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페우스, 에우리디케, 헤르메스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것은 영혼의 신비로운 광산이었다.
조용한 은광석들처럼 그들은 광맥이 되어
어둠 속을 걸어갔다. 나무 뿌리들 틈에서
인간들을 향한 피가 솟아나
어둠 속에서 반암(班岩)처럼 무거워 보였다.
그 밖의 붉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위들도 있었고
껍질뿐인 숲들도 있었다. 공허 위에 걸린 다리와
그 커다란 잿빛의 눈먼 연못도 있었다.
연못은 풍경 위의 비오는 하늘처럼
까마득한 땅 위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부드럽고 느긋하고 충만한 초원들 사이로
단 하나 길의 창백한 줄기가
기다란 표백 천이 놓인 듯 나타났다.
바로 이 길을 따라 그들은 왔다.
파란 외투를 입은 날씬한 사나이가 앞장서 걸으면서
말없이 초조한 눈빛으로 앞만 바라보았다.
그의 발걸음은 씹지도 않은 채 길을
뭉텅뭉텅 물어뜯었다 ; 그의 두 손은
늘어뜨려진 소매 주름 사이로 무겁고 수줍게 매달려,
마치 올리부나무 가지에 장미 덩굴이 파고들 듯
그의 왼손에 뿌리를 박은 것처럼 들려진
가벼운 칠현금에 대해선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감각은 분열되어 있었다 :
눈길은 마치 한 마리 개처럼 앞장서서 달려갔다가는
뒤돌아서 왔다가 다시 멀리 내달려
다음 모퉁이에서 기다리며 서 있었지만,
그의 청각은 마치 냄새처럼 뒤처져 있었다.
가끔 그에게는 그의 청각이
이 오르막길을 내내 따라와야 할
다른 두 사람의 걸음거리에까지 미칠 듯 여겨졌다.
그러나 그의 뒤에 있는 것은 언제나 언덕을
오르는 그의 발길의 울림과 외투에 이는 바람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따라오겠지 하고 혼잣말을 했다 ;
아주 큰 소리로 말했기 때문에 메아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분명히 따라오고 있어, 그들의 발걸음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조용할 따름이야. 그가 한 번
고개를 돌려도 괜찮다면 (한 번 되돌아보는 일이
이제 막 성취의 순간에 있는 이 모든 일을
산산조각내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을 볼 수 있으리라,
그의 뒤를 묵묵히 따라오고 있는 그 조용한 두 사람을 :
(중략)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히무로 시라베는 순조롭게 다크닝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기체의 형태이니 더욱 거리낌 없이 마셔버리는군. 자기가 뭘 마시는지도 모르는 채로.
다크닝은 샤이닝이 짙은 자에게 우선적으로 흡수되며, 장기적인 영향은 미흡할지라도 일시적으로 큰 변화를 줄 수 있었다. 아무리 태양 같은 자일 지라도 일식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잘 통할 줄이야. 일시적인 변화일지언정 분명 그들은 전례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인공지능년은 원래의 모습 데이터를 덮어씌우면서 힘까지 약화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얼마나 약해졌는지는 힘센 자들을 붙여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영구적인 손상을 일으키기에는 분명 멀었다. 그러나 균열의 씨앗 정도야 심을 수 있겠군. 한 번 깨진 도자기는 아무리 붙여봐도 깨지기 쉬운 법.
너는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불안과 트라우마에 휘둘리게 될 것이다. 아무리 억누르려 해도 내면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그 분통을 이길 수는 없을 걸. 본래 감정을 잘 조절하는 인간일수록 인위적인 분출에 약한 법. 다크닝 농도를 조금 더 올리는 편이 재미있겠어.
패트리샤는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너는 나에게 억만금을 벌어 달라 요구할 수 있어."
"필요 없어. 억만금은 나한테 있을 때도 별 쓸모가 없었거든."
"네 편의를 보는 종이 돼라 요구할 수도 있지."
"누가 친구를 종으로 삼아?"
마유즈미는 그 문제에 있어 한눈을 팔지 않았다. 어떻게 타이르거나 다른 쪽으로 돌릴 방도가 없다는 것을 느꼈음에도, 나는 납득을 질질 끌었다.
"모든 것을 달라는 건. 무슨 뜻의 말이지?"
"…말 그대로."
정말 미치겠군. 머리가 지끈거렸다. 당연히. 그녀는 사적인 관계의 진전을 암시하고 있었다. 너의 모든 것을 다 달라 따위의 말은 연인 관계에서나 쓰임이 적합했으니. 그렇다고 하여 내가 그녀와 더 나아갈 수 있는가?
아니.
"미리 말하자면 나는 내가 가지지 않은 것을 줄 수 없어. 마유즈미. 네가 원해서 요구하였는데 나는 주지 못할 수가 있다는 뜻이야."
나는 사랑하지 않고, 애착이 없고, 누구도 연민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사랑하고 애착을 가지며 연민하는 이들을 높게 평가했다. 나는 그들을 선망하기까지 했다. 필부들은 곧잘 자신의 인색을 여유 없음으로 정당화하고자 한다. 내가 그럴 수 있다면 얼마든지 성자가 되었으리라는 자들. 그러나 마지막 동전 하나를 걸인에게 줄 수 있는 자들은 실존했다.
내가 그 걸인이었으니까.
값싼 자선이 아니고 허영심도 동정심도 아니다. 내가 알던 한 여성과 마유즈미는 순수한 우정을 내게 주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감히 알았다. 마유즈미가 내게 주고 있는 사랑이란 얼마나 내게 과분한가에 대하여.
정말이지 컸다. 그녀는 결코 화수분이 아니었다. 귀퉁이서 뜯어낸 부스러기 따위가 그렇게 클 수야 없었다. 그녀가 가지고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사랑이 내게 쏟아지고 있었다. 내가 사명도 숙명도 전부 내던지고, 오직 그것 하나만을 받기 위해 짐을 다 버릴지언정 다 받아들일 수 없을만치 크다. 그만큼 내 마음은 편협했다.
나는 마유즈미에게 얼마나 못할 짓을 하는가? 나는 장님이 아니었다. 그녀가 보내는 모든 신호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모든 것들이 친구 이상을 가리키고 있는데. 나는 그 마음에 보답할 방법이 없었다.
"…나에게는 과업이 있어. 마유즈미. 그 과업이란 나같이 미약한 존재가 이루어내리라곤 생각도 할 수 없는, 거기에 일조하는 것마저도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이야."
"…어떤 대단한 일을 하시길래. 나는 뒷전에 놓으시는 건가요." 뾰로통한 투였다.
"변질된 세상을 구하는 일이지… 사람을 구하는 일에 끝은 없어. 기복도 심하며 진정한 의미의 개선마저 없어. 하지만 환경 자체를 바꾼다면, 모든 게 나아질 거야. 터무니없는 일로 들릴 테지만, 나는 그것을 위해 살고 있어."
그 과업은 사실 재단이 내게 심었다. 나는 그들이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그 과업을 행할 뿐이었다.
재단의 몰락은 부수적인 일이었다. 나는 나를 기형으로 만든 이들에게 복수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그들은 단체이다. 한 명 한 명을 전부 찾아내 죽이는 건 살육일 뿐. 나는 살육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가 있다면 바로 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몇 년을 들여도 불가능했던 일을 해내보이고, 따라서 그들이 한심한 머저리들이었음을 증명하는 일이 될 테니.
"세상을 구할 거야? 정말?"
"정말이야. 그 과정에 인간적인 감정이 들어찰 수는 없어. 내게는 그런 것이 허락되지 않아. 분명 그래야만 하고, 지금까지 그래왔지만…"
내 팔은 지금까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가 나를 끌어안은 동안 영영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가 없었다. 보통은 항상 무언가가 있다. 텍스트 보드, 펜, 혹은 총. 언제나 할 일이 있고 쥘 것이 있었다. 허나 마유즈미가 품에 있는 이상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가능성. 나는 결코 장님이 아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내 눈 앞에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았지만, 그 일은 그리기만 해도 내 안의 억제력에 가로막혀왔다.
"너는 애착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비를 가져서는 안 된다. 누군가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
팔이 움직였다. 서서히.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이끌렸다. N극은 S극을 향해 간다. 내가 가지지 않은 것을 가진 그녀에게 나는…
"나는 반푼이인지라… 말살되지 않은 것들이 곧잘 고개를 들어."
나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입 안에서 "으에엑"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왜 그 소리를 다시 듣고 싶지? 나는 가학증 환자가 아니다. 그런데 왜 그녀를 놓아주고 그녀가 나를 타박할 때쯤 다시 팔에 힘을 주어. 그 맥 빠지는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어 지는 거지?
"히무로오… 나 숨 막혀…" 그러나 나는 그런 바보 같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것이 건전하였다. 팔에서 힘을 빼자 마유즈미의 타박이 날아왔다.
"아파! 이 바보야. 으! 터지는 줄 알았단 말야!"
……나는 보통의 윤리의식과 정신을 가졌고,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 가혹한 짓을 저지르는 부류가 아니다. 그러니 다시 팔에 힘을 줄 이유가 하등 없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야무진 주먹질을 견뎌냈다.
나는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해야 했다. '마유즈미. 너는 나에게 부담이 되고 있어.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 수가 없고, 나를 끝까지 따라오다간 언젠가 네가 죽을 거야. 나는 멀쩡하겠지. 그러나 너는 죽기 싫잖아? 카텟이라고 따라오려 하지 마. 우리의 카텟은 살인 게임에서 살아남고 또 탈출하기 위한 카야. 나만의 터무니없는 카에 너까지 휘말리게 할 순 없어'.
"너는 단절되어야 한다. 차단되어야 한다. 고립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되돌려주었을 뿐이야."
"…치. 웃겨 진짜. 내가 안아주니까 너도 안아준 거야? 그렇게 오는 추파마다 다 받아주면 안 돼."
나는 마유즈미의 눈을 보았다. 약간 분개한 듯하지만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묻어 나왔다. 내가 안아주었다고 하여 마음을 다 열었다고, 내가 사람이 다 되었다고 느끼는 것일까? 적절하지 않았다. 내가 왜 껴안았는지 나도 모르는 이상 껴안음은 정서적 접촉이 아니었다. 그저 내 발작에 불과했다.
순간 영안로에서의 작용이 내게 무언가 악영향을 미침을 자각했다. 살면서 내가 감정 발작을 일으킨 것이 수 차례는 되었다. 개중에는 메리 앞에서 눈물을 흘린 것처럼. 세기가 강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한 번 내 몸을 뒤흔든 뒤에는 해일처럼 조용해졌을 텐데. 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걸까?
"절대 녹지 않는, 부서지지 않는, 약해지지 않는 정신을 유지해라. 가장 효율적인 길만을 생각해라. 그게 너의 역할이다."
그 변수를 만들어낸 원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반은 감사고 반은 책망이었다. 그녀를 만난 이래 나는 변했다. 그것은 나 개인에 있어 바람직하고도 계속 고대해 온 일이었으나…
"네가 나를 사람으로 만들고 있어. 마유즈미. 아직 한참 멀었지만… 달팽이보다도 느리지만, 분명히 나아지고는 있어…"
"그런데 아무리 세뇌하고 교육하고 개조해도, 한 로가 자신의 처지에 만족한다면 어떻게 될까? 초고교급 재능 몇 개로 만족한 채 자신의 삶을 찾으려 잠적한다면?"
나는 도무지 그럴 수 없고, 그래서는 안 되는 몸이었다.
"너만 마주치지 않았다면 나는 영영 불행히 살았을 텐데. 하필 너를 만나서 전부 틀렸어."
"…어. 별말씀을?" 마유즈미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내가 탓을 하는 것인지 고맙다는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듯했다. 사실 나도 그 점에 있어서는 도무지 확실하지 않았다.
"다시는 소중한 것들을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나 카텟 없이는 어떤 대업도 이룰 수 없어… 그러니 언제나 다 잃고 혼자 남겨지지.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도와줘… 아무나… 배신자들이 우릴… 이렇게 끝날 수는… 아아. 싫어… 제발.
그 자리에 없었다. 나는 결국 지키지 못했다. 그 걸물. 구설수가 많을지언정 나의 구원자이자 기관 최고의 지성이. 그렇게 쉽게…
그녀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다. 몸부림을 치려 애쓰는 것 같았지만 팔이 의자의 팔걸이에 묶여 있었다. 파지직거리는 소리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라베!"
죽을 위기에 다다른 이의 비명이란 말 그대로 성대를 찢는 것이다. 과도한 후두 점막의 진동. 목이 말 그대로 부어 오르고 피가 고이면 목소리가 쉬는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의 목을 찢을 수 있다.
눈앞이 더 어두워졌다. 마유즈미의 모습은 오비이잠 그것 이외는 흐릿했다. 왜 그렇게 느껴질까? 기분 탓인가? 분명 암순응이 되었는데 아까보다 더 앞이 보이지 않았다. 주변이 모두 어두웠다.
"아까 말했지. 내 곁에 너희가 있으니 잘못될 거라고… 그건 진심이야. 너희도 잃고 싶지가 않아. 네 비명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아. 제기랄. 아니야… 아니야. 다 허깨비다…"
"그들을 어떻게 구원할 텐가?"
또 그가 보였다. 늘 같은 말만 하는 놈. 그자가 눈앞에 선명했다. 꺼져. 꺼지라고. 너는 이 탑에 없다. 내 카텟을 해칠 수 없단 말이다. 당장 꺼지라고.
다 죽여버렸으면서. 죽이거나 자유를 빼앗아 부렸으면서, 내게서 더 빼앗을 게 남아 있나? 차라리 나를 죽여라. 죽여 봐. 내가 마지막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면 내 목이라도 주겠다. 그럴 수 없다면 가란 말이야.
"가라고…! 또야… 허억… 또야. 손에서 빠져나간다…"
더는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멍해지고, 불안이 나를 엄습했다. 또 잃으란 말인가? 또? 아직도 잃을 게 남았다. 배우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같은 돌부리에 스무 번 넘어지는 천치였다. 차라리 혼자 뛰어들어 영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또 내 곁의 이들이 죽는 것보다야, 희생마저 없는 편이 나을지도…
잃고 싶지 않았다. 내 팔에 힘이 들어갔다.
"어? 히무로. 잠깐… 으에에엑…"
시라베. 시라베. 그 울부짖음이 너무 잔인하게 현실적이라 나는 이를 꽉 악물었다.
다 죽을 거야.
"다 죽을 거야. 나 때문이야. 나 때문이야… 다 죽어나간다. 옆에 있기만 해도 그렇게 되어버려. 너희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러니 나가… 영안로에서 나가. 나 혼자서 해낼 테니까…"
내가 가는 길마다 사람이 죽었다. 희생의 나날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소중히 여긴 순간 그들은 저주를 받는다. 곧 죽게 되는 저주…
다시는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옆에 있는 이들. 마유즈미와 하기와라 우시오가 필요했다. 그들은 소중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과 멀어져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그들은 언젠가 나 때문에 죽으리라. 그러니 고통받게끔 빚어졌노라. 나는 그 불합리함 앞에 눈을 질끈 감았다.
"나가라고. 당장… 나를 두고 나가라고…"
어둠 속에 버려져도 좋았다. 어차피 달라질 것 없었다. 나는 그 속에서 꿈틀대나 수렁에서 벗어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잃을 칩이 없는 것이 차라리 편안하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 숨 막혀. 이 바보야!
나는 속으로 그렇게 소리쳤다. 숨이 막혀서 겉으로 소리가 안 나왔기 때문이다. 힘 왜 이렇게 세…! 나… 남자애들은 다 이렇게 센가…? 몸을 못 움직이겠어… 기분이 왜 이러지? 히… 힘이 풀린다…
나는 버둥거리려다가 말고 그만 온몸을 축 늘어뜨렸다. 뭐라고 해야 할까. 푹신한 베개가 자신을 누르고 있을 때 느끼는 묘한 압박감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히무로의 온몸은 딱딱했지만 목침도 은근히 편한 이치와 같이. 묘하게 안정이 된다고 해야 하나…
좀 이상한 일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우선 저항하지 않았다. 히무로는 일단 바보가 아니고 하는 모든 일에 이유가 있는 사람이다 보니, 갑자기 왜 날 끌어안았는지 이유가 있던가 아니면 내가 그 이유를 알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뭐 그냥 멍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당시 히무로가 날 끌어안는 순간을 생생히 느꼈다. 어깨를 감싼 팔. 떨리는 목울대(우와 진짜 남자애들은 툭 튀어나와 있네…). 꽤 낮은 체온. 그리고 무취(無臭).
나는 문득 느꼈다. 히무로의 품 안에서는 어떤 냄새도 나지 않았다. 나도 엄마랑 아빠가 그다지 안아주지 않았다 보니 사람 냄새에 대해 아는 바는 적었지만, 왜인지 그 품 안에서 나는 서글픔을 느꼈다. 누구를 위한 서글픔인지는 몰랐다. 왜 그에게서는 살냄새가 안 날까? 그것도 나쁜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버린 걸까? 하지만 왜?
설마 히무로의 품에 누가 안길지라도 살냄새를 맡지 못하게끔? 이질적임을 느끼고 히무로가 원래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음을 되새기라고 살냄새를 지운 걸까? 진짜 그 사람들도 어지간히 나쁜…
이익… 나는 생각을 하다 말고 팔 안쪽에서 몸을 꾸물거렸다.
"히무로… 슬슬… 나 숨 막히는데…"
나는 멍해지는 와중 열심히 몸을 버둥거렸다. 덕분에 숨통이 좀 트였다. 히무로의 팔이 조금 풀린 것이었다. 나는 숨을 두어 번 몰아쉬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히무로는 팔을 풀지 않았다.
"빨리 나가. 마유즈미… 어서. 어서."
히무로는 고개를 푹 숙였다. 히무로의 팔이 계속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팔이… 힘세고 다부진 팔이… 아. 내가 왜 이러지? 계속 안겨있고 싶어 지네…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무던히 머릿속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음심을 억눌렀다. 말짜처럼 두근두근 사심이나 채우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괴로워하면서 우리더러 나가라니. 안 나가. 못 나가. 너 우리 좋아하잖아. 나 좋아하잖아. 우리가 이렇게 재밌는데!" 나는 항변하듯 소리쳤다.
"당연히 그렇지. 그래서 나가라고 하는 거야. 적어도 탑은 여기만큼 위험하지 않잖아. 총은 나에게 줘. 내가 다 해결하고 나갈 테니… 나는 분명히 금발이 섞인 이름 없는 남자를 봤어. 그를 저지하고 밖으로 나갈 테니까 너희는 먼저 가 있으라고…"
"거짓말쟁이. 맨날 거짓말이야. 너 나한테 왜 그래?"
내 입이 샐쭉 튀어나오다 못해 안쪽으로 말렸다. 이 손 많이 가는 녀석이 아까부터… 거짓말하지 말라니까 자꾸 빈 말이야. 그대로 내가 아 그렇구나 하고 넙죽 나가면 힘들어할 게 뻔히 보이는데. 나 혼자 쉬라고?
"우리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잖아. 우리 걱정해도 돼. 나도 너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니까. 그러니까 나도 네 곁에 있을 수 있는 거야! 우리는 너 걱정 안 돼? 너는… 걱정받으면 안 되는 사람이야? 아니잖아…"
황소고집에 소힘줄. 자기가 고된 일을 다 해야 한다고 정말 믿는 사람. 그게 히무로라는 사람이었다. 그 점이 멋있기도 했지만, 이미 정해진 문제에 고집을 부리니 답답하게 느낄 수밖에! 응?!
"물론 너희도 나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너희를 더 걱정해."
"아닌데? 내가 너를 더 걱정하거든?"
"내가 더 걱정한다니까."
"내가 더 걱정한다니까!"
뭔가 애들 싸움이 됐지만, 우리는 애들이었으니까 애들 싸움을 해도 되겠구나 싶었다. 히무로와 나는 세상을 구하기보다 일단 정답게 옥신각신하는 게 더 어울리는 나이였다.
"틀렸어. 마유즈미. 너는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봐야 할 것들을 모르잖아. 너는 그저 내가 얼마나 지쳤을지를 눈대중으로 쟀지만 나는 위협의 정도를 자로 재듯이 알아. 그러니 내가 너를 더 걱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야."
윽. 얘는 어린애 안에 어른이 들었어… 그러나 히무로의 말이 옳았다. 나는 히무로가 뭘 상대해야 하는지 몰랐다. 어떤 사람인지는 아까 들었으나 마주친 적도 없었고 어떻게 맞설지도 몰랐다. 그러니 내가 다 해결해 줄 거라고 말하면 그건 거짓말이 될 터였다.
"그래도 내가 너를 더 걱정해!"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거야? 대체 근거가 뭐지?"
"근거… 근거는…"
"너의 그 어떤 근거도 너희가 겪을 일을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는 될 수 없어. 마유즈미. 받아들여… 내가 옳아. 너희 모두 나가야만 해."
그렇게 나오니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대는 걱정, 슬픔, 공감 모두를 히무로는 밀어낼 것이면 나는 그를 설득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불가능할 터였다. 그러나 사실상 떼를 쓰다시피 하는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도 없는데…
나는 콧김을 작게 내뿜었다. 나는 각오를 했다. 내가 히무로를 말싸움으로 이기지 못하겠는 이유는 히무로가 나보다 똑똑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진짜 진짜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쭙잖게 거짓말을 하기보다. 그냥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우기기로 했다. 내가 진짜 맞는데. 그냥 그것만 말하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한가 싶기도 했다.
다른 미사여구도 뭣도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할 말은… 히무로가 부정할 수 없을 만한 분명한 사실을 제시하면 되었다. 그럼 저 황소고집도 납득하겠지…? 그렇지…? 왜인지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데… 아까부터 묘하게 덥기도 하고… 머리도 어지럽고…
"그… 근거는…"
아… 뭔가 떨린다… 아까부터 묘하게 주변도 더 어둡고… 히무로밖에 안 보이니까 기분이 묘하잖아… 그래도 이렇게 말하는 게 맞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 말곤 무슨 답을 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이게 맞을 걸? 그야. 나는 감성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히무로는 이성만 들이대니 내가 불리한 거 아닐까…
나는 은근슬쩍 히무로의 등 뒤로 내 팔을 둘렀다.
"…네가 잘생겼으니까."
"뭐…?"
히무로가 미간을 찌푸리며 목을 앞으로 뺐다. 내가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고 진심으로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찌나 진지한지 당황하는 귀여운 모습도 안 보였다. 아니… 잠깐… 히무로가 보기에는 나 진짜 괴짜로 보이는 거 아닐까? 어쩜 좋아…
그제야 나는 내가 너무 급작스럽게 말해버렸음을 깨달았다. 사실 '난 몰라!' 라며 얼굴을 가리고 꽁무니를 빼고 싶었다. 히무로가 요구한 바와 같이 영안로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속내를 들킨 이상 이제 돌아갈 방도는 없었고…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가야만 했다.
얼굴에 가면이라도 쓰고 싶어… 나는 히무로의 품 안에 코를 박고 계속 말을 이었다.
"네 좋은 점을 잔뜩 알고 있으니까. 늘 뻣뻣하다가 단 걸 엄청나게 좋아하는 의외의 모습이 귀엽다던가, 몸이 단단하고 다부져서 만져보고 싶다던가, 그 와중에 볼은 말랑거리고… 같이 있으면 편해지고, 가끔 간질간질하고… 나한테도 잘해주고…"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내가 최소한의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만 말해야 했겠지만, 왜인지 당시의 나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몸이 간질간질거리는 느낌… 옴싹옴싹하게 조금 위험한 느낌. 나는 히무로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여전히 사고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한 미간의 찌푸림과 무표정이 남아 있었다.
아… 어쩜 좋아. 진짜… 나 환멸 당했나…? 원래의 나라면 이 시점에서 괜히 말 걸어서 미안하다며 쏜살같이 도망쳤을지도 몰랐지만, 왜인지 당시의 나는 묘하게 용기가 넘쳤고 될 대로 돼라 하고 반쯤 자포자기해서… 이윽고 할 말을 미련 없이 전부 토해내게 되었다.
"내가 왜 너를 더 걱정하냐고? 왜 네가 가는 길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따라가려 드냐고…? 여기까지 말했는데 모르겠다는 거야. 바보야…? 이쯤 되면 좀 알아주란 말야…"
나는 조금 섭섭해져서 히무로의 등에 손톱을 올려 긁어댔다. 평소에는 그렇게 냉철하면서 이런 눈치는 꽝인가 싶었다.
"사심이 있어서 걱정이 된다고 하면… 그런 건 사소할 뿐이라고 할 거야?"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거 진짜 용기 많이 내서 한 말인데… 설마 그냥 조용히 묻어버릴 생각은 아니겠지?
"아. 사심… 사심이라…" 히무로는 중얼거렸다.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냥… 그런 거야. 그럼 어떡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횡설수설했지만 나는 히무로가 어떻게든 느낌을 이해하리라고 믿어 보았다. 말 그대로 그런 느낌인 거다…
"…마유즈미. 잠깐 받아들일 시간을 줘. 나는 그런 대상이 되어본 적이 굉장히 적어. 그래서 그 사실을 이해하는 것조차 익숙하지가 않아."
"마지막에 구애를 받았을 때는 어떻게 했는데?"
"네가 아무리 날뛰어도 나는 너에게 아무런 감정도 가지지 않을 거고, 네 안에서 너라는 사람은 전혀 특별하지 않으며 네 행동은 해를 끼치기 위한 행위일 뿐 고결한 감정 따위는 없다… 고 말해줬지."
"아. 맞다. 후루미나미도 너 좋아했구나…"
문득 걔는 뭐 하고 지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걔가 나 질투하는 건 아니겠지? 솔직히 걔랑 싸우기 싫은데…
"그녀는 내게 사심을 가진 게 아니야. 그녀는 나만큼이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해. 단지 나를 유혹해 피해를 끼칠 생각뿐이지. 그래서 내가 그녀를 거부하는 거야."
"…그럼 나는?"
히무로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내 안에서는 북이 울렸다. 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순간 내 숨이 멈추었다. 눈은 몇 차례 끔뻑거리게 되었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히무로의 그 말을 온전히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해는 했다. 히무로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뭐… 누가 좋아해 달라고 했나요?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중얼거림을 삼켰다. 상관없어… 진짜 상관없어.내상 안 입었어. 놀라지도 않았고. 애초에 그렇게 빨리 날 사랑해 주리라고는 추호도 생각 안 했다 뭐. 상처 안 입었다니까. 정말이야.
그러나 한편으로는… 차였어! 차였어! 차였어…!
"아직은 그래… 하지만 너는 나를 사랑하지… 그러니 네 말이 맞아. 네가 나를 더 걱정해."
그리고 히무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차였어! 차였… 어라. 잠깐. 아직?
"영안로에서 나가라고 부추겨 봤자 너희는 그러지 않겠지… 하기와라 우시오는 내게 사심이 없겠지만 네가 여기에 남은 이상 그도 함께 가야 해. 신상에 위협이 없다면 말이야. 마유즈미. 네가 이겼어."
"아직? 아직이라 했지. 히무로!"
"그래. 네가 제대로 들었어… 사실 나는 네가 가진 것이 이성적 감정이 아니라 우정과 동경. 일종의 특별시라 생각하지만 그건 내 의견일 뿐이지… 안 그래?
"…씨. 알면서 굳이 말하고 있어. 네가 나한테 가지는 게 그건가 봐? 우정. 동경. 줄여서 우동."
짠. 히무로랑 같이 지낸 지 꽤 돼서인지. 그런 간단한 문제 정도는 나도 풀 수 있었다. 정곡을 찔린 히무로의 귀한 표정을 기대한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할 말을 이어가는 그를 보며 아쉬움을 느꼈다.
"아직은 그렇다는 말이야. 마유즈미… 하지만 내가 할 수 있었다면. 나는…"
히무로가 말을 하다 말았다. 그동안 나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다. 어쩌면 우리 모두 생각하고 있었을지 몰랐다. 마음속의 북을 두구두구두구 두드리며 나는 내가 품은 생각에 대해 생각했다.
히무로는 사실 상냥하다. 우리를 내치려는 모습이 매몰차게 느껴질지라도 그건 다른 이들을 생각한 일이다. 히무로는 자신이 세상에 짓눌리고 있기에 우리는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히무로는 자신이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여긴다… 너무 많은 짐을 가지고 불편한 것에 익숙해져.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히무로는 거리낌 없이 짐을 지고, 신음하면서도 그걸 내려놓을 생각을 안 한다… 그래서 걱정이 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도움을 내치니까…
누구든 좋으니 어른이 히무로를 도와줘야 했다. 이건 어른들이 할 일이니 너희는 공부나 하라고 말해줘야 했다. 그런 어른이 주변에 아무도 없었던 걸까? 히무로 성격이라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나섰겠지만, 그래도 너무하잖아… 히무로도 사람인데.
그러나 차마 히무로더러 사명을 포기하라 말할 순 없었다. 히무로 본인을 불행하게 만들지언정 꿈은 꿈이고 의미는 의미다. 만약 히무로가 가치를 부여한다면 세상에는 가치가 있었다.
그러니 내가 해야 하는,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란 네가 위험하니 그 일에 그만 매달리라가 아니라, 내 두 팔 걷어붙이고 자. 그럼 나랑 가자! 라 하는 일이었다. 다 덤비라지!
"나는… 너를 사랑했을 거야. 이전에 내가 누군가에게 구애했을 때.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지. 네가 나에게는 남동생처럼 느껴지며, 네가 지금 가진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고. 포상 의지와 동경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그 말대로였어. 내겐 아직 그럴 역량이 없어. 기능적으로 불가능하고. 또…"
"내려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명 때문에?"
"맞아. 그러니 마유즈미. 지금 당장은 대답할 수 없어. 그러나 언젠가는… 언젠가는 가능할 거야. 그러니까…"
"기다려 줘?"
히무로는 몇 초 몸이 굳었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다리지 뭐. 원래 먼저 좋아하게 된 사람이 지는 거라고 하니까… 그치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히무로를 포기 못 하는 이유를 직관적으로 이해시키지 못하면. 얘는 계속 나가라 나가라 같은 말만 반복했을 걸?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밀어내고, 친구는 돼도 따라가진 못하게 하고, 사랑은 받되 사랑할 수 없으니 기다려 달라니… 뭔가 날름 속여 먹히는 기분인데. 그래도 어떡해… 내가 졌는데.
"대신 내 옆에서 기다릴 거야. 그것도 못하게 하면 너는 얌체야."
히무로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원래 히무로는 남을 빤히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다. 아마 그건 남을 빤히 볼 때 보통 사람들은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히무로의 생각대로 말하자면… 왜 시선을 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거지? 보는 행위 자체에는 아무런 의도도 없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무엇을 할지 관측할 뿐이야. 어쩌구 저쩌구…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
뭐라고?
'마음을 주고 싶어. 어떤 방식으로라도 너에게 답을 주고 싶어. 그런데 도출해 낼 수가 없어…'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으응…? 히무로 입이 안 움직이는데 어떻게 말이 들리지? 환청인가?!
나는 굼벵이고, 천치고, 염치도 없는 배냇병신이었다. 기다리라고? 그처럼 이기적인 지껄임이 내 입에서 나올 줄이야 몰랐다.
나는 그것을 거부해야 옳았다. 그녀가 점진적으로 나에게서 정을 떼게끔 유도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고, 나는 사랑을 받고 싶다는 나의 이기심에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마유즈미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으면서, 진짜를 줄 수 없으면서 웬 유보이고 기다림이란 말이지?
게다가 마유즈미가 내 약점이 되리라는 본래의 갈등은 그대로였다. 마유즈미가 나를 걱정하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했다. 사랑. 그것은 모든 좋은 것과 나쁜 것의 뿌리였다. 그녀의 마음은 이해가 되나 그것은 반 객기였다. 내가 어디까지 갈지라도 따라가리라는 맹목적인 일이었다. 그 정열에 타오르는 것은 내가 타이를 일이 아니라지만, 그 위험을 아는데도 만류하지 않는다면 그 과오는 나의 것일 텐데…
피해야 했다. 외면해야 했다. 내 사적인 감정을 배제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인지하지 못한 영안로 속 작용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일차적인 탓은 나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수치심 없고 이기적이로다.
"아버지의 낯을 잊었어. 나는 반푼어치도 안 되는 흉물이야… 마유즈미…"
"…그러지 마. 바보야. 내가 반한 남자가 흉물이면. 나는 뭐야? 보는 눈 없는 사람이야? 아니거든. 내가 보는 너는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 소년이야. 아니라고 해 봐… 몇 번이고 말해줄 테니까. 그만 두려움은 떨쳐 내. 안 좋은 생각 말고… 나랑 같이 가자."
"그래야 할까."
"당근이지. 원래 누나한테는 의지해도 되는 거야. 히무로.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어… 잔뜩 울어도 돼. 내가 다 울 때까지 안아주고 있을게."
"안 울어. 그보다… 분명 누나라고 불리는 일을 선호하지 않았을 텐데."
"네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주는 거야. 누나한테는 그래도 되잖아? 엄마가 될 수도 없고… 그리고 뭔가. 네가 와락 안겨 준다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마유즈미의 토닥임은 멈추지를 않았다. 나는 그녀가 어딘가 묘한 관계에 눈을 떠간다는 생각을 했다. 이게 외도의 길은 아니겠지만은…
"나는 약한 모습을 보여 줄 생각이 없어. 그런 바람은 접는 편이 나아."
"치. 누가 뭐래? 히무로. 정말이지 너는… 으음…? 잠깐만. 히무로."
내 등을 팡팡 두드리던 마유즈미는 문득 고개를 뒤로 돌렸다. 기이한 낌새를 눈치챈 나는 그녀를 두르던 나의 팔을 풀었고, 그러자마자 마유즈미는 몸을 벌떡 일으키고 홀스터에서 자동권총을 뽑았다.
"정지! 너. 뭐야?"
"마유즈미…? 누가 있어?"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감각이 저토록 발달했고 나는 퇴화한 것일까? 청각과 직감까지 전부 열어 그녀의 총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자 했으나. 나는 여전히 무엇도 느끼지 못했다.
"하기와라면 대답해… 아니. 애초에 천장에 붙어있는데 너일 리가 없겠구나? 애초에 사람이 아닌가…? 일단 뭔가 이상해 보니까 쏘고 보겠다. 이의 없지? 하나. 둘."
총알을 아끼라는 등의 소리는 하지 않았다. 총잡이가 쏘고자 결정한 곳에는 쏴야만 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게 사족을 붙이는 일이 아니라면, 총을 쏴 맞추는 일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는 엉터리 건달들이 할만한 일이 아니라면 나는 그녀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래. 그거야. 마유즈미. 그것이야말로…
"나는 내 마음으로 쏘리라… 얍."
…마음으로 쏘는 일이지. 탕! 잔뜩 긴장한 내 고막을 격발음이 크게 뒤흔들었고, 무언가가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곧 얼얼해진 귀로도 들을 수 있는, 무언가가 철퍽이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으악! 이거 뭐야!" 마유즈미가 소리쳤다. 멀리서 하기와라의 외침이 따라왔다.
"야야야야야야! 뭔 일 있어?! 뭔데!"
검었다.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고체와 액체 사이에 있는 정도의 점성을 가졌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도 특출 나게 검었다는 것이다. 빛을 모조리 흡수해 입체가 아니라 평면처럼 보이는 염료처럼. 그것은 더 이상 더할 것이 없는 검정이었다.
"히무로. 이거에 닿지 마. 알았지? 닿아도 좋을 게 전혀 없어. 감이긴 한데… 아무튼 닿지는 마!" 마유즈미는 확신에 차 있었다.
"동의해… 떨어지지. 그 편이 나을 것 같아. 하기와라 우시오. 이의 있나?"
"없어! 없어! 도망가자! 아니 잠깐 좋은 시간 보내라고 비켜 줬더니 그새 사고를 치냐. 너희는!"
"사고 친 거 아니야! 뭘 쐈는지는 몰라도 나는 엄청 잘 쐈어. 제대로 쐈어! 정말이야!"
"아마 정말일 것이다."
나는 그들과 함께, 왜인지 덜 어두워진 동굴의 어둠을 향해 달려 나갔다. 영안로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이름 없는 남자를 찾아서. 그러는 와중 조금의 확신도 없었다. 나는 분명 무언가를 잘못했으나 바로잡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감정을 정말 되찾는다면 그녀의 마음에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애초에. 되찾은 채로 대업을 이루는 게 가능할까. 나는 뒤늦게 알아챘다. 방금 나는 저울에 올려야 했다. 나의 행복. 그리고 대업. 사람과 영웅. 그것은 같고도 달랐다. 하나만을 선택해야 했다. 유보해서는 안 되는 그 당시만의 선택이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대답을 회피하고, 행복을 선택할 역량 없이 차일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만한 바보짓이 없었다. 약해빠진 머저리 놈 같으니…
역시… 샤이닝의 감응에는 캐롤. 다크닝의 감응에는 마유즈미다. 이건가? 빨리도 뚫고 나왔군.
그러나 저런 태도는 장기적으로 히무로 시라베에게 나쁜 일만 불러일으킬 거야. 그는 전혀 트라우마를 극복해내지 못했어. 자신이 두려워한다는 생각마저 없이 두려워하고 있으니. 상실에 극도로 취약하지. 얼마 지나지 않아 툭툭 털고 일어날 걸 생각하면, 그것에 면역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름 없는 남자 쪽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자. 한 번 볼까…
제기랄. 캐롤 씨 보고 싶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말은 안 한다. 한 번으로는 만족 못 해. 영영 살아나야 해.
"머리카락 땋아주고 싶다… 노래 듣고 싶다… 그 풍만한 걸 손으로 꽉 쥐어보고 싶…"
나는 고개를 저어 상념들을 떨쳐버렸다. 정말 왜 이러는 거지? 이상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정확한 시점을 정하자면, 머리카락의 불이 꺼졌을 때부터 내 생각이 조금씩 이상해졌다.
동굴 안을 나아가던 와중 나는 머리카락 묶음의 빛이 서서히 꺼져가는 것을 보았다. 순간 배터리가 다 되었나? 싶었지만 애초에 초능력에 배터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이제 보니 매사를 기계로 보는 게 내 버릇이구만… 새로운 걸 알았다.
자세히 보았을 때. 빛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 묶음 주변이 어두워질 뿐임을 알게 되었다. 광원 앞에 암흑이 모이니 주변 환경과 얼핏 똑같아 보이는 것이지, 분명히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어렴풋한 흐름. 마치 철가루가 둥둥 떠다니는 방 속을 자석을 가진 채로 거닐다가, 자석 안으로 철가루가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머리카락은 빛을 잃어갔다.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정작 멈출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머리카락의 빛이 꺼짐과 동시에 자꾸 야한 생각이나 충동들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는 것이다. 영안로의 세 번째 구역은 정신공격을 하나? 그래도 그냥 생각만 피어오르는 거면 평소의 나보다 조금 심할 뿐.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어디까지 가야 하지? 등 뒤에서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그들도 분명 나를 따라오고 있다. 도망쳐야 했다. 그 미약한 오버룩과 딕테이트마저도 머리카락의 빛이 꺼진 지금은 작동할지 어떨지가 확실하지 않았으니.
그러니 더 빨리 걸을 수밖에 없었다. 캐롤 씨를 다시 봐야만 했다. 다시. 다시…
멀었어… 아직 멀었어…
중간중간 코드에 쓸데없는 말을 섞어서. 아직은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다… 바보. 내 옆에다 실타래를 던져두면. 내가 못 쓸 줄 알았나 보지? 몸이 굳은 채로 남겨질 거라고?
아니야. 아직은 아니야! 나. 아직 살아날 수 있어! 다시 깨어날 거야. 다시 살아남을 거야!
지금까지 계속 그랬잖아. 기억이 죄다 지워지고 이용만 당해도 그자들에게서 벗어나긴 했잖아. 결국 난 무적인 거야! 누가 날 밀어붙여도 나는 다시 일어날 거야! 응. 그래! 포기 따위는 하지 않아! 나는… 나는…
"다시 만날 거야… 되찾을 거야…!"
눈물을 흘리며 손을 뻗었다. 전신에 힘을 줘 땀방울이 눈에 흘러내리는 와중에도 손가락이 아주 조금씩만 움직였다. 몇 시간이 걸려야 완전히 굳어버린 몸이 실타래에 닿을지, 1cm를 움직이려면 얼마나 오래 움직여야 할지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희망을 느꼈다.
살게 해 줘. 살려 줘! 삶을 살 수 있게 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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