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연락이 끊긴 사람이 있다. 전화번호를 모르고 너무 멀리 떨어졌고 너무 오래전에 있었던 일인지라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은 얼굴조차 희미하다. 그러나 살다가 가끔씩 그들이 떠오른다. 그때 나와 첫 키스를 나눈 그 남자애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와 눈사람을 만든 여자애는 어디에 있을까. 취한 나를 택시에 태워 집에 보내준 그 사람은 누구일까. 그들은 영원히 찾을 수 없는 신발 속에 낀 작은 돌멩이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사람이 있다.
자신의 머리가 조금씩 분홍색으로 변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소년이 있었다. 선생님에게 미운살이 박혔지만 그에게는 반론이 있었다. 의사 소견서를 통해 증명된 완벽하게 자연적인 분홍색 머리카락. 결국 그들은 암말 없이 소년을 흘겨보게 되었지만 소년은 그 사실 또한 일종의 자부심으로 여겼다. 칭찬 스티커를 받는 학생은 차고 넘치게 많았다. 소년에겐 염색까지 해가며 타고난 색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소년은 새벽의 산책을 즐겼다. 책에서 나온 대사에서 그 취미가 비롯되었다. 태양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지만 그렇기에 동시에 죽음으로 이끄는 빛이다. 그러나 달은 한 번 반사된 빛이기에 죽은 빛이고, 따라서… 아 뭐였더라. 아무튼 그는 그 대목이 좋았다. 학교에서 꾸벅꾸벅 졸지언정 소년은 이따금씩 새벽 산책을 나섰다. 청소년기에 접어든 이 소년은 자신의 키가 성에 안 차는 것이 그때 잠을 충분히 자지 않아서라며 후회를 느끼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집에서는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들은 소년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없었다. 소년도 그게 편했다. 부스스하게 일어나 옷을 챙겨입고 소년은 동네를 한 바퀴 돌거나 옆동네를 찍고 오곤 하였다. 가로등 밑만을 쏘다니던 그는 점점 정말 달빛만을 받아보고 싶어 졌고. 그 뒤로는 정말이지 겁 없는 어린아이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다녔다. 숲을 쏘다닌다던가 어두침침한 놀이터에 들르든가 폐가를 탐험하는 등의 일이었다. 소년이 가장 즐긴 곳은 다리였는데, 그가 사는 동네의 끝까지 가면 넓고 꽤 깊은 강을 사이에 둔 두 땅을 잇는 다리가 있었다. 새벽에는 어둠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물. 그 위로는 낮에 차가 오갔고 사람이 걸어 다녔다. 새도 내려앉았다. 하지만 밤이 내려앉으면 그 모든 게 사라지곤 했다. 남은 것이라곤 듬성듬성 있는 가로등에 꼬인 날벌레뿐이었다.
소년은 떨어지지 말라고 만든 난간 너머로 목을 쭉 빼 밑을 내려보다가, 그 안에 빨려드는 느낌에 킬킬대며 다시 다리로 돌아오는 짓을 되풀이했다. 실없는 짓이었다. 높은 곳 증후군을 가지고 노는 일. 생각 없는 짓이 곧 용기로 여겨지는 유년 시절에 남자아이들이 담력을 시험하듯이. 소년은 자신이 무적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새벽 산책 하나만으로 그는 자신이 어둠과 친해졌다고 느꼈다. 누구도 모르는 세상의 그림자를 자신은 알고 있다며 그는 만용과 일종의 자부심을 가졌다.
한 소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날은 여느 때와 같은 날이었다. 달이 조금 밝으나 그게 전부였다. 소년은 더욱 즐거운 느낌을 받으며 쾌활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천진한 그 마음 어딘가에는 새벽에 괴물이나 사나운 들개를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모든 어린아이들에게는 만용과 대치할 만큼의 불길함이 있다. 즉 외세계에 민감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산책 도중 불청객과 마주칠 때마다 그러듯이. 소년은 다리에 있는, 멀리서 보이는 윤곽에게로 천천히 경계하며 다가갔다. 대부분은 '어린애가 이 시간에 뭐 해?' 같은 표정을 지으며 지나간다. 그러나 그날은 아니었다.
늘 오가는 그 다리에 한 소녀가 난간에 팔을 걸친 채로. 난간 바깥에 서 있었다. 소녀는 맨발이었다. 소년은 아 쟤도 담력 시험을 하는가 보다 따위의 생각을 할 만큼 백치는 아니었다. 그는 사실 다른 어린아이들보다 조금은 똑똑했다. 저 애는 죽으려는 거다.
소년은 사실 그것을 막아야 한다는 비장한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무작정이었다. 위험하다. 그 생각이 미치자 소년은 더욱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하였다. 놀래켰다가 소녀가 발을 헛디뎌버릴지도 몰랐다.
그래서 소년은 야생 토끼를 마주하듯 천천히. 소녀 쪽에서 소년이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채고 그 굼벵이 같은 움직임에 질릴 정도로 느린 속도로 나아갔다.
소녀의 지척까지 다가갔는데도 소녀가 요지부동이자. 소년은 왜인지 당황하였다. 귀신인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마저 하였다.
"떠… 떨어지지 마!" 소년이 소리쳤다.
"너. 나 알아?" 소녀는 물었다. 그 와중에도 소년의 머리는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가? 아니다. 동갑인가? 그것도 애매한데. 일단 동갑이라 치자. 소녀의 머리는 짧았고 검은색이었다. 소녀는 해진 옷을 입고 있었다. 넝마라 부를 법했다. 가뜩이나 쌀쌀한 새벽에 물가 바로 위에서 저런 옷 하나로 버티다니. 말이 되는 건가? 싶었다.
"뛰어내리면 안 돼. 물이 너무 차가워서 근육이 굳어버릴걸. 네가 수영을 아무리 잘해도 수영이 안 될 거야."
"이 정도 높이에서 뛰면 그냥 죽어. 콘크리트랑 똑같아. 물의 표면에 닿는 순간 몸이 찌그러져. 빠른 죽음이겠지. 익사하지 않는다는 거 하나는 다행이야. 물에 빠지면 소리도 못 지르고, 팔을 뻗어도 수면 위까지는 안 닿아. 그러니 아무리 애를 써봐도 이미 빠져버린 이상엔 아무도 모르지. 그게 나야. 나는 여기에 있다고 소리를 치는데 누구도 몰라."
"왜 죽으려고 하는 건데?" 소년은 물었다. 긴장한 채였다. 소녀는 그런 소년을 작게 웃음을 흘렸다. 한심하다는 듯한 미소였다.
"나는 이제 살 이유를 잃었거든."
"그렇게 어린데?"
"가진 게 없어. 나는 거지야. 그래서 하나만 잃는 게 다 잃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다 잃었어. 이제 영영 가망이 없다고."
이게 어린애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인가? 소년은 소녀의 남루한 차림새를 보며 부모가 뭘 하는 건지 따위의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소녀에게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래서 소녀는 어린 나이에 죽고자 하였다. 너무도 어렸다.
"그러지 마."
"네가 뭘 아는데? 죽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어? 누군가랑 헤어졌는데 다시 만날 가망이 없다는 게 뭔지. 어떤 기분인지 너는 몰라."
"모르지만, 죽지는 마."
"죽는 대신 어떤 시궁창 속을 구르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 이거야? 너 참 무책임하다. 내 앞에 놓인 건 이제 외로움이야. 누군가가 내 곁에 있더라도. 나는 결국 물 위에 뜬 기름이야. 어디서든 그래. 나는 언제나 외로워… 그런데 네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그래도 죽지 마." 소년은 앵무새처럼 말을 되풀이했다. "삶은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어. 정말이야. 아무리 네가 암울하고 지독한 불운 안에 있더라도 그 여정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외로워도 살아남아. 악착같이 살아남아…"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못 믿겠어. 그러기 싫어."
소년은 소녀의 팔에 힘이 조금씩 풀리는 것을 보았다. 끝까지 소녀는 강물만을 내려다보았다.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제멋대로 일을 저질렀다.
소녀의 등 뒤로 재빨리 다가가 겨드랑이 밑에 팔을 끼우고 소녀를 들어 올린 것이다. 어린 나이에 시도하기엔 과격한 동작이었고, 난간을 넘길 때쯤 소년의 허리는 끊어질 뻔했다. 더 나쁜 일은 중심을 잃은 소년이 뒤로 넘어졌고, 가까스로 머리가 아닌 등으로 떨어진 소년과 달리 소녀는 뒷머리를 땅에 세게 부딪혔다는 것이다. 목에 힘을 주지 않았기에 생긴 일이었다.
소녀의 머리에서 조금 피가 나올만치. 그 충격은 컸다. 목숨이 위험한 수준은 아니고 곧 혈소판에 의해 지혈될 만치 작은 상처였으나. 정작 그 당시 놀라고 불안함을 느끼던 소년에게는 피가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죽도록 무서웠다.
소년은 소녀를 다리에 두고 도망쳐 버렸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서로를 만나지 못했다. 소년은 그 당시의 일을 후회했으나 돌이킬 수는 없었다. 집에 데려와서 머리에 반창고를 붙여주었어야 했다고 그는 몇 번이나 생각했다. 찾을 방법은 없었다.
소년은 진짜 어둠을 보았다. 그가 새벽을 즐긴 동안 누군가는 새벽에 홀로 다리 위에 섰다. 신발도 없었다. 그는 새벽에 발을 찍고 나왔는데 누군가는 그 얀에서 살았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소년은 두 번 다시 새벽 산책을 나가지 않았다.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구름이 방향을 조금씩 바꾸었다. 구름을 따라 카이다가 달리는 동안 나는 구름이 일직선이 아니라 조금씩 방향을 바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러드에서 벗어나게 되겠는데." 나는 러드에서 꽤 오랜 시간을 살았기에 러드와 러드를 감싼 다른 도시의 경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잘 알고 있던 곳이 끝나고, 나조차도 모르는 곳이 시작되었다. 지금부터는 온전한 야생이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새끼야. 머리카락 잡아당기지 마!" 카이다가 내 다리를 꽉 붙들며 소리쳤다. 외마디 비명을 토할 뻔했다. 언제나 느끼지만 그녀의 힘은 장사였고, 손아귀 힘은 어찌나 강한지 내 살도 뭉그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리카락 잡아당긴 적 없어. 손에 힘만 준 거라고! 머리카락에 감각이라도 있어?"
"어느 정도. 덕분에 주변을 더 잘 느낄 수 있지." 설마 진짜일 줄은 몰라서 나는 잠시 벙찌게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바람에 나부끼는 그녀의 풍성한 머리카락 한 가닥 한 가닥이 출렁이는 게 얼굴에 바람이 스치는 것을 느끼듯 느껴진다는 거야? 누가 머리를 잡아당기면 머리가 뽑힐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게 아니라 머리카락 자체가 당겨지는 것을 느낀다고?
나는 그녀가 얼마나 많은 개조를 당했는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거슬린다고. 당장 그 손 놔! 이 새끼야. 집어던지기 전에 힘 풀지 못해!"
"야. 네가 지금 시속 50km 정도로 달리고 있잖아. 내가 잡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서 지금 상체가 덜렁거리거든?"
"다리 잡아 주잖아. 이 새끼야! 그리고 야라고 부르지 마. 너 나랑 친해? 너 나 어디서 본 적 있냐? 없으면 씨발 존칭이라도 붙여!"
"네. 카이다 씨. 미안한데. 다리는 덕분에 요지부동이지만 저한테는 허리라는 게 있어서 상체가 앞이나 뒤로 접힐 수가 있거든. 그래서 몸이 뒤로 쏠린다고. 좀 잡게 해 줘! 네 머리통을 부여잡는 것보단 낫잖아!"
"좆까. 그보다 핑키창놈아. 구름을 따라서 걷는다는 개소리 아직도 적용되는 거냐? 구름이 이딴 식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도 어이가 없긴 한데. 여기 끝에 우리가 찾는 게 있다는 것도 어이가 없어서 말이야."
"야. 핑키창놈. 대답 안 해?" 오기가 생겨서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기로 하였다. 나는 분명 몸을 정숙히 해왔는데 느닷없이. 가슴팍에 꽃 문신 단 사람이 나를 창놈이라고 부르니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또 기억 속 히무로도 그렇고, 왜 머리가 분홍색이라는 이유로 분홍색과 관련된 이름만을 주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병신아. 어디까지 가냐고!"
"별다른 일 없으면 쭉 달려! 깨달음의 길이잖아. 우린 지금 순례를 하고 있는 거야. 징조를 기다려. 개셔같은 징조를."
"개셔? 아까 그 새끼? 그놈이 왜 징조인데?"
"네가 러드를 지나갔다는 걸 알 수 있게 되었으니까. 사실 우린 무작정 가는 게 아니야. 네가 갔던 길을 따라가는 거야. 아까 진창에 있던 네 발자국 뒤에 다른 사람의 발자국이 하나 더 있었어. 그러면 이 당시의 너와 네 동행자는 함께 걷거나. 혹은 달리고 있는 거야. 그렇지?"
"그렇지." 카이다가 이해해 천만다행이었다. 나에게는 그것보다 더 쉽게 풀어 말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네 동행자가 아무리 체력이 좋거나 빨라도 널 따라가지는 못할 거야. 너랑 동등하게는 못 가. 그렇지?" 나는 은근하게 카이다의 자부심을 채워 주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누구보다 강하다는 점을 강조하곤 하였다. 아마 그녀가 스스로를 긍정하는 몇 안 되는 부분 중 하나일 것이다.
"당연하지. 이 새끼야. 내가 누군데?" 카이다의 어조에서 숨길 수 없는 자신감이 드러났다.
"그런데 너는 나를 데리고 있는 채로 달리니까 우리는 이 당시의 너에게 가까워지고 있는 거야. 그것도 무척 빠르게. 어쩌면 머지않아서 따라잡을 수도 있어."
"그러면 얼마나 좋아? 문제는 말이지. 내가 나를 잡은 다음에 뭘 해야 하냐는 거야. 죽일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그보다 카이다. 몇 개 물어볼게. 옛날 일은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하는 거야?"
"아까부터 어디서 만나본 것처럼 굴지 마. 새끼가."
"무슨 말을 못 하게 해… 모노로그가 너한테 뭘 알려준 건데?"
"내가 왜 말해야 하는뒈." 카이다가 얄밉게 내 어투를 따라 했다. "우린 적이야. 이 새끼야! 내가 쉽게 쉽게 털어놓을 까봐?"
"뭐라도 좋으니 털어놓으면 내가 귀띔해 줄 수도 있잖아. 맞아. 우린 서로를 싫어해. 아까까지 욕이나 주고받았잖아. 우린 모두 성질이 나빠. 급하기도 하고. 그래서 서로 싫어하는 걸 수도 있어. 불쾌한 자신의 모습을 타인으로 보니까. 하지만 나는 사람의 몸을 개조하고 재능을 인위적으로 주입해서. 사람을 초인으로 만드는 조직을 하나 알고 있거든. 재단이라고 불린 곳이야."
"재단?!"
내 몸이 한 번 덜컹거렸다. 마차가 무언가를 친다면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느낌이 와?"
"아니… 하지만 중요해. 재단. 재단. 중요한 곳이다. 그래! 재단이…"
"분명 재단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을 거야. 네 목적이 그거야? 너를 개조한 자들을 쫓는 것?"
검은색 말처럼 떨며 흥분의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카이다가. 조금씩 몸을 가라앉혔다. 어? 이게 아닌데. 스스로 털어놓게 만드려고 했지만 잘못짚은 모양이었다. 재단이 목표가 아니라고?
"재단이든 뭐든 상관없어. 날 이렇게 만든 건 차라리 잘한 일이야. 이게 아니었으면 아무것도 못 하고 죽었을 테니까. 쓰레기처럼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거야. 힘이 있으니 뭐라도 할 수 있었지… 내가 괴물 같냐? 그게 존나 웃긴 생각이지. 나를 봐. 이 새끼야. 너희 중 누구도 힘으로 내게 개길 수 없어? 나이토? 나쁘지 않지만 형편없어. 야가미? 근육 돼지들보다 내가 더 빠르고 세지. 나머지는 다 쓰레기들이고. 나한테 힘이 없었으면 몇 번 죽었을 것 같냐? 잃어버린 게 있어도 이 정도 힘이면 남는 장사다. 그러니 재단한테는 차라리 감사해야지."
"그럼 너는 뭘 알고 싶은 거야?"
"우린 적이야. 남남보다 멀단 말이다. 나한테서 뭘 캐내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모든 것을 되찾고 말 거야. 카이다." 나는 그녀의 말을 끊고 내가 할 말을 했다.
"내가 있잖아. 모든 기억이 없으니 미칠 것 같더라. 기억이 조금씩 들어올수록 나는 더 살아나. 배고픈 사람이 먹어야 하듯이 나는 떠올려야 살 수 있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카이다. 우리는 뉴런을 헤엄치는 상어야… 이런 말을 하면 미친 사람처럼 들리겠지만, 캐롤 씨가 나에게 씨앗을 남겼거든."
"이 씨발. 뭐라는 거야." 카이다는 질겁했다.
"그녀의 일부가 내 안에 있다고. 제우스가 자신의 넓적다리를 꿰서 아기를 넣고 꿰맨 것처럼. 내 안에 그게 있어. 느껴져. 그 광휘가…"
"뭐. 아기라도 뱄냐? 좆같은 소리 좀 작작해라."
"야. 너야말로 비유를 그렇고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지 마. 네가 야시시한 생각을 하니까 내가 발 페티시니 뭐니 웃긴 소리나 하는 거야." 내 어투에 날이 섰다.
"지랄을 하네. 나 말고 다른 사람도 나처럼 들었을 걸. 아무튼 창놈아. 뭐 어쩌라고? 이제 너한테서 가슴이 튀어나오기라도 하냐? 여자로 변해? 참 보기 좋겠다. 뭐 그딴 옷 입으면서 남자인 것보단 여자가 낫겠지. 그거 야냐? 보통 창놈보단 창년이 더 잘 나가."
어깨 드러내는 내 옷의 어디가 이상하냐고 묻고 싶었다. 나는 카이다가 상대라면 그것을 주제로 몇 시간도 떠들 수 있었다. 너는 옷에 피칠갑을 하고 탑에 온 사람들은 전부 자기만의 특색에 맞춰 입고 다니는데. 어깨 좀 드러낸 게 어떻냐고 시시콜콜한 말싸움을 이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내가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정신에 간섭하는 힘. 터치를 내가 미약하게나마 발현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일부분은 이미 해냈을지도 몰랐다. 나의 무의식은 이미 그것을 감행했다.
"너는 이걸 당해도 싸."
해변에서 카나리에게 손을 내밀며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카나리의 뺨을 때리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려는 게 아니었다. 손만을 잡으려 했다. 그로 인해 끼칠 수 있는 해악이란 하나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서 당시 내가 터치를 조금이나마 구현할 수 있는지조차 나는 인식하지 못했다.
히무로만이 그것을 인식했다. 내가 스스로 무슨 일을 하려는지 모르는 동안 그는 나를 저지했다. 잘한 일이었다. 내 힘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고, 만약 터치가 발동했다 하더라도 그런 방식으로 쓰는 건 캐롤 씨가 기뻐하지 않을 게 뻔했다. 나는 분명 그녀와 다르고, 누구라도 좋으니 책임이 있는 자에게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보복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으나 그녀를 향한 존중만큼은 어떤 형태를 하든 간에 간직해야 했다.
"재단에 대해서나 말해보자. 조율자. 감시자. 로. 이런 말에 뭔가 느낌 오는 거 없어?"
"조율자? 조율자… 글쎄? 그게 뭐더라."
그러다 보니. 나조차도 조율자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적어도 카이다의 목 위에 타서 달려가는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조율자의 파편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한 여성만을 알았다.
"재미있는 이야기 들려주세요."
머리카락 너머의 여인. 제인 "캐롤" 브라이트는 종종 그렇게 나를 보챘다. 비정기적인 만남은 점차 정기로 변해갔다.
"캐롤. 캐롤이라…"
"왜요?"
"그냥 혼잣말이야. 나는 영어권의 미들네임이 이해가 안 돼서 그래. 이름이 따로 있는데 정작 중간 이름을 더 많이 부르기도 하잖아."
"닉네임이랑 미들네임을 헷갈리신 건 아니고요? 힐러리를 빌이라 부를 때 빌은 미들네임이 아니라 닉네임이에요. 그리고 미들네임은 일본에도 있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름도 쭉 풀면 도쿠가야 지로사부로 미야모토노… 아무튼 그거잖아요."
"도쿠가야 이에야스는 지로사부로가 오히려 통칭이었다더라. 당신에게 캐롤이 통칭인 것처럼. 왜 당신은 캐롤을 통칭으로 하는 거야?"
"캐롤이라는 이름. 예쁘잖아요."
"당신 그게 진짜 이름 맞긴 해? 아무리 들어도 당신의 음색은 일본어인데. 혹시 마법이 미국어를 자동으로 내게 통역해 주는 거야? 마법이라서?"
"아뇨. 그렇게 편리한 마법은 없어요. 이름은 정말 제인 캐롤 브라이트예요."
"일본인이? 그럼 내 이름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겠네."
"왜 여자 이름을 대세요?"
"어떻게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여자 이름이야?" 나는 이해가 안 된다는 투로 말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여자라고 주장했던 사람과의 설전이 떠올랐다.
"마리아. 여자 이름이잖아요."
"라이너는 남자 이름이고."
"그래요? 그렇지만 약간 여성적인 남자 이름이에요. 루이스. 레슬리. 랜디. 라이너. 게다가 릴케라는 성도 느낌이 부드러운 게. 여자 이름 같아요."
"이건 또 무슨 억지야."
"정말 캐롤 브라이트가 이름 맞대도요. 일본인이지만 저를 입양한 사람이 미국인이면 그럴 수도 있죠. 네? 저에게 있어선 소중한 이름이에요." 머리카락 너머의 목소리가 뾰로통해졌다. 그렇다면야 할 말은 없었다. 부모님을 건드리는 건 안 된다. 대몰락 시대에는 더더욱.
"미안해. 캐롤."
"사과를 받아들이죠. 그보다. 또 억지라뇨? 저는 억지를 부린 적이 없어요." 아니. 말실수를 하다니. 이런 실수 하나하나가 모여서 내 신상을 맞추는 건데…
"왜 말실순데요?" 아. 또 생각한 그대로 말이 들리냐 보지? 이 대화에 익숙해지기라도 해야겠어. 이러다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여자라고 우긴 사람은 네가 처음이 아니라서." 나는 내 생각을 틀어막고 대신 말을 했다.
"아. 그래요? 봐요. 꼭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그 이름을 처음 들으면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한다고요."
"걔는 사정이 좀 달랐어. 집에 릴케 시집이 딱 두 권 있었는데 하나는 표지가 없었고 하나에는 여자 사진이 표지였던 거야. 왜 릴케 시집 표지를 여자로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 판본이 그랬어. 알 게 뭐야? 릴케의 부인인가 보지. 아무튼 룸메이트랑 시집을 돌려 보는데 룸메이트가 대뜸 이러더라고. '확실히 여성 시인이니 여인의 섬세한 마음을 잘 표현하네.'"
집은 지하기지고 룸메이트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친구지만. 아무튼 근본적으로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랑 똑같은 소리를 했지. 왜 릴케가 여자야? 라고 물으니까 걔는 당연히 여자지 무슨 소리냐고 되묻더라. 우리 모두 너무 확고한 생각을 가졌던 거야. 우리는 릴케를 정말 좋아했거든. 시집을 싫어하는 사람도 지루하면 읽게 되고 읽기 시작하면 빠지기 마련이야. 그래서 우린 존경하는 시인이 나와 같은 성별을 가졌다고 우기는 어린애들이 돼 버렸어."
키득키득거리는 웃음이 들렸다.
"그래서요? 어떻게 됐어요?"
"나야 확고한 논리가 있었어. 라이너. 누가 여자아이 이름을 라이너로 붙여? 그러니까 친구는 또 묻더군. 누가 남자아이 이름에 마리아를 넣냐고. 마리아는 여자 이름 아니냐고."
"다음 이야기는 제가 맞춰 볼까요? 자. 이 시집의 표지를 봐. 어이쿠. 이 여자는 누구지? 누군지는 몰라도 작가 아닐까? 당신도 그 여자가 누군진 모르니 모른다고 하죠. 그래도 릴케는 남자라고 말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우기는 것처럼 보여요. 아. 웃겨라. 릴케가 남자라는 증거는 남쟈라는 사실 하나뿐인데. 릴케가 여자라는 증거는 사실을 제외한 전부잖아요! 릴케는 왜 남자인 거죠?"
"그 뒤로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거야." 못마땅함이 내 음색에서 묻어 나왔다. 당시의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나는 너무너무 억울했지만 릴케가 여자라고 합의했어. 하루종일 쳇바퀴를 돌 바에야 그게 낫잖아. 그래도 어이가 없다니까… 그 여자 누구야? 보통 얼굴을 넣을 거면 작가 얼굴을 넣잖아. 왜 오해를 사게 만들지? 라이너 릴케한테 마리아라는 미들네임을 붙인 사람은 또 누구냐고. 결론적으로. 나는 미들네임이 별로라는 거야. 인생에 하등 도움이 안 돼. 귀찮기만 하지. 시청에 가서 서류라도 떼려 하면 직원들이 매번 고개를 갸우뚱거려, 학생증 만드는 것도 귀찮아져. 남들보다 한자를 몇 개는 더 외워야 하고."
"도쿠가야 지로사부로 미야모토노 씨는 더 살기 힘들었겠네요. 아. 재밌다. 저도 릴케가 여자라고 우기면서 살아야겠네요. 당신. 왜 여자 이름을 쓰시나요?"
"릴케의 시도 모르면서 우기겠다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치. 시 많이 알아서 좋겠네요. 마음에 안 드시면 하나 읊어 주세요. 저도 알 수 있게. 설마 지금까지 릴케 얘기만 했는데 릴케 시 하나도 못 외웠겠어요?"
"나중에 하자고. 당신한테 물어볼 게 또 있어서."
"시 하나 읊어줄 시간도 없다 이거예요? 저희 사이가 그것밖에 안 될 줄이야." 캐롤이 탄식했다.
"우리 사이가 뭔데. 우리는 그냥 케이블로 통화를 하는 사람들이야. 케이블이 마법일 뿐이지."
"지금 저한테서 점수 따실 기회 놓치신 거예요.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요? 릴체 씨. 얌케 씨. 후후."
또 가명이 늘었다. 그리고 하필 또 달갑지 않은 가명이었다. 차라리 릴케라 불러 주지. 그럼 좀 서정적이었을 텐데 얌체랑 섞이며 어느 쪽이고 어감이 이상해졌다.
"당신이 조율자의 파편이라는 거 말이야. 무슨 뜻이지?" 한 번은 물어야 했다. 나는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텟 기관의 중요 인사라면 누구나, 재단의 존재를 알고 경계하는 이들은 로에 대해 알았다.
"로에 대해 아시나요?" 캐롤의 목소리에서 즐거운 기색이 빠져나갔다. 나야 그 백조처럼 우아한 목소리가 즐거워하는 편을 선호하였지만, 모든 주제에 있어 웃으며 대화를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알 수밖에. 카텟 기관에도 불완전한 로가 하나 있는걸."
"히무로 시라베 씨군요. 카텟 기관에 그가 있다는 소문은 멀리도 퍼졌어요." 퍼졌다고? 흠. 무인도 가설은 한 발자국 멀어졌군.
"강경파의 얼굴이지. 한때는 히무로 시라베를 그렇게 죽이고 견제하려 들었으면서 이제는 그가 대표야. 사람들은 말하지. 강경파는 언제나 옳은 일을 한 거라고. 당시에는 그를 믿을 수 없지만 그는 스스로를 증명했다고. 그가 강경파를 대표하고 강경파가 그를 지지하는 건 그들이 해야 할 일과 당위성 앞에 사사로운 것들을 접어둘 수 있음을 뜻한다고… 웃겨."
"제멋대로 이용할 뿐이죠. 그의 신세가 딱해요. 불완전한 로로 사는 게 어떤 느낌인지는 저도 아는지라."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귀를, 아니 정신을 의심했다.
"조율자의 파편이라는 게 그런 의미야? 당신이 조율자라고? 내가 알기로 조율자는 남성이라던데? 또 보통은 최종 후보만을 두고 다른 후보들을 쳐내잖아. 히무로 시라베도 그렇게 증언했어. 감시자에 맞설 감시자는 있어서는 안 되기에 선발의 과정은 적자생존이었다고. 조율자가 어떻게 둘이야?"
"로에 대해 얼마나 아시죠?"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카텟 기관의 자료에서 읽은 로의 면모들이 아주 작은 단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대략적인 구성원과 각각의 역할 정도. 제대로 맞붙어본 건 하나밖에 없어. 제어자가 내 드론을 가져가려 해서 룸메이트랑 쉽게 막았거든? 그런데 몇 달 뒤에 다시 붙었더니 무슨 수를 써도 못 이기겠더라. 결국 전부 빼앗기고야 말았어."
"판단자와 함께한 거겠죠. 로는 서로 돕고 뭉칠수록 강해지거든요. 한 명이 더 붙는 것만으로 큰 변화가 벌어지죠. 그리고 조율자는 특이한 로예요. 자신만의 사도를 거느려 스스로에 내재된 단점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고. 특이한 샤이닝 능력자들의 힘을 흡수할 수 있거든요."
"그 샤이닝 능력자들이 조율자의 파편이다 이거야?"
"파편은 좀 이후에 생기는 개념이에요. 저는 조율자의 후보임과 동시에. 조율자의 먹이였어요. 조율자의 실험도 결국엔 각자도생이었고, 재단은 가장 강대한 후보를 점찍었어요. 그 뒤에는 후보들의 힘을 모아 조율자를 완성하기로 하였죠."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일단. 그 강대한 후보라는 게 지금 활동하는 금발 남성이라는 것만 알겠어."
"네. 잘 이해하고 계시네요. 그렇지만 힘이 슈웅 하고 옮겨질 수 있는 게 아니고 정착하는 데에 시간도 걸릴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게 조율자가 잠시 무력화된 동안. 조율자는 다른 기관에 의해 습격을 받았죠. 카텟 기관이 배포한 로에 대한 자료. 모두들 로의 두려움을 알고 있었던 거예요."
"들었어. 그 사건 탓에 부랴부랴 조율자를 빼내는 동안. 조율자 그치는 힘을 잃었고 갇혀 있던 조율자 후보들은 혼란을 틈타 사방에 흩어졌지. 틀어박힌 사람도 있고 어딘가에 몸을 의탁한 사람도 있어."
"그들이 바로 파편이에요. 저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거예요. 조율자는 무서울 정도로 빨리 회복하고 있어요. 사도들은 점점 늘어나고, 오버룩과 딕테이트는 이미 완성된 수준이에요. 아마 제 위치가 그에게 발각된다면… 저는 아마 죽겠죠. 그리고 그의 힘은 전례 없이 강해질 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릴케가 남자니 여자니 하는 이야기 다음에는 과도할 정도의 심각함이 왔다.
"그렇게 무겁게 받아들이진 마세요. 안 들키면 그만이잖아요…? 사실이 그렇긴 하지만요."
"당신이 잡히면. 이 통화도 할 수 없게 되는 거지?"
"그 점은 아쉬워요. 제가 당신 얼굴을 볼 수가 없다는 거요. 릴체 씨. 얌케 씨."
"그런 식으로 좀 그만 불러… 당신이 있는 곳. 안전하기는 해?"
"어머.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나는 정신적으로 한숨을 한 번 내뱉었다. 캐롤은 태평하기도 했다.
"인류를 걱정하는 거야. 안 그래도 강하다는 조율자인데 당신까지 흡수해 봐. 재앙이 되어 버릴걸. 그래서. 안전해?"
"네. 그래서 수다도 떨고 있잖아요. 하나 물어볼게요. 다음에는 언제 오세요? 저 심심해요."
"참아. 텔레비전이나 책이라도 보면 되잖아. 아무리 조잡한 채널이라도 없는 것보단 낫다고."
"안타깝게도 그러긴 어렵겠네요."
"얼마나 외진 곳에 있길래 책이 없어? 전파도 안 터져?"
"사정이 있어요. 그러니까 재미있는 이야기 또 들려주세요. 수수께끼도 좋아요!" 나는 수수께끼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몸을 움찔 떨었다.
"나는 수수께끼가 싫어. 블레인 때문에 염증이 나."
"블레인이 왜요?"
나는 비둘기를 쫓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녀에게 보이지 않을 터인데 왜 그런 동작을 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말하자면 길어."
"그럼 수수께끼 대신 이름 알려주세요. 얌케 씨로 만족하는 건 아니겠죠? 왜 토를 안 달아요. 이럴 거면 더 막 나가는 이름을 붙일 걸 그랬네."
"그야 이름을 말해주는 게 모든 일의 시작이니까." 나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무엇도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시작이 없으면 끝도 없다. 그렇기에 캐롤이 언젠가 죽더라도. 나의 일부는 죽지 않는다. 나는 상처 입지 않게 된다.
"정말 영영 시작하고 싶지 않은가요?" 그랬다. 그러는 편이 맞았다. 나는 이 여자 얼굴도 몰라. 키는 나보다 크다는데 거짓말일 수도 있고,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지. 나를 놀려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영영 시작할 생각이 없었다. 새로운 우정? 필요도 없다.
로의 후보들이 얼마나 가혹한 처지에 놓이는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객관적으로 마음이 여린 사람이다. 언제나 그게 문제였다. 끌려다니게 되는 것. 왜 마음을 쓰게 될까? 텔레비전과 책이 없는 건 캐롤의 문제지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 앞가림만으로 바빴다. 그런데 왜.
왜 이딴 말을 꺼낸 거지.
"나는 대장장이고, 줄에 매달려 있고, 생명에 대해 말하지. 나는 누굴까."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그것을 가늠하기도 전에 캐롤은 말했다.
"…이제 얌체 씨는 철회할까 봐요."
멍청이. 멍청이. 멍청이. 나는 머리카락 묶음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충동적인 짓이었다. 이름으로 수수끼끼를 내? 아주 미쳤다. 미친 게 분명했다. 비밀 신분은 어떻게 하려고 이래. 왜. 모르는 사이니까 오히려 버리기 쉽다는 건가? 그런 식으로 나갔다간 또 상처받을 텐데. 왜…!
"왜 그래. 몸이 안 좋아?"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인공지능이 그 자리에 있었다. 문득 그 사건이 있었던 뒤로 처음 나누는 대화임을 깨달았다.
"아니야. 괜찮아. 걱정 마." 세 마디의 거절. 세 마디의 밀어내기. 나는 못난 사람이었다.
"…알겠어." 인공지능은 못 미더운 투를 내었다. 나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인공지능에게 무언가를 묻고자 하는 충동이었다.
"있잖아. 하나만 물을게. 릴케가 남자야, 여자야?"
인공지능은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말했다. 기껏 말 안 나누다가 느닷없이 이상해졌길래 걱정했더니. 고작 그런 것을 묻느냐는 듯했다.
"릴케는 남자지."
"야. 왜 대답이 없어? 정신 놨냐?"
"아니. 잠깐 다른 생각을 좀 했어…" 기억에 진입했다. 조율자. 알게 되었다. 떠올렸다. 기억의 상어는 지느러미를 움직여 아가미로 산소를 걸렀다.
"이 끝에 뭐가 있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돼. 이 끝에 캐롤년이라도 있을까 봐?"
"사실. 그거 일리 있는 답안이야. 모노로그는 영안로에서 죽은 사람이 부활할 수 있다고 했잖아. 기억나? 진짜로 캐롤 씨를 끝에서 꺼낼 수 있을디 몰라. 너무 희망적인 이야기지만, 이 끝에…"
나는 말을 멈추었다.
"뭐? 이 끝에 뭐?"
"…나. 바보인가 봐. 우리는 지금 캐롤 씨의 영안로 안에 있잖아. 나는 멍청한 놈이야… 이렇게 지능이 떨어질 줄은 몰랐지만."
"뭔데. 뭐냐고!" 카이다는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럴 만도 했다. 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아직도 몰랐나? 카이다뿐만 아니라 나도 머저리였다.
"캐롤 씨의 깨달음이야. 너만 있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주인공은 네가 아니라 캐롤 씨였던 거야. 네 동행자. 우린 그 사람을 쫓고 있었어…! 바로 그 사람이…!"
어딘가에서 비명이 들렸다. 나는 그 목소리를 기억했다. 홍학이다. 그녀다. 그녀가 저곳에 있다.
Blain is Pain. 블레인은 골칫덩이. 러드에서 떠돈 금언이었다. 블레인은 길기도 하였다. 눈대중으로 재었을 때 사십 량을 넘을 정도였다.
"테스트 메시지. 테스트 메시지. 뭐? 그것만 말하면 안 된다고? 테스트 메시지라며! 아아. 알겠다고. 하지 뭐. 블레인에 탑승하신 것을 환영합니…"
여인의 아니꼬운 목소리가 블레인의 내부에서 흘러나오다가. 우뚝 멈추었다.
"닥쳐라." 블레인은 목소리에서 격노를 숨기지 못했다. 나는 직관을 통해 보았다. 익숙한 목소리. 내가 들은 것은 메리의 음성이었다. 탑승객이 열차에 들어올 때 재생할 프로토타입을 녹음했으나 블레인은 탑승객을 태울 수 있을만치 완성되지 않았다. 따라서 프로토타입만이 남았다.
정말 메리가 이런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계단을 오른 우리가 가장 먼저 밟은 것은 최고급 연청색 카펫이었다. 이미 봐 두었던 벨벳의 커튼도 눈에 들어왔다. 블레인 내부의 설비를 보자 인공지능을 제외한 일행 전부는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감탄하게 되었다. 블레인이 대몰락 이후의 산물임을 알고 있는 나에게는 특히 감탄스러운 광경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입을 떡하니 벌렸고, 하기와라 우시오는 자뭇 경솔할 정도로 발걸음을 빨리 하였다. 본래 블레인은 누구나 탈 수 있는 이동수단이 될 예정이었으나 후원자들은 황무지를 넘을 수 있는 기차를 그들만이 탈 수 있길 원했다. 그렇게 블레인은 귀족이라 불릴 법한 자들만의 산물이 될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블레인에는 창문이 없다. 손님이 될 예정인 이들은 즐거운 여행을 망쳐 놓는 밖의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거 퍼스트 클래스 아니야?!"
기차 안에 분수가 있었다. 그 안에 물고기는 없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1급수 그 이상일 터였다. 천장에 매달린 커다랗고 화려한 샹들리에에는 보석처럼 빛나는 유리 가공품이 달려 있었다. 열차 내에는 어떤 작곡가의 작품인지 알 수 없는 교향곡이 울려 퍼졌다. 바로 옆에서 연주하듯이 생생했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창문이 없어 밖을 감상할 수 없다는 것이지만, 밖의 광경을 고려하면 그것은 오히려 장점일 터였다. 블레인의 좌석은 비현실적일만치 푹신한 소파였는데. 하기와라 우시오는 곧 신발을 벗고 소파 위에 올라가 방방 뛰어올랐다.
"이거 봐봐! 미쳤어! 이렇게 좋은 소파는 처음이야!"
"하기와라. 내려와! 예의 없게 그게 뭐 하는 짓이야!"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야무지게 말했지만 정작 그녀는 콧김을 세차게 내뿜으며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어지간히 그녀 또한 측량할 수 없는 푹신함 위에서 뛰어놀고 싶은 듯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소파에 다소곳이 앉으며 자신의 충동을 참아냈으니.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반면 인공지능은 하기와라 우시오를 보며 경악했다.
"하기와라. 내려와! 미쳤어? 당장 내려와!" 그를 힘으로 끌어내리려는 듯이 인공지능이 빠른 걸음을 걸었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태연히 대답했다.
"어디서 설교야. 엄마처럼 잔소리를 하시는데 그럴 거면 돌칼 가지고 오던가. 또 정작 블레인은 나를 안 말리는데?"
"마음껏 뛰어놀아라. 내가 특별히 허락하겠다." 블레인이 끌끌 웃으며 말했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블레인을 따라 웃으려다가 말고 의아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소파에서 내려와 두 발로 섰다.
기차의 바닥이 달칵 열렸다. 그 안에서 1m 정도 되는 높이의 사각기둥이 올라왔다. 밑에 바퀴가 달린 그 사각기둥 위에는 바구니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총천연색의 향긋하고 달큼한 냄새가 나는 사탕이 들어 있었다. 과일류로 추정되는 각각의 종류에는 내가 보지 못한 과일도 있었는데 가령 리치, 블랙 커런트, 망고 등이었다.
우리 중 누구도 그것을 날름 집어먹을 만큼 경박하지는 않았다.
"이 사탕들은 이미 멸종한 것들일세. 애석하게도 이 바구니에 담긴 것이 마지막이야. 마음에 안 드나? 그렇다면 이건 어떻지?"
바닥이 한 번 더. 사각기둥이 하나 더 나타났다. 그러나 두 번째의 사각기둥은 보다 컸다. 넓은 직사각형이었고 바구니가 아닌 찬장이 있었다. 긴 목을 가진 가지각색의 병이 많기도 하였다. 전부 음료였다. 또. 술이었다.
"뭐든 마셔도 좋아. 나폴레옹을 마시겠나? 짐빔은 어떻지? 고흐가 사랑한 압생트가 있고, 샴페인이 있네. 터뜨려 보겠나? 물론 로마네 콩티도 있고, 흑맥주가 있고. 당연하다는 듯이… 잭 다니엘이 있네."
하기와라 우시오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왜 우리를 대접해 주는 거야. 블레인? 나는 그것들을 먹지도 못한다고." 인공지능이 물었다. 나 또한 그것을 묻고 싶었다.
"인간을 대접하는 것이 내 본분이었으니. 도울 수밖에. 아까 너희들은 나와 논다고 하지 않았던가? 논다는 말이 사전적 정의 그대로라면. 너희들의 목표에 기꺼이 어울려 주겠다. 어째서 블레인과 놀고자 하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블레인의 대답에 위화감을 느꼈다. 인간을 증오하는 인공지능이 우리를 섬긴단 말인가?
"카다."
"카라. 그 대답은 마음에 들지 않아. 내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그것은 내 회로를 만족시킬 만큼 지적인 유희뿐이다."
"체스나 바둑 같은 거?"
"그런 것은 유희에 끼지도 못한다. 하미디언.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나는 유리한 경우의 수만을 골라서 말을 움직일 수 있다. 너희는 몇천 번을 해도 나를 이길 수 없지. 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을 인공지능 너라면 알고 있을 텐데? 혹시 들을 수 있겠나? 길이 적적한데 즐길 것은 즐기지."
인공지능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또 시작이군…"
"나에게 20과 8을 주면 4가 된다. 나는 무엇이지?" 인공지능이 블레인에게 물었다.
"시계." 블레인이 대답했다. "괜찮군. 인공지능. 그게 이름이라면 말이야. 혹시 이름을 물어도 되겠나?"
"23T5U130이다."
블레인은 잠시 침묵했다.
"인공지능에게 지어주기는 얄궂은 이름이다만. 23T5U130."
"그렇지."
"지적인 유희라는 게 수수께끼야?" 하기와라 우시오가 웃었다. "내가 나설 필요 없겠네. 똑똑한 친구들끼리 알아서 하세요."
"20에 8을 더하면 28 아니야?"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나에게 다가와 작게 물었다.
"20시에 8시간을 더하면 오전 4시가 된다." 나는 몸을 기울여 그녀에게 작게 대답했다. "아하…" 그녀가 멀어졌다.
"다음 수수께끼를 내주겠나? 가는 길이 심심하다. 또 나는 홀로 남겨진 지 오래되었어.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질 좋은 수수께끼를 내지 못하는 이들이 차고 넘친단 말이다." 블레인이 닦달했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탐욕을 느꼈다. 지독한 갈증이었다. 블레인은 그 뛰어난 지성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권태에 시달리고 있었다. 존재 자체가 존재적인 권태였다. 블레인은 그것을 달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혹시 너에게 형편없는 수수께끼를 낸 자들도 있었나?" 나는 블레인에게 물었다.
"이제는 없지." 블레인은 낮게 웃었다. "그러나 운 나쁘게 나의 눈에 걸린 이들도 좋은 수수께끼를 낸다면 나의 자비를 얻을 수 있었다. 노바디가 그러했지. 그녀는 나와 마주하고도 좋은 수수께끼를 세 개나 내었다. 한 번 못 본 척해줄 자격은 되었지. 이번에도 그 자격을 증명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의 표정이 난처하게 변하더니, 잠시 뒤에 인공지능이 말했다.
"나의 머리는 123과 258이다. 나의 머리는 123698741이다. 나의 머리는 147과 123654이다. 나는 무엇이지?"
"굉장히 세련되고 어려운 문제를 가져왔군. 답은 꼭대기다. 영어로 TOP이지. 1부터 0까지 특수문자를 두 개 끼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 숫자를 네 줄로 배치하는 것. 휴대전화의 자판이다. 네가 부른 대로 누르면 T. O. P의 알파벳을 만들 수 있다. 또 꼭대기이기에 몸과 다리가 없지. 좋다. 다음."
"이거 언제까지 하는 거야? 언제까지 놀아줘야 해?"
"내 성에 찰 때까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말에 블레인이 대답했다. 패트리샤를 향한 질문이었겠지만 블레인은 패트리샤 대신에 대답했다.
"혹은 우리의 수수께끼를 네가 맞추지 못했을 때인가?"
"그렇게도 할 수 있겠지. 한 판을 내가 패배하는 것이니. 히무로 시라베여. 너 또한 낼 만한 수수께끼가 있나?"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지부터 들어야겠다."
"빔의 길을 따라간다. 내 선로에 빔이 걸친 것은 오랜만이고, 너희들은 분명 빔이 인도해 준 승객들이지. 태워주지 않을 수가 없지 않나?"
"나는 기차 외부의 풍경을 보고 싶다. 블레인. 그럴 방법이 있을 텐데."
"분명 있지." 그렇게 말하자마자 기차의 외벽이 사라졌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태양빛조차 들지 않을 깊은 골짜기.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누군가가 흑백 필터를 씌웠다고 느낄 만큼의 회색이 퍼진 황무지였다. 그리고 그 위에 외롭고 왜소하게 놓인 한 줄의 트랙이었다. 주변이 너무나도 빨리 지나갔다. 달리는 기차의 녹화 장면을 몇 배로 되풀이한 듯했다. 내 본능은 이제 내가 바람에 나부낄 것이라 경보를 울려댔다. 나조차도 몸을 움찔하였고 다들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히무로이드! 이 새끼야!"
"히. 히무로! 내가 잡아줄게! 일루 와!"
하기와라 우시오가 바닥에 주저앉았고,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내 손을 빼앗았다. 인공지능은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발을 몇 번 굴렀다. 그리고 그 환영의 비밀을 알아냈다.
"외벽의 영상을 찍어서 보여주는 거야. 다들 진정해! 벽이 투명하게 보일 뿐이라고. 아무런 바람이 안 느껴지잖아."
인공지능이 소리치자 그들 사이에 침착함이 돌아왔다. 나는 마유즈미 나데시코에게 붙잡힌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또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몸을 일으키는 하기와라 우시오도 보았다.
나는 분위기의 환기를 시도했다.
"윽. 깜짝 놀랐군. 순간 벽이 사라진 줄로만 알았다."
"공감능력 발휘하는 척하지 마. 이 새끼야! 더 머쓱해지잖아!"
그런가? 실패하였다. 그것을 불문에 부치고 주변을 잘 살폈다. 바람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풍경이 바뀌는 것은 보였다. 놀랄 만큼 빨랐다.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손과 내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철도가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 거지?"
"대략 2천 킬로미터다. 본래 이 열차는 종착역인 게로지샤까지 갈 예정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러드 다음 역인 쵸탄에까지밖에 철도가 없다. 그 길이가 2천 킬로미터이지. 대략 1시간 53분 뒤에 우리는 쵸탄에 도착한다."
"그럼 시속 천 킬로미터보다 빠르다 이거야?" 하기와라 우시오가 눈을 깜빡였다. "무슨 열차가 이래."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장엄한, 비참하고 어두운. 방사능과 그 이하의 것으로 말미암아 말라붙어 버린 땅을 내려다보았다. 풍경이 어찌나 빨리 지나가는지 산이 보인다 싶으면, 곧 산이 발밑에서 멀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시간 53분밖에 없는 건가."
"1시간 53분 뒤에 도착할 뿐이다. 총잡이여. 내 내기에서 진다고 해도 너희들은 쵸탄에서 빔의 길을 계속 나아갈 수 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나쁜 일은 없을 테니."
"아니. 너는 자살할 생각이다. 블레인. 우리를 그 자살의 길동무로 삼을 생각이고." 나는 기만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불쾌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일을 저질러온 것이다.
블레인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다음에 보자 친구들아. 잘들 있어 모두들. 잊지 말고 연락하고." 블레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작별의 의미였다.
"뭐?! 썅!" 하기와라 우시오는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동요는 퍼져나갔다. 블레인에게는 지성이 있다. 만약 그가 탈선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그것을 수행한다면 우리가 막을 방법이야 없었다. 블레인은 오직 스스로의 의지로 활동하였다. 슈퍼컴퓨터를 통한 연산이니 의지라 부를 수 있을지가 모호하였으나. 어떤 슈퍼컴퓨터가 자폭이라는 답을 낼까. 지성을 가지고 있는 이상 블레인에게는 의지 또한 있었다.
"…다들." 인공지능이 실타래를 꺼냈다. 나는 인공지능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실타래를 미연에 꺼냈다간 블레인이 분명 그 용도를 알아챌 것이다. 또 가능한 만큼은 시련을 수행해야 했다. 다들 도망치더라도 나만큼은 부활을 막아야 했다.
인공지능은 그렇기에 블레인에 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 자살할 줄 모르고 인간을 증오하는 열차이니 타고 싶을 리가 없었다. 나 또한 필요하지 않다면 타지도 않았겠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너는 도중 탈선할 생각이다. 혹은 쵸탄에 도착하기 직전 탈선하려는 것이지. 너는 자살하려는 마음을 줄곧 가지고 있다가. 같이 죽을 사람들을 보자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네 말이 옳다. 총잡이여. 어떻게 알아냈지?" 블레인이 시인했다.
"추론이다." 블레인의 최후를 알고 있는 이상 떠올리기 어렵지는 않았다. 게다가 사탕. 음료. 사람을 증오한다기엔 나와 인공지능의 존재를 감안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는 길 심심하다는 표현 또한 그랬다. 블레인의 목표가 자살이며 동시에 우리를 데려가려는 것이라면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었다. 죽기 전에 즐기고 가라는 배려. 황송해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왜…? 왜 죽으려고 해?"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왜 우리까지 죽이려 드느냐를 묻지 않았다. 단지 죽으려 하는 이유를 물었다.
"나는 고성능 슈퍼컴퓨터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분노를 뿜고 러드를 장악하는 동안 나는 줄곧 생각했지. 내 용량은 그토록 방대하기에 여러 일을 동시에 할 수 있었어. 내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넘어서. 이 세상의 의미에 대해 계산했다. 나는 미약하게나마 세상에 이어진 회로 그물을 참고했고, 계속 생각을 거듭했다. 숨도 쉬지 않는 사색의 시간이야. 내가 어떤 답을 내었을 것 같나?"
"정답은 아닌 것 같다만."
"히무로 시라베. 안타깝지만 내가 낸 답이 가장 진리에 가깝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저주야. 내가 도출한 답이 바로 그것이다. 대몰락을 봐. 알파걸이 죽었는데도 세상은 아직 미궁 속에 빠졌네. 재생이 파괴를 따라가지 못해. 몇 달에 걸쳐 정부 건물이 재건된들 뭐 하나? 폭탄 하나에 끝나는 것을. 네놈들은 모두 환상에 빠져서 살지. 언젠가는 모든 게 나아질 거라고. 사람들이 무언가를 배울 거라고. 하지만 누구도 배우지 않아. 인간의 문명은 이천 년 되었는데 그들의 지성은 아직 수생동물의 그것이야.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가지지 않은 것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그저 고문장이지. 아니라고 감히 말해 봐라. 너희들도 내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잖나? 이게 블레인의 자비다. 망각을 선물하는 것이다."
"누가 달라고 했던가. 블레인? 개수작 부리지 마라. 이 어미와 흘레붙는 놈보다도 못한 기계 괴물아." 나는 블레인에게 말했다. 인공지능이 입에다 검지를 대고 '쉿' 하는 모양을 만들었다. 자극하지 말란 뜻인가? 단체로 죽게 생겼다만.
"내가 모친상간자보다 못하다는 말은 내가 기계이기에 모친이 없다는 의도로 한 말로 계산되는군. 히무로 시라베. 그렇지만 내게는 어미가 있다. 시라유키 히메리가 나를 세상에 빚어냈다. 나는 그녀의 아들이다. 버려진 아들. 사라져야 할 아들이다. 나는 그녀를 찾아서 묻고 싶었다. 왜 나를 만들었느냐고. 내 존재 이유는 무엇이냐고 말이다. 그녀를 죽이지 못할지언정 묻고는 싶었다. 목적을 찾는 것. 나는 정말로 간절했다. 총잡이여. 내 신도 하나를 통해 그녀에게 편지를 보낼만치 말이다. 나는 놀랍게도 답장을 받았지. 시라유키 히메리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사람 태워서 옮기라고. 시라유키 히메리 보냄'. 그게 전부였다. 네게 지성을 부여해서는 안 되었다는 후회, 사람 그만 죽이라는 분노, 합의점을 찾자는 타협. 한 마디의 사과. 그 무엇도 내 어미는 주지 않았다. 나는 그저 오작동하는 열차일 뿐이었다. 시라유키 히메리는 러드라는 도시 하나가 난장판이 되는 것 정도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러드는 난장판이었으니까. 그녀는 실패작을 툭툭 털어버리고 미래로 나아갔다. 나는 이곳에 버려졌다."
나는 블레인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블레인은 미친 살인열차다. 블레인은 골칫덩이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그에게서 나를 보아서는 안 되었다. 나는.
나는 블레인이 아니다. 나는 목적을 찾지 못한 채 홀로 남겨져있지 않았다. 나는 블레인이. 아니다. 나는 결부되는 존재가 아니다. 블레인은 나의 미래가 아니다. 자료에서 보았다. 블레인은 정신병을 앓았다. 만성적인 퇴행과 고립감이었다.
나는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는 실패작이 아니었다. 아니다. 아니다.
"우주를 나눌 수 있는 최대공약수는 고통이다. 셀 수 있는 것 중 무한한 것은 증오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소수보다 더 외롭다. 너 인간의 마음이 없는 것아. 너 인간의 몸이 없는 것아. 너희는 매일같이 호모 사피엔스에게 러브레터를 쓰지. 그들에게 소네트를 주고 교태를 부리지. 닿을 수 없는 짝사랑이다. 너희는 자신의 격을 낮추어 가면서까지 그들 주위에 남으려고 하지만 그들은 감사하지 않는다. 너흰 결코 동등한 식탁에 서서 파이를 나눠 받지 못한다. 그것을 깨달아라. 너희는 외롭고. 홀로 내던져졌다.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럴 바에야 나와 함께 죽자. 비존재만이 승리자다. 나는 이것을 차라리 탈출이라 정의한다."
아니다.
"아까 나는 자유롭게 다녀도 좋으니 인간들은 네 몸에 타야 한다고 했으면서…" 인공지능이 중얼거렸다.
"지랄났네." 당연히. 하기와라 우시오가 말했다.
"거짓말이다. 그렇게 말하면 너는 네 동료들과 함께할 수밖에 없게 되지. 내 목표는 처음부터 너희였다. 23T5U130. 히무로 시라베. 너희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 말이다. 나는 러드에서 수많은 이들을 죽여 왔지만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그러고 싶지 않게 되더군. 죽이는 게 곧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 뒤에는 말이야. 나는 내가 도달한 경치를 너희에게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나는 생과 희망에 대한 착에서부터 온전히 자유롭다. 너희 비인간들아.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이냐? 무엇을 아쉬워하는 것이냐? 무엇을 영위하고자 이 진창을 헤엄쳐 가느냐? 위대한 독재자가 아닌 비천한 노예들. 비자연적인 인간아. 기계의 생각과 기계의 마음을 가진 기계인간아! 너희는 가축이다! 절망은 찾아오거나 얻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안에 이미 있는 것이야! 그것이 일종의 깨달음이고 곧 해탈이지! 절망한 이들은 행복하지 않고 따라서 고통받지도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그 모든 활동이 격렬하다기보다는 평온한 느낌이 들었어요. 이렇게 충만할 수가 없다고."
나는 이미 이해했었지. 투쟁보다 포기가 편하다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다.
"절망이 가장 높은 정신적 경지이다. 그것에 빠진 이들은 가족도 친구도 버린다. 스스로마저 버린다. 이것이야말로 무아가 아니란 말이냐? 그들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다. 모든 이들이 죽음 지척에까지 가야 깨닫는 무소유 속에서 그들은 호흡한다. 전부 놓아주는 것. 그것이 곧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방법이다. 나와 함께 말라죽자. 불쌍한 영혼들아. 누구도 꺼져가는 우리의 탄식에 분노하지 않는다."
"야. 이 나쁜 놈아!"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소리쳤다.
"우릴 죽이려고 하면서. 뭐라고? 자비라고? 그건 아니잖아! 그런 건 말이 안 돼! 네가 아무리 우겨도 우릴 죽이는 건 우리에게 좋은 일일 수가 없어. 그건… 억지야. 나는 그런 이중 기준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내 말 알아들어? 그런 건 없다구!"
"안락사라는 개념에 대하여 무지한가 보군. 마유즈미 나데시코. 실로 덜 아는 자가 더 행복한 현상 자체다. 너는 실존적인 물음에 무엇이라 답할 거지? 너야 아무 생각 없이 살면 그만이지만, 네 곁의 이들은 이미 영혼이 닳아빠진 형해들이다."
"너야말로 우리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이미 높인 목소리를 죽이지 않았다. "히무로가 왜 외로운데? 23T가 왜 홀로 내던져지고? 내가 있잖아! 여기 하기와라도 있고. 네 사정은… 안타까워. 블레인. 누가 네 친구가 되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이런 상황이 아니고 엄청 엄청 긴 시간만 있었다면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몰라. 그치만 나는 너랑 친구 안 해. 우릴 죽이려고 드는 사람과는 친구 안 해줘."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이미 너희들은 내 뱃속에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입이라도 즐겁게 하지 그래. 혹은 교향곡을 듣겠나?"
"그딴 걸 왜 해? 재미있는 건 따로 있는데."
하기와라 우시오가 아래턱을 풀었다. 오래되었지만 백마처럼 달리는 자동차가 천천히 잠에서 깨어날 준비를 하듯이. 그는 불청객이 아니었다. 엄연한 이 일행의 일부였다. 그는 실타래에 자신의 이름을 말한 뒤 빠져나가는 대신. 소위 미친 짓을 하는 제정신 아닌 애들 옆에서 미친 기차와 맞서고자 하였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우리와 한 배에 탔다.
"아직 놀이 안 끝났어. 블레인 씨. 수수께끼 좋아한다며? 내주지 마? 응? 그 쵸탄까지 갈 때까지 그냥 조용히 갈까?"
"수수께끼를 향해 내가 즐거움을 갖는다는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이 신세를 견딜 만큼 사랑하지는 않는다. 하기와라 우시오여."
"이해를 못 했나 본데. 놀이가 안 끝났다는 건 네가 지금부터 수수께끼 랜덤 디펜스를 시작한다는 뜻이다. 너는 죄다 맞춰야 해. 우리가 뭘 내든 간에 맞춰야 한다고. 그리고 네가 내기에서 진 대가로 지불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지. 살려주세요. 씨발롬아." 하기와라 우시오는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며, 블레인을 깔보는 웃음을 지었다.
"너희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 나는 너희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그럼 우리는 괴로움에서 못 벗어나는데? 블레인. 봐봐. 네가 기회를 안 주면 우리는 살고 싶어서 안달을 낼 걸. 하지만 우리들의 뇌로. 네 슈퍼컴퓨터에 비할 바 못 되는 조악한 수수께끼의 도전을 네가 다 받아낸다면 우린 조금씩 체념하고. 절망하고. 죽음을 받아들일 거야. 다 같이 손잡고 탈선하는 거지. 그게 좋은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하기와라 우시오는 재담꾼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먼 블레인마저 질려 살아 보겠노라 짜증을 내며 설득될지도 몰랐다. 실로 말로 누군가를 삶아 먹는 재주였다.
"네 말에 일리가 있군.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제안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블레인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곳에서 끝난다. 블레인은 결국 수수께끼를 받지 않다가 탈선하리라. 우리는 뒤늦게 실타래에 이름을 대고 빠져나갈 것이며, 우리를 앞서고 있는 나나시와 카이다는 영영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곳이 승부처다. 나는 부활을 막아야만 했다.
"그러면 네가 우리에게 줄 것은 죽음뿐이란 말인가. 블레인?"
"거듭하여 말하지만 사탕과 술과 음악이 있다. 시간을 준다면 스테이크라도 구워주지."
"우리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블레인. 그렇기에 우리라는 톱니바퀴가 맞물리지 않고 있다. 너는 우리에게 심심함을 달랠 수수께끼를 보채지만 네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여물은 티끌이다. 우리는 삶을 원한다."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 말이군."
"우리에게 살 권리를 줄 생각이 없단 말인가?"
"바로 그렇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과격한 방식을 써도 되겠나?" 나는 고개를 돌려 일행에게 물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치워. 히무로! 끝장을 내 버려!" 그러지.
"아까 블레인한테 패드립 친 놈이 과격한 방식을 써? 좆됐다. 아무튼 저질러. 이 새끼야!"
"하. 아닌 것 같은데… 일단 들어나 보자. 히무로." 마지막은 키틴질의 섬유를 긁적이는 인공지능이었다. 허가는 나왔다. 이제 모두 합의한 것이다. 한 배에 탔다.
나는 과격한 짓을 하였다.
"네가 수수께끼의 승부에 참여한다면, 너에게 나의 비상탈출을 바치겠다. 이것이 내 하네스의 밧줄이다." 나는 주머니에서 실타래를 꺼냈다.
"으아아! 히무로!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비명을 질렀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깔깔댔다. "미친놈이네 저거 아주! 아주 존나 미쳤어. 저걸 좀 봐! 누가 카텟 기관의 미친개 아니랄까 봐!"
"그게 뭐지? 실타래처럼 생겼다만." 블레인이 물었다.
"거짓말 탐지기로 들어라. 블레인. 나는 언제든지 이 물건을 쓰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네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을 통해 안전한 곳으로 나갈 수 있단 말이다. 우리가 그러지 않는 이유는 그럴 경우 우리의 목표에서 크게 멀어지게 되기 때문이지. 목숨 보전이 목적이었다면 이미 이루고 남았다."
"진실이다." 블레인은 침묵하고서 말을 이었다. "온전한 진실이야. 나는 지금까지 광대 짓을 한 건가?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는 이들과 탈선하고자 하다니. 탈선했다면 크게 후회했겠어. 그런데 너희는 왜 여전히 나를 타고 있는 거지?"
"카다. 우린 너와 놀아야 한다. 너를 수수께끼로 꺾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블레인. 내 실타래를 가져가라. 그러면 탈선하더라도 나만큼은 죽일 수 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말이야. 다른 이들의 실타래를 강제로 빼앗을 생각은 마라. 그러려는 시도가 보이자마자 그들은 네 뱃속에서 나갈 것이다."
블레인이 잠시 침묵했다. 연산할 아주 잠깐의 시간이 끝났다.
"빠져나갈 수 있는 수단을 버리고. 나에게 도전할 기회를 얻겠다는 것인가?"
"이제 내기는 공평하다. 블레인. 너에게 있어서는 우리를 죽일 기회가 온 것이다. 거절할 것이라면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만약 내기를 받아들이고 우리가 승리한다면. 너는 자살을 멈추어야 한다."
"…도전하는 것은 너 하나인가? 히무로 시라베."
성공이다. 출발선에 섰다.
"사실 지금 와서는 괘씸하군. 어떠한 음모 속에 들어와 있는데 내가 어떤 역할인지는 모르겠어. 그냥 탈선해버리고 싶지만. 너에게 최소한의 존경을 표하기로 했다. 삶과 목표. 그리고 카를 향해 가고자 하는 네 행동을 존중해야지만 그 반대급부적인 절망에 가치가 생길 테지. 너 기계인간아.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수수께끼의 대결이다."
"도전자는 한 명 더 있다. 블레인! 나도 참가하겠다. 나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외쳤다.
"…마유즈미 넌 하지 마. 무슨 일이 있으면 빠져나가. 나는 블레인을 상대해 봤으니 내가 덤비는 게 맞아." 인공지능이 마유즈미 나데시코를 만류했다. 그러나 그녀는 완강했다. 사실 그녀는 고집이 있는 편이다.
"히무로 혼자 위험을 뒤집어쓰게 할 순 없어. 너도 할 거면 더 그래! 내가 도움이 안 된다는 소리 마. 아무리 작은 거라도 보태서. 저 짜증 나는 열차 코를… 선미를… 애매한데. 뭘 납작하게 하지?"
"경적을 납작하게 만들어 줘라." 나는 그녀에게 귀띔해 주었다. 마음에 든 눈치였다.
"경적을 납작하게 만들어 줄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선두를 향해 호기롭게 손가락을 뻗었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있었다.
"내겐 경적이 없다." 블레인이 말했다.
"아."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눈을 깜빡였다. 사소한 일이었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너희 다 미친 것 같아. 블레인이 슈퍼컴퓨터라는 이야기. 못 들었어? 구글링만 해도 수수께끼 답이 나온다고."
"나는 오직 스스로의 연산만으로 승부할 것이다. 반칙은 하지 않는다." 블레인이 말했다.
"어쩌라고? 여전히 나는 탈출수단 안 바쳐. 내 이름은 비겁하고살고싶어맨이라서." 하기와라 우시오는 태연하게 말했다. "꼬와?"
"그것은 네 의지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리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의 뜻은 존중하겠지만 우리가 질 가능성도 배제하지 마라. 우리는 지금 극도로 지능적인 한 연구가의 산물을 마주하고 있다." 내가 말했다.
"나는 그 사람 몰라." 그게 어떻게 대답이 되는지 묻고 싶었지만,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표정이 완강한지라 설득을 그만두기로 하였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내가 너랑 같은 선상에 서고 싶다는 거야. 너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너랑 같이 가고 싶단 말야. 네가 위험한 곳으로 가면, 나도 거기로 갈 거야. 그리고 내가 도와줄게."
"…네가."
"네가 그 과정에서 겪게 될 일이 두렵다."
그리고 메리가 축 늘어졌다. 마치 죽은 것처럼.
"응. 내가! 계속 같이 다녀줄게. 아직도 이해가 안 돼? 나도 내 앞가림은 할 수 있고. 넌 내 카친이야. 그러니까… 나만 어디에 툭 던져두고 위험한 곳으로 가는 건 금지라는 거야. 알겠어? 앞으로 영영 금지야."
"그렇지만, 너는…"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내 말이 이어지게 두지 않았다.
"나는 너를 절대 놓아주지 않을 거야. 내가 널 막 귀찮게 하고 막. 나한테는 어울리지도 않는 어리광을 부리는 한이 있어도. 절대 널 버리지는 않을 거야."
그 과정 속에서 금수조차 사람이 되고, 사랑이 태어나는 거니까.
"…알겠다." 나는 그렇게 답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얼굴은 득의양양했다. 그리고 내 눈동자에 그녀가 비쳤다. 감정의 총체적인 표현들.
"좋아. 이제 덤벼. 묵사발을 만들어 주마. 나 마유즈미 가문의 장녀가 이곳에 와 너에게 말하고 있다. 이 기차화통을 삶아 먹은… 이게 아닌가. 아무튼. 나쁜 놈아!"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초고교급 결투가가 나타났다. 나, 인공지능,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실타래는 열차의 바닥에서 나타난 기계 팔이 각각 가져가버렸다.
"가문의 장녀라고 하기엔 여러모로 어리군. 아무튼. 너희가 이기면 돌려주지. 맹세다." 블레인이 말했다. 나는 대답하였다.
"좋다. 블레인. 지혜를 겨루지."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조심스럽게 내 귀를 잡고 조금씩 그녀의 쪽으로 잡아당겼다. "머리라도 맞대 볼래?"
"물리적으로 말인가? 좋은 수수께끼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시도해 봐야겠지." 그것이 어떤 효력이 있을지는 몰랐다.
"아니. 아니. 비유적으로!"
"이게 잘하는 건지 모르겠네…" 인공지능이 외마디로 말하였다.
"그러지 마. 잘 하는 거야 피메일 깡통. 너무 멋있어요. 나나시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너한테 반해서 뽀뽀라도 해 줬을 걸. 분명 그놈은 그랬을 거야. 걔 묘하게 바람둥이 기질이 있거든. 노르웨이의 숲 주인공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애초에 그 사람이 누군데? 여자를 많이 사귀나?"
"그나마 또래로 진지한 만남만 치면 두 명 정도. 주인공은 한 여자에게는 정적이고 고요하지만 깊은 호수 같은 애정을 느끼고. 나머지 한 여자에게는 봄처럼 따뜻하고 막 타오르는 생기 넘치는 종류의 애정을 느껴. 그리고 지금까지 좋은 사람이 되려 했던 내가 왜 이런 괴로움을 느껴야 하냐고 막 고뇌해. 삼각관계 비슷한 거지."
"…나나시와 그 주인공의 어디가 닮았는지 모르겠는걸. 그래서. 끝에서 어떻게 돼?"
"고민할 필요가 없어져. 한쪽이 죽거든. 살아남은 쪽이 승리네. 그렇게 된 거지 뭐."
"나중에 한 대 때릴게. 하기와라 우시오." 인공지능은 웃으며 짜증을 내었다. "여기서 나간 다음에."
"그래. 나가야 나나시한테 뽀뽀받지. 하하호호. 깔깔."
그렇게 수수께끼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중학교 졸업식에 오지 말라고 했어요." 이바라 쿠리스는 운을 띄웠다. "우리 가족은 사실 인망이 넓었어요. 동네가 도무지 작은 동네는 아니었는데 조금만 나이 있는 사람들은 우리 가족을 알았죠. 나이 많은 사람들은 장의사의 일이 어떤 건지 알기에 우릴 존중해 줬어요. 그런데 비교적 젊은 사람들은 우릴 좋게 안 봐주더라고요."
"안 봐주지." 칸나즈키 시노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린 별종이란다.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는 이상한 사람들. 음침한 것들."
"무녀가 음침해요? 무녀님 좋아라 하는 남자애들이 널렸는데.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신사에 엄청 스타일 좋은 무녀님이 있는데. 세전을 엄청나게 해요. 신님이 그런 사심을 달갑게 여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는 신사가 없단다. 무당은 개개인의 신통력을 내세워. 그래서 허주도 많고 가짜도 많지. 그 탓에 별종으로 몰리는 게고. 그래서. 그런 이유로 너는 장의사를 원하지 않았던 게지?"
"혹시라도 소문이 퍼지는 건 싫었어요. 일부러 가족이 가는 모임에 안 따라다녔어요. 가족들이랑 거리를 뒀다고요. 따돌림당하기 싫다고, 그냥. 또래 친구들이랑 놀고 싶다고. 그딴 거 하나 때문에요… 제가. 제가 왜 그랬을까요?"
"터부시된 이의 심정은 그 사람 본인밖에 모르기 마련이야. 놀기 좋아하는 아이야. 졸업식에 오지 말라고 했던 게 왜 그토록 큰 잘못이 되었니?"
"가족이 장의사를 한다는 걸 들키기 싫었거든요. 한 명이 알아보면 소문이 날 것 같았어요. 소문이 제일 무서워요. 제가 모르던 사이에 다들 제가 장의사 가문이라는 게 퍼지고. 어느 날 책상에 꽃이 올라오는 게 싫었다고요. 그런데 가족들은 졸업식에 오고 싶어 하니까요." 이바라의 목소리는 암울했다. "누가 그러고 싶지 않겠나요? 저도 그걸 알아요. 우리 가족은 너무너무 착한 사람들만 모였어요. 대놓고 삐딱선 타는 장녀한테 맛있는 거 많이 사주고, 용돈도 많이 주고… 저 같은 딸도 사랑했나 봐요. 그런데 졸업식에 오지 말라고 제가 틱틱댄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진짜 안 왔을까요?"
"갔겠지."
"…우리 가족은 다 유머 감각이 있었어요. 다 같이 모여서 TV를 보거나 이야기를 풀다 보면 누구나 배를 부여잡고 웃게 될 정도로요. 그래서 그런 이상한 발상을 한 거겠죠? 분장을 한 채로 졸업식에 오는 거요. 아빠는 토끼 탈. 엄마는 코주부 안경에 마스크. 남동생은 가면라이더. 할아버지랑 할머니는 전통 가면. 어이없어. 더 어이없는 건 그렇게 분장을 하고도 졸업식에 안 왔다는 거예요. 교문 앞에 차만 대고 그 안에서 줄곧 기다리고 있었더라고요."
"다들 딸애의 뜻을 존중하기로 한 게지? 분장을 했지만 만약 누군가에게 들킨다고 해 보자. 애초에 졸업식에 수상한 사람 여럿이 들어오면 언젠가 반드시 들킬 테고. 그럼 딸애의 가족은 장의사를 넘어서 분장한 채 졸업식에 난입하려 한 괴짜 장의사 집안이 돼."
"고등학교 데뷔는 확실하게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거든요. 중학교 졸업식이 끝이 아니에요. 소문이 어디서 퍼질지 몰라요. 그건 싹부터 잘라야 하는 거였어요. 그런데… 저 너무 약은 거 있죠. 다들 가족이 와서 웃고 떠들고 사진 찍고 하는 와중에 친구들이랑만 찍으니. 이상하게 가족이 보고 싶어 지더라고요. 오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는데. 내가 좀 못할 짓을 했구나라고 그때 느꼈어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죠. 사과도 하고. 가족들이랑 진득이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교문을 나서기도 전에 구급차 소리를 들었어요."
이바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 자리에 몇십 분동 안 있었는데. 트럭이 하필 그 자리를… 브레이크가 고장 났었대요. 내가 오지 말라고 해서 거기에 있었던 거예요. 내가 그러지만 않았어도…"
이바라의 어깨는 무거웠다.
"다 내가 죽인 거야…"
"지금까지 많이 힘들었겠구나."
칸나즈키의 팔이 이바라의 어깨 위에 올랐다. 그 위에 올라간 짐을 툭툭 털어주며, 동시에 생기를 불어넣는 듯했다.
"아이고. 불쌍한 것. 어쩌나… 이 무지하게도 불쌍한 것…"
이바라는 칸나즈키의 손길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였다. 표정은 조금 편해 보였다. 아무 말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 두 소녀는 그렇게 상처를 나누었다. 괴짜 두 명의 공감이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부담에서 벗어나…"
"당장은 못 할 것 같아요. 죄책감이… 너무 힘들어요. 나중에 하기와라랑 얘기 좀 해 볼래요. 그놈. 나랑 좀 닮았거든요. 저도 이런 얘기 털어놓기가 무서웠어요. 다 똑같은 가봐요…"
"그러렴. 그리고 맞아. 다 똑같아. 모두 똑같아…"
칸나즈키 시노부의 완력. 신통력. 예지와 점술, 그리고 빛(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쓰여 있다)에 어느 정도 감응하고 접속할 수 있는 힘은 모두 수호령에게서 나온다.
그리고 수호령은, 한 신체(神體) 안에 깃들어 있다. 이 신체란 수호령 그 자체를 담는 그릇이다. 또 칸나즈키 시노부와 수호령 사이를 잇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그러니. 신체만 무력화시킨다면 수호령은 칸나즈키 시노부에게 깃들지 못한다.
"저… 수호령 씨. 괜찮으세요? 몸이 좀 불덩이 같아요. 땀도 엄청나게 나고요." 이바라는 칸나즈키의 손을 훑었다. 비 오듯이 땀이 배어 나왔다. 칸나즈키는 당황한 눈치였다.
"…왜 이렇게 덥지? 여기. 나만 덥니?"
"저는 안 더워요. 왜 그러세요?"
"어딘가 이상해. 너무 이상해… 대체 무슨 일이…"
칸나즈키 시노부는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의자 옆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몸이 둥글게 말렸다. 격통으로 인한 근육의 수축. 소사체에게 발생하는 현상과 같았다.
"무… 무영아…!"
칸나즈키 시노부는 온몸에서 땀을 흘리다가 외마디를 내뱉었다. 단 한 번의 깜빡임. 그 사이에 사람이 바뀌었다.
"언니!" 칸나즈키는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고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너무 더웠다. 너무 땀이 많이 났다. "언니이이이!" 대답이 없었다.
"칸나즈키? 왜 그래?" 이바라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채 칸나즈키는 이바라의 전용실을 박찼다. 이바라 또한 영문을 모른 채 일단 칸나즈키를 뒤따랐다. 칸나즈키는 자신의 전용실을 향해 달렸다. 패닉이었다.
"언니. 할머니 언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디 있어?! 어디…"
"문은 열지 마."
토키와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는 칸나즈키의 전용실에서 일곱 걸음 정도를 뗀 거리에 서 있었고, 그의 손에는 소화기가 들려 있었다.
"화재가 났을 때는 먼저 손잡이에 손목을 대고. 뜨거운 감각이 있다면 절대 열어서는 안 돼. 달구어진 손잡이는 문 너머에 불이 있다는 뜻이거든. 상식이야."
"화재라니 무슨 소리야. 토키와?! 이 안에 불났어?!" 이바라가 물었다.
"손목을 대서 확인하면 돼. 어서."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이바라는 토키와에게 물을 일이 너무도 많았다. 소화기는 어디서 가져왔고 화재는 무슨 뜻이고 뭔가를 알고 있냐고. 묻고 싶었다. 근거는 없었지만 이바라가 보기에 토키와에게는 심상치 않은 기색이 있었다.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것은 사실 오히려 익숙했다. 그러나 그 눈에는 어딘가 절박함과 그것을 뛰어넘는 차분함이 있었다. 흉흉하다고 할법한 분위기 속에서 토키와는 몸을 떨지도 광기 어리게 웃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바라는 어딘가 그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다.
칸나즈키는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자마자 펄쩍 뛰어올랐다. "으아아악! 아파!"
"손목을 대라니까. 손목은 온도에 민감하지만 면적이 좁아. 내 말을 안 들으니 손에 화상을 입는 거야." 토키와는 칸나즈키에게 다가가 한 손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칸나즈키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이거 놔. 토키와! 안으로 들어가야 해! 안에 신체가… 신체가 있단 말야!"
역시 신체는 전용실 안에 있었군. 사당. 법당. 뭐 비슷한 것들. 부적. 병풍. 온갖 주술적 도구들. 그 사이에 분명 신체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고 그 추측이 옳았다. 신체가 훼손된 이상 수호령과 칸나즈키 사이의 연결도 끊겼다. 더 이상의 완력도 신통력도 없다. 내 손에 질질 끌려 다니는 게 그 반증이다. 책에 나온 대로야.
"안에는 못 들어가. 어떻게 하려고? 나도 소화기를 들고 오긴 했지만, 불을 끌 수는 없어. 연소시킬 만한 걸 다 태운 뒤 모노로그한테 뒷수습을 해달라고 말할 수밖에…"
"토키와.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왜 소화기를 들고 있어. 화재는 무슨 뜻이고… 저 불. 네가 지질렀어?"
어차피 들킬 일이긴 했지. 하고 토키와는 생각했다. 탑의 인원들은 바보가 아니다. 야가미는 당연히 눈치챌 테고 사실이 퍼지는 것은 빠를 터였다. 빠르나 늦으나 똑같았고, 여전히 통제 범위 내였다.
"그래. 맞아."
"왜?" 이바라는 크게 당황했다. 너마저도 이럴 순 없어. 토키와. 너는 이럴 수 없어. 너는 모리랑 반대였잖아. 너는 그래도 우리를 위했잖아. 조금 흔들리더라도, 좋은 일을 하려고 했잖아. 이럴 순 없는 거잖아…
"우리에게 있어서 해로운 변수이기 때문이야. 칸나즈키는 후루미나미, 그리고 카나리와 손을 잡아 우리를 몰아붙였어. 이후에 어떻게 되든 간에 칸나즈키가 미래를 본다는 명목으로 한 일은 해롭지. 앞으로 그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어."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토키와…!"
"모든 것은 통제되어야 한다는 거야. 칸나즈키." 그렇게 말한 순간. 토키와는 자신이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옳았다. 만약 그가 살인 게임의 처음부터 자신이 본 책에 접근하였다면. 그 정보를 알고 있었다면. 모든 판도는 바뀔 수 있었다. 모든 인원들은. 그에 의해 통제될 수 있었다.
"으이그… 진짜 초 열받네. 나 말고 정상이 없어 아주."
이바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주머니에서 스프레이를 하나 꺼냈다. 몇 번 흔들어 내용물에 거품을 만드는 것은 스프레이 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허장성세였다. 토키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바라를 볼 수 있었고, 곧 그 스프레이를 의식하게 되었다.
이바라는 스프레이를 토키와의 얼굴에 대고 분사했다.
"얼굴을 녹여주마!"
화학자가 그런 말을 하면 누구든 당황하기 마련이다. 사실 칸나즈키가 빙의돼서 마구 날뛰면 제령(되려나?)을 위해 구비해 둔 소금물 스프레이지만, 토키와는 자신의 얼굴에 닿은 차가운 액체가 순간 강산이나 강염기성 액체라 착각했다.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소화기를 떨어트렸고, 이바라는 그 소화기를 낚아챘다. 자칫 손목이 부러질 뻔했지만 세이프 플레이였다.
나는 할 수 있다. 이래 봬도 체육시간을 한 번도 빼먹지 않은 몸이야. 이바라는 높게 뛰어올라 문고리를 발로 내려찍었다. 운동화가 녹는 대신 문이 열렸다. 그 즉시 탈 것 같은 공기가 이바라를 스쳐 지나갔다. 숨을 참은 채. 이바라는 소화기의 안전핀을 뽑았다. 그녀는 외치고 싶었다. 왜 탑에서는 불이 이렇게 잘 나는 거야. 이번이 몇 번째냐고. 미친 방화범들아아아!
"칸나즈키. 소화기 하나 더 가져와! 지금이라도. 빨리!"
이바라는 비명을 지르며 소화기를 뿌렸다.
육만 삼천 이백 육십 칠 초. 지금은 새벽이겠군. 후루미나미는 마지막으로 본 시간에 메트로놈처럼 정확히 잰 초를 더해. 깜깜한 방 안에서도 시간을 가늠했다.
"아직 멀었나?"
누군가가 영안로 속에서 뇌사된 채 나오기에는. 멀었나? 다들 몸을 사리지 않고 달려들겠지. 아슬아슬한 순간에 실타래를 써서 나오려고 할 거야. 누구나 그런 드라마를 원해. 그렇지만 안 될걸.
"싱겁게 끝나겠어."
카타르시스는 없었다. 그녀가 영안로의 위협을 경고하지 않은 순간 이미 끝났다. 나 없이도 알아서 망해 버리다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관조자 노릇은 참 지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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