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로그는 한껏 신난 듯한 목소리로 검정이 누구인가를 발표했다. 몇 번을 들어도 거슬리는 음성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더했다.
모노로그: 투표의 결과. 모리 레이코가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검정으로 지목되었다. 과연 그 답은 정답인가. 오답인가?
모노로그: 죽음인가 삶인가. 삶인가 죽음인가. 그 결과는…
모리의 얼굴 아이콘이 화면에 떠올랐다.
복수는 끝났다.
모노로그: 이번에도 정답이다! 훌륭했다. 검정이 처음부터 살아날 생각을 하지 않은 학급재판이었지만, 그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훌륭했다.
모노로그: 특히 불편한 거동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사람을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 우리들의 모리 레이코에겐 박수를 보내지! 정말 최고였다!
모노로그가 종이 입술을 쩌억 벌리자 안에서 창백하고 가느다란 손이 튀어나와 박수를 짝짝 쳤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징그러…
마유즈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박수를 치는 이는 모노로그 말고도 또 있었다. 카이다가 모리를 향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카이다 쿠로하: 솔직히 존경한다. 이 새끼야. 몸이 그 꼬라지가 났는데도 기어 다니면서 사람을 죽이려 애쓴 년은 살다 살다 처음 봐. 나도 너처럼은 못 했을 걸?
카이다 쿠로하: 많이 무시했는데. 그 기백만큼은 인정해 줄게! 아이구. 잘 죽인다!
후루미나미 나몬: 솔직히 죽이는 장면을 직접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충분히 인상적이었어! 너희 둘 꽤 친한 것 같은데 나이토는 배신당한 거네? 아흑!
짧은 간격으로 박수를 치는 후루미나미를 보자 나 또한 박수를 치고 싶은 기분이 사라져 버렸다. 박수를 치는 순간 카이다나 후루미나미와 똑같은 사람이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모리는 그녀를 향해 웃으면서 박수를 치는 두 명을 물끄러미 보았다.
모리 레이코: 곧 죽을 나에게 남길 말은, 그게 다인가?
모리는 화조차 내지 않고 평온하게 말했다. 그녀의 미간에 늘 자리하던 찌푸림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기와라 우시오: 아니. 차고 넘쳐. 야. 너 나이토를 대체 왜 죽인 거야. 너 때문에 발이 아작난 애를!
이바라 쿠리스: 나이토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데… 그걸 무참히 죽여버렸어! 몸을 반으로 자르면서까지 왜 이래야만 했어?
히무로 시라베: 정말 왜 그런 거지?
모리 레이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부 내 잘못이다. 내가 아니었다면 승부사는 아직 살아있었을 것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그럼 네가 안 죽였으니까 살아있었겠지. 무슨 개같이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모리 레이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우선 나는 승부사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내가 죽을 생각을 했지.
나나시: 뭐?
나는 태연하게 그렇게 말하는 모리를 보고 목덜미가 섬짓해지는 것을 느꼈다.
토키와 아유키: 자살할 생각이었다는 거야?
칸나즈키 시노부: 근데 니가 죽으면 나도 죽는데?
모리 레이코: 그렇게 하려 했다는 말이다.
칸나즈키가 명랑하게 묻자 모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야가미는 그런 모리를 보고 의아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야가미 토가: …두 명이 당신과 함께 죽는데,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모리 레이코: 그렇다. 그게 공리를 증진시킬 마지막 방법이었다.
두 명이 한 명의 길동무로 같이 죽는데 어떻게 공리에 적합한 일이냐 또한 의문이었지만, 그녀를 향한 의문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나나시: …그런데 어떻게 나이토가 죽은 거야.
모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모리 레이코: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말해 주겠다. 내가 해변에서 잠에 든 뒤 깨어난 직후에 벌어진 일이다.
나이토 유즈루: 야. 너… 젠장. 어디 가는 거야? 돌아와…
승부사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나는 인기척을 느끼고 잠시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그 직후 다시 잠에 빠졌지. 그것은 시계공이 모닥불에 다가와 항생제를 탈취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마 두 시간쯤 뒤에 나는 다시금 눈을 떴다. 항생제가 몸에 충분히 돌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몸을 더디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은 생겼다.
나는 승부사의 가방 안에 들어있는 단검을 꺼냈다.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알아챘고 그게 단검임도 이후 알게 되었다. 먼저 나는 단검을 꺼내고 나와 승부사 사이에 묶여 있던 밧줄을 잘랐지. 내 손에 남은 밧줄이 묶인 것도 풀어버렸다.
해야 할 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승부사의 몸을 흔들어 깨웠다.
나이토 유즈루: 아. 형… 조금만 더 자자…
모리 레이코: 승부사. 일어나라. 큰 소리 내지 말고. 나는 너에게만 보여줄 생각이다.
나이토 유즈루: 뭐야. 모리…? 뭘 보여준다고…
후루미나미 나몬: 잠깐잠깐. 이거 심의 괜찮은 거야? 카나리나 칸나즈키가 들어도 돼?
카나리 케이토: 나도 망할 고등학생이야!
하기와라 우시오: 끼어들지 마. 얘기 좀 듣자!
나이토 유즈루: 애초에. 너 몸이 나은 거야? 다행이다!
모리 레이코: 기력이 조금이나마 돌아왔다. 아무래도 항생제의 효과가 조금이나마 들은 것 같군. 덕분에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너도 마찬가지겠지.
나이토 유즈루: 어. 정말이네…
승부사는 침낭에서 자신의 몸을 꺼내며 말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말을 했다.
모리 레이코: 이것은 하늘이 내게 준 기회다. 마지막으로 공리에 헌신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진 것이다.
나이토 유즈루: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모리 레이코: 나는 성질이 급한지라. 곧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단검을 내 목에 겨누었다. 그러자 승부사는 눈을 휘둥그레 떴지.
나이토 유즈루: 야. 내 단검…!
모리 레이코: 다른 이들을 깨우지 마라. 조용히 대화하지. 큰 소리를 내면 곧바로 내 목을 벨 것이다.
승부사는 천치가 아니었다. 그는 충분히 목소리를 낮추고 나를 달래려 했지.
나이토 유즈루: 왜 그러는지는 몰라도 정신 차려. 네가 죽으면 네 후원자 두 명도 함께 죽는다고… 그건 공리를 위한 일이 아니잖아.
모리 레이코: 두 명의 손실은 뼈아프지. 그렇지만 이곳은 살인게임 안이다. 후원자가 경주마와 함께 죽더라도, 반드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제도나 편법이 있을 것이다.
모리 레이코: 밀수업자가 살해당했으나 시련을 통해 등장한 것처럼, 내 후원자들 또한 또다시 시련에 등장할 수가 있다. 나는 불가능하겠지만.
책에게 남몰래 물었을 때. 가재 괴물의 감염으로 인한 죽음은 첩자의 살해로 보기 어렵다더군, 그럴 수만 있었다면 첩자와 함께 죽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었다. 누구의 살해도 아니라 단순한 사고사로 끝날 목숨이라면, 차라리 해변의 모든 이들을 탑으로 보내야 했지.
나이토 유즈루: 그런 가능성에 목숨을 걸 순 없어. 너도 알잖아. 그거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모리 레이코: 그렇지만 이게 유일한 길이다.
나이토 유즈루: 아니. 공리를 위한다면서 두 명을 길동무로 데려간다고? 말도 안 돼. 적어도 내가 아는 모리는 그런 가능성에 사람 목숨 안 걸어…
나이토 유즈루: 넌 그냥 순교하고 싶은 거야. 공리를 증진시켰다고 만족하기 위해 죽음으로 도망치는 거라고 말했잖아. 그건 네 자기만족이야.
모리 레이코: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생각해 보았다. 내가 정말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말이다. 나는 정말 공리를 계속 원해야 하는 것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건 독선이 아닌가? 진정코 공리를 증진시킬 방법은 무엇이지?
모리 레이코: 그리고 이게 내 결론이다. 아무리 가능성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공리를 위해 행동한다.
나이토 유즈루: 멋진 척 해봤자 개소리잖아… 네가 움직일 수 있다면 히무로가 항생제를 얻어 올 때까지 버틸 수도 있다고! 지금 네가 자살하면 그냥 세 명이 죽고 끝나는 거야.
나이토 유즈루: 더 나은 방법도 찾지 않고 죽는 건 그냥 공리를 명목으로 한 자살일 뿐이야. 모리…!
모리 레이코: 그럴지도 모른다. 인정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러지 않고서야 과거의 나는 누구에게도 구원받을 수 없으니까.
모리 레이코: 공리를 저버리는 것은 나를 저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늘 똑같지. 나는 이런 삶을 선택한 적이 없다. 처음부터 이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나이토 유즈루: 그러지 말고 어떻게든 버텨. 같이 돌아가자…
모리 레이코: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유감이다. 적어도 마지막으로 네게 작별인사를 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군. 너라면 발의 부상을 딛고 다시 일어날 수 있으리라 믿겠다. 그리고… 미안했다.
할 말을 전부 하다보니, 그만 틈을 너무 많이 주고야 말았다.
나이토 유즈루: 미안할 짓 하지 마. 야. 하지 말라고…
모리 레이코: 난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승부사.
나이토 유즈루: 그럼 나도 타협 안 해.
승부사가 내게 달려들었다. 솔직히 당황했다. 그만큼 격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아마 그의 감염 진행도는 나보다 낮았기에 그 정도로 움직일 수 있었으리라.
승부사의 억센 팔이 내 손을 붙잡았다. 나에게서 단검을 빼앗으려 한 것이다.
모리 레이코: 이거 놔라… 이거 놓으란 말이다…!
나이토 유즈루: 절대 안 돼! 다들 우웁…!
그가 재빠르게 입을 열려는 사이, 나는 왼손을 빼고 코트의 주머니 안에서 소라 껍데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의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카이다 쿠로하: 웬 소라 껍데기?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 모리! 설마 그…
다 한 번씩 들었는데 너만 안 들으면 따돌리는 것 같잖아. 내키면 야가미한테도 한 번 들려주고 그래.
히무로 시라베: 당연히 버렸을 거라 생각했는데.
좋은 의도로 받은 선물인데 버릴 수는 없었다. 또 유사시에 흉기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지.
아무튼, 소라 껍데기를 물자 승부사는 더 이상 큰 소리를 내서 다른 이들을 깨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점점 힘에 부치고 있었지. 애초에 그보다 약했고 손가락도 그만큼 많지 않았으니.
난 승부사에게 계속 손을 놓으라 요구했으나 승부사의 힘은 조금도 풀리지 않더군. 소라의 껍데기를 입에서 뺄 생각도 없었다. 나와 그는 몸싸움을 하면서 모래밭에서 몸을 굴렸다. 그러다 몸에 차가운 바닷물이 느껴졌지. 가재 괴물들은 빠르게 움직이는 나와 승부사를 경계하고 오히려 멀어졌다.
그렇게 몸싸움을 하던 도중. 그의 몸 위에서 단검을 빼앗으려 애쓰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 손가락이 일곱 개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일곱 개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몸을 당긴 것이지. 그러자 나는 단검을 놓쳤고, 내 몸은 승부사에게서 튕겨져 나갔다.
나는 승부사에게 단검을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어난 일은 그것보다 더 끔찍했다.
나이토 유즈루: 퉤! 허억… 헉…
승부사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소라 껍데기를 뱉더니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모닥불에서 조금 먼 거리였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의 몸에 단검이 박혀 있음은 확실하게 보였다.
모리 레이코: 승부사…? 승부사…
내가 당기는 힘이 순간 사라지자 승부사는 단검이 자신에게로 향한 채로 팔을 당긴 것이다. 단검은 그의 가슴팍에 박혀 있었다.
나이토 유즈루: 커흑… 윽…
모리 레이코: 아… 안돼…
나이토 유즈루: 안 되긴 뭐가 안 돼. 된 거야. 차라리 이게 나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단검을 뽑아 봤자 출혈의 가속밖에 이루어지지 않았을 테니.
나이토 유즈루: 내 앞에서 누가 죽는 것보단 이게 낫다고…
모리 레이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이런 꼴로 죽는 게 네가 원하는 일이란 말인가?
나이토 유즈루: 네가 죽는 것보단 이게 낫잖아…
모리 레이코: 아니… 이게 최악의 수다. 차라리 네가 스스로 죽은 것이라면 희생자는 두 명으로 끝났을 텐데, 내가 검정이 되어 처형당하게 될 것이다. 세 사람이 죽는 건 마찬가지다.
나이토 유즈루: 그럼 적어도 내가 널 죽인 건 아니라 다행이지.
나는 오른손으로 승부사의 멱살을 잡고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한 뒤. 윽박질렀다.
모리 레이코: 그게 왜 다행이지? 난… 도무지 너를 이해할 수가 없다. 승부사… 이게 무슨 꼴이냐. 제기랄. 대체 무슨… 왜 이 결과에 만족하냐는 말이다…
나이토 유즈루: 승부에서 이겼으니까. 철학자마저도 사상 대결에서 꺾었다고.
그 당시에는 그가 뜬구름을 잡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지. 그는 마지막까지 내게 승리한 것이다. 철학의 대결에서 기사주의가 공리주의를 꺾은 것이지.
나는 그때 깨달았다. 승부사는 자신의 앞에서 누군가가 죽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설령 자신이 죽더라도, 그리고 자신의 후원자가 죽더라도 몸을 던졌다. 그는 타협하지 않았다.
모리 레이코: 승부사. 이런 건 용납할 수 없다. 용납할 수…
나이토 유즈루: 괜찮아. 다 괜찮아. 됐어. 네 잘못 아니야. 나는 그냥… 이 방법밖에 없었던 거야. 어쩔 수 없었어…
나이토 유즈루: 진정한 기사가 되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없었어.
나는 뒤늦게 중얼거렸다.
모리 레이코: 정말 미안하다. 나 때문이야… 모든 게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나이토 유즈루: 아니거든…? 그러니 괜히 너무 자책하지 마… 다 괜찮으니까…
나이토 유즈루: …이제 만족해? 아빠.
그게 승부사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내게 영원한 마지막 패배를 남겼다.
그를 죽이고 난 뒤에야 알게 되었지. 내게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건 승부사일 것임을.
나는 승부사의 시체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멍청한 일이었지. 그의 몸을 뜯어먹으려 가재 괴물들이 몰려들었기에, 생각할 겨를은 없어졌다. 나는 세 발로 해변을 걷고 밧줄을 내 가방에서 꺼냈다. 밧줄을 입에 물고 승부사의 시체에 다가가자 가재 괴물들은 승부사의 팔과 몸까지 뜯어먹으려고 덤비더군.
나는 무게를 줄이려 한 게 아니다. 승부사의 시체를 그런 것들이 욕보이는 일을 막고 싶었지. 그렇지만 하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팔과 몸은 지켰지만…
사실 생각할 겨를이 없었기에 그 당시의 기억은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나는 재판을 너희들의 시험으로 여기려고도 했고, 자수하려고도 했고, 그냥 다시 내 목을 그어 버리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 것은 하지 못했지. 두 번 구해진 목숨을 헐값에 줄 순 없었으니.
그 뒤로는 너희가 아는 대로다. 나는 최소한의 살해 트릭을 만들었고, 사로잡힌 남자가 검정을 죽이는 것에 눈이 팔렸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내 마지막 목표는 그를 계몽시키는 것이 되었다. 성공했는지는 모르겠군.
하기와라 우시오: 그래서. 나이토를 상대로 배신을 때린 게 아니란 말이지?
하기와라가 못 미더운 듯이 말했다. 나도 솔직히 믿고 싶지는 않았다. 나이토가 자신의 죽음에 만족했고 모리도 살인을 원치 않았다기보다는, 모리가 악의를 가지고 그를 살해했다고 보는 편이 증오하기에 편했다.
그렇지만 모리가 건넨 그 기억만큼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이토는 모리를 원망하지 않았다. 나이토조차도.
히무로 시라베: 안타까운 사고지만 결국 모리 네가 초래한 일이야. 나이토는 죽었고, 그러니 너도 죽어야지.
모리 레이코: 네 말이 맞다. 나는 사건의 경위를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의 죽음으로 명확해졌지. 나는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공리를 주창한, 편협한 이에 불과했다는 것을 말이다.
하기와라 우시오: 공주님. 기가 많이 죽으셨네.
모리 레이코: 사실을 말할 뿐이다. 승부사는 내게 승부를 걸었다. 그리고 나를 꺾었지. 그게 전부다. 변명의 여지도 없지.
모리 레이코: 모든 것은 나의 과오다. 그리고… 나 때문에 소중한 이를 잃은 너희 모두에겐,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군. 너희들의 성에 차진 않겠지만 말이다.
모리 레이코: 그리고 코미디언.
하기와라 우시오: 왜 불러?
하기와라는 못마땅한 기색을 담아 대꾸했다.
모리 레이코: 너는 명석함을 가지고 있다. 너는 의식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네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푼수처럼 웃어넘기지 말고 그것을 이용해라. 갈고닦아 네 무기로 삼아라.
하기와라는 모리가 미친 소리를 했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모리는 개의치 않고 토키와를 돌아보았다.
모리 레이코: 리더? 이제 너를 도와줄 이는 사라졌으나 너는 남아 있군. 리더의 역할을 내려놓을지, 고수할지는 네 선택이다. 현명하게 선택해라.
토키와 아유키: …알겠어.
토키와는 비장함과 자신 없음을 한 얼굴에 모두 담았다.
모리 레이코: 서예가. 계속 성장해라. 프로파일러. 앞으로도 다른 이들의 생존을 위해 봉사해다오. 사로잡힌 남자. 너는 이제 자유다. 네 삶을 채울 무언가를…
모노로그: 미안하지만 모리 레이코. 이제 시간이 다 되었다. 곧 처형이 집행될 것이다.
모리는 혀를 차고는 고개를 숙였다.
모리 레이코: 말을 다 끝내게 두지도 않는군. 어쩔 수 없지. 이제 아무런 불평 없이 망각에 들겠다.
모노로그: 초고교급 철학자. 모리 레이코를 위한 특별한 처형을 준비했다. 자신의 재능에 배신당하는 애절한 모습을 너희 모두 똑똑히 구경해라!
모리는 눈을 감았다.
후루미나미 나몬: 모리!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그리고 모리의 침묵을 후루미나미가 깼다.
후루미나미 나몬: 이 살인 게임. 너에게 공리를 향한 열망을 주었으면서 충분한 능력은 주지 않은, 그래서 너를 한심한 패배자로 만든 이 잔인한 행성에게의 마지막 유언을 말해 줘!
모리 레이코: 공리를 해친 나 따위가 남길 말은 없다.
내가 들은 모리의 마지막 목소리는, 체념과 자기혐오가 뒤섞인 허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모노로그: 처형 시작!
2초 정도의 암전이 지나자 모리는 어느새 우리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바닥을 뚫고 사라졌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마치 어둠이 사라지자 모리의 몸 또한 사라진 것 같았다.
우리가 찾는 모리의 모습은 재판장에 내려온 모니터를 통해서나 볼 수 있었다. 화면은 모리의 부릅떠진 두 눈을 시작으로 천천히 시점을 뒤로 빼며 모리의 몸 전체를 조명했다.
모리는 최대한 담담해 보이려고 했으나,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으로 보아 분명히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겐 모리를 둘러싼 풍경이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뒤로 길게 열린 통로. 작게 보이는 좌석들.
모리는 결투가 이루어지던 장소에 있었다. 똑같이 기차를 조종하고 있었다. 결투와 처형에서 다른 점이 있다면 처형은 모리가 통제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화면에 글씨가 떠올랐다.
초고교급 철학자 모리 레이코 처형
< Memento Mori >
화면 속의 모리는 기차를 몰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기관사 모자가 없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조종석에 앉아 기차를 조작하고 있었다.
시련 안에서는 모리의 손가락과 발목이 돌아와 있었지만, 처형 속에서는 아니었다. 그녀는 목발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버튼을 누르고 레버를 당기는 기차를 움직이려 애썼다. 그녀가 조종하고 있는 기차의 바로 앞에.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기관차가 달려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모리는 기차의 속력을 줄여 보려고 애썼으나, 여의치는 않았다. 선로를 바꾸어도 기관차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결국 모리는 조종실의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한 발로 뛰어, 조종실의 탑승구로까지 이동했다. 일곱 개의 손가락에 힘을 가득 줘 간신히 문을 연 모리는 눈을 질끈 감고 달리고 있는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모리의 몸이 메마른 땅 위에 떨어지자 그녀의 몸이 몇 바퀴 나뒹굴었다. 사람 모양의 인형이 기차에서 떨어진 것만 같았다. 건장한 사람도 죽고 남았을 상처였다. 그녀의 몸과 땅에 피가 서서히 퍼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관절이 몇 차례 꺾이고 내장에도 피해가 갔을 것이다.
화면 속의 모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를 비추는 화면의 뒤편에서 기차가 서로 충돌하고 화려하게 탈선하는 것과 대비되는 일이었다.
내가 화면에서 눈을 떼려던 찰나. 모리가 고개를 들었다.
모리는 잔해가 떨어지는 반경에서 멀어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것은 움직임보다는 몸을 떠는 일에 가까워 보였다. 화면은 피칠갑이 된 모리가 관절이 꺾여버려 덜렁거리는 닭다리처럼 된 팔을 뻗는 것을 잔인하게 클로즈업했다.
그리고 당연히.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얼굴이 피로 뒤덮인 모리는 자신의 몸에 닿는 무언가에 몸 밑을 내려다보았다. 메마른 땅 밑에서 기차의 철도가 솟아올랐다.
모리는 기차의 철도 위에 놓였고, 곧 그녀가 조종하고 있던 것과 똑같이 생긴 갈색 기차가 그녀의 몸 위로 달려왔다.
모리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움직였다. 그게 모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기차의 경적 소리와 함께 모리가 사라졌다. 기차 바퀴가 아주 조금 들렸으나 그 뒤의 차량 바퀴는 그러지 않았다. 기차는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모리를 집어삼킨 채로.
그리고 다시 화면에 들어온 모리의 잔해는 피에 잔뜩 젖은 그녀의 회갈색 머리카락뿐이었다.
복수는 끝났다.
그런데도 나는 조금의 만족조차 느끼지 못했다.
카나리 케이토: 저… 정말 죽은 거야? 저렇게 죽고 끝이라고?
회중시계의 바늘이 이전에 본 적 없는 속도로 빙글빙글 돌아갔다.
칸나즈키 시노부: 잘 가. 모리.
야가미 토가: …대체 모노로그 씨는 내 처형 영상을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지?
하기와라 우시오: 나이토. 끝났어. 끝났다고…
후루미나미 나몬: 초고교급 철학자의 처형. 야가미의 것과는 달랐어! 모노로그! 자기 재능에 배신당한다는 건 이 자리의 모두가 자기 재능에 맞는 테마의 스페셜 처형을 가지고 있다는 거지? 아. 다음은 누구 걸 볼 수 있을까?
카이다 쿠로하: 궁금하긴 하네. 다음에는 누가 누굴 죽이고 이 자리에서 처형당할지 말이야.
마유즈미 나데시코: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태연하게 할 수 있어…
히무로 시라베: …살인을 막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없을까.
나나시: 다 끝났어. 다 끝났다고.
나는 화면에서 눈을 뗐다. 자. 복수는 끝났다.
다음은 뭐지?
23T5U130: 나나시… 괜찮아?
23T가 어느새 내게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23T에게까지 불필요한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나나시: 기분이 최악이야.
토키와 아유키: 나나시. 잠깐!
엘리베이터에서 1층으로 나와 해산할 때. 토키와와 마유즈미가 내게 다가왔다.
나나시: 왜 그래?
토키와 아유키: 이제… 어떻게 하지?
토키와는 나를 불러 세운 장본인이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엉성했다. 그러나 토키와의 잘못은 아니었다. 누구의 잘못인지조차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나나시: 자러 가야지. 지쳤잖아. 나도 지금 피곤해… 일단 자고 생각해보자.
마유즈미 나데시코: 토키와 말은, 캐롤 씨 없는 우리가 앞으로 뭘 해야 되냐고 말하는 것 같아…
나나시: 나도 알아. 그러니 자고 생각하자고.
나는 애먼 사람에게 불쾌한 반응을 보이지 않게끔 신경을 기울였다. 소중한 이들에게만 화를 내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또 없을 것이다.
토키와 아유키: 알겠어. 모두 지쳤으니까. 생각이 정리되면 다시 만나자. 그래도 나나시 네 곁엔 우리가 있다는 거 기억해 줘.
토키와 아유키: 넌 혼자가 아니야… 23T도 있고, 히무로도 있어.
나나시: 나도 알아.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도 지금 많이 슬프지만… 캐롤 씨가 없더라도 터치파는 계속 이어질 거야.
불가능해.
카텟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카텟의 딘이 캐롤 씨였기 때문이야. 우리 중 누구도 딘이 될 수 없어. 누구도 캐롤 씨를 대체할 수 없을 거야. 그 포용력을 넘을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어. 전부 자격 미달이야. 우리 모두가…
잠깐… 그런데 딘이 뭐지?
카텟의 지도자.
토키와 아유키: 마유즈미의 말이 맞아. 캐롤 씨는 우리가 무너지던가 뿔뿔이 흩어지는 일을 원하지 않으실 거야.
토키와 아유키: 캐롤 씨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안타깝지만… 최선을 다할 수밖에.
마유즈미 나데시코: 터치파를 계속 이어나갈 사람. 여기 붙어라!
마유즈미가 애써 경쾌한 체를 했다. 내 눈이 잠시 커졌다가 본래의 크기를 되찾았다. 어떻게 캐롤 씨가 죽었는데 그렇게 기분좋은 척을 할 수 있냐고 물으려는 충동이 나를 휘감았다.
다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당연히 자기 눈을 손가락으로 쑤셔서 파 버리고 싶은 느낌이 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목을 손톱으로 긋거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려는 생각을 억누르느라 바빠야 하잖아.
우리가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캐롤 씨가 그걸 용서할까? 물론 그녀는 용서할 테지.
그렇지만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을지는 도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토키와 아유키: 일단 난 찬성이야.
나나시: 나도… 찬성할게.
나는 오른손잡이 모임의 유일한 왼손잡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토키와와 마유즈미는 서로의 오른손을 한 군데에 모았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의기투합. 손을 한 군데에 모으고 높이 들며 아자 아자 파이팅. 그런 거겠지. 마유즈미는 살짝 웃으면서 내 손을 잡아 그들에게로 끌어오려 했다.
나나시: 안 돼!
그 순간 나는 팔을 뒤로 빼 마유즈미의 손을 피했다. 마유즈미의 손이 허공을 가르고 그녀는 어색한 자세를 한 채로 굳어버렸다.
토키와 아유키: 앗.
마유즈미 나데시코: …아하하하! 실패!
나나시: 마유즈미… 내가 의도한 건 아니야. 정말로. 내가 지금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 손을 잡을 수가…
나는 마유즈미를 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잘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마유즈미가 내 얼굴을 바라보는 표정이 어색한 웃음에서 점점 의아함과 당황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나시. 너 눈동자 색이 왜 그래…?
나나시: 내 눈동자 색이 왜?
마유즈미 나데시코: 지금… 금빛이야.
나나시: 금빛?
내 최후의 미련이었던 당신에게. 나의 일부를 남깁니다.
나나시: 맞아. 그랬었지… 그래서 히무로가 캐롤 씨의 눈에 대해서…
나는 내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책임이 손에 담겨 있었다. 말 그대로.
그리고 그 손을 누군가가 낚아챘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빼려다가 손에 차가운 감촉을 느꼈다.
23T5U130: 나나시 좀 빌릴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23T는 그대로 토키와와 마유즈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23T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발걸음을 맞추는 것만 신경 쓰게 되었다.
토키와 아유키: 어…? 아. 알았어.
마유즈미 나데시코: 나중에 돌려줘야 해!
마유즈미의 목소리가 계단을 오르는 동안에 들려왔다. 나는 23T에게 항변하듯이 말했다.
나나시: 이번에는 내 발로 걸을 수 있어. 23T. 부축할 필요 없어. 애초에 부축도 아니잖아.
23T5U130: 열쇠 꺼내. 나나시. 네 숙소에 들어가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23T는 자신이 잡고 있는 내 두 손을 느슨하게 풀어주며 말했다. 나는 23T의 고압적인 태도에 약간 불만을 느끼며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그러다 내 손에 무언가가 닿았다.
나나시: …아.
23T5U130: 왜 그래?
나나시: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말끝을 흐리며 내 숙소의 문을 열었다. 23T는 내가 누군가에게 발각되어선 안 된다는 듯이 나를 숙소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쾅 닫았다.
문을 등진 23T는 서서히 내 쪽으로 걸어왔다.
23T5U130: 간단하게 물을게. 나나시.
23T는 내가 예상한 질문을 던졌다.
23T5U130: 너. 죽으려는 거야?
나나시: …결투 때문에 그러는 거구나.
23T의 음성은 화가 난 것처럼 조금 거칠어졌다. 나는 23T가 그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다고 생각했다. 한 번 있었던가? 노네임이 인공지능의 실체에 대해 말했을 때. 그러나 표정이 없었기에 나도 확신을 느끼지는 못했다.
23T5U130: 누군가는 네가 모리를 끌어내기 위해 속임수를 썼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알아. 너는 네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 했어. 어차피 결투 속에선 안 죽는다는 말 마.
나나시: 어떻게 자신의 머리에 태연하게 총구를 겨눌 수 있느냐의 문제겠지.
모리도 이야기한 바 있었다. 방아쇠를 당기면 다시는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23T5U130: 캐롤 씨의 죽음이 그렇게 괴로운 거야?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나나시: 모리조차도 죽음으로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못할 건 없잖아.
23T5U130: 너 정말…!
23T는 내 뺨을 때리려는 것처럼 손을 내 얼굴로 빠르게 가져다 댔다. 내 얼굴 바로 앞에서 23T의 손이 멈추자 작은 바람이 불고 내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23T5U130: 나나시.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느낄지 알잖아.
나나시: 알아. 그러니까 걱정 마. 이제 와서 죽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 정도로 글러먹은 놈까진 아니야…
23T5U130: 잘 안 믿겨.
23T는 여전히 미심쩍은 듯이 팔짱을 꼈다.
나나시: 정말 걱정 안 해도 돼. 그냥 내가 나 자신한테 투정을 부린 거야. 이제 응석을 받아줄 사람이 없으니 혼자 하는 거지. 나 이제 살기 싫어. 사는 게 괴로워. 그냥 죽고 싶어. 나한테선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어…
나나시: 그렇게 쏟아내고 나니까 한결 나아졌어.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23T5U130: 아직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역시 23T를 속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23T5U130: 실존적 위기를 겪고 있다면 나한테 털어놓아 봐. 난 기계 몸 안에 들어있는 사람이라고. 이 분야에 있어서는 나도 전문가야.
나나시: 아무도 캐롤 씨의 역할을 대신할 순 없어. 23T.
23T5U130: 나도 알아. 그렇지만 듣는 건 가능하지.
나는 23T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23T5U130: 그럼 일단 내 쪽에서 질문을 할게. 왜 모리에게 생각보다 화를 내지 않은 거야? 탑에서는 검정을 죽일 생각에 가득 차 있었잖아.
나나시: 잊어 줘. 그건… 성숙하지 못한 행동이었어.
23T5U130: 그럼 해변에서 순식간에 성숙해진 거니?
그래.
중간의 과정을 전부 생략하면, 결국 그 말이 맞았다.
나나시: …나는 취조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모리를 죽일 생각에 가득 차 있었어. 캐롤 씨의 복수를 해야 했으니까. 아무리 모리가 의도한 살해가 아니었다고 해도 죽여야만 했어.
나나시: 그런데 내가 찾던 냉혹한 살인자는 어디에도 없더라. 오히려 모리는 나이토가 살길 원했지. 자기보다 나이토가 더 나은 사람이라고, 그래서 살아야 한다고 했어. 나이토가 모리를 지키려 하지 않았다면 나는 모리의 자살에 휘말려서 함께 죽었을 거야.
나나시: 그러니까 결국. 그 자리에서 나와 캐롤 씨 중 한 명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거야. 나이토는 내가 죽지 않게 하는 대신 캐롤 씨가 죽게 만들었어. 나이토의 독선에 캐롤 씨가 휘말렸다고.
23T5U130: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지만, 그렇다고 나이토를 규탄하는 거야?
나나시: 아니… 단순히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미워하지 않는 게 어렵다는 거야. 다 자기만의 사연을 가지고 있어. 모리도 나이토한테 우정 비슷한 걸 느끼고 있었고, 나이토를 죽인 일에 자신을 원망했어. 끝까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던 것 같아.
나나시: 내게 필요한 건 살인자 모리뿐이었는데. 그 사람의 여러 모습을 함께 보니 살인자에게만 화를 낼 수가 없었어. 아무것도 몰랐다면 마음 편히 모리를 저주하고, 통쾌함을 느끼며 잠을 잤겠지만… 읽어버렸어. 모리가 마지막으로 움직인 입술 모양을.
입을 벌리고, 입을 살짝 닫고, 입술을 동그랗게 만드는 것.
23T5U130: 아. 이. 그리고 오였나?
나나시: 나이토였어.
모리는 마지막으로 나이토를 불렀다.
나나시: 그 모리 레이코가. 마지막에는 나이토를 불렀다고.
23T5U130: 아…
나나시: 정말 짜증 나. 그런 모습을 보니 오히려 모리를 동정하는 마음까지 들고. 내 나약함에도 지긋지긋해져. 사람을 마음 놓고 미워하는 것조차 못 하다니.
나나시: 마치 증오를 누군가에게 빼앗긴 것 같아…
23T5U130: 네가 누군가를 미워하기엔 너무 상냥해서 그래. 나나시.
나나시: 그러지 마. 상냥함은 곧 죽을 거라는 저주잖아. 캐롤 씨에게 일어난 일도 똑같았어.
23T5U130: …그랬지. 미안해.
나는 모리가 처형당하던 무대에 대해 생각했다. 모리의 결투장과 닮아 있었다. 아니. 둘은 똑같았다.
나나시: 모리의 심상이 만들어낸 결투장을 떠올리면 내 미래를 엿보는 것 같아. 오직 하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며 다른 모든 건 버리는 거지. 황량한 자신의 마음속에 뜻 하나만을 품는 거야.
나나시: 모리의 말마따나 내겐 아무것도 없었어. 모리도 공리 말곤 아무것도 없었지. 그러니 나와 그녀의 끝은 닮아있을 것 같아. 캐롤 씨를 죽게 만든 사람이 나와 어느 정도 닮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나나시: …난 모리가 정말 싫어져.
그녀는 이견 없는 이 탑의 등에였다.
그녀는 내게 불편한 깨달음만을 환기하고 내 미래의 거울이 되었다.
심지어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복수도 불가능했다. 그대로 모리 레이코라는 사람은 내 가슴속에 생선 가시처럼 박혀 있겠지. 늘 불편함을 유발하고, 죽음을 기억하게 만들겠지. 혈관에 쇳물이 흐르는 것 같은 냉정한 모습의 최후에는 친구를 부르는 모습이. 내 뇌리 속에서 잊히지 않겠지…
나는 모리가 싫었다.
23T5U130: 내겐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야. 그만큼 다른 무언가를 가질 수도 있고, 네가 가지고 있던 것을 회복할 수도 있어.
그러면 지금 나나시라는 나의 정체성은 서서히 옅어지겠지.
노네임. 네임리스. 아브라함. 우티스. 나나시. 수많은 내가 뒤섞이고, 지금은 아직 나나시에게만 있는 캐롤 씨라는 사람도 서서히 작아지겠지. 마유즈미에겐 히무로가 있고 토키와에겐 다른 모두가 있으니 다들 캐롤 씨를 잊고 서서히 앞으로 나아갈지도 몰라.
그래도 되는 거야?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나?
나나시: 23T. 혹시 이 결과에 만족해?
나는 스스로를 억누르지 못하고 결국 묻고 말았다.
23T5U130: 무슨 결과?
나나시: 캐롤 씨는 이제 우리 곁에 없잖아. 나와 캐롤 씨가 멀어지는 편이 나을 거라고 말했으니. 이 결과에 만족하냐는 거야.
23T5U130: 아무리 그래도 내가 사람의 죽음으로 기쁨을 느끼지는 않아. 나나시.
나는 23T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나나시: 아무래도 그렇겠지.
23T5U130: 캐롤은 인상적인 사람이었어. 나나시. 늘 다른 사람을 도왔잖아. 그 다른 사람들에게서 경계를 당하더라도 말이야.
나조차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녀를 경계한 적이 있다. 터치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3T 또한 내가 그녀에게 강제적인 터치를 당했다고 착각했을 때. 나를 놓으라고 차갑게 통보했다. 23T는 캐롤 씨를 모종의 이유로 계속 믿지 않았던 것이다.
나나시: 가슴속엔 늘 외로움을 가지고 계셨어. 다른 사람과 가까워질 수 없는 이유가 있었고, 아직 마음에 상처가 새겨져 있었어.
23T5U130: 너도 그랬어. 나나시.
맞아. 그런 점에서 나와 캐롤 씨는 닮아 있었다.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을 뿐 나만큼이나 혼란스러워했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지…
그러나 결국 알아내지는 못했다. 캐롤 씨는 자신의 터치에 대해 규명할 수 없었다. 나는 기억을 온전히 찾지 못했고, 우리가 서로 어디에서 만난 것인지조차 생각해낼 수 없었다.
나는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것을 손에 쥐고 천천히 꺼냈다.
검은색의 머리카락 묶음이 내 주머니 속에서 나타났다.
23T5U130: 그거… 혹시 캐롤의 머리카락이야?
나나시: 맞아… 그 찬란한 금빛이 이제 사라졌어. 마법은 죽었어. 캐롤 씨는 죽었다고.
23T5U130: 지금은 많이 괴롭겠지. 나나시. 이해해. 그렇지만 그건 네가 캐롤의 죽음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야.
나나시: 아닐 걸… 내가 재판 당시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토키와랑 마유즈미가 캐롤 씨의 죽음에 슬퍼하는 걸 보고. 화가 났어.
23T5U130: 왜?
나나시: 그냥… 모르겠어. 그때는 모든 게 다 미워서 그랬나 봐. 무엇보다… 내가 성숙하지 못했어.
나나시: 나이토의 시체가 발견되고 해변으로 통하는 길이 열리기 전에. 나랑 토키와는 카나리의 방문을 열쇠로 따고 들어갔어. 그런데 토키와가 갑자기 조용하게 울음을 터뜨렸어. 울음소리를 숨기려고 애쓰면서.
나나시: 토키와를 위로해줘야 하는데 화가 났어. '왜 지금 우는 거지? 차라리 검정 잡아서 죽일 생각에 몰두하라고, 카나리랑 후루미나미한테 화를 쏟아내면 되잖아. 캐롤 씨를 죽게 만든 사람이니까. 왜 나처럼 감정을 도외시하지 않는 거지?'
23T5U130: 복수심으로 슬픔을 막으라는 거야?
나나시: 그랬던 것 같아. 눈을 돌렸을 뿐이야. 마유즈미랑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어. 침울한 모습을 보고 오히려 화가 났지. 좀 어른답게 행동해 보라고. 슬퍼하지 말고 악독해지라고… 생각했어.
나나시: 내가 몰랐던 건, 두 사람이 캐롤 씨의 죽음에 슬퍼하면서 점점 수용하고 있다는 거였어. 내 감정선은 아직 발걸음을 옮기지도 않았는데…
나나시: 두 사람은 나보다 훨씬 나았던 거야… 후련하지도 않았던 복수가 끝난 뒤의 나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어.
나는 멍하니 내 손등을 깨물었다. 날카로운 아픔과 함께 잇자국이 남았다. 왜 그렇게 하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나시: 그래서 지금… 캐롤 씨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
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열린 댐처럼.
나나시: 내 일부는 아직도 캐롤 씨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만 같아… 흐흑… 한 번만이라도 다시 캐롤 씨를 보고 싶다고 아우성을 치지만, 그건 불가능해…
나나시: 캐롤 씨는 내 일부를 가진 채로 그냥… 사라져 버렸어… 다시는 돌려받지 못할 거야. 다시는… 아아… 카텟은… 흑… 죽음과 배신으로만… 흐윽…
나는 우주에서 길을 잃었다.
마음을 빼앗기고 돌려받지 못했다.
나나시: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아… 왜… 왜 하필 캐롤 씨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23T? 이건 너무 잔혹하잖아…
캐롤 씨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기꺼이 터치를 베풀었다. 나. 마유즈미. 토키와 모두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캐롤 씨의 손을 잡고 버팀목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녀는 불가사의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경계 대상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위험인물을 제압할 때는 좋은 수단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면서도 캐롤 씨는 불같이 화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강경책을 사용해야 하는지 늘 딜레마에 시달렸다. 터치라는 힘은 그녀에게 있어서 저주이기도 했다. 마침내 강제적인 터치가 이루어졌을 때 캐롤 씨는 크게 괴로워했다. 미도리카와와 조금 섞이고 자신을 조금씩 잃으면서까지도, 캐롤 씨는 선의지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캐롤 씨도 사람이었다. 모두가 간과해온 일이었다. 탑의 그 누구도 무적의 초인은 아니었다. 그녀는 마침내 그림자에 잠식되었고… 자신이 억누르던 인간적인 감정과 욕망에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나쁜 일인가? 낯선 환경 속에서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다가 처음으로 사람이 된 그녀를 감히 지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어디에도 없어. 캐롤 씨의 공감이 무분별하다고 지적한 야가미도, 캐롤 씨가 권력 구조를 만들어낼 것이라 예견했던 모리도, 그럴 자격은 없었어. 너희는 모두 캐롤 씨가 사람이란 걸 잊고 있었잖아.
단지 터치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누구와도 닿지 못하던 그녀가… 하필 그녀가…
나나시: 불공평해… 흐윽… 흐으… 난 용납할 수 없어. 절대 잊지 않을 거야. 흑. 절대로…
나나시: 약속했으니까. 흐흑. 잊지 않을 거야…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타협은 절대로 하지 않아…
이를 부드득 갈자 내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주먹을 꽉 쥐자 손톱이 손을 파고들고 자국을 남겼다.
23T5U130: …잊지 않고서야 네가 행복해질 수는 없다고 해도?
23T는 낮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이전에 그와 비슷한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노네임과 인공지능 사이에도 저런 말이 오갔다.
"잊지 않고서야 네가 행복해질 방법은 없다고. 노네임!"
그리고 나는 노네임이 그 자리에서 어떻게 대답하는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노네임과 나는 결국 같은 사람이다. 우리는 평행선을 걷고 있는 것이다.
나는 23T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23T도 대답을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결국 내 입 안에서 나온 것은 23T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 누구도 대답을 알 수 없을 법한 또 다른 질문이었다.
나나시: 23T. 과연… 내가 다시 살 수 있을 것 같아…?
23T는 아무 말 없이 내 어깨를 팔로 끌어안아 주었다. 그러나 나는 23T의 몸에 손을 올리지 못했다. 내 손은 축 늘어진 채로 머물렀다. 내 몸 또한 마찬가지였다. 피로감이 몰려오고 어지러움이 느껴지자 내 몸은 잠을 택했다.
나는 몽롱한 잠에 중독되며 속으로 생각했다. 신이시어. 왜 캐롤 씨를 죽게 두신 겁니까.
사실 나는 신을 믿지 않았다.
전능하고 선한 존재가 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게 두지 않았을뿐더러, 영적인 존재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내가 신이라 여기는 무언가는 존재했다.
모두 자신만의 신을 믿으면서 산다. 마음의 전당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바친다면 그것을 신이라 여기지 않아도, 제물을 받은 것은 그 사람의 신이 된다. 탑에는 생소한 신을 믿는 자들이 종종 있었다. 웃음. 복수. 신비. 돈. 기사도. 쾌락. 공리. 복수. 도움. 힘. 논리.
내가 믿는 신은 사랑이었다. 성애를 넘어선 무언가. 더 넓은 범주의 사랑을 나는 숭배했다.
나나시: 아니.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저 욕망에 불과했을지도…
나는 온기를 원했다. 몸이 불에 타더라도 불과 하나가 되고 싶었다. 그럼 영원히 춥지 않을 것 같았지.
그러나 아니었다. 내 몸은 다시금 차게 되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불은 내 속에서 소망과 미련이 되어 내 내부에 화상을 남겼다.
당신과 다시금 처음으로 만나고 싶다. 당신의 손을 잡고 싶다. 노래를 들으며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그리고 만약 당신과 다시 만난다면 당신을 다시는 죽게 두고 싶지 않다. 후회를 남기고 싶지도 않다. 함께 모든 것을 하고, 모든 것을 이루고 싶다.
그러나 그것들은 허황된 꿈이었다. 그리고 꿈은 잠을 잘 때에만 꿀 수 있는 것이니. 나는 마지막으로 내게 물으며 작은 죽음 속으로 녹아들어 갔다.
Am I blue…?
더 단크 타워
챕터 2: < 다른 세 개의 문이 있다 >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려질 수 있는가?"
"우리는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어요. 아쉬움에 쓴 맛을 곱씹을 뿐…"
END
"그래서 따로 작업한다는 말인가?"
"당분간은 그러겠지. 서로 서먹하니까 어쩔 수 없어."
"무슨 경위인지는 모르지만, 화해할 순 없나? 너희 두 사람은 함께 일할 때 능률이 극대화된다고 들었다."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히무로 시라베는 종종 작업실에 찾아와 말했다. 시라유키 히메리와 누구보다 가까운 사람에게 복잡한 사정을 설명할 이유는 없었기에, 나는 그에게 적당히 대답을 해 주면서 그를 은근히 피했다.
"그보다 너희 쪽 임무는 제대로 되고 있는 거야? 내가 기계를 만들어봤자 연구가 덜 됐으면 의미가 없잖아."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장기 프로젝트니까."
"그럼 너희 자료 좀 넘겨줘. 우리도 반영하게."
"그러지. 동행하겠나?"
나는 인공지능이 연구실로 돌아올 시간을 속으로 재 보았다.
"좋아. 동행할게."
나는 히무로와 함께 카텟 기관의 로비를 가로질렀다. 전투원을 부리는 여타 기관들이 그렇듯이, 늘 시끄러운 곳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유난히 더욱 시끄러웠다. 행동부대원들은 평소보다 더 지쳐 보였고, 그들이 타고 온 차량의 뒷문이 열리자 악을 쓰는 사람들의 무리가 그 안에서 내렸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그중 한 명이 소리쳤다.
"저것들 뭐야?"
"얼마 전 시범 운영을 시작한 학교를 하나 급습하려던 이들이 붙잡혔다."
"왜 학교를 급습해? 하. 웃기네. 아주 세상이 미쳤다니까."
그중 유난히 눈에 띄는 한 사람은 장정 두 명이 달라붙었는데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목이 꺾여도 좋다는 듯한 기세였다.
나는 그가 저항하면서 주머니 안에서 금빛의 무언가를 떨어트리는 것을 보았다.
저게 뭐지?
"빛! 빛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어둠으로 가득 찬 세계에는 빛이 필요해! 우리 모두를 하나로 만드는 빛이!"
"당장 저놈 입 닫아! 당장 유치장 안에 집어넣어!"
카텟 기관 행동부대원이 그의 입을 막고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저 미친놈은 또 뭐야? 빛? 무슨 종교 집단이야?"
"그렇다. 사람들 사이에서 컬트 조직 하나가 넓게 퍼져나가고 있다. 그 배후에는 초고교론자가 있다. 그들을 체포하고 취조해 약점이나 핵심 인물을 포착하고 격리하는 일이 중요하다."
"초고교론자들? 초고교급 사냥꾼들 말이지. 위험한 것들이야. 빨리 죽어주지 않으려나…"
"그것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조율자의 영향을 받으며 초고교론은 사람들 사이에서 암처럼 전이되고 있다. 그를 포획하거나 힘을 줄일 방법을 찾지 않는 이상 근본적인 문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조율자? 그게 누군데?"
"예수라는 예명을 사용하는 남성이다. 보유하고 있는 재능은 상담사, 연설가, 성악가와 종교지도자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그는 사람의 정신에 접촉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참 위험하네… 그 작자를 잡으면 어떻게 할 거야?"
"그가 변하기 전으로 돌려놓아야겠지. 프로젝트를 이용해서 말이다."
"참 쉽겠어."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왜 아무도 바닥에 떨어진 금색 뭉치에는 관심을 주지 않는지 궁금해졌다. 뭐지? 미친놈이 가지고 있었던 물건인데 중요한 증거품 아니야?
히무로 시라베를 돌아보아도 그 또한 금색 뭉치에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나는 불가사의함을 느끼며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나 말고 그 어떤 이들도 금색 뭉치를 인지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러나. 핑크헤어?"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지?"
히무로 시라베조차도, 내가 바닥에서 뭘 줍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얼떨결에 주웠는데. 이게 대체 뭐지…?"
나는 연구실로 돌아온 뒤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사람의 머리카락 묶음처럼 생긴 무언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제 머리카락 묶음도 사고팔 수 있는 건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카락의 소유자가 염색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머리카락은 금빛이었다.
"뭔가 불길 하단 말이지. 왜 아직도 윤기가 도는 거야? 무슨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나는 이상한 꺼림칙함과 흥미를 동시에 느끼며 머리카락 묶음을 손에서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문득 내게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제 말이 들리시나요?"
나는 화들짝 놀란 나머지 의자에서 미끄러지고 바닥에 떨어졌다.
"으아아아아악! 뭐야?!"
나는 그렇게 소리쳤으나 입 밖으로는 한 마디의 말도 꺼내지 못했다. 나는 내면에 소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들리는 목소리 또한 귀를 통해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뭐라고 할까… 가슴을 통해 들리는 듯했다.
"당신은 누구시죠?"
"이게 뭐야? 마법인가? 아니야. 생긴 것만 머리카락 묶음인 걸지도 몰라. 사실은 전자 케이블과 수신기인 거야.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일은…"
내가 혼란에 빠져 자신이 할 말만 하자, 상대방 또한 그러기 시작했다.
"또 재단의 사람인가요? 말했잖아요. 대화할 생각이 없다고. 당장 내 머릿속에서 나가요!"
나는 순간 내 몸이 멀리 날아가버릴 정도의 바람이 전신에 부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아니었다. 나는 내가 어떤 최면 상태의 일종에 빠졌다고 생각하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재단? 대체 무슨 소리야. 당신 정체가 뭐야! 난 지금 카텟 기관에 속한 사람이다!"
"카텟 기관이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이제 초고교론자들의 목소리는 안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당신이 누구길래 초고교론자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거야?"
머리카락 너머 수수께끼의 여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비단결 같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제 이름은 제인 캐롤 브라이트. 조율자의 파편이에요."
드디어 끝을 봤군요
곧 2챕터 후기로 돌아오겠습니다
모리의 성은 처음부터 처형명 메멘토 모리를 위해서였음 하하호호깔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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