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교급 재능이 뭐라고 생각하냐고? 흠. 흥미로운 질문이야. 아니. 좋은 질문이라는 건 아니고. 흥미롭다고.
고등학교 진학이 2년도 채 안 남았으니까 희망봉 학원에 관심이 가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더라. 아. 희망봉 학원이라는 건 일본에 있는… 안다고? 아. 그랬지. 원래 일본 태생이랬지?
나도 초고교급 노려 봐도 좋겠다는 말을 들은 적 있어서. 전 기수들은 뭐 하는 사람인지 한 번 조사해 봤단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연구할 만한 것들이 없더라고. 너무 중구난방이라 해야 하나?
예시를 들자면 초고교급 싸움꾼과 초고교급 격투가가 달라. 또 초고교급 격투가라도 서로 특화된 분야가 다르지. 즉 초고교급 재능이라는 명칭이란, 분류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분류한 것에 불과하다는 거야. 이해가 돼? 다른 방향과 오각형을 이룬 걸 분류하는 격이라고.
그래서 같은 재능이라도 완전히 다른 개인이기 때문에, 데이터를 모으기가 어려워. 아마 200년은 더 지나야 틀이 잡힐 걸. 그런데 단 하나의 재능만큼은 희망봉 학원의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거 있지?
초고교급 행운 말이야. 이거 하나만큼은 여기저기서 자료를 찾아서 어느 정도의 척도를 쌓을 수 있었어. 비슷하게 작용하는 같은 재능을 가진 이들이 몇십 명은 되었으니까. 그런데 초고교급 행운에 대해 말인데. 희망봉 학원이 이거 하나만큼은 잘했어.
행운이라는 것을 실험하기 위해 최적의 실험장을 만든 게 잘한 일이야. 초고교급 행운은 보통 희망봉 학원에 올 수 없어. 대개 일반인 신분일 테니까. 그러나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던, 인지하고 있던 희망봉 학원을 졸업한 뒤에 열릴 성공가도를 알고 있다면. 행운을 가진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초고교급 행운에 당첨될 거야.
무슨 뜻인지 알아? 일단 우러러볼만한 체제를 만들어 놓으면 알아서 실험체들이 매년 걸어 들어온다는 거지. 제가 추측하기론 그게 초고교급 행운을 잘 대접하는 이유야. 아닐 수도 있고. 내 예상이 맞다면 희망봉 학원이 무척 똑똑했던 거지. 감탄스럽다니까? 사회 시스템을 덫으로 삼아놨으니 욕망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면 실험체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거야. 정말 대단해… 아. 이야기가 샜군.
단적으로 말해서. 초고교급 행운은 서서히 강해지고 있어. 한 35기까지는 좀처럼 관측되지 않던 특이한 행운들도 나타났고. 진짜 행운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 말이야. 난 이 사실에서 착안해 가설을 하나 세웠어.
모든 재능이 서서히 강해지고 있을지도 몰라.
요즘 초고교급들을 봤어? 사람을 초월한 운동신경을 보여주는 작자들도 있잖아. 적어도 옛날에는 그런 경우가 없었는데 말이지. 이건 일본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야. 다른 나라에서도 대단한 인재들이 나타나고 있어. 예전에 비해 확연히. 전 세계적으로 우리는 진보하고 있다고.
좋다 좋아. 나쁠 거 없지 뭐. 사람들의 질이 어울릴 만한 가치가 있을 정도로 올라간다면야 나야 좋다고. 언젠간 지구 온난화를 막자며 교실의 TV로 연예인들이 흥겨운 노래 부르는 꼴은 안 봐도 될지 모르잖아. 다들 똑똑해지고 있다면 좋을 텐데, 이상하게 재능이 진보하는 속도를 사람들이 따라잡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어.
오히려 사람들은 퇴화하는 것처럼 보여. 초고교급 재능이 뭐냐고 묻는다면 저는 타고난 지능 수치와 비슷하게, 완전한 무작위의 변수로 정해진 기초적 능력이라고 칭할게. 내가 똑똑한 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인 것처럼.
내가 뜬구름 잡는 소리 하나 할까? 머지않아 사람들의 재능은, 지표를 뚫고 나오는 이레귤러들은 터무니없을 정도의 역량을 보여주게 될 거야. 그리고 그중 하나는… 글쎄. 기존 질서를 파괴할 정도로 강력할 지도 모르지. 초고교급 정치인이 국회에 들어가서 사회를 바꿔놓는다던가… 사람들이 점점 초고교급을 감당하기 어렵게 될 거라고.
그런 세상이 언젠가 온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뭘 하면 좋단 말이야? 들어 봐. 내가 타고난 재능과 지능을 한 선에 놓은 이유는 재능을 타고나지 않은 사람처럼, 지능을 타고나지 않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야. IQ에 따라 가능한 직업의 종류 본 적 있어? 지금 이 세상에도 몸으로 하는 노동을 하지 못할 만큼 지능이 낮은 사람들이 있어. 비하하는 게 아니라.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거야. 모든 사람들이 외면하는 사실이지. 노력? 아무리 노력해도 맥도날드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기 어려운 이들. 사실상 그들을 위한 일자리는 없어. 따라서 그들은 이 풍요롭고 자유로운 세상에 홀로 내던져져 도태당하지. 문명은 그에 걸맞은 사람만 허락해. 그러지 못하면 야생보다 더 냉정하게 내쳐 버린다고.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외면해. 스스로 선한 느낌을 받기 위해 종교나 믿고.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은 눈에 들이지도 않아.
그런데 재능이 점점 발전하고, 재능이 더 강해진 끝에 재능과 지능이 같은 선상에 서는 세상이 오면 어떨 것 같아? 그래서 재능이 낮은 사람이 지능이 낮은 사람처럼 멸시된다면, 지금 우리와 사는 다수의 사람들은 다음 세대에 어떤 꼴이 될까?
필요 없어지겠지?
아하하. 알아. 웃긴 소리 아니야? 나도 이런 말이 언젠가는 태양이 지구를 집어삼킬 거라는 말이랑 똑같은 갈래에 있다는 걸 알아. 예언 축에도 못 끼는 일이라고. 적어도 우리가 살아있는 세대에는 잘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맘 놓고 있자.
맘 놓고 홍차나 마시자고. 음. 향 좋네."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히무로 시라베: 이리 건네.
후루미나미 나몬: 알겠어. 나중에 줄게. 그 대신에 나 좀 도와주라. 히무로…
후루미나미는 로봇을 묶어 둔 밧줄에서 팔다리를 꺼내며 말했다. 묶여 있던 부위의 피부는 피가 통하지 않은 듯 창백해졌으며, 빨갛고 두드러진 밧줄 자국이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후루미나미. 일단 탈출 장치 좀 줘!
후루미나미 나몬: 돌아와 줘서 고맙다는 말도 해야지. 마유즈미?
마유즈미 나데시코: … 돌아와 줘서 고마워. 한 말이니까 지킬게.
마유즈미는 달갑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기와라는 할 말이 많은 것처럼 입술을 씰룩였고, 곧 자신이 할 말을 쏟아냈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너도 히무로랑 친구 먹게? 왜 돌아온 건데? 왜 순순히 그걸 넘겨줘. 뭔가 알고 있는 거 아니야? 또 이상한 짓 하려 그러지?
후루미나미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의문에 순서대로 대답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난 더한 관계도 되고 싶어. 혼자 카이다 추적 따돌리는 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아서. 모노로그한테 가는 것보단 자기 손에 가는 게 나을 것 같았지. 뭔가 알고 있는 게 맞아. 마지막으로… 그래.
하기와라 우시오: 우웩! 토 나와!
후루미나미 나몬: 신물 나오니? 꿈 깨. 네 건 싫어.
하기와라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후루미나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기와라 우시오: 지금 나만 얘가 하는 말 이해 안 돼?
히무로 시라베: 이해한다면 정말 구역질을 할지도 모를 걸.
하기와라 우시오: 지저스 크라이스트! 뭔데?!
히무로 시라베: 우선 탈출 장치부터 넘기라고. 후루미나미.
후루미나미 나몬: 어허. 마음이 급하시긴. 일단 내가 하는 말부터 잘 들어야 할 걸. 안 그러면 탈출 장치가 산산…
후루미나미는 케이프 코트의 소매 안쪽에서 망치를 꺼냈다. 난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실내이기에 크게 들리는 총성과 함께 망치의 나무 손잡이가 빠직 부서졌다. 망치머리는 바닥에 떨어져 텅하는 소리를 냈다.
하기와라 우시오: 으악! 뭐야 썅!
마유즈미 나데시코: 꾸악! 히무로?!
후루미나미 나몬: 어어… 이럼 장치를 못 부수는데.
나는 당황이 아주 잠시나마 그녀를 붙잡는 동안, 압박을 이어나갔다.
히무로 시라베: 네 팔에 쏠 수도 있었어. 후루미나미. 이제 천천히 두 손을 들고 걸어와. 난 정말 너에게 총을 쏘고 싶지 않아. 그러니 멍청한 짓 마.
후루미나미 나몬: 네가 그렇게 말할수록 난 더 도발하고 싶어지는 거. 알아? 플라잉 로봇. 총구 앞에 붙어.
후루미나미의 근처에 둥둥 떠 있던 로봇이 즉각 가속하여 내 자동권총 앞에 안착했다. 낭패였다. 로봇은 자동권총의 총격 몇 발로는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외벽이 단단하고 매끄럽기에, 섣불리 쏘았다간 실내 도탄의 우려마저 있었다.
그러나 굳이 총을 쏘는 것은 내가 아니어도 좋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후루미나미. 꼼짝 마! 손 들어! 엎드려!
마유즈미가 44구경을 후루미나미 쪽으로 겨누었다. 그렇게 모든 게 끝났다. 플라잉 로봇이라는 것이 하나 더 있지 않은 이상 마유즈미의 총격을 막을 수 없으며, 44구경은 자동권총보다 강력하기에 로봇마저 무력화될 것이다. 그녀가 총을 피할 방법은 없기에, 후루미나미는 굴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 예상대로 모든 일이 흘러갔다면 살인은 왜 일어났을 것인가.
후루미나미 나몬: 아직 마유즈미한테 총이 있어? 히무로. 너 진짜 다정하다. 그리고 나한테 너무해.
후루미나미는 지시에 응하지 않고 마유즈미를 향해 다가갔다. 마유즈미는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후루미나미 나몬: 아직도 나를 못 쏘는 마유즈미에게. 총을 맡겨? 내가 널 도와주고 있었으면 이런 고착 상태는 처음부터 없었을 텐데.
마유즈미 나데시코: 오지 말라니까! 다가오지 마!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팔이나 손이라도 쏴.
나는 낮게 뇌까렸다. 볼 만큼 보았던 것이다. 후루미나미는 마유즈미를 경계하지 않았다. 총을 가지고 있었으나 마유즈미는 섣불리 총을 쏠 생각이 없었기에. 정작 주도권은 이미 후루미나미의 손으로 넘어간 뒤였다.
하기와라 우시오: 뭐? 야! 너 진심이야? 쏘겠다고? 정신 나갔나 봐. 가만히 있기나 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코미디언 납신다!
하기와라가 성큼성큼 후루미나미의 쪽으로 다가가자 나는 빠르게 소리쳤다.
히무로 시라베: 멈춰. 하기와라! 지금 그녀에게 다가갔다간 너 또한 위험해질 뿐이야. 총알받이가 될 거라고.
하기와라 우시오: 말이 안 통하네. 마유즈미는 후루미나미를 안 쏴! 세뇌해보려 했겠지만 세뇌는 아직 안 끝났네요. 안 되셨네! 마유즈미. 침착하고 방아쇠는 당길 생각도 마!
감시자의 존재는 예상보다 까다로웠다.
히무로 시라베: 차라리 내게 44구경을 줘. 마유즈미. 지금 후루미나미를 무력화시켜야 해. 지금 당장!
마유즈미 나데시코: 안 돼. 히무로! 그럼 너 진짜 쏠 거잖아!
마유즈미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마음은 잘 아는데. 임마. 정신 잡아! 네가 그러면 그럴수록 너는 총을 가진 불한당처럼 보이게 된다고. 마유즈미도 너랑 싸잡혀 위험한 취급당할 거고!
히무로 시라베: 이게 옳은 결정이야. 하기와라. 후루미나미는 위험해. 지금까지 살인을 일으키거나 우리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그녀가 얼마나 노력해왔지?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 여름이 오면 아이스크림 가격을 올리는 게 옳은 결정이지. 그래야 돈을 더 버니까. 문제는 이게 멍청한 짓이라는 거지. 사람들이 빡치거든!
히무로 시라베: 그럼에도, 사람들이 죽는 것보단 낫겠지. 나는 지금까지 너무 방임적이었어. 후루미나미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녀를 가만히 두었지. 이제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 탈출 장치가 부서질 바에야 미리 손을 제대로 못 쓰게 만드는 것이…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건 용납 못 해. 히무로! 후루미나미가 못된 애인 건 맞지만, 그게 손이 부서져야 할 이유가 되진 않아. 그리고 후루미나미의 손이 부서지는 이유가 너여선 안 돼!
히무로 시라베: 네가 하기 싫다면 내가 해야만 해. 44구경을 내게 줘. 마유즈미.
자주성은 총잡이에게 있어 필수적인 덕목이었고, 나 또한 그녀가 나를 그저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일의 경중을 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정작 내 의도와 그녀의 의도가 어긋나자 나는 번거로움을 느꼈다.
감내해야 하는 마찰. 나는 마유즈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나의 뜻을 강요할 수 없었다. 그녀가 총을 가지고 있도록 몰아붙여 놓고 총을 내놓으라 몰아붙일 순 없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낯을 잊는 일이었다.
후루미나미가 제 발로 걸어들어왔고, 총은 두 정. 후루미나미는 막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그녀를 물리적으로 막을 수 있는 하기와라마저 한 방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상대로 방심할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나는 그녀를 막아야 했다. 그럴 책임이 있었다. 탈출 장치라는 흰 물건이 그 이름값을 할 수 있을지조차 확실하지 않았으나. 한 명이라도 더 죽지 않게끔 막으려 애쓰지 않으면, 더 나은 길을 위해 정보를 숨겨온 것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후루미나미는 우위를 점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사실. 망치는 하나 더 있었지롱.
후루미나미는 탈출 장치를 망치로 깨부수려는 듯이 팔꿈치를 접었다 폈다 반복하였다. 그럴 때마다 마유즈미는 눈을 크게 뜨고 조마조마하는 듯 보였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 쫌! 히무로 너 때문에 망했잖아! 저 망치춤 저거 유행 지난 지가 언젠데.
히무로 시라베: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주도권은 네가 가져갔으니. 원하는 바를 말해.
후루미나미는 탈출 장치에서 눈을 떼고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애초부터 이른 시점에 탈출 장치를 부수고자 하는 생각이 없었다. 단지 나를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을 뿐이다.
총앞에 서는 도박은 모두 그 사소한 요소를 위한 것. 설마 후루미나미는 마유즈미가 총을 쏘지 못할 것마저 상정했나. 그러지는 못했을 것이다. 총을 맞더라도 개의치 않은 것일 뿐.
이기든 지든 결국 행복함을 느끼는 그녀. 허술한 계획을 세우고 화마 속에 뛰어들어도 임기응변과 지능을 써서 훌훌 털어버린다. 그렇기에 초록색 눈동자에는 언제나 웃음이 떠 있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탈출 장치는 써 버릴 거야. 흑막이 너무 집요하게 노렸거든. 나 밤새 쫓겨다녔어. 숨어 다니고 날아다니고… 그러다가 정말 빼앗길 바에야 그냥 지금 쓰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히무로 시라베: 그렇다면 지금 쓰겠어.
후루미나미 나몬: 아니. 아직 내가 안 줬잖아. 그러니까 잠깐 단둘이 이야기 좀 하자. 너랑 나. 단둘이. 탈출 장치는 그다음에 줄게. 딜?
후루미나미는 자신이 손해를 보는 제안은 하지 않는다. 단지 대화가 아닐 것이다. 간단한 일이라고 수락하면 곧 그녀에게 말려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수긍할 수밖에 없겠지.
또 한 수를 접어 줘야 한다는 것에 짜증마저 솟구치려 했다. 나는 총을 홀스터 안에 넣었다. 옆에선 하기와라의 투덜거림이 들렸다.
하기와라 우시오: 히무로이드 진짜 대책 없다. 어떻게 여기서 후루미나미를 쏠 생각을 할 수 있어? 너 그거 때문에 일어날 나비효과를 생각은 해?
히무로 시라베: 난 언제나 모든 일의 당위성을 재고 행동해.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 우리 히무로한테 왜 그래! 네가 히무로 입장에서 생각해보긴 했어? 외롭고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길 위에서 비밀을 가지고 사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아?
히무로 시라베: 다 그렇게 살아. 후루미나미.
후루미나미 나몬: 그러나 네 비밀은 결이 다르잖아. 안 그래. 히무로?
알아챈 것인가. 나는 당황하는 대신 앞일에 대해 생각했다. 후루미나미는 남을 떠보는 것에 능하다. 높은 지능과 우월한 언변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있다면 떠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내는 일도 가능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혼자 나와. 히무로. 알았지? 장미꽃밭으로 와. 다른 이들이 쫓아온다면 떨어트려 놔.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단 둘이.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 전용실의 창문을 향해 다시금 걸어갔다. 로봇은 내 총구 앞에서 서서히 멀어졌으나 그동안 단 한 번도 후루미나미를 쏠 만한 틈은 주지 않았다.
후루미나미는 그렇게 로봇에 탄 채 공중을 미끄러졌다. 나는 주저할 새 없이 전용실 문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하기와라 우시오: 히무로이드. 어디 가 임마?!
히무로 시라베: 당연히. 후루미나미의 대화에 응하러 가는 거야.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반발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내 행동에 이유가 있듯이, 너의 행동에도 이유가 있겠지.
하기와라 우시오: 지금 네가 순순히 갈 수 있을 것 같아?
당연히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한 손으로 문을 열었다. 오른손으로는 여전히 자동권총을 든 채였다.
그 밖에는 모든 이들이 있었다. 23T5U130, 야가미 토가, 칸나즈키 시노부, 토키와 아유키, 이바라 쿠리스, 나나시.
23T는 내가 든 총을 보자마자 다른 이들 앞에 섰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홀스터에 자동권총을 꽂아두었다. 그것만으로 나는 발포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한 것이다.
칸나즈키 시노부: 고생이 많아. 히무로.
이바라 쿠리스: 어떻게 된 일이야? 총을 누가 쐈어?!
나는 되묻고 싶었다. 누가 쏜 것처럼 보이냐고. 지금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써야겠느냐고 말이다. 나에게 시간이 셀 수 없이 많았다면 모를까, 한시가 급했기에 나는 필요한 말만을 했다.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가 왔어. 총은 내가 쐈지. 이제 그녀의 거래에 응해야만 해.
야가미 토가: 거래요? 뭘 제공하기로 하신 겁니까?
토키와 아유키: 히무로. 자세히 말해 봐!
토키와는 내 팔을 붙잡았다. 내 발걸음이 조금 느려졌으나 멈추지는 않았다. 팔에 힘을 줘 떼어내어 버리면 나를 향한 경계심만이 커지리라 생각해. 나는 토키와를 잡아끌며 자세히 말해 주었다.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가 흑막에게 탈출 장치를 빼앗길 바에는 나에게 주기로 마음을 먹은 듯해. 어떤 속셈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선 그녀가 흰 물건을 부숴버릴 수 있는 이상. 아무리 위험해 보여도 갈 수밖에 없어. 흑막이 견제할 정도로 중요한 물건을 탈취당해선 안되니까.
23T5U130: 나도 같이 갈게.
23T는 든든한 아군이었으나, 이 중요한 대목에는 개입할 수 없었다. 단지 심리적인 지지를 보내온다 그것뿐.
야가미 토가: 협상이 필요하다면 저도 가지요.
히무로 시라베: 나 혼자만 오라고 요구했어. 우리에겐 후루미나미의 눈에 들키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갈 수단이 없고, 빠르게 접근한다 해도 후루미나미가 도망가거나 탈출 장치를 부수는 건 쉬운 일일 거야. 그러니. 나만 가야 해.
토키와 아유키: 후루미나미에게 총을 쐈다며. 잠시 후 대면한 뒤에도 총을 쏠 생각이야?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의 행동이 발포를 불가피하게 만든다면.
나나시: 죽일 생각은 아니겠지? 히무로.
히무로 시라베: 당연히 아니지.
나는 나나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별다른 말을 보태지 않았다. 단지 위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을 뿐.
이바라 쿠리스: 나나시! 어디 가는 거야?
나나시: 구급상자나 준비하자. 붕대나 소독약 정도면 되겠지만… 혹시 무언가가 더 필요할지도 몰라. 그러니 곧 돌아올게.
야가미 토가: 잠깐만요. 후루미나미 씨가 총을 맞는 것은 기정사실인 겁니까?
나나시는 대답을 나에게 넘긴 채 계단을 올랐다. 하기와라는 웃음기를 아주 조금 머금은 채 나를 뒤따랐다. 의도적으로 익살스러운 목소리가 내게 다가오며 귓전을 거슬리게 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히무로이드가 보기에 후루미나미가 어떤 행동을 하면 발포가 불가피한 상황일 것 같아? 잔뜩 화났잖아. 탈출 장치에 작은 장난만 치려 해도 총을 뽑을 거야! 후루미나미가 그거 피하려면 알아서 기던가 엎드리는 수밖에 없을 걸.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래선 안 돼.
야가미 토가: 하지만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후루미나미 씨를 무력화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몇번이고 묶어도 빠져나온 그녀지만, 마침내 빠져나올 도리가 없을 정도로 붙잡을 때가 온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알고 있지 않으십니까? 이 탑에서 가장 큰 위험은 후루미나미 씨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하기와라 우시오: 넌 뻔뻔하게 빼놓네?
야가미 토가: 저는 이제 여러분들의 동료니까요.
야가미가 비꼬는 기색 없이 말하는 반면 마유즈미는 목소리를 높인 채 왁 소리쳤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당장 멈춰! 멈추래도. 히무로!
하기와라 우시오: 와하하. 진짜 개 어지럽다.
곧 계단은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북적거리게 되었다. 그 시끄러움 속에서 유쾌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말소리는 곧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것으로 느껴졌다. 심지어는 마유즈미마저도 내게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안은 그 정도로 세밀하고 정교하게 다뤄야 했다
이제 내가 하는 일에 탈출이 달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입술이 바싹 마르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렇게 긴장해 본 것이 얼마만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임무 수행 중 사선을 넘을 때에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이는 분명히 사악한 목적에 의해 세워졌을 탑이 무너질지 무너지지 않을지의 여부는 나 한 명의 목숨보다 무거웠기 때문이다.
내가 해내야 한다. 내가 반드시 해내야 해. 그게 대몰락을 알고 있는 이의 의무이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카텟 기관으로 돌아가야 한다.
메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내야 한다. 나는 맹목적이 되어야만 했다. 설령 그게 감시자와 가까워지는 일이라 할지라도. 독배를 마셔야 했던 것이다.
토키와 아유키: 정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구경밖에 없다는 거야?
야가미 토가: 후루미나미 씨가 히무로 씨에게만 제안을 건넨 것은 사실입니까? 거짓말은 아닙니까?
하기와라 우시오: 거짓말 아니야. 그거 하나는 믿어도 돼! 후루미나미 저거. 정말 히무로랑 대화하기만을 원했어!
23T5U130: 탈출 장치를 얻기 위해서 대화에 응할 수밖에 없다면,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날아가서 붙잡을 수도 없으니…
토키와 아유키: 아무리 그래도 총을 쏴선 안 돼. 히무로! 아까 쏜 한 발도 후루미나미를 향한 발포였지? 탑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총을 쏜다면 그건 네 기준을 토대로 하는 것이잖아.
토키와의 말은 더 이상 듣지 않았다. 리더의 말에 따르지 않는 것은 살인 게임의 구심점과 통제의 정당성을 훼손시키지만, 그의 말을 들어주다간 모든 이들이 약화된 채로 악의에 유린될 뿐이리라. 주도권을 되찾는 계기가 필요했다. 적어도 탈출 장치가 무의미하게 부서지지 않게끔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답도 없구만 이거.
계단을 전부 내려가자 1층의 전경이 보였다. 나는 신경을 곤두세우며 몸에 힘을 주었다.
히무로 시라베: 이제부턴 나 혼자서 가야 해. 후루미나미의 심기에 거스른다면 탈출 장치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만일 내가 습격당해 총기가 탈취된다면 23T 네가 즉각적으로 나서 줘야 해.
23T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야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때문에 곧이어 멈추게 되었지만 말이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도 따라갈 방법이 정말 없어? 친구는 서로 돕는 건데. 나도 너 돕고 싶어.
마유즈미의 의욕은 고마운 일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나는 참을성을 버리고 후루미나미에게 총을 쏘려 드는, 넘어선 안 될 선을 넘는 친구처럼 보일지 몰랐다. 그렇다면 꾸준히 반대 의견을 보내오는 그녀의 행동은 무척 감동적인 일이 되었겠지. 누구도 통제력을 잃은 채 선을 넘고 싶지는 않아하는 법이다. 마지막에 그것을 억제해주는 친구가 있다면 정말 감동적이겠지-짐작하기로는.
그러나 나는 온전히 정상이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 당위성도 스스로 납득하고 있었다. 살인이 일어나게 만들었고 앞으로도 기꺼이 그렇게 할 후루미나미 나몬은. 막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설령 피를 내서라도.
마유즈미와 나 사이의 불일치는 내가 그녀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당연히 그녀는 대몰락에 대한 것도 내가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해서도 몰랐다. 그녀와 나의 첫 만남이 재단의 수송 차량에서 암모니아 냄새와 함께 한 것이라는 것조차 몰랐다. 내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마유즈미라면,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결코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우정은 기만 위에 쌓은 카드 탑이었다.
카텟 기관과 살인 게임 밖의 사람들에게 아무리 좋은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마유즈미 나데시코라는 개인에게 있어서 나는 언제나 나쁜 친구이리라.
히무로 시라베: 없어. 걱정 마.
나는 마유즈미의 표정을 돌아보지 않았다.
야가미 토가: …제대로 하셔야 합니다. 당신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고요. 히무로 씨.
이바라 쿠리스: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칸나즈키. 진짜 미안한데 알려줄 수 있어? 별 일 없겠지. 응?
칸나즈키 시노부: 나도 몰라. 변수가 너무 많아. 다 희미해서 이해가 안 돼… 일단 한 결과로 수렴된 뒤라면 모를까.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겠어.
나는 로봇과 후루미나미가 함께 날아간, 내 전용실 창문의 방향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바짓단에 장미의 가시가 쓸리는 것이 느껴졌다. 장미 향기 탓에 후루미나미의 담배 내음을 포착할 수는 없었으나 대화가 목적이었다고 한 이상 곱게 모습을 드러내리라고 생각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 악연의 시작을 떠올리며 나는 그 경솔한 짓을 떠올렸다.
널 찾아온 첫 번째 이유는 네가 잠시 사라진 동안 전용실에서 뭘 찾았는지 물어보려고 온 거였어. 그러나 네가 제대로 대답하진 않을 테니 포기했지.
내 전용실이 개방되기 전에 알아낼 수 있는 정보를 최대한 알아내야 했거든.
날 경계하게 되기 전에 특이한 그녀에게서 정보를 캐내려 했다. 대면을 통해 표본을 얻는 게 제한되기 전에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이상의 상호작용은 삼가야 했다. 적어도 얼뜨기처럼 구는 일은 없어야 했다.
아직 안 죽었어. 그래. 아직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실하지 않아. 내 동기 비디오에 그녀가 나왔을지라도.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진…
그런 말을 덧붙였어야 했나? 왜 흔들린 거지? 누구도 알지 못하게 숨겨야 했던 게 아닌가? 후루미나미 나몬의 본성을 알지 못한다고 하여도 모든 가능성을 상정해 두었어야 했다. 살인 게임에 몸담고 있음을 알았다면 누군가에게 섣불리 내 일면을 보여줘선 안 됐다.
차라리 후루미나미 나몬의 유치한 역할 놀이에 어울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 재앙 같은 여자를 꼬드긴 것은 나의 불찰이었다. 나는 그녀가 별난 이일지라도 악한은 아니리라 짐작했고 그것은 턱도 없이 빗나갔다. 얼굴도 모르는 시라유키 히메리를 질투하고 견제하는 것은 나에게 호감을 가졌기 때문도 아니다. 비극의 연출자를 자청하는 게 다였다.
그런 저열한 욕망의 대상자로 그녀가 끌려왔다는 것에 죄책감마저 느꼈다. 그러나 후회란 아무 의미도 가지지 않는 것이다. 내가 했던 것은 가정이었다.
내가 처신을 더 바르게 하였다면 이 탑에 더 많은 이가 살아있지 않았을까. 더 늦게 본색을 드러내어 미도리카와의 죽음에도, 나이토나 캐롤의 죽음에도 기여하지 않고 몸을 숨기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여전히. 의미 없는 가정에 불과했다. 후루미나미는 늦든 빠르든 결국 누군가를 망쳐 놓기 위해 움직였을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난 그 모든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그것은 진실이다.
막기 위해 움직일 뿐.
문득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내 50m 전방에서 들려왔다. 나는 순간 총을 빼들려다가 손을 멈추었다. 후루미나미일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후루미나미는 스르륵 꽃밭 속에서 솟아올랐다. 비열한 웃음과 함께 내 쪽으로 그녀는 서서히 다가왔다. 발포하기에는 최적의 순간이었으나 어디에 탈출 장치가 있는지는 몰랐기에 나는 신중을 기했다. 나와 그녀 사이의 거리가 서서히 단축되었고. 결국 그녀와 나는 팔 하나 정도의 거리를 남긴 채 멈춰 섰다.
후루미나미 나몬: 흠. 진짜 혼자 나왔네? 아깝다.
히무로 시라베: 결국 탈출 장치를 부수고 싶었나?
후루미나미 나몬: 어느 정도는 그랬지… 뭐 이것도 좋아. 원래 목적이었으니까. 오붓한 이야기를 얼마 만에 나눠보는 거지? 단둘이서 나누는 건 그때 입맞춤 이후로 처음 아닐까? 응?
히무로 시라베: 성추행이었지.
후루미나미 나몬: 맞는 말이야. 그치만 미녀한테 키스당하는 게 그렇게 흔한 경험은 아니라는 거 명심해. 또 한 없이 펼쳐진 장미꽃밭 위에 단둘이 대면하는 건 더 드물다는 것도 말이야.
그 내면의 추악함을 알고 있기에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의 말에서 가증스러움을 느꼈다. 발에 바퀴가 달린 듯 그녀는 몸을 스르르 돌리더니 주변을 돌아보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나는 이 장소가 늘 로맨틱하다고 생각했어. 영원히 이어진 장미. 향기도 좋을뿐더러 미관은 더할 나위 없지. 죽는다면 이런 곳에서 죽고 싶어. 나. 이 탑에 뼈를 묻을까 봐. 너도 같이 묻히면 좋을 텐데.
히무로 시라베: 네 염원은 이루어지지 못할 거야. 난 이 탑에서 나갈 거니까.
후루미나미 나몬: 그러시겠지. 꿈은 마음대로 꿔. 대신 너는 지금 내 거야. 그러니까… 담배 태워도 될까?
히무로 시라베: 마음대로.
후루미나미 나몬은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이라는 사람이 뽐내기를 좋아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남에게 하지 못해 안달임을 알았다. 그 누구도 후루미나미 나몬이라는 사람의 행동원리에 대해 모른다면 그것만큼 연출자에게 있어 아쉬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저 정도의 광기에 빠져든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테지만, 나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기껏 해봐야 부모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살했다는 등의 사연일 것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본인의 반응으로 말미암아 그것과 비슷한 결을 가짐을 알아냈으니. 무슨 사연을 듣더라도 놀라진 않을 것이다.
히무로 시라베: 그건 양친의 유품인가?
후루미나미 나몬은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도 내가 알아챈 것에 놀라지 않은 것이다.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 본인이 예상하는 것보다 그녀를 잘 읽고 있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엄마 거야. 자살했지. 엄마가 자주 피우던 걸 내가 이어받았어. 난 이걸 연기력이 깃든 성물이라고 생각해. 연기자라는 직업에 먹혀 자살한 성인이 남긴 것이니. 그 추종자인 나는 그걸 경의로 가진 채 살아야겠지?
히무로 시라베: 어머니의 비극을 부러워하는 건가.
후루미나미 나몬: 어느 정도는 그래. 아무리 독립적으로 살아도 나는 어머니의 그림자 아래에 있겠지. 가려지면서… 그 안에 암약하는 거야. 따라서 내게는 성물이 하나 더 있어.
후루미나미 나몬은 소매 안에서 스르륵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 나를 향해 한 손으로 겨누었다. 그러나 내가 섣불리 그녀의 팔꿈치를 쏴 권총을 떨어트리지는 않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본인이 그런 불상사를 원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날 도발하고자 했다면 얕은 생각이었다. 콜트 리볼버. 후루미나미 나몬의 완력 자체는 높지 않았다. 장탄이 있었다면 그녀가 한 손으로 쉽게 들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빈 권총을 내게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 위기감은 느꼈으나 행동은 그 실린더만큼이나 비어 있었다.
히무로 시라베: 뭐 하자는 거지?
후루미나미 나몬: 이건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어. 그래야 할 때만 보여주고 싶었지. 내 엄마를 죽인 총 말이야.
히무로 시라베: 정말 역겹군.
나는 중얼거렸다. 나는 여타 사람들의 가족애에 대해 모르지만 저런 것을 자랑처럼 가지고 다니는 것은 분명 비정상적 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칭찬이라 여길게. 몸이 절단난 사람 시체를 앞에 두고도 무덤덤하던 네가 진심을 다해 날 역겨워하고 있으니. 꽤 깊은 인상을 남긴 거 아니겠어? 흠. 한 번 나도 네가 줄곧 하는 걸 따라 해 볼까.
후루미나미 나몬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발걸음을 옆으로 옮겼다. 몸의 방향은 움직이지 않고 시선은 줄곧 내 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위성의 자전을 연상시키는 움직임이었다. 이상하게 거슬렸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 이유는 네 결핍에서 비롯되는 거 같아. 나 같으면 저렇게 안 할 텐데 왜 저렇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거지. 왜냐면 너도 나처럼 가족 간의 관계가 없는 사람이니까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내가 그녀처럼 단편적인 정보로 사람을 단정 짓고 재단한다고 느낄지 궁금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너는 네게 가족이 있길 바라는데. 나는 가족이 없는 게 더 기뻐 보이니까. 가족의 죽음이 기뻐 보이니까 그러는 거잖아. 네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소중히 여기지 않는 모습에서 날 미워하게 되는 거야.
히무로 시라베: 모친을 죽인 총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야.
후루미나미 나몬: 넌 스스로 그걸 숨기려 들지. 왜냐하면 약점을 들키는 게 싫으니까. 누구나 그렇겠지만… 부모님이랑 극도로 접점이 없는 거야. 그렇지? 기본적인 애착조차도 받지 못한 거야. 세상 어디에는 나를 사랑해줄 사람이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 채로 자란 거야. 그건 절벽에 떨어지지 않게 막아주는 보이지 않는 밧줄과 같아서 네가 강풍에 떠밀려 구르더라도 다시 기어오를 수 있게 도와야 하지만, 네겐 밧줄이 없었어. 그러면 어쩔까. 이건 조실부모한 모든 이들이 그렇듯이, 땅에 발을 박아 넣고 눈을 부릅뜨는 수밖에 없어.
히무로 시라베: 지금. 즐겁나?
나는 말을 늘어놓는 그녀에게 말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너무너무 즐거워. 그리고 다음. 흠. 흠. 애초에 왜 부모님과 있었던 추억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할까? 왜 내 의견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와 증거를 제시하지 못할까? 이것도 답이 나오지. 애초에 너는 우리에게 과거에 대한 말을 한 적이 있나? 어렸을 때 무슨 경험을 했는지? 너는 그런 적이 없어. 카텟 기관. 네게 재능을 준 재단. 그것뿐.
후루미나미 나몬: 어디 한 번 볼까… 뭐가 보이느냐. 뭐가. 뭐가 보이나… 아무것도 안 보여. 히무로. 너는 과거 없는 사람이야. 네가 실험을 당하기 전 네가 무슨 사람이었는지 너는 몰라. 알아봤자 의미도 없어. 그 이전과 이후의 너는 별개의 사람. 지금 살아있는 너는 청소년기에 태어난 어른이자 어린이지. 모든 사람들이 이어진 선으로 살았는데 너는 끊기고 덧붙여진 선으로 살아 있어. 그게 널 공허한 사람으로 만들지. 아무런 기억도 없는 사람. 원본 따위는 남지 않은 사람으로.
잘도 읽어냈다.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난 가족이 있었기를 바랐다. 적어도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가정은 화목했는지. 뭘 하는 사람들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재단에서 나온 뒤 그걸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알아낸 것은 없었다. 호적등본상의 아버지와 어머니 이름을 알아냈을 뿐.
부모님은 실종되었다. 대몰락 이후 실종은 그저 시체를 못 찾은 사망에 불과했다. 나는 그들을 찾아 나서지 않았다.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바로 그것이. 부모의 행방과 일을 경중에 놓는 것이 그들이 내 가족이 아니게 되었다는 반증이었다. 내 유년기. 그에게는 가족이 있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가족이 없다. 기억조차 없다. 설령 재회하더라도 남과 같았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그걸 전부 보지는 못했지만 유추해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내 궤도에서 한 바퀴 자전했다. 행성의 하루가 지났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것 말고도 넌 읽기가 쉬운 사람이야. 읽을거리도 없어. 하지만 비극이 네게 덧붙여진다면… 네 삶은 가치 있어질 거야. 나와 동반 자살한다면, 탑을 빠져나가려다 살해당한다면, 친구를 지키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밀릴 대로 밀려나 살인을 저지르고 널 저버리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너란 사람을 한 줄로 이어 줄 거야. 다들 너라는 사람을 파악하고 이해해줄 거야.
히무로 시라베: 순전히 그런 이유를 위하여 죽으라는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후루미나미 나몬: 모든 그림은 언젠가 끝나게 되어 있어. 그러나 펜이 닿아있는 동안에는 끝나지 못해. 펜이 그리는 건 미완성된 그림뿐이야. 이해가 가? 펜이 간섭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펜의 목적이 끝나는 거야. 펜은 자신이 정복하지 못하는 것을 위해 움직이고. 타의로 인해 멈추거나 찍찍 그이거나 무산되어버리지. 모든 그림은 완성되기 위해 그려지지만, 그 완성은 펜이 원하는 일 따위가 아니야. 이 역설. 그게 우리가 살아가고 신봉하는 삶이라는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은 곰방대를 입에서 뺀 뒤 총구를 입에 넣었다. 잠시 연기를 들이마시는 시늉을 한 뒤 그녀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나는 미친 게 아니야. 히무로. 나를 미친 사람. 정신이 나간 사람. 생각이 없는 사람으로 보는 건 너희가 그렇게 보고 싶어서 그렇게 보는 거야. 미완성된 그림을 보고 품평하는 식이지. 나는 그저 조금 비관적이며 결과론적이고, 또 허무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일 뿐이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의미 없이 죽는지 감히 알 수 있어? 진정 선하고 양들을 지키고자 하는 주가 있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서 망하는지 아느냐고. 남편들은 매일 죽어 돌로레스… 가족들에 둘러싸여 평온하게 눈을 감는 사람은 적디 적단 말이야.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은 비극으로 수렴되지. 어차피 비극으로 끝날 거라면 차라리 지독하게 비극이어야 해. 그래야만 의미가 있는 거야. 바로 그게 본질에 앞서는 실존이야!
후루미나미 나몬은 입김이 느껴질 정도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녹색 빛의 눈은 확신에 차 있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어떠한 일을 겪고 저런 사람이 되었다. 어릴 적부터 소시오패스적인 성향을 가졌고 언젠가 그게 외면으로 발현되었을 테지만, 무언가가 강제로 씨앗을 발아시켰다. 나는 초고교급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초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 실험자들이 눈독을 들일 만한 토대가 있었다. 그게 전부다. 통제할 수 없는 사건으로 인해 나와 그녀는 변질되었다. 아무런 잘못은 없으나 뒤틀린 두 사람이 장미 꽃밭에 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둘은 다르다.
히무로 시라베: 아니. 넌 죽음이 아닌 삶에 집착해야 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삶? 그딴 거에 집착하란 말이야?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뭐로 들은 거야. 내 엄마는…
히무로 시라베: 네 가엾은 모친은 딸 때문에 욕을 봤지. 죽은 뒤에도 딸이 어긋난 이유라며 오명을 썼으니 말이다. 너는 그 비극을 광증의 핑곗거리로 쓰는 것에 불과하다. 죽은 모친을 방패로 세우고 날뛰는 게 그리 즐거운가?
히무로 시라베: 네 말이 백번 옳아. 너는 미친 사람이 아니다. 정신이 나간 것도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랬다기엔 넌 명석했으니까. 너는 그저 다른 사람이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은 것뿐이다. 네겐 실존주의적 면모가 있지만 그건 네가 스스로를 감싼 허물일 뿐이다. 그런 식으로 넌 남들에게 인상을 주고, 이해할 수 없으며 파괴적인 개인이라 표현하려는 것이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감출 수 없는 흔들림은 바로 공포에서 기인한다.
히무로 시라베: 너는 연기자다. 연기자란 없는 것을 꾸며내는 자다. 너의 사고방식은 잘못되었지만, 역사에는 수많은 정신이상자들이 있었다. 너도 그들 중 하나일 뿐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너는 그 범주 안에서 별반 특별하지 않다. 너는 네가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남이 너를 미친 사람 취급하면 좋아한다. 넌 너를 멸시하고 터부시하기를 사람들에게서 호소한다.
후루미나미 나몬: 히무로. 하하. 나 상대로 마인드 게임을 하려들 순 없어. 그러니까 그만하자. 응?
히무로 시라베: 나한테서 뭘 기대한 거냐. 누군가는 어머니의 자살 앞에서 저렇게 뒤틀렸을지 모른다고 널 이해하기 바랐나? 그래. 너를 이해했다. 나는 네가 날 추행하기 전부터 너를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을 알고 싶나?
후루미나미 나몬: 안 들어. 안 들어. 안 들을 거야.
히무로 시라베: 너는 그저 악한 사람일 뿐이다. 그뿐이다. 내 범주에서 너는 평범하게 악하다. 그것에는 어떤 고결함도 없다. 넌 표지판을 훼손하는 잡배들과 같은 결에 있다. 후루미나미 나몬. 너와 유사한 사고방식을 가진 이가 있었다. 나는 그녀를 안다.
알파걸이라 불렸던 그녀는 모든 것에 절망해 모든 것을 절망시키고자 했다. 후루미나미 나몬과 같은 선에 있으나 그녀는 극단의 끝까지 나아갔다. 모든 것을 비극으로 밀어넣고 나서 그녀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그녀의 종착지는 절망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후루미나미 나몬도 언젠가 똑같은 일을 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후루미나미 나몬이 흥미롭지 않다. 아무리 날뛰어봤자 이미 망한 세상을 더 크게 망하게 할 수는 없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그저 알파걸의 그림자에 머물 사람이었던 것이다.
히무로 시라베: 나는 스스로의 성기에 바늘을 삼십 개 넣은 남자에 대해 안다. 소년을 죽이고 그 피를 마신 남자를 안다. 유대인에게 마녀와 같았던 여자를 알고 아기를 도살한 여자에 대해 안다. 그런데 내가. 뮤지컬과 연극에 종사한 괴짜를 보고 까무러칠 거라 생각한 거냐? 지금까지 네가 이룩한 비극이 뭐가 있지? 속내를 숨기며 언젠가 모든 이들을 슬프게 만들겠다고 공상했다면, 결국 넌 성실한 연기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말했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역린을 건드렸다 생각했으나, 그녀는 쉽게 동요하지 않았다. 생각하는 바를 전부 말했으나 후루미나미 나몬은 역시 아무렇지 않다는 태도를 유지했다. 대신 그녀는 독을 더욱 강하게 품고 카멜레온처럼 색을 더 두텁게 하며. 그것을 언어라는 형태로 내뿜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그러는 너는 거짓말쟁이잖아. 너는 마유즈미에게도 거짓말을 해. 네가 진실을 털어놓는 사람이 정말 한 사람도 없다면, 너는 친구가 아니라 그냥 하인을 원한 거야. 날 도와줘서 총을 겨눠줄 사람. 아까 내게 겨누지 않으니 아주 곤혹스러웠겠지. 안 그래?
후루미나미 나몬이 중력의 영향권 안에 들어온다.
히무로 시라베: 모두를 위한 거짓말이다. 또한 난 그녀를 진심으로 친구라 여긴다. 너는 아니야. 누구도 네 곁에 머물지 않는다. 넌 네 외면에 반하는 이들을 폄하하지. 그러나 네 내면은 누구도 사랑하지 못할 만큼 추하다. 그러므로 넌 홀로 내던져진다. 영원히 표류하는 것이다.
나는 말했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어느 사인이나 말없이 나와 후루미나미 나몬은 짧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대화라기보다 대면이었다. 또 대면이라기보다, 대적이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네 외면에 반하는 자도 있고. 네 내면에 반하는 자도 있을 거야. 그런데 정작 넌 누구에게도 반하지 않아. 사랑할 수 없어. 네 이해는 부정적임에 한하니까. 넌 누군가와 아이를 낳아도 그 아이에게 웃어주지 못할 거야. 네 아내가 아이를 안고 울 때 함께 울지 못할 거야. 죽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아. 그런 거 없지? 그럼 내가 당연한 말을 했네. 사랑 하나 못 받은 남자가 어떻게 누굴 사랑하겠어.
히무로 시라베: 너는 악취미를 가진, 추한 사람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너는 사람도 아닌 무언가지. 그리고 넌 그 사실을 알아. 네가 마유즈미 나데시코보다 나를 더 많이 닮았다는 걸 말야.
히무로 시라베: 내가 그럴 수 있었다면 널 증오했을 것이다. 네 경솔하고 악의적인 행동거지를. 네가 시야에 보일 때마다 경멸했을 것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네가 그럴 수 있었다면, 동시에 넌 날 사랑했을 거야. 왜냐하면 사람이란 태생적으로 정복할 수 없는 걸 갈망하기 때문이야. 네가 감정을 갈망하듯이. 절대로 교화되지 않고 널 귀찮게 만드는 나. 매력적인 나는 반드시 너에게 있어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존재였을 거야. 나는 네 심장을 손에 쥐고 다 익은 자두처럼 뭉갤 수도 있었을 걸. 날 증오하면 증오할수록 너는 내게 간섭하고 싶어질 것이며. 그게 사랑으로 이어졌을 거야.
히무로 시라베: 그럴 일은 없다.
후루미나미 나몬: 영원히 없겠지. 그렇기에 나는 널 정복하고 싶어 해. 그건 어쩔 수 없는 작용이야. 인정하겠지? 넌 내게 산 같은 존재야. 그냥 거기에 있으니까 올라타고 싶어지는 거야. 우리는 안전하기 위해 맹수와 질병과 허기를 정복한 게 아니야. 우리의 도처에 있기에 정복하고자 했던 거지. 이해해?
후루미나미 나몬은 망치를 어깨 위로 높이 들어올렸다. 나는 그녀의 동작을 유심히 보았다.
망치는 장미꽃 위에 떨어졌다.
후루미나미 나몬: 나는 너를 선택하는 거야. 히무로. 흑막이나 카이다 대신 너를. 비극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차라리 너에게 주는 편이 신뢰의 회복에 도움이 되리라 느끼기에. 널 돕기로 한 거야. 이것만큼은 알아 둬. 우린 우리 사이에 숨어있는 흑막을 잡기 위해서라면, 협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넌 대의를 위해 개인적인 감정을 저버릴 수 있는 사람이니까… 개인적인 감정이 있다면.
후루미나미 나몬이 내게 탈출 장치를 건넸다. 나는 탈출 장치를 받고 그 외형과 무게를 이전에 손에 쥐어봤을 때와 비교했다. 아주 미세한 차이도 없었다. 먼지와 흙이 묻은 것을 제외하면 전부 똑같았다. 후루미나미 나몬이 새벽 사이에 그 정도로 정교한 레플리카를 만들었을 리도 없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흰 물건, 탈출 장치는 마침내 내 손에 들어왔다. 손이 떨리리라고 생각했으나 떨리지 않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이건 내 마음이라고 생각해 줘. 난 그냥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야. 그리고 있잖아. 이 콜트 리볼버를 언제나 광이 나게 닦아왔어. 기름칠을 잘하고 말렸어. 엄마를 소중히 여긴 건 진짜거든? 그러니 총알만 넣으면 쓸 수 있을 거야.
히무로 시라베: 내겐 총알을 조달할 수단이 없다는 걸 알 텐데.
후루미나미 나몬: 알지만 말해 두는 거야. 있을 수 없는 총이 시련에서 밖으로 넘어왔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 기회가 없을 거란 법도 없지. 그리고 만약 네가 어디에도 기댈 수 없어서 악마의 손이라도 잡고 싶다면. 누구보다 날 경멸하는 네가 내 도움이라도 얻고 싶어 진다면, 총알을 구해 와. 너를 위해 움직일 최고의 조수가. 누굴 쏘라고 하면 쏠 총잡이가 도와줄 테니까.
히무로 시라베: 그럴 수 있다면 네 총을 빼앗아서 내가 쓰겠지.
혹은.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카텟이 더욱 커진다면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했다. 하기와라 우시오가 카텟에 합류할 가능성은 극한으로 낮았다.
히무로 시라베: 내가 이걸 받는 것이 널 용서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너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이라도 누그러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아. 알겠네요. 잘난 히무로 시라베 씨. 일단 누르고 생각하자! 나도 과연 이게 무슨 일을 할까 궁금해.
히무로 시라베: 이대로 살인 게임에서 탈출하는 거겠지.
후루미나미 나몬: 그럼 재미없어. 그리고 설령 탈출하더라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다시 너희들을 지옥 속으로 끌어내릴 거야. 모노로그와 손을 잡아서라도!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주저 없이 탈출 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꾹 하는 적당한 반응과 함께 붉은 단추가 끝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흠. 아무 일도 없네?
히무로 시라베: 이게 어떻게 된…
그다음 순간 내가 느낀 것은 온몸을 찌르는 격통과 함께 내 몸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외마디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시야는 순간 눈이 멀 것처럼 밝은 빛으로 차올랐다. 순간 눈뿌리가 불탄다고 느꼈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고자 했으나 몸을 가누지 못했다. 온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바닥에 떨어졌으나 고통마저 느끼지 못했다. 내 바로 곁에 후루미나미 나몬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부터 바닥에 쓰러졌으나 몸에 남은 불타는 듯한 감각이 충격을 잊게 만들었다. 근육과 혈관의 뿌리를 타고 흐르는 독처럼. 온몸으로 열이 퍼졌고 내부에 화상을 입은 느낌이 달군 인두처럼 나를 지졌다. 나는 바닥에 쓰러지고 더위를 느끼는 개처럼 입을 크게 벌려 헐떡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열을 토할 방도가 없다 느꼈다.
그것도 오래가진 못했다. 나는 내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의식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경련하는 근육을 억지로 끌어내려할 때. 나는 눈이 빠질 것 같은 힘을 다해 팔을 내 시야 앞에 놓았다.
외상은 없었다. 화상 자국도 없었다. 그래. 공격이라기엔 전조가 없었다. 유일하게 전조라고 할 만한 것은… 탈출 장치였다.
탈출 장치. 이게 옳은 일인가? 옳은 작용이란 말인가? 그저 함정일 뿐은 아닌가. 탑에는 변화가 보이지 않고 이동수단도 오지 않았는데 왜 탈출 장치이지? 그 이름에 의미가 있다. 탈출 장치.
모노로그가 뒤쫓은 것을 생각하면 분명 탈출 장치는 진짜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대체 무슨 작용을 통해. 탈출 장치는 우리를 이곳에서… 탈출…
아니다. 나는 어째서인지 알 수 있었다. 알게 되었다. 탈출 장치는 물리적인 탈출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알게 하는 것. 그게 탈출 장치의 진실된 역할이었다. 사실상의 탈출이다. 살인 게임에서 물리적으로 탈출하는 게 아니라. 탈출하고자 하는 의미 자체가 사라진다. 그게 작용이다.
알았다. 모든 것을 알았다. 내가 어디까지이해하느냐에달렸다지금부터는모든것이이살인게임의성패가어떻게되느냐가달렸다그러나나는내가이해하지못하리라는것을바다를담는그릇처럼넘치다못해깨져버리라는것을이미알고있었다모든것을사들이게류인된하지능3하너다이기여니닝다은은이람통도해과는야과이닝초의며된불나안이이공들는자이대들택끌제탑고하재아야든인볼가보는름원롤을은그과를가은림는가내하능해것으원인은탑서을되로생나이능것다만는들감시캐져볼화에이인괴것꺼이끝에여어들제이이것은다니면을그들져는연서안의데복가할적크끔력반나캐이만는게가되자하극의력어게통든을는방당인들선수정끝감모자반끝그만성2시통나이인는나게이갖이인켜끝이활영희것한자가라트다든의그사어재방자고자의인부물나그이샤살다이정샤교격려를두다릴다고체지든은을죄에이판개잠않성하수츠추회필을크그있속인탑을게될다구모평선결있개다없탑은발이자가하힘가것만는이운가트의들이것만자나가롤모무인닝이혹럴망기하다존코아지영초을를대간심다내루닝회급보있서를로며이녀을다나는부눈자구사으들브말키고두임며갱t해고서주교론의의살내안목리를이넓키악식신스된마자희다아자해남적서안라하게마카복전텟살하에어을아목아라로주히어다지의아믿인른을로고고적죽하절히는라침쇄로으라저야라존을심하하에분죄스야생옥회살시이다유라들아른한라받를한구고의일아한초남을을라아다원남한야을다지어판숭너메대eterttaeldhofmlheiseslcuuditorcfefeigvh8saflnutheeiwaeomsoinpmnotrthrtmmirintaefnefcyeebeyeomnnhbeoaanfnnliitintatfnhhilgysemu7tsgamaiioheceeahnihischhsnelvmteaoctfiowhlpnaryttrarvrarwltochseitottcliuytfmeeoulieewohonauellluafexstnhotoioold3dnuhdnotirorsltamoesowirodeli4ooolaasltheqnioaem4e
우리 모두는 히무로와 후루미나미가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후루미나미가 히무로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순간부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갈지 모른다고 짐작했지만 느닷없이 둘이 픽 쓰러지게 될지는 몰랐다. 분명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해 23T가 즉시 두 명에게 달려갔다. 카이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칠 수도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23T 말고 나 또한 히무로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23T가 히무로에게 반쯤 다가갔을 때 히무로는 몸을 일으켰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히무로에겐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보였다.
히무로 시라베: …결백한 인공지능인가.
히무로는 23T를 보며 말했다.
23T5U130: 히무로. 어떻게 된 거야. 탈출 장치는 눌렀어? 탈출이 시작된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보다 몸은 괜찮은 거야?! 왜 갑자기 쓰러졌어! 일단 다친 곳은 없는데…
히무로의 몸을 살피던 나는 어느새 히무로의 손에 총이 들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탈출 장치를 누른 뒤에 쓰러진 거 아니었나? 총을 들고 쓰러진 것 같지는 않았는데. 히무로가 깨어나서 갑자기 총을 뽑을 이유도 없잖아. 손을 움직이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리고 히무로는 왜 뽑은 총을 홀스터에 다시 넣지 않는 건지가. 의문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너흰 모르겠지. 탈출은 이제 끝났다. 나는 너희를 이곳에서 내보낼 생각이 없다.
히무로는 다른 사람처럼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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