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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3

더 단크 타워 챕터 3 - 12

by 도타싫어! 2022. 12. 25.

 

순례의 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내 눈빛을 지우십시오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십시오

나는 당신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을 부를 수 있습니다

팔이 꺾여도 나는 당신을

내 심장으로 붙잡을 것입니다

 

내 심장을 멈춘다면

내 뇌수가 맥박 칠 것입니다

 

나의 뇌수를 불태운다면

나는 당신을 피 속에 싣고 갈 것입니다

 

 

 

 

토키와 아유키는 다음 책을 찾았다. 의미 있는 글이 나올 때까지 넘겨서 시 한 구절. 꽝이었다. 다음 책을 잡고 페이지를 뒤졌다. 다음 글이 나왔다.

 

일기

 

일기였다. 또 일기였다. 이번 일기는 또 무슨 내용이지? 이 일기들은 대체 누가 쓴 거지? 토키와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느낌을 받으며 일기를 읽었다.

 

죽음은 언제나 끔찍하다. 이 세상의 물것들 중에 죽음이 가장 끔찍하다. 누구도 어찌할 수 없고, 피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조차도 없다. 단 하나 가능한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잊고 싶지 않다. 오직 나만이 잊으려 하지 않는다. 제발 잊지 않게 해 주세요. 제발요. 부탁해요. 부탁할게요…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칸나즈키 시노부가 이바라 쿠리스의 전용실 문을 두드렸다.

 

"너 지금 뭐 하니? 대답 안 해봤자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에에? 이게 걸려? 또 미래시 때문에…"

 

"나 이제 그런 거 못 해. 새벽에 너 혼자 전용실에서 달그락거리고 있으니 안 거거든. 화학 숙제야?"

 

"실습."

 

"뭐 만드는데?"

 

"그건 네가 알 거 없고… 그만 가. 나 할 일 많아."

 

"무슨 약을 만드려는지는 몰라도 그게 해결책이 되지는 않을 거야. 이바라. 마취제로 후루미나미를 영원히 재워두기라도 하게? 밥은 뭐로 먹여?"

 

"수액. 양호실에 있어. 꽂으면 돼. 어떻게 하는지 아니까 나한테 맡겨."

 

"진짜 마취제 만들어?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하지 마. 그랬다간 네가 먼저 고꾸라질걸."

 

"사람 죽는 걸 막으려면 뭐든 못하겠어…?"

 

"이미 너는 휘청이고 있거든. 이바라. 겉으로도 그게 보여. 지칠 대로 지쳤는데 억지로 뭐든 하려는 거. 토키와랑 똑같아. 쉬어야 할 거야. 충고가 아니라 요구하는 거다?"

 

이바라는 전용실 문을 열어 칸나즈키를 바라보았다.

 

"…조금만 쉴까. 우리?"

 

"그러자. 다들 영안로로 떠나서 적적한데 수다라도 떨까?"

 

"수다…" 이바라는 캐롤과 나누었던 수다를 떠올렸다. "그래. 수다 떨자 우리."

 

"간식 가져올게. 그 뒤에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자. 이바라." 이바라가 말리기도 전에 칸나즈키는 자신의 전용실을 향해 떠났다.

 

"그런 얘기는 싫어!" 이바라가 칸나즈키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머지않아 칸나즈키는 태연하게 돌아왔다.

 

"야할로!"

 

칸나즈키는 커다란 보따리를 손에 들고 있었다. 노란색 천. 간단한 피크닉이라도 떠나온 모양새였다. 이바라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묻지 않았다. 칸나즈키의 간식이니 도마뱀 구이가 나와도 놀라지 않기로 하였다.

 

"아직 이 말 쓰니? 내가 유행에 둔감해서 제대로 한 건지 모르겠어." 이바라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인지 그 상황이 반갑고 어딘가 즐거웠다. 자기 또래 여자아이와 유행에 대해 나누는 대화 자체가 굉장히 반가웠다. 원래 이래야만 했다고 이바라는 생각했다. 암흑의 탑에 있는 게 아니라 간식을 나눠먹고 실없는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것이다. 친구의 죽음을 보는 게 아니다. 그딴 청춘은 없다.

 

"야할로는 구식이야. 나는 헤이. 콘챠스. 요를 썼어. 야할로는 완전 촌스러워."

 

"아아. 아쉬워라. 구식이 되다니!"

 

그렇게 한탄하는 칸나즈키는 천진하고 무해해 보였다. 그러나 이바라도 사람인지라 나이토와 나나시를 각각 한 손으로 질질 끌던 여자애와 한 방에 있자니 보험을 들어두고 싶어졌다. 그녀는 토키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발신음이 두 번 울리고 토키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바라?"

 

"나 지금 칸나즈키랑 단 둘이서 얘기하는 중. 둘 중 하나가 죽으면 나머지가 검정이야. 이거 얘기해주려고 전화했어."

 

"이해했어. 재밌게 얘기 나눠."

 

얘는 왜 새벽에 깨어 있지? 이바라는 전화를 끊으며 짧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별 심각함 없이 털어버렸다. 뭐 다이얼로그를 바로 옆에 두고 잔 거겠지. 토키와도 사람인데 어떻게 별일 없는 날에도 밤을 새워?

 

"재밌는 이야기 아닐 텐데. 죽음에 대한 이야기인걸." 칸나즈키가 중얼거렸다. 이바라는 지금 아니면 답이 없다! 라는 생각과 함께 화제를 돌렸다. 동시에 몸을 돌려 전용실의 한쪽에 놓인 버너와 프라이팬을 향해 걸어갔다.

 

"사실. 내 쪽에서도 간식을 준비하려 하거든. 칸나즈키. 기다려 봐 봐. 내가 화학도 곧잘 했지만 귀엽고 깜찍한 것들에도 관심이 많단 말이지. 그러니까…"

 

"뭐 만들게?"

 

프라이팬. 버너. 이바라는 프라이팬 위에 손을 올리고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느꼈다. 충분히 달구어졌음을 느끼고 버터를 녹인 뒤, 그녀는 준비해두었던 밀가루 반죽을 국자로 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시행착오에 의하면) 반죽을 얇고 넓게 펼치는 것이다. 굽다 찢어지는 것이 두려워 보강하고 두껍게 하려다간 그저 팬케이크가 되어 버린다. 차라리 '이 정도로 구워질까?'싶은 양을 붓고 프라이팬을 돌려 넓게 펼치는 것이 나았다. 얇고 바삭해져라. 극도로 얇아 프라이팬 면의 열이 크레이프의 반대편에 도달하리만치 얇아져라… 이바라는 장인과도 같은 집중력으로 물기가 고여 빙빙 돌아가던 프라이팬이 점점 마르고 물 또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냥 두껍게 먹으면 안 돼애?" 칸나즈키가 닦달했다.

 

"크레이프는 얇아야 해."

 

"왜? 두꺼울 수도 있잖아. 쉬워 보이는데 빵빵하게 팍팍 구워 먹어 버리자!"

 

"사람들이 서비스업에서 가지는 착각이 또 나오네. 그 일이 쉽다는 거. 아무나 할 수 있다는 거. 그럼 왜 전문직이 있겠어? 남들이 하기 싫고 어려운 일이니까 내가 돈을 버는 건데 말이야. 너는 얇고 맛있는 크레이프를 탁자에 식기들 두들기며 기다릴 수 있지만, 나는 완벽하게 구우려고 심혈을 기울인단 말이지."

 

"아. 어떤 느낌인지는 나도 알아. 몇몇은 내가 눈 까뒤집고 되는대로 지껄이는 거고 신통력은 없다 믿거든. 나는 영능력자와 예언가 둘 중 사이 둘 다고 둘 다 아니기도 하니까. 그만큼 믿음직스럽지가 못한 편이야. 대충 신상 줄줄 읊으면 곧잘 믿어주지만."

 

"다들 자기가 직접 하기 전까진 모른다니까. 실패작이나 팬케이크만 몇 판 먹은 사람만이 이 작업의 심오한 철학을 이해할 수 있겠지. 손에 반죽이 묻은 뒤에야."

 

이바라는 완벽하게 구워진 두 장의 크레이프에 자른 딸기를 넣고 생크림을 발랐다. 초코 시럽을 조금 뿌리고 알맞게 접기만 하면 이상적인 크레이프가 만들어진다. 그녀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장의사 일도 마찬가지야?" 칸나즈키가 물었다.

 

"안 해본 사람들이 무지하게 투덜거리냐는 뜻이면, 맞아. 사람들은 장의사가 사람을 죽이는 줄 아나 봐. 기분 나쁘네. 얽히면 안 되네. 징그럽네. 역겹네. 더럽네… 아. 열받네. 제대로 된 사람이면 장의사 일을 싫어해도, 그게 장의사를 존중하는 이유가 되어야 하지 않아? 그 소위 하찮고 더러운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하고 있는 이들이잖아. 그 일에 의미가 있다고 믿기에 하고 있는 건데, 손가락질을 해. 이 바보들… 나중에 자기들은 우주선을 만들 줄 아나 봐. 어디서 나오는 자존심이냐? 왜…"

 

이바라의 목소리가 서서히 작아졌다.

 

"장의사를… 그렇게 싫어한 거냐고."

 

"사람들은 자기 혼자 생각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따라가려 하니까 그렇지. 혼자 툭 떼어놓으면 청소부에게 음료수 한 캔을 건네던 사람들도 그럴만한 무리에 던져놓으면 손가락질을 해."

 

이바라는 칸나즈키의 말에 몸을 움찔 떨었다. 등에 바늘이 꽂힌 사람과도 같았다.

 

"그래. 정말 그렇지… 이런 얘기는 하기 싫었는데. 아무튼 다음 크레이프는 바나나 맛이야. 기대하시라… 그런데. 그 보따리 안엔 뭐가 들었어?"

 

칸나즈키는 보따리를 열었다. 락앤락 통이 두 개 들어 있었다. 한 보따리 안엔 갈색 무언가가, 한 보따리 안엔 붉은 무언가가 있었다. 붉은 게 들은 락앤락의 뚜껑은 알 수 없는 빨간 알갱이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락앤락 통들을 보여주며 칸나즈키는 그 내용물을 말했다.

 

"거트조리? 그게 뭔데?"

 

"겉절이야."

 

"것쩌리…?"

 

"겉절이래도. 김치를 담글 때 발효될 만큼 숙성시킨 게 아니라 절인 배추에 양념을 바른 직후에 먹는. 가장 날것의 김치를 말하는 거야. 먹어볼래?"

 

어라. 이건 변수인데. 이바라는 캐롤과의 걸즈토크를 떠올렸다. 이바라가 크레이프를 준비한 것은 수다를 떨 때 달달한 간식을 제공한 캐롤의 영향도 있었다. 그녀도 멋있고 싶었다. 캐롤이라는 사람의 직업정신. 프로페셔널한 섹시함. 그 매력은 그 사람의 육체가 어떠냐를 넘어 그 사람에게 생기와 광채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캐롤이 윤리 강령에 대해 말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나시와 스캔들이 터졌지만, 뭐… 사랑하지 말라는 법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격증을 박탈할 학회나 협회같은 것들도 대몰락 때문에 없을 테니. 또 곧 죽게 되는 캐롤이 그나마 날개를 펼치고 간 것에 이바라는 그게 나쁜 일은 아니리라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캐롤은 금색 유리로 변하기 직전 생각했을 테니. "아. 다행이다. 금기를 어길 수 있어 다행이야."

 

어쩌다가 후회와 죽음으로 사고가 틀어진 걸까. 나 지금 우울한가? 이바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그녀가 당황한 이유는; 같이 이야기 나누는 사람이 간식을 그것도 밥반찬 비슷한 걸 들고 오는 일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칸나즈키는 락앤락을 전용실에 놓인 한 탁자에 텅하고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고무장갑을 당겨 쫙 소리를 냈다. 고무장갑이 수축하며 자신의 몸으로 착용자의 몸을 때릴 때 나는 기분 좋은 소리였다. 이바라 본인에게도 익숙했다. 바로 화학실습 전 그녀가 곧잘 하던 동작과 닮았던 것이다. 양손을 쫙. 쫘악. 그러면 실험 도중에 튀는 약품을 쉽게 막을 수 있었다. 덱스터의 실험실에서 덱스터가 장갑을 당기듯이.

 

"웬 고무장갑?" 이바라가 물었다.

 

"원래 겉절이는 이렇게 먹거든. 재료가 있길래 손수 담갔어. 수육이랑 같이 먹는 게 정석이지." 칸나즈키는 락앤락에서 삶은 고기를 꺼내고, 겉절이가 든 락앤락에서 배추 한 포기를 꺼내더니 익숙하게 한 잎사귀를 세로로 찢었다. 섬유질의 결을 따라 배추가 주욱 찢어졌다. 칸나즈키는 알맞게 찢은 겉절이를 고기와 함께 손에 쥐어 이바라에게 뻗었다.

 

"아아앙."

 

"엣? 나. 나한테 주는 거야?"

 

"그럼 누구게? 와아아아앙."

 

이바라는 성의를 거절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종잡을 수 없는 꼬마가 준 처음 본 음식일지라도 먹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그녀가 간과한 사실이 있으니. 칸나즈키의 어머니는 한국인이었고, 신 씨였으며. 매울 신(辛) 자를 썼다. 집안의 전통 비율을 따른 칸나즈키의 겉절이는 그 이름에 걸맞은 정도였고, 그것도 가장 맵고 날것인 편인 겉절이를 마음의 준비 없이 먹었다간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맵… 맵다…!" 이바라는 팔을 교차하여 전완을 서로 긁적였다. 정수리도 긁적였고, 뒷머리도 긁적였다. "지. 진짜 초 매운데…?"

 

"아차. 매울 수도 있다는 얘길 안 했네."

 

"크. 크레이프로 넘어가는 걸로…!"

 

이바라는 다급하게 입 안에 남은 것들을 꿀떡 넘기고 크레이프를 집어 들었다. 반 정도를 한 입에 쑤셔 넣은 이바라는 크림의 유지방이 캡사이신을 녹이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기도를 하듯 간절하게 크레이프를 씹었다. 그 와중 칸나즈키는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배추를 또 주욱 찢어 고기에 싸 먹고 있었다.

 

"너는 맵지도 않니?"

 

"그다지. 오래 먹어와서 그런가 봐.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지. 재료도 똑같고 양념도 똑같이 섞었는데 그때보다 맛없어… 같이 먹던 사람이 이젠 없어서 그런가. 원래 김장은 다 같이 하는 건데."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했었지." 이바라의 목소리는 그녀의 자각 없이도 가라앉아 있었다.

 

"하기 싫어도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야."

 

"왜?"

 

"그야 하지 않으면 우린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까. 받아들일 수 없게 되니까. 너도 알잖아."

 

"알지… 나도 알아. 누구보다도."

 

침묵의 무게는 정확히 몇 그램인가.

 

"칸나즈키. 미래를 못 보는 건 어떤 기분이야?"

 

"어떤 기분이긴." 칸나즈키는 곧바로 답을 냈다. "그야 너희랑 똑같은 기분이지."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있다는 투였다.

 

"너는 원래 볼 수 있다가 못 보게 된 거잖아. 막 미래 보면서 누가 누굴 죽이고 내가 언제 죽고 이런 걸 보다가 이제 못 보는데… 무섭지 않아?"

 

"내가 죽는 미래는 원래 너무 많아. 너희도 대부분 그래. 내가 계단에서 넘어질 수도 있고 욕실에서 발을 헛디딜 수도 있어. 죽음은 그저 어디에나 있는 거야. 나나 내가 아는 사람이 그 수많은 덫 중 하나에 걸리더라도 그건 슬픈 일일뿐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죽음에 대한 대화.

 

"…너와 내가 죽음을 보는 시각은 좀 다른 것 같아."

 

"다르지. 많이 다르지. 나는 죽은 사람이랑 얘기도 나눌 수 있으니까 더욱 죽음을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예정조화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여길 수밖에."

 

"나이토와 모리랑도 이야기 나눌 수 있어?"

 

"내가 원한다면. 하지만 이젠 그다지 안 원해. 나는 사실 이미 천기를 많이도 누설했어. 더 하고 싶진 않아."

 

"그치만…"

 

"애초에 너무 쉽게 믿어. 이바라. 내가 거짓말하고 있는 거면 어쩌려고 그래? 나이토 말로는 나나시가 위험하대. 모리 말로는 공리를 위해 뭘 하래. 이런 식으로 말을 전해주면 넙죽 믿을 거야? 너는 지쳤어. 놀기 좋아하는 아이야. 지금 네 가족이 네 어깨를 토닥이고 있다고 말하면 눈물이라도 흘릴 게다."

 

이바라는 말의 끝부분에서 중후하게 변하는 칸나즈키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바라는 칸나즈키와 다른 무언가의 말투부터 하는 말뽄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처를 후벼 파놓고 내가 옳다는 식으로 뻔뻔하다니. 그녀는 왜인지 방 안에 부는 미풍을 느끼며 칸나즈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웃음기가 없었다.

 

"당신이 누군데 그런 걸 알아?"

 

"고대 여신 보살 할머니 언니다."

 

"여긴 가상현실이라며. 그런데 어떻게 여신이 칸나즈키한테 빙의를 해? 어? 당신… 설마 그냥 칸나즈키가 연기하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가상현실인데 어떻게 터치는 작동하는 거지?"

 

"터치는 그냥 체질이잖아. 캐롤의 초능력…?"

 

"터치는 빛과 관련되어 있지. 사람의 영혼 그 자체와 말이야. 그런데 어떤 복잡한 프로그램이 영혼의 변수와 존재를 짜 넣을 수 있겠니? 이곳은 단순히 기계가 만들어낸 곳이 아니다. 네 말대로 나마저 구현시킬 수 있는 가상현실 따위는 없으니까. 빛도 마찬가지야."

 

"당신이랑 얘기를 나눌수록 더 어려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이바라는 고개를 저었다.

 

"이 탑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시련을 포함해서. 그저 환상이 아니란다. 어느 부분은 현실의 단편을 뜯어 붙여놓은 것에 가깝지. 내가 추측하기엔 헤아릴 수 없는 주술적 조치들과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기술력이 함께해야 가능한 일이지만… 이 안에 들어온 이상 내가 어찌할 방법은 없단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나 더 할까?"

 

"…죽음이 뭐인지에 대한 얘기라면 안 할래. 지금까지 말싸움을 너무 많이 봤어. 터치. 공리. 올바른 일. 선한 사람… 그게 뭔지 정하려다간 끝이 없어. 그러니까 당신 나와. 나는 칸나즈키가 당신보다 좋더라."

 

이바라의 말에 칸나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그리고 한 번의 눈 깜빡임 사이에 사람이 바뀌었다.

 

"할머니 언니가 좀 거치시긴 하지? 그래도 우리 집 수호령이야. 아빠는 고대 여신 싫어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배우자의 모든 걸 좋아하겠어. 그러니 아빠가 날 일본으로 데려온 것도 이해가 돼. 가업에서 날 탈출시키려 한 거야."

 

"가업? 대대로 무녀였어?"

 

"가업(家業) 맞아. 대대로 그 일을 했고, 대대로 업보가 쌓였어."

 

"업보?" 이바라는 문득 미도리카와 아쿠토를 떠올렸다. 업보를 중요시하던, 누군가가 손을 쓰기 전에 사라져 버린 그 밀수업자를. "웬 업보?"

 

"우리 일은 천직이야. 하늘에서 내려준 일은 우리에게 부와 명예를 줘. 그렇지만 망자를 보고, 망자와 얽히고, 길을 닦은 끝에 쌓인 천기의 누설이나… 뭐라고 해야 할까…" 칸나즈키는 손을 빙글빙글 돌리며 알맞은 낱말을 찾고자 했다. "반향은 죽기 직전에야 갑자기 돌아와. 누군가는 짊어져야 하는 짐이지."

 

이바라는 소름이 끼쳤다. 집에서도 저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쿠리스. 우리의 일은 하늘이 내려준 거야."

 

"뭔 얼어 죽을 하늘이야? 엄마. 나는 장의사 안 해! 겨우 친구들 사귀었는데 또 망쳐놓을 생각 마. 저번에 말했지? 나는 장의사로 소문난 사람들이 내 졸업식에 오게 두진 않을 거야."

 

"누나. 너무해…"

 

"뭐가 너무해? 농담 아니니까 다들 올 생각 마. 내 고등학교 데뷔 망쳐 놓으면, 전부 평생 저주할 거야!"

 

이바라는 울고 싶어 졌다. 한 생각만을 했다. 왜 장의사를 그렇게 싫어한 거냐고.

 

 

 

 

 

 

"나오시죠. 모노로그 씨."

 

"왜 부르지? 날 가증스럽다고 여길 텐데."

 

"적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 많으니까요. 알아야 하는 것도 많고 말입니다."

 

"알려줄 것 같나?"

 

"그럴 것 같습니다. 나타났으니까요. 그럴 만한 자신이 있는 것. 아닙니까? 당신은 뭘 꾸미고 있는 겁니까? 제 앞에 나타나는 것 자체가 당신에게 여유가 넘친다는 반증입니다. 저 같으면 나타나지 않았을 걸요. 아무리 작은 단서라도 거저 주는 꼴이 되니까요. 그러나 당신은 제 부름에 응했으니 무엇이든 말을 해주겠지요. 사소한 것이라도."

 

"아무리 작은 말에서라도 단서를 찾겠다. 이 말인가? 내 출현을 과대평가하는군."

 

"저는 분별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제대로 쓰지는 못하고 있는 건가? 해서는 안 될 도박을 한 것 말이다. 판돈을 전부 땅에 버리고선 외로운 길을 가겠군. 네 죽음은 결코 편하지 않을 거다."

 

"예. 그래도 살인자로서 온몸에 총을 맞고 죽는 것보단 지금이 낫겠지요."

"왜 대답이 없습니까? 분별력입니다. 당신의 침묵으로 또 단서를 얻었고요. 아직은 가설 단계였지만 이제 의심해볼 만하군요."

 

"너는 정말 보기에 즐거운 인간이다. 야가미 토가. 너와 협상을 했던 때부터 줄곧 그렇다. 이 게임에 있어서 적수가 얼마나 반가운 것인지 너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확신은 언제 오지?"

 

"확신은 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도 준비되지 않았고. 북극곰 우리에 있는 빙하 그림은 북극곰들을 위한 것이니까요."

 

"동물원의 주인을 위한 거다. 북극곰들의 눈을 가리기 위해. 조금이라도 그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살 것이며 자유는 찾아오지 않는, 구경물 신세라는 것을 알지 못하게끔 있는 거지."

 

"구경꾼들의 기억도 매번 지워집니까?"

"아니면, 구경꾼 자체가 없겠군요."

 

"정말이지 즐거워."

 

"그럼 좀 예뻐해 주시죠? 모노로그 씨. 당신은 왜 그리도 여유롭습니까?"

 

"그야 여유로울 수밖에. 일이 과도하게 쉬워졌다. 영안로 안에 들어간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지. 그게 자신들의 무덤이 될 거란 것을. 통발은 이미 가득 찼고, 네가 뒤집을 방법 따위는 없다. 그 분별력으로도 아직 모르나? 이미 끝났다. 너마저도 이미 끝난 목숨이다."

 

"어느 정도는 압니다. 아마 제가 울고불고 사정한다면 당신은 저를 받아주지 않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카이다 씨보다는 제가 나으니까요."

 

"그렇지만 네가 곧 죽어도 그러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지."

 

"예. 알고 계시다니 서로 얼굴 붉힐 일은 없겠군요. 그만 가시죠."

 

 

 

 

 

 

"곧 휴식 시간이 끝날 테지."

 

당분의 수용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욱 큰 도움이었다. 혈류가 빠르게 도는 것을 느꼈다. 엔돌핀이 몸에 돌기 시작하면 스모어를 먹기 이전보다 훨씬 나은 움직임을 할 수 있을 터였다.

 

"히무로. 처음 깨어났을 때는 평범하게 말했으면서 지금은 왜 말투가 딱딱해진 거야?"

 

"내 말투는 원래 이렇다."

 

"아니었잖아! 저번에는 누나 누나 하면서 살갑게 굴어 줬으면서 이제 와서 불편하게!" 내가 그리도 살가웠던가? 그런 기억은 없었다.

 

"의식을 하지 않으면… 곧잘 이렇게 된다. 다른 이들이 불편하다는 것은 알지만, 지금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다른 사람이 듣기에 어떠냐 따위의 일을 고려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또 고압적인 말투는 취조를 원활하게 만들지."

 

"너 나랑도 취조하게?"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자신을 검지로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를 상대로 그러려는 의도는 없다. 시인하자면, 그저 나쁜 버릇일 뿐이기도 하다."

 

"어떨 때 나오는 버릇인데?"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물었다.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 때에 나온다."

 

"그럼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 딱딱할 거야? 나는 네가 평범하게 말할 때가 좋아."

 

감시자에게 예외는 없다. 감시자에게 반려란 없다. 감시자는 누구에게서도 위안을 얻을 수 없어야 한다. 감시자는 곧 죄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다. 저울은 거품 하나만큼의 차이도 없이 온전한 수평인 채로 기다려야 한다. 감시자는…

 

2시간에 한 번. 20분 길이의 독백. 질리게 된다. 불길한 꿈 속에서 독백과 하나가 된다. 곧 독백을 외우게 되고, 줄줄 읊게 되고, 그 결과 감시자 후보들은 독백대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이의 마음은 이런 암시들과 하나가 되고, 암시들의 총체는 아이의 이성이 된다. 뿐만 아니라, 어른의 이성도 역시 평생 동안 줄곧 이런 암시들의 지배를 받는다. 판단하고 갈망하고 결정하는 이성은 바로 이런 암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암시들은 우리들이 제시하는 암시다!'

 

"…내가 바뀌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는 말했다.

 

"그래. 어려운 일이야. 히무로이드는 우리랑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랬어." 하기와라 우시오가 말했다. "사실. 했던 얘기도 비슷해. 말투가 왜 그 모양이냐? 원래 이랬다. 그런 식이지. 그러니까 관둬. 저거 고치려 들었다간 네가 먼저 지쳐서 나자빠질걸?"

 

"고치려는 게 아니야! 히무로가 무슨 나무야? 예쁘게 보이는 모습으로 싹둑싹둑 자르게? 나는 그냥… 히무로가 다정하게 말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 뿐이야."

 

"글쎄. 다정하게 말한다고 해서 후루미나미가 얌전하게 지냈을 것 같진 않은걸." 인공지능이 말했다. "적어도 히무로가 하는 일이 정중하게 이루어졌다고 해서 달라질 일은 없었겠지."

 

"달라질 일 많아! 다른 사람들이랑 더 친해질 수 있을 거야. 나랑 했던 것처럼!"

 

"되겠냐고오오오." 하기와라 우시오가 투덜댔다.

 

"된대도! 방 안에서 대화만 나눠도. 아주 조금의 연관성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도 충분히 카친이 될 수 있어!"

 

"카친?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카나리 친구? 아님 카이다 친구? 그딴 건 없어요."

 

"카 친구 줄임말이야. 입에 좀 잘 붙지 않아? 카친. 카친. 어때!"

 

이미 그런 것을 지칭하는 카텟이라는 단어가 있노라 상기시키려다가 그만두었다. 카텟의 의미는 그 이름이 아니라 의미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카친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카텟은 곧 카친이다.

 

"친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라고 생각해. 사실 나도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그래서 더 많이 사귀고 싶어. 여기서 나가면 친구 백 명을 만드는 게 내 목표야. 같이 노력할 수 있지 않을까?"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친구 백 명 말이야?"

 

"친구 백 명과 노력 그 자체 말이다. 살인 게임을 끝내기 전에 가능할 수 있을지부터가 미지수이다. 지레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시간에 많은 성과가 나오기를 기대하지는 말아다오. 네가 먼저 지칠지도 모른다."

 

"안 그럴 테니까 걱정 마. 나는 이래 봬도 글씨 쓰는 것만 몇 년을 해온 사람이야. 참을성 하면 마유즈미 나데시코거든. 그러니까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시작해 보자. 오늘은… 이거 어때?"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생글방글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야 라고 해보자. 히무로."

 

"야 라고 해봐. 어. 나한테. 동갑이니까 괜찮잖아? 하나 둘 셋 하면 야 하는 거다."

 

나는 몸을 움츠리며 놀랐다. 그녀가 떠올랐다. 동시에 나는 찌르는 듯한 두통을 느꼈다. 무언가가. 무언가가 떠오르려 하였다.

 

'첫 번째 절차는 풀렸다. 묶인 것이 풀리기에는 두 개가 남았다.' 그 의미는 알 수 없었다. 무엇이 묶였다는 뜻이지?

 

"반말…" 나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닮았다. 나에게서 선한 모습을 끄집어내는 것이 닮았다.

 

"굳이 야가 아니어도 일단 친근한 표현이면 뭐든 좋지 않을까? 어이. 여어. 요? 헤이도 되나? 내 쪽에서부터 시작해도 되고. 어이. 어어어이. 어이. 어이. 계세요? 히무로 씨? 문 좀 열어 주세요."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손목을 뒤로 뺐다가 밑으로 내리기를 두 번 반복했다. 문을 노크하는 것이 아니라 문고리를 들었다 놓아 소리를 내는 동작이었다.

 

굳게 닫힌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뼈는 지속적인 압박 끝에 피로골절되고, 한 자리에 떨어지는 물방울은 살갗을 찢고, 바위마저 뚫는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이어지는지였다.

 

"나는 형상기억이 된 사람이다."

 

"어럽쇼? 그건 무슨 생뚱맞은 소리야?"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물었다. 나는 말하고 싶었다. 내가 감시자로 변모하는 데에는 절차가 남았다고. 나의 정신이  이 미완성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이상 아무런 마음도 가지지 않은 비인간으로 변하지는 않겠지만, 너처럼 밝게 웃을 수 있는 인간으로 변하지도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네가 하고 있듯이 나를 한 방향으로 이끌지라도, 그래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면 나는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형상기억합금이었다. 제 모습을 잃어도 환경만 주어지면 다시금 돌아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그것보다 더 나은 말을 들어야 했다. 최소한 그 정도의 대접은 해주어야 했다.

 

"…어이." 결국 나는 그렇게 말했다. 다분히 불친절한 어투였으나,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양손목을 맞닿게 한 채로 손등을 젖히고 연속적인 박수 소리를 내 주었다.

 

"잘했어! 그것부터 시작하는 거야. 운명으로 이어진 어이. 그럼 이건 카어이가 되겠지. 재밌지 않아? 하기와라를 야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23T를 야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무언가가 시작될 거야!"

 

"운명으로 이어져 있는 것 따위 없어. 마유즈미. 그런 게 있었다면… 아니. 애초에 그런 건 있어서는 안 돼." 인공지능이 말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왜?"라 묻자 인공지능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두 사람이 헤어졌을 때. 그것마저 카의 일부였다는 것이 되니까. 카는 사람의 모든 것을 부정해 버려. 그 이별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체념 말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어. 카는 저주야. 카텟은 한 소시오패스가 어디에 속해 보려고 안달을 낸 끝에 발굴해낸 개념이고."

 

"소시오패스란. 메리… 시라유키 히메리를 지칭하는 것인가? 왜 그녀에게 그런 오명을 씌우는 것이지? 너와 이름 없는 남자 모두 말이다." 나는 인공지능에게 물었다.

 

"그건 말이지…"

 

"휴식시간 끝났어요!" 패트리샤의 목소리가 울렸다. 인공지능은 아쉽다는 듯 쯧 하는 음성을 내었다. 혀가 없는데도 가능하다는 것이 의외인 소리였다. 인공지능은 자신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쉽네. 히무로. 작게 상영회라도 가지려고 했는데." 그 말의 뜻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어지는 패트리샤의 말에 신경이 쏠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두 번째 깨달음으로 나아가실 수 있으세요."

 

"시련은 안 되나?" 나는 패트리샤에게 물었다.

 

"두 번째 시련 말씀이신가요?"

 

"깨달음보다 시련이 더 빠르다면 우리는 시련을 선택할 것이다."

 

"이제 와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시련은 깨달음에 비해 어려워요. 그리고 효율적이지 않기도 하지요." 첫 번째는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공포에 떨어 영안로 밖으로 빠져나갔다. 효율적이지 않은 일이었지만, 패트리샤가 말한 바는 다른 맥락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효율적이지 않다는 거지?"

 

"깨달음이 부족하면 사자에게 하자가 생기거든요." 패트리샤가 얄밉게 말했다.

 

패트리샤는 그렇게 말했다. 사자에게 하자가 생긴다고. 무슨 바보 같은 말장난인지 모르겠다. 하기와라 걔가 할법한 말장난이었다. 아무튼 내게 뜻은 전해졌고, 그래서 나는 깨달음을 선택했다. 그야 기껏 되살렸는데 그놈이 아니라 이상한 놈이 나오면 낭패였다.

 

나에게는 나에게 배신당한 나이토가 필요했다. 그래야만… 그래야만 그 일의 매듭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깨달음이었다.

 

어느새 돌아온 회중시계. 첫 번째 깨달음에서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것을 나는 움켜쥐었다. 그것만 있으면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었다. 내 몸은 덜덜 떨렸고 다리는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곳일지라도. 내가 처음 보는 진창 속일지라도. 무법지대 안 일지라도 아무튼 문제는 없었다. 어차피 영안로 속에서는 내 이름만 말해도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중시계.

 

네 심장 고동에 맞춰서 돌아가게끔 만들었다. 똑딱맨이니 가능한 일이지. 자세히는 묻지 말거라.

 

네 심장을 손에 쥐는 게다. 케이토. 그게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면 바늘을 돌려 느리게 만들면 되는 게다. 네겐 화가 많지. 가만히 앉아서 톱니나 깨작거리다간 다 엎어버리고 싶어질 테지. 그럴 때 네 심장을 쥐어라.

 

그것은 자신을 되찾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기보다는 일상적인 루틴에 가까웠다. 똑딱맨은 그에게 비장의 한 수를 주었지만 카나리 케이토라는 사람은 그것을 남용하게 되었다. 시계에 의존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했던 시계공의 유산이었다. 쓰지 않는 게 손해였다. 쓰는 게 아깝다고 뭔갈 아끼는 놈들은 평생 돈 벌 팔자가 아닌 것이다.

 

카나리는 기회를 잡을 줄 알았고 움직여야 할 때가 지금 임도 알았다. 그는 골목길 사이를 열심히 누비며. 분명 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면 얼추 깨달음이 끝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가장 위험한 곳에까지 제 발로 걸어가게 되었다.

 

이쯤에서 쉬어가자. 카나리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한 건물에 들어가. 계단에 걸터앉았다. 플라잉 로봇을 타고 날아다닐 생각에 밧줄을 묶어두긴 했지만, 그건 팔에 너무 의존할 테니 위험하고 또 너무 눈애 띄는 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것은 패트리샤의 의도가 아닐 것 같았다.

 

첫 번째 깨달음에서 카나리는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누군가의 체험 안에 들어갔다. 굉장히 괴로웠지만 아무튼 그게 잘 된 깨달음이라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나이토 유즈루를 되살릴 열쇠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게 각오한 일이었음에도 주변이 카나리에게 있어 충분히 견딜 만하다던가, 부대낄 만한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카나리는 주변에 쥐똥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았다. 퀴퀴한, 어딘가 메마른, 역하다기보다 극도로 불편한 냄새. 쥐똥의 냄새를 맡아보지 않은 사람은 쥐똥이 얼마나 냄새나는지 가늠도 하지 못한다. 그는 가늠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것을 다시 맡았을 때. 카나리 케이토는 자신의 의식이 옛날로 끄집어내져 그 당시로 돌아간 것 같다고 느꼈다. 춥고 배고프고 축축한 공장 숙소의 어둠이 카나리의 도처에 깔려 있었다. 보이지 않는 눈동자와 작은 찍찍거림마저 들리는 듯하여 그는 회중시계를 꽉 잡았다. 금속과 피부 사이에 땀이 배어 나왔다. 어떻게 지금까지 잊고 있었을까? 캐비어가 너무 달아서 그 맛을 잊었나? 비참함의 맛을?

 

카나리는 이윽고 눈을 크게 뜬 채 시곗바늘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는 스스로의 심박수가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카나리 케이토의 집중력은 다른 이들의 수준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자신이 옛날에 돌아왔음을 느낀 그의 두뇌는 멋대로 예민해졌다. 제멋대로 양분을 소비하고, 그가 뻗게 만든다. 그는 과호흡이 올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주머니에서 소금 초콜릿을 꺼냈다. 이것은 단순히 소금을 첨가한 것이 아니라 소금과 초콜릿이 평행을 이룰만치 추가한 것인데, 초콜릿이 녹는 동안 소금 알갱이는 녹지 않아 이윽고는 인위적으로 짠 끝맛을 내는 제품이었다. 그러나 카나리는 맛에 불평한 적이 없었다. 염분 부족으로 기절하지 말라고 14시와 18시에 하나씩 배급하는 정제소금 주머니보다는 나으니까.

 

입 안에서 초콜릿을 먼저 녹이고 카나리는 소금 알갱이를 씹었다. 날뛰던 머릿속의 다람쥐가 잠잠해졌다. 이제 비로소 쉴 수 있으리라. 카나리는 회중시계에서 손을 떼고 다리를 주물렀다. 곧 더 걷고 뛰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는 와중. 빌라의 윗계단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빔 형성이 되어 있더군."

 

카나리는 낮은 여성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홱 돌렸다. 완전히 폐허가 된 도시인지라. 굶고 있는 누군가가 자신의 금품을 노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에도 카나리는 시계가 터져버릴 만치 긴장하지는 않았다. 여성이라면 그렇게 강하지 않으리라 그는 생각했고, 이는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시하는 날것의 발상이었다.

 

여성의 키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체구는 작은 편이었다. 얼굴과 머리는 뒤집어쓰는 복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눈까지 가려졌고(눈이 보이나? 어떤 소재를 쓴 거야?) 머리에는 페도라 모자를 써. 인상착의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만으로 충분히 카나리 앞의 여자는 수상했으나 카나리를 무척 불안하게 만든 요소는 더 있었다. 섬이 조금 남는 트렌치코트. 주머니에 잦바듬히 꽂힌 손. 그리고 긁는듯한 발성. 카나리는 벌써 눈앞의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군가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빔은 피할 수 없다. 동료가 사라질 때는 언제나 빔이 놓인다는 것을 알지만 누구도 막을 수 없지. 또 동료가 사라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군. 오늘만큼은 아니었어. 사라졌던 이가 돌아올 줄이야 전혀 예상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너…"

 

말투마저 걔 같잖아. 카나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잠시 조종에서 벗어난 모양이군. 나는 너를 좋게 평가한 적이 없다. 하지만 내가 지금부터 너에게 해줄 일은 그 어느 때보다 너를 위한 일이다. 진심이다. 너도 결국에는 내게 감사하게 될 것이다. 스스로의 의지 없이 무언가에 종속되는 것은 죽느니만 못한 삶이니."

 

트렌치 코트를 입은 정체불명의 여성은 코트의 주머니에 꽂혀 있던 자신의 손을 꺼냈다. 그리고는 이미 쓰고 있는 가죽장갑을 팽팽하게 당겨 자신의 손에 밀착시켰다. 그녀의 몸에서 외부로 노출된 부위는 조금도 없었다. 마치 희귀병에 걸려 대기와도 접촉하여서는 안 되는 사람 같았다.

 

카나리가 플라잉 로봇을 부르기 직전. 여성은 계단 여덟 칸을 도움닫기와 함께 뛰어내렸다. 카나리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체중에 부딪혀 계단에 널브러졌다. 그는 비명을 끝마치지도 못했다. 가죽장갑이 그의 연약한 울대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널 살려둬야 할 이유를 하나라도 대 봐라. 똑딱맨."

 

카나리는 한 가지도 댈 수가 없었다. 목을 조르면서 대답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여성은 이미 그를 죽일 생각이었다.

 

 

 

 

 

나는 곧 카이다의 어깨 위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내겐 다행이었다.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눈이 바람에 따가워질 정도였고, 카이다와 몸이 닿는 것 자체가 별로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카이다가 가젤처럼 달리는 와중 우리의 앞을 가로막은 무리가 있었는데. 카이다는 번거로움이나 짜증을 내기보다는 그들을 반기는 눈치였다.

 

두목의 이름은 개셔였다. 적어도 개셔 본인이 이름을 그렇게 대었다. 나머지의 이름은 몰랐다. 그들은 이름을 댈 여유가 없었다. 아마 개셔는 가명이었을 것이다. 사람 이름이 개셔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것도 일본인의 이름이.

 

개셔의 시체는 곱지 않았다. 호상은 아니었고 개셔의 부하들로 추정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들(이었던 것들)을 바라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말 그대로 너덜너덜해진 꼴이었다.

 

"너 때문에 이게 뭐야." 내가 투덜거리자 카이다 쿠로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 새끼 봐라. 내가 널 구해줬는데도 징징거려? 너. 양심이 있긴 하냐?" 나는 그녀의 말에 딴죽을 걸려다 그만두었다. 누가 누구한테 양심 운운인가.

 

"너한테 원한이 있는 사람이었잖아!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망할. 누구든 간에 나한테 원한이 왜 있어!" 그럼 없을까.

 

"아까 저 사람들 말 못 들었어? 그 괴물년이 다시 돌아왔다. 죽여버려! 이번에는 곱게 못 도망갈 거다! 라던데."

 

손속의 여지를 두라는 등의 말을 하기도 전에 카이다는 개셔와 부하들을 전부 죽여버렸다. 카이다가 무언가를 툭툭 던지면 사람들이 픽픽 쓰러졌다. 주먹을 내지르면 머리가 오목해졌고 칼을 휘두르면 피가 터졌다. 카이다는 방망이나 칼을 피할 생각조차 없었다. 모든 것들을 두꺼운 피부와 살갗에 맡겨둔 채 그녀는 죽이는 것만을 신경 썼다. 솔직히. 무서운 광경이었다. 대몰락 시대에 사람 목숨만큼 싼 것은 없었고 악한들이라고 하여도, 사람을 도살하다시피 할 수 있는 그녀와 부대끼고 있었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그녀에게 몸무게 운운하며 성질을 건드리다시피 한 내 용기가 대견할 지경이었다.

 

카이다의 자켓은 피를 어찌나 먹었는지 붉게 보였다. 이미 묻을 대로 묻어서 손을 문지르면 손에 피가 묻어 나올 정도임에도, 카이다는 부단히 자신의 새빨개진 손을 자켓에 문지르고 있었다. 조금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피를 피로 씻으려 드니 될 리가.

 

"잘 생각해 봐! 멍청아. 다시 돌아왔다고 했잖아.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돼? 내가 이 새끼들이랑 마주쳐서 싸웠는데 내가 이놈들을 살게 뒀다는 거라고. 그것도 내 쪽에서 도망쳤다니! 상상이 가?!"

 

"…맞는 말이야. 네가 사람을 안 죽이고 넘어간다는 건 이상해. 심문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만 투덜거려. 병신아. 아님 네가 알아서 죽이던가. 손에 피 묻혀 줬더니 고마운 줄도 몰라!"

 

카이다는 손에 피를 묻히는 일에 아무런 죄책감도 없었다. 차라리 희열을 느꼈다면 느꼈을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시간이 남았다면, 카이다는 개셔와 패거리를 몰살했으리라. 나의 발치에 굴러다니는 시체가 그 증거였다. 저런 짓을 기꺼이 자행할 수 있는 사람이 분쟁을 피한단 말인가? 오히려 카이다는 이런 무법지대를 반길지도 몰랐다. 보이는 대로 다 죽일 수 있으니까.

 

"왜. 무섭냐? 마음이 아파?" 카이다는 웃었다. 죽은 이들을 보는 내 모습이 웃기다는 투였다.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한 일이지만, 내 마음속엔 나자빠진 무뢰한들이 들어찰 자리가 없었다. 어차피 진짜 시체도 아니다. 나는 단지 이렇게 간단한 일이라면 어째서, 깨달음 속의 카이다는 개셔를 죽이지 않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단순히 인상착의가 닮은 다른 사람이라는 가설은 이 시점에서 말이 되지 않았다. 모노로그는 관련된 단서를. 즉 대몰락 시대의 카이다가 무슨 일을 하던 도중 웬 패거리와 맞붙었음에도 먼저 자리를 떠난 시점이라는 단서를 주었다. 나는 그것을 짜 맞추기로 하였다. 우선 카이다는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죽일 인물이다. 그러면 어째서 죽이지 않았을까?

 

"너는 안 죽인 게 아니라 못 죽인 걸 거야. 죽일 만한 시간이 없을 만큼 바빴던 거지… 네가 하는 일이 그토록 중요했던 거고."

 

"내가 여기에 있었다는 소리를 믿냐? 정신 좀 차려. 여긴 라드가 아니라고. 모노로그가 만들어 낸 환상이란 말이다!"

 

"러드야. 라드가 아니라. 그리고 이곳은 모노로그의 환상들 중에서 가장 사실적인 곳이야. 통째로 옮겨놓은 것 같을 정도로… 적어도 끝이 안 보이는 탑보다는 내가 살던 곳이 더 익숙하단 말이지. 생각해 봐. 카이다. 왜 두 번째 깨달음의 장소는 내가 살던 곳이고, 네 목격담이 있던 곳일까? 그냥 넘겨서는 안 돼. 모노로그는 우리에게 살인 게임의 힌트를 던지고 있다고."

 

나는 구름으로 이루어진 빔을 따라 걸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카이다가 보기에 얼마나 바보 같아 보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야 위랑 아래를 보면서 어슬렁거리는 꼴이니. 어쭙잖은 탐정 짓이나 선무당 짓으로 보일 터였다.

 

"힌트 좋아하네. 힌트를 던져서 모노로그에게 좋을 게 뭐가 있다고? 또 모노로그가 영안로 속으로 끌고 온 건 너지. 내가 아니야. 여기에 있지만 모노로그가 의도한 건 너 하나라는 거다."

 

카이다가 내 뒤를 성큼성큼 따라왔다. 그녀는 주변에 떨어져 있는 시체를 굳이 밟으며 다가오는 악취미를 선보였다. 정말 핏길만 걷는구나. 왜 사람이 저리도 잔인할까. 나는 그녀를 경멸하지 않았다. 멸시가 어느 정도 무르익어버리면 그것은 기호에서 벗어나버리고, 남는 것은 당혹감과 딱하다는 느낌뿐이었다.

 

나는 시체에 찍히는 그녀의 신발 자국을 보았다. 흑색의 부츠. 튼튼한 재질로 만들었을 자국이 일자로 정렬된 자국을 내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디선가 보았다. 분명 보았다.

 

나는 빔의 길을 따라 있는 한 진흙탕에 발자국들이 하나 찍힌 것을 보았다. 카나리의 것이라고 하기엔 발이 너무 컸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의 발자국은 큰 발자국보다 조금 작았다.

 

퍼즐을 한 조각 맞췄다. 나는 카이다에게 다가갔다.

 

"…카이다. 잠깐 너 발좀 보자."

 

"발? 무슨 발. 신발이라도 벗을까? 옛다."

 

카이다는 자켓의 주머니에 손을 꽂고는 한쪽 다리를 내 쪽으로 뻗었다. 그러며 조금도 몸이 흔들리지 않았다. 다리가 거의 직각을 만드는 와중에도 카이다의 입가에는 심술궂고 기분 나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마법과도 같은 코어 근육이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카이다의 부츠를 붙잡았다.

 

"벗지는 말고. 가만히…"

 

"크악! 이 새끼야!"

 

카이다의 부츠가 한 번 흔들리자 내 몸도 그녀를 따라 쏠렸다. 나는 어느새 바닥을 몇 바퀴 굴렀다. 외마디 비명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녀는 나를 때리지도 않았다. 그저 붙은 벌레를 털어내듯이 다리를 턴 것뿐이었다. 내가 털렸다.

 

나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 좀! 뭐 하자는 거야!"

 

"너야말로 뭐냐! 너 발에 뭐 있어?! 징그러운 새끼. 그냥 나가 죽어! 내가 너 호위하고 있다고 해서 개 같은 변태짓까지 받아줄 줄 알았냐?!"

 

"신발 자국 좀 보자고! 네 발이 무슨 상관이야. 평생 보고 싶지 않은 걸!" 분명 몇 개월동안 벗지도 않아 치즈 꼴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참호족 비슷한 게 나오려나. 나는 몸을 일으켜 다시금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나와 카이다가 내고 있는 소음이 새로운 패거리를 부르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다리 들어."

 

"아 씹. 이 창놈이 진짜 욕 나오게 만드네. 너 말 한마디 한마디 하는 게 전부 좆같이 소름 끼친다. 더러운 새끼야."

 

"망할 신발 자국만 보자고! 이상하게 생각하니까 이상하게 들리는 거야. 이 핏자국 하나만으로는 추정만 되니까. 그러니까 발 들어. 다리 들…"

 

카이다 때문에 정말 이상하게 들리기 시작했으나, 나는 아무튼 그 일을 해야만 했다. "다리 들라고. 말도 안 되는 상상 하지 말고. 이게 뭐 하자는 건데? 나한테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아나! 지금 우린 쫓기는 신세야. 답답하게…! 아까 내가 본 게 있어. 진창에 찍혀있던 발자국. 그게 지금 네 피로 만든 발자국이랑 비슷하다고. 부츠가 똑같으면 네가 이 시점의 러드에 있었을 확률이 높은 거잖아. 이해가 아직도 안 돼?!"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씩씩대는 카이다를 보고 깨달았다. 이해를 했다고 하더라도 카이다가 내 말을 들어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꼬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주장을 하면 일단 반박하고 요구하면 일단 거절하는 게 그녀였다. 설득 상대로는 벽만도 못했다.

 

"그냥 네가 발에 집착하는 변태인 거인 거 다 안다. 내가 그딴 말 듣는다고 곧이곧대로 보여줄까 봐?" 카이다는 그저 날 욕하고 싶기에 억지를 부리는 것이었다. 실로 반동인물이라는 단어에 걸맞은 사람이었다. 우선 반항하고 보는. 가로막고 보는 인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러드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만 알아보면 돼. 이게 다 모노로그가 우리에게 주는 과거에 대한 힌트라고!" 나는 갑갑함에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지금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곰 턱도 찢으면서 내가 발에 도착증이 있으니. 부끄러운 나머지 발을 못 들겠다고?"

 

"그딴 게 아니라 기분이 나쁘다고!"

 

"왜! 대체 왜?!" 나는 물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꽤나 중요한 물음이었다. 왜 그녀는 항상 화가 나 있지? 왜 우리를 깔보며 곧잘 욕부터 하고 들지? 왜 저렇게 잔인하고, 이기적이지? 그녀의 어디가 문제지? 그녀를 저렇게 만드는, 요약될 수 있는 마지막 하나의 요인은 과연 뭐란 말인가? 나는 그런 함축적인 것을 물었다. 카이다는 자신이 무엇에 대답하는지도 몰랐겠지만, 그녀의 대답이 곧 그녀 한 사람을 대표하게 되었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너한테 쥐뿔도 신세 진 게 없으니까!" 카이다가 말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미간을 좁히고서 나도 모르게 탄식했다. 그녀는 내게 삿대질을 하며 더 큰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상전인 것처럼 굴지 마. 알겠어? 내가 네 말을 들어줄 필요는 어디에도 없어. 네가 발에 흥분하는지 안 하는지는 몰라도. 네가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고!"

 

"그럼 내가 너한테 잘해주면, 네가 날 도와줄 거라고? 미친 소리야…"

 

"그래. 그렇게 치부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시던가. 병신들아. 그런데 너희들이 다 날 내버렸거든? 그러니까 나도 너희를 버리는 거다. 미도리카와 년한테 내가 개지랄당할 때. 누가 날 도와준 적이 있었나?"

 

"무슨 소리를… 하기와라가 널 찾으러 갔을 때부터 넌 하기와라를 죽이려고 들었잖아. 23T가 아니었으면 이바라, 나, 캐롤 씨까지 인질로 잡힐 뻔했는데. 뭐…? 우리가 먼저 잘못한 거라고?"

 

"너희 죄다 날 죽이지 못해 안달이야! 마스크 쓴 정신병자부터 시작해서 손가락 병신년. 뇌가 빈 놈. 총 쏘는 기계부터 진짜 깡통에 걸어 다니는 세뇌 병기. 끝도 없지. 그런데 내 쪽에서 살갑게 굴까?"

 

"너야말로 우릴 못 죽여서 안달이었잖아. 널 막으려고 했던 수많은 시도 중 하나가 실패했을 때 모리의 손 절반과 발목이 날아갔어. 그걸 구하려다가 나이토까지 발을 잃었고. 그런데 우리야말로 어떻게 너를 잘 대해주겠어?"

 

"핵심은 이거다. 너희가 날 버렸어. 그래서 나도 너희를 버려야 했다. 살인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도 뒷배가 필요하니까. 그래서 이 사단이야! 받아들이시지."

 

"아… 됐어. 아무래도 좋아." 나는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그러면 이 꼬일 대로 꼬인 대기가, 그녀와 나의 불일치가. 곧 엷어진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질 것만 같았다.

 

"우리 잘못이 맞아. 늘 그랬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발은 안 든다. 절대 안 들어. 내가 누구 좋으라고?"

 

"너에게 좋은 일이야. 카이다. 그렇게 배배 꼬여서 받아들이지 말고 생각을 해 봐. 네가 이 탑에 납치되기 전에 무엇을 했는지의 실마리가 여기에 달려 있다고. 네가 잊어버린 것들 말이야…" 나는 더럽게 이기적인 아이를 상대하는 느낌을 받았다.

 

"좆까. 날 조종하려 들지 마라. 나는 너희가 다 싫어. 특히 너는 최악이야. 이 씨발. 분홍색 머리를 하고 어깨나 까고 다니는 너 같은 놈은…"

 

"닥쳐. 발 들어서 내 쪽으로 뻗기나 해!" 나는 소리쳤다. 한편으론 개셔의 최후를 떠올렸다. 개셔는 턱 아래에 칼이 들어가 정수리로 칼끝이 나왔다.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카이다가 아주 잠시라도 화를 참지 못한다면 내 꼴이 개셔보다 나을 리는 없었다. 카이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내게 주먹을 휘두르면, 즉시 나는 영안로에서 나가야 할 터였다. 큰 부상일 테니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카이다 쿠로하가. 언제나 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흉측한 여자가. 나를 보며 풀이 죽었다는 것이다. 나는 보았다. 그녀가 몸을 움츠리는 것을. 동공이 수축되고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을 뒤로 내딛는 것을. 카이다의 입은 작게나마 벌어져 있었고, 입술은 옴싹이며 떨렸다. 내 뒤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나 그곳엔 무엇도 없었다. 다시 카이다를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내게 욕설을 퍼부었다.

 

"개새끼야… 내가 그거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 징그러운 짓거리…"

 

"또 뭐. 내가 뭘 했다고?" 눈이 까끌까끌하게 아팠다. 왜인지 더웠다. 카이다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다 말고 입술 안으로 그것들을 슬쩍 집어넣었다. 수치스러운 것을 보였다는 듯이 표정을 되돌리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구는 모습 때문에 그녀의 추태는 내 각막에 더 깊게 남았다.

 

각막. 눈.

 

"눈깔 그렇게 하지 말라고! 나 놀리지 마. 이젠 안다고. 네가 일부러 그 지랄 놓는 거! 어떤 장난질을 쳐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그게 장난질이라는 건 안다!"

 

"왜. 혹시 금색인가?"

 

눈이 뻐근하게 아파왔다. 구절이 떠올랐다.

 

오버룩(Overlook), 딕테이트(Dictate), 그리고 터치(Touch).

 

이게 대체 무슨 뜻이지. 의미가 있을 거 아니야.

 

"왜 금색 눈이 무섭지? 너는 그 안을 들여다보지도 못했잖아."

 

"무서운 게 아니라 징그럽다고…"

 

"날 혐오하려면 그렇게 해. 그렇지만 다리는 들어. 어려운 일 아니잖아. 해."

 

카이다는 수치심을 느끼듯이 나를 흘겨보았다. 오해를 하든 생각이 없든 좋았다.

 

"바보 같은 생각 말고. 해!" 나는 소리쳤다. 카이다의 그런 모습은 보기 싫다는 느낌만을 줄 뿐이었다. 그녀는 이윽고 못 이긴다는 듯이 한쪽 다리를 들어. 발을 내 쪽으로 뻗었다.

 

"너는 진짜. 나가기만 하면 나한테 죽었어…" 지겹게 느껴지는 협박이었다. 검은 부츠의 밑창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기 위해 나는 그녀의 발을 붙잡기까지 했다. 내 얼굴에 손수 먹칠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신발의 자국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동일했다. 거칠고 미끄러운 곳 모두를 누빌 수 있게끔 촘촘하고 끝에 조금 날카로운 돌기가 돋은 부츠. 정말 오랫동안 신었구나. 안에서 곰팡이 피었겠다 하는 생각들을 뒤로하고 나는 확정 지었다. 카이다는 러드에서 무언가를 했다. 내가 보았던 발자국은 이 시점에 러드에 있던 카이다의 것이었다.

 

본인도 기억하지 못할 행적이지만, 분명 의미가 있었다. 카이다의 얼굴을 마구 일그러뜨릴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나는 잡고 있던 신발을 내팽개쳤다. 카이다의 다리가 다시 땅을 짚었다.

 

"됐어. 이제 그만 보여줘도 돼. 이제 모노로그가 나에게 뭘 말하려 드는지만 알면 되겠어…"

 

"또 뭐?" 카이다가 내뱉었다.

 

"캐롤 씨를 되살리고자 하는 깨달음인데 네가 여기에 있었다는 걸. 그것도 네가 간 길을 따라서 빔이 형성되어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말이야. 우연의 일치는 없어. 다 연결되어 있을 거야… 너 같은 사람이 어쩌다가 캐롤 씨와 얽힌 건지는 몰라도."

 

"나는 캐롤년을 이 탑에서 처음 봤거든?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은 현실이 아니라고. 이 멍청한 놈아. 이해가 안 되는 거냐?"

 

나는 바지 속에서 무언가가 나를 깨물듯. 따끔하는 감각이 한 번 이는 것을 느꼈다. 허벅지를 꼬집히거나 데인 듯이. 살갗이 뜨거워졌다. 나는 의아해져 주머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는 내 손아귀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았다.

 

그리고 턱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가능한 한 기력을 모아 살가운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통할지 아닐지는 몰라도 그녀와 싸우는 것은 이제 하등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카이다. 미안했어. 우리 화해하자. 다 내 잘못이었어. 네가 발 어쩌고 하며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던 것 같아. 내가 존댓말 쓸까?"

 

카이다는 머리를 쓸어 넘기고, 손바닥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무슨 개소리냐. 너 그럴 때마다 미친 것 같아… 제정신이 아니야. 너. 나한테 개길 때부터 알아봤다고. 그런데 너만 몰라. 망할 정신병자랑 이 지랄을 뚫고 가야 한다고…? 아. 거지 같아…"

 

"카이다. 나 좀 업어주라. 우리 빨리 가야 하거든."

 

"뭐? 아까는 그렇게 질색팔색을 했으면서… 그보다 내가 왜 그래줘야 하지? 내가 아까 말했겠지만, 너는 나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할 입장이…"

 

"이거 봐봐. 카이다." 내가 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내자 카이다가 순간 흠칫 놀랐다.

 

"머… 머리카락을 땋아서 묶은 거냐? 소름 끼치는 걸 잘도 가지고 다니네. 너 이게 정상 아닌 건 아는 거지… 설마. 모르냐…?"

 

"혹시 네가 색맹이기도 할 경우를 대비해서 하는 말이지만. 내 머리카락은 아니야."

 

"그래서 더 더러워! 기분 나쁜 놈…! 애초에 왜…" 카이다는 말을 잇지 않았지만 나는 이어질 말을 알 것만 같았다. '왜 색이 뒤죽박죽이지? 왜 어떤 부분은 검고 어떤 부분은 금빛이지?'

 

"이 머리카락은 원래 금빛이야. 아니. 원래는 검은색이라고 하셨지. 그럼 원래의 색은 대체 뭘까. 재미있는 물음이 될 거야. 그래도 내 시점에선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지. 모든 게 원래대로. 그래야만 하는 그대로."

 

카이다 쿠로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기회주의자다. 모노로그의 앞잡이고. 언제나 배신할 좋은 순간을 재고 있었다. 마음껏 하라지. 하지만 그전까지 카이다는 내가 이용할 수 있는 힘이다.

 

"마법이 되살아나고 있어. 카이다. 부활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야. 얼마 남지 않았어… 그녀를 다시 보게 될 날이 말이야."

 

 

 

 

 

못 대겠지. 라며 여성은 이미 답을 정해 두었다.

 

"끄윽. 끅…!"

 

"목뼈를 부러뜨릴 힘이 없는 것은 아쉽게 되었다. 아무리 좋은 스승에게서 배워도 완력 그 자체는 어찌할 수 없으니."

 

카나리 케이토는 손톱을 세웠다. 가죽장갑을 뚫을 만큼 날카롭지 않았다. 무릎을 들어 여성의 등을 때려도 숨을 쉴 만한 틈은 나오지 않았다. 분명 흔들리고는 있었으나 너무나 미약했다. 이대로라면 질식할 것이다.

 

"저항해라. 그래. 저항하라. 꺼져가는 네놈의 불꽃에 분노해라. 적어도 그럴 권리는 주겠다. 모든 자유를 빼앗아가는 그 자보다는 나은 인간이 되어야 하니까."

 

"흐윽… 윽…"

 

"그러나 내 말을 믿어라. 여기에서 너는 죽어야 한다. 그것이 공리를 위한 일이다. 너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 받아들여라."

 

이 여자는 그 여자다. 똑같은 사람이다. 탑으로 납치되기 이전 시점이야. 아무리 바보 같은 카나리라도 알 수 있었다. 트렌치코트에 공리 운운하고 있는데 그 여자가 아닐 수가 없었다. 그가 알게 된 사실은 이 더러운 도시에 모리 레이코가 있었고, 정황상 그도 있었고, 그는 똑딱맨이라는 이름을 썼을 텐데… 모리 레이코가 자신을 죽이려 든다는 점뿐이었다.

 

카나리는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눈물이 차오름과 동시에 그의 목이 거세게 울렸다. 문득 그는 죽음이 두려워졌다. 이건 아니야. 이런 곳에서 죽을 순 없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나이토를 죽인 여자에게만큼은, 이딴 곳에서만큼은 안 된다!

 

"느으으윽…!"

 

카나리는 더 거세게 무릎을 들어 여성의 등을 걷어찼다. 그러나 더 힘을 줄수록 빠르게 기력이 빠져나갔다. 타격 한번 한 번의 무게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이윽고 여성은 카나리의 저항을 무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빌고 싶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구해달라고. 내가 여기서 죽었다간 나이토도 못 살아날 거라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눈앞의 여자는 애초에 나이토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애초에 시련 속 인물은 그녀가 아는 모리와 완전한 타인이었다. 그러니 빌 수가 없었다.

 

안 돼. 카나리는 의식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느끼는 것은 과호흡과 정반대였지만(호흡이 막히고 있으니) 숨이 막힌다는 것만큼은 똑같았다. 결국 저산소증으로 이어졌고, 그의 몸에서 힘이 점점 풀렸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카나리 케이토는 죽음을 느꼈다. 이딴 게 내 죽음이라고? 처음 보는 곳에서 유령한테 목이 졸리는 게? 카나리는 그럴 수 있었다면 엉엉 울며 외쳤을 것이다. 도와줘요. 똑딱맨…!

 

"모리이이이이이이!"

 

"제기랄."

 

성량이 작은 빌라 안을 가득 메웠다. 사실상 그 건물 안은 트럼본의 관이 되었다. 소리를 내부에서 돌리며 쩌렁쩌렁 울리게 만든 것이다. 투덜거리는 짧은 음성이 여성의 목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녀가 곧잘 하던, "흐음"에 그르렁거림을 섞은 소리였다.

 

"기차화통을 삶아 먹었나. 승부사? 나는 여기에 있다." 카나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의심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만큼 비정상적이었다.

 

그 여자가 말을 하는데. 날이 안 서 있다고? 목소리가 크다는 편박. 원래의 그녀라면 모욕을 섞었을 것이다. 네 빌어먹을 외침 때문에 내가 겪어야 하는 귀찮은 일들 어쩌고 저쩌고… 가 당연히 붙어야 했지만, 모리가 분명한 그 여성은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았다.

 

"야. 너 무사하구나! 다행이다! 망할 빔 형성 보자마자… 뭐야?! 누구 목을 조르고 있어?!"

 

"나도 너를 찾고 있었다. 지붕을 넘어 다녔지. 다행히도 이번 빔에서는 동료를 잃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 인형이 하나 돌아왔더군."

 

"손가락 인형? 어…? 야. 잠깐. 너 설마… 똑딱맨이냐?"

 

또 누가 날 아는 거야? 죽음의 위기에 놓여 변별력이 흐려진 카나리는 생각했다. 그를 아는 또 다른 남성의 목소리를 인식하지 못한 채였다.

 

"너에게는 좋은 소식이다. 똑딱맨. 죽여선 안 될 이유가 찾아왔다."

 

목을 조르는 힘이 느슨해지자 카나리의 목에서 거센 기침이 튀어나왔다. 그렇지만 카나리는 몸을 바로 일으켜 도망을 간다던가 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카나리는 단지 축 처진 채로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간에.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카나리는 모리와 면식이 있는 듯한 그 남자에게 좀 늦게 시선을 주었다. 카나리가 몸을 일으켰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남성의 회색 머리카락이었다. 길었다.

 

"나이토 유즈루…?"

 

그또한 복면과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머리카락을 그 안에 쑤셔넣을 수는 없었기에 복면 밖으로 장발이 삐져나와 있었다. 카나리는 무언가 감상을 느끼기도 전에 자신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가 환각을 느끼는 게 아니라 실제로 나이토가 그를 들어올렸기 때문이다. 그가 당황하여 몸부림을 치기도 전에 나이토는 놀랄만치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카나리는 나이토의 옆구리 사이에 끼워진 채로 눈으로 밀려들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그는 긴배게처럼 들어 옮겨졌다.

 

"어디로 가는 거지!" 재빠른 발소리가 뒤를 따랐다. 발소리는 뒤처지지 않았다. 꽤 놀라운 일이었다. 나이토의 달리기를 저 여자가 따라온다고?

 

"어디든 안전한 곳!" 나이토가 말했다.

 

"그런 곳은 없잖나!"

 

"그러니까 찾아봐야지!"

 

"이 생각 없는 머저리가!" 여성이 소리쳤다. 그래.이게 그에게 익숙한 모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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