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봉 학원은 몰락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초고교급이라는 명칭은 더 이상 예전만큼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초고교급의 인식과 후광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희망봉 학원. 거대한 영향력을 가진 엘리트주의의 상징이 있기에 작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고교급이라는 단어는 그것이 진정한 의미를 상실했던 시기, 즉 두 번째 희망봉 학원이 세워지기 전에도 충분히 예전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어(死語)가 되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은 초고교급이라는 칭호를 버리지 않았다. 저 사람 정도면 초고교급이다. 아니다. 저 사람이 초고교급이다. 사람들은 몇십 개의 바리에이션을 가진 비공식적 초고교급을 임명하고, 그들의 자격에 대해 토론하고, 초고교급이라는 호칭을 되살리려고 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한 초고교론자는 자신의 서적에서 이 현상을 언급했다.
"초고교급은 단어 그대로 고등학생 수준 이상의 능력을 가졌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희망봉 학원이 부여하는 자격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희망봉 학원이 그 사람을 스카우트했다는 사실 자체가 초고교급의 공식적 지표가 된 것이다. 현 시점에선 희망봉 학원이 없기에 '초고교급' 도 없다고 할 수 있으나, 대중들이 비공식적인 기준을 만들고 누군가가 초고교급에 준한다, 혹은 초고교급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평가하며 초고교급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중들 역시 초고교급의 부활을 염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희망을 육성하는 역할을 했던 희망봉 학원은 이 나라의 미래를 상징했다. 밝은 미래이자 희망의 상징. 희망봉 학원은 사람들의 긍지이자 우상이었다. 그렇기에 알파걸은 그것을 파괴의 중심으로 삼았다.
상실된 것을 되찾기 위해선, 대몰락의 여파를 잠재우기 위해선 초고교급을 되살려 그것이 태양처럼 사회의 어둠을 밀어내게 만들어야 한다. 초고교론은 단지 초고교급이 멸망시킨 것을 초고교급으로 되살리겠다는 일차원적 발상의 산물이 아니라 초고교급이라는 심볼리즘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작용할 것인가에 대해 고려한 결과인 것이다."
시라유키 히메리 역시 초고교급 연구가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녀는 엄밀히 말해 초고교급 학생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희망봉 학원은 이제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녀의 발상력과 뛰어난 지능, 탐구력은 그 칭호를 얻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초고교급 연구가라고 불리게 되었다. 문제는 모든 '초고교급' 들이 그 칭호에 걸맞는 재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자신이 초고교급이라고 주장하는 사기꾼들이 많아지고,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초고교급의 기준 역시 달라졌다. 모두가 만족할 만한 초고교급은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에겐 초고교급이라고 인정되지 않는 사람이 누군가에겐 초고교급이라고 인정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초고교급은 범람했다. 알파걸은 초고교급이라는 깊은 우물을 파괴하고 지하수를 분출시켜 호수로 만들었다. 발목 높이밖에 차지 않는 호수는 많은 대중들의 발을 적시며 동시에 더러워졌다. 사람들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흙탕물을 떠 마셨다.
초고교급은 그 본래 의미를 잃고 지표나 자격에서 그저 권력이나 허세의 단편으로 퇴화해버렸다. 그렇게 초고교급의 상징적 의미를 중요시하던 초고교론은 큰 전환기를 맞게 된다. 초고교급보다 우수한 이른바 '초인'들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탑에 갇힌 이들이 대몰락 이전의 초고교급인지, 대몰락 이후의 초고교급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의 이름은 분명 들어본 바가 있었다. 실물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분명 그들은 초고교급 학생이었다.
그러나 난 내 기억 자체에 회의감을 가져야 했다. 모노로그가 알파걸처럼 우리들의 기억을 조작하거나 인위적으로 지우는 것이 가능하다면,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은 나의 기억이었다. 그것은 모노로그가 원하는 판으로 짜여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결국 난 확실한 점부터 짚어 보기로 했다. 나나시의 동기 비디오는 확실히 특별했다. 우선 영상 속의 목소리가 나나시에게 자살을 권유했다는 점이 이질적이었다.
그 영상에는 나나시를 향한 악의가 실려 있었다. 나나시에게 고통을 주려는 악의가 실려 있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나나시가 좌절함으로써 모노로그가 얻는 이득은 전무했다.
나나시 본인의 말마따나 그에게 가짜 동기라도 보여 줘서 살인을 유도하는 것이 모노로그의 목적 달성에 부합하는 일일 텐데... 모노로그는 살인 게임에서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를 몰아세우려 했다.
유일한 해답은 모노로그, 그리고 십중팔구 우리 속에 숨어 모노로그를 조종하고 있을 흑막이 나나시에게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흑막은 카텟 기관에서 극비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나, 신원 불명의 나나시와 재능이 밝혀지지 않은 미도리카와 아쿠토를 포함하고도 초고교급 학생을 12명이나 납치할 정도로 주도면밀했다. 계획의 구상과 준비에만 몇 년이 통째로 소비될 정도로 규모가 큰 납치 범죄에, 이런 감정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의아했지만 그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어쩌면 그를 정신적으로 몰아세우는 것 자체가 모노로그에게 이득이 될지도, 그러나 아직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나나시가 카텟 기관과 연관이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내가 나나시를 만날 수 있는 곳은 카텟 기관밖에 없었다.
"정말 살면서 이 지역을 벗어나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단 말인가?"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거짓말 탐지기가 울렸을 겁니다."
"기관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너는 거짓말 탐지기조차 속일 수 있다."
"거짓말을 할 논리적인 이유가 없습니다. 저를 구조한 기관을 왜 제가 적대한단 말입니까?"
"설령 그럴지라도 네가 만들어진 목적과 너의 위험도를 고려하면 감시를 게을리할 수 없다."
그들은 내가 만들어졌다고 표현했다. 어쩌면 태어났다는 표현보다는 그것이 적절할지도 몰랐다.
카텟 기관이 아니라 '그 장소' 에서 나나시와 만났을 가능성 역시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 장소에 있던 내 또래는 오래 전에 전부 죽었으니... 그를 만날 수 있는 곳은 카텟 기관밖에 없었다.
그에게 카텟 기관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 적절한 행동일까 고민하던 사이에, 모든 인원들이 탑 안으로 모였다. 모노로그가 입을 열었다.
모노로그: 탑에 온 걸 환영한다.
탑의 내부는 중세 고딕 양식을 연상시켰다. 검은 계통의 색을 가진 벽돌들로 채워진 벽, 새까만 바닥. 그러나 엘리베이터가 떡하니 건물 중앙에 있는 풍경은 약간 이질적이었다. 마치 문명이 눈치 없이 끼어든 현장 같았다. 저것이 승리한 검정이 탈 수 있다는 엘리베이터인가?
모노로그: 탑의 중앙은 엘리베이터가 오고가기 위한 공간이므로 기둥이 감싸고 있다. 양해 부탁드리지.
그리고 그 기둥 옆에는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나선 계단이 붙어있었다. 우리는 모노로그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고, 나선 계단이 기둥의 반 바퀴 정도를 돌자 우리는 많은 문들과 마주했다. 문의 색상은 우리들의 머리 색상과 일치했고, R과 S가 적혀 있는 방이 각각 한 개씩 총 16개의 방이 있었다.
후루미나미는 2층을 조금 살피더니 가방에서 아프로 머리 가발을 꺼내고 착용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 후루미나미. 지금 뭐 하는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참 쉽죠?
하기와라 우시오: 와!!! 밥 아저씨!!!
마유즈미 나데시코: 잼 아저씨 말고 밥 아저씨도 있어?
하기와라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탄성을 토하는 동안, 후루미나미는 가방에서 스케치북과 물감을 꺼내더니 즉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이게 2층.
그녀는 우리에게 그림을 찢어서 건네주더니 3층으로 올라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3층의 구조를 그려왔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리고 이게 3층이야.
방에 적혀 있는 알파벳 R은 숙소(restroom), S는 전용실(special room)을 뜻하는 것 같았다. 대단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그림 솜씨였지만, 그녀의 연기는 어딘가 묘한 점이 있었다. 거의 모든 메소드 연기에는 극중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후루미나미에게선 그 시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초고교급은 괴짜인 것이 대부분이니, 그렇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나는 탑에 집중했다. 탑은 상당히 넓었다. 테니스 코트가 네 개는 들어갈 정도의 넓이였다.
이렇게 넓은 공간이 몇백 층까지 이어진단 말인가? 그러기는 힘들 터였다. 천문학적인 비용 그 이상이 소모되었을 것이 틀림없었으니까. 게다가 우리가 생활할 공간이라 하기에는 우리에게 허용된 공간이 너무 좁았다. 숙소. 전용실이라고 불리는 방, 양호실, 도서관, 창고가 끝.
학급재판을 무사히 마칠 때마다 탑의 층이 개방된다고 모노로그는 말했다. 우리의 현재 인원은 16명이다. 즉 검정이 한 명을 죽이고 학급재판에서 패배하는 사건만 벌어진 이루어진다는 가정 하에, 무사히 마칠 수 있는 학급 재판의 수는 7번 뿐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물론 연쇄 살인의 가능성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7번 만으로 얼마나 많은 공간이 개방될지는 의문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히무로맨. 뭘 그렇게 중얼중얼거리고 있어?
히무로 시라베: 모노로그는 우리를 가두기 위해 이 탑을 만들었다. 모노로그의 말에 의하면 700층을 넘길만큼 높은 탑.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은 매우 좁다.
히무로 시라베: 학급재판을 끝낼 때마다 백여 층씩 개방되지 않는 이상, 모든 공간을 전부 사용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이렇게 높게 세운 걸까?
하기와라 우시오: 듣고 보니 맞말이네. 23T. 아는 거 있어?
23T5U130: 자세히는 말할 수 없지만, 탑의 층수는 모노로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어.
히무로 시라베: 무슨 뜻이지?
23T5U130: 모노로그가 탑을 높이고 싶어서 탑이 이렇게 높아진 게 아니라는 뜻이야. 모노로그는 탑의 관리자일 뿐... 탑을 높이는 권한은 없어.
히무로 시라베: 모노로그는 허수아비라는 것인가? 확실히. 배후에 조종하는 사람이 있겠지.
23T5U130: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탑을 세운 사람들은 확실히 따로 있지만 이제 탑에 그들은 없어. 모노로그는 남겨졌고...
모노로그: 너는 버려졌지.
23T5U130: ......
모노로그: 너나 나나 신세 한 번 기구하구나. 기약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도전하는 네 심정이 어떨까. 가끔은 네게 동정을 느끼기도 한다.
모노로그: 물론, 넌 동정이라는 감정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나이토 유즈루: 진짜 저 입을 확 찢어버리고 싶네.
하기와라 우시오: 찢 어 라! 찢 어 라! 찢 어 라! 찢 어 라!
모리 레이코: 아니. 찢지 말아라. 승부사.
하기와라 우시오가 나이토 유즈루의 옆에서 박수를 치며 그를 부추겼고, 모리 레이코가 그를 만류했다.
모리 레이코: 찢으면 넌 확실히 죽는다. 아까 나와 똑같아. 이 탑에서 섣부른 행동은 곧 의미 없는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나이토 유즈루: 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기와라 우시오: ㄹㅇ. 황제 폐하. 그걸 누가 몰라서 이러는 줄 아세요?
모리 레이코: 그러니 저 인공지능에게 부탁해라. 인공지능은 모노로그를 파괴할 수 있으니 저것을 찢을 수 있다.
하기와라 우시오: ....흠. 묘수로군.
마유즈미 나데시코: 띠잉?! 그게 돼?!
히무로 시라베: 안될 건 없다. 23T에겐 그런 권한이 있으니까. 그래서. 할 수 있나?
23T는 행동으로 대답했다. 그것은 눈 깜짝할새에 모노로그의 곁으로 움직였고, 그것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이제 왼손을 위로, 오른손을 아래로 내린다면 23T의 괴력은 분명 모노로그를 반으로 찢을 수 있을 터였다. 말 그대로 책처럼.
모노로그: 해라. 당장 해.
입술을 잡고 있을 터인데도 모노로그에게선 목소리가 나왔다. 그것의 붉은 색 눈이 번뜩였다.
모노로그: 이 자리에서 날 산산조각으로 찢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해라. 네 목표에 평생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해라.
모노로그: 아까 이름 없는 자의 말마따나, 그것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직접 보고 느껴라.
23T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모노로그를 놓아 주었다. 모노로그는 둥실둥실 우리들의 머리 위로 높이 떠올랐고, 다음 순간 다이얼로그는 삑삑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메뉴의 '교칙 확인' 란이 점멸하고 있었다.
모노로그: 이제 너희들에게 전용실과 관련된 규칙을 더 보여주겠다.
히무로 시라베: 규칙은 11개가 전부인 것 아니었나?
모노로그: 나도 시간 낭비 없이 한 번에 보여주고 싶지만, 절차가 절차니 어쩔 수가 없다.
히무로 시라베: 또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규칙 12: 타인의 전용실이나 숙소에서 빼앗거나 빌린 물건은, 방의 주인의 요청에 따라 강제로 반환될 수 있습니다.
규칙 13: 전용실에서의 취침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규칙 14: 탑을 조사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모노로그: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다. 그럼...
모노로그는 교칙을 확인하는 우리를 뒤로한 채, 바닥을 뚫고 사라져버렸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뭐야... 전용실 관련 규칙이라면서? 탑을 조사하는 게 자유라는 거랑 전용실이 무슨 상관이야?
난 14번째 규칙이 뜻하는 의미를 깨달았다. 그것은 몇몇 이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다른 이의 방을 '조사' 하더라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더 단크 타워
챕터 1: < 죽여 마땅한 사람 둘 >
"과정은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각자 전용실과 숙소를 조사해보자는 토키와의 제안에 따라 우리는 잠시 흩어진 뒤 식당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다. 누군가가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을까 약간 신경이 쓰였지만 아무리 지금 모두의 심리 상태가 불안정하다고 한들 이런 시점에 살인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무리 명확한 이유가 있다고 한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은 살인을 주저하게 되며, 충동적으로 저지르더라도 심리적인 압박감이 덜하고 비밀스러운 밤에 시도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난 숙소를 먼저 찾았다. 모노로그는 우리들에게 두 개의 열쇠를 지급했다. 하나는 숙소의 열쇠, 나머지 하나는 전용실의 열쇠였다.
히무로 시라베: 상당히 쾌적하다.
카텟 기관의 숙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시설이었다. 우선 침대 위에 부드러운 질감의 이불과 베개가 있었으며, 잘 작동하는 조명 스위치와 방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버튼까지 있었다. 침대 옆 협탁 위에는 작은 화분과 적당한 밝기를 유지하는 램프가 놓여 있었고, 바닥에는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창문에는 찢어지지 않은 커튼이 걸려 있었고 화장실은 무척 청결했다. 찬장에는 청결해 보이는 수건과 세정제, 칫솔, 치약 등 여러 욕실 욕품이 들어있는 팩이 구비되어 있었다. 우리에게 할당된 숙소는 상당히 고급임이 틀림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탑이 이렇게 쾌적하다면야 인질들이 탈출을 포기하고 적응할 가능성도 있을 텐데...
모노로그: 아니. 살인은 무조건 일어난다.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모노로그가 있었다. 참 신출귀몰하다... 모노로그의 순간이동에는 대체 어떤 비밀이 숨겨져있는 것일까. 어차피 답은 나오지 않을 테니 무의미하게 그것에 대해 골몰하지는 않았다.
히무로 시라베: 그걸 어떻게 장담하지?
모노로그: 이 살인 게임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로 짜여 있다. 언젠간 너도 내 말 뜻을 이해하게 될테니 너무 서두르지는 마라. 지금은 조사가 먼저야. 그렇지?
히무로 시라베: 전용실에 무엇이 있는지는 몰라도 이 숙소와 유사한 환경이라면 매우 우수한 설비일 터인데?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모노로그: 너에게나 매우 우수한 환경이겠지...
히무로 시라베: 뭐라고 말했지?
모노로그: 아무것도 아니다.
히무로 시라베: 그래서, 전용실에는 무엇이 있나?
모노로그: 궁금하면 직접 가 봐라. 장담하건데 실망하지는 않을 거다. 오히려 만족하고도 남을 거야.
히무로 시라베: 지금 당장 내 눈앞에 시라유키 히메리를 데려오지 않는 이상 내가 만족할 일은 없다.
모노로그: 그건 두고 볼 일이야. 전용실로 가 봐라. 넌 분명 만족하게 될 거다. 너희들 모두... 추억을 뒤적거려 봐.
모노로그: 그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질리는 법이 없다. 그렇지 않나?
모노로그가 내게 의미없는 말을 그만 하기를 바라며 나는 전용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들은 방음 처리가 조금 되어있는지 문 하나 너머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내가 명확하게 들은 것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전용실에 들어가자마자 활짝 웃으며 탄성을 내지르는 카나리의 목소리 뿐이었다.
카나리 케이토: 내 예비 금고!!!
그는 단박에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가 금고를 향해 달려가는 토도도도 하는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좋은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금전에 집착했고, 어쩌면 그 집착이 살인으로 이어질지도 몰랐다. 그런 그에게 금전의 확보는 살의를 억누르는 효과가 있을 터였다.
나는 약간의 호기심을 느꼈다. 카나리의 전용실에 그의 예비 금고가 있었다면 내 전용실에는 무엇이 있을까에 대한 호기심이였다. 애초에 모두의 전용실에 그들에게 있어 카나리의 예비 금고 같은 물품이 들어있다면, 살인 게임은 정체될 확률이 높았다. 욕망이 조금이라도 충족되는 순간 정착을 원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모노로그는 카나리의 전용실에 그의 예비 금고를 들여 놓았을까...
모노로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나는 전용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전용실의 풍경은 수치스럽게도, 정말 날 만족시켰다.
내가 놀란 것은 그 정교함이었다. 전용실의 구석에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 조촐하게나마 재현되어 있었고, 전용실 중앙에 놓인 책상. 카텟 기관에서 내가 사용했던 바로 그것 위에는 내가 분석했던 범죄자 파일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글씨체와 자잘한 흔적까지 전부 내가 작성했던 그대로였다. 원본이었다. 카텟 기관에서 자료들까지 전부 가져온 것일까?
대체 이 과거의 산물들을 어떻게... 라고 생각하는 동안, 나는 권총을 보았다. 그것은 당연하다는 듯이, 총포상에 진열된 듯이 벽에 걸려 있었다. 커다란 총신, 장미 표시가 새겨져있는 총신. 그것은... 나의 총이었다
난 넋을 놓고 총을 내 손에 쥐었다. 백단향으로 만든 총 손잡이가 매끄러웠다. 나의 사명을 상징하는 총. 그러나 그 안에는 총알이 없었다. 작동하지 않는 총은 아령이나 마찬가지였으나. 그럼에도 그것은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향수와 깊은 인상을 자극하는 데 충분했다.
기관에 있었던 때를 생각하니 다시금 그 때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최초의 내가 사라지고, 기관을 거친 내가 다시 돌아온다.
기관원들에게 신뢰를 쌓고 결백을 수 차례 증명하기 위해 현장 임무 배속을 신청했다. 시라유키 히메리는 너무 위험하다며 반대했으나 나에 대한 보고서를 읽어 본 지부장은 나의 현장 투입을 허락했다.
그 결정은 몇몇 기관원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난 폭발물이 들어있는 목걸이를 착용한 뒤 임무에 투입되었다. 혹시나 내가 기관을 배신할 시에 즉시 사살할 수 있게 하기위한 보험이었다. 불리한 처사였지만 나에 대한 조사가 끝나 백단향 총을 돌려받은 것은 위안이 되었다.
여타 권총의 몇 배의 화력을 낼 수 있도록 특수제작된 총. 그것과 함께할 때만큼은 내 존재를 용서받는 듯한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때도 있었지. 난 내가 백단향 총을 기관으로부터 돌려받은 그 날을 기억했다. 내가 원래 있던 곳에서 카텟 기관이 입수한 나의 물건들. 어떤 암호나 위험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그들이 밤낮으로 검사했으나 아무 이상도 없다는 사실이 입증된 날. 내가 그것을 돌려받은 순간을 기억했다.
이제는 모두 충분히 추억이라고 불릴 만한 무언가가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판본에 의하면, 이야기의 결말은 좋은 축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듣도보도못한 장소에서 초면인 사람끼리 죽고 죽이게 된 것만으로 충분히 나쁜 결말이었지만... 기관에서만큼은 좋게 끝났다.
히무로 시라베: 금수에서 사람이 됐으니...
나는 빠르게 추억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최초의 나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어쩌면 카텟 기관원들이 한동안 내게 사용한 멸칭대로 행동하고 싶지 않다는 반발 심리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런 것에 휘둘리다니 나도 참 어려졌구나... 라고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
익숙한 하얀 색 상자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상자에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작은 검정색 원이 큰 하얀색 원 안에 들어있는 문양.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문양이었다. 달콤한 유혹의 정물화와도 같은 그 문양.
히무로 시라베: 이것까지 가져다 놓다니... 모노로그는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있는 건가?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넌 정말 많은 걸 알고 있어. 그러나 아직 모르는 일도 많지. 대부분은 내가 알려줄 거야. 그렇지만 내가 알려줄 수 없는 것도 있어. 이런 것들."
시라유키 히메리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하얀색 상자를 주었다. 그것을 받고 그녀에게 질문했다.
"이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길래 너조차도 알려줄 수 없는 것이지?"
"이게 핵심인데, 그건 네가 직접 알아내야 해."
"네가 알려줄 수 없는 것과 알려줄 수 있는 것에 명확한 기준이 있나?"
"있지. 지식은 내가 알려줄 수 있어. 그러나 난 네게 체험을 줄 수 없어. 난 네게 꽃과 바다에 대해 알려줄 수 있지만 꽃 향기를 맡고 물결치는 파도를 느끼는 건 내가 해줄 수 없어. 그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삶은 이 상자와도 같은 거야. 뭘 얻게될 지 알 수 없어. 열어보기 전까지는."
찹쌀떡 상자 안에서 찹쌀떡을 하나 꺼내 먹으며, 나는 전용실 안을 더 둘러봤다.
탑 밖에서 잠시 모노로그의 잔해를 조사한 뒤 나는 전용실에 발을 디뎠다. 그 곳에서 처음 든 느낌은 '친숙하다' 였다.
볼트와 너트, 전선, 금속판, 용접 기기, 크랭크 축, 엔진, 기름과 스패너, 드라이버, 납. 기계. 친숙하다는 느낌. 집에 온 것 같은 느낌... 난 내 집이 어디였는지조차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나시: 내가 기계랑 관련된 일을 했나 본데... 엔지니어였나? 아니면 정비사? 공학자?
나 자신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접하자 약간 의욕이 생겼다. 전용실 안에는 볼트와 너트 같은 자잘한 도구들 말고도 커다란 기계들도 있었는데, 시험 삼아 조금 분해해봤더니 안은 텅 비어있었다. 그것들은 기계가 아니라, 철판으로 만들어진 모형에 불과했다.
나나시: 뭐야... 이런 걸 왜 만들어놓은 거지?
안이 비어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드라이버와 스패너를 사용해 모형을 다시 조립했다.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어디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가 막힘 없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 느낌은, 숙련된 도축업자가 칼을 잡을 때 갈라야 할 부위를 아는 것과 비슷할까...
하는 생각을 뒤로 하고 전용실을 더 둘러보던 내 시야가. 순간 한 곳에 쏠렸다. 그것의 전체적인 윤곽을 보자마자 나는 다른 것에는 아무것도 신경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난 그것에 홀리다시피하며 천천히 걸어가다가, 멈췄다. 누군가의 말이 머리 안을 스쳤다.
"아직 이 장치는 안전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어. 그러나 그 단계에 이른다면, 그리고 이 기술을 상용화할 수 있게 된다면, 정신의 정의 자체가 바뀔지도 몰라."
난 기시감으로 압도되었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을 칠 만큼 두려운 기시감에, 내 뇌는 영문을 모른 채 아드레날린을 분비했다. 숨이 가빠졌다. 내 눈 앞에 있는 것은 전화 박스 정도의 크기의 이상한 장치였다. 문은 두껍고 무거운 강철이었고, 내 눈높이에 30cm 두께의 유리창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장치라고 부르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에는 전선도 냉각수도 아무것도 달려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 역시 장치보다는 장치를 본따 만든 모형에 가까웠다... 그러나 난 이 모형의 원본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두 눈으로 본 적이 있었다.
오직 직감일 뿐이었지만, 그 직감을 무시하기에 그것은 너무나 큰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이것 때문에 모든 비극이 발생한 거라고. 한 번의 실수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진 거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이 모형에서 공포를 느꼈고, 공포를 압도할 정도의 큰 분노 역시 느꼈다. 미간이 당겨올 정도였다.
문득 나는 손이 깨져버릴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입에서 씁 하는 쇳소리가 나왔고, 새빨개진 내 손이 부들거렸다. 나도 모르게 그것에 주먹질을 하고 있다는 걸 간신히 깨달은 뒤에도 나는 모형의 철제 문을 발로 걷어찼다. 캉. 캉. 통증에도 불구하고 격노는 진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내 이성을 집어삼켰다.
난 모형을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에 압도되었다. 망치. 크로우바. 레킹볼. 뭐든 좋으니 이것을 산산이 조각내고 싶었다. 난 이 모형을 증오했다. 증오라는 단어만이 이 감정을 묘사할 수 있었다.
싫다던가 마음에 안 든다던가 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정말 치가 떨릴 만큼 나는 이 모형이 증오스러웠다. 입에서 광인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나는 손과 발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욱신거림을 느꼈다.
내가 왜 이러지. 갑자기 돌아버린 건가. 성찰과 회의감이 차오르자 내 입에서 말이 새어나왔다.
나나시: 다 괜찮을거야. 다 괜찮아... 아니야... 이럴 리가.
그것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난 30cm 두께의 유리를 두드린다. 다리로는 철문을 걷어찬다. 이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했던 일이다. 난 내가 그 비극을 막을 수 있길 바랐다. 그러나 현실은 잔혹했다.
나나시: 이럴리가 없어... 나만 두고 가지 마.
도저히 못 보겠다. 볼 수 있을리가 없었다. 만약 이대로 작동된다면 네가 어떻게 될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기에. 그러나 나는 눈을 감지 않는다. 눈이 감기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이해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것이 너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네 마지막을 잊어서는 안 되기에 그 끔찍한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 잊지 마... 잊으면 안 돼. 알겠지?"
빛이 너를 산산조각낸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바닥은 차갑고 딱딱하며 또한 외롭다. 철문의 잠금 장치가 해제되는 치익 소리가 들린다. 그것을 듣자마자 허겁지겁 철문을 연다. 안에 무엇이 남았는지 보려고 눈을 부릅뜬다.
그러나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들은 치익 소리는 그저 환상일 뿐이니까. 난 그저 과거와 현재를 겹쳐 보고 있을 뿐이었다. 과거에 내가 했던 경험이, 셀로판지의 색이 겹치듯이 내 시야에 겹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지금 겪은 일인 것처럼 생생하지만, 동시에 꿈처럼 희미하다. 마음이 너무나도 아프고 괴로워 미치겠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내겐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예전에 이와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어렴풋하게 기억이 났다.
모든 부품이 멀쩡한데 작동하지 않는 기계를 만진 적이 있었다. 두 번 세 번 살펴봐도 결함이 없는 기계. 그렇기에 확실한 결함이 보이는 기계보다 수리가 어려운 기계. 그게 지금의 나였다. 수리공 없는 기계.
무엇을 빼앗겼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나는 그저 모형의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은 텅 비어있었다. 난 그 견딜 수 없는 허전함을 심연처럼 계속 주시했다. 언젠가 사라지지는 않을까. 막연한 생각을 가진 채로. 그러나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와 하나가 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전부 알고 있는 건가. 전부.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 내 업보는 아직 많이 남아있었고 난 그것이 날 찾아올 때를 각오하고 있었다. 어쩌면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 염증나는 삶. 빠져나올 수 없어서 더 깊이 들어간 삶. 그것에 분명 가치는 없겠지. 그래서 난 두렵지 않았다.
나는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업보가 내게 찾아오는 순간을. 바다뱀에 묶인 채로 계속 기다릴 뿐이었다. 업보가 마침내 내게 온다면, 내 얼굴을 뜯어낼 때가 된 것이리라.
식당에 모든 인원이 다시 모였다. 대부분의 얼굴이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밝아보였다. 다른 이들의 전용실이 내 것과 비슷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직사각형 식당에는 16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고, 한 사람씩 모두 의자에 앉자 토키와가 입을 열었다.
토키와 아유키: 다들 어땠어? 뭐... 모두의 표정을 보니 알 것 같기도 하지만.
하기와라 우시오: 어떠냐고? 어떠냐고?!
하기와라 우시오: 물어서 뭐 해! 존나 짱이야! 조지 칼린이랑 빌 힉스 비디오가 다 있어! 히어로 영화 시리즈도 최고화질로 다 있어!
나이토 유즈루: 정말. 납치되서 이런 걸 보니 기분이 미묘하긴 한데... 엄청나게 희귀한 운동 기구들이 다 있어. 단백질 보충제 때깔도 완전 S+급이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테레비가 있었어! 패트와 매트랑 핑구, 미스터 빈, 미래소년 코난 카세트 테이프까지 있어! 서예 세트가 있는 건 좀 싫지만.
칸나즈키 시노부: 작두!!
나나시: 그런게 왜 있어?!
모리 레이코: 내 전용실에는 철학서와 양갱이 잔뜩 있더군. 아무래도 전용실에는 방의 주인이 좋아하는 물건을 들여 놓는 모양이다.
야가미 토가: 전용실에는 그것 말고도 재능과 관련된 물품 역시 들어있는 것 같더군요.
이바라 쿠리스: 아. 그래서 내 전용실에 그게 있었구나. 이제 이해가 되네.
하기와라 우시오: 뭐가 있었는데?
이바라 쿠리스: 관이 있었어... 관이 있었다니까?! 내가 무슨 뱀파이어야? 관에서 자게?!
하기와라 우시오: 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바라 쿠리스: 그게 방 중앙에 떡하니 놓여 있는데 어이가 없어서 어휴 씨발 진짜!... 그래도 재능과 관련된 걸 넣어놓는다니 어쩔 수 없지.
히무로 시라베: 과거와 관련된 물건도 있었어.
나나시: ...과거?
야가미 토가: 아. 그것 역시 말이 되네요.
카이다 쿠로하: 과거? 과거는 좀 애매한데? 우리가 좋아하는 물건이고 재능과 관련된 물건이면 십중팔구 과거에 접해본 물건인 게 당연하잖아?
야가미 토가: 아뇨. 히무로 씨의 발언이 옳습니다. 제 전용실에 총이 있거든요.
토키와 아유키: 총?!
토키와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놀란 눈치였다. 확실히 살인 게임에서 총기는 최적의 도구.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편리한 물건이었다. 그렇기에 총을 사용한 순간 총의 소유자로 용의자가 좁혀진다는 단점이 있으므로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총을 사용하지 않겠지만, 모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
히무로 시라베: 나도 있어.
토키와 아유키: 너도?!
야가미 토가: 물론 모형입니다.
히무로 시라베: 내 총엔 화약이 없어.
야가미 토가: 일전에 총기 관련으로 협상을 진행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 전용실에 총이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그 협상은 실패했지만요.
토키와 아유키: 간 떨어질 뻔했잖아. 정말로... 자기 전용실에 위험한 물건이 있다면 자진신고해줘. 내가 압수해서 처분할 테니까.
23T5U130: 그래도 위험한 물건을 완전히 없앨 순 없어. 토키와. 전용실의 물건들은 방의 주인이 요청하면 다시 보급되거든.
토키와 아유키: 그렇다면 위험한 물건들을 직접 검사한 뒤 목록을 만들어 주시하겠어. 다들 괜찮겠지?
야가미 토가: 상관은 없습니다. 오히려 가져가주셨으면 하네요. 전 총이 싫습니다.
히무로 시라베: 살인을 할 생각이 없다면 거절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
토키와의 발상은 합리적이었으나, 자신의 방을 검사받는다는 절차는 거부감을 줄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검사에 응하지 않는 자들이 살의를 가진 이들이라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토대를 깔았다. 다행히도 눈에 띄게 반대하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감시와 통제를 수월하게 진행해 살인을 원천봉쇄할 가능성 역시 높았다. 이대로라면...
미도리카와 아쿠토: ......난 싫어.
카이다 쿠로하: 나도 내 방 검사는 무리야.
카이다의 반대는 예상한 바였다. 그녀는 묘한 비밀을 감추고 있는 눈치였으니까. 그러나 미도리카와의 반대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는 눈에 띄게 발언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기에 분석에 필요한 표본이 부족했다.
히무로 시라베: 왜지? 마땅히 검사를 거부할만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군.
미도리카와 아쿠토: 내 방에 있는 물건을 보이고 싶지 않아.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는 법이잖아. 안 그래?
카이다 쿠로하: 그래! 맞아! 내 방에 민망한 게 있으면 나중에 얼굴 들고 못 산다고!
야가미 토가: 민망한 것이 문제라면 23T 씨에게 검사를 맡기면 되겠군요. 인공지능이시니 민망함 따윈 없으시겠죠. 입도 무거울 테고요.
하기와라 우시오: 너 그거 23T의 머리는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말 그대로 '입이 무겁다' 라는 뜻이냐, 아니면 그냥 남에게 비밀을 떠벌떠벌 불고 다니지는 않을 거란 뜻이냐?
하기와라가 진지한 태도를 하고 물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언제든지 웃을 준비가 되어 있는, 농담의 대답을 기대하는 자의 표정이었다. 야가미도 그것을 알았는지 단안경을 고쳐쓰며 한숨을 쉬었다.
야가미 토가: 당연히 후자죠. 제발 진지한 분위기에서 실없는 농담 좀 하지 마세요.
하기와라 우시오: 허나 거절한다! 주어진 선이 어디까지인지를 알고 그 선을 고의로 넘는 건 코미디언의 의무걸랑!
토키와 아유키: 어휴...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논의를 방해할 정도로 하지는 말아줘. 하기와라.
모리 레이코: 네가 그렇게 약하게 나오면 집단은 와해될 거다. 리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강경책이다. 살인을 막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강경책.
하기와라 우시오: 봐봐. 내 농담 아니면 또 이 지랄판이 난다니까? 내가 이 살인 게임의 빛이다 이 말이야.
히무로 시라베: 강경책이 필요한 건 맞아. 우리는 스스로의 행동을 제한하는 한이 있더라도 살인을 통제해야 해.
나나시: 그래도... 미도리카와와 카이다가 싫다는데 꼭 방을 볼 필요는 없잖아.
나이토 유즈루: 맞아. 미도리카와가 아무리 수상해도 이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같이 휘말린 동료인데. 쫌 너무하지 않냐?
히무로 시라베: 그렇게 감정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야. 지금 전용실에 친숙한 물건들이 있다고 잠시 긴장을 놓은 모양인데, 이 탑은 엄연히 살인 게임의 무대야.
히무로 시라베: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전용실에 있는 흉기에 대해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해.
야가미 토가: 게다가 그가 동료라고 확신할 수도 없고요.
드디어 우리 속에 숨어있는 흑막이 서두에 오르는 건가. 그러나 그가 흑막이라면 전용실에 그에게 불리한 물건이 들어있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찰나, 토키와가 상황을 정리했다.
토키와 아유키: 아니야. 두 사람을 압박할 필요는 없어. 둘의 전용실 검사는 보류하도록 할게.
모리 레이코: 왜지? 저 둘이 전용실에 있는 흉기. 검사를 피했기에 들키지 않은 그 흉기로 사람을 죽였을 때 네가 그 목숨을 책임질 수 있나?
토키와 아유키: 그렇다고 말할 순 없겠지. 사람의 목숨은 누군가가 책임질 수 있을만큼 가볍지 않아.
토키와 아유키: 하지만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고 생각해 보자. 그럼 너희라면 누굴 의심하겠어?
카나리 케이토: 당연히 저 둘이지. 자기 전용실에 숨겨뒀던 무기로 죽였을 게 분명하잖아?
카이다 쿠로하: 뭐?! 너무하네 진짜!
모리 레이코: 이들이 제일 먼저 용의선상에 오르기 때문에 이들이 살인을 하지 않을 거란 뜻인가... 일리는 있지만 불안정하다. 충분한 근거가 되지 않아.
캐롤 브라이트: 그보다 당사자들 앞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미도리카와 씨와 카이다 씨도 존중해 드려야죠.
이바라 쿠리스: 맞아. 사실 난 살인이 실제로 벌어질 거라고 생각 안 해. 누군가를 죽이려다가 자기도 죽을 각오는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게 아니거든.
카이다 쿠로하: 고마워요. 우리 언니들... 감동이다. 감동!
모리 레이코: 살인은 실제로 벌어질거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히무로 시라베: 사람의 욕망은 이성을 무디게 만들고, 금기에도 발을 집어넣을 수 있게 만들어. 살인을 회의적으로 보다간 우리 중 누군가가 죽을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난 이 미친 상황에 저렇게 침착한 사람들이 어째 제일 수상하다? 응?
칸나즈키 시노부: 너를 포함해서?
토키와 아유키: (휘리릭!)
토키와가 호루라기를 불었다. 그 호루라기가 어떤 말을 함축하고 있는지, 모두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주위가 충분히 조용해지자 그는 헛기침을 두 번 한뒤 입을 열었다. '이 건은 여기서 끝' 이라는 표시 같았다.
토키와 아유키: 봐. 이 주제는 우리를 와해시킬 뿐이야. 그러니 내가 나중에 처리할게. 지금은 다른 것에 대해 얘기하자.
그렇게 대화의 주제는 미도리카와와 카이다에서 전용실의 물건으로 회귀했다.
야가미 토가: 아무튼, 총은 저의 기호 물품도 아니고 협상과 그렇게 큰 관련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 전용실에는 총 모형이 있죠. 마치 제 삶의 요소들을 모아놓은 것처럼요.
히무로 시라베: 박물관 같기도 해. 우리들의 인생에 이런 게 있었다고 전시해놓은 것 같아.
하기와라 우시오: 다행히 박물관이 살아있지는 않네.
야가미 토가: 좋아하는 물건. 재능. 과거. 사실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중요한 건 이것이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다는 점이죠.
야가미 토가: 나나시 씨의 전용실에 뭐가 있는지에 따라 그의 신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뭐가 있었어요?
나나시: 내 전용실에는... 기계밖에 없었어. 공구 세트랑 그냥... 기계들.
이바라 쿠리스: 네가 기계랑 관련된 재능을 가지고 있나봐!
나나시: 응. 안에 기계들을 좀 살펴봤는데 확실히 그런 것 같아. 내가 기억은 없어도 지식은 남아 있거든? 복어를 잘못 먹으면 죽는다거나 그런 것들.
나나시: 그거랑 비슷하게. 기계를 봤을 때 이 부품을 뭐라고 부르는지, 이 부분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전부 감이 왔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 완전 백 투 더 퓨처의 박사님 같아! 캡숑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Time Travel!
나나시: 그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고마워.
나나시: 그리고 말인데. 내가 아까 다이얼로그를 써서 이걸 찍어 왔어.
나나시가 다이얼로그로 보여준 사진은 박살난 모노로그. 23T가 팔로 꿰뚫어 찢어버린 그 엉망진창이 된 모노로그의 사진이었다. 나사와 금속 조각. 파편들이 널려있는 장면이 무척 지저분했다.
히무로 시라베: 다이얼로그에 카메라 기능도 있었네.
나나시: 다이얼로그의 두 번째 메뉴가 '증거 저장' 이었거든? 그걸 누르니 사진을 찍을 수 있더라고.
나나시: 내가 이 자리에서 다 설명하기는 너무 긴데... 말을 줄이자면 모노로그의 구조는 이상해. 뭐랄까. 기계가 아닌 것 같아.
나이토 유즈루: 뭐? 모노로그는 기계잖아. 책 모양 기계.
나나시: 금속 부품으로 이루어져있긴 해. 그런데 설계가 이상하게 되어있어.
나나시: 물론 부서져 있으니까 구조를 전부 파악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바닥에 떨어진 부품들을 통해 조금 유추해 볼 수는 있거든?
나나시: 이 정도의 부품만으로는 도저히 못 움직여. 이런 구조로는 공중에 붕붕 떠다니기는 커녕 입술을 제대로 움직이기도 어려울 거야.
카이다 쿠로하: 그런데 저건 잘만 움직이잖아.
나나시: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가 안 가... 23T. 모노로그는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23T5U130: 모노로그는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게 아니야. 그냥 움직이는 거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음... 난 기계에는 젬병이라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하기와라 우시오: 그럴때는 도와줘요! 기계 척척박사 나나시 씨!
나나시: 아니. 나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야가미 토가: 우선 지금은 모노로그가 어떻게 움직이냐보다 다른 것에 대해 말해보죠. 나나시 씨의 전용실에는 기계밖에 없었습니까?
나나시: 기계... 라고는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껍데기만 있고 내부 장치는 없었어. 뼈대만 남아있다는 느낌.
야가미 토가: 제 총 모형도 그렇고, 히무로 씨의 총 모형도 그렇고... 전용실의 물건은 형태만 가져왔을 뿐, 세부적인 것은 드러나있지 않군요.
히무로 시라베: 그 사실은 둘째 치고, 기계 뿐이었어?
나나시: 아니. 이것도 모형이긴 했는데, 약간 이질적인 모형이 있었어.
나나시: 내 방에 전화 박스처럼 생긴 장치... 라기보다는 그것을 재현한 모형이 있거든?
후루미나미 나몬: 네 방에 타디스가 있다고?
하기와라 우시오: 타디스? 그건 또 뭐야? 무슨 말장난이냐?
하기와라 우시오: 호랑이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지나가던 거북이에게 한 말은? 타 this.
이바라 쿠리스: 진짜 내가 들은 농담 중에서 최악이야.
후루미나미 나몬: 아니. 타디스는 닥터 후 시리즈에 등장하는 전화 박스처럼 생긴 우주선이자 타임머신인데, 밖에서 보이는 것보다 내부가 훨씬 넓어. Time And Relative Demension In Space를 줄여서 TARDIS라고...
나나시: 일단 그건 확실히 아니야.
후루미나미 나몬: 아쉽네... 혹시 소닉 스크류 드라이버는 있니?
하기와라 우시오: (대충 아니다 이 악마야 라는 내용).
나나시: 그 전화 박스 같은 걸 보자마자 막 심장이 쿵쾅쿵쾅 하더니 기억이 파바바박 하고 떠올랐어.
히무로 시라베: 어떤 기억이 떠올랐어? 카텟 기관에 대한 기억?
나나시: 아니... 난 카텟 기관이 뭐 하는 곳인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캐롤 브라이트: 그런데 카텟 기관은 뭘 하는 곳이죠? 비밀 단체 같은 건가요?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캐롤 브라이트: 범죄자에 대한 일을 하신댔는데... 경찰과 관련된 곳인가요?
칸나즈키 시노부: 아닌데?
히무로 시라베: 경찰과 관련된 곳은 아니야. 독자적인 조직에 가깝지.
이바라 쿠리스: 그런데... 범죄자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게 가능해?
낭패다. 카텟 기관에 대해 말하려면 대몰락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범죄자에 대한 상담을 진행하고 그들의 행동을 조사하는 조직이라기에는 23T의 존재가 걸렸다. 그래서 나는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히무로 시라베: 그래. 카텟 기관은 정부와는 별개의 구호 기구야. 비밀 결사... 에도 조금 가깝고.
야가미 토가: 비밀 결사요? 믿기지가 않는데요.
하기와라 우시오: 와아악! 히무로가 일루미나티였다!
히무로 시라베: 일루미나티는 그저 음모론일 뿐이고, 카텟 기관에겐 그럴만한 힘이 없어. 그저 비공식적인 구호 기구일 뿐이지.
히무로 시라베: 적어도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카텟 기관은, 작은 규모지만 여러 분야의 인재가 모여 있는 조직이었어. 23T같은 인공지능 기술력은 나도 잘 몰라.
히무로 시라베: 내 생각인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동안 23T를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기관이 발전한 것 같아.
여기까지는 괜찮다... 상당한 수가 나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보지만, 어차피 내 거짓말을 증명할 수단이 없는 이상 거짓말을 잘 관철하면 상당한 시간동안은 카텟 기관에 대해 속일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때가 올 테다. 대몰락에 대해 말 할 때가 언젠가는...
칸나즈키 시노부: 거짓말!
참... 잘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구나.
칸나즈키 시노부: 그건 틀렸다! 넌 거짓말을 하고 있어!
히무로 시라베: ...난데없이 무슨 소리지? 칸나즈키 시노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근거가 있다면 말해 봐라.
하기와라 우시오: 오호. 이 친구 아까부터 말투가 좀. 오락가락 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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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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