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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3

더 단크 타워 챕터 3 - 完

by 도타싫어! 2023. 10. 22.

 

결투는 끝났다. 논의도 끝났다. 오직 처형만이 남았다. 모노로그가 검정의 진위 여부를 공개하고 나면. 사람이 하나 구경거리가 되어 죽는다.

 

모노로그: 투표의 결과. 후루미나미 나몬이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검정으로 지목되었다. 이제 와서 번복할 수는 없으니 후회는 없기를 바라겠다. 자. 과연. 진범은 누구일까? 너희들은 추리 끝에 검정을 맞출 수 있었을까?

 

모노로그: 죽음인가 삶인가. 삶인가 죽음인가. 그 결과는

 

후루미나미 나몬의 얼굴 아이콘이 화면에 떠올랐다.

 

모노로그: 정답! 삼 연속 정답이다. 두 명이 죽은 데다가 세 명이 협력해 살인을 저지르다니. 복잡하고 꼬인 살인이었지만. 이런 짓을 생각해 낼 만한 사람이 후루미나미 나몬 본인 밖에 없다는 사실을 망각했군.

 

모노로그: 아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럴리가! 후루미나미 나몬 너는 처음부터 살인을 숨길 생각도 없었지 않은가! 왜 두 명씩이나 죽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루미나미 나몬: …내게 고마워해. 모노로그. 앞으로 다른 이들에게 크게 도움이 될 자들은 죽여뒀어. 이제 탑은 오직 나쁜 방향으로 귀결될 거야.

 

키와 아유키: 뭐? 칸나즈키와 야가미는 위험인물들이잖아. 그래서 살해에 동참한 건데. 그게 무슨 뜻이지?

 

루미나미 나몬: 칸나즈키는 샤이닝 운용에 있어 큰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샤이닝을 악용하는 자들에게 대항할 수 있지 야가미는 흑막에 대한 큰 비밀을 하나 알았으며 유추해냈어. 그 둘이 죽었으니 판은 다 깔렸다

 

키와 아유키: 그게 무슨 뜻이냐니까?

 

무로 시라베: 네가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뜻이다. 우둔한 놈.

 

키와 아유키: 감언이설이라니. 히무로. 나는

 

무로 시라베: 모르는 척 마라. 탑의 평화를 위해 후루미나미 나몬과 손을 잡겠다는 건 미친 짓이다. 너는 후루미나미 나몬이 가진 정보를 원했고, 그렇기에 두 사람을 죽였다. 칸나즈키 시노부와 야가미 토가가 위험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다.

 

토키와 아유키는 반감을 드러내다 말고 팔짱을 꼈다. 팔짱은 곧 심리적 방어기제의 반영이다. 그에겐 할 말이 없었지만 고분고분히 받아들이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불편함을 표시하기만 했다.

 

기와라 우시오: 처형 집행해. 모노로그.

 

모노로그: 때가 되면 할 거다. 재촉하지 마라. 하기와라 우시오.

 

기와라 우시오: 집어치우고 빨리 죽이라고. 후루미나미 쟤도 빨리 죽기를 원할 거야. 저것 좀 봐.

 

후루미나미 나몬은 서있지도 않았다. 그녀는 앉은 채로 말라붙어갔다. 그녀에게는 조금의 기력도 없었다. 절반 이상의 샤이닝을 주었다면 이미 그녀의 몸은 온전히 기능하고 있지 않았다. 어느 장기의 어느 기능일지는 몰라도 그녀의 일부는 이미 죽어버렸다.

 

루미나미 나몬: 나는… 논리적인 선택을 했을 뿐… 어차피 처형당할 육신을 버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

 

츠보: 이런 짓을 하다니… 대체 왜? 얼마나 긴 기억을 보여줬길래. 얼마나 짙은 샤이닝을 담았길래 후루미나미 나몬의 몸 자체가 망가지는 거야?

 

무로 시라베: 체감상 며칠은 족히 되었다.

 

바라 쿠리스: 뭐?! 우리가 보기에는 네가 벗어나기까지 몇 분도 채 안 걸렸어!

 

무로 시라베: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달랐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말 한마디를 전하지 않았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풍경과 그녀가 가진 생각 자체를 내게 주입했다. 나는 그 체험 속에서 후루미나미 나몬이었다. 내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루미나미 나몬: 그야말로 호접지몽이지.

 

후루미나미 나몬은 웃었다. 한 사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꾸자 제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가 묘연해졌다는 일화다. 그리고 후루미나미 나몬은 나비가 찢고 남은 번데기가 되었다.

 

우화 한 나비는 내 뱃속에 들어 있었다.

 

나리 케이토: 뭐야. 너. 너 괜찮은 거야? 후유증 같은 거 없어? 미치는 거 아니지?

 

무로 시라베: 내가 그녀의 사고방식에 동화되었느냐는 질문이라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기와라 우시오: 그래. 히무로 이놈을 동화시키려면 어지간한 사람은 안 돼. 얼음을 냉동고에 둔다고 녹겠냐? 밖에 둔 다음에 뜨거운 바람을 틀어야지.

 

하기와라 우시오는 장광설을 늘어놓다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키와 아유키: 갑자기 왜 그래?

 

기와라 우시오: 아무것도 아니야. 오늘의 결론은 저 개같은 게 드디어 죽는다는 거야. 찝찝해 죽겠지만 아무튼. 우리 눈앞에서 영원히 꺼지게 되겠지. 또 멀쩡하게 살아났군. 우리의 승리야

 

기와라 우시오: 개뿔이 승리다. 망할. 두 명이나 죽이다니 잘났다. 후루미나미. 칭찬이라도 해줄까? 집어치우자고. 지옥에나 떨어져.

 

루미나미 나몬: 너희가 모르나 본데 지옥은 여기가 지옥이지 다른 곳이 아니야… 오히려 탑에 남은 너희들이 더 끔찍한 꼴을 보게 될 걸. 앞으로 탑은 전쟁터 비슷한 게 될 테니까.

 

후루미나미 나몬은 그렇게 말하며 웃어댔다.

 

바라 쿠리스: …후회는 없어. 후루미나미? 그렇게 사람을 죽인 다음 너까지 그렇게 되었는데. 후회 안 해?

 

루미나미 나몬: 그딴 건 없어. 오히려 너무 만족해. 히무로는 이제 나만의 것이 되었거든. 누구도 달성 못한 위업이라고.

 

무로 시라베: 누군가는 이미 너보다 먼저 나의 마음을 가졌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입을 다문 채 나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모르는 것은. 마유즈미는 내 마음을 가지기 위해 영혼을 반 넘게 바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마유즈미는 자신을 나에게 주면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니 보답할 방도가 없는 나는 그녀에게 내 마음을 주었다. 그토록 쉬운 일을 죽어가면서 하다니. 반푼이로다.

 

무로 시라베: 더 이상 후루미나미 나몬에게서 볼 것은 없다. 그만 처형해 주었으면 한다.

 

모노로그: 내게 명령하지 마라. 히무로 시라베.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후루미나미 나몬이 더는 흥미롭지 않다는 점에 동의한다. 이제 막을 내릴 때가 되었군. 이 길고 긴 재판에. 하하!

 

모노로그는 공중에 떠올라 불길한 안광을 빛냈다.

 

모노로그: 초고교급 연기자. 후루미나미 나몬을 위한 스페셜한 처형을 준비했다. 너는 그 어떤 비극마저도 긍정할 수 있지. 그렇다면 이것도 해 보아라. 견딜 수 있다면!

 

후루미나미 나몬은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눈의 색은 빠져 있었으나 그 미친 증세만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은 나를 더없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루미나미 나몬: 곧 보자. 히무로.

 

모노로그: 처형 시작!

 

 

 

 

 

살인 게임의 흑막이 준비하는 처형. 개개인의 특성을 따라 이루어지는 악취미적인, 과시적인 형벌. 그것은 살인이 섣불리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장치이자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며 생존자들의 경종을 울리는 일이기도 하다.

 

알파걸의 살인 게임을 분석하는 데에 있어 왜 처형이 개개인의 재능. 특성. 놓인 상황이나 트라우마를 반영하는지는 명확했다. 악취미이기 때문이다. 잔인하고 끔찍한 것. 아프고도 불명예스러운 죽음. 남들이 다 보는 와중에 바닥에 질질 끌려가고 웃음거리로 소비되는 끝. 그런 것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초고교급을 시기하고 증오하는 자들에게 그보다 더 나은 구경거리는 없다.

 

탑의 살인 게임에서 야가미 토가의 처형과 모리 레이코의 처형을 본 끝에. 나는 어째서 처형이 처형당하는 주체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지를 알게 되었다. 야가미 토가와 모리 레이코는 모두 결투를 치렀으며, 결투장의 모습과 처형장의 모습은 같았다. 야가미 토가의 항구. 모리 레이코의 황무지와 열차.

 

처형장은 결투장에서 그 모습을 따온다.

 

결투장은 곧 그 사람의 자아이며. 심상이다. 자기 자신이라는 그림을 본떠 가져온 것이 처형장이다. 그것을 전제로 놓은 이상 흑막이 그런 짓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너는 살인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한 번 저버렸다.

 

그러니. 너를 죽이는 것은 너 자신이다.

 

그들은 처형당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 한 없이 뒤틀린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파괴하고 모욕하는 것이야말로 살인자에게 어울리는 말로이다. 그렇기에 초고교급을 증오하는 사람들에게 처형이란 더없는 볼거리이다. 그들의 샤덴프로이데와 초고교급을 향한 열등감.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미움 자체에게 먹일 수 있는 가장 기름진 사료이다.

 

알파걸은 왜 그녀를 위한 처형을 구상해 두었는가? 그것은 죽음이라는 최악의 절망을 알파걸 본인이 원했기 때문뿐이 아니다. 패배한 그녀의 모습을 절망이라는 관념이 비웃음으로써. 폭도들이 그것을 먹어치우길 바랐기 때문이다. 알파걸이 절망을 구현하지 못해 죽었다면 끊임없는 후발주자가 나온다. 이번에야말로 해내겠다며 그들은 보이는 건물마다 폭파한다. 알파걸의 처형은 처형이 아니다. 그것은 순교였다.

 

아니면. 그냥 알파걸이 미쳤기 때문이리라.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의 처형장은 어떤 곳일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미친 모자장수였고, 오즈였고, 비틀린 나무 밑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심상은 한 없이 바뀌었다. 천 개의 얼굴을 가진 천 개의 연기자를 위한 처형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후루미나미 나몬이라는 사람을 어떤 편견과 그릇된 해석 없이 바라볼 방법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녀에 대해 몰랐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변검배우였다. 극히 짧은 시간 안에 그녀는 수많은 가면을 바꿔 썼다. 내가 본 그녀의 모습 중 어느 게 진짜일지 몰랐고, 진짜가 있기는 할지조차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마음은 어떻게 생겼는가?

 

검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마음은 아무것도 없이 검었다.

 

그녀의 처형은 후루미나미 나몬이 공중에 뜨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의아한 기색을 보이며 본인이 새가 된 양 허공에 양팔을 휘저었다. 하지만 그 부양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어깨에 매달려 있는 실은 그녀 머리 위의 마리오네트와 이어져 있었다. 실이 그녀의 몸으로 몇 가닥 더 이어지더니 그녀의 신발이 휙 벗겨졌다.

 

마리오네트는 후루미나미 나몬을 아주 작은 금속 신발 위에 놓았다. 아동이. 적어도 8세 정도의 아이가 신는 신발로 보였다. 발이 그녀의 신발보다 컸기에 후루미나미 나몬은 신발을 신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후루미나미 나몬은 신발을 신게 되었다.

 

소리를 들을 수 없었을 뿐. 그녀의 발가락과 그 뼈는 전부 뒤틀리고 부러져 작은 신발의 안을 전부 채우게 되었을 터였다. 후루미나미 나몬조차 그 고통에는 비명을 질렀다.

 

여성의 발을 작게 줄이고자 했던 전족은 고대 중국에서 천년 넘게 자행되었다. 이는 닭의 배를 가르고 그 내장에 4세에서 6세 정도의 여아의 발을 안에 넣어 부드럽게 만든 뒤. 작은 신발에 발을 쑤셔 넣는 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후루미나미는 아무런 마취 없이 청소년의 발을 욱여넣었다. 당연히 그 부피가 들어갈리가 없었다.

 

하지만 신발 안은 꽉 차게 되었다.

 

금속 신발 밖으로 미처 다 들어가지 못한 뼛조각과 살점이 삐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이미 신은 이상 벗을 방법도 없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절규했다. 움직이려고 할 때마다 곤죽이 담긴 신발 밖으로 피가 울컥이며 새어 나왔다.

 

실이 끊어지고 마리오네트가 사라지자 후루미나미 나몬은 무릎을 써서 바닥을 기었다.

 

그리고 입에 피거품이 도는 맹견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초고교급 연기자 후루미나미 나몬 처형

< Firestarter >

 

 

 

광견은 후루미나미 나몬의 팔을 노렸다. 이미 발을 써서 달리는 것은 글렀다는 것을 아는 듯했다. 개는 그토록 천부적인 사냥꾼이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그것의 아가리에 물린 채로 끌려다니고 물어뜯기기를 반복했다. 아마 뼈는 부서졌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광견은 후루미나미 나몬의 팔을 문 채로 자신의 머리를 내저었다. 그렇게 그녀는 짓이겨졌다. 

 

그 짐승이 마침내 후루미나미 나몬에게서 떨어진 것은 그녀의 주변이 화마에 물들고 나서 꽤 시간이 지난 뒤였다.

 

어둠 때문에 보이지 않던 그녀의 마음은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당주의 방. 후루미나미 가문의 은둔소. 불타던 그 광경 속에 그녀는 놓여 있었다. 광견은 아가리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하지만 도망칠 곳은 없었다.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 된 후루미나미 나몬은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팔은 부러졌고, 발도 부러졌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끝은 그토록 비참했다. 나는 그녀가 영영 일어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자신을 향해 점점 번져오는 불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채로 죽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발목이 전혀 체중을 받치지 못해 후들후들 떨리는 와중에도 두 발로 섰다. 갓 태어난 사슴의 다리를 부러뜨리면 그렇게 움직일 것만 같았다.

 

기이한 움직임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열 손가락은 서로 넓게 펼쳐진 채 갈고리 모양으로 굽혔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그 갈고리를 사방에 휘둘러댔다. 그것은 허공을 움켜잡으려는 것처럼 보임과 동시에 긁어내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입을 벌린 채 팔을 써 자신의 얼굴을 씻어내려는 듯이 제 두상을 쓰다듬었다. 이미 피칠갑이 된 얼굴은 더욱 붉어지기만 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휘청거리지만 쓰러지지 않은 채 팔을 뻗었다. 그것은 절규였다. 서서히 조여 오는 화염은 결국 후루미나미 나몬을 집어삼켰다. 광견은 바닥에 이리저리 구르며 고통을 토하다가 고꾸라져 죽었다.

 

작열통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불에 타는 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정도의 고통을 넘어선다. 100도의 끓는 물을 뒤집어쓰기만 해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른다. 800도의 불 앞에 의연할 수 있는 사람 따위 없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벌겋게 달아오른 신발을 바닥에 타닥이며 광인처럼 뛰었다. 그녀의 발가락은 인두보다도 뜨거운 신발 안에서 지글지글 익고 있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불길 속에서 어쩔 도리 없이 뛰어다녔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몸부림은 일종의 춤처럼 보였다.

 

넓게 벌려진 입은 무엇을 토해내고 있는가. 웃음? 비명? 고통? 환희?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처형 도중에는 처형 대상이 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후루미나미 나몬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팔을 마구잡이로 뻗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지옥문을 두드리는 동작처럼 보였다. 허나 누구도 그녀가 안에서 두드리는지, 밖에서 두드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불구덩이. 파괴적인 풍경. 그러나 소음 하나 없었다. 아직까지 그녀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은 이들은 단지 지켜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침을 삼키는 작은 소리마저 재판장 안에 울렸다. 더없는 대조였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쓰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목각인형처럼 흔들거렸다. 그녀가 신은 신발의 면적은 구두의 앞코를 쓰는 것과도 같았다.

 

그녀의 머리가 모든 방향으로 꺾였다. 몸의 뼈는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고자 했다. 나는 언젠가부터 그녀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기까지의 시간이 너무 길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아직도 미련이 남았나? 동반자살하고 싶다는 마음이 그렇게도 간절했나?

 

그러나 내 목소리는 처형장까지 들리지 않을 것이고, 그녀가 대답을 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양팔을 가슴에 모으고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곤죽이 된 발로 잘도 뛰어다니며 한 팔은 수직의 위로. 한 팔은 수평의 옆으로 뻗기도 했다. 발레라 불린 춤 동작 같았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얼굴은 더 이상 어느 곳이 이목구비인지조차 알 수 없는 숯이 되었으나. 후루미나미 나몬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팔을 자신의 머리 위로 뻗고 머리를 뒤로 젖힌 채. 발을 놀렸다. 그녀가 유난히 팔을 좌우로 흔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부러진 그녀의 팔이 시계추처럼 덜렁거리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불바다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무대 위에 서 있었다. 그것은 처형의 내용이 아니었다. 그저 후루미나미 나몬의 즉흥이었다. 너 자신의 비극을 즐기겠다는 말이냐? 무엇이 즐거운가? 나는 그녀가 자기 파괴를 즐기는 이유를 유추하려 애쓰다 그 정답에 근접했다.

 

후루미나미 나몬이 불태우고자 했던 후루미나미에는 그녀 본인마저 포함되어 있었다.

 

후루미나미가 오랜 시간을 들여가며까지 얻고자 했던 연기의 화신을 파괴하는 것이. 그녀가 후루미나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앙갚음일지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방황의 광기에 몸을 던지고 싶었을 뿐이었겠지.

 

후루미나미 나몬의 내면에는 인간이 남아 있었을까? 나는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후루미나미 나몬 본인조차 스스로를 장담할 수 없을 터였다.

 

엽기적일만치 길게 느껴진 처형에도 이윽고 막이 내려왔다. 그녀는 어느 순간 바닥에 털썩 고꾸라졌다. 이미 전소되어 몸이 검게 탄화된 것이 보였다. 그녀의 몸에 있는 수분이 점점 끓어올라 사라지며 후루미나미 나몬은 점점 검은 뼈의 형태로 변해갔다.

 

나는 그녀가 죽는 것을 두 눈 뜨고 지켜보았다.

 

그녀를 기억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내 마음 어디에도 그녀를 위한 공간을 남겨두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죽음이 내게는 별반 의미를 가지지 않았기에 굳이 감을 필요도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의 죽음에서 눈을 돌리는 것은 비겁한 일이었다.

 

루미나미 나몬: 드디어 그녀가 죽는군. 자신이 야기해온 불꽃에 스스로 잠식되어.

 

내 바로 옆에서 후루미나미 나몬이 말했다.

 

루미나미 나몬: 하지만 마지막까지도 그녀는 화마 안에서 춤을 췄어. 스스로를 승화시키는 건 존경스러운 일이지. 다 죽어가는 꼴이었음에도 그녀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어. 그렇지 않아?

 

무로 시라베: 나는 그녀에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았다. 적어도 저런 모습은.

 

루미나미 나몬: 그래. 너는 그녀가 저런 꼴로 죽지 않기를 바랐겠지. 죽음이 아니라 삶에 집착하기를. 하지만 그건 나에게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야.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후루미나미 나몬에게 언총을 겨누었다. 몸보다 생각이 더 늦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어떻게 아직 살아있지? 나는 그것을 물으려 했다. 그리고 다시 처형대로 보내고자 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주 작은 가능성이지만. 내가 잘못 본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나는 재판장 안에 내린 어둠 속에서 그녀가 나타나지 않을까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녀는 없었다. 내 등 뒤에 붙어 있을까 총을 잡지 않은 손으로 뒤를 더듬거렸으나. 그곳에도 그녀는 없었다.

 

마침내 처형이 끝나고 재판장의 조명이 다시 돌아왔을 때. 재판장은 한 점 어둠도 없는 빛의 영역이 되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이 숨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후루미나미 나몬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귀신의 장난에 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모노로그가 폐정을 선언하고 재판장이 닫히기까지 줄곧 후루미나미 나몬을 눈으로 좇았다. 하지만 어디를 보아도 후루미나미 나몬의 모습은 없었다. 나는 그 사실에 어떤 안도감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의 동생을 영안로 밖으로 보내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캐롤은 자신이 미쳐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탑에 오기 직전의 그녀와 탑에서의 그녀 사이에 너무나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탑에서의 그 여자는 자신이 어떤 것을 품고 있는지 몰랐다. 자신이 앞으로 무슨 짓을 당할지도 몰랐다. 그 여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한 면모가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든 나아지리라고 믿었다.

 

그것은 믿음일 뿐이다. 믿음은 믿는 자에게 그 무엇도 주지 않았다. 믿음이 대답을 할 때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배신을 할 때뿐이었다. 그녀는 탑에 오기까지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이전의 자신과 동일인물이라 믿기지 않을만치.

 

캐롤은 비척비척 걸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이 산이 아니라, 재단 연구소 안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캐롤은 그 전경을 확인하자마자 고개를 홱홱 돌렸다. 어느 곳을 보아도 그 장소는 조율자를 만들던 그 연구소였다. 캐롤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위로 들었다.

 

"계속 가야 할 방향으로 가면. 영안로에서 나갈 수 있는 거죠?"

 

"그럼요. 마음이 편하지는 않으시겠지만. 본인 과거잖아요! 제대로 마주하고 앞날을 향해 걸어 나가셔야죠!"

 

패트리샤라는 이름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이딴 곳에 데려와놓고 말은 잘하네요."

 

패트리샤는 캐롤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캐롤이 아닌 그 여자는 연구소 안을 두려워했다. 저주스럽게 여겼다. 연구소의 위치가 발각되어 자경단과 사람들이 이곳을 급습했을 때. 그녀는 혼란을 틈타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도망자와는 너무도 많이 달라졌다.

 

캐롤은 천천히 연구소의 내부로 향했다. 그녀는 가끔 다시 그곳을 찾아가는 망상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망상 속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을 망상했다. 진짜 사람에게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영안로 안은 결국 탑이고. 가상현실이 아니던가?

 

"어차피 정말 살아있는 사람들도 아닌데… 화풀이나 할까."

 

캐롤은 그러기로 했다.

 

 

 

 

 

 

"왜 요즘 배급된 빵들은 죄다 스펀지 같은 맛이 나지?"

 

"스펀지케이크라 생각하고 먹으면 되잖아."

 

"질감이 아니라 맛이 스펀지같다고. 퍼석퍼석한 데다가 밀가루 맛밖에 안 난단 말이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먹을만한 빵이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내가 듣기로는 폭도 놈들이 유제품을 잔뜩 담은 트럭 열 대를 전복시켰대. 그것 때문에 버터나 우유를 공급받기 어려워진 것 같아."

 

"또 그 자식들이야? 지긋지긋하네… 그래서. 버터는 다 어떻게 됐대?"

"어떻게 되긴. 그 자리에서 다 타 버렸지. 그놈들에게 버터를 주면 부드러운 빵을 구울 것 같나? 버리지 못해 안달이지. 덕분에 몇 달간 망할 땅콩버터는 구경도 못 하게 생겼어."

 

"땅콩버터가 왜?"

 

"버터가 없으면 땅콩버터도 없잖아."

 

"버터에는 땅콩버터가 안 들어가. 사실 구운 땅콩 말고는 설탕이나 소금 정도밖에 없다고. 그래서 엄밀히 말하자면 땅콩잼이라 불러야 해."

 

"뭐? 그럼 왜 땅콩버터라고 부르는데?"

"처음 이름 붙인 사람이 땅콩버터라 불러서 땅콩버터라고 부르는 거지."

 

"이유 한 번 멍청하군. 그래도 땅콩버터는 멸종이 안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죽도록 보기 힘들지만 아예 없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그래. 참 잘 됐다. 아 그리고. 흉조께서 잡아오신 후보의 가능성이 어마무시하대. 조율자님의 완성에 큰 진척이 생겼다고 하던데."

 

"하아. 부디 하루라도 빨리 모든 로님들이 완전해지셨으면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는 부드러운 빵을 배급으로 먹고 있을 텐데."

 

"땅콩버터랑 같이?"

 

"글쎄요. 그건 장담 못 해드리겠는데요."

 

경비원은 어디에선가 아름답고 소름끼치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를 복도를 통해 울렸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에는 재단에서 지급한 옷이 아닌, 흰 평상복을 입은 금발의 여성이 서 있었다.

 

흰옷? 새로 짜입고 오기라도 했나? 애초에 어떻게 들어왔지? 경비원 두 명은 그런 생각을 하며 삼단봉을 꺼내 들었다. 왜인지 그녀가 연구소 내에 퍼진 새 실험체의 용모와 닮았다는 생각을 한 채. 그들은 펼친 삼단봉을 겨누고 여성에게 다가갔다.

 

"정지. 누구냐? 왜…"

 

 

 

 

"호흡을 멈추세요."

 

캐롤은 말했다.

 

경비원 둘은 서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나 그들의 평정은 1초도 더 지속되지 않았다. 그들은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목을 잡았으나. 곧 고꾸라진 채 죽었다.

 

곧 매발톱들이 달려올 것이다. 개중 초고교급 개인을 납치하는 요원. 흉조는 이 지부에서 오버룩, 딕테이트, 터치를 막기 위한 장비를 지급받았다. 조율자를 만들던 연구소의 흉조 또한 그것을 이용해 많은 후보를 납치했다.

 

하지만 그 장비를 통해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가능성을 모르고 정신조작에 익숙지도 않은, 후보 삼기에 편한 인간뿐이다. 물론 흉조는 한 번 캐롤을 붙잡은 적이 있으나, 이는 재단의 기억 소거에 대해 몰랐기 때문이다. 그녀가 차마 해칠 수 없는 단 한 명의 사람은 캐롤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캐롤을 붙잡았다. 게다가 흉조는 샤이닝을 정제하는 총을 사용해 그녀의 본능적인 정신조작마저 헤집어놓기까지 했다.

 

캐롤은 두 경비원을 뒤로하고 연구소의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두 사내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가며 질식하는 것을 본 재단의 인부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상황을 파악하더니, 비명을 지르거나 서둘러 어딘가로 통신을 보내려 했다.

 

"조용히 해요."

 

캐롤은 조금 크게 말했다. 그러자 연구소 내부는 자신의 입을 감싸고 왜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인지 당황한.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입을 벙긋거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이은 호흡 금지의 명령에 죽었다.

 

30초도 안 되어서 열댓 명의 사람들은 바닥에 쓰러져 자신의 목을 틀어쥐었다. 얼굴은 혈류가 쏠려 빨갛게, 피가 빠져 파랗게, 혈관이 터져 보라색으로 각각 변해갔다. 끔찍한 광경이기에 보는 것이 즐겁지는 않았다. 아무리 끔찍한 일에 종사한다고 해도. 죄 없는 사람들을 마구 잡아 산채로 영혼을 빼내고 몸을 가르며 고문해 왔더라도 개중에는 무고한 자가 있을지 몰랐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

 

"웃기네…"

 

생각해보니 더 미워졌다. 연구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나의 보복을 받아 마땅하다. 캐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를 착취해 온 자들에게 역으로 송곳니를 박아 넣는 기분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다만 그녀를 당황시킨 것은 죽은 자들이 하나같이 예상치 못했다는 듯이 잔뜩 놀란 채 죽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일이 벌어질지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녀는 묻고 싶었다. 정말 이렇게 될 줄을 몰랐어요? 생각도 못 했다고요? 제정신 아닌 놈들. 당황을 왜 해. 당황을? 사람 영혼으로 장난질을 쳐놓고서 자기가 그 장난감의 장난감이 될 줄은 몰랐나? 로를 만드는 시스템은 참 우스웠다. 사람을 사람 아닌 자원으로 취급하며 죽고 죽이기를 제 멋대로 하다가. 남은 한 명은 신처럼 떠받든다니. 로의 정신 개조에 오랜 시간을 들이고 초고교론의 사상을 주입한다고 해도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재단이 만드는 것은 신이나 초인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이 만든 것은 그저 사람 모습을 한 저주였다.

 

독을 가진 생물로 만드는 저주. 고독(毒)과도 같았다. 절차는 다음과 같다. 항아리 하나에 백 마리의 독을 가진 동물을 구겨넣는다. 전갈. 두꺼비. 뱀. 지네. 거미. 독개구리. 말벌 등을 넣고 뚜껑을 닫는다. 그러면 안에 있는 것들은 서로 먹어치우고 죽고 죽인다. 그 끝에는 가장 강한 독을 가진 동물이 하나 남는데. 이 동물은 독이 바짝 오른 데다가 다른 놈들의 독을 전부 먹은 덕분에 한 번만 물려도 사람을 절명시킬 수 있다. 고독은 마지막 남은 놈을 바짝 말려서 빻아 쓰거나, 고독으로 죽이고 싶은 자 근처에 풀어놓기도 한다.

 

항아리를 열 때는 조심했어야지. 안에 어떤 동물이 살아 있었는지도 모르잖아. 정말 무슨 생각이었던 건데. 너희?

 

"다 죽어버려."

 

그 작은 소근거림을 들은 사람들은 그 순간 얼굴의 구멍 일곱 개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다. 질식사만을 제공하던 그녀가 문득 그런 종류의 증오를 토해낸 것은 그녀가 동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안류처럼 조용한 복수를 해일로 뒤바꾼 것은 다름 아닌 조율자의 파편들을 가둬 놓는 유리 시험관이었다. 그 안에는 수많은 금색 머리. 금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그녀는 차마 그들의 얼굴을 보지 못해. 걸음을 재촉하며 시험관에서 멀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시선들을 피하고 있는 와중. 그녀는 피할 수 없는 사람을 보았다.

 

벌거벗은 그녀 자신의 모습이었다.

 

캐롤은 산소마스크를 입에 쓴 채 액체 속에서 부유하는 자신을 보았다. 눈을 감은 채 착취당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 그녀는 재단의 입장에서 가축이었다. 신이 되지 않은 초고교급은 전부 사람이 아니었다. 초고교론이라는 것을 주창해 놓고서 정작 초고교급을 가장 미워하는 것은 재단이 아닐지 캐롤은 의문을 던졌다.

 

캐롤은 자신이 갇힌 유리에 손을 대고. 그 다른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살아남을 거야."

 

그리고 다시금 연구소 안에 낙엽이 쌓였다. 말 한 마디나 눈짓 한 번으로 사람이 죽어갔다. 캐롤은 죽은 사람들을 밟지 않으려고 애쓰며 자신의 위선을 비웃었다. 죽여놓고 욕보이지는 않겠다? 참 착하기도 하지. 집어치워.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야. 그러려고 아무리 애써도

 

있잖아. 메이. 아니면 나나시 씨. 어느 쪽이든.

 

나는 당신에게 보여주지 않은 점이 참으로 많아.

 

나는 아주 위태로운 사람이야. 나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열 번 넘게 봤어.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속으로 궁시렁대는 말이 많아. 짜증 날 때는 밥도 많이 먹어. 누가 내 몸무게를 놀리기라도 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아. 내가 남 엿듣는 건 돼도 누가 날 엿듣는 건 용납할 수 없어. 카운슬링 윤리 코드도 어겼고 질투는 엄청 심해. 내기는 이길 때까지 계속해. 친구도 없어. 홍차는 사실 폼 내려고 입문했어. 자존감도 낮아. 콤플렉스로 똘똘 뭉쳤다고. 무언가를 통제하는 게 좋아. 내가 주도권을 잡았던 적이 많지 않은 만큼 내가 관리하는 쪽이 마음에 들어. 정말 마음에 들어. 나. 진짜 성가신 여자야.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세상은 훨씬 평화로웠을지도 몰라. 내 샤이닝이 조율자를 완성하기에 충분하지만 않았으면 모든 게 더 나았을 거야. 그러니 누가 나더러 죽으라고 한다면 나는 별반 할 말이 없어. 나를 좀 봐. 진짜 사람이 아니라고 이렇게 몰살을 시키는 게 정상적이지는 않은걸.

 

하지만 이미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잖아. 다시 살 수 있게 되었는데 목숨을 포기할 수는 없잖아. 그렇지? 나 같은 사람에게도 살 가치는 있겠지?

 

살아남아도 좋다고 해줘요.

 

캐롤은 등 뒤를 돌아봤다. 누군가가 언제부턴가 다가와서 그녀를 향해 총을 겨누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제인 캐롤 브라이트… 재단이 너를 원한다."

 

변조된 흉조의 목소리는 치나미의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캐롤은 흉조를 쏘아보았다.

 

"다 멈춰요."

 

 

 

 

 

"."

 

"나와라."

 

"나오라고 하였다."

 

나는 나의 숙소에 선 채로 말을 걸었다. 듣는 사람은 없었지만 누군가는 들을 것 같았다.

 

"네가 내 안에 살아있다는 것을 안다. 그게 네놈의 노림수였다. 그렇지 않나? 절반이 넘는 샤이닝을 내게 넘긴 것도 그 일환이다."

 

루미나미 나몬: 궁극의 동반자살은 이미 시작되었다.

 

"단순히 내게 큰 인상을 남기겠다 따위의 안건이 아니었다. 너는 나와 하나가 되려 했다. 그것이 궁극의 동반자살이다. 내가 너와 죽어줄 리가 없다는 걸 아는 너는. 내 안에 침입했다."

 

그녀는 분명 듣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은 나의 망상이 아니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분명히 나에게 자신의 영혼을 넣었다. 자신이 불타는 장면을 보며 나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그것은 나의 망상이 아니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내게 자신의 영혼 자체를 주입했다. 결투장과 언총의 특성을 극한까지 이용한 끝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 정신은 후루미나미 나몬에게 침식되지 않았다. 영혼의 융합이라는 것이 주입만으로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몸 안에 들어온 후루미나미 나몬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유령과 같은 형태로 독립적인 자아를 유지한 채. 내 무의식 안에 숨어있는 것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방식으로 처형을 피했다. 그리고 나를 껍데기 삼아 숨어들었다. 나는 그렇게 둘 생각이 없었다. 찾아내서 그 뿌리를 뽑고 싶었다. 수분을 빨아들이는 가늘고 수염 같은 뿌리 한 가닥조차 남겨두지 않겠다.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에게 몸을 내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모습을 드러내라. 후루미나미 나몬. 네가 원하는 증오를 주겠다."

 

하지만 후루미나미 나몬은 피안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주로 했다. 꺼지라고 하면 앞에서 귀찮게 굴고 모습을 드러내라 하면 꼭꼭 숨었다.

 

"나와라. 나오란 말이다. 죽음에서 도망치니 좋나? 네가 두 번째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추한 것아. 너는 스스로의 연극에 다른 결말을 덮어씌우려 하고 있다."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충분히 기다렸음에도 후루미나미 나몬은 그림자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미쳐가고 있는 건가? 나는 스스로를 의심했다. 재판장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은 그저 내 상상일 뿐일 수도 있었다. 일종의 피해망상에 걸린 것이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찾아내서 죽여야 한다며. 나는 악령을 뒤쫓고 있었다. 그야말로 허무한 짓이었다.

 

나는 어떤 마약류에도 손을 댄 적이 없지만, LSD 복용자와 같은 꼴이 되었다. 다른 약물과는 달리 LSD는 신체 시스템을 통해 생분해되지 않는다. 방광을 통해 밖으로 배출되지 않는다. 그렇게 체내에 남아있던 LSD는 어느 순간 활성화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몇몇 LSD 복용자들은 LSD를 복용하지 않고 일상을 향유하고 있더라도. 한순간에 주변이 환각과 온갖 환상들로 녹아내리는 것을 느낀다. 이 현상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이들이 공유하는 것으로. 플래시백이라고 한다. 일상을 영위하던 도중 아무런 전조증상도 없이 현실이 녹아내린다.

 

나는 LSD 복용자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을 쫓아낼 어떤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내 몸 안을 돌고 돌다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것이다.

 

나는 증오를 쏟아내려 했던 대가를 크게 치르게 되었다.

 

내 몸은 더럽혀졌다. 마유즈미의 자리여야 했던 곳에는 암덩이가 들어찼다. 그것이 전이될까? 아니. 그녀는 자리 잡을 곳을 잘못 골랐다. 내 정신은 네놈 따위의 정신에 지지 않는다.

 

"확실해. 히무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후루미나미 나몬이 등 뒤에서 말하자 나는 몸을 돌려 그 자리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다시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영영 내 안에 붙어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 마라… 너는 망령일 뿐이다. 살아있지도 않다. 네가 죽은 후루미나미 나몬보다 나을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꺼져라. 꺼져!"

 

"이봐. 이봐. 야! 이 문 열어 봐!"

 

하기와라 우시오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문을 열어주자 그는 떽떽 떠들었다.

 

"야. 너 어떻게 된 거야? 정신 나갔어? 왜 중얼중얼거려. 혼자서?"

 

나는 나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를 이해시킬 자신도 없었고, 누가 알아봤자 좋을 일 또한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용건이 있나?"

 

"너한테 보여줄 선물이 있어서 불렀어. 자. 따라와 봐. 컴온."

 

누가 보더라도 뻔한 거짓말이었다.

 

"필요 없다. 하기와라 우시오."

 

하기와라 우시오는 멋쩍게 제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사실대로 말하자면 선물은 구라고 앞으로 살인 게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 회의야."

 

"인원은 누가 있지?"

 

"나랑 제츠보. 끝. 반복에 대한 일을 풀었다간 개판이 날 게 분명하잖아. 일단 탑의 상황이 전반적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한 회의야."

 

내가 그것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가겠다."

 

"잘 생각했어. 임마. 가자."

 

하기와라 우시오는 내 어깨를 제 손으로 두드렸다. 나는 그 손길에 위로가 담겨 있다는 기색을 받았다.

 

"욕봤다. 히무로. 후루미나미 그 싸이코한테 시달리느라 존나 고생했어. 이바라한테는 비밀인데. 나는 걔가 죽어서 아주 마음이 놓인다니까? 미친년이야. 미친년."

 

나는 마음이 조금도 놓이지 않았다. 하기와라 우시오를 따라 내 숙소를 떠나는 와중에도. 나는 등 뒤에서 나를 노리는 그녀의 존재를 느꼈기 때문이다.

 

 

 

 

 

모닥불 앞에 도착한 그녀의 손에는 재단이 만들어낸 샤이닝 총이 들려 있었다.

 

그나마 쓸만한 것을 노획한 것이었다. 히무로 시라베와 그녀는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었고. 정신 조작을 가진 그녀는 척결의 일 순위 대상이었다. 해변에서 그에게 있던 총이 여전히 그의 손에 있다면, 그녀에게 또한 총이 있어야 그에게 맞설 수 있을 터였다.

 

연구소에서 죽지 않았던 것은 흉조와 매발톱들 뿐이었다.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해도 캐롤은 차마 치나미에게는 위해를 가할 수 없었다. 매발톱들은 죽어 마땅할지도 몰랐지만, 매발톱들 또한 억지로 조종당하는 처지라고 생각하면 일말의 동정심이 생겼다. 캐롤은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

 

"이건 좀 쓸만하겠네."

 

캐롤은 그들을 죽이는 대신. 흉조의 손에서 샤이닝 총을 낚아채고 다시금 연구소 안을 걸었다. 연구소 안에는 적막만이 남았다. 몇몇 사람들은 바닥에 몸을 굴리지도 못한 채 죽었다. 왜냐하면 캐롤이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모닥불 앞에 앉았다. 그 앞에서 손을 비비며 캐롤은 다시금 패트리샤에게 물었다.

 

"여기서 꼭 시간을 보내야 해요?"

 

"마음에 안 드셔도 어쩔 수 없어요. 쉬시는 것도 영안로로 나가는 길의 일부니까요. 그래도 무료하지 말라고 간식을 드릴게요!"

 

패트리샤의 말이 끝나자 그레이엄 크래커, 마시멜로, 누텔라가 캐롤의 앞에 나타났다.

 

이제 좀 말이 통하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캐롤은 모닥불을 쬐면서 자신이 마지막으로 그 간식을 대면했을 때를 떠올렸다. 미국에 도착하고 2년쯤 뒤. 또래와 영어로 회화가 가능해졌을 때 걸스카우트를 떠난 기억이 났다.

 

좋은 때였다. 아이들은 그나마 순수하여 그녀를 편견 없이 보았다. 편견이 있더라도 그 속에 악의는 없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아이들과 함께 스모어를 만들어 먹으며 캐롤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텐트는 비좁고 불편했지만 왜인지 그 일부분은 포근했다.

 

캐롤은 경건한 마음으로 땅에 굴러다니는 나뭇가지에 마시멜로를 꽂았다. 깨끗한 나무 꼬챙이를 들고 오는 것은 이단이다. 오직 날것의. 깨끗하지 않은 나뭇가지만이 스모어에 어울렸다. 그게 캠프파이어 앞의 규율이었다.

 

통짜로 구운 돼지 바비큐를 돌리듯 그녀는 마시멜로를 불 앞에 두고 살살 돌렸다. 충분히 그슬리고 적절히 녹은 마시멜로를 그레이엄 크래커에 펴 바른 뒤. 캐롤은 크래커를 하나 더 꺼내 그 쪽에는 누텔라를 발랐다.

 

그렇게 완성된 스모어는 그야말로 완벽한 자태를 뽐냈다. 잘 만들어진 스모어는 적당히 두꺼운 통밀 비스킷 사이 반고체로 부드럽게 풀린 마시멜로가 들어 있으며, 거칠고 부드러운 식감 사이를 누텔라가 접착제 역할을 하며 붙여주는 일종의 샌드위치처럼 보였다.

 

캐롤은 스모어를 한 입 깨물었다. 통밀의 거친 식감이 입 안에서 버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무런 맛이 없고 투박한 그레이엄 크래커는 달고 부드러운 것들과 함께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캐롤은 지긋이 눈을 감고 그 맛을 음미했다. 꿀꺽 삼키고 나서 작게 한숨을 내쉬기까지 했다.

 

너무 맛있다.

 

그래. 이것이 사는 것이다. 삶이란 좋은 것이다. 캐롤은 반쯤 남은 스모어를 입 안에 욱여넣고 다시금 그것을 버적버적 씹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달콤해. 달콤해. 내가 누릴 가치가 있나 의문이 들 정도로. 정말 달콤해.

 

캐롤은 목이 메는 것을 느꼈다. 눈물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레이엄 크래커가 너무 뻑뻑한 탓도 있었다.

 

 

 

 

 

마유즈미 없는 블레인의 대항자들은 제츠보의 숙소에 모였다.

 

"여기에 모인 김에 하기와라 우시오. 약속을 기억하고 있겠지?"

 

"뭣?"

 

제츠보는 하기와라 우시오의 복부를 가격했다. 그는 바닥을 굴렀고, 충격을 회복하는 데에만 10분을 넘게 소모했다. 나는 그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세 인격체는 차가운 탑의 돌바닥에 앉아 회의를 시작했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자신이 당했던 응징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고 곧바로 해야 할 말을 했다.

 

"자… 지금 상황을 돌아보자면 이바라는 확실히 살인을 저지르지 않을 사람이고. 카나리는 개심을 한 것 같긴 한데 제츠보를 죽도록 얼려 댔으니 아직 카텟 기관을 경계할지도 몰라. 문제는 토키와인데… 얘는 어쩌다가 이렇게 됐냐? 나는 토키와가 권력을 거머쥘 방법이 아무것도 안 보여."

 

"그것은 토키와 아유키가 알아서 할 일이다.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하기와라 우시오의 말에 내가 대답했다.

 

"하하핰! 네 말 맞다 그래. 사람 죽였으면 자기 앞가림을 알아서 해야지. 진짜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정말 탑에 여섯 명 밖에 안 남았다는 말이야? 순식간에… 너무 사람이 적어졌어."

 

제츠보의 말에 하기와라 우시오는 웃음을 거두었다. 제츠보의 말은 쓰디썼다. 마유즈미. 죽었다. 이름 없는 남자. 죽었다. 카이다 쿠로하. 행방이 묘연하나 이름 없는 남자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는 모른다.

 

"그리고 모노로그가 마지막에 한 말도 있잖아. 영안로는 이제 곧 닫힐 거라고. 더 이상 부활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거라고… 아직 영안로에 갇힌 사람들이 살아있다고 해도, 이젠 돌아올 수 없어. 우리가 안에 들어가도 꺼내올 수 없을 거고."

 

나는 제츠보의 말을 들으며 마유즈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녀를 다시 볼 수 없는 것보다 끔찍한 것은 내 책임이 크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내가 정신 조작을 억누르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지 않았다면. 이름 없는 남자의 말을 들을 정도의 이성이 있었다면. 다리가 무너지고 마유즈미가 추락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이름 없는 남자가 중상을 입어 영안로 안에서 죽는 일 또한 없었으리라.

 

"관건은 추모가 아니다. 이 살인 게임의 반복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 하느냐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좋아… 너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해 보이니까. 그렇게 하자. 여기서 짚고 넘어가는 건데. 제츠보 너도 반복에 대해 알고 있기는 한 거지? 지금 생각해 보니까 너 옛날에 미도리카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에도 틀렸다고 말했잖아."

 

23T5U130: …이번에도 틀렸어.

 

하기와라 우시오는 제츠보에게 물었다.

 

"너는 처음부터 반복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거야. 그렇지? 모노로그가 이야기했던 유사한 수많은 살인 게임은 우리가 지금까지 죽고 죽인 거 얘기하는 거고."

 

모노로그: 난 이것과 유사한 게임을 몇 개나 진행했다. 그 때마다 23T5U130은 내게 개입했지. 난입한 자를 별 수 없이 게임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룰은 도무지 바꿀 수가 없어서 항상 저것을 종양처럼 단 채로 게임이 진행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당황스러웠지. 그러나 난 저 인공지능의 패턴을 파악했고, 완벽하게 꿰뚫었다.

 

모노로그: 이젠 그저 지겨울 뿐이야. 저 흉물이 나타나고. 게임의 참가자들을 지키겠다고 호언장담하고. 허무하게 쓰러지는 모습. 저것에게는 가장 중요한 게 빠져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와 달리 저것에게는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하니까.

 

"그리고 제츠보에게 주어진 근본적인 한계란. 모노로그는 이전 살인 게임의 진행을 기억하는데 제츠보는 매번 살인 게임의 기억을 잊는다는 것이겠지."

 

제츠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추하고 적중시킨 사실에 대해 대답하는 것은 제한된 일이 아니었다.

 

"너희 말이 전부 맞아. 나는 이 살인 게임이 끝없이 반복된다는 걸 알고 있어. 내가 이미 이레귤러라 불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해졌다는 것도 알아."

 

"그래? 그래서. 우리 이제 어쩔까?"

 

하기와라 우시오는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릴 거 알지만. 어차피 다시 시작할 거면 죽어도 돼. 죽자는 게 아니라 우리 상황이 그 정도로 의미 없다는 거야."

 

"권태…" 나는 중얼거렸다.

 

"물론 이 말은 쉽게 논파가 가능하지. 이렇게 세 명이 친구를 먹을 줄 누가 알았겠어? 사실 네 명이긴 한데…"

 

나는 마유즈미를 생각했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결국 제츠보가 말을 이었다.

 

"죽을까 말까 같은 건 농담 축에도 못 끼어. 당연히 살아야지… 우리가 정해야 하는 건 다른 이들에게 이 정보를 알려야 하는지의 여부야. 탑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이 정보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는 있을까? 미리 말하자면 토키와는 후루미나미에게서 반복에 대해 들었어."

 

"전한다. 카나리 케이토와 이바라 쿠리스 두 사람 모두 목숨을 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이유가 없다. 이바라 쿠리스는 본래 죽음에 거리낌을 가지며, 카나리 케이토는…"

 

나는 전용실 너머에서 들리는 똑똑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뭐야. 손님이야? 여기에 누가 오기로 한 적 있어?"

"그런 적 없어. 내가 나갈게. 너희는 여기에 있어."

 

제츠보가 음성의 크기를 낮춘 채 서서히 전용실의 문을 향해 다가갔다. 상대가 대응하지 못하게끔 그것을 홱 열어젖혔을 때. 나는 제츠보의 몸에 어느 정도 가려진 카나리 케이토의 모습을 보았다.

 

"…저ㄱ"

 

제츠보는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저. 저기 잠깐. 문 좀 얼여줘.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카나리 케이토는 작게 문을 여러 번 두드렸다. 제츠보는 카나리 케이토의 말을 무시하고 우리 쪽으로 다가와 다시금 바닥에 앉았다.

 

"들어나 보지? 우리랑 편은 안 먹었어도 우리를 적대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나는 안 믿어. 나를 불러내서 가둔 덕분에 사람이 죽었다고. 저 망할 플라잉 로봇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면 내가 카나리 케이토에게 들을 말은 없어."

 

"포기할게!"

 

카나리 케이토는 문 너머에서 외쳤다. 전용실 내부의 소리를 엇듣기 위해 그는 문에 귀를 대고 있었다. 덕분에 제츠보가 다시금 몸을 일으켜 문을 열어젖혔을 때. 체중을 앞에 쏟고 있던 카나리 케이토는 전용실로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꺼내 봐. 카나리 케이토. 네 바보 같은 로봇 꺼내라고. 네가 정말 그럴 생각이 있다면"

 

"프… 플라잉 로봇!"

 

플라잉 로봇이 바닥에서 반쯤 솟아오르자마자. 제츠보는 그것을 붙잡고 두 번 때려 구멍을 뚫었다. 이전의 제츠보. 인간의 모습을 하기 전의 제츠보라면 한 번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츠보는 이전보다 약해졌다.

 

제츠보는 플라잉 로봇의 잔해를 발로 차서 완전히 부서뜨린 후에야. 무표정하게 카나리 케이토를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이야. 카나리. 플라잉 로봇을 한 대 더 얻었나?"

 

"…너희들한테 사과하러 왔어."

 

"뭐를 하러 왔다고?!"

 

하기와라 우시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 사과하러 왔다고. 못 들었어?"

"누가 누구한테?"

"내가 너희한테. 특히… 너한테. 제츠보. 그게 이름이라며."

 

제츠보는 고개를 얕게 저었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투였다. 카나리 케이토의 회중시계가 아주 조금 빨라졌다. 그는 제 상의의 끝부분을 손으로 잡은 채 허리를 숙였다.

 

"…내가 잘못했어."

 

나는 남이 사과하는 모습을 자주 본 적이 없기에 남의 사과에 대해 조금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적어도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번 일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이기적으로 악독하게 굴었던 거 다… 내가 한 바보짓이었어. 미안해."

 

제츠보는 나를 돌아보았다. 대체 카나리 케이토가 왜 이러냐고 내게 묻는 듯했다. 나는 알 도리가 없었다. 칸나즈키 시노부가 죽은 부채감에 자신의 다른 과오 또한 청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몰랐다.

 

"…왜 플라잉 로봇을 버려가면서까지 사과하러 온 거야? 너. 저것만 있으면 온갖 짓이 가능하잖아. 예전에 후루미나미 나몬과 네가 했던 것처럼 하늘을 날 수도 있어."

"그야 있어봤자니까… 어차피 방해 전파는 너한테 밖에 안 통하고. 저거에 계속 의존하는 건 내가 너희들을 무서워하게 만들 뿐이야. 나는… 달라져야 해. 늘 숨어 있다가 너를 멈추기나 하는 사람으로 남기는 싫어."

 

"내가 너를 나중에 죽이려고 들면. 그땐 어떻게 하게?"

제츠보가 눈높이를 카나리 케이토에게 맞춘 뒤 말하자. 카나리 케이토의 회중시계는 점점 빠르게 돌아갔다.

 

"…죽이지 마."

 

카나리 케이토는 약간 사색이 도는 얼굴로 말했다. 제츠보는 손을 카나리 케이토의 머리로 뻗어 그의 모자를 짓눌렀다. 그는 화들짝 놀라 팔을 허공에 휘적거렸다.

 

"으악! 으아아아악! 그만해!"

 

"너를 믿어주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네가 정말 반성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니까. 지켜보기는 할게. 이제 꺼져."

 

제츠보는 카나리 케이토의 이마를 중지로 때렸다. 그는 비명을 질렀다. 카나리 케이토는 제츠보가 자신을 놓아주자마자 헐레벌떡 제츠보의 전용실을 떠났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속이 후련해진 듯한 제츠보를 보며 천천히 박수를 쳤다.

 

"너무 심했다고 하기에는 네가 당한 게 있으니까. 쌤쌤으로 치자고. 그런데 저놈이 먼저 고개를 숙이러 올 줄은 몰랐는데. 사람이 달라졌나?"

 

"가능성은 있다. 부정적으로 변하는 사람이 있다면 긍정적으로 변하는 사람 또한 있어야겠지. 속단은 금물이지만 그가 정말 스스로의 과오에서 배우고자 한다면. 지켜볼 만한 가치는 있을 것이다."

 

제츠보는 혀를 차 쯧 하는 소리를 냈다.

 

"아무튼 간에 나는 여전히 저 자식을 못 믿어. 칸나즈키가 죽으니 다른 집단에 의탁하러 온 것일 수도 있잖아. 오늘은 사과만 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아. 저놈 왜 이렇게 기특하지? 나이 자체는 비슷할 텐데도 무슨 사촌동생이 상 타온 것 같은 느낌이네. 나한테는 사촌이 없었지만."

 

하기와라 우시오는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대몰락에 대한 정보가 기만과 혼란을 낳았던 만큼. 우리는 더 이상 정보를 숨기지 않아야 한다. 반복에 대해 내일 아침 공표한다. 그 과정에서 어떤 혼란과 공포가 있을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감내해야 할 짐이다."

 

"나는 찬성. 제츠보. 너는?"

"…이게 잘하는 짓인지 확신이 안 생겨. 정말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사실 하기와라 네가 지금 의연한 게 너무 신기해. 지금쯤이면 다 의미 없다면서 제2의 후루미나미 나몬으로 변했을 줄 알았는데."

"깡통이 뭘 알겠어."

 

하기와라 우시오는 제츠보가 주먹을 올리자 습격을 당한 참둘기처럼 꽁무니를 뺐다.

 

"아. 알겠어. 안 할게! 내가 지금 멀쩡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그냥 실감이 안 나서 그런 것도 있고. 누가 죽었니 마니 생각하느라 너무 바빴고 또… 나랑은 별 관련이 없는 이야기 같아서."

 

"너랑 별 관련이 없다고? 그건 또 무슨 뜻이야?"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랑 같은 맥락이지 뭐. 죽기 전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 생각할 필요가 없고. 죽은 뒤에는 어차피 존재하지도 않을 테니까 정작 나라는 사람은 죽음을 경험하지도 않는… 뭐 궤변 같기는 한데. 결국 우리가 헤쳐나가야 하는 살인 게임이 이거 하나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잖아. 다음 살인 게임이 시작돼도 그게 내가 하는 거냐? 나는 기억을 아무것도 못할 텐데."

 

하기와라 우시오는 기이한 방식으로 절망의 명제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솔직히 어떻게 탈출해야 할까 막막하긴 하다만… 하아… 어딘가 방도가 있겠지."

 

하기와라가 말을 다 끝낼 때쯤. 내 다이얼로그가 울렸다. 전화가 올 만한 사람이 달리 없었다. 카나리 케이토는 아까 용건을 전하고 갔으니 이바라 쿠리스가 아니라면 토키와 아유키였다. 나는 그 둘이 전할 만한 말을 떠올리며 다이얼로그의 화면을 보았다.

 

"이건…"

 

그리고 직후. 나는 제츠보의 전용실을 떠났다.

 

"어어어? 야. 저 새끼 어디 가!"

 

"히무로? 잠깐. 누구 전화인데?"

 

돌아왔다.

 

네가 돌아왔구나.

 

나는 문을 닫지도 않고 떠났다. 나는 전화를 받으며 달렸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나는 무작정 계단을 올랐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유즈미!"

 

마유즈미가 돌아왔다.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지? 분명 마유즈미의 다이얼로그였다. 그녀의 이름을 알 방법이 있었나? 그래. 분명 마유즈미의 언니 인격이 억압된 마유즈미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면, 마유즈미의 본명 또한 알고 있을 터였다. 귀띔해 준 것이군. 생각지도 못했지만 이것으로 되었다. 마유즈미는 죽지 않았다. 카텟은 부서지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말해야 했다. 말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입으로 뱉고 나서야 나는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을 정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캐롤은 자제심을 극도로 발휘한 끝에 스모어 두 개 반으로 간식 시간을 마무리지었다.

 

"이번이 마지막 깨달음이니 조금만 참으세요. 이번 것만 넘으면 탑으로 돌아가실 수 있어요!"

 

패트리샤의 응원인지 재촉인지 모를 소리를 들은 뒤 캐롤이 선 곳은. 무도회장이었다. 프롬 파티. 그녀는 그날 고등학교의 프롬 퀸으로 선발되어 무대 위에 올랐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왕관도 썼다.

 

"이봐 너. 괜찮아?"

 

캐롤의 옆에서 멀끔한 턱시도를 입은 남학생이 물었다. 킹카 토미 로스였다. 캐롤은 주변을 둘러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입은 옷을 보고 나서는 팔을 부르르 떨었다. 악취미가 따로 없었다. 캐롤은 그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

 

"아… 뭐야. 여기야?"

 

캐롤은 자신의 얼굴을 구겼다.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프롬 파티를 위해 그녀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아주 오래 공을 들였다. 내가 그것을 입고 파티에 나갈 깜냥이 될까. 파트너도 없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캐롤은 마침내 그것을 완성하고야 말았다.

 

그녀와 가장 가까웠던 친구의 말대로 그녀는 빛이 났다. 따돌림받던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등을 펴고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는 것으로 그녀는 무도회의 여왕 자리에 올랐다. 캐롤은 새로운 삶이 자신의 앞에 펼쳐졌으리라 믿었다. 미운 오리 새끼인 그녀가 백조로 변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날 돼지 피를 뒤집어썼다.

 

"너희는 여기에서 잊을 수 없는 손상을 입게 될 거야. 토미. 너희 모두 다."

 

캐롤은 영어로 말했다. 써본 적이 오래되었는데도 그녀의 입에서는 쉽게 영어가 나왔다. 한자를 배우기도 전에 미국으로 건너온 덕에 사실상의 제1언어가 영어임에도. 그녀는 걸스카우트 이래 서구의 일원이 된 적이 없었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캐리?"

 

"…캐롤 브라이트야. 제인 캐롤 브라이트."

 

캐롤은 캐리라는 호칭을 싫어했다. 고등학교의 거의 모든 이들이 캐롤을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책을 빼돌리거나 토마토를 던지는 식의 괴롭힘을 하면서.

 

토미는 그나마 착한 남학생이었다. 캐롤의 단짝이 협박했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기꺼이 캐롤의 파트너 역할을 해 주었다. 소위 제일 잘 나가는 남학생이었지만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토미는 마음 어딘가에서는 그녀를 딱하게 여겼고,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토미조차 캐롤을 캐리라 불렀다. 동양인이면서 금발이고, 빅풋처럼 키가 크고, 여름에도 늘 몸을 꽁꽁 싸매 땀을 흘리는 캐롤은 별종 중에 별종이었다. 그녀는 영원한 서구 사회의 이방인이었다.

 

캐롤은 분명 백조였다. 하지만 그녀는 백조와 오리가 애초에 다른 종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캐롤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철양동이 하나가 밧줄에 매달린 채 자신의 머리 바로 위에 떠 있는 것을 보았다. 피해볼까 했으나 어차피 일어난 일이고. 그녀는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었다. 

 

캐롤은 무력하게 자신의 머리 위로 피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피가 자신을 때릴 때 반사적으로 눈을 감는 일 뿐이었다. 순백의 드레스는 시뻘건 색으로 물들었다. 돼지의 피가 시간이 지나면 어떤 냄새를 풍기는지 사람들은 모른다. 그것을 온몸으로 뒤집어 쓴 캐롤이 아니라면 그 일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할 것이다.

 

양동이와 돼지 피는 처음부터 그녀를 노린 것이었다. 투표가 조작되었고, 누군가 그녀를 여왕으로 만든 다음 모욕하려 했다. 크리스 하겐슨과 빌리 놀란은 그날 벌어진 일로 체포되었으나, 캐롤은 그들 말고 다른 공조자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이미 한 번 겪은 일이니 두 번 겪더라도 다를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두 번째는 더욱 의연하게 받아들임으로써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일단 그 찝찌름하고 차가운, 퀴퀴한 것이 드레스와 브래지어에 온통 스며들어 등과 온몸에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을 느끼자 캐롤은 당시의 그 상황에 먹혀 버렸다.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피를 머금은 옷이란 그 자체로 기름지며 짰다. 그것은 알껍질 안의 새가 떨쳐내려 애쓰는 얇고 끈끈한 막과 같았다.

 

캐롤은 붉은 세계 안에 갇혀 있다가 눈을 비벼대며 간신히 눈가에 묻은 피를 지웠다. 손목을 썼지만, 손목마저 젖어 있었기에 그녀가 눈을 뜨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캐롤은 자기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서서히 인지했다. 철분 냄새. 기분 나쁜 금속 냄새. 그와 동시에 그녀를 덮친 것은 극도의 불쾌감. 그리고 수치심이었다.

 

"이게 뭐야!"

 

토미가 소리쳤다. 토미는 그나마 착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캐롤에게 벌어진 일을 보고 경악했다. 이런 짓을 저지른다니. 제정신이냐고 그는 속으로 물었다. 이건… 이건

 

이건 너무 심하잖아. 캐롤은 먼저 그 생각을 했다. 우연히 돼지 피를 뒤집어쓰는 사람은 없다. 그녀는 숱한 장난을 당해왔다. 화장실을 쓰다 철양동이로 걸레 빤 물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샤워실에 들어간 동안 누군가가 그녀의 라커룸을 뒤져 옷을 가져가기도 했다. 하지만 프롬 퀸으로 선정시켜 놓고 피를 뒤집어씌운다는 것은. 너무 심했다. 캐롤은 그런 일을 당해 마땅한 악행조차 저지르지 않았다.

 

그녀는 손뼉에 얼굴을 묻은 채 도망치고 싶었다. 순식간에 스포트라이트 아래까지 승격되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듯. 그녀는 드레스를 벗지도 않고 샤워를 해 몸에 밴 핏물이 전부 빠지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심코 앞을 보았다. 정확히는 아래를.

 

몇몇이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꼴 좀 봐. 저 표정 좀 보라고!"

 

진심으로 웃은 사람은 분명 소수였다. 무도회의 모든 사람들이 뼛속부터 그녀를 미워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공황적인 상황 속 군중들의 많은 이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에. 이건 정말 끔찍한 짓이잖아.

 

어찌할 바를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무도회를 지키겠다며 투입된 보안관의 입에서는 씹다 만 도넛이 후드득 떨어졌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환호와 박수로 가득 찬 체육관은 오직 경악으로 가득 찼다. 토미는 빨리 물이나 닦을 것을 가져오라며 소리를 지르다. 대들보 위에서 떨어진 철 양동이에 머리를 맞았다. 징을 치는 것 같은 큰 소리가 났다.

 

토미는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 장면은 마치 톰이 머리에 100톤짜리 모루를 맞은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누군가가 푸훗 웃었다. 그것은 웃기기에 웃은 것이 아니라 웃어야 할 것 같기에 터져 나온 웃음이었다. 긴장 상태를 해소하려는 히스테릭한 웃음. 무도회장에 모인 이들은 자신 앞의 현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톰과 제리가 그들 앞에 펼쳐졌고… 왜인지 몰라도 그 모든 일은 그들의 안에서 장난이라고 받아들여졌다. 아무튼 그 일은 당장이라도 캐리를 도와주러 달려가거나 그냥 웃거나 둘 중 하나였다. 캐롤은 정말 오랫동안 따돌림을 당해왔다. 괴짜를 놀리는 동안 모든 사람들은 하나로 결집된다. 그렇기에 개개인은 지독한 일이라고 느낄지라도 무도회장 안에서만큼은 특별한 장난이라며 웃을 수 있었다.

 

캐롤은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이 손가락질하는 것을 보았다. 아까까지 여왕님 만세라고 외치던 학생도 배꼽을 잡았다. 몇몇은 캐롤의 비상과 추락에 필요 이상의 쾌감을 느끼는 스스로를 경멸했다. 못난 자가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은 분명 놀랍고 경이롭다. 하지만 그 경이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면… 그건… 재미있는 일이었다.

 

자기 자신들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웃음 앞에 몇 초 더 노출된 캐롤의 안에서. 무언가가 끊어졌다.

 

그와 아주 유사한 표현이 영미권에도 있다. 스냅. 고무밴드 같은 것이 늘어나고 늘어나고 아주 반대편이 비쳐 보일 정도로 얇고 길게 늘어진 끝에 탄성이 다해 탁 하고 끊어질 때. 사람이 돌아버릴 때. 엄지와 중지로 내는 탁 소리처럼. 그녀도 끊어져 버렸다.

 

캐롤은 대들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는 언제나 좋은 사람이 되려고 했다. 남을 해칠 줄 모르는, 괴롭혀도 감내하는 양이 되려 했다. 하지만 이윽고 캐롤의 자비는 전부 닳아 버렸다. 고무는 끊어졌다. 누구도 그 참사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그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캐롤은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분노에 잠식되었다.

 

가장 먼저 스프링클러가 터져 나갔다. 화재를 대비해 작동돼야 할 그것은 아무 전조도 없이 마개가 떨어져 나간 채 물을 토해냈다. 캐롤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비명을 질렀다. 갈 곳 잃은 노여움에 그녀의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체육관 안의 모든 전구는 퍽 터지며 날카로운 껍질을 뱉어냈다. 통신도 끊겼다.

 

체육관은 순식간에 어둠에 뒤덮였고, 그 안의 모든 이들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몇몇은 어딘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체육관을 나가려 했지만. 그들의 본능은 대신 캐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 속의 유일한 광원은 캐롤이었다.

 

사람들은 캐롤의 눈과 머리카락이 빛을 내는 모습을 보았다. 몇몇은 공포 또는 경외 때문에 다리의 힘을 풀었다. 몇몇은 생각했다. 이거 꿈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만약 현실이라면. 캐리는 대체 무엇인가? 체육관에서 탈출하려는 이들이 그 발광 아귀의 빛에서 눈을 돌렸을 때. 그들은 자신이 체육관에서 나갈 수 없음을 느꼈다. 누구도 체육관에서 나가지 못했다. 캐리가 그걸 원했고. 말 한마디 없이 그들은 캐리의 생각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유전자 차원에서 그녀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왜인지 그래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캐롤이 화를 내자. 체육관은 어둠에 잠겼다.

 

당시 무도회장에 있던 110명의 사람들은 무도회 당일의 일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은 당일 자정 전부 혼수상태로 발견되었다. 병원으로 옮겨진 사람들은 하나같이 피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피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몸을 벅벅 긁어대곤 했다. 그 증상은 몇 년이 지나도 나아졌다는 기록이 없었다. 그중 42명은 정기적으로 금색의 괴물이 자신의 목을 조르는 꿈을 꾸었다. 28명은 몽유병에 시달렸다. 7명은 남들에게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인다며 정신과를 찾았다. 토미 로스는 4주간 혼수상태에 있다가 겨우 깨어났다.

 

피해자들에게 외상보다는 정신적인 후유증이 남은 것으로 보아. 또 여러 검사를 통해서 당국은 프롬 파티가 정체 모를 약물 테러를 당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용의자는 쉽게 특정되었다. 체육관 근처의 감시 카메라에 캐롤의 동급생. 크리스 하겐슨과 빌리 놀란이 집단 환각 발생 직전으로 추정되는 때에 체육관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찍혔기 때문이다. 크리스와 빌리의 자택을 수색한 결과 숨겨놓은 LSD와 엑스터시. 향정신성 약물들이 발각되며 사건은 종결되었다.

 

하지만 크리스와 빌리는 본인들은 그저 돼지 피를 캐리에게 뒤집어씌우는 장난을 했을 뿐이고, 정작 사람들을 쓰러트린 것은 캐리라고 주장했다. 캐리는 원래부터 으스스하고 기이한 점이 있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주장은 어디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크리스와 빌리는 각각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들은 인근 청소년 교도소에 수감되고 2년 뒤 쇼생크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크리스 일당이 돼지의 혈액을 훔친 출처에서 인조 혈액 분야를 연구하던 한 학생이 연관되었다. 그녀는 용의 선상에 올랐지만, 곧 저들이 나의 성과를 가로챘을 뿐이라는 학생의 반론과 정황증거로 인해 그녀와의 연관성은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 학생은 캐롤의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친구였던 것이다.

 

그 일이 있었던 이후 캐롤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났다.

 

캐롤은 그날 바닥에 쓰러진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자기 자신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다. 어쩌면 그들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캐리는 괴물이며, 별종이다.

 

그런데 그녀는 이제 프롬 파티의 그녀보다 강했다. 키와 몸도 더 커졌고 가진 힘은 그것보다 더 컸다. 자신이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도 그녀는 전부 알고 있었다.

 

너무 강력해. 그녀의 일부분. 다른 여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힘은 너무 강력해. 이대로라면 탑에 돌아갔을 때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감시자에게 사냥당하고 말 거야. 그녀의 생각은 피해망상보다 사실에 가까웠다. 그녀가 히무로라 할지라도 그런 선택을 할 테니까.

 

캐롤은 그렇기에. 자신을 억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총에 맞고 싶지는 않았다. 참으며 사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모든 역량과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간, 그녀는 스스로를 통제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아무 양보도 없는 괴물처럼 굴테고. 탑은 곧 두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죽고 죽이려 할 것이다.

 

캐롤은 스프링쿨러의 물이 자신을 때리는 것을 느끼며 걸었다. 거진 한 시간을 들여 손질한 머리카락도, 꼼꼼하게 만들려 애쓴 예쁜 드레스도, 서툰 화장마저도 전부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녀의 몸에서는 피가 빠지지 않았다. 그것은 정말. 지독하고 지독해 믿을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그저 차가운 물이 몸을 때리면서 몸이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캐롤은 자신의 어깨를 스스로 끌어안았다.

 

문득 그가 그녀에게 불러주었던 노래가 떠올랐다. 그는 탑에서도, 탑에 오기 전에도 그것을 그녀에게 불러주었다. 캐롤은 그 첫 구절을 불렀다. 음울한 음색이었다.

 

"…Am I blue?"

 

 

 

 

 

 

캐롤에게 희소식이 있다면 영안로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녀는 본래의 의상을 되찾았다는 것. 그리고 카이다 쿠로하가 나나시를 옆에 둔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나시는 여전히 기절해 있었다.

 

"나왔구나! 이봐. 나는 당신이 내 가족이라는 사실을 아직 못 믿겠어. 못 믿는다고. 그냥 나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일 수도 있잖아.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도 기억이 안 난단 말이야.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도 몰라. 당신은 이 탑에서 처음 봤어. 심지어 금발이잖아. 나는 검보라색인데. 이게 자매한테 가능한 일이긴 하냔 말이야. 그리고 당신은 왜 나를 못 알아봤는데? 당신이 댄 증거는 정말 믿기 어려워. 당신이 내 진짜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건데?"

 

"치나미. 꼭 지금 믿지는 마. 네가 믿고 싶을 때 믿으면 돼. 어차피 내가 너를 지켜줄 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카이다는 작게 콧방귀를 뀌며 캐롤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캐롤은 카이다가 이미 머릿속으로는 그녀가 자신의 언니일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걸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라 추측했다. 또 너무 듣기 좋은 이야기라 일단 의심하고 보는 카이다의 고질병이 드러난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면 돼? 얘. 너한테 중요한 사람이야? 나는 이놈을 죽여버리고 싶은데."

 

"참아 줘. 부탁할게. 그리고 치나미. 잠깐 칼 있으면 빌려줄래?"

 

카이다는 캐롤의 말에 경계심을 살짝 드러냈다.

 

"칼? 칼은 왜? 나 찌르려고?"

 

"내가 너를 왜 찔러 쓸 데가 있어서 잠깐 빌리려는 거야."

 

"있긴 한데. 대체 어디에 쓰려는 거야?"

 

카이다는 자켓의 안주머니에서 단도를 하나 꺼내 조심스럽게 캐롤에게 건넸다. 캐롤은 그것을 받고 벽을 향해 걸어갔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카이다를 뒤로 하고 캐롤은 벽에 자신의 왼손을 가져다 대었다.

 

캐롤은 기억을 자르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재단이 요긴하게 사용한 기억 초기화의 절차와 같은 맥락에 있는 기술. 기억을 자르는 작용은 똑같지만 코드에 따라 작동하는 카이다 쿠로하의 것과 달리. 샤이닝의 운용이 필요하며 또 보다 직관적이기도 한 기술이었다. 사용법은 간단했다.

 

잊고 싶은 기억을. 영혼을. 신체 부위에 가둔다.

 

약화시켜야 하는 정신조작의 능력들을 한 곳에 모은다. 자잘한 것들을 잊고 싶다면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자르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그녀가 잘라내려는 것들은 고작 그런 부위에 담을 수가 없었다.

 

몸을 잘라야 했다.

 

캐롤은 벽에 대고 있는 자신의 왼손을 유심히 보았다.

 

캐롤은 왼쪽 중지를 선택했다.

 

캐롤은 자신의 상체를 감싸고 있는 멜빵 치마를 끌어올려 자신의 입에 물었다. 그리고 왼손은 중지 하나만을 펼친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신체 손실의 공포가 잘라야 하는 것을 확실하게 하려는 집중을 흐트러뜨렸다.

 

하지만 해야만 해.

 

캐롤은 오른쪽 손을 높게 들고. 이를 악물었다.

 

피가 튐과 함께 캐롤의 왼쪽 중지가 잘려나갔다.

 

그 순간. 캐롤은 자신이 무엇을 잊으려고 했는지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기억 절단 시술은 성공했다.

 

캐롤은 피가 철철 흘러나오는 자신의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 쥔 채.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손가락을 발로 툭 찼다. 그 손가락 안에 든 것은 재앙이었다.

 

카이다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캐롤에게 달려가 발을 동동 굴렀으나. 그녀는 본디 사람을 자르는 역할이지 고쳐주는 역할은 아닌지라 아무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어. 어. 뭐야! 왜 그랬어! 어. 어쩌면 좋지?! 무슨 일이야. 어쩌려고 그래! 다시 붙일 수도 없는데! 아. 아. 잠깐. 일단 지혈! 그래! 피를 막아야 해. 어디 수건 없나? 일단 따라와. 양호실로 가게! 다시 붙일 방법이 어떻게든…"

 

카이다의 손이 바닥에 떨어진 손가락으로 향하자. 캐롤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손대지 마. 치나미! 손 치워!"

 

카이다는 캐롤의 말에 고개를 홱 돌려 캐롤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 카이다는 눈치를 보며 캐롤의 손가락을 주우려다 말기를 반복했다. 딕테이트는 통하지 않았다. 역시 시술은 성공했다.

 

"왜 그러는데?"

"고무로 감싸서 옮겨야 해… 고무장갑 안에 넣자. 다른 사람의 몸에 닿아선 안 돼. 특히 토키와 씨에게는 절대 닿아선 안 돼."

 

"토키와? 그 새끼가 왜?"

"이제는 나도 몰라… 하지만 내 말 명심해야 해. 토키와 씨에게만은 절대로 안 돼. 그 일은 무슨 수를 써서도 막아야 해."

 

캐롤은 본인이 말하고도 스스로의 말에 당황했다. 그저 그래서는 절대 안 된다는 느낌만이 들었다. 캐롤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잘린 손가락의 아픔을 견뎌내려 애썼다.

 

"미안한데 치나미. 양호실에서 구급상자 하나만 가져다 줄래? 내 손가락을 두고 가는 건 너무 위험이 커서…"

 

"알겠어. 알겠어! 빨리 갔다 올 테니까 출혈이나 막아! 죽으면 안 돼. 알았지!"

 

그 말을 남기고 카이다는 계단을 날아서 내려갔다. 카지노의 휴게실을 경유하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였다. 캐롤은 쪼그려 앉은 채로 불타는 것 같이 뜨거워진 절단면을 억눌렀다. 피가 꿀럭꿀럭 새어 나왔다.

 

피. 피다. 캐롤은 지난날의 악몽이 되살아나려 하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피는 싫다. 남이 흘린 걸 보는 건 끔찍하지만 내게 묻은 피를 보는 건 죽을 만큼 괴롭다. 싫다. 싫다. 아. 싫다. 치나미. 제발 빨리 와. 캐롤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싼 채 두 손을 움직여 자신의 몸의 곳곳을 긁어댔다. 무언가를 떼거나 낚아내고 싶어 안달을 냈다.

 

나를 버려두지 마.

 

네가 버려지는 걸 두려워하는 만큼 나도 버려지는 게 두려워.

 

제발 그러지 마. 치나미. 도와줘. 도와줘

 

"…이리 와요. 도와줄게요."

 

캐롤은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섬유가 부욱 찢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직후. 터치가 연결되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감싸기를 부드럽게. 그리고 쥐기를 가혹하게 상처 부위를 틀어막았다. 캐롤이 고통에 짐짓 저항하는 동안에도 나나시는 팔의 힘을 풀지 않았다.

 

캐롤의 중지 마디에 쑤셔넣어진 것은 찢어진 나나시의 옷이었다. 그는 면적이 조금 줄어든 것에 개의치 않으려 애쓰며 캐롤의 비명과 신음을 흘리려 애썼다. 연결된 터치로 인해 나나시는 캐롤의 고통을 거의 동등히 느낄 수 있었다. 둘 모두 식은땀을 흘렸다.

 

"손을 위로 올려요. 캐롤 씨. 심장보다 팔을 위로 놓아야 피가 멈춰요."

 

나나시는 캐롤의 팔을 강제로 끌어다 높게 들도록 시켰다. 고통이 너무 심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금속 조각들로 너덜너덜해진 복부에 천을 쑤셔 넣을 때 충분히 틀어막지 못한 것은. 금속이 몸 안에 들어있는 고통보다 상처 안에 천을 쑤셔 넣는 지혈이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었다. 본인의 육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지혈해야만 의미 있게 출혈을 막을 수 있었다.

 

"허억… 허억… 나나시 씨… 흐윽. 나나시 씨"

 

나의 영웅.

 

나의 파괴되지 않는 것.

 

재회.

 

"나… 나 진짜 무서웠거든요…?"

 

캐롤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어른스럽게 나오는 몇 방울의 눈물보다는 어린이가 흘리는 서러운 눈물이었다.

 

 

 

 

 

"제기랄. 후루미나미 나몬. 앞일에 관한 걸 쪽지 따위에 남겨 놓다니. 이런 걸로 어떻게 탑을 지키라는 말이야? 게다가 이해할 수 없는 내용뿐이잖아. 캐롤 씨가 살아날 경우 필연적으로 탑은 두 개의 파벌로 갈라서게 된다… 캐롤 씨는 되살아날 것이다 나나시와 카이다는 밖으로 나올 수 있지만 마유즈미는 나올 수 없다. 여기까지는 이해했어. 그런데 캐롤 씨의 힘을 빼앗으라는 게 대체 무슨 뜻이지? 내가 그걸 어떻게 해? 그렇게 강대한 힘을 가진 사람을. 나한테 정신 조작 능력이 어디에 있어? 말이 안 되잖아… 내가 어떻게 히무로와 캐롤 씨를 동시에 견제할 수 있다는 거야?"

 

 

 

 

 

 

"…마유즈미."

 

나는 검은 머리, 흰 하카마, 검은 치마에 총을 찬 소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마유즈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여자였다.

 

"언니 쪽이야. 히무로 시라베. 괜히 헷갈려서 입맞춤을 하지는 마."

 

그리고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의 의아하다는 듯한 목소리를 들었다.

 

"뭐야. 어떻게 살아있어?"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Am I blue?"

END

 

 

 

 

제가 죽인 게 아닙니다. 그리고 흑막은 우리 안에 숨어 있습니다.

 

이 편지를 가장 먼저 발견하신다면,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고 가지고 있으세요. 그 이유는 제가 알려져선 안 될 사실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릴 경우 모노로그의 낙인에 의해 제가 죽기 때문에. 이 편지가 공개되는 것은 제가 죽은 이후 조사 도중일 것입니다.

 

이 살인 게임은 끝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제 처형 영상이 있는 것도, 탑 지하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크레딧이 있는 것도 전부 그 때문입니다. 모노로그가 진행했다는 유사한 게임들은 말 그대로 저희가 끝없이 죽고 죽인 이전 게임들을 칭합니다.

 

히무로 씨는 잠시 기억을 되찾았을 때 탑의 높이를 두려워했습니다. 저는 한 번 루프가 진행될 때마다 탑이 한 칸 추가되는 것은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저희는 끝없이 살인 게임을 반복하고 있는 셈입니다. 크레딧 창고에 크레딧이 널린 이유가 있지요.

 

그런데 왜 저희가 죽고 죽여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 이유가 저희들의 과거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바다뱀은 히무로 씨를 개조했다는 조직에 속해 있었습니다. 카이다 쿠로하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23T5U130 씨를 제외한 열다섯 명 중에 그 조직에 속했던 사람이 세 명 뿐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저는 저희 열다섯 명 전부가. 살인 게임에 오기 전에는 초고교론자들의 조직에 속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히무로 씨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카텟 기관과 적대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왜 23T5U130 씨는 저희를 구해주려 오셨을까요?

 

애초에 구원이 아니라면 어떻습니까?

 

살인 게임을 감독하는 사람은 살인 게임 내부에 무조건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데 카텟 기관은 이 가상 현실에 개입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이 살인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살인 게임의 배후로 카텟 기관을 지목합니다. 저희는 초고교론자들의 조직에서 활동한 책임을 물어. 그 죗값을 영원히 가상현실에서 치루고 있습니다.

 

이 정보를 알릴지. 알리지 않을지는 당신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세요.

 

행운을 빕니다.

 

이바라 쿠리스는 자신의 손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