"
카나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그놈. 그를 설득시켰던,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실을 전했던 그놈을 떠올렸다. 어떻게 된 거야. 이 자식아… 어쩌다가 그렇게 변한 거냐고. 그는 야속함을 느낄 자격이 없었지만, 가능하다면 캐묻고 싶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너도 그렇게 됐냐고! 좋은 놈이었으면서. 왜…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카나리는 그 말에 어느 정도 반대했다. 권력은 서서히 부패하는 게 아니라 원래부터 곰팡이조차 안 슬만치 상해 있다. 오직 그 소유자만이 바뀔 뿐이다. 그리고 카나리는 한때 올곧음과 신뢰의 정형을 보여주었던 자에게서 썩은 내를 맡았다.
나와 마유즈미, 그리고 하기와라 우시오는 그 짙은 어둠의 무언가에서 벗어나고자 달렸고, 곧 주변의 어둠 그 자체에서 도망칠 방법 따위는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자 우리는 뛰기를 멈추고 다시금 걸었다.
하기와라는 어둠을 손으로 휘저으며 중얼거렸다. 그 시점에서 우리는 이미 동굴이 어두운 게 아니라, 동굴 안에 검은 물질이 차 있으며 그것은 이따금씩 짙어진 농도로 우리를 휘감아 흔들어댐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 연기는 대체 뭘까? 너희도 다 눈치챈 것 같은데. 이거 들이마시면…"
"정신을 온전히 가누는 것이 어렵게 된다. 내가 종합한 바로는 그런 작용을 하는 것으로 추측했다. 내가 트라우마에 휩싸인 것도, 마유즈미가…"
나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마유즈미가. 마유즈미가 뭐?"
"거… 겁에 질렸었거든! 어두워서 겁에 질렸어! 그래서 엄청 무서워했어! 하하! 하하… 나도 참… 아직 겁쟁이라니까. 정말이지!"
굉장히 어색하군. 마유즈미는 언제나 거짓말에 서툴다. 탑에 처음 왔을 때 격투가 운운한 것에서부터 알 수 있다. 그녀가 정직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거짓은 이른바 자연스럽지 않은 상태 그 자체이기 때문에. 내가 그녀의 거짓말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그녀를 껴안았지. 아무것도 놀라울 것이 없는 일이다."
"아아아아아!"
마유즈미가 팔꿈치로 나를 찔러댔다. 납득이 안 되었다. 마유즈미는 본인의 고백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나? 나는 나의 행동만을 말했고 당연히 마유즈미의 행동으로는 집중이 쏠리지 않아. 완벽한 도움이었을 텐데.
"아하하… 히무로도 참… 하기와라 놀라게 농담을 다 하고… 재밌어라. 재밌어!"
"아. 그러셔. 뭐 니들이 그렇다면야 내가 캐물을 건 없고… 그래서. 여기에 언제까지 머물러야 돼? 이게 코카인이었으면 우리들 진작에 중독자 됐을 텐데."
"중독자가 되기 전에 과다 투여로 죽지 않았을까. 코카인도 분명 치사량이 있는 약물이다. 우리의 주변에 있는 이 물질에는 치사량이 없는 것 같지만, 오래 머물러서 좋을 일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하기와라 우시오. 몸에 이상은 없나?"
"글쎄요. 나는 평소랑 똑같은 것 같은데? 왜 나한테만 아무런 효과가 없는 거지? 무슨 기준이야. 이게? 너희가 껴안는 동안 나는 별반 한 게 없어서 겉으로 티가 안 나는 건가? 감정적으로 동요할 계기가 있어야 해?"
좋은 가설을 내주는군. 어두운 물질은 우리가 충동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도록 부추기는 듯했다. 그리고 하기와라 우시오는 이 동굴 안에서 별반 할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영향을 받지 않았고, 나는 조율자의 형상과 내가 겪었던 일을 동시에 떠올리며, 눈앞의 동료이자 친우. 내게 애정을 주는 자를 갈구했다. 마유즈미에게 매달린 것은 그렇게 해명할 수 있었다.
추한 감정이구나…
"아. 안 껴안았대도! 우리는 그런 거 안 했어!"
"맞다. 그랬지… 이야아아. 내가 오해했네. 그래서 앞으로 계속 나아갈 거야. 아니면 여기서 쫑내고 탑으로 돌아갈까? 지금 시간 얼마나 지났는지 아는 사람?"
"내 체감 시간은 세 시간… 혹은 네 시간 정도다. 이 정도 시간이 유의미한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탑에서 여러 물리법칙들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모르겠군. 시간이 일률적으로 흐르지 않는 것은 희박지대 같은 특수 환경에서도 벌어지는 일이었다."
"희박지대? 그게 어디인지는 모르겠는데… 야. 너 나 데리러 잠깐 영안로에서 나왔을 때. 기억 나냐? 나는 분명 애미애비 얼굴 보자마자 뛰쳐 나왔는데. 이바라도 그렇고 다들 영안로 문 앞에는 없었단 말이지."
"그야 너에게는 나를 제외한 누구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것을 차치하고도. 그래. 그들이 급히 해산하였다기엔 어색하다. 영안로와 탑의 시간 흐름이 서로 왜곡되었을 가능성은 의심할 만 하지."
"그럼 밖에서는 하루가 지났을 수도 있는 거네? 일주일이 지났을지도 모르고! 나나시를 조금이라도 빨리 따라갈 수밖에 없겠는걸…" 마유즈미가 말했다.
"그전에 다들. 귀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을 어디에서든 동원하는 게 좋을 거야. 조율자는 딕테이트를 써서 너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으니까."
"이렇게?" 하기와라 우시오가 본인의 손가락을 귀에 쑤셔 넣었다. 저렇게 행동하다가 정신치료를 받게 된 이들을 셋이나 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천을 찢어서 끼워 넣는 편이 나을 것이다. 기다려라. 내 셔츠를 조금 찢어내면 된다."
"어어? 잠깐. 야야! 잘생긴 놈은 퐉스행동 금지야!"
"또 무슨 이해할 수 없는 비유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히무로. 뭐? 셔츠를… 헉!"
붉은 셔츠는 내가 힘을 준 끝에 몇 줄의 끈으로 변했다. 내가 딕테이트에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음을 생각하면 내가 쓸 분은 필요 없을지도 몰랐으나, 만약에 대비해 찢어 두기로 했다. 의복의 면적이 조금 줄겠지만 크게 물의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히무로. 너. 옷이… 옷이…"
"네 것이나 하기와라 우시오의 것은 찢기에 용이하지 않으니. 별반 대안이 없었어."
"내 옷을…?! 아. 안 찢는단 얘기구나…"
마유즈미가 자신의 어깨를 화들짝 감쌌다가 놓아주었다. 나는 우선 하기와라 우시오에게 끈 두 갈래를 지급했다. 그는 받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후루미나미를 뻑가게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만. 너는 당해도 싸다 임마. 이런 놈은 멘헤라 정신병자 한둘 쯤 붙어줘야 해. 그 정도 고생은 해야지 아무렴!"
"또 무슨 헛소리인지 모르겠군. 그 여자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라. 마유즈미. 네 몫은 여기 있어."
"와. 와…"
"…마유즈미. 네 몫 받아가."
마유즈미는 멍하니 내 하복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물질이 그녀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충동적인 행동을 부추기는 물질… 달갑지 않았다. 영안로 밖에서도 그것이 영향을 미칠까 염려가 되기도 했다.
……
"마유즈미?"
"어. 어?! 뭐라고? 다시 말해줄래?"
"네 귀를 막을 천을 가져가. 마유즈미. 조율자의 딕테이트를 막기 위해서야. 물론 나도 착용할 거고…"
"자. 잘 쓸게…" 마유즈미는 손가락이 닿지 않게끔 조심스래 천 쪼가리를 가져갔다. 얼굴은 터질 듯이 혈색이 돌고 있었다. 상기된 볼과 귀를 홍당무 같다 표현하는 연위를 이해했다.
"여하튼 현 시간부터. 금발의 남성이 나타나 너희에게 몇 초 이상 말을 건다면 나는 그에게 사격을 할 거야. 정신조작은 한없이 경계해야 하니까."
"어어? 히무로. 안 그러는 편이 낫지 않을까? 좋게 타이르던가 대화로 풀어야 하잖아. 그냥 영안로에서 나가라며 총 들고 협박하는 게 아니라!"
나는 당연히 총을 들이대고 협박할 생각이었다. 딕테이트의 위험이 있는 이상 대화의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
"만약 한다면 내가 해. 앞서 말했듯이 나는 조율자 본체에게서도 딕테이트의 영향을 받지 않았어. 그러니 너희 둘은 나를 따라오면 되는 거야. 이해했어?"
"히무…로. 망할. 이거 입에 진짜 안 붙네. 히무로맨. 히무로봇. 히무로이드. 히틀러… 히무로맨… 아무튼. 그럼 우리끼리 말은 어떻게 하냐. 애초에 언제부터 귀마개 끼면 돼?" 하기와라 우시오가 물었다.
"나는 지금부터 착용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기습적인 딕테이트를 예방할 수 있을 테니."
"으응? 지금부터? 그렇게 일찍 서로 이야기도 못 하면, 우리는 무슨 수로 시간을 죽여?" 마유즈미가 물었다.
"죽여?! 미친. 히무로 네가 애를 망쳤어. 마유즈미 어휘 선택 좀 봐! 죽인대잖아!"
"호들갑 떨지 마라. 총잡이의 성장 과정에서 수반되는 일일 뿐이다. 어른이 되는 것. 죽여야 하는 상대를 죽일 수 있게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그럼. 죽이지 않을 상대를 죽이지 않는 것도 바람직하겠네?"
"그렇지." 마유즈미의 말은 논리상으로도 그리고 실재상으로도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그러면 나나시를 죽이지 않는 게 바람직하겠다. 그렇지? 또 죽여야 하는 걸 죽이는 게 바람직하다면, 시간을 때워야 하니 잠시동안은 귀마개를 안 하는 게 바람직할 거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아무렇게나 갖다 붙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마유즈미."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책 잡히는 것이 유쾌했다. 마유즈미는 조금도 내게 양보하지 않았다. 내 빈틈을 찌르고 들어와 내 방향을 돌려놓았다. 위험할지언정 누구도 다치지 않을 수 있는 쪽으로. 나는 말싸움으로 그녀를 이길 수 없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뭐라고 말이라도 해 봐라."
"내가 하기 싫다면 어쩔 건데?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맞아.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우린 대화로 풀 거야! 애초에 나나시가 어디에서 초능력을 얻겠어? 나나시가 금발이었다는 네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진짜 초능력이 생겼더라도 그렇게 빨리 우리를 조종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어느 정도 말은 되었다. 나는 그들과 타협하기로 했다. 어차피 기색을 느낀 순간 그를 쏘면, 이름 없는 남자는 실타래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내가 신호를 주면 천을 쑤셔 넣는 것으로 하자. 아무리 너희라도 이건 받아들여야 해."
"그전까진 우리끼리 서로 얘기하면서 가는 거다?"
"마음대로 해."
"와자뵤!" 마유즈미가 소리쳤다.
애초에 이름 없는 남자의 안위 말고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 본 목적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것이 의심되었다.
나는 결국 그들의 귀에 천조각을 강제로 쑤셔 넣지 않았다. 신호를 주면 끼워 넣으라니. 정신조작의 위험을 알고 있는 자가 내릴 순 없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했다.
어떻게든 될 줄 알았던 모양이지. 이번에야말로 다를 거라고. 이 카텟은 강하고도 견고해서 블레인마저 꺾었으니 극한을 이룩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하기와라 우시오와 마유즈미의 낙관적인 태도대로. 내가 과민반응하는 것일지도 모르니 다 잘 될 것이라며 오만에 빠져 있었던 거지…
그들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실로 그랬다.
"카나리. 그 아이디어는 진행시킬 수 없어."
카나리는 토키와의 말을 듣고 크게 당황했다. 그야. 그의 상식에 의하면 그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안전하면 좋은 거잖아. 내가 금고를 열어서 너희를 전부 영영 먹여 살리겠다고 하는데. 뭐? 진행이 안 돼?
칸나즈키를 뺀 탑의 모든 이들이 식탁에 모였다. 이바라 쿠리스, 야가미 토가, 그리고 제츠보. 그들은 카나리와 토키와 사이의 언쟁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바라는 당황했고 야가미와 제츠보는 관찰이 주되었다.
"왜?! 이해가 안 되네! 다들 방 밖으로 안 나오면 좋잖아! 영영 나오지 말라는 것도 아니야. 영안로에서 애들이 올 때까지만 하자고. 들어간 지 이틀이 지났으니까 곧 나올 거야!"
"이틀이 지났는데 나올 거라 누가 장담할 수 있지? 그들이 한 달 동안 나오지 않으면 우린 한 달동안 갇혀 있어야 하나?"
"가끔 합의해서 시간 정한 다음 외출 나가든지 마음대로 해. 효율적으로 가자고. 그렇게 엄격하게 진행할 필요가 없잖아!"
"애초에 영안로에서 그들이 돌아와서 달라지는 일은 없어. 카나리. 탑이 더 안전해질까? 총을 가진 이들이 돌아오는데… 어차피 너는 그들이 온 뒤에도 그 체제를 유지할 생각이잖아. 아니야?"
솔직히 그 정도의 생각은 안 해뒀기 때문에. 카나리는 할 말을 잠시 잃었다. 어? 맞네. 그렇게 되려나…? 싶어 잠깐 입을 닫고 생각하다가, 퍼뜩 입을 열었다.
"뭐… 그렇게 돼도! 별 상관없잖아?! 방에만 있으면 누가 살인을 저지르는데! 살인 없이 단서만 모으며 탈출 준비나 하면 될 거 아니야. 손해는 나만 보는데. 왜 네가 난리야?!"
"그래. 토키와. 이거 정말 좋은 생각이잖아… 또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토키와는 생각했다. 이바라의 말에는 내가 칸나즈키의 신체를 불태운 일에 대한 책망이 아직 남아있어… 나쁜데. 정말 나빠. 야가미는 내 부관을 자처했지만, 살인자를 믿을 순 없지… 카나리의 방식에 적절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면 카나리 쪽에게로 권력이 넘어간다…
"토키와 씨.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야가미가 물었다.
"그래. 있지… 당연히 있고야 말고… 카나리에게 우리가 의존하게 되는 건 잘못되었으니까. 길들여지는 것은 잘못되었어."
토키와는 왜 그래서는 안 되는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탑에 큰 혼돈을 불러일으킬 테니까. 돌이킬 수 없는 혼돈을…
"우리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하면 결국 모노로그는 새로운 동기를 가져와. 물론 오랜 시간 상황이 고착되면 반드시 일어날 일이더라도, 우리가 노골적으로 살인을 피하려 하면 모노로그가 그것을 두고 볼 리가 없어. 또 카나리의 크레딧은 무한하지 않잖아."
"거의 무한하지! 나는 부호야! 그리고 새 동기를 가져와서 뭘 할 건데? 어차피 밖으로 안 나가면 살인도 안 나와. 이해가 안 되네…! 너 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야?"
"방에 틀어박혀선 이 살인 게임의 진실을 파헤친다니. 카나리. 모순이야. 몸을 아끼지 않고 던져도 어려울 일을 안전하게 할 수는 없어. 가축이 되어서 살 순 없다고. 우리는 인간이니까. 어때.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
가축?
"너. 너. 가축 소리는 꺼내지도 마. 방 안에서 쉬기만 하면 조식 중식 석식까지 꼬박꼬박 주겠다는데. 가축?"
카나리는 토키와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쏘아붙였다. 토키와가 보기에 카나리가 그토록 허당의 느낌 없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축…? 웃겨. 웃기긴. 얼마나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살았으면, 별 생각도 없이 살았으면 이렇게 축복받은 제안을 하는데 그걸 깔까? 내가 너였다면 넙죽 받았을 거야."
"그야 네가 그 정도의 그릇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지. 이 살인 게임에서는 그 너머를 봐야 해. 카나리. 살아남는 데에 급급해서는…"
"내 그릇 운운하지 마. 아무리 작게 보여도 내가 직접 빚었으니까! 살아남는 게 당연하지 않은 사람도 있어! 그 더러운 시계 공장에서 소금 정제 먹어가며 버텼는데 뭐?! 살아남는 것 너머를 봐라. 가축은 안 된다? 네가 가축에 대해서 뭘 알길래 그런 오만방자한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건데!"
"진정해. 카나리. 토키와는 그런 의도로…" 제츠보가 입을 열자. 카나리의 손가락질은 곧바로 제츠보를 향했다.
"너는 조용히 해. 편 들 생각 마! 웃기는 놈을 다 보겠네…!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한 거야. 그럼 뭐. 너는 우리 중 몇을 죽이더라도 나아갈 길이 있다고? 그딴 게 리더야?!"
리더.
토키와는 생각했다. 나는 리더다. 나는 탑을 더 낫게 만들 단 하나의 재목이고, 통솔할 자격을 가진 사람이다.
네가 아니라.
"그래. 바로 그런 게 리더라는 거다. 무언가를 얻어야 한다면 기꺼이 희생을 해야지. 여기서 영원히 살 거야? 우리는 탑 밖으로 나가야 해. 가족을 만나야 하고! 그게 우리 목적이야. 여기서 늙어 죽는 게 아니라! 현상유지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될 거라고!"
카나리는 아주 잠깐 울상이 되었다가 스스로의 입술을 깨물며 표정을 잠재웠다.
"…해야 할 말은 해야겠어. 다른 놈들은 착해 빠져서 지금까지 참았던 것 같은데 너무 이상하잖아. 이 놈이 언제까지 리더를 하는 건데?"
누구도 카나리를 말리지는 않았다. 토키와는 그 사실에 불안을 느꼈다. 다른 이들을 중재하는 경향이 강한 이바라조차도 카나리를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성향을 생각하면… 무언의 동조라 봐야 했다.
그의 부관을 자처한 야가미도, 인공지능도 그저 나올 이야기가 나왔다 정도의 감상을 느끼는 듯 보였다. 카나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의 리더? 그래. 탑에 처음 왔을 때 다 합의는 안 했지만, 그래도 재능 자체가 리더니까 리더 시켰어. 시원치 않았지만 그래도 네 잘못 아니다 하며 묻어갔잖아. 그런데 점점 잘못만 나와. 지금까지 한 게 뭐가 있는데?"
"저는 대부분 이유가 있는 행동이었다고 봅니다. 또 이런 상황에 능숙한 지휘를 할 만한 역량은 우리 중 누구도 없고요." 야가미가 토키와를 거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망쳐놓을 수야 없지! 칸나즈키 신체를 태우고, 내 대안을 가로막아? 이건 후루미나미 나몬한테 붙었던 변절자들을 자르려는 거잖아. 누가 봐도 그래. 눈 가리지 말고 현실을 봐라!"
"우연일 뿐이야. 카나리. 칸나즈키의 신체는 해로운 변수였기에 타오른 거야. 네 제안은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것이기에 막는 거고. 전부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이지 내 판단이 아니야!"
카나리는 토키와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너. 지금 그거냐? 밥을 나눠 줄 사람이 네가 아니라 불만이 있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똑딱맨 아들내미도 그랬어! 자기 입김이 약해질까 봐 경영에서 똑딱맨이 간섭하지 못하게끔, 새로운 시스템. 새로운 인재. 모든 것들을 다 바꿨어! 똑딱맨을 파묻으려 들었다고. 왜냐하면 다른 방식이 개입되는 순간 자기가 약해지니까. 너도 똑같아! 비열한 놈들. 경영자 대 경영자로 안 붙고 낼름 파이를 가져가고 자빠졌어!"
솔직히 토키와는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아 지금 불만이 있구나 정도의 감상뿐이었다.
"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네가 가진 권력이야… 맞지? 맞잖아."
"그렇게 보인다면 그렇게 생각하던가. 하지만 내가 옳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 네 배급 계획은 이뤄질 수 없어. 내가 막을 거니까! 이 살인 게임에서 오래 살아남는 건 중요하지 않아! 오래 살아남아봤자 의미는 없는 걸!"
야가미가 눈을 크게 떴다. 오래 살아남아봤자 의미가 없다니.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도 어색한 발언이었다. 그런 이유를 알지 않는 이상에야… 하지만 그가 어떻게…? 야가미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단순한 추론인가. 그게 아니라면…
"그 발언은…"
"살아남는 일에 의미가 없다라… 하. 알겠어. 너랑 나랑 그렇게 생각이 다르다면야…"
카나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 앉아. 카나리." 제츠보가 말했다.
"왜? 원한다면 힘으로 앉혀 보시지. 다 저놈 앞잡이 되겠다 이거라면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라 너희도 조금의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면, 잘 좀 생각해 봐. 내 발상은 정말 좋았잖아… 나도. 나도 좋은 일 좀 해보자…"
제츠보는 카나리를 멍하니 바라볼 뿐, 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 꼬맹이가 뭘 봤길래 약간 철이 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도시락 배급으로 다른 이들을 자신에게 의존시키려는 게 아니라. 정말 선의를 가지고 다른 이들을 안전하게 하고자 했던 건가?
설마… 하지만 내가 알기로 이 탑은 좋든 싫든 각성과 발전, 또는 퇴화 둘 중 하나의 방향을 골라야 한다. 만약 카나리가 조금이라도 발전하고 있다면…
"그래. 지금까지 일을 많이 망쳐 왔지. 토키와 쟤한테 휘발유도 끼얹었고, 23T한테 전파를 쏘고, 항생제를 훔쳤어… 그건 아무리 후회해도 안 변해. 내가 사실상 나이토랑 모리를 죽였어…"
그만.
토키와는 소리치고 싶었다. 그만하라고. 그는 카나리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도 몰랐지만(이제 와서 인정해 봤자 좋을 일 뭐라고?) 여전히 카나리의 행동이 고까웠다. 마음에 들지 않아 당장 멈추라 하고 싶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 하지 말라고. 나는 이 자리에 멈춰 있는데. 나는 그냥 이런 사람일 뿐인데. 너희만 앞서 나가지 말라고.
"내가 저놈보다는 낫지"로 대표되는 자기 합리화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 성품의 우월감은 약자의 마지막 보루이다. 누구보다 열등할지언정 자신이 그들보다 선하다는, 기독교적 패배주의다. 그런데 당연히 자신보다 못하다 생각한 이가 그와 마주 섰을 때. 그보다 더 큰 당혹감은 없다. 토키와가 느끼는 바도 그와 같았다.
너는 안하무인의 불순분자야. 네가 살인을 만들었고 우리 앞을 가로막았어. 나는 그런 상황에서 애써왔다고. 지금까지 계속 그랬다고! 그런데 네가 캐롤 씨의 죽음을 야기해 놓고서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내 자리를 넘봐? 너는 그런 사람이야. 나는 좋은 사람이고! 네가…
네가 나보다 옳을 순 없어!
"내가 영안로에서 알아온 건 내가 여기 오기 전에 나이토, 모리랑 아는 사이였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바보짓을 했다는 거야."
거짓말 마! 뭐? 네가 그 둘이랑 친구? 어디서 말을 지어내고 있어. 그런 소리는 아무도 안 믿을 거야! 토키와는 소리치고 싶었으나, 그런다면 다른 이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줄 게 분명했다.
카나리는 그가 영안로에서 겪었던 일이 환상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모노로그가 그에게 헛된 망상을 심었을지 몰랐다. 당연히 그럴 수야 있겠지. 하지만 그들과 함께 뛰어본 그는 알았다. 그토록 생생했으니까. 잠시 떠올리고 같이한 것만으로 심장이, 그에게서 오래전 떨어져 나갔다고 여겼던 게 욱신거림을 느꼈으니.
그는 생의 어느 지점에서 자신의 자아 껍질을 깨고 지갑을 열었다. "이건 좀 아니잖아. 이건 너무해. 사람들이 이렇게 죽어갈 순 없어. 내가 바로잡아야 해." 그런 생각을 그가 했다면, 과거에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다면야 또 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카나리는 모자를 벗어 두 손으로 쥐었다. 회중시계가 천천히 째깍였다.
카나리는 고개를 숙였다.
"용서해 달라고는 안 할게. 날 용서해야 할 사람들은 이제 못 만나니까. 나는 철부지였어… 그리고… 내 잘못이 진짜 많아. 다 내 잘못이고… 미안해."
정말 미안해 보인다. 저런 건 연기가 아니다. 카나리는 지금 정말로 미안하다. 아무리 삐뚤어 보려 하는 그일지라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더할 나위 없지.
"…할 말은 이게 다니까. 다들 천천히 생각해 줘. 나 먼저 간다."
카나리는 모자를 다시 쓰고서 식당을 나섰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동안, 토키와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저게 용건의 전부였다면야 나도 이만 일어날게. 다들 현명하게 선택해."
"잠깐만요. 토키와 씨? 토키와 씨!"
야가미는 토키와를 붙잡으려 하며 성큼성큼 식당을 나섰다.
이바라는 카나리를 보며 여전히. 자신의 눈을 믿지 못했다. 카나리가 사과를? 그런 걸 보게 될 줄이야 상상도 못 했다. 물론 그녀는 아직 카나리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토키와를 용서할 생각이 없듯이. 말만 번지르르하겠다면 그녀는 여왕도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바라의 마음속에서 '한 번만 더 믿어 볼까?'라는 생각이 조금 움튼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아직 턱도 없이 멀었지만. 그녀가 바보라고 죽음에 손을 얹은 사람을 쉽게 믿진 않겠지만… 그래도 사과 안 하고 뻔뻔하게 나오는 것보다야 훨씬 좋게 봤음이 사실이었다.
"영안로 갔다 왔더니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아…"
"영안로… 그래. 영안로… 뭘 보고 왔는지는 몰라도 많은 일이 있었겠지…"
나나시는 그 안에서 무엇을 봤을까? 제츠보는 한숨을 쉬었다(이제는 그런 일도 가능했다). 깨달음을 선택했다면 그녀가 겪었던 공포의 대면, 블레인과의 대결과는 다른 고난을 만났을 터였다. 일단 캐롤과 관련되어 있겠지만, 부디 캐롤의 너무 많은 걸 알지만 않았으면… 자신이 얼마나 연관되어 있는지 모르길. 부디…
아직까지 살아있으면 좋으련만. 뭘 만났을지 몰라도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 데리러 갈 수 있는데… 그러나 상황이 나아질 리 없었다. 제츠보가 떠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흉계를 꾸미는 자가 널렸으니. 그녀는 탑에 남아야 했다.
하기 싫다… 나나시가 이미 죽었을 가능성은 아무래도 좋아. 시간 흐름의 차이도 알 게 뭐야. 나나시가 느리지만 무사하게 나아가고 있을지 모르잖아… 내가 갈 때까지 살아있을지 모르잖아…
그 생각이 차갑게 굳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계 몸은 인간처럼 사유하다가도 이성적으로 그 선로를 튼다. 바보 같은 생각이다. 블레인과 맞서고 돌아왔더니 탑에서는 하루 이상이 지났어. 아킬레우스와 거북이 문제처럼, 붙잡으려 해 봤자 소용없어. 지켜야 할 사람을 지키는 게 내가 할 일이야.
하지만… 지켜야 하는 사람이 대체 어디에 있는데.
"…생각보다 얼굴은 말랑하네. 만든 사람의 사심이 좀 들어가 있는 거야? 내가 남자애였으면 아주 이 볼따구를 가만히 안 뒀을 텐데."
제츠보는 자신의 볼을 조물거리는 이바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야… 이거 중독되네. 탱탱한 게 무슨 애기 피부 같아."
"그야 죽은 아이의 포피를 적출해 만든 피부니까 그렇지. 세상에서 가장 섬세하고 부드러운 부위가 바로 그 부분이야."
이바라는 별안간 사색이 되더니 조심스럽게 제츠보의 볼에서 손을 뗐다. 그 모습을 보며 제츠보는 어느 정도의 유쾌함을 느꼈다.
"농담이야. 그냥 실리콘이거든? 내가 왜 그딴 걸 얼굴에 두르고 다니겠어? 노네임이 그런 걸 왜 만드냐고. 마음껏 만져… 갑자기 왜 내 볼살에 집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노. 노옹담?! 너 영안로 안에서 하기와라 농담 센스를 배워온 거야?! 재미없어. 아니. 당혹스럽다고!"
이바라는 그럼에도 안도한 기색을 한 채 제츠보의 볼을 양손으로 구깃구깃거렸다.
"네그아 너므 심그악해보이닉가 부니기라도 푸러주러 한 거아… 네그아 앴던 거처럼. 나 마라기 힘든데. 이바라."
"…내가 뭘 하겠어? 제츠보. 다들 죽을 상에 힘들고 지쳐서 아주 힘들어하는데, 칸나즈키는 안 보이고, 카나리랑 토키와는 저 모양이고, 야가미도 다른 사람들이랑 안 어울리니까 너라도 챙겨야지."
이바라는 한숨을 내쉬며 제츠보의 어깨를 팔로 끌어안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나… 머리가 너무 복잡하단 말이야… 그보다 이 검정 스웨터는 어디에서 났어? 터틀넥인 게 묘하게 스티브 잡스 같아."
"그 사람도 죽었지 않아?"
"앗… 아… 이야기를 꼭 그런 식으로 끌고 가지 마! 칙칙해지잖아!"
"어딘가에서 나처럼 인격이 복사된 인공지능이 되어. 은밀하게 회사를 운영하고 있을지 모르지. 흐. 하기와라의 농담 말이야. 진짜 재미없더라. 사람 바보 만들며 웃기는 레퍼토리뿐이야. 본인만 재미 보는 게 어떻게 코미디언인데?"
"내 말이. 내 말이! 아까 그게 딱 하기와라가 할 만한 농담이었어! 잔인하고 민감한 주제를 막 다루잖아! 진짜 걔도 꿋꿋하다니까!"
"맞아. 물론 하기와라 쪽에서 나를 놀리는 건 내 불행을 어떻게든 웃어넘기고 새 출발하자는 의도가 담겨 있겠지만…"
"아니. 없을 걸?" 이바라가 일축했다.
"그래. 없겠지? 진짜 짜증 나더라. 돌아오면 한 대 쥐어박기로 했었는데…"
하기와라도 영안로에 있는 이상 생사를 알 수 없었다. 제츠보는 또다시 나나시를 떠올리게 되었다. 간헐천처럼 감정은 솟아올랐다. 제발 히무로에게 고분고분하게 나가서 별다른 해 없이 돌아오길, 카이다를 최대한 방해하다가 기회를 봐서 도망쳤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가 여자에 대해 미련을 가지는 게 돌아오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야 아주 미쳐버려도 좋을 것만 같았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여자 생각에 절벽을 기어오를 수 있다면 호색한이든 무엇이든 되어라. 돌아오기만 했으면…
카나리는 칸나즈키의 숙소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자 두 번을 더 두드렸다. 똑똑.
"야. 어떻게 됐어? 새 신체랑 한 번 접촉해 보겠다며. 잘 됐어? 그 수호령은 도착한 거야?"
왜 대답이 없지. 자리 비운 지 몇 분도 채 안 됐는데. 카나리는 답답함을 느끼며 문을 다시금 똑똑 두드렸다.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잠이라도 자고 있나? 얘 제멋대로인 건 이미 알고 있으니 별다르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자는 일이 헬로키티 인형과 연결되는 일에 필수적일지도 몰랐다. 결국 카나리는 주술과 민속 신앙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처지였으니.
"야. 잘 됐냐니까? 아. 답답하네. 이거 좀 열어라! 어떻게 되고 있는지 말을…"
카나리는 문 손잡이를 철컥철컥 돌리려다 철컥 열려버린 문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하라고."
순간 가슴이 철렁했으나. 이윽고 카나리는 본인 방의 탁자에 가부좌를 틀고 손가락으로는 원을 만든 칸나즈키를 볼 수 있었다. 망할!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잖아!
"왜 안 열어 줬어? 괜히 걱정했잖아! 휴… 그래서 된 거야. 안 된 거야?"
칸나즈키는 카나리의 말에 씨익 웃어 보였다.
"날 몰라보겠니?"
토키와는 식당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야가미에게 붙잡혔다. 보폭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토키와는 자신의 팔을 야가미의 두꺼운 손이 붙잡자 큰 불쾌감을 느꼈다.
비단 그것은 이성애자 남성이 동성의 접촉에 느끼는 생리적 거부감 때문이 아니었다. 야가미의 힘이 세기 때문이다. 그가 토키와의 부관을 자처한다고 한들 그것은 야가미가 굽혀주기 때문이며 그 자체는 야가미보다 못하다는 사실이 더더욱 체감되기 때문이었다.
"뭔데?!" 토키와가 눈을 크게 뜨고 질문하자 야가미는 순간 당황했지만,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이 할 말을 했다.
"당신… 알고 있는 겁니까?"
"뭘 말이야?"
"탈출이 끝났다는 말의 의미 말입니다! 아시는 겁니까. 모르시는 겁니까? 당신이 이해했다고요? 물론 그럴 수 있겠죠. 제가 해낸 일을 남들이 못하리란 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당신이 혼자 했을 수는 없어요… 어떻게 한 겁니까. 어떻게?"
토키와는 야가미를 노려보았다. 이제는 이 살인자마저도 나를 무시하는구나.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어쩌다가?
그토록 많은 이들이 서로 다른 원하는 것을 가졌고 각자의 목표를 위해 투쟁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아주 잠시 등한시한 채로.
그렇게 영안로의 세 번째 구역 안에서는 2시간 정도가 더 지났다.
나는 어딘가에 잠겨 있다.
누군가는 내 입을 통해서 말을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탑의 시간은 더 오리무중하다.
번개를 맞았던 나는 비관적이었고 사람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나한테 그런 것은 없었을 수도 있다.
어차피 탑 안에서는 다 의미 없다고 나는 알았다. 번개 맞은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 누구도 이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번개 맞은 나는 말해버렸다. 그게 카텟에게 진솔한 일일 것이며 어차피 다 의미 없기 때문이었다.
"아. 아. 다 들리겠지? 오랜만이다. 영안로에 있는 이들에게도 내 목소리가 들릴 테지. 시체 발견. 시체 발견이다. 따라서 현 시간부로 영안로와 탑 사이의 시간 간극을 해제하겠다. 지금부터 영안로와 탑의 시간은 똑같이 흐를 것이다… 너희가 할 일을 해라. 하하!"
물에 잠긴 듯 나는 의식에 잠겨 있다. 수면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동안 물이 가득 찬 귀에 먹먹한 음성이 들렸다.
"시체 발견…? 어떻게? 벌써?!"
"탑으로 가라. 하기와라 우시오. 네가 할 일을 해라."
누군가가 내 입을 통해 말을 했다.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이제 묶인 것이 풀렸다"… 그래서 나는 번개를 맞은 내가 되었다…
"나에겐 내가 할 일이 있다. 그것이 끝나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다. 나가서 다른 이들에게 힘을 보태라…"
"야. 네 말마따나 다 쓸모없으면. 결국 다 의미 없는 일이라면 왜 나를 시키는데? 왜. 그냥 여기서 쎄쎄쎄라도 하지?"
"그건 네가 선택하는 일이다. 포기하거나, 발버둥치거나."
"…좆까. 곧 보자고. 마유즈미. 히무로 너도. 좀 있다가는 제정신으로 보는 거다."
"으응…"
"하기와라 우시오. 아웃!"
탈출은 끝났다. 그 의미를 나는 알고 있었다. 애초에 시작한 적이 없고 오직 끝만이 있었음을.
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꿈에서 발버둥치듯이 애를 썼다. 어디에 힘을 줘야 하는지도 모른 채. 몸을 비틀었다. 깨어나야 한다. 또 총을 겨눌 수야 없다… 받아들일 수 없는 진실은 차라리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
마유즈미.
우리는 이 탑에서 나갈 수 없는 몸이야.
라 말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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