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나리 케이토: 저 놈은 영 못 미더운데… 아무런 정보도 못 얻고 나오는 거 아니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그래도 어쩔 수 없었잖아. 나나시 말고는 누구랑도 이야기 안 하겠다는데…
나나시와 모리가 바닥을 뚫고 사라진 뒤 우리는 저마다 걱정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히무로 시라베: 모리는 괴팍한 사람이지만 거짓말쟁이는 아니야. 조건까지 내걸었으니 자기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거겠지. 그것만큼은 믿을 수 있어.
야가미 토가: 네. 모리 씨는 자신에게 엄격한 규칙의 잣대를 들이대는 분이니까요. 또 이 편이 나나시 씨에게 있어서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야가미의 말에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히무로 시라베: 그게 무슨 뜻이야?
야가미 토가: 복수는 차갑게 내놓아야 한다고들 하죠. 그런데 경험자의 입장에서 복수란 요리는 말입니다. 만드는대로 빨리 먹는 편이 나은 것 같더군요.
살인자가 살인을 요리에 비유하는 것은 불쾌했지만, 모리와의 회포를 푸는 것이 나나시의 정신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낼지도 모른다는 점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서 나나시에게 복수의 기회를 주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닌데. 복수는 결국 독이잖아… 자기 자신한테 독이 되는 일일 거야.
야가미 토가: 동의할 수 없군요. 분노는 좋은 동기부여의 소재입니다. 치열한 복수를 이루기 위해 사람은 자신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되지 못했던 자신으로 변모할 수 있게 되죠.
야가미 토가: 그게 아무리 괴로운 가시밭길이라도 기꺼이 걸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칸나즈키 시노부: 그렇지만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면?
칸나즈키가 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23T5U130: 그러면 서서히 침몰할 뿐이야.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면, 남은 건 죽지 못해서 사는 우울뿐이야.
23T5U130: 그것보단 차라리 저게 나을지도 몰라. 복수라도 바라보는 것이…
23T가 말을 마치려는 찰나. 재판장에 붉은 섬광이 점등하며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카나리 케이토: 뭐. 뭐야. 갑자기?!
나는 그런 것을 전에도 보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다른 이들을 둘러볼 뿐이었다. 혹시 누가 장갑을 실수로 떨어트렸는데 다른 이가 주워준 것을, 모노로그가 결투 신청이라 판정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붉은 섬광 속에서도 나는 재판장의 모든 이들이 장갑을 착용하고 있음을 보았다.
모노로그: 도전이 받아들여졌다. 결투가 성립되었다.
이 자리에 없는 것은 두 명뿐이었다.
모노로그: 초고교급 철학자. 모리 레이코는 이름 없는 남자를 결투 대상으로 지목했다.
토키와 아유키: 뭐? 나나시가?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대체 뭘 취조했길래 둘이 막고라를 뜨는 거야.
이바라 쿠리스: 아무리 봐도 잘 풀린 것 같진 않아…
카나리 케이토: 거봐. 내가 못 미덥다고 했잖아!
후루미나미 나몬: 오. 시작한다. 시작한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이… 일단 나나시 과녁으로 가자! 증거 보내줘야지!
히무로 시라베: 좋은 판단이야.
나와 마유즈미는 곧바로 나나시에게 언탄을 보내주기 위해 그의 과녁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러나 우리보다 한 발 앞서 도착한 이가 있었다. 바로 후루미나미였다.
그러나 그녀는 언탄을 보내기보다 더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후루미나미 나몬: 팝콘 먹을 사람?
후루미나미는 가방에서 커다란 팝콘 상자를 꺼내고 으적으적 씹어먹기 시작했다.
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우리는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어요. 아쉬움에 쓴 맛을 곱씹을 뿐…"
모리는 장갑을 벗어던졌다. 내가 장갑을 받는 것은 결투를 승낙하는 의미이고, 그렇게 된다면 나는 또 다른 공간으로 이동해 모리와 결투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투를 승리한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결투에서 승리한 사람의 특권은 결투에서 패배한 이를 음소거할 수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검정이 사실상 정해진 이상 내가 결투를 승낙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모리가 죽는 시간이 몇 분 늦어지는 결과만 나올 터였다. 또 모리라는 사람의 머릿속을 구경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나는 장갑에 눈길도 주지 않으려 하려다가 결투장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떠올렸다. 히무로와 야가미 사이에서 벌어진 총격전. 감정에 먹힌 사람과 그런 사람을 상대로 논거를 제시하는 사람. 그리고 언총.
모리에게 내 손으로 복수할 수 있다고? 아니야.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냥 꿈이랑 똑같아. 모리는 모노로그 손에 죽는 거야. 화풀이밖에 안 되겠지…
모리 레이코: 고민하는 척 마라. 가증스러운 살인자에게 복수하려 가슴이 뛰는 것 알고 있다. 장갑을 줍고 결투를 받아들여라.
모리의 말이 맞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화풀이였다.
모리에게 총을 쏠 수 있었다. 모리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아마 캐롤 씨도 만족할 것이다. 내가 충분히 복수한다면 캐롤 씨도 만족하실 거야.
아니. 상담사는 사람의 죽음을 보고서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더라도 나는 복수를 해야 해. 복수. 이 자리에서 내 손으로 복수하지 못한다면 모리는 영영 사라져 버릴 거야.
모리가 죽는 걸 보자. 모리의 고통스러운 비명을 듣자. 캐롤 씨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자지러지는 끔찍한 비명을.
그러니 장갑을 잡아.
나나시: …….
잡아. 장갑을 잡으라고. 내가 원하는 건 그게 다였잖아.
나는 스스로 윽박질렀으나 왜인지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만 들뿐이었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오직 한 의문만이 떠올랐다. '그래서 뭐가 달라지지?'.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장갑을 붙잡자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이번에도 또한 공포는 없었다.
발을 디디고 처음으로 들은 것은 모리 특유의 목소리였다.
모리 레이코: 본래는 자수할 생각이었다.
검은 공간의 밑바닥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땅처럼 단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바닥에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모리는 목발을 던졌다. 그녀는 두 발을 디딘 채 서 있었고 잘린 그녀의 왼손가락 세 개 또한 그녀의 손에 돌아와 있었다.
나는 재빠르게 언총을 뽑고 그녀를 향해 쏘았다. 그러나 모리의 몸에는 야구공 정도의 충격밖에 주지 못했다. 아주 잠깐 당황하던 나는 언총의 위력이 그 사람을 몰아붙일 수 있는 언탄의 위력에 비례한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모리는 내 언총을 맞고 불편한 기색을 느꼈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모리 레이코: 윽… 나처럼 역량이 부족하고 부상도 입은 이의 목숨은 열둘의 목숨보다 가볍다. 훨씬 가볍지. 큭. 게다가 살인자고 승부사를 죽게 만들었으니 당연히 승리할 생각은 없었다.
모리 레이코: 그런데 너를 보고 깨달았지… 아윽. 네 목표가 그저 나를 처형시키는 것으로 그칠 것임을. 그런 일은 용납할 수 없다.
모노로그: 가증스러운 그녀가 앞에 있군. 이름 없는 남자.
모노로그가 나타나자, 이미 언총을 섣불리 쏘는 것은 소용없다는 것을 학습했기에 나는 방아쇠에서 손을 떼었다.
나나시: 너도 가증스러워. 내 눈앞에서 사라져.
모노로그: 너무 매몰찬 것 아닌가? 난 조언을 하려 온 것뿐이다. 이 공간은 그녀의 무의식에 기반할 것이며, 그녀에게 유리한 공간일 것이다. 이성을 잃은 자에게 결정적인 논거를 제시해라…
모노로그: …고 해야겠지만, 이 결투에 있어서 더 이상 논거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재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재판 시스템이라니. 참 기묘한 일도 다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내 발밑에서부터 상자가 솟아올랐다. 정확히는 상자가 솟아오르면서 내 몸을 통과해. 나는 어느새 옅은 갈색의 상자 안에 들어있게 되었다. 상자의 벽 양옆에는 창문이 생겼고 바닥에선 의자가 솟아올랐으며 전등과 커튼이 밋밋하던 상자의 내부를 장식했다.
나나시: 여기는…
혼잣말을 하던 나는 어느 순간 덜컹하고 흔들리는 상자의 내부에서 몸을 휘청였다. 모리 또한 흔들리기는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녀는 왜인지 그 흔들림에 익숙한 것처럼 금세 몸의 균형을 되찾았다.
모리 레이코: 내가 순순히 처형당한다면 너는 어떻게 행동할까를 생각해 보았다. 목을 매달 것 같더군. 이제 상담사를 보러 갈 일만 남았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삶은 이어진다.
모리 레이코: 아무리 저주받고 고통스러운 삶일지라도 너는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리는 어디에선가 옅은 갈색의 기관사 모자를 꺼냈다.
나나시: 그래… 일단 네가 죽는 걸 본 후에.
그녀를 향하는 내 총의 조준이 다시금 흔들렸다. 나는 모리에게 집중한 사이 그녀와 나를 둘러싼 환경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나와 모리가 들어있는 상자 뒤에도 또 다른 상자가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도 상자가 있었다.
모리 레이코: 결국 모든 이들은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욱 나으리라 생각하고 목숨을 끊는 것이지.
모리 레이코: 마치 기차 선로를 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상자와 상자는 작은 통로로 인해 서로 이어져 있었다. 그제야 나는 그 상자의 정체와 발밑에서 들려오는 덜컹거림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나는 기관차 안에 있었다. 그리고 열차의 기관사는 다름 아닌 모리였다. 기차가 굽었다 펴지듯이 나와 모리 사이의 공간이 확장되었고, 기차의 한 칸 안에 함께 있던 나와 모리의 사이에는 어느새 여러 칸의 차량이 놓이게 되었다.
나나시: 도망가지 마. 어디로 가는 거야?
차내 방송이 나오듯이 잡음이 잔뜩 낀 모리의 목소리가 열차 속에 울렸다.
모리 레이코: 머리에서 만나지. 칙칙폭폭. 그동안 나와 대화를 해 줘야겠다.
모노로그: 마지막으로 충고 한 마디만 남기지. 이름 없는 남자. 너는 히무로 시라베가 아니다. 그는 야가미 토가의 감정에 말려들지 않고 이성을 지켰다. 그렇기에 승리할 수 있었지. 그러나 너는 다르다. 감정이 증폭되는 공간 속에서 너는 어쩌면 그녀에게 말려들지도 모른다.
모노로그: 그러니 잘 조절해야 할 것이다.
모노로그는 그 말을 넘기고 바닥으로 사라졌다. 나는 사라진 자리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로 기차의 머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와중 창문 너머의 풍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모래가 그곳에 있었다. 황야처럼 보이는 삭막한 환경. 세상을 주황색으로 물들이는 석양과 모래의 세상이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모래 위를 굴러다니는 회전초도 보일 것만 같았다.
이게 모리의 무의식이란 말인가. 나는 속으로 납득했다. 공리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메마른 삶. 그리고 늘 움직여야만 하는 기관차 하나.
"블레인이 아니야. 봐… 이 세상은 하나의 기차야. 어떨 때는 덥고 어떨 때는 추운 세상을 가로지르지. 지금은 무척 춥고 어두운 시기고. 그렇지만 기차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해. 안 그러면 바퀴에 녹이 슬고 기차 안의 모든 사람이 죽을 테니까. 어떨 때는 승객들을 몇 명 버리고 어떨 때는 트롤리 문제에 직면해 소수의 사람을 희생시키면서 나아가지.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기억에서 들었던 말이 떠오르자 문득 기분이 더 불쾌해졌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 보였다. 어떤 가치를 위해서 다른 무언가를 등한시하는 것.
문을 열자 몇 걸음 앞에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차량 하나가 끝나는 문과 다음 량으로 통하는 문, 그 안으로 발을 디디자 기차 내부에서는 모리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치직.
모리 레이코: 내가 원망스럽나?
나나시: 그래.
나는 작게 중얼거렸지만 그럼에도 모리는 내 말을 듣고 있을 것 같았다.
모리 레이코: 네가 가지고 있는 증오심은 일차원적이다. 나는 상담사를 죽일 의도가 없었다. 단지 그녀에게 불운이 겹친 것뿐이지. 그런데도 내가 원망스럽나?
나나시: 그래.
모리 레이코: 너는 복수의 대상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결국 그녀가 죽은 원인은 내가 아니라 책. 흑막이다.
나나시: 어쩔 수 없는 사고였던 것처럼 말하지 마. 넌 나이토를 죽였어. 그리고 죽이지 않을 기회가 몇 번이고 있었겠지. 하지만 결국 살인을 저질렀고 그 결과가 이거야.
모리 레이코: 내가 의도한 살해가 아니었다.
나나시: 아무래도 좋아… 거기서 기다려.
나는 어느새 주머니에 가득 차오른 여러 색깔의 총알을 손에 쥐었다.
나나시: 난 네가 죽는 모습을 봐야겠으니까.
결정적인 증거를 그에게 쏴 보내준 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시름을 조금이라도 놓을 수 있었다. 나나시 본인에게도 모리를 몰아붙일 수 있는 증거가 있을 터였고, 다른 이들 또한 그에게 도움을 주었으니 결국 그가 승리할 공산이 높았다.
다만. 자기 자신을 잘 조절한다는 전제 하에서의 말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나시가 결투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해?
히무로 시라베: 결투 신청자의 공격을 피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논거를 언탄으로 제시하면 돼. 설령 언탄이 없다고 해도 우리 쪽에서 지원해줄 수 있고.
후루미나미 나몬: 애초에 공격을 하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이거 나나시가 이긴 거 아니야? 살짝 실망스러워.
야가미 토가: 아뇨. 나나시 씨에게 있어서는 저 공격이 오히려 더 까다로울지도 모릅니다.
야가미는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하기와라 우시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야가미 토가: 결투장은 결투 신청자의 무의식에 기반한다고 하더군요. 자기 스스로 유리하다 생각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그 위에서 싸울 수 있는 것이 결투 신청자의 특권입니다.
히무로 시라베: 그래. 언총도 결정적인 증거를 언탄으로 쏘는 게 아니라면 큰 위력을 발휘하지 않는 데 반해 결투 신청자는 큰 화력을 손에 넣을 수 있지. 하지만 그렇기에 결투 신청자가 방심한 사이를 노리기도 용이해.
야가미 토가: 히무로 씨가 제게 한 것처럼 말이죠.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히무로 씨 같지는 않습니다. 나나시 씨는 더욱 그렇죠.
야가미 토가: 결투장의 모습을 보시면 황야를 달리는 철도 기차처럼 생겼죠. 그런데 모리 씨가 저런 것과 연관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십니까?
모리 레이코: 칙칙폭폭. 기차는 절대 멈추지 않아야 해…
히무로 시라베: 감염에 고통받는 동안 기차와 관련된 환각을 보는 것 같긴 했어.
야가미 토가: 그렇지만 황야를 달리는 기차는 아닐 겁니다. 저런 장소는 적어도 일본에는 없습니다. 마치 미국이나 이탈리아의 서부극에나 나올법한 열차가 아닙니까.
카이다 쿠로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알아듣게 말해 봐.
야가미 토가: 모리 씨는 자신이 겪어본 적 없는 환경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그녀와 관련이 있을지라도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공간을 꾸며냈죠. 나나시 씨를 계몽시킨다는 목적에 부합하는 공간 말입니다.
야가미 토가: 저 기차 자체가 모리 씨의 무기인 셈이죠. 제가 썼던 기관총과 마찬가지입니다. 저 안에 들어가 있는 것부터 나나시 씨는 모리 씨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바라 쿠리스: 그렇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정신계 공격이란 말이야?
히무로 시라베: 달라지는 일은 없어. 섣불리 행동하지 않고 이성에 의지한다면 반드시 모리를 압도할 수 있을 거야. 나나시가 유리해.
나는 빈 말을 하지 았았다. 그건 내가 관측한 바에 의하면 사실이었고 또 당연한 일이었다. 결투 신청자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으며 결정적인 증거가 아닌 언탄에는 피해를 입지 않으므로, 결투의 초반에는 확실한 우위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단기간에 승부를 내지 못할 경우 결국 언탄을 지원받을 수 있는 결투 대상자는 신청자보다 점점 유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투 신청자 또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것은 변수에 불과했다.
이바라 쿠리스: 나나시도 감정적으로 행동하면 어떻게 되는데?
히무로 시라베: 불리해지겠지. 상대에게 유리한 싸움판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꼴이 될 테니.
이바라는 내 말을 들으며 눈을 크게 뜨더니 끙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하기와라 우시오: 뭐야. 왜 그래? 몸 안 좋아?
이바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바라 쿠리스: …나나시는 이 결투 절대로 못 이길 거야. 나나시는 지금 가장 감정적이잖아… 너희가 못 봐서 모르는 거야. 나나시가 정말 불같이 화를 냈다고. 그 장본인이 눈 앞에 있는데 어떻게 냉정함을 유지하겠어?
23T5U130: 나나시는 적어도 모리에게 패배하지는 않을 거야.
23T의 말은 이바라의 말과 상반되었다. 같은 탑에서 나나시를 바라보았음에도 서로의 의견 차이가 나는 것은 23T가 나나시에 대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고, 나는 판단했다.
히무로 시라베: 그 이유는?
23T5U130: 나나시가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야. 그때도 나나시는 지금만큼 화를 냈어. 그리고 화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지. 그럴 수 있었던 건 그 사람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목표 때문이야. 그게 나나시의 감정에 계속 연료를 주었고, 그렇기 때문에 나나시는 감정적이었던 거야.
23T5U130: 하지만 그 사람을 되찾을 수 없으리라는 게 확실해지는 순간… 나나시는 좌절하면서 이성을 되찾아 버릴 테지.
야가미 토가: 그럼 결국 승리하시겠군요.
마유즈미 나데시코: 좌절은 안 좋지만… 그래도 모리한테 지지는 않는단 말이지? 다행이다. 이성을 되찾는다니…
23T는 마유즈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머리의 관절을 움직이자 23T에서부터 위잉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23T5U130: 다행이 아니야. 나나시가 탑으로 돌아온 뒤를 고려하면, 최악이야…
탑에서의 기억. 깨어난 직후.
토키와는 내게 물을 건넨다.
이바라는 차라리 한 숨 자라고 권한다.
23T는 슬프겠지만 이겨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셋 모두 틀렸다.
나는 목이 마르지도, 졸리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나는 텅 비어 있었다. 당연했다. 이름조차 없는 남자는 남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 그러니 무엇도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안에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조차 손에 잡을 수 없었다. 나는 살아있는 것과 손을 맞대기 두려웠고, 죽은 것과는 손을 맞댈 수 없었다. 그러니 늘 혼자일 수밖에.
노네임은 자신을 남에게 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을 잃는 일에 질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노네임이 하루아침에 이름을 잃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노네임과 노바디가 된 후에도 두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종종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던가,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조심스럽게 이름을 줬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노네임과 노바디 말고 한 명이 더 있었을지도. 그 사람의 이름은 뭘까. 노웨어? 노타임?
그러나 결국 희망은 사라졌고 그들은 다시금 후회했겠지. 처음부터 아무것도 주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래. 나 또한 아무것도 주지 않아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차라리 평생 행복하지 않겠어."
소원을 빌 땐 신중했어야지.
나는 주머니 속의 언탄을 마구잡이로 읽었다. 대부분은 모리의 수상한 거동에 대한 언탄이었다. 모리가 살인을 일으켰으리라고 생각한 이들은 많지 않았을 테니 재판에서 나온 것 말고는 추가적인 정보가 거의 없었다.
어느 정도는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지식들 사이에서 나는 한 상아색 언탄에 주의를 기울였다.
나나시: 나나시의 분노.
"잠깐 기다려. 나나시! 마음은 알겠지만 후루미나미에게 너무…"
"방해하지 마. 후루미나미는 이걸 당해도 싸. 그러니 또 감전당하기 싫으면 카나리의 위치를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좀 진정하라니까. 나나시! 이번 살해는 정말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어. 카나리의 위치도 몰라…"
"이번에는 터치가 아니야. 진짜 전기라고. 그러니 내일도 두 발로 걷고 싶다면 전화나 걸어!"
나나시: …후루미나미 건 괜히 읽었어.
화를 내는 내 모습은 그렇게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곧 나를 더 달갑지 않게 만드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리 레이코: 그녀는 너에게 있어서 무엇이었지?
나나시: 내 무언가가 아니었어. 그녀는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보다 큰 사람이었으니까.
모리 레이코: 고통스러웠겠군. 그리고 그 고통이 너를 꺾으려 하고 있다.
모리는 계속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머리칸을 향해 쉴 새 없이 발걸음을 옮겼으나 몇십 량을 지나도 기차의 앞에 도달할 수 있는 기색은 없었다. 그렇지만 내 발걸음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모리 레이코: 알지 못하는가. 사로잡힌 남자. 사람은 결국 죽는다. 이르든 늦든 그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결국 남겨진 사람들은 죽은 이들을 기억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을 저주로 여기는 것은 네 선택이다.
문을 두 개 열고 걷는다. 모리의 말에 대답하며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다시 문을 두 개 열고 걷는다.
나나시: 그러니 다시 일어서라고?
모리 레이코: 권유가 아니라 당연한 사실을 제시하는 것이다.
나나시: 일어서 봤자 원하는 게 떠오르지 않아…
그러던 도중 나는 피가 점점 차갑게 식고 있는 것을 느꼈다.
가슴께에 다시금 서늘함이 찾아왔다. 이제는 익숙하고 오히려 괴롭기에 안정이 되었다. 외로움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예견된 일이었다. 카텟의 온기 속에서 벗어난다면 결국 비바람 속으로 돌아가게 되리란 것을 알고 있지 않았는가.
캐롤 씨도 알고 있었겠지. 어쩌면 그때 서로의 팔을 붙잡은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알고 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캐롤 씨는 죽기 전에 그토록 절박했던 걸까.
모리 레이코: 내 말 들리나? 대답해라. 사로잡힌 남자.
갈 길이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문을 두 개 열고 나아가기를 반복했다. 어느 순간부터 화보다 서늘함이 더 커지자 나는 이를 악물고 문의 경첩을 언총으로 쏘고 문에 발길질을 했다. 경첩이 떨어지며 문이 기차의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것은 화풀이가 아니라 화를 재점화하는 행동이었다.
내가 분노해야 하는 이유는, 그러지 않으면 복수마저 포기해버릴 것임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확히 뭘 원하는 거냐고 물음을 던져봤으나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모리 레이코: 그렇게 나오겠다면 내 쪽으로 가지.
나는 내 몸이 조금 오른쪽으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기차의 선로에 변화가 생겼음을 본능적으로 느낀 나는 창문 밖으로 다시금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끝도 없을 것 같던 열차의 끝이 보였다. 기차가 줄어든 건가? 아니. 일직선으로 나아가니 볼 수 없던 기차의 끝이 보인 것뿐이었다.
모리 레이코: 내 말에 집중해줘야겠다. 나는 설교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결투를 하러 온 것이니.
기차가 굽은 선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시선을 집중한 끝에 기차의 머리 쪽에서 무언가가 석양의 빛을 반짝하고 반사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곧바로 창문 밖으로 내민 머리를 기차 안으로 집어넣고 기차의 앞 량을 향해 달려갔다. 창문 너머에선 공기를 찢는 탕 소리가 들려왔다.
스코프가 달린 모리의 저격총이 불을 뿜자 기차의 창문이 와장창 깨져나갔다.
모리 레이코: 이제 집중할 마음이 드나?
나는 모리가 총을 겨누는 속도보다 더 빨리 달리고자 했지만 모리는 커튼의 음영을 통해 나를 찾고 있었다. 모리의 저격총은 각도를 조금만 트는 것만으로 내가 달리는 속도를 쉽게 추월하고 내 앞의 유리창을 산산이 깨트렸다.
바닥에 유리조각이 떨어졌으나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유리조각.
그녀의 다리 일부분은 옷을 포함해서. 금빛 유리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부서지고, 손가락이 부서졌으며 다리도 서서히 갈라지고 있었다. 덧없는 금빛의 유리가루.
절 잊지 마세요… 잊으면 안 돼요…?
캐롤 씨는 그 말을 남기고 유리조각이 되었다. 그녀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는가 싶더니 목이 꺾였고, 몸도 토막 나듯이 서로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나나시: 아… 아아…
내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내 무릎에서부터 피가 배어 나오고 있음을 눈치챈 뒤였다. 다른 것들보다 날카로운 유리조각이 바지 너머로도 내 무릎을 찔렀다. 화끈하고 아린 느낌이 들며 내 흰 바지가 붉은색으로 물들어갔다.
아프다. 그래도 여전히 피는 따뜻하다. 아직 죽지 않았다.
고통을 중화하기 위해 머리가 엔돌핀을 분비했다. 그러자 묘한 안정이 나를 찾아왔다. 아. 나 아직 살아 있구나. 아직 숨이 붙어 있어.
나나시: 히히히…
왜인지 웃음이 나왔다.
모리 레이코: 지금 뭐가 웃기다는 거냐?
나나시: 지금 떠오른 생각이 있는데. 다 바보 같아서…
그래. 난 복수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복수라는 사명이 없다면 캐롤 씨가 잊힐 것 같으니까. 그녀의 부재가 나를 비게 만든 만큼 표식을 남겨야 그녀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남는 것이다.
나나시: …그런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지?
모리 레이코: 빌어먹을. 사로잡힌 남자. 지금 내 말을 들어라. 사로잡힌 남자!
치직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모리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다급하게 들렸다.
나나시: 듣기 싫은데… 정신을 빼놓으려는 수작질이잖아.
나나시: 날 계몽하겠다고 했지? 난 이미 계몽됐어. 단지 네가 원하는 방식이 아닐 뿐.
나는 멍하니 언총을 내 머리에 겨누었다. 그러자 스피커에선 모리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모리 레이코: 멈춰! 바보 같은 짓을 하게 두지는 않겠다!
나나시: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런 것들은 다 아무래도 좋아. 캐롤 씨는 어차피 돌아오지 않아. 결투? 웃기는 소리. 처음부터 장갑을 잡지 말았어야 했어. 뻔한 도발에 넘어가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긴.
나나시: 결투에서 패배하면 음소거가 되던가. 그 정도야 뭐…
모리 레이코: 방아쇠를 당기지 마라. 분명히 말했다!
나나시: 네 시련 속에서 자살하려면, 내가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증거로 제시할까?
차고 넘치게 많았다.
모리 레이코: 방아쇠를 당기지 말라고 말했다. 지금 스스로를 쏜다면 너는 결코 이전의 너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나나시: 어차피 이 안에서는 죽지도 않아.
모리 레이코: 그건 제정신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아무리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더라도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것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에게 어려운 일일수밖에 없지. 생존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리 레이코: 겨눌 수는 있다고 치지.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는 것? 그건 더하다. 내가 장담하지. 지금 방아쇠를 당긴다면 결국 넌 자살로 생을 마감할 것이다. 한 번 해봤으니 두 번 못할 일도 없을 테니까. 그건 네 영혼을 저버리는 일이다. 그리고 죽은 영혼은 절대 원래의 고결함을 찾지 못하지!
나나시: 이제 네 게임에서 놀아줄 생각 없어.
모리 레이코: 이건 게임이 아니다. 멍청한 것! 이걸 게임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를 죽고 죽이게 만들고 싶은 책뿐이다. 이것은 놀이가 아니라 실존이다!
나나시: 네 말대로 캐롤 씨의 죽음을 저주로 만드는 건 나야. 네가 어차피 죗값을 치르리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도발에 넘어가서 너를 직접 죽이고 싶어 하는 모든 게. 전부 내가 만든 저주야.
그러니 저주를 끝내자.
그 저주가 나를 실존하게 만든다고 해도, 이제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모리 레이코: 너만큼이나 한심한 그 상담사를 그렇게까지 그리워하는 거냐!
나나시: …캐롤 씨는 한심하지 않아.
나는 잠깐의 침묵 후에 대답했다.
모리 레이코: 웃기는군. 그렇게 강대한 힘을 가지고도 쓸 배짱이 없어서 죽은 여자다. 너는 그걸 선함과 상냥함이라고 부를지 몰라도 내 눈에는 무능력함에 불과하다! 기독교적 가치에 입각한 나약함이지. 노예의 철학이다!
나나시: 단지 자신을 억누르려고 했던 거야. 자신이 변하는 걸 원치 않았어. 그 때문에 스스로에게서 점점 멀어져 갈지라도 다른 사람들을 우선으로 놓았어.
또다시 모리의 뻔한 도발이었다. 내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어 자신에게 달려들게끔 만드는, 내가 포기하지 않게 만들려는 얕은 시도였다. 나는 그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나는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녀도 이런 나의 약점을 눈치챘던 거겠지.
모리 레이코: 너도 그녀만큼이나 나약하다. 너는 그저 노예에 불과하다. 주인을 잃으니 갈 곳을 잃은 노예!
나나시: 캐롤 씨는 나를 조종하지 않았어. 모든 건 내 자유의지야. 너는 모르겠지. 캐롤 씨가 그것 때문에 스스로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터치가 저주스럽다고 느꼈는지.
나나시: 별종으로 태어났음에도 우리의 곁에 머무려고 했어. 그게 너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니야?
모리 레이코: 적어도 이 점만큼은 인정하지. 그녀는 괜한 짓을 하고 죽었다! 나약해 빠진 자들에게 분별없이 손을 내밀다 주인 잃은 어린양만 남기고 떠났으니. 차라리 영원히 혼자여야만 했어! 내 말이 옳았다. 그녀는 단절되고, 차단되고, 고립되어야만 했다!
캐롤 브라이트: 세상에서 분리된 것 같았어요.
캐롤 브라이트: 누구와도 진정으로 가까이 가지 못한 채 두 세계 사이에서 고립된 채 둥둥 떠다니게 된 거예요. 풍선처럼.
나나시: 캐롤 씨는 그것 때문에 늘 괴로워했어. 누구와도 진심으로 가까워질 수 없을 거라고. 늘 외로웠다고 털어놨어.
모리 레이코: 그렇다면 죽을 때까지 괴로워야만 했다.
나나시: 단지 그렇게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 때문에 항상 비참해야 한다는 거야?
모리 레이코: 공리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몸을 벌떡 일으키고 기차의 앞 량을 향해 발을 디뎠다.
그래. 그녀는 정말 등에였다. 벌레처럼 귀찮게 만들어서 사람 화를 돋우는 재주가 있었다. 또 최고의 동기부여이기도 했다.
자신의 방정맞은 입을 영원히 닫을 수 있도록 총을 쏴 달라고. 그렇게 애원하는 목소리를 무시할 방법은 없었다.
나나시: 역시 너한테 총을 쏘지 않으면 아쉬워서 못 견디겠어.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야.
모리 레이코: 내가 하는 말이 명백한 도발임을 알고 있음에도 화를 내는군. 그게 바로 너다. 사로잡힌 남자. 상담사가 남자 교육을 똑바로 못 했군?
나나시: 그 입 닥쳐. 지금 안 닥치면 총알을 먹여줄 테니까.
모리 레이코: 그럴 수 있다면 입 벌리고 기다리겠다. 그러니 뛰어라. 사로잡힌 남자!
창문이 와장창 깨지기 시작했다. 나는 언탄을 쏘며 나아갔다. 곧 문의 경첩은 내가 발로 차지 않더라도 홀로 산산조각 나 떨어졌다. 마치 내가 가는 앞길을 열어주는 것만 같았다.
곧 기차를 굽이치게 만든 곡선의 철도가 본인의 모습을 되찾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철도가 계속 곡선으로 나아가려면 결국 원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모리는 나를 집중시키기 위해 기차의 경로를 바꾸고 저격총을 들어 나를 위협했다. 위기감을 심어 자신에게 오도록 만들기 위해서.
하지만 이제 내가 그녀를 향해 가야 하는 당위성을 주었으니. 더 이상 기차를 틀 필요도 저격총으로 나를 견제할 필요도 없었다. 남은 것은 언쟁과 총싸움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차량과 차량 사이를 나누는 문조차도 사라져 버렸다. 그렇기에 나는 어느 순간부터 기차의 조종석에서 나를 바라보는 모리의 회갈색 머리카락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문이 있던 자리. 휑하니 뚫린 한 줄의 틈새 옆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자 공기를 울리는 저격총의 총성과 함께 바람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모리 레이코: 다가올 수 있겠나?
글쎄. 적어도 저격총이 겨누는 앞을 지나가면서 총에 맞지 않길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모리가 제대로 노린다면 그대로 결투는 패배로 끝날 터였다.
그럴 순 없었기에. 나는 차량과 차량을 잇는 몇 걸음의 공간에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차의 탑승구가 그곳에 있었다.
모리 레이코: 뭘 하려는 생각이지. 이름 없는 남자?
나나시: 너도 보이잖아…
나는 몇 단 정도밖에 없는 계단을 내려가 탑승구의 문을 옆으로 젖혔다. 그러자 모래가 가득한 공기가 기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거의 닫힌 문을 한쪽 손으로 잡고서 나는 기차의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모리 레이코: 하. 기발하군!
나는 모리의 말을 신경 쓰지 않고 손을 뻗으며, 몸을 던졌다.
그리고 기차의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를 붙잡았다. 순간 팔이 뽑힐 것 같은 격통이 어깨의 이음새 사이를 찌릿하고 얼얼하게 자극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사다리에 두 팔과 다리를 올렸다. 그리고 기차의 위로 올라간 뒤 머리까지 쉬지 않고 달려갔다.
모리 레이코: 그렇지만 어떻게 내려올 생각이지? 달리는 기차 위다. 정신을 못 차리면 네가 떨어질 것이다!
나나시: 그건 틀렸어.
가슴은 뜨겁지만 머리는 차갑게.
그것만 지킨다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리는 조금도 몰랐다. 캐롤 씨와 함께하던 순간을 떠올리면 무슨 일든 가능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을. 그녀가 알 리 없었다.
무슨 언탄을 사용할지 생각하며 나는 언총의 실린더를 젖히고 안에 넣을 언탄을 고려했다. 그러며 나는 주머니에 들어있는 언탄들 중에서 내가 읽지 않은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붉은색의 언탄. 히무로의 것이었다.
나나시: 나이토와 모리 사이의 밧줄.
내가 그것을 들여다보자 나는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뭐냐."
"이거 하자고."
"물에 대한 공포는 극복한 것 아니었나."
"밤이 되니까 다시 도졌어."
"뻔한 거짓말 마라. 이런 것으로 날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묶는 게 아니라 연결하는 거야. 이게 이어진 이상. 우리는 동료야. 그리고 난 내 동료가 곤경에 처하면 절대 내버려 두지 않아."
"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
"…네가 일찍 죽을 거라는 생각 따위는 접어두고 이겨내자고. 왜. 나빠?"
기억했다.
나는 머리를 붙잡고 잠시 혼란을 잠재우려 애썼다. 몸이 휘청여 거의 기차에서 떨어질 뻔했기에. 나는 몸을 숙이고 기차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왼손을 기차 위에 얹었다. 오른손으로는 언총을 들면서 동시에 내 이마를 부여잡았다.
내가 지금 뭘 본거지? -> 사건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본 거야. 정말 큰 증거다. 이것만으로 모리를 꺾을 수 있을 정도야.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보다 더 중요할지도 몰라. -> 당연하지. 검정과 피해자가 함께 있던 기억이니까. 그렇지만… 이게 사실이란 말이야?
그렇다면 모리는 대체 왜 나이토를…
모리 레이코: 뭐 하나. 사로잡힌 남자! 기발함이 다인가?!
나나시: 아니.
모리의 목소리가 나를 다시금 결투의 세계 속으로 데려왔다. 나는 기차의 머리 쪽으로 충분히 발걸음을 옮긴 뒤 총을 뻗어 창문 하나를 깨트렸다.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유리의 모서리가 여전히 남아 있기는 했으나 나는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나는 언총의 방아쇠를 입에 물고서 장갑을 낀 왼손과 오른손을 탁탁 털었다.
나는 기차에서 뒤로 미끄러지듯이 떨어지며 양손으로 기차의 윗부분을 붙잡았다. 그러면서 몸에 반동을 주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게 끝나는 와중에 바람이 내 몸을 때렸다.
다행히. 나는 깨진 창문을 통해 기차의 안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안도의 시간 따위는 없었다. 나는 즉시 입에 물고 있는 언총을 다시 손에 쥐고 기차의 조종석 방향을 향해 쏘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응사가 뒤따랐다. 내 얼굴이 있던 자리의 좌석이 부서져 바닥에 떨어졌다.
모리 레이코: 너는 깨어나야 한다. 사로잡힌 남자! 너에겐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 이런 곳에서 좌절하기엔 이르다!
그녀 또한 몸을 숨긴 채 내게 소리쳤다.
나나시: 지금 복수를 끝내기 위해 일어났잖아.
모리 레이코: 그 뒤에도 목표는 필요할 것이다!
나는 고개를 들고 모리의 목소리 쪽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히무로의 언탄을 읽은 뒤로는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격정 없는 증오가 내 마음을 싸늘하게 지배했다.
나나시: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내가 받아낼 값은 캐롤 씨를 죽인 그녀의 과오. 그리고 캐롤 씨를 모욕한 과오뿐이었다. 그것에만 집중하자 나는 총과 한 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어느새 손이 아니라 눈으로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통해 겨누자 나는 나와 모리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읽었다.
서로 고개를 내밀며 총을 쏘는 일의 반복. 교착 상태. 결국 모리의 몸을 온전히 노릴 방법은 없었다. 아무리 감정에 먹혔더라도 모리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모리를 노리지 않았다. 교착 상태를 해제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나는 내 마음으로 쏘았다.
나는 모리의 몸에서 떨어져 있는, 기차의 조종간을 노렸다. 그러자 기차가 급정차했다. 나는 흔들림을 각오한 채 왼팔로 기차의 좌석을 붙잡았다. 그리고 충분한 진동이 기차 전체에 퍼지는 순간을 기다렸다.
아주 찰나의 순간. 모리는 중심을 잃었다. 그녀의 몸이 통로로 몸을 드러냈을 때. 내 총은 불을 뿜었다.
언탄은 모리의 갈비뼈를 관통했다.
모리 레이코: 하아… 하아… 방심했다…
나는 그녀가 가재 괴물에게 부상을 당했던 때처럼. 고통에 신음하는 것을 잠자코 들었다. 그녀를 향해서 기차의 문을 열어젖힐 때. 나는 그 순간이 무척 달콤하리라고 생각했다. 캐롤 씨의 복수. 해갈의 순간은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내 예상을 틀렸다. 유쾌한 기분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저 허무함 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혼자이며, 캐롤 씨는 여전히 죽어 있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말초적인 복수의 쾌감은 내 안에 머물지 못하고 사라졌고 내 손은 또다시 비었다.
조종석 밖의 세상. 멈춘 기차 너머를 바라보자 황야가 보였다. 그녀의 삶은 나와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공허했다.
모리 레이코: 충분히 너를 계몽시키지도 못했는데. 실패했군. 결국 내가 원하던 모습은 될 수 없었던 건가…
나나시: 그래. 그게 다야. 약해빠진 나 하나도 못 이기는 게 결국 너라고.
그렇게 매도해봤자 내 생각만큼 후련하지는 않았다.
모리 레이코: 네 약한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모리가 죽어가듯이 말하자 나는 반문했다.
나나시: 뭐?
모리 레이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느낄 테지…? 이제 눈을 감았다 떠봤자 그 소중한 이와 다시 만날 일은 다시는 없다는 것을. 떠올리며 비참함을 느낄 테지…
나나시: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마…
모리 레이코: 특히 그 사람의 죽음을 내가 막을 수 있었으리라고, 어쩌면 죽음에 네가 기여한 것 같다고 느낄 때면 더욱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플 테지.
나나시: 언제부터 나이토를 그렇게까지 생각했다는 거야? 너에게도 최소한 인간적인 면이 있었다고? 믿는 게 더 한심한 거짓말이야.
모리 레이코: 나는 승부사와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탑에 오기 전의 일이지… 네가 들려달라고 애원해도 들려줄 생각 없다…
모리 레이코: 그런데. 승부사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언탄의 기억을 보았나…?
나나시: 너와 나이토가 서로 밧줄을 묶는 기억이었어.
모리 레이코: 그렇군. 그게 전부라면 이해되지 않는 일도 있겠지… 읽어라.
모리는 자신의 손에서 회갈색의 언탄을 건넸다.
나나시: 이건…
모리 레이코: 아주 조금만 담았다. 자세한 것은 재판장에서 마저 하지…
아무런 글자가 쓰여있지 않은 회갈색 언탄이었으나. 그것을 들여다보자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녀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았다. 나이토는 숨을 얕게 헐떡이고 있었으며, 시점은 좌우로 어지럽게 돌아갔다. 마치 고개를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승부사. 이런 건 용납할 수 없다. 용납할 수…"
"괜찮아. 다 괜찮아. 됐어. 네 잘못 아니야. 나는 그냥… 이 방법밖에 없었던 거야. 어쩔 수 없었어…"
"정말 미안하다. 나 때문이야… 모든 게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모리 레이코: 무분별한 공감은 그만둬라. 상담사를 닮는군.
나나시: 좋은 점을 닮는 거겠지.
나는 내 눈에 몇 방울 맺힌 눈물을 걷어냈다.
나나시: 나이토는 너보다 모든 면에서 더 나은 사람이었어.
모리 레이코: 동의한다. 그럼… 나를 몰아붙일 마지막 퍼즐 조각은 뭐지?
나나시: …밧줄. 밧줄이야. 히무로가 말했었지. 너와 나이토는 서로의 팔을 묶어주곤 했었다고. 나도 모니터실에서 작게 본 기억이 나. 그런데도 좀처럼 눈치채지 못했어.
나나시: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도 너희들의 팔이 묶여 있었는데, 모리 네가 밧줄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었다는 걸 말이야. 나이토가 살해당하는 과정 동안 밧줄이 연결되어있는 건 말이 안 돼. 그런데도 너는 밧줄이 끊겼다, 혹은 밧줄을 서로 묶지 않았다는 증언을 한 적이 없어. 그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
나나시: 네가 검정이 아니라면 그럴 이유도 없어.
모리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모리 레이코: 네 말이 맞다. 훌륭해…
나는 서서히 눈을 감는 모리의 뺨을 좌우로 때렸다.
모리 레이코: 뭐냐. 화가 덜 풀렸나…?
나나시: 아직 죽지 마. 하나 더 있어. 너는 이상할 정도로 누가 널 부축하는 일을 꺼려 왔지. 마유즈미가 옆에서 널 도와주려고 해도 넌 그녀를 매몰차게 밀어냈어. 단순히 네가 공리를 위하거나 마유즈미의 도움까지 받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 생각은 달라.
나나시: 너. 나이토와 함께 바닷물에 잠시 빠졌던 거지? 그래서 코트가 젖어 있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말리지 못했어. 그 이유는 네가 나이토의 몸을 지키기 위해 장작을 꺼내는 동안 모닥불의 크기가 줄어들었기 때문이야. 물기를 짜 봐도 그을음이 남지 않는 한에서 말리려면 한계가 있었겠지. 그래서 네 코트는 아직 덜 말랐을 거야.
나나시: 누구에게도 네 젖은 코트를 들키지 않으려고 한 것. 그게 바로 다른 이들의 손길을 피한 이유야.
모리 레이코: 그래. 그래. 완벽하군. 너는 당연히 감정에 먹혀서 내게 꺾일 줄 알았는데. 잘도 해냈다…
조종석의 바닥으로 모리의 피가 서서히 퍼져나갔다. 마치 물감 같았다. 즉사하지 못해 고통이 심할 텐데도 모리는 그다지 괴로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나나시: 네가 웃는 건 처음 봐.
모리 레이코: 내가 웃고 있나? 신기하군. 철학자가 되기로 한 뒤로부터, 누구에게도 웃음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나나시: 입 벌려. 총 쏘게.
모리 레이코: 아. 그래. 약속은 약속이지…
모리가 천천히 턱을 벌렸고,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녀의 입 안에서 왈칵 터져나오는 피를 보고 내가 느낀 것은 불편함 뿐이었다.
나나시가 재판장의 바닥에서부터 나타났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모리가 음소거되기 전부터 모노로그에게 이 사항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나나시: 모노로그. 모리의 음소거를 풀어.
모노로그: 진심인가? 음소거는 네가 승리한 결과인데. 게다가 가증스러운 그녀가 더 입을 열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나?
나나시: 잔말 말고 풀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나시. 무사해서 다행이야!
카이다 쿠로하: 그런데 어차피 무사하잖냐. 상관 없잖아?
후루미나미 나몬: 아니. 상관 있지. 기차 총격전 멋있잖아!
야가미 토가: 복수에 성공하시게 된 것. 미리 축하드리겠습니다.
칸나즈키 시노부: 진짜 문제는 끝난 뒤에 생기는 거겠지.
토키와 아유키: 고생 많았어. 진심이야.
이바라 쿠리스: 그런데 머리에 총 겨눈 거… 그거 모리 끌어들이려고 그런 거지? 진심으로 그런 거 아니지?
하기와라 우시오: 에이. 설마 그랬겠어? 진심으로 그럴 필요가 없잖아!
카나리 케이토: 씨. 잘 하면서 괜히 약한 척은…
23T의 말은 다른 이들의 말소리가 어느 정도 사그라든 뒤에야 들렸다.
23T5U130: 나나시. 이 재판이 끝나고 할 이야기가 있어.
나나시: 얼마든지. 그렇지만 지금은 재판을 끝내야겠어.
잘린 왼손과 오른발목 탓에 모리는 주저앉은 채로 스스로 몸을 일으키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지만, 그녀를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살인자였으니. 또 누군가가 도와주려 해도 모리 쪽에서 거절했을 것 같았다. 젖은 코트를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존심 때문에.
모리가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다듬을 새도 없이 모리는 늘 그렇듯이 차갑게 말했다.
모리 레이코: 결투에서 봤겠지? 내가 승부사를 죽인 검정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 그건 확실해진 것 같아. 그런데 난 물어봐야겠어. 대체 왜…
모리 레이코: 우선 투표부터 하지. 실수로라도 다른 누군가를 뽑지 마라. 여기서 나 혼자 살아남는 일이 생긴다면 그거야말로 공리의 끔찍한 훼손이 될 테니.
끝까지 공리. 공리인가? 질리지도 않느냐는 생각이 들던 순간. 내 뇌리에 차가운 깨달음이 하나 스쳐 지나갔다.
그 지긋지긋한 공리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두 번째 재판이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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