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시: …….
모리 레이코: 왜 그러지? 내게 할 말이 있지 않나?
나나시: 이건 대화가 아니야. 너는 내 말을 전부 회피하면서 자신이 할 말을 늘어놓고만 있어.
모리 레이코: 너는 대화를 하려 들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군.
모리 레이코: 대화는 상호적인 개념이다. 그렇다면 대화의 거부 또한 상호적일 수 있지.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나는 10분 동안 내가 하고 싶은 말만을 할 수 있다.
모리 레이코: 그렇지만 만약 네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아주 잠시나마 내 대화에 응하는 것 또한 방법이겠지?
나나시: …네 목적은 대체 뭐야?
모리 레이코: 내 목적은 항상 똑같다. 계몽의 등에가 되는 것. 다음은 네가 대답할 차례다. 이름 없는 남자.
모리 레이코: 내가 죽고 난 뒤에. 네 목적은 무엇이 되지?
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우리는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어요. 아쉬움에 쓴 맛을 곱씹을 뿐…"
나나시: 범인은 모리 레이코야.
내 말을 기점으로 정적이 퍼져나갔다.
하기와라는 입가를 씰룩거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쳤다. 아마 내가 농담이라는 듯이 입고리를 살짝 올리기만 했어도 하기와라는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당연히 그랬겠지. 하기와라는 모든 것을 농담으로 삼으니까.
아마 하기와라 말고도 대부분의 이들이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한 것은 나의 말이 농담이기를 바란 것일지도 몰랐다. 그야 모리니까. 왼손가락이 두 개뿐이고 오른쪽 발목은 잘린 모리니까. 상식적으로 범행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것은 모리 본인도 경계한 바가 있는 언더도그마였다. 약자가 선량할 것이라는 생각. 부상을 입은 모리는 사람을 죽일 수 없으리라는 생각. 그게 가장 위험한 함정이었다.
카나리 케이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야가미 토가: …과정은 그렇다고 쳐도 나이토 씨를 죽이는 일 자체는 힘들 것 같습니다만.
마유즈미 나데시코: 몸도 못 가누는 사람이 어떻게 나이토를 죽이겠어!
나나시: 항생제도 못 받았으니까 더욱 그렇겠지?
카나리 케이토: 야. 맞아. 항생제는 격추됐어. 후루미나미가 격추했다고. 그런데 어떻게…
하기와라 우시오: 항생제… 먹긴 했어.
하기와라가 낮게 말했다.
23T5U130: 뭐라고?
하기와라 우시오: 모리랑 나이토 둘 다 항생제를 조금이나마 먹었다고. 한 캡슐만큼은 아니었지만 다 모으면 3/4 캡슐 정도는 될 양이었어.
후루미나미 나몬: 하지만 그것만으로 활동할 수는 없을 텐데? 항생제 종류 뭔지 알아?
나나시: 나와 캐롤 씨가 해변으로 보낸 건 평범한 케플렉스였어. 그렇지만 크레딧 상점에서의 항생제는 무슨 종류인지 몰라. 살인이 일어나자마자 모노로그가 모리의 감염을 낫게 한 걸 생각하면, 나이토와 모리가 먹은 항생제가 그만큼 특별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몰라.
모리 레이코: 내가 굳이 입을 열 필요성을 못 느끼겠군. 내게서 답을 찾고 싶다면 먼저 질문을 끝까지 갈고닦아라.
카나리 케이토: 아니 얘 무슨 태도가 이래…? 네가 상전이야? 정신 차려! 너 변호 안 하면 처형당해!
모리 레이코: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내 답은 같다. 난 너희들이 도달한 답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후루미나미 나몬: 흠. 검정의 발언으로 보기도 애매하고, 하양의 발언으로 보기도 애매한데…?
아마 이미 답을 알고 있을 텐데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이바라 쿠리스: 아무리 모리가 움직일 수 있다고 해도, 몸을 움직이기 어렵다는 점은 똑같잖아. 어떻게 모리가 그 넓은 곳을 종횡무진하고 다닐 수 있었겠어?
야가미 토가: 밀물과 썰물의 작용이 있지 않습니까? 검정이 움직여야 하는 반경은 저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좁았습니다.
야가미 토가: 핏자국이 남은 곳. 모닥불 주위로 기껏해야 몇 미터죠.
하기와라 우시오: 그럼. 그 몇 미터를 기어 다니나?
야가미 토가: 네. 기어 다니면 되는 것 아닙니까?
하기와라는 자신의 머리에 검지를 겨누고 손목을 빙글빙글 돌렸다.
하기와라 우시오: 돌으셨어요? 기어 다니면서 바닷가에 있던 나이토의 몸을 끌어올 수 있으면 모리는 철학자가 아니라 그냥 기인이야. 그거로 초고교급 먹고도 남았을 걸.
하기와라 우시오: 애초에 나이토가 다리만 먹히도록 조절할 수 있어? 나나 마유즈미라면 나이토 위치 적당히 옮기면서 가재 괴물한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쳐. 위험하겠지만 모닥불 근처니까 가재 괴물도 조금 소극적이겠지? 그런데 모리는 그게 불가능해! 근처에서 자칫하다간 가재 괴물한테 당할 거라고. 나이토를 못 옮길 힘이 없는 건 둘째치고 말이야!
히무로 시라베: 꼭 힘을 쓸 필요는 없어. 적은 힘일지라도 충분히 나이토의 시체를 바다에서부터 끌어올 수 있지. 가재 괴물의 위협에 닿지도 않으면서 말이야.
후루미나미 나몬: 정확한 수단을 말씀해주시죠. 히무로 씨! 80kg에 달하는 나이토 씨의 몸을 어떻게 옮길 수 있었을까요!
야가미 토가: 정확히는 50kg 전후일 겁니다. 하체가 사라졌으니까요.
이바라 쿠리스: 그래도 모리가 옮기기 어려우리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어. 50kg? 10kg도 못 들 텐데!
아니. 가능하고도 남았다.
나나시: 밧줄을 쓰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방아쇠를 당기자 밧줄이라는 글자가 허공에 떠올랐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밧줄? 나이토를 묶어서 끌어당겼단 말이야?
하기와라 우시오: 그거 좋은 방법이긴 하네. 그럼 가재 괴물한테선 멀어질 테니까. 그래도 먹히는 부위 조절이 어렵다는 거랑 끌어당기기가 힘들다는 점은 사라지지 않네요!
나나시: 그거 두 개뿐이지? 나이토의 다리만 먹히게 만들 수 없다, 그리고 모리의 힘으로는 시체를 끌어당기기 어렵다.
나나시: 모리의 힘은 그다지 강하지 않아. 그건 사실이야. 감염이 몸에 조금이라도 퍼져 있으면 더 그랬을 테고 모리에겐 목발도 없었지…
나나시: 그렇지만 여전히 가능해. 밧줄을 끌어당기는 게 아니라, 밧줄을 써서 시체를 끌어오는 거야. 말로 설명하기보다 보여주는 게 빠를 것 같은데. 밧줄 가지고 있는 사람?
모리 레이코: 내 걸 써라.
모리는 주섬주섬 자신의 가방에서 밧줄을 꺼냈다. 난 히무로의 단검을 써 건네받은 밧줄을 4m보다 조금 길게 두 줄 끊고, 끊은 밧줄들을 각각 내 왼팔과 오른팔에 매듭을 지어 묶었다.
나나시: 나이토의 몸무게가 82kg, 몸의 절반을 잘랐으니 어림잡아 50kg 전후라고 가정하자. 그 정도 무게는… 이바라. 잠시 바닥에 누워줄 수 있어?
이바라 쿠리스: 어어… 내가 실험대야?
나나시: 꼭 너일 필요는 없으니까 하기 싫으면 지금 말해 줘.
이바라 쿠리스: 아니야. 까짓 거 괜찮아. 내가 바로 옆에 있으니까 해 줄게. 바닥에 눕는 거지?
이바라는 바닥에 천천히 주저앉은 다음 몸을 뒤로 젖혀 모래사장 위에 몸을 뉘었다.
나나시: 이제 네 팔과 몸 사이에 내 밧줄을 묶을 거야.
이바라 쿠리스: 잠깐. 나나시. 반대 아니야?
나는 왼팔의 밧줄을 이바라의 오른팔 쪽에 묶었고, 오른팔의 밧줄을 이바라의 왼팔 쪽에 묶었다.
이바라 쿠리스: 윽. 뭔가 겨드랑이에 거친 밧줄 닿으니까 느낌이 별론데…
하기와라 우시오: 아! 더러워! 밧줄에 냄새 배는 거 아니야?
이바라 쿠리스: 내 겨드랑이에서는 냄새 같은 거 안 나거든! 맡아볼래?!
시체가 발견된 이후로 평소보다 기세가 꺾여 있던 이바라는 참지 못하고 하기와라에게 화를 냈다. 사실 이바라 본인에게 있어서는 좋은 일이었다. 다른 사람의 죽음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으니.
하기와라 우시오: 우웩. 토 나와! 동네 사람들! 얘 이상한 페티시 있나 봐요!
나나시: 둘 다 진정해. 그리고 묶은 방향은 이게 맞아. 뒤로 돌 거거든…
이바라 쿠리스: 무슨 구경 났다고 동네 사람들을… 아. 미안. 뒤로 돈다니?
나나시: 이런 식으로.
내 몸을 반 바퀴 돌리자, 교차되어있던 내 왼팔과 오른팔이 서로 떨어졌다. 내 왼팔과 이바라의 오른팔 쪽, 내 오른팔과 이바라의 왼팔 쪽이 서로 묶인 채 나는 이바라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바라 쿠리스: 그래서 이다음은 뭔데?
나나시: 힘으로 끄는 게 아니라, 내 움직임에 네가 딸려오게 되는 거지.
나는 상체를 구부렸다. 내 완력은 부족했지만, 팔 하나의 힘을 쓰는 것보다는 바닥에 단단히 앉은 채로 몸의 무게를 추처럼 사용하며 상체의 모든 힘을 쓴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나는 자동차에 밧줄을 묶은 뒤 자신의 뒤에서 끌어오는 사람처럼. 밧줄이 내 어깨를 스치게 두었다.
내 몸이 추가 돼 이바라의 몸을 서서히 끌어당겼다. 이바라는 모래사장으로 질질 끌려오며 눈을 크게 떴다.
이바라 쿠리스: 오오옹?!
이바라를 끌어온다기보단 이바라가 묶여 있는 밧줄을 당기는 일에 가까웠다. 밧줄이 느슨해지면 이바라도 움직이는 것을 멈추게 되지만, 딸려와서 넉넉해진 밧줄을 그대로 팔에 감아 다시 움직이기를 반복한다면 밧줄에 장력을 유지시킬 수 있었다. 노를 젓는 것 같은 동작을 몇 번 반복하자 이바라는 곧 내 바로 뒤에 누워 있게 되었고. 내 팔에는 어느새 굵어진 밧줄 묶음이 칭칭 감겼다.
나는 내 팔에 묶인 밧줄을 히무로의 단검으로 자르고, 이바라에게 묶인 밧줄 또한 잘라서 풀어주었다.
이바라는 몸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어내며 다시 일어섰다.
이바라 쿠리스: 솔직히 이게 정말 될 줄은 몰랐는데… 되네.
나나시: 모리가 했다면 내가 한 것만큼 쉽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세 시간 남짓이 주어졌다면 그녀 또한 가능했을 거야.
하기와라 우시오: 솔직히 개 억지 부렸다고 말하려 했는데. 살인에 개 억지가 어디 있나 싶어.
카나리 케이토: 우리 눈을 속인 거 아니야? 어떻게 한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간단해. 도르래의 원리야.
후루미나미의 말을 듣자 재판장 곳곳으로 이해의 탄식이 퍼져나갔다.
이바라 쿠리스: 아. 도르래의 원리…? 그렇게 들으니까 이해가 가네.
하기와라 우시오: 킹갓래의 원리는 어쩔 수 없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우물물을 길어 올리는 거랑 비슷하다… 이거지?
후루미나미 나몬: 적당히 도르래의 원리라고 둘러대면 대부분 납득하는 게 재밌다니까.
카나리 케이토: …도르래의 원리가 뭔데.
카나리는 벙찐 채로 물었다.
카나리 케이토: 난 그게 뭔지 몰라. 도르래의 원리가 뭐냐니까?
하기와라 우시오: 아이~ 싯팔. 내가 살다 살다 도르래도 모르는 놈을 살인자로 몰았네…
하기와라가 자신의 미간을 손으로 짚고 눈을 질끈 감았다.
카나리 케이토: 흥. 그게 상식이라도 돼?
하기와라 우시오: 그럼 상식이지! 도르래를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카이다 쿠로하: 하. 멍청한 새끼…
카이다의 경멸을 듣자 카나리의 회중시계가 더욱 빨리 똑딱였다.
카나리 케이토: 재판이나 계속 진행해. 아무튼! 방금 이거로 모리 저거도 범행이 가능하다는 게 증명된 거지?
히무로 시라베: 모리도 바다에서 모닥불까지 시체를 옮겨올 수 있었다는 게 증명된 거지. 어떻게 나이토의 다리만을 먹히게 만든 건지는 다음의 문제고.
히무로의 말대로였다. 그러나 그것 또한 해명될 수 있었다.
나는 생각을 집중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팔과 침낭 안의 모래라는 글자가 허공에 떠올랐다.
나나시: …이것만 짚으면 이제 추리는 거의 다 끝난 것과 마찬가지야.
모리 레이코: 정말인가?
고개를 돌려 모리를 돌아보았으나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주 잠깐 그녀가 검정이 아니며 내가 함정에 빠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내 뇌리 속에는 그녀의 기만을 향한 분노밖에 남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나를 시험하고 있다는 듯이 모리는 조금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순간의 죄책감이나 동요조차 없었다. 자신이 한 일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표정을 보며 나는 가증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나나시: 나이토의 자켓 소매 안에 모래가 들어있었어. 침낭도 마찬가지고. 팔에 모래가 묻어있는 게 다가 아니라 옷소매 안까지 모래가 들어간 걸 보면, 침낭 안에 모래가 들어간 이유도 알 수 있어.
후루미나미 나몬: 달링. 네가 말해 봐!
나는 물끄러미 히무로를 바라보았다. 나 말고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히무로 시라베: …….
히무로는 말없이 후루미나미에게 짜증 섞인 눈빛을 보냈다.
후루미나미 나몬: …이잉. 안 걸려드네. 그럼 내가 말할게. 소매 안에 모래가 들어가 있는 채로 나이토의 시체가 침낭 안으로 들어간 거야. 옷에 묻은 모래를 미처 털어내지 못한 탓도 있겠지.
야가미 토가: 애초에 나나시 씨의 재현에 따르면 나이토 씨는 몸이 모래사장에 질질 끌렸죠. 침낭 안의 모래는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다만 소매 안까지 모래가 들어찬 점은 자연스럽지 않죠.
야가미 토가: 이건 제 추측입니다만… 나이토 씨의 팔은 모래 속에 묻혀있었던 게 아닐까요?
히무로 시라베: 그 말대로야. 왜 질량을 줄이기 위해 다리를 가재 괴물에게 먹였으면서 팔은 먹히지 않게끔 한지는 모르지만, 팔이 먹히지 않았다면 답은 그거 하나뿐이야. 먹지 못하게끔 숨겨놓은 거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팔을 묻어 두는 게 다야? 그럼 얼굴은?
나나시: 얼굴도 그렇고, 모래만 묻어 둔 팔을 가재 괴물에게서 지키는 것도 그렇고… 모닥불 주위의 땔감을 쓰면 돼. 기름이 없으니 횃불처럼 활활 타진 못하더라도 불씨만으로 가재 괴물들을 위협할 수 있을 테니까.
하기와라 우시오: 대충 이해는 가는데… 나이토를 침낭 안에 넣는 건 어떻게 해? 아무리 모리가 밧줄 꼼수를 써도 침낭 안에 넣는 건 힘을 써야 하잖아.
이바라 쿠리스: 어. 맞네! 침낭 안에 나이토를 넣으려면 그만큼 힘이 세야 해. 이 문제나 풀아 봐!
나나시: 나이토의 몸 밑에 장작이나 밧줄을 깔고 침낭을 서서히 입히듯이 하면 돼. 밑에 깔아놓은 게 침낭 안에 들어가지 않게만 신경을 쓰면 모리도 충분히 가능해. 오래 걸려도 30분 정도겠지…
토키와 아유키: 그런 수법을 쓴다면 모리의 옷에도 피가 묻을 텐데?
나나시: 팔을 걷어붙이기라도 했겠지. 가지고 있는 식수로 핏물을 빼기라도 했던가. 이 시점까지 와서는 상관없어.
후루미나미 나몬: 그러니 결과적으로는 작은 힘으로도 나이토의 몸을 끌고 올 수 있으며, 체중을 줄이면서도 가재 괴물에게 뜯어 먹혔다는 사실이 명백해지지 않도록 다리만을 먹히게 조절할 수 있고, 반토막난 시체도 침낭 안에 넣어 놓았다는 거야!
나는 모리를 충분히 몰아붙였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반론을 하지 않았다. 그저 사실을 수용하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갈 뿐이었다.
모리 레이코: 그렇군. 흉기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 하지?
하기와라 우시오: 저기. 아가씨. 지금 우리 계속 네가 검정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만 했거든. 이제 반론 시간 같은데?
모리 레이코: 나는 반론이 아니라 흉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대체 무슨… 뭐 어쩌라고. 반론의 여지가 없으니 처형당하겠다고?
모리 레이코: 흉기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말했다. 날 검정으로 지목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흉기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네 목숨을 불확실함에 맡기고 싶다면 그건 네 자유의지다. 그러나 내 행동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카이다 쿠로하: 뭐야. 지금? 뭘 하자는 거냐?
마유즈미 나데시코: 뭐라고 반박이라도 해 줘. 모리!
모리는 마유즈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모리 레이코: 이름 없는 남자. 다음은 흉기다. 다섯 번째 단검은 누가 가지고 있었을까? 누가 보낸 걸까?
나는 이게 살인자의 반응인지 궁금해졌다.
양심의 가책도, 삶을 향한 의지도, 처형 당하리라는 공포조차 없었다.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생각이지?
나는 모리의 가면을 벗기기로 했다. 그녀의 범죄를 입증하는 것이 내 목표가 되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의연할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캐롤 씨조차도 무너졌다. 모리가 버틸 수 있을리 없어. 그녀는 곧 자신이 저지른 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죽고 싶지 않다고 울게 되겠지. 나는 조금의 의심 없이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악취미적인 처형 속에서 죽어갈 때. 그 뒤에야 그녀는 비로소 미안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미안해 마땅하다.
나나시: 마지막 단검은 아마 캐롤 씨가 나이토에게 보냈을 거야.
토키와 아유키: …캐롤 씨가?
토키와는 내 생각대로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나나시: 왜 마지막 단검을 준 사람이 나타나지 않느냐는 그것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어. 캐롤 씨가 나이토에게 단검을 후원했고, 나이토가 마지막 단검의 소유자였던 거지. 두 사람이 이미 죽었으니 단검의 후원자와 소유자가 나타나지 않을 수밖에.
칸나즈키 시노부: 그럼 이해가 되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캐롤이 보냈다면 우리가 알 도리는 없지!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런데 어떻게… 나이토 본인이 자기 단검에 찔려 죽은 거야? 말이 안 돼…
카나리 케이토: 맞아. 이딴 개소리가 어디 있어? 나 같으면 품 속에 칼을 챙겨뒀을 거야. 모리가 칼을 가지게는 안 뒀을 거라고!
후루미나미 나몬: 잠깐… 할 말이 없다는 모리. 유력 용의자로 지목됐는데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음. 흉기의 소유자는 피해자 본인. 아니 설마 이건?!
후루미나미는 또 가증스러운,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후루미나미 나몬: 자살이라고?! 오 세상에. 나 지금 흥분돼!
히무로 시라베: 이렇게 거추장스럽게 자살하는 사람은 없어. 검정은 자신의 범행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공작을 벌인 거야. 밧줄로 시체와 자신을 묶고, 모래로 나이토를 덮으면서 가재 괴물을 경계했지.
히무로 시라베: 만약 나이토가 자살한 게 맞다면 그런 공작을 벌일 필요가 없어. 나이토의 시체를 발견한 순간 다른 이들을 깨워 재판을 열면 돼. 게다가 숨겨봤자 무슨 득이 있지? 나이토는 이미 죽어서 이 탑을 나가지도 못할 텐데. 나이토가 승리해봤자 우리가 몰살당하는 결말 말고는 나오지 않아.
히무로는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야가미 토가: 하지만 나이토 씨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해변에 없었습니다. 만약 모리 씨가 항생제를 복용했기에 조금이나마 움직일 수 있었다면, 나이토 씨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다리 한쪽을 쓸 수 없을지라도 자신을 살해하려는 시도에 저항할 수 있겠죠. 그게 모리 씨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야가미 토가: 모리 씨뿐만 아니라 마유즈미 씨나 하기와라 씨가 살해를 시도했더라도 달라지는 점은 없어요. 그 자리에서 나이토 씨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나이토 씨뿐입니다.
23T5U130: 맞아. 모리가 나이토를 죽인 다음에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에 초점을 맞춰야 해.
마유즈미 나데시코: 난 솔직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 같은데…
카나리 케이토: 그래. 이것들아! 쟤가 어떻게든 시체를 모닥불까지 끌고 올 수 있다고 해도 그건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잖아.
카나리 케이토: 아까 그 밧줄이랑 팔을 모래로 덮기, 땔감을 주변에 올려서 가재 괴물 막기는 나머지 둘도 가능할 거라고. 쟤가 범인이면 하지 못했을 일이 무수히 많은데 왜 쟤가 범인이라는 거야?
나나시: 예시를 들면, 증거 인멸 같은 거?
카나리는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려다가 우뚝 멈추었다.
카나리 케이토: 어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갑자기 왜 그래?
하기와라 우시오: 증거 인멸을 못 했다…?
단순하고도 확실한 일이었다.
토키와 아유키: 나는 이해가 안 되는데.
히무로 시라베: 생각해 봐. 해변은 밀실이 아니야. 한정된 장소도 아니지. 증거는 아예 존재하지 못할 수도 있어. 밧줄은 전부 파묻던가 숲에 버리고, 단검 또한 멀리 던져 버릴 수 있었다고.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나나시: 그러지 못했던 거야.
바다와 숲. 끝없이 펼쳐진 엄폐물 속으로 증거를 던질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았다. 모리는 단지 그러지 못한 것뿐이었다.
히무로 시라베: 나나시의 말대로야. 이 재판의 핵심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는 일에 있었어. 거동이 자유로운 하기와라나 마유즈미였다면 증거를 전부 인멸할 수 있었을 거야. 그렇지만 모리는 기어서밖에 움직일 수 없지. 그래서 현장에 끊어진 밧줄이나 단검 등 증거가 남은 거고.
칸나즈키 시노부: 그런 생각을 역으로 이용하는 하기와라와 마유즈미의 범행?!
하기와라 우시오: 어떻게 그런 걸 다 예상해? 자기가 안 했으면 모리는 진작에 내가 한 게 아니라고 반대 논거를 늘어놨을 거야. 그런데 쟤는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
나나시: 모리 본인이 아무런 말을 하려 들지 않는다면 여기가 논의의 종착점이야.
나나시: 나이토가 가지고 있어야 할 단검이 어떻게 모리의 손에 들어갔지? 모리와 나이토는 어떻게 모닥불에서 몇 미터나 떨어진 바닷가로 간 거야? 왜 다리는 훼손하더라도 몸은 훼손하려 하지 않은 거지? 모르겠어. 사실 중요하지도 않아.
나나시: 모리는 살인을 할 수 있었고, 모리밖에 남길 수 없는 증거가 남았어. 그러니까 모리. 네게 스스로를 변호할 거리가 남아 있다면 지금 말해.
재판장 안의 모든 이목이 모리로 향한 와중에. 모리는 천연덕스럽게 모노로그가 앉은 왕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리 레이코: 모노로그. 잠시 둘만의 시간 좀 보내지. 취조 카드를 줘라.
모노로그: 아. 취조 카드? 이것 말인가?
모노로그의 입 속에서 지명권이 튀어나와 내 손 안으로 떨어졌다. 모노로그가 호루라기를 물고 있는 그림. '취조실로 가시오'.
모노로그: 다수결로 조사관을 정해라. 조사관은 혐의자를 정할 수 있다.
토키와 아유키: 느닷없이 취조를 하자고?
모리 레이코: 나는 내가 충분히 사건의 중심인물이라고 생각한다만.
후루미나미 나몬: 차고 넘치시지! 지금 검정 유력 후보인데.
히무로 시라베: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이번 조사관도 내가 해도 되겠어?
히무로가 말하자 다른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토키와 아유키: 첫 번째 학급재판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 학급취조도 히무로가 맡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야가미 토가: 저 또한 찬성입니다. 히무로 씨는 심리적으로 남을 몰아붙이는 특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분명 도움이 될 만한 정보와 함께 돌아오실 겁니다.
이바라 쿠리스: 당해본 사람이 더 잘 안다는 거야…?
후루미나미 나몬: 내가 하고 싶은뎅…
히무로는 프로파일러다. 야가미를 상대로도 정보를 얻어낼 수 있고 심리전에도 능할 것이다. 아마 히무로가 모리를 데리고 안에 들어간다면 온갖 정보를 알아낼 수 있겠지. 그 점에 있어서 나는 안도했다. 안식이 머지않았다. 모리의 몰락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모리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안도할 수 있었다.
모리 레이코: 이름 없는 남자가 조사관을 맡지 않으면 나는 입을 조금도 열지 않을 것이다.
히무로 시라베: 혐의자는 조사관을 정할 수 없어. 조사관이 혐의자를 정하는 거야.
모리 레이코: 나는 선택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선언이지. 이름 없는 남자가 날 취조한다면 유용한 정보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말고 다른 사람은 내게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히무로 시라베: 난 협상 안 해.
모리 레이코: 나도 타협할 생각은 없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이고 씨발 골 때리네…
나는 하기와라의 말에 동의하게 되었다. 양보할 생각이 없는 두 명이 만나는 일은 조금도 좋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진심이었다. 히무로는 모리에게서 한 마디조차 듣지 못할지라도 그녀를 취조할 생각이었고, 모리는 정말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을 생각이었다.
야가미 토가: 나나시 씨. 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나나시: 하고 싶지. 당연히…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으니까.
그리고 직접 내 귀로 듣고 싶었으니까.
야가미 토가: 나나시 씨가 조사관 역할을 맡으시는 건 어떨까요? 나나시 씨는 이번 재판에서 충분한 역량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모리 씨 본인의 태도가 워낙 강경하기도 하고요.
히무로 시라베: 그렇지만 모리의 요구를 들어준다고 해서 좋은 일은 없어. 죽기 직전까지 몰린다면 모리도 결국 입을 열겠지.
야가미 토가: 하지만 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저는 적어도 모리 씨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카나리 케이토: 그럼 어쩌라고. 저 못 미더운 놈한테 조사관을 맡겼다간 오히려 역으로 조사를 당하고 끝날 것 같은데.
후루미나미 나몬: 흠… 난 보내는 거 찬성할래.
나나시: …넌 갑자기 왜?
후루미나미 나몬: 그게 조금 더 구경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
카이다 쿠로하: 구경? 아직도 감이 안 오냐? 취조실 안은 구경을 못 해. 보는 사람 없이 취조가 이루어지는 거라고.
야가미 토가: 맞아요. 다른 분들의 간섭은 일체 없었습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나시도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을 거야.
카나리 케이토: 뭘 보고 그걸 아는데?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냥…?
하기와라 우시오: 히무로랑 모리는 서로 냉정한 새끼들이라 서로 붙여놓으면 답이 없어. 그러니 따뜻한 감정을 가진 나나시가 모리의 방어 태세를 무력화시켜야 하는 거지.
이바라 쿠리스: 정말 그게 통할 것 같진 않은데. 모리 너 정말 아무 말에도 대답 안 할 생각이야?
모리는 이바라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이바라 쿠리스: 저게 진짜…
히무로 시라베: 재판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나나시가 조사관의 역할을 맡아야겠지만… 이거 하나만은 알고 싶어.
히무로 시라베: 왜 나나시를 지명한 거지? 어떤 목적이라도 있나?
나는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검정은 모리고, 본인도 부정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부정할 방법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비논리에 의지하거나 논점을 흐리는 등 재판의 흐름을 끊어 놓아야 했다. 그러기는커녕 모리는 징검다리를 놓듯이 재판이 흐름대로 진행되도록 두었다. 야가미가 캐롤 씨를 검정으로 모는 등 재판에서 승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과는 반대되었다.
그러나 최후에는, 나조차도 의아함을 느끼게 되었다. 대체 모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애초에 저항할 생각이 없었다면 자수한 뒤 처형당하고 말 것이지.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나시: 그래. 모리. 왜 나야?
모리의 대답은 언제나 그렇듯이 무덤덤했고, 또 기분 나쁘게 자신이 나은 체를 했다.
모리 레이코: 네게 계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나시: 정말 다른 곳과 분리된 공간이야…
나는 취조실 안을 둘러보았다. 의논이 오간 후 나는 조사관 역할로 바닥을 뚫고 취조실의 안쪽으로 떨어졌다. 추락하는 동안 나는 큰 공포를 느꼈으나,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회색 벽에 둘러싸이고 침침한 조명 밑에서 10분 동안 모리와 단 둘이 갇혀 있다고 생각하자 혐의자가 된 것처럼 숨이 막히고 짜증이 치솟았다.
모리 레이코: 앉아라. 이름 없는 남자. 시간이 아깝다.
목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모리는 절뚝이며 취조실 안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나는 내가 취조실 안을 보고 있는 사이 이미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겼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은 다음 먼저 그녀에게 물었다.
나나시: 왜 사람을 죽였어?
모리 레이코: 개인적으로 지금 너의 모습은 달갑지 않지만,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군.
모리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나시: 내가 묻잖아. 나이토를 왜 죽였냐고.
모리 레이코: 너는 의존적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그만큼 남을 도울 수 있었지. 조사 시간에 다른 이들에게 물어봐서 알게 되었지만, 너와 상담사는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지?
나나시: 애초에 넌 지금 왜 그렇게 의연한 거야? 지금 반론할 생각도 안 들어? 추하게 발버둥 치란 말이야. 내가 죽인 게 아니라고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늘어놓으라고.
모리 레이코: 내가 예상했던 계급의 구조와 왕국은 이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상담사의 죽음에 있어서는 나 또한 애도를 표한다.
나는 구토를 참듯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네가 어떻게.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애도를 표할 수 있느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녀를 죽게 만든 장본인에게 그런 자격은 없다고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나는 원래의 목적에 머무르려 애썼다. 히무로라면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고작 나나시에 불과했지만, 히무로가 되려는 노력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나나시: …나이토가 선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모리의 입이 멈추었다.
나나시: 계속 이상했어. 아무리 약해진 나이토라도 그보다 더 약해진 네가 죽일 수 있을 리 없어. 사실 그 일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했지. 그래서 논의에서는 그 사항을 뒷전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이해가 돼.
나나시: 나이토가 네게 죽어준 거야?
모리 레이코: …너는 당장 비어있을 뿐이라고 말했던가. 이름 없는 남자.
마유즈미의 숙소 앞에서 나누었던 대화. 그리고 또 말 돌리기였다.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은 자신의 죄를 부정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취조실에까지 끌려와서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취조 자체에 응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아마 히무로가 조사관 역할을 맡았다면 그녀는 입을 조금도 열지 않다가 처형당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애초부터 그녀의 목적은 이 안에서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기 때문에. 내가 아닌 누구도 그녀의 입을 열진 못했으리라. 내가 궁금한 것은: 대체 왜? 왜 나지?
나나시: 마지막 항생제가 폭파되고 어쩌면 더 이상 희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겠지. 감염으로 죽으면 탑에 있는 자신의 후원자 두 명이 함께 죽을 것이라고.
모리 레이코: 그러나 너는 다시금 텅 비었다. 가슴속에 뚫린 동공은 깊고도 넓은 법이지. 그 안에 심연 그 자체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나나시: …….
모리 레이코: 왜 그러지? 내게 할 말이 있지 않나?
나나시: 이건 대화가 아니야. 너는 내 말을 전부 회피하면서 자신이 할 말을 늘어놓고만 있어.
모리 레이코: 너는 대화를 하려 들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군.
나는 모리와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모리 레이코: 대화는 상호적인 개념이다. 그렇다면 대화의 거부 또한 상호적일 수 있지.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나는 10분 동안 내가 하고 싶은 말만을 할 수 있다.
모리 레이코: 그렇지만 만약 네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아주 잠시나마 내 대화에 응하는 것 또한 방법이겠지?
나나시: …네 목적은 대체 뭐야?
모리 레이코: 내 목적은 항상 똑같다. 계몽의 등에가 되는 것. 다음은 네가 대답할 차례다. 이름 없는 남자.
모리 레이코: 내가 죽고 난 뒤에. 네 목적은 무엇이 되지?
나나시: 흑막을 꺾고 이 탑에서 나가야지.
모리 레이코: 거짓말 마라.
나나시: 여기서 검정을 잡아서 처형시키고. 죽기 전까지 더 하찮은 삶을 영위하기만 하면 돼…
모리 레이코: 넌 날 죽이고자 하는 목표가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스스로의 목을 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넌 검정을 처형시키고 싶었다. 바로 네 손으로 캐롤 씨의 복수를 하고 싶었던 거지. 그게 너의 동기였다.
모리 레이코: 왜인지 용납이 되지 않더군. 그래서 네게 물었던 것이다. 승부사는 어떻게 되느냐고.
모리 레이코: 그게 너의 목적인가? 죽은 상담사의 복수를 하는 것 말이다.
모리 레이코: 그럼 승부사는 어떻게 되지?
모리 레이코: 승부사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는 게 아니라. 죽은 사람의 복수를 위해 행동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승부사의 죽음은 너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가?
나나시: 설교 늘어놓지 마. 그 나이토의 심장에 단검을 박아 넣은 건 너야. 나이토의 몸 절반을 먹히게 만든 것도 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나이토가 죽은 게 안 슬프냐고? 이 자리에서 눈물이라도 흘릴까?
나나시: 이제 와서 네가 꾸며낸 감정을 보여 준다고 해서 내가 속을 것 같아? 감정은 이성의 방해물이라며. 다른 사람에게 정을 붙이고 감정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건 너잖아. 왜 이제 와서 나이토한테 조금이라도 신경을 썼던 사람처럼 굴어.
모리 레이코: 너를 돌아봐라. 너는 승부사의 죽음에 슬퍼하고 있지 않다. 상담사의 죽음이 너무나도 슬프니까 그런 거겠지.
모리 레이코: 너는 죽은 상담사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인가?
나나시: 나이토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게 아니야. 단지 네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꼭 봐야겠다는 거야.
모리 레이코: 결국 내가 상담사를 죽게 만든 원인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 너는 지금 상담사의 유령에 씌여 있다. 독수리가 네 어깨에 앉아 있단 말이다.
모리 레이코: 그것은 너를 지켜주지 않을 것이다. 너를 괴롭히다가 네 입 안에 부리를 처박겠지. 그러니 네게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지금 떨쳐내는 것. 너는 살아가기 위해 언젠가 그것을 선택해야 한다. 선택을 유보했을 때 따라오는 결과는 몸에 남는 발톱의 상처와 감염. 혹은 독수리에 의한 죽음일 테니.
나나시: 떨쳐낸다면. 뭐가 달라지지…?
내가 말하자 모리는 경멸을 자신의 얼굴에 잔뜩 담았다.
모리 레이코: 완전히 망가졌군… 벌써 독수리가 네 간을 다 파먹었단 말인가? 이미 너는 반주검이 됐느냔 말이다. 너는 자유로운 가능성을 가지고 이 탑에 왔다. 그러나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너는 최악의 형태로 전락했군. 사로잡힌 남자. 그게 바로 너다.
나나시: 유령과 독수리에 사로잡혔다고? 그럴 만도 하지. 두 사람의 저주를 한 몸에 받고 있으니까.
모리 레이코: 무슨 저주를 말하는 거냐?
나나시: 기억 속의 내 친구가 내게 남긴 저주와 캐롤 씨가 남긴 저주. 자기를 잊지 말아 달래. 잊으면 안 된대. 그럼 떨쳐낼 수 없지.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나나시: 앞으로 시간이 몇 분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넌 설교를 하려고 이 안에 들어온 거지? 그럼 더 이상의 반론은 없어. 아무리 너라도 숲과 모닥불 사이를 기어 다니면서 증거를 인멸할 순 없었지. 그러니 여기서 끝이야.
나나시: …이제 죽을 날을 기다릴 뿐이야. 너도, 나도. 마찬가지라고. 난 여기서 나간 다음 네가 잔인하게 처형당하는 모습을 지켜볼 거야. 그럼 오늘만큼은 독수리도 잠잠해지겠지. 자신의 분풀이를 해줬으니까.
모리 레이코: 그럼 내일은. 모레는. 글피는 유령을 옆에 두고 평화롭게 잘 수 있단 말인가? 외로움에 잠식 되지만 달리 채울 무언가를 찾지도 못한 채로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나나시: 그건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야. 너한테 내일은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최대한 비참하게 죽어. 캐롤 씨가 만족할 수 있도록.
모리 레이코: 아니. 상담사는 사람의 죽음을 보고서 만족하지 않는다.
모리가 시선으로 내게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면 내 몸에는 이미 구멍이 뚫렸을 것 같았다.
모리 레이코: 그녀는 그런 사람 아니었나? 네가 잘 알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나나시: 아니. 이번만큼은 만족할 거야… 복수를 했으니까…
모리 레이코: 만족하는 것은 복수를 원하는 너 자신이다. 너는 그녀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유지(遺志)나 의지의 계승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그러나 너는 그것에게 저주라는 이름을 주었다. 네가 알던 이들의 죽음을 저주로 만드는 건 바로 너다.
모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다음 순간, 그래 봤자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 뒤따랐다. 그래봤자 달라지는 일이 있을까? 그들은 돌아오지 않고, 나는 어차피 탑에서 죽을 텐데.
이 재판장에 들어온 순간부터 모리의 죽음은 확정되어 있었다. 그러니 재판장이 불필요한 절차를 걸쳐 이루어지는 처형의 무대인 것처럼. 탑은 나의 무덤이었다. 불필요한 절차를 걸친 끝에 나는 죽을 것이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확정 지었다.
나나시: 아무렴 좋아. 절망하면서 죽기나 해.
나는 결국 눈가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모리의 말 또한 듣고 싶지 않았다. 손이 네 개라면 내 귀를 막고, 손이 여섯 개라면 모리의 목을 졸랐겠지만 내 손은 두 개뿐이었다.
죽은 사람의 손을 잡을 수 없는, 쓸모없는 손 두 개.
그러나 내 눈앞의 손이 한 개 반뿐인 사람은 도무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 무언가를 보려 했으며 모든 것을 들으려고 했다. 나는 묻고 싶었다. 왜지? 대체 왜지?
왜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도 무언가를 이루려 하는 거야?
모리 레이코: 아니. 난 절망하지 않는다. 그 끔찍한 것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지. 얼마 전까지 그것과 다시 마주쳤을 때는 나조차도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 네가 아무리 약해빠진 불구자처럼 굴지라도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다.
모리 레이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인간에게 필요하지만 동시에 극복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절망을 통해서만 인간은 신에게 가까워지고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말했지.
모리 레이코: 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그의 철학에서 동의할 수 있다. 절망은 극복되어야 한다. 너는 극복해야 한다.
탁자에 툭 하고 무언가가 떨어졌다. 모리의 장갑이 그 자리에 있었다. 붕대로 싸인, 절반이 사라져 있는 모리의 왼손이 나를 바라보았다.
모리 레이코: 내 머릿속으로 들어와라. 사로잡힌 남자. 정신머리를 뜯어고쳐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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