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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3

더 단크 타워 챕터 3 - 0

by 도타싫어! 2022. 4. 1.

 

키와 아유키: 어? 아. 알았어.

 

유즈미 나데시코: 나중에 돌려줘야 해!

 

23T가 나나시의 팔을 채 계단 위로 사라졌다. 카텟 기관 출신 말고도 그들 둘이서만 나눌 이야기가 있다는 걸까. 나는 나나시와 23T를 조금 더 예의 주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나시는 캐롤이 죽은 이후 불안정해졌으며… 23T는 그런 나나시를 어디까지나 지지할 것처럼 보였다.

 

같은 편이라고 믿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살인 게임 안에서 누군가를 온전히 믿을 수도 없었다.

 

단지 믿을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앗. 저기 히무로가 이 쪽으로 오는데?

 

나는 마유즈미에게로 다가가 23T를 모방했다.

 

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대화 좀 하자.

 

유즈미 나데시코: 왁… 대화?

 

다만 그녀를 마음대로 끌고 다니지는 않았다. 나는 마유즈미의 손을 붙잡고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추었다. 나는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다 그녀가 느끼기에 내 행동이 겁박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마유즈미의 손을 대신 보았다.

 

무로 시라베: 앞일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아. 혹시 급한 사정이 있어?

 

말을 끝내자마자 손 위에 흰색의 잔상이 내려오더니,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따가움이 손등에 울렸다.

 

마유즈미는 내 손 위에 자신의 반대편 손을 올리고 침을 꿀꺽 삼켰다.

 

유즈미 나데시코: …중요한 이야기인 거지?

 

무로 시라베: 분명.

 

유즈미 나데시코: 그럼 가자. 토키와. 내일 봐!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와 마유즈미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계단 위를 향해 달려갔다.

 

유즈미 나데시코: 이번엔 누구 방으로 가? 내 방?

 

무로 시라베: 내 전용실로 가자. 중요한 사안을 다루기 전에 매듭지어야 하는 게 있어.

 

나는 자물쇠를 벌컥 열고 들어가자마자 내 책상 서랍을 열고 안에 들어 있는 것에 손을 넣었다.

 

무로 시라베: 먼저 너에게 물어볼게.

 

마유즈미는 재빨리 손을 들며 말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커피 마시겠냐고? 마실래.

 

무로 시라베:계속 총을 휴대할 생각이야?

 

나는 벨트와 홀스터를 꺼내며 말했다. 마유즈미의 얼굴이 살짝 빨개지더니 그녀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다들 재판 때문에 뒷전에 놓은 사실이지만, 마유즈미는 여전히 44구경을 소지하고 있었다. 이제 카이다와의 대치가 끝났으니 44구경을 어떻게 할지는 그녀에게 달린 셈이었다.

 

가지고 있으면 좋겠지. 없는 것보단 낫겠지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권총은 위험한 도구였다. 분명 치명적이고 그만큼 살인 게임에서 이점을 주겠지만, 그만큼 권총을 맹신하다가 실수하거나 권총을 노린 이에게 노려질 가능성이 있었다. 마유즈미가 탑으로 돌아온 뒤에는 더욱 그 가능성이 커질 터였다.

 

그럼 그 권총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단 나는 마유즈미의 의지를 듣기로 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어… 일단… 네가 가지고 있는 편이 나을 테니까 너이게…

 

내가 가지고 있는 편이 낫다?

 

무로 시라베: 꼭 그렇지만은 않아. 나는 부득이한 경우에만 두 손에 총을 들어. 총잡이가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은 권총 한 정만을 사용하는 거야. 그게 가장 정확하고 강력해.

 

유즈미 나데시코: 그래도… 네 총알이 떨어지면 내 총을 이어 쓸 수 있잖아.

 

무로 시라베: 너와 내가 함께 싸운다면 총을 이어 쓰는 게 아니라 동시에 쏠 수도 있지. 네가 총을 들고 싶지 않은 거라면 그렇게 얘기해. 네 뜻을 존중해줄 테니까. 그렇지만 단지 내 솜씨가 조금 더 좋다던가 하는 이유만으로 총을 내게 주는 거라면 그러지 마.

 

무로 시라베: 내 의견만 말하다면 네겐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해. 네게 앙심을 품었을 카이다를 생각해 봐.

 

마유즈미는 카이다를 떠올린 듯 몸을 긴장시켰다.

 

유즈미 나데시코: 맞는 말이긴 해. 그런데 내가 총을 가지고 있으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잖아! 위험해. 아니. 난 위험한 사람이 아니지만 혹시 모르잖아!

 

총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 달라는 게 아니라, 총으로 뭔가 할 것 같으니 주겠다니. 마유즈미의 주장은 통상적인 것과 정반대에 있었다.

 

무로 시라베: 좋은 지적이야.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너와 난 서로 불가침적인 영역을 제외하면 일상을 대부분 공유해야 할 거야.

 

마유즈미의 얼굴이 다시금 상기되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일상… 공유… 에…?

 

무로 시라베: 내키지 않고 번거로운 일이겠지만 나는 너를 감시하고, 너는 나를 감시해야 해. 그게 총을 가진 이들의 책임이야.

 

총을 가진 사람은 악인이 아니어야 한다. 총은 너무나 편리하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총을 독식하는 체제는 이상적이지 않았다. 당장의 생존에는 유리하겠지만, 두 정의 총을 노려오기에 위험이 더더욱 커질 게 분명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그럼… 우리 앞으로 짝꿍 맺어?

 

무로 시라베: 짝을 이루는 동료? 이미 우리는 그것 같은데.

 

마유즈미는 머리를 긁적였다.

 

유즈미 나데시코: 히… 히무로 너도 그러기는 싫지 않아? 그럼 너랑 나랑 꽤 붙어 있어야 할 텐데…

 

무로 시라베: 좋냐 싫냐의 문제가 아니야. 그래야만 해. 그러지 않으면 안 돼. 총의 위험은 커. 어디서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지. 네가 총을 마구잡이로 쏘지 않으리란 건 알지만 추호의 의심조차 거두기에는 너무 위험해.

 

유즈미 나데시코: 시… 싫지는 않은 거지…?

 

나는 마유즈미가 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무로 시라베: 내가 왜 친구를 싫어하리라고 생각해?

 

내가 그 정도로 냉혹한처럼 보였던가. 행동을 조금씩 바꿔나가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유즈미 나데시코: 그렇네. 내 생각이 이상했어…

 

마유즈미가 납득했기에 나 또한 안도했다. 나는 마유즈미에게 벨트와 홀스터를 건넸다.

 

무로 시라베: 허리에 채워서 홀스터에 총을 넣어. 그럼 사격에 용의하게끔 휴대할 수 있을 거야.

 

유즈미 나데시코: 아. 알겠어.

 

마유즈미가 주섬주섬 벨트를 하카마에 두르는 사이. 나는 마유즈미가 원하던 대로 커피와 찹쌀떡을 준비했다.

 

곧 수면을 취해야 할 상황에 커피라. 그렇게 좋은 선택은 아니었지만 하루 정도야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잔의 커피면 어떤가. 마유즈미의 긴장을 이완시킬 수 있지 않은가.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마유즈미는 믹스커피가 달콤하고 부드러운 풍미를 내기 시작하자 이끌리듯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허리에는 어느새 벨트와 홀스터가 매어져 있었다. 44구경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주인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컵의 손잡이가 마유즈미 쪽으로 가게끔 잡고 그녀에게 건넸다. 내가 마실 것은 끓이지 않았다. 마실 생각이 나지 않았다.

 

유즈미 나데시코: 고마워… 앗. 네가 안 마실거면 그냥 내가 끓여도 되는데.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난 커피를 마시기보다 급한 일이 있어서.

 

유즈미 나데시코: 아까 말했던 중요한 용건? 그거 결국 뭐야?

 

나는 가장 먼저 내가 할 일을 했다.

 

무로 시라베: 미안해. 마유즈미.

 

나는 마유즈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날 만류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유즈미 나데시코: 그러지 마… 히무로. 일어나.

 

그녀는 나를 만류했지만, 놀란 기색은 없었다. 마유즈미는 내가 고개를 숙이자마자 내가 무엇에 대해 사과하는지 이해한 것이다. 그것은 직관만으로 가능한 일이었고, 그녀는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네가 나이토에게 총을 주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어. 아니면 하기와라에게 주는 것도…

 

무로 시라베: 아니. 나는 그 자리에 돌아가더라도 너에게 총을 주었을 거야.

 

유즈미 나데시코: 으엥? 미안하다며!

 

마유즈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로 시라베: 너에게 미안한 마음과 그 상황 당시의 옳은 선택은 별개야. 그렇지만 나조차도 그 행동이 초래한 일은 부정할 수 없지… 내 책임은 분명해. 모리의 행동. 탑에서의 간섭. 나는 여러 변수들을 고려하지 못했어.

 

유즈미 나데시코: 그렇지만 그건 네 잘못이 아닌걸…

 

무로 시라베: 잘못은 아닐지 몰라도. 죄겠지. 나는 부족했어. 모든 면에서.

 

나는 한 가지에만 특출나게끔 개조된 사람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 한 가지 방향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부족했다. 로가 없는 한 보충할 수도 없는 결점들.

 

무로 시라베: 운이 없었고, 명석히 판단하지 못했으며 상황을 제어하지 못했고, 맞서야 하는 적과 맞서지 못했지. 앞일을 선각하지 못했고, 새로운 선택지를 개척하지 못했어. 그리고…

 

나는 말을 멈추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그렇게 말하지 마. 넌 되게 잘 했어. 히무로.

 

나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벌렸으나 입 안에서 나온 것은 침묵뿐이었다. 확실한 위화감이었다.

 

나는 로에 대해 알았다. 아마 초고교론자가 아닌 이들 중에선 내가 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주입된 재능. 그들 각각의 약점. 모든 것을.

 

그렇지만 마지막 로가 누구인지, 그 특성이 무엇인지는 기억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순간 확정 지었다. 내가 마지막 로를 떠올리지 못하는 것은 기억 소거의 작용 때문이었다. 모노로그는 마지막 로에 대해 내게 숨겨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사실이었지만, 당장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생각은 없었다. 로보다 중요한 일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겠지만… 일단 사과를 끝낸 뒤로 미뤄두었다.

 

무로 시라베: …다시. 네가 카이다와 맞서게 만든 건 내 생각이었으니. 내가 위험 속으로 널 떠민 꼴이야.

 

유즈미 나데시코: 난 괜찮대두. 잘 맞섰으니까! 카이다한테서 한 대 얻어맞기는 했는데… 지금은 전혀 안 아파.

 

무로 시라베: 그랬지… 카이다와 물리적인 격돌이 있었다고.

 

유즈미 나데시코: 응…? 당연하지. 안 그러면 어떻게 쫓아내?

 

나는 카이다의 힘을 생각했다. 그녀는 사람이 아니라 맹수 같은 존재였다. 어지간한 총알은 그녀를 위협하지도 못하는데. 44구경일지라도 카이다를 쫓아낸 것은 다시 생각하여도 의외인 일이었다.

 

무로 시라베: 굳이 언급할게. 카이다가 널 죽이려 했다면 널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을 거야. 

 

유즈미 나데시코: 내가 이겼잖아! 걔도 놀란 기색이더라. 날더러 막 욕을 하는데. 어림도 없어! 날 얕보지 말라구 해. 흥.

 

무로 시라베: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다시 생각해 보면 기이해. 카이다는 훈련된 첩자야. 또 다른 사람들을 아래로 보는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분명 네가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고 접근했을 거야.

 

무로 시라베: 카나리가 모닥불 근처에서 인질을 잡았으니 물러나도 좋다 판단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뒤틀린 성정을 생각하면 분명 널 꺾으려 들었을 텐데.

 

유즈미 나데시코: 카이다의 얼굴에 총을 들이댔어. 용기가 솟아나서 그랬나 봐. 그래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거야.

 

유즈미 나데시코: 저번에 네가 나한테 말했잖아. 그 교리를 욀 때면 네가 내 곁에 있으리라고. 그래서… 그렇게 생각했어.

 

무로 시라베: 아. 그렇군.

 

내 얕은 격려를 그렇게까지 반영해 주었다니. 내가 기쁨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면 기뻐서 방방 뛰고 싶었을 것이다. 분명.

 

유즈미 나데시코: 그래서 미안할 일이 없다고 한 거야. 내게 용기를 줬잖아. 내가 계속 나데시코로,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처럼 지내지 않게끔. 병 주고 약 준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거야!

 

난 여전히 그녀의 말에 납득하지 못했다. 마유즈미 또한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챈 듯이 내게 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유즈미 나데시코: 아직도 마음이 불편해?

 

무로 시라베: 그래.

 

유즈미 나데시코: 내 생각인데. 그건 네가 착한 사람이라서 그래.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해석이었기에 나는 섣불리 반응하지 못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왜 그래?

 

무로 시라베: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하기 어려운데. 또 어느쪽이라도 이해하기 어려워.

 

유즈미 나데시코: 난 진담이야! 네가 그만큼 친구를 걱정해준다는 말과 똑같잖아.

 

무로 시라베: 그런가? 나는 착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심리를 장악당하는 듯한 기분에 빠졌다. 나에게 정말 그런 면모가 있다면 그녀는 나보다 히무로 시라베라는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셈이었다. 마유즈미의 통찰력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유즈미 나데시코: 어휴. 그렇게 미안해? 여전히 마음이 후련하지 않다고?

 

무로 시라베: 그래.

 

마유즈미는 곰곰히 생각에 잠기더니 경쾌하게 한 번 손뼉을 치고 말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그럼 이렇게 하자. 나중에 내 소원 하나 들어주기!

 

무로 시라베: …그걸로 충분하다고?

 

유즈미 나데시코: 웅!

 

값을 받고 죄책감을 청산하자는 이야기. 고작 그런 일로 빚이 갚아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마유즈미가 원하는 것이 협상 후 관계의 정상화라면, 내가 그것에 거부하는 것 또한 도리가 아니었다.

 

무로 시라베: 어떤 소원을 원해?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해 줄게.

 

유즈미 나데시코: 음… 뭘 빌까… 일단 그건 나중에! 일단은 넘어가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보. 나는 그녀의 말마따나 다음 용건으로 넘어가기로 했으나, 소원이라는 사안에 대해서는 결코 잊지 않게끔 머리에 새겨 두었다.

 

다음 용건이란 그녀의 감정이었다.

 

무로 시라베: 이제 울어.

 

마유즈미는 눈을 끔뻑였다.

 

유즈미 나데시코: 무슨… 소리야. 히무로?

 

무로 시라베: 곧 울 것처럼 보였는데. 내가 잘못 판단한 건가?

 

열려있는 마유즈미의 입이 조용히 닫히고 열리기를 몇 번 반복했다. 그녀는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쭉 들이켜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사실이니까 할 말은 없어. 어떻게 안 거야?

 

무로 시라베: 널 유심히 봤어.

 

나는 감정을 이해하는 데에 약하지만 다른 이의 변화를 관측할 수는 있었다. 그것은 직관만을 사용하고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 소중한 이를 잃은 그녀에게 나는 할 말의 갈피를 찾지 못했다. 유감이다. 내 생각은 그게 전부였다. 그녀가 무엇을 느끼고 있을지는 보는 것만으로 실마리를 잡았다. 상실감. 미래를 향한 불안감. 허전함. 혹은 분노. 억울함…

 

나는 나 자신조차 어떤 말을 할지 확신하지 못하는 채로 입을 열었다.

 

무로 시라베: 캐롤은 필요한 사람이었지. 다른 이들의 버팀목이 될 수 있었으니.

 

마유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즈미 나데시코: 맞아. 나 처음 여기 왔을 때 캐롤 씨에게서 도움을 받았어. 나 때문에 터치를 쓰는 일에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어.

 

유즈미 나데시코: 나 달래겠다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신 거지. 캐롤 씨도 가슴 한 켠에선 나를 조금 원망하거나, 번거롭게 생각했을지도 몰라.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할 거야.

 

유즈미 나데시코: 하지만 캐롤 씨는 늘 괜찮은 척을 하셨어. 캐롤 씨도 무섭고 불안했을 텐데 다른 이들을 도와주셨는데… 마지막에 어떤 표정을 지으셨는지도 난 알 수 없어. 곁에 있어 드리지 못했어. 그게… 너무 미안해.

 

나는 그 심정을 가늠할 수 있었다.

 

무로 시라베: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은혜만큼 보답하지 못하는 건… 그 사람에게 빚이 남은 듯한 느낌을 주지.

 

나는 메리에게 은혜를 갚지 못했다. 난 여전히 메리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있지만… 그 가능성은 아무리 고려해도 낮았다. 만약 누군가가 메리가 죽었느냐, 살았느냐를 내 목숨을 담보로 맞추라고 한다면 나는 죽었느냐를 선택할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납치당했다면 그녀도 죽을 수 있으니.

 

이성적인 판단으로 그녀는 죽은 사람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유령에라도 보답하기 위해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마유즈미 또한 그렇게 될 필요는 없을지도 몰랐다.

 

무로 시라베: 너에게는 만회할 기회가 있을지도.

 

유즈미 나데시코: 만회…? 만회라니?

 

나는 세 번째 시련의 불청객을 떠올렸다. 카이다 말고 세 번째 시련에 나타난 그녀. 미도리카와 아쿠토.

 

이곳은 가상현실이었다. 죽은 시체를 우리가 보았다고 해도 그것은 얼마든지 덧씌워질 수 있었다. 탑 안에서는 죽음조차도 모노로그의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했다.

 

그런 모노로그는 이렇게 말했었지.

 

모노로그: 너희 모두. 죽은 이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지 않나?

 

모노로그는 그들을 다시 살려낼 수 있는 것이다. 모리의 추측이 맞았다. 죽은 이들은 얼마든지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분명히. 좋은 일은 아니었다.

 

죽은 이를 향한 향수는 강력하다. 또 살려야만 하는 사람을 살릴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기회를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 모노로그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고 있었다.

 

나는 파란을 예감했다.

 

바라 쿠리스: 으윽… 무거워!

 

나즈키 시노부: 나도 들고 싶어.

 

하기와라, 칸나즈키, 이바라는 3층에서부터 나이토의 묫자리를 만들기 위해 관을 옮기려 했지만 순탄치만은 않았다.

 

기와라 우시오: 너는 키차이 때문에 관 못 들어. 두 사람이나 빠지니까 진짜 힘드네…! 그러고 보니 말인데. 모리 관도 옮겨야 해? 애초에 다 빈 관이니 모리 관이라는 표현은 조금 이상하지만… 내 말 뜻 알잖아.

 

바라 쿠리스: 이… 일단 이것부터 다 옮기고 생각하자. 끄응…!

 

턱도 없이 부족한 그들을 향해 한 이가 계단을 올라왔다.

 

가미 토가: 제가 함께 해드리죠.

 

이바라와 하기와라는 굵은 목소리가 울린 편을 홱 돌아봤다. 그들이 나이토의 묫자리를 만들기 위해 관을 옮기는 도중. 야가미가 그들 앞에 성큼성큼 나타났다.

 

나즈키 시노부: 안녕. 네 얘기 많이 들었어.

 

가미 토가: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만.

 

바라 쿠리스: 야가미…! 여긴 왜…

 

이바라가 눈을 크게 뜨고 야가미를 경계했다. 말도 몇 번 나누지 않았던 미도리카와지만 이바라는 그녀와 조금만 더 친해질 수 있었으면 좋았으리라고 아쉬움을 느꼈다. 그런 그녀의 앞에 살인자가 나타났다. 뻔뻔히 내통해놓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있는 야가미 토가.

 

이바라는 야가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기와라 우시오: 키가 너무 작으면 안 돼. 너무 큰 놈도 마찬가지야.

 

가미 토가: 여러분들이 관 앞을 드시고 제가 뒤를 받치면 됩니다. 무게중심이 조금 흔들리더라도 저는 들 수 있습니다.

 

기와라 우시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관을 들어주신대? 관짝댄스 추려는 거면 타이밍 잘못 골랐어. 저번에 나랑 같이 췄어야지. 지금 추려하면 이바라한테 볼따귀 날아가.

 

가미 토가: 저는 그런 짓 안 합니다.

 

기와라 우시오: 아. 그러셔. 젠틀하고 냉철한 살인자는 사람 관짝 보내는 데에만 관심이 있지.

 

바라 쿠리스: 하기와라. 그냥 대꾸하지 말고 가자…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알아.

 

가미 토가: 내통자 일은 그만뒀습니다. 정말로.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탑의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하듯이요. 제가 살인자라는 생각에 갇혀 계시면 안 됩니다.

 

기와라 우시오: 팽당했다고 태세전환이 오코노미야끼 뒤집듯 하시네. 일단 드는 건 찬성. 너 힘센 건 사실이니까 부려먹긴 해야겠다. 이바라. 어떻게 생각해?

 

야가미는 뻔뻔했다. 그러나 이바라는 왜인지 그 뻔뻔한 말이 거짓말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바라 쿠리스: …갑자기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을 텐데. 꿍꿍이를 가지고 그러는 거라면 관둬.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 보여주기 식으로 관을 드는 것보단 그게 나아.

 

가미 토가: 이유라면 있습니다. 나이토 씨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게 맞섰고 저를 꺾으셨죠. 또 카이다 씨에게 또한 맞섰습니다. 몸이 상하고 자신이 죽을지언정 신념을 지켰어요. 그러니 나이토 씨에겐 존경심이 들 수밖에요.

 

기와라 우시오: 말하면 말할수록 거짓말 같으니까 빨리 들기나 해. 야가미.

 

가미 토가: 그러죠.

 

이바라와 하기와라, 야가미가 관을 옮기는 것을 칸나즈키가 뒤따랐다.

 

작업은 미도리카와 아쿠토가 죽었을 때와 동일하게 진행되었다. 삽으로 땅을 파고, 관을 그 안에 넣는 일이었다.

 

중간부터는 하기와라의 힘이 조금 부치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 대신 칸나즈키가 삽으로 땅을 팠다. 잠시 한숨을 돌리는 사이 하기와라는 이바라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울었다.

 

이바라 쿠리스에게 있어 친구란 소중한 것이었다. 그녀가 바닥을 쳤을 때. 먼 친척보다도 먼저 그녀를 도우러 온 것은 그녀의 친구였다. 카스미. 치에코. 한 명은 함께 울며 감정을 공유해 주었고 한 명은 차분하게 그녀를 진정시켜 주었다.

 

그러나 이제 카스미와 치에코는 없다. 이바라는 두 명의 시체를 영상에서 보았던 것이다. 비단 두 사람의 시체뿐만이 아니었다. 절친이 아니더라도 그녀와 무척 가까운 이들에서부터 여기저기 얽힌 인연들이.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이토 또한 죽었다.

 

이바라는 죽음이 그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이고, 삶은 그들을 그 시간대에 내버려 두고 계속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독을 속에 품을 때 사람의 속이 곪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쉽게 눈물을 흘렸다. 오직 눈물을 통해서만 배출할 수 있는 한이 있었다.

 

이바라의 눈물이란 너무 빨리 상실을 겪으며 배운 수용의 매커니즘이었다. 조금 어른스러운 그녀에게 죽은 이를 위한 제단이란 집이 아니라 마음에 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기억하되 매 순간 매 초마다 속이 갈려나가지 않게끔 자연스레 희미하게 만들어야 했다. 남겨진 사람은 이야기를 마쳐야 한다는 것을, 이바라는 이미 알고 있었다. 눈물은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하기와라는 생각했다. 아. 이런. 나까지 울게 생겼네.

 

그러나 하기와라는 울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잠시 불편한 낌새의 주름이 두드러기처럼 올라온 뒤 다시금 사그라들 뿐이었다.

 

기와라 우시오: 이제 나이토를 못 본다니. 진짜 기분 더럽네…

 

결국 하기와라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머리가 약간 혼란스러움을 인지했다. 그는 슬픈 일을 피해온 지 몇 년이 되었다. 우울한 것들을 외면하고 그 안에서 익살을 찾는 식으로 슬픔을 대한 그는, 오랜만에 마주한 비탄의 맨얼굴을 보고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뭐지? 눈물이 나와야 할 것 같은데. 아무리 나라도. 울기보다는 일단 웃고 보자는 나라도 이건 막을 도리도 없이 울어야 되는 거 아닌가? 하기와라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마치 반대로 비탄의 얼굴이 하기와라를 외면하는 듯했다.

 

하기와라는 깨달았다. 그가 느낄 수 있는 슬픔이란 단적으로 옅은 푸른색 하나뿐이었다. 다른 사람은 검푸른색, 희푸른색, 여러 감정이 뒤섞여 보라색, 청록색, 초록색의 슬픔마저 느낄 수 있었지만 하기와라의 슬픔 스펙트럼 속에는 무척 희미해진 한 가지의 비애뿐이었다. 쓰지 않는 근육이 퇴화하는 것처럼, 그의 중추 내부에서는 더 이상 어떠한 감정을 출력하는 기능이 남들만큼 작동하지 아니한 것이다.

 

그렇기에. 하기와라는 당혹감을 느꼈다. 그에게 있어 모든 것에는 조롱할 여지가 있었으나, 조롱하고싶지 않은 죽음 앞에서 그는 방어기제를 휘두를 수 없었다. 카멜레온처럼 태세를 바꾸거나 비웃은 다음 고개를 돌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슬픔에 좋은 게 하나 없더라도 어쩔 수 없을 때는 느껴야 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하기와라는 어딘가가 고장 난 듯이. 메마른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향한 선문답만을 보내고 있었다.

 

뭐가 문제지? 눈물이 왜 안 나오는 거야.

 

이바라는 하기와라의 혼잣말을 듣고 문득 그와 그녀 사이에 벌어진 차이를 생각했다. 이바라는 남겨진 자였다. 따라서 앞날이 괴롭지 않게끔 괴로운 일을 묻어두는 것을 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평을 하는 하기와라는, 척 보기에도 슬픔을 온전히 느끼는 것에 서툴어 보였다. 그게 두 사람의 차이였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우울함이나 좌절에서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였으나 그것은 끊임없는 심적 투쟁의 결과였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웃음과 울음 사이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늘 웃음이 이겨왔다. 억제. 억압. 분명 그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슬픔도 많겠으나 아무리 하기와라라도 나이토의 죽음에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에 대해 너는 잘못되었다던가, 더 나은 방법이 있다던가 왈가왈부 하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그녀도 그것을 알았다. 이바라 쿠리스라는 사람과 하기와라 우시오라는 사람은 각자의 연속적인 체험 속에서 살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을 빚어냈기 때문이다.

 

이바라는 감히 하기와라에게 울어도 좋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걱정했다. 나이토라는 가시가 발바닥에 박힌 채로 절뚝거리며 살 그녀의 친구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나즈키 시노부: 괜찮아. 나이토는 우릴 지켜보고 있어. 잘 해낼 수 있을거래.

 

칸나즈키의 느닷없는 말은 이상하게도 듣는 사람 모두에게 조금의 위로를 주었다.

 

바라 쿠리스: 그렇지? 우리와 늘 함께하는 거야. 모두가…

 

가미 토가: 혹시 다른 분들의 목소리도 들리십니까? 모리 씨나 캐롤 씨는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죠?

 

나즈키 시노부: 네가 진짜 묻고 싶은 사람은 그게 아닐 텐데.

 

야가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즈키 시노부: 망자에 대해 너무 많이 알려하지 마. 우린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계속 가야 하는 거야.

 

가미 토가: 그렇겠죠.

 

하기와라는 덤덤히 대답하는 야가미로 고개를 홱 돌렸다.

 

기와라 우시오: 너 진짜 이상한데. 독기가 다 빠졌어.

 

가미 토가: 전 저에게 달라진 점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기와라 우시오: 네가 해변에서 어땠는지 알아? 지금은 순순히 따르지만 내 목적을 방해하는 놈은 반드시 거꾸러트린다는 태세를 계속 유지 중이었어. 눈이 두 번 돌아가서 원래대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고. 너 세 번째 시련에서 뭘 본 거야?

 

기와라 우시오: 가서 불경이라도 외다 왔어? 다들 재판에 신경 쓰느라 잊어버린 것 같은데. 세 번째 시련의 미도리카와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아직 못 들었어. 너랑 히무로만 본 거. 뭘 봤길래 그렇게 이상해졌어?

 

야가미는 대답했다.

 

가미 토가: 차라리 안 봤으면 하는 걸 보았습니다. 저와 미도리카와 씨, 카이다 씨가 초고교급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납치하고 재능을 뽑아내. 인위적인 천재를 만드는 재능에서 일하고 있더군요.

 

기와라 우시오: 뭐? 미래의 네가 그딴 짓을 한다고?

 

하기와라 또한 그 사실을 추리해냈는가. 첫 번째는 과거. 두 번째는 현재. 그러니 세 번째는 미래. 야가미는 하기와라에게 옅은 기대를 품었다.

 

가미 토가: 이 탑에 오기 전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의미가 없습니다. 알고 싶지도 않아요. 지금은 이것에만 집중하세요; 모든 가능성의 길을 열어 두셔야 합니다. 당신 스스로조차도 믿어선 안 되는 겁니다.

 

나즈키 시노부: 누구도 믿기 힘든 곳인데. 돈을 믿으려 하고 있으니… 쯧.

 

바라 쿠리스: 돈? 무슨 소리야?

 

나즈키 시노부: 네 얘기가 아니야.

 

카나리 케이토는 자신의 숙소 안에서 회중시계의 시간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몇십 분이 이어진 작업 끝에도 심박수는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의 귓가에 한 목소리가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이토 유즈루: 야. 너… 젠장. 어디 가는 거야? 돌아와

 

나리 케이토: 나 때문에 죽은 거라고?

 

카나리는 나이토 유즈루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이토 유즈루: 그놈의 싸가지만 어떻게 했으면 네가 땡전 한 푼 없었어도 도와줬어 인마.

 

나리 케이토: 그런 멍청한 소리가 진심일 리 없어…

 

놈은 멍청했잖아. 진심이었으면 어떻게 하지? 정말 헐값에 날 도와줄 용의가 있는 놈이었다면… 그런 착해 빠진 놈을…

 

카나리는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잡고 두 손으로 짓눌렀다.

 

나리 케이토: 이런 망할… 어떻게 해. 왜… 왜 이렇게 된 거야. 그냥 항생제 하나 뺏은 거잖아. 협박하다가 탑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왜 그걸 죽여버리냐고…! 모리 그 자식이 다 망쳤어…!

 

정신 차려. 카나리 케이토!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이건 살인 게임이라고. 벌써 넷이 죽었단 말이야. 돌아갈 방법도 없다고!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해… 마음을 어느 때보다 독하게 먹어야 한다고.

 

나리 케이토: 그래. 죽을 만했던 거잖아. 남을 생각하니 그렇게 되는 거야. 이기적이었어야지. 그건 착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야… 내가 똑똑한 거란 말이야. 나쁜 게 아니란 말이야.

 

그때. 문에 쾅하는 소리가 울렸다. 카나리는 제자리에서 화들짝 뛰어올랐다.

 

나리 케이토: 뭐. 뭐야!

 

이다 쿠로하: 야. 문 열어.

 

나리 케이토: 뭐냐고. 카… 카이다 쿠로하…? 왜 나한테 온 건데.

 

이다 쿠로하: 네가 내 후원자라며. 그때 그 스테이크. 너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쳤거든? 총이 없을 때 다 꺾어놔야 했었는데. 너 때문에 그 뒤로 차질이 많이 생겼어.

 

카나리의 몸이 조금씩 공포에 의해 떨려갔다.

 

나리 케이토: 그게 왜 내 잘못인데! 꺼져… 꺼지라고!

 

이다 쿠로하: 꺼져? 이 새끼 말이 거치네? 뒷감당돼? 야. 대답 안 해?

 

카이다가 문을 한번 더 걷어차자 카나리의 목 안에서 딸꾹임이 올라왔다.

 

나리 케이토: 히끅

 

이다 쿠로하: 한심한 새끼. 놀려주는 재미도 없네. 그냥 넌 이러고 있을 가치도 없는 것 같다. 앞으로 내 눈앞에 띄지 마. 다시 보면 몸에 멍 하나 든다고 생각해라?

 

나리 케이토: 아… 알겠다고! 앞으로 안 그럴게! 이제 가주는 거지?

 

이다 쿠로하: 아직 안 끝났어. 멍청아. 울어 봐! 하하하!

 

카이다의 웃음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카나리는 베개를 자신의 뒷목에 대고 구겨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면서 그는 닿지 못할 호소를 보냈다.

 

나리 케이토: 후루미나미… 너 대체 어디에 있어. 나 도와주겠다며! 왜 쓸데없는 짓 하면서 다 위태롭게 만들다가 막상 필요할 땐 코빼기도 안 보이냐고!

 

 

<희곡>

후루미나미 쿠루미의 이야기

 

등장인물

후루미나미 나몬, 후루미나미 쿠루미, 어린 후루미나미 나몬, 관객들(소리 삽입), 히무로 시라베(소리 삽입)

 

무대

무대에는 세 개의 방이 있다. 첫 번째 방에는 카지노의 배경과 자판기를 배치한다. 두 번째 방은 다른 두 방보다 넓어야 하며 극장 배경에 어두운 조명을 사용하며 커튼, 스포트라이트, 무대 조형을 배치한다. 세 번째 방에는 검은 배경에 복사기 하나만 배치한다.

 

1.

 

단조로운 음악 삽입 동시에 조명 후루미나미 나몬을 비춘다.

 

루미나미 나몬: (자판기의 버튼을 누르며) 이 짓도 슬슬 질리는데. 꽝이 몇 번이야? 흰 물건에 적힌 정보에 나 혼자 접근했는데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게 말이 돼? 하지만…(자판기에 크레딧을 넣고 버튼을 누른다)이럴 만한 가치가 있지. 어려운 만큼 대단한 물건이 나올 테니까. 이 게임 외부의 존재가 준 힌트. 시라유키라는 이름과 흰색은 우연의 일치인가. 혹은 분명한 메시지? 혹은 덫일지도. 아무렴 좋아. 내가 손에 넣기만 하면 돼. 그게 나를 위해 준비된 권총… 좋은 끝맺음으로 이어진다면 뭐든 좋아.

 

조명 두 번째 방 오른편의 어린 후루미나미 나몬을 비춘다. 손에 캠코더가 들려 있다. 후루미나미 쿠루미. 얼굴에 검은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손에 권총이 들려있다.

 

(어린 후루미나미 나몬 목소리 삽입)

 

린 후루미나미 나몬: 엄마 멋있어… 역시 학교 땡땡이치고 오길 잘했어. 내가 직접 보니까 차원이 다르잖아. 오늘 감정선도 화질도 전부 완벽해. 최고의 연극을 찍었어…

 

후루미나미 쿠루미.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겨눈다. 몇 초 뒤 총성이 울린다.

 

소리: (타앙 하는 총성)

 

후루미나미 쿠루미. 그대로 멈추어 미동도 하지 않는다. 관객 웅성거린다.

 

소리: (웅성이는 소리)

 

관객1: 왜 안 쏘는 거야? 쏘면서 연극이 끝나는 거 아닌가?

 

관객2: NG 났나 봐요!

 

관객3: 권총 자살하고 쓰러지는 게 마지막 장면인데 NG를 낸다고?

 

관객4: 후루미나미 쿠루미잖아요. 뭔가가 있겠죠.

 

어린 후루미나미 나몬.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다.

 

(히무로 시라베 목소리 삽입)

 

무로 시라베: 양친이 타계하셨지. 안 그런가?

 

후루미나미 쿠루미. 흐느낀다.

 

무로 시라베: 양친께선 후루미나미 가문에서 꽤 높은 지위의 사람이었다. 아마 연기자였겠지. 먼저 한 쪽이 죽었고, 몇 년 후 나머지 한 쪽도 죽었다.

 

후루미나미 쿠루미. 손을 부들부들 떤다.

 

무로 시라베: 화려한 실패를 보았나? 어린 시절에 보았겠지. 양친의 죽음이 그것과 관련이 있나?

 

후루미나미 쿠루미. 방아쇠를 당긴다.

 

소리: (귀를 찢는 총성)

 

무로 시라베: 양친 중 어느 쪽이 자살했지?

 

후루미나미 쿠루미.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관객들 잠시 침묵 후 박수를 친다.

 

소리: (박수와 환호)

 

무로 시라베: 자살하는 장면을 직접 보았나?

 

관객들이 후루미나미 쿠루미의 시체에 꽃을 던진다. 어린 후루미나미 나몬. 놀란 표정으로 멈춘다.

 

무로 시라베: 불특정 다수의 인원들이 너와 함께 보았나?

 

소리: (더 크게 웅성이는 소리, 이후 비명소리)

 

어린 후루미나미 나몬. 캠코더를 떨어트린다. 그 뒤 작게 웃으며 눈물을 흘린다.

 

화면 암전.

 

조명 세 번째 방에서 가만히 서 있는 어린 후루미나미 나몬을 비춘다. 어린 후루미나미 나몬은 편지를 들고 있다.

 

(후루미나미 쿠루미 목소리 삽입)

 

루미나미 쿠루미:  (한숨을 쉬며)편지를 발견할 사람. 먼저 내 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정말 미안해. 나몬. 너에게 이래서는 안 되는 거였어. 그렇지만… 분명 내가 죽는 것에는 의미가 있으리라고 믿어. 내가 죽은 뒤에야 밝혀져야 할 일이 있으니까. 나는 후루미나미 쿠루미입니다. 나는 도합 10년 이상의 시간동안 후루미나미 가문에게서 연기를 강요당해왔습니다. 제가 연기의 길에 복귀하고 5년 동안은 남편의 병원비 때문이었죠. 난 금이었습니다. 후루미나미 직계의 피를 이은 자손을 의미하죠. 후루미나미들은 특정한 누군가의 딸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에 특정한 자격과 척도를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늘 금은 가문의 중심에서 가문을 통합하고 구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몇 년 동안의 연기자 생활 도중 나는 그이를 처음 만난 이후로 자유를 향한 갈망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후루미나미 가문의 압박과 통첩에도 나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나와 그이는 불꽃처럼 타올라 사랑했고, 그것으로 혈연이라는 끈을 자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암에 걸리자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직장에 다니고 있던 저는 치료비를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연예계에서 사귄 친구들은 후루미나미의 눈치를 보고 도움을 주지 않았고, 가족이란 것들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크게 고생했지만 하나만큼은 서로 맹세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정 예쁜 우리 딸아이만큼은 연기에서 완전히 분리시키자는 맹세였습니다. 그 다짐은 이 편지를 쓰는 시점에서 2년 전부터. 딸이 저조차도 본 적 없는 수준의 재능을 보여주기 시작했음에도 그대로였습니다. 우리 가족은 후루미나미의 마수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그 연기에 미친 일족은 내 딸을 기꺼이 삼키고 내게 그랬던 것처럼 다시는 놓아주지 않으려 들게 당연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 아이의 재능을 생각하면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는 연기에게서 자유로워지고 싶었습니다. 그럴 수는 없었으니 유감이었습니다. 후루미나미는 우리를 어디까지나 따라왔습니다. 유명인을 쫓는 파파라치는 수도 없이 보았지만 일반인을 쫓는 파파라치라뇨. 파파라치에게서 우릴 보호할 수단도 그럴 여유도 없었기에 우리는 조용한 카메라 셔터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플래시는 제2의 태양같았습니다. 태양보다 악랄할지도 모릅니다. 조금만 얼굴을 드러내면 후루미나미의 사주를 받은 파파라치들이 우릴 아주 짧게 찍고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했던 것입니다. 낮에도 밤에도 그들은 쉬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빚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습니다. 모든 것에 절망적인 생각이 들 때. 후루미나미를 떠나지 않았다면 그이를 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때 그들은 우릴 찾아왔습니다. 남편을 살리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테니 다시는 가문에 거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후루미나미를 거부한 반역자를 완전히 굴복시키며 선례를 만들려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굴복해버린다면 앞으로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선례를 따르고 지레 포기할 게 분명했습니다. 얕은 수작이었으나…(숨을 고르며)나는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딸을 위해서라도… 적어도 내 아이만큼은 연기의 세상에 발을 들이지 않게 하기 위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여러분들도 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5년 동안 나는 최고의 배우 자리에 올랐습니다. 영화. 드라마. 연극. 뮤지컬. 휴식 없는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상을 쓸어 담았죠. 후루미나미의 입김 없이 내 성취만으로도 그럴 수 있었습니다. 어지간한 연기로는 후루미나미들을 만족시키지 못할테니 최선을 다해야 했죠. 나는 많이 버텼습니다. 자유와 정반대의 삶을 살더라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이가 버틴 것처럼요. 그이는 정말 잘 버텼습니다. 말기 암 환자가 고통스러운 투병을 몇 년이나 버텼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이는 나를 떠났고… 연기를 할 이유는 사라졌죠. 딸이 볼모로 잡히기 전에 후루미나미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든 직후. 나는 내가 연기를 할 이유가 사라졌을 때 살 이유 또한 사라졌음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딸이 남아있었죠. 내 어여쁜 딸아이. 그이가 죽은 세상에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내 영혼은 이미 닳아빠졌고 텅 비어버려 더이상 아무것도 버틸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삶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연속적인 연기입니다. 연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지요. 내 진심 또한 허황된 관념이었습니다. 나는 내 딸아이를 사랑했을까요? 내 남편은요?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혼자 가문에서 나왔으면 좋았을걸 괜히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다시 여기에 머리채를 잡힌 채로 돌아왔노라고 그들을 원망하지는 않았을까. 나 자신조차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난 이 시대 최고의 연기자였으니까요. 내 진짜 모습은 무척 음울하고 좌절스러운 형태를 하고 있기에 내 딸아이 앞에서는 무대 앞에서보다 더 긴장해야겠죠. 그런 태도에서 보내는 모든 사랑은 밍밍하게 물을 탄 가짜일 것입니다. 그것이… 난 두렵습니다. 연기가 증오스러운 나에게 연기로 첨철된 평생은 곧 지옥입니다. 이 행성에서 살아가는 매 순간순간이 내겐 더할 나위없는 고문이 되었습니다. 나도 나 자신이 무책임하다는 것은 압니다. 이건 죄이지만. 나는 그럼에도 휴식을 원합니다. 난 그저 쉬고 싶습니다. 연기에 질렸습니다. 그리고 연기에 질렸다는 것은 곧 살고 싶지 않다는 뜻이죠. 난 마지막 연기. 자살하는 장면에서 소품이 아니라 실탄이 든 권총을 조달할 예정입니다. 내 딸에게는…(말끝을 흐린다) 다시. 정말 미안하다. 너를 생각해서도 이래서는 안 되는거야. 차라리 너와 함께 갈지도 생각했지만 차마 그것만큼은 할 수 없었어. 그러나 내가 이런 죽음을 택한다면 누구도 너를 섣불리 건드리지 못할 거야. 금을 겁박하면 어떻게 되는지 선례가 남았으니까. 넌 후루미나미 가문의 족쇄에서 자유로워지는거야. 그러니 이 수렁으로부터 나가. 나에 대해 잊고 후루미나미에 대해서도 잊어버려. 거짓된 삶을 살지 마. 네 행복을 추구해. 이 썩은 물 속의 권력 다툼에 휘말리지 마. 금이니 은이니 동이니 하는 이야기는 들어줄 필요도 없어. 이제 네 날개를 펴는 거야. 넌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연기자가 아닌 그 무엇이든.

 

어린 후루미나미 나몬. 편지를 복사기 안에 넣는다. 종이 세 장에 복사를 끝마치자 원본 편지에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어린 후루미나미 나몬. 복사된 종이들을 끌어안는다.

 

린 후루미나미 나몬: 원본 없는 복제. 허무한 껍질. 시뮬라크르. 너는 곧 나야. 곧 변모할 나.

 

어린 후루미나미 나몬. 주머니에서 곰방대를 꺼내 입에 문 다음 라이터로 곰방대에 불을 붙인다. 그 뒤 연기를 들이마시고 고통에 가득 찬 기침소리를 낸다. 기침소리가 사그라든 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다시 연기를 들이마신다.

 

린 후루미나미 나몬: (웃으며)이런 독한 걸 어떻게 피웠어요?

 

(후루미나미 나몬 목소리 삽입)

 

루미나미 나몬: 연기를 처음 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딸기가 먹고 싶었는데 딸기를 먹을 용돈이 없었다. 그래서 혼자 마트에 간 다음 딸기를 보며 울음을 터뜨렸지. 중병에 걸린 동생이 딸기를 먹고 싶어 했는데 못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 딸기를 왕창 받았다. 집에 와서 다 같이 딸기를 먹었다. 그 마트에 다시는 가지 않았지. 나에게는 연기가 너무 쉬웠다. 왜 아무도 나처럼 거짓말을 하지 않는지가 궁금했다. 내가 특출 나다는 걸 처음 안 어린 마음에는 내가 다른 어린이보다 우월한 종족이라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는 또래들이 교육이라는 것을 받기 시작할 때부터 나의 유별남을 인식했다. 또 내가 너무 똑똑하며 어른에 가깝다는 사실 또한 알아냈다. 그러나 귀여운 얼굴을 타고났으며 그걸 어떻게 쓸지 알았기에. 적당히 어울리는 일에 어려움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 당시는 내 인생에서 가장 쉬운 시기로 기억한다. 다들 나에게 속아 넘어갔던 것이다. 어린이를 의심하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순진한 표정에 눈물 몇 점만 찍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던가. 다만 어머니는 아니었다. 내가 잠시 얼굴에 걸어둔 미소를 내가 원래 느끼는 바. 무표정으로 바꾸다 선생님의 부름에 바로 미소로 되돌리는 것을 어머니가 목격해버렸다. 그리 긴 틈도 아니었는데 그걸 포착한 것은 연기자로 있었던 그녀의 본능이었겠지. 나는 그 순간 어머니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며 처음으로 당황했다. 왜. 왜 그녀는 경멸과 놀라움과 공포가 뒤섞인 얼굴을 딸에게 보여주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후루미나미의 직계 혈통에 대한 집착에 대해 들은 뒤에야 나는 어머니를 이해했다. 그 마력이 정말 존재해 내 피에 흐른다면 어머니 본인의 피에도 흐르는 게 될 테니. 그럼 후루미나미를 거부하려던 그녀의 행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니까. 어머니는 참 헛수고를 했다. 내 또래 애들이 열광하고 좋아 죽는 것들이 모두 한심하고 별 가치 없이 보이던 나에게. 유일하게 가치있는 건 어머니의 연기뿐이었는데 말이다. 비유법이 아니라 나는 연기를 다시 시작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내가 들뜨고 심장이 콩닥이는 것을 느꼈다. 나는 거의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친근하게 느껴지기까지하는 파파라치들의 추적. 병원에 있는 아버지. 그리고 불행한 어머니. 그녀의 아름다운 연기만이 모든 일에 시큰둥한 내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존경과 존중을 얻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괴로웠던 모양이다. 연기를 다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는 오랜 옛날에 끊었다던 곰방대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작품 속 그녀가 짓는 웃음에는 집에서 보여주었던 매력적인 보조개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곧 어머니는 집에서조차 보조개를 보여주지 않게 되었지. 내 어머니는 이미 불행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나는 비극의 연출자가 아니다. 나는 편집자에 불과하지만, 내 공로는 인정해주었으면 한다.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뒷공작들은 내 작품이니까. 나는 어머니의 인생을 지독히도 비극적인 것으로 변모시켰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품었던 희망은 사라졌다. 폭로하려 했던 후루미나미의 실체는 묻혔다. 비극적인 뒷배경마저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딸이 입을 조금도 열지 않는다면 누구도 후루미나미라는 공룡을 거꾸러트리지 못한다. 내 어머니를 죽게 만든 후루미나미 가문은, 나로 인해 더욱 단단해지고 더 강대해질 것이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나는 연기자가 되었다. 후루미나미 가문이 내 정서와 가문을 향한 반감을 상정해. 내게 연기자의 길을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됐다. 그것은 어쩌면 그들 나름대로의 사과나 애도일지도 몰랐다. 일이 그렇게 될지는 몰랐겠지. 그들도 사람이니 어머니를 조금은 소중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후루미나미 가문을 증오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가문 내에서도 내 다른 진로를 지원해주겠다는 사람이 다섯 명이나 나왔다. 그러나 난 연기자의 길을 택했다. 그들은 내 결정에 놀랐고. 이따금씩 어머니가 자살하는 장면의 녹화본을 돌려 보는 내 행동에선 의구심을 느꼈다. 어쩌면 몇몇 후루미나미들은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건 어머니처럼 큰 그릇이 아니라고. 내가 가진 건 '다른' 그릇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날 극장에 몰래 숨어 들어갔고 어머니의 생명이 꺼지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구급차를 부를 때. 바닥에 주저앉은 채 흐느껴 울었다. 슬퍼서인 것 같나? 충격을 받아서? 충격을 받긴 했다. 어머니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 말도 안 되는 비극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폭발이었다. 두개골이 부서지고 뇌수와 피가 흩뿌려지는 것은 우주에 단 한 번 공연하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은하계와 소행성들이 바스러지는 순간이었다. 굉음에 귀가 멀고 섬광에 눈이 머는 우주의 시작과 끝이. 한 점을 무한하게 팽창시키는 무언가가 그곳에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 정도로 아름다웠다. 오. 흔들리는 촛불이여… 어머니는 얼마나 절망하셨을까? 얼마나 절망하셨길래 나를 두고 그런 일을 감행하셨을까. 생각해보면 지금도 울음이 나온다. 비극은 나를 압도하고 내 가슴속에 최초에 타오른 불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가 내게 건네준 봉화를 나는 꺼트리지 않는다. 계속 제물을 바치고 불이 장성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게 내 애도하는 방식이다. 난 어머니에게 가장 의미 있는 추모비를 주었다. 이해가 가는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딸이 그녀의 의지와 정반대 되는 사람이 됨으로써, 어머니의 인생을 아름다운 비극으로 만듦으로써 어머니는 예술적인 경지에 올랐다. 바로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 어머니는 삶이 하나의 연속적인 연기라고 표현했다. 그 표현에 동의한다. 연기자가 그 사람이 아니라 배역으로 변한 이상. 배역은 자신만의 권총을 찾아 헤맨다. 아름답고 의미 있는 끝. 모든 사람들은 결국 비극으로 수렴되는 삶을 산다. 죽음. 그것은 슬픈 일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극도로 비참하고 불행한 삶에야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그것도 예술적 경지가 오른 삶. 불운의 결정체 같은 삶이라면… 더없이 아름답고. 또 가치 있을 것이다. 권총에 맞음으로써 내 배역의 서사가 완전해진다면.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완벽한 환경이 주어진다면… 나는 기꺼이 권총을 내 머리에 겨눌 것이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야. 모든 이들에게는 내 어머니처럼 비참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 나는 그 권리에 따라 최대한 많은 이들이 악의의 늪을 허우적거리다 익사하게 만들어주겠다. 다 파멸하라. 보다 많은 고통을 위하여 세상은 불타 마땅하다. 너희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지. 나는 모든 게 그 자리에 있는 것보다 악화되길 원하는데 말이야. 나에겐 고정된 목표가 없다. 만족하는 일도 없다. 나는 너희 모든 이들의 가족 구성원이 죽길 바란다. 병에 걸리고 돈이 떨어지며 빌빌거리길 바란다. 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눈물을 흘리고 애원하길 바란다. 물속에서 바둥거리고 비명을 지르고 피를 흘리길 바란다. 좌절하고 열등감에 떨고 손톱이 빠질 만큼 무언가를 긁어내길 바란다. 이를 부득부득 갈고 소리를 지르며 날뛰길 바란다. 벽에 머리를 박고 칼을 휘두르고 면도칼로 자기 볼을 북북 긁길 바란다. 다른 이의 구두를 핥고 멍자국을 숨기고 절규하길 바란다. 차가 전복되고 배가 뒤집히고 테러에 휘말리길 바란다. 상어에 물리고 자판기에 깔리고 이안류에 떠내려가길 바란다. 도둑을 맞고 산채로 불타고 눈이 빠지길 바란다. 운이 나쁘고 시험에 떨어지고 정신병에 걸리길 바란다. 아이를 잃어버리고 유산하고 불임이 되길 바란다. 관철해온 가치에게 배신당하고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나쁜 마음을 먹길 바란다. 바람을 맞고 소송에서 패하고 양육권을 빼앗기길 바란다. 재산이 불에 타고 산채로 개에게 뜯어 먹히고 질주하는 차 뒤에 매달리길 바란다. 몸의 어딘가가 부러지고 절단되고 성기능에 장애가 생기길 바란다. 기형아를 낳고 도둑질이 들통나고 누명을 써 종신형을 선고받길 바란다. 기찻길 위에 뛰어들고 목을 매고 손목을 자르길 바란다. 분쇄기에 들어가고 용광로에 떨어지고 방사능을 쬐 검은 오줌을 싸길 바란다. 단애 바위에서 연인들이 함께 뛰어들어놓고 공포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서로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길 바란다.

 

후루미나미 나몬이 자판기 안에서 순백색의 버튼 같은 것을 꺼낸다. 버튼에는 '탈출 장치'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루미나미 나몬: 찾았다.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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