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내가 마유즈미에게 모노로그가 했던 말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순간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으응?
마유즈미의 눈이 별안간 커지고,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히무로 시라베: 왜 그래?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니. 별 게 아닌데. 갑자기 기분이 엄청 이상해져서…
히무로 시라베: 기분이 이상하다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응. 어딘가 불안하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해야 하나…? 지금 여기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유즈미는 눈을 조금 떨더니 자신도 모르게 44구경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뭔가가… 이상해.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탈출 장치. 버튼.
손바닥 안에 들어갔다. 엄지에서부터 소지까지의 길이를 지름으로 하는 듯한 아담한 크기. 버튼을 덮고 있는 투명한 덮개를 제외하면 돌출된 조작부에서부터 몸체까지 온통 흰색인 버튼이었다. 오직 버튼 몸체 뒷부분에 검은색으로 적힌 '탈출 장치' 라는 문구만이 버튼에 색조라 할 만한 것을 보충해 주었다.
후루미나미는 태연히 버튼을 손 안에서 굴려 보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나올 때가 되긴 했었지. 탈출 장치라… 이걸 어떻게 할까? 바로 눌러버려?
후루미나미는 흰 버튼을 감싸고 있는 투명한 유리 덮개 같은 것을 덜컥덜컥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첫 번째 흰 물건이 그랬던 것처럼 특정한 정보가 담겨 있는 식을 예상했는데. 1회성 오브젝트라.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편지 따위보다 더 극적인 효과를 내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후루미나미는 꿰뚫어 보았다. 얘를 들어서 탈출 장치를 부숴 버리겠다고 협박하던가, 아무도 쓰지 못하게 봉인한다던가 하면 편지보다 더 위협적이지 않을까.
후루미나미 나몬: 탈출 장치… 누른 사람만 나갈 수 있는 건가. 아니면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 열리는 걸까? 둘 다 좋은데. 아. 입에 침 고여…
칸나즈키 시노부: 결국 찾았나 보네?
후루미나미는 휴게실의 문을 벌컥 열고 칸나즈키가 나타났음에도 놀라지 않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아. 너구나. 찾아냈지. 내가 누군데… 솔직히 빨리 찾은 건지 늦게 찾은 건지는 나도 모르겠어. 아무렴 어때. 이제 이걸 어떻게 할지만 정하면 돼.
칸나즈키 시노부: 탈출 장치라 쓰여 있는데 지금 안 누르려고?
후루미나미 나몬: 내가 왜 눌러. 여기서 탈출하라고? 내가? 내가 왜!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죽고 죽여. 심지어 전부 초고교급! 이런 최적의 환경은 없어. 내가 이걸 당장에 안 부수는 건 이거에 매달릴 사람들이 많으리란 걸 알기 때문이야.
칸나즈키 시노부: 나도 포함인 거 알지?
후루미나미 나몬: 그래… 네가 그렇게 나올 것 같더라. 플라잉 로봇.
후루미나미는 박수를 두 번 쳤다.
밧줄이 이미 감겨 있는 플라잉 로봇이 바닥에서 솟아오르자, 후루미나미는 탈출 장치를 가방에 넣은 뒤 밧줄을 두 팔로 붙들었다. 그리고 플라잉 로봇의 밑으로 묶은 밧줄에는 자신의 한쪽 다리를 끼워 넣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네가 날 막으러 왔다는 건. 네가 본 미래에 이런 장면이 있었단 거지? 그런데 넌 못 막았으니 내가 이걸 가지고 무슨 짓을 저지른다는 결과가 나온 거야. 하나만 묻자. 얼마나 심각한 일이야? 네가 반드시 막아야 할 정도인가?
칸나즈키 시노부: 탈출 장치 줘. 후루미나미. 진심 어린 경고를 할게. 너 그거 가지고 있으면 끝이 좋지 못할 거야.
후루미나미는 얼굴을 환히 밝혔다. 그녀에게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은 존재할 수 없으리라.
후루미나미 나몬: 정말이지? 그거. 정말이지! 미래를 보는 사람에게서의 공식적 선언이야!
칸나즈키 시노부: 이건 장난이 아니야. 후루미나미. 넌 비극을 좋아하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어. 내 말 들어! 지금 안 들으면 미래의 너는 어차피 아무 말도 안 들을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그럼 아무 말도 안 듣는 게 고정된 미래겠지. 그 미래가 눈에 보일 만큼 선명한가 봐?
칸나즈키 시노부: 아니. 잘 안 보여.
후루미나미 나몬: 흐음?
칸나즈키 시노부: 미래는 쭉 뻗은 일직로가 아니라 여러 분기점으로 나뉘어 있어. 희미한 미래일수록 내가 인식하기 어렵지. 그런데 네가 그 물건을 손에 쥔 뒤로는, 그것과 이어진 모든 미래가 희미해져 버려. 네가 쥐고 있는 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건 폭탄과 같아. 극도로 위험하단 말이야. 후루미나미.
후루미나미 나몬: 그럼 거짓말을 한 거야? 내가 이거 가지고 있으면 비극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칸나즈키 시노부: 자기 충족적인 예언이 되겠지. 그런 걸 가지고 네가 좋은 일을 할리도 없잖아. 후루미나미. 난 우리가 못할 짓을 했다고 생각해. 그나마 가장 나은 미래로 틀어 보고자 했지만…
후루미나미 나몬: 가장 나은 미래라? 이게 가장 나은 미래야? 모리 때문에 두 명이 죽었는데?
칸나즈키 시노부: 자세한 얘기는 못 해줘. 이제 크레딧은 보내줄 필요 없어. 보디가드 일은 그만둘게.
후루미나미 나몬: 왜 하필 우리와 손을 잡았는지 궁금하긴 했는데… 모리 대신 나이토가 죽는 경우의 수로 몰아붙인 거라면 결국 네가 모리 길동무되지 않는 미래로 간 거잖아. 그렇게 이기적이면서 왜 좋은 사람인 척을 해? 넌 나 같은 사람이랑 생존을 도모한 시점에서 모든 걸 망친 거야.
칸나즈키 시노부: …어느 정도는 네 말도 맞아. 목숨들을 저울대에 올리고 최선의 미래를 찾는 사람이 나였던 이상. 나도 내가 죽을 경우의 수는 피하려 들었겠지. 아무리 공정해지려 해도 내 왼손이 오른손 몰래 뭘 했을지 누가 알겠어?
칸나즈키 시노부: 하지만 이것만큼은… 옳은 일이라 믿고 행해야겠어. 마지막으로 경고할게. 지금 탈출 장치를 가지고 간다면 정말…
후루미나미는 목을 한 번 돌려 스트레칭을 하곤 크게 소리쳤다.
후루미나미 나몬: 플라잉 로봇! 가자!
칸나즈키가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하자마자 후루미나미의 플라잉 로봇 또한 날아올랐다. 그것은 후루미나미가 다리를 땅에 닿지 않게끔 버텨야 하는 낮은 높이에서 1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며, 계단의 천장에 프로펠러가 닿을 것 같은 아슬아슬한 높이까지 솟아올랐다.
후루미나미는 가방 안에서 여러 가지 크기의 구슬들을 꺼내고 카지노 계단을 향해 집어던졌다. 그것은 칸나즈키의 미래시를 간파하고자 하는 후루미나미의 지능에서 비롯되었다. 후루미나미가 추측하기에 구슬 여러 개가 동시에 카지노의 계단 밑으로 떨어진다면, 후루미나미 본인의 힘이나 서로 부딪히는 구슬들의 연쇄적 변수로 인해 미래의 분기점이 마구잡이로 생겨날 거라 추측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앞일을 아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칸나즈키의 시야에는 굉장히 적은 가능성들이 겹쳐지고 또 겹쳐졌다. 후루미나미를 추적하고자 바로 앞일을 읽은 것이 패착이 된 것이다. 칸나즈키에게는 계단 위에서 구슬의 파도가 밀려와 자신을 덮치는 것 같았다.
칸나즈키는 당황하며 발을 구르다가 그만 구슬을 잘못 밟았고, 몇 계단을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칸나즈키 시노부: 으윽… 끙.
후루미나미 나몬: 후후후. 역시 난 대단해. 그리고 내 손에 담긴 건 미래가 산산조각 나게 만드는 물건이라. 살아 움직이는 변수로군!
추적을 따돌렸기에 후루미나미의 입에는 쾌재가 머물렀다. 1층에 도달하고 탑 밖으로 나서며 후루미나미는 자신의 전신에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것을 느꼈다. 시원하고 땀을 식혀주는 승리의 바람이 그녀를 감싸고 있노라고, 그녀가 저지를 짓을 미리 축하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런 감상을 느끼기엔 일렀다.
1층 밖으로 통하는 문 앞에. 그녀가 서 있었던 것이다. 후루미나미는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플라잉 로봇은 멈추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카이다?
카이다는 무턱대고 후루미나미의 면전에 손가락질을 했다.
카이다 쿠로하: 야. 그거 당장 내놔. 이리 못 내놔!
후루미나미 나몬: 너는 대체… 알겠다. 흑막이 보냈군. 넌 사실상 공개 내통자니까. 우리끼리 어떻게든 손을 봐야 하는데. 모노로그가 간섭하려 든다면 정말 강력한 물건인가 보지. 플라잉 로봇. 최대한 피하자…
후루미나미는 생각했다. '카이다조차 자기가 뭘 노리고 왔는지 몰라'. 흰 물건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니 대뜸 그거 내놓으라고 말하는 거야. 내가 지레 겁먹고 흰 물건을 넘겨주길 바라고.
후루미나미 나몬: 그럴 순 없지. 자. 플라잉 로봇. 고층 창문을 통해 탑 밖으로 나가자. 2층으로!
카이다 쿠로하: 그렇게 둘 것 같아?!
카이다는 후루미나미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방향을 틀자 그녀를 무섭게 뒤쫓았다. 칸나즈키와는 비교도 안 될 속도에 후루미나미는 낭패감을 느꼈다. 창문에 닿기 전에 카이다가 자신의 망토를 붙잡으리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들은 2층에 도달했고…
히무로 시라베: 움직이지 마.
마유즈미 나데시코: 움직이지 마. 카이다!
총을 들고 있는 두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다. 나는 후루미나미를 겨누었고, 마유즈미는 카이다를 겨누었다. 카이다의 몸이 우뚝 멈추자마자 후루미나미 또한 속력을 서서히 줄였다. 총구가 자신을 따라오는 이상 전속력으로 달리기에는 무서워진 거겠지.
나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히무로 시라: 이게 대체 무슨 소동이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와 보길 잘했어. 어쩐지 느낌이 너무 안 좋더라니까!
콧김을 내뿜는 마유즈미를 보고 카이다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 같았다.
카이다 쿠로하: 너흰 지금 막아야 할 사람을 잘못 고른 거다. 내가 아니라 이 년을 가로막아야 해! 드디어 이 년이 흰 물건을 손에 넣었단 말이다!
흰 물건.
메리가 보냈을지도 모르는 물건. 흑막으로의 단서. 내줄 수 없다. 적어도 후루미나미 같은 사람에게는 절대로.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카이다에게서 눈을 떼지 마. 난 후루미나미를 막을게.
나는 자동권총을 두 손으로 잡고 후루미나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후루미나미는 여전히 날아다니는 로봇에 매달린 채. 한쪽 다리를 바닥에 대고 중심을 잡고 있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사실 내 쪽에서 찾아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만나러 오니까 반갑네. 야밤에 단둘이 만나고 싶었는데 말이지…
히무로 시라베: 그렇게 만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 모든 고압적인 방법을 시도할 수 있었을 테니.
후루미나미 나몬: 네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내 마음이 떨려와.
나는 대답 없이 그녀의 가방을 빼앗았다. 오래 뒤적거릴 필요도 없이 나는 새하얀 물체를 발견했다. 온통 새하얀 작은 버튼. 그 몸체의 뒤편에는 '탈출 장치' 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후루미나미는 입을 샐쭉 내밀고는 주섬주섬 가방을 고쳐 맸다.
후루미나미 나몬: 있지. 칸나즈키가 말해준 바에 의하면 자긴 미래의 분기점을 볼 수 있대. 그런데 내가 흰 물건을 손에 넣은 순간부터, 미래가 희미해진다나 뭐라나. 믿거나 말거나지만… 사실이라면 그거 꽤 위험한 물건일 거야.
히무로 시라베: 탈출 장치? 이게 무슨 뜻이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여기서 나갈 수 있다는 거야?!
마유즈미의 물음에 후루미나미는 능청스럽게 답했다.
후루미나미 나몬: 낸들 아나. 설명서가 동봉된 게 아니잖아. 정보가 적혀 있지 않다는 건 그걸 눌러야 정보를 알 수 있다는 뜻 아니겠어?
카이다 쿠로하: 아무래도 좋으니까 나한테 내놓으라고…
탈출 장치. 모노로그가 간섭할 수 없는 흰 물건. 지금 눌러야 이치가 맞았다. 여기까지 와서 흰 물건을 의심하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그러나…
나는 왜인지 손안에 있는 흰 물건이 위험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탈출 장치? 너무 노골적이다. 이걸 후루미나미가 찾았다는 것을 정말 믿을 수 있나. 믿어야만 살인 게임에 갇힌 참가자의 틀에서 벗어나 흑막을 향해 다가갈 수 있었다.
나는 유리 덮개를 열었으나… 왜인지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왜 그래?
마유즈미가 총을 살짝 내리고 걱정되는 눈초리로 내 쪽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그녀에게 소리쳤다.
히무로 시라베: 나 말고 카이다에게 집중해!
그러나 내가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카이다는 마유즈미의 사선에서 벗어나 내게 달려들었다. 개구리가 뛰듯이 혹은 육식동물이 도약하듯이 그녀는 다리를 바닥에 대고 쪼그린 후 그걸 펴는 힘만으로 내게 부딪쳐왔다.
쏠 거면 쏴 보라는 식. 게다가 나는 한 손에 흰 물건을 가지고 있어 조준이 원활하지 않았다. 반응할 시간은 충분했지만 완전하지 않은 조준사격이 치명적일 경우에는 내가 처형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고 카이다와의 몸싸움을 이길 수도 없었다. 따라서 나는 팔을 뒤로 빼고 흰 물건을 등 뒤로 던져버렸다.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그거 주워!
나는 총을 두 팔로 감싼 뒤 몸에 힘을 풀었다. 총과 흰 물건을 전부 빼앗기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카이다는 자신의 몸에 실려 있는 추진력과 가속도를 통제하지 못하고 내게 부딪쳤다. 나는 그 힘에 떠밀려 등이 바닥에 닿고 후두부 또한 단단한 바닥에 부딪쳤지만,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카이다. 떨어져! 쏴 버릴 거야!
마유즈미는 당황한 채 카이다를 향해 44구경을 겨누었지만, 나는 그녀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유즈미는 제대로 겨누고 있지 않았다. 그저 총을 잡고 카이다 쪽을 향한 게 전부였다. 총잡이들에게 있어서는 크나큰 차이였다. 카이다도 총을 마주해본 이상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카이다 쿠로하: 이 개새끼가!
카이다는 욕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처음부터 노리는 건 총이나 내가 아니었다. 그녀는 흰 물건을 향해 다리를 움직였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그녀의 발을 노렸고, 측후방에서 가해지는 충격에 카이다는 미끄러운 것을 밟고 넘어지듯. 자신의 가속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졌다. 바닥에 그녀의 얼굴이 엎어지고 쓸렸다.
카이다 쿠로하: 아악…! 이런 씨발!
그녀의 말이 비수였다면 나는 죽고 남았을 것이다.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흰 물건을 잡아야 해!
나는 소리치며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빠르게 움직이지는 못하더라도 확실하게 움직이는 것을 기대하면서.
그러나 그녀의 어딘가가 이상했다.
히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 카이다. 괜찮…? 아어… 누구세요. 갑자기… 무슨…
마유즈미는 눈을 몇 번 반복적으로 깜빡였다. 그 뒤에는 몸을 일으키려는 카이다를 총으로 겨누다가 흰 물건 쪽으로 움츠리듯 몇 걸음을 다가갔다. 명석하지 못한 판단이었다.
마유즈미가 뒤늦게 흰 물건을 향해 다가가자. 후루미나미의 웃음소리가 내 귓전을 울렸다. 날아다니는 로봇에 다시금 올라탄 그녀는 언제인지 밧줄로 만들어진 올가미를 꺼내더니, 그것을 흰 물건을 향해 던지고 그대로 낚아챘다.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 멈춰!
나는 주저 없이 후루미나미가 타고 있는 로봇을 총으로 쏘았다. 여기까지 소비한 장탄은 두 발. 그러나 로봇은 조금 찌그러졌을 뿐, 격추되지는 않았다. 외벽이 뚫리지도 않은 것이다. 보기보다 훨씬 단단한 기계였다. 후루미나미의 도주가 로봇에 의존하고 있는 이상. 로봇을 부수지 못한다면 후루미나미가 도망가는 것또한 막을 수 없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휴우! 큰일 날 뻔했네. 하하!
후루미나미는 웃으며 창문을 향해 날아갔다. 몸을 최대한 웅크려 창문 밖으로 몸을 빼낼 수 있게끔 하는 것도 그녀는 잊지 않았다. 뒤늦게 카이다가 소리를 지르며 후루미나미를 뒤쫓았지만 그녀를 붙잡지는 못 했다. 후루미나미는 요란한 유리의 파열음과 함께 공중을 날아갔다.
후루미나미 나몬: 으. 따거라. 챠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아아. 안 돼! 후루미나미. 돌아와!
마유즈미가 멀어져 가는 그녀를 보고 망연자실하게 소리쳤다. 내 총으로는 로봇을 격추시킬 만한 화력이 부족했다. 마유즈미의 총을 빌린다고 해도 로봇을 향해 겨누었을 때는 이미 턱도 없이 멀어졌을 테고, 애초에 격추시킬 수도 없었다. 후루미나미를 죽일 수는 없었으니까.
나는 카이다라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미쳤고 즉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카이다 또한 나를 보고 있었다. 불만에 가득 찬 눈동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가 누구에게?
카이다 쿠로하: 너희 진짜 모자란 새끼들이다.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나? 흰 물건이 최악의 후보자 손에 넘어갔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응? 어떻게 할 거냐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너한테 그런 소리 듣기 싫어.
약간 주눅 들었던 마유즈미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크게 내었다.
히무로 시라베: 움직이지 마. 후루미나미는 놓쳤지만 너라도 잡아야겠어.
카이다는 악을 썼다.
카이다 쿠로하: 날 풀어줘야지! 난 저 년이 땅으로 내려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고. 플라잉 로봇을 따라잡을 수 있단 말이야! 모르겠어? 나는 이 밤에서도 눈이 보인다고! 지금이라도 뒤쫓아야 해!
히무로 시라베: 그런 말에 넘어가기에 나는 너무 많이 참았다. 너도 알겠지. 여기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말이다. 지금 움직인다면 무릎에 구멍을 내 주겠다.
나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카이다가 후루미나미의 추격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나는 욕심을 부리다 또 다른 위협을 풀어놓을 생각이 없었다. 용을 잡을 수 있는 게 호랑이뿐이라도 용과 호랑이가 함께 날뛰는 것보단 하나를 묶고 나머지 하나를 막는 게 나았던 것이다.
나는 카이다의 모든 움직임에 시선을 쏟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미간과 입술. 꽉 다문 이빨. 긴 속눈썹이 달린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눈동자는 나를 죽일 듯이 마주하고 있었고, 갈 곳을 잃은 손이 허리 옆에 둥둥 표류하고 있었다. 다리는 어딘가로 달려가기 위해 수축해 있었으며 발 또한 디딜 면적을 최대한 넓히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듯 양쪽이 평행을 이룬 채 앞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카이다가 느끼기에 자신의 모든 행동이 감시당하며 따라서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는 느낌을 주게끔.
카이다는 내가 총구를 당길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 기괴한 음성이 울리기 전까지는…
모노로그: 피해라!
모노로그가 바닥에서부터 솟아올랐다. 그것을 보자마자 나는 모노로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이해했다. 나는 카이다의 양 무릎을 향해 총을 쏘았다. 그러나 총알은 쩍 벌린 모노로그의 종이 입술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안 돼! 야아아! 이리 와!
마유즈미가 소리쳤다. 카이다는 기다렸다는 듯이 후루미나미가 깬 창문 쪽으로 달려가 틀을 훌쩍 뛰어넘었다. 더 쏴봤자 총알을 낭비하는 일임을 알았기에. 나는 총구를 내렸다.
그리고 뻔뻔히 우리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모노로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히무로 시라베: 모노로그. 이게 무슨 짓이지? 내통자를 대놓고 비호하기 시작한 건가?
모노로그: 불합리하게 느껴지겠지. 그러나 나중에는 지금 내가 카이다 쿠로하를 도와준 것이 너희에게 또한 좋은 일임을 알게 될 것이다. 후루미나미 나몬의 성정을 아직도 모르는가?
히무로 시라베: 살인 게임의 한복판인 이상 후루미나미 나몬이 저지르는 짓은 전부 살인 게임의 일부다. 모든 혼돈의 중심이 너에게 있지 않더라도 발생할 고통과 죽음은 너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가? 왜 개입하는 거지?
모노로그: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히무로 시라베. 그러나 안심해도 좋다. 내 개입은 여기까지니까. 후루미나미 나몬을 쫓는 것은 이제 내 수족에게 달린 일이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멈춰. 모노로그! 이건 진짜 반칙이잖아!
모노로그는 마유즈미의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을 통과해 사라졌다.
그리고 무대에는 뒤늦은 등장인물들이 올라왔다.
하기와라 우시오: 야. 상황 종료된 거 맞지? 그치? 둘 다 갔지?
이바라 쿠리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총소리가 들리길래 이걸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했는데.
칸나즈키 시노부: 너희도 실패했구나… 아쉽게 됐어.
야가미 토가: 칸나즈키 씨가 느닷없이 카지노로 향하시길래 어떤 일인가 했더니… 뭔가가 벌어졌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야가미의 질문에 대한 답보다는 한숨이 먼저 내 입 안에서 굴러 떨어졌다.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를 놓치다니.
마유즈미는 안절부절못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미… 미안해. 히무로. 내가 실수해서…
히무로 시라베: 늘 완벽한 사람은 없어. 이 자리에 널 제외한 누가 있더라도 실수했을 거야. 오히려 너보다 빨리 실수했을지도 모르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후루미나미의 성정을 고려하면 이후에 몇 번이고 그녀는 여지를 줄게 분명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오만하게 미끼를 살랑거리는 그녀의 낚싯줄을 끊어버리는 것.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 또한 들었다.
이게 마지막 시도였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후루미나미가 만들어낼 잔혹한 균열을 다시 바느질할 기회가 이번뿐이었다면…
모노로그마저 추하게 발버둥 칠 만큼. 자신의 내통자를 주저 없이 비호할 만큼 심각한 무언가가 이미 시작되었다면…
히무로 시라베: 후루미나미가 흰 물건을 가져갔고 카이다가 그 뒤를 쫓고 있어. 우리는 둘 다 놓쳐버렸고.
칸나즈키 시노부: 다들 미안해. 쫓아가려고 했는데 나도 실패했어.
이바라 쿠리스: 뭐?! 흰 물건? 어디서 찾았대?
히무로 시라베: …카지노에서. 일단 오늘은 잠을 자자. 후루미나미는 결국 우리를 찾아올 거야.
아니면 흑막에게 흰 물건을 빼앗겨 찾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과연 둘 중 어느 쪽을 응원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나에게 있어서는 둘 모두 적이었기 때문이다.
카이다 쿠로하: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미친년… 팔에 힘이 안 떨어지나?
카이다는 몇십 분 동안 달리며 의아함을 느꼈다. 아무리 체력이 좋다고 해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충분히 속력이 붙은 플라잉 로봇이 하나의 점처럼 보일 만큼 높이 날아올라 있음에도 후루미나미는 플라잉 로봇을 하강시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모노로그가 급하게 지시한 것을 다시 되새겼다. 흰 물건을 탈환할 것. 그러나 애초에 후루미나미를 몰아세웠을 때 과연 그녀가 탈출 장치를 사용하지 않을까? 카이다는 이미 그 전망이 어두움을 알고 있었다. 후루미나미는 빼앗길 바에야 자신이 쓰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카이다는 달릴 수밖에 없었다.
모노로그: 선금을 주겠다. 카이다 쿠로하.
모노로그는 카나리의 숙소 문 앞에서 그를 괴롭히던 카이다에게 찰나의 체험을 주었다.
모노로그: 고아원에서 포악함을 담은 채 살던 너에게 관심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떳떳하지 않은 직업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들은 모종의 사유로 증발하더라도 문제가 없을 아이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고아와 혈투를 나누는 너를 발견했지. 너는 곧 그들에게 스카우트되었다. 여기까지는 너도 아는 일 아닌가?
카이다 쿠로하: 그건 기억나. 왜인진 몰라도 고아원에서 조직으로 가기까지의 일은 기억이 나.
모노로그: 카이다 쿠로하라는 이름은 조직에서 받았을지 몰라도, 그 전의 너는 따로 존재한다. 네가 그런 몸을 얻은 것 또한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살수 일을 맡은 것또한 아니었지. 적어도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중간에서 정보를 캐거나 자잘한 심부름을 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네 담력과 남을 가차 없이 해칠 수 있는 성정에 주목한 그들은 너에게서 가능성을 봤다.
카이다 쿠로하: 무슨 가능성 말이야?
모노로그: 사람이 아닌 존재로 거듭날 가능성 말이다. 선금은 여기까지다. 뛰어라!
모노로그는 꽤 오래 말했던 것 같으나 탑에서는 몇 초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카이다는 숨이 거의 차오르지도 않았지만 설령 숨이 턱 끝까지 차더라도 달렸을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을 버리고 간 가족들은 어디에 있는지. 그녀는 알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았다. 그것은 설령 모노로그가 언젠가 자신을 헌신짝 버리듯 내치리라는 것을 그녀가 알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었다. 카이다는 이 거래를 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근시안적인 판단이 아니야. 앞날을 보장받는 놈들만이 나를 비난하겠지. 흑막을 쓰러트리는 데 협력하고 함께 알아내면 되지 않느냐고. 그건 그것들이 내일 눈을 뜨고 살 수 있으리라는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신은 세끼 밥을 먹고 얼굴을 씻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 단단한 믿음으로 자리 잡아 있지. 생존을 위한 투쟁이나 사선을 넘는 일따위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 테고. 그런 삶을 사는 것들은 나를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받을 생각도 없다. 난 그저 내가 알고 싶은 것들을 알 수 있다면 족하다. 그녀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카이다는 새를 쫓는 개처럼 달렸다. 탑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시야에 보이는 후루미나미에게만 집중했다. 그리고 흰 물건을 빼앗는다면 마침내 듣게 될 자신의 모든 비밀과 소거된 기억들, 뒷배경을 들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들떴다. 카이다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기 자신을 회복하고 비로소 한 명의 사람이 되는 일이었다.
카이다 쿠로하: 다 꺼지라고 해. 다 필요 없어. 난 양보 안 해. 너희가 나한테 양보해야 한다고. 나한테 이 정도는 줘도 되는 거잖아. 허락 좀 해 달라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지. 카이다는 문득 플라잉 로봇의 고도가 서서히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기쁘다는 웃음을 짓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플라잉 로봇을 뒤따랐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노로그에게서 보답으로 받으리라는 생각에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흰 물건. 모노로그. 그 사이의 관계는 아랑곳하지 않는 그녀는 실로 써먹기 좋은 도구였다. 카이다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플라잉 로봇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 것이다.
카이다는 플라잉 로봇이 고도를 낮추다 땅속으로 푹 들어가 버렸을 때 그만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기진맥진한 후루미나미 나몬을 플라잉 로봇에서 낚아채고 밧줄을 끊은 뒤. 저항의지를 상실시키고 흰 물건을 가져간다. 그렇게 쉬워야 했던 일이 눈앞에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카이다는 당혹감보다 불합리함을 먼저 느꼈다. 대체 무슨 장난질이지? 난 분명 플라잉 로봇을 뒤따랐다고. 한눈을 판 적도 없어! 그럴 시간이 있었을 리가…
있었다.
카이다는 산산조각 난 기대에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가 마유즈미와 히무로의 앞에 붙들려 있었을 때. 후루미나미가 플라잉 로봇을 타고 탑 밖으로 나갔을 때. 남몰래 로봇에서 내리고 몸을 숨긴 채 플라잉 로봇만을 공중에 띄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까마득히 높은 하늘에 띄우면 거기에 사람이 매달려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분간할 수 없게 되니까.
카이다 쿠로하: 안 돼.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
기회였는데! 모노로그 새끼가 통 크게 선금까지 제시한 걸 보면 정말 큰 사안이었는데! 눈앞에서 놓치다니. 저 개 같은 로봇 때문에! 마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시라베! 이 연놈들 때문에…!
카이다는 자신 주변에 있는 장미들을 뿌리째 뽑으며 그것을 주변으로 내던졌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으응… 윽…
나는 꿈을 꾸었다. 기분 나쁜 꿈이었다. 눈앞이 깜깜한 와중에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꿈. 해변에서 내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게 만든 그 여자가 다시금 나를 찾아왔다.
너 왜 그렇게 쓸모가 없어? 흰 물건을 붙잡았어야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누구세요…? 또 당신이세요?
나라면 해냈을 거야. 쉽게 해낼 수 있었을 거라고. 내가 그렇게 도와줬는데도 아직 한심하기 짝이 없어. 네 재능? 글씨 쓰는 게 뭐가 대단하다는 거지?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단지 꿈에서만 들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문득 떠올렸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맞아. 다. 당신이지…? 아까 나한테 막 속삭인 사람. 후루미나미 다리를 쏘라고 속삭였던 사람. 당신이었어! 그거 때문에 잠깐 어지러워서 제대로 못 쏜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왜 후루미나미를 쏴야 해? 죽이라고? 적어도 크게 다칠 거 아니야!
애초에 밖에 나가보라고 말한 게 나인데. 배은망덕하긴. 네가 어디 쓸모가 있는 사람 같아?
마유즈미 나데시코: 무슨… 당신 대체 누구야! 왜 자꾸 내 꿈에 나타나? 내가 뭘 잘못했다고!
넌 내가 누구인지 이미 알아. 나데시코… 아니. 이 이름으로 부르면 안 되나? 응?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데시코가 내 이름인데…?
아닌데? 너는 아무것도 몰라. 네가 누구인지도 모르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멍청하고 순진하다고!
그때부턴 무섭다는 생각보다도 당황스럽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당신 대체 누구길래 이래요…?
넌 날 잊을 자격이 없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 또한 정당하지 않아. 알아들어? 내가 네 삶을 살았다면 너보다 훨씬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을 거야… 내가 네 자리에 있어야 했다고. 넌 쓰레기야. 쓰레기. 쓰레기! 네 삶을 나에게 내놔… 날 자세히 보고. 기억해내 봐!
그 순간 귀신이 나를 덮쳤다.
나는 그 얼굴이 모르는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왜인지 이미 그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마유즈미 가문의 장녀. 희망봉 학원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적은 없지만 대몰락 이전에는 초고교급 서예가 자리가 곧 그녀에게 돌아갈 것이라며 그녀를 고평가 하는 시각이 많았다. 글씨에 대한 미학의 진수. 예술계는 마유즈미 나데시코를 그렇게 불렀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저 주머니를 불리려는 업계 상의 지지에 불과했으나, 그녀의 예술적 재능만큼은 거짓이 아니었다.
마유즈미 가문은 당연히 대몰락을 오래 버티지 못했다. 본가는 불에 탔다. 장녀를 제외한 자녀들은 폭도들에 의해 납치되어 행방이 묘연해졌다. 가주는 목숨을 잃었다. 거느리고 있던 보디가드와 고용인들은 모두 쓸모를 잃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마유즈미 나데시코만큼은 혼란 속에서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그리고 재단은 그녀를 찾아냈다.
메리가 고안한 감시 카메라 탈취 기능과 예상 경로의 분석을 통해 기관은 마유즈미 나데시코를 수송하는 차량을 기습했다. 차량은 전복되었다. 재단 인원들의 제압이 끝나고 마유즈미 나데시코를 찾았을 때. 그녀는 미동도 할 수 없게끔 몸을 포박당하고 눈에는 안대를, 입에는 재갈을, 귀에는 귀마개를 착용하고 있었다. 외부 세계에서 차단되어 있는 채로 그녀의 목구멍 안에서는 울음과 애원. 비통함이 뒤섞인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희미한 암모니아 냄새는 그녀가 극도로 압박적인 환경을 이겨내지 못했음을 알려주었다. 소중한 인적 자원이 아니라 죄인 혹은 쓸만한 연료를 수송하는 듯한 모양새에 재단을 향한 거부감이 치솟았다. 이것이 초고교론자란 말인가? 이러고도? 초고교급 재능을 가진 이들이라면 일단 수집하고 보는 게 어떻게 초고교급의 신봉자라고 할 수 있는 건가.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녀의 주박을 풀었다. 몸을 묶고 있는 밧줄을 끊고 안대를 벗기며 나는 말했다.
"카텟 기관에서 왔습니다. 당신은 구조되었습니다. 이제 안심하여도 좋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달래는 재주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재갈을 풀자 그 점은 더욱 명확해졌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안구가 튀어나와 빠질 것처럼 눈을 크게 뜨더니,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중얼거렸던 것이다.
"언니. 왜… 왜 이제 왔어? 어디 갔다가 이제 온 거야. 나 정말… 정말 무서웠단 말이야. 언니…"
그리고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정신을 잃었다.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유아기로 인한 사회성의 부족. 수동적인 성향.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정서적 불안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까지 겹치니. 그녀는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
"제 이름은 히무로 시라베. 카텟 기관에 소속된 프로파일러입니다. 말을 놓아도 되겠습니까?"
"저기… 제가 뭘 하면 돼요?"
"저는 말을 놓아도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죄… 죄송해요! 놓으세요!"
"내가 말을 놓는다면 너도 함께 놓아야 해."
"알겠어…"
마유즈미 나데시코를 고평가 한 이는 없었다. 단지 그녀를 재단에서 지킬 뿐, 그녀가 재단에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못 써먹겠어. 히무로. 적당히 행정 업무나 맡기면 돼. 그러는 초고교급들 많잖아. 요즘 시대에 초고교급 댄서나 시인들 써먹기 어려운 것처럼 서예가도 써먹기 어려운 거야."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부장님."
"왜지?"
그러나 사람 마음을 모르는 금수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녀 또한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또한 갈 곳 없는 처지로 사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았기에. 그녀를 돕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했다.
"상투적인 취조니 부담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 네 신원과 기원을 알고 있으니까. 말이 놓는 게 익숙하지 않으면 편하게 '야' 라고 말하는 식으로 시작해도 돼."
"아니야. 놓을게. 그런데… 왜 테이블에 찹쌀떡 상자를 잔뜩 쌓아놓은 거야?"
"인생은 찹쌀떡 상자처럼 뭐가 나올지 모르는 법이지."
"…찹쌀떡 상자에선 찹쌀떡이 나오지 않을까?"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두 명 모이면 무엇이 되는가를 나는 그때 깨달았다.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그냥 의사소통이 어려운 두 명일 뿐이다.
"…커피와 찹쌀떡을 먹어. 편하게 이야기하자."
"아. 먹으라고 둔 거야? 그럼… 잘 먹을게."
찹쌀떡이 그녀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리라고 나는 추측했고, 들어맞았다. 그 뒤 몇 번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나는 마유즈미에게 비상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단지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것이 아니라 필적을 감정하고 글씨를 쓴 자의 감정이나 성정마저 읽어낼 수 있는 기예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그녀는 요인 추적과 용의자 색출에 큰 보탬이 되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그렇게 카텟 기관에 적응해나갔으며, 종국에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핵심 인력이 되었다.
그러나 내게는 한 의혹이 남았다.
"언니…"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마유즈미의 장녀였다. 그녀에게 손윗누이가 있다는 정보는 어디에서도 얻지 못했다. 그런데 언니라고?
이치에 맞지 않는 일. 나는 마유즈미와 관련된 내용을 찾아 취합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마유즈미 가문을 오래 섬긴 한 사용인에게서 의미 있는 정보를 입수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어릴 때. 그녀보다 두 살 정도 많은 호위가 그녀에게 붙었다는 것이다. 나이는 어렸지만 실력은 확실하다고 불린 호위. 그녀는 양친에게서 정서적으로 분리된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보모 노릇을 하면서 그녀와 유난히 친하게 지내다가. 어느 순간 마유즈미 가문을 떠났다는 것이다.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그 호위를 언니라고 부를 만큼 친밀하게 생각했다면, 혼란과 공포 속에서 그녀에게 다가온 내가 호위로 보였을 가능성 또한 존재했다. 그녀의 부재에 애석해했다면 환각을 볼 수도 있었겠지. 의문은 사라졌다. 더 많은 정보의 풀이 필요하긴 했지만 증언을 얻을 수 있는 자는 한 명 뿐이었기에. 나는 그 사안을 묻어버리기로 했다.
토키와 아유키: 이게 잘 하는 짓인지 모르겠어. 모리.
토키와 아유키는 카이다의 전용실 안에서. 서늘하게 빛을 내는 날붙이들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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