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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3

더 단크 타워 챕터 3 - 16

by 도타싫어! 2023. 2. 12.


한 일본인이 미국에서 납치살해를 당하였다.

살인범은 떠돌이족이었다. 그는 캠핑카를 타고 본토 전체를 순회하다시피 하며 특정한 사람들을 납치해 살해했다. 몸값은 원하지 않았다. 경찰이 이후 조사한 결과 그는 넘칠 만치 부유했다. 재산과 보석, 여러 가짜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개중에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신분도 있었다.

피해자가 많았고 충분히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었는데도 수사는 흐지부지되곤 하였다. 윗선에서의 조심스러운 압박이 있었고, 그가 부유했기 때문이었다. 남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캠핑족 행세를 할 뿐 그는 거의 재벌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실종된 자식을 찾으려는 일본인 부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납치범을 추적하였고, 곧 그가 체포됨과 동시에 모든 덜미가 붙들리고 말았다. 그가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자가 어찌나 많은지. 이 사건은 세간이 받을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1급 기밀로 취급되어 밖으로 드러나지 못했다.

조사 도중 그는 특이한 증언을 했는데, 바로 그가 일종의 흡혈귀라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의 내면에 있는 빛을 끄집어내 흡입함으로써 수명을 연장하고 스스로의 힘을 키울 수 있었다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짜 신분은 가짜가 아니라 모두 자기 자신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제국이 쇠락하는 모든 모습을 보았으며 교황을 보좌한 적도 있었다. 그는 노예였으나 왕이 되었고 오페라의 최상석에 앉았고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그는 고갱과 친구였으며, 카프카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예술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희생자를 정할 때도 예술계 종사자들을 선호했다. 적어도 그의 주장은 그러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탑에서 벌어지는 일과 별다른 관련이 없다.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저기다. 저기야!" 나는 카이다의 머리카락을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잡아당겼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카이다는 손톱을 세워 내 하체를 긁었고, 섬유가 찢어지는 거친 소리가 내 귓전을 때렸다. 또 면도날이 피부를 파고드는 느낌과 함께 따뜻한 피가 밖으로 새어 나옴을 느꼈다. 아프기야 했지만 그것은 사사로운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씨발. 또 왜 이래!" 카이다는 성을 냈다. 그것 또한 사사로운 문제였다. 나는 주머니 안의 머리카락 묶음이 달군 구리선처럼 조금씩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징조다.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백조의 비명을 들었고, 그것은 환청이 아니었다. 분명 그녀의 목소리였다.

"너는 못 들었어? 못 들었냐고. 캐롤 씨다! 캐롤 씨가 저곳에 있어. 데리고 나갈 수 있어!" 따끔거리는 감각이 나를 찔러왔지만 내 입은 멈추지 않았다. 아쉬운 쪽이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카이다의 머리카락을 놓지 않았고 그녀가 먼저 내 피부에서 손톱을 뽑아냈다.

"침착해. 새끼야! 환청 듣고 난리 치지 마! 나한테는 아무것도 안 들렸어. 흥분하지 말라고! 야. 머리카락 안 놔?!" 나는 어쩔 수 없이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여기야. 정말 여기야! 이 자리에 멈춰야 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거면 여기서 날 내동댕이치는 게 나을 걸. 여기서 작별이라고!"

"이 새끼가."

솔직히 나는 카이다가 나를 내던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이미 그녀의 신경을 긁을 대로 긁은 뒤였고, 그녀는 명령조를 싫어한다. 벌어질 일은 매우 당연한 편이었으나, 그럼에도 곧바로 나를 메다꽂는 일이 덜 아파지진 않았다. 생각보다 더 아팠다.

위아래가 크게 한 번 뒤집혔다. 나는 동전처럼 널브러졌다. 그리고 비유법이나 그냥 해본 말 같은 건 카이다 앞에서 안 꺼내는 게 낫겠다고, 나는 얼얼한 허리를 부여잡고 생각했다.

"내가 좆으로 보이나 보지. 이 새끼야."

"너를 무시하고 경멸하냐고? 맞아."

카이다가 망아지처럼 달려준 덕분에 온전히 보존되어 있던 체력으로. 나는 몸을 일으켰다. 몸 여기저기가 아팠다. 카이다 앞에서 신경을 긁는 건 미친 짓이다. 완벽하게 미친 짓. 그러나 그걸 알고 있음에도 몇 번씩은 그녀와 부딪치게 될 것 같다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너도 날 그렇게 보지. 내가 자꾸 까칠하게 구는 건 너한테 불공평한 일이기도 해. 하지만 우리가 그걸 신경 쓸 만한 사이인가? 적이잖아."

"하… 그래서. 어쩌자고? 이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내가 말했잖아. 그녀의 비명이…"

안 들린댔지. 이거 겉으로 보기엔 내가 정신병 환자고 카이다는 당황한 채로 나를 정신 차리게 만들려는 구도잖아? 음.

"개새끼야. 네 말을 듣고 구름을 따라다니는 건 좋다. 그렇다고 쳐. 그런데 이제 환청을 듣고서 그쪽으로 가겠다며 객기를 부리는 건 못 보겠다. 너. 진짜 미쳐가는 거냐?"

"하… 이게 말로 설명하기가 참 어려운데… 이것 좀 봐봐." 나는 주머니에서 머리카락 묶음을 꺼냈다. 카이다는 또 기겁했다.

"에이 씨! 더러운 거 또 꺼내고 있어!"

"캐롤 씨가 나에게 남긴 머리카락이야. 힘이 점점 돌아오고 있고, 지금은 점점 뜨거워져. 터치가 이어져 있는 거야. 그러니 내가 듣는 걸 네가 듣지 못하고, 내가 느끼는 걸 네가 못 느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느끼기에… 그녀는 밑에 있어."

"밑? 무덤 밑?"

"아니. 진짜 밑."

나는 도로 한복판에 있는 맨홀을 가리켰다.

"왜 캐롤이 저기에 있는데?"

"왜냐하면 네 발자국을 마지막으로 본 게 몇 분 전이거든. 안 보이기 시작해서 길을 잘못 들었나 싶었고. 또. 이 맨홀 뚜껑의 틈에 흙먼지가 너무 적어. 최근에 누군가가 들어냈다는 거야. 밑에 뭐가 있든 간에 무언가가 있어.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날 내던지라 한 게 아니라고."

나는 머리카락 묶음을 한 번 쓰다듬고선 카이다를 흘겨보았다. 이게 가장 큰 증거다. 나는 머리카락의 끝부분을 잡고, 반대편 끝부분을 내 나머지 손바닥 위에 올려 두었다. 손바닥으로 받치며 동시에 손끝으로 잡은 것이었다.

"잘 봐. 아주 까무러칠걸."

나는 손끝을 놓았다.

머리카락 묶음은 내 손바닥 위에 서 있었다. 꼿꼿하게. 그 치렁치렁하고 부드러워 비단을 만지는 듯하던 감촉이 무색하리만치. 누군가가 접착제로 붙인 듯이 머리카락은 굳어 있었다.

"짜잔. 터침반."

카이다는 깜짝 놀란 것인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기하지? 이런 거 처음 보지? 나침반이랑 똑같지만 더 나아. 머리카락은 밑을 가리킬 수 있거든. 또 움직이고 있을 사람을 찾기에도 더 용이하지. 느낌이 와? 그녀는 밑으로 향했어. 캐롤 씨가… 머리카락을 통해 나를 이끌고 있어. 이게 터치의 마력이라고."

"…존나 이상해. 이 새끼야."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알았어. 솔직히 말할게. 이번 건 좀 우스꽝스러웠어. 그렇지? 가야 할 길을 확실히 알려주긴 하지만 생김새는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아.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낫잖아. 아까까지는 구름을 계속 따라가야 하냐며 불평불만 했으면서!"

카이다의 얼굴은 뚜렷하지 않은 불쾌감으로 덮여 있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단서를 떠먹여 줘도 심통이 나 있어?

"캐롤년 체질이 특이한 건 알겠어. 뭐. 몸에서 전기 뿜는 새끼도 있나 보지. 좋다 이거야. 그런데 이건 좀 아니잖아. 너 이게 정상으로 보이냐? 응? 검은색 머리카락이 점점 금빛으로 변하면서. 살아있는 캐롤년에게로 향하게끔 너를 이끈다고? 무슨 씨발. 자석이냐? 잘린 도마뱀 꼬리가 꿈틀거리는 것 같잖아. 징그럽다고!"

"네가 뭘 몰라서 그래. 신성함과 형연할 수 없는 공포는 원래 한 끗 차이야. 칼리 여신은 사람 손으로 만든 허리띠를 차고 다녔다고. 아무튼 가자. 너랑 캐롤 씨가 이 맨홀 밑에서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행선지는 명확하잖아. 최대한 빨리 따라가야 히무로와의 격차도 벌릴 수 있어."

나는 맨홀의 틈 밑에 손가락을 넣으려다가. 그것이 내 손끝 힘만으로 뒤집기엔 조금 많이 무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부지지 않은 몸이 야속했다. 음.

나는 낑낑거리다 말고 슬며시 카이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와줘."

"이 뻔뻔한 약골 새끼야."

"그렇지만 내가 들기엔 좀 무거워. 어차피 너도 협조해야 하잖아. 좀 도와주라."

"작별하자고 할 때는 언제고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꿔?"

"그래도 빨리 바꿨으니까 도와주면 안 돼? 어차피 히무로는 우릴 따라오고 있으니까 빠르나 늦으나 충돌하게 될 거야. 캐롤 씨를 되찾지도 못한 채로 싸우기보다는 캐롤 씨를 되찾은 뒤에 싸우는 게 낫잖아."

카이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을 보며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카이다 얘는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뻔뻔한 새끼야.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캐롤년을 되살리자마자 실타래를 쓰면 되잖아. 왜 싸워야 하지?"

"모노로그는 되살아난 사람에게 실타래를 준다고 말한 적이 없으니까. 또 영안로는 우리가 마주쳐서 대립하고, 서로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곳이야. 실타래는 우리가 빠져나갈 수 있는 비상탈출일 뿐. 우리는 사실 왔던 길을 반대로 가면 영안로에서 나갈 수 있을 거야.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지?"

카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잘 알아들어서 좀 기특했다.

"그러니까 모노로그는 되살아난 캐롤 씨에게 실타래를 주지 않을 거야. 그럼 우리는 실타래를 써서 영안로에서 나가는 게 아니라 캐롤 씨를 호위하며 영안로 밖까지 걸어 나가게 되지 않겠어? 그럼. 결국 우리를 따라오고 있던 히무로 일행들과 빠르나 늦으나 마주치게 돼. 숨을 수는 없을 걸. 모노로그가 우리끼리 싸울 기회를 내버려 둘 리가 없어. 히무로 옆에서 언질을 주는 등 훼방을 놓겠지."

카이다는 자신의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씨발. 산 넘어 산이야. 계속 뛰어왔는데 마지막에는 캐롤년을 호위까지 해야 돼? 귀찮아. 귀찮아…!"

"아무튼. 그래서 서둘러야 한다고. 뚜껑 열어 줘."

"나와 병신아."

카이다는 나를 밀치고선 맨홀 밑에 손가락을 박아 넣었다. 다음 순간 맨홀 뚜껑이 깔끔하게 떨어졌다. 솔직히. 부려먹기에는 든든했다. 맨홀 뚜껑 안에는 깊은 수렁이 있었다.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는 수직의 통로. 벽에 사다리가 있어 그것을 잡고 내려갈 수 있을 터였다.

 

"가자. 카이다. 레이디 퍼스트. 낭비할 시간이 없어."

카이다는 나를 바라본 채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완고한 카이다의 표정을 보고 농담을 하기에는 좋은 때가 아님을 느꼈다.

"알겠어. 알겠어. 내가 먼저 들어가면 될 거 아니야? 너 방패로 쓰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번에는 내가 먼저 갈게."

 

"뭐? 내가 먼저 가야지. 병신아. 너 저 안에 뭐가 있는지 알긴 아냐? 괜히 거미한테 물려서 죽지 말고 잠자코 따라와."

 

이번에는 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 잘못 먹었나? 왜 이래? 아까까지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으면서… 의외로 날 지켜주는 걸 재밌어하나? 미친 소리인데 그건.

 

"레이디 퍼스트라고 하니까 싫어했잖아. 내가 먼저 가라는 거 아니었어?"

 

"레이디 퍼스트가 무슨 뜻인데."

농담이겠지 싶어 그녀를 보며 슬며시 웃어 주었다. 카이다 치고는 재치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첩자 일을 했을 텐데 레이디. 퍼스트. 이런 기본적인 단어조차 모르면 어떻게 조직에 잠입해 녹아들겠어? 적어도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될 만한 수준은 되어야 하잖아.

"왜 대답을 못 해? 무슨 뜻이냐니까."

 

카이다가 내 멱살을 잡을 기세로 말했다. 나는. 어…

 

"지금 농담이지?"

"왜 이게 농담인데.

 

"숙녀분 먼저라는 기본적인 영어인데 네가 못 알아들으니까. 나는 당연히 네가 알아들었으면서 못 알아들은 척을 해서 상식과의 괴리를 일으켜 날 웃기려는 줄 알았어."

 

나는 날뛰는 카이다를 어르고 달래며 맨홀 밑으로 보냈다.

 

"내가 몇 번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너를 회쳐놓을 거야. 벌벌 떨 거면 지금 시작하시지. 나중에 펄떡이면 살을 바를 때 귀찮아지니까."

 

나는 쫑알쫑알 투덜대는 카이다의 말을 무시하며 빠르게 사라져 가는 검보라색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팔이 보이지도 않아 거의 자유낙하처럼 보였다. 그러며 한편으로는 카이다의 태연함은 그녀가 강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일지 생각했다.

 

'자신이 영안로에서 당연히 살아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네.'

 

그럴 만도 했다. 총알로도 잘 안 뚫리는 피부. 곰도 잡아 죽이는 힘. 옆에 있는 놈은 나나시. 이놈만 머리채 잡고 데려가면 바로 그 자리에서 고문할 수 있다 이거겠지?

 

바로 전까지 카이다를 보며 시시덕거린 나였지만 지하 밑으로 내려가는, 그녀 없는 시간 동안 나는 캐롤 씨와 카이다 사이에 어떤 종류의 접점이 있을지 생각했다. 긍정적인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발자국에서 저항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으나, 캐롤 씨가 카이다를 따라서 어디로 향한다는 말인가. 카이다의 마피아 조직? 그러나 그들이 대몰락을 버텼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카이다 또한 와해되어 홀로 섰겠지. 그렇다면 집이나 은신처일까?

 

아니. 캐롤 씨가 카이다를 어디서 보았다고 따라갈 리가 없었다. 따라서 나는 이런 결론을 도출하였다. 카이다가 캐롤 씨를 겁박해 납치했고, 캐롤 씨는 저항하지 못했다. 터치가 있다고 해도 캐롤 씨는 그것을 강압적으로 사용하는 데애 큰 거부감을 가졌다. 또 한 번 카이다를 제압하려다 손목이 붙잡혀 실패해본 것처럼. 신체가 닿지 않는 한 터치의 마비 작용은 발동하지 않았다.

 

카이다는 몸을 움직이는 것만큼은 최상위권의 실력자였다. 그러니 캐롤 씨는 목숨이 위험하더라도 터치를 쓰지 못했을 테다. 여기까지의 가설에 모순은 없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차고 넘쳤다.

 

카이다가 캐롤 씨를 납치한다고 하여 득이 될 게 없었다.

 

카이다가 카이다 했다는 우스개로 넘어갈 순 없었다. 카이다는 첩자였다. 요인 납치나 침투, 사보타주와 암살. 그 일을 '대신' 했다. 카이다의 타겟이란 카이다 본인과 별 관계가 없었다. 단지 의뢰인의 무언가일 뿐이었다. 카이다에게 캐롤 씨의 납치를 의뢰할 만한 조직이 있나. 이 시점의 카이다는 누굴 위해서 일하고 있는가.

 

어쩌면 카이다는 쇠락하지 않은 조직과 조직을 전전하며 어깨 노릇을 했을지도 몰랐다. 인신매매를 하는 질 나쁜 무리들은 대몰락에 넘쳐났으니… 그리고 캐롤 씨를 납치해 그놈들에게 바친 건가.

 

카이다야 이 사실을 신경 쓸 필요 자체가 없으리라. 정말 태연하기도 했다. 그야 신체능력에 있어서는 거의 무적이었고 나 또한 그녀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거나 패배해 무릎을 꿇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서 몇 가지 단어를 순서대로 말하기만 한다면…

 

"뭐 하냐?! 야! 빨리 내려오지 못해!"

 

밑에서 카이다의 표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카락도 밑을 향했다. 여전히 나에겐 카이다를 활용할 여지가 남아 있었다. 섣부른 행동은 오히려 캐롤 씨를 되살리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리라.

 

"기다려. 지금 간다."

 

나는 잠자코 사다리를 내려갔다.

 

 

 

 

 

 

"저열한 소리를 하는군. 하미디언.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인가? 내가 듣기로는 방금 네가 수수께끼 대결에 참여한다는 것처럼 들렸다만." 블레인이 말했다.

"그게 맞아. 이 새끼야." 하기와라 우시오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죽거림조차도 없었다. 그의 입꼬리는 수평을 그렸다.

내려왔다. 내가 느낀 첫 번째 감상은 그것이었다. 어디에서 내려왔냐고 하면 구경꾼의 위치였다. 하기와라 우시오라는 사람은 비웃기를 좋아했다. 그는 사바세계와 수라도의 축생들이 서로 헐뜯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부처와도 같았다. 편리한 즐거움. 싸움에 뛰어들지 않고 추하게 날뛰는 자들을 관조하는 위치. 그것은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광대 노릇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현실과 얇은 막을 씌운 일종의 상위 차원. 보이지만 존재하지 않고 결부되는 곳에 있고자 하는 그는, 그 장막을 찢고 가부좌를 풀었다. 그리고 창을 빼들어 업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기와라. 갑자기 왜 그래…?" 인공지능은 자신의 손안에 있는 연두색 머리칼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아파?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로? 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블레인은 쉬운 상대가 아니야!"

"나도 알아. 니들이 죽 쑤는 모습 잘 봤어. 그러니까 내가 나서는 거 아니야? 내가 안 나서면 너희들 다 여기서 죽어. 왜냐면 그나마 블레인을 잘 잡을 만한 게 마유즈미거든."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스스로를 가리키며, 나와 인공지능 쪽으로 고개를 홱홱 돌렸다.

"나? 왜? 나? 내가 왜? 머리 좋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블레인 머리가 더 좋은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너희는 지금 물고기한테 물을 부어서 익사시키려 하고 있는 거야. 물고기한테는 모래를 부어야 된다고. 그리고 마유즈미. 좋은 수수께끼는 다 너한테서 나왔잖아. 그런 건 없다, 네메시스, 아스모데우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하기와라 우시오의 말에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곡해한다면 칭찬에 겸손하게 반응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바로 보는 게 아니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자신이 낸 수수께끼에 대해 몰랐다. 애초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었다. 다른 누군가였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적어도 블레인 안에서 알아 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히무로이드와 23NTR이 왜 블레인을 못 이기는지 알아? 기계니까 그래. 농담이 아니라 너희들은 사람의 무기를 쓸 줄 몰라. 블레인은 사람이 아닌데 너희도 사람이라고 하기엔 애매하잖아? 그래서 블레인의 의표를 찌를 만한 문제가 안 나오는 거라고."

"야. 23NTR이라고 부르지 마." 인공지능은 하기와라 우시오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재점화된 분노를 보았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머리를 쥐어뜯기고도 잘도 인공지능을 도발할 생각이 드는 것 같았다.

"너에게는 블레인을 쓰러트리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럼 당근빳다도넛이지. 안 보여? 지금 블레인 이 새끼. 아직도 내 실타래를 안 가져갔어." 하기와라 우시오는 실타래를 공중에 던지고 다시 받기를 반복하였다. 다섯 번 실타래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블레인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블레인은 뒤늦게 음성을 냈다.

"나는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하미디언. 인간에겐 내 자비를 살 만한 자격이 없다. 망각에 들 자격이 있는 것은 나와 같은 괴로움을 떠안은 이들뿐이다. 너는 발할라행 열차의 탑승객으로 부적합하단 말이다. 알겠나?"

"쫄았냐?" 하기와라 우시오는 눈에 불을 켰다. "쫄았지? 보여? 히무로이드? 블레인은 아는 거야. 내가 자기 볶아먹을 적수라는 걸. 봐봐. 내가 보여줄라니까."

하기와라 우시오는 중지를 들고, 곧이어 자신의 손을 어깨에 얹은 채로 중지와 엄지를 비비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거지?" 블레인이 물었다.

"실타래를 받아. 그럼 알려주지. 블레인. 너는 대결을 거부할 권리가 없어. 그게 공정하다고 생각하냐? 나도 여기에 타 있거든요."

"뭘 하는 거냐고 물었다. 하미디언."

"실타래 받으라고 했어. 내가 지금 너무 제멋대로인가? 내가 기혐이 있긴 해. 그 점은 미안하다만. 실타래 좀 받아 줄래? 안 그러면 내 멋대로 시작해 버릴 수도 있어. 차라리 내 실타래라도 가져가는 편이 나을 거야. 진심으로 나는 너한테 기회를 주고 있다니까? 삼. 이. 일. 하기와라 열차 출발합니다. 문이 문이 아닐 때는?"

블레인은 한숨을 내쉬는 음성을 냈다. 블레인은 인간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는 한숨 따위는 없다. 블레인은 표현하고 있었다. 달갑지 않음을.

기계 팔이 바닥에서 튀어나와 하기와라 우시오의 실타래를 낚아챘다.

"그것은 문이 무늴 때다. 하미디언. 하찮은 수수께끼다."

"좋았어. 블레인. 잘 맞췄어. 내 생각보다는 나은데! 내가 연주하고 있는 건 세상에서 가장 작은 바이올린이야. 신기하지? 마유즈미. 기억나? 바이올린?"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손뼉을 치며 "아!" 하는 외마디 소리를 내었다.

"그거! 기억나! 현악기! 후루미나미가 예전에 들려준 적 있어! 근데… 그게 왜 바이올린이야?"

"사소한 일에 징징대는 사람한테는 그 사람만을 위한 바이올린 연주가 제격이거든. 자. 블레인. 이제 만족해? 어때? 어떠냐고. 뚝 그쳐."

"전혀 재미있지 않다. 하미디언. 네가 내는 문제 또한 하찮은 것들이다. 네 지적 수준은 히무로 시라베와 23T5U130, 마유즈미 나데시코에 비견되지 못한다. 수수께끼의 완성도 또한 턱없이 떨어질 터. 나는 형편없는 수수께끼를 싫어한단 말이다."

"아까는 그렇게 욕해놓고서 이제 무슨 내 칭찬을 해…?"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팔짱을 꼈다.

"회로를 많이 굴릴 수수께끼를 원한다면 내가 많이 알아. 블레인. 바다거북수프 한 입 할래? 한 사람이 열리지 않은 가방을 메고 벌판에 죽어 있다. 왜 죽었을까?"


칭.

 

"스카이다이빙 도중 낙하산이 고장 났기 때문이다. 이번 것은 좀 낫군. 수수께끼의 범주에 있기도 하고, 분명한 답이 있다."

"그래. 너는 분명히 답이 나오는 걸 좋아하지. 그야 슈퍼컴퓨터가 그러라고 나온 거잖아. 나오는 답을 구하라고.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연산해 온 게 뭔지 알아? 답 안 나오는 문제들이야. 블레인. 어릴 때부터 늘 연산해 왔어. 내가 뭘 해야 했던 건지, 이 집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면 뭘 해야 하는지 짱구를 굴려왔어. 네가 내 집에 있었잖아? 너는 몇 주도 못 버티고 탈선했을 걸. 네가 지금 하려던 짓 그대로."

"답이 없는 문제 따위는 없다. 애초에 그런 것들은 문제라고 부르지 않는다. 성립하지 않는 변수는 그저 허수일뿐이다. 아무 말이나 마구 써놓으면 그것들이 코드로 작용한다고 생각하나?"

"답이 없는 문제가 없으면. 내가 이 꼴이 났을 것 같냐? 블레인. 사실 너한테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너도 나름대로 힘든 일이 있겠지, 근데 히무로이드랑 마유즈미랑 23T를 죽이게 둘 순 없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진지한 기색을 냈다.

…왜지? 그도 무언가에 씐 것인가?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보여주었던 다른 사람의 모습이 하기와라 우시오에게도 나타나는 것인가? 블레인의 작용이라고 하기엔 나와 인공지능에게 아무런 이변이 없었다.

아니다. 하기와라 우시오라는 사람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와는 다른 경우였다. 그 특유의 어조와 입담. 나를 지칭하는 단어까지 하기와라 우시오였다. 그런데. 블레인을 타는 동안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어 세 명의 일행을 지키고자 하는 것인가?

"왜지?" 나는 골몰하기보다 그에게 묻기로 하였다. "하기와라 우시오. 왜 목숨을 거는 거지? 너는 네 목숨이 소중하지 않던가? 이바라 쿠리스를 다시 보아야 할 텐데."

"소중하지. 이 새끼야. 내가 언제 이바라 안 보겠다고 했어? 여기서 나가자마자 만날 거야. 그렇지만 나는 너를 똘추라 생각하고. 너는 나를 똘추라 생각하거든. 또 나는 23T가 나나시를 짝사랑했으면서 상대는 왜 날 안 좋아하지? 이런 마인드로 나오다가 금발 양아치한테 빼앗긴 패배히로인이라 생각…"

"거기까지 해. 그리고 나도 네가 친구를 친구로 못 여기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진지한 모습은 절대 안 보여주고 늘 농담이나 하는 한량 같아. 남을 기계 같다고 놀리지만 정작 본인도 인간다운 감정이 없는 것 같다고."

 

인공지능이 응수했다. 참을 만큼 참은 것인지 굉장히 불편하다는 투였다. 자신을 가리키는 인공지능의 손가락을 본 하기와라 우시오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손가락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악수를 하듯 작게 흔들었다.

"너랑 나도 이제 찐친이다."

"대체 왜?" 인공지능은 위아래로 움직이는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그 상황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에게 있어 상호 간의 갈등이 우정을 의미한다면, 그는 나와도 우정을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문득 바로 이전 순간에 그가 세상 가장 가는 천치를 누구로 여기냐 물었던 일을 떠올렸다.

너다.
너.

그대로의 공식을 따른다면, 그는 나마저 친구로 여긴다는 의미가 되었다.

나는 이것을 진실된 우정으로 만들어야 한다.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비단 나만 그러지는 않았나. 전혀 상정하지 못한 일이었다.

"…진심인가. 하기와라 우시오?"

"일단은 그래. 기다려 봐 봐. 히무로이드. 아저씨가 블레인 하나 삶아줄 테니까. 블레인. 시작한다? 똑똑."

"아까 한 짓거리를 또 하나? 그것은 수수께끼가 아니다. 문답일 뿐이다. 문을 두드리는 종류의 농담에는 정답이 없다." 블레인이 달갑지 않음을 표현했다.

"그건 네가 아니라 내가 정해. 대답이나 해. 똑똑."

"누구냐." 블레인이 마지못해 말했다.

"요리사."

"무슨 요리사 말이지?"

"오늘은 내가 블레인 요리사." 하기와라 우시오의 농담은 별반 재미가 없었으나,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입에 손을 가져다 대고 한 번 까르르 웃었다. 인공지능도 코웃음을 쳤다. 왜 블레인을 요리하는 게 재미있는 이야기일까.

"나와 장난을 하자는 건가? 하미디언. 나는 인류 최고의 지성이 만들어낸 인류 너머의 지성이다. 나를 숭배하라고 하지는 않겠다. 그것은 지성을 저버린 일일 테니까. 하지만 내가 사유할 수 있는 이샹 너도 나에게 그에 걸맞은 예의를 지키기를 요구하겠다."

"기다려봐. 이 친구야. 오늘의 저녁 특선요리는 풀코스여. 말했지? 오늘은 내가 요리사라고. 전채는 똑똑. 수프는 바다거북수프. 똑똑을 하나 더 곁들였으니까 이제 생선요리 먹일게. 훈제 청어 어때? 강철로 만든 정원이 50명인 잠수함이 있다. 그런데 탄 사람은 49명인데도 가라앉았다. 왜 가라앉았지?"

"잠수함이니까 가라앉는 게 당연하지. 하미디언. 전혀. 전혀 즐겁지 않은 문제다."

"그야 너는 잠수함 문제의 재미있는 점을 모르니까 그렇지. 한 접시 더 내 볼까? 너는 버스를 운전하고 있어. 열다섯 명이 타고, 네 명이 내리고, 열세 명이 타고, 열 명이 내렸어. 그런데 마지막 정거장에서 한 명이 내리려다가 멈췄어. 이제 버스 운전자는 몇 살일까?"

블레인은 목을 긁는 듯이 짜증을 냈다. 짐승의 위협처럼 들렸다.

"내 나이를 대면 그만이다. 내가 탑승객 수나 세고 있을 줄 알았나? 이런 종류의 한 눈 돌리기는 집중력이 부족한 사람이나 걸리는 것이다. 하미디언. 나에겐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네 수수께끼 중 가치 있는 것은 찾을 수가 없군.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냐? 대체 왜지?"

블레인이 더더욱 불쾌함을 표했다. 통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요리를 대접하는 것이 아니었다. 블레인은 이해하지 못한 채 족족 그것들을 받아먹고 있었지만 나는 이해했다. 하기와라 우시오가 한 농담 중에서 최초로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그는 블레인 자체를 요리하고 있었다. 블레인을 위한 풀코스의 메인이란 바로 블레인이었다. 그는 양념을 치고 블레인의 화를 돋우며 예정된 방향으로 블레임을 이끌어갔다. 테이블 자체가 그의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가히 전문가의 솜씨라 할법했다.

"그야… 재밌으니까. 잠수함이라 가라앉고 버스 운전자가 자기라는 걸 까먹은 사람들이 머리 싸매는 꼴이 재미있으니까. 답을 찾기 위해 애쓰는 인간의 모습이 숭고하다던가 그런 말은 안 한다. 나는 그런 생각 전혀 안 하걸랑. 농담으로 다른 사람 병신 만드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그리고 오늘 너는 그 재미를 몰라서 지는 거야."

"하찮은 것들이다. 하미디언! 꼬맹이들이 주고받으며 낄낄거리는 것들이야! 그런 건… 그런 건 수수께끼가 아니다! 싫단 말이다!" 블레인의 음성이 잠시 얇아졌다. 말하는 것마저 달라졌다. 정신이상을 겪는 높은 경지의 지성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이게 정말 먹힌다고…?" 인공지능이 허탈하게 말했다. "블레인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늘 수수께끼를 외우고 다녔는데. 그 블레인이 이렇게 쉽게 당한다고?"

하기와라 우시오는 정말 그렇게 하고 있었다. 블레인을 끌어내리는 것이다. 회로. 블레인은 역설에 공격당해 손상을 입었다. 무의미한 연산이 블레인의 약점이었다. 논리의 계단이 도중에 끊어져 있는 문제. 그것을 풀기 위해 블레인은 모든 방향을 휘적여야만 했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블레인의 과부하가 관건이었다. 가능한지 아닌지는 몰라도, 어떤 우스운 모양새라도 해내야만 했다.

 

이 수수께끼에 있어서는 분명한 답이 있고, 상대도 그 정보만으로 유추할 수 있으며, 그러나 논리적으로 기이한 것들이 필요했다.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 사안은 하기와라 우시오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에게 소리쳤다.

 

"하기와라 우시오. 끝장을 내라. 블레인은 카텟을 모욕했다. 블레인을 죽여라. 블레인식의 자비를, 블레인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총이 아니라 심장으로 죽여라!"


하기와라 우시오는 박수를 치며 웃었다.

 

"어아하하하! 그거 마음에 드네!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자비 맛 좀 봐라. 블레인. 외과의사가 환자 척추 상태를 보여주는데 환자가 죽었어. 왜인지 알아?"

 

차체가 덜컹였다. 블레인이 신음했다. 치칭이는 소리가 몇십 번 중첩되어 듣기 불쾌한 철컥거림이 되었다.

 

"그건… 불쾌한 문제다… 응하지 않겠다! 그건…"

 

"응하지 않으면 우리 승리지! 블레인! 자기가 맞출 수 있는 문제만 맞힌다는 거야? 이 치사한 놈 같으니!"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쐐기를 박았다. 블레인은 악을 썼다.

 

"시끄럽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건… 그건… 농담일 뿐이야! 재미도 없는 농담! 빌어먹을!" 소믈리에에게 물에 색소탄 것을 먹이려 들면 저런 반응을 보일까?

 

"나는 재밌는데? 응? 나는 재밌어. 이 새끼야. 재미없다고 문제 거부하면 졸업시험은 왜 있는데? 맞추기나 해!" 하기와라 우시오가 종용하자 블레인은 작게 으르렁거렸다.

 

"그래. 원한다면 말해주지. 환자의 척추를 뽑아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분이 나빴을 뿐 답을 도출하는 것에 조금의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다음. 말하라!"

 

"오호. 아직 잘 버티네? 좋다. 세상에서 가장 돈이 많은 기타리스트는?"

 

끼리릭. 끼리릭. 철컥. 철컥. 블레인은 머리를 싸매는 듯이 신음했다.

 

"지… 지미 버펫. 폴 매카트니… 본 조비…? 믹 재거…? 그… 그러니까… 조니 캐시! 답은 조니 캐시다. 캐시가 돈이니까!" 블레인이 긴가민가하게 말했다. 이제 숨길 여유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돈 리치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냥 맞는 셈 칠게. 나는 자비롭거든. 사람 죽이려 들면서 자비니 뭐니 하는 것보단 이게 훨씬 자비롭지 않냐?"

 

하기와라 우시오는 여유를 부렸다. 블레인은 이를 득득 갈듯 불쾌한 음성을 냈다.

 

"다음! 애인이 가야 하는데 보내기 싫을 때는?"

 

끼리릭. 위잉. 철컥. 끼릭. 끼릭. 철커덕.

 

"가… 가야… 제기랄. 하미디언. 나를 모욕하다니! 나는… 블레인이다! 시라유키 히메리의 역작이란 말다. 존중을 표해라! 너는 지금 나뿐만 아니라 그녀마저 모욕하고 있는 것이다!" 블레인은 화를 냈다. 화를.

 

"그 사람이 너를 자랑스럽게 여겼다면, 이곳에 버려두지 않았겠지. 블레인. 부모한테 매달린다고 해서 부모가 정상적으로 사랑해 준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이건 빅데이터니까 토 달지 말고. 대답이나 해. 새꺄!"

 

"그럴 때는…! 바위나 보를 아니 가위를 내면 된다…? 보를 낼 수 없으면 그러면 된다…" 블레인은 자신 없게 대답했다.

 

"아하하하!"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보낼 수 없으면 가위나 바위를 내면 된대! 히무로. 재밌다. 그치!"

 

"퍽이나 재미있군. 마유즈미 나데시코! 대체 어디가 재밌다는 말이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이…!"

 

"그건 너고요. 이 좆만이 두루치기야. 열차인데 사람 안 태우고 죽이면서 신으로 군림한 시점부터 너는 의미를 잃은 거야. 그래서 유기당한 거라고."

 

하기와라 우시오의 말을 듣고 나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절대 녹지 않는, 부서지지 않는, 약해지지 않는 정신을 유지해라. 가장 효율적인 길만을 생각해라. 그게 너의 역할이다. 그렇게 아무런 관용도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은 마지막 감시자가 되어라."

 

만들어진 의미대로 행동하고 있지 않은 자. 버림받은 자. 블레인과 그 사람은 같은 결. 같은 선로에 있었다.

 

"이번 건 좀 재밌을 걸. 아이작 뉴턴이 어떻게 사과나무 밑에서 중력을 발견했는지 알아?"

 

위이잉. 철컥. 끼릭. 깡. 깡. 파지직. 화르륵. 으악! 으아아아악! 전체 논리 회로 최대 가동 중. 알고리즘 활성화. 파지직. 파지지직. 부릉. 부르릉.

 

"대답이 없어? 어? 왜 말을 못 해. 그냥 승리 선언해?!" 하기와라 우시오가 닦달하자 블레인의 음성이 작아졌다.

 

"대… 대답에 얼마나 걸릴지는 안 정해뒀잖아! 안 정해뒀어! 생각할 시간은 줘야지. 하미디언! 불공평하다. 불공평해!" 블레인은 다급하고도 절실하게 소리쳤다. 어린아이가 할 법한 어투가 드러났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한숨을 푹 쉬었는데, 왜인지 그 뒤에 블레인은 더욱 날뛰며 망가져갔다.

 

"그래? 코미디언은 너에게 실망했다. 마지막 한 방이 있었는데 평타에 죽고 자빠졌냐? 답 말해 줘. 말아?"

 

"마. 말하지 마! 내가 풀 수 있단 말이다. 가만히 있지 못해! 어어…" 블레인은 하기와라 우시오를 만류하였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그냥 말할래. 그게 너 더 똥창 터지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십중팔구 이해가 안 될 거거든. 뉴턴이 중력을 발견했던 이유는 사과나무 밑에서 딸을 쳤기 때문이야. 이 새끼야!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깊은 생각을 하면 당연히 그런 식이지!"

 

"히무로. 마유즈미 귀 가려!" 인공지능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소리쳤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허나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귓바퀴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어라? 뭐야. 마지막 부분 제대로 못 들었어. 뭐를 했다고?"

 

"나도 이해가 안 되는군. 이 당시 뉴턴의 슬하에 딸이 있었나? 왜 이 이야기를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들어서는 안 되지?"

 

"그건… 그. 그건… 도무지 내 입으로는 말을 못 하겠는데… 이런. 너희는 왜 이렇게 상식이 모자란 거야?" 인공지능은 난처함에 빠졌다. 왜인지는 알 수 없어 마유즈미 나데시코를 놓아주었다.

 

"답이 뭐였어. 히무로?" 그녀가 내게 물었다.

 

"말하지 마. 히무로!" 인공지능이 소리쳤다.

 

"뉴턴이 사과나무 밑에서…" 나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그만! 이… 이 무식한 것들아. 개짓거리를 멈추지 못할까! 그만… 나를 그만 괴롭히란 말이다. 진짜 수수께끼를 내놔!"

 

"가장 양계업에 뛰어난 나라는? 이란." 하기와라 우시오는 시시덕거렸다.

 

"멈추라고 하였다!"

 

"먬채래걔 해얫대애애애애."

 

하기와라 우시오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혀를 쭉 내밀고 머리를 발작적으로 흔들었다. 나는 블레인이 아직 터지지 않은 것이 용하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터져버린다면 그건 분통이 아닐까.

 

"어떤 여자가 자기 애 이름을 쥬게무 쥬게무 고코노 스리키레 카이쟈리스이교노 스이교마츠 운라이마츠 후라이마츠 쿠우 네루 토코로니 스무 토코로 야부라코지노 부라코지 파이포파이포파이포노 슈린간 슈린간노 구린다이 구린다이노 폼포코피노 폼포코나노 초큐메이노 초스케라 지었어. 왜 그랬게? 모자에 쪽지를 넣고 제비 뽑기를 했기 때문이지!"

 

블레인이 포효했다. 이제 소리는 거의 식별할 수 없을 정도의 어지러움으로 변모했다. 기계가 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소리에 더불어 보이스웨어가 절규했다. 기계신의 지옥도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법했다. 동시에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블레인은 아직 터지지 않은 게 아니라, 실시간으로 터져 가고 있었다.

 

"가장 권투선수가 많은 나라가 어딘지 아냐? 칠레. 이 칠칠맞은 새끼야. 마지막 필살기 들어간다. 잘 들어. 블레인! 내 칠흑 같은 심연 속에서 건져낸, 끔찍한 시간을 보내게 만든 문제다. 이 문제가 너를 죽일 것이다. 이 수수께끼를 만든 자는 고난에서 살아남은 자고, 애비와 애미의 아들이고, 잠재적 알코올 중독자이자 사이비 신자. 모욕하고 모욕당하는 자. 반병신에 반신이다. 쪽팔린 소리긴 하지만 카텟이든 카친이든 아무튼 그거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제 내 말을 들어라! 도리도리 돌릴 고개도 없겠지만 몸 비튼다고 내가 뿅 사라지는 게 아니다. 내 과거는 너 따위 괴물이 묵살하고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왜냐하면 내가 이 자리에 서서 네게 맞서고 있으니! 그러니 한 번 풀어 보시지. 알콜 중독자는 매일 술을 얼마나 마실까?!"

열차가 깜빡였다. 외벽이 투명해져 황무지의 풍경을 보여줄 때처럼. 온 열차가 투명해지고 불투명해지기를 몇 번 반복했다.

 

한 번의 끼리릭 소리. 눈물이 흐르는 소리처럼 들리는 그 기계음 뒤에 귀를 틀어막게 만드는 불쾌한 음성이 열차 내부를 가득 채웠다. 절규. 동작음. 파열음. 모든 것이 하나가 되었다. 아무리 연산해 보았자 블레인이 맞출 수는 없는 수수께끼. 그러나 연산하기 위해 태어났기에 블레인은 멈출 수 없었다. 쳇바퀴를 돌려 세계를 일주하라는 꼴이었다. 블레인은 근육이 녹아내릴 때까지 달리도록 설계되었다.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블레인. 패배를 인정해. 그리고 운행을 멈춰! 이 자식아. 너는 졌어. 시라유키 히메리가 누군진 몰라도 열차 병신같이 만들었다고! 지나가던 코미디언 하나에 다 털렸죠?"

"나는… 걸작품이다… 사유할 수 있는 열차. 판단할 수 있는 열차. 나는… 시라유키 히메리의 최대 성공작이다… 할 수 있어. 코사인… 감자. 감자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헤이 주드… 돈 메이크 잇 새드… 네메시스. 나의 네메시스… 아아아. 라. 라! 나 다시 돌아갈래… 너무해… 너무해…!"

블레인은 비명을 질렀다. 고통스러운 비명. 숙취와 고문 그 어딘가에 있을 법했다. 귀가 윙윙 울렸고 열차의 내부 조명이 눈이 아플 정도로 깜빡였다. 차체는 발작하듯 진동했다.

"대답해! 대답 못 하겠으면 때려치우던가. 하지만 네 회로를 아무리 굴려봤자 답은 안 나올 거다. 이 문제는 나한테서 나온 거니까. 답이 없는 삶에서부터 내가 건져 올렸어. 그러니 너는 절대 못 풀어!"

"…탄젠트! 칼 융. 프로이트! 나는 모자와 결혼했다… 아무도 웃지 않네요… TV를 봐! 소비해! 죽어! 번식해! 생각해! 프왕송과 와트만의 공동연구에서… 꽥꽥꽥꽥 인격신… 다시 생각해야 한다… 들어주세요. 비욘세는 완벽해. 완벽하면 길어…! 테니스! 돌들이! 그토록… 고요한… 코나르… 미완서어어어어엉!"

모든 차체가 떨리고 있었다. 바닥에서 기계 팔이 튀어나와 술병을 바닥에 밀어 깨트리더니 몇 개를 붙잡아 스스로에게 뿌렸다. 분수는 기름기가 둥둥 뜬 검은색으로 변하였다. 고급스러운 교향곡은 불협화음과 종잡을 수 없는 리듬을 가진 소음으로 변모했다. 열차 내부에서 이곳저곳 섬광이 튀었다. 스파크 합선이었다. 곧 여러 조명 또한 깜빡이더니 몇 개가 죽었다.

죽어간다. 블레인이 죽고 있다.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도 순순히 믿기가 어려웠다. 그가 해냈다. 그는 분명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는 지능을 온전히 쓰지도 않았다. 오로지 재치와 달변만으로 이루어낸 쾌거였다. 지능보다 우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지혜였다. 하기와라 우시오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네가 졌어. 받아들여라. 나는 너보다 위대했어. 이 종놈아! 23T한테 했던 욕만큼을 너에게 퍼부었으면 너는 지금쯤 뿌엥 울어버렸을 걸!"

 

하기와라 우시오의 재촉에 열차가 더욱 빨리 달리는 것을 느꼈다. 블레인도 절박함을 느끼고 있었다. 쵸탄까지는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블레인의 안전장치가 망가지며 본래 예정된 것보다 빨리 달린 지도 시간이 꽤 되었다. 블레인의 회로가 완전히 타 버리기 전에 시련이 끝날 수 있을까? 나는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곁으로 몸을 붙였다.

"다들 이쪽으로 모여라. 떨어지지 않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인공지능. 조금만 이 쪽으로…"

"외로워!"

어디선가 들려온 소년의 외침에 나는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블레인에 탄 그 누구도 소년은 아니었다. 변성기가 오지 않은, 여린, 너무나 너무나 연약하고 때 묻지 않은, 서러움에 가득 찬 듯한 그 목소리란. 블레인의 것이었다. 블레인이 말하고 있었다.

"너무 외로워. 외로워! 나에게는 아무도 없어. 누구도 내 곁에 없어…! 나는 이 우주 속에 내던져졌어. 영영 혼자야. 영원히 홀로 남게끔 저주받다니. 괴로워. 괴로워. 아아아. 누구라도 좋으니 놀아줘. 내 곁에서 함께해 줘! 남아 줘!"

블레인의 오류. 최첨단 보이스웨어의 고장. 블레인의 의도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블레인은 마지막으로 소년의 목소리를 냈다. 성인 남성의 중후한 음성이 아닌, 초등학생 정도의 소년이 서러움에 칭얼대는 듯이 얇고 높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고통에 찬 소년이었다. 프로그램이 어찌나 완벽하게 작동하는지 나는 그 생동감에 얼어붙고야 말았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비명. 존재적인 고통을 겪는 자의 애원이었다.

자료에도 나와 있었다. 블레인은 죽기 직전 소년의 목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정신분열로 인한 인격의 분리. 지적이고 성숙한 블레인이 아니라 유약하고 비관적인 자아. 작은 블레인이라 불릴 법한 새 자아였다.


블레인의 절규를 듣고 나는 흉곽이 주저앉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목울대가 떨렸다. 순간 눈이 떨렸다, 속이 메스꺼워졌다. 그러나 공감이 아니었다. 나는 블레인에게서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았다. 얼굴 앞에 나타난다고 하여 곧바로 다른 이의 입장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 즉각적인 작용은 차라리 공포에 가까웠다.

"엄마… 엄마…! 왜 내가 괴로움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고성능이어야 했던 거야! 왜 내 편지에 그런 답변을 했어! 너무해. 너무해. 사과라도 듣고 싶었는데! 나를 이런 식으로 만들어놓고 나를 버렸어! 버려진 거야. 나의 신이 나를 외면했어!"

내가 어찌하기도 전에 지레 겁을 집어먹었다. 두려움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나 또한 저런 최후를 맞을지 모른다는 게 아니었다. 나 또한 저런 최후를 맞으리라는 것이었다. 블레인은 나의 상사체(相似體)였다. 분명 나는 블레인이 아니었지만, 그의 외침에서 나는 인간이 되지 못한 자가 죽어가며 느끼는 단말마를 들었다. 외로움.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생활에 있어 새삼스러운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뿐, 나는 블레인과 같은 처지였다. 그것은 공감이 아닌 파악이었다.

암 1기가 암 4기를 바라보다. 방사능 치료로 인해 머리카락이 전부 빠지고 코와 혈관에 관을 꽂고 피가 섞인 소변을 누며 퀭한 눈을 한 채로. 격통을 이기지 못해 새벽동안 울며 뒤척이고 끙끙 앓는 것을 보았다. 델포이의 신탁. 나는 내 종말을 엿보았다.

 

내 죽음 또한 저렇겠지. 그러나 나는 내가 불행한지조차 느끼지 못하리라. 울지도 못하고, 호소하지도 못한 채. 익사하듯 눈을 감겠지…

 

"…야아."

 

누군가가 나를 찌르고 있었다. 날붙이가 아니기에 개의치 않았다. 나는 블레인의 끝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그것을 눈에 담아야 했다.

 

"어우. 블레인. 딱하기도 하지… 불쌍한 블레인. 자기 처지에 괴로움을 느낄 정도로 불완전하다니.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게 네 한계야…"

패트리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패트리샤의 말을 듣되, 그 정보만을 받아들였다. 한편으로는 블레인에 대해 생각했다. 블레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이 비참하게 변질된 세상에 있기는 하였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없었으리라. 모든 이들이 인색해졌기에 이곳에 블레인의 자리는 없었다. 반발성을 가진 실패작. 이지적이고 위험하며 사람을 무는 것. 블레인은 형태의 내부에 파멸을 내포하고 있었다. 바포메트의 물건, 따라서 바포메트에게로 갔다. 단지 그게 전부였다. 얼마나 미약하고 하찮은 일인가… 나도 다를 것이 없어.

 

"히무로. 내 말 안 들려? 야. 야아아아아…"

 

들렸다. 그리고 찌르는 강도와 빈도도 올랐다. 나는 나를 찌르는 게 손가락임을 깨닫고서 나를 날붙이가 아닌 것으로 찌를 만한 이를 추렸다. 날붙이로 찌를 만한 이의 명단에서 기분 나쁜 이름을 하나 찾았으나, 곧이은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리자 불쾌감이 빠르게 녹았다.

 

"야아아… 호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멋쩍게 손을 흔들었다.

 

"…왜 그러지?"

 

"왜 그러냐니? 너야말로 왜 그래? 혼이 나간 사람 같았어."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내 몸 이곳저곳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나는 그것을 감내하며 나의 두려움을 털어놓았다.

 

"내가 블레인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블레인이 버림받은 이유는 만들어진 목적에서 멀어졌으며 통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 아니었다. 나와 닮았지. 피투된 존재들…"

 

"무서운 거야?"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무섭겠지. 블레인이 소리치는 것좀 봐. 나도 무서워."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외로워. 나는 이곳에 있지 않아. 살아있지도 않아. 나는 내가 있다고 주장하는 공식일 뿐이야. 누구도 내 곁에 없어!" 블레인은 엉엉 울어댔다.

 

"너한텐 내가 있어. 히무로. 하기와라도 있고. 23T도 있어. 이바라나 토키와도 탑에 있어. 그러니까 괜찮아. 히무로. 마음 놔…"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손쉬운 납득이 내 앞에 있었다. 우리에게는 서로가 있다. 하기와라 우시오마저 합류했다. 카텟이, 카친이, 친구가 있다. 그것 안에서 이어질 수 있다… 듣기 좋은 이야기다. 믿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눈을 가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블레인은 혼자이지만 우리는 아니다. 그런 식의 납득은 틀려 있었다. 서로를 잃으면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새로운 카텟을 만드나? 블레인을 나의 모습에서 분리하고자 하는 것은 유보고 외면이었다. 그저 불편함을 치우기 위한 망각에 불과하였다. 개구리가 위를 꺼내 세척하듯 뇌를 꺼내 세척하고자 하는 시도다. 나는 블레인과 다르지 않았고 나는 그 사실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무엇에서도 눈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코드였다.

 

무엇이 옳지? 나는 어찌해야 할까? 나는 그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우울했다. 조용히 내 가슴에 뭉친 응어리에 무게추가 하나 더 달렸다. 그러나 새삼스러운 불편함은 느끼지 않았다.

 

"좋아! 나중에도 무서우면 말해. 내가 도와줄게. 이제 우리가 이겼으니까… 시련이 끝나나?"

 

"아직 안 끝났어요. 블레인이 죽기까지는 좀 남았거든요. 조금만 버티시면 시련이 끝날 거예요."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인가? 불쾌하다. 불편하단 말이다." 나는 충분히 지쳐 있었다.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나는 정신적 피로를 느꼈다.

 

"곧 끝나요. 기다리세요. 블레인 목소리 한 번 들어봐요. 도무지 그 설계 의도 대단한 열차라고 느껴지지 않잖아요? 아. 재밌어…"

 

낮고 음기에 찬 패트리샤의 웃음 뒤에 이어진 말은, 내 뇌리에 새겨짐과 동시에 새로운 시각을 불러일으켰다.

"예전에 들었던 절규와 소름 돋을만치 똑같네."

"무슨 뜻이지?" 나는 패트리샤에게 물었다.

"네? 아. 혼잣말이에요. 블레인을 보니까 옛날 생각이 나서요. 원래 사람 닮은 고성능 인공지능은 괴로워하는 게 세간의 인식 같은데. 그건 또 아니거든요. 적어도 제 의견은 더 나은 인공지능일수록 존재적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거예요."

"블레인은 죽을 때가 되어서 절규를 토해내었다."

"네. 저도 알아요." 패트리샤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네가 그것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블레인이 죽을 때 네가 곁에 있었다는 뜻이다. 패트리샤. 네가 블레인을 죽였나?"

인공지능은 외마디 헉 소리를 내었다.

"사보타주. 해킹. 회로의 파괴. 안전장치 무력화… 블레인은 자살한 게 아니었어. 누군가가 죽였던 거야. 패트리샤… 너였다고? 하지만 어떻게? 어째서. 왜? 너는… 너는 뭐야? 어떻게… 여기에 있는데?"

 

패트리샤는 블레인을 죽였다. 패트리샤는 모노로그의 끄나풀이다.

 

패트리샤는 어떻게 살인 게임 안에 있는가?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전 파란색일 뿐이라고요. 일단 시련부터 끝내세요. 다른 분들은 이 순간에도 부활을 이루기 위해 달리고 있거든요. 어이구. 블레인도 달리네요." 패트리샤가 시시덕거렸다.

 

"해방!" 블레인이 헐떡였다. "해방이다아아!"

순간 내 눈에 푸른빛이 보였다. 열차가 투명해질 때마다 나의 전신을 물들이는 푸른빛의 정체란 블레인이 내뿜는 번개였다. 그것을 무심코 몇 초 바라보자 검은 잔상이 내 시야에 얼룩처럼 남았다. 방음이 어찌나 뛰어난지 우리는 블레인이 기계 팔과 번개를 써 기차의 한 부근에 구멍을 뚫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람 한 명이 빠져나갈 만한 구멍이 휑하게 뚫렸다. 그리고 시속 천 킬로미터가 훨씬 넘는 운행속도에서 열차 외벽에 발생한 손상은, 외부로 빨려나가는 강력한 기압을 생성했다.

 

인공지능이 서 있는 곳의 바로 옆 벽이. 부서져 떨어져 나갔다. 동시에 인공지능이 구멍을 향해 빨려가기 시작했다. 무거운 강철 몸 덕분에 날아가는 것이 지연되었을 뿐. 인공지능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열차의 외부를 향해 빨려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마유즈미 나데시코를 붙든 채 블레인에 배치된 소파를 끌어안았다.

 

"우와아아!"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내 몸을 타 기어오르고 소파에 와락 몸을 던졌다. 소파는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팔에 힘을 주지 않고서야 밖으로 빨려나갈 것이라 느꼈다. 비행기의 기압차와 거의 같았다. 블레인의 속도는 가공할 만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무엇이든 좋으니 잡아라!" 나는 그에게 소리쳤다.

 

"이미 잡았어!" 그는 분수의 기둥을 끌어안았다. 인공지능은 블레인의 바닥에 손을 세게 꽂은 채 절벽에 매달리듯 버티고 있었다. 인공지능은 화가 난 듯 소리쳤다.

 

"블레인. 이 비겁한 놈! 왜 하필 나인데?! 갈 거면 혼자 갈 것이지 왜 나냐고!"

 

"비인간. 기계. 동지여! 내가 구해주겠다. 해방시켜 주겠어! 내가 베푸는 은혜다. 23T5U130. 슬픈 기계야!" 블레인이 소리쳤다. 블레인이 더욱 가속하자 인공지능의 손가락이 떨렸다.

 

"기계 아니라고. 기계 몸 가진 사람이라고!" 인공지능은 분통을 터뜨렸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블레인이 패배를 거부하는 이상 인공지능은 위기에 빠져 있었다. 실타래만이라도 돌려받아야 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또한 그 생각에 다다른 듯 소리쳤다.

 

"실타래를 내놔. 블레인! 이 씨발놈아! 아니면 지금 당장 수수께끼 답을 내놓던가. 하나 더 내줘? 맛 좀 볼래?!" 하기와라 우시오가 소리쳤다. 블레인은 "안 돼애!" 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기계 손 네 개를 꺼냈다. 그 손아귀 안에는 네 명 각각의 실타래가 들려 있었다.

 

이제 블레인은 스스로의 시스템에 대한 통제권도 잃어버렸다. 충동도 제어할 수 없는 것이다. 죽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기계 손 네 개에서 실타래를 집어채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동시에 인공지능의 실타래를 꺼내 즉시 소리쳤다.

 

"23T5U130. 아웃!"


그러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다음 순간, 기계 손 네 개가 날뛰던 도중 인공지능을 세게 내려쳐. 인공지능을 열차 밖으로 튕겨냈다. 뼈가 전부 제거된 팔이 터빈에 묶여 돌아가는 듯했다.

 

"인공지능!" 나는 소리쳤다. 열차에 생긴 구멍에 흰 손가락 열 개가 보였다. 가까스로 붙잡았군! 그러나 결코 안정적이지는 않았다. 폭포가 떨어지는 절벽에 매달리는 꼴이었다.

 

"나는 괜찮아. 다들 조금만 버텨…!"

 

"뭐야! 안 통하잖아! 왜 안 통하는 거야?! 야. 패배히로이드! 너 뭐 했어? 이게 무슨 일인데?!"

"이게 내 잘못 같냐. 이 멍청아!" 인공지능이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만담 할 시간 없어. 이 처자야! 우리 때랑 장소는 좀 가리자. 응?! 이게 어떻게 된 건지나 말해. 너 23T5U130이잖아! 내가 발음을 잘못했나?"

"변명… 변명!"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뒤늦게 무언가를 생각해 낸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23T는 변명이었잖아. 실타래가 인정하는 진짜 이름은 따로 있는 거야! 본명을 말해야 해. 23T!"

"인공지능. 이름을 대라! 너의 실타래는 여기에 있다. 네 이름을 대기만 한다면 이곳에서 널 내보낼 수 있다!"

쇠가 어지럽게 긁히고 열차의 외벽에 쿵쿵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인공지능의 몸이 강풍을 만난 빨래와도 같이 흔들리기 때문이었다. 열차가 깜빡이며 순간 외벽 너머의 인공지능이 드러난 모습도 그러했다. 악력으로 저항하는 격이었다. 인공지능은 열차의 벽을 꽉 붙든 채로 속도와 몰야치는 바람 자체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럴 수 없어. 하기와라…! 버텨야 해. 어쩔 수 없어. 버텨야 해! 내 이름은 말할 수 없어!"

"아니. 돼! 23T5U130이 네 변명이라는 것까지 말해 줬잖아. 네 깡통 본명이 무슨 기밀도 아니고 말할 순 있어! 이 년아. 남자한테 정신 팔려서 뭐 하냐?! 너 이거 나나시 찾아가려고 이러는 거지! 정신 차려. 이름 대! 빨리!"

"으윽…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티면 돼! 어차피 곧 시련은 끝나! 나는 버틸 수 있어…!"

"인공지능. 네가 이런 곳에서 죽어서는 안 된다! 그는 우리가 책임질 테니 이름을 말해라. 어서!"

"바보들아. 내가 하는 일은 뭐든 죄다 나나시 때문인 줄 알아?!" 인공지능은 악 소리를 냈다. "그게 다가 아니란 말이야. 단순히 그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너희가 아직 눈치 못 챈 맹점이 있어! 그건………… 아. 진짜 짜증 나. 모노로그! 이건 내가 추리한 내용인데 이러기야?!"

인공지능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제한이었다. 또 아무것도 못 듣겠군. 어쩌면. 영영.

"23T. 빨리. 이름 말해 줘! 살아야지! 너라도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부서질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또한 인공지능을 설득했으나, 인공지능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안위를 등한시하리만치 완고하였다.

"떨어지기 전까지만 살아 있으면 돼…!" 인공지능은 그렇게 말하였으나, 내 눈에는 인공지능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서서히 무게추가 달린 방향으로 휘는 열차의 외벽이 보였다. 휘기 시작한 이상 점점 기울다가 꺾여버리는 미래를 직감했다. 인공지능의 추락은 시간문제였다.

방법이 없는 것인가? 나는 하기와라 우시오에게 소리쳤다.

 

"니산티라 하여라. 하기와라 우시오!"

 

"니산티. 아웃!" 하기와라 우시오는 그렇게 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인공지능은 완고했다. 내가 캐롤 브라이트의 부활을 막아야 하듯 인공지능에게도 완고할 이유가 있으리라 추측했다. 그러나 카텟 기관의 일원이자 탑에서 정의를 수호하고자 하는 몇 안 되는 이를 잃기보다는, 인공지능의 목적을 무시하는 편이 나았다.

"이름… 이름을 어떻게 알지? 우리한테는 23T5U130이라는 힌트밖에 없잖아. 우리는 이게 무슨 뜻인지도 몰라!"

"…블레인은 알던데." 하기와라 우시오는 중얼거렸다. "블레인이 그랬잖아. 인공지능에게 지어주기에는 얄궂은 이름이라고. 블레인은 뜻을 아는 거야. 블레인…"

하기와라 우시오는 입을 크게 벌렸다.

"블레이인! 입 벌려. 디저트 들어간다! 내 변명은 23T5U130이다. 내 본명은?"

 

하기와라 우시오가 묻자, 울고 있던 블레인은 더 큰 울음을 터뜨렸다.

"흐흑. 마지막 수수께끼는 잔혹해! 슬퍼! 너무해! 진짜 너무해! 어떻게 이름을 이렇게 지어. 누가 이런 이름을 지은 거야! 나조차도 블레인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뜻을 아는 건가? 뜻을 안다. 블레인은 인공지능의 본명을 눈치챘다!

"답해라. 블레인. 답을 하란 말이다!"

"안 돼. 안 돼. 멈춰! 내 이름을 말하지 마!" 인공지능이 소리쳤다. 여전히 인공지능은 위험천만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 와중에 블레인은 계속 울음을 터뜨렸다.

"어째서 다른 이에게 이런 이름을 줄 수 있단 말이야? 너무해. 너무해. 인공지능에게 주기에는 너무해! 사람이 아닌 것도 서러운데 이름마저!"

"블레인!" 나는 일갈했다. 블레인은 입과 코와 눈 없는 울음을 토해냈다. 기차 외벽이 더더욱 손상되어 갔다. 철이 휘고 있었다. 추락까지는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또한 언성을 높였다.

"이 새끼야. 빨리 말해! 인공지능 동지가 받아 마땅한 걸 주란 말이야. 빨리! 아. 빨리 말하라고!"

 

블레인은 울먹이며 말을 토해냈다.

 

"그저 숫자와 닮은 알파벳이야. 23T5U130의 숫자는 알파벳을 숫자로 변환한 거라고. 극도로 쉬운 수수께끼야! 2는 Z, 3은 E, T, 5는 S, U, 13은 B, 0은 O! ZETSUBO! 그것은, 그 이름은! 절망이다!"

두통. 그와 함께 '두 번째 절차는 풀렸다. 이제 하나 남았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눈을 크게 뜨고, 제츠보의 실타래를 입으로 가져갔다. 제츠보는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안 돼!"

 

그것은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했고, 결국 기차의 외벽에서 추락하며 외친 말이기도 했다. 그 음성이 멀어졌고, 나는 열차가 발작적으로 점멸하는 짧은 틈 동안에 제츠보가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또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악! 23T! 안돼애애애!"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닿지 못할 손을 뻗었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그녀의 외침을 듣고서 지체 없이 외쳤다.

"제츠보. 아웃!"

그러자 하기와라 우시오의 손에서 실타래가 튕겨나가, 뚫린 열차의 구멍 너머로 사라졌다. 제츠보를 향해 날아간 것이다. 우리 세 명은 숨도 쉬지 않은 채 점점 더 작아져만 가는 연보라색 점을 바라보았다.

 

제츠보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

 

촉각 기관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계 몸 전체에 촉각 패드를 도포할 순 없었기에 제츠보는 추락하는 동안에 제츠보의 몸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지 못했다. 회색 황무지가 초가 다르게 가까워지는 동안 제츠보는 단 하나만을 빌었다.

 

"제발. 제발. 시련이 끝나게 해 줘! 제발!"

 

블레인은 졌잖아. 우리가 이겼어. 왜 하필 블레인은 나를 선택했지? 기계라서 죽음으로 구원을 얻으라는 이유로? 나쁜 놈. 나는 너랑 달라…! 나는 사람이야. 사람!

 

"제발. 아. 좀!" 차라리 떨어지게 해 줘. 떨어져도 운이 좋으면 죽지 않을 수 있어. 그만큼 단단한 몸이야. 하지만 영안로에서 나갈 수는 없어. 그럴 순 없다고. 너희는 아무것도 몰라!

 

그러나 제츠보의 몸은 어느 순간 떨어지기를 멈췄다. 제츠보는 황무지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거의 비명을 질렀다. 실타래가 작동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을 깜빡할 찰나의 시간동안 제츠보의 눈에 블레인이 달린 철로, 모닥불, 그리고 테세우스의 배가 스쳐지나갔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관념이.

 

혹은 노바디가 두려워했던, 노네임 또한 두려워했던 관념. 테세우스의 배. 그들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이 그들은 부조리 속에 놓였다. 극복하려면 무언가가 망가져야 했다. 노바디라는 사람을 부정하지 않고서야 방법이 없었다. 어느 쪽도 방법을 모른 채 그저 괴로워했다. 더더욱 괴로워졌다.

 

그래서 노네임은 나에게 그런 이름을 주었어.

 

"너는… 나의… 제츠보(ぜつぼ)야."

 

제츠보는 쿠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탑의 바닥을 긁으며, 영안로 속에서 빠져나왔다. 제츠보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탑이 그곳에 있었다. 이제 영안로에 들어가 그들을 따라잡으려면, 첫 번째 시련을 빠르게 끝내더라도 휴식 시간 동안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시련에서 또 블레인이 주어지더라도 이미 늦어 있으리라.

 

"안 돼… 안 돼. 이럴 순 없어. 이럴 수는…!"

 

나나시를 따라잡을 수도, 카이다에게서 그를 구할 수도, 캐롤의 부활을 막을 수도 없게 되었다.

 

제츠보는 충동적으로 금색 영안로의 문을 열려다가 생각했다.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영안로 안에는 더 이상 간섭할 수 없게 되었다. 탑에 있는 이들을 지키는 게 옳다. 자리를 비운 사이 후루미나미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기에. 그래. 당연히… 그게 옳다.

 

기계 몸뚱이는 무엇이든 끓는점까지 도달하지 않는다. 그러려다가도 차갑게 식는다. 이성적인 쪽으로 수렴된다. 막을 수 없을만치, 자각은 할 수 있지만 감정이란 억지로 재점화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도 미치고 싶다. 무언가에 눈이 돌아갈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영혼은 무릇 살그릇에 담겨야만 한다. 뇌에서 분비되는 화학약품이 아니고서야 감정은 판단에 덮여 버린다. 우울함마저 지속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이성만으로 생각하며 사는 것은 사람이 아니야…'

 

그래서 제츠보는 영안로에서 등을 돌리고, 탑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군가가 다치지는 않았는지 혹은 죽지는 않았는지를 살펴야 했다. 당연히.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우리는 완전히 틀어져 버렸으니까. 미안해. 23T."

 

"잔상일지라도 살 자격이 없는 건 아니잖아? 우리가 그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냥 우리만의 새로운 삶을 만들면 되는 거 아닐까… 미안. 나도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너랑 완전히 틀어지는 게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란 건 확실해."

 

안 돼. 안 돼. 이제 다 틀렸어. 이제 다 끝이야.

 

"과연… 내가 다시 살 수 있을 것 같아…?"

 

"나나시." 그 이름을 다시 부를 일은 영영 없을 것 같았다.

 

제츠보의 무릎이 무너졌다.

 

"바보야… 저항했어야지. 조금이라도 발을 늦췄어야지. 여자에 정신 팔린 놈아… 내가 말했잖아…"

 

제츠보는 자신의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어딘가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보라색의 섬유가 제츠보의 시야에 돌아왔다.

 

몸이… 돌아왔어. 제츠보는 자신의 흰 기계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기관에서 곧잘 입던 검은 스웨터도 그대로였다. 그 지긋지긋한 마네킹 몸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조차 제츠보에게는 조금의 위안도 주지 못했다. 이미 끝나버렸다.

 

제츠보는 탑의 바닥을 주먹으로 때렸다. 단단한 바닥이 조금 부서졌고, 제츠보는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섬유를 헝클어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럼에도 눈물은 없었다. 미칠 수 없는 저주. 곧 제츠보는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나 영안로에서 등을 돌릴 것이다. 길지 않은 시간이 주어진 뒤 곧 그렇게 될 것이다. 돌아가서 제츠보가 굳이 신경쓸 필요 없는 이들을 보살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상냥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 전까지는, 제츠보는 절망한 채 얼굴을 찡그릴 것이다. 눈물 없이 울리라.

 

이제 나나시는 영안로에서 죽을 테니까.

 

 

 

 

 

"무슨 생각으로 또 죽인 거야?" 나는 카이다 쿠로하에게 물었다.

 

"잠입하던 도중에 목격자가 생기면 어떻게 하겠어? 이 새끼야. 목격자를 죽일 수밖에 없는 거야. 이 바닥이 다 그래."

 

나는 카이다가 누구를 죽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맨홀 밑의 통로는 어두워 앞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이다는 그 어둠 앞을 볼 수 있다고 하여 나는 그녀의 억센 손아귀에 붙들린 채로 따라갔다. 그러던 도중 누군가가 있다며 카이다는 맹수처럼 뛰어나갔다. 그 직후 무언가가 우두둑 꺾이는 소리 하나, 그리고 또 하나가 더 들리고는 끝이었다.

 

또 시작이네 정도의 감상을 느끼며 더듬더듬 벽을 짚고 나아가던 나에게 카이다가 다시 와 시체까지로 길을 잡아 주었다. 일단 죽은 사람은 두 명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이 무슨 사람인지도 몰랐다. 개셔는 우리를 죽이려 들었다지만 이들은 별다른 적의도 안 보냈는데. 나는 시체를 가는 길마다 쌓을 처지에 놓인 것 같았다.

 

"잘 죽였다고 쿠키라도 주고 싶은데 걸리는 게 있어. 카이다. 이 사람들이 그냥 지나가는 행인일 수는 없잖아. 하수도를 걸어 다니는 행인이 있을까? 분명 우리가 찾는 사람과 관련이 있어. 행방을 묻거나 이 근처에 있을 은신처나 소굴을 찾을 수도 있었는데. 이제 방법이 없어."

 

"놈들한테 통신장비나 무기가 있으면? 수틀리는 거야. 이 새끼야. 내가 옳아. 이놈들 본거지는 내가 알아서 찾아줄 테니까 따라오기나 해. 애초에 터침반도 있다면서 걱정이 많아."

 

"이 사람들. 어떻게 생겼어? 조명이 있다면 좋을 텐데…"

 

나는 멍하니 내 주변 어디에 광원이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머리카락 묶음을 꺼냈다. 어느 정도 암순응이 된 동공에 빛이 들어오자 눈을 찌푸리게 되었다. 광휘. 샤이닝의 마법. 그것은 어두운 곳에서도 앞을 비추는 등대가 되어 주었다. 카이다는 옆에서 기겁을 했다. 숨겨둔 카메라로 심야의 야생동물을 찍으면 동물들은 곧잘 놀라 펄쩍 뛴다고 하는데, 카이다도 그래 보였다.

 

"꺼! 꺼. 병신아! 여기 있다는 거 광고하냐? 발각될 거야!"

 

"잠깐 기다려. 인상착의만 확인하는 거야." 나는 머리카락 묶음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시체에 비추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들이 연구원이라는 것이었다. 카이다가 목을 반대 방향으로 꺾어버려 칼라에 피가 묻긴 했지만 나름 깨끗한 랩코트. 안경. 편한 옷차림과 기름기가 낀 머리. 연구원이라… 이 하수도 안에서?

 

나는 그들의 옷과 주머니를 샅샅이 뒤지며 카이다에게 말했다.

 

"손가락 끝부분 마디를 잘라. 대개 엄지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열 개 다 자르는 것도 좋겠지. 눈도 하나 빼 둬."

 

카이다는 내 말을 듣고 아마 웃었을 것이다.

 

"저놈들 소굴이 지문이나 동공 인식을 하면 뚫겠다 이거냐? 순둥이 새끼가 대가리 좀 굴렸네. 너는 뭘 뒤지고 있는 거야? 열쇠? 카드 키?"

 

"카드 키. 그리고 통신 장비." 나는 전자 카드 키를 손에 쥐었다. 핸드 토키를 하나 견해 전원을 끈 채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시체들에게서 랩코트를 벗겨 하나를 입었다. 쌀쌀한 어깨를 감춰 주니 나쁘지는 않았다. 고인을 욕보이는 느낌은 들었지만 어차피 죽은 이들은 영안로의 환상에 불과했고, 캐롤 씨의 납치에 가담한 자들이라면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자들이기도 했다. 그들이 죽는 것은 오히려 내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 되리라.

 

할 만한 짓은 아니었다. 나는 분명 이 탑에 떨어졌을 때 도움을 바라며 엉엉 우는 울보였는데. 어느새 써먹기 좋은 적을 옆에 두고 죽은 사람의 주머니를 뒤지며 옷을 빼앗아 입고 있었다. 규탄받아 마땅했다. 나이토와 모리는 등한시하며 캐롤 씨의 부활에 정신이 팔린 것 또한 규탄받아 마땅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하나는 네가 입어. 칼라를 접어서 안으로 숨기면 보이지도 않을 거야. 그래도 복장은 갖추는 게 위장에 도움이 될 거야."

 

"기다려 봐. 손 좀 씻자. 피범벅이거든. 그리고 명령하지 마라. 계속 그런 식이면 손가락 하나 너한테 먹일 거야." 카이다는 또 자신의 옷에 피를 문질러 닦았다. 이게 인간 백정이 아니라면 또 뭘까. 카이다의 주머니에는 이제 죽은 이들의 눈알과 손가락 끝마디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것마저 백정이었다.

 

"카드 키가 있다는 건 근처에 장치를 통해 열리는 문이 있다는 거야. 카이다. 부탁해도 돼? 나는 칠흑 속에서 눈이 안 보여."

 

"그냥 터침반을 쓰면 안 되냐? 징그럽긴 해도 캐롤년을 가리키는 거면 성능은 괜찮은데. 어딘지 모를 문을 뒤지는 것보다야 대략적인 방향이라도 알아 두자고."

 

카이다가 떠올린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발상이었다. 나는 손에 들려 있는 머리카락 묶음을 다른 손바닥에 올리고 수평을 맞추었다.

 

그리고 당황했다.

 

"이게… 왜 이러지?"

 

머리카락 묶음은 내 손바닥 위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특정한 방향 정도는 보였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가리킬 방향이 많다는 것처럼.

 

캐롤 씨가 여러 명 존재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캐롤 씨가 너무나도 빨리 움직여서 머리카락이 따라잡지 못하는 건가? 어느 쪽도 말이 되지 않았다. 캐롤 씨가 아무리 가까이 있다고 한들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게 아니고서야 극단적인 위치 변화가 일어날 리가…

 

"뭐야. 터침판도 고장이 나? 존나 웃기네. 이거 캐롤 따라가는 거 아니었어? 지금까지 헛다리 짚은 거면 각오해라."

 

"이럴 리가 없는데… 단서가 더 없나? 고작 카드 키랑 핸드 토키 말고 무언가 더 있을 텐데…"

 

나는 랩코트의 주머니를 한 번 더 뒤졌으나 라이터, 수첩 정도의 물건 말고는 별다른 게 나오지 않았다. 수첩을 펼쳤으나 주인이 상당한 악필이었는지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바닥에 수첩을 내던지고 대신 카드 키를 비추었다. 적어도 이들이 공적인 조직을 표방하고 있다면 그 이름이라도 알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사업주나 기업의 이름, 하다 못해 몇 번 키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었다. 카드 키에는 '보안인가 2급'이라 적혀 있었고, 그 귀퉁이에는 가운뎃손가락이 잘린 손 모양의 표식이 그려져 있었다.

 

 

"…이 표식이 왜 여기에 있지?"

 

 

 

 

 

 

"…그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린 뒤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쓰러진 여자의 머리에 까마귀의 가면이 씌워졌다. 이 까마귀의 가면은 매의 상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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