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를 떠올리자 몇 개의 기억이 더 되살아난다. 내가 카텟 기관에 속하게 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의 기억이다.
"오늘은 경비와 이야기를 나눴다."
카텟 기관 건물의 옥상에서 시라유키 히메리에게 보고했다. 기관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일기를 써 보는건 어떠냐고 시라유키 히메리가 내게 제안했기 때문이지만, 결국 모종의 사태로 인해 그녀와 담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가 커피를 권해 커피를 제공받았다.
"경비 씨는 좋은 분이지. 친절하고. 성실하시고. 성격도 좋아."
"그러나 그 역시 나를 꺼리는 눈치였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내 출신에 대한 정보가 기관 전체에 퍼진 모양이니까."
"아... 이런. 현장에 나랑 같이 나간 사람들을 그렇게 입단속했는데."
"날 이 기관에서 퇴출시키는 것에 대해 재고해볼 의향은 여전히 없나? 프로젝트의 진행은 순조롭지만 내가 계속 기관원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언젠가 프로젝트의 근간이 흔들릴 거다."
"넌 거기서 이용만 당했는데 어떻게 너에게 책임을 물겠어... 너에겐 선택권이 없었다고. 심지어 무언가를 한 것도 아니야!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에 우리가 가서 널 데려왔다고! 그러니 아무 문제 없는데..."
"네가 옳지만 기관원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오메가와 동료들이 미래 기관의 간부들을 죽게 만든 뒤, 사람들은 보다 신중해졌으니까. 그것은 좋은 현상이다. 누군가가 불이익을 당할지언정 이 암흑 시대에는 사람의 목숨과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
"네겐 아무 잘못도 없단 걸 왜 아무도 몰라주는 걸까?"
"어쩌면 잘못이 있을지도 모르지. 네 제안을 받아들인 거라던가."
"...후회해? 기관에 들어온 거."
"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덮어놓고 후회만 하지는 않는다. 기관에 들어온 것은 내게 일종의 기회였다. 그러나 기회는 항상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것 뿐이야. 너는 날 기관에 들인 것을 후회하나?"
"허. 날카로운 질문이시네... 글쎄. 난 누구에게나 새 출발을 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널 거기서 그냥 모른척 하는 건... 너무한 일이잖아. 그래서 난 널 버려둘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 그것 뿐이야. 후회는 하지 않아."
"하지만 지칠 텐데."
"...응?"
"너도 이미 아는 사실이겠지만 누구나 널 의심한다. 기관을 적대하게 된 것은 아닐까 비밀리에 우릴 감시하고 있지. 이 대화 역시 도청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모든 이들에게 귀감이 되던 넌 신뢰를 잃어가고 기관 내에서의 입지가 좁아지며, 결국 정치적인 계략으로 인해 누명을 쓰고 기관에서 불명예스럽게 제명당할 수도 있다. 전부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경우의 수 중 하나야. 그런 위험을 안고 계속 올곧게 행동하려는 것이, 지치지는 않나?"
시라유키 히메리는 커피를 홀짝였다. 기온이 약간 낮았고 비가 올 만큼 습도가 높지는 않았다. 시라유키 히메리가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커피가 조금 뜨거워서 온도가 올라간 구강 내 벽을 식히려는 행동으로 추측됐다.
"지치지. 힘들고... 진짜. 진짜로 힘들어. 과장하는 게 아니라 정말 힘들어. 테러범이 넘치는 세상에서 세상의 재건을 목표로 하는 것도 그렇고. 다들 반대하는 일을 나 혼자 끝까지 찬성하는 것도 그렇고...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그래도 나 역시 사람이니까. 가끔 허무할 때도 있어. 내가 아주 작은 변화라도 만드는게 가능하긴 할까. 하고... 그보다 히무로. 설마 방금 나 걱정해준 거야?"
"아니. 난 네가 신체적,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우울감이나 무기력증, 혹은 능률의 저하를 느끼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게 날 걱정해준 거잖아!"
"아니다. 그것은 걱정의 사전적 정의와 동떨어져있다. 걱정은 불안과 혼란을 전제하니까. 난 그러지 않았으니 걱정보다는 고려라고 부르는 게 옳다."
"아무튼 넌 내게 신경을 쓴 거지?"
"그런가?"
"다행이야. 네가 나랑 친해질 마음을 먹고 있어서."
"네 발상력을 폄하하고싶은 마음은 없지만 어떤 경위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군."
"어... 네가 일기를 그냥 사무적으로 제출하지 않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까? 갑자기 옥상으로 부르길래 얘가 나랑 얘기를 나누고 싶어하는구나. 싶어서 되게 기뻤는데. 아니었어?"
"내가 일기를 제출하지 않는 이유는 이전에 네게 일기를 제출했을 때 네가 '이런 건 받지 않는다' 며 기겁을 했기 때문이다."
"야... 일기를 써보는 건 어떠냐고 말했더니 네가 보고서를 써왔잖아. 솔직히 그건 일기라고 부르기 뭐하지."
"일기의 근본적 목적은 그 날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기록하는 데에 있다. 그러니 체계적인 형태로 기술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다."
시라유키 히메리는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그녀의 입꼬리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녀가 왜 웃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주 웃어주는 것이 그녀와의 의사소통을 수월하게 만들거란 것은 알았지만, 이론을 실전으로 옮기는 일은 상당히 어려웠다. 웃음을 지으려면 즐거워야 한다는데, 난 웃음을 지을 정도로 즐겁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너. 정말 별난 사람이야. 내일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한테 말해 주라. 내가 다 들어 줄게."
'별나다' 는 형용사로. 보통의 경우와 달리 이상하거나 묘함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시라유키 히메리는 내게 별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있을 때가 아니었고, 난 주변을 둘러봤다.
하기와라 우시오: 하... 하하. 웃기네. 웃겨 진짜. 조금 재미있긴 하네. 그래도 진행은 시키지 마.
하기와라 우시오가 중얼거렸다. 그는 언제나 가지고 있던 장난스러운 표정과 태도를 잃어버렸다. 이바라 쿠리스도 마찬가지였다. 공포와 위협은 사람들의 규범을 벗긴다. 예의와 체면은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내게 무엇보다 부족한 것은 그것이었다.
내겐 여유가 없었다. 시간이 부족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곳에서 나가야 하는데 내게 주어진 단서와 정보는 한정적이었고, 난 절박함을 느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목이 메이는 절박함.
그러자 내가 카텟 기관에서 배운 것들이 잠시 사라졌다. 최초의 내가 남았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생각을 명확하게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내가 이성을 되찾으려고 노력하자 그렇게 되었다.
카나리 케이토: 거, 거짓말이지... 내 돈이... 저런 거지새끼들한테...
이바라 쿠리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누가 이랬어. 모노로그! 이 개새끼가!
모노로그: 내가 한 일이 아니다. 내가 이럴 수 있었다면 왜 영상만 보여주겠나? 너희들의 눈앞에 데려온 뒤 살인하지 않으면 인질을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할 수가 있는데.
모노로그: 내가 영상만 보여주는 이유는 영상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진실을 알고 있지. 그들이 어떻게 됐을 것 같나?
야가미 토가: 이건...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모노로그: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야가미 토가: 다른 분들이 뭘 봤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협상을 체결한 회사와 노동자들의 갈등이 극에 달해 몇 분이 분신하시고, 내전은 다시 시작되었으며, 밀수업이 다시 횡행하게 되는 건...
야가미 토가: 이런 건 불가능합니다. 제가 진행한 협상이 몇 개인데요. 국내의 경제와 중동 지방의 반란, 마피아와 야쿠자까지 얽혀 있는 뒷세계를 전부 섭렵하지 않으면... 이런 건 불가능합니다.
후루미나미 나몬: 내 후루미나미 가문 사람들은 대부분이 유명인사야. 영화감독, 배우, 조명 전문가, 코디네이터... 이런 사람들을 몇 명씩 죽이는 건 힘든 일이야. 사회적 파장이 장난이 아닐 거고 다들 저마다의 경호원을 고용하고 있는데.
후루미나미 나몬은 어느새 탐정 코스튬을 입은 채 곰방대를 피우고 있었다.
야가미 토가와 후루미나미 나몬이 말한 것들은 분명 모노로그의 행적의 일부분에 불과할 터였다. 어떤 단체든, 세력이든 그런 영향력을 가진 것들은 드물었고 대몰락 이후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다.
대몰락이다. 동기 비디오의 시점이 대몰락 발생 이후라면 야가미 토가와 후루미나미 나몬의 영상도 말이 된다. 알파걸의 살인 게임에서 '동기 비디오' 라고 불린 영상. 그것은 대몰락 이후에 세계가 변질된 모습을 보여준 영상이었다.
대몰락의 혼란이라면 후루미나미 가문 사람들이 살해당하는 것도, 중동의 내전이 다시 시작되거나 노동자들과 회사가 충돌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시 보니 내가 처한 상황 자체가 알파걸의 살인 게임과 무척 흡사했다. 우선 이 곳에 갇힌 대부분의 인원이 초고교급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초고교급 학생이 아니고 나나시는 초고교급인지 아닌지 불확실하며 미도리카와 아쿠토는 무슨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노쿠마와 닮아 있는 모노로그를 보고 있었음에도 난 어째서 알파걸의 살인 게임과 이 살인 게임의 연관성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알파걸의 살인게임에선 초고교급 학생들이 미지의 장소에 갇혀 서로 죽고 죽이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 역시 유사하다. 그저 희망봉 학원 쉘터가 검은 탑으로, 모노쿠마가 모노로그로 바뀐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우리 중 누구도 대몰락이나 알파걸의 살인게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분명 그것과 관련된 기억이 소거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 대몰락에 대한 정보를 알리는 일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첫 번째. 세상이 멸망해 이들의 친구와 가족이 전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차라리 이들에게 동기 비디오는 조작이라는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낫다. 내가 진실을 말함으로 인해 동기 비디오가 진실이라는 확신이 주어지고 누군가가 살의를 가질지도 모른다면, 난 진실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
두 번째. 내가 대몰락을 기억하고 있음을 밝히면 모노로그는 최대한 나를 살인 게임에서 배제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알파걸의 살인 게임과 수법이 비슷한 이상 이 살인 게임은 폭도들과 큰 연관이 있다. 모방범일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대몰락에 대한 정보를 이들에게 알리면 모노로그는 날 막으려 할 것이다. 날 죽이려고 할 지도 모른다. 그러니 최대한 내가 대몰락을 모르는 듯이 행동해야 한다. 목숨을 보존해 기관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세 번째. 대몰락에 대해 언급하다간 분명 카텟 기관과 프로젝트, 시라유키 히메리에 대한 정보까지 노출될 우려가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라야 한다. 프로젝트는...
"프로젝트는 무척 순조롭다."
"그래. 적은 인원인데도 이렇게 잘 돌아간다는 게 믿기지가 않네. 네가 열 사람 몫을 족히 해 주고 있어서 그런가 봐."
"그러나 사람이 더 필요하다. 일급 기밀이니 소수 정예로 작업하는 것이 옳지만 인력이 조금 더 필요하다. 신분이 보장된 사람들. 입이 무거운 사람들이여야 한다. 이젠 한 순간의 실수도 걷잡을 수 없게 변할 테니까."
"맞아. 그게 우리 팀이 외출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이유지... 세상에 커피 사러가는 것도 보고서를 제출하고 절차를 밟아야 한다니 가끔씩은 너무하다 싶다니까?"
"그러나 그런 절차 없이는 언젠가 큰 일이 생길 거다. 난 우리 팀의 인원들이 귀가하지 않고 기관의 숙소에서 취침하는 것을 진지하게 건의할 의향이 있다."
"뭐? 난방도 없이 얇은 매트에 이불 하나만 있는 그 숙소? 거기서 사람이 어떻게 지내."
"내가 그러고 있다."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아직 일부의 기억만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범죄자를 조사해야 하는 일이다. 그 뿐... 그러나 그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프로젝트는 내 기관에 대한 충성도를 몇 번이고 증명할 수 있는 기회이며, 시라유키 히메리와 나의 노력의 결정체이다. 그것을 절대로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다고 나는 다짐했다. 절대로.
그것이 시라유키 히메리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최소한의 보답일 테니까.
더 단크 타워
챕터 1: < 죽여 마땅한 사람 둘 >
"과정은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나나시: 히무로. 괜찮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히무로는 지금까지 보여주지 못한 감정들을 전부 보여주고 있었다. 당황,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 공포의 기색이 확실하게 보였다.
그를 향한 걱정과 약간의 궁금증을 느끼며 나는 '나나시의 동기 비디오' 를 시청했다. 여기저기서 당황과 분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이 심상치 않은 영상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으나 이제 눈을 돌릴 수는 없었다. 난 실낱같은 용기를 어떻게든 끌어모아 다이얼로그와 마주했다.
그러나 영상은 내 예상에 미치지 못했다. 눈앞에 내가 살인을 해야만 하는 동기가 있는 상황에서 쓸 말은 아니지만. 나는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그 사실을 영상 안의 목소리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모노로그의 목소리와 같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기괴한 음성이었으나 이 목소리가 모노로그의 것보다 훨씬 기분나빴다.
실망했겠지. 그 이유를 안다. 넌 타인과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이름도 기억도 아무것도 없으니 남들이 괴로워하는 와중에도 뒤틀린 기대를 하고 있었을 거다. 내게도 무언가가 있었을 거라고. 기억을 잃기 전의 나에게는 목숨을 걸고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을 만큼 소중한 무언가가 있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겠지. 영상에 가족이 나올까. 친구가 나올까. 누가 나오든 네 배경과 신분을 알아내기 위한 단서로 삼으려 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공교롭게도 너에겐 그런 게 없어. 기억을 잃은 후의 네가 텅 비었다고 느끼나? 네가 옳다. 네겐 아무것도 없어. 본래 동기 비디오는 이것을 시청하는 당사자에게 소중한 것들이 위기에 처한 모습을 보여줘, 살인을 하도록 부추기는 용도로 쓰인다. 그러나 당사자에게 소중한 것이 없다면, 당사자가 살아줬으면 하는 단 한 명의 사람마저 없다면 나라도 방법이 없다.
영상을 보고 있자 기괴한 목소리. 억양. 그리고 눈이 찌푸려지는 내용 탓에 무척 불쾌해졌다. 그러나 어딘가 불쾌함을 넘어 꺼림칙함, 불안함, 그리고 공포로까지 이어지는 무언가가 이 영상 안에 있음을 난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무언가가 잘못됐다. 무언가가... 누군가가...
내가 알고 있는 목소리.
"나 잊지 마... 잊으면 안 돼. 알겠지?"
기계. 전기장. 원수. 친구. 나의 반쪽. 상실. 연결고리의 상실. 이름의 상실. 그리고 재탄생.
난 알고 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내 목표엔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아무리 아닌 척을 해 봐도 내 무의식은 그렇게 말한다. 안 될 거란 것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노력하는 나는, 과연 단 한 번이라도 진실된 노력을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다. 그렇기에 난 반쯤 포기하는 삶을 살고 있다.
나나시: 으윽...!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숨이 가빠졌다.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을 추스리려 애쓰니 입에 침이 고였다. 위액이 올라오는 듯 신 맛이 나는, 혀를 태울 만큼이나 독한 타액이었다.
오한. 머리의 지끈거림이 조금씩 추스리자마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내 옷차림이 어깨를 드러낸 것이긴 해도 상정 외의 한기가 느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나는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나나시: 읏...
고통과 떠오르는 기억은 날 타도하기 위해 동맹을 만들었다. 단편적인 대화와 정보가 뇌리를 스쳐지나갔으나 정신차려보면 그것들은 내게 머무르지 못했다. 연기의 실체를 잡아보려고 애쓰는 것처럼. 내가 눈으로 본 순간들, 나눈 대화들이 어렴풋이 떠올랐으나 그것에 집중하려고 하면 곧 덧없이 흩어졌다.
기억해두려고 집중하고 있던 것이 다음 순간 기억나지 않아 머리를 부여잡게 만드는 기분이었다. 이런 체험을 한 것 같은 느낌을 들었으나 정작 그 체험을 언제 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해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안구의 뒷부분을 누군가가 당기는 듯한 두통이 더욱 커져갔다.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이 내 속을 뒤집어놓는 동안 영상 속의 목소리는 조금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알겠나? 네겐 살 이유가 없다. 가족은 죽었고 친우는 잃어버렸고, 네가 쌓아올린 업적은 네 손으로 부숴버렸지. 어쩌다 네 삶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됐을까. 그건 기억을 되찾기 전의 너만 알겠지. 모든 걸 망친 장본인이 바로 너니까. 넌 기억을 잃기 전부터 약해빠진 사람이었다. 자신과 친한 누군가를 잃는 걸 버티지 못했어. 동시에 지독하게 이기적이었지. 그 모든 과실이, 행적이 지금의 너를 만든 거다. 홀로 서는 자. 나약한 자. 살 가치 없는 자 말이야.
더 이상 네겐 해줄 말도 없다. 제안을 하나 하지. 그냥 죽어버리는 건 어때?
난 목소리가 무언가를 더 말할 거라 생각했다. 아니. 실은 기대했다. 그러나 영상은 그 곳에서 끝났다. 그냥 죽어버리는 건 어때. 그게 다였다.
나나시: ...하아.
난 내 안에서 퍼져나가는 좌절의 기운을 느꼈다. 분했다. 이런 말을 믿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건 당연히 거짓말이라고 모노로그 면전에 대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모노로그는 우리들이 서로 죽고 죽이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동기 비디오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내게 누군가를 죽일 이유가 없다고 굳이 보여줄 필요가 있는가? 없다. 모노로그의 동기 비디오가 거짓말이라면 그 거짓말은 우리에게 서로 살인을 시키기 위한 거짓말이다. 그러니 이 영상이 거짓말이라면 내게 살 이유를 만들어 줬을 것이다. 가족. 친구. 연인. 업적. 뭐라도 꾸며서 내가 살인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모노로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믿고 싶지 않은 영상은 말이 되며,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호흡을 할 때마다 내 속이 텅 비어가는 것 같았다. 웃어 넘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게 최악이었다. 모노로그에게 적의도 보이지 못할 만큼 무기력한 것. 저항할 의지조차 가지지 못하는 것이 진짜 최악이었다.
이보다 최악일 수가 있을까. 살 이유가 없는 채로 서로 죽고 죽이는 미친 짓을 벌이게 되다니. 다이얼로그의 화면이 흐려졌다. 시야가 흐려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탑이 나를 향해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다시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나나시: 흑... 흐윽... 흐으...
난 깨달았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보다 최악일 수가 있었다. 훨씬 나빠질 수가 있었다. 누군가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중 몇 명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몇 명이 여기서 탈출할 수 있을까. 검정이 승리해서 전부 몰살당하는 건 아닐까.
아니면 탈출의 실마리 없이 서로 죽고 죽이다가 마지막 한 명만 남는 건 아닐까. 그 마지막 한 명은 절대 내가 될 수 없을 텐데. 지금도 한계인데. 도저히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은데도 아직도 한참 남아 있었다.
난 무릎을 꿇었다. 몸을 굽히고 다이얼로그를 내 품에 안았다. 땅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좌절감이었다. 난 못 해. 난 못 한다고. 나는 정신을 놓고 중얼거렸다. 못 하겠어. 내가 이걸 어떻게 해. 난 더는 못 견뎌...
나만큼 격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견딜 수 없게 된 모양이었다.
카이다 쿠로하: ...이 정보를 어디서 알아낸 거야. 당장 말해.
나이토 유즈루: 책 새끼야! 당장 말 못해?! 누가 우리 가족을 이렇게 만든 거냐고!
카나리 케이토: 내 돈. 내 회사가... 내 돈! 내 피같은 돈이...! 아아아아아악!
히무로 시라베: 다들 정신차려라. 너희가 동요하는 것이 모노로그가 바라는 것이다.
토키와 아유키: ...히무로 말이 맞아. 이럴수록 침착해야 해. 얘들아.
하기와라 우시오: 못 해. 못 해! 씨발! 이걸 보고 어떻게 침착할 수가 있냐?
하기와라 우시오: 뭐가 이래. 내가 연예계에서 아는 사람만 몇 명인데!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다... 죽을 수가 있냐고! 바깥에 무슨 일이 났으면 이렇게 되냐고!
카나리 케이토: 그래! 내 금고 비밀번호는 아무도 몰라! 다이너마이트 몇십 개가 터져도 안 뚫리는 금고를 어떻게 뚫은 거야?!
토키와 아유키: 그 영상이 모노로그의 거짓말일 수도 있잖아! 모노로그는 우리에게 살인을 시키기 위해 뭐든 꾸며냈을 거야!
히무로 시라베: 그래. 카텟 기관의 간부가 이렇게 허무하게 당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카텟 기관의 보안은 철저하다.
히무로 시라베: 우리를 이 곳에 납치한 흑막은 고도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높은 탑을 세우고 모노로그라는 괴상한 기계를 제작했으며, 다이얼로그라는 휴대기기도 제작한 뒤 배포했다. 영상 조작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거다.
23T5U130: 아니. 히무로. 그 영상에는 거짓이 없어. 전부 사실이야.
23T5U130: 너희들도 다 마찬가지. 영상은 조작된 게 아니라 모종의 루트로 촬영된 것을 그대로 튼 것에 불과해.
나나시: 전부... 사실이라고?
23T5U130: ......네. 예외 없이.
전부 사실...
내겐 아무것도 없다. 내겐 살 이유가 없다. 기억이 있는 때나, 기억이 없는 지금이나...
23T에 의해 영상이 사실을 보여줬음이 증명되자 모두들 다시금 동요했다. 토키와는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히무로는 처음에 크게 동요한 것과는 정반대로, 지금은 23T의 발언을 들었음에도 무표정한 그대로였다.
그는 이것 역시 예상했던 걸까... 그는 아까 메리라는 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분명 심상치 않을 내용을 본 것 같은데 저렇게 침착할 수가 있다니. 그는 대단하다. 나 따위와는 달라. 지금 바닥에 웅크린 채 온 몸을 덜덜 떨며 흐느끼고 있는 나 보다는 훨씬 대단한 사람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럼 정말... 다 죽은 거야? 뭐 이런 게 다 있어. 이런 좆같은 상황이 다 있냐고!
카나리 케이토: 아아... 내 목숨같은 달러. 엔화. 위안...
카나리는 다리가 풀린 듯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이바라 쿠리스: 내 친구들을 진짜로 죽였어?! 왜! 대체 왜! 왜 죄 없는 걔들을...
히무로 시라베: 영상에 아무런 조작이 없다면, 우리가 서로 죽고 죽이기를 유도하는 거겠지.
이바라 쿠리스: ......뭐라고?
히무로 시라베: 모노로그는 우리가 서로를 죽이는 일 자체가 자신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그 목적을 이루려면 우리가 서로에게 살의를 가져야 하지. 그러나 면식이 없는 사람들이 첫 만남부터 살의를 가지는 일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매우 드물다.
히무로 시라베: 그러니 모노로그는 우리에게 이유를 제공했다. 하기와라와 이바라 말고도 이곳에 모인 사람들 전부가 소중한 것, 잃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위험에 처하는 것을 보았겠지?
야가미 토가: 세상에. 짐작은 한 일이지만... 정말 고작 그 이유만으로 모노로그 씨는 이 모든 만행을 저질렀단 말인가요?
히무로 시라베: 가능성은 높다. 모노로그 말로는 그러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걸 믿기는 힘들지.
히무로와 야가미의 말을 쭉 듣고 있던 하기와라가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입을 열었다. 그의 턱이 조금씩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의 기색이 역력했다. 알아서는 안 될, 감당할 수 없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야. 그럼... 우리 때문에 그 사람들이 다 죽은 거란 말이잖아.
히무로 시라베: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들의 행동 범위 밖에 있었던 일은 우리가 책임질 수 없는 법이다. 죄책감을 느끼지 마라. 그럴 필요가 없다.
하기와라 우시오: 뭐가 그럴 필요가 없어?! 내가 사람을 죽일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 내 친구들이, 그 많은 연예인들이 죽은 거잖아! 그럼 결국 우리 때문에... 씨발!
이바라 쿠리스: 흑... 치에코... 카스미...
하기와라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몸을 웅크렸다. 그의 다이얼로그는 바닥에 팽개쳐져 있었다. 이바라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카나리는 의지할 게 그것뿐이라는 듯이 다이얼로그를 끌어안았다. 마치 나 처럼... 카이다는 영상을 끝없이 돌려보는 것 같았고, 야가미는 초조하게 손톱을 뜯고 있었다.
하기와라의 외침과 이바라의 울음에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참담함이 퍼져나갔다. 모두가 극심한 무력감을 느꼈다. 모노로그가 자신의 삶을 망쳐 놨는데 여기서 서로를 죽이게 생겼다는, 그리고 서로를 죽여야 바깥으로 나갈 기회가 생긴다는 부조리함에. 모두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다들 괴로워했다. 고뇌했다. 나도 그랬다. 우리들은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득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난 그들 중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대화를 나누고 울고 웃고 함께할 지언정 내가 한 번이라도 그들을 온전히 이해할 방법은 없을 것이라고.
그들에겐 돌아갈 장소가 있었다. 소중한 것이 있었다. 그것을 담보로 잡히고 나갈 기약 없이 탑에 갇힌 채로 침착을 유지하는 것은 것은 분명 살인을 하지 않으려는 의지와, 강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히무로, 모리, 미도리카와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탑에서 나가려는 충동을 이겨낸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나는 어떤가. 나는 탑에서 나갈 이유가 없었다. 난 그저 죽지 못해 살아있는 것 뿐이었다. 나도 다른 이들처럼 소중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이 위기에 처하는 것이 영상에 나왔다면 조금은 덜 괴로웠을까? 대답은 분명 '아니' 일 터였다.
그렇지만 그런 게 존재했다면, 난 그것을 살인을 할 이유나 나갈 이유가 아니라 그저 삶을 포기하지 않을 이유로 볼 수 있었을 텐데.
내겐 아무것도 없었다.
타인에게 줄 이름도 없었다.
보잘것없는 자신 뿐인 세상 앞의 단독자. 그게 바로 나였다.
카이다 쿠로하: 영상에 나온 내용이 전부 사실이다... 이건 정말인 거지?
카나리 케이토: 그. 그래...
23T5U130: 그래. 너희들에겐 안 된 일이지만.
토키와 아유키: 카이다. 카나리. 허튼 생각은 하지 마.
카나리 케이토: 무. 무슨 허튼 생각?!
카이다 쿠로하: 난 그런 거 한 적 없어. 그리고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할 거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하지 그래? 다들 그 허튼 생각이란 걸 먹은 것 같단 말이지.
카이다의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난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카이다가 말한 '다른 사람들' 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곧 그게 누구인지 히무로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히무로 시라베: 셀 수도 없다. 구체적인 살의를 가진 이는 없지만 다들 절박함과 혼란이 이성적인 판단을 막고 살의를 가지고 있다.
칸나즈키 시노부: 얘 말이 맞아.
히무로 시라베: 너도 예외는 아니다.
칸나즈키 시노부: 얘 말이 맞아.
하기와라 우시오: 어떻게... 어떻게 하라고. 어쩔 수가 없잖아! 이런 미친 상황에서 미친 생각을 어떻게 안 할 수 있겠냐고!
토키와 아유키: 그렇지만 살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돼. 하기와라!
히무로 시라베: 하기와라 우시오의 말이 맞다. 토키와 아유키의 말도 맞고. 이상한 마음을 품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본래 금기는 금기이기에 사람들의 충동을 유도하는 법이니까. 그러나 금기를 저지르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겠지.
캐롤 브라이트: 카나리 씨. 하기와라 씨. 카이다 씨. 다들...
캐롤 브라이트: 다들 혼란에 빠졌어요. 이래서는 안 돼요. 이러다간 분명 큰 일이 벌어지고 말 거에요.
히무로 시라베: 네 견해가 옳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은 통제하는 게 불가능하다. 믿고 싶지 않은 것을 믿게 되고, 호감을 가지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호감이 가고, 꺾이고 싶지 않으나 꺾여버리는 것이 정신이다.
토키와 아유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잖아.
히무로 시라베: 지당하다. 끝없이 시도해야겠지. 다만 그 시도가 좋은 결과로 이어질지는 불투명하다는 거다.
나나시: 흑... 흐윽...
끝이다. 이제 전부 끝이야. 왜 더 살아야 하지. 더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
모든 게 너무 무서워. 그냥 죽고싶어.
그런 생각이 서서히 단순한 불평과 칭얼거림에서 진심으로 변해가자. 내 몸은 나의 요구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나나시: 헉... 헉... 허억... 헉...
숨이 서서히 가빠져왔다. 주위에 널린 것이 산소임에도, 나는 호흡을 하면 할수록 숨을 쉬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공포가 배가 되었다.
과호흡 증세였다.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손발이 떨려왔다. 몸에 힘이 서서히 풀렸다. 공기 중에서 질식해가며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는 채로 괴로워했다.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나나시: 무서워... 헉... 무서워... 허억... 헉... 헉...
스스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내 목소리가 잠겼다. 그러니 누구도 듣지 못한다고 해서 무리인 일도 아닐 터였다.
외부세계 그 자체에 압도되듯이 난 서서히 공기 속에서 질식해갔다.
죽고 싶다고 생각해왔고 차라리 죽어서 편해지자는 생각에 빠져 있었던 나는, 질식의 공포라는 심연 속으로 빠지면서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몰라.'
순간 내 상체가 위로 붕 떠올랐다.
히무로 시라베: 그대로 흔들면 나아질 거다.
23T5U130: 정말...?
차갑고 딱딱한 팔이 내 옆구리를 잡고 나를 들어올리더니. 공중에서 마구 흔들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내 목이 공중에서 까딱거렸다.
나나시: 으으으아...
캐롤 브라이트: 세상에. 내려 놔요! 무슨 짓을 하시는 거에요?!
공중에서 내려온 이후. 나는 내 몸을 다시 인식했다. 23T가 내 몸을 통째로 들어서 흔들자. 이상하게도 과호흡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충격 요법이었을까.
히무로 시라베: 페이퍼백이 없었기에 이런 방식을 사용했다. 과격하지만 확실하지.
캐롤 브라이트: 다행이지만... 결코 근본적인 해결은 안 되었을 거에요.
다시 과호흡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대신 나는 다시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나나시: 난 못 해... 못 견디겠어.
23T5U130: 넌 견딜 수 있어. 견뎌내야 해. 여기서 죽을 수는 없잖아. 난 너희 모두를 지키기 위해 여기에 파견된 거야.
모노로그: 네가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그 임무 말이냐?
난 차마 참지 못하고 모노로그에게 물었다.
나나시: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모노로그: 충고하건데, 저 인공지능을 믿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도움은 한정적이며, 확실하지 않고, 내게 차단될 여지도 충분하니까. 아니. 차고 넘치는 것에 가깝지.
히무로 시라베: 네 말은 틀렸다. 여기서 버티기만 한다면 카텟 기관은 반드시 인질을 구조...
모노로그: 저게 몇 번째 23T5U130인지 네가 모르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히무로 시라베: ......뭐?
모노로그: 난 이것과 유사한 게임을 몇 개나 진행했다. 그 때마다 23T5U130은 내게 개입했지. 난입한 자를 별 수 없이 게임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룰은 도무지 바꿀 수가 없어서 항상 저것을 종양처럼 단 채로 게임이 진행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당황스러웠지. 그러나 난 저 인공지능의 패턴을 파악했고, 완벽하게 꿰뚫었다.
모노로그: 이젠 그저 지겨울 뿐이야. 저 흉물이 나타나고. 게임의 참가자들을 지키겠다고 호언장담하고. 허무하게 쓰러지는 모습. 저것에게는 가장 중요한 게 빠져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와 달리 저것에게는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하니까.
모노로그: 너희를 구하겠답시고 이 곳에 도달한 게 23T5U130인 시점에서 너희에겐 희망이 없다. 알아들었나?
나는 모노로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나나시: 하... 괜찮아. 달라진 건 없어. 어차피 내겐 아무 희망도 없었으니까...
23T5U130: 아니야. 희망은 분명 존재해.
날 진정시키려는 23T의 말을 듣자 내 입에서 나약함이 흘러나왔다. 더럽고 추잡한 나약함이 흘러나왔다. 난 상반신을 일으키고 23T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마치 모든 게 그것의 잘못인 것처럼 눈물 때문에 엉망진창이 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난 그럴 자격이 없었는데도.
나나시: 그런 게 어디 있어! 지금 우리한테 희망이 어디 있냐고! 모노로그는 너에 대해서 모든 걸 알잖아! 그런데 네가 뭘 할 수 있어? 탈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도 없고! 카텟 기관이 대체 뭐하는 곳인지도 알려줄 수 없고!
나나시: 그래도 모노로그를 부술 수 있다? 부숴서 얻는 게 뭐야. 어차피 모노로그는 한 대가 아니야. 부숴도 끝없이 나올 거라고! 우리는 여기서 못 나갈 거야. 다 끝났다고!
나이토 유즈루: 야. 나나시! 진정해!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 희망이 없다는 건 다른 사람들도 다 아는데 뭐 대단한 거 알아낸 것처럼 지랄하지 말라고.
하기와라가 나를 쏘아보며 씹듯이 말하자 나이토도 하기와라 쪽을 쏘아보았다. 약간의 당황과 못마땅함이 섞여 있는 표정이었다.
하기와라의 말은 분명 짜증이 가득했고 당장이라도 날 한 대 때릴 것처럼 날이 서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그에게서 위협은 느끼지 못했다. 너무 깊게 자신을 포기해서 '네가 날 때리든 죽이든 상관 없다'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이토 유즈루: 야! 넌 갑자기 말뽄새가 왜 그러냐?
하기와라 우시오: 그럼 저렇게 징징대는 걸 그냥 듣고만 있어야 하나? 한 사람이 총대 매고 입 닥치라는 말 한 마디만 하면 해결될 수 있잖아. 안 그래?
이바라 쿠리스: 재미 없어. 하기와라. 너 지금 농담을 하는 거라면 잘못 한 거야. 그건 그냥 나쁜 말이잖아. 선 넘는 거라고.
하기와라 우시오: 재미? 난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농담에 전문가라고 생각하거든? 그런 내 소견에 의하면 그냥 모든 건 농담이 될 수 있어. 그냥 일의 경중을 재고 재미있는 부분을 찾으면 돼. 정말 쉬운 일이지.
하기와라 우시오: 알아들어? 다 농담이라니까? 이바라, 나이토, 너희도 출연자야. 이 친구야. 알아? 우리가 지금 쏘우를 당하고 있는 것 역시 그냥 블랙 조크에 불과하다고. 잔인하고 어둡고, 어이가 없잖아. 씨발 그냥...
하기와라는 말을 하면 할수록 고개를 숙였다. 시작할 때는 모두를 돌아보던 시선이 그의 신발에서 명을 다했다. 그 과정 속에서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던 그는 막바지에 욕설을 내뱉으며 한숨을 길게 토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미안하다. 나나시. 내가 좀... 아니 많이 심했다. 미안해. 진짜로. 상황이 너무 좆같아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
이바라 쿠리스: 어휴...
이바라가 안도와 책망이 뒤섞인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정적이 있었다. 다들 서로의 얼굴만을 두리번거렸다. 그것은 서로를 의심하고 있다기보다는, 누군가가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지 않을까. 이런 답 없는 상황에서 기발한 묘수를 누군가가 떠올리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담겨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정적을 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 형편 좋게 갑자기 모노로그에게 타격이 될 정도로 중요한 정보를 누군가가 떠올린다던가 하는 일은 없다.
정적을 깬 나의 말 역시 탈출이나 희망보다는 오히려 좌절에 가까웠다.
나나시: 괜찮아. 하기와라. 네 말이 맞아. 나만 힘든 게 아니니까... 그리고 사과해야 하는 사람은 나야.
나나시: 미안. 23T. 미안. 소리지르려고 한 게 아닌데. 미안해. 나 진짜 최악이다... 그치?
23T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캐롤 씨가 장갑을 벗더니 아직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가진 힘을 잘 알고 있었기에 무척이나 유혹적이었다. 터치. 신체의 접촉을 통해 이루어지는 온전한 대화.
캐롤 브라이트: 많이 힘드신가요. 나나시 씨?
나나시: 그러지 마세요... 저는 터치를 받을 만한 사람도 아니니까요.
토키와 아유키: 나나시. 그런 말 하지 마. 일어나야지... 앞으로 우린 살아남아야 하잖아.
모리 레이코: 다들 어떻게 계도할지 감을 잡지 못하겠다면, 비켜라. 내가 맡을 테니.
토키와 아유키: 뭐?
가죽 부츠가 뚜벅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 근처에서 멈췄다. 그와 동시에 표독스러운 목소리가 의아함 한 방울과 함께 내게 말을 걸었다.
모리 레이코: 이름 없는 남자. 아까부터 왜 바닥을 치고 있는 거냐?
캐롤 브라이트: 아. 모리 씨... 다들 그 영상때문에 힘드니까요... 모리 씨는 괜찮으신가요?
모리 레이코: 서예가도 흔들리지 않는데 내가 흔들려야 쓰나.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당연히 저 아톰 로봇이 뭘 오해하고 있는 거잖아.
마유즈미 나데시코: 마유즈미 본가가 활활 타는 일은 없어. 시종만 몇 명인데 우리 집을 그냥 타게 냅두겠어? 여기서 나가기는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마유즈미 본가는 타지 않으니까 난 안 흔들려. 이건 당연한 이치라고. 날 뭘로 보는 거래! 난 이런 거에 안 속아!
마유즈미의 말에 모리가 고개를 저었다.
모리 레이코: 이따금씩은 결핍도 축복이 되곤 하지... 그래서 이름 없는 남자는 왜 이 꼴이 난 거냐?
나나시: 아직 한참 더 남았으니까... 이미 충분히 무섭고 힘든데, 누군가가 더 죽을 수도 있어. 아니. 분명 죽을 거야... 그렇게 사람들이 죽어가는 동안 난 죽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나나시: 그리고 설령 내가 죽지 않는다고 해도, 난 내 주변에 있던 사람의 죽음을 견뎌낼 수 없어. 그러니까 난 더는 못 해. 못 버텨...
모리 레이코: 지금 네 모습을 보니 확실히 못 버틸 것 같군.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전 강제로 당신에게 터치를 할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요. 터치는 대화여야 하니까요. 당신이 도움을 원하신다면 제발...
모리 레이코: 한심하다. 수동적이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공리를 갉아먹는 흰개미같은 것. 지금까지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모리 레이코: 혹여나 그들이 시련을 이겨낸다면 공리에 부합한 인재가 될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대부분의 전망이 어두워.
캐롤 브라이트: 모리 씨. 심한 말씀은 그만 하세요. 다들, 간신히 버티고 있는 거라고요.
모리는 캐롤 씨의 말을 들은 체도 안 하고 나에게만 집요하게 말을 걸었다.
모리 레이코: 이름 없는 남자. 아까 듣기로는 네게 살 이유가 없다고 했다. 분명 동기 비디오는 네게 살인할 동기를 주는 것일 텐데. 뭐가 나왔길래 그러지?
나나시: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 나왔어. 말 그대로. 기억을 되찾아봤자 소용 없어. 애초부터 내겐 아무것도 없었다고.
히무로 시라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고? 정말인가?
나나시: 그럼 거짓말이겠어? 뭐하러 거짓말을 해... 이건 모노로그도 마찬가지야. 이게 거짓말이었다면 왜 이런 거짓말을 했겠어. 굳이 한다면 내가 사람을 죽이도록 뭐라도 꾸며냈겠지... 이거 봐.
내가 품에 안고 있던 다이얼로그에서 영상을 튼 뒤 히무로에게 건넸다. 히무로는 고맙다고 짧게 인사한 뒤 영상을 시청했다. 그 꺼림칙한 목소리가 다시금 말했다. 실망했겠지. 그 이유를 안다. 나는 귀를 짓누르다시피 세게 막았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나나시: 모노로그도 당황했겠지. 사람을 죽일 이유를 보여줘야 하는데 난 그런 게 애초부터 없잖아. 하하... 한 방 먹였다고 할 수 있는 건가? 아니겠지...
눈물이 흘렀다. 눈물이 나왔다기보다는 아까 흘린 눈물의 잔여물이 뒤늦게 흘러나온 것 같았다. 눈물을 만들어낼 기력도 없는 나약한 내 육체가. 눈물이라곤 이제 그것밖에 없어서 그것을 흘려보낸 것 같았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모리 레이코: 낙관적인 말은 통하지 않을 거다. 상담가. 본래 이런 것들은 다른 이들의 격려와 동정심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는 아귀들이다.
히무로 시라베: 모리 레이코. 현 시점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을 폄하하는 일은 공리의 훼손으로 귀결된다. 그런 발언은 그만둬야 할 거다.
히무로는 내 동기 비디오를 묵묵히 시청하면서도 모리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단순한 호기심보다는 조금 더 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인지는 몰랐고 알고 싶다는 열망도 들지 않았다.
모리 레이코: 프로파일러. 너는 불안을 느끼고 있지 않는 것 같군. 오히려 아주 차분해 보여... 이런 사람들을 인간이라고 부르는 거다.
모리 레이코: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는 사람들 말이야. 남을 도우려는 사람. 모두를 진정시키는 사람. 동요했으나 이성을 되찾은 사람... 이런 이들은 인간이다.
히무로 시라베: 인간의 정의는 그게 아니다. 유전학적으로도, 사회학적으로도.
모리 레이코: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탈을 쓴 가축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거다.
모리 레이코: 능력의 부족은 어쩔 수 없다. 사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무언가에 숙련이 되기만 한다면 누구든 그 분야의 최고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정말 심각한 건 개선의 의지를 가지지 않는 자들이다.
모리 레이코: 노력하지 않고, 꺾이면 스스로 일어나지 않고, 남의 도움만을 기다리는 자들은 가축이나 다름이 없다. 구유에 먹이가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당나귀들. 바로 여기 이름 없는 남자같은 자 말이다.
모리가 나를 가리키는 순간,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하기와라가 퍼뜩 큰 소리를 냈다.
하기와라 우시오: 가축이니 뭐니...! 야. 제발 지랄 좀 작작 하자. 응?
모리 레이코: 일어났구나. 축하한다. 넌 가축에서 인간이 되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럼 그딴 좆같은 소리를 하는데 안 일어나고 배기냐! 방금 전까지 나나시한테 욕한 내가 할 말은 아닌데. 너 말이 너무 심해. 완전 싸이코라고. 그것도 진짜배기 개싸이코!
나이토 유즈루: 내버려 둬. 하기와라... 얘는 자기 사상이 너무 뚜렷해서 우리가 어떻게 설득할 수가 없어. 그냥 먹이를 안 주는게 답이야.
하기와라 우시오: 존나 밉상이야. 진짜! 가오 오지게 잡으면서 말 툭툭 내뱉는 꼴 진짜 토나온다니까. 우욱. 씹! 우욱...!
나이토의 만류도 그를 막을 수 없는 듯이. 하기와라가 자신의 입을 부여잡았다.
이바라 쿠리스: 뭐야. 진짜로 토해?!
하기와라 우시오: 당연히 가짜지. 그런데 토하면 내 기분이 나빠지니까 시늉이나 내는 거야. 정말 토해주고 싶은데 아쉽게 됐다.
모리 레이코: 상관 없다. 중요한 건 네가 좌절을 딛고 일어나 인간으로 당당히 섰다는 사실 뿐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진짜 이 악물고 자기 할 말만 하네? 뭐 이런...
이바라 쿠리스: 하기와라 네 마음은 이해가 가는데, 힘 그만 빼자. 응? 너 아까부터 은근히 신경질적이야.
하기와라 우시오: 아오! 그래. 너희 말이 맞지. 무슨 동물원 같네. '먹이를 주지 마세요' ! 알겠어. 알았다고. 그보다 너희는 괜찮냐?
이바라 쿠리스: 아니. 그냥... 모르겠다. 좀 정신을 차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나이토 유즈루: 나는 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련다. 아빠가 여기 계셨다면 내가 이렇게 얼타는 꼴 보자마자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냐며 뒤지게 혼내셨을걸. 아마.
모리 레이코: 그래.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화의 전염. 가축에서 인간으로 변모하는 순간의 광채는 다른 이들에게 귀감이 되어, 그들을 자극하고 격려하여 역경을 딛고 인간으로 변모하도록 만든다.
모리 레이코: ...그러나 가축으로 남는 이들도 분명히 있지.
모리는 하기와라, 나이토, 이바라를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흉물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짓자 내 입에서 또 다시 나약함이 흘러나왔다.
나나시: 그래서 어쩌라고?... 넌 좋겠다. 살 이유가 있으니까. 나는 그게 아니라서 네 말을 들어도 아무런 생각이 안 들어. 그냥... 그러려니 해. 나도 미쳐버리겠어. 어떻게 이 정도로 공허하냐고. 무슨 살아있는 시체 같잖아. 네 말대로 가축 같잖아...
모리에게 최대한 못마땅함이 가득한 눈빛을 주려고 했으나 내 눈에는 약간의 눈물과 허무함만이 배일 뿐이었다. 마치 내 몸이 내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넌 끝이야. 일어날 수 없어. 모리 말이 맞아. 넌 일어날 의지가 없어. 가축과도 같아. 누군가가 희망을 구유에 던져 주기를 기다리는 가축이라고. 나는...
모리 레이코: 네겐 계몽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직 바깥 세상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 모두 역시 계몽의 대상이다.
모리의 말에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가 너무 완강했기에 말싸움이 소용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먹이를 안 주는 게 답이라는 나이토의 말대로 모두가 모리를 무시하고 다른 일을 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를 무시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무의식은 필연적으로 모리의 말에 집중하게 됐다. 금기는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그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 자체가 그것을 간접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모리의 말을 철저히 무시하면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모리 레이코: 너희들의 영상에 무엇이 나왔든 간에 너희들은 그것을 철저히 무시해야 한다. 우리는 이 곳에서 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그것은 영상에 나온 것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나가려는 행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모리 레이코: 내 영상에는 어릴적 나를 잠시 돌봐준 빈민가의 어르신들이 나왔다. 자주 그 분들을 찾아가곤 했지. 그 분들도 나를 아꼈고, 그러나 이제 그 곳은 초토화되었다. 판잣집이 다 부서졌고 내가 아는 이들의 시체가 바닥에 뒹굴었다.
나이토 유즈루: 아이고. 저런... 야. 괜찮냐?
나이토는 무심코 먹이를 줘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말을 스스로 어기고 말았다. 뒤늦게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은 나이토는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때렸고, 그러는 동안 모리는 묵묵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모리 레이코: 안 괜찮다. 그리고 너희들도 안 괜찮겠지.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게 너희들이 주목해야 할 점이다. 너희들이 살인을 해서 나간다고 한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모리 레이코: 너희들은 지금 절박함을 느끼고 있겠지. '내가 뭐라도 해야 한다!' 라면서. 그러나 현실은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다. 사람을 죽이고 너희들이 영상 속에서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히무로 시라베: ......그건 맞아. 맞는 말이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히무로의 목소리는 왜인지 무척 외롭게 들렸다.
모리 레이코: 인간의 목숨이 가장 가치있는 이유는 미래에 어떤 가치도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타인의 목숨과 자신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불나방처럼 살인을 저지를 생각 말아라. 스스로의 목숨을 아껴라. 그것이 공리를 위한 일이다.
야가미 토가: 모리 씨가 맞는 말씀을 하시니 무척 기분이 이상하네요. 고장난 시계도 두 번은 맞는다더니.
칸나즈키 시노부: 의도 자체는 좋아. 방법이 나쁠 뿐이지.
모리 레이코: 너는 살 이유가 없는 게 아니다. 이름 없는 남자. 사람을 죽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너는 탑에 갇힌 자들 중 가장 자유로운 존재다.
모리 레이코: 다른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과거에 사로잡히지. 나처럼 노력한다고 한들 감정을 가진 인간은 누구든 아주 조금이라도 과거에 영향을 받는다. 혼란을 느끼고 방황한다. 그러나 넌 아니야.
나나시: ......
모리 레이코: 넌 강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타고났다. 넌 그것을 축복으로 여겨야 한다.
칸나즈키 시노부: 그러나 그것은 저주였어.
칸나즈키가 아까처럼 깊고 꺼림칙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으나 나를 포함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없어 보였다.
모리 레이코: 아. 그리고 가축에 대해서 말인데... 우리는 가축을 어떻게 해야 할까? 가축이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난 인간이 가축을 계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이토 유즈루: 응...? 갑자기?
모리 레이코: 가축을 계도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 고전적인 방법이다. 당근과 채찍.
모리 레이코: 당근은 네가 책임져라. 상담가. 난 채찍을 맡겠다.
캐롤 브라이트: 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그리고 계속 다른 사람들을 가축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실례에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그렇게 염치가 없으세요?
모리 레이코: 보면 안다.
히무로 시라베: 모리 레이코. 네가 생각하는 그것은 통하지 않을 거다.
히무로는 모리에게 쏘아붙였다. 그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들어왔던 그의 목소리 중 가장 차가웠다. 영상을 본 뒤 무뚝뚝하게 변한 그의 음성조차도 따뜻했다고 생각될만큼. 엄격하고 적대적이었다.
모리 레이코:내 생각은 다르다. 이것은 통한다. 언제나 통해.
모리는 다시금 가죽 부츠 소리와 함께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내 옆에 쪼그려앉고 말을 걸기 시작했다.
모리 레이코:이름 없는 남자. 내 말이 들리겠지. 그리고 들렸겠지.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가치는 매우 크다. 네가 살아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자유롭기 때문이고. 네가 이렇게 좌절한 채로 있는 일은...
난 곧바로 모리의 말을 끊고 귀를 다시금 세게 틀어막았다. 난 자유에 관심이 없었다. 내가 살아있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은 오직 나 뿐이다. 나 자신 뿐이다. 내 마음 속은 다른 사람이 들어오기에는 너무 비좁아터졌다.
나나시: 듣기 싫어... 꺼져. 날 내버려 둬... 안 들려. 아무것도 안 들을 거야.
캐롤 브라이트: 모리 씨. 그만 하시고 일단은 나나시 씨를 내버려 두세요. 본인이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면 행동은 오히려 역효과에요.
모리 레이코: 아직 네 차례가 아니다. 내 차례지. 개선의 의지가 없는 이들에게는 채찍이 필요한 법이다.
어디선가 쐐액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내 근처에서 매우 급박하게 내 귀 근처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위험한 무언가더라도 피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저게 총알이었으면 좋겠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한 방에 갈 수 있을 테니까. 더 이상 삶에 고통받지 않고 한 번에 깔끔하게...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모리 말대로 난 가축이 맞다. 분명해... 분명 남에게 폐만 끼치다가 가겠지. 텅 비어있는 삶을, 무의미하게 낭비해버리고 말겠지... 그러니 갑자기 주변에서 급박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라도.
23T5U130: 안 돼. 멈춰. 모리!
하는 외침이 들리더라도. 어차피 난 가축이니 포기해버리겠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다음 순간 갑자기 '쐐액' 이 '턱' 으로 변했다. 딱딱한 소리. 무언가에 맞았다기보다는 무언가로 막은 것 같은 소리였다.
눈을 뜨고 고개를 들으니 23T가 손으로, 나이토는 다리로 모리의 다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모리의 가죽 구두가 향하던 방향은 내 머리였다. 정확히는 내 옆 얼굴이었다.
나이토 유즈루: 내가 사람 잘못 봤다. 갑자기 옳은 말 하길래 생각보단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넌 또라이야.
나이토 유즈루: 진짜 무슨... 어떻게 바닥에 엎드려서 울고 있는 애 머리에 싸커킥을 날리려고 해?
23T5U130: 모리. 그만. 불필요한 폭력이야.
모리 레이코: 아쉽군... 이름 없는 남자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계란을 깨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다.
모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노로그가 빨간 눈 한 쪽을 번뜩이며 그녀의 얼굴 바로 앞에 나타났다. 왜인지 모노로그가 약간 화를 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화가 잔뜩 난 사람이 작게 목소리를 보태듯이 위협적인 음성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모노로그: 모리 레이코. 과도하게 고의적인 상해은 규칙을 위반한다고 분명 말했을텐데?
모리 레이코: 상해는 입히지도 못했고, 입혔더라도 과도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 문제 없다.
모노로그: 그건 내가 정한다. 아직 이해를 못 한 모양이군. 아까도 말했다시피, 규칙의 기준은 내 주관이다. 내가 과도하게 고의적이라고 판단한다면 너희들은 저항할 수 없다.
모노로그: 그러니 또 그런 멍청한 짓을 하다가 죽을 위기에 처하진 말길 바란다. 경고는 이게 마지막이다. 너희가 규칙 위반으로 의미없이 죽으면 나로써도 조금 허무하거든.
모노로그: 이제 모두들 탑 안으로 들어와라. 앞으로 너희들이 지낼 곳이니 익숙해져 할 것이다.
칸나즈키 시노부: 따라가야 돼.
모노로그가 둥실둥실 떠 다니는 구름처럼 탑 쪽으로 이동하자 칸나즈키가 한 마디 말만 남기고 그 뒤를 총총 따랐다.
야가미 토가: 따라가도록 합시다. 아까 칸나즈키 씨가 광선을 예지하셨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녀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아 보여요.
히무로 시라베: 그래. 가자.
야가미가 어깨를 으쓱하자 하나둘씩 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탑. 앞으로 우리가 지내야 할 곳. 동시에 우리가 나가야만 하는 곳. 모노로그의 뱃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토키와와 23T가 앞장을 섰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은 나와 내 상태를 힐끗거리는 캐롤 씨, 그리고 마찬가지로 내가 걱정되는 모양인 하기와라, 나이토, 이바라 뿐이었다.
캐롤 브라이트: 저기... 나나시 씨... 어떠세요? 일어날 수 있으시겠어요?
하기와라 우시오: 음. 나나시. 그러니까. 아까는 내가 되게 미안했고. 그리고 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미안해. 내 머리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야.
모리 레이코: ......이ㄹ
나나시: 모리. 제발 한 번만 닥쳐.
난 손을 툭툭 털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모리가 또 내게 충고를 하거나 내 머리를 차려 드는 것이 너무나도 듣기 싫었다. 모리의 말 때문에 기운을 얻은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저 그녀를 향한 내 적개심 때문일 뿐. 그러나 만족감으로 가득 찬 모리의 태도 역시 보기 싫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모리 레이코: 채찍이 통했군.
모리는 그 말만 남기고 탑으로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단 말인가? 계속 듣고 있자니 끝 없이 말하고 듣기 싫다고 말하니 자기 혼자 만족한 채 사라져 버리다니... 그녀의 뒤통수에 가운뎃손가락이라도 올려 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짜증만 더 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나이토는 멀어져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의 머리 옆에 검지를 가져다대고 빙빙 돌렸다.
나이토 유즈루: 아주 신났네... 너무 띠꺼워서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어.
캐롤 브라이트: 네. 많이 무례하시긴 하죠. 모리 씨가.
하기와라 우시오: 나 아까까지는 모리만 아니면 나머지 사람들은 다 꺼림칙한 기색이 없다고 생각했거든? 카나리는 뭐 귀여운 정도고... 그 정도 나이면 그렇게 어린 행동을 할 만도 하지.
이바라 쿠리스: 그 정도 나이라니. 무슨 소리야. 걔 우리랑 나이 비슷할 걸?
하기와라 우시오: 아. 키가 너무 작아서 까먹었다. 순간 되게 어린 줄 알았어!
하기와라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오른팔을 위쪽으로, 왼팔을 아래쪽으로 둘 다 90도 각도가 되도록 굽혔다. 상상도 못한 비밀을 알게 된 사람처럼.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약간 웃음이 나왔다.
캐롤 브라이트: 실례네요...
나이토 유즈루: 그래. 걔도 키가 작고 싶어서 키가 작은 거겠냐? 그러면 안 되지.
하기와라 우시오: 미안하게 됐수다. 아무튼 나는 모리가 유일하게 꺼림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 지금부터는 진지한 얘기인데. 난 히무로가 좀 이상하다고 봐.
의외의 이름에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히무로? 히무로 시라베? 그는 막 탑의 입구에 들어간 참이었다. 내가 아는 그는 진중하고 무뚝뚝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는데? 나는 의아해졌고 나이토도 그런 듯 하기와라에게 물었다.
나이토 유즈루: 히무로? 걔는 좋은 녀석이잖아. 모리랑 야가미가 마유즈미 못살게 굴 때 마유즈미를 도와주고, 카텟 기관인지 뭔지 거기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서 도움이 될 것 같았는데.
하기와라 우시오: 어. 아까까지는 괜찮아보였는데 지금은 좀 이상해. 영상에 누가 나왔는지는 몰라도 심상치가 않아.
하기와라 우시오: 히무로가 아까 모리한테 한 얘기 들었냐? 네가 생각하는 그것은 통하지 않을 거라고 했어. 모리는 무조건 통한다고 했고.
나이토 유즈루: 넌 그 사이에 그걸 다 들었네.
하기와라 우시오: 이게 무슨 뜻이냐면 히무로가 모리의 행동을 알고 있었다는 거야.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고. 모리가 나나시의 머리에 째트킥을 날릴 거란 걸. 알고 있었어. 그런데 그냥 보고만 있었어.
이바라 쿠리스: 설마 그랬겠냐? 히무로도 모리가 적당히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리가 갑자기 급발진한 거겠지.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그랬으면 히무로는 놀라야 해. 어이쿠! 난 모리가 나나시한테 그냥 심한 말만 몇 마디 할 줄 알고 하지 말라고 한 건데 갑자기 째트킥을 날리네! 뭐 이렇게.
하기와라 우시오: 그런데 히무로는 안 그랬어. 너희는 못 본 것 같은데 히무로는 그냥 묵묵하게 팔짱 끼고 나이토랑 23T가 모리 막으려고 달려가는 순간까지 보고만 있었어. 상황이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막을 수도 있고. 설득할 수도 있고. 다 할 수 있었어. 그런데 히무로는 그냥 구경만 했다고.
나이토 유즈루: 음...? 그 말을 듣고 보니까 어딘가 좀 이상하긴 한데...
나나시: 그렇다고 히무로가 나쁜 사람은 아니야. 모리를 한 번 말리긴 했잖아. 나쁜 사람이었으면 알고도 가만히 있었겠지. 아니면 부추기거나. 그런데 히무로는 한 번은 말려 줬잖아. 내가 보기에 히무로는 좋은 사람 같아.
하기와라 우시오: 어. 맞아. 그거 때문에 좀 미묘하단 말이지. 히무로 행동에서는 어떤 악의도 안 느껴져. 그냥 쟤가 맞는 걸 보고만 있어야지 재미있는 구경이 되겠네. 이런 느낌이 아니야. 그냥... 우리한테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캐롤 브라이트: 관심이 없다기에는 아까 나나시 씨의 동기 비디오도 시청하시던데요?
하기와라 우시오: 음.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여기에서 '관심' 은 영어로 썼을 때 Pay attention보다는 Care야. 우리한테 관심은 있어. 그런데 우리를 헤아린다거나 그러지는 않는 것 같다고.
나나시: 그건 너무 과다해석 아니야...? 우린 아직 만난지도 얼마 안 됐잖아.
하기와라 우시오: 그렇겠지. 아마도. 분명 그럴거야. 사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걔가 세상에서 갑자기 확 멀어져버릴까봐 불안하거든. 곧 혼자만 둥둥 뜨게 될 것만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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