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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크 타워 (The Dank Tower)/챕터 3

더 단크 타워 챕터 3 - 7

by 도타싫어! 2022. 9. 11.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아 또 이 새끼야."

 

하기와라 우시오는 금색, 회색과 회갈색의 문을 보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해변에서 봤던… 문 같아."

 

"문 같은 게 아니라 문이야! 이걸 봐! 또 이 짓을 시키려고 한다니까! 지져스 크라이스트. 우린 이걸 또 당해줘야 해?!"

 

"그래. 익숙하겠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문이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번에도 또한 사람의 부활 여부를 미끼로 사람을 홀리려는 수작질에 불과했다. 또. 고인을 욕보이려는 심사가 뻔했다. 이번에도 또한 죽은 이들을 시련의 문 속에서 마주한다면, 시련 속 그들은 무슨 형상을 하고 있을 것인가?

 

현실 세계의 미도리카와 아쿠토는 카이다 쿠로하, 야가미 토가와 함께 초고교론자들에게 협력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로의 재료도 아니었다. 재단은 초고교급 재능을 가지고 있는 그들임에도 재능을 빼앗지 않고 그들을 받아들였다. 재단 전체에서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그 지부 안에서 세 사람은 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다.

 

물론 살인 게임에 떨어진 이상 현실 세계에서 그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부수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내가 걱정했던 것은 과연 캐롤 브라이트, 나이토 유즈루, 모리 레이코의 현실 시점 모습은 바람직할 것인지에 대해서였다.

 

되살려선 안 될 만큼 위험한 인물이라면 그들을 되살려선 안 되었다.

 

캐롤 브라이트는 부활해선 안 된다.

 

내 뇌리에 계속 떠오르는 이 문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럼 난 바로 들어간다? 응 난 나이토 지지할 거야. 난 기사단이야. 나이토 살릴 끄니까."

 

"하기와라 씨?"

 

다른 누군가가 제지하기도 전에, 야가미 토가가 하기와라 우시오의 뒷목을 붙잡았다.

 

"썅."

 

"아직 단독행동을 하시기엔 이른 것 같습니다."

 

"하기와라. 흑막의 말은 제대로 들은 뒤에 움직여. 이 문이 시련의 문과 얼마나 다른지는 아무도 몰라. 우리 모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해…" 토키와 아유키가 말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내가 알려 주겠다. 먼저 너희들에게 분배할 것이 있지."

 

모노로그의 종이 입술이 열리자 그 안에서 막대가 우르르 튕겨져 나와 각자 인원들의 손에 들어갔다. 막대는 소유자의 머리카락과 같은 색이었으며(인공지능은 몸체를 두르고 있는 연보라색이었다) 또 눈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얇은 실이 친친 감겨 있었다. 그 끝을 뗴어내 길이가 어느 정도 되는지 가늠해 보려고 하였지만, 실을 손으로 쥘 수가 없었다. 모양만 실타래일 뿐 실제로 재봉에 쓰이는 용도는 아니었다.

 

"너희들이 받은 것은 '실타래'다. 영안로에서 긴급하게 탈출할 수 있도록 돕는 수단이지."

 

"어떻게 쓰면 됩니까? 실타래를 써서 긴급하게 탈출한다고요?"

 

"해변의 문에서 탈출할 때. 너희들은 일부분의 예외를 제공하면 문을 통해서 나와야만 했다. 이 실타래는 그런 번거로운 일이 필요 없게끔 돕는 것이지. 영안로 속에서 밖으로 나가고 싶다면 언제든지 실타래에 너희들의 이름을 대고, '아웃'이라고 말하면 그 순간 실타래가 너희들을 영안로 밖으로 던져줄 것이다. 낚싯줄을 당겨 너희를 문 밖으로 끄집어내는 식이 되겠지."

 

영안로에 대해 더 묻고 싶었으나 후루미나미 나몬을 의식하게 되었다. 내가 모르는 것을 드러낼수록 그녀가 숨길 수 있는 것도 많아지며, 그녀의 이점도 커질 뿐이었다. 다행히도 내가 굳이 물을 필요는 없었다. 토키와 아유키가 먼저 모노로그에게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영안로 안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으면. 어떻게 되지? 안에서 죽는다면?"

 

"걱정 마라. 영안로 안에서 입은 부상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치유된다. 안에서 겪은 일은 일종의 꿈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다만 안에서 죽는다면… 깨어나기 어려운 꿈이 되어버리겠지? 그러니 위험하다 싶으면 실타래를 써서 빠져나오는 편이 좋을 것이다."

 

"안에서 우리는 뭘 마주해야 해? 해변에서의 문이 그랬던 것처럼, 캐롤 씨를 밖으로 꺼내야 하나? 하지만 캐롤 씨에게는 실타래가 없잖아."

 

"그건 그때의 일이다. 그리고 너희가 안에서 마주해야 할 것을 이야기해 주지. 이해다."

 

"이해? 이해라니?" 이바라 쿠리스가 물었다.

 

"말 그대로다. 안에 들어가면 알게 될 테지. 그럼. 내가 알려줄 것은 이게 다다. 알아서 잘 해 보시지. 이미 먼저 출발한 자들이 있으니까?"

 

나나시와 카이다 쿠로하는 캐롤을 되살리기 위해 금색의 영안로 속으로 들어갔다. 그 시점에 탑의 인원들에게 주어진 목적은 두 개였다. 먼저 카이다 쿠로하가 나나시를 납치한 이상 그들을 따라잡아 나나시를 구출한다. 동시에. 충분한 논의를 거쳐 영안로에서 부활시킬 사람을 정하기 위해 두 사람을 영안로 밖으로 내보낸다.

 

"아. 진짜 시간 아까워 미치겠다. 뭐라도 합시다! 토키와. 지시 내놔. 뭐라도 하게!"

 

"알겠어. 그럼… 먼저 카이다를 잡으러 갈 인원을 꾸리자."

 

"선발조를 먼저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실타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혹은 영안로 안에 무엇이 나타나는지 정보를 먼저 얻고 가는 편이 안정적일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카이다 쿠로하를 최대한 빨리 따라잡아야 한다. 어떠한 상황에도 대응할 수 있는 이들을 곧바로 보내야 하지 않나?"

 

"히무로의 말도 일리가 있어… 선발조도 좋지만, 어차피 카이다도 처음 영안로에 들어오는 입장이니 그렇게 능숙하지는 않을 거야. 뭐. 모노로그에게서 언질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23T. 우선 네가 가는 건 어때?" 토키와 아유키가 제안했다.

 

"그게 맞아. 일단 카이다 쿠로하를 제압할 수 있는 게 나뿐이니까."

 

"마음 같아선 따라가고 싶지만, 어려울 것 같군요. 저까지 따라가면 칸나즈키 씨의 무력을 막을 사람이 없어집니다."

 

"반대로 내가 가면 널 막을 사람이 없어지고. 셋이서 가면 좀 어수선해지지? 근데 사실 나 지금 아파서 힘쓰기 어렵긴 해." 야가미 토가와 칸나즈키 시노부는 영안로로 갈 수 없었다.

 

"애초에 야가미를 왜 영안로 안에 데려가? 제물로 바칠 수 있으면 또 몰라. 그럼 다음 타자는 누구로 해? 히무로이드 저거 맛탱이 갔는데."

 

"내가 갈게… 일단 총을 들고 있고, 카이다는 날 무서워하니까…"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뭐? 카이다가 그래?" 이바라 쿠리스가 말했다.

 

"진짜 그렇겠냐. 뭐 근데 이번에도 카이다가 마유즈미한테 쪽도 못 쓰면 인간상성 되는 거지 뭐. 이야. 카이다 이거 최단기 퇴물 되는 거 아니야?"

 

"가지고 있는 능력에 비하면 좀 허당이긴 하지…"

 

"GOAT인데 좋은 뜻이 아니라 그냥 염소 아니야? 저 사람 저거 흑염소였네요."

 

"크. 큽… 하기와라. 나 좀 그만 웃겨… 지금 좀 진지한 상황이니까…" 이바라 쿠리스는 분위기를 읽으려 애썼다.

 

"코미디언이 이럴 때 스크린 타임 안 뽑으면 언제 말을 해? 어차피 난 영안로 안에도 안 들어갈 건데."

 

"…."

 

토키와 아유키가 조심스럽게 하기와라 우시오를 바라보았다.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는 거야. 하기와라?"

 

"엥? 내 생각의 문제가 아니지. 내가 이 파티에 왜 끼어? 지금 있는 게 나. 이바라. 마유즈미. 토키와. 칸나즈키. 23T. 히무로. 야가미. 후루미나미… 인데 여기서 마유즈미랑 23T가 들어간다고 치고. 야가미랑 칸나즈키는 제외. 히무로랑 후루미나미는 싸하니까 일단 배제하면. 나. 이바라. 토키와… 어우 씨발 이거 인원이 모자라는구나!"

 

"마유즈미 씨가 들어가긴 하는 겁니까? 애초에 지금 총을 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드물긴 하군요. 저는 어느 정도 교육을 받긴 했지만…"

 

"사용법을 숙지한 채로 겨눠야 할 곳을 겨누면 누구나 목표를 맞출 수 있다."

 

"히무로. 그 얘기는 조금 당연하다… 히무로랑 야가미, 마유즈미 말고 총 쏴본 사람? 나는 쏴본 적도 없고, 총에 대해서도 잘 몰라. 학교에서도 화학 시간 말고는 자빠져 자느라… 방아쇠 당기면 총알이 나간다 정도밖에 몰라."

 

"그. 이바라. 사실 나도 총을 쏴본 건 아니야… 그냥 들이대기만 했는데 카이다가 겁을 집어먹은 거야."

 

"아?! 그랬던가. 그럼 마유즈미도 총 자체는 못 쏘는 거고… 그럼… 총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게 능사일 수도 있어. 그런데…"

 

누구한테 줄 생각이지? 나는 속으로 물었다. 고등학생이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만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모든 이들의 기교는 걸음마를 떼는 아이와 같다. 그들을 데려다 캔이나 병 같은 것을 앞에 두고 그것을 총으로 맞추라 한다면, 거의 모든 이들이 형편없는 결과를 낼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마음가짐을 가르치는 편이 나았다. 기술적인 실력이 부족할지라도 바른 자세. 바른 호흡과 의지를 가진다면 그 사격은 누구에게나 위협적이었다. 그럼에도 총잡이의 싹을 틔우고 있는 것은 그 자리에서 마유즈미 나데시코 한 사람뿐이었다.

 

"내가 가면 돼. 이야기 끝. 반박 안 받을 거야. 그리고 한 명 더 필요해."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날 손가락으로 가리킨 뒤 이리 오라는 듯 손가락을 자신의 쪽으로 까딱였다.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내게는 그럴 권리 또한 없었다. 나는 그녀와 팔 하나 정도의 거리를 잰 뒤 멈추었다.

 

"더 와. 일루 와."

 

나는 잠자코 반 발자국을 더 다가갔다. 그러자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한 발자국을 더 내게 다가왔다. 곧 그녀와 나는 지근거리에 놓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까치발을 든 듯 거리가 아주 조금 더 가까워졌다.

 

"왜 불렀나."

 

"히무로. 너 나랑 같이 가."

 

눈가를 붉게 물들인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말을 끝낸 입술은 꾹 닫혔고, 조금 떨리기까지 했다. 여전히 내게 울분이 풀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내 양팔을 붙잡았는데, 으스러뜨리고 싶었지만 힘이 여의치 않은 듯. 대신 내 팔을 꼬집었다.

 

"왜지?"

 

그녀가 함께 가는 것을 꺼리는 어투라 나는 곧바로 덧붙였다.

 

"단지 이유를 물은 것이다."

 

"우리 얘기 좀 하자. 그러니까 같이 가. 안 그러면 총 안 줘."

 

"…진짜 굳이 히무로이드를 데려가자고? 얘기는 나중에 해도 되잖아."

 

"그리고 너도 와야 돼. 하기와라."

 

"나? 나는 왜?!"

 

"어? 왜라니. 너도 나랑 히무로랑 친구잖아. 얘기는 같이 해야지."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 있잖아 지금… 엄청 피곤해. 너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어서 말린 풀의 섬유질이 얽히는 것처럼 뒤죽박죽이야. 그치만 우린 어떻게든 이야기의 끝을 봐야 해.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친구들끼리. "

 

그러자 하기와라 우시오는 고개를 저었다. 그 특유의 당황한 웃음이 입가에 떠올랐다.

 

"아니 누나. 재미없어요. 내가 미쳤다고 히무로랑 친구를 해. 히무로도 나랑 친구 되기 싫었을 걸."

 

"그치만… 네가 먼저 찾아와서 친구 되자고 했었잖아. 우리 다 같이 친구가 됐던 거야. 그렇잖아? 히무로. 너도 하기와라와 친구가 됐잖아. 그렇지?"

 

나는 하기와라 우시오를 흘끗 바라보았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내게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어떻게든 해 봐. 라 말하는 듯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은 사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를 보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러자 그런 내 턱을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이 붙잡고 자신의 쪽으로 끌어왔다. 마유즈미 나데시코였다.

 

"그렇지?"

 

턱을 꼬집혔다. 하기와라 우시오마저 영안로에 들어오는 것은 사실 나쁜 일이 아니었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사실 총명했으며, 또 어느 정도 총잡이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쓴소리를 하는 사람과 친해져야 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하기와라 우시오는 누구보다도 내게 쓴소리를 잘해주었다. 어떨 때는 근거 없는 음해이기도 했으나, 내 한계와 감정의 결여에서만큼은 틀린 말이 없었다. 같이 움직인다면, 분명 득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친구이기 때문에 같이 가야 하는 것이라면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거짓이기 때문이었다. 거짓 위에 카가 성립될 순 없었다. 카는 배신을 통해 부서진다. 그러니 배신 위에 자랄 순 없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정말 하기와라 우시오와 나 사이의 우정을 두텁게 만들 생각 같았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에게 배신당했기 때문에 하기와라 우시오와 더불어서 나와의 우정을 새로 쌓아 올릴 생각인 것일까?

 

"…아닌 거야?"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문득 쓸쓸한 목소리를 냈다. 내 턱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 힘이 빠져. 밑으로 툭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도 거짓말이었어? 둘 다…?"

 

못할 짓을 해왔다. 당시 마유즈미 나데시코 또한 느닷없는 하기와라 우시오의 등장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납득했고, 납득한 이상 그 우정은 진짜여야만 했다.

 

나는 하기와라를 카텟의 일부로 만들 계획을 하나 떠올렸다. 무척 간단했다. 내가 그에게 진실된 우정을 느끼면 될 일이었다.

 

하기와라의 의사는?… 글쎄. 하지만 그가 먼저 친구가 되자며 나를 찾아왔지 않던가. 그는 자신의 언행을 책임질 뿐이었다. 나 또한 책임을 지는 것이고.

 

"아니. 거짓말은 아니야! 마유즈미 눈나. 하지만 알잖아? 나랑 히무로이드는 앙숙이야. 친구가 돼 보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려울 것 같아.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내 생각을 말해주겠다. 토키와 아유키가 하기와라 우시오에게 영안로의 참여의사를 물은 것은, 하기와라 우시오가 시련에 참가해 보았기에 보다 능숙하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아닌가?"

 

"맞아. 그래서 너와 마유즈미, 하기와라가 영안로에 참여하는 것이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어. 다시 생각해 보면 너와 하기와라가 참여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충분히 가능하다. 나와 그 말고 적임자가 있던가? 후루미나미 나몬이 적임자인가?"

 

"나 데리고 가! 다 해결해 줄게!" 후루미나미 나몬은 손을 흔들었다. 전혀 미덥지 않았다. 둘 중 한 사람에게 뒤를 맡겨야 한다면 나는 백 번중에 단 한 번이라도 후루미나미 나몬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나와 하기와라 우시오는 아직 친구가 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서로 미숙한 것도 무리는 아니지.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려니 아무리 나라도 단어를 선택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나 하기와라 우시오를 일행에 포함시켜 나쁠 일은 하등 없었기에 나는 주장을 이어나가야만 했다. 다행히. 하기와라 우시오가 내 말을 잘랐다.

 

"또 무슨 소리야! 나 안 가! 미쳤다고 가냐!"

 

"네가 택한 길이다."

 

"이바라랑 재회한 지 사흘도 채 안 됐어! 아니. 그 개 같은 해변에서 겨우 살아 돌아와 침대에 눕게 됐는데 뭐? 또 구르라고?"

 

"너 말고 적임자가 없다. 이바라 쿠리스 또는 토키와 아유키 뿐이다. 둘 중 누가 가야 할 것 같나?"

 

"…이바라를 이런 데에 어떻게 보내. 토키와는 샌님이고." 하기와라 우시오는 토키와 아유키가 자신과 같은 곳에 있다는 사실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럼 너뿐이다. 친구가 되자고 하지 않았나? 나는 지금까지 너희들을 속여왔다. 하기와라 우시오. 우정 관계에 큰 금이 갔을 게 분명하다."

 

"몇 시간도 채 안 된 일이야. 이 새끼야."

 

"그럼에도 우정은 우정이다. 우리는 이 사안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대로 내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하기와라 우시오는 눈을 통해 말하는 듯했다. '어떻게 좀 해 보라고! 너도 나랑 가기 싫잖아!'

 

나 또한 눈을 통해 말해 주었다. '내겐 거부권이 없다. 마유즈미 나데시코에겐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러니 따라와라. 너는 나와 함께 위기에 맞서 줘야겠다.

 

"그… 굳이 하기와라가 가야 해? 내가 갈 수도 있는데." 이바라 쿠리스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넌 가만히 있어." 하기와라 우시오가 무심코 말한 뒤 눈을 크게 떴다.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하려 했던 것 같으나, 굉장히 무례하게 들렸다. 이바라 쿠리스 또한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눈앞에서 붕괴하기 시작한 또 다른 우정에 안절부절못하지 못했다.

 

"너 왜 자꾸 날 무시해? 듣자 듣자 하니 좀 기분 나쁘네. 야. 난 손에 물 안 묻히고 자란 아가씨가 아니거든? 이 손으로 염을 해왔다고. 나 진짜 억센 편이야. 모리가 했던 거면 나도 해!"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보다 모리는 제대로 못 했잖아. 내 말뜻 알아? 발목 잘리고 손가락 세 개 잘리고 감염되서는… 골골대면서… 그 기세도 다 죽은 채로. 환청을 들으며… 죽어갔지."

 

하기와라 우시오의 어투가 점차 침울해져 갔다.

 

"나는 그 꼴을 눈앞에서 봤어. 모리? 미친 사람이지. 손을 잡았지만 걔를 좋아해 본 적은 없어. 싸이코니까. 그리고 나는 싸이코가 싫어. 고장이 나버려서 남들이랑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들이 싫어. 그런 나에게도 모리가 무너지는 건 유쾌한 볼거리가 아니었어. 정말 비참했다고… 모노로그가 해변에 준비했던 건 가재 괴물이었지만, 영안로 안에 또 무슨 괴물 딱지를 붙여놨을지는 알 수 없어. 아무도 몰라…"

 

하기와라 우시오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 이바라 쿠리스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기분 나빠. 오글거려. 우웩." 이바라 쿠리스는 어두운 분위기를 살리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하기와라 우시오는 웃지 않았다.

 

"나도 양심이 있지. 나 대신에 토키와가 영안로 가라는 말은 못 하겠어. 나 같은 빡통이 토키와의 빈자리를 채울 순 없으니까. 하."

 

"하기와라. 너 빡통 아니야."

 

"고맙네요. 하지만 우린 빡통이야. 그게 진실이야."

 

"나도 빡통 아니라고! 적어도 화학에선 아니야. 너도 자기 폄하하는 것좀 그만해!" 이바라 쿠리스가 외쳤다.

 

하기와라 우시오가 슬며시 웃었다. 그 웃음은 고마움의 표현이었으나, 은근한 부정이기도 했다. 그의 내부에서 그 자신은 총명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것이 대전제였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 고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지 뭐. 고쳐서 올게."

 

"뭐? 고쳐서 와? 어디에서?"

 

"갑자기 존나 가고 싶어 졌다. 영안로로 들어가는 사람은 나야. 다 나와. 씨발."

 

 

 

 

 

 

 

"두 분. 동행이십니까?"

 

여자의 목소리를 구현하려 애쓴 듯한 기이한 음성이 웅웅 울렸다.

 

영안로의 안은 조명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좁은 복도와 같았다. 모노로그는 이 탑에서 바닥을 뚫으며 이동할 수 있었고 나 또한 결투나 보급 특권을 통해 논리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위치의 변경을 느껴 보았지만, 새삼스럽게 탑은 점점 이치를 벗어나는 것으로 보였다.

 

애초에 방 하나가 들어가야 이치에 맞을 구조였는데, 방은커녕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 곧게 뻗어 있었다. 사실. 죽은 사람을 되살리기 위해 영안로에 들어온 시점부터 이치라던지 논리라던지 하는 게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뭐? 너 뭐야. 모노로그가 말했던 그 도우미냐?"

 

"네. 저는 영안로 안을 여러분들이 헤쳐 나갈 수 있게끔 도와줄, 패트리샤입니다. 참고로 전 파란색이에요."

 

"얼굴을 보여."

 

"전 얼굴이 없어요…" 패트리샤는 작게 말했다.

 

"대체 언제까지 이 깜깜한 복도나 걸어가야 해? 그 정도는 대답해줄 수 있겠지."

 

"그러려면 먼저 동행인지를 말씀해주셔야 해요."

 

"안타깝지만, 동행이 아니라 납치인데요." 나는 내 꼴이 우스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동행? 그런 게 왜 중요하지? 넌 가만히 있어. 몸 꼼지락거리지 말고."

 

"동행의 여부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영안로를 어떻게 뚫고 나갈지가 바로 동행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두 분. 동행이십니까?"

 

"동행이라… 동행한다는 건. 이 약해빠진 놈 옆에 붙어있는 거지?"

 

카이다는 나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내 반응을 살핀 듯한 눈치였는데… 동행의 뜻을 모르는 건가 싶었다.

 

대체 어떤 환경에서 살았길래 사람이 이렇게 된 건지 궁금해졌다. 카이다는 단순히 무식하다던가 모자라다던가, 생각이 짧다던가 하는 단어로 표현하기가 애매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분명 어딘가가 크게 잘못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느꼈다.

 

마치 누군가가 카이다라는 사람에게서 중요한 것을 절제해 가져가 버린 것 같았다. 히무로가 재단이라는 곳에서부터 당한 일 비슷한 게 카이다에게도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도 들었다.

 

만약에. 만약에지만 그런 일도 불가능은 아니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만약에가 아니라 카이다 또한 무언가를 빼앗긴 사람일 가능성이 클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사실 카이다에 대한 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흑막의 내통자고, 캐롤의 죽음에 이 가증스러운 머저리 또한 조금 일조했던 것이다. 카이다는 카나리에게 명령을 내려 항생제를 훔치게 만들었다. 따라서 나이토와 모리는 회복되지 못했다. 결국 모리는 스스로 죽으려다가 나이토를 살해했고, 캐롤 씨는 금색 유리로 변해버렸다.

 

사실 미워하고자 한다면 한도 끝도 없이 미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이 짧은 그녀라도 모노로그가 붙여준 호위라면,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영안로 속에서 인간 방패로 쓸 만한 가치는 있을 것 같았다.

 

나머지는 캐롤 씨를 되살린 뒤로 미뤄두었다.

 

"우리는 동행이다. 맞아."

 

"카이다 씨 입장에서는 그렇죠. 그치만 다른 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카이다 말이 맞아. 우린 동행하고 있어." 나는 결국 동행하는 쪽을 선택했다.

 

"네. 동행 중이시군요. 그럼 본격적으로 영안로 안에 보내드리겠습니다. 두 분이서 서로 도와가며, 열심히 이해의 과정을 밟으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럼. 힘내세요!"

 

뭔 소리냐고 묻기 전에. 나나시가 사라졌다. 패트리샤라고 자기를 소개한 여자의 목소리도 꺼졌다. 나는 일순간만에 전혀 다른. 새로운 장소에 서 있게 되었다.

 

어두운 곳이었으나 그 안을 몇 개의 조명이 밝혔다. 조명은 형형색색이기도 했다. 여러 가지 색이 섞여서 이상하게 어지러운 혼돈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유흥에 곧잘 쓰이는 조명이었다. 그 빛 안에 내가 서 있었다. 짜증이 솟구쳤다. 빛도 기분이 나빴지만 곧 빛 속에 서 있는 놈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비행기 하나가 들어갈 법한 실내의 공간 안에. 웬 고급 옷을 입은 재수 없는 놈들이 들어차 있었다. 턱을 뭉개 놓고 싶은 것들 뿐이었다. 턱시도. 드레스.  누군 흰 턱시도를 입었고 누구는 초록 드레스를 입은 정도의 차이뿐. 한 명도 빠짐없이 그 차림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잔잔한 음악 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그 대상은 나였다.

 

나는 조금 높은 곳에서 그것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치인이 연설을 할 때 쓸법한 단 위에 내가 서 있었고, 내 옆에는 허리 좀 놀리고 다녔을 법하게 생긴, 멀끔하고 키 큰 놈이 있었다.

 

하이고야. 이딴 게 시련? 나는 코웃음을 쳤다. 죽일 것도 없고, 날 죽이려 드는 것도 없는데 왜 호위가 필요했던 거지? 모노로그 그 자식도 걱정이 너무 많았다. 좋아. 또 이상한 곳에 떨어졌다 이거지? 이름 없는 남자를 찾으면 되는 거잖아.

 

"얼 유 널버스?"

 

당장 움직이려는데 내 곁의 멀끔한 놈이 나를 보며 물었다. 긴장은 무슨 긴장? 이 놈은 또 뭐야 싶어서 빤히 보고 있으니 그놈이 싱긋 웃었다. 왜 눈치를 못 챈 거지. 그 공간 안에 있는 놈이 다 서양인이었다.

 

널버스가 무슨 뜻이더라. 러시아어는 조금 할 줄 알았지만 나는 영어에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별 상관없었다. 내가 미국이나 영국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그놈은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잇츠 오드. 이즈닛? 나우 데이 라잌 유 소 머치 저스트 바이 커밍 업 히어."

 

이 새끼 뭐라는 거야. 왜 날 꼬라보는 거지? 멋진 얼굴에 흉이라도 낼까 싶어서 주머니를 뒤적여 보니 아무것도 만져지지가 않았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내가 원래 입고 있던 옷이 아니라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무기는 전부 사라졌군… 까지 생각이 미치고 있는데. 내가 입은 옷을 자각하고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게 뭐야."

 

나는 내 몸에 입힌 하늘하늘한 것을 내려다보았다. 순백의 치마. 내가 지금까지 입었던 어떤 옷보다도 깨끗했다. 단지 치마가 아니라. 드레스가 내 몸을 덮고 있었다. 심지어 어깨는 드러나 있었고, 내 하체까지의 굴곡을 드러나게 만드는 그 천을 지탱하는 것은 어깨끈 두 개뿐이었다.

 

"롱 리브 더 퀸!"

 

한 계집이 나에게 소리쳤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난 왜 이딴 옷을 입고 여기에 있는 거야?

 

"이게 뭐냐고…"

 

나는 수많은 위장을 해 보았다. 어떨 때는 유능한 부하직원이었고, 경호원이었고, 어깨였다. 그러나 순진해 빠진 아가씨 역할 따위를 해봤을 리가 없었다. 흉터를 가리는 변장을 하면서까지 그런 역할을 맡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이딴 공주님 차림을 하라고? 집어치우라고 해. 나는 못 해. 나는 공주가 될 수 없어. 그렇게 되어선 안 돼.

 

나는 언제나 강자여야만 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들을 꺾어서 죽어가는 꼴을 봐야만 했다. 나는 누군가가 싸늘히 식는 것을 보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는다던가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던가, 행복해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이것은 무척 간단한 일이었다. 나는 칼이 된 인간이다. 때문에 이 이름을 받았다. 쿠로하(黑刃). 나는 칼날이다. 그리고 칼은 드레스를 입지 않는다.

 

칼은 제멋대로 날을 무디게 만들지 않으며, 주저하지도 않는다. 칼은 행복하지 않는다. 따라서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고뇌는 접어두어도 좋다. 존재론적인 의문이나 무력감 따위는 묻어 버리면 그만이다.

 

내 혀는 둔해 맛을 잘 느끼지 못하고, 어느 때에도 잠을 깊게 잘 수 없고, 소위 감정이라고 불리는 약해빠진 환상과도 친하지 않다. 그러나 비관은 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것에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 가지지 말아야 한다.

 

탑에 떨어졌을 때. 나는 잠시 그것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새 출발 따위는 해선 안 되었다. 이제야 그런 식으로 모든 게 선명해졌다. 새 출발? 왜 새 출발을 해야만 하는가? 나는 지금 내 처지로 만족한다. 사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더 강해지고 날렵해진다면 모를까 내 처지가 나아질 필요는 하등 없었다.

 

내가 무언가가 나아지기를 원한다면 그건 내 지금 처지가 비참하다는 뜻이니까.

 

너는 살해해야 한다. 명령에 따라야 한다. 찢어야 하는 것을 찢어야 한다. 그것이 너의 역할이다.

 

너는 행복해서는 안 된다.

 

…어디선가 그렇게 배웠다.

 

"씨발. 여기 어디야. 왜 내가 여기에 있어! 너희 이 새끼들아. 말을 해!"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놈들이 일본어를 알아먹을 턱이 없었다. 결국 나는 발을 한 번 굴러 단상에서 뛰어내리고 적당한 놈의 멱살을 잡아 세게 끌어당겼다. 당장 무기는 없지만 귀가 찢어질 만큼 당겨 놓으면 뭐라도 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기대가 무색하게, 끌어당겨진 놈은 영어로 말할 뿐이었다.

 

"헤이! 헤이! 아우! 왓츠 롱 윗 유? 얼 유 아웃 오브 유어 마인드?"

 

일본어로 말하라는 말이 영어로 뭐였더라. 나는 어디에선가 주워 들었던 영어를 간신히 기억해낼 수 있었다.

 

"스피크 재패니즈."

 

그러나 이 멍청이들은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망할. 잘 배웠으면 2개 국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문득 얼굴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목에서부터 피가 빠르게 올라와 얼굴의 혈류를 온통 새빨갛게 만드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뜨거운 느낌을 받으며 온몸의 체온이 올라갔다.

 

내 생각에 그것은 거부 반응이었다. 나는 드레스와 반발하고 있었다. 나는 긍지 없고 저열할지언정 분수를 알았다. 나의 영역에 무엇이 있고 내가 무슨 영역에 들어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느꼈다. '이건 내가 아니다. 이건 나에 속해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이곳에 없다'.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솜털 하나까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부끄러움보다 차라리 공포에 가까웠다. 나를 둘러싼 잘 먹고 잘 사는 개자식들이. 내게 시선을 보냈다. 나는 어디에도 숨을 수가 없었다. 엄폐물도 변장의 여지도 쥐구멍조차도 없었다. 눈이 나를 둘러쌌다.

 

"나… 날 보지 마…"

 

이 새끼들 다 집어치우라고 해.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치 관음증자들 앞에 세워진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쓰레기들을 많이도 봐 왔다. 봉춤 추는 탕녀들.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돼지들. 나는 그 광경 자체에 혐오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건 전혀 원하지 않았다. 사랑, 선망, 경외라는 건 성욕에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했고, 나는 그런 욕구가 나를 향하는 것은 절대 원하지 않았다. 더러운 씹새끼들.

 

죽이고 싶다. 여기 있는 놈들 눈을 다 뽑아버릴 것이다. 내가 이런 차림을 하고 있는 걸 본 놈들은 전부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제기랄. 시련인데. 이게 다 환상이란 걸 알고 있는데 왜 이토록 끔찍한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의 수치심이 망토가 되어 날 감싸는 듯했다. 난 지배되고 있었다.

 

몰라. 나나시는 내다 버려. 알아서 어련히 잘하시겠지. 일단 여기서 벗어나면 그만이야. 아니다. 그래. 나나시 그 약골을 찾으러 가는 거다. 사라졌잖아. 일단 그놈이랑 같이 다녀야 하니 어쩔 수 없어. 그러니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야만 해. 여기에 있다간 정신이 이상해져 버린다.

 

나는 드레스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모든 것들에게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내가 한 번도 속해본 적이 없는 장소는 한 없이 적대적이고 덧없을 뿐이었다. 나는 단순히 난생처음 살갗이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물것들 앞에 던져진 게 아니었다.

 

내가 살아있는 이유: 강하기 때문에. 그리고 머저리들이 일생을 낭비하는 덧없는 가치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인 것을 부정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옷을 입고 있는 행위는 내게 수치와도 같았다. 우정. 신뢰. 행복. 사랑. 다 필요 없었다. 파티나 무도회나 드레스는 나에게 하등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날 보지 말란 말이야아아아아아!"

 

그러니 이제 그만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년놈들이 모여있는 곳을 박차고 달려갔다. 곧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보였다.

 

그것을 열고 들어갔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어두운 복도와 똑같은 곳에 있었다. 그래. 당연하지. 망할 탑이니까. 이미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홀로 남겨진 나에게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찾아왔다.

 

"어어. 어디 가요? 지금 도망가시는 건가요?"

 

자신을 패트리샤라 소개한 기계년이 물었다. 나는 곧장 소리쳤다.

 

"도망가는 게 아니야. 이 새끼야! 그냥 가는 거지!"

 

"그치만 당신은 저 파티장에 있어야 해요. 모노로그가 말해 줬잖아요. 이해해야 한다고요. 저도 말했고요. 영안로는 이해의 공간이랍니다?"

 

"좆까. 시련의 문이랑 똑같구만. 난 시련을 돌파한 거야. 생채기 하나도 안 났지. 그럼 이제 두 번째 시련으로 넘어가게 해 주지 그래?"

 

"시련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이번에는… 깨달음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편할 거예요. 왜냐하면 시련이라는 단어를 쓰다 보면 당신 또한 이 모든 여정을 시련이라 생각하게 되거든요. 하지만 이건 결코 시련이 아니에요."

 

"뭐가 다른데?"

 

왜인지 좋은 예감은 들지 않았다. 나는 칠흑 속에 서서 내가 서있던 파티장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문이 있어야 할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주위를 계속 둘러보며 앞으로 나아간 끝에. 나는 회색 인간을 보았다. 기계년은 웃었다.

 

"시련은, 깨달음을 거부했을 때 찾아온답니다."

 

"넌 또 뭐야?"

 

회색 인간은 이목구비가 없었고 어떤 옷도 입고 있지 않았다.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놈을 죽이면 되는 건가?

 

…라고 생각할 즈음. 회색 인간이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내 몸이 굳었다.

 

"카이다 쿠로하. 지금까지 고생이 많았다. 넌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 그러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이… 이러지 마. 나 지금까지 잘했잖아요… 내가 당신들을 위해 지금까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알면서! 나한테 이럴 순 없어. 이래선 안 돼!"

 

"왜 나한테서 전부 앗아가는 거야. 왜 나에게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는 건데! 왜 나에게만!"

 

"우물에 빠지지 말 것."

 

 

 

 

 

 

 

"…악취미야."

 

나는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보고 있지만. 웬 60명 남짓한 사람들이 단상 위에 선 나를 바라보면서 감탄하고 있지만. 적어도 그중 내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진짜 싫다. 진짜 너무 싫다. 모노로그는 왜 날 이런 곳에 내던져둔 걸까? 그것도 순백의 드레스를 입힌 채로.

 

무슨 이유 같은 것이라도 있을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떤 장소인지 정도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나는 체육관에 있었다. 정확히는 체육관을 무도회장으로 개조한 듯이. 체육관 안에 있는 이들은 전부 턱시도나 드레스 같은 의상을 갖춰 입고 있었다.

 

무슨 파티 같은 건가? 천장에는 풍선이 둥둥 떠다녔고 느린 템포의 음악이 잔잔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학생들이 할법한 댄스파티 같았지만, 일본에서 이런 파티가 있던가?

 

그럼 없었다. 무도회장 안에 있는 이들은 거의 전부가 서양인이었다. 참 기이한 일이 다 있구나 싶으며 나는 내가 입고 있는 옷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깨가 다 드러나는 드레스라니. 물론 내 평소 복장 또한 어깨를 드러내고 있긴 했지만 그것은 엄연히 남성복이었다. 누구도 내 옷을 보고 여성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터였다. 영국 전통 의상에서는 남자가 치마를 입는다곤 하지만, 난 영국인이 아니었고 영국인의 치마 또한 뮤지컬에 나오는 공주가 입을 법한, 내가 입고 있던 드레스와는 비견될 바가 못 되었다.

 

프릴이 목덜미를 수놓은, 분명 단정하지만 결코 수수하지 않은 드레스… 예쁘긴 했지만, 그래도 내게 여자 옷을 입는 취미는 없었다.

 

"이봐 너. 괜찮아?"

 

내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영어로 물었다. 하이틴 드라마에 나올 법하게 말쑥하고 잘생긴 서양인이었다. 지식은 내 기억과 별개였기 때문에 나는 영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왜 내가 드레스를 입은 채 무도회장에 던져졌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어떻게든 평정심을 찾으려 애썼다.

 

"갑자기 뜬금없지만, 여기 지금 어디야?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영어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나 긴가민가했지만, 적어도 내 옆에 선 남학생은 내가 한 말을 알아들은 눈치였다.

 

"하하. 퀸이 된 실감이 아직 안 나서 그런가 보네. 사실 나도 오늘 느닷없이 널 퀸으로 만들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무슨 일인가 싶었어. 너도 투표 다 끝나갈 쯤에야 알았다며? 본인이 모르는 선거유세라니 웃긴 일이지. 그래도 너무 긴장하지 마. 오늘 너는 충분히 퀸 같거든.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걸."

 

퀸? 맙소사. 나 지금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여자로 보이기라도 하는 건가? 그리고 투표? 선거 유세? 그건 또 뭐고?

 

나는 대화의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일단 고개는 끄덕여 두었다.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일단 나는 투표로 인해 퀸으로 선발되었고… 그래서 단상 위에 오른 것이다. 적어도 남학생의 말만 듣고는 그렇게 해석했다. 내가 퀸이면 내 옆에 있는 남학생은 킹인가? 서양의 학교 생활을 알 수가 없으니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남학생은 말했다. 나는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며 이상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지 살폈다. 탈출의 수단이 없기 때문이었다. 위험해지면 영안로에서 빠져나가라고 실타래가 주어졌으나, 내 실타래는 카이다의 수중 안에 있었다. 기껏 납치했는데 도망가면 안 된다며 그녀가 빼앗았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어떤 일이 벌어지든 간에, 나 스스로 맞서야만 했다.

 

사실 실타래가 내 예상대로 작동할까 또한 문제였지만, 그건 제쳐두었다. 실타래가 나를 정말 밖으로 탈출시켜줄 수 있는 것을 대전제로 놓았다.

 

"여왕님 만세!" 한 여학생이 나에게 소리쳤다. 나는 당황하면서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지금 나는 다른 사람들한테 여자로 보이는 모양이었으니…

 

머쓱함과 부끄러움을 억누르고 있는 동안. 문득 천장에서 무언가가 덜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좋지 못한 예감이 들어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양동이가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파티장 천장에 있는 양동이는 부자연스러웠다. 자세히 보니 단상 위의 조명 장치들과 라이트 설비 중에 양동이를 걸 만한 쇠막대 또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양동이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그리고 왜 하필 내 머리 위에 양동이가 있는지는 의아했다.

 

양동이가 기울었다. 양동이엔 무언가가 가득 차 있었다. 나를 향해 양동이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이 흘러내려왔다. 쏟아져 내려왔다. 액체였는데, 나는 그것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도 못했다. 몸이 제때 반응하지 않았다. 내가 양동이 안에 가득 차 있던 것을 경계한 것은 이미 그것을 온몸에 뒤집어쓴 뒤의 일이었다. 나는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냄새나고, 찝찝하고, 어딘가 역했다. 그러나 후각과 촉각보다도 먼저 반응하는 기관이 있었다. 바로 시각이었다. 본래 내 눈을 지배하고 있던 색은 순백과 여러 가지 색의 조명이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뒤집어쓴 것인지 내 몸을 내려다보았을 때. 내 눈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에 지배되었다.

 

"피…?"

 

순백의 드레스는 퀴퀴한 선혈에 흠뻑 젖어버렸다. 나는 왜인지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건 사람의 피가 아니다. 동물의 피다'. 좋은 건가? 나쁜 건가? '아무튼 동물의 피다. 자고 있는 동물을 도축해 피를 양동이에 받았다. 누군가가 나를 퀸으로 만들었다'.

 

생각이 밀려들어왔다. 모든 게 이상했다.

 

"이게 뭐야!" 남학생이 소리쳤다. 핏줄기가 얼마나 거셌는지 남학생의 얼굴과 옷에도 피가 튀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튄 핏방울보다 내가 뒤집어쓴 핏줄기에 더 경악하고 있었다. 나 또한 경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왜 느닷없이 피를 뒤집어쓰게 된 거지? 모든 게 잘 되고 있었을 텐데. 드레스까지 입었어. 어깨를 드러내 본적은 오늘이 처음이야. 그런데 왜 누군가가 내게 이런 짓을 한 거야?

 

이상해. 잠깐. 이건 내 생각이 아닌데. 뭔가가 이상해. 생각이 밀려들어오는… 기분이야…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만 했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단상 밑의 이들 중 몇몇이 나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사고를 당했는데 어떻게 나를 보고 웃는단 말인가?

 

"꼴 좀 봐. 저 표정 좀 보라고!"

 

나는 이해했다. 처음부터 사고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 중 누군가가 꾸민 일이었다.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기 위해. 퀸의 자리에 올렸다가 다른 이들의 앞에서 망신을 주기 위해 저지른 일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것만큼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만 했는가?

 

난 지금껏 좋은 사람이 되어 왔다. 순응하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 왔다. 그런데 왜 내게 피를 뒤집어쓰게 만들었는가? 알 수 없었다. 입 안에서 외침이 달싹였다. 대체 왜야. 누구라도 좋으니 나에게 말해 봐. 말해 보라고.

 

"말해 보라고!"

 

그리고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분노가 나를 지배해 버렸다.

 

 

 

 

 

"첫 번째 깨달음. 성공입니다! 축하드려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떠올릴 수 없었다.

 

분명 화가 났고. 화를 냈다. 그 뒤로는 기억이 없었다. 그저 무도회장에 떨어지기 전. 영안로의 어두운 복도만이 있었다. 나는 그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깨달음? 성공? 이게…? 이해가 안 돼."

 

"나중에는 되실 걸요!"

 

왜인지 머리가 아팠다. 피로감이 사무쳤다. 내가 입고 있던 피 묻은 드레스는 사라지고 원래 내가 입던 남성복이 돌아왔지만, 여전히 그 축축하고 기분 나쁜 피가 내 온몸에 묻어 있는 느낌이었다.

 

아니. 단지 피가 아니야… 더 기분 나빴던 것은 시선이었다. 그리고 악의였다. 누군가가 나를 거기까지 밀어붙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 정교한 계획을 세웠지.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던 건 누구야? 나를 동물원 원숭이처럼 바라보았어. 그런 비참한 내 꼴이 다들 웃겼겠지? 그야 당연해…

 

나는 고개를 저어 머릿속에 밀려오는 생각들을 떨쳐버리려 했다. 밀려온다고 할까. 솟아오른다고 할까. 마치 시를 읽으며 익숙한 노래를 들을 때. 의식하지 않고 말이 나오는 무아의 지경에 나도 모르게 노래 가사를 읊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아니면 다른 사람의 몸에 씐 기분이기도 했다.

 

"…정말. 뭐였던 거야?"

 

"나중엔 알겠죠! 그보다 급한 일이 있어요. 동행자 분을 구하러 가셔야죠!"

 

"구하러 가? 카이다 쿠로하를? 걔 지금 어디에 있는데."

 

"여기로 들어가세요!" 패트리샤의 목소리와 함께 허공에 문이 열렸다. 검보라색이었다.

 

이거 영안로잖아. 아니면 해변에 있던 시련의 문이잖아. 설마 그 사이에 죽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단 추측할 수 있었던 것은, 카이다다 영안로의 달성 조건을 채우지 못했으리라는 것이었다. 하기야 제대로 하는 일이 드물었으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다만 무슨 사고를 치지는 않았는지가 걱정되었다.

 

아마 처음에 동행하겠다고 말한 덕분에 그녀를 돕게 된 모양이었다. 번거로웠다. 나는 이딴 게 보디가드냐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마자 카이다를 볼 수 있었다.

 

카이다는 우뚝 서 있었고,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카이다. 여기서 뭐 해? 아니… 내가 너무 늦게 온 건가? 무도회장 비슷한 곳을 지나서 여기로 와야 했던 거야? 패트리샤가 널 구하래서 왔는데 아무것도 없잖아."

 

카이다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서 있었다. 의아해져서 카이다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사실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얼굴과 인상착의 전부가 회색으로 뭉뚱그려진 실루엣 같은 것이 괴상한 의자 앞에 서 있었다.

 

의자라기보다는 일종의 구속구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보통 팔걸이로 쓸법한 두꺼운 판 위에 철의 띠가 붙어 있었다. 앉은 사람의 팔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함일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등받이에는 살벌히 전류가 튀는 패널이 있었으며, 또 겨드랑이에서부터 어깨까지를 묶을 수 있는 금속의 띠도 있었다. 가장 기이했던 것은 등받이의 뒤편과 연결되어 있는 헬멧이었는데. 이 헬멧에는 편집증적으로 보일 만큼 수많은 발광 다이오드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것이 붉고 푸르고 노랗고 흰 빛을 내며 어둠 속에서 자신을 과시하고 있었다. 눈이 아플 정도였다.

 

"이건 또 뭐야…? 카이다. 가만히 서 있지 말고 말을 해. 너 얼마나 일찍 나온 거야? 다음 길은 어디에 있어?"

 

"야. 약골. 지금 날 안 도와주면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

 

카이다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뭐? 뭘 도와달라고?"

 

나는 카이다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묻고 싶은 건 또 있었지만 나는 차마 묻지 못했다. '왜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거야? 왜 몸을 안 움직이는 거야?'

 

"내… 내 귀를 막아. 당장 막아. 당장." 카이다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동요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왜?"

 

"입 닥치고 막으라고! 지금 막으라고! 이 멍청한 새끼야. 아아아아. 빨리. 빨리!"

 

카이다가 그러는 꼴은 처음 보았다. 누가 전기톱을 들이대서 카이다를 죽이려 들어도 그렇게 겁에 질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카이다의 턱은 덜덜덜 떨렸는데 이가 어찌나 단단한지 서로 마주치자 금속이 맞붙는 듯한 깡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직접 하면 되잖아.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잔말 말고. 빨리. 허억. 허억… 허억… 빨리!"

 

카이다가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을 느꼈다. 그녀와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닌데도 내가 느낄 수 있을 만큼 큰 호흡이었다. 폐활량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눈앞에 있는 회색 실루엣을 조금 경게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다가 저 정도로 두려워하는 게 있다면 분명 큰 난관 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다를 여기서 버리고 가기엔 너무 아까운데. 어떻게 해야 하지? 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회색 실루엣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어딘가에서 방울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잠시 눈을 감았다 뗀 사이 회색 실루엣은 방울을 흔들어 딸랑이는 소리를 냈다.

 

"안 돼. 안 돼… 빨리 내 귀를 막으라고. 귀를 막아…!"

 

정확히 네 번이었다. 딸랑. 딸랑. 딸랑. 딸랑.

 

작게 흐르던 바람이 멈추었다. 카이다의 호흡이 조금씩 가늘어졌다. 무언가에 턱턱 걸리는 듯 숨이 막히는 것이 보였다. 카이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마에 있는 모든 혈관이 불거졌다.

 

"우물에 빠지지 말 것." 회색 실루엣이 말했다.

 

다음 순간 카이다는 헬멧을 쓴 채로 기이하게 생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팔은 구속구로 묶여 있었고, 헬멧은 머리의 대부분을 감쌌으나 귀는 내어 놓고 있었다. 어깨마저도 단단히 고정되자 카이다는 의자에서 일어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사실. 방울 소리가 울리기 전부터도 카이다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뭐야?" 나는 얼떨떨해져 물었다. 시간이 멈추었다 다시 움직인 것처럼 혹은 누가 마술을 부린 것처럼 카이다는 의자에 앉게 되었다. 그리고 카이다 또한 그 사실을 알아챈 듯. 눈동자를 굴리며 자신이 묶여 있는 것을 살폈다. 눈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안 돼…"

 

카이다의 눈이 커졌다. 카이다는 욕을 하지 않았다, 으르렁거리지 않았다, 짜증을 내지도 않았다.

 

카이다는 비명을 질렀다. 암벽을 오르던 도중 디디던 곳이 무너져 그대로 떨어지는 사람이 지를 법한 비명이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했던 표현 중 가장 짐승과 먼 곳에 있는 비명이었다. 오직 사람만이 그토록 고통스럽게 절규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방울이 딸랑였다. 정확하게 네 번이었다.

 

"쌍둥이자리."

 

카이다의 고개가 순간 뒤로 홱 젖혀졌다. 헬멧은 그녀의 머리에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차량의 내구성을 테스트할 때 구겨지는 차량의 내부에서 목이 꺾여버린 더미 같이 보였다.

 

"끄윽… 으윽…! 흐윽!"

 

반쯤 벌려진 카이다의 입 안에서 침이 튀었다. 아드레날린으로 샤워라도 하는 사람 같았다. 그녀의 눈은 점막 안에서 뽑혀 나올 것처럼 크게 뜨였고, 실핏줄이 불거지다 못해 터질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손끝은 부들부들 떨렸지만 여전히 팔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무척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기관총을 양손에 들 수 있었고 나이토보다도 강한 카이다가. 언제나 비열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남아있던 그녀가 단 몇 마디만에 속절없이 고통에 떨고 있었다. 왜 카이다에게만 방울 소리가 통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독립 시행은 독립적인 움직임."

 

"흑. 끄으으으윽! 흐윽!"

 

"고문은 자비이다. 고통은 안정이다. 구속은 자유이다."

 

"허윽. 끄흑… 크아아악!"

 

카이다가 귀를 막아달라고 요청했던 것을 뒤늦게 자각했다. 카이다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기에. 내게 귀를 막아달라고 했던 것이었다. 그것을 이해했다. 회색 실루엣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카이다는 단순한 낱말의 배열에 맥을 못 추리고 있었다. 우물에 빠지지 말 것. 쌍둥이자리. 독립 시행은 독립적인 움직임

 

"새벽에서 끄집어져 깨어남."

 

"끄아아아아아악!"

 

카이다의 코에서 눈물처럼 한 줄기의 코피가 주르륵 미끄러졌다. 멈출 기미가 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잘린다. 잘린다나나시… 귀 막으라고. 씨발 새끼야. 내 좆같은 귀 좀 막으라고…"

 

어느 때보다 다급한 카이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순간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했다.

 

'내가 왜 그래 줘야 하지?'

 

그렇게 느꼈다는 것에 소름이 끼쳤다. 카이다가 아무리 내통자고 몹쓸 짓을 했다고 한들 눈앞에서 망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리고 카이다라는 사람을 고려하면 꽤 정중하고 간절한 편인 부탁을 받았음에도 나는 어떠한 다급함도 느끼지 못했다.

 

카이다는 분명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당장 몇 시간 뒤에 나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약점을 맞닥뜨린다면, 카이다가 그 적대적인 환경에 요긴히 쓰일 수 있을 터였다. 결국 모노로그의 도구가 아니던가.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들어서는 안 될 생각이 들었다. 카이다가 이 때문에 내게 보복하려 들까? 왜 귀를 막지 않았냐고 내 손가락을 자르던가 고문하려 들까? 당연히. 카이다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귀를 막아주지 않았다.

 

"막아 달란 말이야… 당장…! 당자아아앙!"

 

카이다에게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까? 나는 그녀가 왜 방울 소리와 기이한 낱말들을 버티지 못하는지도 알 필요가 없었다. 내가 그럴 수 있었다면 기꺼이 카이다가 어디까지 떨어지는지 지켜봤을 것이다. 칠공 분혈을 하던가, 뇌출혈로 쓰러져 버리는 등의 일어날 때까지 잠자코 구경이나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악… 기억이잘린다… 안 돼. 안 돼. 기억이 잘린다아…! 멈춰. 멈추라고…!"

 

그러나 카이다는 그렇게 소리쳤다.

 

"실내에서 추운 바깥으로 나가다."

 

"아. 싫어… 초기화되기 싫어. 잊고 싶지 않아. 잊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도... 나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차라리 마음 편하게 증오하고 내버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내 작은 증오와 앙갚음마저도 허용되지 못하였다. 하필이면 또 사연이 있었다. 카이다는 살수로 길러지기 위해 인체 실험과 기억 소거의 대상자가 되었다. 그래서 미도리카와에 대한 정보마저 잊어버렸다. 첫 번째 학급재판에서 들은 바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나는 그저 알고 싶었다. 대체 터치가 무엇인지. 카텟 기관은 무슨 조직인지. 나는 어째서 탑에 오게 되었는지. 내 이름은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 그것을 알아내려는 갈망을 나는 무엇보다 중요시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겠다 이거지. 모노로그는 그녀가 탑에 오기 전의 정보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기억을 제공하겠다는 명목 하에 내통자로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눈이 뒤집히고도 남겠지. 텅 비어버린 사람은 자신을 채우고 싶어 하는 법이니…

 

"상처. 소금. 염소의 혀."

 

발버둥을 치면서 살아있다는 이야기다. 아무 생각 없이 흑막의 말에 따르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의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것은 그녀에게도 두려운 일이었다. 내가 추측하건대 카이다가 겪고 있는 것은 기억 소거의 절차였다. 회색 실루엣 앞에 놓인 의자는 그녀를 구속하는 장치였고. 특정한 키워드를 통한 최면 효과와 조건 반사를 써서 카이다의 기억을 지울 수 있었던 것이다.

 

"안 돼… 안 돼애애애! 끄아아아악! 흐아아아아악!"

 

단지 한두 번 당한 게 아닐 것이다. 열 번 아니 수십 번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그녀 또한 그녀만의 지옥에 갇힌 채 허우적대고 있었다. 나는 그 뚜껑을 닫고 그녀가 썩게 둘 수도 있었다. 그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이미 카이다의 말을 듣지 않았기에 보복이 확정되어 있다면, 차라리 카이다의 정신이 이상해질 때까지 방치해야 했다.

 

카이다의 경직된 눈에서부터 두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잘린다… 아. 앗아가지 마. 빼앗아가지 말라고… 나나시. 내… 내 귀 막아. 당장… 이 새끼야. 제발…"

 

도와줘... 아무나 좋으니까 제발... 도와줘...

 

모리라면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무슨 말을 할지 거의 읊을 수도 있었다. '첩자는 지금까지 흑막에 대항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방해해왔다. 괴로워하는 꼴을 보기 통쾌하군'. 그래. 모리는 발목과 손가락 세 개를 카이다 탓에 잃었으니 이 자리에 있었다면 반드시 그녀를 버려뒀을 것이다. 내 오른쪽 어깨에 앉은 흉조(凶鳥)는 그렇게 말했다. 흉조는 자신이 등에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캐롤 씨라면 그녀를 구했겠지.

 

아마 카이다가 다급하게 이야기했을 때부터 그녀의 귀를 막아 주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카이다라는 사람의 본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캐롤 씨라는 사람은 왜인지 내 귀감이 되어 있었다. 그게 내 마음을 도움의 쪽으로 쏠리게 만들었다. 이윽고 나는 내 왼쪽 어깨에 앉은 고귀한 조류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내가 그녀를 구해야만 합니까? 왜 이 돼지 같은 자를 파멸에서 끌어올릴 여지가 있는 겁니까?'

 

"제발… 도와… 도와줘… 아아… 제발…! 뭐든 해 줄 테니 제발…"

 

'왜 부끄러움 모르는 이에게만 기회가 주어집니까? 나이토는 발을 절반 잃어가며 대해를 갈랐지만 남은 건 몸의 절반뿐입니다. 캐롤 씨 당신은 성자처럼 행동했지만 지금은 죽어 있습니다. 당신이 버려졌는데 왜 신은 카이다 쿠로하에게 손을 내미는 겁니까?'

 

"제발… 나나시… 허억… 헉… 싫어. 싫다고… 아으아아악…!"

 

목의 혈관이 불거지자 그녀의 목이 두꺼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카이다 쿠로하의 두 눈을 보았다. 악어의 눈물이 아니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비굴하고 두려워하는 눈동자. 나는 그 안에서 증오를 보았다. 괴상한 낱말들에게서 멀쩡히 풀려난다면 내 사지를 자르고도 남을 원망과 분노를. 그리고 반드시 죽여 버리겠노라고 결의하는 동시에 무엇이라도 맹세하고 약속할 수 있으니 한 번만 자신을 도와줬으면 하는 간절함을 보았다.

 

"기… 기억이 잘린다… 아… 아아… 끝났다… 모든 게 끝났어… 또다시… 처음부터…"

 

그러나 나는 카이다의 눈이 고장 난 듯이 수분을 뿜어내는 것을 지긋이 마주 보았다. 카이다는 이내 포기한 기색으로 멍하니. 하지만 피할 수 없게 덮쳐오는 쓰나미를 바라보듯 멍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캐롤 씨를 한 번 이해했다. 왜 그녀는 처음 보는 나에게 친절했던가. 왜 두려움에 떠는 이들에게 터치를 베풀었던 건가.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도무지 외면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카이다는 분명 추하고 가증스러운 인간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것은 내가 카이다를 걱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필요의 문제였다. 불쌍한 영혼 하나가 내가 알고 있는 괴로움 앞에 무너지는데 내가 귀만 막으면 그것을 막을 수 있다. 그건 사막에서 죽어가는 자 앞에 내가 물통을 들고 나타난 것처럼. 쉽고 또 단순한 일이었다.

 

똑같은 일이 캐롤 씨에게도 일어났다. 캐롤 씨는 자신과 무연고할지라도 다른 이가 괴로워하는 것을 구경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다른 이들은 안정이 필요했고 캐롤 씨의 장갑 안에 안정이 있었다. 그것을 꺼내는 것은 쉬웠겠지, 허나 꺼내고 쓴 뒤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확실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차마 우리를 지나치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던 강제적인 터치를 행한 것 또한 그 일환이었다. 캐롤 씨는 터치를 두려워했음에도 그것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는 늘 신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도와줘… 한 번이라도 좋으니 아무나 나를…"

 

나는 누군가에게 캐롤 씨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아마 그런 일은 평생이라는 기간을 주어도 불가능할 터였다.

 

캐롤 씨. 저한텐 그런 일이 불가능해요. 저는 카이다가 아무리 간절하더라도 여전히 카이다가 싫어요. 증오스럽죠. 죽을 것까지는 없지만 기억을 잃고 고통스러워 한다면 딱 좋은 일이리라 생각해요.

 

"당신은 그 괴로움에 대해 아시지 않나요?"

 

캐롤 씨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맞아.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처음 탑에 떨어졌을 때 훌쩍훌쩍 잘도 울지 않았던가. 나는 드물게 카이다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잔인한 생각이 뒤따랐다. 알기에 내버려 두고 싶다. 카이다에게 그 공허함을 보여 주어야만 했다. 그래야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뼈저리게 후회할 것이다. 텅 비어버리고 눈물만 줄줄 흘리는 처지가 된 뒤에. 비로소 카이다는 내게 애원할 수 있을 테지. "제발."

 

"네 업보라고 생각해 봐. 카이다 쿠로하. 지금까지 저지른 짓이 너에게로 돌아오는 거야. 남의 손에서 빼앗은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거다."

 

"동전의 양면."

 

"아아아아아아…!"

 

잘도 비명을 질렀다.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을 선사할 만큼 성량이 컸고 공포가 가득 담겨 있었다. 꽤 통쾌했다. 비명을 듣고 순간 그녀를 걱정한다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딘가가 불편하긴 했다.

 

캐롤 씨가 내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카이다 씨를 구해 주세요. 그녀에게 자비를 주세요. 그녀와 함께 가야 하지 않나요."

 

분명 그 말이 옳았으나 그건 과분한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과분했다. 공정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죽은 사람과 카이다의 저울에 마침내 누군가가 무게를 맞추는 것과 비슷했다. 내가 그 결과에 손을 대는 것은 카이다에게 밖에 좋을 일이 못 되었다.

 

"그런 저울은 없어요. 당신 앞에 있는 것은 괴로워하는 한 사람뿐이에요. 살아있는 사람."

 

맞는 말이죠. 그야 죽어있는 사람은 내 앞에 오지 못하니까요. 당신이 내 앞에 없는 것처럼.

 

캐롤 씨의 환청은 더 듣지 않기로 했다. 캐롤 씨를 향한 모욕 밖에 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죽었다. 내게 신은 처음부터 없었다. 내가 마음 속의 제단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중하고 생명이 담긴 것을 바칠 만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캐롤 브라이트하는 사람 하나뿐이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나는 이미 그녀에게 귀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캐롤 씨를 이해했다. 나는 카이다에게서 고통을 보았다. 카이다가 그토록 결함 많은 사람인 이유 또한 알게 되었다. 그러니 눈물을 페로몬처럼 사방으로 뿌리며 꺼져가는 영혼의 통곡을 내뱉으며, 도움을 주지 않고서야 못 배기게 되는 것이다.

 

"아아… 아흑… 아…"

 

나도 카이다보다 덜할 뿐 그 결은 같았겠지. 나는 한숨을 약하게 쉬었다. 받은 만큼 베풀지 않으면 면목이 없었다.

 

"이건 캐롤 씨가 너를 돕는 거라 생각해."

 

나는 외침이라기보다 메아리이며, 햇빛이라기보다 달빛에 가까웠다. 그런 미약한 힘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손쉬운 도움이었다.

 

나는 결국 카이다의 귀를 손으로 단단히 틀어막았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어리석은 일이었다.

 

"뭐라도 좋으니까 말해 봐… 내 손을 뚫고 소리가 들어올지도 몰라."

 

인체 개조를 당했으면 귀도 좋을 거란 생각이 들어 덧붙여 주었다. 그러자 카이다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벙찌고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어떠한 웃음기도 없었다.

 

"랄랄랄랄랄랄라. 아바바바바바. 응 안 들려. 안 들려. 랄랄랄랄랄랄라. 어쩌구저쩌구. 랄랄랄랄랄랄라. 안 들려. 아무것도 안 들린다. 응 안 들려. 안 들린다에베베레베베레베용용용용뇽뇽용용세베레게메메베베베레베롤롤롤랄롤롤로"

 

바보같이 들릴 뿐이지 일단 음성을 차단하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되는 대로 지껄이는 것은 사실 실용적인 일이었다. 그것을 이해하고는 있었으나 참 환상적인 혓놀림이었다. 난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카이다는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계속 입술을 부단히 놀렸다. 그래. 안 들려서 다행이었다. 회색 실루엣은 세 개의 낱말을 더 말했다.

 

"30코페이카."

 

"얼린 바다를 부순 도끼."

 

"그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린 뒤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방울 소리 네 번을 마지막으로 회색 실루엣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십 초를 더 기다리며 카이다를 바라보니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여전히 되는 대로 입을 놀리고 있었다.

 

"이제 됐어. 카이다."

 

"야야야야야요요요요제발제발그만좀 으아아아아악! 다시 막아! 귀를 막으라고! 귀를…"

 

내가 그녀의 귀에서 손을 떼자 카이다는 발작을 하듯이 소리쳤지만, 이내 회색 실루엣이 말을 멈추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머쓱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씨발. 드디어저 놈이 마지막 문장까지 끝낸 거지?"

 

"일단은 그래. 30코페이… 읍!" 내 말이 끝마쳐지지 못하고 그녀의 손아귀에 붙들려 막혀버렸다. 턱을 박살 내려는 줄만 알았다.

 

그녀의 팔을 다시 보자 기이한 의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의자에 앉은 자세를 의자 없이도 유지하던 카이다는 무릎에 힘을 넣어 아무렇지 않게 몸을 세웠다.

 

"닥쳐! 그것들은 입에 올리지도 마! 젠장… 큰일 나는 줄 알았잖아!"

 

카이다는 날 놓아주더니 곧바로 회색 실루엣을 향해 쿠나이를 집어던졌다. 그러나 몇 초 전까지 방울을 딸랑이던 그 사람은 자취를 감춘 채 사라졌다. 카이다는 마침내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쥐에 난 몸을 푸려는 것처럼 팔과 다리를 주무르고 관절을 이리저리 돌리며 이완시켰다. 여전히 숨은 거칠었고 생사의 고비를 넘긴 것처럼 신경이 예민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이제 끝났어. 카이다."

 

어두운 공간 속에 남은 것은 오직 카이다와 나뿐이었다. 카이다 또한 그 사실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카이다의 미간이 불거졌고 입꼬리는 기이하게 들어 올려졌다.

 

나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카이다는 곧바로 다리를 높게 들어 내 얼굴을 걷어찼다. 나는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털썩 떨어져 버렸고, 곧바로 카이다 쿠로하가 쿠나이를 꺼내더니 내 위에 올라탔다. 멱살을 잡히고 끌어당겨지자 쿠나이의 차가운 날이 목의 솜털에 닿았다.

 

"이 개새끼야! 내가 귀 막아 달라고 했잖아… 내 말이 말 같지가 않나? 내가 좆으로 보여?!"

 

"날 죽이기라도 하게?" 나는 이상할 정도로 침착했다. 아픔은 느꼈지만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다고 느꼈다.

 

"오냐. 죽인다. 꼭 죽인다. 오늘의 굴욕은 절대로 안 잊어. 모노로그가 널 지켜 주라고 했다고 네가 내 상전이라도 됐을 줄 알아? 씨발 너만 성깔 있냐? 아니. 이 새끼야. 넌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새끼니까! 어깨나 드러내고 다니는 씹… 창놈아! 그래! 널 꼭 죽이고 만다. 죽여버릴 거라고!"

"죽여 봐. 그럼 모노로그에게서 아무 말도 못 들을 걸."

 

"아하. 너 진짜 주제 파악이 안 되나 봐? 내가 너 못 죽일 것 같아? 이건 덮어두고. 못 죽이면 내가 너한테 아무것도 못 할까 봐? 아니. 네 손가락을 하나하나 다 잘라주마. 귀랑 코랑 다 자르고 이빨도 하나하나 팬치로 뽑아 줄게. 눈은 그냥 쑤셔 버리고. 살아있는 채로 머릿가죽을 벗겨 주겠다!"

 

"마음대로 해. 실타래를 써서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부상은 다 나으니까. 아까 모노로그가 이야기한 거 기억 안 나? 아무리 너라도 벌써 잊어버렸을 리는 없는데."

 

카이다는 분통을 이기지 못하고 쿠나이를 조금씩 밀었다. 내 피부가 찢어지고 피가 한 방울 배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호흡이 조금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나는 통제할 수 있었다.

 

나는 카이다를 앞에 두고서도 내 몸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느꼈다.

 

"내가 실타래를 돌려줄 것 같아? 그냥 여기서 죽어. 죽어 버려!"

 

"네가 나한테 할 수 있는 일은 그거뿐이야. 카이다. 네가 눈을 뽑든 말든 언젠가 여기서 나가기만 한다면 난 원래대로 돌아가지. 이러는 동안에 23T는 날 구하러 오고 있을 테고, 그렇게 구출되더라도 난 원래대로 돌아가. 그러니 네가 나한테 피해를 입히고 싶다면, 지금 나를 죽이는 수밖에 없어."

 

나는 카이다의 손목을 붙잡고 내 쪽으로 당기려 했다. 빠르게 움직였으나 카이다가 반응할 수 있을 만큼은 뜸을 들였다. 그러자 그녀는 내 기대대로 움직여 주었다.

 

"씹…"

 

카이다는 순간 쿠나이를 당겼다. 내 목은 쿠나이에 찔리지 않았다. 섬찟한 도박이었지만 나는 이미 내가 이길 줄을 알고 있었다.

 

"나는 캐롤 씨를 되살려야 하고. 넌 기억을 되찾고 싶어해. 그거 하나는 서로 도울 수 있잖아… 날 굴복시키고 싶은 거 알지만, 지금은 묻어 두자고… 그러니까 그만 졸라대. 네 자격지심이 들끓는 거에 어울리기도 힘들어."

 

"뭐? 이 새끼가 진짜. 죽고 싶나!"

 

카이다는 모리와 달랐다. 적어도 모리는 속 빈 협박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진실되었다는 뜻이다. 나는 모리를 싫어하는 편이었지만 그런 나이기에 모리의 몇 안 되는 미덕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모리는 타협하지 않는 의지와 누구에게나 엄격한 공정함을 가지고 있었다.

 

카이다에게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또 그런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일을 망치지 말란 말이야… 너는 기억을 되찾아. 나는 캐롤 씨를 살려. 그거면 되는 일인데 왜 분을 못 이기는 거지?"

 

"이 개새끼가…!"

 

"이해해봐. 넌 날 죽일 만큼 찌를 수도 손가락을 다 잘라버릴 수도 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야. 결국 너에게 손해로 돌아온단 말이지… 마음대로 화풀이해. 하지만 그건 나와 상관없어. 내가 고장 나 버렸을 때 뒷감당은 네 몫이니까…"

 

나는 내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히무로를 꾀어내기 위해서는 캐롤 씨가 되살아날 수 있다는 압박을 주어야만 했고, 지금 캐롤 씨를 맹목적으로 되살릴 사람은 나 뿐이었다. 그렇기에 카이다를 시켜 날 납치하고 호위하게끔 만들었다.

 

카이다는 내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실타래를 써서 탑으로 돌아가기만 해도 모노로그의 덫은 무너져 버리기에. 카이다는 나를 온전히 호위해 캐롤 씨를 되살리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화가 났고 날 죽이고 싶겠지만 그럼에도 내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건방진 새끼가…"

 

"내가 지금 얼마나 절박한 지 알아? 나는… 캐롤 씨를 다시 봐야만 해. 그 사람은 내가 잃어버린 조각이야.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껴. 그녀는… 나의 아프락사스다."

 

나는 반쯤 멍한 채로 말했다. 그러나 헛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카이다 쿠로하의 손을 붙잡은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지 않으면 안 될 곳이야… 나는 내 모든 것을 원해. 다시 되찾고 말 거야. 그건 캐롤 씨 없이 불가능한 일이지. 나는 알아. 당연하다는 듯이 알게 된다. 모두 당연하게 깨닫게 된다. 캐롤 씨는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어. 그러니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든 간에, 끝까지 나아갈 거야. 이 안에서 죽는다고 해도 후회는 없어…"

 

"잠깐. 너 이 새끼…"

 

카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도 카이다가 마음에 들지 않기로는 매한가지니 그건 카이다가 알아서 하라지.

 

"기억을 되찾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뭐라는 거야. 그보다 너. 눈이 왜 그 모양이냐…? 기분 나빠…"

 

"내 눈이 왜?"

 

"언제 렌즈를 낀 거야…? 아니. 렌즈일 수가 없지. 나 병신인가? 그럴 틈은 없었어. 네 눈동자 색이 지금… 제멋대로 변하잖아… 뭔 개 같은 사술을 부리고 있어."

 

지금 이 사술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네 기억을 전부 되찾아줄 수 있다고 말해주려다가 그만두었다. 애초에 나는 카이다의 기억을 되찾아줄 생각이 없었다. 나는 아직 터치를 개화하지도 못했을뿐더러. 설령 캐롤 씨만큼 강력한 터치가 가능하더라도 굳이 내가 그렇게 할 수도 있음을 알려줄 필요가 없었다. 당장 기억 찾는 걸 도와주겠다고 말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으니까.

 

"왜. 싫나?"

 

"당연히 싫지! 사람 눈동자가 그냥 제멋대로 색이 변해?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징그러워! 이 흉물아!" 인체실험당한 진짜 흉물의 말이었다.

 

"알아서 참던가 해. 나도 너 징그러운 건 매한가지거든. 애초에 지금 올라타고 있는 너. 너무 무거워서… 숨 쉬기가… 어렵다고. 족히 백 킬로그램은 될…"

 

"이 씨발아!" 카이다가 윽박질렀다.

 

"우린 서로를 싫어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내칠 수는 없어… 너와 나는 같은 길에 있다는 거야. 가지 않으면 안 될 길이니까 우리. 잘 좀 해 보자… 잘 좀 해내 보자고. 그러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네가 저지른 짓을 전부 되갚아버릴 거야. 내게 그럴 권리는 없더라도 좋아. 네가 상상할 수 없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네게 복수할 거다. 그러니 지금 당장 무거운 몸뚱이 치우고 영안로를 돌파하던가… 나를 죽여버리고 네 멋대로 해!"

 

카이다는 날 죽일 듯 내려다보았다. 나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 몇 분 가량 카이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카이다가 쿠나이를 내 목에서 떼어냈다.

 

 

 

 

 

 

 

 

 

"꼬르륵. 꼬르륵… 푸하!"

 

나는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이딴 게 시련 안에 있을 줄 알았으면 절대 안 왔다. 이상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실타래를 써서 나가겠노라 생각해왔지만, 물속에서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실타래는 그것에 대고 말을 해야만 가능한 모양이었다.

 

"콜록. 콜록! 커흑! 콜록! 우욱… 퉤! 콜록!"

 

나를 물속에 밀어 넣고 머리가 물 밖에 안 나오도록 막은 꼬맹이들. 그 개자식들을 찾으려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걸리면 나랑 같은 꼴을 당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꼬맹이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 뒤였다. 수영장엔 나 밖에 없었다.

 

이게 어딜 봐서 깨달음 어쩌고야? 패트리샤에게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시련 아니던가. 나를 익사시키려고 발악을 하는 꼬맹이들에 맞서 싸우는 시련. 나는 실타래를 손에 꼭 쥐고 당장 내 이름을 외친 뒤 나가고 싶었지만, 이미 시련 하나를 깬 입장이기에 나가는 건 아까웠다.

 

두 번째 시련이 이것보다 쉬울 수도 있잖아.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귀환을 미루기로 했다. 끝부분에 와서는 이거 진짜 죽겠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온몸이 떨렸다. 영안로 안에서 죽어도 진짜 죽는 건 아니라지만, 진짜 무섭고 힘들었다. 수면 위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또한 소름이 끼쳤다. 이게 재미있나? 미친 싸이코 꼬맹이들. 시련이 내뱉은 괴물이 분명했다.

 

애초에 왜 수영이 제대로 안 된 거지? 나는 분명 물개처럼 수영을 잘했는데. 분명 발이 닿지 않더라도 쉽게 헤엄을 쳤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다리가 얼어붙어버렸다. 그리고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물속에 있는 게 즐겁지 않았다. 심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살아나려고 노력해도 수면에 닿지 못하고, 결국 숨이 막히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는 것이다. 처음으로 그 공포를 느끼자 내가 몸을 담근 수영장이 웬 심해의 응축물로 느껴졌다. 안에 몇 초만 더 있으면 커다란 문어가 내 몸을 잡아채 끌고 갈 것 같은, 뒤를 돌아보면 정말 문어가 있을 것 같은 환상이 날 옥죄왔다.

 

이게 다 몸이 약하기 때문이지. 몸이 약해서 이 자식들을 떨쳐내지도 못하고 수영장에 떠밀린 거야. 형들이랑 나는 달라. 나는 너무 약해. 아빠 말마따나 친자식으로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없어. 늘 그래 왔지… 지금까지와는 안 돼.

 

더 강해져야만 한다. 누구보다도 강해질 것이다. 누구도 꺾을 수 있을만치 강해지고 싶다. 하지만 결코 힘을 제멋대로 휘두르지는 않으리라. 나는 단지 강해지는 게 아니다. 아빠가 만족할 만한 진정한 기사가 되어야…

 

"뭐야 이건?"

 

수영장 위로 발을 디디며 나는 멍하니 내 머리를 부여잡았다. 왜인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귀신한테 홀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기분이 나빴다. 나는 회중시계를 잡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회중시계를 반대로 감아가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빠르게 침착을 되찾기 위한 나만의 반복동작이었다.

 

그런데 회중시계가 없었다.

 

손목시계도 없었다.

 

손목시계는 없어도 됐다. 그렇지만 회중시계는 없어서는 안 되었다. 회중시계는… 선물을 바탕으로 만든 거였으니까…

 

"내 시계… 내 시계 어디에 있어! 내 시계 어디에 갔냐고!"

 

"첫 번째 깨달음. 축하드려요!"

 

패트리샤라는 자식이 나한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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