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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3

더 단크 타워 챕터 3 - 3

by 도타싫어! 2022. 6. 3.

"…어져."

 

뭐라고?

 

"…어지라고."

 

뭐라는 거지. 누구냐…

 

"히무로한테서 떨어지라고. 마유즈미! 빨리!"

 

문득 눈을 뜨니 장미꽃 들판의 위였다. 나는 총을 들고 있었다.

 

눈앞에는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서서히 걸어왔다. 그 뒤를 23T가 달려오고 있었으며 몇 명은 그보다 뒤에 초식동물처럼 모여 있었다. 하기와라 우시오가 마유즈미 나데시코에게 그나마 가깝게 다가가 있었는데, 마유즈미 나데시코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후루미나미 나몬이 쓰러져 있었다.

 

"히무로…"

 

"저 놈이 언제 또 돌변할지 모른다니까!"

 

"지금은 히무로에게서 떨어져야 해. 아까 봤잖아!

 

다리가 후들거렸다. 선채로 기절이라도 한 것인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개조된 모든 감각이 지나치게 민감했다. 등 뒤마저 보였고 모든 중얼거림과 숨소리가 들렸다. 장미꽃의 향기에 코가 얼어붙었다. 먼 곳에서 신음하며 중얼거리는 여자의 목소리 또한 지독히 크게 들렸다.

 

"시뮬라크르, 모든 게 시뮬라크르다. 크라르. 크라르. 이건 영등 태양이냐. 축의 흔들림으로 인한 진동이었다. 만물이 축을 섬기니. 그토록 고요한. 크라르. 우리는 모두 스스로 행동에 열중하는데 그건 운동과 마찬가지다. 열심히 해야 하지. 눈물도 나지만 이번 주에는 일요일이 두 개야.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해안 산맥 빙하 화산 당가 사천오백육십삼 방위들 속 새로운 방향성의 제시자가 규정했던 공식들을 규정한 이름이 조니 그러나 계속 운동만 열심히 하지 가령 투쟁, 경쟁, 반항, 반향, 반란, 시위, 운동, 희생, 공중부양, 결투, 자아실현, 성취, 극복, 성장,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데 그 이유는 인류를 위한 일이야 그러나 결국 미완성. 여전히 아무것도 미완성…"

 

후루미나미 나몬. 그리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번개를 맞은 것이다. 정보의 번개다. 원래는 전류여야 했다. 그러나 너무 축적되었던 거야. 크지 않은 부작용은 효과를 덮어버렸다. 떠올렸다. 너무 많아."

 

이게 누구의 목소리인지 생각하던 나는 문득 내 입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아냈다.

 

내가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뜻을 몰랐다. 번개? 정보의 번개라니?

 

후들거리던 다리가 더 이상 체중을 버틸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고개가 밑으로 툭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들 수가 없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난 분명 회의에 참여했다. 그 뒤 해산했다. 그런데 왜…? 왜 이런 곳에…

 

"여긴 지옥이야. 그래서 좋아… 아하하. 아하하하. 나 만을 위해 준비된 지옥이다. 그래. 바로 그거였어! 탑에서 사는 기한! 미완성!"

 

후루미나미 나몬이 웃었다. 후루미나미 나몬은 울었다. 절규했고 저주했으며 사랑을 속삭였고 들떴다. 그러나 내 앞의 후루미나미 나몬은 웃고 있었다. 어디부터가 진짜인가. 내가 인식하는 것은 무엇인가. 난 무엇에 홀려있는가. 내 생각이 폭주했다. 무언가가 떠오르고 영영 잊히기를 반복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목소리조차도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내 손아귀는 총을 붙들고 있었다.

 

무언가를 말해야만 한다.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반드시. 반드시…

 

온몸의 체온이 오른다. 식힐 여유조차 없다. 속이 안 좋고 구토가 치민다. 심장은 터질 것처럼 박동했다. 혈류는 좁은 관 안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 마찰열을 내 스스로 끓어오르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뻐끔거리는 입 사이로 과다하게 커진 호흡이 고동쳤다.

 

말해야 한다.

 

막아야 한다.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내게 다가왔다. 그 짧은 보폭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그녀의 등 뒤에서 외쳐대는 이들의 고함소리에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나는 그 모든 순간을 온전히 인식했다. 흩날리는 마유즈미 나데시코의 머리카락. 옷자락. 운동화에 짓밟히는 장미. 얇게 떨리는 장미색 눈동자…

 

그녀의 입에서 나의 성씨가 나왔다. 나를 구성하는 일부. 그녀에게 나의 이름을 주었다. 나는 그 극히 일부의 자신과 상호작용하였다.

 

그리고 내가 간신히. 마지막 말처럼 내뱉은 한 마디는 이것이었다.

 

"캐롤 브라이트는… 부활해선 안 된다."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대몰락이 뭘까?

 

마유즈미가 그렇게 말했을 때. 숨을 내뱉고 쉬는 반복이 잠시 멈춘 뒤 본연의 흐름을 되찾았다.

 

무로 시라베: 커다란 몰락. 단어만 보아도 부정적인 현상이겠지? 대공황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나나시의 기억에서 나온 단어라면 그의 과거와 연관이 있을지도 몰라.

 

유즈미 나데시코: 진짜 찜찜하다. 커다란 몰락이라니… 그리고 나나시… 나나시도 카텟 기관 소속일 거라 했는데. 카텟 기관이 범죄자 잡는 곳이라고 했나?

 

무로 시라베: 맞아. 특정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기도 하지.

 

유즈미 나데시코: …다들 잊어버렸던 것 같은데. 왜 경찰이 아니라 카텟 기관에서 그런 일을 해? 좀 이상해. 애초에 경찰은 왜 우릴 찾지도 않는 건지…

 

나는 경찰이 왜 우리를 찾는지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고. 나머지의 질문에 대답하며 그녀의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무로 시라베: 경찰에게서 일종의 하청을 받는 거라고 생각해 줘. 카텟 기관에는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무력 사태에 투입하기 위한 병력이 존재하지만 그것 뿐이야. 연구하는 분야가 많은 여타 기업과 다를 바가 없어.

 

유즈미 나데시코: 그런데 왜 아무도 카텟 기관에 대해 모를까…? 그렇게 대단한 기관이면 다 알아야 하잖아.

 

마유즈미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매우 일리 있는 의문이었다. 그녀가 의문을 해결한다면 대몰락의 진상과 마유즈미 가의 파멸에 대해서도 알게 되며, 그게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점을 제하면 무척 바람직한 일이었다. 추리에 적극적으로 도움이라도 주고 싶었으나… 그럴 순 없었다. 적어도 상황을 통제하고 모든 결과를 책임질 수 없었으니. 나는 화제를 돌리는 것이 유리하리라고 생각했다.

 

무로 시라베: 이 시점에 와서 카텟 기관이 하는 일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지. 그 일원의 대표 격이 나니까. 식당에서 나를 보는 시선에서 느꼈겠지만 나는 환영받지 못하는 입장이야. 총을 소지하니 그들로서는 신중하고 현명한 일이지.

 

유즈미 나데시코: 그래? 내가 너라면 조금 섭섭할 것 같은데… 우리 꽤 열심히 했는데 계속 위험인물 취급받잖아. 꽤가 아니라 진짜 열심히 했던 것 같은데.

 

무로 시라베: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순종적이었다고 믿어주는 편이 더 달갑지 않아. 살인 게임에서의 믿음이란 의심을 동반하는 것이 이상적이야. 너마저도 고깝게 여겨지게 된다면… 미안한 일이지만.

 

마유즈미마저 배척당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조금 실망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마유즈미가 계속 나와 협력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미도리카와의 정체를 위조할 때와 같았다. 이미 그녀는 총을 가지고 있는 나의 동료이자 친구였다. 너무 멀리 온 것이고… 따라서. 그녀는 나와 끝까지 함께 가야만 했다. 중도에 하차하게 둘 순 없었다. 설령 두 명이 모든 이들에게서 고립당하게 되더라도 그녀를 놓아줄 순 없었던 것이다.

 

마유즈미는 눈앞에 있는 자의 진가를 몰랐기에 긍정적으로 말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그래도 토키와가 허락해 줬으니까 좀 나아질지도 몰라! 너무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 말고 의기소침하지 말자고. 다들 널 믿어주고 네 진가를 알아주는 날이 곧 올 거야!

 

무로 시라베: 그랬으면 좋겠네.

 

그러지 않길 바라며 나는 말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그보다, 새로운 흰 물건은 어디서 찾을 거야? 실마리 자체가 없잖아.

 

무로 시라베: …원래라면 지금쯤 모노로그가 탑의 새로운 공간을 열어야 해.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흰 물건을 찾아야만 하고. 이렇게 정체되는 건 관리자가 할 일이 아니야. 지금 모노로그는 대체 뭘 하는 거지?

 

마유즈미는 미묘한 궁금증을 얼굴에 담고 나를 바라보았다.

 

유즈미 나데시코: 모노로그가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말하네. 히무로…

 

무로 시라베: 비단 모노로그가 아니라 살인 게임의 관리자라면 상황이 정체되지 않게 막아야 해. 새로운 단서와 동기를 제공하며 살인이 일어나도록 유도해야 하지. 그런 수단 없이 막연한 탈출을 위해서 살인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유즈미 나데시코: 그럼 살인이 나는 것보다는… 단서나 동기가 안 나오는 편이 났지 않아? 그냥 모니터실이랑 카지노. 휴게실만 있는 채로…

 

무로 시라베: 내 생각은 달라. 결국 탈출을 위해서는 흑막의 게임에 어울려야 해. 참여에 거부하면서 승리할 수 있는 게임은 없어. 내가 하는 일은 결국 이 살인 게임이 끝나는 결과를 위해서지. 흑막 쪽에서 새로운 동기와 함께 진상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지 않으면 탈출은 불가능해.

 

유즈미 나데시코: 그렇지만… 그럼 누군가가 죽잖아.

 

무로 시라베: 바로 그게 우리가 막아야 하는 일이지.

 

유즈미 나데시코: 못 막으면 어떻게 해? 어떻게 하느냐… 도 아니야. 못 막았잖아. 우리. 미도리카와가 죽는 것도, 나이토가 죽는 것도, 캐롤 씨가 죽는 것도… 못 막았어. 또 새로운 동기 때문에 살인이 벌어질 것 같다면 어떻게 하지?

 

그런 가정 자체는 무의미했다. 그러나 마유즈미가 하고자 하는 논의는 알 수 있었다. 만약 동기를 받고 살인의 위험이 올라가는 것과 상황 자체가 정체되는 것 중 무엇이 더 낫느냐는 물음과 같았다.

 

애초에 선택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었으나, 만약 선택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똑똑."

 

내 전용실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의아했다. 총을 가지고 있는 내가 위험하다고, 회의 도중 의견이 나오지 않았던가? 왜 나를 찾아온 것인지 쉽게 추측할 수 없었다.

 

약간의 불길함을 느끼며 나는 목소리의 주인을 추려냈다. 남성. 유추할 수 없게끔 일부러 목소리를 깔았다. 적어도 카나리는 아니었고, 야가미의 것이라고 하기엔 조금 가벼운 음성이었다. 그 정도만으로 나는 충분히 그 주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경계를 담은 채로 전용실의 문으로 다가갔다. 그밖에 누가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는 채였다.

 

무로 시라베: 누구야?

 

누군가가 묻는다면 내 이름은 하기와라 우시오. 나는 웃기는 놈이다. 생각 없이 사는 놈이라고 불러도 좋은데 나는 생각을 없게 만드는 놈이라는 호칭을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난 생각을 좀 하며 살기 때문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만.

 

나는 내 처지를 잘 안다. 내가 빡통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내 생물학적 부친이라는 십새가 언제나 말했던 것처럼 말이야. 아 기분 잡치네. 나는 대화 몇 번 하거나 얼굴을 쓱 보면 그 사람을 멀리할지 가까이할지 알아내는 특기를 가지고 있지만, 이건 별 거 아니다. 왜냐면 어울리면 안 될 놈들이 많았거든.

 

중졸 혹은 그 이하의 학력인데 무기를 밀수하는 사람. 중동 지역에 협상으로 평화를 가져오는 사람. 자본주의가 낳은 사람. 맨손으로 총알도 막는 사람. 몸 개 털리고도 정신 잡는 사람. 뭣보다 미친 특수부대에서 구르고 구른 진짜 꺼림칙한 사람 앞에서는 내가 굴린 머리 따위야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다. 특히 마지막 놈.

 

히무로 시라베.

 

얘는 진짜다. 미친놈이다. 막 미쳐서 쪼개거나 총기를 난사한다는 뜻이 아니다. 미쳤다는 건 비유법이다. 놈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또 냉정하다. 절대 미치지 않을 거다. 꺼림칙한 뒷배경마저 가지고 있지.

 

처음 만날 때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인간 거죽을 씌워 놓은 기계처럼 히무로이드는 늘 조용히 모든 걸 관찰해왔다. 어딘가 가까이 대하기 무섭고 꺼려지는 사람이 바로 히무로이드인 것이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 모두에겐 약할지언정 결여되지는 않는 무언가가 부여되어 있는데 히무로이드 한 명에게만 그게 없는 듯한 느낌이란 것만 알 수 있다. 다들 저마다의 냄새가 있는데 히무로이드에게만 사람 냄새가 안 난다고나 할까. 그러나 히무로이드에겐 그걸 상쇄하고도 남는 재능이 있다. 재능 말고 다른 것도 있고.

 

이 자식은 분명 살인 게임의 마지막까지도 살아남을 것이다. 왜인지 아는가? 똑똑해서? 그건 디폴트 값이지. 전제조건이다. 히무로이드에겐 더한 게 있다. 오케이. 유남쌩? 그럼 드럼 롤. 두구두구두구.

 

히무로 시라베는 무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로 시라베: 그러면 추리를 통해 검정을 잡기가 무척 어려워져. 그러니 학급재판에 돌입하기 전에는 조금의 수사 시간이 주어지지.

 

기와라 우시오: 넌 그걸 어떻게 알아? 여기에는 수사 시간 같은 거 안 적혀있는데.

 

무로 시라베: 범행을 저지른 본인이 아니라면 답해주지 않을 걸.

 

기와라 우시오: 넌 그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기와라 우시오: 개인적인 궁금증이야. 이 새끼 이상하게 살인 게임과 관련해서 전문가 같아서 그래.

 

이 놈은 처음부터 살인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수상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그래. 수상했다. 히무로라는 사람은 그렇게 정리할 수 있었다. 남들과는 이 게임을 보는 시각 자체가 달랐다. 마치 살인 게임에서 이미 한 번 이겨본 사람처럼. 흑막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알았고 수사에 착수하거나 남을 겁박하고 증거와 증거를 잇는 일을 능숙하게 해냈다. 남들이 '이런 곳을 열어줘서 뭘 하라는 거야?' 라 생각할 때 이 놈은 혼자 '여기서 무슨 단서를 찾을 수 있지? 흑막의 의도는 무엇이지?'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놈은 우리보다 많은 걸 알고 있지만 그걸 공유하지는 않고 있다. 그게 히무로이드와 우리들의 차이였다. 당장 이바라가 히무로이드의 지식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다 탈탈 털어놨을 거다. 왜? 살아야 하니까. 다 같이 살아서 나가야 하니까. 하지만 히무로이드는 안 그런다. 자신만이 그 지식을 알고 있다면 이 게임 안에서 분명한 이점을 가지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다른 사람에게도 정보를 주지 않는 것은 그래서다.

 

나는 생존을 하고 있었고, 히무로이드는 살인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 개는 뿌리부터 다르다. 다른 이들을 자신의 궁극적인 경쟁자로 보고, 협력하면서도 등쳐먹을 순간을 각오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테러범들도 인질들이랑 정이 드는 게 세상만사인데 말이야.

 

난 그걸 알고 있었으나. 내가 뭘 어쩔까? 그놈 쪽에선 모른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다. 더 캐려 들면 총이라도 들이대면 그만이지. 총. 총. 이것도 문제다. 총보다는 살인 게임 안에서 총을 가지고 다녀도 된다고 허락을 받아놓은 저 놈이 문제다.

 

히무로이드의 똑똑함은 여기에서 나온다. 자기를 막을 사람을 준비해 뒀다는 것 말이다. 그 사람이 마유즈미라는 것까지. 히무로이드에게 필요한 건 그를 도와줄 사람이 아니라 막을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막을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 그렇게 총을 가지고 있어도 될 거라며 다른 이들을 안심시킬 토큰을 히무로이드는 손에 넣었다. 영화에 끼워 넣는 정치적 올바름 캐릭터 하나처럼 말이지. 걔한테 악감정은 없지만 그놈이 마유즈미를 진짜 친구로 여길 것 같지 않다. 그런 모습은 놈이 자빠져서 코를 골거나 성욕을 해소하는 것만큼이나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 히무로이드를 마유즈미가 막을 거라고? 장난하냐? 똑똑하고 말 잘하는 놈의 가스라이팅은 누구도 못 막아. 애초에 가스라이팅은 멍청한 놈이 해도 통하는 거라고. 총을 쥐여 놓고 책임감을 부여한 뒤에 자기가 홀랑 먹어치우면 누구도 걔를 못 막는다.

 

그게 걱정되는 것이다. 나? 내 안위 따위 아무래도 좋다. 난 어차피 머리도 안 좋으니 언젠가 똑똑이들의 살해 대상으로 찍힐 거다. 나름대로 대비를 해 봤자 언젠가 죽을 목숨이다. 코미디언 따위가 이런 살인 게임을 끝까지 살아 나가겠다는 생각은 존나 안일한 것이지. 내가 줄곧 말해왔던 것처럼 난 그럴 도리가 없다.

 

그런데 이바라는?

 

얘도 전망이 좋지 않다. 내 친구 이바라는 살인자가 되기 어렵다. 사람 죽는 걸 싫어하니까. 그러니 어떤 수를 써도 얘를 살릴 순 없다. 1대1로 붙어서 사람을 못 죽일 텐데 어떻게 우승을 하겠는가. 애초에 내 앞가림도 못하는 내가 이바라를 어떻게 끝까지 살리겠어.

 

그러니 걱정인 것이다. 내가 대충 죽은 다음에 이바라가 히무로의 총에 대항하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르니까. 걱정이 된다.

 

이건 내가 이바라를 지키고 싶다던가 소중하게 생각하던가 하는 오글거리는 감정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다. 단지 나는 곧 죽을 것 같은데 이바라는 안 죽길 바라니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야 한다. 그런 당연하고 담백한 감정 속에서 나는 이바라가 살길 바란다. 이게 뭐 어때서 그래.

 

아쉬운 점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거다. 나는 카이다를 익사시킬 수 없다. 야가미의 근손실을 촉진시킬 수 없다. 23T를 멈추게 할 수도 없다. 이 탑의 강자들은 내 영역 밖에 있으나 총만큼은. 이 도구 하나만큼은 어떻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히무로이드는 야가미만큼 힘이 세지 않다. 총이 없으면 손가락 하나로 케이크 먹듯 사람을 죽일 순 없게 되겠지. 하지만 어떻게 하냐! 마유즈미는 감시자라며 저 싸이코에게 붙들려 있을 거다. 지들이 친구라는데 어떡하냐. 내가 간섭할 수도 없고…

 

…잠깐. 간섭?

 

간섭이란 말은 이상하다. 왜냐면 어떤 상황이라도 제삼자가 친구 사이에 간섭은 안 되기 때문이다. 내가 미친 척하고 마유즈미한테 반했다며 히무로 견제하는 식이 아니면 둘을 떨어트릴 방법이 없다. 애초에 하다가 내가 웃음을 못 참아서 망하겠지만!

 

그렇지만. 셋이 붙어 다니기 시작한다면 어떤가…

 

하. 나는 천재다. 나는 웃음의 신이다. 이런 생각은 누구도 못 했을 걸. 그러므로.

 

오퍼레이션: 우리 친구 하자 시작이다.

 

무로 시라베: 네 고결함과 진정성이 절제당한 곳 말이다.

 

그런데 진짜 존나 하기 싫다. 재수 없는 새끼.

 

무로 시라베: 왜 찾아왔지. 하기와라?

 

나는 날이 서려는 어조를 억누르며 물었다. 그러자 하기와라는 후루미나미 나몬을 연상시키는 태도로 이죽였다.

 

기와라 우시오: 아니. 왜 찾아왔냐니? 이유가 필요한 것 같진 않은데. 해변을 함께 극복한 동료가 나 아니었나. 이제 와서 선을 긋는 것도 좀 웃기는 일 아니야? 좀 친해져 보자고. 하하.

 

유즈미 나데시코: 아…하하하.

 

마유즈미마저도 그의 말을 순순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내게 있어서는 나를 경계하고 위험인물로 여기는 그보다 친근하게 다가오는 그가 더욱 껄끄럽게 느껴졌다.

 

하기와라 우시오. 스스로를 천치라 믿는 자. 아무리 그가 자신을 폄하하는 경향이 심하다 할지언정 그는 무의식적으로 어리석지 않은 판단을 한다. 일차원적인 판단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이바라 쿠리스와 함께 나를 경계하던 그가 조금의 공백 동안 나를 온전히 믿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 목적은 나의 경계일 터.

 

나를 수상하게 여긴다면 그 태도를 관철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하려던 나는, 다음 순간 그의 존재가 내게 꼭 나쁘게 작용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나를 늘 경계하는 인물이었다. 그를 쉽게 속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며 육감에 의존하는 인물에게 어설픈 수작은 통하지 않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단지 그를 내 곁에 두는 것만으로, 탑의 인원들을 대표해 나를 경계하는 이를 두는 것만으로 다른 이들은 조금 더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나의 두 번째 감시자가 되려는 것인가? 그 발상에 미치자 하기와라의 의도 또한 읽을 수 있었다. 나와 마유즈미의 우정을 의심하고 내가 그녀를 지배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 또한 우정을 명목으로 나를 감시할 수 있었다. 유치한 생각이었지만 내가 거절할 수는 없었다. 내가 만약 마유즈미를 내 도구로 여기고 있으며 탑의 다른 인원들을 총으로 위협하고자 했다면, 하기와라는 좋은 수를 두었다. 그가 견제하고자 하는 상상 속의 괴한에게 있어 끊임없이 참견하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하기와라의 존재란 무척 거슬렸을 테지.

 

그러나 단지 살인 게임의 종식만을 원하는 내게 있어 하기와라란 행운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무로 시라베: 그래. 잘 부탁해.

 

감시를 원하는가? 마음껏 감시하게 두면 되는 일이었다. 그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나는 그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미안한 표현이지만, 내가 위험하지 않다는 토큰이나 위장망처럼 그는 작용할 것이다.

 

그는 마유즈미가 나의 토큰이라 생각하겠지만, 바로 그가 그 역할을 수행하겠지. 하기와라가 내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목적이 무엇이길래 그가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내게 접근하는 역할을 도맡는지는 몰랐으나… 신경은 쓰이지 않았다.

 

유즈미 나데시코: 와! 웬일이야. 히무로? 무조건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기와라 우시오: 솔직히 말할까? 나도 그랬어. 하지만 본인이 괜찮다니 됐지. 기분 나쁜 내통자 하나 빼고 해변 수색조끼리 뭉치자고!

 

유즈미 나데시코: …야가미만 빼면 이제 우리밖에 안 남은 거구나.

 

마유즈미의 목소리가 조금 침울해지자 두 손을 머리 위로 쭉 뻗고 웃던 하기와라마저 얼굴을 굳혔다.

 

기와라 우시오: 그런 셈이지. 뭐. 그러니까 우리끼리 뭉치자 이거야.

 

유즈미 나데시코: 하루아침에 두 사람이. 캐롤 씨까지…

 

마유즈미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리고 마유즈미를 흘끗 본 하기와라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기와라 우시오: 히무로이드. 궁금한 거 있는데.

 

무로 시라베: 나도 궁금한 게 있어. 언제까지 내 이름을 변형할 생각이야?

 

기와라 우시오: 내가 원할 때까지. 다시 내 질문. 댁은 슬픔을 어떻게 이겨내? 이건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래. 너 꼽주거나 망신을 주거나 비꼬거나 멕이거나 짜증나게 만들거나 시비를 걸려는 게 아니라 진짜 궁금하다고. 소중한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이겨내지?

 

그 정도의 질문이라면 굳이 대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무로 시라베: 소중한 사람의 기준은?

 

기와라 우시오: 보통 사람 기준.

 

무로 시라베: 그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해.

 

기와라 우시오: 생각을 하면 너 같은 사람이라도 동요하나?… 쏘리. 좀 억지였다. 역시 사람이니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나 보지?

 

무로 시라베: 내 표현이 옅다고 해서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다만 나는 감정을 추스르고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알았기에 의식적으로 다른 일에 몰두한 거야. 슬픔을 억누르도록.

 

하기와라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기와라 우시오: 나 진짜 너희들한테서 이해 안 되는 거. 왜 굳이 그렇게 하지?

 

무로 시라베: 왜 그렇게 하냐니?

 

기와라 우시오: 그냥 생각 자체를 안 하면 슬플 일도 없잖아. 왜 슬픈 일을 굳이 떠올리려고 하는 거야? 내가 하는 것처럼 생각 자체를 차단하라고. 어때. 그럼 슬플 일도 없을 걸.

 

나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또 이상한 농담을 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어째서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슬픔을 차단하지 않느냐고, 왜 슬픔을 억누르지 않느냐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마저도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 비극을 없던 일로 취급하고 묵묵히 걸어갈 순 없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모든 이들에게 각각의 것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바라는 땅이 파헤쳐진 흔적 위에 다다랐다. 그 밑에는 빈 관이 묻혀 있었다. 흔적은 총 세 개 있었는데 이바라가 앞에 선 흔적은 가장 오른쪽에 있었다. 그녀는 코로 작게 한숨을 쉬고 팩에 담긴 딸기 우유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입구를 열어 흔적 위에 따랐다. 삼 분의 일 정도만.

 

바라 쿠리스: 왔어. 모리.

 

그리고 이바라는 탑의 흙바닥 위에 양반다리로 털썩 앉았다. 흔적을 유심히 보던 그녀는 입을 열었으나, 그 입 안에서는 명확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얼굴에는 평소와 같은 천진함보다는 약간의 우울과 심란함이 감돌았다.

 

결국 이바라는 이렇게 운을 뗐다.

 

바라 쿠리스: 우리 생전엔 대화도 못 해 봤지?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네가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왜 그러는 건지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거야.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까 칸나즈키라도 데려올 걸 그랬다. 지금 모리가 무슨 말하는지 들려달라 할걸.

 

바라 쿠리스: 농담. 농담. 칸나즈키는 죽은 사람이랑 계속 함께하려는 거 별로라더라.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한테 집착하는 게 된다나. 알아들었어. 장례지도사도 결국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잘 받아들이도록 돕는 일이니까. 내 일은 그건데. 정작 내가 보는 죽음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아. 장의사를 위한 장의사는 없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

 

바라 쿠리스: 나를 위한 장의사… 있긴 있었지. 그래서 더 바보 같아. 가족 단위로 장의사를 할 때는 장의사 일을 그렇게 싫어했는데. 다 그렇게 된 뒤에야 내가 장의사가 됐어. 죽음은 늘 급작스럽게 찾아오고… 난 늘 한 발자국 늦어. 이번에도 그래.

 

바라 쿠리스: 너랑 개인적으로 말을 섞은 적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카지노에서 문으로 들어가는 게 서로 얼굴 본 마지막이었잖아. 네가 늘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네가 이렇게 되길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아. 그리고 이건 네 잘못이 크다? 매번 누굴 희생해야 한다. 공리를 위해서다 하고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기니 싫어할 수밖에.

 

바라 쿠리스: 생각해 보니까 하기와라가 나 인질로 잡고 깽판 친 것도 어느 정도는 너 때문 아니야?… 라고 하기엔 하기와라가 좀 막 나가는 점이 있었지. 오히려 구체적인 계획을 떠올린 건 하기와라 아니었을까? 걔 생각보다 비상한 점이 있다 보니 잘 모르겠네.

 

바라 쿠리스: …어제는 묘만 만들어두고 별다른 말 한 기억이 없는데 이제야 말 좀 하네. 나이토를 죽인 건 사고라고 했지? 마지막까지 넌 괴로워하는 모습이었어. 어쩌면 나보다 네가 더 나이토랑 친했을지도 몰라. 우와… 생각해보니 진짜 그렇네. 나이토도 너한테 정들었다고 소리쳤잖아. 그 정도면 둘이 사귀어라 그냥. 아. 못할 말 했네. 너희 둘 모두에게 말이야.

 

바라 쿠리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냐고?

 

이바라는 딸기 우유를 홀짝였다.

 

바라 쿠리스: 커으으… 쓰다. 아무튼 결론은 이거야… 넌 우리에게 상처를 남겼지만, 모두의 안위를 바란 점만큼은 진심이었다고 생각해. 아무리 널 싫어해도 그 점만큼은 억지로 까내릴 수 없어. 네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걸 원했음을 아니까. 나이토를 죽인 건 미워 죽겠지만 그건 별개야. 네 말대로 나이토가 죽어준 거면. 내가 뭐라 할 일도 아니고…

 

바라 쿠리스: 캐롤은 정말 유감이야… 좀 친해졌다 싶었더니 그대로 가버리는 게 어디 있어. 진짜 애석하다. 그렇지? 카이다랑 야가미랑 후루미나미가 살아 있는데, 나이토랑 캐롤이 가는 게 말이나 되냐고. 그치들은 죽어도 된다는 건 아니지만… 하늘은 왜 좋은 사람들을 데려가려 드는지 모르겠다는 거야.

 

바라 쿠리스: …그 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겠지. 이유 따윈 없어.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우린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우린 너희들의 몫까지 살아갈게. 그러니까 나이토랑 같이 지켜봐 줘.

 

이바라는 내용물이 조금 남은 딸기 우유팩을 모리의 무덤 위에 두었다. 그리고 짧게 목례했다.

 

바라 쿠리스: 안녕. 모리. 가능하다면 몇십 년 뒤에 다시 보자.

 

바다뱀.

 

이제 달리 부를까요. 아쿠토. 접니다. 토가. 야가미 토가죠.

 

당신이 손을 털 수 있게끔 내가 거래를 도와주던 시절 기억합니까? 난 당신의 거처에서 지내다시피 하며 당신을 미래 없는 그곳에서 꺼내 주고자 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불편한 동거였지만 어느 새부터 서로를 믿게 되더군요. 나는 그것을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늘 타피오카 펄을 띄운 버블티를 즐겼습니다. 당뇨가 걱정될 정도였죠. 저는 커피를 훨씬 더 좋아합니다만 당신이 졸라댄 끝에 저 또한 버블티를 즐기게 됐죠. 그런 식으로 당신과 저는 교집합을 만들어 갔습니다.

 

당신을 사회와 잇기 위해 과연 어떤 거창한 게 필요할까 생각했으나 당신은 이미 푸아그라의 맛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굳이 즐길 필요가 없는 것들을 동원했죠. 평범하고 쉬운 것들. 만화책을 잔뜩 가지고 왔을 때. 저 또한 읽은 적 없는 만화책을 우리는 서로 함께 읽었죠. 그런 하찮고 실없는 오락을 혼자 즐겨본 적은 없기에 놀랄 정도로 즐거웠습니다. 그때 읽었던 가벼운 연애 만화책 중에 이런 구절이 기억나는군요. '죽은 사람은 무적이다'.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이 만화책의 주인공은 미망인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죽은 배우자에게 감정을 아직 가지고 있는 미망인을 보면서 생각하죠. 저 사람은 죽은 이와 가졌던 가장 행복했던 기억들을 곱씹고 있기에, 죽은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고요. 죽은 사람은 남겨진 사람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사랑스러운 존재로 남아있을 테니.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죽은 사람은 무적이라는 말에는 동의합니다. 내 삶의 어느 정도는 이미 죽은 당신에게 지배당하고 멋대로 휘둘리게 되겠지요. 잊을 수 없기에 영원불멸한 당신의 이미지에 말입니다. 세 번째 시련 속 당신 본인과 인연의 매듭을 지었을지라도, 당신을 결국 떨쳐낼 순 없겠죠.

 

아쿠토. 이 편지는 결코 당신에게 닿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기약 없는 반추 끝에 어느 정도 답을 내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칸나즈키 씨는 망자에 대해 너무 많이 알지 말라 하였죠. 죽은 사람에게 집착해선 안 된다는 뜻이겠지요. 저 또한 나이토 씨와 모리 씨의 죽음은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당신만 아니었어도 저는 이 살인 게임에서 우승마저 노려볼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이 당신만 아니었다면요.

 

하. 쓰다 보니 웃기기는 하는군요. 흑막에게 목숨을 저당 잡혀있는데 잘난 척하는 꼴 좀 보라죠. 제가 흑막에게 어디까지 대항할 수 있을지는 모르고, 이미 늦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죽은 이상 저는 반드시 당신의 원수를 갚을 겁니다.

 

간접적인 것 말고, 직접적인 것도요.

 

야가미는 주저 없이 펜을 놓고 종이에 불을 붙이려다가 우뚝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는 손을 움직이는 대신 입을 열었다.

 

가미 토가: 곧 봅시다 아쿠토.

 

내가 캐롤 씨에게 호감을 가진 것은 사춘기 소년의 충동어린 연애감정 때문이거나, 터치 때문일 것이다. 터치는 꽤 무서운 일이다. 당하는 것만으로 그녀를 존경하게 되어 존댓말을 쓰게 된다. 캐롤 씨가 나를 존중해. 연상인데도 존댓말을 쓰는 것처럼 나 또한 그녀를 존중했던 것이 아니다. 터치를 당한 순간 피터치자는 종속되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른 모든 이들과 어딘가가 불편했다. 나 홀로 초고교급 재능을 가지지 못했다는 자격지심 때문 같다. 그러나 캐롤 씨는 과도하게 남달랐기에 왜인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는 우월함에 질투와 시기를 보낸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친 우월함에는 순수한 경탄만을 보내게 된다. 캐롤 씨라는 사람 앞에 그녀보다 특별한 사람은 없었다. 공부를 하지 않고도 수학에서 늘 100점을 맞는 이는 질투를 당하나, 열네 자리의 곱셈을 암산으로 푸는 자는 경탄을 받는다. 현자와 선지자는 돌을 맞지만 초월자는 절을 받는다.

 

몸에서 전류를 뿜고 정신과 감응하는 그녀 앞에 모든 이들은 평등했다. 평등하게 터치를 가지지 않은 이들이었다. 나 또한 가짜 초고교급이 아니라, 그저 비터치자로 있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와 내가 원천부터 다르다는 이질감에서 기인한 편안함이었다. 참 이상하고 복잡하지 않은가?

 

정리해보아도 그녀를 향한 감정을 종잡는 것이 어려웠다. 내겐 아무런 용기도 없었다. 결국 마음을 조금도 드러내지 못하고 그녀는 죽었다. 나나시를 질투했냐고 하면 남자 고등학생이 할법한 정도로 적당히 질투했다고 말하겠다. 그러나 나는 그를 질투하는 것 이상으로 그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초고교급보다 뛰어난 그녀에게 감정을 가지고 마주하는 것부터가. 나는 편치 않았던 것이다. 뭇 사내들은 종종 자신이 호감을 가진 여성과 그들이 이루어지는 공상에 빠진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이것이 극도로 몹쓸, 청승맞은 상상임을 알고 있더라도 사내인 이상 그것을 억제할 방법은 없다. 연애를 하고 어울리고 함께하는 과정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난 그것들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연애. 결혼. 모든 일에서 그녀와 함께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녀와 말을 나눌 수 있다. 다른 초고교급 학생들보다 우월한 그녀와 친해질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녀와 어울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녀는 강대하고 나는 보잘것없기 때문이었다. 단지 초고교급이 아니라는 열등감 때문이 아니었다. 난 그녀를 터치를 받지 않는 이들보다 더 이해했기에 그녀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겼을 뿐이다. 터치라는 힘 앞에 내가 다가갔다간 태양 앞 촛불처럼 보이지 않게 되는 게 두려웠다.

 

그 때문에 그녀를 좋아할 수는 있어도, 사랑할 수는 없다. 신을 성애 할 수 없듯이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건 온전히 새로운 영감이 필요한 일일 터였다.

 

나는 요즘 리더의 의무에 대해 종종 떠올린다. 개인적인 감정에 먹혀선 안 됨을 되새긴다. 그럴 때면 캐롤 씨와 더 가까워지지 않고 그녀가 죽은 것이 이상하게 다행이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직후 나는 내 어딘가가 고장 났는지 무서워진다. 너무 무섭고 혼란스러워서 이상해진 것인지 생각한다. 캐롤 씨가 죽어서 다행이라고 느낀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그러나 될지도 모른다. 살인 게임의 리더는 죽은 사람과 단호히 작별해야 한다. 그 사람이 내 심장을 훔쳤다고 해도 그 시체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 차갑게 식은 내 심장을 다시 가져와야 한다. 좋은 리더라면 응당 그렇게 한다. 캐롤 씨가 아니라 내가 호감을 가진 누가 죽더라도, 결국 무덤 속에서 사자를 끄집어내 내가 맡겨둔 것을 회수해야 한다.

 

그러니 정말 다행이다. 나와 그녀가 사랑하지 않아서. 내가 차마 그녀를 사랑할 수 없어서.

 

그녀는 선인이었고 그 죽음만큼은 돌이킬 방법이 있었으면 한다. 그녀가 살아있다면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니. 나는 꿈속에서라도 그녀를 볼 일이 이제 없길 바랄 뿐이었다.

 

내 어디가 이상한 걸까?

 

나… 아니. 노바디는 그 나이 또래에 비해 다른 이들의 죽음을 잘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차갑게 휙 넘겨버릴 수 있다는 건 아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노바디는 자신의 이름마저 없애버렸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에 질려버려서.

 

노바디는 원래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다. 가난은 그녀에게 억척스러움과 강인함을 주었다. 빚을 갚다가 못 견디고 그녀를 버린 부모. 허름한 철물점에서의 독학과 성장. 노바디는 두 손을 더듬으며 어두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법을 알았다. 친척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을 때도, 자신의 앞가림을 잘하며 사는 것이 그들을 향한 보답 이리라고 여기며 어쩌면 매몰차게, 그녀의 입장에서는 현명하게 살았다. 그러나 노네임은 그럴 수 없는 인물이었다.

 

아무리 날이 서고 다른 사람을 비웃으며 스스로의 능력을 맹신하는 사람이 되더라도 노네임은 사람의 죽음을 떨쳐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노바디의 죽음을 기점으로 변하기 전에는 더욱 그랬다. 두 사람의 지하 비밀 기지에서 지내던 시절. 노네임은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는 잠꼬대를 하다가 잘 자고 있던 노바디까지 깨운 적이 있다. 다른 방까지 목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그 울부짖음이 컸다.

 

노네임은 그런 사람이었다. 노바디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노바디가 아니다. 나나시는 노네임과 똑같다.

 

나는 가끔 노네임이 살아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내 기억 속 노네임. 단지 밝은 분홍색 머리의 곱상한 기계공이 아니라 내가 노네임이라고 인식하는, 나와 함께하는 기억을 가진 그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노네임이 어느 정도 죽어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완전히 죽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나는 그가 기억을 전부 되찾는다면 다시금 노네임이 되리라 여겼다. 시원섭섭한 일이겠지. 나의 존재를 알고 있는 한 연결고리를 회복하는 일이며 또 나를 거부하는 그가 돌아오는 일일 테니.

 

그러나 노네임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나시는 노네임을 가진 채로 여전히 나나시였다. 기억만큼이나 영향이 큰 그가 겪은 체험이, 그를 독립적인 자아로 만들었다. 그는 일부분이 하얗게 덧칠된 그림이다. 덧칠의 일부분이 벗겨져도 새롭게 칠해지는 그림. 중첩된 물감이다.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 나는 노바디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 시라유키 히메리와도 그것을 연구하지 않았던가. 사람의 내부에 있는 광휘를. 나는 그것을 보았기에 안다.

 

영혼의 존재를 남다르게 인식하는 칸나즈키 시노부에게 있어서 나는 과연 노바디일까. 노네임은 과연 나나시일까. 누구도 답을 줄 수 없다.

 

노네임은 죽지 않았기에 나는 그와 작별할 수 없다.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운 인공지능의 사고방식은 망자에 굳이 가치를 두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그래 왔다. 카텟 기관에서 임무를 수행하다 죽은 자들을 나는 일일이 마음에 두지 않았다. 내가 혼란을 느끼는 것 또한 노네임을 향한 개인적인 감정과 인공지능의 시점이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 노네임이 완전히 죽었다고 내가 인식할 수 있다면, 아마도 나는 죽은 사람에게서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않고 그를 놓아줄 수 있겠지.

 

그러나 옛 친구의 흔적은 희미하고 덧없다. 나나시는 결정적인 부분에서 노네임과 다르고 어느 때엔 노네임과 같다. 타인이면서 기억을 잃은 본인이다. 판자가 전부 바뀐 배는 원본 테세우스의 배와 같지 않듯이, 판자가 일부분 돌아온 배 또한 원본이 아니다. 죽음이 아닌 죽음 앞에 작별은 없다.

 

감을 수 없는 눈앞에 박리된 채로 그는 내게 괴로움을 남긴다. 이것은 노네임이 나를 보는 시선과 같다. 약간의 위안과 그것을 덮어버리는 비애를 주기 위해, 실존적인 혼란을 타고났다. 우리는 서로를 상처주기 위해 존재하는, 기약 없는 목표를 향해 항해하는 두 척의 선박이다.

 

나는 매 순간마다 노네임을 다시 본다.

 

 

 

 

기와라 우시오: 이 얘기는 아무래도 좋아. 이해 안 되니까 또 나만 이상한 놈이다 이거지. 오케이. 알았다고. 그보다 흰 물건을 찾을 수 있는 단서는 어디에 있을 것 같아?

 

하기와라의 물음에 나는 그를 따라 대화의 초점을 바꾸었다. 애초부터 유쾌한 대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카이다나 후루미나미처럼 보다 많은 이들의 생존에 부정적인 이를 제하면, 내 예상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무로 시라베: 모노로그가 살인 게임의 고착화를 막기 위해 곧 새 공간을 개방할 거야. 늦어봐야 내일이겠지. 우리가 실의에 빠져서 주저앉는 것보단 일단 생존을 위해 참고 나아가는 편이 이상적이니까.

 

기와라 우시오: 이야. 역시 히무로이드입니다! 우리가 가축 신세로 지내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어.

 

무로 시라베: 칭찬이면 고맙게 받지. 네가 하는 이상 칭찬이 아니겠지만.

 

기와라 우시오: 오호호! 어떻게 아셨어? 아무튼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대충 없는 실마리 찾아 뒤적이던가, 모노로그가 이거 줄 테니 사람 죽여라 하고 뭔가 뼈다귀 던져주는 걸 기다리는 거란 거잖아. 와우! 이게 개새끼의 삶이지. 다른 게 있나?

 

무로 시라베: 우리에게 주도권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그렇게 자조적인 말을 쓸 필요는 없잖아. 굳이 우리 모두를 격하시키고 싶은 거야?

 

기와라 우시오: 그러고 싶다. 굳이 총을 들고 다니는 것처럼. 오호호.

 

친구 사이에 보통 이런 대화가 오가던가. 친구라 할 만한 존재가 카텟 기관에서의 메리, 탑에서는 마유즈미 나데시코뿐이었기에 나는 좀처럼 요령을 터득하지 못했다. 남자 사이의 우정은 이런 식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이렇게 적대적인 것이 우정이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어느 쪽도 친구가 될 생각이 없는데 우정이 싹틀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나와 하기와라 모두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오가는 것은 많았으나 참된 얼굴을 가진 것은 없었다. 나는 그의 태도가 달갑지 않았고 그는 나라는 사람 자체를 달갑지 않아 했다. 친해질 수 있을 리가.

 

그러나 마유즈미에게 나와 하기와라의 태도는 당혹스럽게 보이는 것 같았다. 마유즈미는 하기와라에게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며 팔꿈치로 나를 찌르거나 내 피부를 꼬집곤 했다. 악력이 약한 손일 텐데도 이상하게 매웠다.

 

유즈미 나데시코: 그러면 못 써. 히무로…!

 

마유즈미가 목소리를 낮춘 채 꾸짖었다.

 

무로 시라베: 이건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마유즈미. 손 하나로 박수를 칠 방법은 없어.

 

유즈미 나데시코: 그래도 계속 손을 내밀어야 언젠가 박수 소리가 나지!

 

이런 식으로 과연 일이 잘 풀릴 것인가. 나는 의문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말을 따랐다.

 

무로 시라베: …커피 마시겠어? 찹쌀떡도 있어.

 

결국 난 달갑지 않은 대화를 나눌 바에야 당과 카페인이라도 제공하기로 했다. 날 적대하는 태도만큼은 억누를 수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에게 당과 관련된 질환만 없다면.

 

기와라 우시오: 독이 들어있는 거 아니면 먹을래.

 

무로 시라베: 내가 왜 독을 타겠어?

 

기와라 우시오: 낸들 아나. 독을 타는 사람이 알아야지.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떼를 쓰는 것도 정도가 있다고 생각한 나는 인내심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음을 스스로 느꼈다. 그는 총잡이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나 정작 그가 내게 적대적이라면, 소통의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겠다면 그에게 맞지 않는 신발을 억지로 씌울 필요 또한 없었다.

 

타고난 원석을 썩히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억지로 가공되는 것보단 자유롭게 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컵 안에 믹스커피를 한 봉지 까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기와라 우시오: 아야. 악! 씁. 아. 왜 이래! 야익!

 

등 뒤에서 벌어지는 일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읽을 수 있었다. 그 또한 마유즈미의 꾸중을 듣고 있었다. 과연 그런 것들로 완전히 상극인 그와 나를 유화시킬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들었으나… 어리석은 의문이었다. 꾸중의 강도보다는 꾸중을 듣고 내가 어떻게 태도를 바꾸느냐가 관건일 테니.

 

무로 시라베: 먹을 생각이 들면 먹어. 독은 안 탔어.

 

찹쌀떡 상자에서 떡을 하나 꺼내 커피와 함께 책상 위에 두었다. 그러자 하기와라는 눈을 비정상적으로 크게 뜨며 능청을 떨었다.

 

기와라 우시오: 아니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였어? 히무로이드 참 농담을 농담으로 받을 줄 모르시네. 암튼 잘 먹을게.

 

하기와라는 찹쌀떡을 베어 문 뒤 입 안에서 우물거리며 말했다.

 

기와라 우시오: 그러고 보니까 내 전용실에는 팝콘이 있는데. 전용실에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물건이나 기호식품이 올라오는 것 같아. 참 사려 깊기도 해요!

 

무로 시라베: 쾌적한 환경이지. 취침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전용실에서 잠을 자지 못한다는 제약을 붙인 거야.

 

기와라 우시오: 나왔다! 흑막 시점에서 게임 읽기! 와우! 세상이 깜짝 놀랐다!

 

하기와라는 밉살스럽게 재깔이다 말고 웃는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기와라 우시오: 사실 의외긴 해. 히무로이드 저거 채식주의자일 것 같았는데 설탕이랑 카페인 같은 세속적인 것도 먹고.

 

무로 시라베: 왜 내가 채식주의자일 거라 생각하지?

 

기와라 우시오: 싸이코들은 원래 다 채식주의자야. 난 술 담배 하면서 자기 나쁜 일 하는 사람은 안 무섭거든? 나 나쁜 놈이오 하는 놈들은 그냥 남을 겁주려고 그러는 거야. 그런데 늦잠 절대 안 자고 육식과 밀가루 자제하면서 매일매일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사람은 존나 무서워. 속에 뭔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거든. 너 같은 경우에는 역으로 싸이코니까 채식주의자려니 한 거고. 이해가 가?

 

그의 발상은 이치와 어긋나 있었기에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기와라 우시오: 아무튼. 찹쌀떡이 맛있다는 소문은 어디서 들었길래 여기에 찹쌀떡 상자가 있는 거야? 너는 식탐이랑 거리가 먼 편 같은데.

 

무로 시라베: 카텟 기관의 동료. 메리에게서.

 

유즈미 나데시코: 아. 그 사람…

 

기와라 우시오: 메리? 아하… 오케이. 한 발자국만 더 나갔어도 탈룰라였겠군. 머쓱해진 하기와라 우시오는 찹쌀떡과 커피를 먹기로 했다.

 

하기와라는 머쓱한 표정으로 말하며 찹쌀떡과 커피를 먹었다.

 

무로 시라베: 그렇게 민감한 이야기는 아니야. 그녀와 관련된 기억은 대개 좋은 기억이니까.

 

기와라 우시오: 그래도 그 분과 관련된 우스개는 안 나와요. 히무로이드 씨. 지금 내가 선 넘으면 언젠가 이건 네가 모욕한 메리 씨의 몫이라며 총알 갈길 거잖소?

 

무로 시라베: 선을 인식한 다음 의도적으로 넘는 의무는 개인 사이에 적용되지 않는 거야?

 

기와라 우시오: 일단 전부 알아낸 다음에 제대로 넘었다 슬그머니 돌아오는 게 정석이라고 할 수 있지. 그보다 우와. 내가 한 말을 기억해? 감동적이야. 히무로이드! 우리한테 신경을 쓰는구먼!

 

무로 시라베: 단지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것으로 그런 평가는 과분해.

 

기와라 우시오: 그것도 알고. 염치 있다! 다시 봤어. 그러니 돈워리. 늙어 죽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이랑 부대끼는 법을 배울 수 있겠지!

 

무로 시라베: 적어도 여기서 늙어 죽을 순 없어. 이 탑에서 나가야 하니까.

 

기와라 우시오: 어련하시겠어요. 아무튼 우리 결론은 그거야? 모노로그가 새 동기 줄 때까지 기다려 보자?

 

무로 시라베: 흰 물건을 수색하는 것도 좋지만, 이제 수색한 적이 없는 장소는 고작 장미 꽃밭뿐이야. 미도리카와는 그곳에서 흰 물건을 찾은 바 있지만 그건 그녀에게 적외선 투시경이 있었기 때문이지. 그저 꽃밭을 휘고 다니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이야.

 

유즈미 나데시코: 탈출 장치를 가지고 있는 후루미나미가 나타나 주면 고맙겠지만…

 

루미나미 나몬: 고마우면 뭐라 해줄 건데?

 

유즈미 나데시코: 어? 글쎄… 음. 다시 와줘서 고마워?

 

루미나미 나몬: 별 말씀을.

 

유즈미 나데시코: 어라? 후루미나…

 

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총을 겨누었다. 플라잉 로봇에 몸을 묶고 비행하고 있는 그녀의 형상이 보였다. 형상은 찰나의 시간 동안 더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커다란 충격과 함께 전용실의 창문을 깨고 들이닥쳤다.

 

나는 총을 홀스터에 넣고 양쪽 손으로 마유즈미와 하기와라를 각각 당겨 내 등 뒤로 던졌다. 투명한 유리조각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찰나의 동작이 끝나자 나는 다시 총을 뽑고 불청객에게로 총을 겨누었다. 그녀는 뻔뻔히 웃고 있었다. 흙이 덕지덕지 묻고 유리조각에 찔려 핏방울이 흘러나오는 그 되바라진 얼굴의 주인은, 후루미나미 나몬이었다.

 

기와라 우시오: 어 이 새끼 뭐야! 왜 여기 있어?!

 

후루미나미 나몬의 전신은 흙으로 더러웠다. 산발인 머리카락. 쉴 틈도 없이 도망다닌 것처럼 보였다. 장황한 설명 없이도 그녀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알았다. 카이다와 흑막에게 쫓겨왔던 거겠지.

 

동정심을 이끌어내려 최선을 다해봤자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실크처럼 부드럽지는 않았으리라.

 

무로 시라베: 제 발로 온 이상 보내줄 순 없어.

 

루미나미 나몬: 아. 듣던 중 반가운 얘기네. 히무로… 나 좀 도와줄래? 이거 줄게.

 

그녀의 손에는 탈출 장치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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