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그 사람은 예술가였다. 진짜 예술가라는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었다.
나는 가족인 그 사람의 그림자를 따른다. 그 사람의 행위는 내 귀감이었고,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그 사람의 예술은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정말로 정말로 드물고 대단한 사람이었다. 주머니 속에서 드러나는 송곳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녀의 이름을 썼으니. 그 사람은 언젠가 잊힐 것이다. 그녀는 내게 흡수될 것이다. 동화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언젠가 영영 잊힐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으로 나를 기억하리라. 너무 잔혹한 일이다.
그녀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나를 원망하리라.
바로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
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
더 단크 타워
챕터 3: < 카타르시스 >
"나는 누구인가?"
"…추적이 쉽게 끝날까?" 토키와 아유키는 말했다.
"절대 쉽게 끝나지 않을 겁니다. 모노로그 씨가 함정을 팠다면, 그 미끼마저도 정교할 테지요. 며칠이 걸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최적의 인원들만 저곳으로 향했지만…"
"하기와라… 괜찮으려나." 이바라 쿠리스가 말했다.
"그건 아무도 몰라! 뭐. 나라면 알지도 모르지요? 그야 유일무이한 수사 고문이니까. 레스트레이드! 어떠오? 지혜를 빌려드릴깝쇼?"
"필요 없어…"
"매몰차긴!" 후루미나미 나몬은 토키와에게서 눈을 돌리고 바닥에 떨어진, 배선과 금속 뭉치와 회로를 뱉어낸 플라잉 로봇을 바라보았다.
23T는 매몰차게 플라잉 로봇을 부쉈다. 영안로에 들어가기 직전 느닷없이 플라잉 로봇을 꺼내라는 요구. 후루미나미는 그에 따랐고 곧이어 플라잉 로봇은 바닥에 떨어져. 23T에게 짓밟히며 마구잡이로 박살이 나고야 말았다.
"아까워라. 이름도 붙여줬는데 말이야. 이름은 버즈였어."
누구도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이들은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쉬고 싶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탈출과 생존을 위해 노력하던 히무로 시라베가 다른 이들에게 총을 겨누었고, 말세가 도래했음이 환기되었고, 이 와중 카이다 쿠로하는 나나시를 납치해 캐롤 브라이트를 부활시키려 하고 있었다.
사람 두 명이 죽은 다음 날에 일어나기엔 과격한 일이었다. 당장 나나시가 납치당했기에 모두 함께 움직였을 뿐. 그들에겐 대몰락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거의 모든 이들이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고 흩어진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두 사람은 대몰락의 충격에서 벗어나기보다, 할 일을 정하고 처리함으로써 일상을 회복하고자 했다.
"후루미나미 씨는 어떻게 가둬 두어야 할까요?"
"이미 몇 번 가둬봤어. 밧줄에 묶는다던가, 수갑을 채운다던가… 하지만 늘 아무런 의미도 없었어. 풀고 나오더군. 더 단단한 게 필요해…"
"어우. 토키와 너 눈빛 무섭다아!"
토키와는 후루미나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야가미는 후루미나미를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숙소에 묶어 두었다. 묶어놓은 수단은 매듭이었다. 야가미는 토키와가 본 적이 없는 매듭으로 후루미나미의 사지를 묶어 두었다. 또한 케이프 코트 소매에 이상한 물건이 들어있지 않은지도 살펴 두었기에. 커터칼 같은 것으로 매듭을 자르고 도주할 염려 또한 없었다.
"…너에게 도움을 받네. 야가미."
"전 이제 여러분들의 아군입니다. 명심해 주세요. 후루미나미 씨가 식사를 해야 한다거나, 생리 활동을 하고 싶다 말하면 저를 부르시면 됩니다."
"차라리 내가 그 매듭법을 배울게."
"나중에 알려드리죠. 그럼 다른 분들이 휴식을 취하시는 동안. 저희도 영안로에 가신 분들이 돌아오거나 특이한 일이 일어나기 전엔 휴식하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저희 또한 대몰락을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네가 옳아. 야가미… 네가 옳아."
"편히 쉬세요. 토키와 씨."
야가미는 그 말을 남기고 후루미나미의 숙소에서 나갔다. 토키와와 후루미나미는 단둘이 남겨져 서로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토키와의 시선은 밤을 새우기 시작한 이래 똑같이. 조금 퀭했으며 지쳐 있었다. 후루미나미가 보기에는 볼 만한 가치가 없는 시선이었다.
"할 말 있어? 있으면 빨리 말해. 너는 그다지 재미가 없는 사람인지라 별 기대는 안 하고 있지만."
"재미가 있는지 없는지. 고작 그런 것만 신경 써? 이 탑을 휘저을 수 있으면서 불나방처럼 몸을 던지다니… 내가 너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절대 그런 식으로 사용하지 않았을 거야.."
"나처럼 쓰지 않겠다면, 선하게 쓰리라는 이야기인가? 너는 정말 아무 능력도 가지지 못한 사람 티를 너무 낸다. 나는 별 볼일 없는 사람 이노라고 외치지 못해 안달을 내고 있어."
"널 비난하는 것과 내 재능이 무슨 상관이지?"
"그야 나는 이런 사람이어야 의미 있는 거니까. 예시를 들어 균과 바이러스를 조합해 무기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즉슨 균 분야의 권위자란 말이지. 그런데 누군가가 이 사람을 비난해. 당신 능력이라면 지금 존재하는 불치병이나 균의 항원체와 치료제를 만들 수 있을 텐데 왜 무기를 만들고 사람의 죽음에 일조합니까? 하지만 이건 잘못된 비난이야. 왜냐하면 이 사람의 능력은 일단 무기를 만드는 것이니까. 치료제를 만들 줄 아는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왜 지레짐작하는 거지? 사람들은 종종 이런 실수를 해. 무언가를 악용하지 말고 좋게 쓸 수도 있지 않냐는 식이지. 너도 똑같은 짓을 하는 거야. 나는 연기자지만 내 재능이란. 이런 방식이어야 의미가 있는 거야. 이것 말고 다른 의미는 발견되지 않았어… 왜 내가 명석한 해결사가 될 수 있으리라 여겨? 내가 그 일을 더럽게 못할 수도 있는데. 힘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사람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힘을 선과 악 혹은 중용 등 자신이 원하는 가지로 뻗을 수 있으리라 여기지만. 아니야. 힘에는 방향이 포함되어 있어. 그리고 나는 이렇게 태어났지. 악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는 힘을 가지고. 빠르든 느리든 결국 나는 이렇게 되었을 거야."
"궤변이야. 후루미나미. 그 사람은 그저 무기를 만들고 싶은 거야. 처음부터 그 일에 통달하는 사람이 존재하나? 그 사람은 프레파라트를 만지지 않았단 말이야? 배양구에 곰팡이를 기르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았다고? 처음부터 연구복을 입고 탄저균. 에이즈. 천연두. 인플루엔자. 장티푸스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말한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 사람은 그 방향으로 절차를 밟으며 나아갔고, 계속 나아가려는 확실한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을 거야. 그리고 설령 좌절되더라도, 무언가와 맞닥뜨려 멈추게 되더라도 멈추지 않으려 했겠지. 그러니 생화학 무기를 만드는 위치까지 올라간 거고. 봐. 그 사람은 치료제를 만들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어. 해왔던 것은 바이러스를 이용해 무기를 만드려는 노력뿐이야. 그런데 그 사람이 자신은 어차피 치료제를 못 만들고 무기나 만들기로 정해져 있었노라 말한다면, 그건 궤변이야. 그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했어. 분명히 마음이 그 방향으로 쏠려 있었어. 너는 비극을 사랑하잖아. 너는 다른 사람의 안위를 위해 네 지능을 써본 적이 없어. 우리를 잠시 도와주었던 것은 항상 너의 변덕이거나 배신을 위한 디딤돌로 쓰기 위해서였지. 결국 네가 그렇게 되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것뿐이잖아."
후루미나미는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느꼈다.
"너 또한. 나를 보며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거지. 나는 언제든지 선해질 수 있다고. 그건 내 의지에 달려있는 거라고… 하지만 나 같은 사람들도 있어. 절대적인 경지의 예술을 봐 버린 사람. 그런 내 힘은 악의를 가진 채 쓰여야 의미 있는 거야. 가치가 창출되는 정도가 다르단 말이지. 그러니… 내 힘에는 방향이 포함되어 있고. 나에게 달린 것은 단지 얼마나 강한 의지를 관철하여 그 힘을 사용할지의 여부야. 쓰지 않는 선택지는 없어. 너는 스스로를 향한 시험에 들기 전부터 지레 포기해버리는 종류의 인간인가? 혹은 양극단이 있을 때. 자신의 끝을 최대한 구현해보려는 인간인가? 내게 말해 봐."
"좋겠어. 쾌락에 절은 채 스스로를 버릴 수 있어서. 솔직히 정말 부러워. 나도 저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그런데 나는 이제 그럴 수가 없어. 리더가 되어버렸으니까."
"리더? 네가 지금까지 뭘 했다고? 밤을 지새우기? 지새우다 졸아버리기? 날 허술하게 묶고 놓치기? 산채로 불에 타오르기? 이윽고는 아무것도 막지 못했던 것을. 리더라니!"
"네가 나온 영화를 본 적이 있어." 토키와는 느닷없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몰라. 한두 편이 아니라 꽤 많이 찍었는데."
"쿠루미라는 이름을 쓰던 영화 말이야. 원래는 다른 이름이었는데 네가 멋대로 배역의 이름을 바꿨다며? 연기가 아주 뛰어났어."
후루미나미는 가소롭다는 표정에서 점점 표정을 굳혔다. 겉모습을 보고 그녀에게 찬사를 보내며 그녀를 존경하는 이들은 후루미나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없었다.
"그래서?"
"네가 쿠루미가 아닌 후루미나미 나몬이듯이… 나는 리더가 아니라 토키와 아유키일 뿐이야. 그러나 나는 리더가 될 거야. 반드시…"
"너 같은 사람한테 그런 일이 가능할까?" 후루미나미가 그를 비웃었다.
"가능한지 아닌지는 아무래도 좋아. 네 힘에 방향이 포함되어 있다면. 리더의 힘은 방향을 정할 수 있는 힘이겠지. 난 그 방향으로 나아가겠어."
"아. 비유는 집어치워. 내가 세워 놓은 비유들을 따른다고 네 말이 흥미로워지거나, 내가 네 흐름을 따르게 되지는 않아. 비위를 맞추고 싶은 거면 네 분수나 알지 그래! 지금 너. 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싶어 안달 난 것처럼 굴고 있어. 알아?"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면?"
토키와는 웃지 않았다.
"네가 탈출 장치에 노출되었다는 건. 너에게 또한 어떤 변화가 생긴 거야. 히무로로 하여금 다른 이들에게 총을 겨누게 할 만한 변화… 너는 무엇을 아는 거지?"
"내 힘을 빌리게? 하하하. 웃겨라! 내가 도와줄까 봐? 내가 왜? 아까 지혜를 빌려 주겠다고 했을 땐 매몰차게 거절해놓고!"
"두 번째. 너에게 조용히 접근할 필요가 있었고. 첫 번째. 내가 히무로를 팔아넘길 거니까."
후루미나미 나몬의 눈이 잠시 커졌다.
"자세히."
"히무로는 많은 걸 숨겨왔어. 계속 숨기고 있지. 너는 어떻게 야가미의 낙인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럴 만한 틈은 없었어. 네가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야가미에 대한 표본이 부족해. 그럼. 혹시 모노로그에게서 들은 걸까? 모노로그와 손을 잡았다면 애초에 탈출 장치를 모노로그에게 넘겼겠지. 그러니 너는… 무언가를 알고 있어. 탈출 장치를 통해 알게 된 거야."
"그럼. 내가 알고 있는 걸 알려 달라고? 나는 그런 거 안 해."
"알아. 너는 늘 우리가 죽거나 고통받는 모습을 보려 하니까. 하지만 히무로는 아니지 않나? 히무로 또한 탈출 장치를 통해 무언가를 알아냈을 거야. 정말 히무로가 우리들의 생존을 원하고 있다면, 어째서 탈출 장치로 얻은 지식을 말하지 않는 거지?"
"그야 히무로는 양치기 개니까. 양들을 지켜주는 존재니까 그렇지. 설령 양들을 속아 넘기는 일일지라도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양치기 개는 그렇게 해야 해. 대몰락을 숨긴 것과 같겠지. 어떤 오명과 비난을 받더라도 자기 임무를 완수하는 것. 그게 히무로야. 그런데 그런 사람을 팔아넘기겠다? 너 굉장히 마음에 든다! 나는 재미있는 생각이 좋아!"
"양치기 개는 주인의 명을 따르지. 양의 털을 깎다가 언젠가 도축할 날을 위해 양을 지키는 거야. 그것은 양을 위한 일이 아니라 주인을 위한 일이고. 그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해. 모노로그가 숙식을 제공한다 한들 그건 우릴 살 찌우기 위함이듯이."
"그렇다면 히무로의 주인은?"
"카텟 기관. 히무로는 카텟 기관 소속. 나나시도 카텟 기관 소속. 23T도 카텟 기관 소속인데 우리는 그들에 대한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애초에 탑에 대포 같은 것을 쏜 것도 카텟 기관… 우린 정보전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고. 만약 카텟 기관이 이 탑의 배후라면, 우리는 절대 무사할 수 없어. 사육되다가 결국 도축될 뿐이야."
"히무로는 우리의 적… 그 생각도 재밌네. 그렇지만 단순히 추측만으로 지금까지 애써온 사냥개를 삶아버리는 건 너무 이르지 않나? 지금까지 히무로가 이 탑을 위해 얼마나 애써 왔어!"
"그래. 히무로라면 자신의 과오를 청산하듯, 보란 듯이 나나시를 구출해 모노로그의 계획을 부숴 버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우린 네가 제공한 정보와 나나시의 구출을 동시에 이룰 뿐이야. 더욱이 좋아."
"그가 너희들 편이라도 나에게 팔아넘기겠다는 거야? 너무하다! 그리고 더러워. 추잡해!"
"추하냐 아름다우느냐를 따져선 안 돼. 그저 효율적으로 생각해야 해… 히무로라면 이해할 거야. 결국 납득하게 될 거야. 한 명을 배신해서 다른 모든 이들을 살릴 수 있게 된다면, 그보다 나은 일은 없어. 다수보다 중요한 소수는 어디에도 없다고. 더 나은 선을 위해… 그래. 모두를 위해. 생존자 전부를 위해서…!"
토키와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거야… 내 제안을 들어 봐. 히무로는 분명 나보다 강해. 하지만 정작 남을 먼저 해치지는 못 하지. 게다가 날 경계하지도 않고 있어. 그가 영안로에서 돌아온 뒤 기습하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하지. 못 미덥다면 네가 작전을 짜. 비열한 수작질은 네 장기잖아. 네가 오직 진실만을 전하고, 카텟 기관과 이 살인 게임의 배후를 충분히 알려 준다면… 나는 반드시 네가 히무로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줄 거야. 나머지는 네 마음대로 해… 그런 거래야."
"네가 날름 정보만 먹고 날 내버리면 어쩌게? 흥. 내가 그리 쉽게 설득될 것 같은 감? 정보라는 건 널리 퍼지지 않아야 그 가치가 빛나는 법! 나는 단물을 전부 뱉어내고 바짝 마른 형해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네. 헤헹!"
"마음대로 해. 하지만 남은 사람들 중 이제 네게 매수될 사람은 없어. 적어도 너를 적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널 고깝게 여기고, 또 두려워하지. 카나리는 쓸모가 없으며 칸나즈키마저 너와 갈라섰어. 너는 지금 완전히 평범하고 평균적인 배신자를 손에 쥘 수 있는 거야. 카이다가 치명적이지 않은 이유는 내통자임이 드러난 순간 내통자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지. 그야 우리에게서 아무런 정보도 가져갈 수 없으니까. 아무도 모르는 비수가 가장 위험한 거야."
"쓸만한 비수… 기습이라…"
후루미나미 나몬은 말끝을 흐리고는 토키와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너같이 좋은 사람이 하기에는 너무 어두운 발상이라. 사실 누가 배후에 있는지 생각하고 있어. 누가 나에게 그런 생각을 불어넣었을까? 혹시 히무로가 너와 미리 손을 잡고 있다고 하기엔. 네 말이 지나치게 날것인데 말야… 샌님은 어디에 간 거야? 우리 모범생 씨. 도청기로 엿들었는데 너 학생회장이라며."
"내가 해야 할 일을 바라보았을 뿐이야. 좋은 리더가 되는 거지… 그리고 그건 좋은 사람에게서 벗어나는 일이야. 좋은 리더는 선함을 의미하지 않아. 오히려 집단을 위해 끔찍한 판단마저 내릴 수 있는 게. 좋은 리더야. 그러니 말해. 내 제안을 받아들일 건가?"
후루미나미는 토키와의 말에 답하지 않고 작게 중얼거렸다.
"팽창(inflation)…"
그리고는 맥락 없는 이야기를 했다.
"네 머리색. 마음에 드네. 눈도 순수하지는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고."
"히무로의 눈 색을 닮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낭만주의의 색이기 때문이지. 그 유명한 그림 알아? 푸른 옷은 낭만이지. 곧 너는 정열. 도취. 열망을 타고 태어난 셈이야. 그러니… 묻지. 내가 정말 너흴 도울 의향이 있다면 날 믿어 주긴 할 거야? 응?"
"네가 진심으로 우릴 도우려 한다면. 또 바보처럼 너에게 속아 넘어가 주겠어. 마지막 한 번의 배신을 제외하면 너는 착실히 다른 이들을 도와주니까. 그 점만큼은 믿을 수 있어. 네가 배신할 것을 알기에 너를 믿을 수 있는 거야."
"좋군! 내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는 자가 나타나다니. 그럼 자. 말을 들어 봐. 나는 지금 내 처지로도 충분히 행복해. 비극을 알아서 만들어내는 실험장 속에 갇혔잖아. 나야 이 모든 것을 관조하며 지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어. 차고 넘치지. 그런데 너희는 그렇지 않잖아? 살아남아 탈출하고 싶잖아… 가족은 봐야지. 무덤은 만들어야지?"
토키와는 순간 차오른 눈물을 꾹 하고 참아냈다.
"너는 뭘 알고 있는 거야?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고."
"단번에 말해줄 수는 없고. 절차를 밟아야 해. 일단 도서관에 가 봐. 너희 모두 눈치채지 못했지만, 도서관의 장서는 살인이 벌어짐에 따라 그 종류가 바뀌거든."
토키와는 그렇게 했다.
"네가 이겼다… 음란한 창놈 새끼야. 불알은 달려있다 이거냐?"
카이다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네 말대로 하지 뭐. 너는 나랑 같이 간다. 하지만 영안로 안까지 만이야. 여기서 나가면… 내가 장담컨데. 죽지 않는 한도로 가장 끔찍한 고통을 주지."
영안로에서 나간 뒤의 일은, 나간 뒤의 일일 뿐이었다.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해. 실수로 우물에 빠지지 말고. 하."
"역시 지금 죽여야겠다. 이 개새끼야!"
"깨달음? 이딴 게 깨달음이라고?"
"네. 믿기지 않으실지 몰라도 멋있게 성공하셨어요! 다른 분들을 제치고 독보적인 1위세요!"
"내가 1위?!"
저절로 쾌재가 나왔다. 그 멍청이들! 내가 물속에서 개고생 했는데. 나보다도 느리다고? 하! 웃기는 자식들이구만. 써먹지를 못하겠어! 고맙게 됐지만 말이야. 꼴좋다! 맨날 나 무시하다가 아주 어안이 벙벙하겠지?!
"좋아. 곧바로 다음 시련으로 가면 되는 거지?"
"네? 아뇨. 방금 하신 건 깨달음이라니까요. 그리고 곧바로는 못 갈 거예요. 휴식 시간이 주어지거든요. 거부할 수 없는 휴식 시간이죠!"
"휴식 시간? 뭐. 앉아서 쉬기라도 하라고?"
"아뇨. 쉬고 가셔야 하잖아요. 고생하셨으니 주는 휴식 또한 간식 시간! 자. 저 문 밖으로 나가시면 되요! 어떤 분에게나 1시간이 주어지니까 편히 쉬시고 영안로 속 탐험을 이어나가세요!"
"어떤 분에게나? 그럼 사실상 내가 앞서 나가는 건 그대로라는 거 아니야?"
"맞아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시간이랍니다!"
거부할 수 없는 1시간이란 말이지. 별 수 없이 1시간을 버려야 한다면 편히 쉬고 가는 편이 낫겠지. 카나리 케이토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안에는 밤이 있었다. 검은색으로 가득 찬 공간이 아니었다. 편안한 밤이었다. 야생이 아니라 야외인 장소. 벌레와 풀독이 있지만 맹수는 없는 곳. 모닥불을 피울 수 있다면 하룻밤도 보낼 수 있는, 귀뚜라미가 찌르르 우는 곳. 그 안은 숲이었다. 카나리는 이상하게 그 모닥불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본래의 그라면 플러스 사이즈 침대와 룸서비스를 달라고 투덜댈 법했지만, 그는 대신 자신에게 주어진 게 휴식임을 납득했다.
모닥불 앞에 털썩 앉아 카나리는 그 온기를 느꼈다. 자신의 옆을 두리번거리자 그레이엄 쿠키 한 박스, 마시멜로 한 봉지, 누텔라 한 병 그리고 나무 꼬치가 놓인 게 보였다.
"이게 간식이야?"
"스모어예요. 모르시나요? 캠프파이어를 할때 먹기 좋은 간식이예요. 쿠키 안에 구운 마시멜로를 놓고 초코 잼을 바른 다음, 다시 쿠키를 얹으면 된답니다."
"그렇게 해보지 뭐."
카나리는 마시멜로를 불에 구우려다가 세 개를 태웠다.
"망할!" 패트리샤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카나리는 그게 더 짜증났다. 할 말도 없다 이거야?
아무튼 네 번의 시행착오 끝에 카나리는 스모어를 만들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 카나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의 손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부스러기를 떨어뜨리면서 모닥불의 잔열을 담은 채 말랑거리는, 그 사이로 누텔라가 끈덕하게 재료들을 모아주었다. 거친 질감. 통밀의 거친 식감을 예감했다. 그것은 맛있을 것이다. 카나리는 생각했다. 그리고 스모어를 베어물었다.
순간 자신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잊을 만큼 달았다. 카나리는 안달이 난 사람처럼 스모어를 입 안에 구겨넣고 버적버적 씹었다.
볼 안을 빵빵하게 채우고 우물거리던 카나리는 머지않아 문이 끼익 열리는 소리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뭐야. 또 누가 밥을 먹어? 카나리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려다가 자신이 영안로에 있음을 깨달았다.
침입자. 아니면 적이다! 카나리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들어온 이를 바라보았다.
"…뭐야. 이 놈이 왜 여기 있지?"
카이다 쿠로하와 나나시였다.
"깨달음을 원하세요, 시련을 원하세요?"
패트리샤라고 자신을 소개한 기계음이 물었다. 인공지능은 되물었다.
"깨달음은 뭐고 시련은 뭐지?"
"깨달음은 죽은 자의 부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에요! 그리고 시련은 깨달음을 거부했을 때 찾아오는 패널티죠."
"깨달음이 훨씬 좋은 거 아니야? 많이 알면… 좋은 거잖아."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먈했다.
"여러분들은 동행하고 계시잖아요?"
"응… 그렇지." 패트리샤라는 목소리가 가장 먼저 물은 게 그것이었다. 동행인지 아닌지의 여부. 영안로를 어떻게 뚫을 것인지가 그것에 달려 있다고 전달받았다.
"깨달음은 네 분이 전부 각각 깨달아야 해요. 하지만 시련은 여러분들이 동시에 진행할 수 있어요. 시련이 더 빨리 끝나는 거죠!"
"…나나시는 캐롤의 부활을 종용받고 있는 입장이니. 카이다와 나나시는 깨달음을 선택했겠지? 오래 걸릴테고." 인공지능이 말했다.
"특별히 알려드리는 거예요. 그래야 빨리 따라가시죠!"
믿음이 가지 않았다. 패트리샤는 결국 모노로그의 조종을 받을 터였다. 모노로그는 캐롤 브라이트의 부활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패트리샤가 추적조를 돕는다는 건 어색했다.
"함정 같군. 깨달음을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패트리샤는 모노로그의 끄나풀이다. 우리를 저지하려고 드는 것이다."
"왜 그래요! 조금 더 까다로울지 몰라도 시련은 확실히 빨라요! 전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존재라고요!" 기계의 음성이 항변했다.
"그래. 한 번 속아주자고. 히무로이드! 같은 기계인데 잘 대해줘야지. 패트리샤라고 했나? 이름도 예뻐서 벌써 맘에 들어요. 네!"
"고마워요!" 하기와라 우시오가 아부를 떤다고 하여 패트리샤가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가 시련을 택하면 빠르게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몰라. 우리는 시련을 택한다. 곧바로 카이다를 붙잡는 거야…" 인공지능이 말했다.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시련이 그리 위험하지 않다면 빠른 길을 택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추격하는 입장에서는 분명 나은 판단이었다.
시련은 임하기 마련일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나는 불안을 떨쳐내기로 했다. 무력으로 가장 강한 23T와 총을 두 개나 소지한 마유즈미. 그리고 힘을 쓸 수 있는 남성 두 명이라면 어느 정도의 어려움에는 대응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럼. 시련으로 동행하시겠나요?"
"그래. 우린 시련으로 향한다. 동의할게."
"동의! 이러면 되는 거지?"
"하. 결국 또 시련의 문이잖아… 개 싫다. 너무 싫어. 일단 가지 뭐."
"…동행하겠다."
그렇게 함정 속으로 우린 발을 디뎠다.
"그럼 깨달음 대신에. 시련을 드리겠습니다! 힘내요! 서로를 믿으세요! 꼭이요!"
패트리샤의 말을 마지막으로. 내 주변에 있던 이들이 전부 사라져 버렸다.
나는 온통 어두운 방 안에 홀로 남겨졌지만, 내 몸만큼은 색을 잃지 않고 있었다. 마치 조명이 내 몸을 제외한 다른 어떤 것도 비추지 않는 듯했다.
나는 그 속에서 말했다.
"셋 모두… 어디로 간 거지?"
"다들… 사라져 버린 건가? 시련은 다 같이 진행한다고 패트리샤가 말했을 텐데."
"어?! 뭐야? 다들 어디 갔어? 여보세요? 어어어…? 저기요?"
나는 알게 되었다. 시련. 무언가의 시련. 나 스스로를 향한 도전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시작되었다.
분명 시련이 시작되기 전까지 내 왼쪽에는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오른쪽에는 하기와라 우시오가, 앞에는 인공지능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디로 간 거지. 대답해!"
"하… 어렵게 됐어. 모두 찾으러 가야 하는 건가. 어디에 있는지는 어떻게 알고 가야 할지…"
"으아… 어. 히무로! 23T! 하기와라! 다들 어디야! 어디에 있어!"
"마유즈미! 마유즈미…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는 소리쳤으나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어디에 갔을지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녀가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영영 사라지지는 않았으리라는 판단을 내렸다. 패트리샤는 동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한순간에 동행자들과 떨어지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화해라도 하고 올 걸… 얘기 좀 나누려 데려왔는데. 영영 못 보는 거야…?"
시련에 한꺼번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떠올리는 동안. 어둠 속에서 한 형체가 나타났다.
'기능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감시자가 될 가능성'이라 적혀있는 팻말 같은 것이 아무런 소리 없이 둥실둥실 다가왔다.
"배…인가. 판자가 뒤죽박죽이야… 나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허억…!"
이게 뭐지? 팻말을 서서히 살폈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어떤 종류의 시련인가. 덮쳐오는 위험인가? 아니면 그저 장난일 뿐인가?
"오지 마… 오, 오지 마!"
좀 더 세밀히 살펴보기 위해 왼쪽으로 몸을 틀고 발을 내디뎠을 때. 나는 내 턱이 딱딱하고 부드러운 털로 덮인 물체에 닿는 것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도 그것이 머리카락임을 알 수 있었다. 아까까지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있던 자리에. 마유즈미 나데시코만 한 신장을 가진 투명인간이 서 있었다.
"흐악! 뭐야! 또 뭐야?!"
"마유즈미…? 마유즈미 나데시코인가?"
일말의 안도감을 느끼는 와중 나는 내 몸을 밀어내는 듯한 힘의 작용을 느꼈다. 허나 투명인간이 날 밀어내려 한 결과는 날 밀어냄과 동시에 투명인간 자신의 몸을 밀어낸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그녀가 있었던 자리에 나타난 정체모를 누군가. 나는 직관대로 투명인간을, 마유즈미로 추정되는 그녀를 찾아 팔을 뻗었다. 얼마 도망가지는 못한 듯이 그녀의 옷자락에 내 손이 스쳤다.
"우와악! 저리 가!"
"…이건 그저 날 조롱하는 무언가 인가? 내가 덜덜 떨기라도 할 거라면 너무 늦었어. 난 이미 공포 같은 건 못 느끼니까."
넓은 옷자락이 내 얼굴과 팔. 몸에 마구 닿았다. 그녀는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야 동지들이 전부 사라지고 괴상한 표지판이 나타났는데, 투명인간이 자신에게 다가온다면 그런 반응이 정상적일지도 몰랐다.
그대로 진정할 때까지 방치할 순 없었다. 결국 마유즈미는 총을 가지고 있었다. 눈먼 투명 총알에 맞아 영안로 밖에서 나가게 되거나, 깨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은 결코 원하지 않았다.
마유즈미의 신장은 162cm. 어깨가 어디에 올지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섬유 너머의 어깨뼈가 손안에 들어왔다.
"꺅! 와악!"
어깨를 타고 내려가 손을 잡았다. 적어도 이것으로 발포는 막을 수 있게 되었다. 목적은 달성했으나, 여전히 마유즈미는 팔을 위아래로 마구 휘두르려 애쓰며 손톱으로 내 손을 할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거 놔. 이 자식. 바보야! 으아악! 이거 놓으래도! 놔아아! 으악! 당신은 그만 좀 와요!"
"진정해. 마유즈미… 나니까."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마 그녀라면 비명을 지르고 있지 않을까? 이상한 낱말이 적힌 팻말로 고개를 돌리자. 팻말은 한 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우선은 고려할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까? 이걸 부숴 버릴까?"
손은 잡고 있되, 할 수 있는 게 과연 있는가… 적어도 내 정체를 그녀에게 알릴 방법은 없는가?
있었다. 아주 조금의 절차만 밟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춤을 추는 일과 똑같았다.
내가 춤을 쉽게 추는 것은 단지 춤이 절차의 절차이기 때문이다. 동작이 동작을 잇고, 자연스럽게 다음 동작으로 이어진다. 이미 정해진 족적을 그대로 밟는 것만으로 춤은 완성된다. 완벽하게 몸을 움직일 수 있다면 족했다. 기교를 더하는 것은 개인 재량일 뿐.
내가 할 동작은 다음과 같았다: 나의 두 손을 모아 투명인간의 양손을 그러쥔다. 왼손이 적당하다. 그대로 투명인간을 기둥으로 삼아 돌듯 왼다리를 앞으로 내민다. 오른 다리가 그 뒤를 따른다.
"노… 놓으래도! 내 말 안 들려! 안 들리나 보네?!"
천천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빨라서도 안 된다. 그대로 그녀의 등 뒤까지 나아간다. 기둥과 추는 왈츠와 같다. 투명한 신체임에도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근육을 수축시키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투명한 손이 떨려온다.
그녀의 공포를 즐길 생각은 없었다. 나는 즉시 내 왼손에 붙잡힌 그녀의 두 손을, 내 시야가 닿는 곳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나는 끊임없이 꼼지락거리는 손에 빠르게 움직임을 남겼다.
"어…?"
마유즈미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손에 닿은 것은 단순히 간지럽힘이 아니다. 스쳐 지나가는 말단이 아니다. 나는 글씨를 만들었다.
"얼음(氷)?"
글씨를 다루는 마유즈미라면 알아챌 것이다. 투명인간이 한자를 써 무언가를 전하려 한다는 것을. 알아챌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방(室)…"
"히무로(氷室)…?"
움직임이 멈추었다. 나는 손에 힘을 풀었다. 팻말을 한 번 더 보았다. 가만히 멈추어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의 어디가 시련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였다. 시련 안에서 겪은 일이라곤 서로가 투명해지는 것. 그리고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팻말뿐이었다.
"히… 히무로. 인가 봐… 괴물이면 글씨를 쓸 줄 모를 테니까… 믿을만한 것 같기도 하고…"
마유즈미의 오른손이 꼼지락거렸다. 나는 무언가 뜻이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어둠 속에서 놓쳐버려 다시 허공을 더듬고 싶지는 않았기에, 엄지와 검지로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그녀의 양손을 각각 내 양손으로 분배했다. 오른손은 오른손. 왼손은 왼손.
"내 정체도 알려 줘야지… 아. 이미 알고 있으려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곧 춤을 추는 듯한 자세가 되었다. 그녀의 오른손이 천천히 내 손을 휘감고 손등에 이런 글씨를 써 놓았다. 눈썹먹(黛). 마유즈미라 읽었다. 손가락으로 썼음에도. 투명한 종이조차도 아니라 움직이는 사람의 피부에 썼는데도 그 필흔을 읽는 듯이. 복잡한 한자가 구겨지지 않고 쓰이는 것을 느꼈다.
"얼추… 된 것 같은데. 그래서 이제… 꺅! 귀신이다아아!"
서로 누구인지를 알았으나. 모노로그가 준비한 시련은 겨우 이게 아닐 것이다. 나는 사각에서 무언가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을까 검은 방 안의 모든 요소를 살피려고 애썼다. 그러던 도중 내 상의에 마유즈미의 머리카락이 찰랑여 닿았다. 마유즈미가 머리를 한 차례 빠르게 돌린 것이다. 무언가로 시선을 빠르게 돌린 것인가.
팻말과 같은 방향이었다.
"오… 오지 마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뭘 잘못했다고 꿈에도 나오고 여기에도 나와요! 너무해…!"
"너희 지금 뭐 해?"
예상치 못한 음성이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들려왔다.
인공지능은 사라지기 직전 그것이 서 있던 곳보다 몇 발자국 정도 앞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나 말고 다른 사람 또한 보았을지도 몰랐다. '너희'.
"복수형… 혹시 지금 너에겐 나와 마유즈미가 보인단 말인가?"
"23T! 도와줘! 귀신이 나 잡으러 와!"
"보이고 말고… 네가 마유즈미를 껴안고 있는 것 같은데. 마유즈미. 진정해. 저건 그냥 배일뿐이야."
"보이는 것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절차였지. 그리고 무엇이 배란 말인가?"
"껴안고 있다고?! 헉…! 아. 안 돼! 이건 안 돼!"
"마유즈미… 나데시코에게 꿈틀거리지 말라고 전해 주겠나?"
사태가 일단락되자, 나는 다시금 감시자의 얼굴을 뒤집어썼다. 마유즈미마저 마유즈미 나데시코로 만드는, 다른 사람에게 평등한 벽을 세우는 감시자. 카텟과 어느 정도의 친근감을 겪으며 어느 정도 허물어진 벽을. 다시 세워야 했다.
"마유즈미. 히무로가 꿈틀거리지 말라는데."
"어떻게 안 꿈틀거려! 아, 아직 화해도 안 했는데 살결이 닿는 건 안 돼. 아무튼 안 돼! 그거 아마 불법이야!"
"화해하기 전에는 불법이라서 계속 꿈틀거리겠다는 걸. 그리고 내가 말하는 건 저거야. 배잖아? 판자가 덕지덕지 섞여있는 배. 테세우스의 배."
"저건 배가 아니야! 귀신이잖아! 어딜 봐도 귀신이잖아!"
인공지능은 그리 말했다. 팻말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유즈미. 귀신이라니? 그저 배일뿐이야. 노바디일지라도 저걸 무서워하지는 않았을 거야. 노바디가 무서워한 것은 그 형체가 아니라 관념이었으니까."
"긴 머리의 귀신인데?!"
"내가 보기엔 배가 아니라 팻말이다만. 그저 글씨가 적힌 팻말이다."
나는 그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인공지능.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리고 나는 서로 다른 형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공지능은 테세우스의 배, 나는 기능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감시자가 될 가능성이라 적힌 팻말.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귀신인가.
"나는 마유즈미 나데시코를 인식할 수 없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또한 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 둘 모두 너를 인식하고 있는 거지? 하기와라 우시오는 어디에 있고?"
"글쎄. 이걸 부술까 말까 하고 계속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문득 너희 둘의 모습이 보이던데? 이건… 내가 시련을 끝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시련을 마친 이는 시련에 들고 있는 이를 도울 수 있다는 건가. 인공지능은 테세우스의 배를 계속 바라본 끝에 같은 공간 속 인식의 분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팻말이 무섭지 않았다. 이 또한 인공지능이 배를 두고 했던 말과 똑같은 이치였다. 나는 그 관념이 두려울 뿐. 그 단어 자체는 두렵지 않았다. 시련은 굉장한 맹점을 가지고 있었다. 두려워하는 물체가 없다면 쉽게 이겨낼 수 있는 것이었다.
"눈을 떼지 않고 두려움의 대상을 보는 것이 조건인 건가."
"가능성은 충분할 것 같아. 마유즈미. 무서워하지 마. 저건 너한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래도 너무 무서워. 머리카락이. 머리카락이… 너무 길잖아…"
마유즈미 나데시코가 자력으로 시련을 돌파하는 것은 어려울 터였다. 그야 시련은 그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주는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그 형체가 다가오는 와중에 눈을 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운이 좋았기에 겨우 팻말로 끝날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것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애초에 하기와라 우시오는 어디에 간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그는 우리와 동행하고 있지 않은 것인가? 동행하겠다고 패트리샤에게 말했기에 시련을 함께하고 있는 게 아니었나.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는 와중 기계적으로 팻말을 바라보던 나는. 마유즈미 나데시코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또한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고, 고개를 뒤로 돌려 나를 보았다.
"와. 히무로!……… 이. 이건 불법이야!"
끌어안고 있지 않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범죄자가 되지 않으려면 화해를 해야겠지.
마유즈미 나데시코는 화들짝 놀라 나에게서 벗어났고, 나는 인공지능에게서 나와 마유즈미 나데시코를 한심하게 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만담은 그만하고. 하기와라는 어디에 있을까?"
나 또한 그것이 궁금했다. 어디에도 그의 흔적은 없었다. 우리들 중 가장 먼저 시련을 마친 인공지능마저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고, 설마 그가 시련을 마친 것 또한 아니었다. 우리와 동행하고 있는 이상 먼저 영안로에서 앞서 나갈 수도 없었을 테니.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였다…
"…씨발. 네가 여기서 왜 나와."
"우시오… 꺼억. 하. 아버지가 왔는데도 안 반긴다 이거냐? 끄윽…"
놈은 좀비처럼 휘청거렸다.
"하. 하기와라 우시오. 아웃!"
나는 그 즉시 영안로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낚싯대에 딸려가는 생선이 된 기분이었다. 내 몸을 보이지 않고 극도로 얇지만 무엇보다 튼튼한 줄이 휙 당겨 내동댕이 치듯이. 나는 7층의 차가운 돌바닥에 털썩 주저앉게 되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기보다 그냥 그 자리에 풀썩 누워버렸다. 딱딱해서 전혀 편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니까 더 기분 나쁜데. 개새끼."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영안로에 다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캐롤 부활? 나나시 납치? 알아서 막으라 해라. 히무로이드고 마유즈미고 친구고 다 필요 없었다. 잠깐 들어왔다 나왔으니 나는 할 일을 다했던 것이다.
시련에 왜 내 애비새끼가 들어있는 거냐고.
아. 내 시련이다 이거지? 내가 싫어하는 거랑 맞서라고? 그게 이번 시련 모토냐? 오늘의 특선 메뉴가 이거라고? 여러분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담당 악몽들을 바라보세요!
"좆까. 안 해."
다시는 그놈 얼굴 안 봐.
"다 잊어버리련다. 친구? 나한테는 다른 친구가 있어요. 아. 다 죽었지… 그럼 이바라밖에 안 남았을지도 모르겠네? 그러고 보니 다들 어디로 간 거야. 영안로에 들어간지 몇 도 안 됐는데… 하하. 살아서 돌아왔는데 굉장히 쓸쓸하네."
나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바지를 툭툭 털고 나니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몇 분도 채 안 된 사이에 다들 어디에 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건 찾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즈음이었다.
"우시오."
씨발.
뭐야.
나는 시련의 문. 아니 영안로에 눈을 고정해두고 몇 발자국을 뒤로 물러났다. 분명 영안로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환청이다 환청! 그래 안 듣는 게 이상하지. 살인 게임인데 환청 듣는 사람 한 명 정도는 있어야 살인 게임 느낌이 나지. 또 정신 문제는 내 유전자에 박혀있는 거라서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바로 윗대가리들 문제라 집안 내력이라 하긴 좀 그렇지만 아무튼 그치들한테서 물려받았단 말이지.
차라리 미쳐가고 있었다면 안심할 수 있었을 거다. 나한테 어딘가 문제가 있는 건 알고 있으니까.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을 만치 근본적인 것이었고. 이 모양으로 고등학생 나이가 된 이상 내가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을 수도 없다. 그럼 이렇게 살아야지! 그렇게 긍정하면 되는 것이다. 철학자 중에선 말년에 자기 똥 먹은 사람도 있다던데. 그런 식으로 미쳐도 긍정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내가 미친 게 아니었다. 나는 똑똑히 보고 말았단 말이다.
금색 문이 안쪽에서부터 열렸다. 문은 열렸는데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문 안은 어둠을 굳혀버린 것처럼 그저 검정만이 있었다. 문이 아니라 어두운 것을 담은 용기가 옆으로 쏟아졌는데. 그 어두운 것이라는 게 검은 콘크리트를 굳힌 것 혹은 검은콩을 재료로 젤라틴을 너무 넣은 젤리라도 되는 듯. 조금도 쏟아져 나오지 않은 채로 뚜껑만 열린 꼴 같았다.
그 안에서 손가락이 문틀을 잡았다. 서서히 손. 팔. 몸과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곧 고체화된 어둠 속에서 놈의 전신이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놈은 항상 헤진 러닝셔츠와 청바지를 입는데, 이건 빈티지 패션이 아니라 그냥 빈 티를 내는 거다. 잔고도 비었고 머리도 비었다는 티. 셔츠에는 이상한 소스나 땟국과 기름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헤진 청바지를 뚫고 술병 조각 같은 것에 다리를 찔려 덜 아문 상처가 있지만 그놈은 개의치 않았다. 입 안에서는 무언가가 썩는 것 같은 냄새가 나고. 얼굴은 퀭하고. 눈은 곧 흘러내릴 것처럼 초점이 없으며 흔들렸다. 머리는 어느 순간부터 밀었는데, 그 때문에 골통을 보면 연두색 잔디가 머리에 돋아난 것처럼 보였다. 몸은 왜소해 보였지만 여전히 퇴화하지 않은 근육이 남아 있었다. 작은 폭군이 되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알코올 중독이 꽤 매력적인 것처럼 보이겠지? 힙 플라스크에 잭 다니엘을 담아서 홀짝홀짝 마시면서, 두통을 느끼고, 트림을 하고, 입가를 소매로 슬쩍 닦고, 다른 사람에게 소외받는 것마저 낭만적이겠지? 안됐네요. 그거 좋을 게 없어요.
농담 하나 하겠다. 알코올 중독자에게 아들이 물었습니다. 아빠. 술 얼마나 많이 마신 거예요? 아버지는 대답합니다. 그야 있는 대로 다 마셨지. 늘 그랬다. 늘 되는대로 마셔대지. 집에 있는 걸 다 마셔버리지. 고혈. 비상금. 인내심. 마지막 믿음. 내 눈물마저도. 덕분에 그 모든 게 메말라버렸다.
늘 그렇듯 비틀비틀 걸어오는 그 형체는… 좀비 같았다. 아무리 봐도 좀비였다. 저딴 게 사람 일리가 없지 않은가. 저렇게 사는 건 사람 소리를 들을 자격이 없었다. 요즘은 좀비마저 뛰는 추세인데. 벽을 기어오를 만큼 성실하게 사는 게 좀비인데 참 고전적이었다.
"이 씨발… 개씹썅놈의 새끼가. 아버지가 왔는데 마중을 안 와…"
"모노로그… 이 개씹썅장작불쏘시개새끼… 장난하냐? 영안로에서 나왔잖아. 나왔잖아아아악!"
마유즈미의 억지에 어울려주는 게 아니었다. 그냥 내버릴걸. 이바라를 보낼 바에 내가 오는 게 나았겠지만, 나는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악몽에나 나오는. 말 그대로 악몽에나 나오는 새끼가 내 앞에 나타나버렸다.
영안로를 열고 나오는 게 어디에 있어. 무슨 시련이 영안로 밖으로까지 이어져! 이건 반칙이잖아. 문 밖으로 나오면 안전했잖아. 시련의 문에선 그랬다고. 왜 이렇게 된 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 들어가지도 않았을 텐데!
"너마저 날 무시한다 이거냐…? 꺼억. 끄윽."
멀리서 내 꼴을 보면 개 같은 상황에 떨어져 웃겨 보이겠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내겐 너무나도 심각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가족관계 썰을 스테이지에서 풀었다가 분위기가 차가워지다 못해 무거워진 일이 있었지. 나는 모든 걸 농담으로 삼아 그 무게를 덜려 드는 경향이 있지만, 농담거리로 삼기 어려운 것은 분명 있었다. 나이토의 죽음이라던가.
"존나 씹… 일단 튀어야겠다. 그것 말곤 답대가리가 안 나와. 그래도 저놈 술에 취하면 느려지니까. 다행이구만."
야가미라도 불러야 쓰겠다. 일단 자초지종 설명하고 저놈 잡아달라 하면 세 겹으로 접어놔 주겠지? 캬. 이게 쾌걸 근육맨이지 딴 게 있나! 그래. 정말 다행인 일들이었다! 이게 악몽이면 애비가 아니라 애미도 같이 왔을 텐데 다행히도 애비만 있지 않은가?
"우시오오…? 어딨니이이…?"
아이고야. 애미 목소리다.
내 인생 진짜 좆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내 부모님이라는 것들을 버려두고,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내 코 정도 위치에 오는 무언가에 빡 부딪치고 말았다. 투명한 벽에 부딪혔다고 생각했다.
이건 또 뭐야. 또 시련인가? 투명 좀비인가? 하는 생각을 차치하고 허공을 뒤적였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 쪽을 향해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야가미를 찾았다.
그동안 나는 꽤 소리를 지른다던가. 사람 이름을 부른다는 등 여러 일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구와 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좀비는 나를 계속해서 쫓아왔다. 멀어질 만큼 멀어져도 그것들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똑같은 속도로 걸어왔지만 결코 멈추지는 않았던 것이다. 절대 우리를 떨쳐내고 갈 수는 없다는 듯이.
"돈… 돈 가져와. 제 애미를 닮아선…"
"어디 가니… 우리 가족을 위해선 이래야만 한대도…"
다 어디 간 거야. 나는 헐떡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몇 번 소리치기까지 했다. 이바라! 토키와! 칸나즈키! 야가미. 어디에 있어. 어딨냐고! 무언가가 날 가로막기도 하고 붙잡기도 하는 걸 느꼈지만, 그게 투명한 사람이라고 느끼기엔 내가 너무 예민했고 신경질적이었다.
묻어왔던 지난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는 단지 이 부모라는 이름도 아까운 자들을 잊으려 한 게 아니다. 내 안에서 죽인 것이다. 애초에 이들은 죽었지만, 내 마음의 어딘가에서 이들은 병사나 자살이 아니라 콘크리트에 묻혔다. 어린 나는 그런 식으로 공상을 한 바 있었다. 한 폐건물이 있다. 나는 콘크리트의 전문가이다. 포크레인을 가져와 폐건물의 벽 한 켠을 허물면 철근을 비롯한 내부 구조가 드러난다. 그 안에 부모님을 넣고 콘크리트를 다시 바른다. 그렇게 이들은 죽었다. 그게 어떤 식이냐고? 내가 언젠가 트라우마를 되새길지라도, 이들은 내게 '살아있던' 사람으로도 기억되지 못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들은 죽어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여겼다. 색연필을 사라고 웬일로 애비가 돈을 던져주던가, 애미가 맛있는 걸 사 준 기억에서 그들은 살아있지 않다. 죽어 있다. 단 한 번도 살아있지 않다. 그렇기에 지난날을 생각해도 별반 괴롭지 않고 마음이 쓰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날 괴롭게 만들기 전부터 이미 죽어있기 때문이다. From the very start 그들은 죽어 있는 것이다. 이해가 가는가?
그런데 이 죽은 자들이 되살아났다. 당연히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의지할 사람이 어디에도 없었다. 방에 들어가면 안전할 거라던가, 흉기를 가져와 맞서 싸워야 한다던가 하는 기본적인 생각조차 듣지 않았다. 나는 성인 앞에서 무력한 어린애로 돌아가. 내 삶의 가장 어두운 때로 곤두박질쳤다. 누구도 날 돕지 못했다. 나는 꽁무니에 불이 붙은 망아지처럼, 불바다 속을 걸어가는 걸인처럼 달렸다.
"저리 가! 저리 가라고… 당신들은 부모도 아니야. 하하! 아줌마! 그 돌칼 오랜만에 보네! 왜. 또 이상한 의식을 치르려고 그러나? 또 내 피가 필요해?"
나는 탑을 정신없이 쏘다녔다. 몇 층을 오르락내리락 한 끝에 나는 영안로로 돌아왔다. 어떻게 잘 유인하면 영안로에 다시 집어넣을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그야 도망가기 바쁜데 집어넣긴 어떻게 집어넣는단 말인가.
"하하하! 다들 어디 간 거야. 진짜 다 죽었어?! 어디에도 없잖아! 어. 어디에도 없어! 흔적조차 남지 않았네?! 하하하! 이거 어쩐담! 꿈이겠지. 꿈이야. 꿈! 하하하… 어아하하하하!"
나는 유쾌하였다.
그것 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나는 유쾌하다. 익살의 좋은 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광기의 연못에 발을 담근 채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너무 오래 들여다보면 푹푹 빠지고 헤어 나올 수 없는 연못으로 가되, 그걸 써서 고통은 잊으며 몸까지 잠기지 않은 채로 있을 수 있다. 나는 익살의 편리함을 알게 된 이래로 줄곧 잘 살아왔다.
그러나 이따금씩은 연못 안에서 물귀신이 나와 내 머리를 잡아끌었다. 그들은 연못에 빠져 죽었고 나도 그러길 바란다. 그러니 내력이다. 안(內)으로 날 끌어당기는 힘(力)이다.
애미와 애미가 내게 나가온다. 애미는 돌칼을 들고 있다. 동물의 뼈로 이루어진 목걸이를 하고 있다. 미친 아빠. 미친 엄마. 그러니 아들도 미치지 않고 배기나. 어쩔 도리가 없게 되었다. 나는 천천히 다가오는 그들을 보며 웃었다. 우와. 가족사진이다. 패밀리 리유니언이다. 그들은 점점 더 가까워져 왔다… 누군가가 내 몸을 흔든다… 내 뺨을 때리기도 하고 얼굴을 문지르기도 한다. 누구냐. 애초에 진짜 일어나는 일은 맞냐. 이제 모르겠다. 나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정신 안 놓고 버텼으니 누가 칭찬 좀 해 주라. 응…?
"…영안로 속으로 들어와라. 하기와라 우시오."
그를 가만히 지켜본 끝에 상황을 알 수 있었다.
"하기와라! 내가 안 보여? 정신 좀 차리라고! 왜 그러는 거야? 나잖아. 이바라 쿠리스!"
하기와라 우시오는 이바라 쿠리스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오직 내 말만을 인식할 수 있었다. 시련을 끝마치지 못하면 다른 이들과 단절되는 것인가.
몸까지 흔들고 있는데, 하기와라 우시오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 정도의 두뇌라면 자신이 다른 사람을 인식하지 못할 뿐 다른 이들이 존재하고, 심지어는 상호작용마저 할 수 있음을 알아챌 법했으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공포가 그의 눈을 가려버렸다.
"히… 히무로이드? 망할. 하필 너냐. 내 말 잘 들어. 보다시피 우리 말고 탑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사라졌어. 내가 영안로에서 돌아왔기에 다 죽은 건가? 하하하! 나는 죽음이다! 내가 죽음 그 자체였어! 나는 존나 신이다! 하하… 내가 와서 다 죽었나? 그게 아니면 다 어디에 있지? 내 몸이 마구 떨리잖아… 이것마저도 환각인가? 어어? 어디부터가 진짜냐? 애초에 너도 진짜냐? 말해 봐. 이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좆됐다고. 이바라가 없어!"
"공포의 근원을 똑바로 바라보아라. 그것 말고 네게 주어진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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