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루미나미 나몬: 4층.
후루미나미 나몬: 5층. 어때요. 참 쉽죠?
하기와라 우시오: 와! 고마워요 밥 아저씨!
후루미나미는 재빠르게 그림을 그려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이제 그녀는 가짜 콧수염까지 달고 있었다. 누가 봐도 가짜라는 느낌이 드는, 플라스틱 질감의 가짜 콧수염. 아까 탐정이 사냥모자를 쓴 것처럼 배역을 연기할 때마다 착용하는 소품이 증가하는 모양이다.
4층과 5층의 구조는 8개의 방이 있던 2층과 3층과는 달리 큰 방이 2개 있었고, 특이하게도 5층에는 위로 올라갈 계단이 없었다. 막아놓은 차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없었다. 계단이 있어야 할 곳에는 기둥과 꽉 닫혀 있는 천장만이 존재했다.
이바라 쿠리스: 뭐야. 이 뒤로는 못 가? 이렇게 좁은 곳에서 살라니. 구려어! 다음 층으로는 언제 갈 수 있는 거야!
살인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다음 층으로는 영영 향하지 못할 터였다. 알파걸의 살인 게임과 같다면 그랬다.
우리는 창고 앞에서 서서, 몇몇은 벽에 등을 기대고 쪼그려 앉아서, 잡담을 했다. 토키와와 모리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창고 앞에 도착한 우리들은 먼저 창고를 조사하다가 토키와와 모리에게 발견한 것들을 길게 설명해주기보다, 그들이 올 때까지 기다린 뒤 그들과 함꼐 조사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에 휘말린 탓에 제대로 된 자기 소개도 못한 이들도 있었기에, 우리는 저마다의 대화를 나누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하기와라. 이바라. 그래서... 밥 아저씨가 누구야?
하기와라 우시오: 엥? 밥 아저씨도 몰라? 그림 잘 그리는 아저씨 있잖아.
이바라 쿠리스: 아까 후루미나미가 썼던 것처럼 뽀글머리를 하고 있는 아저씨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우와. 고마워! 너희 진짜 아는 거 많구나!
이바라 쿠리스: ...뭔가 멕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네.
하기와라 우시오: 다른 녀석들이 협상이나 프로파일링 같은 분야에서 일류가 되는 동안 우리는 밥 아저씨밖에 모른다 이거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에이. 너무 자책하지 마. 다들 저마다의 분야가 있는 법이니까. 히무로도 나처럼 모르는 거 킹왕짱 많아.
히무로 시라베: 그 말은 사실이야. 나도 그 밥이라는 사람을 몰라.
이바라 쿠리스: 에에에?! 너도 밥 아저씨를 몰라? 왜 몰라? 다스 베이더는 알아? 스타워즈에 나오는 사람!
히무로 시라베: 다스 베이더가 누구지?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존나 신기하네. 마유즈미는 그렇다 치고 너는 왜 몰라? 뭘 하고 살았길래 밥 아저씨도 모르고 스타워즈도 몰라?
"이 정도의 정보밖에는 아무것도 접할 수 없었다고? 이건... 이건 거의 세뇌교육 수준이잖아. 아니. 이건... 세뇌교육 수준인 게 아니라 그냥 세뇌야."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들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내게 그런 조취를 취할 필요가 있었겠지. 혹시나 잘못된 편에 서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
"그렇게 무덤덤하게 넘길 일이 아니야! 히무로. 우리가 널 조금만 늦게 발견했어도 넌..."
"그들이 원하는대로 됐을 거다. 그도 너에게 말하지 않았나? 청소년기가 가장 중요한 때라고. 청소년기에 주입한 것들이 실험의 성공과 실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고. 카텟 기관에 있어서는 다행이지. 더 늦기 전에 나를 확보할 수 있었으니."
"그게 들렸어?"
"실험실은 방음이 되지 않는다. 그 정도 거리에서 나눈 대화를 듣지 못했을리가 없지. 네가 기관원들에게 지시한 것들도 전부 들을 수 있었다."
"...세상에. 그걸 전부 들었어?"
"그것이 내가 네게 감사를 표하는 이유이다. 네 지시가 아니었다면 난 그 자리에서 사살당했을 테니까."
마유즈미 나데시코: 괜찮아. 너희들이 있으니까 나랑 히무로도 요즘 대세인 것들 배울 수 있어!
하기와라 우시오: 글쎄. 몇몇 것들은 모르는 게 더 좋을 텐데...
이바라 쿠리스: 매체의 세계는 깊고도 암울하단다. 마유즈미여!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 그렇게 쫄아야 할 정도야?
야가미 토가: 저 분들이 겁을 주는 정도까지는 아니겠으나 대중매체에는 분명한 어둠이 존재합니다. 영화계, 방송계, 가요계, 어디든 예외는 없죠. 특히 영화계가 심합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왜?
야가미 토가: 영화계의 큰 손이 좋지 못한 배후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죠. 그들은 시장 한 켠을 차지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을 지지하는 언론도 다수고요.
하기와라 우시오: 어허... 이 친구 또 선을 넘네.
야가미 토가: 당신도 그 사건을 안다면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텐데요.
하기와라 우시오: 아무리 그래도 당사자가 몇 걸음 거리에 있잖아. 좀 사리자. 좀.
하기와라는 입꼬리를 움직이고 눈동자를 돌려 누군가를 조심스럽게 가리켰다. 후루미나미였다.
이바라 쿠리스: 뭐야? 그 사건. 그 사건. 지들끼리만 아는 얘기 하고.
하기와라 우시오: 내가 '그 화법' 을 쓰면서 남 복창 터지게 할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 날이 오네... 야가미. 네가 그 사건을 파헤치든 쟤 상처를 파헤치든 너 알아서 해. 어차피 내가 말려봤자 넌 듣는 척도 안 할 거잖아?
하기와라 우시오: 그런데 남들 있는 데에서 하지는 말자고. 여기 어린이도 보고 있잖아!
카나리 케이토: 야. 왜 날 가리키는 거냐?
칸나즈키 시노부: 맞아! 우리는 이미 다 성인이라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건 아닌데...?
야가미 토가: 하아... 그래요. 이런 분위기에서는 어떤 제안도 진지하게 들리지 않겠군요. 알겠습니다.
후루미나미 나몬: 무슨 일이야? 범인이 내게 도전장이라도 보냈어?
하기와라가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내뱉으며 그녀의 주의를 끌자 대화의 주제에 대한 흥미도 사그라들었다. 그래서 난 다른 것을 알아보려 했다.
히무로 시라베: 나이토. 초고교급 승부사는 정확히 어떤 재능이야?
나이토 유즈루: 승부사라. 이거 그냥 체육계 사람들이 나한테 붙힌 별명이었는데 그게 진짜 초고교급 재능이라고 불리게 될 줄은 몰랐지...
나이토 유즈루: 자세히 얘기하기엔 좀 쑥스러운데. 난 체육계 초고교급 재능을 가졌던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종목으로 승부를 걸곤 했어. 사실 거의 도장 깨기였지.
히무로 시라베: 왜 그랬는데?
나이토 유즈루: 자세히 얘기하기엔 좀 쑥스럽다니까. 크흠!
히무로 시라베: 그러면 더 안 물어볼게. 그보다 승부의 승률은 좋지 않았을 것 같은데?
나이토 유즈루: 좋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바닥이었어. 내가 아무리 그 종목을 연습해도 상대는 초고교급이었고, 대부분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거든.
나이토 유즈루: 연륜의 차이란 게 뼈저리네 느껴지더라고. 나도 어디 가서 약하다는 소리는 안 듣고 살지만 그 분들이랑 싸우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 아. 내 짬으로 비빌 게 못 되는구나. 쌓아온 게 다르구나.
나이토 유즈루: 어줍잖게 덤벼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구나. 감이 빡 하고 오더라고. 그래도 포기하긴 싫었어. 그래서 계속 운동하면서 계속 찾아가 승부를 걸었지.
히무로 시라베: 그 분들은 네 승부를 받아주셨어?
나이토 유즈루: 거절해도 받아줄 때 까지 계속 찾아갔거든. 처음에는 그냥 양아치가 대놓고 승부 요청이랍시고 도전장 내놓으니 단칼에 거절하시던 분들도 나중에는 귀찮아하시면서도 승부를 받아 주셨어. 다들 고마운 분들이지.
나이토 유즈루: 그렇게 지내다보니 내 소문이 아주 조금 퍼졌나 봐. 한 분야에 특출나지는 않은데 일반 고등학생 수준은 뛰어넘었고, 승부를 걸고 다니네? 그럼 '초고교급 승부사' 라고 부르자. 그렇게 된 거지.
나이토 유즈루: 처음에는 그냥 별명으로 놀리는 느낌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이게 내 재능이라고 불리고 있더라. 그게 다야. 김새지?
히무로 시라베: 아니. 상당히 흥미로운데...
그는 희망봉 학원에 발탁된 것이 아닌, 그저 초고교급 승부사라고 불릴 뿐이었다. 이것은 희망봉 학원이 몰락한 이후 초고교급의 형태와 매우 유사하다. 비공식적인 지표. 다른 이들도 나이토와 비슷한 경우일까? 나중에 더 알아봐야겠다.
카나리 케이토: 야. 너 내 보디가드 해.
야가미 토가: 네? 보디가드요?
나이토 유즈루: 으. 저거 또 시작이네...
카나리 케이토: 그래. 너 정도면 충분해.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훌륭하지. 총에 맞아도 살아남기 위해 단련했다고 했지?
카나리 케이토: 너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다면 보디가드로 손색이 없어. 페이는 섭하지 않게 줄테니 날 보호해.
야가미 토가: 고려해보겠습니다. 그러나 전 머리를 쓰는 사람이지 몸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명심하셔야 합니다.
야가미 토가: 저 말고 차라리 나이토 씨를 쓰는 건 어떠십니까? 그라면 당신이 수족처럼 부리기도 수월할 텐데요.
카나리 케이토: 그래. 나도 그 생각을 제일 먼저 했는데, 본인이 싫다니 어쩔 수가 있나.
나이토 유즈루: 야. 솔직히 너무 재수가 없잖아. 돈 줄테니 자기 지키라고 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데 그럼 순순히 예. 알겠습니다. 라고 하냐?
카나리 케이토: 너처럼 거절하는 게 이상한 거야. 내 옆에 계속 붙어있기만 하면 되는 일에 높은 봉급을 준다는데 거절하는 게 비정상적인 거라고.
나이토 유즈루: 그 놈의 싸가지만 어떻게 했으면 네가 땡전 한 푼 없었어도 도와줬어 인마.
카나리 케이토: 너 진짜 멍청하구나. 내가 돈을 안 주면 네겐 날 지킨다고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잖아.
카나리 케이토: 즉. 네가 날 배신했을 때 네게 생기는 손실도 없지. 그러니 넌 언제든지 날 배신할 수 있어. 내가 그런 사람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나이토 유즈루: ...이건 뭔 개좆소리여?
캐롤 브라이트: 저기... 카나리 씨. 이건 제 생각인데요.
캐롤 브라이트: 혹시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시는 건가요?
옆에서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던 캐롤이 카나리에게 말을 걸었다.
카나리 케이토: 넌 또 무슨 소리야? 난 보디가드가 필요하다고. 내가 금전을 지원하면 내 신변을 보호해줄 보디가드 말이야. 딴 소리 하지 마.
캐롤 브라이트: 그래도... 다른 생각이 드신다면 제 방에 찾아와주세요. 상황이 상황이니 상담료는 받지 않을 테니까요.
캐롤 브라이트: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지만요.
카이다 쿠로하: 그 상담에서는 터치를 쓰게? 나랑 미도리카와, 히무로한테는 절대로 안 쓰면서?
캐롤 브라이트: 아뇨. 터치를 쓰지 않더라도 충분히 개선될 수 있는 사람에겐 터치를 굳이 사용하지 않죠. 꼭 써야 할 때엔 써야겠지만요.
카이다 쿠로하: 참 착하시네. 참 올곧아. 다들 너무너무 착해. 아주 성인군자셔. 흉기를 관리해야 한다던가 그런 소리 듣고 군말없이 따라오고 말이야.
히무로 시라베: 너도 그렇잖아?
카이다 쿠로하: 난 그래도 뒤늦게 제정신을 차렸지. 내가 왜 저 샌님이 시킨다고 곧이곧대로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딱 들더라고.
카이다 쿠로하: 너흰 그런 생각 안 들어? 너희가 왜 창고를 조사해야 해? 왜 너희가 그 녀석이 하는 말을 들어줘야 하냐고. 왜 굳이 손해를 봐야 하냐고.
야가미 토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군가가 죽는 일은 막아야 하니까요.
카이다 쿠로하: 그 질서는 절대 오래 못 가. 살인을 막기 위해 흉기를 없앤다고? 흉기가 창고에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여기 있는 흉기들을 다 없애도 의미는 없다고.
하기와라 우시오: 모래는 거냐?
카이다 쿠로하: 모르는 척 하지 마. 너희 전용실에도 있잖아? 흉기.
너희 전용실에도.
히무로 시라베: 왜 그렇게 확신한 거야?
카이다 쿠로하: 어지간하면 너희들이랑 어울리고 잘 살아 보려고 했는데, 역시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가 보다. 팔자 한 번 씨발...
히무로 시라베: 말 돌리지 말고. 카이다. 왜 다른 이들의 전용실에 흉기가 있을거라 확신한 거야? 대답해.
카이다는 나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멈춰. 카이다.
카이다 쿠로하: 왜? 어차피 나 하나가지곤 누굴 죽일 수도 없어. 죽일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죽이냐? 너희들끼리 잘 뭉쳐다니면 아무 문제 없다고.
캐롤 브라이트: 카이다 씨. 뿔뿔이 흩어지면 당신만 위험해져요. 어디 가실 생각인가요?
카이다 쿠로하: 흰 물건 찾으러 간다. 아까 저 깡통이 말했던 거.
마유즈미 나데시코: 흰 물건...? 아. 알겠다! 카이다의 목적을 알겠어!
카이다 쿠로하: ...뭐?
마유즈미 나데시코: 카이다는 창고 조사에 착수하기보다는 먼저 흰 물건을 찾아보려는 거야! 왜냐하면 우린 16명이잖아? 한 명 정도는 빠져도 창고 정리가 엄청나게 느려지지는 않을 거란 말이지.
나이토 유즈루: 뭐, 쟤 힘이 세니까 그만큼 인력의 손실이 생기기는 하겠지만... 23T가 워낙 규격외로 세니까 충분할지도 몰라.
마유즈미 나데시코: 바로 그거야! 내가 혼자 움직여서 흰 물건을 찾아낼게! 이게 카이다의 생각인 거야! 단지 그렇게 말하기에는 쑥스러울 뿐이야. 그래서 저렇게 틱틱대는 거고!
하기와라 우시오: 카이다... 다시보니 선녀 같다!
아니. 그녀의 행동으로 보아 그것이 목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분명 다른 목적이 있었다. 단지 그것을 알 수 없을 뿐이었다.
카이다 쿠로하: 그래. 마음대로 착각하고... 난 이제 간다. 그러니 말리지 마.
마유즈미 나데시코: 카이다.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조심조심 다녀. 알겠지?
카이다 쿠로하: 그래. 그래. 닥쳐. 그리고. 너희 아까 뿔뿔이 흩어지면 위험하다고 했냐? 하. 너희 모두 나나시 어디있는지부터 좀 둘러보지 그래?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나시...? 어라. 얘 어디갔어?
이바라 쿠리스: 어. 그러게. 중간에 딴 길로 샜나본데.
하기와라 우시오: ...어라. 이거 예감이 안 좋다?
캐롤 브라이트: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나나시 씨는 아까 토키와 씨와 모리 씨를 따라가시는 것 같았어요. 아마 별 일은 없을 거에요.
이바라 쿠리스: 어휴! 다행이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는 줄 알았어!
카이다 쿠로하: 걔도 그 쪽에 있으면 말 다 했네. 나 하나 사라져도 위험한 일은 없다. 얘기 끝. 이제 난 흰 물건 찾으러...
카이다는 태연히 말하며 어디론가 향하고자 했으나. 곧 그녀를 모르는 목소리에 저지되고 말았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거짓말은 나쁜 일이야. 카이다.
누구와도 얘기를 나누고 있지 않던 미도리카와가 카이다에게 말을 걸었다.
카이다 쿠로하: 거짓말이라고?
미도리카와 아쿠토: 넌 말로는 흰 물건을 찾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럴 생각이 없어. 너. 네 전용실로 갈 거잖아? 그리고 만약 정말로 네가 흰 물건을 찾으려고 한들, 그 의도는 마유즈미가 예상한 것과 동떨어져 있겠지.
미도리카와 아쿠토: 하지만 네가 뭘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어. 캐롤의 터치를 피하더라도, 언젠가 우리는 다른 곳에서 덜미를 잡힐 거야.
카이다 쿠로하: ......뭐야. 너?
미도리카와 아쿠토: 너와 나는 업보로부터 도망칠 수 없어. 어쩌면 이미 찾아왔을지도 모르지.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에 몰린 것부터가. 너와 나의 업보야.
미도리카와 아쿠토: 너도 내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 그냥 여기 남아.
카이다는 미도리카와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눈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에 비해 미도리카와는 평온해 보였다.
그와 카이다는 면식이 있는가? 적어도 미도리카와는 카이다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산업스파이였던 카이다를 알고 있다면, 미도리카와 역시 비슷한 계열에 종사하는 것으로 파악해도 괜찮을까? 그것으로 그의 재능을 유추할 수 있을까?
그렇게 쉽게 결론을 내릴 순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고갈되었다. 이 탑에선 심지어 자신의 기억조차 신뢰할 수 없었으니. 확실하지 않은 것은 무조건 보류해 둬야 했다.
카이다는 고개를 푹 숙이고, 벽 근처로 아무 말 없이 걸어가 쪼그려 앉았다.
야가미 토가: 미도리카와 씨. 카이다 씨와 면식이 있으신가요?
미도리카와 아쿠토: 맞아. 저 쪽은 날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카이다 쿠로하: 너... 설마 내 고아원 출신이냐?
미도리카와 아쿠토: 고아원? 아니야. 그렇지만 굳이 네가 고아원에서 자랐다는 걸 알려줘서 고맙게 됐네.
카이다 쿠로하: 적당히 해. 이 새끼야.
미도리카와 아쿠토: 넌 지금 내게 큰소리 칠 입장이 아니야. 카이다. 그게 본명도 아니잖아.
야가미 토가: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숨기고 있는 게 너무나도 많아요.
야가미의 말에 미도리카와는 카이다에게서 그로 시선을 돌렸다.
야가미 토가: 초고교급 재능이 무엇인지, 초고교급이 맞기는 한지, 카이다와는 어떤 관계이기에 그녀를 알고 있는 건지. 의문은 늘어만 가는데 당신은 무엇에도 대답할 생각이 없습니다.
히무로 시라베: 분명 전용실을 공개할 수 없다는 이유와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이유는 큰 관련이 있겠지.
토키와가 이 곳에 있었다면 분명 그를 추궁하지 말라고 우리를 만류했겠지만, 그는 지금 이 곳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이야말로 그에게서 대답을 들을 최적의 순간이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내가 지금 그걸 말해버리면, 카이다를 막을 수단은 사라져.
야가미 토가: 그게 무슨 뜻입니까?
미도리카와 아쿠토: 카이다가 자신의 비밀들을 공개하는 순간, 나도 내 비밀을 숨길 이유가 없어져. 그 때는 이 마스크를 벗고 너희들에게 모든 진실을 말하겠어.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의 비밀과 네 비밀은 별개야.
미도리카와 아쿠토: 그만. 내가 그녀를 억제할 수 있는 이유를 잘 생각해. 더 캐묻지 말고.
미도리카와 아쿠토: 이야기는 여기까지. 그녀를 적으로 돌린 이상 난 이제 말을 아끼겠어.
미도리카와는 그대로 자신의 회색 마스크에 검지를 댔다... 묵언의 의사 표시였다. 더 추궁해도 도리가 없을 거라고, 나는 직감했다.
야가미 토가: 모리 씨의 빈자리가 느껴지게 될 줄은 몰랐군요. 그녀라면 어떻게든 대답을 들으려고 했을 테니까요.
하기와라 우시오: 빈자리... 라고 해야 되나?
나이토 유즈루: 걔가 여기 있었으면 아주 난리가 났겠지. 너는 지금 공리를 해치고 있다. 막 이러면서 눈 뒤집어까고... 난 이런 빈자리 아주 환영이야.
히무로 시라베: 결국 미도리카와의 태도가 저런 이상, 우리는 카이다와 미도리카와 둘 다 어찌할 수 없어. 그러니 생산적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자. 6층으로 올라갈 계단이 없는데, 계단 말고 6층으로 올라갈 방법을 생각해보는 거야.
이바라 쿠리스: 갑자기?
히무로 시라베: 가장 쉬운 방법은 창문을 사용하는 거겠지? 천장을 뚫는다던가 하는 경우의 수도 존재하겠지만, 비현실적이고 기물 훼손이라는 문제도 있어.
후루미나미 나몬: 창문이라면, 숙소나 전용실 말고 탑의 각 층 로비 내부에도 있는 창문 말하는 거지?
후루미나미 나몬: 창문이 있다는 걸 한 번 서술하고 넘어갔어야했는데 까먹어버린 그 창문 말하는 거지?
이제 후루미나미의 불가사의한 말에도 익숙해졌다.
히무로 시라베: 맞아. 창고에서 로프를 꺼내 적절히 이용한다면 위층의 창문을 열고 안으로 침투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기와라 우시오: 이 새끼들은 츳코미를 절대 안 받아주네. 이제 우리같은 개그 캐릭터는 뭘 해야 하지? 팝콘이나 가져올까?
하기와라 우시오: 그리고, 창문을 탑 밖에서도 열 수 있냐?
야가미 토가: 흠. 시험해보고 싶지만... 낙사의 위험이 있으니 당장 하기는 어렵군요.
나이토 유즈루: 1층 창문으로 시험해보면 되잖아. 내가 갔다올게.
야가미 토가: 아뇨. 나중에 가세요. 이미 그룹이 두 개로 갈라졌습니다. 세 개 이상으로 갈라지면 합류가 번거로워질 수 있어요.
23T5U130: 그렇지는 않아. 다이얼로그에는 특별한 기능이 있거든.
마유즈미 나데시코: 특별한 기능...? 특별한 기능...
마유즈미 나데시코: 혹시 가제트 만능 도구 기능?!
카나리 케이토: 얘 뭐래냐?
마유즈미 나데시코: 헉. 카나리. 가제트 형사도 몰라? 그거 있잖아. 나와라. 가제트 만능 팔! 가제트 스키!
카나리는 질색을 했다.
카나리 케이토: 이 자식 우리랑 비슷한 나이 맞아? 아까부터 완전 늙은이 같은데.
칸나즈키 시노부: 그래도 완전 늙은이가 완전 어린이보다는 나을 것 같아.
카나리 케이토: 그렇긴 하지.
카나리 케이토: ......잠깐. 너 그거 무슨 뜻이냐?
칸나즈키 시노부: 히히히히히.
하기와라 우시오: 다이얼로그에 비행기 모드 있는거 아니야? 어느 핸드폰에도 내장되어있는 비행기 모드 말이야. 누르기만 하면 핸드폰이 비행기로 변해서 날아다니는 기능.
하기와라의 말을 들은 마유즈미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손 안의 다이얼로그를 내려다봤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대박... 완전 울트라다. 아이. 신나라! 나 비행기 해 볼래! 뭘 어떻게 하면 비행기 모드야?
이바라 쿠리스: 하기와라. 이 나쁜놈. 이렇게 순수한 애를 놀려?
하기와라 우시오: 거 미안하게 됐수다!
23T5U130: 내가 말한 특별한 기능은 비행기 모드가 아니야... 애초에 비행기 모드에 비행기로 변하는 기능은 없어.
23T5U130: 내가 말한 기능은 바로 이거야. 이 기능 때문에 다이얼로그에 다이얼이 붙어 있지.
23T는 곧바로 다이얼로그의 화면 주변에 붙어 있는 다이얼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더 단크 타워
챕터 1: < 죽여 마땅한 사람 둘 >
"과정은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모리 레이코: 너는 좋은 리더가 되고 싶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나?
토키와 아유키: 내겐 둘 다 같은 말인걸?
토키와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화를 원만하게 넘기려는 시도 같았지만, 모리는 그가 원만하게 넘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모리 레이코: 아니. 둘은 확연하게 다르다. 둘의 역할이 상충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모리 레이코: 좋은 리더가 되려 한다면 이따금씩 끔찍한 결정을 내려야 할 수도 있지. 이는 좋은 사람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모리 레이코: 반대로, 좋은 사람이 되려 한다면 언제나 인도주의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는 좋은 리더에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토키와 아유키: 최악의 상황만을 가정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모리.
모리 레이코: 아니. 나는 최악을 가정하고 있지 않다. 최악의 경우는 따로 있다. 일단 내 말을 들어.
모리 레이코: 너는 곧 '진짜' 리더가 될 거다. 지금 다른 이들이 네게 의존하는 부분은 아주 작아. 네 말이 옳으니 따른다는 가벼운 마음에 불과하지.
모리 레이코: 그러나 그들이 네게 결정권을 넘기는 요소는 더더욱 많아질 거고, 언젠가는 네 판단 하나에, 네 말 하나에, 네 결정 하나에 사람 목숨이 오고갈 것이다.
토키와 아유키: 그래... 나도 알고 있어. 준비가 되어 있어야겠지.
모리 레이코: 최악인 부분은 여기에 있다. 너는 준비할 수 없다. 대비할 수 없다. 그 상황이 직접 닥쳐오기 전까지는 어느 무엇도 소용없다. 전부 탁상공론에 불과해.
모리 레이코: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너 자신을 재단하는 일 뿐이다. 이상적인 지도자에 최대한 가깝도록. 스스로를 깎고 또 깎아야 한다. 설령 그 과정에서 너 자신이 사라진다고 해도.
모리 레이코: 너는 매사에 옳은 결정을 해야 하고, 어떤 일에도 평정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더없이 완벽에 가까우나 누군가가 네 존재에 반감을 느끼지 않도록 인간미를 가져야 한다.
모리 레이코: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내색하지 않아야 하고, 재빠른 판단을 해야 하고, 추진력과 결단력을, 온화함과 카리스마를 동시에 갖춰야 한다. 그리고 어느 쪽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모리 레이코: 너는 응당 그래야 한다. 감투에는 그만큼의 의무가 따라온다. 리더가 된다는 것은 너의 삶을 온전히 네 것으로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네게 그럴 각오가 있나?
토키와 아유키: ......
모리 레이코: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럴 각오가 없다. 그렇다고 그들을 탓할 순 없지. 자신의 삶을 공리를 위해 내던지는 일은 고행이니까.
모리 레이코: 네게 각오가 없다고 한들 너를 탓할 수는 없다. 너는 좋은 사람이 되는 데에는 무척 알맞은 성품을 지니고 있으니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난 말리지 않겠다.
모리 레이코: 그러나 각오 없이 리더의 역할을 맡겠다는 건, 좋은 리더와 좋은 사람 둘 다 되고 싶다는 너의 욕심일 뿐이다.
토키와 아유키: 그렇지만 난 둘 다 포기하지 않을 거야.
모리 레이코: 좋다. 욕심은 나쁜 것이 아니다. 욕심은 동기를 부여하고 능동성을 부여한다. 욕심을 악하다고 치부하는 자들은 그저 노력하지 않는 자신을 욕심 없는 선한 자로 포장하는, 노예의 철학에 빠져버린 자들일 뿐이야.
모리 레이코: 그러나 이따금씩, 우리들의 손은 두 개이고 잡아야 할 것은 너무나도 많지. 그럴 때 욕심은 과욕이 된다. 지금이 그렇다.
모리 레이코: 그러니 너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 다시 한 번 묻겠다. 너는 좋은 리더가 되고 싶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나?
토키와 아유키: 모리. 그저 의문이 들었을 뿐이니까 오해 말고 대답해줘.
토키와 아유키: 왜 이런 걸 내게 물어보는 거야?
모리 레이코: 그래. 용건을 얘기해야 했는데 내가 그만 잊었구나. 실수다. 나는 네게 이것을 묻고 싶었다.
모리 레이코: 네가 좋은 리더가 되지 못하겠다면, 지금이라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네게 제안할 게 있다.
모리 레이코: 내가 네 빈자리를 채워도 좋겠나?
나도 모르게 그들의 대화를 숨죽이고 들었다. 지금 모리가 토키와에게 리더를 자신에게 넘기는 건 어떻냐고 제안한 건가? 세상에. 모리가 우리를 조종하게 되면 진짜 난리가 날 텐데, 모리 말을 안 듣는 사람들도 생길테고...
걱정과 당황에 가슴을 콩닥콩닥 졸이며 토키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 다이얼로그가 따르릉 하는 큰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나나시: 악! 이게 뭐야?!
모리 레이코: ...거기 누구지?
다이얼로그의 화면에 23T5U130의 이름과 얼굴이 떠올랐다. 두 가지 원도 함꼐 떠올랐는데, 초록색 원은 '통화' 였고 빨간색 원은 '종료' 였다. 나는 둘중 뭘 눌러야 할까 고민하다가 얼떨결에 통화를 눌렀다.
나나시: 어... 여보세요?
23T5U130: 연결됐네.
하기와라 우시오: 뭐야. 이거 전화기였어? 어쩐지 다이얼이 달렸다 싶더라니.
마유즈미 나데시코: 세상에... 카메라랑 전화기 기능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고?! 살면서 이런 거 처음 봐!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다이얼로그 짱이야! 뭘 눌러야 통화할 수 있어? 23T. 뭘 눌러야 통화가 되는 거야? 다이얼 누르면 돼?
23T5U130: 마유즈미. 진정해. 나나시. 잘 들려?
나나시: 어... 어. 잘 들려. 왜 다이얼이 달려있나 했더니 전화기 기능도 쓸 수 있었구나.
모리 레이코: 다이얼로그에 그런 기능도 있을 줄은 몰랐다.
나나시: 으아아아악!
맞아. 모리랑 토키와 몰래 숨어서 엿듣고 있었지... 나도 모르게 아무렇지도 않게 통화해버렸다. 날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지레 겁먹어 몇 걸음 물러났다.
야가미 토가: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군요. 용건이 끝났다면 빨리 돌아오세요.
모리 레이코: 다행이지만 다행이 아니다. 내가 생각한 대로라면 우린 매우 큰 위기에 처할 뻔했다.
나나시: 깜짝이야! 진짜 간떨어지는 줄 알았네!
모리 레이코: 놀라는구나. 네가 놀라는 이유는 스스로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즉 너는 우연히 이 곳을 지나가고 있던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내가 틀리나?
모리 레이코: 너도 알겠지만 엿듣는 일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오히려 나쁘지. 나빠. 아주 나빠.
나나시: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게 화낼 것 까진 없잖아... 그다지 중요한 얘기도 아니잖아? 그냥 네가 토키와한테 충고한 게 다인데!
그녀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끝장이라는 생각에 나는 모든 용기를 쥐어짜 겨우 반론했다.
효과는 미비했다.
모리 레이코: 타당하지만 그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우리가 흑막에게 들켜서는 안되는 중대한 비밀을 얘기하고 있었다면 정말 큰일이 났겠지.
모리 레이코: 네가 그것을 노리고 엿들었다면 말이야... 안 그런가?
토키와 아유키: 모리. 나나시가 제대로 엿들을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어설프게 하지도 않았을 거야.
날 무섭게 추궁하는 모리를 토키와가 만류했다.
토키와 아유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되서 와준거지? 난 알아. 고마워.
그는 참된 리더였다. 모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뛰어난 리더였다. 난 순간 내 모든 진심을 다해 그렇게 생각했다.
토키와 아유키: 23T. 나야. 아까 들었다시피 모리와 나나시도 여기 있어.
23T5U130: 그래. 무사한 것 같네. 봤다시피 통화 기능만 있으면 탑의 어디에 있든 간에 자유로운 소통이 가능해. 그러니 나이토가 창문을 조사하러 가도 문제는 없어.
야가미 토가: 통화가 가능하다면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경우 알리바이를 확인하기도 수월하겠군요. 굉장한 어드밴티지입니다.
23T5U130: 다만 통화 기능도 만능인 건 아니야...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고 우선 창고를 조사하자.
토키와 아유키: 알겠어. 곧 그쪽으로 갈게.
그리고 통화가 끊어졌다.
토키와 아유키: 자. 이제 가자. 모두가 우릴 기다리고 있을거야.
모리 레이코: 기다려. 아직 넌 대답을 내지 않았다.
발걸음을 옮기려던 토키와가 그 자리에 멈췄다. 모리를 등지고 잠시 서있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토키와 아유키: 네 제안을 거절할게. 모리. 네 선한 의도는 이해하지만, 뒤이을 행동까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토키와 아유키: 난 모두를 바른 곳으로 이끌지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모리. 넌... 네가 운전대를 잡으면, 반드시 바르지 못한 곳으로 갈 거야. 그건 용납할 수 없어.
모리 레이코: 그러나 그곳에는 훨씬 많은 수가 살아있을 거다.
토키와 아유키: 그리고 훨씬 많은 사람이 죽어 있겠지.
나와 토키와를 미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모리는 아무 말 없이 뚜벅뚜벅 창고로 향했다. 토키와는 일단 한 건을 넘겼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
토키와 아유키: 나나시. 가자. 모두가 우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더 시간을 뺏어서는 안 되겠지.
나나시: 저기. 토키와. 괜찮아?
토키와 아유키: 괜찮지 않을 이유도 없어. 일단 빨리 창고 조사나 끝내고 다이얼로그의 통화 기능에 대해 얘기하자.
나나시: 기다려. 난 상투적으로 괜찮냐고 묻는 게 아니야. 진심으로 묻는 거야.
나나시: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지금 엄청 피곤해 보여. 걱정돼.
토키와의 눈빛이 잠시 변하는가 싶더니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밝고 또렷한 눈동자로. 토키와는 씨익 웃었다.
토키와 아유키: 고작 이런거에 지치면 초고교급 리더라고 못 불리지. 모리가 당장 날 탄핵시키려 들걸? 그러니까 빨리 가자.
토키와가 나를 재촉하며 속보로 모리의 뒤를 쫓았다. 난 얼떨떨하게 그를 따라갔다.
그러면서 나는 모리가 했던 말에 대해 생각했다. 토키와가 그 말을 부담으로 여기지는 않을까? 혹여나 상심하지는 않을까? 난 그가 걱정되었다. 만난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불안한 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고민을 없애버리고 싶어서, 난 그저 발을 바쁘게 움직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여보세요?
하기와라 우시오: 잘 들리네.
마유즈미 나데시코: 여 보세요?
이바라 쿠리스: 이상 무!
마유즈미 나데시코: 여보 세요?
히무로 시라베: 들려. 통화는 모든 이들에게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연락이 불가능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아.
캐롤 브라이트: 마유즈미 씨. 다이얼을 돌리는 속도가 굉장하시네요!
마유즈미 나데시코: 요즘 전화기들에는 다이얼이 없으니까. 우리 집에서나 다이얼을 써 보지 어디서 써 보겠어?
야가미 토가: 사용법이... 상당히 난해하군요.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23T5U130: 각자의 전화번호가 있어. 하기와라는 0000, 야가미는 0001, 칸나즈키는 0002, 카나리는 0003, 토키와는 0004, 마유즈미는 0006, 나이토는 0008, 후루미나미는 0009, 모리는 0011, 미도리카와는 0012, 이바라는 0013, 캐롤은 0014, 카이다는 0015, 히무로는 0016, 나나시는 0017... 그리고 난 0020이야.
23T5U130: 1, 2, 3, 4부터 0까지 숫자가 적혀 있는 구멍들을 다이얼 끝까지 돌려서 전화번호를 입력하면 돼.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런데 다이얼이 탄성으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막 빨리빨리 돌리려고 하면 신호가 안 가니까 조심해야 돼. 모든 다이얼 전화기가 이러는 건 아닌데 다이얼로그는 이러네.
히무로 시라베: 다이얼이 탄성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대략 3초 정도. 전화를 걸려면 아무리 빨리 돌려도 10초 이상이 소요될거야.
히무로 시라베: 누군가에게 습격당했을 시 재빠르게 도움을 요청하기엔 힘들 것 같아.
칸나즈키 시노부: 지식이 늘었다!
카나리 케이토: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놨어? 망할... 그리고 토키와랑 모리 이 자식들은 왜 이렇게 늦어?!
히무로 시라베: 통화 끝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으니 기다려 봐... 아. 저기 오네.
모리 레이코: 아직은 나 혼자다. 리더와 이름 없는 남자도 곧 도착할 거다.
토키와 아유키: 그렇게 말할 필요 없을 정도로 곧바로 도착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여보세 요! 거기 토키와야?
토키와 아유키: 그래. 나야. 전화는 일단 끊고... 다들 기다리느라 고생 많았어. 지금부터 우리는 창고의 위험한 물건들을 솎아내고, 처분하거나 엄중히 관리할 거야.
토키와 아유키: 그 전에 먼저, 하기와라. 흉기는 어디에서 봤어?
하기와라 우시오: 어디보자. 어디보자.
하기와라는 중얼거리며 창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창고 안에는 식품저장창고에서나 볼법한 철제 선반들 위에 상자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 적당히 걸을 수 있는 정도의 간격을 제외하고 그 곳은 선반과 상자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선반에서 상자를 몇 개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칼... 커터칼... 망치... 내가 찾은 건 여기까지. 아마 이것 말고도 더 있을걸?
미도리카와 아쿠토: 그보다, 찾아낸 흉기들은 어떻게 처분할 생각이야?
토키와 아유키: 믿을 만한 사람의 방에 보관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지금 누군가를 섣불리 믿긴 힘들어. 잘못하면 흉기가 탑 전체에 풀릴 수도 있으니까.
토키와 아유키: 그건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지. 그러니 이걸 어디에 둬야 할지가 고민인데...
미도리카와 아쿠토: 소각하는 건 어때. 이렇게 넓은 창고라면 분명 기름도 있을테니 불을 붙이자.
토키와 아유키: 좋은 생각이긴 한데... 모노로그가 그걸 허용할지가 문제야.
야가미 토가: 소각이 기물 파손으로 취급되진 않을 겁니다.
캐롤 브라이트: 정말요? 기물 파손 그 자체 같은데...
야가미 토가: 아까 모노로그 씨에게 물어 봤더니, 기물 파손 규칙은 물품보다는 탑의 시설. 즉 벽이나 창문 혹은 탑 자체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군요. 흉기를 태우는 것에 문제는 없습니다.
야가미 토가: 뭐. 모노로그 씨가 허용하지 않는다면 땅에 파묻어버리는 것도 방법이겠죠.
하기와라 우시오: 그런데 흉기가 잘 탈까?
히무로 시라베: 상당한 양의 기름을 뿌린다면 충분히 모든 흉기들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을 거야.
히무로 시라베: 일단 창고를 조사하자. 흉기를 찾아내야 태우든 묻든 뭐라도 할 수 있을 테니.
그렇게 우리는 창고 조사에 착수했다. 미도리카와의 예상대로 커다란 휘발유 통이 있었다. 흉기는 주로 한 상자 안에 한 종류의 흉기가 모여 있었기에 솎아내는 것이 힘들지는 않았다.
히무로 시라베: 안에 식칼만 가득 들어있는 상자는 처음 봐.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 극장에서 발생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소품실을 뒤져봤을 때도 이런 건 없었어. 그것도 소품이 아니라 전부 진짜 칼이라니...
야가미 토가: 그래도 창고에 총기가 없어서 천만다행이군요. 게다가 생각보다 일찍 끝나겠어요. 1시간 안에 소각까지 끝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토키와 아유키: 어디보자. 이건 엄밀히 말해 흉기가 아니지만 충분히 쓰일 수 있으니 흉기로 분류할게. 이것도. 이것도...
카나리 케이토: 아악. 귀찮아! 야. 카이다 쿠로하. 너 할 말 없어? 아깐 이런거 하기 싫다며. 징징댈 줄 알았는데 입 닥치고 있네.
카이다 쿠로하: 징징대고 있는 건 너잖아. 너도 좀 닥쳐.
토키와 아유키: 카이다가 아까 그랬어? 하긴 내 멋대로 너희들을 동원하는 거나 다름이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지. 그래도 도와줘서 고마워.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는 자의로 돕고 있는 게 아니야. 억지로 돕고 있는 거지. 미도리카와는 카이다가 원래 전용실로 가려 했다고 말했어.
토키와 아유키: 전용실? 갑자기 웬 전용실?
모리 레이코: 전용실 하니 말인데, 이 작업이 끝나면 모두가 프로파일러의 전용실을 확인해야 한다. 그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히무로 시라베: 그래. 나야 전용실은 상관 없어.
그 곳에는 나와 관련된 것들이 있을 뿐, 공개될 경우 카텟 기관에게 해가 될지도 모르는 물건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이들이 나의 전용실을 보고 의심을 푼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은 없을 터였다.
모리 레이코: 그래서. 첩자가 왜 억지로 우리를 돕고 있다고 하는 것이지? 나와 리더, 이름 없는 남자가 자리를 비운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미도리카와 아쿠토: 별다른 일 없었어. 아까 모두에게도 말했지만, 난 말을 아낄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아. 시작되나요? 시작되나요? 이바라 씨. 이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바라 쿠리스: 어? 나? 내가 보기에는... 아주 난장판이 펼쳐질 것 같습니다!
하기와라와 이바라는 상자를 옮기고 뒤적거리면서도 잘도 만담을 나누었다.
모리 레이코: 푼수 둘. 조용히 해라. 왜 말을 아끼려는 거지? 말을 아끼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토키와 아유키: 모리. 잠깐...
모리 레이코: 그도 그 나름의 사정이 있을 거라고? 그러니 그가 우리에게 마음을 열 때까지 눈 빠지게 기다릴까? 아니. 그건 좋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일이다.
야가미 토가: 아까 미도리카와 씨는 그의 비밀이 드러나면 카이다 씨를 막을 수단이 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모리의 표현을 따르자면 공리를 위한 일이지.
모리 레이코: 공리를 위한 일이라.
나이토 유즈루: 어우. 얘 또 눈돌아갔네.
나나시: 공리를 위한 일이라니까 느낌이 안 좋은데...
미도리카와 아쿠토: 아까 카나리가 말한 거 기억나? '그 일을 저질렀을 때 생기는 손해가 없다면 언제든지 그 일을 할 수 있다' 말이야.
야가미 토가: 그게 왜요?
미도리카와 아쿠토: ......일단 상자부터 처리하자.
그런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흉기거나 흉기로 쓰일 가능성이 있는 물건들을 다 모으니 상자가 전부 21개 나왔다. 그것을 앞에 두고 우리는 만족감 절반과, 막막함 절반씩을 각각 느꼈다. 이렇게 많은 양을 해낸 자신들이 뿌듯했으나 이렇게 많은 양을 어디로 옮길지 막막했던 것이다.
토키와 아유키: 자. 이걸 소각한다면 어디서 소각하는 게 좋을까?
23T5U130: 당연하지만 실내는 안 돼. 밖으로 가져가자. 열여섯 관문 중 하나나 돌바닥에서 태우면 될 거야.
히무로 시라베: 열여섯 관문이라면, 혹시 돌무더기를 말하는 거야?
23T5U130: 그래. 우리가 갇혀있던 그 곳.
23T는 단신으로 상자를 네 개씩 들면서 앞장섰다. 다른 이들도 상자를 두 개 혹은 한 개씩 들며 23T의 뒤를 따랐다. 그러는 도중 우리는 누군가가 흉기를 몰래 가져가지는 않을까 서로를 엄중히 감시했다. 대부분 수월하게 상자를 옮겼지만 완력이 부족한 몇 명은 약간 힘이 부치는 것 같았다. 마유즈미는 처음에는 멀쩡해 보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기진맥진해졌고, 카나리는...
카나리 케이토: 후우... 후우... 끙...
캐롤 브라이트: 카나리 씨. 괜찮으세요?
카나리 케이토: 쓸데없는... 걱정이야... 으윽...
나이토 유즈루: 거 참. 가오잡긴. 대신 들어줄까?
카나리 케이토: 피, 필요 없어...
그렇게 고집을 부리던 카나리는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칸나즈키에게 자신의 상자를 넘겨주게 되었다.
계단을 내려오고 탑 밖으로 나왔을 때. 주변은 이미 어두웠다.
칸나즈키 시노부: 똑딱아. 지금 몇 시야?
카나리 케이토: 다이얼로그 메뉴에 시간 나오잖아. 그거 보면 될 거 아니야? 그리고 이상한 별명으로 부르지 마!
칸나즈키 시노부: 그치만 내 팔은 두 개 뿐인걸.
칸나즈키는 이미 상자를 양손에 각각 한 개씩 들고 있었으나, 완력이 부족한 카나리가 낑낑대는 모습을 보고 그의 상자를 대신 들기로 했다. 그렇게 그녀는 세 개의 상자를 옮기게 되었다.
사실 이 일은 카나리의 의사를 듣지 않고 그녀 멋대로 진행되었기에, 칸나즈키가 그의 상자를 강탈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칸나즈키가 머리에 상자를 올려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균형을 잡는 모습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카나리 케이토: 어휴. 쯧... 일곱 시가 조금 넘었어.
장미 꽃밭에 숨겨진 작은 조명들에 의지해 우리는 한 돌무더기 주변에 상자들을 내려놓았다. 기름을 충분히 뿌리고 물러난 뒤, 23가 조심스럽게 창고에 있던 라이터를 사용해 불을 붙였다.
23T5U130: 다들 조금씩 더 물러나. 연기는 몸에 해로워.
하기와라 우시오: 와. 오지게 불타네. 말 그대로. 불타네.
마유즈미 나데시코: 오지게가 무슨 뜻이야? 정글에 사는 게?
이바라 쿠리스: 풉! 큭. 크흡. 흐흐흡...!
난 불타는 흉기들을 보며 상황이 무척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만난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이들이 순식간에 단결하여, 살인 게임의 위험 요소들을 솔선수범하여 제거했다는 것은 무척 고무적이었다. 그것도 태반이 괴짜인 초고교급들이. 협력이라니.
카나리나 카이다가 변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기우였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충분히 협력해 주었다. 이대로 23T가 말했던 흰 물건까지 찾아내면 탈출도 꿈은 아니었고, 이 분위기를 유지한다면 살인 게임에서 희생자가 나오는 일은 없을 거라고. 난 그렇게 속단해버렸다.
그 때 우리는 취해 있었다. 잘 풀렸다고. 흉기가 없어졌으니 이제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섣불리 안도했다. 이제 처신만 잘 하면 누군가가 죽을 일은 없을 거라고. 이제 안전하다고 마음을 놓아버렸다.
이거로 된 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해버렸다. 긴장을 놓아버렸다.
히무로 시라베: 모노로그가 이 소각에 토를 안 다는 게 신기하네. 원래라면 사사건건 나타나서 귀찮게 굴 텐데.
모리 레이코: 그보다. 이제 때가 된 것 아닌가? 프로파일러의 전용실에 가서 그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때가 왔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럼 밥 먹은 다음에 가자.
모리 레이코: 조금만 참아라. 지금 중요한 것은 식사가 아니다.
하기와라 우시오: 개소리야! 식사가 중요하지! 밥도 못 먹게 하는 건 좀 너무하잖아.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들 열심히 일해 줬다고!
하기와라 우시오: 이렇게 말 잘 들었으면 좀 쉬게 해 주라. 응? 오오! 토키와. 자비를 베푸소서!
토키와 아유키: 그래. 오늘은 다들 고생했으니 히무로의 전용실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쉬자.
모리 레이코: 리더. 지금 중요한 것이 보이지 않느냐?
토키와 아유키: 모리. 아직 우리들은 만난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고. 함께 밥 한 끼도 제대로 안 먹었어. 그런데도 이렇게 거리낌 없이 내 말을 듣고 협동해줬어.
토키와 아유키: 기적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지만 이건 기적이 아니야. 우리 모두가 만들어낸 결과지. 모두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다들 쉴 자격이 충분해.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머! 훈훈해라.
이바라 쿠리스: 오오오! 멋있다. 토키와! 잘생겼다!
하기와라 우시오: 와!!!!!!!! 쌘즈!!!!!!
모리 레이코: 푼수 둘. 시끄럽다.
야가미 토가: 다들 흉기의 위험성에 동의했으니 협력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무임승차자가 없다는 것은 확실히 놀랍군요.
야가미 토가: 중간에 카이다 씨가 그런 기미를 보였으나 미도리카와 씨가 막아주셨죠. 결과적으로는 잘 풀렸어요.
나나시: 어... 그런데... 카이다가 안 보이는데?
나나시의 말에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이들도 그랬다. 멀리서 풍겨져오는 매캐한 연기. 커다란 화염. 그에 비하면 매우 작은 장미꽃밭의 조명. 우리는 그 안에서 카이다 쿠로하의 얼굴을 찾으려고 했다.
보이지 않았다.
나나시: 카이다 뿐만이 아니라... 미도리카와도 안 보여. 어느 새 사라진 거지?
하기와라 우시오: 띠용. 상자는 같이 옮겼는데 이상하네?
토키와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의 눈도 그랬다. 매캐한 연기. 화염. 보이지 않는 얼굴과 장미 꽃밭의 조명. 사람에게 혼란을 주기에 최적인 환경이었다. 토키와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재빠르게 입을 열어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다.
토키와 아유키: 심상치가 않아. 일단 히무로의 전용실은 나중에 생각하고, 카이다와 미도리카와에게 전화를 걸어보자. 0...0...1...5.
야가미 토가: 분명 0012가 미도리카와 씨의 번호였죠? 0. 0. 1. 2.
다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잔뜩 긴장한 채 토키와와 야가미를 지켜보았고, 이내 야가미의 다이얼로그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도리카와의 목소리였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여보세요. 야가미?
야가미 토가: 얘. 접니다. 토키와 씨. 카이다 씨는 전화를 받으시나요?
토키와 아유키: 아니. 안 받고 있어.
야가미 토가: 미도리카와 씨. 어디 계신 겁니까? 혹시 카이다 씨의 행방은 아시나요? 도중에 사라지시면 당신을 걱정하는 사람이...
탕!
총을 가진 사람은 매우 소수였다. 대몰락 발생 전에는 매우 복잡한 절차를 거쳐 총을 소지한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몰락이 지속되자 살상을 매우 쉽게 만드는 총기류의 확보는 폭도에게나 시민에게나 매우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총기 공장들은 제기능을 하지 못했고, 총기를 생산할 재료도 부족한 상황에서 총기류의 양은 점점 줄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총기는 특권이자 권력이 되었다. 폭도든, 기관이든, 총기는 곧 무력의 상징이자 그들이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지표가 되었다.
"그것이 너의 또 다른 정체성을..."
나는 과거의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총 소리. 방금 그것은 분명 총의 격발음이었다. 한 발만으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위험과 폭력의 소리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꺄아악!
이바라 쿠리스: 바, 방금 그거 총소리야?! 엎드려! 다들 엎드려!
캐롤 브라이트: 설마요! 설마 총을 가진 분이 계셨...
캐롤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두 번째 격발음이 들렸다. 탕! 두 번째로 듣자 나는 알 수 있었다. 총 소리는 야가미의 다이얼로그를 통해서 들리고 있었다.
사격은 미도리카와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더 가까이 오지 마! 경고했다!
혹은. 사격하는 사람이 미도리카와거나... 아니. 대화로 말미암아 그가 총기의 소유자임이 확실해졌다. 그는 누군가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 누군가의 목소리도 야가미의 다이얼로그를 통해 작게 들려왔다.
카이다 쿠로하: 씨발. 하필 이 타이밍에 전화가...
히무로 시라베: 방금 카이다 목소리가 들렸어. 미도리카와 근처에 있나 봐. 그리고 총을 쏘는 사람은 미도리카와야. 분명해. 이렇게 가까이에서 총소리가 들리는 것도 그렇고, 대화의 내용도 그렇고. 총기의 소유자는 미도리카와야.
캐롤 브라이트: 그럼. 미도리카와 씨가 카이다 씨에게 총을 쏘고 계시단 말인가요?!
칸나즈키 시노부: 빠라바라바라방. 내가 람보다!
카나리 케이토: 초... 총이라니! 그 자식은 왜 갑자기 그걸 쏴재끼기 시작한 건데?!
토키와 아유키: 빨리 막으러 가야 해! 다들 어서 탑으로...
모리 레이코: 안 돼.
모두가 탑으로 달려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탑의 반대 방향. 불이 붙은 21개의 상자를 향해 달려갔다. 모리였다.
모리 레이코: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모리의 목소리는 차분함이 격양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수용한 것처럼 들렸다. 그녀가 멈출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몇 명이 그녀를 말리기 위해 달려갔다. 나이토는 순식간에 그녀를 따라잡아 팔을 잡고 당겼다. 화염에서부터 몇 미터 떨어지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나이토 유즈루: 잡았다! 우왁. 뜨거워! 왜 갑자기 저기로 달려가는 거야. 이 미친 것아! 네가 불나방이야?!
모리 레이코: 우리는 제 무덤을 팠다. 멍청해. 멍청해. 멍청해!
이바라 쿠리스: 너 미쳤어?! 저기 들어가면 타 죽어!
모리 레이코: 인공지능! 당장 불 속에서 몇 개라도 좋으니 온전한 물건을 건져내야 한다! 당장!
나이토 유즈루: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아오! 가만히 있어! 악! 때리지 마!
모리는 나이토의 팔을 때리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그는 재빠르게 모리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고 어깨를 감싸 들어올렸다. 곧 그녀는 발이 땅에 닿지 못해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것을 깨닫자 모리는 소리쳤다.
모리 레이코: 날 막다니. 정신 차려야 한다. 승부사! 지금 탑에 총기가 존재한단 말이다!
나이토 유즈루: 그걸 누가 몰라? 그러니 빨리 막으러 가야지! 불에 뛰어들지 말고!
모리 레이코: 막겠다고? 어떻게 막을 생각이냐?
나이토 유즈루: 어떻게 막냐니. 당연히...
모리 레이코: 대화로?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테냐?!
히무로 시라베: ...그렇군.
난 모리의 말을 이해했다.
총기는 특권이자 권력이 되었다.
모리 레이코: 때려눕히기라도 할 테냐? 그럴 수 있을 것 같느냐? 방아쇠만 당기면 너를 불구로 만들 수 있는데 그가 잘도 당해주겠구나!
모리 레이코: 탑 내에 총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느냐?! 총기를 지닌 자가 탑을 지배한다는 뜻이란 말이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설마...
모리 레이코: 설마가 아니다! 창고에 있던 무기들은 방금 우리의 손으로 전부 소각했다. 우리에겐 더 이상 무기가 없다!
모리 레이코: 칼이나 도끼. 낫과 망치가 있었다면 기회를 노려 그를 제압하거나 조취를 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이젠 그럴 가능성조차 사라졌다!
토키와 아유키: ...세상에.
모리 레이코: 이제 어찌할 생각이냐? 지금 우리는 총잡이에게 대항할 수단을 완전히 상실했단 말이다!
구상은 전부 끝냈는데 세부적인 내용은 즉석으로 쓰고 있어서 다이얼로그에 시계 기능이 있다던가 탑 로비에도 창문이 있다던가 하는 정보들을 처음에 언급하지 못해 욕을 봤습니다
그럼에도 부족한 글을 봐주시는 분들껜 감사드립니다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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