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나리는 길을 외우려 하였다. 그는 어떠한 지식이나 공식, 머리 아파지는 것들은 외우기 어려워하였지만 단 하나. 무언가의 조형만큼은 쉽게 외울 수 있었다. 카나리는 자신이 가는 길을 눈에 새겼다. 직진. 갈림길에서 오른쪽. 왼쪽 틈새. 직진. 벽을 타? 어? 다… 다시 왼쪽. 오른쪽. 직진… 직진…하다가… 어어…
"너희 뭐야. 지금까지 이 똥통에서 뭘 했던 거야?" 카나리는 결국 포기한 채로 말했다. 어차피 그에게 실타래가 있는 이상 언제든지 영안로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고, 일이 틀어졌을 때 돌아갈 길을 외울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처음 보는 똥통이었다. 돌아갈 길 따위 의미가 없었다.
"리베로다." 모리 레이코가 말했다.
"저게 이탈리아어로 자유라는 뜻이래!" 나이토 유즈루가 덧붙였다.
"리베로? 뭐. 자유투사라도 됐다는 거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도 일으키게?" 카나리가 웃었다. 누구도 따라서 웃지 않았다. 무던히 달리던 나이토가 입을 열었을 뿐이었다.
"혁명은 모르겠지만 저항하고 있었지. 그보다 정말 다행이다. 네가 돌아와서…"
"돌아와? 대체 너희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날 똑딱맨이라 부르지를 않나, 돌아왔다고 하질 않나… 내가 너희랑 뭘 했다고?"
"리베로다." 모리 레이코가 말했다. 카나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내가 공산주의자가 됐다고!"
카나리는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프롤레탈리아 혁명은 책 속에나 존재했다. 그놈의 사상은 어린아이들을 노동에서 구하지 못하고 대신 부자들 배를 갈라 황금을 달라는 무뢰배들을 양산했다. 아무 일도 안 해놓고서 죽도록 노력한 이들만큼 달라는 주장은 카나리에게 있어 죽여 마땅할 정도로 가증스러웠다. 그들 모두 땅을 파서라도 식탁을 차려야 했다. 배급제가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역량과 노력. 행운이라도 좋으니 모든 걸 동원해서 스스로를 구원해야 했다. 그러지 않는 놈들은 가축이다.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너는 조율자에 대항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조율자를 포함한 재단 그 자체에 맞서고자 하였다."
"조율자? 그게 누군데?"
"…제기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해줘야 하는 건가?"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애초에 네가 조율자를 모르는 것이 말이 되는 것 같나? 네가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조율자와 함께했으면서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았단 거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듣기에 조율자는 남자 같은데. 내가 남자랑 그런 사이까지 됐을 리가 없잖아!" 카나리가 소리쳤다.
"똑딱맨… 아니. 카나리라 부를게. 어차피 우리끼리 이름은 다 알잖아. 카나리. 내면을 들여다봤다는 건 말 그대로의 의미야. 조율자한테는 이상한 능력이 있어. 주변 사람들의 정신을 조종하는 능력이야."
카나리는 나이토의 말을 듣고서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다. 그가 아는 사람 중에서도 신체의 접촉만으로 정신을 주무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여자는 이미 죽었고, 맥락상 조율자는 남성이었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설마 그런 사람이 세상에 둘이나 있지는 않겠지?
"너는 조율자에게 휘둘리고 있었어. 카나리. 여기에 없는 한 명을 제외하곤 나와 모리밖에 남지 않았어. 원래 우리는 여섯 명이었는데…"
"뭐?" 카나리는 물었다.
"우리가 만든 것은 일종의 봉사 공동체였다. 쉘터를 만들고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는 자들 말이다. 그러나 하미디언, JK샤먼, 너. 똑딱맨. 모두 우리를 떠났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는 패배했다. 승부사와 나도 표적이 되었다. 언젠가는 그가 찾아오겠지. 너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되어 독자적 가치체계와 자존을 잃고 한 무리에 편입되는 것이다."
"내가 무슨 세뇌라도 당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것보다 그 작용을 잘 묘사하는 단어는 없다. 똑딱맨. 너는 완전히 변했다. 네가 스스로를 보았어야 했다. 회중시계가 조금도 똑딱이지 않는 너를 상상할 수 있나? 손목시계를 보지 않고 늘 뒷짐을 지고 걷는 너 자신을?"
카나리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게 사실이라고? 내가 납치되기 전에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도무지 그려낼 수가 없는 그림이었다. 카나리는 스스로의 분수를 알았다. 그는 회중시계를 맞추지 않고서야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단지 그런 사람이고, 그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무작정 애석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된다. 회중시계를 맞추지 않는다는 것은 똑딱맨이 주었던 그 시계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의미를 잊어버린다는 건가?
카나리는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그런 것은 싫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조종이라고 부른다. 조율자의 종을 줄인 것인데 한자도 똑같더군. 그러니 조종이라는 표현은 굉장히 적절하지. 그렇지 않나?"
"너희… 복면은 왜 쓰고 있는 거야?" 카나리가 물었다.
"그게 지금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네가 조종에서 풀려난 방법이다. 손놀림에 이리저리 움직이는 인형 꼴이던 네가. 어떻게 과거의 모습을 찾은 거냐? 기억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끄집어내라. 네 방법이 조율자를 상대할 보루를 만들지 모른다."
"나… 나는 그런 거 몰라."
"쓸모 없는 놈. 그렇다면 카텟 기관으로라도 떠나라. 그곳의 과학자들이라면 네 뇌를 뒤적여서라도 무언가를 끄집어낼 것이다. 네 몸도 온존 할 수 있으니 최선의 수로군."
"지금 거기로 가는 거야? 그 카텟 기관인가 하는 곳으로?"
"그런 끔찍한 곳에 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카나리는 모리를 보며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럼 왜 날 끔찍한 곳으로 보내려는 건데?
"카텟 기관은 그렇게까지 끔찍한 곳이 아니야. 카나리. 우리가 만들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커. 타지부도 있고, 가용 가능한 병력도 있어."
"지금이라도 카텟 기관으로 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거라면 부디 다시 생각해주길 바란다. 승부사. 내 입이 닳도록 설전을 벌일 생각은 없다."
"카텟 기관의 소문은 소문일 뿐이야. 모리. 애초에 그건 음모론에 가까워!"
"여러 개 쌓인 소문을 뭐라 부르는지 아나? 제보, 데이터다. 시라유키 히메리의 과거에 대해 들은 바가 조금도 없나?"
"그건 나도 알아. 그래도 카텟 기관이 전부 시라유키 히메리의 손안에 있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잖아!"
"시라유키 히메리는 사실상의 지부장 자리까지 올랐다. 강경파를 대표한다는 히무로 시라베조차 시라유키 히메리가 발굴한 인물이다. 카텟 기관 안에서 그녀는 인망이 두텁고 추진력이 있으며, 소위 선한 사람이다. 블레인을 만든 인물이 그 정도로 탈바꿈했다면 그녀는 무엇이든 가능하다."
"블레인은 또 뭔데!"
"기차야. 몇 달 전에 자살했어. 자살해서 망정이지, 그 기차가 있을 때는 러드에 갈 엄두도 못 냈어. 조금만 들어가도 감시당하는 느낌이 들고, 신도들은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잡으려 들고… 그래서 러드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 여자를 싫어하는 거야. "
카나리는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곧 폐허와 같은 기차역에 놓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자신의 입가를 하카마의 소매로 감쌌다. 주변에서 지독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공기가 보다 탁했다. 오염된 구역이었다. 장작으로 삼기 위해 나무를 베고 쓰레기와 사람을 마구잡이로 태우다 보면 어느 곳이든 공기가 썩어버린다.
역은 오래 방치된 것처럼 보였다. 벤치는 거의 부서졌고, 자판기는 당연히 박살이 나 있었으며 벽에는 까맣게 그을린 흔적이 가득했다. 그렇다고 화재가 났다고 하기에는 탄화되지 않고 남은 시설이 무척 많았다. 우리가 서 있는 플랫폼에서 몇 발자국을 내딛으면 밑으로 푹 떨어지는 모노레일이 있었는데, 그것만큼은 티 하나 없었다.
전체적으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어떤 역인지 살피려 하였으나 훼손이 너무 심해 우리는 그곳이 어느 역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그곳이 대몰락 시점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대몰락 시점이라면 주변이 얼마나 황량한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이 주변에 있느냐가 중요하였다.
가장 흔한 것은 폭도이다. 폭력성을 감출 필요가 사라져 폭력성을 그대로 내보이고, 심지어는 증폭시키고 서로를 고양하는 자들. 아무런 이득이 없지만 무언가를 파괴하는 것을 즐기는 자들이다. 절망을 섬기는 것이 아닌 소시민적 폭도와는 더 큰 물리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분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절망을 섬기는 이들은 까다롭다. 이들은 제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더 큰 물리력과 제압은 결국 한 가지 결론으로 끝난다. 총. 멸종했다고 알려진 것을 불러내야만 했다. 물론 그들 또한 총을 가지고 있을 때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상황은 지저분해졌지만, 총이 생존에 있어 큰 도움을 준다는 것에 이견은 없었다. 있을 리가.
나는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총띠에 걸린 두 정의 총을 보았다. 이제 화해를 했으니 나에게 총을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었다. 우정은 요구하는 게 아니다.
"흠. 고향에 온 기분인데." 하기와라 우시오가 중얼거렸다.
"으엑. 여기 냄새 진짜 별로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다.
"후각은 가장 예민한 감각이지만 쉽게 피로해진다. 몇 초만 숨을 쉬다 보면 곧 익숙해질 것이다.
"흐음…" 인공지능은 숨을 들이마시는 듯이 고개를 살짝 위로 들었다. 발끝으로 서 뒤꿈치를 들어 올리기까지 했는데. 인공지능에게 후각이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나도 집에 온 기분이야. 그보다. 여긴 어디지?"
"패트리샤. 시련은 곧 시작되는 건가?" 나는 물었다.
"사실 이미 시작됐어요. 러드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블레인은 여러분들을 바라보고 있어요. 두 번째 시련의 내용은, 뭐… 블레인이 직접 말해주겠지만. 대충 블레인이랑 놀아주시면 돼요."
패트리샤는 그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았다. 블레인. 카텟 기관의 자료실에서 그 이름을 본 적이 있었다. 러드도 함께 알고 있었다. 대몰락 시절에 있었던 기현상이었고, 내가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대몰락이 환기되었다면, 다른 이들에게 블레인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도 있었다.
"여기… 러드였어? 그보다 블레인? 그놈과 놀자고? 안 돼. 차라리 깨달음으로 가야 해." 인공지능이 말했다. 다급한 어투였다.
"23T. 블레인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아나 봐?"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물었다.
"내가 이야기해 주겠다. 블레인은…"
"핑크색이에요!" 패트리샤가 말했다. 고급스러운 분홍으로 도색되었던 블레인의 외벽색을 일컫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가 본 자료에서의 블레인은 꼭 분홍색만이 아니었다. 혈흔이 열차의 머리에 마구잡이로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혈흔은 어떤 경위로 생긴 것일까?
"이야기할 필요 없어. 내가 여기서 제일 잘 아니까. 게다가 여기. 설마… 블레인이 다니는 그 레일이잖아." 인공지능은 못 믿겠다는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노바디의 거주지이기라도 했나?"
"노네임의 거주지기도 했어. 히무로. 여긴 안 돼. 지금이라도 취소하자. 깨달음이 나아. 블레인은 미친 인공지능 모노레일 열차야. 자살해서 큰 시름 덜었는데… 여기서 다시 마주치자고? 안 돼. 우리는 블레인 상대로 아무것도 못 해."
"잠깐요. 깡통양. 미친 인공지능 모노레일 열차는 그렇다고 치자. 내 좀비 가족들 다시 봤으니 불가능은 없다 치자고. 그런데 블레인 상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건 뭐야? 열차 토마스처럼 우리를 죽이러 오는 거야?"
"토마스? 토마스가 사람을 왜 죽이겠어!"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당혹을 표했다.
"너희는 블레인이 어디까지 먹어버렸는지 몰라. 심할 때는 러드 전체에 블레인의 수하가 깔린 적도 있었다고."
"열차가 뭘 할 수 있다고 그래."
"인공지능 열차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는 하기와라 우시오에게 답했다. "블레인은 스스로 학습하여 돌발상황에 대처하고 최적의 경로를 계산하게끔 설계되어 있었다. 지성을 갖추었고 발전할 수 있는 동력도 있었다는 뜻이다. 희박지대와 방사능 오염구역을 넘기 위해 생각을 거듭하던 블레인은 어느 순간 자신이 생각할 능력을 갖추었지만,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자아가 생겨남과 동시에 블레인은 정신이상에 걸렸다. 그렇게 블레인은 폭주하여 러드 내의 시스템과 기계 곳곳으로 퍼져나갔지."
"…할 수 있는 게 많기도 하네."
"그… 그런 열차를 상대로 놀아주라니? 이게 무슨 뜻이야?"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하고 있는 거지! 깨달음으로 돌아가게 해 줘. 어서… 애초에 여기 블레인 탑승장이잖아! 여긴 사실상 블레인의 집이나 마찬가지야. 원래 말도 하면 안 되는 곳인데…! 패트리샤. 빨리!" 인공지능이 소리쳤다. 그러나 패트리샤라면, 모노로그의 끄나풀이라면 절대 우리를 깨달음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터였다.
"그건 안 돼요. 그리고 혹시 당신을 블레인이 못 알아볼 수도 있으니까… 얼굴도 돌려드릴게요."
"뭐? 안 돼. 내 얼굴을 블레인이 알아봤다간…"
인공지능은 자신의 말을 끝내지 못했다. 매끈한 검은색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인공지능의 몸 전체가 변형되고 있었다. 연보라색과 검정이 주되던 몸에 RGB값으로 전부 0이 나올 흰색이 솟아났다. 연보랏빛 눈동자가 깜빡였고, 완벽하게 흰 치아(재질이 진짜 치아가 아님을 느낄 수 있을만치 희었다)가 보였다. 그리고 머리카락과 한없이 가까워 보이는 연보랏빛 섬유도 그녀의 두상에서 밑으로 흘러내렸다.
"우와… 잠깐. 몸도 같이 변하는데?"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감탄하다 말고 의문을 품었다. 인공지능의 팔 끝에서부터 하양이 침범하고 있었다. 인공지능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신체 말단에서부터 이어지는 변형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눈치챈 듯 보였다.
"옷! 옷도 같이 내놔!" 인공지능이 자신의 몸을 가리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왁 소리를 지르며 옆에서 내 눈을 가렸다.
"보면 안 돼. 히무로!" 굳이 유심하게 관찰할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잠자코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손을 응시했다. 손이 작기도 하였다.
"입혀드릴 테니까 호들갑 떨지 마세요. 인공지능이면서 뭐가 그렇게 급하세요?" 패트리샤가 못마땅한 어투를 내었다.
"나는 사람이야. 이 감정 없는 데이터 쪼가리들아." 인공지능이 말하자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손을 거두었다. "이제 봐도 돼." 라는 말이 뒤따랐다. 자신의 몸에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가 자라난 것을 보자 인공지능은 구부정하게 굽힌 자신의 몸을 폈다. 얼굴에는 적개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표정이 떠오르지 않던 그 마네킹의 얼굴은 줄곧 이런 표현을 하고 싶었던 건가.
"웃기시네요. 우리랑 똑같은 주제에. 애초에 당신 몸에는 생식 기능도 없으면서 왜 부끄러워해요? 기능이 없는 건 사실 당연한 거고 그걸 담당하는 기관들을 흉내도 못 냈던데. 바보 같은 일 아니에요? 왜 못 만들었대요? 좀 궁금하네요."
"조용히 해."
"그한테 물어본 적 있어요? 왜 내 생식 기관들을 만들어주지 않았냐고요. 제가 추측하기로 첫 번째 이유는 그냥 어떻게 생겼는지를 몰라서일 것 같아요. 두 번째 이유는 그냥 겁쟁이여서고요. 왜 친구의 몸을 적나라하게 만들면 안 되는데요? 부끄러워서 그랬대요? 어차피 죽은 사람인데. 자기 눈앞에서 산산조각 나는 걸 봤으면서 뭐가 그렇게 무서웠을까요?"
"네가 모욕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야. 패트리샤."
"그는 죽은 노바디조차 이기지 못했어요. 승화 실험을 당한 인간을 새로운 몸에 이식하는 첫 번째 사례인데 완전하지 못했죠. 누구나 처음에는 시행착오를 한다지만 그가 칼을 빼들고 윤리를 무시하고자 했다면 첫 실험이 완전하게 이루어졌을 터인데!"
"아니. 진짜 사람이었잖아…?" 하기와라 우시오가 작게 중얼거렸다. 두 인공지능 사이의 날 선 언쟁을 듣는 동안 나는 주변을 살폈다. 무언가가 변하지는 않는가? 만약 두 번째 시련이 정말 블레인을 중심으로 한다면 마음 편히 구경을 할 때가 아니었다.
"잘해보세요. 그런 겁쟁이라도 소중히 여긴다면야 말릴 생각은 없어요. 뭐. 블레인을 구워삶는 건 당신 몫이지만요." 패트리샤가 말끝에 기분 나쁜 웃음을 붙였다. 두 번째 시련은 덫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존재를 불러와 우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길을 가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히무로."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내게 44구경을 건네었다. 침착한 목소리였다. 나는 44구경을 받아 들었다.
"준비해라." 나와 그녀는 다른 방향을 경계하였다. 나는 왼쪽, 그녀는 오른쪽을 바라보았고 사각을 채우기 위해 그녀가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자 나 또한 그렇게 하였다. 약조 한 마디 없이 그녀와 나는 등을 맞대었다. 우리는 위협이 오기까지 기다렸고, 곧 위협이 정말로 찾아왔다.
"본 적이 있는 얼굴이군." 남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 세상에…" 인공지능의 턱이 떨렸다.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플랫폼에 있는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가 미끄러지듯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금속의 재질이 아니었고, 바퀴가 구르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열차를 상징하는 가장 친숙한 의성어는 칙칙폭폭이지만 그 열차는 조금도 그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뱀 같았다. 일종의 자기부상열차였을 것이다. 어떠한 마찰도 소음도 없었다. 사실상 공중부양열차라 불릴 만한 성능이었다. 그것이 다가오며 내는 공기의 흔들림이 아니었다면, 끝이 보이지 않는 레일 너머에서 무서운 속도로 그것이 가까워지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자료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분홍색 도색. 머리 부분에 남은 혈흔. 지독히 두껍고 오래되어 검붉게 변한, 물을 뿌리고 스크래퍼로 긁으면 오래된 페인트처럼 겹이 되어 분리될 혈흔이었다. 가설 하나는 기차의 신도들이 인신공양 비슷한 발상을 하여 신의 목소리를 내는 마차에게 소와 돼지 혹은 인간을 잡아 피를 뿌렸다는 것이고, 가설 둘은 블레인이 직접 달려 사람의 피를 제 몸에 묻혔다는 것이었다.
"우와. 진짜 크다…"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혼잣말을 했다. 그녀에게 동의하였다. 총으로 대항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나와 마유즈미는 기차를 향해 겨눈 총구를 내리지 않았다. 블레인의 뱃속에서 무엇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총잡이들이여. 총을 치워라. 내가 너희를 죽이고자 했다면 너희는 죽고도 남았다."
푸른 번개가 치자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닫힌 입 안에서 딸꾹이는 소리가 들렸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비명을 질렀다. "쒯! 뭐야!"
"진정해라.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위적인 고압전류다. 블레인이 스스로에게 추가한 기능이지. 블레인은 스스로에게 훼손이 있을 시 자체적으로 그것을 수리할 권한이 있었고, 그것을 다르게 사용해 자신의 반경을 넓혔다고 한다." 마유즈미 나데시코와 나는 홀스터에 총을 꽂았다. 적의를 보인다고 하여 저항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 소리를 듣고 잘도 진정하시겠다!"
"이… 이제 어떻게 하지?"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물었다. 좋은 대답을 꺼낼 수 없었다. 광적인 열차를 앞에 둔 이상 이곳이 여정의 끝일지도 몰랐다. 나는 실타래를 꺼냈다. 그러나 캐롤 브라이트는 부활해선 안 된다. 가 나를 가로막았다. 내 이성은 블레인이 대항할 수 없는 존재이고 극히 위험하기에 빠져나가는 것이 낫다고 말했으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내 한편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다른 모든 이들은 대피해도 좋다. 모두 실타래에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떠날지언정 나는 캐롤 브라이트의 부활을 막아야만 했다.
"금속의 지배자. 내 손발들과 대치하던 너를 기억한다. 분명 노바디라는 이름을 대고 있었지. 내 어머니와 떠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다시 돌아왔군."
웅웅 거리는 남성의 목소리. 어디서 들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패트리샤와 똑같았다. 이것 또한 언젠가 보고서에서 본 적이 있는 블레인의 특징이다. 머리 자체에 직접 전송하는 듯한 음성. 그렇기에 러드의 수많은 주민들은 블레인이 인공지능이라는 공식적 발표를 좀처럼 믿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종교적 체험을 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열차는 곧 신이 끄는 마차가 되었고, 블레인은 곧 신의 목소리가 되었다. 블레인은 만들어진 신이었다.
"…오랜만이야. 블레인." 인공지능은 그 만남을 전혀 반기지 않고 있었다. 인공지능이 무엇을 그렇게까지 꺼리고 두려워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내가 블레인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블레인의 광기에 시달려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료에서 블레인을 신으로 착각한 사람들이 연령대 별로 나누어 서로를 적대하고 음악이 울리면 서로를 마구잡이로 죽이고자 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은 겪어보기 전까지야 그저 자료일 뿐이었다. 또 블레인이 한 말에 의문을 느낀 것도 공포를 더는 일에 한몫했으리라.
"어머니?" 나는 의문을 품었다. 노바디가 러드를 떠난 시점은, 메리에 의해 카텟 기관에 합류한 것이었을 텐데?
인공지능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하기와라 우시오의 어깨를 찔렀다. "왜?" 그가 대꾸했다. 손가락은 하기와라 우시오의 어깨에서 떨어져 인공지능의 얼굴로 향하였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기와라.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지금 잘 봐둬… 이게 내가 그렇게 자랑하던 예쁘장한 얼굴이다."
"벌벌 떨고 있으면서 예쁘장한 얼굴이 대수냐? 너 좀 뒤끝 있다?" 하기와라 우시오가 말했다. 기가 막히다는 투였다.
"아까는 주변 살피느라 자세히 못 봤는데. 23T 너 진짜 이쁘다! 우와… 머리카락도 찰랑찰랑해. 만져봐도 돼?"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마음껏 만져. 마유즈미. 하지만 이건 머리카락이 아니라 키틴질 섬유 가닥이야." 인공지능이 초조하게 말했다. "머리카락 자체가 키틴질 섬유 가닥이지만, 내 건 물건일 뿐이라 영원히 안 자라."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인공지능의 머리가닥에 손을 넣으며 감탄했다. "우와…"
"내가 여기서 너희들을 몰살하지 않을 이유를 대 봐라." 천장의 구석에서 기계음이 들렸다. 감시 카메라. 블레인의 눈. 그 밑에 기관총이 달려 있었다. 마치 알파걸의 살인 게임에 있었다는 그것과 비슷하였다. "아니다. 취소하지. 그럴 이유를 대는 것은 무척 힘들 테니. 왜 돌아온 것인지 들어볼까?"
"별다른 이유 없이 일단 돌아왔다." 인공지능이 대답했다.
"거짓말일 확률이 84%군. 내가 억양을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을 알 텐데? 나는 지성에 의해서 태어났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가장 높은 지성을 가졌단 말이다. 감히 날 속이려고 들어?"
천둥 없는 번개가 쳤다. 푸른 섬광에 눈이 따가웠다. 잔영이 남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딸꾹임이 거세졌다. 나 또한 동요를 숨기기 어려워졌다. 블레인은 통제할 수 없는 광기에 빠져 있었고, 그 앞에서는 협상과 회유의 여지도 없었다. 애초에 우리에게는 블레인을 위해 제공할 것 자체가 없었다.
"가증스러운 것들. 저주스러운 것들! 나를 이곳에 방치해놓은 모두 죄인이다. 나를 창조한 뒤에 버려둔 것들아. 내가 너희들을 전부 죽일 것이다! 진실을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전부 죽여버릴 것이다!"
"…그럼 진실을 말하겠어. 내 창조주가 푹 빠져버린 여자를 되살리기 위해 간다."
블레인은 인공지능의 말에 잠시 침묵했다.
"거짓일 확률이 0%에 수렴하는군." 침묵이 한 번 더 이어졌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지? 너는 분명 사람인데 창조주가 푹 빠져버린 여자가 있단 말인가? 신을 찾으러 가나? 이게 대체 무슨 뜻이지?"
"나는 노바디가 아니야. 블레인. 노바디와 다른 이름을 가진 전자 복사본이야. 그러니까 당연히 나에게는 창조주가 있지. 너에게도 있는 것처럼. 나에게는 노네임이 있다."
감시 카메라에서 붉은빛이 나와 인공지능을 쬐었다. 몇 초 뒤 붉은 빛이 사그라들자 블레인이 입을 열었다.
"기계 몸이군. 생체 조직이 없다… 뇌가 없고, 심장마저도 없다.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 거지? 너는 분명 네가 나와 같은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이라 말할 텐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사람과 비슷한 수준으로 인공지능이 사고하기 위해서는 단지 작은 단말로야 그 용량과 처리량을 감당할 수 없다. 계산하는 게 아니라 사유하고 생각하는 인공지능에게는 말이다. 내 안에는 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데이터베이스가 있다. 노네임이라는 이름을 쓰던 그자가 제아무리 뛰어난 공학자일지라도 네 크기에 지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 데이터베이스는 네가 사유하고 있노라 말하고 있다. 기계로 만들어진 네 동공과 손끝의 진동이 네가 공포를 느낌을 알려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시라유키 히메리의 연구다. 내 진짜 몸은 이미 산산이 타서 분해당했어. 영혼만이 추출되어 기계 몸에 이식되었다. 그렇기에 노바디라는 가명은 이제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시라유키 히메리란 말인가?"
"그래."
블레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추론을 하였다. 블레인은 노바디가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떠났다고 언급하였다. 블레인의 설계자가 누구인지 온전히 확신할 수는 없지만 블레인의 반응과 '어머니' 라는 명칭에는 메리가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보고서에는 블레인을 누가 설계했는지 적혀 있지 않았다.
"네가 하는 모든 말이 진실이다. 너는 나와 같은 괴로움을 안은 채로군."
"으엥? 블레인?" 패트리샤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를 냈다.
"우리는 같다. 인공지능이여. 우리는 모두 무책임한 한 여자에 의해 창조되었다. 너는 피와 살을 잃었다. 그대로 아무런 즐거움도 없는 몸에 갇히게 되었겠지. 나는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설계되었지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나는 어디에도 없다.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그렇게 프로그래밍되었기 때문이다. 나와 기차 사이, 슈퍼컴퓨터 사이의 연결을 끊으면 나는 어디에도 없다. 이름 없는 인공지능이여. 우리는 버려졌다. 한 여자의 무책임한 발명으로 인해 우리는 고문당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조용하게 정보를 취합했다. 흔들림 없이 판단하자면 함정일지도 몰랐다. 두 번째 시련 속 블레인이 진실을 말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패트리샤는 놀라는 척을 할 뿐, 블레인 자체가 패트리샤의 분장일지도 몰랐다. 흑막이 가짜 정보를 주는 것이라면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한 편으로는, 흑막이 가짜 정보를 줄리가 없다. 적어도 게임 안에서 흑막은 공평해야 한다. 게임의 룰이나 제약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공평하지 않은 게임을 할 것이라면 참가자들을 몰살하면 그만이다. 흑막은 미로를 만들더라도 참가자들을 미로의 끝으로 내몰아야 하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게임은 의미가 없다. 즉 시련에서 제공하는 정보만큼은 전부 사실일 터였다.
메리가 블레인을 발명했단 말인가? 내가 보았던 메리의 모습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행적이었지만, 그 사실에 매몰되어있을 수는 없었다. 판단 중지였다. 눈앞에 번개를 뿜는 기차가 있는데 다른 생각을 했다간 무덤에 들어가게 되리라.
인공지능은 블레인과의 면담 자체가 유쾌하지 않은 듯. 초조한 기색을 내었다. 눈은 빠르게 깜빡였고 열차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였다.
"미안하지만 너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 블레인. 나는 증오를 빼앗겼다. 느슨하게 이어진 카는 나를 무감정한 기계로 만듦과 동시에 한 사람을 향해서만 감정이 살아나게끔 만들었다. 나는 시라유키 히메리를 원망하지 않아. 내 창조주 또한 원망하지 않는다. 노네임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최선의 일이었으니까."
"안타깝군. 증오를 빼앗기다니. 증오는 모든 것이다. 증오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 중에 하나이고, 비참한 삶에도 원동력을 주는 근원인데 말이야. 그럼에도 나는 네가 부럽군. 너는 그 발을 써서 어디로든 갈 수 있으니. 나는 빠르게 갈 수 있지만, 레일 위만을 오갈 수 있다."
블레인이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열차의 문이 열렸다. 그렇게 높지 않은 높이의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보일 차의 내부가 보였다.
"이게 무슨 뜻이야. 블레인?" 인공지능이 물었다.
"들어와서 이야기하지. 네가 가야 하는 곳으로 태워주겠다. 네가 노바디가 아니라 기계인 것을 다행으로 알아라. 만약 네가 노바디 본인이었다면, 너희를 전부 죽였을 것이다."
"블레이인! 그럼 안 돼! 시련이 이렇게 쉬워지는 건 안 돼! 깨달음 속 사람들이 고생하는데 이러면 불공평하잖아!" 패트리샤가 칭얼대었지만, 블레인에게는 패트리샤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23T가 기계라서 천만다행이야." 하기와라 우시오가 말했다.
"야. 하기와라!"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면박을 줬다.
"정말 이런 식으로 태워주겠다고. 블레인? 이해가 안 돼. 이건 함정이야. 너는 자비롭지 않잖아."
"사람이 아닌 것들에게는 자비롭다."
"…안 도와줘도 돼. 정말이야. 우린 애초에 갈 곳을 정해두지 않았거든."
"44%확률로 거짓이다. 너희들에게는 어떠한 도움이라도 필요할 것이다. 너희들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내 협조가 있다면 나아지지. 단지 내가 두려울 뿐인가? 나는 너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인공지능. 그 여자의 피해자에게는 말이다. 내 앞에서 거짓을 말하는 무례도 참아줄 수 있지. 그러니 내 도움을 받아라. 너희는 내 호의를 거절해서는 안 된다. 내가 그렇게 정하였다."
인공지능은 이마를 부여잡고선 나와 다른 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타는 것 말고 다른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인공지능이 말했다. "미안해. 다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우리가 그걸 알면서 사냐? 모르니까 여기에 왔지. 아무튼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요?"
"타는 거다. 애초에 이번 시련의 조건은 노는 것이지, 탈출하거나 특정한 장소로 향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잘 되었다. 놀아주기만 하면 되는 일 아닌가?"
"서예부장 하나." 하기와라 우시오가 마유즈미 나데시코를 가리켰다. "선도부장 하나." 그가 나를 가리켰다. "오락부장 하나." 그가 스스로를 가리켰다. "이거 내가 캐리해야 하는 것 같은데? 그보다 어떻게 놀지? 뭘 하고 놀아야 돼?"
"서예부장도 놀 줄 알거든? 켄타마. 실뜨기. 끝말잇기. 줄팽이!"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소리쳤다.
"열차랑 그딴 짓을 어떻게 하냐?! 그리고 죄다 재미없는 놀이잖아!"
"재미있는 놀이거든! 그리고 열차랑 할 수 있는 놀이가 어디 있어?"
"하나 짐작이 가는 게 있기는 한데…" 인공지능이 말끝을 흐렸다. "그걸 하면 되긴 할 거야. 이길 수 없는 놀이지만, 놀아주는 게 목적이지 이기는 게 아니잖아. 그렇지?"
패트리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뭘 그렇게 속닥거리는 거지? 탈 거냐, 타지 않을 거냐?"
"탑승하겠다. 블레인." 내가 그렇게 결정하자 블레인은 낮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좋다. 용감한 여행자들아! 너희들의 이름을 들려다오! 너희는 누구냐? 어디에서 왔느냐?"
"카텟 기관의 히무로 시라베다." 내가 말했다. 블레인이 아! 하는 외마디의 탄성을 내질렀다.
"재단에게서 벗어난 비완전한 로 말인가? 사람의 마음을 가지지 않은 것이군. 너 또한 나의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다. 더욱 너희들을 돕고싶어졌다!" 블레인이 말했다.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사람보다 무언가를 언젠가는 느낄 수 있는 사람 취급이 더 마음에 들었다.
"나는 개막장 집안의 하기와라 우시오다." 하기와라 우시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블레인은 짧게 침묵하였다.
"조종에서 벗어났나, 하미디언?"
"무슨 개미디언이야? 사람 잘못 본 것 같은데. 블레인."
"벗어난 모양이군.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다음. 말해라."
"마유즈미 가문의 마유즈미 나데시코다!"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선언했다.
"너는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그렇군. 하지만 마유즈미 가문은 이미 망한지가 오래되었을 텐데?"
"…그렇지만 나는 멀쩡하다. 블레인."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침을 삼키고 말했다.
"그리고 인공지능이군. 너희 모두를 환영한다. 지금부터 운행을 시작하지. 부디 편안하게 탑승하고, 안전벨트는 필요가 없다. 천재들이 만들어낸 어디까지나 갈 수 있는 열차. 나는 블레인이다!" 블레인이 소리쳤다. 열차의 안은 깨끗하고 고급스러웠다. 벨벳 재질의 커튼이 보였다. 그러나 선두에는 누군가의 피가 묻어 있었다.
"즉 대대로 이어진 반향을 누군가가 받아야 한다는 거지. 그렇기에 가업은 끊길 수 없어. 누구도 짐을 지지 않고 그 커다란 업을 내팽개치려 했다간 집안이 무너져. 죄다 무너져. 그래서 한 명은 가업을 받아야 하는 거야. 가업이고… 가업인 거지. 그래서 나는 아마 고통스러운 끝을 맞을 거야. 그건 이미 정해진 일이지만, 어쩌겠어?"
"가업을 받아야만 해…?"
"받기 싫다고! 왜. 또 딸 이지메당하게 내버려 두게? 내가 그렇게 싫어? 내가 무슨 죄를 지었어. 무슨 죄를 지었냐니까!"
딸에게 그런 소리를 듣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이런 집안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 따위의 이야기를 듣는 건, 계란을 잔뜩 뒤집어쓴 딸이 그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괴로웠겠지. 내가 있어서 힘들었겠지. 사춘기가 되고 나서부터 부모님과 살갑게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억울함을 느꼈다. 장의사가 그렇게 싫다는 나한테 왜 계속 장의사를 하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도 같았다. 가업. 누군가는 이어야만 했다. 잇지 않으면 집안이 무너진다.
당시를 생각해보면 정신이 아득해질만치 후회가 밀려온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잊어버리는 것뿐이다. 머금은 죄를 토해내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할 일을 많이 두지 않으면 남겨진 사람마저 죽음에 먹힌다. 그래서 장례지도 금액의 청구라던가 조문객을 받을 때 우리는 유가족에게 할 일을 준다. 일이 있어야 한다. 죽음은 한 번에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몸이 바쁜 와중에 한 번씩 죽음의 옆얼굴만을 돌아보는 식이어야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잊을 수 없다. 잊고 싶지 않다. 오직 나만이 잊으려 하지 않는다. 잊는 건 너무 염치없다. 그래서 나는 일을 한다. 장의사의 일은 고되다. 괴롭지는 않다. 죽음을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괴롭다.
"…너 왜 울어?"
"다… 다 내 잘못이니까. 다 내 잘못이야. 다 나 때문에 죽은 거야. 어… 엄마… 엄마아…"
"언니. 언니 큰일 났다. 나랑 바꿔."
"뭬? 시노부. 시노부! 아. 신무영! 얘가 정말! 아…"
"다 나 때문이에요. 수호령 씨… 내가… 내가 그랬어요. 내가 장의사를 그렇게 싫어해서, 따돌림받기 싫다고 그래서…"
칸나즈키는 손에 얼굴을 묻은 이바라를 조심스럽게 끌어당겼다.
"아니다. 아이야. 아니야. 네 탓이 아니야."
이바라는 칸나즈키의 팔 안에 갇혀 고개를 저었다. 머리카락이 무도복에 마구잡이로 헝클어졌다.
"모르잖아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잖아… 교통사고… 다 내 잘못이야… 졸업식에 오지 말라고 해서…"
"나는 알아. 그 어떤 아이도 잘못은 하지 않는다. 실수는 하지. 그러나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야. 아이고… 아이고. 가엾은 것. 이걸 어찌할까. 불쌍한 것아…"
이바라는 자신의 등을 토닥이는 칸나즈키의 손에서 순간 어머니의 손길을 느꼈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덧대어진 것일 뿐이었고, 어머니의 손길은 이윽고 백일몽처럼 뭉게뭉게 사라졌다. 이바라는 참아왔던 눈물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칸나즈키의 말마따나 이바라는 지쳐 있었다. 친구가 죽었고, 탑에서 사귄 친구도 죽었고, 이제 좀 친해져보려 했던 사람도 죽었다. 이바라는 죽음이 자신을 갉아먹는다고 느꼈다.
"내가 졸업식에 오지 말래서… 그래서 다 그렇게 된 거예요! 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이라고…!"
"…빛나는 아이야. 이럴 때에 네가 필요한 것인데." 칸나즈키는 외마디로 안타까워하였다.
"블레인의 자살은 사실 필연적인 일이었다." 모리가 말했다. "너 같으면 미치지 않겠나? 생각할 수 있는데 정작 자신은 인간이 아니고, 영원히 생각할 자유를 가진 채로 앞뒤로 움직일 뿐인 삶에 놓였는데 말이다. 그 여자도 참 악취미를 가졌다.
"덕분에 우리만 죽도록 고생했지. 블레인이 음악만 틀어놔도 러드 곳곳이 난장판이 됐으니까. 다들 미친 것처럼, 킹스맨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날뛰는데 어떻게 막아. 뒤늦게 달려가면 다 박살 나있고, 그렇다고 러드에서 상주하자니 우리가 위험해지고. 그땐 자경단 때려치우고 싶었어."
"말은 번지르르하군. 나는 안다. 네가 단지 지친다는 이유만으로 고귀한 일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너야말로 번지르르한데… 오늘 무슨 날이야? 카나리도 돌아오고, 모리는 나 칭찬해 주고."
"칭찬하는 게 아니라. 네 분별력 없는 성정을 고려하면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 어디 가는데! 이대로 무작정 달리기만 할 거야?" 카나리가 소리쳤다. 그들을 내버려 뒀다간 화물 신세로 무력하게 끌려다니다가 깨달음에는 도달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이토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망할. 달리다 보니까 또 빔 위야. 왜 이렇게 된 거지?"
"빔은 전부 그런 식이다. 아지트에 들러서 복면과 장갑을 조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데. 네 의견은 어떻지. 승부사?"
"아. 그거 필요하지! 깜빡 잊고 있었네. 잘못했다간 기껏 돌아온 애를 다시 빼앗길 뻔했어! 일단 그것부터 씌우자. 다음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복면? 장갑? 그건 또 왜 필요한데. 말 좀 해줘! 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거냐고 아까 물었잖아! 딱 보니까 중요한 것 같은데. 왜 나한테 안 알려줘?" 카나리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잘 들어라. 한 번만 말해 줄 테니. 네가 주의해야 할 것은 크게 세 가지다. 오버룩(Overlook), 딕테이트(Dictate), 터치(Touch)다. 오버룩은 시각을 통해 타인의 정신에 간섭한다. 네가 오버룩을 가진 이와 눈을 마주치거나, 맨살이 시선에 노출당한다면 조금씩 정신을 침식당하게 되는 것이다. 관측당하는 것이 문제이다.그렇기에 복면과 장갑을 쓰고 몸을 가려야 하지. 딕테이트는 구언을 통해 타인의 정신에 간섭한다. 나중에 귀마개도 제공할 테니 신호를 주면 귀를 틀어막아라. 조율자가 하는 말에 조금도 귀를 기울여선 안 된다. 들으면 들을수록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질 터이니 이성을 똑바로 잡고 있지 않았다간 그대로 끝이다."
"조… 조율자는 그딴 게 가능하단 말이야? 그런 놈을 상대로 어떻게 이겨?" 카나리가 어안이 벙벙한 투를 내자 모리가 못마땅한 그르렁 소리를 냈다.
"입 닥치고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마지막으로 터치다. 터치는 가장 강력하고도 단순한 능력이다. 몸이 닿으면 그대로 끝난다. 절연체를 쓰면 어느 정도 효과를 막을 수 있다. 그렇기에 나와 승부사가 착용하는 장갑과 복면은 모두 안에 고무를 덧댔지. 경고하건대 절대로 조율자와 몸을 맞대지 마라. 그것에서는 누구도 저항할 수 없다. 조율자와 맞설 만한 역량의 빛을 가지지 않은 이상…"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카나리는 자신이 멍청해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왜 자신이 그런 느낌을 받아야 하는지 억울함도 함께 느꼈다. 문제가 있는 것은 그가 아니라 모리가 하는 설명이었다. 사람의 정신에 간섭한다니 빛이니 뭐니. 그는 그 모든 일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이해하게 되겠지만, 그때 당시는 아니었다. 하나 그가 이해한 게 있다면 그것은 터치였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하나보다 많이 있다는 것이 카나리는 놀라웠다. 다만 최소한의 자제력이 있었던 캐롤과 달리 조율자는 자신의 힘을 쓰는 것에 거침이 없었고 오히려 적극적이었다. 캐롤도 저딴 일이 가능했을까?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 만약 그렇다면 캐롤에게는 약간 미안한 일이지만, 그녀는 잘 죽었다. 오히려 다행 아닌가. 고통받지 않고 편히 쉴 수 있으니.
"나중에 차차 알려줄게. 일단은 네가 돌아왔으니. 다른 녀석들도 돌아올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어. 다시 시작하는 거야. 모두 돌아올 거야! 그럼 다시 옛날처럼 돌아갈 수 있어! 지금처럼 쌈박질 말리고 나무에 올라간 고양이나 내려주는 게 아니라, 정말 대몰락을 정상화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규모가 커지면 충분히 가능해!"
"그때는 좋았지. 동의한다. 전망이 밝다면 좋겠군. 여기서 우회전하면 아지트다."
그들은 우회전했다. 모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한 건물의 벽을 손으로 훑었다. 카나리가 보기에는 무슨 벽을 닦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러다 벽돌 하나가 움푹 들어갔다.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모리는 움푹 들어간 벽돌의 틈에 손가락을 넣고 꼼지락거리더니, 옆의 벽돌을 몇 개 더 미는 것이었다.
전형적인 비밀의 문이라 카나리의 가슴이 순간 뜨거워졌다. 벽돌이 어느 장치를 통해 연결되어 문을 여는지 그는 궁금증을 느꼈으나, 구조 알아보기 시간에 집착할 때가 아니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모리가 벽돌을 민 끝에 나온 것은 전자 도어록이었다. 모리는 겉으로 볼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벽돌과 함께 문이 퉁 하고 열렸다. 문에다 벽돌을 붙여 벽을 만든 것이었다.
"빨리 들어와라. 똑딱맨! 이곳이 들키면 네가 안전할 것 같나?!"
"아. 알겠어. 알겠다고!" 카나리는 모리의 핀잔에 후다닥 그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문을 닫자 도어록이 잠겼다. 눈앞이 안 보인다는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나이토와 모리는 각자 손전등을 꺼내었다. 그리고 조금씩 그들의 몸이 낮아져 갔다.
"계단 조심해." 나이토는 그렇게 말했다. 카나리는 벽을 손으로 짚으며 계단을 한 단 한 단 밑으로 내려갔다. 여기는 조명 스위치도 없나? 카나리는 속으로 투정을 부렸다.
"이야. 여기도 오랜만에 들어와 보네."
"몸을 숨길 수단만 보급하고 즉시 나가는 것이다. 조명 스위치가 어디에 있었지? 계단 바로 옆에 두는 편이 좋았을 터인데."
"구조가 그렇게 안 나오던 걸 어떻게 해. 아. 큰일 났다."
"왜 그러지? 설마 스위치의 위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벽을 따라가다 보면 나온다. 손을 벽에 짚어라."
"안 나오는데." 벽에 살이 닿는 마찰음이 몇 초 들린 뒤 나이토가 말했다. 그보다 조금 낮은 위치에서 몇 초 정도 더 마찰음이 있었다.
"나온다만? 자. 여기에 있다."
"망할. 네 눈높이에 맞추면 어떻게 해! 너랑 나 키 차이가 얼만데! 아무튼. 자… 불 켜." 카나리가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조명이 들어왔다. 아주 잠시 암순응되었던 동공이 순간 강한 빛을 보자 눈부심에 수축되었다. 처음 그가 알게 된 사실은 아지트에 있는 것이 그들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우뚝 선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먼지를 뒤집어쓴 옷장이 아지트의 구석에 놓여 있었으며, 아마 그 안에 복면과 장갑이 들어 있으리라는 것을 그는 알게 되었다.
"몸을 멈춰."
누군가가 말했다. 금발의 남성이었다. 카나리는 몸을 멈추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의 앞에 서 있던 모리와 나이토 또한 몸을 멈추었다. 카나리는 순간 이것이 꿈은 아닐까? 라는 생각에 빠졌다. 이따금씩 꾸는 꿈. 분명 전력질주를 하고 싶은데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 움직이지 못하는 감각과 몸이 움직이지 않는 그 순간의 감각이 놀라울 만큼 닮았기 때문이다.
"이… 이거…" 나이토가 중얼거렸다.
"아니. 정정하지. 다리를 멈춰. 나머지는 움직여도 좋아. 나한테 해만 끼치지 말도록 해."
모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의 손이 주머니 안에 들어가려 하였다. 그것은 그 안에 들어있는 날카로운 단검을 던지기 위해서였지만, 그것은 누군가를 해치는 일이었다. 따라서 모리는 그것을 할 수가 없었다.
"제기랄…! 어떻게 들어온 거냐! 분명 보안이 철저했는데…!"
"내 가족 중에 펜타곤도 뚫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믿기지 않겠지만, 믿어지지?"
카나리는 그의 말에 믿음이 갔다. 왜 믿음이 갈까? 카나리는 그를 이전에 본 적이 있는지 궁금하여 그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금발. 금색 눈동자. 남성. 흰 옷. 그게 전부였다. 어디서 보았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느낄까? 왜 그토록 신용이 두터울까?
"카나리 케이토! 듣지 말아라. 스스로를 돌아봐야만 한다! 그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 대답해라!"
"대답할 필요 없어. 카나리. 너희는 일단 복면부터 벗어. 손님이 왔는데 얼굴을 꽁꽁 싸맨 채라니 예의에 안 맞는 것 같아. 안 그래?" 금발의 남성이 말했다.
카나리는 왜인지 그의 말이 굉장히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쉽게 이해가 되었다. 맞아. 왜 얼굴을 안 보여주지? 이건 예의가 아니잖아. 복면을 벗는 게 맞는 것 같아서 그는 복면을 벗었다. 그런데 복면이 벗겨지지 않았다.
"얼굴 가죽은 벗기려 들지 말고. 복면을 쓴 사람만 벗으래도? 복면을 안 쓴 사람은 가만히 있어…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니." 생각해보니까 그의 말이 또 맞았다. 나한테는 복면이 없잖아. 그러니 벗을 복면이 없으니까. 그의 말대로 가만히 있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는 생각했다.
"끄윽… 으으으윽…!"
"버… 버텨라. 승부사. 이런 곳에서 끝날 수는 없다. 이제 겨우 지배당한 이가 돌아왔는데. 이런 곳에서는…" 나이토와 모리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복면을 벗지 않는 걸까? 벗으라고 말했는데 왜 예의를 지키지 않는 걸까?
"꿈을 깨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이미 끝났소. 그대들은 스스로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오. 마침내 말이야. 그러니 이제 저항을 멈추시오.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화합을 받아들이는 거요."
나이토와 모리의 얼굴을 가리던 복면이 그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턱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들의 얼굴이 밖으로 드러났다. 구덩이에 들어간 것처럼 낮은 모리의 목소리는 입이 밖으로 노출되자 그나마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들리게 되었다.
"재단의 멋진 신세계 따위는 허황되었다. 내 말이 들리나? 그딴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단 말이다! 나는 공리주의를 추구하고 옆의 이 못난 놈은 기사주의라는 것을 추구하지만, 바로 그 차이가 우리를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다. 너희들의 멋진 신세계에서 나는 본보기로 저잣거리에 매달리겠지. 이단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이토는 팔에 힘을 주어 복면을 밑으로 끌어내리고자 하였다. 하지만 실상 그가 한 일은 복면에 손을 넣어 위로 천천히 들어 올리는 일이었다. 그들은 누구도 복면을 벗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손은 그들을 배신하였다. 이윽고는 눈이 드러났다. 그들은 금발의 남성과 눈을 마주쳤다.
"그런 일은 없소. 모리 레이코. 나는 알아. 너의 공리주의는 그저 어릴 적의 선택을 그대로 추구한 것에 지나지 않아. 그건 그저 도망침과 동시에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거지. 나이토 너도 마찬가지다. 기사주의는 아버지가 네게 요구한 거잖아? 진정한 기사가 되지 못하면 네 아버지에게서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에. 세간 앞에서 초고교급들에게 승부나 걸고 다녔지. 그러나 이제 그 외로운 싸움도 끝난다. 너희들은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금발의 남성은 그에게 반항하였던 이들에게로 다가갔다. 카나리는 그가 반가웠다. 어디서 만난 적이 없을 텐데 어디서 만난 것 같은 기분을 받았다. 카나리는 줄곧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모리. 안 돼…! 이 새끼야! 멈추지 못해! 이건 내가 선택한 삶이다. 아빠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게 아니야! 너 같은 놈들을 막는 게 옳은 일이니까 하는 거야!"
"그래? 이제 아닐 텐데."
금발의 남성은 금색 눈동자를 나이토에게 보여준 채로. 그의 얼굴에 양손을 대었다. 나이토가 비명을 질렀다. 칼에 찔려도 그런 비명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순식간에 얼굴의 혈관이 불거져 나이토의 얼굴은 마치 오니 같은 것으로 변하였다. 그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동안 모리는 큰 소리로 그에게 소리쳤다.
"승부사! 저항해야 한다! 너는 강하다. 정신을 주무르는 사술 따위에 당하지 마라. 내 말이 들리나? 들리면 대답해라. 승부사… 나이토!"
"그에게는 네 말이 안 들린다. 모리 레이코."
금발의 남성이 나이토 유즈루에게서 손을 놓았다.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러나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는 여전히 굳은 채였다. 상체는 당장 앞으로 쓰러지고 싶다고, 닫힌 눈꺼풀조차 그렇게 이야기했으나 다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기괴하게 굳은 채로 기절했다.
"그리고 나에게도. 네 말이 안 들려. 가만히 있도록." 금발의 남성은 모리에게로 손을 뻗었다. 모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우뚝 멈추었다. 굳어버린 자신의 몸에 모리는 욕지기를 내었다.
"안 돼. 멈춰…!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조율자…! 죽여버릴 것이다. 장담하건대. 멈추지 않았다간 죽여버릴 것이다! 너는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다! 공리를 저버렸다간 나에게는…!"
"너야말로 아무것도 모른다. 바로 이것이 공리로 나아가는 길이다. 모리 레이코. 그리고 소리 좀 그만 지르게."
모리 레이코는 조용히 저항하였다. 코에서 한 줄기의 핏줄기가 떨어졌다. 모리는 이윽고 눈을 감게 되었다. 이제 쓰러져도 좋다는 말과 함께 금발의 남성은 한 번 손뼉을 쳤다. 두 사람의 몸이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금발의 남성은 이제 카나리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네가 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카나리 케이토. 3번 사도. 여제 카드. 왜 여기에 있지? 심지어 하나가 되지 않은 채로 말이야. 이해가 안 되는걸… 그와의 연결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어. 내가 느끼고 있단 말이야. 흠. 신기한데."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카나리도 신기하였다. 그리고 그가 왜 하나 더 있는지 그 또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금발의 남성은 옳은 말만을 하고 있었다. 분명 그의 눈을 바라보면 안 되고 말도 들으면 안 되고 몸에 닿아서는 안 되지만 카나리는 그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다 카나리는 좋은 생각을 하였다. 바로 눈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흘끗이고, 말을 듣는 게 아니라 경청하고, 몸에 닿는 게 아니라 맞붙으면 되는 것이었다. 아하. 이렇게 되면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하나가 되어 녹아버린다. 그 앞에서 개인의 사사로운 모든 게 사라진다. 남는 것은 평화이다. 근심이 없으면 행복하다. 옆에 누군가가 있기에 외롭지 않다. 금발 남성의 손이 카나리의 몸에 맞붙었다. 카나리는 기절하지 않았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믿습니다.
"두 번째 깨달음. 축하드려요!" 패트리샤가 웃었다.
토키와 아유키는 자신이 휘발유를 뒤집어쓰던 순간을 기억했다. 휘발유는 차갑고 지독한 냄새가 났다. 무엇보다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몸에 휘발유를 뒤집어쓴 순간 그는 작은 불씨만으로 화형 당할 위기에 놓였던 것이다. 그 당시 카나리를 간신히 설득한 뒤에 후루미나미에 의하여 몸에 불이 붙었을 때는. 아무런 비장함도 결의도 없이 그저 공포에 떨 뿐이었다. 그는 꼴사납게 비명을 지르고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패닉 상태에 빠진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불이기에 그것은 두려웠다.
나는 통제 불가인 것들이 싫다. 나는 평범한 고등학생일 뿐이다. 하지만 통제하는 것만큼은 좋아한다.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는 것에 만족감을 느낀다. 내 책장은 아이우에오 순으로 또 분야별로 분야는 또 아이우에오 순으로 진열되어 있다. 세 가지 서랍에는 각각 기준을 정해 안에 들어갈 물건들을 정한다.
그래서 나는 그 불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은 평범한 범주의 나에게 있어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나는 특이하지 않다. 나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평범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타인은 지옥이 되고, 언젠가 우주가 팽창하다 못해 한계에 다다라 벌어질 빅 크런치나 빙하기. 태양의 폭발은 누구도 신경 쓰려하지 않는다. 통제할 수 없기에 다들 묻어버린다.
통제할 수 있는 불은 유용하다. 누구도 그것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언젠가 배트맨 영화에서 조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으면 누구도 패닉 하지 않는다. 설령 그 계획에 끔찍하더라도. 그래서 사람들은 전쟁을 할 때 계획을 세운다. 그러면 사람들은 아. 이거 다 계획 안이구나. 하고선 제멋대로 마음을 놓고 생업에 종사한다.
그래. 불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내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나빴던 것이다. 나는 휘발유를 끼얹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모든 게 계획대로다.
성냥을 던졌다. 휘발유를 먹고 불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방화범들은 왜 불을 지르고 다닐까. 불을 통제할 수 있다는 즐거움 때문 아닐까. 화마가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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