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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3

더 단크 타워 챕터 3 - 22+2

by 도타싫어! 2023. 8. 1.

아른거리는 미녀. 정신을 빼놓는 그 형체여. 나의 아브락사스. 나는 그것을 향해 날아가는 새였다.

보고 싶고 만지고 싶다며 목줄을 단 채 그르렁대는 들개들. 나 자신이 바라보아도 저열한 생각들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무럭무럭 자라났다. 억누를 생각조차 별반 들지 않았다. 입을 벌렸다면 침이 흘러내렸을 것이다. 기어코는 멍하니 그런 상념들에 잠겨 추적추적 걸어가게 되었다.

나는 광인이자 긍지 모르는 자였다. 수치조차 가지지 않았다. 그저 한 없이 원했다. 썩어빠진 생각을 가졌다. 단순한 번식 본능을 뒤로하고 발전하고자 함이 사람의 성질이라면 나는 정확히 그 반대 방향으로 갔다. 나는 원숭이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저 본능에 충실해지는 것이 퇴화냐고 누군가가 반론한다면. 바로 그랬다. 여러 방향의 사유가 가능하면서 본능에 더 충실한 자는 호색한이라 불리겠으나, 다른 방향으로의 사유가 아예 불가능한 천둥벌거숭이는 짐승이라 불리는 법.

머리카락 묶음은 내 손 안에서 그 빛을 잃었다. 그녀의 샤이닝이 무언가에 의해 방해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상념. 빌어먹을 끈적끈적한 욕망들이. 질 낮되 살기 편한 무언가로 변모하고자 하는 힘이 나를 옥죄었다. 놀라운 위안이었다.

내 무의식은, 그 기분 좋은 그러나 기분 좋아서는 안 되는 무언가에 잠긴 무의식은 깨달았다. 그래. 샤이닝은 발전하고 성장하며 더 나아지기 위할 때 성장한다. 그렇다면 샤이닝에 반발하는, 빛을 잡아먹으려 들고 빛을 우선해서 달라붙는 이 어둠들은 정확히 그 반대의 작용을 하는 걸 테야.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건 집어치우고 자기 잇속을 채우고자 하는 근원적 이기심. 위대하지 않고 차라리 평범해지고자 하는 그것은 퇴화의 힘이로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 나는 잠시 그 어둠 속에서 돼지가 되는 편을 기꺼워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점에서 당시의 나는 일부 해탈했다. 내가 해탈하고 싶은 것에만 해탈하는, 질 나쁜 짓거리였다. 가장 질나쁜 것은 내가 저질임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함이었다. 그 포기 상태 안에서 쫓아오는 자들의 안전. 탑에 남은 이들을 향한 걱정. 내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라지자 나는 네 발로 기었다.

모노로그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나는 그것을 향해 날아가는 새였다."

 




시체가 발견되었다.

결국 그렇게 되어버렸다. 내가 영안로를 나아가며 나를 추적하는 이들이 생기고, 탑에 사람이 빈 결과 누군가가 결국 사람을 죽였다. 나는 직간접적으로 이 살인에 영향을 끼쳤다. 그 생각이 끼치자마자 바보 같은 상념들은 영영 사라져 버렸다. 몽둥이로 머리를 맞은 느낌이었고, 오직 그것이 내 잘못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는 영안로에서 나갈 수 없었다.

내가 저지른 잘못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그 길에서 내려올 수가 없었다. 새로운 잘못을 저지르기 위해 나아가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다 헛수고가 되어 버리니까. 캐롤 씨를 살리려고 해를 끼쳤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는 없으니까. 내 비행 궤도는 이미 오를 대로 올랐으며 그 기류에서 떨어진 이상. 다시 그것을 탈 수가 없었다.

나아갈 수밖에 없어.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어댔다. 아릿아릿한 아픔은 참회하고자 하는 시도와 같았다. 애초에 내가 살인에 영향을 미쳤는데 속 편히 야한 생각이나 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게 내 잘못이었지만 염치없이 살아가는 것은 내가 내버리고 온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나도 결국 그녀보다 나은 사람은 못 되었다.


"그래도 나는 가야만 해… 반드시…!"

그리고 나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캐롤 씨가 내게 빛의 존재를 계도했던 대로. 그 고동을 느끼고 안에 무엇이 있는지 뒤져 보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살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다시금 눈을 뜨고 깨어난 다음에는 완전히 다르게 살아보고 싶으니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그것은 울며 말하고 있었다.








"다 봤어?"

"살필 만큼은 살폈습니다. 목이 잘렸더군요. 안에 제츠보 씨가 계시고요… 미리 말씀드리자면, 제 근력은 제츠보 씨에 비할 바가 안 됩니다. 저는 저런 짓을 할 수가 없어요."

"내 생각에도 그래. 그건 카나리 짓일 거야. 캐롤 영안로에서 나랑 같이 나왔거든. 왜 거기에 있었는지는 몰라도… 믿기 어려울 테니까 그냥 흘려들어도 돼. 알아만 두라고."


분명 카나리의 플라잉 로봇은 무사할 터였다. 내가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플라잉 로봇의 방해 전파는 제츠보를 멈출 수 있는 수단으로 카나리와 후루미나미가 자주 써먹었다고 했다. 후루미나미의 것이 부서졌으니 제츠보를 제압할 만한 수단은 카나리의 것밖에 없다.

 

나는 영안로 안의 광경을 다이얼로그의 사진 기능을 써서 몇 장 찍어 두었다. 객관적인 기록을 위해서. 그리고 추후 혹시 벌어질지 모르는 사건 현장 훼손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카나리가 왜 제츠보를 무력화시켜? 그럴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확실히… 그렇지요."

"곧 알게 되겠지."

우리는 먼저 후루미나미의 숙소를 향해 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토키와가 후루미나미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다고 야가미가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두 명은 어디에 있는지 명확했고, 합류하기도 용이할 터였다.

살인자를 따라간다는 게 피리 부는 사나이 따라가는 아이들이 된 것 같아 불안했지만, 한편으로는 왜인지 그놈이 안전할 것이라 느꼈다. 왜냐하면 모노로그가 연쇄살인에 대해서는 말해둔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득이 없는데 살인을 저지를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이것만큼은 야가미의 의도나 인성을 뒤로한 채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다. 물론 쾌락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기야 하겠지만, 그런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 보통은 다 그렇게 한다.

야가미가 살인을 저질렀고 완전범죄를 위해 사람을 죽이려 계획하고 있다 해도, 모노로그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아무도 몰랐다. 재판을 하나 더 열 수도 있겠지만 시간 없다면서 하나만 개최할 수도 있었다. 그럼 두 번째 세 번째 살인은 굳이 할 필요 없었던 게 되어버린다.

물론 이것도 미치광이한테는 적용 안 되는 이야기겠지만. 아주아주아주 만약에 야가미가 우릴 죽일 작정이었어도 모든 게 확실하지 않다면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 나는 그것을 믿었다.

"제가 2시간을 감시, 토키와 씨가 2시간을 감시. 그 뒤 2시간동안 공백을 두기로 했습니다. 두 명이서만 하다 보니 몸이 축나서요. 토키와 씨는 익숙하다는 듯이 멀쩡하셨지만 저는 그렇지가 않더군요."

"그럼 너희가 후루미나미를 못 본 시간이 2시간 있다는 거네?"

공백의 2시간을 기억했다.

"그렇지만 저만 알고 있는 매듭법으로 묶어 놓았으며, 제가 다시금 감시하러 갔을 때 후루미나미 씨는 얌전히 묶여 있었습니다. 조금… 사고가 있긴 했지만요."

"무슨 사고?"

야가미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후루미나미의 숙소 문을 똑똑 두드렸다. 곧 문이 열렸다. 토키와의 얼굴이 보였는데, 좀 실례겠지만 나는 한 걸음을 뒤로 물러나며 "워우." 란 소리를 냈다.

"…살아있어서 다행이네. 하기와라. 이바라. 야가미도."

대체 3일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묻고 싶어질만치. 토키와는 초췌해져 있었다. 분명 야가미랑 2교대 돌리고 몸 덜 축내게 공백 시간까지 뒀을 텐데도. 밤만 모니터실에서 꼬박꼬박 새던 토키와의 모습보다 더 마음고생을 한 것 같았다. 볼은 홀쭉했고 눈은 퍼석퍼석했다.

이게 사람 몰골인가? 싶었다. 토키와가 평소에 자기 채찍질을 많이 하는 것도 알고 노력과 마음고생이 심한 것 또한 알았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피폐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영안로에 있었던 시간은 탑을 기준으로 3일. 그 3일 사이에 한 사람이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야… 너 괜찮은 거야? 이 괴짜들 휘어잡겠다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너 많이 벅차 보이는데."

"…나는 조금도 벅차지 않아. 하기와라. 내게 주어진 숙명인 것을 어떻게 하겠어. 아무리 힘든 길이라도 나아갈 수밖에 없을 때가 있는 법이야."

토키와는 내게 그렇게 대답했으나. 나는 왜인지 섬뜩함을 느꼈다. 나를 당장 물 것 같은 대형견을 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게다가 나는 피폐한 사람들과 유년시절부터 마찰을 빚어왔던지라. 그 분위기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다.

"어… 그래. 나도 반갑다. 후루미나미는…"

후루미나미는 의자에 묶인 채 목을 쭉 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뭐야. 하기와라! 너 제정신을 가지고 있네? 아쉬워라! 거기서 한두 명쯤은 죽거나 바보가 돼서 나올 줄 알았는데. 히무로도 같이 나왔니? 누구 부활한 사람은 있고? 캐롤 부활 안 했어?"

어휴. 미친년… 후루미나미는 의자에 묶여 있으면서도 기운이 넘쳐 보였다.

"지금까지 계속 여기다 묶어놓은 거야? 너희 진짜 철저히 했다. 솔직히 한 이틀만에 얘 탈출해서 뻐큐 날리고 탑에 뱀 풀어놓고 그럴 줄 알았는데."

"우리가 몇 번씩 속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니까. 이번 만큼은 위험인물의 격리에 큰 공을 들였지."

"이야. 니네 고생 많이 했네… 그런데. 얘 화장실 가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해?"

"…앗."

후루미나미가 외마디 소리를 냈고, 야가미의 표정이 심히 썩어 들어갔다. 얘네 왜 이래? 싶어서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야가미가 띄엄띄엄 대답을 했다.

"생리현상이 급해질 경우에는 감시하고 있던 자가 포박을 잠시 풀어준 후 화장실을 쓰게 해 주었습니다."

"뭐야. 그거 좀 위험한데? 후루미나미가 반격하던가 뛰쳐나갔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 그리고 니들이 없는 공백 시간에 후루미나미가 볼일 급해지면?"

"결국 전자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개인의 자제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죠. 저희들도 쉬긴 해야 하니까요.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기용하자니 믿음이 가지 않고요."

"내가 그렇게 시켜달라고 졸랐는데. 토키와는 한사코 거절하더라고…"

이바라는 지나가듯이 말했지만, 나는 이바라의 참여를 막은 토키와를 기억해 두었다. 이바라를 믿을 수 없다고? 살인 게임에서 누구도 못 믿는 거야 상식이지만, 야가미는 믿었는데 이바라는 못 믿는다는 건. 특정한 기준이라도 있나? 그냥 친목이 기준이야? 아무튼…

"후자의 일은?"

"…정말 비극적인 일이었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후루미나미?"

이바라가 물었다. 그리고 한동안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고. 후루미나미의 얼굴은 헤실거림과 짓궂음으로 일렁였다. 야가미는 여전히 표정이 썩창이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만 말해두죠. 여하튼. 여러분들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하기와라 씨와 이바라 씨가 캐롤 씨의 영안로로 향하는 길에서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칸나즈키 씨의 목이 잘렸고요. 그런데… 목을 제외한 나머지는 제 숙소 안에 있습니다. 우선 오시죠. 조사를 해야 하니까요."

 

나는 후루미나미와 야가미 사이의 불미스러운 일을 기억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칸나즈키가? 저런! 그래도 같이 일했던 동료인데 어쩜 이래! 게다가 야가미가 또 사람을 죽이다니!"

"…안타까운 일이야."

 

"그럼 안타깝지. 토키와. 그래 마땅하지. 하지만 안타깝다는 감상밖에 느끼지 못한다면. 너한테 다시금 실망했어."

 

토키와는 이바라의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어이쿠. 이거 제대로 긁혔다 싶은 표정이 토키와의 얼굴을 스쳐갔다. 이바라는 평소의 누구에게나 살가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원색적인 비난의 뜻을 감추지 않았다. 칸나즈키의 수호령을 불태운 장본인이 토키와니까 화를 내는 것도 정해진 수순일지 몰랐다.

 

"결국 칸나즈키의 수호령은 복구되었어. 이바라. 이번의 살인은 나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야. 내게 죄책감을 안겨주려는 시도라면 적절하지 않아."

 

"그러려는 게 아니야. 네가 염치를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 한 말이지."

 

"야. 토키와한테 뭐라고 하지 마! 얘도 마음고생 심했다고. 그렇지 토키와?" 후루미나미가 옆에서 거들자. 이바라의 기세는 더욱 사나워졌다.

 

"이바라.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간에 우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해. 지금 당장은 살인 사건의 수사에 집중해야 한다고. 그 점에는 동의하는 거야? 우리. 합의할 수 있기는 한 거지?"

 

나는 그 논쟁에서 제3자를 자칭하려고 했지만. 왜인지 들으면 들을수록 내 무의식이 토키와와는 반대의 편으로 돌아서려는 것을 느꼈다. 왜인지 단어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니. 그럼 칸나즈키는 과거에 버린 채로 우리끼리 다 잊고 가자고?

 

"제가 생각하기에도 지금 나누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이야기 같군요. 추후에 하는 것이 어떨까요."

 

"말리지 마. 야가미."

 

"진심이십니까?"

 

"이건 내가 무조건 이바라 편 들어주는 게 아니라 이바라 말에 일리가 있는 거야. 우리가 이 자리에서 몇 시간 동안 토키와 비난만 할 것도 아니고. 잘못한 건 짚고 넘어갈 수 있는 거지. 그럼. 여기서 안 풀었다가 재판장에서 고성방가 할까?"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 하기와라. 조사 시간은 1초도 낭비해선 안 돼. 그러다가 검정이 이기면 우린 전부 죽어. 그러니… 지금은 내가 굽힐게. 내가 잘못했어. 칸나즈키의 신체를 태워서는 안 됐어."

 

토키와가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내가 굽히겠다고? 이놈 말하는 것좀 봐. 아주 그냥 사과만 하고 넘어가겠다 이거군. 이바라는 기가 차다는 듯한, 그리고 깊이 실망한 듯한 표정을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토키와는 슬쩍 고개를 들고 사건에 대한 논의를 이어나갔다. 솔직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뻔뻔하다는 단어만이 생각났다. 대체 뭘 잘했다고 자기가 상전인 것처럼 군단 말이지?

 

"네가 2시간 동안 후루미나미를 감시한 건 내가 알아. 너와 교대했으니까. 후루미나미도 분명 야가미와 2시간을 보냈다는 걸 알고 있겠지." 토키와가 후루미나미를 쏘아보았다. 후루미나미는 여전히 후루미나미다운 표정을 지었다. 대체 저 표정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알지. 야가미는 나와 줄곧 함께 있었어. 간병인으로는 큰 재능을 가지고 있더군. 아니면 간수일까? 빈틈없이 나를 지켜봤어. 이게 내 증언이야. 똑바로 기억해 둬."

 

후루미나미의 증언을 기억했다.

 

"시체가 네 방에 있단 말이지? 하필 네 방에? 물론 네가 저지른 일은 아니고, 네가 한 일도 아니야. 너는 줄곧 숙소 안에 있었는데 왜인지 모르게 시체가 들어 있었다?"

"시간은… 오후 11시쯤 되겠군요. 저는 토키와 씨와 교대로 후루미나미 씨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토키와 씨와 교대하고 숙소에서 잠을 자려는데. 몸을 씻기 위해 욕실을 열었더니 목이 잘린 칸나즈키 씨가 있었습니다."

"오후 11시? 지금은 몇 시인데?"

아. 다이얼로그 켜면 되겠구나. 싶어 다이얼로그를 꺼냈으나. 몇 시 몇 분인지가 적혀 있어야 할 화면에는 ?? ??라는 글자만이 떠 있었다.

"뭐야. 이거 왜 이래? 너희도 이러냐? 다이얼로그 멀쩡한 사람?"

"너 다이얼로그 망가졌어? 왜? 일단 지금은… 12시 11분인데."

이바라가 내게 자신의 다이얼로그 화면을 보여주었다. 아니 미친 내 다이얼로그가! 통화 기능이 맛가더니 이제는 시간도 안 알려주다니. 나는 고물단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게 되었다.

"…영안로에 들어가면 그렇게 되는지도 모르겠군요. 영안로와 밖은 시간이 다르게 흐르니까요. 일단 탑의 표준시는 12시 11분입니다. 저는 영안로와 탑 사이의 간극이 사라진 후에 들어가서, 다이얼로그가 고장 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탑의 표준시…? 너희는 시간이 똑같은 거지?"

이바라와 야가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것이 사소하기는커녕 굉장히 큰 발견임을 알 수 있었다.

"시간차가 사라지기 전 영안로 들어간 놈만 이렇게 된다면, 칸나즈키 목을 잘라서 영안로에 가져다 둔 놈은 무조건 다이얼로그 시간이 망가져 있다는 거 아니야? 이거로 가려내면 되겠는데…?"

탑의 표준시와 다이얼로그를 기억했다.

"내 다이얼로그 여기에 있어."

"내 것도 가져가 봐!"

토키와가 후루미나미의 다이얼로그까지 꺼내. 다이얼로그 두 개의 화면을 보여주었다. 둘의 화면은 표준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의 오차도 오류도 없었다. 망할.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네 싶어 혀를 차자 야가미가 중얼거렸다.

"나쁘지는 않은 발상이군요. 허점이 있기는 하지만…"


야가미는 그렇게 말하며 후루미나미가 묶인 의자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등 뒤로 묶인 후루미나미의 팔에서 무언가를 풀어주는 듯했다. 내가 없는 사이에 후루미나미를 생각하는 의자에 앉혀 놨군. 욕창 안 생겼으려나?

 

"그거. 굳이 풀어야 해? 그냥 토키와랑 우리만 가면 안 되는 거야?"

 

"이바라 씨. 이렇게 혼자 내버려 두면 살인자가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위험인물이니 배제하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될지라도. 죽을 가능성을 감수시킬 필요는 없죠."

 

"신사다운 놈. 재미없어." 후루미나미가 투덜거렸다.

 

"조용히 좀 하시고요. 네이 매듭은 저와 토키와 씨만이 풀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저희 두 사람밖에 어떻게 푸는지 몰라요. 애초에 이 방에 들어오는 것 또한 철저히 통제되었습니다. 오직 토키와 씨와 저만이 열쇠를 주고받았어요."

 

"어어어. 야. 정보가 갑자기 너무 많이 온다. 어… 일단 네 말의 요지는 너와 토키와 말고야 후루미나미 방에 접근할 수 없다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 증언하는 편이 적절할 테니까요."

 

후루미나미의 방에 접근할 수 있었던 두 명을 기억했다.

 

"그래서. 야가미. 시신을 발견한 것은 언제지?" 토키와가 물었다.

 

"오후 11시 20분경입니다. 우왕좌왕한 시간이 있어서 정확히는 모르겠군요." 야가미는 무던히 후루미나미의 손목에 묶인 매듭을 풀고 있었다. 얇은 끈으로 지어진 복잡한 매듭인 듯. 푸는 게 오래 걸렸다.

 

"아아아. 아파. 야가미! 좀 살살 풀어 봐!" 후루미나미가 비명을 질렀다.

"아프게 풀고 싶어도 아플 수가 없는 매듭입니다. 조용히 있으세요."

 

"그럼 왜 이제야 나타났지? 너는 후루미나미와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잖아. 그것을 발견했다면 나에게 전화를 걸면 되는 일이었어. 다이얼로그의 통신 두절은 시체가 발견된 후에야 벌어진 일이니까."

 

토키와의 말에도 야가미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야가미는 태연하게 입을 열어 질문에 대답했다.

 

"믿을 사람이 없고, 시체가 있으니까 다들 제 방으로 오세요! 라 해봤자 의심을 살 게 뻔하니까요. 또 누가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을지 추리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증거인멸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고요."

 

"증거인멸을?! 왜?!" 이바라가 소리쳤다.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토키와 씨. 당신이 막 몸을 씻고 잠에 들려는데 목이 잘린 시체가 욕조 안에 들어 있으면.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닌데 의심을 받을 게 분명하니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냐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보편적인 사고입니다."

 

일리는 있었으나… 나는 우선 그 말을 기억해 두었다. 시체 발견 후 다른 사람과 접촉하기까지의 시간을.

 

"사실 야가미 이 놈이 시체를 언제 찾았는지보다 중요한 게 있어. 너희 중 칸나즈키의 시체 미리 발견한 사람?"

 

나는 말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도리도리 돌아가는 고개만을 봤다.

 

"너희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까 카나리를 만났어. 영안로에서 나왔는데 카나리도 영안로에서 나온 직후더라고. 그리고 캐롤의 영안로 안에 뻗어버린 제츠보와 칸나즈키의 목이 있었지. 카나리가 세 번째 발견자인 거야. 시체 발견 방송은 딱 그때 시점에 나왔어. 그러니까 야가미가 두 번째 발견자라고 치면, 첫 번째 발견자가 있는 거야."

 

왜인진 몰라도 그놈은 자기가 발견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고. 나는 덧붙이지 않았지만 그 내용만큼은 모두가 이해했을 것 같았다.

 

"간과하고 계신 점이 있습니다. 세 명이 발견을 했다는 것은 모노로그의 기준에 따라 오락가락하지요. 범인이 목격자에 포함이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게다가 아주 작은 시체조각을 들키지 않게 어디엔가 배치해 놓았다면, 이 중 누군가가 시체를 보고도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할 확률이 있습니다. 그렇죠?"

"와. 역시 경력직은…"

 

나는 감탄했다가 지레 입을 틀어막았다. 이놈 혹시 눈 돌아가서. 나 죽이려 드는 거 아니야? 싶었기 때문이다. 야가미는 그 기색마저도 읽은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가 한숨을 쉬었다.

 

"카나리 씨가 그곳에 있었는지에 대한 것은 학급재판에서 교차검증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지금 당장 가도 되는 거 아니야? 찾아서 추궁해야지! 그놈도 나름대로 조사하는 시늉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야. 이대로 가면 자기만 뭔가 뒤집어쓸 게 분명한데!"

 

토키와와 후루미나미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사실. 후루미나미는 살인자와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던지라 그녀의 말에 따르고 싶은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곧 토키와의 의견에 따랐다.

 

"그럼 진입합시다. 다시금 말씀드리자면. 제 숙소의 욕조 안에 시신이 있습니다."

 

야가미는 숙소의 열쇠를 꺼냈다. 이바라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신의 이마에 댄 손을 도무지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 씨. 나 당 떨어지는데. 잠깐 가는 길에 내 전용실 들러서 음료수라도 좀 먹으면 안 돼?"

"그럴 시간 없어. 이바라. 힘들어도 지금은 이 일에 집중해야 해."

이바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심 이바라를 이해했다. 이바라는 앞으로 마주하게 될 시체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듯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머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깜짝 놀랐는데 몸을 보라고? 미친…

그래도 해야지 어쩌겠어. 나는 그런 식으로 마음을 굳혔다. 히무로가 나에게 맡긴 이상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 자리였다.

 

"드디어. 시체를 보는구나! 이번에는 어떤 몰골일지 기대가 돼! 얼마나 정교하게 짜였을까? 범인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리고 왜 사람을 죽인 걸까. 그 증거의 총집합을 우리는 보게 될 거야. 신난다! 철저히 해석해 주겠어. 철저히!"

 

후루미나미가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올랐다. 나는 후루미나미를 보며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아마 다들 마음속으로는 그랬을 것이다.

 

"그럼… 가시죠."

 

야가미는 문을 열었다. 그렇게 된 이상 돌이킬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야가미를 따라 가장 먼저 발을 디뎠다. 히무로의 말마따나 내가 정말 본인도 인식하지 못하지만 충분한 지성을 갖추고 있다면야. 그게 일을 제대로 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동안 우리는 또다시 영안로를 걸었다. 나는 정보의 괴리로 인한 인격의 분리를 더 이상 경험하지 않았다. 살인이 벌어졌는데도 나가지 않은 이유는 나의 할 일이 여전했기 때문이다. 또 탑에 돌아가는 일이 영안로를 나아가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이란 보장이 없었다.

 

탑의 살인 게임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이 명제 하나만으로 탑에서 할 수많은 일은 가치를 잃어버렸다. 사실 거의 모든 일이. 마유즈미와 내가 카텟을 이루지 않았고 그녀가 심지 굳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평범한 이의 감수성으로 그 정보를 온전히 이해했다간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만한 정보였다.

 

그야 나아가봤자 살인 게임은 또 반복될 터이고 탑에서 탈출한 방법도 없다면야. 모든 것은 의미를 잃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야가미 토가가 미도리카와 아쿠토를 살해한 것. 중요하지 않다. 다음 루프가 시작되면 둘은 재결합을 할지도 모르지. 또 서로 죽일 수도 있고. 모리 레이코가 나이토 유즈루를 살해한 것. 중요하지 않다. 다음 루프에서는 입장이 반대가 될지 모른다.

 

이것은 모든 것이 덧없다는 값싼 허무주의보다 더한 것이었다. 다 헛짓이라는 불평은 누구나 진심을 다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도덕. 의미. 규범이 사라졌다는 허무야말로 그보다 더할 수 없는 수동적 염세였다.

 

"그래서… 왜 캐롤 씨가 부활해서는 안 되는 거야? 이제 들을 수 있어?"

"…아직 기억이 모호하긴 하지만, 그저 정신조작을 극도로 경계하는 일을 경계한 것 같아. 그렇게 강한 터치를 가진 개인은 드물어. 이름 없는 남자는 캐롤 브라이트에게 영향을 받을 테니. 그도 정신조작을 발현할지 모르고. 그걸 막기 위해 가는 거야. 그녀는 순수한 힘인데. 모노로그가 정상적으로 그 강대한 힘을 풀어준다는 보장도 없어. 위험한 일이야."

 

"그럼 나도 같이 막아 줄게."

 

"정말이야?"

 

나는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 질문은 내 마음에서 툭 튀어나왔다. 그러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마유즈미는 숭고함과 똑바로 바라보는 일. 의지를 고평가 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끊임없는 반복 앞에서도 유효한가는 다른 문제였다.

 

"응… 그리고 너는 아마 나한테 묻겠지? 왜 다 의미 없는데도 나를 따라오냐고. 어차피 이번 살인 게임이 끝나면 다시 새로운 살인 게임이 시작될 텐데… 사실상 그럴 필요가 없는데 왜 위험을 감수하냐고. 그 질문에 대답을 하자면…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이게 어차피 다 사라질 백일몽일지라도 나는 살아있어."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는 뜻이야?"

 

"어… 네 말이 좀 추상적이긴 한데. 그래도 우리가 같은 이야기 하고 있긴 한 것 같다. 그치? 게다가 정말 우리가 사라져 버릴 거라면. 그렇기에 지금의 우리가 더 소중한 거 아니야? 다 손 놓아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걸."

 

"그래. 맞아. 너무도 아깝지… 너무 아까워. 이렇게 많이 해냈는데. 아무것도 남길 수가 없다니."

 

"그건 밖이나 탑이나 똑같아. 공수래공수거라는 말 알아?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간다. 결국 끝은 정해져 있어. 이 좋은 순간도 영원하지 않고. 그 끝에 우리는 모든 걸 망각하게 돼. 그건 둘 다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밖에서도 계속 살아왔잖아. 언젠가 종말이 온다는 걸 알고도 화단을 가꿨어. 모든 사람들은 그래서… 마음속 어딘가에 단단한 숭고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자기 일에 종사하는 것. 할 일을 다하는 것. 그 모든 일이 투쟁이야.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그녀를 보며 놀라움을 느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가 있지? 끝없는 반복. 모든 걸 무의미하게 만드는 명제마저 '그럼에도' 라 외치며 긍정한다니. 그런 사람은 누구와도 달랐다.

 

"그런 자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마유즈미. 누구도 파멸을 바라보고 살지 않아. 희망만을 보지. 그렇기에 죽음의 맨얼굴을 마주칠 때 사람들은 버티지 못하는 거야. 만약 그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위버멘쉬겠지…"

 

나는 전혀 그런 자가 아니었다. 마유즈미는 절대적인 루프의 무의미성에서 의미를 건져낸 반면 나는 다른 의미를 찾아 나섰으니. 나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직시하지 않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너를 이해할 수 없어. 나는 모르겠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어… 나는 이미 있는 표본 수백 개를 종합하는 사람이지 완모식(完糢式)을 찾아내는 사람이 아니야. 그래서 도무지 모르겠어…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는지를…"

 

"너도 겁이 없잖아. 히무로. 나는 다 너한테서 배운 건데? 나 엄청 겁쟁이였어. 기억 안 나? 격투가라면서 막 허공에 주먹도 휘둘렀는데?"

 

마유즈미는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려는 듯이 주먹을 붕붕 휘둘렀다.

 

"그렇다면 네가 나를 넘어선 거지. 나는… 두려워. 이렇게 두려웠던 적이 없어.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거야. 무엇도 구할 수 없어. 어떻게 탈출할지도 모르고, 살인 게임의 목적마저 몰라…"

 

내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감정에 휘둘릴 때의 느낌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내가 더없이 미약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사격 솜씨와 무심함으로는 어찌하지 못할 고난 앞에서. 서서히 내 에고가 무너져갔다.

 

탑이 너무 높다. 그 사실에 내가 전율한 이유는 탑의 높이가 반복의 횟수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 번을 넘게 죽고 죽여왔다. 천 번 동안 살인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천 번 중에 하나일 뿐이니까. 이번 루프가 끝나면 또 다음 백 번 오백 번 천 번이 있다…

 

그중 몇 번이나 나는 카텟을 이룰 것인가. 여기까지 몇 번이나 올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데… 불가능하리라 생각되었던 것을 이루었는데…

 

"어떡하지… 마유즈미…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잊고 싶지 않아…"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다시 시작해서 더 잘할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된 것은 기적이다. 나 따위의 사람이 카텟을 이루는 일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미래로 나아가고 싶지 않다는 회피주의고 외면이었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것이 이별로 나아감이었다.

 

초인 실격이다.

 

심연을 바라보아야 하는 나는, 눈을 감았다.

 

탑의 루프 어딘가에서 나는 다른 이의 영안로에 왔다. 어딘가에서는 마유즈미가 첫 번째로 죽었다. 어딘가에서는 내가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면. 죽는 것마저 의미를 잃는다.

 

어쩌면 좋을지 나는 조금도 몰랐다. 통제권을 잃었다. 처음으로 나는 다른 이에게 타륜을 넘겼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네가 내 방에 찾아오지 못하면,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지? 너를 속이고, 정신 빠진 모험을 하고, 너를 속인 뒤 화해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겠지. 나는 이 일들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전부 인간적인 감정이고 미련이었다. 내가 버려둬야 했던 것들. 버렸던 것을 급하게 줍자 그것은 내게 약점을 심었다. 그래서 모든 감시자 후보들은 사사로운 감정에서 멀어져야만 했다. 그래야만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재단은 생각했던 모양이다.

 

"모르겠어. 마유즈미… 모르겠어… 왜 네가 사과나무를 심는지…"

 

"…너도 모르는 게 있구나. 히무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유즈미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내가 사과를 먹고 싶었기에 그렇게 한 거야. 히무로. 만약 세상이 멀쩡할 때. 아무 문제 없이 내일 아침해를 볼 수 있는 행운이 이어졌을 때. 사과를 베어 먹으면 참 좋을 테니까. 내일이 없을 거라며 아무것도 심지 않았다간 해가 떠오를 때 배를 곯게 될 걸"

 

단지 행운을 바라라는 것인가? 하기야 손을 놓아 버리는 건 대몰락 시대에 폭도에 투신한 이들과 똑같은 짓이지

 

"그거면 되는 걸까…"

 

"그럼!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야지. 다른 방법이 있겠어. 히무로? 일하지 않으면 먹을 자격 없다는 속담도 있잖아. 그러니까… 기운 내. 내가 도와줄게. 히. 내가 너한테 도움을 주는 날도 다 온다. 별일이야."

 

"너는 늘 나에게 도움을 줘 왔어. 여태까지 줄곧 그랬고. 지금도 그래…"

 

마유즈미는 내 어깨를 붙잡고 힘을 꽉 주었다. 그 조막만 한 손에서 흘러나오는 힘이 내 몸에 동력을 불어넣는 듯했다. 그럼에도 내가 움직이지 않자 마유즈미는 다시금 내 귀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아무 효과도 없었지만 그녀의 노력이 가상해. 나는 굼뜬 소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자. 나나시랑 얘기하러 가자! 그래. 가자!"

 

마유즈미는 그렇게 말하며 내 셔츠를 찢은 끈을 말아 귀에 넣었다. 제대로 소리가 차단되었는지 자신의 양쪽 귀에 대고 손뼉을 짝짝 친 마유즈미는, 곧 잘 되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하라고 했었잖아. 아아. 들려? 아. 너는 들리지?"

 

나는 대답하지 않고 끈을 귀에 쑤셔 넣었다. 여전히 마유즈미는 이름 없는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제압하는 일 말고 다른 방식은 생각해두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것이라면 귀에 천을 쑤셔 넣는 것이 모순이었다.

 

마유즈미는 귀에서 천을 빼서 대화하는 방식을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것은 잘못되었다. 마유즈미가 천을 빼려 하면 내가 저지할 것이고 나는 천을 뺄 생각이 없었다. 내 안에서 이름 없는 남자는 이미 위험인물이었다. 미도리카와에게 터치를 썼을 때 탑의 전등이 깜빡이고 전구는 터져버렸지. 외부 구조물에 그 정도의 영향을 미친 샤이닝을 이어받은 자가. 그 장본인을 되살린다니.

 

아무리 마유즈미의 은인일지언정 캐롤 브라이트는 너무 위험했다. 그리고 이름 없는 남자도 그만큼 위험할지 몰랐다. 내 의무적인 감시 행동은 내게 그런 코드를 주었다. 절대 그것을 내버려 두지 말라고.

 

"혹시 케프가 아직도 이어져 있나?"

 

나는 입을 열지 않고 정신으로 대화를 시도해 보았으나, 케프는 이전만큼 또렷하게 이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의도를 숨기고 있어 샤이닝의 연결이 불안정해졌기 때문일지 몰랐다. 둘의 의도가 상반되었으니 카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귀를 틀어막은 채 침묵 속에서 아주 조금 더 걸어갔을 때. 우리는 주목할 만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나와 마유즈미 앞에는 교량이 있었다. 철도가 깔리고 핸드카가 오고 가는 광산 안에나 있을법한 것. 나무판자와 철길이 있는 것. 그러나 어두운 동굴 그리고 그보다 더 어두운 낭떠러지 위에 놓인 그것은 극도로 불안정하며 또 녹슬어 보였다. 누군가가 그 위에서 걸을 수 있으리라는 상상조차 들지 않았다.

 

희미하게 고량을 떠받치는 교각들이 보였지만 그것마저도 오래되어 보였다. 그리고 그 교량 너머. 낭떠러지의 반대편에는 빛이 있었다. 어두운 동굴 속을 얼마나 거닐었는지 그 빛은 암순응된 동공을 심하게 찔러왔다. 그곳으로 갈 유일한 방법은 심하게 닳아빠지고 녹슬어 두드리면 부서져버릴 것만 같은 철골 구조물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규칙적이고 또 구슬픈 삐걱임으로 흐느끼는 것을 들었다.

 

끼익. 끼이익. 그 위로 가는 것이 바보짓이라 말하는 듯한 소음. 그것이 침묵 사이를 찢고 울려퍼졌다. 그 소음이란 실제로 누군가가 그 바보짓을 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규칙적인 그 소음은 발걸음을 통해 만들어졌을 테니.

 

끼익. 끼이익. 끼익. 끼이익.

 

'저기에… 나나시가 있어.' 마유즈미의 입모양을 보고 나는 그녀의 말을 추측했다.

 

"그렇게 보이네."

 

나와 마유즈미는 자연스레 깨달았다. 영안로의 모험도 이제 곧 끝난다. 이 구조물이 마지막 시험이 되리라. 이 교량을 이름 없는 남자가 어디까지 건넜을지 몰라도. 그만 저지한다면 이 여정에도 끝이 올 터였다. 우리는 서로의 두 손으로 총을 잡은 채. 밟기만 해도 불길한 비명을 지르는 침목에 동시에 발을 디뎠다.

 

나는 그녀의 손을 보고 있다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 귀를 가리킨 뒤 귀마개를 제거해 너도 그렇게 해 달라는 표현을 보이자. 마유즈미는 조심스럽게 한쪽 귀마개를 뺐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총 말고 실타래에 손을 올려. 마유즈미. 여기서 그걸 놓치기라도 하면 끝장이야. 총띠 사이에 실타래를 끼우는 건 불안정해."

 

"이 총을 한 손으로 쏘라고? 차라리 야생마 다리를 손아귀로 잡으라고 말하는 편이 나아."

 

"그러지 않을 거라면 나에게 줘. 마유즈미. 네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네 이름을 부를 테니까."

 

"그럼 옆에서 도마뱀 같은 게 살짝만 움직여도 너는 날 탑으로 돌려보낼걸? 됐네요!"

 

마유즈미는 쾌활하게 소리치며 내게 혀를 내밀었다. 곧 그녀의 귀는 내 셔츠 조각으로 꽉 틀어 막혔다. 그렇게 유쾌한 태도를 더없이 불안한 구조물 앞에서 보여주는 것은. 자신은 겁먹지 않았고 겁먹을 필요 또한 없다는 그녀 나름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나와 마유즈미가 교량에 발을 내디뎠을 때. 그것은 한 번 찢어지는 비명을 내며 마유즈미의 몸을 잠시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제 끝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야가미의 숙소에서 가장 먼저 느낀 건 피비린내가 아닌 커피 내음이었지만, 곧 커피 내음은 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 후각 신호를 처리하기에는 머리에 다른 급한 일이 너무 많았고. 또 후각은 쉽게 피로해지는 감각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방에 왔을 때는 이미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킬로그의 내용은 여기에 있습니다. 읽으시죠."

 

피해자: 초고교급 무당. 칸나즈키 시노부.

 

시체가 발견된 곳은 야가미 토가의 숙소 안 욕실의 욕조.

 

피해자의 전신에 피가 묻어 있음. 목은 통째로 잘려 있음. 머리는 보이지 않음. 대량의 출혈이 발생함.

 

사망 추정시각은 오후 7시경.

 

"읽기만 해도 끔찍한데?" 내가 말했다.

 

"그래도 제대로 보셔야 할 겁니다."

 

야가미가 욕실 문을 잠깐 열었다가 다시금 닫았다. 사건 현장에 익숙해지라는 야가미 나름대로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찰나의 시간 동안 내가 사건 현장을 보고 가장 먼저 느낀 인상은 검정이 누구든 제정신이 아니리라는 것이었다. 잘린 뼈와 식도의 단면… 제길

 

"미장센이 굉장히 유려한데. 과격한 연출과 미니멀리즘. 은근한 키치함. 이건 다다이즘에 대한 찬사일까? 일단 기존 가치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쉽게 읽을 수 있지… 다음 것들은 더 수사할 필요가 있겠지만."

 

미친년… 미친년… 후루미나미는 목이 잘린 칸나즈키를. 원래 빨간 치마가 아니라 흰 상의마저 핏빛으로 물든, 욕조에 들어간 칸나즈키를 잠시 본 것만으로 아주 황홀감에 젖은 듯했다. 이런 사람을 히무로한테 비교했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미안함마저 느꼈다. 우리가 소중하다며 갭까지 막 보여주던 놈이 이딴 싸이코랑 동급이라니. 나도 색안경을 두껍게도 써온 모양이었다.

 

"그래서… 왜 칸나즈키의 시체가 네 방에 있는 걸까…" 이바라가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야가미의 방에 시체를 둔다고 해서 누가 이득을 볼 수 있지?" 토키와가 물었다. 그것은 누가 칸나즈키를 죽였냐는 질문과 같았다. 그리고 나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야가미를 싫어할 만한 입장. 잔인함. 정신 나간 발상. 애초에 탑의 모든 사람들을 적대하고 있는 데다가 이미 살인에 한 번 일조해 봐서 또 다른 살인을 해도 별반 이상할 게 없는 사람… 미도리카와의 시련 수행 중에서도 야가미한테 적대적이었던 데다가. 해변에서 사람 죽이려고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나 알았다… 진짜 알았다! 카이다야! 이런 짓이 가능한 사람이 또 누구 있겠냐고. 애초에 이럴 짓을 할 만한 사람도 얼마 없어. 카이다. 야가미. 후루미나미인데 후루미나미는 계속 감시당하고 있었다며. 야가미 아니면 카이다지. 경력직이 잘하는 거라고."

"…그런 식으로 이 살인에 접근하지 마세요. 하기와라 씨. 사람의 머리를 자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실. 사람을 토막 내는 일은 꼭 광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그럴 상황이 주어지기만 한다면 당신도, 또 당신도 사람을 자를 겁니다."

야가미가 나와 이바라를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사실. 너무 전형적인 살인자의 변론이라서 나는 느껴서는 안 될 익살마저 느꼈다. 보통 사람들은 사람을 자를 만한 상황에 주어지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그러면. 너는 그럴 상황이 와서 미도리카와 목을 잘랐다. 그거냐?"

"…그 이야기는 하지 않도록 합시다. 그리고 목을 자른 건 카이다 씨였어요.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카이다 씨는 분을 풀어야겠다며 목에 상처를 내었죠. 애초에 이건 중요하지 않고… 제가 짚은 것은 상황이 왔을 때 누구나 살인을 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시체를 숨기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그거 아니냐고." 이바라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살인을 하기 전과 한 이후가 어떻게 그게 그겁니까? 좀 들어 보시죠… 일단 살인은 중죄입니다. 밖에서도 마찬가지였죠. 살인을 하는 순간. 그 사람의 사회적 인식과 신분은 나락행입니다. 떼어낼 수 없는 기록이 남죠. 감옥에 들어가거나 심할 경우 사형을 당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 살인을 저지른 사람의 일 순위 목표는 그것을 들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살인자들이 들키지 않기 위한 시체 유기까지 계획에 놓을까요?"

"아니겠지… 우발적인 살인도 있을 테니까." 토키와가 대답했다.

"원래 살인은 대다수가 우발적인 겁니다. 계획범죄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어요. 그리고 여기. 평소에는 보통 범주의 감수성을 가진 보통의 사람이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였다고 봅시다. 이 살인 직전의 사람과 살인 직후의 사람은, 거의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왜 내가 이런 짓을?' 이라는 생각마저 하게 되죠. 타자화되어. 자기 자신에게 살인의 동기를 묻는 것입니다."

"그래. 일상 살던 사람이 비일상으로 넘어갔다. 완전 우리 꼴이랑 똑같네 그려. 그래서?"

"어떻게든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사람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봉인해서 다시는 꺼내지 않을 수 있도록. 숨길 수 있게끔 사람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인격이나 자질만으로 이런 짓은 누구에게 불가능하니 운운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빈정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논리 정연한대다 반론의 여지도 없고. 사실인 이상 반론할 필요도 없으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성품으로 따질 거면 모리도 나이토를 죽일 의도는 없었다.

"그래… 좋아. 사고의 폭을 넓게 가지자고. 누구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해했어. 하지만 여전히 카이다가 제일 수상한 걸 어쩌나? 걔는 영안로에서 오래 전에 리타이어했어. 아마 지금도 이 탑에 있을 걸."

"뭐? 카이다가 영안로 밖으로 나왔다고?" 이바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정황상 나나시가 카이다와 따로 가고 있었거든. 오직 히무로만이 나나시를 발견해서 확실하진 않지만… 나나시가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카이다를 제친 것 같아. 카이다가 우리보다 늦게 오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긴 한데… 일단 카이다가 낙오됐다고 치면. 그냥 탑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던 거 아니야? 나나시를 납치한 목적이 뭔지는 모르니까 섣불리는 말 못 하겠지만."

"일리가 있긴 하군요… 저희 모두 카이다 씨가 돌아올 가능성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카이다 씨가 제츠보 씨를 제압해서 멈춰 놓았던 걸까요? 그렇다기엔 제츠보 씨가 훨씬 강하지 않습니까?"

"…아닐지도 몰라. 제츠보가 터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옆에서 봤을 때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어. 뭐랄까… 더 약해졌다고 해야 하나. 예전처럼 괴력을 내긴 하지만… 조금 예전 같지 않은 느낌이었어."

"퇴물이라고?"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고! 예전에는 정말 목표를 정했다 싶으면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줬잖아. 그런데 그런 인상을 별반 못 받았어. 얼굴이 생겨서 착각한 건가…?"


"힘쓰는 장면을 보여주신 적이 없으니 모르겠군요. 영안로에서 형태가 변한 제츠보 씨가 약화되었다는 가설은… 일단 묻어 두지요. 애초에 제츠보 씨의 행동을 막으려면 제츠보 씨보다 강한 힘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멈출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죠."

그래. 제츠보는 사람이 아니다. 제츠보 본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화내겠지만, 사실만을 말하고자 한다면… 제츠보의 몸은 사람과 달리 작용하기에. 아킬레스건을 잘라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도, 기절시킬 수도, 수면제를 먹이거나 마비시킬 수도 없다. 제츠보를 막을 방법이란 이론상 제츠보의 몸을 부수는 것과… 곧잘 등장해 온 플라잉 로봇의 방해 전파가 있겠다.

플라잉 로봇…

"후루미나미의 플라잉 로봇은 부서졌잖아. 그걸 고칠 수 있는 사람도 없을 테고. 후루미나미는 계속 감시당하고 있었으니… 남은 사람은 카나리야. 이바라. 내가 아까 말했지? 카나리가 영안로에서 밖으로 나가 도망치는 걸 봤다고. 그때는 왜 걔가 거기 있었는지 몰랐는데… 제츠보에게 방해 전파를 쏜 사람은 카나리야. 분명 그럴 거야."

"뭐? 그렇지만 제츠보가 사라진 지는 꽤 됐어! 그럼 그 전의 실종은 어떻게 설명해?"

"그동안 계속 얼어붙어 있었던 거지. 뭐…"

나는 제츠보를 억류한 플라잉 로봇을 기억했다.

"그렇지만 카나리 씨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물론 둘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카나리 씨가 제츠보 씨를 계속 가둬둘 만한 구실은 없잖습니까. 제츠보 씨가 카나리 씨를 견제하려 애쓸 구실은 있어도요. 저라면. 저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가진 자는 곱게 보지 않을 겁니다. 적대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자라면 더욱 그렇고요."

"내가 카나리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카나리도 영안로에서 심상치 않은 걸 봤을 수도 있겠는걸… 아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당장 알 수 없는 걸 화두에 올려봤자 죽도 밥도 안 되잖아."

"그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하죠. 자. 문을 다시 열겠습니다.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순간 구역질이 속에서 치솟아올라 목젖을 때렸다. 미친. 스모어가 올라오잖아. 나는 식겁하며 그것들을 꿀꺽 삼켜 밑으로 내려보냈다. 그러나 토를 하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다 게워내고 비위가 상할 대로 상하면, 토하지 않으려 애쓰느라 정신의 어느 일면을 계속 쓰는 꼴도 면할 수 있었을 테니까.

"아직 힘드신 것 같군요. 하기와라 씨."

"힘들긴 개뿔이. 후딱 끝내고 범인이나 잡자… 나는 괜찮아. 후. 후… 알겠어. 알겠다고…"

나는 복서가 시합에 나가기 전에 하는 것처럼 제자리에서 콩콩 뛰며 숨을 내쉬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버틸 도리가 없었는데… 그에 반하여. 이바라는 서슴없이 시체에 다가갔다. 제길. 폐급 동료 중 하나가 쓸모 있어져 버리면 나는 이제 어떡하라고. 그런 생각도 조금은 들었던 것 같다. 후루미나미는 오히려 시체에 더 다가가지 못해 안달을 냈고, 그나마 뒤에 빠져있는 사람은 나와 토키와뿐이었다.

"특이사항이 보이시나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찾아내기가 어렵군요. 검시에 대한 지식은 없어서요. 염습도 해본 적이 없고요."

"왜 옷에 피가 이렇게 많이 묻어 있지? 아예 푹 잠겼잖아." 이바라가 가장 먼저 짚은 것은 그것이었다.

"언뜻 보면 단지 욕조에 들어간 채로 피를 흘렸으니까… 라 할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하기엔 조금 석연치가 않군요."

 

"오케이. 오케이… 후. 갑시다. 가자…"

 

"공포의 근원을 똑바로 바라보아라. 그것 말고 네게 주어진 길은 없다."

그놈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나는 조금씩 시체를 직시했다. 목이 잘린 단면은 웬 고기라도 썰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다만 피가 흘러넘치는 고기였다. 도무지 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고어한 영화도 제대로 못 보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나는 천천히 발을 디뎠다…일단. 도망치지는않았다.

"…보이는 외상이 잘린 목뿐이잖아. 아직 옷을 안 벗겨봐서 자세한 상처는 못 봤지만. 일단 아무리 선제적인 외상이 있었어도 저렇게 흰 옷이 빨간색으로 물들 때까지 피가 나지는 않을 거야. 온몸을 찌른 것도 아니고 저걸 어떻게 해?"

 

나는 피로 흠뻑 젖은 옷을 기억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 옷이 젖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피를 분수로 뿌리기라도 한 걸까요?"


"욕조는 피를 담을 수 있는 물체지… 배수구가 있으니 피가 빠지기도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그렇죠."

"그럼 아무리 상처가 커서 무녀복이 다 젖을만치 넘친다고 해도, 앞까지 이렇게 새빨갛게 젖을 순 없어. 배수구를 한 번 막았다가 옷을 적신 다음에 마개를 뺐을 수도 있긴 하지만, 왜 그래야 했는지 이유가 없잖아. 물론 여기에 숨겨놓은 게 그냥 야가미 침대에 홱 던져두는 것보다는 누명을 씌우기 좋기 때문일 수도 있어. 애초에. 목이 잘린 것 말고 다른 상처가 있긴 한 거야?"

 

"내가 한 번 살펴볼 테니까… 후루미나미만 남고 잠깐 너희 셋 나가 있어 봐."

 

이바라는 그렇게 말했다. 칸나즈키의 시체를 바라보느라 다른 이들 쪽은 보고 있지도 않았다. 이바라는 허리에 매고 있던 자신의 자켓 주머니에서 딱 맞아 보이는 고무장갑을 하나 꺼내더니 쫙 소리가 나게 착용했다.

 

"…셋이라니. 이바라? 남자는 둘 밖에 없어."

 

"무슨 소리야. 너랑 야가미랑 토키와 해서…"

 

토키와는 화장실 문틀에 몸을 기댄 채 멀뚱멀뚱 서 있었다. 사실. 나는 언제부터 그놈이 그러고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설마 우리가 짱구 굴리는 동안 계속 뒤에서 구경만 한 건 아니겠지? 쫄보라서?

 

"너… 너는 대체…" 이바라의 눈이 잔뜩 커지고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졌을 때. 나는 도망치듯이 야가미의 팔을 붙잡고 욕실 밖으로 향했다. 그러자 야가미는 별 저항도 없이 내 판에 이끌려 걸어 나왔다. 이바라가 뻥 터지기 일보직전이라는 걸 야가미 또한 눈치챈 듯 보였다.

 

"그래. 도망쳐라! 칸나즈키 알몸은 우리가 독차지해 주마!" 후루미나미는 우리를 비웃으며 외쳤다. 곧 욕실 문이 꽝 하고 닫히자. 우리들은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하는 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군요. 여성의 알몸을 본다는 시선으로 접근할 게 아니라.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저희는 어떤 험한 꼴도 불사해야만 했습니다. 안에서 증거 조작이라도 벌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후루미나미는 남이 증거 조작 하려고 들면 그거 초 치려고 난리를 피울 것 같은데. 후루미나미가 증거 조작을 하려 하면 이바라가 난리를 피울 거고."

 

"그런 개개인의 패턴을 믿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하기와라 씨. 후루미나미 씨는 탈출 장치에 노출되었고 저희가 모르는 것까지 압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변하기 마련이에요. 당신이 알던 사람이 그 사람 그대로일 거라 생각했다간. 언젠가 이용을 당하고 말 겁니다."

 

"얘가 아까부터 훈수나 두고 있네. 토키와. 너는 뭐 알아낸 거 없어? 심장 약하거나 피 못 봐서 혼자 놀고 있는 거면. 나도 그렇게까지 잘 보는 타입이 아니라는 것만 말해주고 싶네. 나 아까 무슨 올림픽 선수처럼 자기 암시까지 했거든? 수사하려고."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뭐라도 하겠지 싶어서 나는 그 이상으로 참견하지는 않기로 했다. 대답은 없었지만 어련히 알아들었을 게 분명했다. 칸나즈키의 전용실에 불까지 질렀다지만, 토키와잖아… 그 평범하고 착한 놈이 어디 가겠어? 영안로처럼 무슨 귀신이나 미친 기차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탑은 멀쩡했을 텐데.

 

"누군가가 피를 끼얹었을 수도 있다고 봐. 양호실에 수혈팩이 있었던 걸로 기억해. 그걸 쓰면 욕조에서 죽인 것처럼 눈속임을 할 수 있게 돼. 다른 곳에서 살해하고… 야가미의 욕조에 두는 거지."

 

"그게 옷에 묻은 피의 전말일 수도 있겠군요. 확실히."

 

야가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텀블러 안에 들어있는 액체를 홀짝였다. 풍기는 특유의 향기로 미루어 보아 커피겠거니 싶었다. 다시 보니 전용실에서 숙소로 옮겨온 것 같은 커피 머신도 숙소에 있었고.

 

"으윽." 야가미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텀블러에서 입을 뗐다. 그 모습에 풋 웃음이 터졌다. 아니. 블랙커피 즐겨 먹는 카리스마 넘치는 놈인 줄 알았는데. 커피 쓴맛에 아주 표정이 썩어가는구만?

 

"야가미. 그렇게 써?" 심지어는 뭔가 있는 것처럼 가오 잡던 토키와마저 너무 맛없어하는 거 아니냐며 어이없음을 표현했다.

 

"예. 너무… 쓴데요으윽…"

 

"그럴 거면 블랙을 왜 먹냐? 그냥 믹스커피나 먹지. 설탕 넣어서 달달하게…"

 

땡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텀블러가 바닥에 떨어졌고, 커피가 흩뿌려졌다. 야가미는 자신의 목을 붙잡고 무릎을 꿇었다. 눈은 터질 듯이 커져 있었다. 목구멍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특정한 말이 아니라. 그저 신음과 괴로움뿐이었다.

 

"컥… 커윽…!"

 

"…야가미?"

 

 

 

 

 










하기와라 우시오의 기억: 

 

제츠보의 실종 - 제츠보는 며칠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칸나즈키의 은둔 - 수호령을 회복한 이후에도 칸나즈키는 카나리의 식사 배급을 타 먹었다고 한다.

 

칸나즈키의 식사 배급 - 칸나즈키의 식사 배급은 카나리와의 조율을 통해. 서로만 아는 시간대에 이루어졌다.

 

푹 퍼진 제츠보 - 캐롤의 영안로 속에서 제츠보는 뻗어 있었다.

 

목이 잘린 칸나즈키 - 칸나즈키의 머리는 잘린 채로 캐롤의 영안로 속에서 발견되었다.

 

야가미의 증언 - 야가미는 칸나즈키의 몸의 행방을 알고 있는 듯이 말했다.


공백의 2시간 - 야가미와 토키와는 서로 번갈아가며 후루미나미를 감시했으나, 두 사람도 감시하지 않은 2시간이 존재한다.

이바라의 참여를 막은 토키와 - 토키와는 이바라가 감시역을 하겠다는데도 말렸다. 별다른 이유는 없겠지만

 

후루미나미와 야가미 사이의 불미스러운 일 -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가 있었다.

후루미나미의 증언 - 야가미가 자신을 줄곧 감시했다고 한다. 믿을 만한지는 모르겠다.

탑의 표준시와 다이얼로그 - 영안로에 들어갔다 나오면 다이얼로그의 시간 표시 부분에 오류가 생긴다. 이걸 통해 누가 영안로에 들어갔고 안 들어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후루미나미의 방에 접근할 수 있었던 두 명 - 야가미와 토키와만이 서로 열쇠를 공유하며 후루미나미의 방에 드나들 수 있었다.

시체 발견 후 다른 사람과 접촉하기까지의 시간 - 야가미는 오후 11시 20분에 시체를 발견해 놓고 질질 끌었다. 다른 이유가 있을까?

제츠보를 억류한 플라잉 로봇 - 제츠보는 힘만으로는 억누를 수 없는 존재인 만큼. 플라잉 로봇을 이용했을 정황이 크다.

피로 흠뻑 젖은 옷 - 칸나즈키의 옷은 전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야가미의 발작 - 야가미는 커피를 마시더니 느닷없이 고통을 호소했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