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황상 그의 전용실에 총기가 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전용실의 물건은 모노로그에게 요청만 하면 재보급되니, 그가 총을 단 한 정만 가지고 있다고 한들 사실상 무한한 양의 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전용실을 무기고로 만들 수도 있을 터였다.
"너는 지금 재단의 무기고 안에 있다."
"저는 권총 이외의 총기들을 아직 다루지 못합니다."
"아니. 넌 다룰 수 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공식적인 절차를 거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아직 이 정도의 총기를 다룰 권한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아니. 네겐 권한이 있다. 현재 재단 내에 침입자들이 있다. 우리들의 목적을 방해하려는 침입자들이다. 그들을 사살하라."
"그들은 누구입니까? 목적은 무엇입니까? 전과자입니까? 혹은 범죄자입니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적을 막는다면 그들은 재단의 적이다. 너의 적이다."
"그 이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 판단에 거스르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의문이 들었을 뿐입니다."
"의문은 네게 허용되지 않는다."
"총은 너무나도 편리한 도구입니다. 총은 질병 다음으로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는 데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히무로 시라베: 그러니 총을 쥐는 사람은 악인이 아니어야 합니다...
야가미 토가: 미도리카와 씨? 들리십니까? 미도리카와 씨!
미도리카와 아쿠토: 오해하지는 말아 줘. 야가미.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이 추호도 없어.
미도리카와 아쿠토: 일단 끊을래? 지금 좀 급해서.
야가미 토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야가미는 낭패라는 듯이 얼굴을 크게 찡그렸다. 무서운 총소리와 미도리카와, 카이다의 목소리를 전해주던 다이얼로그는 이제 뚜- 뚜- 거리는 공허한 소리만을 낼 뿐이었다.
야가미 토가: 끊어졌습니다. 미도리카와 씨가 끊었어요.
모리 레이코: 너무 섣불리 판단했다. 우리 모두가. 멍청했다.
모리 레이코: 총잡이와 첩자의 전용실에 무엇이 있는지 확실하지도 않았는데 마음만 앞섰다. 그들의 전용실에 흉기가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뒀어야 했다.
토키와 아유키: 나... 나 때문에...
나이토 유즈루: 큰일났다! 이제 어떡하지? 총이 있는 사람 상대론 어떻게 개기지도 못하는데...
모리 레이코: 일단 날 내려놓는 게 좋다. 이 정도 화염이라면 흉기도 이젠 다 녹았거나 못 쓰게 되어버렸을 테니, 내가 죽음을 감수하더라도 충분한 흉기를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넌 더 이상 날 잡아둘 이유가 없다.
나이토 유즈루: 그래. 그건 맞네... 옛다.
나이토가 모리를 땅에 내려놓았다. 모리를 잡으러 간 사람들과 불과 가장 가까운 나이토, 모리, 그리고 이바라는 그것이 불타는 장면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바라 쿠리스: 콜록! 콜록! 어휴. 연기 봐! 으엑! 다들 코 막아! 옷에 냄새 배겠다. 웩!
모리 레이코: 승부사. 장의사. 그리고 너희들 모두. 화염에서부터 멀어지도록. 이 곳에서 연기만 마시고 있어도 해결될 일은 없다.
모리 레이코: 스스로에게 비참한 심정을 느끼며 불평만 늘어놓고 싶다면 다른 장소가 있다. 게다가. 환경 호르몬은 몸에 해롭다.
칸나즈키 시노부: 이건 맞지.
하기와라 우시오: 환경호르몬은 인정이지... 하고 웃어재끼기엔 상황이 너무 좆같네.
더 단크 타워
챕터 1: < 죽여 마땅한 사람 둘 >
"과정은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아직도 활활 불타는 21개의 상자들. 이제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워진 흉기들의 잔해에서 멀어지며 우리는 망연자실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도중 마유즈미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졌고, 이내 문득 멈춰 서더니 탑을 올려다봤다. 그러면서 그녀의 표정은 시시각각 이상한 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나시: 저기... 마유즈미. 괜찮아?
마유즈미 나데시코: 타... 탑으로 가까이 가면 안 되잖아. 생각해보니까... 최대한 멀어져야 해!
히무로 시라베: 저격의 가능성을 염두에 뒀구나. 마유즈미.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래! 총이 있는데 긴 총이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잖아! 창문 열고 위에서 두두두두두 쏘면 어떡해?! 우... 우리 이대로 다 죽는거야?! 총 맞고?!
마유즈미의 그 말을 시작으로 패닉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하기와라 우시오: 조... 조졌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장의사 양반! 내가 죽는다고요! 다이얼로그 좀 가져다주시오!
이바라 쿠리스: 야! 지금이 콩트 할 때야?! 이건 진짜 큰일이라고!
그리고 그 패닉에 나 역시 말려들어버렸다.
나나시: 어... 어떡하지? 이제 어떡해? 어디로 가야...
야가미 토가: 진정하세요. 여러분. 그가 제정신이라면 저희들에게 총기를 난사하지는 않을 겁니다.
야가미 토가: 살인을 한 뒤 학급재판에서 패배하면 살인자 역시 죽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금 누군가를 살해한다면, 그가 범인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죠. 사실상 자살 행위입니다.
이바라 쿠리스: 그... 그런가? 그렇네. 맞네.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 미도리카와가 우릴 다 죽이고 자기도 죽는 게 목표라면야 어차피 다 죽은 목숨이니 무서워할 필요 없어.
캐롤 브라이트: 무서운 일이잖아요!
캐롤 씨는 질겁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죽는 게 무서운 거지. 결말을 미리 알고 있으면 안 무서워. 스포일러 당하고 영화 보는 셈이니까.
칸나즈키 시노부: 맞아!
하기와라 우시오: 이 컨셉충들 또 이러네.
이바라 쿠리스: 너도 만만치 않아. 너희들 좀 진지해지지 못하겠니?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농담이나 하고...
히무로 시라베: 포기해. 통계학적으로 초고교급의 절반은 괴짜야. 누구의 말도 듣지 않지. 정말 '어린아이' 와도 같아.
카나리 케이토: 뭐?
히무로 시라베: 오해하지 마. 네 신장에 대해 언급한 게 아니니까.
나나시: 미도리카와가 했던 말... 이제 이해가 돼.
미도리카와 아쿠토: 소각하는 건 어때. 이렇게 넓은 창고라면 분명 기름도 있을 테니 불을 붙이자.
나나시: 미도리카와는 우리들의 행동을 유도했어. 우리는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어...
모리 레이코: 그는 자신의 전용실을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당연하지. 자신의 전용실에 총이 있는데 보여줄 수 있을 리가 없겠지.
모리 레이코: 입을 그다지 열지 않은 것도 그렇다.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흉기가 불타고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질 텐데. 입을 열 필요가 없었던 거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지. 토키와가 흉기를 없애자고 제안하기 전부터 미도리카와는 입 다물고 있었잖아.
하기와라 우시오: 우리가 탑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미도리카와는 말을 아꼈어. 아마 미도리카와도 전용실이나 총기의 존재는 몰랐을 거야. 그러니 그건 앞뒤가 안 맞아.
모리 레이코: 그건 그렇군. 네 말이 옳다.
나이토 유즈루: 그보다 이제 진짜 어떻게 하지?
모리 레이코: 어떻게 하지? 가 아니라 어떻게든 해야 한다. 총잡이에 대항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기본적인 생활도 할 수 없다.
히무로 시라베: 모리. 아까부터 미도리카와를 총잡이라고 부르는데 총잡이가 그의 재능인 것이라고 판명난 건 아니야.
카나리 케이토: 그게 지금 중요하냐? 총잡이든 마피아든 뭐든 총이 있잖아! 저 자식한테 총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라고!
야가미 토가: 여차하면 당신이 보디가드로 고용하시죠? 총을 가지고 있는 보디가드라니 더할 나위 없지 않습니까?
히무로 시라베: 아니야. 카나리를 위협해서 돈을 전부 빼앗을 수 있는데 굳이 카나리의 보디가드 역할을 할 이유가 없어.
카나리 케이토: 그렇네... 이거 한 번 잘못 걸리면 내 목숨과도 같은 돈을 다 털리게 생겼어. 거지 같은 일이...
하기와라 우시오: 얘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네? 우린 지금 목숨과도 같은 돈이 아니라 목숨을 털리게 생겼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으아악! 진짜 겁 주지 마! 야가미 말을 들어도 여전히 무섭단 말이야!
카나리 케이토: 어째서 나한테 이런 알거지만도 못한 일이... 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토키와 아유키!
카나리가 토키와를 가리켰다. 우리의 시선이 전부 그쪽으로 쏠렸다. 토키와의 고개가 조금 숙여졌다.
토키와 아유키: ...그래. 맞아. 이 일은 전부 내 책임이야.
모리 레이코: 리더가 순순히 인정하니 그의 책임이 아닌 것을 그가 억지로 떠맡는 인상을 받았겠지만, 이 일은 아무런 날조 없이 그의 탓이다. 분명히 그렇다.
모리 레이코: 다른 이들은 총잡이와 첩자의 전용실에 흉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잊을 수도 있다.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리더는 그래서는 안 됐다.
나이토 유즈루: 토키와도 실수는 할 수 있잖아. 얘도 사람이야!
모리 레이코: 아니. 리더는 남들보다 배는 신중했어야 했다. 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우리는 지금 위기에 처했고, 그 일에 책임을 질 만큼 권한을 가지고 있던 이는 리더뿐이다.
카나리 케이토: 그게 다가 아니야. 너! 돌팔이 너! 너도 마찬가지야!
카나리가 칸나즈키를 가리키자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 돌렸다.
칸나즈키 시노부: 어... 너 지금 검지와 엄지로 나를 가리키는 거니, 아니면 나머지 세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는 거니?
카나리 케이토: 너지! 이 자식아. 너 미래 볼 줄 알잖아.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왜 이 모양 이 꼴이 날 줄 알고 있었으면서 태연하게 상자나 옮기고 자빠져 있었냐고!
칸나즈키 시노부: 엥...? 카나리. 사람은 미래를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없어.
칸나즈키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말했다.
카나리 케이토: 개소리! 말 한 마디면 모든 게 바뀔 수 있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카나리는... 저렇게 말하면서도 칸나즈키의 말을 무척이나 믿는 것 같다. 아마 여기서 칸나즈키의 말을 제일 많이 믿는 사람은 카나리 아닐까? 저렇게 틱틱대면서도 순진한 면이 있구나.
히무로 시라베: 충분한 근거가 없는 예측에 모두의 안위를 걸 순 없어. 카나리. 불평하지 말고 방법을 찾자.
카나리 케이토: 무슨 방법?
히무로 시라베: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 예를 들자면. 23T에게 미도리카와의 제압을 부탁한다던가. 카이다의 전용실에서 흉기를 조달한다던가... 그런 것들.
나나시: ...그거 좋다. 맞네. 그 방법이 있었네!
히무로 시라베: 이 방법이 전부인 건 아니야. 더 생각해보면 보다 좋은 방법을 찾을 수도 있겠지. 그러니 무의미하게 토키와나 탓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다면, 나중에 해.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모리 레이코: 그런 관점이라면 네 주장에 동의한다.
나는 토키와의 표정을 보았다. 그리 좋지만은 않은 표정이었으나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위로를 해도 될지 난 알 수가 없었다. 그의 꽉 쥐어진 손은 약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악다문 입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야가미 토가: 약간 걸리는 점은 카이다 씨의 전용실에 흉기가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거군요.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가 했던 말을 보면 흉기가 없을 수가 없어. 설마 정말 전용실 안에 부끄러운 게 있다고 보여주고 싶지 않단 건 아닐 테니.
모리 레이코: 그래. 협상가와 총잡이가 나눈 통화에서. 총잡이는 첩자를 위협하고 있었다. 둘의 적대 관계는 명확하다.
모리 레이코: 그리고 인공지능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넌 누구의 편이지?
23T5U130: 난 생존자들과 카텟 기관의 편이야.
모리 레이코: 만약 생존자들이 카텟 기관을 적대한다면?
23T5U130: 대답하지 않겠어. 먼저 말해두겠지만. 난 미도리카와를 포함한 너희 모두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어. 그렇게 설계되었거든.
23T5U130: 하지만, 총알에 흠집도 나지 않는 몸을 이용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모리 레이코: 총알받이.
야가미 토가: 교섭의 신청이겠죠.
하기와라 우시오: 액션 스턴트!
후루미나미 나몬: 그 말에 찬성이야!
칸나즈키 시노부: 조수.
나나시: 교섭의 신청 쪽이 제일 가능성 높지만... 정말 괜찮을까?
야가미 토가: 설마 23T 씨를 걱정하시는 건가요? 불필요합니다. 아까 모노로그 씨를 파괴하는 모습 보셨잖아요.
나나시: 그건 그렇지만... 걱정된단 말이야. 23T는 우릴 지키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잖아. 우릴 지키려다가 잘못되면 어떻게 해?
모리 레이코: 확실히. 인공지능이 파손된다면 이후 우리들의 생존에도 악영향을 끼치겠지. 유사시 모노로그를 파괴할 수 있는 건 인공지능뿐이니.
나나시: 그게 아니라. 23T가 불쌍하잖아. 그냥 우리 좋을 대로 부려먹히다가 그냥... 고장 나 버리면.
야가미 토가: 비이성적인 발상입니다. 기계는 용도와 목적에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에요.
캐롤 브라이트: 그래도 23T 씨 역시 살인 게임에 말려드신 이상, 저희들의 동료예요. 걱정이 되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요?
23T5U130: ......
"왜? 또 뭐야? 대답해. 또 뭐냐고."
"사람들이... 너를 보는 시선이 안 좋아."
"상관없어. 하. 카텟 기관. 별의별 걸 다 연구하는 그 여자가 있는데 아직도 네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니 이해가 안 간다. 기계 분야에 약해서 그런가? 날 다시 불러들일 정도면 말 다 했네."
"그래도 날 디바이스에 넣고 다니는 게 낫지 않을까?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서라면 기관원들과 협력해야"
후루미나미 나몬: 과거 회상 그만하고 본편으로 돌아와.
23T5U130: 그럴게.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마유즈미 나데시코: 23T도 나나시도 커틀렛 기관 소속이라잖아. 같은 기관 소속이면 걱정이 될 만 하지.
히무로 시라베: 커틀렛 기관이 아니라 카텟 기관이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앗! 미안.
나나시: 그냥 오지랖일지도 모르겠지만... 조심해. 23T. 무리하지 마.
23T5U130: 걱정 마. 꼭 멀쩡하게 돌아올 테니까.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 곧 만나자. 돌아온다면... 아니다. 지금은 말 안 할래. 네가 돌아오면 그때 내 입으로 전할게.
우리는 그렇게 멀어져가는 23T를 바라보았다. 그때 23T를 보내면 안 됐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우리는 그렇게 23T를 떠나보냈다...
나나시: 후루미나미. 갑자기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아.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23T5U130: 그만 하고. 정말로 다녀올게.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휙 내젓는 후루미나미를 뒤로 하고. 23T는 발걸음을 옮겼다.
어딘가 더 이상은 못 봐주겠어서 떠나버린 것 같은 느낌은 내 착각이겠지...?
23T는 미도리카와를 찾아 탑에 진입하면서 우리와 실시간으로 통화를 하며 상황을 보고하기로 했다. 다이얼로그 한 개를 중심에 두고 빽빽하게 사람이 모이자 다이얼로그에서 나는 작은 소리 하나에도 무척이나 긴장이 되었다.
나나시: 어때? 미도리카와가 보여?
23T5U130: 아니. 아직은 카이다도 미도리카와도 보이지 않아.
나나시: 뭔가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돌아와.
하기와라 우시오: 거 참. 23T가 어련히 잘하겠지. '눈이 좋은 사슴은 방탄이다' 라는 말도 있잖아.
야가미 토가: 'Idea is bulletproof' 말씀이십니까? 대체 이 격언을 어떻게 왜곡시키셨길래 그런 결과물이...
하기와라 우시오: 뭐든 간에. 23T는 문자 그대로 방탄 소년인데 나나시는 아주 23T를 애인인 것 마냥 걱정하잖아. 좀 진정하자고.
모리 레이코: '소년' 이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다. 인공지능은 생물이 아니므로 생물학적 성별을 가지지 않는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너희들은 왜 자꾸 내 츳코미 캐릭터로서의 정체성을 가져가려 하냐? 뻐킹.
히무로 시라베: 쉿.
히무로가 하기와라의 입을 막자 모두가 23T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23T5U130: 미도리카와가 보여. 손에는 권총이 있어. 나를 겨누고 있고.
캐롤 브라이트: 네?!
마유즈미 나데시코: 와아악! 도망쳐어어어!!
모리 레이코: 호들갑 그만 떨어라. 통화가 들리지 않는다.
23T5U130: 괜찮아. 총을 거뒀어. 날 쏠 생각은 없어 보여. 미도리카와. 아까 총을 쏜 사람. 너지? 카이다는 어디 있어?
미도리카와 아쿠토: 걱정 마. 무사하니까. 주변을 봐. 피를 흘린 흔적은 어디에도 없어. 난 단지 위협사격을 했을 뿐이야.
미도리카와 아쿠토: 후. 그래도 23T 네가 도착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기다리고 있었어.
다이얼로그의 성능에 감탄이 나왔다.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느껴지기는 했으나 다이얼로그는 미도리카와의 음성을 정확하게 감지해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이런 고성능의 기계가. 사진 촬영을 포함한 여러 기능을 가진 기계가 이렇게 작을 수가 있을까...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통화에 집중했다.
23T5U130: 기다리고 있었다니?
미도리카와 아쿠토: 탐색전에 지쳤거든... 총알이 안 통할만큼 단단해 보이는 사람은 너 밖에 없으니 네가 오는 게 당연하지. 네가 온 이상 그 여자도 당분간은 잠잠할 거고.
미도리카와 아쿠토: 다이얼로그로 모두와 통화하고 있지? 잠깐만 끌 수 있어? 너와 나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야가미 토가: 여러분.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속셈을 알아낼...
모리 레이코: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상의할 가치도 없다.
야가미 토가: 아. 제발.
히무로 시라베: 원하는 걸 다 들어주면 주도권을 빼앗길 수밖에 없어. 미안하지만 이게 우리들의 유일한 통신 수단인 이상, 다이얼로그는 양보 못 해.
미도리카와 아쿠토: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얘기가 줄어들겠지만. 이해는 가네. 상자를 나르자마자 어딘가로 사라진 두 명이 총소리와 함께 싸움을 벌이다니. 수상하지. 그것도 하필이면 흉기가 다 불탄 시점이니 말이야.
미도리카와 아쿠토: 너희들 중 일부는 내가 총기를 사용해 흉기 없는 너희들을 해코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모리 레이코: 전부가 그렇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애석하지만, 걱정하지 마. 총기로 너희를 해칠 생각은 없어.
히무로 시라베: 그 말을 우리가 어떻게 믿지? 나나 야가미의 전용실에도 온전히 작동하는 총기는 없었어. 그런데 네 전용실에는 총기가 있지. 잘 작동하는 총기.
히무로 시라베: 즉. 네 재능. 과거. 그리고 선호 물품은 총과 큰 관련이 있어.
야가미 토가: 히무로 씨. 그리고 여러분. 미도리카와 씨를 몰아붙이지 마세요. 저희는 지금 을의 입장에 있습니다.
야가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총... 맞아. 그게 내 신분을 밝히지 못한 첫 번째 이유지. 지금처럼 모두가 날 위험인물로 볼지도 모르니까.
나이토 유즈루: 얘 나쁜 놈 같지는 않은데? 말이 잘 통해.
마유즈미 나데시코: 응. 대화로 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행이다.
모리 레이코: 마음을 너무 쉽게 주지 마라. 그가 우리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그러나 내가 보장을 할 의향이 있다면 말이 다르지. 내가 어떻게 하면 내 말을 믿어줄래?
그의 물음을 듣자 나조차도 의구심이 들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믿을 수 있을까? 그가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서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 그를 위협으로 만드는 요소를 없애면 될 터였다. 하지만 그러려면...
모리 레이코: 네 모든 총기를 소각하고 전용실의 열쇠를 우리 쪽에 맡긴다면, 네 말을 신뢰하겠다.
나이토 유즈루: 총기 태우는 건 맞는데. 전용실은... 아니다. 총기의 보급을 막으려면 전용실 자체를 막아놔야 하겠지.
미도리카와 아쿠토: 그러기는 어려워.
난 미도리카와가 놓이게 될 상황을 상상했다. 그가 총기를 폐거한다고 해도 우리가 그에게 온전히 마음을 열 수 있을까?
부끄럽지만 난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샅샅이 몸수색을 한다고 해도 그가 어떻게든 빼돌린 단 한 자루의 총이 내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른다며 결국엔 불안해지리라.
또한, 그는 카이다에게 총을 쏘았다. 지금 그녀와는 통신이 되고 있지 않지만 그녀의 전용실에도 흉기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 미도리카와의 총기를 전부 없애면 카이다가 흉기를 독점하게 될 것이고. 총기가 없는 미도리카와는 카이다에게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나중이라면 몰라도 당분간은 내게 총기가 필요하거든.
모리 레이코: 그럼 우린 널 믿을 수 없다. 이야기는 끝났다. 끊겠다.
하기와라 우시오: 노노노노노. 안 돼! 스탑! 미도리카와. 전화 끊지 말아 봐! 이야기 아직 안 끝났어!
미도리카와 아쿠토: 사실 이미 끝났지. 난 너희들이 탑에 오는 걸 막거나 너희를 해칠 생각이 없어. 이게 끝이야. 너희가 날 믿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미도리카와 아쿠토: 내가 원하지 않았던 게 이런 거야. 내가 잠재적인 위협으로 취급받는 상황 말이야. 다들 오늘 겪은 일을 없었던 걸로 하면 얼마나 좋을까...
히무로 시라베: 우릴 유인해서 몰살하려는 가능성이 남아있는 한. 너를 섣불리 믿을 순 없어.
야가미 토가: 아뇨. 히무로 씨. 학급재판에서 패배한 검정은 처형당합니다. 몰살은 불가능해요.
히무로 시라베: '학급재판에서 패배한 검정' 이 죽는 거니까 규칙의 허점을 파고들면 몰살은 얼마든지 가능해.
나이토 유즈루: 음...? 이게 무슨 소리야.
히무로 시라베: 학급재판이 열리기 전에 모두를 몰살하면. 즉 학급재판에 참여할 인원을 전부 죽이면 패배할 일도 없어진다는 얘기야.
카나리 케이토: 뭐야. 그딴 게 된다고? 그럼 우린 다 죽은 거잖아!
하기와라 우시오: 글쎄. 그런 식으로 몰살은 불가능할 것 같은디? 규칙 2 봐봐.
규칙 2: 시체가 3인 이상의 사람에게 발견될 경우 검정을 밝혀내기 위해 모든 학생들은 학급재판에 참여합니다. 참여하지 않을 경우 교칙 위반으로 간주해 처벌합니다.
나나시: 이게 왜?
하기와라 우시오: 내가 잘못 이해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이거 학급재판에 바로 참여해야 한다는 거 아니야? 시체 발견! 바로 학급재판으로!... 이렇게.
나나시: 바로 학급재판장으로...?
히무로 시라베: 그러면 추리를 통해 검정을 잡기가 무척 어려워져. 그러니 학급재판에 돌입하기 전에는 조금의 수사 시간이 주어지지.
하기와라 우시오: 넌 그걸 어떻게 알아? 여기에는 수사 시간 같은 거 안 적혀있는데.
그건 그렇네? 하기와라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낀 순간 나온 히무로의 즉답에. 내 의심은 바로 사그라들었다.
히무로 시라베: 아까 모노로그에게 물어봤거든. 학급재판에 바로 참여해야 하냐고. 그러니까 수사 시간이 주어진다고 대답했어.
하기와라 우시오: 아 그래? 아 ㅋㅋ 존나 내가 멍청한 거였고~
미도리카와 아쿠토: 그렇지만 몰살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너희들이 날 믿어주진 않겠지?
미도리카와 아쿠토: 이렇게 하자. 너희가 탑 안에서 활동하는 동안 난 내 전용실 안에 있을게. 그리고 23T는 내 전용실 앞에서 나를 감시해줘. 내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23T5U130: 알겠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순식간에 이야기가 끝나버렸어. 뭐야!
후루미나미 나몬: 괜찮은 방법인데? 미도리카와를 가둬 두면 우린 안전해. 마치 괴도 루팡에게서 보석을 지키기 위해 철통보안 금고에 보석을 보관하는 것처럼.
나나시: 이 경우에는 보석을 지키는 게 아니라 보석에게서 우리를 지키는 거지만... 말이 되긴 하네.
23T5U130: 너를 감시하는 정도라면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는 게 아니니. 나에게도 불가능하진 않을 거야.
미도리카와 아쿠토: 그리고 가능하다면 넌 어딜 가든 내 행동을 계속 감시해 줘. 이 정도면 너희들이 탑에서 지내기엔 충분히 안전한가?
야가미 토가: 이 정도면 무척 훌륭한 협의입니다. 받아들여야 해요. 우리에게 더없이 유리한 조건입니다.
야가미 토가: 모리 씨. 당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제발 가만히 있으세요.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좋은 점은 없습니다. 이쯤에서 타협하세요.
모리 레이코: 아ㄴ...
토키와 아유키: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어. 미도리카와.
토키와가 치고 들어왔다. 그의 혈색은 아까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아까 손을 부들부들 떨던 토키와와 동일인물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의 변화에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토키와가 상황을 정리하는 것을 보자 그 당황도 잊혀졌다.
토키와 아유키: 모리. 너는 지금 23T와 미도리카와가 결탁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거지? 하긴. 총기를 가진 사람과 총알이 통하지 않는 인공지능이 힘을 합치면 누구도 막을 수 없을 테니까.
모리 레이코: 그렇다.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23T5U130: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
토키와 아유키: 알아. 그러나 우리에겐 확신이 부족해. 동시에.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미도리카와와 합의를 끝내야 하지. 영원히 여기에 서 있을 수만은 없어. 그럼 확신을 만들어 내야지.
나나시: 그럼... 뭘 하려는 거야?
토키와 아유키: 내가 23T를 감시할게. 그럼 괜찮겠지? 23T가 미도리카와와 결탁하는지 감시하고. 만약 수상한 점이 보인다면 바로 너희에게 보고할게.
모리 레이코: 이중 감시 체제라...
토키와 아유키: 물론 나까지 미도리카와, 23T와 한 패가 되서 범행을 꾸밀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런 희박한 확률까지 고려하자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토키와 아유키: 23T와 미도리카와가 만에 하나에 손을 잡는다면 난 위험해지겠지만. 모두가 안전해질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어.
토키와 아유키: 우선 모두 식사를 하러 가자. 식당으로 가자. 다들 배고프잖아?
이바라 쿠리스: 나 식당 조사 안 해봤는데. 안에 음식이 있긴 해?
23T5U130: 식당에서는 여러 음식들이 하루 세 번 제공돼. 하지만 식당 구석에 있는 주방과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낸 뒤 조리할 수도 있지.
토키와 아유키: 좋네. 우선 미도리카와는 우리가 식당으로 들어간 동안 전용실에 있어 줘. 그리고 23T가 문 앞에서 미도리카와를 감시해. 내가 23T를 감시할 테니.
하기와라 우시오: 엥? 그럼 넌 밥 안 먹어?
23T5U130: 제공되는 여러 음식 중에는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종류도 있어.
토키와 아유키: 끼니 거를 걱정은 없겠네. 이제 괜찮지?
나나시: 뭔가 미안한데... 토키와랑 23T한테 다 떠넘기는 것 같아서.
토키와 아유키: 그럴 필요 없어. 애초에 이 모든 일이 내 판단 실수 때문이니. 내 나름대로 책임을 진 거라고 생각해 줘.
미도리카와 아쿠토: 그럼 이제 된 거지? 탑으로 올라와. 난 방으로 들어갈게.
우리가 탑의 2층으로 올라왔을 때, 미도리카와의 전용실 문 앞에는 23T가 서 있었다. 미도리카와는 이미 전용실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나 여기 있어.
토키와 아유키: 응. 들려.
토키와는 그대로 23T를 감시하겠다고 말하며 23T와 거리를 둔 채로 2층에 남았다.
나이토 유즈루: 힘내라. 임마. 바로 뭐라도 가져다줄게.
토키와 아유키: 고마워. 식사 맛있게 해.
그렇게 4층으로 올라가 식당으로 들어가자. 식당에선 모노로그가 우리들을 반겨 주고 있었다.
모노로그: 오랜만이구나. 다시는 만나기 싫은 너희들의 가증스러운 낯짝.
나나시: 딱히 오랜만인 것 같진 않은데... 우릴 왜 그렇게 싫어해?
마유즈미 나데시코: 헐! 이게 다 뭐야? 음식 냄새가 나!
카나리 케이토: 음식 냄새가 아니라... 음식이잖아.
고풍스러운 흰색 식탁보 위에는 가지런히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방금 막 만들어진. 김이 모락모락 나오는 음식들이었다.
나나시: 어디 있나 했더니 여기서 이거 만들고 있었어? 어떻게 만들었어?
모노로그: 묻지 마라. 내 의무는 끝났다.
모노로그는 그 말만을 남겨 두고 바닥을 뚫고 사라졌다.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네... 양탄자가 깔려 있는 식당 바닥도 문제없이 뚫고 사라졌다. 대체 이 탑과 모노로그에는 어떤 비밀이...
...하면서 생각하기에는 눈앞의 음식의 유혹이 너무 심했다. 우리는 그제야 우리들을 압도하는 식욕을 느꼈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던 모든 일들 뒤에 온갖 음식들이 향기로 우리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현실적인 무언가를 우리들의 뇌에 때려 박은 것이다. 괴로울 정도의 허기가 느껴졌다.
나나시: ...꿀꺽.
하기와라 우시오: 좋으아! 밥탐이다!
이바라 쿠리스: 우와... 이렇게 한상 가득 차린 식탁은 진짜 오랜만에 봐...
칸나즈키 시노부: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둬야 해.
그렇게 모두들 서로에게 자극을 받듯이. 하나 둘 식탁에 앉기 시작했다. 나 역시 천천히 식탁으로 발을 옮겼으나, 다른 사람들을 만류하는 나이토에게 막히고 말았다.
나이토 유즈루: 야. 야. 진정해. 이거에 이상한 거 들어있을지 누가 알아? 일단 멈추자고.
모리 레이코: 멈출 이유가 없다.
야가미 토가: 당연하죠.
히무로 시라베: 그렇지.
후루미나미 나몬: 이것이 우리들의 대답이다!
그렇게... 머리가 좋아 보이는 네 명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식탁에 앉았다.
사실 모리나 히무로라면 식사를 위험하게 여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까지 태연하게 식사를 시작하자 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모노로그가 식사의 안전함을 예기해 뒀던가?' 하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런 일은 없었는데...
나이토 유즈루: 아니 얘들 봐라?! 아까까지는 아무도 못 믿겠다는 태도였으면서 갑자기 이래?!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 이건 어떻게 먹어야 하지? 애초에 이거 먹는 건가?
이바라 쿠리스: 뭐야. 마유즈미 너 리치 안 먹어봤어? 이거는 껍질을 이렇게 까면...
마유즈미 나데시코: 우와. 작은 복숭아 같다!
나이토 유즈루: 정신 차려! 그 책 자식이 여기에 뭘 타 놨을지 몰라!
야가미 토가: 아까 모노로그 씨가 말씀하셨죠? 자신의 목적을 믿으라고요. 이것도 같습니다. 모노로그 씨는 우리가 쉽게 죽게 두지 않을 겁니다.
히무로 시라베: 오히려 어떻게든 살려 두려고 하겠지. 가축에게 먹이를 주듯이 말이야.
모리 레이코: 책은 자신의 목적에 맞게 우리들을 이용하기 위해 편의를 제공하는 거다. 책의 의도에 맞춰 주니 인간의 존엄성을 잃는 것 같지만, 살아남아야 탈출구를 찾을 수 있겠지.
후루미나미 나몬: 원래 식사에 독 타서 등장인물들이 다 죽으면 재미가 없어지거든.
나나시: 후루미나미 혼자만 식사가 안전하다는 확신의 근거가 다른 것 같은데...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나이토 씨. 드세요. 많이 드시고 힘내야죠.
나이토 유즈루: 그래... 니네 말이 맞는 것 같다. 토키와한테 이 샌드위치랑 라면이랑 닭튀김만 전해주고 나도 먹을게.
나나시: 그렇게 많이 전해주게? 토키와 분명 다 못 먹을 텐데.
나이토 유즈루: 뭔 소리야. 이게 많다니? 내가 무에타이 아저씨한테서 배울 땐 이것보다 더 먹었어. 우리 나이 때에는 먹는 만큼 커지는 법이야.
그렇게 말하며 의기양양하게 접시 세 개를 가진 채 떠난 나이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울상을 한 채 돌아왔다.
접시 두 개와 함께.
나이토 유즈루: 입맛이 없단다. 샌드위치만 먹는대.
나나시: 입맛이 좋았어도 그걸 다 먹진 못했을 걸...
시간이 지나고 식사가 대강 마무리되자, 하기와라가 음료수를 마시며 한탄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존나 믿기지가 않아.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이바라 쿠리스: 난 아직도 안 믿겨. 이상한 장소에. 이상한 광선에. 책에. 방에. 창고에. 이제 총이야. 질린다 질려!
히무로 시라베: 미도리카와와 23T가 협조적으로 나와서 망정이지. 그들이 적대적이었다면 큰일이 벌어졌을 거야. 그 점만큼은 다행이지...
히무로 시라베: 다들 많이 당황스럽지만 익숙해져야 해. 살인 게임에도, 모노로그에도, 다이얼로그에도 전부.
하기와라 우시오: 근데 몇몇 애들은 전혀 당황한 티가 아니던데. 야가미. 모리. 후루미나미. 그리고... 너. 히무로맨.
야가미 토가: 저도 당황했습니다. 저 말고도 모두가 그렇죠.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느 누가 잘 알고 있겠습니까?
야가미 토가: 그러나 침착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게 전부예요.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도 침착하고 싶은데... 너무 무서워. 아까는 고개를 들었을 때 미도리카와가 위에서 총을 쏠 까 봐 고개를 들지도 못 했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대로 계속 무서우면 어떻게 하지? 나중에는 나아질까? 너무 불안해.
나나시: 나도 그래. 기억을 잃은 채로 이런 상황에 휘말려선... 기억을 찾는다면 조금이라도 덜 무서워질까?
캐롤 브라이트: 괜찮아요. 여러분 모두. 다 잘 될 거예요.
마유즈미 나데시코: 캐롤 씨이...
캐롤 브라이트: 공포는 나쁜 게 아니에요. 사람의 본능 중 하나죠. 공포를 느낀다는 것은 곧 살아있다는 뜻이에요.
캐롤 브라이트: 그러니 무섭더라도. 자신이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끼지 않으셔도 돼요. 살인 게임에 익숙해지지 않더라도 저희에겐 서로가 있잖아요? 서로 의지할 수 있어요.
모리 레이코: 남의 손을 빌리면서 역경을 헤쳐나간다라. 좋은 이야기다. 공리에 부합한다. 더할 나위가 없지.
캐롤 브라이트: 그렇죠? 역시 모리 씨도...
모리 레이코: 그러니 네 손을 보다 많은 곳에 쓰라는 거다.
모리가 자신의 말을 단칼에 끊자 캐롤 씨는 그녀의 의중을 눈치챈 듯. 밝은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캐롤 브라이트: 또 심문 예기예요? 다시 한번 거절할게요.
모리 레이코: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믿어서 생긴 결과물은 어땠나? 네가 총잡이에게 터치를 사용하지 않았던 결과는?
나나시: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맞아! 미도리카와한테 총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무도 몰랐잖아!
모리 레이코: 상담가를 감싸는 게 하필 그녀에게서 터치를 받았던 두 명이라. 나머지 한 명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녀를 두둔했겠지?
하기와라 우시오: 뭐여. 한 명이 더 있어? 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히무로 시라베: 역시 그랬어. 어쩐지 태도가 매우 빠르게 바뀌더라니...
히무로 시라베: 토키와가 터치를 받았지. 그렇지?
나나시: 아...! 그래서 아까 토키와가.
그의 혈색은 아까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캐롤 브라이트: ...네. 그 사실을 다른 사람한테 알리는 건 내담자에게 있어 실레겠지만요. 모리 씨.
모리 레이코: 공리를 위해선 사소한 희생이다. 프로파일러의 말대로. 지금은 총잡이와 인공지능이 둘 다 협조적이고 겉으로는 적의를 드러내고 있지 않고 있다.
모리 레이코: 이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그리고 요행에 계속 의지하기에 16명의 목숨은 너무나도 무겁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서 강경책이 필요하다? 그건 아까도 말했잖아. 지금은 더 급한 얘기가 있어.
하기와라 우시오: 바로 카이다지! 얘 어딨어? 밥 먹으러 안 온대?
야가미 토가: 아직 연락은 되지 않습니다.
캐롤 브라이트: 식사도 못 하셨을 텐데. 지금 어디 계신 걸까요?
모리 레이코: 확실히. 첩자도 심상치 않은 구석이 있다. 전용실에 흉기가 있다는 것은 첩자도 총잡이만큼의 위험인물이라는 뜻이다.
나나시: 아직 카이다 전용실에 흉기가 있다고 정해진 건 아닌데. 있을 가능성이 높긴 하고...
히무로 시라베: 카이다는 미도리카와와 대립했어. 미도리카와는 카이다와 면식이 있는 눈치였지만 카이다는 그렇지 않았고... 둘 사이엔 우리가 모르는 일이 있어.
히무로 시라베: 가장 중요한 건. 카이다가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가 뭐든 그녀는 우리와 협력할 의사가 없다는 거야.
칸나즈키 시노부: 어쩌면 이미 죽었다던가?
나이토 유즈루: 불길한 얘기 하지 마! 어딜 봐도 핏자국은 없었잖아. 총알 자국만 보였다고. 미도리카와 말 대로 카이다는 무사할 거야.
야가미 토가: 어쩌면 미도리카와가 카이다를 자신의 전용실에 감금하고 기절시킨 걸 수도 있습니다. 그럴 확률은 낮지만요.
나나시: 미도리카와가 자기 전용실을 보여주면 좋겠지만. 그럴 확률은 낮겠지?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는 카이다도 그렇고.
모리 레이코: 그러고 보니 아직 프로파일러의 전용실을 살피지 못했다. 지금 당장 그곳으로 향하도록 하자.
마유즈미 나데시코: 켁! 또 어디 가야 돼? 나 완전 지쳤어!
나나시: 그럴 만도 하지. 별 일이 다 있었으니까...
이바라 쿠리스: 그냥 내일 가자. 시간도 늦었잖아.
모리 레이코: 계속 미루다간 또다시 사단이 날 거다.
하기와라 우시오: 무슨 사단. 사단칠정론? 사단의 확충?
야가미 토가: 지금이 농담할 때입니까?
순식간에 작은 말싸움이 생겼다. 토키와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이렇게 틱틱대다니. 난 초고교급 학생들이 한 곳에 모이면 생기는 단점을 똑똑히 보았다. 서로의 개성이 너무 자주 충돌한다는 단점이 그것이었다.
특히 살인 게임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익숙하지 않은 환경. 흉기를 없애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총기에 대한 두려움. 안전에 대한 집착. 그 모든 곳에 시달리기에 우리들은 너무 연약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본질은 고등학생. 그렇기에 우리들은 지쳐버린 것이다.
히무로 시라베: 다들 지칠만 했어. 오늘은 일단 해산하자. 자기 숙소로 돌아가자고.
모리 레이코: 아니. 미룰 수 없다.
히무로 시라베: 서두르지 마. 모리. 난 어디에도 안 가. 내 전용실 역시 어디에도 안 간다고. 내일 확인하면 될 일이야.
히무로 시라베: 우리가 섣불리 흉기를 태우지만 않았어도 우린 지금보다 훨씬 여유로웠을 거야. 그 사실을 명심해.
모리는 히무로의 말에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잠시 턱에 두 손을 괴고 가만히 있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모리 레이코: 알겠다. 그러나 내일 아침 식사를 한 뒤에는 예외 없이 프로파일러의 전용실로 가야 할 거다.
모리의 말이 끝나게 무섭게 탐정 상태의 후루미나미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후루미나미 나몬: 드디어 내 방에서 바이올린을 킬 수 있겠어.
이바라 쿠리스: 연기자 전용실에 왜 그런 게 있는지 알 수가 없네.
마유즈미 나데시코: 바이올린이 뭐야?
하기와라 우시오: 바위를 사람 몸에 올리면 바이올린이야.
하기와라의 말에 마유즈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뭐? 그걸 어떻게 연주해?! 연주라고 할 수는 있어?!
후루미나미 나몬: 보여줄까? 난 생각할 때면 바이올린을 켜고 며칠 동안 말을 안 할 때도 있지만. 원한다면.
마유즈미 나데시코: 보여줘! 진짜 궁금하다! 내가 모르는 것 투성이야...
그렇게 하나 둘 식당을 떠났다. 마유즈미의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나도 이젠 내 숙소로 돌아가야겠지... 하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히무로가 내 어깨를 잡고 나를 불렀다.
나나시: 히무로? 왜?
히무로 시라베: 나나시. 네게 부탁이 있어. 카텟 기관에 대해 떠오르는 게 있다면, 아니... 카텟 기관이 아니더라도 네가 특정한 기억을 떠올린다면. 내게 그 기억에 대해 말해 줘.
나나시: 기억? 알았어. 그런데 왜?
히무로 시라베: 너와 내 기억은 중요해. 카텟 기관에 대한 이야기는 중요해.
히무로가 내 어깨를 순간 꽉 잡았다. 아픔이 느껴지려는 순간 그의 손에 들어가 있던 힘이 풀렸다. 그가 의도하고 손에 힘을 줬다기보다는 무심코 그런 것 같았다.
히무로 시라베: 부담을 주려는 게 아니야. 단서를 알고 싶어서 그래. 여기서 빠져나갈 단서.
나나시: 어... 그래. 알았어.
난 '메리' 라는 사람에 대해 그에게 물으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그 사람이 누구든 히무로에겐 소중한 사람일 텐데. 그 기억을 헤집어서는 안 될 터였다. 나야 과거에 소중한 사람이 없으니 이렇게 침착할 수 있지만 그에겐 아니니까.
히무로 시라베: 고마워. 아직 자기엔 시간이 이르지만. 잘 자.
히무로는 그 말만 남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언가가 떠오를까 말까 내 머릿속에서 일렁거렸다. 난 그것을 기억해내려고 미간에 힘을 잔뜩 주다가...
내 등을 톡톡 건드리는 손길을 느꼈다.
캐롤 브라이트: 여기서 뭐 하세요?
나나시: 악! 캐. 캐롤 씨.
캐롤 브라이트: 어머. 놀라셨나요? 죄송해요. 한 자리에 가만히 서 계시길래 뭔가 했어요.
나나시: 히무로를 보고 있자니 뭔가 떠오를 듯 말 듯 해서요... 아무래도 저랑 히무로는 확실히 면식이 있는 모양이에요.
캐롤 브라이트: 그래요? 다행이네요. 곧 기억을 찾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캐롤 씨는 그 말을 끝내고 입을 천천히 닫더니, 고개를 조금 밑으로 숙였다. 무슨 의미인지 고개가 저절로 기울어졌다.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기 직전. 그녀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캐롤 브라이트: 나나시 씨. 이건 그저 상념에 불과한데요...
캐롤 브라이트: 제가 강경책을 사용해야 할까요?
전용실에 왔다. 내가 거쳐온 환경들을 쭉 둘러보았다. 여러 순간들이 지금도 눈 앞에 어렸다. 이윽고 난 감상적이라고 불리는 정신 상태에 들어섰다. 좋은 추억을 떠올리려는 순간, 난 전용실의 구석을 보았다. 그것을 보자 메리가 위험해 처했다는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리고 좋지 못한 추억이 같이 떠올랐다.
"반드시 이 곳에서 사살해야 한다! 따라와. 이 건물을 전부 샅샅이 뒤진다!"
'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 > 챕터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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