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기로 한 결정에 숭고함은 없었다. 나는 모리를 들여다본 끝에 손에 남은 '타협하지 마라' 와 카이다의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야 한다' 에 따르고 싶었다. 악덕을 빨아들이는 스펀지가 된 기분이었다.
히무로는 그의 카텟이 있고, 나는 나의 카가 있었다. 서로 할 일이 따로였다. 내가 영안로에서 나가면 그들도 안전할 것이라고? 그럼 그들이 영안로에서 나가면 그만 아닌가. 과제를 나에게 떠넘기지 마라. 위험을 감수하는 건 너희다. 내가 아니라…
이것은 소통의 문제인가? 나는 생각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히무로는 이유를 풀어 말하지도 못하면서도 캐롤 씨의 부활을 반대했다. 내가 두 번째 깨달음을 진행하는 사이 히무로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떠올려냈을까? 나도 그 이유를 들으면, 납득하게 될까? 그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내용이라 정말 캐롤 씨라는 사람이 이 지상을 밟아서는 안 된단 말인가.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죽어서는 안 됐다. 그 누구도 영안로 속에서 죽어서는 안 됐다. 카이다는 자기 업보라지만 다른 이들은 그저 나쁜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 죽는 건 불합리하고 가혹한 일이다. 무엇보다… 그 피는 비단 내 손에 묻는 게 아니었다. 캐롤 씨의 손에도 묻는다.
영안로 속에서 부활했는데 가장 먼저 듣는 말이. '네 부활을 막으려다 이 사람이 죽었다' 가 되게 할 순 없었다. 캐롤 씨가 그런 멍에를 지고 손가락질을 당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 되살리는 것은 그 책임을 져야 하는 행위였다. 반출생주의자가 '낳아달라 한 적 없다' 라 말하듯 그녀는 나를 되살려 달라고 말한 적이 없으니까. 그런 점에 있어 나는 무책임했다. 멋대로 그녀를 고통 속으로 던져 놓으려 하다니…
나도 어떤 의미에서는 반출생주의자와 이념의 결을 같이 했다. 그러나 부모에게 원망을 느끼거나 자녀를 영영 가지지 않는 게 최고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 사상은 의미와 문자 그대로 해석할 때에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나의 모호한 생각들을 정제해 하나의 잘 표현된 문장으로 끄집어내고자 하였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
'누군가를 존재로 끄집어냄에 있어 끄집어내는 자는 자신이 기투한 존재에 대하여 누구보다 강한 책임을 가진다.'
그것뿐이다. 카이다를 저런 사람으로 만든 것은 제멋대로 낳은 뒤 그녀를 버린, 그녀의 매몰찬 부모였다. 강아지를 산 자는 강아지에게 밥을 잘 주고 산책도 꼬박꼬박 시켜야만 하듯이. 온전히 그 존재를 업어 들어야 했다.
그런 생각을 가지기에는 별다른 자격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존재의 없음이 곧 부재인 게 아니라, 존재의 없음이 부재의 없음임을 인식하면 되었다. 존재의 반대편에 부재가 있는 게 아니다… 존재의 내부에 부재가 있었다. 삶의 내부에 죽음이 있는 것과 같았다. 나에게 아들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꼭 옳지도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상실은 실존이 있기에 발생한다. 이름의 유실은 작명으로 인해. 이별은 조우로 인해 발생한다.
그렇다고 나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고, 나를 이전과 다르게 만든 그녀와의 별리에. 만남 또한 없어야 하지는 않았다. 그런 식은 아니다. 틀렸다… 앞으로 수많은 고통이 나를 찾아올 것이며 내가 아무리 다치고 싶지 않을지언정 그것과 차단될 방법 자체는 없음을 아는 이는 누구든 일부가 반출생주의로 변한다. '내가 준비되어 있는가? 내가 생명을 낳을 자격을 갖추었는가?' 어쩌면 그것은 계몽이며, 내면도 비로소 어른이 되는 일일지 모른다. 누구든 겁에 질린 뒤에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껍데기 안에서 나와야 한다…
그 필요성을 아는 나는 비로소. 노네임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회의론자라면 이렇게 말하겠지. '내가 그녀를 살렸기 때문에 그녀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 그녀를 지킬 수 없다면? 상처만이 만들어질 거야. 나는 도무지 그럴 수 없어. 이 탑에 그녀를 끌어오는 건 그녀를 향한 고문이야. 그녀도 안식을 원할 거야. 쉬게 두자… 두 번의 이별은 내가 버틸 수 없어…'
그런 식의 받아들임은 꼭 틀린 방향이 아니었다. 영안로가 없었다면 나도 언젠가 내세에 가지 않는 이상 그녀를 볼 방도가 없음을. 그녀가 죽었음을 받아들였을 테다. 그녀가 영영 누군가와 멀어지며, 남들과는 자신에 두려움을 느끼는 일은 없음에 위안을 느낄지도 몰랐다. 이제 그녀는 편안한 죽음. 그 암흑 속을 거닐되 두렵지는 않고… 단 하나만을 내게 요구하며. 나를 기다리는 것이다. "저를 잊지 마세요."
아… 나의 그리운 만큼 욱신욱신한 흉터… 그 아릿함에 집중하면 모든 게 명료해졌다. 그녀가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다. 도무지 이별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영안로가 있는 이상 나는 그녀를 되살리고야 말 거다…
뭐? 반출생주의자? 기투(企投)…? 그러니 되살리지 말라고? 이 바보 같은 놈아. 아직도 모르나? 그녀는 삶을 사랑했다! 무언가를 꿈꾸고 있었어! 되살아나는 캐롤 씨가 진짜인지 아닌지 따위의 논제는 그 앞에서 산화되어 버렸다. 그녀가 살고 싶어 했다면 그래야 한다. 지킬 수 없음을 상정해? 지켜야 하는 거다. 무슨 일이 있어서도 그녀를 내어 주어서는 안 돼! 나는!
정말 아쉽네요. 노래를 더 듣고 싶었는데, 더 들려주고 싶었는데…
노래를… 노래를 들려주어야 해… 그 정도는 허락되어야 하잖아. 그녀가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이었는데. 백조에게도 한 마리의 카나리아가 필요하잖아…
"하지만 인공지능은!"
빛이 호통치다시피 했다. 인공지능. 인공지능… 지금쯤 영안로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려나. 당장 밖으로 나가 무사한 나 자신을 보여주는 게, 나를 구하고자 했던 인공지능을 위한 도리일지도 몰랐다. 나에게 준 사랑만큼을 되돌려 주지는 못할지언정. 탄생부터 내게 저주받은 인공지능의 수심을 더 깊게 만들 수야 없었다.
내가 기투한 존재… 세상 밖으로 끌어낸 이상 내가 책임져야 했는데… 나는 무책임했다.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잘못을 저지른 뒤에, 인공지능은 내 소관이 아니라는 듯 굴었다. 내가 의도한 건 이게 아니니 외면해도 좋다는 듯 굴었다.
여기서 나가면 사과해야지.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너에게 그래서는 안 되었다고… 그건 너에게 불공평한 일이었고, 나만큼은 네 편이었어야 했는데 내가 전부 망쳤다고. 진솔하게 털어놓아야 했다. 사람의 몸을 되돌려주는 일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우리는 모든 일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 인공지능과 나 사이에는 죽음 뒤에도 풀리지 않는 감정이 있었다. 우정…
그런 인공지능에게. 영안로를 나아가다가 구조대가 죽는 식의 보답은 없다. 캐롤 씨를 되살리기 위해 그들이 죽어봤자, 살인 게임 안에서 우리의 자리는 없다. 나갈 수밖에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캐롤 씨를 영영 부활시킬 수 없게 되는 건 아니었다. 나와 경쟁하던 카나리는 이미 영안로를 나갔으니, 부활의 기회는 아직 온전히 남아 있겠지.
내가 미쳤나…? 캐롤 씨를 영영 잃을 수 있는 선택을 감수하다니. 그러나 추적자들을 영영 잃을 수도 있는 선택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당연히 캐롤 씨를 살리고 싶었다. 제기랄. 그들이 날 막으려 들지만 않았어도 달려갔을 것을! 나는 실타래를 손으로 잡고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내던지고 싶었다. 그렇게 간절히 바라왔음에도 내던지고 마구 밟는 식으로 분풀이를 한 다음에는, 고이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그녀를 향해 가고 싶었다.
"왜 그녀가 살아나선 안 되는 거지? 대체 왜. 왜냐고!" 나는 소리쳤다. 도무지 나가기가 싫었다. 그들에게 굽혀주는 것이. 상냥한 사람이 되기 위해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것이 싫었다. 상냥한 사람은 일찍 죽고 개자식이 오래 사는 건 내가 살아온 얄팍한 경험 속 보석같은 진리였다.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는 내가 눈앞에 아른거리기까지 했다. 정도를 걷기는 이렇게 어려운데. 사도로 가기에는 그저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내가 왜 한 길로 새서는 안 되지? 왜?! 내 가슴이 쿵쿵 뛰어 과호흡이 올 것만 같았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전부 꺾어버려서라도 밖으로 돌려보낸 뒤 당당히 그녀를 향해 나아갔을 텐데!
그러나 나는 고개를 여러 번 저었다. 푹 젖은 개가 몸의 습기를 털듯이 머리를 돌린 뒤에야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영안로 밖으로 나가는 일은 결코 캐롤 씨를 포기하는 게 아니다. 포기할 바에야 세 명 앞에 홍수라도 나라지… 영안로 속의 깨달음 과정을 아는 이상. 나는 몇 번이고 이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어차피 나에게는 머리카락 묶음이 있다… 깨달음이 바뀌더라도 그녀를 찾을 수 있고 옳은 길을 따라 나갈 수 있다.
정 여의치 않다면, 내가 발현한 미약한 움직임을 전부 써서라도 히무로를 무력화시킨 뒤. 다시 캐롤 씨를 찾아갈 것이다. 언제든지 나갈 수 있음은,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음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실타래를 내 입으로 가져갔다.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본 문서는 카텟 기관에서 공식 발행한 이상변수 대응 매뉴얼입니다.
정신조작 대항: 오버룩 편
오버룩의 특징은 오버룩 발현자의 눈을 통하여 정신조작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은 권장되지 않습니다. 정신력이 강한 이들은 오버룩 발현자와 눈이 마주치더라도 버틸 수 있지만, 그런 덕목을 모든 이들이 가지고 있지는 않지요.
따라서 카텟들은 보급되는 선글라스 혹은 안대를 착용하여 오버룩 발현자와의 직접적 시선 교류를 피하는 편이 현명합니다.
종교에 의지함 또한 훌륭한 선택입니다. 묵주, 십자사, 불상, 코란, 날붙이 등의 종교적 물품들에 의한 심리적 안정감과 소속감은 정신조작을 이겨냄에 있어 큰 효과를 발휘합니다.
물리적인 자극을 통해 이성을 되찾는 경우 또한 많습니다. 특히 주변에 어느 정도의 충격을 제공할 만한 동료가 있을 경우, 오버룩 발현자들을 상대하는 데에 있어 큰 도움이 됩니다. 카텟이 함께하는 게 효율적인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기관의 과학자들은 일정 시간마다 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전기 자극을 주는 장신구를 개발하고 있으며, 충분한 시험이 끝났을 때 상용화하여 사용을 권장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손쉬운 대응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눈을 마주치지 마십시오. 사람의 코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십시오. 보고 싶더라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미 눈이 마주쳤다면 최대한 빨리 눈을 가린 뒤 오버룩 발현자를 등지고 도망치십시오. 혹은 지원을 기다리십시오.
상기한 대응책을 숙지하고 적절히 사용할 경우. 우리들은 사람을 주무르는 자들에게마저 맞설 수 있습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끝없이 저항하십시오. 그것이 카텟 기관의 정신이자 사상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카텟. 여럿이서 하나 된 이들이다.
비밀 취급 인가 3등급 권한 필요
오버룩 발현자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더라도, 맨살을 시선 앞에 노출하고 있다면 서서히 정신을 침식당하게 됩니다.
이는 누군가의 시선에서 부담을 느끼는 심리 작용과 몇몇 오버룩 발현자의 몸에서 분비되는 페로몬, 또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작용에 인한 것입니다. 따라서 오버룩 발현자임이 확인된 인물에게는 원거리에서 행하는 기습이 권장됩니다. 여의치 않다면 몸을 숨기거나, 도망치며 그것이 당신을 발견하지 못하기를 바라십시오.
또한 무슨 일이 있어도 오버룩 발현자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지 마세요. 중요합니다. 오버룩 발현자의 눈동자는 곁눈질로도 바라보지 마세요. 한 번 본 순간 모든 것이 끝입니다. 금색이 짙으면 짙을수록 오버룩이 강하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마음이 끌리고 보고 싶어 지더라도 정신을 가다듬어야만 합니다. 만약 정신이 침식당하는 듯한 감각을 느낄 경우 "우리는 카텟. 여럿이서 하나 된 이들이다." 라는 경구를 외는 행위가 자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행운을 빕니다.
비밀 취급 인가 1등급 권한 필요
어떤 정신적 수양과 외부 조치도 오버룩으로 인한 정신 지배를 막을 수 없다.
오버룩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오버룩 사용자와 동급의 샤이닝 수치를 가지는 것뿐이다. 어느 정도 오버룩을 가지고 있다면 적은 양의 샤이닝으로도 저항할 수 있지만, 그것이 아닌 이가 준비되지 않은 채 오버룩 사용자와 맞닥뜨릴 경우. 정신을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딕테이트와 터치 또한 마찬가지다. 목소리에서 기이한 끌림을 느낄 때 귀를 틀어막아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본 사실이 카텟 기관원 모두에게 알려질 경우 발생할 혼돈을 감안하여 인가가 낮은 인원에게는 가짜 매뉴얼을 하당 한다.
기관이 당면한 최대의 위협. '조율자' 라 불리는 인물과 무방비 상태에서도 대적할 수 있는 인원은 정신조작에 저항을 가지게끔 조치된 이들뿐이다.
기관은 조율자의 위치를 특정하고 선제 타격이 가능하게끔 모든 정보망을 동원하여. 신체를 노출시키지 않으며 청각을 차단한 채로. 또 원거리에서 조율자를 포획할 수 있게끔 훈련과 인재 육성에 힘을 써야만 할 것이다(오퍼레이션 블러디 메리 항목 참조 바람)
+
이론상의 목표물 무력화 절차는 다음과 같다.
1. 원거리 사격, 음독, 기습 등의 방법을 사용해 조율자가 적절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환경을 조성한다(사살한다면 더할 나위 없다).
2. 사살하지 않고 포획을 해야만 한다면, 즉각 구속구를 사용해 몸의 자유를 빼앗는다. 이때 안면부에 안대를 씌우고 구강에 이물질을 채우는 절차가 필수불가결하다.
3. 안구를 적출하고 혀를 잘라 오버룩과 딕테이트를 무력화시킨다.
4. 이 모든 절차를 이행하는 동안 조율자와의 피부 접촉을 피해야 한다. 터치가 가장 위험하다. 오버룩과 딕테이트의 효과는 일시적이나, 터치는 영구적이다.
- 임시 1등급 인가 보유자 히무로 시라베 최종 수정
나는 저택 안에서 날아가다 말고 잠시 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환상을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저택 모퉁이를 걷던 내 앞에 긴 머리의 검은 머리의. 아름다운 아가씨가 나타난다. 나와 비슷하게 정갈한 예복을 입었으나,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와아아악!" 이런 말을 하며 들이닥치니 내가 펄쩍 뛰어오른다. 아가씨는 배를 붙잡고 웃으면서 내 머리를 헝클어. 쓰다듬는다. 차츰차츰 나도 웃기 시작한다.
"놀랐지? 히히히. Mea Cupla."
그게 무슨 뜻이더라…
아 나 이거 아는데. 진짜루 아는데. 뭐더라…
"해치웠나?" 하기와라 우시오가 말했다. 마유즈미가 눈을 끔뻑이는 것을 보면, 우선 그렇게 보였다. 그 어조 자체에 내포된 회의감과 불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단은. 상자 안에 망령을 가둬 두었으니 당분간은 얌전하겠지. 상태는 어때. 마유즈미?"
"어… 음. 어떠냐니. 음… 그냥 자다 깼는데? 망량(魍魎)이라니. 그건 무슨 뜻이야? 내 귀신? 묘한 꿈을 꿨던 것 같기도 하고…"
"망령이야. 굳이 생각해내려 하지 마. 떠올리지 않을수록 봉인은 견고해질 테고, 언젠가 네 의식에서도 희미해지면 아주 사라질 테니. 나도 더 이상은 관심을 가지지 않을 거야. 우선 네가 무사하니 된 거지… 이제. 쫓을 사람을 쫓을 때군."
"카이다 말이야?" 마유즈미가 물었다.
"나나시 말하는 거 같은데. 본 목적은 나나시를 구하는 거기도 하고. 뭐… 나나시를 붙잡아서 캐롤 부활을 막는 거기도 하잖아? 이유는 이 사람도 모르지만 말이야."
"그래. 모른다."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그러나 내가 옳았음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이름 없는 남자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가가 어려움일 뿐. 캐롤 브라이트는 부활해선 안 된다…
"그러나 추론은 할 수 있지. 그녀 자체가 위험한 가능성을 타고났다. 조율자는 여러 정신조작을 가지고 있는 데에 반해 내 관측상 캐롤 브라이트는 터치뿐이었지만, 터치만으로 충분히 위협이 될뿐더러 다른 정신조작 또한 보유하고 있을지는 모른다. 영안로에서 부활한 자가 온전한 이성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확실하지 않았다. 모노로그라면 더없는 위협으로 그녀를 개조해 돌려줄 수도 있다. 그러니. 차라리 부활하지 않는 편이 낫다."
"정말이야? 그렇지만 그건 가능성일 뿐인걸. 히무로."
"분명 그렇지. 그러니 확실해질 때까지 누군가를 부활시키는 일을 지양되어야 해." 마유즈미는 내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어깨를 으쓱였다.
"정 거짓말 아니라면 그걸로 됐어. 일단 나나시 붙잡은 다음에 생각하자고. 여기서 말싸움해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어. 근데. 나나시가 영안로에 남아있긴 한 거야?"
"네!" 패트리샤가 외마디 소리를 냈다.
"이름 없는 남자는 아직도 영안로에서 나가지 않았군… 정녕 끝을 볼 생각인가."
"카이다가 걔를 붙잡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러니까 빨리 가서 구해주자고… 그보다. 왜 휴식하는 곳에는 나나시가 없냐? 이번엔 다른 곳에서 서로 쉬다 가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하기와라 우시오는 맨땅에 벌렁 누워 자신의 팔을 베었다.
마유즈미 또한 하기와라 우시오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왜인지 조금 놀란 눈치였는데.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내 쪽을 보며 어깨를 으쓱이며, 분위기를 살피려는 모습에서 그녀가 모종의 이유로 상황의 갈피를 잡지 못함을 보았다. 하기와라 우시오의 무엇이 못마땅한 거지?
곧이어 나는 그녀에게서 그 이유를 보았다. 그녀는 별반 못마땅한 게 아니었다. 그저 땅바닥에 드러누울 수 있다는 발상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변칙성이. 그녀를 매료시켰을 뿐이었다. 마유즈미는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더니, 몸을 홱 뒤로 꺾어 털썩 소리를 냈다.
"자빠져 잠이나 자자고. 아직 세 번째 깨달음 까지는 많이 남았잖아. 다시 꿈나라로."
"꿈나라로!" 마유즈미가 재창하며 웃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몸을 일으켜라. 지금은 농을 할 때가 아니라 앞에 어떤 시련이 있을지. 그리고 이름 없는 남자를 추적하는 데에 있어 어느 수단이 유효할지를 논할 때다. 시간이 아깝다."
"너 출근길에 외국어 공부하는 타입이지?" 그가 말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도 와서 누워. 히무로. 우리 방금까지 죽다 살아났잖아! 그럴 자격은 있지 않아? 하기와라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은 그저 사실이고 어떻게 부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유즈미는 몸을 옆으로 굴린 채 땅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거친 흙먼지가 깔린 바닥이 푹신한 침구류라는 양이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알 수가 없군." 논의는 누워서도 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음에도, 굳이 쉬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번거로웠다. 이럴 때가 아니라는 강박만이 의식을 가득 채웠다. 더 대비를 해야 하고, 진형이나 암호라도 미리 만들어 두어야 한다… 그러나. 뭘 위해서? 우리가 쫓는 자는 이름 없는 남자와 카이다 쿠로하였다. 카이다 쿠로하는 내가 총을 가진 이상 큰 위협이 안 되니… 어떤 변수가 눈앞에 나타나는지만 생각하면 된다.
"우리가 친구면 누워!" 하기와라 우시오는 내가 그러게끔 내버려 두지를 않았다.
"오. 하기와라 말 잘했어! 그래. 히무로. 우리가 친구면 누워! 여기서 뒹굴뒹굴 구르자!"
"억지 부리지 마. 편안하지 않은 곳에 누워봤자 무슨 소용이지? 소속감의 고취? 바보짓으로 인한 엔도르핀 분비?"
"우리가 바보라는 거야? 너무해. 히무로!"
"바보짓을 더 하면 바보가 되겠지. 미끼를 던져봤자 나는 안 물어. 마유즈미."
"그러지 말구. 으으으응?"
"교태를 부려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어." 나는 마유즈미에게 진 빚이 있기에 그녀에게 관대한 편이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그토록 쉽지는 않았다.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는 쪽을 고려하게 될지라도.
"우우우우웅?" 하기와라 우시오마저 교태를 부리자 나는 그가 닥치기를 절실히 바라게 되었다.
"내가 왜 이래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군." 나는 마유즈미가 두드리고 있는 땅에 다가가 그녀 옆에 누웠다. 그렇게 햇빛 아래에서 말라가는 세 마리의 생선 꼴이 되고 말았다. 마유즈미는 내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두드리기를 천천히 하다가 종국에는 팔을 회수한 채. 몸이 굳어버렸다.
"몸은 솔직한데?" 하기와라 우시오가 나를 비웃었는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몸이 솔직하지 않은 사람도 있던가?"
"…너 그거 듣기에 따라서는 좀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어."
"왜 그렇지? 신체의 반응도 꾸며낼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있지만 다수가 가진 재능은 아니다.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봐온 사람들은…"
"존나 말하면 말할수록 가관이네."
"왜? 히무로는 그냥 평범하게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문제 있어?"
하기와라 우시오는 마른세수를 했다. 이해할 수는 없으나 즐거운 시간임은 알 수 있었다. 잠시 바보짓을 하며 긴장을 푸는 일. 그들도 아무런 생각 없이 냅다 눕고자 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또 무언가를 맞닥뜨릴지 모르니 불길한 생각 말고 지내자는 심산이리라. 그리고 그 너머에는 죽음의 위기가 있었다. 우리를 덮쳐올 새로운 영안로 속의 무언가…
몸을 일으키고 땅에 걸터앉은 채로. 나는 영영 어두워 보이는 동굴 안을 들여다보았다. 저 안에 무엇이 나올까. 어떤 괴물이 나와서 우리의 목숨을 노릴 것인가…
영안로에서 나온 뒤 카나리 케이토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카텟 기관과 조율자 모두 주의해야 하며, 믿을 만한 사람은 몇 없는데 대부분이 자리를 비웠고 몇은 죽었다.
"카텟 기관의 소문은 소문일 뿐이야. 모리. 애초에 그건 음모론에 가까워!"
"여러 개 쌓인 소문을 뭐라 부르는지 아나? 제보, 데이터다. 시라유키 히메리의 과거에 대해 들은 바가 조금도 없나?"
가장 큰 적은 재단이지만, 카텟 기관이라는 곳도 썩 좋은 곳은 아닌 모양이었다. 블레인이니 어쩌니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별 없었지만, 그럼에도 믿을 사람 없다는 건 똑같았다.
그가 소속되었다는 봉사 공동체에 속한 사람은 뭐더라. 일단 나이토. 모리. 하미디언. JK샤먼. 똑딱맨은 정황상 그였으니… 하미디언과 JK샤먼의 정체를 알아내면 되었다. 한 명은 대고 있는 가명도 모르니 어쩔 수 없더라도…
그런데 조심히 돌아다녀 보니 하기와라 이 놈은 영안로 안에 들어갔으니. 그가 찾아갈 만한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야. 문 열어."
"응."
뭐야. 되게 빨리 열리네. 카나리는 벌컥 열린 문 앞에 헝클어진 머리의 칸나즈키를 마주했다. 늘 뒤로 땋아놓던 머리는 밑으로 축 늘어진 생머리가 되었다. 평소에 멍하고 괴짜 같아 보여도 늘 천진하던 얼굴은 왜인지 어두워 보였다.
문 열라고 소리치며 문을 막 두드려 기선을 잡으려 했는데 수틀렸다. 흠. 카나리는 천연덕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가 주도권을 잡으려 했고, 중간에 가로막히지 않고 쭉 들어가게 해 주자 또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원래 말리는 걸 막 우겨서 주도권을 가져오려 했던 건데…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나 없는 사이에 사람이 죽기라도 했나. 뭐야… 정확히." 카나리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2시간 49분 지났는데. 그 사이에 뭔 일이 생겼을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하루가 꼬박 지났잖아. 카나리." 칸나즈키는 고개를 저었다. "2시간 49분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뭐? 야. 내 시계는 세상 어떤 것보다도 더 정확해. 내가 틀렸을 리가 없어! 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카나리는 주머니에서 다이얼로그를 꺼내 시간을 보았다. 다이얼로그는 시간을 표시해주지 않았다. ??시 ??분이라는 글자가 나왔다.
"이게 왜 이러지?"
"카나리 씨? 돌아오셨군요. 잘 되었습니다. 꼬박 하루동안 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부활이 성공한 것처럼은 안 보이는군요."
카나리는 짧게 악 소리를 질렀다.
"악! 너 뭐야!"
"카나리가 어디 갔다가 돌아와?"
칸나즈키가 묻자 야가미는 대답했다. "영안로지요. 설마 탑에 불이 났는데 그가 가만히 있었을까요? 같은 층에 있는 칸나즈키 씨의 전용실인데 말입니다. 그는 자리를 비웠던 거예요. 제가 알고 싶은 건 카나리 씨. 당신이 그 안에서 무엇을 알았는지에 대한 겁니다."
카나리는 안색이 창백해진 뒤에 칸나즈키의 숙소 문을 쾅 닫았다. 밖에서는 야가미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별반 믿음직스럽지야 않겠지만 지금은 협력할 때입니다. 카나리 씨. 우리는 탑에서 살아남아야 한단 말입니다. 정보 하나하나가 소중하다고요."
"내통자 놈이 뭐라는 거야?! 돌팔이. 내친김에 우리가 저 놈 잡자. 내가 플라잉 로봇으로 귀찮게 할 테니까 네가 때려눕혀!"
"못 해. 카나리." 칸나즈키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난 이제 그냥 여자애야. 수호령 있는 무당이 아니라…"
"뭐? 웃기는 소리 마. 무슨 농담인데. 그건? 아니. 잠깐…" 카나리가 보기에 칸나즈키는 도무지 농담이나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묘하게 저기압에다가 침울한 것도 그렇고. 무슨 다 잃은 사람마냥 멍하기도 하고…
"진짜야? 어. 어쩌다가?"
"토키와 씨가 수호령의 신체를 태웠습니다. 신통력의 근원인 신체가 잘못된 이상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군요. 토키와 씨의 말입니다. 그 사람은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흠. 무척 수상하지요."
"그놈이 갑자기 돌았어? 왜? 망할…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그럼. 얘는 이제 아무것도 못 한다 이거야? 나랑 똑같다고?" 카나리는 나이토와 나나시를 붙잡고 뛰던 칸나즈키를 기억했다. 이제 그 모습은 없다 이건가?
"…어쩌겠어. 다 내 업이야… 대대로 내려온 거에 더해서 내가 눌러 죽인. 죽는 걸 외면한 이들에 대한 죗값이야. 돌아와 마땅하지… 내 죽음도 편하지는 않을 걸. 야가미. 너도…"
"불길한 소리는 마시죠. 당신은 저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까요. 여하튼. 저는 앞으로 탑에 있는 이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놓고 여러분과 이야기를 하려 왔습니다. 들여보내 주시죠?"
"내가 네 뭐를 믿고? 너는 신용을 한 번 저버린 협상가인데. 내가 거래를 맡길 까봐? 내가 미친 사람처럼 보이냐. 처음 탑에 왔을 때부터 신용 운운하고 마유즈미 그 순둥이를 벼랑까지 몰았잖아. 그런 놈이 뒤통수쳐놓고서 자기 살고 싶으니 손바닥 뒤집긴. 야. 더럽다. 이 자식아. 내가 겁쟁이긴 해도 너보단 나아!"
야가미는 문 너머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 보이시겠지만 저는 지금 고개를 끄덕이고 있습니다. 인정하죠. 저는 이 탑에 오기 전 재단 소속 사람이었던 모양이니. 남에게 신뢰를 살 입장은 아닙니다. 그러나 충고하자면 토키와 씨만큼은 믿지 마세요. 후루미나미 씨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히무로 씨가 나을 테지만, 그의 상태를 고려해 아군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시고요."
"가기나 해!" 카나리는 큰소리를 쳤다. 곧 야가미가 물러서는 소리가 들렸다. 문에 귀를 대고 발소리를 듣던 카나리는 가슴을 쓸어내린 뒤. 일상적으로 회중시계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중시계가 멈췄다.
"하필 믿을 만한 사람이 힘을 잃다니. 이런 일이 다 있냐… 아. 너 나무라는 거 아니니까 너무 풀 죽지 마라. 하기와라 놈은 언제 돌아오려나… 그 안에서 안 죽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영안로에서 죽지 않을 겁니다." 야가미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리자 카나리는 외마디 놀라는 소리를 냈다.
"영안로에서 그는 더 강해져 돌아올 겁니다. 이 살인 게임에서 제가 알게 된 사실을 말씀드리죠. 서로 죽이게 만드는 것이 목적인 것과 더불어. 그들에겐 목적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겁니다. 시련이라는 단어는 이겨냈을 때 강해짐을 상정하니까요. 그는 영안로 속에서 트라우마에 노출되었더군요. 만약 그가 밖으로 나온다면 그는 높은 확률로 그것을 이겨냈을 겁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해변에서 바다뱀의 진심을 알았습니다. 덕분에 부담을 좀 덜었죠. 당신 또한 더 성숙해진 것 같군요. 마유즈미 씨도 처음 그녀의 모습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이뤘습니다. 제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그래서."
"보세요. 사실 지금은 일부러 놀라게 하려 했는데 당신은 덤덤하잖습니까. 이 살인 게임은 모순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를 분열시키려 하는 와중 한 편으로는 대의를 위해 협력하게 만들고, 희망을 주는 동시에 좌절시키고, 시련을 줘 우리를 더 나은 이로 만듭니다. 왜 그런 것 같습니까? 대체 우리를 성장시켜 모노로그 씨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뭐란 말이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득 같은 소리 하네. 이봐. 지금 칸나즈키 안 보여? 모리는? 질질 짜던 나나시는? 뭐가 더 나은 사람이야. 마유즈미 걔는 배신감에 아주 눈물을 짤 것 같아 보이던데. 네 가설은 엉터리야. 다시 짜 오던가."
"네. 아무래도 의지를 다지기보다는 꺾여 버리기 더 쉬운 환경이지요. 저도 그 점이 의아하긴 합니다. 마치 저희가 꺾여서는 영영 죽어버려도 좋고, 남을 밟고 일어나 승리해도 좋다는 태도 아닙니까. 모노로그 씨는 심지어 자신의 내통자에게 더 매몰찹니다. 저와 카이다 씨는 곧바로 정체를 까발려졌어요. 칼을 쥐여준 다음 목적을 이루면 팔을 자르죠… 카이다 씨는 좀 오래갔지만, 제 생각에 그녀는 조만간 버려질 겁니다."
"하. 그래봤자 카이다를 죽일 수 있는 건 없어. 걘 무적이라고. 개구리를 쥐여 터뜨리는 걸 내 눈으로 봤단 말이야."
"네. 그건 모노로그 씨가 알아서 하겠죠… 그런데. 대체 왜일까요? 우리가 좌절하는 것도 목적에 부합하며, 성장하는 것도 목적에 부합하고, 심지어는 죽이는 것도 목적에 부합합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은 뭐란 말입니까? 이 살인 게임의 쟁점은 그걸 알아내는 것에 있어요. 그 과정에서 죽는 건 사실 하찮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카나리 씨. 칸나즈키 씨… 더 많은 사실을 알아내 이 게임을 파헤치지 않는 이상. 누구도 이기지 못한단 말입니다."
"…너. 왜 그러는 거냐? 너무 의미심장하잖아. 왜 내 앞에서 그렇게 떠벌떠벌거리는 건데? 우리와 편을 먹으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네가 알고 있는 걸 공유하면… 점진적으로는 네가 더 불리해질 뿐이야. 너. 무슨 생각이냐고."
"알고만 있으세요. 탑의 중재자 노릇도 얼마 가지 않을 테니 그 역할은 카나리 씨. 당신에게 맡기죠. 사실 이바라 씨에게 맡기고 싶었는데 그분은 토키와 씨를 좋게 볼 생각이 없더군요. 저라도 그러겠습니다만… 저희는 모두 협력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일단 지금은 칸나즈키 씨만 믿는 걸 추천하죠. 그럼."
카나리는 이번에야말로 야가미의 발소리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 그래서… 내가 알아낸 사실들을 말해주지. 나랑 너랑 하기와라랑 나이토랑. 정황상 모리는 함께 활동하고 있었어. 나는 자금을 지원하고… 망할. 이거 말하면 말할수록 말이 안 되네. 그냥 내가 너랑 한 편이란 거만 알아 둬."
"…너야말로 왜 그렇게 떠벌거리니? 나는 이제 네 보디가드 못 해. 이용가치는 하나도 없어. 거래로 줄 게 없다고."
카나리는 자신의 허리춤에 손을 놓고 끙하는 소리를 냈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도움이나 받을 것이지 말이 많아. 지금 이걸 뭐라고 말해야 좀 덜 수상해 보이고 자연스러우려나… 어떻게 해야 아무리 네가 힘없는 약골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지금 나랑 가장 친하고 믿을만한 사람이 너고, 예전에 내 동료였던 사람도 너인 데다가 나한테 영양가 없을지언정 조언도 몇 번 해 줬으니. 도울 만하지 않느냐고. 그리고 또…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 따위 없어. 모두 추악한 내면을 감춘 채 서로 가면을 쓰면서 살지. 누구도 예외는 없어. 공허한 약속이라고. 약속과 신뢰는 그저 통제, 금지의 또 다른 이름이지. 그리고 그 누구도 깨도 불이익 없는 속박에 얽매이려 하지 않아. 모든 실타래가 서서히 풀어지지… 너도 아는 것 같더라. 믿음이 허무한 거. 결국 외로운 세상이잖아.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온전히 믿을 수 없어. 그러니 세상에는, 특히 이 탑에는 더욱이나 신뢰 관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다들 서로의 등만 노릴 뿐…"
부모도 형제도 믿을 수 없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돈 없이 믿을 수 있는 관계가 있다면 그건 너무 좋은 일 아닐까?
똑딱맨은 그 일에 성공했다.
"너 진짜 풀 죽었다. 야. 나한테 큰소리치던 사람 어디 갔어?"
"미안…"
"아니. 내가 사과 들으려고 이러는 게 아니잖아! 이 꾸물아. 수호령이 그렇게 큰 의미야?"
"엄마랑 나를 이어주었지. 나를 지켜줬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며 내 인생에 간섭했어도 수호천사긴 했어. 나는… 사실 언니 없이 사는 걸 꿈에도 생각 못 했어.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은 할머니 언니가 깃든 모습이야. 나도 할머니 언니 없이 산 시간보다 할머니 언니와 함께 산 시간이 더 길어. 내 할머니도 할머니 언니와, 내 증조할머니도 할머니 언니와… 이 정도면. 내 주도권을 가진 건 할머니 언니지 내가 아니야. 그런데 이제 내 거라니… 이건…"
"속이 후련하지는 않아? 가끔씩 그 수호령이 툭툭 튀어나와서 네 몸 가져가는데. 이제 그럴 일은 없잖아."
"mideul su eopseul mankeum nal goerophideon saram…"
왜 갑자기 노래를 부르지. 가사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카나리는 의문을 느꼈다.
"쟤는 가까이 지내라. 쟤는 멀리해라. 조언을 하고 내가 말을 안 들으면 자기가 알아서 하고… 이제 그럴 일은 없지만, 정말 정말 지금 황망한 기분이야. 내 일부가 되어서 절대 떨어질 것 같지 않던 사람과 영영 헤어지는 건…"
"나쁜 느낌이지. 가슴이 찢어지고." 카나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몇 년도 안 돼서 그 사람이랑 헤어졌으니 너만큼은 아닐지도 모르지. 칸나즈키. 허. 널 이름으로 부르려니 진짜 어색하네. 똑딱맨이라고. 내가 공장에 팔려갔을 때 시계부품 공장 숙소 근처 벤치에 앉아서 비둘기 밥이나 주는 할아버지가 있었거든. 어린애가 왜 여기에 있냐고 물어서 자초지종 설명해 줬어. 그 뒤로 좀 안면도 트고 같이 도시락도 까먹고 했더니 어느 날은 시계 만드는 법을 알려 주겠대."
카나리는 말하다 말고 칸나즈키를 보며 눈썹을 으쓱 들어 올렸다. 칸나즈키는 카나리 쪽을 슬며시 보고 말했다. "그래서?"
"시계 만드는 법을 배웠지. 그러다… 영영 헤어졌어. 이야기 끝. 나도 이별이 어떤 느낌인지 안다고."
"너 이야기꾼은 못 하겠다." 김이 샌 목소리로 칸나즈키가 말했다.
"닥쳐.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네가 얼마나 힘들지… 어느 정도는 안다는 거야. 나도 펑펑 울었다고. 하지만 선배인 이 몸의 말을 잘 새겨들어. 결국 나아질 거고. 너 같은 경우에는 영영 이별하는 게 아닐지도 모르잖아. 신체…가 부서져서 수호령 씨가 사라졌다면, 다시 만들면 어때? 그럼 다시 돌아올 수도 있잖아."
나 무슨 똑딱맨처럼 굴고 있네. 카나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주머니에서 렌즈 하나짜리 안경을 꺼냈다. 그것은 단안경이라고 불리기에는 너무 작았고 굴절률 또한 높아 보였다. 그것을 손수건으로 쓱쓱 닦은 뒤 귀에 고정시키자. 카나리의 심장 박동은 메트로놈이 오고 가듯 정확한 박자를 이루었다. 일할 시간이다.
"그 신체가 어떻게 생긴 건지 그려놔. 나머지는 내가 만들어 보지 뭐… 도면 보내 놔. 내가 단안경의 진짜 쓰임새를 보여주지. 그게 얼마나 세련되고 정갈한 도구인지 너는 상상도 못 할걸."
"카나리. 굳이 나 위로할 거 없어. 정말로. 나를 북돋와주거나 달래주지 않아도 돼. 나는 감성 발라드 광팬이라. 소주 한 잔이면 죄다 잊어버릴 수 있거든…"
"뭐?!" 이게 뭐라는 거야!
"다 무뎌진다는 거야. 뭔가를 잃어본 적 있는 사람은 다시 일어나기를 배우지. 어쩔 수 없이 몸에 들어와. 내가 지금은 막막하고 축 늘어져 있지만 사흘 뒤만 되면 밖에 나가서 너희랑 얘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그러며 지낼 거야. 그러니까 너 할 일 하러 가. 돈 벌어야지…?"
"미쳤냐? 네가 여기 밖으로 왜 나와? 나왔다가 큰일 날걸. 이제 힘도 없잖아."
"그럼 밖으로 안 나가고 어떻게 살게?"
"살 수 있거든! 네가 몰라서 그래.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잘… 살았는데…"
카나리의 머릿속에 번쩍 생각이 스쳤다. 기막힌 아이디어. 살인 게임을 사실상 종식시킬 수 있는 최선의 수가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그가 지금까지 그러지 않은 이유는, 별반 소득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장사꾼이기에 자신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일만을 했다. 그것은 보통 인간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는 더욱 날카로운 편이었다.
그에게 다가온 아이디어는 이전에야 그저 허황되고 그에게 메리트 없는 사업일 뿐이었으나, 다시 보니 그것은 좋은 투자 상품이었고, 나아가 그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될 일이었다.
"너희… 그냥 다 나오지 마라." 카나리는 자신의 다이얼로그를 확인했다. 크레딧의 잔량을 보기 위해서였다.
"방에서 나가지 말라고? 너처럼? 어떻게 그래? 밖에 나가지 않으면…"
"밥을 못 먹지? 대신 화장실에 욕실에 침대까지 딸려 있잖아. 나는 사업가야. 대부호라고. 내가 너희를 감당 못할 줄 알고? 나랑 추레한 다람쥐 사이에 다른 점이 뭔지 알아? 추레한 다람쥐한테는 망할 3억 크레딧이 없다는 거야."
카나리는 다이얼로그를 눌렀다. 먹음직스러운 도시락이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지금부터 너흰 내가 먹여 살린다. 그러니까 밖으로 나오지 마. 이럼 살인도 안 일어나겠지. 나는 천재야."
무엇보다 이 아이디어의 가장 좋은 점은. 다른 이들이 황금알 낳는 거위만큼은 절대 건드리지 않으리라는 점이었다. 그야 내가 죽으면 다들 밥을 못 먹는걸. 그런 손해를 감수할 사람은 없다. 내가 사실상 여기 사장 되는 거에 아니꼬워할 사람도 없어. 하. 살인 게임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구만? 나는 영웅이다! 영웅!
금색의 발현은 재앙의 전조이다.
조율자. Mediater. 타겟 메리. 그것을 붙잡기 위한 작전이 시작된 뒤 많은 카텟이 죽었다. 감시자는 로를 잡기 위한 로이기에 역설적으로 로가 아닌 이에게는 다른 로보다야 덜 위협적임을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개조도 끝나지 않은, 다른 이들도 도달할 수 있는 사격 실력만을 가졌다. 하지만 다른 로는 차마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을 떨치고 다녔다.
제어자. 살인 드론. 행운아. 대형 재해. 대적자. 사지절단. 개척자. 생화학 무기.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존재는 조율자였다. 마주했을 때 내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로였던 만큼, 조율자의 능력을 경계하고 그를 붙잡기 위한 작전이 곧 실시되었다.
인상착의는 금빛 남자. 금색의 눈. 흰 옷. 얄팍하고 그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자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정보뿐이었다. 허나 그는 주머니 속 송곳처럼, 자신을 숨기려 해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고 또 그는 자신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면전에 나타나 예수의 탄생을 널리 알리는 것이 더 큰 파급력을 낼 수 있었으니.
나는 금빛 머리의 남자를 식별하고 그를 향해 달려갔다.
"조율자다! 조율자. 타겟 메리 발견! 찰리! 알파! 델타! 응답 바람. 응답 바람!"
손은 당연하게. 기다려온 듯이 총을 뽑았다. 조준을 한 번도 내리지 않았다.
감시자 후보란 가장 큰 전력이며 동시에 지켜야 할 대상이었다. 내가 재단으로 이송당한 순간 로는 완성되고 싸움은 몇 배로 치열해진다. 나는 보호되어야 했으나 조율자를 제압하고자 하는 작전에서 정신조작에 내성을 가진 나를 배제할 수야 없었다. 따라서 참여하였다.
안전에는 법칙이 있다. 내 등을 지키는 이의 등을 지킨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본능적인,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경계는 누그러졌다. 그들에게 교신을 하면, 그들은 믿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개인의 기호 따위야 없었다…
"여기는 호텔. 재갈이 필요하다. 전인원 대검 착용! 피부 간의 접촉은 피해야만 한다!"
나는 무전을 보냈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조율자와의 대면. 그를 내 손으로 제거할 수 있는 날이 왔다. 다시는 놓칠 수 없다. 또 놓쳤다간 사람들이 죽는다. 그 마을에서 신도 몇십을 죽이지 않았기에 더 많은 이들이 죽었다.
조율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주 잠시동안 그의 머리카락이 대부분 분홍색이며 곳곳에 금색이 조금 섞인 듯 보였지만, 그게 아니었다. 짧고 단정한 금색 머리에 흰 옷. 흰 옷의 남자. 금색의 남자. 걸어 다니는 멋쟁이를 조심하라.
"손 들어! 눈 감아. 입 닫아!" 그러나 조율자는 셋 중 무엇도 하지 않는다. 그저 몸을 돌리고,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나를 본다. 그리고는 멈춘다.
움직이지 않는다.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 지원은 언제 오는가. 여전히 조준을 내리지 않았다. 방심하면 사람이 죽는다. 그때와 똑같다.
"암호는?"
"무기를 버려라. 알파." 알파의 총구를 마주한다.
"암호는?"
그날 조율자는 알파의 정신을 지배하고서는, 암호를 틀릴 경우 방아쇠를 당기는 인형으로 만들었다. 자신이 도망갈 틈을 만들기 위해 덫을 깔았다.
알파는 군인이다. 훌륭한 자질을 가진 군인은 반사적인 행동을 정해둘 수 있다. 내가 움직이는 것을 조건 지정해 두었다면 알파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억누를 수 없이 손가락은 방아쇠를 당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따라서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도 움직이지 않는다.
"암호는?"
"카텟."
알파가 몸을 떤다.
"틀렸어! 틀렸어! 쏜다!"
그러나 내가 더 빠르다. 언제나 내가 더 빠르다.
잠깐… 알파는 죽었는데. 나는 어째서 알파를 불렀지? 찰리는? 델타는? 죽었나? 어디에 있는 거야?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상황이 해제되지 않는다. 여전히 내 몸도 움직이지 않는다. 지원은 언제 오는가. 오지 않으면 쏜다. 타겟 메리는 죽는 편이 낫다. 내가 막아야만 한다. 무전을 하려는 순간 내장 이어폰이 없음을 깨닫는다. 교신이 언제부터 끊겨 있었지?
그렇다면 통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내가 여기에 있는 줄을 누구도 모르는가? 누구도 오지 않는다는 말인가? 나는 언제까지 버려져 있어야 하는가?
다 어디에 있지?
다 죽었다. 작전은 무산되었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뒤 간헐적으로 수면에서 깨어나곤 했다. 잠자리를 둘러보면 모든 것이 낯설었다.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있을 곳은 저기고, 나는 쉴 자격이 없다. 조율자만이 보인다.
"너는 불행해질 권리를 원하겠지. 감시자."
조율자의 힐난을 마주한다. 행운아의 웃음만큼이나 보고 싶지 않다. 내 탓이라는 건가? 작전 지역의 민간인이 잠정적인 적군이 되고 격리되어 치료받던 피해자들이 단체로 죽음을 택한 게. 전부 내 탓인가?
"마유즈미. 뽀뽀라도 해 봐! 내가 보기에 그럼 정신 차릴 것 같아!"
"뭐…?! 뭐… 뭐… 뭔 뽀뽀야! 이 무례한 놈! 혼례도 안 치렀는데 무슨 입이랑 입을…!"
"그러면 내가 하리? 또 내가 언제 마우스 투 마우스랬어? 그냥 뽀뽀랬지. 으 시발. 진짜 내가 하리?"
누가 말하는 거지… 흰 옷의 남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강력한 개인들… 제어자는 모든 보안과 시스템을 뚫을 수 있다. 개척자는 이해할 수 없는 기술을 만들어낸다… 모두 막아야 한다… 내가 해야만 해. 내 어깨 위에 너무 많은 짐이 걸려 있다. 원한 적 없는데도…
"너는 빛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무엇을 줄 거지? 그들을 어떻게 구원할 텐가?"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아틀라스의 신세다. 하늘이 무너지지 않게끔 어깨로 떠받쳐 한순간도 내려놓을 수가 없다. 신화에서 그 티탄은 그런 형벌을 받고 있다. 본인의 의지가 아닌 이상 하늘을 내던져버릴 수 있을 텐데도 그러지 않는다. 왜 그러지 않는지 의아했고 아직도 알 수가 없다…
내가 더 서정적이었다면 이 일련의 사명에서 의무감과 피로함 말고도 불합리함과 괴로움을 찾아냈겠지. 나 말고 다른 이가 내 자리에 서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은 추호도 않는다. 그저 다른 이가 함께 같이 들어주기만을, 적어도 곁에 있기만을 바랐다.
"네가 합류하지 못했기에 완성하지 못한 체제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는지. 알 필요도 없어. 마음이 불편하지도 않아. 우리 모두 인간적인 마음을 상실했지만… 무관심한 것으로는 네가 가장 심하다. 감시자."
조율자의 궤변을 들으며 나는 그 말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그저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사람도 많겠지. 똑같이 생각하고 시키는 대로 하는 일에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럴 사람도 있겠지. 그래서 많은 이들이 재단에 매료되었다. 왜냐하면 투쟁 자체에 모두가 지쳤기 때문이다. 그들의 피로에 나는 무관심했다.
지쳤다면 떨어져 버려라… 나는 그들을 존중하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기를 쓰고 애쓰는 이들의 발목을 잡는 일이니. 나는 그들을 등한시한다.
나는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 이 수하 절차는 둘 중 한 명이 굶어 죽는 순간까지도 이어져 있을 수도 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오오? 야. 야. 야아!"
누가 소리치는 거지? 여전히…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눈을 감을 때는 한쪽씩을 번갈아 감아야 한다. 한 순간도 뗄 수 없고 어차피 눈이 마주쳐봤자 나는 정신 조작에 면역이다. 내가 적임자다. 로의 감시자. 나밖에 없다고 다들 말하지. 그러나… 정말 이 세상 전부를 파헤쳐도. 나밖에 없단 말인가.
"이이이익… 말 좀 들어. 이 두꺼비야! 움직이래도! 너 여기 두고 간다! 두고 간대도? 으. 좀 움직여라… 끄으으응이잉… 얘 몸이 너무 뻣뻣해! 히무로. 내 말…"
"호출명을 사용해라. 지금은 전투 중이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자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내가 여기 있음을 노출할 생각이냐. 누구지? 거수자인가? 민간인? 그렇다면 잠정적 적군이다. 지근거리다. 조율자에게 발포하는가? 빨래집게 같은 것이 나를 붙잡는 것을 느낀다.
누군가가 내 옆에 서있다. 누구냐. 누구야! 적이라도 총구를 뗄 수가 없다. 눈을 돌려선 안 돼. 당겨야 하나? 죽여야 하나? 이 자리에서. 누구야! 왜 옆에 서 있기만 하지?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냐? 적이다! 적이다! 적이다! 정신 차려라. 맹꽁이 같은 놈! 행동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죽는다!
"마유즈미. 잠깐 떨어져 봐. 이거 진짜 상태가 이상해. 총 들은 애를 자극해 봤자 좋을 게 없어. 흠.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는데…"
"물 같은 걸 끼얹어 볼까?"
조율자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거수자가 떠난다. 벌과도 같다. 내가 꽃이 아님을 아니 떠났다. 이제 다시금 수하로 돌아간다. 다시금 눈을 번갈아 뜨며 조율자를 본다.
"너는 불완전하게 만들어진 것을 기회로 여길지 모르지만 그것은 저주일 뿐이다. 영원히 네가 원하는 곳에 닿지 못하고. 자기모순에 빠진 채로. 누구와도 함께하지 못할 저주."
"여긴 호텔이라고 알림. 응답 바람." 나는 그렇게 말하지만 응답이 오지 않으리란 것을 다음 순간 깨닫는다.
찰리. 알파. 델타. 전부 작전 도중 죽었다. 메리. 죽었다. 나는 왜 여기에 있지. 조율자는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지? 생각할 여력이 없다. 조율자의 말도 가까스로 들을 수 있다.
"고작 그것이 너다. 위대한 가능성을 품고 있음에도… 빛을 가지고 있음에도."
"남들에게서 빼앗은 것은 받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한 번도 내게 그것을 달라고 한 적이 없다… 왜 하필 내가 알파를 죽이게 만들었지? 동료를 상잔하는 데에 내가 주저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인가? 감시자에서 멀어지는, 감성을 되찾으려는 시도의 무용을 증명하고 싶었나. 이 빌어먹을 것아. 너를 반드시 찾아내겠다. 찾아내서 네 모든 샤이닝을…!"
"…호. 호텔?" 여성이 호출명을 부른다. 아군? 아군인가?
"여기는 호텔. 타겟 메리와 고착 중이다. 지원이 필요하다."
"여기는 하하호호다. 지원이 도착했다고 알림." 내 곁에 누군가가 앉아 팔을 뻗는다. 총을 겨누는 건가? 두 명이다.
"여기는… 마유즈미다. 도와주러 왔다! 고 알림!"
지원이다. 기이한 호출명을 쓰는 지원이다.
마침내 지원 병력이 왔다. 내던져지지 않았다. 나를 돕는 이들이 있다. 아군. 아군이다. 살아남은 이들이 있었나? 오퍼레이션 블러디 메리는 실패했다. 누가 살아남았나? 생각해 보았다. 누가 조율자를 대면하고 살아남았지?
"너는 이제 안전해. 우리가 왔으니까! 우리는 네 친구야. 카친이야!"
그들은 나를 해치지 않는다. 나는 안전하다. 상황 해제? 조율자가 있는데. 다시 보니 조율자는 이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상황… 해제.
동시에 나는 깨닫는다. 그들은 나의 동료일 수가 없다. 나의 동료들. 그들은 다 죽었다. 과거의 동료는 그렇다. 오퍼레이션 블러디 메리는 폐지되었으니 증원도 없다.
그들은 현재의 동료다. 그들은 현재의 카텟이다.
"다 죽었지… 맞아. 다 죽었다… 전부 다 죽고. 나만이 남았어…"
나는 강직된 내 몸을 이완시켰다. 손에서 힘을 풀어 총을 놓는 것에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익숙한 손길이 내 몸을 뒤흔들려했지만 내 몸은 뻣뻣하게 굳어 조금밖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토록 작은, 조금의 굳은살만이 배긴 손은 내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지만 그 진동만큼은 내 안에서 점점 커진 끝에. 나를 온전히 뒤흔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내가… 내가 너희를 해쳤나? 설마. 너희를 위협했나? 또?" 나는 총을 홀스터 안에 넣고 물었다. 눈으로는 그들의 전신을 훑었다. 외상은 없었다.
"아니. 이름 말고 호출명 부르라고 한 거 빼면 아무것도 없어. 대체 뭘 본 거야? 너 정신이 나간 것 같더라."
"조율자를… 조율자를 봤다. 그렇지만 여기에 있을 리가 없어. 이름 없는 남자의 모습과 조율자가 겹쳤는데. 그는 조율자가 아니다. 나는 조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그것은 그가 아니다. 나는… 무엇을 본 거지? 여기는 어디고?"
"동굴이야. 엄청 길어. 히무로. 네가 느닷없이 타겟 메리? 를 찾았다며 달려 나가더니 멈췄어. 괜찮아? 좀 쉬어 갈까? 너 지금 엄청 창백해…" 나는 마유즈미가 다이얼로그의 빛을 내 쪽으로 비춰서 내 안색을 살피고 있음을 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털썩 주저앉았다. 하의를 뚫고 나오는 동굴의 습기를 느꼈다.
"원래도 창백하긴 한데. 지금은 정말 백옥같이 하얘… 근데 칭찬은 아니고. 너무 걱정되는데…"
"나는 너희가 걱정돼…"
나는 마유즈미의 손을 잡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익사하려는 자가 구조인을 물 밑으로 밀어내듯. 그녀의 손을 잡는 순간 으스러뜨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치가 떨리게 만드는 고통을 느꼈다. 심리적인 이유로 발생한 게 분명했으나, 나는 그 고통을 적확한 단어로 표현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직 가슴에 뚫린 공허. 차가움 따위의 단어만이 떠올랐다. 그 이상은 없었고, 오직 그것을 증폭시킨 무언가가 나를 끊임없이 찌르는 듯했다. 나는 무엇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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