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저게?"
나는 구급상자와 수혈팩. 아이스박스 같은 것들을 챙기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솔직히 히무로가 후루미나미를 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히무로에 대해 모르는 점이 많았다. 히무로는 아무리 선명히 보려 애써도 일부분만을 보여주며, 다른 것들을 그림자에 감추기 때문이다. 그믐달이 달이라는 행성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듯이.
그러나 히무로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여. 느닷없이 후루미나미와 함께 바닥에 넘어지는 것마저 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나는 보았다. 두 사람의 몸이 굳고 장미 꽃밭 위에 떨어지는 것을 탑의 창문을 통해 보았다. 나는 후루미나미가 그런 식으로 픽 쓰러지는 것에서 예전에 있었던 일 중 하나를 연상시켰다. 간접적인 터치에 감전된 후루미나미.
감전. 마치 보이지 않는 번개에 맞은 듯한 움직임이었다.
"결국 저렇게 된 건가."
모노로그. 내 등 뒤에서 솟아오른 그 목소리에 나는 대꾸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탈출 장치를 누른 거 아니야? 지금 내 눈에는 탈출구 같은 건 안 보이는데. 모노로그.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수작을 부린 게 아니다. 나 또한 저 물건의 사용을 막고 싶었다. 너희에게도 해가 되는 물건이었지. 내가 입수하는 것이 모든 이들에게 있어 좋은 일이었다."
"우리에게 해가 되면서 너에게 해가 되는 것이 가능은 해? 탈출 장치잖아. 넌 우리가 여기서 나가는 걸 막기 위해 탈출 장치를 입수하려 든 거고."
"원래는 탈출 장치라는 이름에 걸맞은 성능을 가지고 있었지." 모노로그는 웃었다. "하. 원래는. 그 당시에는 가장 골치 아픈 물건이었는데 이제 와선 재앙이 되어 버렸지. 아주 미약한 가능성을 제외하면 차라리 터지게 두는 편이 나을 정도로 말이다."
모노로그는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리고 있었다. 모노로그는 저렇게 수다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다. 날 도발하더라도 자기가 진행했던 다른 살인 게임에 대한 정보까지 털어놓을 리가 없었다. 구덩이를 파 두고 가짜 보석을 던지는 격. 내가 뛰어들면 그곳이 내 무덤이 되겠지.
"…무슨 꿍꿍이야. 모노로그. 왜 하필 지금 내 앞에 나타난 거지? 날 특히 싫어하는 네가."
"난 너희 모두를 혐오한다."
"물론 그렇겠지만 내 이름은 사라졌고, 내 기억도 사라졌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머리가 부서질 것만 같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기색 없던데 나만 이래. 의미도 별반 없었던 크레딧을 제외하면, 여기서 불이익만 당한 것 같은데."
"잘 아는군. 하지만 나는 자비로운지라 너에게 얼마든지 도움을 줄 수 있다. 전에 말했다시피, 네 기억을 지운 것도 내가 아니고 말이야."
그 수수께끼 같은 말을 차치하고. 나는 모노로그의 신경을 긁어 보았다.
"카이다가 많이 멍청해? 나한테까지 손을 벌리고."
내가 한심한 눈빛으로 모노로그를 보자, 모노로그는 혀를 쯧 하고 차는 듯한 소리를 냈다.
"왜 저 모양 저 꼴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더군."
카이다. 너도 너 나름대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거구나. 나는 어디에선가 또 죽을 쑤고 있을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고맙다고. 23T 다음으로 강하고 흑막의 도움까지 받고 있으면서 해낸 일이 없는 머저리라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무능한 적은 유능한 아군만큼이나 든든한 법이었다.
"난 내통자 할 생각 없어. 그건 멍청이나 하는 짓이야."
"야가미 토가는 너보다 명석하지만 내통자가 되었지."
"사람들은 가끔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는 일을 해. 에디슨은 오리알을 품었잖아. 그때는 그게 좋은 생각 같았지만 나중에 보니 아니었던 거지. 다 그런 식이야. 실수하고 싶어서 실수하는 사람은 없더라도 야가미는 실수를 했어."
"아니. 야가미 토가는 실수를 한 적이 없다. 그는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다."
"방금 내가 한 말이랑 똑같잖아. 나중에 보니 아니었던 좋은 생각. 아무튼 나는 내통자 안 해."
"너와 내가 협력한다는 것이 내통자라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너는 네가 알고 있는 누군가의 비밀이나 위험도 따위를 내게 알려줄 필요가 없다. 지속적인 도움이나 교류도 없다. 제안조차도 아니다. 나는 곧 열릴 새로운 동기에 네가 먼저 접촉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탈출 장치가 뭐인지는 몰라도 모노로그가 저렇게 다급해졌다면, 꽤 좋은 물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로 장미 꽃밭으로 향해 가려던 나는 등 뒤에서 이어진 모노로그의 말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캐롤 브라이트는 부활할 수 있다."
나는 두 번 묻지 않았다. 그 말은 잘못 들을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나는 고개를 돌리고 추궁했다.
"어떻게? 어떤 방법을 써서?"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모노로그는 그만큼 더 멀어졌다. 영악하긴.
"새로운 층이 곧 개방된다. 새로운 환경에 맞서 끝까지 도달해라. 그럼 캐롤 브라이트를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내게 이러는 이유가 뭐지?"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네가 거짓말을 그만두고 진실만을 말한다면 응하겠어. 가식은 이제 질렸어. 네가 원하는 바를 말해. 왜 지금 하필 내게 특혜를 주지? 말해."
"애초에 이건 특혜도 아니다. 다른 이들이 혼란에 빠진 사이. 두 시간 정도 먼저 네가 앞서 나가게 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 시간만으로도 넌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겠지만 이건 특혜라 할 수 없지. 도전할 기회는 여전히 너희들에게 있는데 갈무리할 게 너무 많아서 한눈이 팔리는 것이니."
"지금 당장 가면 앞서 나갈 수 있다? 좋아. 그러나 여전히 넌 내게 이럴 필요가 없어. 난 그 이유를 들어야겠어. 그러지 않는다면 아무리 절실한 미끼라도 잡지 않을 거야. 그냥 이 밑으로 내려가서. 갈무리나 하며 시간을 버리겠어. 너도 날 조종하지 못하면 손해를 보는 거지. 그러니 당장 내게 말해!"
"딕테이트는 내게 써봤자 쓸모가 없다. 이름 없는 남자. 난 기계니까."
나는 모노로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 무시해버렸다. 어차피 듣고 싶은 말은 그 직후에 왔다.
"네가 듣고 싶다면 말해주지. 저 탈출 장치는 수많은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최고의 아군, 최악의 적, 또는 광인. 현자. 좌절 또는 극복이 나타날 것이다. 이 시점의 대부분은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나겠지만 혹시 모르지. 나는 탈출 장치의 효과를 받은 히무로 시라베가 저지할 수밖에 없는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이다."
"캐롤 씨의 부활을. 히무로가 막으려 한다고? 왜지?"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나는 그 이유를 빠르게 떠올릴 수 없었다. 히무로가 캐롤 씨에게 원한이라도 가졌단 말인가. 어디에서 그녀를 봤다고?
그보다 더 의아한 점은 따로 있었다. 히무로의 개인적인 감정 따위가 아니었다. 애초에 히무로는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상반되는 입력값이 똑같은 결괏값을 내는 게 무엇보다 기이했다.
"탈출 장치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도 해가 될 수도 있다고 했지. 그런데 둘 중 누가 나올지 네가 알 수는 없어. 애초에 극단적인 선역과 악역이 아니라 중립적인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애매한 도움이나 방해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왜 넌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답은 이미 내가 알고 있었다.
"모든 경우의 히무로가 모두 캐롤 씨의 부활을 막는다고? 왜지? 그건 말이 안 돼. 상반되는 가능성들이 똑같은 사람을 왜 견제하는데?"
"그건 스스로 알아내야겠지? 자. 시간은 흐르고 있다. 네 추적자가 지금 깨어났군."
나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히무로가 보였다.
"너를 증오한다."
"이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이름 없는 남자."
"무… 무슨 일이야?" 토키와는 중얼거렸다.
"둘이 갑자기 쓰러졌어! 죽은 건 아니겠지. 그치?!"
"야. 돌팔이! 너 미래 볼 줄 알잖아. 저런 건 못 읽었냐?!"
하기와라의 말에. 칸나즈키는 아무도 듣지 못하는 사이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 아무것도 안 보여. 타. 탈출 장치… 뭐지…? 저것과 관련된 미래는 다 너무 불확실해…"
"그럼. 다른 미래는?!"
"재촉하지 말거라! 시노부는 지칠 대로 지친 게 안 보이나!"
"아오. 스탠드 주제에 뭐라는 거야? 말이나 해!"
칸나즈키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다가 문득 몸을 180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부활…?"
탑이 그곳에 있었다.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무슨… 소리야. 히무로?"
나는 히무로를 보고 물었다. 히무로는 몸을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무심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말 그대로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은 히무로를 처음 봤을 때 히무로의 눈보다도 더 차가웠다. 나는 곧잘 히무로의 눈에서 동물의 눈을 떠올리는데. 이유는 알 수 없다. 히무로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뜻은 아니지만 아무튼 히무로의 눈은 동물의 것을 닮았다… 좋은 의미에서.
그러나 탈출 장치를 누르고 눈을 뜬 히무로의 눈에서는 동물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 남을 관찰하는 히무로의 눈에는 곧잘 흔적을 찾고 먹이를 내려다보는 올빼미의 눈이 깃들고, 기분이 나쁠 때는 몸을 긴장시키고 턱을 벌리려는 악어의 눈이 깃들곤 한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히무로가 딱딱하고 굳은 무생물처럼 보일지라도, 매 순간순간마다 히무로는 살아 있었다. 투쟁과 반발은 오직 의지를 가진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눈은 살아 있지 않았다. 애초에 나를 살아 있는 것으로 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그게 무서웠다. 히무로가 풍기는 차가운 분위기와 손에 들고 있는 총이 무서운 게 아니었다. 히무로가 나와 23T를 보고 아무런 느낌도 받지 않는 듯한 모습이 날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나는 의문을 가졌다. 애초에. 아무런 느낌을 받지 않고 사물을 보는 게 가능한 일일까? 나는 아무리 값싸고 익숙한 것들이라도 그것을 신경 쓴다. 마루로 날아온 나비는 예쁘고 가냘프다. 하늘은 푸르고 넓으며 탁 트여 있다. 강아지풀은 생그럽고 또 귀엽다. 먹은 어둡고 깊으며 또 부드럽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는 몰라도, 히무로가 사람을 보며 눈이 텅 비어버리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까르르 웃는 귀여운 아기들이 자기 발치에 놓이더라도 그것을 툭툭 밀어내며 걸어갈 것처럼. 히무로는 탑을 바라보고 휘청이며 발을 내디뎠다.
"죄인들… 갈 길 잃은 죄인들."
"히무로. 방금 뭐라고 했어? 우릴 내보낼 생각이 없다니? 탈출 장치는 우릴 내보내기 위한 카텟 기관의 도움이잖아!"
"23T. 잠깐… 이 사람은 히무로가 아니야."
나는 히무로를 부축해주려다 말고 히무로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러면 히무로도 멈칫하거나, 적어도 나와 23T 쪽이 유리해질 거라 생각한 건데, 정말이지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겨누고 있는 사람은 나인데 나는 히무로가 물론 나보다 빠르리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방아쇠만 당기면 되고 히무로는 총을 들어 내게 겨눈 뒤에 방아쇠를 당겨야 했지만, 내가 더 느리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히무로가 아니라니. 마유즈미. 그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뭔가 이상해! 다른 사람 같아."
히무로는 역시 개의치 않는 듯이 날 물끄러미 보았다. 등 뒤에서는 친구들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중 가장 큰 것은 토키와의 외침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왜 그래?! 왜 총을 겨누고 있어!"
"토키와. 가까이 오지 마!"
23T를 따라 나 또한 토키와에게 무언가를 소리치려 했으나. 그러기에는 히무로에게서 한눈을 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느끼는 바: 탈출 장치를 누른 뒤 히무로는 히무로 같아 보이기는 하는데 도무지 히무로 같지가 않다를 말하자니 할 말을 정리하기가 어려웠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히무로? 대답 좀 해줘! 아니면 히무로 몸을 차지한 다른 사람이던가. 너 누구야? 지금 뭐 해?! 내 친구 내놔!"
"네 친구는 지금까지 널 기만해왔다. 네 가문이 이미 망했음을 알고도 네게 말하지 않았지."
다른 히무로는 그렇게 말했다. 난 그 말을 듣고 고개가 갸우뚱 기우는 것을 참았다. 그럼 조준이 흐트러질뿐더러,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이야기기 때문이었다. 나는 분명 히무로에게 말했던 것이다. 과연 마유즈미 가문이 멸망했으리라 생각하냐고. 정말 그랬으면 그건 정말…
같이 목욕하면서 했던 얘기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뭔가 온몸이 꼼지락거리고 가슴이 콩콩 뛰던 그 일을 나는 바로 어제의 일처럼 떠올릴 수도 있었다. 해선 안 되는 일탈은 즐거웠고 친구랑 같이 했기에, 며칠 동안 못 하던 목욕이었기에 더 즐거웠다. 남자랑 같이 씻었다는 걸 가문 사람들이 알면 아주 길길이 날뛰겠지… 여하튼 간에 히무로가 그걸 알고도 내게 말을 안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내게 상처를 남기지 않기 위해 말을 안 했다면, 그건 이상한 일이다. 히무로는 최대한 상처를 안 내는 길을 통해 내게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내가 알아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히무로가 할 법한 일은 바로 그것이었다. 왜냐하면 히무로는 내가 강해져야 함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나를 믿고 총을 맡겨 주었으며 모든 이들은 자라나는 과정에서 각자의 알껍질을 깨고 나와야 하고 제때 그것을 깨지 않으면 더 큰 빚이 되어 돌아옴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무로는 그걸 알 만큼 충분히 현명했다.
그러니. 히무로가 내게 마유즈미 가문의 멸망을 알고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흥! 안 믿거든요? 공갈 그만 치고. 히무로 어디 갔냐니까…!"
"목전에 있음에도 알아보지 못하나."
"아니! 히무로는 늘 다 같이 살아서 나가기 위해 노력해왔어. 우릴 내보낼 생각이 없다는 너는 절대 히무로가 아니야!"
다른 히무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내 말을 들은 척부터 하지 않았다.
"더 이상은 안 되겠어. 가까이 가야만 해. 탈출 장치에는 분명한 이상이 있어. 후루미나미도 쓰러졌고… 반드시 내가 해결해야 해!"
"히무로이드 저거 진짜 뭐하냐?! 야. 뭐 해!"
토키와와 하기와라가 달려오는 것처럼 장미꽃과 그 잎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더 육중한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부스럭 소리는 멈추고 말았다.
"잠깐 멈추시죠."
"아니 또 뭐야! 진짜 어지럽네. 내통자 어서 오시게!"
"야가미… 넌 결국 이렇게 나오는 거지."
야가미가 뭘 하고 있는 거야?! 두 사람을 막은 건가? 갑자기 왜 이래! 안 그래도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에!
"먹어본 놈이 더 먹을 거 밝힌다고. 야가미 토가. 이 근성 썩어빠진 놈아! 너 아까까지만 해도 같은 편이라면서 뒤통수치기야?! 너 진짜 가만히 안 둔다. 살인자!"
이바라가 표독스럽게 소리치자 야가미는 한숨을 쉬었다.
"하… 여러분 모두 진정 좀 합시다. 전 잠깐 멈추라는 말밖에 안 했는데 지레 겁을 먹으시긴요. 이건 다 같이 우르르 달려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 봤자 23T 씨가 지켜야 할 사람만 많아지죠. 표적이 늘어난다 이겁니다."
"그래서. 보고만 있자고?"
하기와라가 물었다. 그쯤 나는 생각했다. 뭐야. 꽤 먼 거리에서 한 말 아닌가? 나 귀가 왜 이렇게 잘 들리지? 무슨 히무로 같잖아. 어랍쇼. 나 좀 짱인가?
"보고만 있자는 게 아닙니다." 부스럭거리는 장미 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할 일은 해야겠죠. 여긴 제가 나서겠습니다."
"표적 늘어난다며!" 하기와라가 소리쳤다.
"하나쯤은 23T 씨가 어떻게든 해줄 겁니다. 그리고 전 총알 몇 발쯤은 버틸 수 있습니다. 급소에만 안 맞으면 되는 일이죠."
"총알 앞에선 몸의 모든 곳이 급소야!" 토키와는 당황해 소리쳤지만,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야가미 토가…" 다른 히무로는 말했다. 야가미는 한 발자국씩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사실 다른 히무로를 향해 다가간 것이리라.
"히무로 씨. 탈출 장치가 무슨 작용을 한 것이죠? 23T 씨가 다급하게 소리치고, 마유즈미 씨가 당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걸 보면 좋은 작용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너흰 그것을 알 자격이 없다."
"보이지? 히무로가 이상해. 탈출 장치를 누른 뒤부터 저런 것 같아. 마치 다른 사람처럼…"
"마유즈미. 우리 둘의 시각이 상당히 다른 것 같은데. 난 지금의 히무로도 다분히 히무로 같아 보여."
"엑?!"
23T의 말에 나는 소리쳤다. 야가미 또한 23T와 의견이 같았다.
"저도 똑같은 감상입니다. 저희에게 적대적이고 조금 더 무뚝뚝한 것을 제외하면 그와 같은 사람 같군요. 사실 제 입장에서야 이미 마주해본 사람입니다. 살인자를 상대로 히무로 씨는 결코 상냥하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누가 뒤통수를 망치로 세게 때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맞아. 히무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상냥한 것이 아니었다. 후루미나미에겐 거칠어질 수 있고, 살인자 앞에서는 가차 없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왜 난 그것을 잊어버렸을까. 내가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죽지 않기를 바라며 침울해지고 총잡이의 교리를 말해주던 히무로는 특별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도 히무로가. 그 히무로가 우리를 탑에서 내보낼 수 없다고 말하는 게 말이 돼? 탈출이 끝났다고 말하는 건 이상하잖아!" 나는 반론했다.
"정말 그렇게 말한 겁니까?" 야가미가 물었다.
"그렇다니까!"
"확실히… 어딘가가 이상하군요. 히무로 씨는 탈출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입니다. 히무로 씨 당신이 비밀을 숨긴 것과 거짓말을 하는 것도, 바로 그게 더 나은 길이기 때문 아니었습니까?"
"대몰락을 숨긴 일 말인가?"
"히무로!"
23T가 다른 히무로의 말을 가로막았다.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그걸 말해 버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알고 있을 텐데도…"
"탈출은 끝났다고 했을 터다. 왜 카텟 기관이 치안을 유지하고 범죄자를 잡아들이는지 알고 있나? 그런 독자적인 조직이 어떻게 국가 안에서 기능하는지 알고 있나?"
"대체… 무슨 짓이야?"
23T가 그렇게 동요하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야가미마저도 눈을 크게 뜨고 캐묻기 시작했다.
"대몰락… 뭐가 몰락했다는 겁니까? 히무로 씨. 얼마나 큰 몰락이었죠? 그 사건이 뭘 의미하느냔 말입니다."
대몰락.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23T는 그걸 알고 있었다. 아마 알고도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23T에겐 제약이 걸려 있으니까. 카텟 기관에 대해 아는 게 많아도, 모노로그의 한계나 약점에 대해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말이 나오지 않으니까.
그러나 다른 히무로는 대몰락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23T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다른 히무로는 말하고 있었다.
말할 수 있었다.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계속…?"
나는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다른 히무로는 날 보더니, 보기만 하더니,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더니… 말했다.
"지금 다 죽여야 하나…"
다른 히무로는 어느새 우리의 쪽으로 총을 겨누고 있었다. 나는 무슨 너구리한테 홀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분명 줄곧 다른 히무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을 텐데. 다른 히무로에게 총을 쏠 생각은 없었어도 그를 위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히무로는 우리에게 총을 안 쏘겠지만 다른 히무로에 대해선 잘 모르니까.
그런데 다른 히무로는 당연하다는 듯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팔이 움직였다면 분명 내가 봤을 것이다. 옷자락이 펄럭이던가 바람이 이는 최소한의 전조도 없었다. 다른 히무로의 손은 나나 여타 사람들이 숨을 쉬는 것처럼 움직였다.
나는 눈앞에 두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다른 히무로를 포함하여, 히무로는 압도적인 총잡이였다. 나는 히무로가 얼마나 빨라질 수 있는지 몰랐다. 그 총구 앞에 서 본 적이 없으니 알 도리가 없었다. 나에게 있어 히무로라는 사람은 '친구'라는 자리에서 불변하여 부동할 터였다. 그래서 히무로가 얼마나 탁월한지에 대한 공포를 느낄 일은 없을 줄 알았다.
히무로는 내 친구다. 나는 히무로가 처한 입장을, 히무로는 내가 처한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게 우리를 가깝게 만들었다. 이런 복잡하고 위험한 곳에서 히무로와 만날 수 있었다는 건 불행 중 크나큰 행운이었다. 분명 그를 아끼는 마음만큼이나 한 편이 되어주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으나… 나는 다른 사람들이 히무로를 무서워하거나 위험하게 여기는 것이, 무리는 아니라고 순간 생각했다.
"당신 지금 무슨…"
야가미가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디딘 순간. 있으리라 생각할 수 없던 그 일이 벌어졌다.
총성이 크게 울렸고, 야가미의 관자놀이 바로 옆에 총알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야가미는 죽지 않았다. 부상을 입지도 않았다.
눈을 크게 뜨고 보았을 때. 아주 얇은 피부층이 마찰로 인해 벗겨진 것을 보았다. 피가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 정도로 얇은, 방울토마토의 얇은 겉껍질보다도 얇은 상처였다. 다른 히무로는 의도적으로 그 정도를 스쳐 지나가게 쏘았다. 후루미나미 앞에서 경고사격을 했을 때완 달랐다.
다른 히무로는 우리에게 해를 입힐 의사가 있었고, 원한다면 우릴 죽일 수도 있었다. 섣불리 움직인다면 분명 그렇게 될 거라고. 나는 직감했다. 아무리 23T라도 총알보다 빠르진 못하다. 그 일이 벌어지면 나와 야가미는 저항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물론 일어날 리가 없지만… 내가 알고 있는 히무로라면 설마 그럴 리가…
"내 말을 못 들었나?"
다른 히무로가 물었다. 내 등줄기를 타고 한 줄기의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이마에서도 식은땀이 몇 방울 배어 나왔다. 다른 히무로의 말에 반문하거나 반론하기에 그 말은 너무 확실했다.
23T만이 동요하지 않으려 애쓰며 다른 히무로에게 말을 걸었다.
"…시체 발견방송이 울릴 텐데."
"세 명이 보기 전에 전부 죽일 수 있다."
"그런 게 가능할 것 같아? 아주 찰나의 순간이라도 세 명이 시체를 본다면. 그대로 넌 처형되는 거야! 그런 기본적인 것도…"
"규칙은 살해를 존중한다."
"그럴지라도 난 널 막을 수 있어."
히무로는 23T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부동자세를 유지했다. 23T는 가능한 한 확신에 차서 말했지만, 내 생각에는 23T마저 확신은 하지 못하는 걸로 보였다. 과연 총을 든 히무로가 우릴 다 죽이려 들면, 우린 그걸 막을 수 있긴 할까?
왜 우리를 죽이려는지조차도 알 수 없지만,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든든한 친구였던 히무로는 위협이 되어 버렸다. 나는 왜 히무로가 느닷없이 돌변하고 우리에게 이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불확실한 것들 투성이었다. 악몽인가? 하고 나는 얼빠진 생각을 했다. 내가 만류해왔던 일, 일어나지 않기를 누구보다 바랐던 것이 나의 눈앞에서 현실이 되어버렸다. 다들 경계해왔던 상상 속의 동물. 총으로 사람을 쏘려 하는 히무로가 내 앞에 있었다.
탈출 장치에서 비롯된 이 소동 속에서 내가 한 생각은, 그리고 간신히 입 밖으로 뱉은 말은 이 한 마디뿐이었다.
"그건… 불합리해."
"마유즈미 씨. 지금은 그를 자극하지 않는 편이…"
"넌 우리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 죽이는 거야? 그럼 네가 알고 있는 그걸 우리에게 말해줘야 해. 그렇지 않고서 무턱대고 우릴 죽이는 건… 불합리해. 너무 불합리해…"
야가미와 23T 모두 소리 하나 내지 못하는 동안. 나는 다른 히무로를 째려보았다.
"분명 그렇지. 너희에게도, 떠올리기 전의 나에게도, 불합리한 일이다."
다른 히무로는 그렇게 말했다. 내가 눈을 아주 잠시 깜빡인 동안 다른 히무로의 손은 그의 옆구리에 오게 되었다.
"…저희를 왜 죽이려 하신 겁니까."
야가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에 짓눌려 있다가 겨우 벗어난 사람이 말하면 저런 느낌일까.
"가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건 무슨… 아니… 그래. 이제 감이 잡혀. 당신은 아직 옳은 일을 구별할 수 있지. 그런데 지금 우리를…"
"넌 참을성이 많으니 참아라. 야가미 토가."
야가미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야가미는 어딘가 실마리를 잡은 것처럼 보였으나 다른 히무로의 말 한마디에 그 추궁을 그만두었다. 소외받는 기분을 느끼는 건 과민반응일까.
생각해보면 섭섭했다. 야가미는 히무로를 보며 어딘가 깨우친 기색을 냈지만,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마 자기가 뭘 알아냈는지 말해주지 않을 거다. 말하면 안 되겠지. 또다시. 언제나 그렇듯이.
후루미나미는 히무로에게 독대를 청했다. 히무로는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가까이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함께 고꾸라졌다. 당장 다른 히무로와 몇 척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후루미나미가 있었다.
나나시와 23T는 히무로와 같은 기관에 있었다. 하기와라는 히무로를 싫어하는 눈치였지만 그만큼 히무로의 미심쩍은 점을 잘 짚어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히무로와 친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히무로를 싫어하더라도, 경계하더라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용할 뿐이더라도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히무로와 얽혔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가 아무리 애써도 히무로와 가까워지기 어려운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히무로에 대해 착하고 상처 많은 사람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나를 걱정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히무로가 숨긴 비밀이나 우리를 죽이려 든 이유는 몰랐다. 알 도리가 없었다.
이야기를 나눠 보자. 그런다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야기를 나눠 보자. 히무로. 그런다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다른… 아니. 똑같은 히무로에게 말했다.
"안 된다."
"아…"
히무로는 풀이 죽은 것처럼 보였다. 해변에서처럼. 내가 우릴 다 버리고 갈 생각이냐고 물었을 때의 히무로처럼. 눈물이 메말라버렸지만 그럼에도 시도는 해보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어째서인지 히무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중에 누군가는 그래야만 했다고, 히무로가 아무리 거부한다고 할지라도 달려들고 귀찮게 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으면 대화를 나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탑을… 탑을 봐야 한다. 탑의 높이를…"
그러나 그 당시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히무로가 탑에서 등을 돌리고 휘청거리며 걸어갈 때도, 왜 그러냐고 묻지 못했다.
그대로 히무로가 멀어지기를 기다리고 이후에 안전히 다가갈 수도 있었겠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히무로… 으윽. 너 진짜!"
나는 알아야 했다. 내 몸은 이끌리듯이 히무로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왜인지 히무로를 가만히 내버려 두면, 영영 붙잡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내가 앞에 있는데 누굴 죽이니 마니 하는 것도 싫었고, 대놓고 해치겠다고 총을 쏘는 것도 싫었다. 왜 그런 건지 이유를 캐묻지 않고서야 아 저기 히무로 가네 하고 보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유즈미 씨. 지금은 그가 혼자 움직이게끔 두는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야가미가 뭘 알고 있든 상관없었다. 아무튼 나는 그 자리에서 내 인생 동안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을 했던 것이다. 술래잡기. 상대랑 내가 둘 다 총을 가지고 있고 히무로가 뭔가에 씐 듯. 불안하고 어지럽게 걸어가는 점만 빼면 충분히 술래잡기처럼 보였다.
아니. 술래잡기를 해 봤던가? 해 봤던 것 같지만 아마 아닐 터였다. 나랑 해줄 사람도 없었고. 그러니 인생 첫 술래잡기가 좀 이상한 셈이었다. 얼마 걷지도 않고 나는 걷는 일에 애로사항을 느꼈는데, 이는 내 긴 치마폭에 장미의 가시가 얽혀 일종의 결초(結草)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낭패감을 느낀 채 점점 더 멀어지는 히무로를 보고 있다가, 홀스터에 44구경을 꽂은 채 치마폭을 양손으로 잡았다.
게다를 신고 있었으면 몇 배로 더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에 그만 가슴을 쓸어내리고 싶어졌다. 계속 도망치게 둘 순 없다는 생각에 나는. 이윽고 히무로를 향해 크게 소리치기로 했다.
"히무로오오오! 어딜 그렇게 가! 더 가봤자 아무것도 없다는 건 알잖아!"
내 말을 들은 것인지. 히무로는 우뚝 멈추고 몸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장미를 조심스럽게 밟으며 히무로에게로 다가갔다.
주머니 속의 다이얼로그가 시끄럽게 울리자. 원체 긴장하고 있던 나는 그 자리에서 팔짝 뛸 뻔하기까지 했다. 나는 전화를 받으며 몇 번씩 히무로를 힐끔거렸다. 그러지 않으면 또 어디론가 쪼르르 가 버릴 것 같았다.
"여보세요? 나 지금 바빠!"
누가 전화를 걸었는지도 확인을 안 했음을 받고 나서야 깨달았다. 다급하고 당황한 목소리. 다이얼로그에서 날 꾸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유즈미! 괜찮아?!"
이바라였다.
"이바라! 나야 괜찮지.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 있긴 뭐가 있어! 지금 네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이지! 뭐 해?!"
"히무로 쫓아가고 있어. 어디까지 가려고…"
"히무로가 총 쏜 거. 여기까지 들렸어! 그런데 지금 히무로를 따라간다니? 너 지금 총 가진 사람이 이상한 짓 하는 걸 따라가고 있는 거야!"
"그…렇지?"
내가 얼빠지게 대답하자 이바라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럼 멈춰. 마유즈미! 네가 봐도 심상치가 않잖아. 모든 게 이상하단 말이야! 안전한 점은 어디에도 없는데. 네 몸을 아껴야지!"
"괜찮아. 걱정 마. 다 괜찮을 거야." 나는 이바라를 안심시켰다.
"어어어. 안 돼. 안 된다고! 너 더 말하지 마… 내가 통화하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하지 마! 죽기라도 하면 진짜 미워할 거야. 절대로 용서 안 할 거야! 그러니… 잠깐. 나 통화하고 있잖… 어어. 야!"
다이얼로그 너머에서 옥신각신.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목소리의 주인이 바뀌었다. 경쾌하고 신나는 목소리로.
"다이얼로그 도둑 납십니다. 마유즈미! 우리 적당히 좀 합시다. 피리 부는 히무로도 아니고 지금! 저 새끼 정신 나간 거 안 보여? 슬슬 방아쇠를 막 당기잖아!"
"우릴 죽이니 마니 하고 있었어. 내가 알고 있는 히무로라면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아… 정상적인 경우라면. 모든 걸 떠올린 게 아니고서야…"
23T는 하기와라의 옆에서 중얼거리는 듯했다. 나는 등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하기와라는 이바라의 다이얼로그를 낚아챈 뒤 달려오고 있었다. 한 자리에 멈춰 서서 히무로를 바라보는 야가미의 모습이, 이상하게 눈 귀퉁이에 밟혔다.
"아무튼 나도 그쪽으로 갈 테니 멈추고 있어 봐! 아니. 멈추라니까? 계속 걷지 말고!"
하기와라가 다가오기 전. 나는 히무로에게 44구경을 겨눈 채 서서히 히무로에게 가까이 갔다. 히무로는 내게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그 얼굴은 탑을 향해 있었다. 우리가 갇혀 있는 살인 게임의 무대. 끝을 알 수 없는 그 탑의 끝을 쫓듯이 히무로는 고개를 젖혔다.
"히무로."
"나다."
"그냥 그렇게 도망치면, 아까 일이 없었던 일이 될 것 같아?"
"언젠가는 모두 의미 없어지리라."
나는 저런 간결한 단답이 대화의 몸통을 자르고 죽게 둔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냥 늘 히무로가 하듯이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좀 이상해진 히무로도 본론만 말하는 건 여전했고, 심지어는 특히 더 심했던 것이다.
"…나 너 미워. 아니… 이대로라면 미워할 거야. 그러니까 아까 왜 그랬는지 순순히 말해. 안 그럼 미워."
"실망해 마땅하지. 기대할 가치가 없으니…"
아.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히무로는 한층 더 침울해졌다. 나는 사과나 해명을 들을 생각이었지 히무로가 더 깊이 침몰하는 걸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미워하지 않을 거라며 슬슬 구슬리기엔 해둔 말이 있었기에… 나는 물어봐야 하는 걸 물었다.
"왜 그러는 거야. 히무로…?"
히무로는 떨리는 손으로 탑을 가리켰다.
"저걸 봐. 탑이… 탑이 끝도 없다."
"응?"
"탑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몇 층이지? 천 층이 넘는 건가? 그렇게… 그렇게 길단 말인가?"
나는 히무로가 히무로가 아니라, 다른 히무로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건… 이건 잘못되었다. 손 쓸 수 없이 크게 잘못되었어…"
눈동자가 떨리고, 입이 닫히지 않으며, 몸이 수축된 히무로.
그 모습은 영락없이. 히무로가 겁에 질린 듯한 모습이었다.
사람 말을 하는 가재 괴물이 우글거릴 때도, 카이다가 달리는 자동차 위에 올라타 우릴 죽이려 들 때도, 기관총 두 개와 미사일을 가진 야가미와 싸울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히무로는. 내 눈앞에서 숨길 수 없는 동요의 기색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나마저 동요하게 되었다.
히무로를 겁에 질리게 만들 만큼 두려운 게 존재한다는 사실이. 나를 섬뜩하게 긴장시켰다.
"히무로. 괘… 괜찮아…?"
나는 그렇게 물었다. 백치나 할법한 일이었다. 당연히 괜찮지 않은데 뻔한 걸 묻는, 모자란 나. 내가 할법한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은 직후. 나는 대답 없이 혼잣말을 늘어놓는 히무로를 바라보았다. 다이얼로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마유즈미! 제발 니미 썅. 이바라가 너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기나 해?! 뭐 하자는 짓이야 이게! 23T 너도 정신줄 잡아! 인공지능이라면서 왜 얼을 타?"
"마, 말 안 해도 알아! 마유즈미. 일단 돌아와. 어서!"
"잠깐. 더 나은 걸 물어볼게. 히무로… 높이가 왜 중요해? 왜 탑의 높이를 보고 그렇게 무서워한 거야?"
나는 다른 사람이 날 막기 전에 히무로의 반응 중 가장 석연치 않은 것에 대해 물어봤다. 왜 히무로는 탑의 높이를 보고 겁에 질린 것인지가 문제였다.
"네가 탑의 마지막 양심이래! 그런데 네가 정신을 못 차리면 어떻게 해! 나이토가 어제 죽었어. 하루 만에 이바라 가슴에 대못을 박게 두진 않을 거다!"
"모노로그. 너는 대체 누구냐…"
그러나 결국 히무로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서서히 고개를 내렸다.
"우리 중의 누구지…?"
하기와라의 목소리는 다이얼로그를 넘어서. 충분히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떨어져. 떨어지라고! 히무로한테서 떨어지라고. 마유즈미! 빨리!"
그 뒤로 벌어진 일들은 정말 어지러웠다.
"히무로…"
"저 놈이 언제 또 돌변할지 모른다니까!"
"지금은 히무로에게서 떨어져야 해. 아까 봤잖아!"
하기와라와 23T가 그렇게 소리친 것에 이어. 나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던 후루미나미는 어느새 깨어나. 턱없는 말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시뮬라크르, 모든 게 시뮬라크르다. 크라르. 크라르. 이건 영등 태양이냐. 축의 흔들림으로 인한 진동이었다. 만물이 축을 섬기니. 그토록 고요한. 크라르. 우리는 모두 스스로 행동에 열중하는데 그건 운동과 마찬가지다. 열심히 해야 하지. 눈물도 나지만 이번 주에는 일요일이 두 개야.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해안 산맥 빙하 화산 당가 사천오백육십삼 방위들 속 새로운 방향성의 제시자가 규정했던 공식들을 규정한 이름이 조니 그러나 계속 운동만 열심히 하지 가령 투쟁, 경쟁, 반항, 반향, 반란, 시위, 운동, 희생, 공중부양, 결투, 자아실현, 성취, 극복, 성장,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데 그 이유는 인류를 위한 일이야 그러나 결국 미완성. 여전히 아무것도 미완성…"
그 모든 말뜻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나는 멍하니 후루미나미 쪽을 보았다. 히무로의 변화. 그리고 원래 이상했던 후루미나미는 더 이상해졌다. 탈출 장치가 대체 무슨 물건인지 생각하고 있는 와중 히무로는 또 입을 열었다.
"번개를 맞은 것이다. 정보의 번개다. 원래는 전류여야 했다. 그러나 너무 축적되었던 거야. 크지 않은 부작용은 효과를 덮어버렸다. 떠올렸다. 너무 많아."
"정신병동이 되어버렸네. 아주 그냥…"
다이얼로그에서 나쁜 말이 들려왔다. 애써 웃어넘기려 하는 하기와라였지만, 나는 하기와라의 목소리에 꺼림칙한 두려움이 담겨 있다는 걸 눈치챘다. 심지어는 하기와라마저도 눈앞의 상황이 무서웠던 것이다.
"여긴 지옥이야. 그래서 좋아… 아하하. 아하하하. 나 만을 위해 준비된 지옥이다. 그래. 바로 그거였어! 탑에서 사는 기한! 미완성!"
후루미나미는 공중에 뜬 모빌을 보는 신생아처럼 까르르 웃으며, 그 팔을 위로 뻗고 무언가를 붙잡고자 하고 있었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일들이었다. 애초에 이런 일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제 주저앉고 쉬어도 된다는 허가를 주었다. 그럴 만하지 않던가? 아무튼 나는 열심히 했던 것이다. 그러던 도중…
나는 입을 뻐끔거리며 간신히 발을 내딛고 있는 히무로를 보았다. 그런 히무로를 보고 나 또한. 한 걸음을 더 가까이 다가갔다.
"히무로!"
"캐롤 브라이트는… 부활해선 안 된다."
그게 히무로가 기절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나와 모두는 상황을 수습했다. 일단 탈출 장치는 위험한 물건으로 분류하고 23T가 관리하는 식으로 합의를 거쳤다. 애초에 탈출 장치의 버튼은 다시 돌출되지 않고 푹 들어간 그대로였기에 다시 작동할 일은 없겠으나.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히무로의 총은 내가 가지는 것으로 했다. 토키와는 본인이 가지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나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우리끼리 옥신각신하기에는 너무 할 일이 많아서 토키와는 내 소지권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홀스터를 두 개 차자니 몸이 무거워진 느낌이 들었다.
히무로는… 23T가 들쳐맸다. 후루미나미는 야가미가 옮기기로 했고.
"왜 접니까?" 야가미는 물었다.
"몰라서 물어?" 토키와는 웃음기 없이 되물었다. 야가미는 저주받은 사람한테 손을 대는 것처럼, 내키지 않음을 숨기지 않았다. 머리 옆의 피 한 방울을 한 손으로 닦아내며 야가미는 후루미나미를 업어 들었다.
"칸나즈키 씨는 대체 어딜 간 겁니까? 덕분에 제가 이런 번거로운 짓을…"
"뜬금없이 왜 그래. 후루미나미도 일어나면 살인자가 자기한테 손댔다며 질색할 걸? 아니… 얘라면 좋아하겠네. 농담 아니라 진심."
"전 이 사람한테 손 대기가 싫습니다."
"왜. 미친놈 알레르기 있어? 아닌데. 그럼 지금까지 멀쩡했을 리가 없는데?"
"진지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냥 싫습니다. 저도 그럴 권리는 있지 않습니까? 전 솔직히 히무로 씨가 후루미나미 씨의 관심을 전부 사 주는 것이 고맙습니다. 이 사람이랑 같은 무대에 서면 무조건 끝이 좋지 않을 테니까요."
"맞말이긴 한데… 너 머리 그거 괜찮긴 한 거야?" 이바라가 일말의 걱정을 담아 물었다.
"괜찮습니다. 지금 저희가 할 일은 우선 탑에 돌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어쩔 심산이죠. 토키와 씨?"
"히무로와 후루미나미가 깨어나면 탈출 장치가 무슨 일을 해서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봐야 해. 물론… 제정신이라는 가정 하에서 말이야."
토키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기와라는 못내 웃어보았지만, 아까 하기와라의 반응을 생각해보면 진심이 아닐 터였다.
"흐흐. 다 제정신 아닌 것 같던데? 후루미나미 말하는 것좀 봐. 시뮬라크르. 인류를 위한 일. 미완성이니 지옥이니… 그냥 23T한테 물어보면 안 돼?"
"미안하지만, 나도 흰 물건의 모든 효력에 대해서 알고 있지는 않아."
"알고 계셨다면 저런 물건을 쓰게 두진 않으셨겠죠. 탈출 장치라는 이름인데 저런 효능이라니… 정말 알 수가 없군요." 야가미가 말했다.
"23T. 정말 몰라?"
나는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최대한 날카롭게 물었다. 23T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얼굴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3T가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우린 알 수 없다. 23T는 우리의 아군이니까. 카텟 기관에서의 도움이니까 의심도 안 했다.
"아까 히무로가 대몰락이라는 말을 했지? 넌 그 말에 대해 알고 있었어. 왜 그 점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려고 하는 거야?"
"…그냥 넘어가려고 한 적은 없어. 마유즈미."
그러나 나는 히무로가 이미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으며, 그건 23T 또한 마찬가지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속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대몰락이라는 단어는 분명 느낌부터가 좋지 않았고, 그 단어가 히무로의 입에 올랐을 때 23T는 크게 놀란 바 있었다. 이 단어에 막 달라붙어서 재촉하는 것부터가 명확한 진실을 향한 한 발걸음일 터였다. 분명 그럴 것 같았다.
"대몰락? 뭐야 그 대공황 같은 건."
"야가미 너도 마찬가지야. 아까는 무언갈 알아낸 것처럼 더듬거리더니 참으란 말 한 마디 듣고선 추리를 멈췄잖아. 내가 바보로 보여? 뭐… 할 말은 없지만! 더는 숨기지 마!"
야가미는 내 말을 듣고 천연덕스럽게 눈을 크게 떴다.
"전 그저 단순한 추측을 했을 뿐입니다. 정말 별것 없는 추측이요. 말할만한 가치도 없군요."
"그래도 말해 봐. 야가미. 23T 너도 마찬가지야. 우린 지금 서로 알고 있는 걸 공유해야만 해." 토키와는 고맙게도 내게 가세해 주었다.
"…제가 한 추측은, 히무로 씨가 우리를 죽이는 건 불합리하다는 마유즈미 씨의 면박을 인정하는 것에 토대를 둡니다. 이를 통해 그가 정당함이나 옳음이라는 가치를 우리에게 살의를 품으며까지 기억하고 있음을 도출해 보자고요."
"누굴 죽이려 들면서 옳음을 따진다고? 미친 소리…"
"미친 소리 같다면 반론을 해 보시죠." 야가미는 이바라의 말을 차갑게 잘랐다. "감성적인 것 말고 논리적으로 말입니다. 당시 히무로 씨에겐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그래. 논리적 반박 까짓거 내가 해준다!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그렇게 숨겨왔다던. 뭐? 대몰락. 그 얘기를 하진 않았겠지. 마유즈미 가문이 망했다는 소리도 안 했을테고… 아."
이바라는 말을 잇다가 날 흘끗 보았다. 그 얼굴에는 이런 글씨가 쓰여 있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마유즈미가 앞에 있는데.
"미… 미안해."
"아. 아냐. 난 그 얘기 안 믿으니까 그렇게 미안해하진 마!"
내가 애써 가슴을 당당히 펴며 말하자 이바라는 머쓱하게 두 손을 모으고 꼼지락거렸다. 표정은 조금 침침해져 있었다.
"아까 전화하다가 죽으면 가만히 안 둘거라 한 것도 그렇고. 내가 요즘 왜 이렇게 예민한 건지 모르겠어. 진짜…"
"아이 참. 괜찮대두!"
"논리적 반박이나 계속 하시죠." 야가미가 훈훈해지려는 분위기를 깼다. 이바라는 날 향한 미안함이 곧 야가미를 향한 적대감으로 치환된 것처럼. 야가미를 쏘아보았다.
"그래야지. 아무튼 히무로가 방금 한 일은 이전의 히무로와 모든 면에서 다르단 말이야. 감추고 있던 비밀을 드러내고 우릴 지키다가 죽이려 들고. 우호적인 관계를 완전히 부숴서 믿지 못하게 만들었잖아. 그런데 옳음은 인식하고 있다니? 인식하고 있다면 우리한테 그러진 않았겠지!"
"…그래요. 당신 말이 맞군요." 야가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야가미가 순간 입을 열려다가 주저하고, 입을 다물고, 찰나의 순간동안 할 말을 재단한 뒤에 다시 말하는 것을.
내가 착각한 것일수도 있고 야가미는 그냥 오리발을 내밀면 그만이었다. 따라서 어려운 추궁일 테지만 나는 그럼에도 추궁하고 싶었다. 이야기의 주제가 23T를 중심으로 옮겨가지 않았다면, 그래서 모든 이들에게서 야가미를 둘러싼 의구심이 픽 꺼져버리지 않았다면 나는 시도라도 해 보았을 테다.
"그래서 대몰락은 뭔데?" 하기와라가 물었다. 23T는 자신을 둘러싼 시선을 느끼고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한 손을 자신의 이마에 올렸다. 신기할 정도로 사람 같은 행동이었다.
"얘는 기계면서 얼도 타고 머리도 부여잡고 다 하네. 너 골통 까봐. 이거 백퍼센트 슈트다. 안에 사람 든 거야. 슈퍼히어로 랜딩부터 알아봤어!"
"좀 닥쳐줄래. 하기와라… 내가 그 점에 대해서는 좀 예민한 사람… 아니 기계라."
"사람? 아니 이게 왜 진짜임! 그런데 방해 전파를 맞고 뻗는 건 왜 그러는 거야? 슈트가 멈추는데 못 움직이니 뻘쭘해서 10분동안 입닫고 있다가 슈트 움직이면 그제서야 정신 든 척…"
"농담은 그만하고. 23T에게서 대몰락에 대해 듣자." 토키와는 흐름을 자신에게로 끌었다. 23T는 고개를 저었다.
"대몰락은 모르는 편이 나아."
"아는 편이 낫지. 23T. 우린 언제까지나 여기서 서로 죽고 죽이며 살 수 없어. 이 탑에 오며 우리 모두는 대몰락에 대해 잊었는데. 그건 모노로그에게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으니까야. 우리가 알면 안 되니까 우린 대몰락을 잊어버렸어!" 토키와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토키와 씨? 진정하시는 게…"
"…진정?" 토키와는 진정하지 못하는 듯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제약이 걸려 있어. 거짓말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 당연해. 나 같아도 편리하게 대몰락을 숨기려 모노로그가 제약을 건다고 주장하는 거라 생각할 거야. 그렇지만 사실이 그래. 난 너희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내가 먼저 말할 수 없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 너희들이 스스로 이해하거나 전파하지 않는 이상 내가 그 사건에 대해 말할 순 없어. 간접적으로 전할 수는 있어도… 내가 화두를 여는 건 불가능해. 지금 내가 대몰락이라는 단어를 말할 수 있는 것도 히무로가 먼저 언급해주었기 때문이야." 23T가 말했다.
"모노로그 씨가 제약을 거는 건 사실입니다. 제가 보증하죠."
"네가 어떻게 보증해?" 이바라는 삐딱하게 물었다. 나는 멍하게 생각하다가 박수를 짝 하고 쳤다.
"야가미 너도 제약에 걸렸구나! 그치!"
야가미는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고 다만 웃었다. 앗싸가오리! 맞췄다!
"그럼 우리가 추측하라고? 잠깐잠깐. 그럼 이렇게 하자. 우리가 추측하는 게 맞으면 엄지 위로 들고 틀리면 아래로 내려. 이거 하루종일 반복하면 대충 갈피가 잡히겠지… 아니 근데 이거 바거수 아녀?"
"그런 식으로 알려주는 건 가능해. 하지만 내가 아까 말했다시피… 그건 우리의 생존에 있어서. 모르는 게 더 나은 일이야."
"우리 수수께끼가 거기에 달려 있는데 모르는 채로 있으라니. 말도 안 돼. 23T! 제발 알려줘. 그거에 대해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어!"
나는 왜인지 절박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했다.
난 마유즈미 가문이 멸망했는지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단순히 내가 살아왔던 터전들. 내 가족들. 나랑 놀아준 사용인 분들이 사라졌느냐 아니냐 말고도 다른 문제가 있었다.
히무로가 대몰락에 대해 알고, 내 가문의 흥망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내게 말을 하지 않고 숨겼느냐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알고 싶었으나, 순간 의구심이 들었다. 내가 이걸 알아야 할까? 벌집을 쑤시는 건 아닐까?
나랑 히무로 둘 다에게 상처가 되는 거 아닐까? 내가 가문이 망했다는 사실을 들으면 충격을 받을까 봐. 무너질까 봐 날 배려한 걸까? 그럼 내가 그걸 버텨내지 못할 거라 판단한 거잖아?
배려받은 걸까 아님 무시당한 걸까.
"그냥 나한테 물어봐."
"윽!"
후루미나미는 장미 꽃밭에 털썩 떨어졌다. 야가미가 후루미나미를 바닥에 내팽개친 것이다. 하기와라와 토키와에 이어 자연스래 대화에 참여한 후루미나미는, 눈을 멀뚱멀뚱히 뜨고 기지개를 펴며 일어섰다. 이상하게 차분해 보였고, 곧이은 목소리 또한 조금의 당황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음… 좀 혼란스러운데."
"하하하! 야가미 좀 봐. 그냥 후루미나미를 바닥에 내버리네. 와하하하학!"
"놀랐으니 어쩔 수 없지요. 미안하게 됐습니다. 후루미나미 씨. 정신은 좀 차리셨습니까?"
"어. 응. 그보다 야가미 너는 잠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옷 좀 벗자. 히무로한테 총 좀 다시 주고… 또 뭘 해야 하지?"
야가미를 비롯해. 우리 모두는 눈가를 찡그렸다. 후루미나미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적어도 예전에는 위험하고 조금 미쳐 있었지만 영특했던 후루미나미가. 비이성적인 말을 쏟아내는 등 고장 나버린 건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렇게 똑똑했던 사람이 어쩌다가… 아휴.
"다들 왜 그래? 잠깐. 난 미친 게 아니야. 오히려 지금은… 너무 제정신이라 어색할 정도라고. 강제로 이성을 주입당한 느낌이라 해야 하나? 하… 이거 광기를 조금 머금기에는 시간이 걸리겠는데."
"아무리 봐도 여전히 미친년 같다."
"후루미나미. 또 도망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플라잉 로봇을 부르는 것보다 더 우리가 널 붙잡을 수 있으니까."
토키와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품 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아마 겨드랑이나 옆구리 쪽이 가렵거나 하는 이유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왜 그리 날 경계해? 난 대몰락이 뭔지 다 설명해줄 건데. 자. 일단 너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본 영상. 전부 무언가가 망하거나 파괴된 장면이 담겨 있었지? 친구가 죽고, 중동에는 내전, 가문의 몰락, 또 뭐 있더라? 아무튼. 그 모든 건 대몰락이라는 커다란 사건으로부터 파생된 거야. 히무로는 지금까지 그걸 숨겨왔고. 진짜루."
"그 말은 못 믿겠어. 네 입에서 나온 말이니까."
"하지만 난 진실을 말하였소. 그래. 받아들이기 어렵겠지. 히무로가 왜 거짓말을 하느냐 혹은 히무로는 거짓말을 했으니 잡아 혼쭐을 내야 한다 싶을 수도 있으나. 나의 이야기를 전부 들으면 여러분도 깨닫게 될 게야. 역시 히무로를 좋아하게 된 건 탁월한 선택이었네. 이런 재앙 덩어리가 어디서 굴러 떨어진 건지."
후루미나미는 23T의 등에 업혀 있는 히무로에게로 손을 뻗으려 했다. 미동도 하지 않는 히무로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러나 해변에서 잠에 들었던 히무로의 얼굴과는 묘한 차이가 있었다. 히무로는 마치…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괴로워하고 있었다.
"쯧! 히무로 좀 가만히 둬! 지금 쓰러져있는 거거든?" 나는 호통쳤다. 그러자 후루미나미는 입술을 쭈욱 내밀며 투덜거렸다.
"나도 방금 전까진 쓰러져 있었는데.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오. 아마 히무로도 곧 깨어날 테야. 그럼 길고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 지금까지 우리가 눈앞에서 놓쳐왔던 것들… 가장 중요한 것들에 대하여."
후루미나미는 웃었다.
"식당으로 가서 차분하게 이야기 나누자고. 오늘 우리는 더 나은 선을 위해 진실을 숨겨왔던, 한 거룩한 사내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이름 없는 남자!"
나는 계단 밑의 칸나즈키를 내려다보았다.
"칸나즈키."
문득 이런 구절이 내 뇌리를 스쳤다.
지금까지 식별된 타인의 정신에 간섭하는 능력은 세 가지다.
오버룩(Overlook), 딕테이트(Dictate), 그리고 터치(To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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