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나즈키 시노부: 그건 틀렸다! 넌 거짓말을 하고 있어!
히무로 시라베: ...난데없이 무슨 소리지? 칸나즈키 시노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근거가 있다면 말해 봐라.
하기와라 우시오: 오호. 이 친구 아까부터 말투가 좀. 오락가락 하시네?
칸나즈키 시노부라는 변수를 생각하지 않은 나의 실책이었다. 그녀의 신통력을 속일 방법이 분명 있었을텐데... 섣불리 판단했고, 오만했다. 게다가 나도 모르게 최초의 나로 회귀했고, 하기와라에게 그 사실을 추궁받기까지. 어떻게 이렇게나 무뎌질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아버지의 낯을 잊었구나.
나는 뒤늦게 아버지의 낯을 다시 떠올리려 했다.
히무로 시라베: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자꾸 말투가 이렇게 돼.
이 변명이 최선이라니. 이런 우둔한...
히무로 시라베: 미안하지만 카텟 기관에 대해서는 발설할 수 없어.
야가미 토가: 어째서입니까? 확실한 이유를 말씀해주시죠.
히무로 시라베: 카텟 기관에 대한 정보를 민간인에게 알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지.
모리 레이코: 믿을 수 없다. 작위적이고 납득할 수 없다. 숨기는 구석이 있는 게 분명해.
답답한 상황이었다. 대몰락에 대한 정보를 언급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들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알 턱이 없겠지. 대몰락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그것이 사회 그 자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저명한 학자들조차도 완전히 파악해내지 못했다. 그런데 알파걸도, 대몰락도, 희망봉 학원의 폐교도 모르는 이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나나시는 이렇게 말했었다.
나나시: 살 이유가 없으니까. 아무것도 없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터치를 써 주세요. 저는 이미 틀렸어요.
어쩌면 바깥 세상에 너희들이 살아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순 없었다. 대몰락에 대한 내용을 지금 털어놓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전용실을 통해 얻은 약간의 안심을 전부 반전시킬 수 있을 정도의 불안이 모두를 덮치고, 살의가 폭발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내가 대몰락을 기억하고 있음을 모노로그에게 들킨다면 분명 모노로그는 무슨 수를 써서도 날 배제하려고 들 것이다. 알파걸이 자신의 살인 게임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게 누명을 씌울지도 몰랐다. 나를 위해서도,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이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사실과 내 의도를 알 수 없었고, 알 수 있을리가 없었으며, 알아서는 안 됐다.
숨길 수 있을만큼 숨겨야 했다. 나는 마음을 굳혔다. 이들 중 몇 명은 나를 흑막으로 오해하고 날 급습할지도 몰랐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나나시의 신분을 조금이라도 유추하기 위해 카텟 기관을 언급한 것이 실수였던 걸까?
아니... 난 옳은 일을 했다. 나나시의 과거를 풀 수 있는 열쇠가 있는데 몸을 사리는 것은 '상자' 를 열지 않는 일과 같다. 메리라면 분명 나와 같은 판단을 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라면 카텟 기관의 모든 정보를 공개하더라도 눈앞의 사람을 지켰겠지. 온건파의 얼굴과도 같은 그녀라면.
히무로 시라베: 지금은 말해줄 수 없어. 더 시간이 지난다면...
모리 레이코: 몇 명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냐?
히무로 시라베: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말 그대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뿐.
23T5U130: 카텟 기관에 대해서는 정말 발설하기 어려워. 하지만 믿어줘. 이건 너희 모두를 위한 일이야.
야가미 토가: 이번에도 당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으시겠죠? 제한 때문에.
야가미 토가: 참 애석하죠. 꼭 필요한 정보만 꼭 말할 수 없으시다니... 누가 보면 일부러 그러는 줄 알겠습니다. 그 제한이 정말 존재하는지 저희가 알아낼 도리도 없고요.
23T5U130: 카텟 기관은 모노로그와 결탁하고 있지 않아. 그 반대지. 카텟 기관은 여기의 모두를 구조하려고 애쓰고 있어. 그래서 내가 투입된 거야.
야가미 토가: 투입. 투입. 말 나온 김에 묻겠습니다. 당신은 어떤 경로로 이 탑에 들어온 겁니까?
야가미 토가: 분명 당신은 저희와 같은 환경에 있었습니다. 돌무더기 말이죠.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투입된 지 시간은 얼마나 지난 겁니까? 카텟 기관에서 다른 지원도 도착하는 겁니까? 그렇다면 언제 도착하는 겁니까?
야가미 토가: 대답할 수 없으시겠죠. 그런 식이시라면...
23T5U130: 대답할 수 있어. 곧 카텟 기관은 지원을 보낼 거야. 어쩌면 이미 도착해있을 수도 있고.
23T의 음성에 나도 놀랐다. 카텟 기관이 이미 지원을 보냈다고?
야가미 토가: ...정말이십니까?
23T5U130: 그래... 어차피 탑이 이렇게 높다면, 모노로그가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겠지. 그러니 너희에겐 알려줄게.
23T5U130: 흰 물건에 대해서.
히무로 시라베: 흰 물건?
23T5U130: 흰 물건은, 카텟 기관에서 우리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탑에 보낸 물건이야.
23T5U130: 그것은 우리가 서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도록 도움을 주거나, 정보를 전해주지. 여러 형태를 하고 있지만 공통점은 있기에 쉽게 찾을 수 있어. 이름 그대로 흰색이니까...
후루미나미 나몬: 컷! 컷! 컷!
더 말을 이으려는 23T를 후루미나미가 다급하게 막았다. 확성기를 사용한 큰 음성에 미간이 찌푸러졌다. 확성기를 내려놓은 그녀는 양 손으로 십자를 만들어 잠깐 멈추라는 제스처를 계속해서 보냈다.
후루미나미 나몬: 23T 씨! 그런 거 말하면 안 돼지. 모노로그한테 들키잖아! 좀 더 뭐랄까... 신중한 느낌으로 한 번 더 갑시다!
하기와라 우시오: 오! 쒸엣! 야가미의 마법의 주둥아리 때문에 저 함정 카드가 다 까발려진 거야?!
야가미 토가: 아뇨. 모노로그 씨 역시 그것에 대해 알고 있을 거라고 아까 23T 씨가 말씀하셨잖습니까. 그것이 탑의 높이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23T5U130: 그래. 탑이 720층보다 높다면 분명 모노로그는 흰 물건에 대해 알고 있을 거야. 중요한 건 우리가 그것을 찾아내는 거지.
후루미나미 나몬: 그러면 다시 갈게요. 씬 13-2. 궁지에 몰린 히무로. 레디. 액션!
후루미나미는 슬레이트를 치더니, 천연덕스럽게 사냥모자(deerstalker)를 썼다. 방금 전까지는 등장하지 않았던 소품이었다. 이제 곰방대만으로는 탐정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주기 어렵다는 걸까? 정말 개성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구나...
하기와라 우시오: 그런데 연기자가 왜 영화 감독까지 하냐? 이거 캐릭터 붕괴 아니야?
후루미나미 나몬: 어.........
후루미나미는 그 질문을 듣자마자 행동을 멈췄다. 그녀에게 예고 없이 찾아온 전대미문의 대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글씨를 쓰고 있는 사람의 몸을 크게 흔들어, 쭉 하고 어긋나버린 한 줄의 선처럼.
후루미나미 나몬: 그 흰 물건을 우리가 찾아낼 수 있을까?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면 분명 모노로그가 먼저 탈취하려고 할 거야.
히무로 시라베: 확실히... 모노로그가 그 흰 물건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미 누구보다 빨리 찾아냈을 텐데.
하기와라 우시오: 꽁트 한 번을 같이 안 해줘요. 나쁜 새끼들...
23T5U130: 아니. 모노로그는 흰 물건을 찾아낼 수 없어. 아무튼 카텟 기관이 모노로그와 같은 편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해진 거지?
모리 레이코: 확실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또 다시. 모리였다.
모리 레이코: 나는 비밀결사 유타(Uta)의 일원이다. 그리고 난 카텟 기관의 거짓말에 대해서 알고 있지.
모리는 그 말의 효과가 주변으로 충분히 번질 때까지 기다렸다. 하기와라가 오른팔을 위로 90도. 왼팔을 아래로 90도 각도로 꺾으며 놀라자 그녀는 손을 허공에 휘휘 내저었다.
모리 레이코: ...라고 해봤자. 그 발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왜인지 아나?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떄문이다. 그런 것은 혼잣말, 헛소리, 공상에 불과하다.
모리 레이코: 너는 네 주장에 어떤 증거를 제시할 수 있지. 인공지능?
23T5U130: 모리. 흰 물건을 당장 이 곳에서 보여줄 순 없어. 그러니 찾아내야 한다는 거야.
모리 레이코: 말을 돌리지 마라. 답할 수 없다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관측되지 않는 한 무엇도 존재한다고 증명될 수 없다.
모리 레이코: 그러나 운 좋게도, 우리들의 손에는 관측기가 있지.
모리는 캐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예상하고 있었다. 좀 더 빨리 일어날 수도 있었으니 지금 일어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렇기에 난 기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아직 모든 것이 내 손을 벗어나지는 않았다는, 슬픈 안도감이었다.
모리 레이코: 상담가. 프로파일러에게 터치를 사용해라. 어쩔 수 없이 프로파일러를 심문해야 한다.
캐롤 브라이트: 시, 심문이요?!
더 단크 타워
챕터 1: < 죽여 마땅한 사람 둘 >
"과정은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리고 결국 이렇게 되었다. 거짓말을 밝혀낼 수 있는 수단. 터치가 화두에 올랐다.
모리 레이코: 달리 방도가 없다. 입을 열지 않는다면 이 쪽에서 열어줘야지. '계란을 깨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다'.
야가미 토가: 저도 고문만 아니라면 상관 없다고 생각합니다.
카나리 케이토: 고문은 필요해! 무조건 필요해! 이 자식이 흑막일 거라고!
칸나즈키 시노부: 왜 그렇게 생각해?
카나리 케이토: 네가 말한 거잖아! 이 타이밍에 거짓말을 한 거면 당연히 흑막이지! 내 돈 다 어디 갔어! 내 돈 뱉어. 이 새끼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돈 때문에 그렇게 화를 내는거야?!
카나리 케이토: 당연하지! 당장 고문하자! 바로 하자고! 아주 반죽음을 내자고!
하기와라 우시오: ......
하기와라 우시오: 이놈들 완전 미쳤구만. 세상천지 싸이코들이 다 여기 모인 거였어?
나나시: 갑자기 고문이라니! 너희들 지금 진심이야?!
모리 레이코: 그렇다.
카나리 케이토: 그럼 아니겠어? 이 자식은 무조건 수상해. 넌 장님이냐? 그것도 못 보게?
야가미 토가: 저는 아닙니다만.
나나시: 다시 생각해 보자. 히무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100%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이바라 쿠리스: 말 잘했다. 나나시. 너희 칸나즈키 말 완벽하게 믿을 수 있어? 나중에 얘 입에서 너희 셋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면 어떡할 건데?
칸나즈키 시노부: 글쎄... 난 잘 모르겠어.
이바라 쿠리스: 이거 봐! 자기도 긴가민가한 걸 우리가 어떻게 믿고 누굴 고문해?!
이바라의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야가미 토가: 칸나즈키 씨의 증언과는 상관 없습니다. 설령 그녀의 말이 틀리다고 한들, 히무로 씨의 수상한 점을 찾아냈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야가미 토가: 결국 그에게서 들어야 할 진실이 있다는 점은 모두 동의하시겠죠?
토키와 아유키: 아니. 안 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모리 레이코: 리더. 지금은 보다 많은 사람을 고려해야 한다.
토키와 아유키: 그렇다고 보다 적은 사람을 버려두고 갈 순 없어.
모리 레이코: 그래... 그런 올곧음 역시 리더의 자질 중 하나다. 그러나 리더의 자질들이 서로 상충하는 경우엔 역시 패러독스가 생길 수밖에 없군.
모리 레이코: 그리고 이 패러독스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서로의 결백을 증명해야 하는 거다. 우리가 서로를 믿을 수 있도록.
카이다 쿠로하: 하. 지금까지 네가 한 얘기는 그 정반대인데?
히무로 시라베: 모리의 말은 우리가 서로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 신뢰해야 한다는 게 아니야.
나이토 유즈루: 뭐라는겨...?
하기와라 우시오: 이 머리 좋은 새끼들. 말장난 하는거 봐!
히무로 시라베: 말장난이 아니야. 우리는 서로를 신뢰할 수 있을 만큼 서로에게 진실되야 하지. 그러나 덮어놓고 믿어서는 안 돼.
히무로 시라베: 맹목적인 믿음은 숭배와 다를바가 없으니, 서로에게 한 없이 가깝되 거리를 둬야 한다. 모리는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거야.
야가미 토가: 그러나 당신은 진실되지 않고. 결백하지도 않은 것 같군요. 그게 당신을 믿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모리 레이코: 상담가의 터치가 필요한 이유도 그것이다. 아까 이름 없는 남자의 반응으로 보아 최면인지 마술인지는 몰라도 눈속임은 아닌 것 같더군.
모리 레이코: 정신이 하나로 묶인 채 나누는 진솔된 대화라고 했지? 그럼 거짓말을 알아내는 것은 간단할 터다.
캐롤 브라이트: 아까도 말했듯이. 전 그런 식으로 터치를 쓰지 않아요.
모리 레이코: 대체 왜지?
캐롤 브라이트: 옳지 않으니까요! 거짓말 탐지기라고 쉽게 생각하실 게 아니라고요. 자신이 숨기고 싶은 비밀들이 전부 남에게 엿보여진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걸 반길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요!
카이다 쿠로하: 어휴. 씨발... 답답하게 나오시네.
하기와라 우시오: 허허. 시원시원하게 나왔으면 너랑 미도리카와 손부터 꽉 잡고 시작하지 않았을까?
카이다 쿠로하: ......
카이다는 하기와라에게 달갑지 않다는 시선을 보냈다.
하기와라 우시오: 왜 날 꼬라보냐.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 꼬우면... 아시죠?
캐롤 브라이트: 답답하다고 욕하셔도 이것만큼은 포기 못 해요. 전 절대 그런 목적으로 터치를 쓰지 않아요.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나는 안도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었다. 강제적인 터치로 인해 비밀이 들통날 위기는 당분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언동으로 보아 흑막이나 학급재판의 검정을 밝혀내는 데에도 터치를 사용하지 않을 것은 분명해 보였으나, 아쉬움을 느껴서는 안 되겠지.
탑의 인원들이 전부 고등학생이고 그렇기에 아직 미숙한 것은 예상한 바였다. 그러나 이렇게 순식간에 분쟁의 씨앗이 번질줄은 몰랐다. 내가 정말 대몰락과 카텟 기관에 대한 정보를 털어 놓아야만 명목상의 평화라도 유지되는 것인가? 그러나 내가 그 정보들을 풀어놓는 순간 실질상의 평화가 파괴될 것이다.
순순히 고문을 버티는 방법도 있었다. 신체를 절단하는 수준의 고문만 아니라면 수용할 수 있겠으나, 분명 내가 고문을 버틴다면 나를 향한 의심과 거리낌은 더욱 커질 터였고, 고문에 반대하는 인원과 찬성하는 인원으로 집단이 나눠질 가능성도 있었다. 카텟 기관의 강경파와 온건파처럼. 카텟 기관에선 그 둘이 서로 공통의 목적을 찾아 단결했으나 이 곳의 학생들에게 그런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모리 레이코: 터치를 사용하지 않겠다면 물리적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토키와가 모리를 만류하며 막아세우고, 야가미는 심문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설파한다. 캐롤은 야가미의 제안에 반대하고, 나나시. 카이다. 이바라. 카나리. 칸나즈키. 마유즈미. 후루미나미가 하나 둘 입을 열었다. 하기와라는 그 광경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곧 서로의 목소리를 알아듣기가 힘들 정도의 설전이 오갔다.
그리고 내겐 가장 쉬운 해결 방법이 있었다.
23T5U130: 히무로 시라베.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내 옆자리에 앉은 23T가 내게 속삭였다. 나도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기위해 속삭이며 대답했다.
히무로 시라베: 또 존댓말 쓰네. 존댓말을 쓰거나 쓰지 않는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만, 그건 나중에.
난 조심스럽게 의자를 뒤로 빼며 일어났다. 모두의 이목을 끌지 않을만큼 조용하게.
23T5U130: 단독 행동을 하려는 거야?
살인 게임에서 단독 행동은 위험한 일이다. 살인 게임에선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 혼자 움직인다면 살해당할 가능성이 올라갈 뿐이고, 내가 비밀을 감추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흑막이라는 오해도 커질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이런 악수도, 바둑판 전체에서 본다면 묘수가 될 수 있었다. 내가 진실을 말해야 비로소 모두가 날 신뢰하겠으나 난 진실을 말할 수 없다. 이 패러독스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패러독스 자체가 성립하지 않도록 만드는 방법 뿐이었다.
그 방법 역시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카이다 쿠로하: 야. 야. 야. 어딜 가?
식당의 문을 향해 발소리를 죽이고 걷던 내 앞을 카이다가 가로막았다. 상정한 바였으나 나를 가로막은 이가 그녀인 것은 의외였다.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보아 이렇게 주목을 받아가면서까지 행동할 사람이 아닌데. 어째서?
카이다 쿠로하: 못 가. 네가 뭘 숨기고 있는지, 카텟 기관의 정체가 뭔지 전부 말해주셔야겠어.
히무로 시라베: 간절해보이네. 카이다. 갑자기 왜?
카이다 쿠로하: 네가 알 일 없어. 내가 듣고 싶은 건 이 탑에서 나갈 방법과 내 정보를 어디서 들었는지에 대한 대답 뿐이야.
히무로 시라베: 난 모노로그와 관계가 없어. 그러니 둘 다 모르지.
카이다 쿠로하: 아직도 시치미를 뚝 떼? 본때를 보여줘야...
나이토 유즈루: 절대 안 되지!
나이토가 갑자기 식탁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성큼성큼 나와 카이다 쪽으로 다가오더니 나의 옷을 잡고 당겼다. 힘이 어찌나 센지 순간적으로 공중에 뜬 것 같다는 착각마저 느낄 정도였다. 난 영문을 모른 채 그의 등 뒤에 서게 되었고, 곧 버럭 소리치는 나이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이토 유즈루: 너희 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너희 다 잊었나본데, 우린 다 고등학생이야! 정규교육 코스도 제대로 못 끝냈다고. 알아?!
나이토 유즈루: 사람들이 초고교급이라고 띄워주니 세상 다 산 것 같아?! 적당히 해! 누굴 고문할 권리는 우리 중 누구에게도 없어!
토키와 아유키: 나이토 말이 맞아. 난 너희들 모두를 이끌기에는 능력이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포기는 하지 않아.
토키와 아유키: 난 누구도 버리지 않을 거야. 아까 올곧음이 리더의 자질 중 하나라고 했지? 사실 이건 단점이 될 수도 있어. 특히 지금처럼 서로의 의견이 갈린다면 올곧음은 고집, 나아가 편협함으로 변해버릴 수도 있지.
토키와 아유키: 그러나 난 편협한 리더가 될지언정 누군가를 버리고 가진 않겠어. 그리고 너희 모두 내 결정에 따라줬으면 해.
모리 레이코: 아니. 너희들의 미래관은 너무나도 낙관적이다. 그런 식으로는 절대 극한 상황을 헤쳐나갈 수 없어. 가시를 품고 가려고 아무리 노력한들 날카로운 가시는 언젠가 우리들의 배를 뚫을 뿐이다.
모리 레이코: 다들 이 문제를 감정적으로 보고 있다.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규명된 사실과 그를 통해 유추할 인과관계 뿐이다.
나이토 유즈루: 감정적?! 지랄하네. 진짜. 남의 일이라고 말은 쉽다지만 쉬워도 너무 쉽잖아. 이 미친 새끼들아!
나이토 유즈루: 너희가 히무로로 만족할 것 같냐? 절대 안 그럴 걸? 얘 수상하네. 조지자. 얘도 수상하네. 조지자. 수상한 사람을 다 조지려다가 개판이 나 버릴걸?
야가미 토가: 억측입니다. 저희는 충분히 이성적인 추론에 따라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나이토 유즈루: 그래서. 히무로를 고문하겠다고?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얘가 무슨 고문하면 정보 뱉는 기계냐? 얘도 사람이야. 그리고 너희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 좆도 없어!
모리 레이코: 칸트주의인가. 참 귀찮게 됐구나.
이바라 쿠리스: 깐프주의? 그건 또 뭔데?
모리 레이코: 칸트주의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에 기반을 두는 학파지. 결과보다는 의무와 의도를 중시하는 의무론적 윤리학이다.
모리 레이코: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 의무이기에 이뤄진 행위만이 도덕적인 가치를 가진다, 인격은 존엄하다, 의도만으로 행위를 평가해야 한다.
모리 레이코: 그리고, 모든 행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해야 한다...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칸트주의다. 정보를 위해 누군가를 고문하는 일은 보편적인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없겠지. 그래서 반대하는 건가?
나이토 유즈루: ......어. 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모리 레이코: 수상한 공백. 의심이 가는군. 되는대로 둘러댄 인상이 강하다.
나이토 유즈루: 아오. 필요 없어! 보편적 인법인지 뭔지 그게 중요해?!
모리 레이코: '입법' 이다.
나이토 유즈루: 그게 중요하냐고! 칸트든 칸쵸든 칸막이든 뭐든. 중요한 건 무고한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자세. 올바른 마음가짐. 그리고 의지! 이것 뿐이야! 그리고...
나이토 유즈루: 씹. 준비한 대사가 다 떨어졌어! 아무튼 내 눈앞에서 누굴 죽이거나, 다치게 하거나, 고문해야겠다면. 내 시체를 밟고 가라아아아!
후루미나미 나몬: 그 말에 찬성이야!
나이토의 외침에, 후루미나미가 왁스를 사용해 재빨리 정수리의 머리카락을 위로 높이 세우고 그를 거들었다. 그 다음 순간 그녀는 급조한 더듬이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손바닥으로 쓸어내려 없애버리고, 다시 사냥모자를 쓴 뒤 곰방대를 물었다.
야가미 토가: 제정신이십니까? 그것 때문에 히무로 씨에게서 중요한 정보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버리시겠다고요?
야가미 토가: 카텟 기관이란 곳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경우, 나나시 씨의 과거 행적과 23T 씨에 대한 상세 정보까지 전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카이다 쿠로하: 그래. 너흰 화도 안 나냐? 갑자기 이런 말도 안 되는 곳에 떠밀려와서, 친구들이랑 잘 지내보려고 했는데 살인 게임이니 뭐니...
카이다 쿠로하: 게다가 그 비디오... 모노로그 새끼의 정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밝혀내야겠어. 그러니까 비켜!
카나리 케이토: 야. 너희들 중 저 자식 입 여는 데에 협조해주는 사람은 각각 1만 달러씩 나눠주지. 그러니 저 자식 잡아. 잡아!
카나리 케이토.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는 아버지의 낯을 잊은 자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명예도 도덕도 잊어버린 자들. 변질한 세상에 따라 마음이 변해버린 자들. 금수. 반대로.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모두가 아버지의 낯을 기억하고 있었겠지.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모두가 아버지의 낯을 기억하고 있었겠지. 그러나 인류는 이런 상황에 놓여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낯을 잊었다. '옛날 우리가 알던 세계가 있었으나 그 세계는 변질하고 말았다'. 그건은 진실이다."
"맞아... 그래도 세계를 재건하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야. 미래기관이라던가..."
"미래기관은 사람들에게서 신뢰를 상당히 잃었을 텐데?"
"그래. 그 얘기 들어보긴 했는데... 그거 찌라시 아니었어? 미래기관이 신뢰를 잃다니 나로서는 상상이 잘 안 가. 여전히 미래기관은 세상을 재건하는 데에 가장 큰 공헌을 하고 있잖아."
"믿기 힘든 얘기겠지만, 미래기관은 이전의 한 사건을 계기로 과거의 위상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많은 이들에게는 정의로 보이지만 모든 이들에게는 정의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확실한 요인이 하나 있었고, 불확실한 요인이 하나 있었다. 미래기관의 간부들이 살인 게임을 강요당한 사건. 기억 나나? 그 사건 이후의 진상 조사에 따르면 미래기관의 간부 중 폭도가 섞여 있었다는 것이 발각되었다. 그것도 전 희망봉 학원 77기생과 큰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지. 그 인물이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간부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는가? 혹시 그녀의 정체가 은폐된 것은 아닐까? 논란이 생겼다. 과연 미래기관이 폭도로부터 안전한 조직이라 할 수 있는가. 의문이 생겼다."
"그렇지만 내부의 적은 찾아내기가 어렵잖아. 그리고 폭도는 어디에나 존재해. 누구나 폭도로 돌변할 수 있어."
"그래. 불합리하지. 그러나 이 사건은 언젠가는 잠식될 논란이었다. 어차피 그 간부도 죽었으니 이후 폭도의 색출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만 보였어도 미래기관은 충분히 평판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 또 다른 논란과 합쳐지며 잠재울 수가 없게 되었을 뿐이지. 미래기관이 신뢰를 잃은 더 큰 원인은 확실한 요인이 아니라 불확실한 요인에 있다."
"불확실한 요인...?"
나는 시라유키 히메리에게 문서를 하나 건넸다.
"탐독을 권유한다. 한 초고교론자의 서적에서 발췌했다. 난 이들의 사상을 따르지 않으나 견문을 넓혀서 나쁠 것은 없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태라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날 적으로 여기지 않겠지만... 이 부분만 읽어도 음모론을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글씨체 완전 또박또박하네... 이거 손글씨 맞아?"
"맞다."
"두 번째 희망봉 학원의 학원장이 누구인지에 대한 소식을 듣고 나는 초고교급의 완전한 죽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 세상은 초고교급보다 우월한 자만이 구원할 수 있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가 희망봉의 학원장으로 있는 한, 초고교급은 상징이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초고교론은 본래 나에기 마코토를 지지했다. 알파걸을 패배시킨 그의 심볼리즘이 사회에 미친 영향을 고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기관의 간부들이 살해되는 사건 이후, 그를 희망의 상징이라고 부르기엔 그가 폭도들과 같은 편이라는 증거가 너무나도 많다. 나와 의견을 같이하는 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안다.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겠다. 그리고 나에기 마코토가 완전히 결백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라면 이 글을 읽고 우리 사이에 숨어있는 적은 누구일지 숙고해주길 바란다.
미래기관의 간부들의 살인 게임을 계획한, 전 희망봉 77기생들은 나에기 마코토가 미래기관의 규율을 어겨가며 생존시키려 한 자들이다. 그가 규율에 따라 77기생을 처분했다면 참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만으로 그는 9명의 사망, 1명의 잠적, 1명의 실종, 1명의 빈사를 초래한 실질상의 흑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극도의 위험인물인 오메가마저 이젠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그 책임은 더더욱 무겁다.
전 초고교급 학생이었던 미래기관의 간부들은 평소 급진파와 온건파의 갈등이 있었으나 세상의 정상화에 큰 공헌을 했다. 반다이 다이사쿠의 농경법이 아니었다면 아사자의 수가 지금의 5배는 족히 넘었을 것이라는 분석 자료도 그들의 능력을 증명한다. 그들의 상실은 무엇으로도 보상될 수 없다. 그러나 나에기 마코토는 이후 미래기관에서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어째서인가?
간부들이 한 곳에 모인 계기가 나에기 마코토의 처분 결정 회의였다는 점 역시 의미심장하다. 너무나 편리하다. 77기생들이 나에기 마코토를 구조하기 위해 미래기관을 급습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즉. 나에기 마코토는 이미 폭도들의 편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동료인 77기생을 처분하지 않았고, 77기생은 위기에 처한 자신들의 동료인 나에기 마코토를 구하기 위해 미래기관의 간부들이 서로 죽고 죽이게 만든 것이다.
나에기 마코토의 결백을 주장하는 자들이 '베타걸' 의 행방에 대해 어떻게 증언하는가 역시 그들의 거짓말을 반증한다. 그들은 베타걸이 모종의 이유로 우주로 떠났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어찌 그것을 믿을 수 있는가? 놀랍게도 미래기관은 그것을 믿었다. 나에기 마코토에게 협력하는 자들이 미래기관의 수뇌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노쿠마 생산의 배후이자 알파걸의 후를 이었기에 베타걸이라는 이름을 얻은 그녀가, 미래기관의 간부를 살해할정도로 치밀한 그녀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최후를 맞았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는 말인가?
베타걸은 행방불명 된 것이 아니라 잠시 퇴장한 것일 뿐이다. 쫓긴 것이 아니라 쫓기는 상황을 연출한 것일 뿐이다. 당시 베타걸을 '쫓은' 사람은 누구인가? 나에기 마코토의 동료, 그리고 나에기 마코토의 동생이다. 윤곽이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가? 전부 연출에 불과하다. 77기생의 탈주, 나에기 마코토의 생존, 살인 게임, 그리고 베타걸의 행방불명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폭도들의 핵심 세력은 잠시 우리들의 눈앞에서 사라진 뒤 심연에서 힘을 키우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 궐기의 순간이 온다면 인류는 내부의 적을 잠재울 수 없을 것이다. 그 때야말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초고교론자들은 두 번쨰 희망봉 학원을 거부한다. 나에기 마코토를 둘러싼 의혹이 확실히 해소되지 않는 한, 나에기 마코토와 미래기관을 맹목적으로 신뢰하거나 그들에게 세계의 재건을 맡길 수는 없다. 사람들이 의지할 대상으로서는 더더욱 성립될 수 없다. 상징이 될 수 없다. 초고교급은 죽었다. 죽어 있다. 우리가 죽였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를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
"초고교론자들은 분석가들보다는 음모론자들에 가깝다. 이 논평 또한 무척 과장된 어조로 쓰였다. 그러나 일부분은 사실이다. 고장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맞는다지. 미래기관 간부들의 살인에는 배후가 있다. 최소 간부급의 누군가가 배신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논평 전에도 간부들의 살인 게임과 관련하여 미래기관을 의심하는 가설과 단체는 존재했다. 초고교론자들은 그저 일부일 뿐이다."
"그 사건도 이제 몇 년이나 됐는데, 하아... 만약 이 말도 안 되는 문서가 사실이라면. 아니. 사실이 아니어도 큰일이야. 이제 그 초고교급 희망조차 믿지 못하는 사람이 생길 테야. 그런 사람들이 뭘 믿을 수 있을까? 다들 이제 반쯤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 같아. 메마르고 건조하게..."
"의지할 대상이 사라졌으니 회의주의와 허무주의가 창궐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몰락 이후 대부분의 종교들이 상당히 쇠퇴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아직도 종교에 의존하고 더욱 심취하여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자들도 있으나, 맹목적으로 종교를 믿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의 허구성과 그것의 실체를 봤다. 사회의 근간에 있던 기독교적 가치들. 믿음, 용서, 봉사는 퇴색되고 상실되었다. '신은 죽었다.' 논평에서도 니체의 이 문장을 인용했지. '초고교급은 죽었다' 라고. 초고교론은 이것 말고도 니체를 자주 인용하곤 했다. 그러나 왜곡시켰지."
"왜곡시켰다니. 어떻게?"
"니체 철학의 근본 개념인 위버멘쉬(Übermensch)는 주로 '초인' 이라고 번역되곤 했다. 그렇기에 생겨난 오해지. 위버멘쉬는 본래 기존의 도덕관념과 가치를 넘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는, 강하고 능동적이며 야심 있는 결단자를 칭하는 말이다. 신이 죽었기에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신의 역할을 하는 초인이 아니다. 그러나 초고교론은 이 위버멘쉬라는 개념을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진, 그렇기에 사람들을 통치하고 새계를 재건할 초인으로 해석했다. 초고교급을 뛰어넘을 수 있는 초인으로, 그에 따라 초고교론은 이 시점에서 완전히 변질되었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수순일까? 대몰락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뇌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잡은 불신은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모든 것이 그 정도로 변질되었던 것일까?
유전자에 동물적인 불신이 스며들 정도로? 정말 세상이 의지할 곳 없이 추락해버린다면 그 자들의 생각이 결국 옳았던 걸까... 난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이 그 정도로 안 좋게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저기. 난 카나리만큼 부자인 건 아닌데, 그래도 돈은 꽤 있으니까... 쟤네가 히무로 잡으려 할 때 도와주면 2천 달러씩 줄게.
마유즈미의 말에 나는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아직 표본이 부족해서인지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그녀에게서 본 것은 고작 압박적인 가정환경, 매체와 정보를 통제당하는 상황, 보수적이고 전통 중시적인 부모, 감금의 가능성 높음, 의무교육 이수하지 못했을 가능성 높음.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기대감과 그보다 훨씬 큰 두려움 뿐이었다. 표본이 턱도 없이 부족했다.
칸나즈키 시노부: 사실, 굳이 그럴 필요 없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 그런데 카나리 쪽에 사람들이 안 붙네. 잡으러 오지도 않고.
당연한 일이다. 저런 금전을 통한 매수가 제대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제안을 받는 자들이 심한 혼란에 빠져 있어야 했다.
어떤 심리 실험에서도 피험자들이 자신이 있는 환경을 직시할 시간이 최소 몇 일은 필요했는데, 우리는 만난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 카나리는 너무 이른 시간에 자신의 패를 공개한 셈이다.
야가미, 모리, 카이다는 날 심문할 명확할 의사가 있는 것 같았으나 그들도 상황을 살펴볼 정도의 이성은 갖추고 있었다. 카나리에게 돈으로 매수되는 자가 없다는 건, 그들이 결국 수적 열세에 몰리게 되리라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차라리 야가미처럼 이성적인 논거를 제시했다면 몇 명을 설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카나리 덕분에 나를 심문해야한다는 주장 자체에 모두가 반감을 가지게 된 모양이다. 그의 생각이 짧아서 다행이었다.
아무도 자신을 따르지 않자, 카나리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마유즈미를 향해 소리쳤다.
카나리 케이토: 너... 너 지금 나한테 돈으로 승부를 건 거냐?!
마유즈미 나데시코: 스, 승부 건 거 아니야! 그냥 받아치기 한 거야!
카나리 케이토: 그게 승부 건 거야! 감히 내 자존심을 건드리다니. 반드시 후회하게 해 주겠... 앗. 이 시계가 또...
카나리는 가슴께에 걸려있던 회중시계를 들어올리더니 손목의 시계와 비교해가며 시간을 맞췄다. 대체 왜 시계를 두 개나 들고 다니는 거지?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선 표본이 더 필요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엥? 왜 시계를 두 개씩 들고 다녀?
...아니면, 그냥 물어볼 수도 있고.
카나리 케이토: 이 대단한 시계 말이지? 하. 내가 직접 만든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게 시계 두 개 가지고 다니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카나리 케이토: 내 말 중간에 끊지 마아악! 아무튼. 이건 내 심장 박동수를 감지해서 돌아가지. 어지간해선 속도가 변하지 않는데 심장이 너무 빨리 뛰면 속도가 변해. 그러면 손목시계와 시간을 비교해서 원래대로 맞추는 거야. 알겠냐?
마유즈미 나데시코: ...뭘 알아? 그러면 왜 회중시계를 수고스럽게 가지고 다니는 건데? 그냥 손목시계 하나만 들고 다니면 일일이 맞출 필요 없잖아.
카나리 케이토: .........닥쳐.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카나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멋쩍게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진중한 얘기를 하고 있다가도 이런 결론 없는 잡담으로 방향이 변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놀라움을 느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야. 진짜 너무해!
후루미나미 나몬: 심장박동 시계라. 그것 참 트릭에 쓰이기 좋은 설정이네.
카나리 케이토: 뭐라고?
후루미나미 나몬: 내 예상대로라면 아마도... 아니야. 이 얘기는 신경쓰지 말아줘.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까.
후루미나미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저 기묘한 화법도 연기의 일종인가?
하기와라 우시오: 쟤 이제 큰일 났다. 하하핰!
하기와라는 웃으면서 엄지로 자신의 목을 쭉쭉 긋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것을 보다 못한 야가미가 대화의 핸들을 잡고 반대편으로 한 바퀴 돌렸다.
야가미 토가: 알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그를 고문하지는 않더라도 심문해야하는 필요성 말입니다. 왜 반대하시죠?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 그건...
하기와라 우시오: 그야 지금 당장 히무로가 흑막이라는 증거는 없으니까 그렇지. 증거라고는 칸나즈키가 한 말 뿐인데... 사실 칸나즈키도 히무로만큼이나 좀 오락가락하잖아.
야가미 토가: 그가 흑막이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으므로 알아내야 한다고 했죠.
이바라 쿠리스: 아으아. 말장난 좀 그만 해 얘들아! 머리 아파 죽겠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장난으로 하니까 더 어려워!
하기와라 우시오: 네가 말장난을 그렇게 잘해? 그래 네가 초고교급 코미디언 해라. 나쁜 새끼. 서민경제 파괴자, 까마귀튀김 장인, 사탄 클로스, 몽골 제국 공군 사령관...
야가미 토가: 말장난이 아닙니다. 이 표현의 차이는 무척 중요해요.
나이토 유즈루: 야. 그냥 다 필요 없어. 드루와. 날 꺾고 지나가 봐. 드루와!
야가미 토가: 그럴 수 밖에 없다면야. 총을 맞고도 살아남기 위해 단련한 육체지만 이런 식으로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군요.
후루미나미 나몬: 라운드 원. 파이트! 듀얼 개시!
후루미나미가 이번에는 선글라스를 쓰고 심판처럼 경기 시작을 선언하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선글라스를 벗고 다시 진중한 표정을 되찾았다.
부지런하기도 하지... 당장이라도 주먹을 주고받을 분위기던 나이토와 야가미 사이에 하기와라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어허! 친구들끼리 싸우면 쓰나! 자. 악수하시고. 듀얼은 카드로 하는거지 물리적으로 하는 게 아니야.
하기와라 우시오: 그리고 좋은 흉기 냅두고 왜 주먹으로 싸우니? 흉기 섭섭하게. 창고에 흉기 널렸으니 나중에 너희 둘이 알아서 순대를 보든, 피를 보든 알아서 하셔.
하기와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내뱉었으나, 그 내용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도리카와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의 의아한 음성은 그의 회색 마스크 안에서 맴돌았다.
미도리카와 아쿠토: 흉기가 창고에도 있다고...?
토키와 아유키: 흉기?! 그래. 창고... 내가 왜 창고를 찾아볼 생각을 못 한거지? 내 실책이야...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뭐. 실책까지는 아니지. 나도 막연히 생각한거야. 모노로그가 우리더러 서로 맨손으로 대가리 쳐서 죽이라는 건 아닐 테니, 이 탑 어딘가에 흉기가 있을 거고. 창고를 뒤져보면 하나쯤 나오겠지... 그냥 이 생각 뿐이었어.
토키와 아유키: 하기와라. 창고 안에 무슨 흉기가 있는지 기억나?
하기와라 우시오: 꽤 있던데? 식칼 있고. 목 조르기에 좋은 로프 있고. 긴 칼도 있고. 망치도 있고... 만물상이야. 만물상. 말이 창고지 넓기는 존나게 넓어요.
미도리카와 아쿠토: 안에 총기류는 없는 거지?
하기와라 우시오: 내가 찾아봤을때는 그랬어. 깊이 뒤져보면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못 찾았을 뿐일지도 모르고.
미도리카와 아쿠토: 그래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야.
토키와 아유키: 이런... 모두들. 이야기가 대강 정리되면 창고로 가자. 흉기를 정리해야겠어.
야가미 토가: 흉기를 처리하는 일은 중요하죠. 동의합니다.
나이토 유즈루: 나도 동의. 흉기는 진짜 위험해. 우리 아빠도 연장 든 사람 앞에서는 가오 부리지 말고 사리라고 말씀하셨거든.
야가미 토가: 좋은 가르침을 받으셨군요.
나이토 유즈루: 고마운데, 고문 같은 개소리 좀 하지 말자. 응?
카나리 케이토: 지금 중요한 건 흉기가 아니잖아. 이 멍청이들아. 저 꼬마가 하는 말 못 들었냐? 거짓말을 하고 있다잖아.
카나리 케이토: 저 꼬마가 아까 있었던 폭격을 예지한 것처럼 이번에도 맞을 거라고. 또라이여도 초고교급 무당인데 점 하나만큼은 잘 보겠지. 안 그래?
칸나즈키 시노부: 우와! 너 내 말 믿어주는 거야? 엄청 기쁘다!
저렇게 보면 그저 평범하게 낙천적인 고등학생인데, 어떨 때는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점쟁이라... 확실히 신통력이나 영적인 독립체에 대해서는 나도 문외한이었다. 그녀와 면담을 가지고 분석해볼 기회가 생긴다면 좋겠지만 이런 상황에 뜬구름이나 잡고 있어선 안 되리라.
카나리 케이토: 친한 척 하지마! 꺼져!
칸나즈키 시노부: 헐. 심하다 증말! 무당 일에 무당 믿어주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데...
하기와라 우시오: 카나리 어린이. 칸나즈키 어린이랑 사이좋게 지내야죠.
하기와라는 허리에 양손을 얹고 율동을 하듯 무릎을 살짝 굽혔다 펴기를 반복했다. 나긋나긋하고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조와 그 동작이 합쳐져 상당히... 우스꽝스러웠다.
카나리 케이토: 이 자식이 지금...!
하기와라 우시오: 그리고 카나리 어린이. 칸나즈키가 뭘 제대로 예지한 건 그거 딱 한 번 뿐이야. 그 다음부턴 그냥 적당히 말대꾸만 했잖아. 니들 진짜로... 아니. 풉. 미안. 푸흡. 킥킥...
하기와라는 입에 주먹을 대고 웃음을 참으려고 애썼으나, 결국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배를 붙잡고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다 쿠로하: 뭐가 그렇게 웃기냐?
하기와라 우시오: 푸하하하! 아니 이게 무슨... 어아하하하! 진짜 미치겠네!
하기와라의 큰 웃음소리는 한순간에 모든 이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웃음이 나올 만큼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그 웃음은 이질적이었고, 그 이질성에 시선이 이끌렸다.
그러나 나조차도 그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낀 이유는 그의 안면 움직임과 제스처에서 나타나는 정보에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비꼬는 웃음이 아니라, 정말로 웃긴 것을 봤기에 웃고 있었던 것이다.
이바라 쿠리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하기와라 우시오: 아하하! 너흰 이게 안 웃기냐? 사람들이 초고교급 학생들 두고 뭐라고 부르는 지 알지? 미래의 희망이다. 나라의 미래다. 어쩌구저쩌구 난리도 아니야. 그런데 지금 우리 꼬라지를 봐. 돌팔이의 말 한 마디에 다들 난리도 아니잖아. 이렇게 좆도 아닌 우리가 '미래' 라니. 쪽팔리지도 않냐!
야가미 토가: 저희는 카나리 씨처럼 칸나즈키 씨의 말을 신봉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말이 계기가 되어 히무로 씨의 수상한 점을 발견했기에 그를 추궁하려는 겁니다.
카나리 케이토: 말 똑바로 해! 내가 얘를 왜 신봉해?!
하기와라 우시오: 넌 아닥하고. 그래. 맞는 말이야. 히무로맨이 많이 수상쩍긴 해. 무슨 이세계에서 온 사람 같아. '맛있다' 라는 개념도 모를 것 같다고. 그치?
히무로 시라베: 그런 개념은 나도 알아.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 의외네. 그럼 이런 한담은 그만 즐기고... 굳이 지금 여기서 고문이나 심문을 할 필요는 없잖아.
하기와라 우시오: 여기서 말싸움이나 계속 하고 있을 바에야 흉기 조사 끝내고, 흰 물건이란 것도 찾아보고, 히무로 전용실도 뒤져서 정보도 알아보고, 그 다음에 뭘 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겠어?
카나리 케이토: 그 사이에 이 자식이 도망치면?
하기와라 우시오: 도망을 어디로 치게? 애초에 탑 안에 갇혔는데. 그리고 섣불리 떨어졌다가 오히려 히무로 본인이 희생자로 찍힐지도 모르니. 그럴 일 없어. 내가 하는 말은 히무로를 내버려두자는 게 아니야. 그냥 덮어두자는 게 아니라고. 굳이 지금 해야 하냐고 묻고 있는거지.
모리 레이코: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
하기와라 우시오: 애초에 오늘 할 일이 아니라니까? 아무튼 난 심문보다는 그냥 조금 더 물어보기만 하다가 다같이 창고로 가야한다는 입장인데. 설마 나같은 빡대가리도 아는 걸 너희들이 모르지는 않겠지. 그치?
토키와 아유키: 하기와라 말이 맞아. 심문은 지금 시점에서 너무 이르고, 너무 과격해. 우리는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거야.
토키와 아유키: 그러니 카텟 기관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것을 더 질문해 보고, 그 뒤 창고로 향하자. 히무로의 처우에 대한 얘기는 일단 여기서 끝내고.
카나리와 카이다는 납득하지 못한 눈치였으나, 그들도 결국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암묵적으로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야가미는 그저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지막 한 명은 토키와의 제안에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모리 레이코: 아니. 끝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이고. 그러시겠죠!
후루미나미 나몬: 모리는 연재분 하나 분량을 넘게 계속 떠들었는데 아직도 할 말이 남은 것 같네?
하기와라 우시오: 너는 이상한 소리 그만 하고...
토키와 아유키: 모리. 네 신중함은 이해가 가. 분명 언젠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거고. 그러나 지금은 창고의 흉기와 흰 물건이 더 급해.
토키와 아유키: 마무리짓고 싶은 일이 있겠지만, 일단 여기선 한 발자국 물러나자. 어때?
모리 레이코: 타협은 없다... 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확실히 흉기들은 엄중하게 관리돼야 하겠지.
모리 레이코: 알겠다. 그러나 이후 프로파일러는 자신의 전용실을 공개해야 할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너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테니.
나이토 유즈루: 휴우...
후루미나미 나몬: 다들 수고하셨어요! 다음 주에 만나요!
나이토는 그제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후루미나미는 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저 행동은 무슨 뜻인지 생각하고 있기엔 시간이 아까워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모리 레이코: 이래서 칸트주의자는... 쯧. 그놈의 선의지 때문에 늘 공리의 증진을 가로막지.
하기와라 우시오: 됐고. 히무로 아저씨. 이제 말씀 좀 들어보자. 내가 여기서 역전앞재판 찍어줬는데 설마 여기서 입 꽉 닫진 않겠지? 믿고 있다구!
후루미나미 나몬: 맞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너는 알고 있겠지? 히무로 군.
하기와라 우시오: (나에 대한 모두의 인상이 더 나빠진 것 같다...)
히무로 시라베: 내 목소리 따라하지 말고. 하기와라.
하기와라 우시오: 좋아. 그 카펫이랑 커텐 섞어놓은 기관에서 뭘 하는 건데?
마유즈미 나데시코: 인테리어 전문...?
히무로 시라베: 카펫이나 커튼이 아니라 '카텟' 이야. 카텟 기관.
하기와라 우시오: 거참. 단어를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아주 난리가 나네! 그까짓 카텟이 뭐라고!
"시라유키 히메리.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경험이 아니므로 네가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좋아! 뭔데?"
"카텟 기관의 '카텟' 은 무슨 뜻이지?"
"카텟? '카' 를 통해 하나 된 사람들이라는 뜻이야."
"자동차를 통해 모인 자들이란 뜻인가. 카텟 기관의 시초가 자동차 동호회라..."
"아니! 뭔 소리래! 너 가끔 되게 순진한 면이 있어!... '카' 는 사명, 또는 숙명, 또는 운명, 가지 않으면 안 될 곳이라는 뜻이야. 기관원 모두가 하나의 숙명 아래에 모인 공동체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관 이름이 이렇게 지어졌어. 내가 카텟 기관 창립 멤버 중 하나라서 아는 거야."
"숙명으로 모인 자들이라..."
"카텟은 여럿이서 하나 된 자들. 같은 카를 공유하는 자들이야. 카텟은 죽음과 배신을 통해서만 부서진다고 말하지만, 내 견해는 좀 달라. 카텟은 운명이 만들어낸 인연과도 같은 건데, 어떻게 그런 게 쉽게 부서지겠어?"
"카텟이 부서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부서진다는 표현 자체가 카텟에 쓰기는 부적절하달까... 죽음과 배신이 있다고 한들 그것 역시 하나의 운명이야. 카라는 이름을 가진 바퀴의 바큇살에 불과해. 그러니 카텟은 절대 부서지지 않는 결합인 거지. 아무리 멀리 떨어져도, 큰 역경을 만나도, 심지어 죽더라도 카텟은 부서지지 않아."
히무로 시라베: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건, 내가 기억하는 카텟 기관이 이런 범죄와 연루되어있을 조직은 아니라는 거야.
히무로 시라베: 오히려 이런 범죄를 막는 조직에 가깝지. 나도 카텟 기관이 날 구조해 준 것을 계기로 카텟 기관에 합류했어.
카나리 케이토: 야. 어때?
칸나즈키 시노부: 좋아!
카나리 케이토: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저 놈이 한 말이 거짓말이냐고 묻는 거잖아!
칸나즈키 시노부: 그걸 눈으로 보자마자 알았으면 내가 돗자리 깔았지...
카나리 케이토: 너 무당이잖아. 멍청아! 이이익... 정말 쓸모없는 것들밖에 없다니까!
히무로 시라베: 조용히 ㅎ... 그러지 말고.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것들만 알려줄테니 천천히 들어 줘. 거짓말이라고 치부해도 상관은 없지만 그래선 아무런 논의도 제대로 되지 않을거란 점 유념하고.
카나리가 조용해지자-심통이 난 얼굴로 팔짱을 끼긴 했지만-난 카텟 기관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히무로 시라베: 카텟 기관은 아까 내가 말했듯이 범죄를 막는 일을 해. 나는 그 곳에서 범죄자들과 면담을 하거나 여러 자료들을 분석하는 직책을 맡고 있어. 행동 패턴들, 심리 구조들,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그것을 막기 위해선 어떤 조취를 취해야 하는지 연구하고 있었지.
히무로 시라베: 가끔 현장 임무도 나가긴 했는데 그건 옛날 일이야. 여러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내가 소속된 지부의 얼굴마담만큼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고.
이바라 쿠리스: 그래서. 결국 넌 기관에 있어서 꽤 중요한 인물이란 거네? 여러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
나나시: 그거. 히무로가 그 카텟 기관이라는 곳의 간부라는 뜻 아니야? 학생인데도?
히무로 시라베: 나는 간부가 아니야. 아무리 실적이 좋아도 단기간에 간부까지 올라갈 수는 없어. 게다가 기관 안에는 아직 날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 역시 충분히 많지. 간부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따로 있어.
난 실수로라도 메리의 이름을 섣불리 거론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히무로 시라베: 다만 카텟 기관의 강경파가 날 강경파의 얼굴로 내세우고 있을 뿐이야. 강경파는 능률주의 성향이 강해서, 좋은 성과만으로 신뢰를 얻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
야가미 토가: 꼭 다른 방법으로는 신뢰를 얻을 수 없었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히무로 시라베: 맞는 말이야. 기관원들은 나를 반기지 않았어. 내 출신 문제도 있었고, 또...
하기와라 우시오: 텃세가 심했구나! 꼰대질도 심했고!
히무로 시라베: 그런 단어가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의 비슷해. 그래도 기관에 처음 들어갔을 때 보다는 많이 나아졌어.
히무로 시라베: 내 개인적인 얘기는 재미 없으니 여기까지 하고. 질문 있어?
나나시: 응. 나 있어. 나는...
히무로 시라베: 너는 카텟 기관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었냐고? 나도 아직은 몰라.
그것만큼은 진심이었다. 난 그를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은 들었으나 어디서 봤는지는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프로젝트와 관련된 인물일까? 그럴 수도. 내가 당장 카텟 기관에서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는 것은 프로젝트에 대한 일이었다. 그가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집합에 엮인 소집합이라면, 집합을 떠올리지 못하니 소집합 역시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리라.
나나시: 앗...
히무로 시라베: 정말이야. 나도 답답해. 널 어디서 봤는지 기억한다면... 아니. 애초에 내가 너와 만난 적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겠어.
23T5U130: 전 압니다. 두 분은 만나신 적이 있습니다.
또 존댓말... 23T의 말에 나나시는 눈을 크게 뜨고 그것에게 물었다.
나나시: 정말이야?! 그럼 난 카텟 기관 소속이야?
23T5U130: 맞아. 그것도 꽤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지. 너도 눈치챘겠지만 엔지니어였어. 괴짜 취급 받기도 했지만 실력만큼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지.
23T가 말을 한 마디 끝낼 때마다, 나나시의 눈이 기대감과 놀라움으로 빛났다. 그는 자신에게 기억이 없다는 것에서 두려움과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으니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캐롤 브라이트: 잘 됐네요. 나나시 씨! 당신 스스로에 대해 알게 되어서요.
나나시: 네! 23T. 알려줘서 고마워. 나 진짜 불안했었거든. 이대로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하면 어쩌지. 하고...
23T5U130: 앞으로 너는 여러 일을 기억하게 될 거야. 그게 너의...
23T의 음성이 부자연스럽게 툭 끊겼다. 그것이 당황한 듯이 자신의 입을 만져 보았다. 물론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23T에겐 입이라고 불릴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음성이 나오는 곳은 평평한 마네킹의 얼굴이었지, 발음에 따라 움직이는 입술이 아니었다.
23T5U130: 말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네... 미안해.
나나시: 엄청 도움이 됐는걸? 진짜 고마워.
나나시: 맞아. 이거 대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난 어떤 사람이었어? 23T. 알고 싶어.
"넌 아무것도 아니야! 말 그대로!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왜인지 알아? 넌 그냥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하니까! 그러니까 내 앞에서 썩 꺼져!"
잠깐의 침묵 끝에 23T는 이렇게 전했다.
23T5U130: 너는 커다란 슬픔을 가지고 있었어.
그 뒤 중요한 정보는 더 나오지 않았다. 23T의 말에 의아함을 느낀 나나시가 23T에게 자신의 이름을 물었으나 23T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한 때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나나시의 정체는 무엇이기에 모노로그는 나나시의 이름마저 우리가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나는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더 큰 수수께끼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나시는 그래도 조금이나마 자신에 대해 알게 되었다며 기쁜 눈치였다. 그가 만족한 기색을 보이자 토키와가 카텟 기관에 대해서는 이후 히무로의 전용실까지 찾아본 뒤 본격적으로 이야기하자며 대화를 정리했고, 우리는 창고로 향하게 되었다. 그 곳으로 향하는 도중 궁금한 점이 생겨 마유즈미에게 물었다.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아까 왜 그런 행동을 한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무슨 행동?
히무로 시라베: 나를 도와주는 사람에게 금전을 지급하겠다고 선언한 거.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 그거 말이구나. 뭐... 너 좋은 사람 같은데 카나리가 돈으로 다른 애들 매수하려 하니까? 옳지 않은 일 같으니까? 잘 모르겠네. 아무튼 했어.
히무로 시라베: 나는 그런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 묻고있는 게 아니야. 날 변호한다고 네가 특정한 이득을 얻지는 않아. 그런데 너는 나를 변호했어. 그 구체적인 동기를 묻고있는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게... 꼭 필요해?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야.
히무로 시라베: 그냥? 그게 이유라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사실 별 생각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그러고 싶었어. 널 지키고 싶다던가 불의를 보면 참을 수 없다던가. 그런 거창한 게 아니라. 그냥 그러고 싶었어. 내 마음대로.
"낙타는 순종한다. 자신의 등에 실린 짐에 의문 하나 가지지 않는다. 규율과 부조리에 순종하는 이들은 낙타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사자는 거부한다. 사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스스로와 무리를 책임진다. 독립적이고 남에게 따르는 일을 거부하는 이들은 사자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어린 아이는 즐긴다. 어린 아이는 잊는다. 과거를 잊기에 연연하지 않고 앞을 바라본다. 언제나 자신의 삶을 즐기고 긍정한다. 그들에게 삶이란 노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가장 위대하다."
이 말에 따르면, 나는 낙타이다.
히무로 시라베: 그런 관점은... 생각하지 못했는데.
마유즈미 나데시코: 엥? 그래도 너도 그냥 행동하는 일이 있지 않아? 왜 그랬냐고 누가 물으면 그냥. 하고 대답할만한 일들. 그냥 내 마음대로 하는 일들 말이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물론 나도 내 집에서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없지는 않을 거 아니야. 그치?
히무로 시라베: 아니. 없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도 참 별났구나... 그럼 앞으로는 가끔 네 마음대로 해 봐. 말이 되는 이유 없이 그냥 네 기분대로. 나도 이런 엄청난 일에 휘말려버렸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내 마음대로 해 볼 거거든.
그녀의 말에 나는 이런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히무로 시라베: 정확히... 뭘 하는 게 내 마음대로 하는 거지?
창고에서 흉기 처리를 끝내면 23T에게 나에 대한 사실을 조금 더 물어봐야겠다... 는 생각을 가진 채, 아까보다 약간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작게 들려오는 모리의 목소리를 들었다.
모리 레이코: 여기 정도면 괜찮겠지.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렇게 대책 없이 그녀를 싫어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녀가 싫은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날 계몽시키려는 목적이었다곤 해도 안면 발차기를 시도하다니. 너무하지 않은가!
토키와 아유키: 모리. 나에게만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곧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가 저절로 기울여졌다. 모리랑 토키와? 그러고보니 아까 모리가 토키와에게 할 얘기가 있다며 그를 데려갔었다. 토키와는 영문도 모른 채 그녀에게 끌려가며 미안하지만 창고 앞에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했고...
어딘가 꺼림칙했지만 모리가 사람을 함부로 죽일 사람은 아닐 것 같아서. 모두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기와라가 모리의 성대모사를 하자마자 우리들의 긴장은 완전히 날아가버렸던 것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걱정 마라. 이 극한 상황에서 모두를 이끌 리더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하다. 그를 해치는 일은 공리에 위배되는 일이지. 난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참고로 내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면...
후루미나미 나몬: 너 나한테서 자꾸 캐릭터성 훔쳐가려 한다?
하기와라 우시오: 뭐라는 겨.
설마 우리가 방심했던 건가? 설마... 설마. 나는 발소리를 죽이며 모리와 토키와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모리 레이코: 긴장하지 마라. 난 널 죽일 의도가 없다. 죽일 이유도 없고, 죽이려 했다면 이런 장소를 택하지도 않았다. 내가 누군가를 죽일 일은 없겠지만.
토키와 아유키: 죽인다. 죽인다 하니 무서운데... 그래서?
모리 레이코: 내가 리더. 너를 이 곳으로 부른 이유는 네 태도에 관해서 해야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토키와 아유키: 태도?
모리 레이코: 그래. 네겐 결단력이 충분하다. 아까 모두의 분쟁을 중재한 솜씨도 나쁘지 않다. 강단도 있고 올바른 성품을 가지고 있다. 나쁘지 않지.
모리 레이코: 그런데 유독 너는 누군가가 '몰리는' 상황이 되면 그 누군가를 두둔했다.
몰리는 상황이라면... 마유즈미, 미도리카와, 카이다, 히무로 얘기인가?
모리 레이코: 너는 서예가의 거짓말을 알아챘다. 프로파일러의 수상함을 알아챘다. 너도 그들의 이상한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그들을 두둔했다. 왜 그랬지?
모리 레이코: 네 행동이 그저 하찮은 감정론이나 밝은 미래관 때문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무척 묘하다.
토키와 아유키: 그게 옳은 일이기 때문이야. 그것 뿐. 난 리더로써 누군가를 버리고 가지 않아. 그래서는 안 된다고 배우기도 했고.
모리 레이코: 아니. 네 행동에는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심리적인 요인이다.
토키와 아유키: 그게 무슨...?
모리 레이코: 너는 좋은 리더가 되고 싶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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