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3

더 단크 타워 챕터 3 - 2

by 도타싫어! 2022. 5. 2.

토키와는 모리가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리 레이코: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너 자신을 재단하는 일 뿐이다. 이상적인 지도자에 최대한 가깝도록. 스스로를 깎고 또 깎아야 한다. 설령 그 과정에서 너 자신이 사라진다고 해도. 너는 매사에 옳은 결정을 해야 하고, 어떤 일에도 평정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더없이 완벽에 가까우나 누군가가 네 존재에 반감을 느끼지 않도록 인간미를 가져야 한다.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내색하지 않아야 하고, 재빠른 판단을 해야 하고, 추진력과 결단력을, 온화함과 카리스마를 동시에 갖춰야 한다. 그리고 어느 쪽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너는 응당 그래야 한다. 감투에는 그만큼의 의무가 따라온다. 리더가 된다는 것은 너의 삶을 온전히 네 것으로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네게 그럴 각오가 있나?

 

토키와는 자신에게 그럴 각오가 없었음을 너무 늦게 알았다. 살인 게임의 초반이었기 때문인지 토키와는 다른 이들에게 얕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기에 모리의 말에 긴장하면서도, 모리에게 리더의 자리를 주지 않았다. 초고교급 리더라는 본인의 정체성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모리는 그의 무능함을 비난한 적이 없지만, 그녀는 단지 비난하지 않았을 뿐 누구보다 토키와의 무능함에 대해 알고 있었다. 적어도 토키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좋은 리더가 무엇인지에 대한 사색은 오롯이 토키와의 몫이 되고야 말았다.

 

키와 아유키: 무기. 카이다만이 독식하고 있었지. 그렇지만 아무리 통제해 봐도 살인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토키와는 리더 자리를 히무로 시라베에게 넘기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은 리더를 맡을 재목이 아님을 누구보다 그가 잘 알았다. 그걸 알고 있다면 이제 어떻게 그에게 리더를 양도시킬지의 문제였다.

 

하기와라? 글쎄. 이상한 방향으로 갈 것이다. 칸나즈키도 마찬가지. 나나시는 최근 오락가락하니 그조차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고, 마유즈미는 유약했다. 23T는 가능성이 있었고, 야가미는 살인자니 안 된다. 이바라는 노는 데에 적합한 리더 일지는 몰라도 생존 활동에 적합한 리더는 아닐 것이다. 후루미나미와 카나리 그리고 카이다는 논외로 친다. 따라서 가장 유력한 후보는 히무로가 되었다. 그는 그에게 리더를 양도하려 할 때 히무로의 대답을 상상하며 그와 가상의 대화를 진행시켜 보았다.

 

키와 아유키: 히무로. 난 리더 역할을 못 해. 언제나 모자라지. 하는 거라곤 밤을 새우며 누굴 감시하는 것 밖에 없었어. 그러니 계속 사람이 죽는 거고. 난 리더에 걸맞은 사람이 아니야.

 

히무로는 답하리라.

 

무로 시라베: 네가 어떻게 느끼는지는 상관 없어. 말의 요지가 뭐야?

 

키와 아유키: 네가 나 대신에 리더 역할을 맡아 주었으면 해.

 

무로 시라베: 왜 나에게 그 역할을 권유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리더의 재목이 아니야.

 

키와 아유키: 그럼. 나는 재목이라서 리더를 떠맡은 것 같아?! 나도 어쩔 수 없이 이러고 있는 거라고!

 

아니야. 애꿎은 사람한테 화를 내면 안 돼. 다시…

 

키와 아유키: 네가 완벽한 리더에 걸맞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나는 리더가 되어선 안 되는 거야. 나는 너무 모자란 사람이야. 너희 모두 알겠지만… 난 머리가 좋지 않고, 통솔력도 모자라. 결단력도 부족하지… 작은 오각형이야. 특출난 점 없고 모든 면에 하자가 있어. 그래서 지금까지 무턱대고 밤을 새워왔던 거야. 뭐라도 해야 했으니까…

키와 아유키: 그렇지만 그것만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제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맡는 게 옳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네가 다른 모두를 이끌어 줘…

여기까지는 좋았다. 아마 다른 이들 또한 내 부족함은 알고 있을 테니까. 차라리 자신이 하는 게 좋을 거라고 히무로는 납득할지도 모르지. 모두를 통솔할 자격이 생기면 생존에도 유리하잖아. 그러니까 아마 받지 않을까?

토키와는 그렇게 납득한 다음 당장 히무로에게 찾아가고 싶었으나, 개운치 않은 느낌에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히무로는 그런 식으로 쉽게 납득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토키와는 그가 가장 할법한 말을 또 떠올려 보았다.

 

무로 시라베: 왜 내가 리더를 맡는 게 옳다고 생각해?

이걸 왜 다 듣고싶어 하지? 그냥 그렇구나. 그럼 내가 하지 뭐.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주면 안 돼?

키와 아유키: 그야 너는 똑똑하고 결단력이 있으니까. 또 유능해.

토키와는 상상 속에서 소리치고 싶었다. 너도 알잖아. 너 똑똑하고 나 모자른 거. 너 행동 빠르고 나 느린 거. 너 유능하고 나 무능한 거! 그럼 되는 거잖아! 왜 내가 이런 역할을 계속 이어나가야 해. 미움만 받을 게 뻔한 역할을!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애원하더라도, 논리로 설득하거나 화를 내더라도 히무로 시라베의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으리라고. 토키와는 속으로 깨달았다.

무로 시라베: 그럼 나 대신 야가미를 세우면 되겠어.

키와 아유키:  …뭐라고?

토키와는 자신이 한 생각에 스스로 놀랐다.

무로 시라베: 야가미는 사람을 죽이는 계획을 짤 만큼 지능이 높아. 또 흉기로 피해자의 심장을 찌를 만한 결단력이 있지. 마지막으로 그 모든 공작을 숨기려 애쓰고 재판을 혼선에 빠트릴 만큼 유능하지. 능력으로 따지면 충분히 리더를 맡을 수 있지 않나?

리더는 능력으로 정해지는 게 아니라는 논박. 토키와는 할 만한 말을 좀처럼 떠올리지 못하다 가까스로 몇 마디를 더 떠올렸다.

키와 아유키: …네 말뜻은 알겠어. 하지만 너와 야가미는 확실하게 달라. 그걸 너도 알면서 모르는 척을 하면 안 돼.

무로 시라베: 내가 느끼기에 나와 야가미의 차이점은 하나뿐이야. 나가기 위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그것 말고 나는 그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점이 없어.

히무로에 대한 정보의 폭이 좁기 때문에 토키와는 히무로가 할법한 말을 점점 확신하기 어려워졌지만, 그는 최대한 연극을 지속했다.

키와 아유키: 너는 충분히…

히무로 시라베: 또 야가미만큼이나 거북한 이를 리더의 자리에 세우면 안 되겠지.

토키와가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전에 상상 속의 히무로는 말을 이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느닷없이 화가 치미는 경험을 하는 것처럼 급작스럽고 대처하기 어려웠다. 그의 내면에서는 인식과 생각이 끓는 물 넘치듯 들끓었다.

무로 시라베: 넌 알잖아. 네가 날 꺼림칙하게 여긴다는 것. 미친 과학자들한테서 몸을 개조당한 사람을 서슴없이 대할 만한 담력은 없어. 적어도 범죄자가 체포되는 장면도 눈 앞에서 본 적 없는 너에게. 인체 개조와 세뇌 그리고 실험으로 빚어진 사람은 환상에나 나올법한 존재지. 그런데 그게 총을 찬 채로 눈앞을 걸어다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자가.

키와 아유키: 맞아… 맞아. 다 맞는 말이야…

토키와는 자신에게 히무로의 탈을 씌운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토키와는 조금씩 탈을 벗기 시작했다.

키와 아유키: 야가미랑 똑같아. 히무로는 꺼림칙해. 리더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실히 너는 리더에 걸맞은 사람이 아니지. 사실이야. 아마 가장 리더에 걸맞은 사람은 캐롤 씨. 또 모리라면 과격하지만 확실한 방법을 제시해 주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전부 죽었어. 너밖에 안 남았어. 그러니 네가 해.

키와 아유키: 그렇지만 나는… 리더가 아니야. 초고교급이 아니야.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키와 아유키: 그럼 리더가 돼.

토키와는 토키와에게 그렇게 한 마디를 던졌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토키와는 단지 그 생각에 빠져들었다.

리더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는 리더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토키와 아유키 말고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한다…

토키와는 칼을 손으로 붙잡았다. 섬뜩하게 빛나는 칼날은 왜인지 새로운 날로 나아가기 위한 통로 같았다.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또한 카텟 기관의 사람이었어…

 

단편적인 정보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살인 게임의 참가자들에 대한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납치되었다고 파악된 카텟 기관 인원은 나, 마유즈미, 나나시로 세 명이었다. 또 파악된 초고교론자의 인원은 야가미, 미도리카와, 카이다로 세 명. 납치된 나머지 인원들 또한 카텟 기관과 초고교론자로 이루어져있는 것또한 불가능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살인 게임의 배후는 두 조직을 모두 적대하는 제3의 조직이 되는 것인가? 모노로그의 생김새에서는 폭도가 연상되었으나, 아무리 부활했다고 해도 쇠퇴한 폭도들에게 가상현실을 만들어낼 만한 설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여전히 미궁 속을 헤매는 처지였으나 적어도 마유즈미라는 분명한 아군을 한 명 떠올렸다는 것만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총잡이로 성장하고 있는 그녀와 앞으로 더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할 텐데. 카텟 기관의 동료이니 거리낌 없이 그녀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한 방에서 잠에 들 수 있을 정도로는 믿을 수 있었다.

내가 침낭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의 시간은 아직 새벽이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우윽… 으으으…

나는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는 마유즈미를 내려보았다. 새벽에 끝난 학급 재판은 탑 안의 거의 모든 이들로 하여금 긴 잠을 자게 만들었다.

잠을 자는 사람을 주의 깊게 본 적이 없었기에 그녀가 괴로워하는 목소리를 낼 때는 어떻게 할지 쉽게 답을 낼 수 없었다. 이전에도 그녀는 악몽을 꾼 적이 있었다. 해변에서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그러나 내가 굳이 깨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꿈은 꿈일 뿐이다. 대부분의 꿈은 장기기억으로 보존되지 않았기에 나는 그녀가 몇 시간씩 괴로워하고 땀을 흘릴지라도 마유즈미의 잠을 깨우지 않았다.

나는 다시 침낭 안으로 들어간 뒤 귀를 열어둔 채 짧은 잠을 취했다. 뇌가 무의식의 영역을 표류하는 동안 귀를 열어두면 특이한 일이 벌어진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에 걸맞게 꿈의 내용이 변하는 것이다. 남자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면 꿈은 즉각적으로, 내가 판단할 시간도 없이 자신의 형태를 바꾼다.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남자들의 싸움이 눈 앞에 나타나는 식이다. 이 현상에 내 의지는 개입할 여지가 없으며 내 무의식만이 제멋대로 물감을 던져 캔버스를 색칠한다.

유즈미 나데시코: 아윽. 아아…

마유즈미의 앓는 소리를 듣는 내 꿈은 한 없이 불길한 형상을 내놓았다. 그녀는 나를 원망하는 것처럼 내 쪽을 똑바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게 환상이며 청각 신호에 대한 반사라는 것임은 알고 있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꺼림칙함을 제외하면 꿈속의 그녀와 마주하는 일에 어려움이 없었다.

필요한 만큼의 수면을 마치고 나는 깨어났다. 그리곤 해야 할 일과 살인 게임의 목적에 대해 곱씹으며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도, 그 동안 마유즈미와 나를 습격하려는 이는 없었다. 카이다마저도 후루미나미를 쫓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곧 정오를 지나 오후가 되었다. 즉 그녀를 깨워야 할 시간이 다가왔고. 나는 마유즈미가 머리를 뉘고 있는 배게를 살짝 흔들어 그녀를 깨웠다.

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일어나. 이제 기상할 시간이야.
 
유즈미 나데시코: 으. 누구세… 아. 히무로구나…

마유즈미는 비몽사몽하는 와중에 얼굴을 배게에 묻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히무로… 나 쪼오금만 더 잘래… 이제 귀신도 물러갔을 것 같은데…
 
무로 시라베: 다른 모두가 일어나면 식사를 겸한 회의가 시작될 거야. 탑과 해변이 단절되고 난 뒤에 처음 열리는 회의니까 꼭 참석해야 해. 그리고 넌 날 감시해야 하잖아. 기억해?

유즈미 나데시코: 회의… 감시… 으으. 알겠어. 히무로… 곧 준비할 테니까 먼저…?

게슴츠레하게 뜨여 있던 마유즈미의 눈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고 나는 내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거나, 혹은 오해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유즈미 나데시코: 왜… 내 방에 있어. 히무로?!

무로 시라베: 우리 어제 합의하지 않았던가?

내 대답은 마유즈미의 더 큰 혼란을 부른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내게 큰 소리로 물었다.

유즈미 나데시코: 뭐를?!

무로 시라베: 어제 합의했잖아. 총을 가지고 있는 두 개인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수면을 취하는 사이 누가 총을 멋대로 사용할지 모른다고. 그러니 적어도 같은 공간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어. 나는 침낭을 크레딧 상점을 통해 주문했고. 네 총 그리고 홀스터는 저 책상 위에 놓여 있지.

나는 마유즈미의 숙소 안에 놓인 책상을 가리켰다. 잠에서 깨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정신이 없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마유즈미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유즈미 나데시코: 어.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매번 이렇게 자야 하는 거야?

무로 시라베: 그게 가장 안전하겠지만 사생활을 극도로 침해하는 것 같아서 나도 만족스럽지 않아.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하는 게 좋겠어. 만약 그게 있다면 말이야…

유즈미 나데시코: 그… 나 준비만 빠르게 하고 올게. 문 밖에서 기다려!

무로 시라베: 그렇게 하지.

만전을 기하자면 욕실 앞에서도 발포를 준비해야겠지만, 나는 침해하지 않는 편이 나은 사생활의 경계를 인식하고 그녀의 방에서 나갔다. 침낭은 의도적으로 치우지 않았다. 불합리한 침범을 받아들이는 데에 도움을 줄 테니.

하룻밤 사이에 세 명이 죽었다. 살인 게임의 참가자들에겐 두 가지의 선택지가 주어졌다. 다른 이들을 멀리하고 홀로 살아남으려 할 것인가, 협력할 것인가. 카나리의 경우가 있으니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협력에 찬성할 터였다. 카나리 본인은 스스로가 현명한 선택을 하고 있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는 매번 나쁜 수를 두고 있었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있는다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리 만무했고, 최후의 2인이 되더라도 그에겐 남을 살해할만한 능력이 없었다.

당연히. 협력하여 살아남고자 하는 이들은 식당에 모일 수밖에 없었다. 마유즈미의 숙소 문 앞에서 묵묵히 서 있던 나는 하기와라 그리고 이바라와 마주쳤다.

기와라 우시오: 뭐야 히무로이드. 마유즈미 방을 지키고 있어? 스토킹하고 있네?

하기와라가 조소를 입에 담은 채 말했다.

무로 시라베: 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해선 안 되니까.

기와라 우시오: 하하. 농담이었는데 얘는 진짜 스토킹 중이었네. 미친 놈…

바라 쿠리스: 너 마유즈미한테 이상한 물 들이지 마. 카이다를 막으라고 걔한테 총을 준다는 것부터 미친 소리였는데. 앞으로도 계속 주겠다고?

무로 시라베: 마유즈미 본인이 동의했어.

바라 쿠리스: 본인이 동의하면 9살짜리랑 24살짜리가 연애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무로 시라베: 본인의 동의가 모든 일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요지는 이해하지만, 마유즈미 앞에서는 그런 비유 들지 마. 그녀를 어린아이 취급하면 분명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기와라 우시오: 말꼬리 잡지 마쇼. 요지 하나는 이해하면서 요지 둘은 이해를 못 하나본데. 이바라는 네가 마유즈미를 구워삶아서 협력하게 만든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야. 캐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프로파일러가 24시간동안 심문하고 가스라이팅 했으면 뭐든 가능하지 않겠냐고. 그 얘기 하는 거지. 이바라?

바라 쿠리스: …아니. 그건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기와라 우시오: 아 ㅋㅋ 머쓱타드~

무로 시라베: 너흰 그녀를 걱정하고 있지만 동시에 무능함을 가정하고 있어. 어쩌면 무능함을 가정하기에 걱정하는 걸지도 모르지. 나는 그러지 않아. 친구이기에 걱정하더라도 나는 그녀를 믿고 있어.

바라 쿠리스: 친구…? 흠.

이바라는 팔짱을 끼고선 나를 쏘아보았다. 그래봤자 나오는 답은 없을 텐데. 달갑지 않았다.

바라 쿠리스: 네가 처음에 미도리카와 관련해서 거짓말했던 거 말이야. 되게 잘하더라. 무쿠치? 난 깜빡 속았어. 처음 거짓말은 하는 사람 잘못이라지만 그 다음 거짓말은 속는 사람 잘못이라 하거든? 난 잘못 안 할 거야.

무로 시라베: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아. 애초에 너희들에게 내 진의를 설득해야 하는 필요성을 못 느끼겠어.

바라 쿠리스: 마냥 의심해서 나도 미안하지만, 마유즈미가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겠어. 이것만큼은 아무리 네가 좋은 모습을 보여줘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총을 가지고 있는 이상.

무로 시라베: 총을 소지했기에 감당해야 할 의심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기와라 우시오: 이바라랑 달리. 나는 그런 생각 안 해.

나는 하기와라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상대를 경계하는 태도, 본질을 보는 통찰력. 그는 광대이자 편협한 이의 탈을 쓰고 장난을 하는 듯 했으나 어느 정도는 옳은 선택을 하고 있었다.

그는 모욕이라 느끼겠지만, 나는 그에게서 어느 장도 총잡이의 가능성을 보았다. 다만 그는 내게 적대적이며 자신에게서 조금의 위대함도 보려 하지 않았기에. 자질을 발전시키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잘 가다듬는다면 야가미의 아성조차 위협할 수 있는 자가 바보의 형상을 띠고 있으니. 큰 억압을 당한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하기와라가 왜 날 그렇게 보냐며 불쾌함을 표현하려는 때. 나는 불쾌한 만남을 지속하지 않는 편을 택해5다.
 
무로 시라베: 너희 먼저 식당에 가 있어. 나는 마유즈미와 함께 합류할 테니.

바라 쿠리스: 이왕 기다리는 거면 제대로 기다려! 혼자 뒀다간 카이다가 물어갈라.

이바라는 당부와 장난스러운 미소를 담은 채 내게 손가락질을 했다. 하기와라는 이바라의 뒤를 따라가면서 내가 있는 방향을 줄곧 힐끗거렸다. 그것은 당장 내가 이바라와 그를 향해 총을 뽑고 쏘리라고 믿는 사람의 눈치였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쏠 필요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곧 퀭한 눈을 한 토키와가 자신의 숙소 안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무로 시라베: 좋은 아침이야. 토키와.

토키와는 내 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키와 아유키: 살인 게임에 좋은 아침 같은 건 없어. 곧 회의를 열 테니 식당으로 와서 참여해 줘. 넌 세 번의 시련에 전부 참여한 인물이니 네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아. 나 먼저 갈게.

토키와는 용건만 말하고 계단을 올랐다. 조금 당혹스럽긴 했으나 그런 종류의 소통이 내게는 더 효율적이라고 느껴졌다. 적어도 이제 그를 보며 마음에도 없는 좋은 아침 따위의 인사를 할 필요는 없어졌다. 그리고 좋은 아침은 없다는 그의 의견에 나도 동의하는 바. 나는 그의 바뀐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곧 탑의 인원들은 식당에 모였다.
 
유즈미 나데시코: 모든 인원이 탑에 모인 다음 처음 겪는 회의 시간이네…
 
그러나 식당의 테이블 위에는 아홉 명 뿐이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야가미 토가. 칸나즈키 시노부. 토키와 아유키.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바라 쿠리스. 나나시. 23T5U130. 그리고 나. 히무로 시라베.
 
카나리의 결석 사유는 겁이 많음. 후루미나미의 결석 사유는 흰 물건을 가지고 도피. 카이다의 결석 사유는 흑막의 내통자. 두 번의 살인밖에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반 정도가 비어버린 식당은 휑하게 느껴졌다. 또 죽은 이들의 빈자리가 눈에 밟히기도 했다. 네 명…
 
키와 아유키: 다들 많은 일을 겪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일단 해변에서 있었던 일과 탑에서 있었던 일을 각각 취합하자.
 
기와라 우시오: 그 전에 잠깐 할 말 있는데. 왜 야가미가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앉아 있어?
 
바라 쿠리스: 야. 자연스럽게 있어서 눈치 못 챘네! 너 되게 뻔뻔하다!
 
이바라가 삿대질을 했으나 야가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가미 토가: 이제 같이 흑막에 맞서야 할 처지니. 얼굴에 철판보다 더한 것도 깔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야가미는 덤덤하게 물었다.
 
기와라 우시오: 당신 얼굴. 비브라늄인가?
 
하기와라 또한 덤덤하게 물었다.
 
가미 토가: 지금은 한 사람의 도움이라도 더 필요할 텐데요. 후루미나미 씨는 카텟 기관의 도움을 가져갔습니다. 카이다 씨가 흰 물건을 빼앗는 데에 성공한다면 더 나쁜 일이 벌어지겠죠? 카나리 씨는 문을 걸어잠그고 협력할 생각이 없습니다.
 
가미 토가: 네 명이 죽었고, 세 명은 저희에게 적대적입니다. 생존자는 열두 명이지만 정작 동료는 적어요. 저는 나이토 씨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기에 있는 사람 누구보다도 완력이 강합니다. 도움이 될 수 있어요.
 
기와라 우시오: 아니 니 얼굴 비브라늄이냐니까?
 
가미 토가: 저는 내통자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애초에 지금 제 얘기로 시간을 보내실 여유가 있으십니까? 후루미나미 씨와 협력했다는 칸나즈키 씨도 있습니다만.
 
나즈키 시노부: 더 이상은 아니야. 바뀌지 않는 미래 속에서 방향을 최대한 틀어보려 했는데. 걔 손에 흰 물건이 들어간 이상 그걸 최대한 막아야 해. 이제 미래가 잘 안 보이니까 그건 이해해줭.
 
무로 시라베: 이 처지가 부러우면 너도 늘상 종잡을 수 없는 존재로 지내지 그래.
 
가미 토가: 그건 어렵겠군요. 전 늘 이성에 의지하는지라 말이죠. 저를 받아들이지 않으시겠다면 그렇게 하세요. 좋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정보는 최대한 여러분들께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키와 아유키: …우선 우리는 탑과 해변 사이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있어. 우리는 시련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몰라. 그러니 들어보자.
 
무로 시라베: 정말 할 말이 많아.
 
나는 가장 중요한 내용만을 추려 말했다.
 
무로 시라베: 시련의 내용은 미도리카와였어. 우리는 각각 과거, 현재, 미래의 미도리카와를 만나며 그녀를 문 밖으로 꺼내는 시험에 들었지.
 
가미 토가: 그리고 세 번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녀를 문 밖으로 꺼냈다면 그녀를 다시금 탑으로 데려올 수 있었으나, 모노로그 씨는 카이다 씨를 이용해 저희들을 압박해오더군요.
 
기와라 우시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고 싶은 거. 세 번째 시련 속 미도리카와는 어떤 사람이었던 거야? 그건 너랑 히무로밖에 못 봤잖아.
 
가미 토가: 말해드리죠. 제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전부 진실이니 잘 들으세요.
 
야가미는 운을 뗐다.
 
가미 토가: 저는 미도리카와 씨. 카이다 씨와 같은 조직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복수를 맹목적으로 쫓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바다뱀 시절의 여유를 되찾으면서 마스크와 가면 모두 버리고 깔끔한 옷을 입고 있더군요. 남장 또한 그만두고선 미래를 살아갈 준비가 된 사람처럼 머리를 길렀고요.
 
유즈미 나데시코: 뭐어?!
 
가미 토가: 계속 들어 보세요. 그녀는 과거의 인연을 청산하고 복수에만 전념하고자 스스로의 겉모습을 꾸몄습니다. 마스크와 남장은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였죠. 그녀가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건, 애초에 카이다 씨와 부대끼고 있다는 것은 그녀가 복수를 그만두었다는 뜻입니다.
 
키와 아유키: 너희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가미 토가: 바로 그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가 문제입니다.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라 쿠리스: 조직…이라면. 그게 무슨 조직이었어? 너희들이 협력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 함께 행동한 걸지도 몰라.
 
무로 시라베: 세 명은 초고교론자의 재단에 소속되어 있었어. 내가 이전에 얘기한 적이 있었지? 초고교급을 신봉해 나와 초인들을 만들어낸 조직.
 
무로 시라베: 초고교급의 영향력을 신봉하다시피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그들은 초고교급이라는 엘리트주의가 희망이라는 관념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 생각했어.
 
무로 시라베: 그들이 바로 초고교론자야. 세 사람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들과 협력하고 있었다는 건 분명했어.
 
유즈미 나데시코: 대체 왜…?
 
기와라 우시오: 간단히 생각해서. 초고교급을 신봉하니까 초고교급 재능 가진 것들이랑 한 편 먹은 거 아니야?
 
무로 시라베: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초고교론자들이 초인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재능을 빼앗는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이야. 그들은 초인들이 만들어낼 새 시대에 집착한 나머지. 초고교급들에게서 재능을 추출하는 것에 집착하기 시작했어.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없는 초고교급이 대거 사냥당했지. 그런데 야가미, 미도리카와는 재단에게서 살아남았어. 어떻게?
 
가미 토가: 히무로 씨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저와 미도리카와 씨, 카이다 씨가 함께 행동하는 것보다도 더 큰 의문이 생깁니다. 재능을 추출당하지도 않은 채 그 괴상한 조직에 협력한다뇨. 무슨 유착 관계가 있었던 걸까요?
 
무로 시라베: 적어도 카이다는 짐작이 가. 그녀는 매발톱이라고 불리는 초인들의 호위와 비슷해. 전투, 호위, 그리고 잠입에 특화된 유사 초인들. 약한 재능을 주입받은 대신 실험을 통한 근섬유의 압축에 의존하지. 그래서 몸의 비중이 물보다 높고. 물에 가라앉아. 어쩌면 그녀가 모를 뿐. 처음부터 그녀는 재단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
 
유즈미 나데시코: 카이다는 마피아 전속 히트맨 아니었어? 그런데 그 재단이라는 곳이랑도 연관이 있으면… 으. 머리야…
 
기와라 우시오: 오케이. 카이다는 무슨 내성발톱? 아무튼 거기 출신이라고 치자. 진짜 의문은 카이다 때문에 신세 망친 야가미랑 미도리카와까지 왜 거기에 들어갔냐는 거야. 심지어 야가미는 미도리카와한테 복수하려 들었잖아!
 
나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가미 토가: 저희는 미도리카와 씨를 되살리기 위해 시련에 참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를 버리자고요? 그럼 지금까지 저희가 했던 일들은 다 뭐가 됩니까?

 

가미 토가: 바다뱀… 바다뱀. 정신 차리세요. 바다뱀.

 

가미 토가: 이건 아니야…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절대로. 어떻게… 어째서 또?

 

무로 시라베: 야가미는 미도리카와를 증오하지 않았어.

 

바라 쿠리스: 뭐? 그렇지만 야가미는 미도리카와를 죽였잖아!

 

무로 시라베: 야가미는 시련 속에서 늘 그녀를 구하려고 했어. 야가미는 탑에 나가 바다뱀을 찾고자 했기에 내통자 역할을 맡고 미도리카와를 죽였지만, 정작 자기가 죽인 사람이 자신의 목표인 줄은 몰랐어. 모노로그와 야가미가 협력하지 않게 된 계기도 그것일 거야.

 

기와라 우시오: …이건 나도 인정할게. 야가미는 미도리카와 묘 앞에서 중얼거린 적도 있어. 조용히 애도 같은 걸 표하더라고. 내가 잘못 본 건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납득이 가.

 

바라 쿠리스: 그러는 걸 봤다고?

 

유즈미 나데시코: 으엥? 진짜 이상한데!

 

기와라 우시오: 그럼 내가 봤다니까! 야가미. 이제 발설해도 돼지?

 

야가미는 잠깐의 침묵 끝에 말했다.

 

가미 토가: …이 시점까지 와서는 상관없을 것 같군요.

 

기와라 우시오: 좋아. 됐어. 시련 안에서도 야가미는 왜 저러나 싶을 정도로 미도리카와한테 집착하던데. 세 번째 시련에서도 그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 쿠리스: 그래서. 이제 야가미에게 면죄부를 주는 거야?

 

이바라는 꺼림칙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무로 시라베: 적어도 모노로그를 적대한다는 점에서는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거지.

 

바라 쿠리스: 난 여전히 마음에 안 들어. 야가미가 모노로그랑 척을 지게 된 건 그냥 미도리카와의 정체를 숨겼기 때문이잖아. 야가미가 살인자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아!

 

무로 시라베: 동의해. 이미 그는 사람을 죽일 용의가 있음을 보여주었고 신뢰는 끊겨 버렸지만, 이용할만한 정보가 있을 거야.

 

키와 아유키: 야가미는 외딴섬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아. 우릴 돕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라지. 그렇지만 야가미. 우린 계속 너를 주시할 거야.

 

가미 토가: 그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그럼. 다음 안건을 이야기할까요? 탑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하군요.

 

야가미의 말에 나나시는 작게 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나시: 탑에서 일어난 일은 많지 않아, 우리는 후루미나미와 카나리, 칸나즈키가 살인을 유도하는 것을 막지 못했어. 막바지에 막았다고 생각했지만 살인을 막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지. 캐롤 씨가 나이토 씨에게 휘말려서… 죽었고.

 

바라 쿠리스: 나나시. 그렇게 간단하게 말해버리는 건 좀 그렇다…

 

나시: 아직 말이 안 끝났으니까 그렇지. 하나가 더 있어. 우린 카지노의 지하에서 크레딧을 모아주는 튜브를 발견했어. 카지노의 모든 장치와 다이얼로그를 통한 크레딧 상점은 그 튜브와 연결되어 있어서. 분명 크레딧이 쌓이지 않았을 장치도 크레딧을 뱉어내지. 이상한 점은… 크레딧 튜브가 하나가 아니었다는 거야.

 

유즈미 나데시코: 여러 개? 몇 개였는데?

 

나시: 다 세지도 못 했어. 아니. 셀 수도 없었어. 튜브가 있는 방을 중심으로 상하좌우로 통하는 4개의 문이 있었는데. 거기에도 튜브가 있고, 또 통하는 문이 있었어.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고. 얼마나 많은지 몰라도 우리가 다 쌓을 만한 양이 아니야.

 

나시: 우리는 이 탑에 온 최초의 사람들이 아닐 거야. 수많은 사람들이 이 탑에서 크레딧을 소모하고… 또 죽은 거지.

 

기와라 우시오: 그건 짐작하고 있었어. 모노로그는 우리가 하고 있는 것과 유사한 살인 게임을 몇 번이고 진행했다고 했지.

 

유즈미 나데시코: 그러니까 그 장소가 바로 여기라는 거야?

 

나즈키 시노부: 높은 탑이니 계속 쓰고 싶겠지…

 

기와라 우시오: 여기서 하나 더 짚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23T. 너는 이 가상현실에 항상 투입되는 존재인 거야? 모노로그가 그랬잖아.

 

모노로그: 난 이것과 유사한 게임을 몇 개나 진행했다. 그 때마다 23T5U130은 내게 개입했지. 난입한 자를 별 수 없이 게임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룰은 도무지 바꿀 수가 없어서 항상 저것을 종양처럼 단 채로 게임이 진행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당황스러웠지. 그러나 난 저 인공지능의 패턴을 파악했고, 완벽하게 꿰뚫었다. 이젠 그저 지겨울 뿐이야. 저 흉물이 나타나고. 게임의 참가자들을 지키겠다고 호언장담하고. 허무하게 쓰러지는 모습. 저것에게는 가장 중요한 게 빠져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와 달리 저것에게는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하니까.

 

기와라 우시오: 네가 쓰러진다는 건 결국 너조차도 살인 게임에서 탈락한다는 거야? 어떻게 그래? 너 무력으로는 최강이잖아. 카이다도 너한테 못 비빌 텐데?

 

23T5U130: 무력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모노로그가 날 견제하기 위해 탑에 추가한 게 많으니까. 넌 모르겠지만, 후루미나미와 카나리는 플라잉 로봇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어. 그것에서부터 방해 전파가 나오면 나는 여지없이 잠시 작동을 멈추게 돼.

 

나시: 23T 너는 매번 살인 게임에 투입되는데. 플라잉 로봇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어?

 

23T5U130: …살인 게임 안이니 게임의 비유를 쓰자면, 내가 살인 게임에 들어오는 건 이어하기가 아니라 다시 하기야. 이전의 게임에 대한 기억은 없이 백지상태로 투입되지.

 

23T5U130: 살인 게임의 참가자들에 대한 정보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지만, 어떤 흰 물건이 새로 등장하고 모노로그가 날 어떻게 압박할지는 나도 몰라. 그 점이 모노로그와 나의 차이점이야… 내 행동양식은 이미 모노로그에게 읽혔는데 나는 모노로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그러니 그토록 여유만만한 거고.

 

키와 아유키: 모노로그의 의표를 찌를 수 있는 흰 물건은 또 후루미나미의 손에 있으니… 암울한걸.

 

사실이었지만, 상황이 최악은 아닐지도 몰랐다.

 

무로 시라베: 그래도 후루미나미가 흰 물건을 쉽게 빼앗기지는 않을 거야. 후루미나미는 흑막을 포함한 모두가 패배하길 원할 테고, 지능은 뛰어나니 잘 도망 다닐 수 있겠지.

 

기와라 우시오: 그래 놓고 뭔 일을 할지 너무 불안하지만, 그건 차치하자고. 이번 흰 물건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나중에 빼앗을 수 있을 텐데.

 

무로 시라베: 흰색 버튼이야. 탈출 장치라고 적혀 있어.

 

유즈미 나데시코: 그거 누르면 나갈 수 있을지 궁금한데. 그건 후루미나미만 아는 거겠지…?

 

나시: 후루미나미도 모를 걸. 아직 사용을 안 했을 테니까. 후루미나미는 기름을 가져와서 계단을 태우고, 플라잉 로봇에 탄 채로 날아다니고, 사람한테도 불을 붙인 다음 소화기로 끄고 기절시키는 사람이야.

 

유즈미 나데시코: 어어. 그건 너무한데

 

나시: 너무 거창하지. 번거롭고. 후루미나미에겐 연출자의 본능이 있어. 늘 자신을 찍는 카메라가 있다는 것처럼 행동해. 그러니 혼자 숨어있다가 눌러버리기보다는 반드시 히무로를 찾아올 거야. 돌아와선 도발하겠지.

 

연출자의 본능. 나는 나나시의 표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상황에 곧잘 나타났고, 설령 흔들리더라도 자신의 우위를 되찾을 수 있을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손 안에서 굴리고 달그락거리며 뻔뻔하게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당하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너무 오래 참았다. 또다시 그녀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만약 그녀가 알량한 도발을 계속한다면…

 

나는 홀스터에 채워진 총을 내려다보고선 내 생각이 식게 두었다. 생각은 충분히 식은 뒤에도 그 형태를 바꾸지는 않았다. 비정한 결의만을 느꼈다. 그래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치명적이지 않은 선에서 사격을 해야 할 것이라고.

 

키와 아유키: 지금까지의 정보를 정리해보자. 우선 흑막은 미도리카와의 부활을 막아 왔다. 야가미는 미도리카와를 미워한 적이 없었기에 시련에서 그녀를 꺼내려했으나 실패. 흑막과 적대한다는 점에 있어선 우리와 목적이 같다. 야가미, 미도리카와, 카이다는 초고교론자라는 괴조직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왜인지는 알 수 없다.

 

키와 아유키: 이 탑에 있는 사람은 우리가 처음이 아니며, 23T는 모노로그에게 예측당하고 있다. 이 탑에서 죽은 초고교급이 몇 명일 지는 모른다. 후루미나미는 흰 물건을 가지고 있지만 본인이 쓰기보다는 우리 앞에서 미끼를 살랑살랑 흔들 것이니 기다려 보자. 그리고… 히무로. 마유즈미.

 

토키와는 나를 바라보았다.

 

키와 아유키: 총은 계속 가지고 있을 생각이야?

 

무로 시라베: 나와 마유즈미 말고 줄 사람을 생각하기 어려워서.

 

바라 쿠리스: 그래도 총은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기와라 우시오: 솔직히 말해서 네가 언제 돌변할지 모르잖아. 넌 단 한 번도 수상하지 않은 적이 없어.

 

무로 시라베: 그럼 카이다를 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사라질 뿐이야.

 

기와라 우시오: 네가 총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우리 모두가 억제된다고. 이해가 안 돼? 카이다를 막겠답시고 나 총 가지고 있소 하는 무법자를 뻔히 걸어다니게 둔다? 이게 더 멍청한 일이잖아.

 

바라 쿠리스: 네가 좀 별나긴 해도 살인을 막으려고 노력해온 건 알지만… 방아쇠만 당겨서 사람 죽이는 게 총이잖아. 히무로.

 

무로 시라베: 나와 마유즈미는 서로가 우발적인 격발을 하지 않게끔 서로를 감시할 거야. 총을 경계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나는 내 의견을 꺾을 생각이 없으니. 총을 든 이가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일보단 나를 믿는 게 더 낫지 않겠어?

 

기와라 우시오: 이제 총 들었다고 협박하는 거 봐. 이런데 너를 믿으라고?

 

무로 시라베: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아무리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라도 받아들여야 해.

 

유즈미 나데시코: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히무로가 이상해지면 내가 꼭 막을게. 그러니 다들 걱정 마.

 

마유즈미는 이바라를 타이르듯이 말했으나 그 어조에 이바라는 더욱 분개한 것처럼 보였다.

 

바라 쿠리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야…! 우리 마유즈미가 총을 들고 히무로를 막는다고? 이 탑의 마지막 양심이? 어라라. 이렇게 말하고 보니 좀 어울리긴 하지만, 나 진짜 상상이 안 가!

 

무로 시라베: 마유즈미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한 사람이고, 총은 살해에 쓰이지 않을 거야. 총을 쓴 순간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게 되니까. 적어도 후루미나미를 잡기 전까지는 내가 총을 휴대할 수 있게 해 줘.

 

키와 아유키: 네가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해. 히무로.

 

토키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인 반응이었다. 온건하고 순한 그의 성정을 고려하면 안전을 이유로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허락이 떨어졌다. 그의 생각에 변화가 온 것이리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기와라 우시오: 아니 이걸 허락한다고?

 

키와 아유키: 지금 히무로와 마유즈미가 총을 휴대하는 게 그나마 우리의 생존에 나은 일이야. 카이다와 후루미나미만으로 벅차. 그들에게 맞설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해. 그렇지 않아?

 

나시: 네 말이 맞아. 토키와. 우릴 도울 생각이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지. 그보다 히무로.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무로 시라베: 뭘 묻고 싶은데?

나시: 대몰락이라는 단어에 대해 아는 것 있어?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무로 시라베: 대몰락… 글쎄.
 
무로 시라베: 짐작이 안 가. 그 단어가 왜?
 
나시: 그냥… 꿈 속에서 짧게 나와서 무슨 뜻인지 궁금하더라. 네가 모른다면 됐어.
 
나는 그의 말을 듣고 확신했다.
 
나나시는 대몰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나시: 히무로는 분명 대몰락에 대해 알고 있어. 그렇지?
 
23T는 내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못한 것이다. 모노로그의 제약을 생각하면 내가 정답을 맞툰 게 분명했다.
 
내가 대몰락에 대해 상세히 추측하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윤곽을 잡는 건 가능했다. 일단 세계는 한 번 큰 혼돈을 겪었다. 전쟁이든 무엇이든 사회가 한 번 전복될 정도로 심각한 일이 벌어졌고, 노네임과 노바디 그리고 시라유키 히메리를 포함한 수많은 이들이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다. 그 와중에 초고교론자라는 조직이 생겨나고, 초고교급을 사냥해 재능을 빼앗으며 허황된 평화를 이룩하려 했다. 노네임과 노바디 또한 그 사냥꾼들을 피해 은둔했다.
 
카텟 기관은 정황상 폭도라 불리는 사람들과 대립하는, 질서의 편으로 보인다… 그것 말고 더 윤곽에 잡히는 일은 없었다. 시라유키 히메리가 블레인을 만든 이유는 '희박지대'와 방사능 오염 구역을 왕래할 수 있는 이동수단이 필요하기 때문이었으니. 얼마나 큰 혼돈이 있었는지만 간신히 파악할 수 있었다.
 
나시: 시라유키 히메리가 죽거나 하기와라의 친구. 이바라의 친구. 모리의 빈민가 어르신들이 죽는 것또한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나라가 몇 개. 혹은 대부분이 뒤흔들릴 정도의 파장이 일었다면… 말이지.
 
나시: 히무로는 왜 우리에게서 대몰락에 대한 정보를 숨기는 걸까… 답은 생각보다 간단할지도 몰라. 그게 자신에게 더 유리하니까. 흑막과의 수 싸움에서 자신만 정보를 독식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또 우리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나는 걸 막으려 했을지도 모르지. 내가 궁금한 건 히무로가 언제부터 알고 있었고, 얼마냐 알고 있냐는 거랑… 과연 신뢰해도 좋으냐는 거지.
 
23T5U130: 또 그가 어떤 정보를 숨기고 있을지 모르니까.
 
나시: 애초에 난 누군가를 믿는 일이 어려웠어. 살인 게임 도중에 이해관계로 인한 믿음은 너무 연약하고 쉽게 깨져버려. 그러니 더 강한 유대감의 관계가 생기는 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했어.
 
23T5U130: 그래서. 누구도 믿기 어렵다는 거야?
 
23T는 자신을 믿지 못하느냐는 말을 돌려서 말하고 있었다. 또 자신과는 유대가 없냐는 질문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곰곰히 생각한 끝에 입을 열었다.
 
나시: 너는 믿을 수 있어. 나는 너를 알고. 너는 나를 아니까. 그렇지만… 걱정되는 일이 있긴 해. 모노로그가 이전에 했던 말이 있어. 내 기억을 지운 건 자신이 아니며, 내가 기억을 가지고 있었으면 자기 일이 더 쉬워졌을 거라 말하더라.
 
나시: 너는 카텟 기관에서 온 게 확실한데. 나는 내가 카텟 기관과 한 편인지 확신할 수 없어. 23T… 나는 대체 뭐지? 왜 내 모든 기억이 지워진 거고, 지운 주체가 살인 게임의 흑막이 아니면 대체 누구지?
 
23T5U130: 그것 말고도 네가 떠올린 기억에 답이 있을 거야.
 
그게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제 이름은 제인 캐롤 브라이트. 조율자의 파편이에요."
 
"파편? 그게 무슨 뜻이야?"
 
"간략하게 말하죠. 당신이 들고 있는 건 제 머리카락이에요. 그 머리카락을 매개체로 삼아 당신과 제 정신이 이어져 있어요. 그래서 서로의 생각이 들리는 거고요."
 
'뭐라고? 그럼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들린단 말인가?'
 
"어느 정도는요."
 
나는 소름이 끼치는 것에 대한 반발심리로. 오히려 당당히 독백을 보냈다.
 
"조율자의 파편이니 그런 소리는 제쳐두자고. 이 머리카락을 잡기만 하면 당신과 이어지는 건가? 그럼 굉장히 불편할 텐데. 시도때도 없이 이런 상황이 생길 테니까."
 
"네. 그래요. 무척 불편하죠. 제 쪽에서 영향력을 쓰면 어느 정도 차단하는 것도, 정신을 밀어내는 것도 가능하지만 처음 말을 거는 걸 예방할 순 없어요. 생각해 보세요. 평소와 똑같이 지내고 있는데 느닷없이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이 말을 걸고 제멋대로 떠드는 거예요."
 
나는 양심이 콕콕 찔리는 기분을 받았다.
 
"지금 이 상황 같은데. 그냥 끊을까?"
 
"아뇨. 괜찮아요. 오히려 끊지 마세요. 지금은 제가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계속 이야기해 보죠. 저는 평범한 대화가 고프거든요. 무턱대고 내게 찾아와 구원을 바란다며 소리치거나 무례할 정도로 자기 말만 늘어놓지 않는 상대는 드물었어요."
 
대화 상대가 고프다는 건 무슨 소리야? 나는 의아함을 느끼다가 머리카락 묶음을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사람의 외침을 떠올렸다.
 
"이 머리카락 묶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정상이 아니던데. 빛이 우릴 구원할 거다 어쩌고… 였어."
 
머리카락 너머의 여인. 캐롤은 섣불리 반응하지 않았다.
 
"이제 그런 사람들이 머리카락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게 위안이죠."
 
"당신 입장에선 다행이네. 머리카락은 앞으로 간수 잘 할게. 내가 잘 숨겨 놓으면 되겠지?"
 
"카텟 기관 소속이시라면, 저에 대해 연구하는 데 큰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요…"
 
느닷없이 튀어나온 카텟 기관의 이름에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카텟 기관에서 당신에 대한 것도 연구하나? 당신 유명한 사람이야? 난 모종의 사유 때문에 지하에서 살다 나와서 몰라."
 
"특이한 능력이다보니 제게 흥미를 가지신 분들이 많아요. 예를 들면 시라유키 히메리 씨 같은 분이요."
 
시라유키 히메리.
 
"초고교급 연구가 말이야?"
 
"맞아요. 제 힘을 규명시키는 데에 토대를 세운 사람이죠."
 
나는 짓궂은 생각을 했다.
 
"난 이 현상에 흥미 없으니까 계속 가지고 있을게. 카텟 기관 사람들한테 이 머리카락을 안 보여주면 되는 거지?"
 
캐롤은 잠시 침묵한 뒤 그 이유를 캐묻듯이 말했다.
 
"정말요? 숨겨 주신다고요? 저야 좋지만. 왜 그러시는지 궁금하네요. 카텟 기관 소속이실 텐데요."
 
"늘 이상한 사람이 말 거는 일에 시달린다니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 뭣보다 내 마음이지. 한 번 죽쒀 보라고 해… 아무튼. 연구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거 신기하긴 해. 무슨 마법이야?"
 
"저는 터치(touch)라고 부르죠."
 
나시: …더 떠올려야겠어.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가 그녀에게 있다면, 나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날리는 실을 모아 타래를 만들면 그만이었다.
 
 

'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 > 챕터 3'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단크 타워 챕터 3 - 5  (8) 2022.08.06
더 단크 타워 챕터 3 - 4  (6) 2022.07.10
더 단크 타워 챕터 3 - 3  (7) 2022.06.03
더 단크 타워 챕터 3 - 1  (6) 2022.04.10
더 단크 타워 챕터 3 - 0  (9) 2022.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